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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시공간을 초월한 역사를 걷다
- 2014. 07. 31 17:35 레저/여행
- 우리나라에서 11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남한산성을 걸었다. 4백여 년 전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남한산성은 서울 근교의 사랑받는 휴식처로 여전히 시민들의 삶과 함께하고 있다. 잠들어 있던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시간 여행이 시작됐다. 경기도 광주시와 성남시, 하남시에 걸친 산악 지대, 해발 500m에 달하는 험준한 산세를 따라 지어진 남한산성은 누구에게도 함락되지 않는 천혜의 요새였다. 하지만 난공불락의 성도 패배의 역사를 피해 가진 못했다. 많은 이들에게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스스로 걸어 나가 청나라에 무릎을 꿇은 치욕의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며 그 역사와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는 남한산성을 찾았다. 인천 하늘고등학교의 이다지 역사 교사가 시간 여행의 길잡이가 돼주었다. 남한산성을 오르는 탐방로는 크게 5개 코스로 나뉜다. 짧게는 2.9km부터 길게는 7.7km까지, 가볍게 걸을 수 있는 산책로와 흠뻑 땀을 흘릴 수 있는 등산로를 찾아 매년 3백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남한산성에 오른다. 묵은 성돌 하나하나에도 민초들의 피와 땀을 품고 있는 산성은 오늘날에도 시민들의 삶과 함께하는 운명을 지켜내고 있는 셈이다. 5개 코스 중 1코스를 걸어보기로 했다. 시작점인 산성종로 로터리에서 북문으로 올라가 서문과 수어장대를 거쳐 남문으로 내려오는 코스로 가벼운 등산로와 산책로로 이어져 있어 아이들과 함께 걷기에도 좋은 길이다. 녹음이 우거진 여름에는 울창한 솔숲을 걸으며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난공불락의 성 1636년 겨울, 청나라 10만 군대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자 인조는 황급히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한다. 한양 근처에 안전한 피신처를 마련하려고 했던 인조가 옛 성의 흔적을 따라 다시 쌓아올린 요새다. 가까스로 성안의 행궁으로 몸을 피한 다음날 산성은 청나라 군대에 완전히 포위되고 성안의 왕과 군사, 백성들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리고 펼쳐진 47일간의 항전. 종국에는 적의 장수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땅에 머리를 짓이기며 항복한 ‘삼전도 굴욕’의 아픈 역사가 새겨지게 된다. “1626년 인조 4년에 완공된 남한산성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요충지로 여겨졌던 곳이에요. 안쪽은 평평하고 얕은 반면에 바깥쪽은 높고 험해서 외부에서 공격하기 쉽지 않고, 지형상 해가 길어 야습도 어려운 곳이죠. 사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은 치열하게 싸움을 벌인 곳이 아니라 버틴 곳이었어요. 성 밖에서 청나라 군대가 대포를 쏘아대긴 했지만 섣불리 성안으로 침입하거나 공격을 감행하지는 않았어요. 성안의 물자와 식량이 한정돼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항복하리라는 계산이었죠.” 1·3 남한산성은 남녀노소에게 사랑받는 곳이다. 주말에는 등산객들과 나들이객들로 활기가 가득하다. 2 이번 여행에 길잡이가 돼준 이다지 교사. EBS 수능강의와 KBS ‘역사저널 그날’ 등을 통해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4 소나무 가지가 드리워진 등산로. 결국 버티는 자와 기다리는 자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시작점인 로터리에서 400m 정도를 오르면 나오는 북문은 이러한 가운데 병자호란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가 기록된 문이다. 당시 3백여 명의 군사가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 공격을 감행하다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야 만다. 가슴 아프게도 북문의 또 다른 이름은 ‘모두 승리한다’라는 뜻의 ‘전승문’이다. 47일간의 항전 치열했던 전투의 상흔을 뒤로하고 북문에서 1km 정도 쉬엄쉬엄 산을 오르면 서문 전망대의 탁 트인 전경이 펼쳐진다. 맑은 날이면 잠실벌과 하남시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아름다운 야경 포인트로도 유명한 장소다. 잠시 한숨을 돌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가슴까지 뻥 뚫리는 느낌이다. 등산객들이 땀을 식히며 한 걸음 쉬어가는 서문은 인조가 항복을 하러 갈 때 지나간 문이다. 말을 타고 지날 수도 없는 작고 초라한 문. 난공불락의 성을 스스로 걸어 나가야 했던 왕의 심정을 상상하니 방금 전과는 또 다른 감정이 밀려온다.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는 정통성을 갖고 정권을 잡은 왕이 아니었어요. 광해군이 명과 후금 사이에서 잡아놓은 국제 질서를 무너뜨리며 왕이 됐기 때문에 여러모로 위협을 느끼고 있었죠. 위기 상황을 고려해 남한산성을 증축하기는 했지만 전쟁에 대비하지는 못했어요.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에도 붕당 간의 정쟁은 끊이지 않았고 그러한 혼란 속에 다시 전쟁을 치르게 된 거죠.” 남한산성 안에서 피 말리는 항전을 치르는 동안에도 신료들은 청과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와 화친을 도모해야 한다는 주화파가 대립각을 세웠다. 주화파의 대표 인물인 최명길이 쓴 항복 문서를 주전파인 김상헌이 울면서 찢고, 다시 최명길이 찢긴 문서를 모아 붙이는 비통한 장면이 연출됐다. 청과 화해하자는 쪽도, 싸우자는 쪽도, 모두 나라를 위해서라는 명분과 비전이 있었다. 하지만 식량이 바닥난 상태에서 강화가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고 인조는 결국 항복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종묘와 사직을 둔 행궁까지 있었던 남한산성은 완벽한 도시의 기능을 했던 성이에요. 전쟁을 대비해 평상시에도 만반의 준비를 했다면 정말 난공불락의 성이 됐을지도 몰라요. 아무리 시스템을 잘 만들어놓았어도 위기 대응이 제대로 돼 있지 않으면 비극을 막을 수 없다는 뼈아픈 교훈을 말해주는 곳이라고 할 수 있어요.” 5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남문.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올 때 들어온 문이다. 6 산세를 따라 이어지는 성곽. 물 흐르듯 곡선이 유연하다. 7 인조가 직접 전투를 지휘했던 수어장대. 서쪽 제일 높은 장대라는 뜻으로, 원래 이름은 서장대였으나 영조 때 2층으로 증축되며 이름이 바뀌었다. 8 무망루. 병조호란의 치욕과 효종의 원통함을 잊지 말자는 의지가 담겨 있다. 9 행궁 옆길. 노을 지는 풍경이 평화롭다. 아픔의 역사, 지켜야 할 문화유산으로 서문을 지나 수어장대로 향하는 길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해 최적의 요새를 만들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이다. 우거진 소나무 사이로 굽이치는 성곽은 산의 등고선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서 남한산성이 가지는 가치는 기술적·문화적 측면이 강해요. 우선 일본과 중국, 우리나라의 축성술이 교류한 장소였고 유사시에 임시 수도의 역할을 해낸 산성 도시로서의 가치도 인정받았죠. 지형을 잘 이용했을 뿐 아니라 서양의 신무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지어졌고요. 임진왜란을 겪은 후 성을 지으며 한층 발달된 이론과 기술이 도입됐어요. 이전의 산성들과 비교해 훨씬 정교하고 튼튼하게 지어졌죠.” 남한산성에 도입된 기술은 지금도 산성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성벽 하단부에 무게중심을 두고 그 사이사이에도 특수 처리된 돌들을 끼워 넣어 화포를 방어할 수 있도록 했고, 자그마한 비밀 통로인 ‘암문‘과 몸을 숨겨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는 ‘여장’, 총과 포를 쏠 수 있도록 뚫어놓은 구멍인 ‘총안’과 ‘포루’를 만들어 단순한 방어 이상의 기능을 갖췄다. 어찌할 수 없는 역사의 한탄과 안타까움이 서린 곳이지만 민족의 생존을 지켜온 최후의 보루로서 소중하게 아껴야 할 유산임은 틀림없다. 인조가 직접 전투를 지휘했다는 수어장대 옆에는 ‘무망루’라는 편액이 보존돼 있다. 병자호란 때 겪은 시련과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돌아와 끝내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뜻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 본래 수어장대 2층 누각에 있었으나 일반인들이 볼 수 있도록 1989년 수어장대 옆 보호각으로 옮겨왔다. “없을 무(無)자에 잊을 망(忘)자를 써서 ‘무망루’예요. ‘잊는 일이 아예 있을 수 없다’라는 뜻이죠. 당시 느꼈던 치욕과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부분이에요. 병자호란은 짧았지만 깊은 상처를 남긴 전쟁이에요. 조선이라는 나라에 끼친 정신적 트라우마도 매우 컸고요. 그러한 상흔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남한산성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줘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겪고도 또 전쟁이 났고, 이렇게 훌륭한 산성이 있었지만 막아내지 못하고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는 점에서 최근에 우리에게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들을 반추해볼 수 있어요. 역사는 반복돼요. 어제와 오늘을 제대로 보고 사회에 대한 비전과 철학을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수어장대를 나와 최종 목적지인 남문까지 이어지는 길을 내려오며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시원한 솔향기를 맡으며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 아이와 함께 나들이 나온 가족들, 강아지들까지 폴짝폴짝 뛰어노는 평화로운 풍경 위로 생과 사가 뒤엉켰던 47일간이 오버랩됐다. 상처를 잊은 자들에게 아픔의 역사는 되풀이된다. 우리가 지금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무망루’의 교훈을 되새겨 봐야 할 때다. Tip 남한산성 성곽길 탐방로 1코스(3.8km, 소요 시간 80분) 산성종로(로터리)-북문(0.4km)-서문(1.1km)-수어장대(0.6km)-영춘정(0.3km)-남문(0.7km)-산성종로(로터리 0.7km) ●자세한 탐방로 코스는 남한산성 문화사업단 홈페이지(www.nhss.ggcf.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임시정부 역할을 했던 남한산성 행궁도 잊지 말고 들러보자. 하절기(4~10월)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연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안지영, 김천기>
- 고 황장엽의 숨겨진 남한 부인과 아들… 수년간 추적했다!
- 2010. 11. 01 17:16 화제
- ㆍ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진 가족 비화 공개 지난 10월 10일, 북한에서 망명한 최고위급 인사인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현재 그의 주검은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그의 사망 소식 후 새롭게 떠오른 이슈가 있다. 그동안 숨겨져 있던 남한의 부인과 아들이다. 50대 초반의 부인 엄씨는 현재 서울 강남에 6층짜리 빌딩을 소유하고 있는 등 상당한 재력가로, 아들은 캐나다를 거쳐 미국에서 유학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생전의 황씨와 엄씨는 세 사람이 가족 관계인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세 사람의 관계를 수년 동안 추적하면서 깨알같이 적은 취재수첩을 공개한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인 1997년, 망명 당시 황장엽씨는 베이징 주재 한국총영사관에서 북한에 남겨둔 아내 박승옥씨에게 유서를 작성했다. 이 유서에는 가족에게 씻지 못한 죄를 지은 심정과 함께 망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심경이 담겨 있었다. 당시 작성한 유서는 국내에서 발간된 회고록에 소개되기도 했다. 다음은 유서 내용의 일부다. “내가 당신까지 속인 채 이곳에 와보니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였고, 나와 당신의 생명이 얼마나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가를 새삼스럽게 느꼈소. 나를 믿고 따르며 나에게 희망과 기대를 걸어온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모두 배반하였소. 나는 이것으로 살 자격이 없고 내 생애는 끝났다고 생각하오. 저 세상에서라도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소. 당신이 이 편지를 받아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언제 목숨을 끊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유서 삼아 적어두는 것이오.” 황장엽씨와 엄씨, 지인의 소개로 처음 만나 비서로 인연 맺어 그로부터 4년이 흐른 2001년 가을, 평소 알고 지내던 취재원으로부터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황씨에게 국내에 숨겨진 부인과 아들이 있다는 소식을 믿을 만한 사람으로부터 들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황당한 소리로 치부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 황씨는 일흔을 훨씬 넘긴 고령인데다 망명한 지 오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취재원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확인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황당한 소리로만 들리던 일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때 취재원이 말한 내용의 핵심은 이렇다. “두 사람이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 정확하지 않다. 다만 황씨가 망명한 지 얼마 안 돼 누군가의 소개를 통해 알게 된 것은 분명하다. 당시 황씨는 국가정보원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에 정보기관이 개입하지 않고는 두 사람의 만남 자체가 성사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후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고, 자연스럽게 사실혼 관계를 맺게 되었다. 물론 황씨의 여인도 국가정보원이 따로 관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두 사람의 관계는 국가정보원에서도 매우 민감한 문제였을 것이다. 북한의 암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데다 언론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기사화할 수 있기 때문에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꺼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 여인의 주변을 통해 두 사람의 관계가 조금씩 드러났을 확률이 높다고 들었다.” 서울 논현동에 자리한 엄씨 소유의 6층 빌딩.두 사람 사이는 정보기관 관계자의 증언으로도 확인이 가능했다. 처음 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렸던 관계자는 거듭된 확인 요청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관계자는 신분을 노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았을 뿐이지 국가정보원 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외부 활동에 강한 의욕을 보였던 황씨와 다소 불협화음을 일으켰던 담당자들은 황씨의 사생활 문제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더욱이 담당자들 입장에서는 황씨의 신변 안전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 여인과 아들로 인해 황씨의 동선이 외부에 알려지면 큰일 날 일이었다. 국가정보원에서는 모자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황씨가 그 여인을 만나게 된 과정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단편적인 소문을 종합해본 결과, 그 여인이 국가정보원에 파견 나온 검사의 소개로 황씨의 비서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 여인을 소개받은 황씨가 직접 비서로 채용했다는 것이다. 사실 정보기관의 전례로 봐서 황씨 같은 거물급 망명 인사의 비서로 외부 사람을 들인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업무적인 비서라기보다는 생활적인 일을 도와주는 여자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유산 상속 문제는 ‘교통정리’가 된 것으로 예상 다시 9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2010년 10월 10일 언론은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사망 소식을 일제히 보도했다. 황씨가 오전 9시 30분경 서울 강남구 논현동 안가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경찰은 10월 19일 공식 브리핑을 통해 “고인은 발견 하루 전 반신욕 중 심장 질환에 의해 자구력을 상실하며 사망에 이른 것으로 판단된다”고 전했다. 언론은 이후 그의 유산 상속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황씨가 망명할 때 적지 않은 돈을 갖고 들어온 것은 물론 정부와 각계의 후원금, 각종 강연료, 출판물 인세 등 상당한 재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인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황씨의 수양딸과 함께 사망 직후 언론 보도로 그 존재가 분명해진 사실혼 관계의 부인과 아들에게로 모아졌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고인의 유가족으로는 ‘황장엽민주주의건설위원회’ 대표를 맡고 있는 김숙향씨가 유일하지만, 사실혼 관계의 부인이 있어 유산 상속 분쟁의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어 부인을 잘 아는 지인의 말을 빌려 “황씨는 사후 자신의 재산을 일단 수양딸에게 넘긴 뒤 부인과 분배토록 약정서 같은 것을 작성한 것으로 알고 있다”는 내용도 덧붙여졌다. 그러나 취재 결과, 언론의 보도와는 다른 사실이 발견됐다. 황씨의 부인 엄씨는 이미 상당한 재력가인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엄씨가 황씨를 만나기 전까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주변의 전언을 감안하면, 황씨의 적지 않은 재산이 이미 부인에게 ‘양도’되었을 가능성도 높았다. 또 87세의 고령인 황씨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상속 문제를 이미 ‘교통정리’ 해놓았을 것이라는 추론도 배제할 수 없었다. 실제 최근에 다시 연락이 닿은 앞서 언급한 정보기관 관계자는 이 같은 가능성과 추론에 힘을 실어주었다. 고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지난 10월 14일 대전 현충원 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됐다. “황씨는 망명 당시 북한에 두고 온 부인과 자식들을 생각하며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런 황씨가 아무리 자신의 호적에 올라 있지 않은 부인과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런 대책을 세워놓지 않았을까? 내가 알기론 수십억원의 재산이 부인 몫으로 남겨졌다. 단적인 증거로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황씨 안가 근처에 있는 6층짜리 빌딩이 부인 명의로 되어 있다. 특히 유산을 놓고 분쟁의 소지가 있다고 했는데,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판단된다. 만약 법적인 분쟁이 일어나면, 어떤 식으로든 부인의 신분이 드러나게 된다. 국가정보원이든 부인이든 이런 상황을 원치 않을 것이다. 유산 정리는 마무리되었고, 나머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최대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게 끝낼 것으로 예상된다.” 친구들 앞에서 ‘황장엽 아들 낳았다’고 말해 최근 황씨와 그의 부인 엄씨에 관한 보도가 이어진 직후 필자는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취재수첩을 들춰보았다. 취재수첩에는 황씨 부인과 3년여 동안 ‘숨바꼭질’ 취재를 벌였던 과정이 깨알처럼 기록돼 있었다. 거기에도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부인의 강한 의지가 그대로 묻어나 있었다. 다음은 3년여 동안 부인의 서울 양재동 소재 아파트와 그녀의 소유로 돼 있는 논현동 빌딩 등에서 수차례에 걸쳐 대화를 나누거나 전화 통화를 한 내용을 일문일답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 황장엽씨에 대해 알고 있나? “그 사람이 누구인지 난 모른다. 왜 나한테 그 사람에 대해 묻나?” - 북한의 전 노동당 비서로 우리나라에 망명한 최고위급 인사다. 언론을 통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나. “글쎄, 난 모른다. 신문이나 방송을 잘 안 봐서 그 사람에 관해 알지 못한다.” - 황씨와 관련해 취재를 하고 있다. “그 사람 일을 왜 나한테 물어보나? 궁금한 게 있으면 그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거 아닌가. 왜 자꾸 연락하고 사람을 괴롭히나?” - 그 사람을 모른다고 하면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계속 전화하고 찾아오니까 이러는 거 아닌가. 이건 사생활 침해다. 더 이상 날 찾지 마라.” - 황씨 취재를 하다가 당신이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확인은 무슨 확인을 하나. 난 그 사람을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다. 그러니까 더 이상 묻지 마라.” - 당신이 황씨의 아들을 낳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누군지 모르고, 만난 적도 없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마라. 계속 이러면 나도 생각이 있다.” 부인은 황씨와 관련된 말만 나오면 극도의 거부 반응을 보였다.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예민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상 소문이 진실일 수도 있다는 방향으로 흘렀다. 무엇보다 엄씨가 황씨의 비서가 된 과정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엄씨의 주변과 정보기관 관계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광범위한 취재에 돌입했다. 취재 과정에서 엄씨와 몇 년 동안 수차례 만났다는 지인과 연락이 닿았다. 그 지인의 증언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처음에는 친구 소개로 만나 여러 사람들과 함께 어울렸다. 그 친구는 조용한 편이었지만 당찬 구석도 있었다. 과거 무슨 미인 대회에 출전했다고 들었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꾸미고 다니지는 못했지만 눈에 띄는 미인형이었다. 그런데 취직을 했다며 사라지더니 3년쯤 지나 친구들 앞에 나타나 ‘아이를 낳았다’고 했다. 처녀가 아이를 낳은 것도 놀라웠지만, 그 아이 아빠가 ‘황장엽’이라는 게 충격적이었다. 친구들이 믿으려 하지 않자, 그녀가 자세히 설명했다. 황장엽의 비서로 일하다가 임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권력기관의 아는 사람을 통해 비서로 들어갔다는 말을 얼핏 들었다. 예전과는 달리 여유가 있고, 귀티까지 흘러 모두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이후 그녀는 다시 소식이 끊겼고, 강남에 살고 있다는 소문만 들을 수 있었다.” 한 빌딩에서 부인은 음식점을, 황씨는 연구소를 운영 엄씨의 존재를 처음 확인한 것은 2001년 가을. 지인의 증언대로 서울 양재동의 한 아파트에서 친정어머니,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녀는 1998년 가을에 이 아파트를 매입해 이사를 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녀가 이곳으로 이사 온 시기는 매우 중요하다. 아들 출산과 산후조리를 위해 비교적 한적한 곳으로 거처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녀에게 수차례에 걸쳐 정식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자신이 ‘엄OO’인 것은 인정했지만 황씨와의 관련설은 극구 부인했다. 그러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갑자기 종적을 감췄다. 어디에서도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엄씨가 다시 취재수첩에 들어온 것은 지난 2003년, 황씨가 강남에 개인 연구소를 차렸다는 언론보도를 통해서였다. 황씨가 운영하는 연구소라면, 분명 그녀의 동선과도 겹칠 것이라고 판단했다. 수소문 끝에 찾은 곳은 논현동의 한 빌딩. 황씨가 사망 이후 언론에서 언급된 엄씨 소유라는 논현동 그 빌딩이었다. 단지 다른 점은 언론에서 보도한 것과 달리 5층이 아닌 6층이라는 점. 대지 90여 평에 연건평 270여 평의 이 빌딩은 지하 1층 지상 6층의 규모였다. 2003년 7월에 세워진 이 빌딩의 소유주는 엄씨로 돼 있었다. 그녀는 2001년에 대지를 매입했는데, 같은 시기 황씨가 대지에 대해 가등기를 한 것으로 되어 있었고 그러다 빌딩이 세워진 이후 소유권이 넘어갔다. 엄씨는 빌딩을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업가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이 빌딩의 1층에서 프랜차이즈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2004년 10월에는 자본금 5억원의 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특히 관심을 끈 것은 빌딩 6층에 북한 관련 연구소가 들어와 있다는 빌딩 관계자의 설명이었다. 즉 1층에선 엄씨가 음식점을, 6층에선 황씨가 개인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엄씨는 아들을 낳기 전까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런데 불과 몇 년 사이에 수억원대의 아파트와 수십억원대의 빌딩을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황장엽이란 힌트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풀기 쉽지 않는 난제로 남아 있다. 이후 그녀와 몇 번 전화 통화를 하고 빌딩 앞에서 부딪혔지만 해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북한과 남한 모두에서 ‘비극적인 가족사’ 북한에서 ‘주체사상’을 정립하며 권력을 손에 쥐었던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하지만 남한에서는 활동에 제약을 받으며 망명객 신세를 면치 못했다. 더욱이 황씨는 북한에 두고 온 가족으로 인해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런데 남한에 있는 부인과 아들 역시 자신의 가족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숨겨진 가족’으로 언론에 의해 알려졌을 뿐이다. 한동안 황씨와 엄씨의 동선이 겹쳤던 논현동 빌딩을 다시 찾았다. 음식점은 예전과 다름없이 손님을 맞이하느라 분주했고, 빌딩은 외관상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빌딩 소유주는 여전히 엄씨 앞으로 되어 있지만, 그곳에서 그녀와 아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대신 엄씨의 가족이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평소 황씨는 친모의 성을 딴 ‘늦둥이’ 아들 엄군을 무척 귀여워했다고 한다. 엄군은 어렸을 때 연고가 있는 캐나다로 유학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현지 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라고 한다. 미국과 우리나라를 오가며 가족을 돌봤던 엄씨, 황장엽씨의 사망 이후 그녀의 이민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황장엽은 누구?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학자 출신의 북한 정치인으로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한 것은 1972년 제5기 최고인민회의 의장 겸 상설회의 의장이 되면서부터다. 그때부터 그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해 이른바 ‘김일성주의’로 발전시켰다. 또 김일성 우상화를 제3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여러 나라에 주체사상 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최고인민회의 의장 재직 기간 중 20여 차례에 걸쳐 30여 개국을 순방해 외국에도 잘 알려졌다. 그는 북한에서 부인 박승옥씨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황씨는 1997년 베이징 주재 한국총영사관을 찾아 망명을 신청했다. 그는 남북간의 극한 대립을 해소하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망명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1997년 4월 필리핀 특별기편으로 국내에 입국했다. 북한에서 망명한 최고위급 인사였다. 황씨는 망명 후 1997년 12월부터 국정원이 운영하는 통일정책연구소의 이사장을 맡았고, 북한문제연구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또 북한의 인권 상황을 폭로한 책과 회고록을 출간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탈북자단체 관계자들과 ‘북한민주화동맹’ 활성화 방안을 연구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외활동을 펼쳤다. ‘황장엽씨 안가 근처에 있는 6층짜리 빌딩이 부인 명의로 되어 있다. 유산 분쟁 소지는 없을 듯. 유산 상속 문제는 마무리되었고, 나머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최대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게 끝낼 것으로 보인다’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정문홍(자유기고가) ■사진 / 이성원, 경향신문 포토뱅크>
- 신작 장편소설 「남한산성」 발표한 작가 김훈
- 2007. 06. 22 화제
- 27년간 문학담당 기자로 일한 김훈은 두 번째 소설 「칼의 노래」로 한국 문단 최고의 동인문학상을 수상, 그제서야 비로소 ‘문학 담당 기자’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었다. 신춘문예를 거치지 않고 소설적 역량만으로 높이 평가받는 작가 김훈. 새로운 장편소설 「남한산성」이 벌써 베스트셀러에 오른 그는 문학의 예술성을 강조하기보다 밥벌이의 고단함을 강조했다. 글쓰기는 노동이고, 예술이기 이전에 생계고 생활이며, 자신은 돈을 버는 사람이라는 것. “현세적인 가치 속에서 건강한 시민으로 살아가려 하며 예술은 물적 토대 위에서 가능하다”는 그는 “배를 주리면서까지 문학을 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아직도 몽당연필을 꾹꾹 눌러 원고지에 글을 쓰는 김훈의 ‘소설을 쓰는 고통과 희열’을 들었다. 김훈은 종로에 나올 일이 있다고 했다. 취재를 핑계 삼아 그의 집필실을 둘러보려던 욕심은 잠시 접어두어야 했다. 일산에 살고 있는 그가 종로까지 걸음하는 건 종로 영풍문고에서 열릴 「남한산성」(학고재) 팬 사인회 때문. 5월 둘째 주 토요일, 팬 사인회를 마치고 난 김훈과 카페 한구석에 마주 앉았다. 차를 많이 마셨다는 그는 “그냥 물이나 한 잔 달라”고 했다. 목이 말랐던 모양이다.‘뭐라고 써야 하나’ 진땀 뺐던 7개월 김훈(59)은 불친절한 작가다. 쌍방향 소통의 시대인 요즘 그는 독자와 대화하길 꺼린다. 그가 컴퓨터를 전혀 안 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에게 말을 걸기가 어렵다. 편지를 써서 부치거나 직접 집으로 찾아가야 하는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독자들이 작가 김훈에게 가는 통로는 막혀 있는 셈이다. 김훈이 독자들을 만나는 자리라곤 팬 사인회가 유일하다. 그렇다고 팬 사인회를 하면서 독자들에게 살갑게 말을 붙이는 것도 아니다. 책에 사인 해주는 게 고작이다. 그는 “독자들과 이야기 나눠야 할 특별한 이유를 못 느낀다”면서 “나는 소설로 모든 말을 한다”고 강조했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이 연일 화제다. 출간한 지 2주일 만에 5만 부가 나갔을 정도. 기분을 묻자 그는 “무척 어렵고 고통스러운 글인데, 독자들이 그걸 따라오고 있다는 게 다행스럽다”고 답했다. 김훈이 「남한산성」을 쓰리라 계획한 건 3년 전부터다. 집필은 지난해 10월부터 7개월 동안 이어졌다. 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철저히 혼자가 된다. 인기척이 있으면 글을 못 쓰기 때문이다. 집 근처에 작업실을 얻어 ‘중’처럼 혼자서 지냈다. 불현듯 ‘소설 쓰기는 밥 벌어 먹는 노동치곤 무자비한 노동’이라던 그의 말이 생각났다. 여전히 그런 생각을 하는지 묻자 이번 글쓰기 역시 매우 힘들었음을 고백했다. “매일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면 눈앞이 캄캄했어요. ‘오늘은 뭐라고 써야 하나’라는 생각에 진땀이 날 정도였죠. 글 쓰는 게 무척 어려웠고, 더디게 진행됐어요.” 글쓰기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소설 쓰기를 중단하려 했던 적도 있다. 열흘 혹은 한 달 넘게 글쓰기를 내팽개친 적도 많다. 하지만 그때마다 마음을 다잡아 고비를 넘겼다. “장편소설을 쓴다는 것은 무거운 짐을 지고 혼자서 먼 길을 가는 거라고 할 수 있어요. 소설을 쓰는 동안은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으니까요. 사람들은 나를 매인 데가 없기 때문에 무척 자유로울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반대예요. 강철 같은 규율로 스스로를 옭아매지 않으면 나는 망하거든요. 나를 규율할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스스로 학대하면서 글을 쓸 수밖에 없죠. 무조건 나 자신을 채찍질해서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그렇게 겨우겨우 만들어냈죠.”‘지독한 기계치’의 이유 있는 항변 김훈은 기계치다. 그는 기계를 못 만진다. 기계 다룰 줄을 아예 모르는 건 아닌데, 그가 만지면 신기하게도 고장이 잘 난다. 그런 일이 자주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기계를 피했을 게 분명해 보인다. 그는 “만지면 고장나고 고장나면 아내한테 야단맞기 때문에 기계는 안 만지는 게 좋다”고 말했다. 제법 그럴싸한(?) 논리다. 사진기자의 카메라를 흘끔 쳐다본 그는 “카메라는 딱 질색”이라고 말했다. 기능이 많은 라디오도 꺼린다. 라디오의 버튼은 껐다 켰다 하는 것만 있어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텔레비전이 보고 싶으면 아들을 부른다. 물론 텔레비전을 끄는 것도 아들의 몫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뭔가 눌러야 하는 게 많은’ 비디오는 당연히 못 본다. 그래도 딸이 선물해준 휴대폰은 사용할 줄 안다. 전화 받고 거는 정도에 국한되지만. “정말 다행”이라고 했더니 “그것도 못하면 못 살잖아”라며 웃었다. “나는 기계가 싫어요. 내 본질에 안 맞는 것 같기 때문이죠. 영화 보는 것도 싫어해서 영화 안 본 지도 20년이 넘었어요. 컴컴하고 갑갑하고 시끄럽고 냄새나는 영화관에 들어가는 게 싫거든요.” 김훈이 컴퓨터를 못한다는 사실과 아직도 원고지에 몽당연필과 지우개를 사용해 글을 쓴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기자 생활을 할 때 컴퓨터를 한번 사용하려고 했는데 실패했어요. 키보드를 치는 느낌이 싫더라고요. ‘키보드로는 글을 쓸 수 없겠구나’라고 생각했죠. 그 뒤로 다시는 컴퓨터를 만지지 않아요. 원고지에 써서 갖고 가니까 출판사에서 나를 싫어해요. 특이한 늙은이 때문에 자기들이 고생하니까요. 원고를 팩스로 보내도 되는데, 그것도 믿을 수가 없어요. 팩스로 보내면 이게 간 건지, 안 간 건지…. 꼭 딴 데로 간 거 같은 생각이 들어요(웃음).” 소설의 자료 역시 직접 돌아다니며 구한다. 도서관이나 전문가들, 자료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서 자료를 수집해온다. “인터넷으로 하면 참 좋을 텐데…”라는 말에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에게는 컴퓨터가 아니 모든 기계가 낯설기만 한 것을. 김훈은 연필로 원고지를 꾹꾹 눌러 쓸 때의 느낌을 좋아한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그 힘 말이다. 자전거 타기를 좋아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자전거는 엔진이 없어서 좋아요. 자전거를 탈 때는 내 몸이, 내 심장이 엔진이에요. 내 몸을 써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게 좋아요. 그게 바로 ‘삶의 육체성’이죠.” 스스로를 ‘자전거 레이서’라고 표현하는 김훈. 그는 오래전 일산으로 이사를 가면서 자전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재미 삼아 타던 자전거에 이제는 집착하는 정도가 됐다. 10만~20만원이 아닌 몇 백 만원짜리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고 알려진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그는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프 더 레코드’였다. 입이 근질근질하지만 정확한 가격을 공개하면 ‘큰일(?)’이 날 것 같아 꾹 참기로 한다. 47일 동안 남한산성 안에서 일어난 이야기 「남한산성」은 30대 중반 이후의 남성들에게 유독 인기가 높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김훈은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성들보다 남성들이 이 땅의 슬픔과 약육강식의 고통을 더 잘 알기 때문에 책의 내용에 공감하는 게 빨랐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남한산성」은 역사소설이다.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으로 파천한 47일 간의 역사를 담았다. 아직 「남한산성」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책 소개를 부탁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성에 들어가니까 조선 사대부들이 임금을 따라 성 안으로 들어가요. 고립무원의 상태가 된 거죠. 그 안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어요. 싸우자는 사람이 있고, 투항하자는 사람이 있고, 어제는 싸우자 그랬다가 오늘은 투항하자는 사람이 있고, 아무 말도 없는 사람이 있고, 성 밖으로 도망가야 산다고 도망가는 사람이 있고, 성 안으로 들어와야 산다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고…. 그게 인간의 정확한 모습이에요. 그들의 고통과 절망과 희망과 그 대책 없음. 그걸 쓴 거예요.” 소설 속의 주된 갈등은 성 밖이 아니라 의외로 성 안에 있다. 주전파(主戰派) 김상헌과 주화파(主和派) 최명길 사이에서 엇갈린 말은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 김훈은 이 둘의 말을 비롯한 수많은 말을 옛 문헌에서 끌어다 썼다. 거침없는 칸의 글이나 청병 통역 정명수가 인조에게 뱉은 모진 말까지, 모두 출처가 있는 것들이었다. 정사(正史)가 아니면 야사에서라도 찾아 썼다고 전해진다. 역사 속의 기록만 옮겨다놓은 건 아니다. 「남한산성」에는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부분도 꽤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송파나루의 늙은 사공이다. 청병이 곧 들이닥친다는데도 사공은 강을 떠나지 않는다. 김상헌이 같이 성 안으로 들어가자고 권유해도 사공은 고개를 젓는다. 연유는 간단했다. ‘청병이 오면 얼음 위로 길을 잡아 강을 건네주고 곡식이라도 얻어볼까 해서…’이다. 김상헌이 사공의 목을 베는 장면을 김훈은 이렇게 적었다. ‘쓰러질 때 사공의 몸은 가볍고 온순했다. 사공은 풀이 시들듯 천천히 쓰러졌다.’죽기 전에 소설 서너 편 더 쓰고 싶어 작가 김훈에게 글쓰기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는 “글쓰기는 밥을 벌어먹고 사는 노동”이라고 답했다. “우선, 글쓰기는 노동이에요. 예술이기 이전에 나의 노동이고, 생계고, 생활이에요. 나는 돈을 버는 사람이에요. 나는 현세적인 가치를 부정, 경멸하는 사람들을 경멸해요. 나는 현세적인 가치 속에서 건강한 시민으로 살아가려고 하죠. 예술은 물적 토대 위에서 가능해요. 배를 주리면서까지 문학을 할 생각은 없어요. 또 하나, 글쓰기는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에요. 누구나 자신을 표현하고픈 욕구가 있잖아요. 나는 글을 통해 나를 표현하죠.” 작가 김훈의 어린 시절 꿈은 ‘작가’가 아니었다. 그의 꿈은 밥을 먹는 것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들으면 믿지 못하겠지만 ‘밥을 먹고, 밥을 먹는 나라를 만드는 게’ 그의 유일한 꿈이었다. 돈이 없어서 대학을 중퇴한 그이기에 ‘글쓰기가 생계’라는 말은 쉬 잊혀지지 않는다. 글을 쓰지 않을 때 그의 생활이 궁금했다. 김훈은 “글을 쓰지 않을 땐 논다”며 웃었다. 주로 강가나 들에 나가서 혼자 논다. 바람을 쐬며 자전거를 타고, 뜀박질을 하고, 등산을 한다. 몸을 써서 놀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 부인이 심심해하지 않느냐 묻자 “아내도 자기 나름 돌아다니느라 바쁘다”고 말했다. 그는 애주가다. 많이는 아니지만 자주 마신다. 젊었을 때는 위스키에 심취했고, 요즘은 사케를 좋아한다. “술 많이 먹는 사람치고 악인 없다”는 말을 했더니 그는 “많이 마시는 거 자체가 악”이라며 웃었다. 올해로 이순(耳順)인 작가 김훈. 그는 앞으로 딱 서너 편의 소설만 더 쓰고 죽고 싶다고 했다. 이제는 과거 이야기가 아닌 당대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물론 그 이야기를 쓸 수 있을지 없을지는 좀 더 지나봐야 알 수 있겠지만. “내가 올해 예순이거든요. 일흔이 넘으면 글을 쓸 수 없을 거 아녜요. 사람이 물리적 한계가 있으니까 말이에요. 앞으로 서너 편 정도 쓰게 되겠죠. 이야기하다 보니 갑자기 여생을 아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나와 돌아다니지 말고, 술 먹지 말고…(웃음).” ‘인생의 대선배’인 김훈에게 요즘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말을 부탁했다. 그는 “어려움과 혼란을 수용하는 능력을 기르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올바른 사람이 되라”고 당부했다. 돈을 벌었으면 세금을 내고, 사소한 것이라도 법은 꼭 지켜야 한다는 것. 그는 “쓰레기를 주워 휴지통에 버릴 줄 알고 구세군 자선냄비에 만원짜리 한 장 넣을 수 있다면, 그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글 / 김민정 기자 ■사진 / 박형주 ■장소 협찬 / BIRDS N BUGS(02-777-8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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