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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겸의 풍경](17)남한산성 소나무숲-한그루마다 애틋하게, 마을이 함께 지켜낸 숲(2021. 08. 20 14:41)
2021. 08. 20 14:41 문화/과학
산의 능선이 둘러싸고 있는 분지 같은 지형, 그곳에 번화가가 있다. 숲에 오르는 길은 이 번화가의 로터리에서 출발한다. 남한산성의 둘레길은 완연한 늦여름에 잠겼다. 남한산성은 냉혹하고 처절한 기록이 남아 있는 곳이지만, 반대로 숲을 지키고자 했던 이들의 뜨거운 열정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산성 아래의 마을은 자체적으로 ‘금림조합’을 만들어 숲을 지키고자 했다. 20세기 초, 곳곳이 민둥산이었던 다른 지역과 달리 이 일대는 푸른 숲을 유지했다. 덕분에 남한산성의 소나무숲은 90년 넘도록 울창한 수림을 자랑한다. 산성의 숲길을 걸으며 저마다 개성 있는 모습으로 자라난 소나무를 유심히 살펴본다. 저 나무 하나하나가 함께 살고자 했던 이곳 마을 주민들의 노력이요, 결과물이다. 이 길을 걸을 땐 풍경을 흘려보낼 것이 아니라 저 숲을 이룬 소나무 한그루 한그루의 생김새를 마음에 새길 일이다. 우리 곁에 훌륭한 숲이 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정태겸의 풍경
[이곳&이야기]발밑으로 펼쳐지는 단양군의 남한강 비경(2019. 07. 05 15:18)
2019. 07. 05 15:18 사회
ㆍ단양강 잔도, 만천하스카이워크 등 명물로… 올해 관광객 1000만명 전망 충북 단양군 단양읍 상진리에는 아찔한 산책로가 있다. 남한강이 굽이쳐 흐르는 가파른 절벽에 매달려 있는 ‘단양강 잔도(棧道)’다. 적성면 애곡리 만학천봉까지 1.2㎞ 길이의 산책로 바닥에는 구멍이 송송 뚫려 남한강 수면이 보인다. 자칫하면 강으로 퐁당 빠질 것 같다. 산책로에는 강바람이 불어와 시원하지만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른다. 아찔하기로 소문난 중국 장자제(張家界)의 잔도를 걷는 기분이다. 산책로 끝에 다다르면 만학천봉(해발 340m) 정상에 우뚝 서 있는 120m 높이의 거대한 철구조물이 나타난다. 충북 단양군이 2017년 적성면 애곡리 만학천봉 정상에 조성한 만천하스카이워크 전경. / 단양군 제공 단양의 새로운 명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전망대인 만천하스카이워크다. 이곳에서도 아찔함은 계속된다. 전망대 꼭대기에는 허공을 향해 뻗어 있는 3개의 스카이워크가 있다. 바닥은 통유리로 돼 있어 절벽이 그대로 내려다보인다. 떨어질까 조심조심 난간을 잡고 끝까지 걸어가면 단양 전경과 남한강의 비경이 펼쳐진다. 조선시대 문인과 화가들은 유달리 단양을 사랑했다. 석회암 지대에 기암괴석이 웅장하고, 남한강이 굽이쳐 흐르는 등 자연풍광이 빼어나서다. 470여년 전인 1548년(명종 3년) 단양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1501~1570)도 단양의 경치에 반했다. 그는 단양에서 경치가 빼어난 곳 중 이름이 없었던 곳에 채운봉(彩雲峯), 현학봉(玄鶴峯), 오로봉(五老峯)이라는 이름을 지어 단양팔경을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단양팔경 중 사인암(舍人岩)의 경치에 반한 단원 김홍도(1745~?)는 이곳을 그리기 위해 1년여를 고민하다 그림을 완성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단양에서 태어난 조선 개국공신인 정도전(1342~1398)도 도담삼봉의 풍경에 매료돼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 지었다. 선인들은 자연풍경을 보기 위해 단양을 찾았지만 50여년 전 사람들은 성공의 꿈을 안고 단양으로 모여들었다. 석회암이 풍부한 단양은 1960년대 시멘트를 생산하는 공업도시로 변신했다. 정부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워 한창 경제 부흥에 열을 올리던 시기였다. 내로라하는 시멘트 회사 공장들이 잇따라 들어섰다. 일자리가 생겼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단양의 인구유입은 전국 평균치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1960년대 말에는 인구가 9만3000여명에 달할 정도로 사람들이 북적였다. 전국 시멘트의 30%가 이곳에서 생산됐다. 선인들이 사랑했던 단양, 관광도시로 하지만 10만명을 넘을 것 같았던 인구는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이 시작되면서부터다. 50년 동안 지역경제를 책임졌던 시멘트산업이 힘을 잃자 인구유출은 더욱 빨라졌다. 단양군은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기업을 유치해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단양군은 전체면적 780.1㎢ 중 80%가 임야인 산골도시다. 타 도시처럼 기업을 들여와 인구를 늘리고 싶어도 공장을 지을 땅이 없다. 지난 6월 말 현재 단양군의 인구는 3만44명. 1960년대 말보다 무려 60% 넘게 줄어들었다. 1990년 이후 단양군에서 폐교된 학교만 24곳이 넘는다.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인구의 28.39%(8529명)를 차지해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지도 오래다. 인구유입이 없으니 자연스런 결과다. 단양군은 지역을 살리기 위해 관광지를 개발하기로 했다. 자연풍경을 둘러보고 끝나는 것이 아닌 직접 체험하고 느끼는 체류형 관광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2007년 온달 드라마 세트장을 활용, 고구려 명장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의 전설을 테마로 한 온달관광지를 만들었다. 2012년 5월에는 민물고기 전시관인 다누리아쿠아리움이 들어섰다. 2850㎡ 규모의 전시관에 전세계 민물고기 220여종 2만2000여마리가 전시돼 있는 이곳은 민물 수족관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다. 6월 말 현재 누적방문객은 214만4950명이다. 개관 이후 7년 동안 무려 군 인구의 70배가 넘는 사람이 이곳을 찾은 셈이다. 충북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의 ‘수양개 빛터널’ 외부에 5만 송이의 LED 장미를 심어 조성한 ‘빛의 정원’ 전경. / 충북도 제공 두 곳을 시작으로 단양군은 본격적으로 체류형 관광지 조성에 나섰다. 이렇게 만들어진 만천하스카이워크, 단양강 잔도, 수양개 터널은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적성면 애곡리 만학천봉 위에 세워진 만천하스카이워크는 120m 높이의 전망대다. 이곳의 바닥은 구멍이 뚫린 스틸그레이팅으로 만들어졌다. 120m 아래를 그대로 볼 수 있어 짜릿함이 느껴진다. 특히 고강도 투명 강화유리 바닥에 삼지창 모양으로 허공을 향해 뻗어 있는 3개의 스카이워크는 이 전망대의 백미다. 하늘 위를 걷는 아찔한 기분을 느끼며 걷다보면 남한강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는 짚와이어와 알파인코스터도 있다. 짚와이어는 남한강 수면 120m 위에서 시속 50㎞로 980m를 로프를 타고 내려오며 주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또 만학천봉에서 매표소까지 640m의 레일을 시속 40㎞의 속도로 내려오는 알파인코스터는 짜릿함이 느껴진다. 2017년 7월 만들어진 만천하스카이워크는 지난 한 해만 82만2185명의 관광객을 유치하며 단양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잡았다. 빼어난 풍광 활용한 체류형 관광상품 단양에서 만천하스카이워크로 이어지는 1.2㎞ 길이의 ‘단양강 잔도’는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필수코스다. 이 중 800m 구간은 남한강 200m 위 암벽에 매달려 있다. 남한강 풍경을 감상하며 걷다가 구멍이 송송 뚫린 아래를 내려다보면 등골이 서늘하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폐터널은 조명이 화려한 관광지로 변신했다. 적성면 애곡리에 있는 길이 200m, 폭 5m의 수양개 터널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져 철도로 사용되다 1942년 폐쇄된 터널이다. 단양군은 70여년 동안 방치된 이 터널에 영상·음향시설을 설치해 ‘수양개 빛터널’을 만들었다. 이곳에 들어가면 영상과 음향이 조명과 어우러진 몽환적인 빛축제가 열린다. 밤이 되면 터널 밖에 심어 놓은 5만 송이 LED 장미가 빛을 발하며 빛의 정원으로 변신한다. 젊은이들의 인증샷 명소로도 유명하다. 잇따라 들어선 관광시설은 지역경제를 살리는 효자가 됐다. 단양군의 연간 관광객은 2015년 792만명에 불과했지만, 2017년 1001만8000명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지난해에는 996만명을 기록했다. 올해 6월 말 현재 509만명이 단양을 다녀갔다. 단양군은 올해 1000만여명의 관광객이 지역을 찾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재길 단양군 만천하스카이워크 팀장은 “옛날에는 단양을 둘러보는 데 5시간 정도에 그쳤지만 관광시설이 들어선 이후 체류기간이 늘어나면서 숙박객이 늘어 지역경제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며 “이들 시설을 아우르는 관광상품도 개발되고 있어 앞으로도 많은 관광객이 찾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곳&이야기
[특집]‘김정은 환영’을 보는 남한의 시각(2018. 12. 17 14:55)
2018. 12. 17 14:55 정치
ㆍ자본주의 논리에 입각한 ’북한 오리엔탈리즘’이란 편견 아닐까 “평화통일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언제까지 빨갱이로 매도되어야 하나. 감옥살이를 해야 했고, 고문도 당했고 심지어 죽임도 당했다. 이제는 잡혀가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열변을 토했다. 김수근 위인맞이환영단 단장(35)의 말이다. 12월 9일 오후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백두청산위원회 소속 회원들이 집회를 열고 ‘북한 김정은 위원장 서울 방문을 환영한다’는 취지로 결성된 백두칭송위원회 청산을 요구하고 있다./연합 12월 11일 <경향신문사> 인터뷰실에서 김 단장을 만났다. 궁금했다. 그들이 맞고자 하는 위인은 김정은 조선노동당 위원장이다. ‘위인’이라니. “위인이냐 아니냐 생각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북의 인민들이 문재인 대통령을 맞이했듯이 북의 지도자를 어떻게 하면 더 환대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김정은 위원장의 방남은 역사적 사건이다. 예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DMZ의 지뢰를 철거하고 대치하던 남북 군인이 악수하는 모습에 감동받았다. 그런데 우리, 정확히 말해 보수언론이나 집단의 반응은 어땠나. 귤 박스에 돈 들었다고 찬물을 끼얹는다. 방남을 환영한다고 하면 보수언론이 빨갱이로 매도한다. 지난 73년 동안 민족 대결을 부추긴 집단에 언제까지 휘둘릴 것인가.” 김정은을 ‘위인’이라고 생각하는 까닭 그가 ‘위인’이라고 주장한 논리는 이랬다.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 5·1경기장 연설에서 언급했듯, 지금의 국면이 만들어진 것은 김 위원장의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평화 분위기를 이끌어냈기 때문에 위인으로 봤다. 단순히 문재인 대통령을 만났을 때 연장자로 우대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여서, 지도력이 있어서 이런 부분이 아니라 한반도 평화에 획기적인 전환을 이끌어 냈기 때문이다. 남북이 통일되는 과정에서 그의 결단이 시작이었다고 역사는 평가할 것이다.” 문화적 퍼포먼스나 키치(kitch)는 아니다. 김 단장은 “누군가의 지시나 제안 같은 것은 없었다”고 말한다. ‘방남은 엄청난 사건인데 언론에서도 환영한다는 말은 안 나오고 남북 정상이 만난 지도 두 달밖에 안 되었는데 청와대 벽에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나는 것을 벽화로 그려놓았다고 욕먹는 사회 분위기가 된 것에 대해 강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그런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누군가는 촌스럽다고 이야기하는데 영어를 써야 세련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좋은 우리말을 두고.” 환영단은 알고 지내던 지인들 네 명과 함께 만들었다. ‘주사파냐’는 질문에 그는 “주체사상을 배운 적 없다”고 답했다. 김 단장은 1983년생이다. 재수를 한 03학번이다. 지방에 있는 한 대학에 다닐 때 학생운동을 하지는 않았다. 노무사 공부를 하러 서울에 올라왔다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에 참여한 것이 ‘운동’과의 첫 인연이었다. 1000일 넘는 기륭전자 파업 출근 선전전에 동참했다. 지금의 아내를 만난 것도 세월호 천막 단식농성장이었다. 그가 남북문제에 눈을 뜬 것은 두 계기였다. 하나는 김진향 전 카이스트대 교수의 강연이었고, 다른 하나는 재일동포 학생들의 이야기를 담은 <우리학교>라는 다큐멘터리다. “고향이 강원도 인제 원통, 휴전선 근처다. 집 근처에서 사격훈련도 하고 논앞에 헬기가 내려앉기도 했다. 이런 나라에서 왜 살아야 하나 어렸을 때부터 싫었다. 서울에 오니 오히려 도시사람들은 그런 것에 무덤덤한 것 같았다. 미사일을 쏜다고 놀라지도 않았다. 그러다 김진향 교수 강의를 들었다. 인생의 사고를 송두리째 바꾼 경험이었다. 우리가 북한을 모른다는 것이 위험하다. 한마디로 북맹(北盲)의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고, 그것은 재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학교>라는 다큐를 추천받아 봤는데 재일동포들이 일본 극우세력들과 싸워온 역사였다. 보면서 두 시간 내내 울었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왔나. 충격과 혼돈이었다.” 환영단 결성사실이 보도되자 그의 휴대전화에는 수천 통의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대부분 욕설과 ‘북에 가서 살아라’와 같은 내용의 반복이다. 그리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관심병 환자가 아니냐는 비아냥도 있다. “굳이 관종이라고 한다면 통일관종이라고 하면 좋겠다. 나는 오히려 우리 국민이 너무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방북도 전세계가 관심을 갖는 뉴스인데, 북한 지도자의 방남은 남북분단 후 처음 있을 일이다. 그렇게 위대한 일이 지금 시작되려하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이고 주인공인 사람들은 말하면 이상한 사람이 되는 분위기다. 이제 진짜로 통일이 시작되는 것인데 조용하다. 과거 말하면 잡혀가는 시대가 있었으니 그래서인지 한국은 원래 질문도 안 하는 나라로 유명했다. 억압과 탄압의 시기는 지났는데도, 마치 목줄을 풀어놔도 그대로 있는 개처럼 과거의 관성에 묶여 있는 것은 아닌가. 나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들 모두가 통일관종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12월 11일 경향신문사에서 과 인터뷰하고 있는 김수근 위인맞이환영단 단장/우철훈 선임기자 “보수세력에게 빌미, 역공작 배후 의심” 왕년의 운동권은 이들의 활동을 어떻게 볼까. 소위 ‘NL운동권 출신 386’으로 정치권을 거쳐 현재는 변호사를 하고 있는 한 인사에게 물었다. “김수영 시인이 김일성 만세를 허용해야 한다는 시도 썼는데 이제 광화문광장에서 그 정도 주장을 했다고 호들갑 떨 시대는 지나지 않았나.” 이 인사가 내놓은 모범답안이다. “과민반응할 일은 아니다”라면서도 이어지는 이 인사의 ‘속내’는 사뭇 달랐다. “사실 그 사람들이 진정으로 조국통일을 바라는지는 의문이다. 지난 2년 문재인 정부가 최악이었던 한반도 상황을 간신히 뚫고 나온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쉽게 보수세력에 빌미를 주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사람들의 활동을 침소봉대해 당장 대한민국이 좌경화되었다고 주장하는 자유한국당이나, 그런 활동으로 존립 근거를 확인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적대적 공생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든다.” 이 인사의 주장은 SNS를 통해서도 쉽게 발견된다. 저런 노골적인 친북행태의 배후에는 국정원이나 ‘반통일세력’의 역공작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식의 주장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남북경협에 관여해왔던 인사는 “당장 체제선전에는 이용할지 모르겠지만 북쪽 사람들도 아주 잘했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북쪽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다. 남쪽 사회 분위기가 어떤지 뻔히 아는데 저 사람들 뭐하는 짓이냐고 반응하지 않을까. 내가 알고 지내는 북한 사람들도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아주 잘하고 있다고 마냥 박수치지는 않을 것 같다. 엊그제 단장이라고 하는 사람(김수근씨)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보니 아이돌 좋아하는 느낌이었다. 나도 그 사람 논리가 설득되지 않는데 그런 논리로 누구를 설득하겠나. ‘잘하잖아요, 멋지잖아요’ 이런 것이 아니라 정중하게 정상회담 상대자로 김정은 위원장을 거론한다면 또 모를까.”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이 있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영문학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만들어낸 개념이다. 간단히 말해 서양사람들이 바라보는 동양이라는 ‘편견’을 말한다. 서양문화 속에서 동양은 열등한 존재로 재현된다. 19세기와 20세기 서양의 식민지배는 그렇게 정당화된다. 열등하고 무능하고 게으른 존재이며, 두뇌나 신체에서 열등하기 때문에 그들은 지배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이드의 저작을 읽다보면 그리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서구문화에서 동양은 때로는 찬양 대상이다. 서양은 갖지 못한 신비한 초월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다. 간단히 말해 그들과 우리 서양은 다르다. 사이드의 주장에서 핵심은 재현(representation)이다. 동양은 스스로를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해줘야 한다. 사이드에 따르면 동양이란 서양에 의해 체계적으로 구성된 담론적 구성물일 뿐이다.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는 동양에 대한 서양의 편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타자로 분류될 수 있는 모든 집단과 개인에 대해 나타날 수 있는 편향이다. 2003년 타계한 에드워드 사이드가 만약 살아서 북한, 그리고 김정은 방남을 둘러싸고 한국에서 벌어진 ‘소동’을 봤다면 어떻게 설명할까. ‘북한’이라는 오리엔탈리즘 “일단 책 제목만 보고 시비를 건다. <주체의 나라, 북한>이라는 책 제목이 북 체제에 대한 옹호로 생각하는 것이다.” 지난 3월 동명의 책을 펴낸 강진웅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의 말이다. 북한이라는 나라의 국가와 사회에서 모순적 실체를 구조적으로 다룬 연구서다. 외부의 시선에서는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는 권력의 내적 합리성을 고찰하는 연구이지만 재단하는 논리는 간단하다. 북한 체제에 대한 옹호인지 아니면 비판인지. 찬반의 어느 한 입장을 떠난 ‘중립지대’의 여지는 한국 사회에서 쉽게 허용되지 않는다. ‘앨리스 죽이기’라는 영화가 있다. 2014년 재미교포 신은미씨에 대한 ‘종북몰이’와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추방당하는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를 찍은 김상규 감독은 한국과 외국의 관객 반응에서 나타난 차이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영화의 내용에 대해) 한국인 관객들은 관람 중 분노와 탄식을 하는 반면, 미국과 캐나다에서 열렸던 영화제를 찾아 관람한 외국인 관객들은 ‘낄낄 웃음’을 하며 마치 이 다큐를 블랙코미디 취급을 해서 몹시 당황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감독의 말을 인용한 영화의 주인공 신은미씨는 이렇게 덧붙였다. “한마디로 이들(외국 관객들)은 국가보안법의 ‘고무찬양’ 조항을 코미디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실 지난 70여년의 분단을 돌이켜보면 전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체제다. 분단선은 한반도의 허리, 휴전선에만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정보통제는 ‘남조선’의 자본주의 문화 유입을 막기 위해 북한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북의 당 기관지 <로동신문>이나 ‘조선중앙방송’를 비롯한 북한 관련 정보에 대한 남한 일반 국민의 접근은 차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여전히 처벌대상이다. 지난 두 보수정권 시기에는 한때 남북 간 비상 핫라인마저 끊겨 완벽히 단절된 적도 있었다. “박근혜 정권 때 새누리당이 내걸었던 플래카드를 기억하는가. 국정교과서를 추진하면서 반대하는 학자·교사들을 두고 ‘김일성 주체사상을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다’고 비난했다. 북한에 대한 혐오로 MB가 집권했고, 박근혜 정부가 등장했다. 남북관계가 비틀어진 사건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2008년 7월 박왕자씨 사건을 거론하는데, 실은 그해 2월 26일, 보수정권 시작 시기로 돌아가야 한다. 이상희 전 합참의장이 신임 국방부 장관으로 내정되었는데 인사청문회를 하면서 북한이 주적이라고 선언했다. 7월 사건은 결국 금강산 관광 중단의 빌미에 불과했다.” 김진향 교수의 말이다. 참여정부 인사수석실 비서관을 역임한 뒤 개성공단에 오랫동안 머무르며 수많은 북한사람들을 만나 토론한 경험이 있는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은 없다”고 말하곤 한다. “북한에 대해 모르는데 문제는 본인이 모르고 있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남과 북은 체제와 제도뿐 아니라 그것에 기반한 가치나 생활양식도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식 기준에서 재단하려고 한다. 우리가 보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저쪽에서는 특수한 것일 수 있다. 우리의 기준은 개인주의, 자본주의 경제논리에 기반한 인식이다. 통일부나 국정원, 북한 연구자는 다를까. 나는 그분들을 만난 자리에서도 당신들은 ‘북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한다.” 지난 2015년 10월 ,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발표 이후 새누리당이 국회 앞에 내걸었던 현수막. 기존 역사교과서를 친북이라고 비난하고 있다./김정근 기자 우리가 아는 북한은 없다 김 교수는 탈북자로 북한 사회를 판단하려는 것의 한계를 예로 들었다. “정부기관이나 교수들이 무엇으로 북한 사회를 연구하는가. 대부분 문헌자료다. 기껏 만나는 사람들이 탈북자다. 북한 전체 인구가 2500만명이다. 3만명의 탈북자가 한국에 들어와 있다고 하니까 말하자면 그들은 전체의 0.001%도 안 된다. 굉장히 특수한 신분의 사람들이다. 나도 세종연구소에 있을 때 매일 한 명씩 만나 인터뷰했지만 그들의 경험을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답하는 내용도 분단체제가 원하는 답으로 최적화할 수밖에 없다. 분단체제의 가장 큰 문제는 합리적 토론이 안 된다는 것이다. 젠더나 민족, 심지어 동성애 문제도 토론이 되는데 북한을 주제로는 합리적 토론이 안 된다. 북을 비판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만 토론에 낄 자격요건이 생긴다.” 김 교수에게 한국에 사는 우리가 북맹 또는 북한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물어봤다. “제일 좋은 방법은 실제 북한사람들을 만나 대화해보는 것이다.” 박한식 미국 조지아대 명예교수는 ‘남북을 갈라놓은 12가지 편견’을 다룬 책 <선을 넘어 생각한다>에서 “중요한 것은 동질성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질성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질성을 인정하지 않는 극단의 태도가 우리의 주적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 강요와 당신은 누구 편인가라는 편가르기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남한에 와서 보니 숙청하면 아오지 탄광에 보낸다는 표현을 사람들이 많이 하는 것을 보고 헛웃음이 났다.” 탈북자 홍강철씨의 말이다. 함북 출신으로 지난 2013년 탈북한 홍씨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간부들도 탄광이나 농장 등 어렵고 힘든 데를 보내는 이른바 혁명화 조치를 하는 것은 사실이다. 아오지 탄광은 고열탄을 생산하는 곳이다. 심지어 아오지에서 탈북한 사람도 있다. 일반 탄광일 뿐인데, 남에서는 한 번 추방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지옥쯤으로 아오지 탄광이라는 비유를 사용한다.”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제일 많이 느끼는 남북의 정서상 차이는 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우선 북한사람도 똑같이 말하고 풍습이 같은 한민족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탈북자라고 생각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내 주변에는 나같이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사상이 다르다고 해서 자기와 뜻이 다르면 간첩으로 매도하고 종북 딱지를 붙여 의심하고 인간적으로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북한사람들은 안 그렇다. 누구나 잘못은 범할 수 있다. 과오가 있으면 조직이 달라붙어 그 사람을 비판하고 새사람을 만들어주려고 노력한다. 생활총화라는 것도 흔히 남한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인민재판식으로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다. 서로 도와 잘못을 고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는 다르다. 사상이 다르다고 하면 적으로 돌린다. 이런 말을 하면 ‘저 사람 이상하다, 위장귀순한 간첩 아닌가’ 하는 반응이 돌아온다.” 곱씹어봐야 할 쓴소리다.
특집
[법률 프리즘]남한·북한 저작물, 양쪽서 똑같이 보호받나(2018. 08. 27 14:49)
2018. 08. 27 14:49 사회
북한 저작권사무국은 남한의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에 북한 저작물의 이용을 원하는 남측 희망자에 대하여 북한 저작권사무국을 대리하여 포괄적 사전협상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영화 <강철비>의 한 장면. 영화 <미션 임파서블>의 무대로 등장하였을 만큼 상하이는 국제도시이다. 청나라가 마지막 호흡을 내뿜던 100여년 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듯하다. 황푸강변 와이탄에 늘어선 100여년 전의 서양식 건물들에 그 당시 열강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황푸강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화려한 거리의 한 구석에는 허름한 집들이 모여 있는 골목이 있다. 이 골목 중 한 집에는 한글로 된 표지판이 붙어 있다. 상하이를 찾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 임시정부가 있었던 곳이다. 사무실로 사용하였던 방에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임시정부에 젊음을 바쳤던 분들이 숙소로 사용했던 방이 나온다. 해마다 광복절이 되면 임시정부 등에 참여하며 젊음을 바쳤던 분들에 대한 기사들이 여럿 나온다. 이들 중에는 해방 공간의 정치 상황 탓에 남에서도 북에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분들도 있고, 어느 한 체제를 선택하면서 다른 체제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분들도 있다. 월북작가 해금 이후 몇 차례 분쟁 문화예술인들도 마찬가지다. 해방 공간에서, 또 이후 전쟁을 거치며 많은 작가들이 월북하기도 했고 납북되기도 했다. 우리 정부는 1954년 월북 작가들의 작품에 대하여 출판 및 판매 금지조치를 내렸고, 이 조치는 1988년에서야 해금되었다. 우리말의 보고라고 불리는 <임꺽정>도, 나타샤를 사랑했던 백석의 시도 이 기간 동안 금서였다. 금지조치가 풀리면서 월북 작가들의 책들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이들 책을 저자의 허락없이 출판하는 것이 법률상 문제가 없을까? 몇 차례의 분쟁을 거치면서 북한 저작물의 이용과 관련된 기준이 마련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월북작가 이기영이 쓴 소설 <두만강>에 대한 것이다. 이 작품은 19세기 말부터 1930년대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두만강 일대에서 살던 주민들의 계급투쟁을 묘사한 것이다. 분쟁이 발생했던 당시 이기영은 이미 사망한 뒤였고, 남한에 유족이 있었다. 쟁점은 간단했다. 이기영의 작품에 대하여 우리 저작권법을 적용할 수 있는지가 문제였다. 이기영의 책을 출판한 쪽에서는 북한의 경우 저작권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지 않고 설령 저작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상속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이 당시엔 북한에 저작권법이 없었지만 북한도 2001년 저작권법을 제정하면서 저작권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였고, 저작재산권에 대한 상속도 인정하였으므로 현재 이와 같은 분쟁이 일어난다면 아마도 주장이 달라질 것이다). 법원은 먼저 헌법 제3조 영토 조항을 들었다. 헌법 제3조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 도서이고, 북한도 한반도의 일부이므로 우리 저작권법의 효력이 북한에도 미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저작권법에 따라 그 유족에게 저작재산권이 상속된다고 하였다. 또 다른 사건에서 법원은 6·25전쟁 전후에 납북되거나 월북한 문인들의 작품을 발행하려면 그 저작재산권의 존속기간이 만료되지 않은 이상 해당 문인 또는 그 상속인들로부터 저작재산권을 양도받거나 이용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분쟁이 이어지자 통일부는 북한 저작물의 이용에 대한 원칙을 세워 나갔다. 중국 등 제3국의 중개업자를 통한 북한 저작물 이용계약은 인정하지 않고, 북한의 책임 있는 기관과 직접 체결한 계약이 아니면 국내 출판을 승인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북한 저작물 사용에 대한 신뢰성과 투명성을 높이기 위하여 북한 당국의 조치를 촉구했다. 남북한 문화교류 대비 제도 정비 필요 북한의 저작권사무국은 통일부의 요구에 따라 2005년께 남한의 민간단체인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을 통하여 북한에 있는 저작권자의 승인과 저작권사무국의 공증확인서가 없이 남측에서 이용하는 것은 저작권 침해라는 통지를 해왔다. 저작권사무국은 북한이 2004년 6월 저작권 사업을 총괄할 기구로 설립한 기관이다. 북한 저작권법에 따르면, 저작권사무국은 저작권자가 외국인이나 외국 법인에게 저작재산권을 양도하려 할 때 승인권, 저작권 사업에 대한 감독통제권을 가지고 있다. 이후 북한 저작권사무국은 남한의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에 북한 저작물의 이용을 원하는 남측 희망자에 대하여 북한 저작권사무국을 대리하여 포괄적 사전협상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은 현재 통일부로부터 승인받은 유일한 남북교류사업자이자 북한 저작권사무국으로부터 협상권을 부여받은 단체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현재는 국내 이용자가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과 북한 저작물의 이용에 대한 계약을 체결하고, 북한 저작권자의 동의서와 저작권사무국의 확인서를 받는 방식으로 절차가 마련되었다. 저작권료도 통일부의 승인을 받아 지급하는 구조이다. 북한 거주자의 저작물을 남한에서 이용하기 위한 절차는 어느 정도 정비가 된 셈이다. 실제로 2006년부터 2017년까지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을 통해 북한의 저작물 이용과 관련하여 체결된 계약이 860건이라고 한다. 그러나 북한에서 남한의 저작물을 이용하는 것에 대하여는 남북한 간 특별히 합의된 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북한 저작권법은 국가 관리에 필요한 저작물을 복제·방송하거나 편집물 작성에 이용하는 것은 저작권자의 허가를 필요로 하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북한 당국이 국가 관리에 필요하다고 인정만 하면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므로 저작권자의 권리 보호에는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영화 <강철비>의 도입부에는 북한 특수요원의 딸이 밥상에서 아빠에게 ‘지디(지드래곤)’라고 남조선 가수 이름 들어봤냐고 물었다가 남한 노래 절대 듣지 말라고 혼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는 어떻건 남한 콘텐츠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위험해질 수 있는 것이 북한의 현 상황이라면, 남한 저작자의 권리 보호를 논하는 것이 시기상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북 간 문화 교류가 안정적인 토대 위에 이루어지려면 이러한 제도도 정비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법률 프리즘
[영화속 경제] 남한문화가 낯설지 않은 북한의 ‘장마당세대’(2018. 06. 04 15:45)
2018. 06. 04 15:45 경제
북한에 쿠데타가 일어난다. 핵을 가지고도 사용하지 않는 북한1호(국무위원장)에 불만을 품어서다. 개성공단을 찾았던 북한1호의 머리 위로 살상무기 ‘스틸레인’이 쏟아진다. 치명상을 입은 북한1호는 남으로 도망온다. 쿠데타 세력은 남한에 선전포고를 한다. 남한 정부는 그를 치료해 북으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전쟁을 막는다. 이런 시나리오는 몇 달 전만 해도 말이 안되는 공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 싶다. 남과 북의 최고 수반이 번개로 만나는 시대다. 세상이 이렇게 변했다. 양우석 감독의 <강철비>가 새롭게 보이는 까닭이다. 영화 <강철비>는 남과 북을 적과 아군으로 이분화하지 않는다. 쿠데타 세력에 맞서야 하는 북한 정권과 북한 내전으로 자칫 전쟁에 휘말릴 위기에 처한 남한 정부가 공동이익을 위해 보조를 맞춘다. 영화의 원작은 2011년 웹툰 <스틸레인>이다. 이 웹툰의 글작가가 양우석 감독이다. 통상 한국영화에서 북한 특수요원은 당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인물로 그려졌다. 하지만 엄철우(정우성 분)는 아니다. 그는 ‘가족을 공화국을 지킨 영웅가족으로 대접하겠다’는 거래를 제안 받고 사건에 뛰어든다. 쿠데타를 막으면 그의 아내와 딸은 쿠바 대사관에서 일할 수 있다. 북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당과 수령을 위해 무한충성을 보내는 것은 옛말이다. 사유재산에 눈을 뜨고 있고, 개인의 이익을 중시한다. 이런 성향의 2030을 ‘장마당세대’라고 부른다. 북한판 밀레니얼 세대로 북한 인구의 절반쯤 된다. 장마당이란 시장을 의미한다. 사회주의 배급체계인 북한에는 원래 시장이 없다. 장마당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이 낳은 산물이다. 당시 김일성 주석 사망, 소련 붕괴, 가뭄과 추위 등이 겹치면서 북한의 배급망이 붕괴됐다.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사람들은 갖고 있는 것을 뭐라도 팔아서 식량을 구했다. 장마당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2003년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은 ‘시장을 인민 생활에 편리하고 나라의 경제 관리에 유리한 경제적 공간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한 방침’을 제시하며 장마당을 공식 인정했다. 2018년 기준 북한 전역에 공인 받은 장마당만 500개에 육박한다. “달러만 주면 탱크도 구해준다”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로 장마당은 활성화됐다. 생필품부터 전자제품, 휴대전화까지 없는 게 없다고 한다. 영화 속 엄철우는 평안남도 평성시에 있는 한 장마당에서 약을 거래하고, 돈을 주고 깽깽이국수(잔치국수)를 사먹는다. 장마당에서 물품을 사고 팔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사금융이 자생적으로 생겨났다. 일부는 북한식 신흥자본가로 성장했다. 이른바 ‘돈주’다. 돈의 주인이란 뜻이다. 돈주들은 고리대금 이자놀이부터 부동산, 유통, 무역, 심지어 밀수까지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은행의 조사에 따르면 북한 전체 경제에서 시장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30%에 육박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유럽에서 공부하며 자본주의를 접했다. 김 위원장이 장마당을 적극 지원하는 배경이다. 다시 영화 속으로 가보자. 엄철우의 딸 인영은 지디(지드래곤)의 팬이다. <삐딱하게>를 좋아한다. 엄철우는 “남조선 노래를 듣는 거이 아바지 어마니 죽창치는 거야”라며 화들짝 놀라지만 대세를 막을 순 없다. 남한의 대중가요와 드라마는 장마당을 통해 북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그렇게 남과 북은 가까워져 가고 있다.
영화 속 경제
[영화속 경제]-무기력한 조선왕조의 ‘머들링 스루’(2017. 10. 31 16:21)
2017. 10. 31 16:21 경제
역사에는 아름다운 것만 있지 않다. 보기 싫고, 떠올리고 싶지 않은 치욕의 역사도 있다. 그럼에도 그런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조선의 인조가 청태종(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은 ‘삼전도의 굴욕’도 그렇다. 황동혁 감독의 영화 은 바깥세상에 어두웠던 외교력, 자기를 지킬 수 없었던 나약한 국방력, 명분에 사로잡힌 이상론이 불러온 실패의 기록이다. 1636년 인조 14년 청의 대군이 조선에 군신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하며 압록강을 건넌다. 병자호란이다. 정묘호란(1627년)이 일어난 지 9년 만이다. 강화도로 채 피난가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도피한다.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 분)은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며 화친(나라와 나라 사이 다툼이 없이 가까이 지냄)을 주장한다. 반면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 분)은 굴욕을 당할 바에야 죽는 게 낫다며 척화(화친하자는 논의를 배척함)를 주장한다. 때는 눈이 내리는 정월, 청군에 포위된 조선군은 추위와 굶주림과도 싸워야 했다. 청나라 황제를 자칭하는 칸 홍타이지는 중국에서 삼전도까지 와 인조의 항복을 요구한다. 인조는 격서를 써 성밖 의병들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대장장이 날쇠가 격서를 들고 성밖으로 탈출하지만 근왕병들은 끝내 오지 않는다. 항전 47일 만에 인조는 항복을 결심한다. 당시 조선은 전란의 후유증, 왕위 찬탈을 둘러싼 내분으로 엉망인 상태. 진흙탕 속에서 겨우겨우 왕조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른바 머들링 스루(muddling through)였다. 머들링 스루란 헤쳐나가기 힘든 진흙탕 속을 통과하는 상황을 의미하는 경제용어다. 시간을 끌면서 힘겹게 나아가거나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한 채 시간만 끄는 상황으로 보면 된다. 머들링 스루는 유로존이 그리스,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 주요국의 재정문제로 촉발된 금융위기에 늑장대응을 하면서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는 현상을 빗대면서 사용됐다. 혁신을 찾지 못해 침체가 계속되며 서서히 성장동력을 잃어가는 경제상황을 ‘머들링 스루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최근 한국 경제가 딱 그런 꼴이다. 서서히 침체의 길로 가고 있지만 반도체 산업을 제외하고는 마땅한 먹을거리를 찾지 못한 채 성장잠재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머들링 스루는 의미가 확장돼 조직의 명확한 목표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현재 체제를 버텨가면서 직면한 문제를 우선 해결해 나가는 상황을 이르기도 한다.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대는 조선왕조에 민심도 돌아섰다. 신분제도는 공고했고, 먹고살 길은 막막했다. 실용외교와 대동법을 내세워 사회개혁을 시도했던 광해군은 폐위됐다. ‘봄에 씨를 뿌려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배곯지 않는 세상’이 되지 않는 한 조선이 청의 나라가 되든, 명의 나라가 되든 백성들에게는 똑같았다. 인조가 항복을 한 뒤 김상헌은 최명길에게 한탄한다. “백성을 위한 새로운 삶의 길이란 낡은 것들이 모두 사라진 세상에서 비로소 열리는 것이오. 그대도, 나도, 그리고 우리가 세운 임금까지도.” 조선이 머들링 스루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혁신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하지만 조선은 끝내 개혁을 이루지 못한다. 조선은 영·정조시대를 거치며 잠시 기력을 회복하는가 싶더니 구한말 열강의 진흙탕에 빠져 몰락한다. ‘삼전도의 굴욕’을 머들링 스루에서 탈출하는 혁신의 기회로 삼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또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 속 경제
[구석구석 과학사](17) 많은 과학자들이 남한을 떠난 까닭은(2017. 10. 16 19:25)
2017. 10. 16 19:25 문화/과학
미 군정은 1946년 7월 ‘국립종합대학 설치계획안’(일명 국대안)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였다. 국대안은 발표 즉시 각계의 강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국대안 파동이 남긴 상처는 작지 않았다. 사진은 1946년 7월에 열린 경성대학 이공학부의 처음이자 마지막 졸업식을 찍은 것이다. 일제 패망 직후 경성제국대학의 일본인 교수와 학생들이 떠나가자, 한국인 교수와 학생들은 학교를 접수하고 경성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본에서 유학 중이었던 한국인 학생들도 대부분 귀국해 합류하였다. 그러나 사진 속에서 미소를 지으며 함께 하고 있는 교수와 학생들은 현실에서는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이 무렵 새로운 대학의 미래상을 둘러싸고 대학 구성원들 사이의 의견 대립이 한껏 고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6년 7월 경성대학 이공학부 졸업식 사진. 앤스테드 총장을 비롯한 미군 쪽 인사들이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일제강점기에 교토제대의 교수가 되어 큰 관심과 기대를 받았던 두 과학자, 이태규와 리승기는 각각 맨 앞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 왼쪽에서 다섯 번째에 앉아 있다./서울대기록관 대학 발전에 대한 서로 다른 상상들 경성대학의 운영을 주도한 한국인 교수들 가운데는 사회주의 성향의 지식인들이 많았다. 이공계에서는 이공학부장 대리였던 이론물리학자 도상록(1903∼1990)이 좌익계 과학기술자들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성향의 교수와 학생들은 현실정치의 좌익계 정당에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반공세력을 지원하던 미 군정과는 불편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또 이들 나름대로 미 군정이 자신들이 지닌 영향력을 애써 무시하고 친미 반공 성향이 강한 미국 유학파 교수들만 가까이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 미 군정과 좌익계 교수들 사이의 갈등은 해방된 한국의 고등교육정책을 어떻게 짤 것인지에 대한 의견 대립이기도 했다. 한국인 교수들은 경성대학,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등이 각각 하나의 엘리트 대학으로 승격하여 각자의 학풍과 전통을 이어 나가기를 기대했다. 일본에서도 종전 후 미 군정이 전문학교들을 대부분 대학으로 승격시켰으므로 이들이 무리한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 군정의 눈에는 일본인 교수들이 모조리 빠져나간 한반도의 고등교육기관들은 승격은 고사하고 존속 여부도 불투명해 보였다. 또한 산업화를 달성한 일본 본토와는 달리 한반도는 아직도 농업사회를 벗어나지 못했고 중등교육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는데, 이런 처지에 교수들의 바람처럼 많은 수의 대학을 만들겠다는 것은 현실성 없는 이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미 군정의 지극히 냉정한 판단이었다. 미 군정은 1946년 7월 ‘국립종합대학 설치계획안’(일명 국대안)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였다. 경성대학과 각종 관립 전문학교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국립서울대학교’라는 거대 대학을 세운다는 내용이었다. 미 군정은 이에 앞서 6월에 공금을 횡령했다는 핑계로 도상록을 파면하여 학내 반대세력의 힘을 꺾으려 했다. 국대안은 발표 즉시 각계의 강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새 나라 건설의 꿈에 부풀어 있던 한국 지식인들은 국대안을 “너희들에게는 그렇게 많은 대학이 필요 없다”는 미 군정의 냉랭한 통보와 마찬가지로 받아들였다. 학교의 이사와 총장이 모두 미국인으로 정해진 것도 한국인의 자존심을 배려하지 않은 처사였다. 강제로 통합을 당하게 된 학생들도 반발했다. 경성대학 쪽은 전문학교와 합치는 것을 자존심 상하는 일로 여겼고, 전문학교 쪽도 나름의 전통을 버리고 차별대우를 감수하면서까지 경성대학과 통합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 국대안 발표 직후 모두 반대 성명을 냈다. 각각의 성명서 발표를 보도한 신문기사. /서울대기록관사진 속 과학기술자들의 절반만 남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군정은 “국대안에 반대하는 이들은 좌익”이라는 논리를 앞세워 국대안을 밀어붙였다. 국대안 자체에는 비판적이었던 이들 중에도 이 논리에 설득되어 “좌익의 무책임한 선동을 내버려둘 수 없으니, 일단 개교는 하고 보자”는 논리로 사실상 찬성으로 돌아서는 이들이 늘어났다. 결국 국대안 찬성파와 반대파 사이에 충돌이 이어졌다. 오늘날 서울대학교는 10월 15일을 개교기념일로 쇠고 있지만, 실제 1946년 10월 15일은 성대한 개교 행사 같은 것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교직원의 집단 사직, 학생들의 동맹휴학, 학교의 무더기 제적과 파면처분, 대학병원의 진료 거부 등이 1947년 2월까지 이어졌다. 미 군정이 대학 이사와 총장을 한국인으로 교체하고 1947년 6월에는 제적되었던 학생들의 무조건 복교를 허용하면서 비로소 ‘국대안 파동’은 수습되었고, 7월에 서울대학교의 첫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국대안 파동이 남긴 상처는 작지 않았다. 도상록과 리승기(1905∼1996)를 비롯해서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수진의 약 40%에 이르는 22명,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많은 학생들이 국대안 파동과 한국전쟁 휴전 사이의 혼란한 시기에 자의건 타의건 북으로 갔다. 위 사진 속 과학기술자들 중 절반가량이 남한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다. 북으로 가지 않은 이들 중에도 한국을 떠난 이들이 있다. 경성대학 이공학부장으로서 서울대학교 설립과정에 깊이 참여하고 개교 후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장을 지낸 이태규(1902∼1992)는 국대안 파동의 와중에 반대파의 으뜸가는 표적이 되었다. 비방과 협박이 쏟아졌고, 일본 시절부터 함께 했던 아끼는 제자들도 사표를 던지며 등을 돌렸다. 이태규는 결국 한국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1948년 미국 유타대학으로 떠나고 말았다. 국대안 파동은 서울대학교의 출발점인 동시에 한국 과학계 분단의 계기이기도 하다. 그 시작이 갈등과 고난으로 가득했음을 생각하면 오늘날 한국 과학계가 이만큼 높은 수준의 연구역량을 갖추게 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성취를 찬탄하는 것과는 별개로, 아픈 과거는 미화하거나 덮어버리지 않고 그대로 기억해야 한다. 모든 역사를 아름답게 기억할 수는 없고, 아프고 험한 역사는 그에 맞게 기억하는 방식이 있는 법이다. 10월에 굳이 국대안 파동의 아픈 역사를 들춰내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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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치스크린]남한산성-철저한 고증과 묵직한 울림
[터치스크린]남한산성-철저한 고증과 묵직한 울림(2017. 10. 10 16:04)
2017. 10. 10 16:04 문화/과학
(주)싸이런픽쳐스 제목 남한산성 (The Fortress) 제작연도 2017년 제작국 한국 러닝타임 140분 장르 드라마 감독 황동혁 출연 이병헌, 김윤석, 박해일, 고수, 박희순 개봉 2017년 10월 3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1636년 인조 14년, 새로운 군신관계를 강요해오던 청나라의 대군이 쳐들어오자, 임금과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고립된 임금과 백성들은 청의 무리한 요구를 거부한 채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속에 급속히 지쳐간다. 순간으로 치욕을 감내하더라도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 분)과 목숨을 바쳐서라도 대의를 세워야한다는 예조판서 김성헌(김윤석 분)의 첨예하게 각을 세운 이견 사이에서 인조(박해일 분)는 갈등한다. 청의 우두머리 칸이 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공포는 극에 달하고 작은 산성 안에 갇힌 조선의 운명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위태로운 상황으로 곤두박질친다. 아무리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영화는 많았지만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작품은 드물다. 이유는 분명하다. 규모, 즉 영화화할만한 거리의 차이다. 영화 은 김훈 작가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2007년 출간 이래 100쇄를 찍어내며 총 70만부 판매의 성공을 기록한 이 작품은 제15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훈은 처음 이 이야기를 창작하며 그렸던 몇 가지 중요한 이미지가 있었다고 한다. 고립된 성에서의 무서운 추위, 봄이 오는 아주 희미한 냄새 등이 그것이다. 인터뷰를 통해 그는 아무쪼록 이런 느낌들이 영화 속에도 녹아들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의 바람은 어느 정도 성사된 듯하다. 이 작품은 대규모 스펙터클이나 액션에 무게를 싣는 활극이 아니다. 기대와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호불호가 분명히 갈릴 부분이다. 중간 중간 공들인 액션 신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영화의 중심을 지탱하고 있는 가장 큰 화제는 처절한 상황에 처한 인물들의 ‘갈등’ 그 자체다. 그리고 화면 안에서 끊임없이 몰아치는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과 눈보라는 한정된 공간과 시간 안에서 국가의 기로라는 중대사를 결정해야 하는 인물들의 목을 가혹하게 옭아 죈다. 당시의 분위기를 최대한 재현하기 위해 제작팀은 철저한 고증을 거친 세트와 소품을 활용하고자 노력했다. 촬영 역시 한겨울을 관통하는 일정임에도 실내 스튜디오를 지양하고 로케이션과 오픈세트로만 진행했다. 배우들의 입김까지 고스란히 느껴지는 영화 속 한기가 그래서 더욱 절절히 와 닿는지도 모르겠다. 감독 황동혁의 연출목록은 예사롭지 않다. 2007년 내놓은 장편데뷔작 이후 , 로 이어진 꾸준한 작품활동은 그가 다양한 소재와 장르를 재단할 수 있는 연출가일 뿐 아니라 관객동원 능력까지 지닌 흥행가임을 증명했다. 은 139분이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흔들리지 않고 묵묵하게 전개된다. 마지막까지 격양되지 않은 묵직한 울림을 이어간다. 모처럼 ‘문예영화’란 단어도 떠오른다. 한국영화를 보며 간만에 느껴보는 정서다. 호흡이 가쁘지 않으니 영화 속의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화려하진 않지만 우아함이 깃듯 풍광, 뚜렷하되 감정을 선동하지 않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 등은 영화가 전달하려는 주제와 분위기에 관객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다가서게 만든다. 당연히 배우들의 연기도 그 여백의 자리를 채운다. 자신이 가진 역량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었던 배우들에게도 이 작품은 특별한 의미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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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교수 주승현의 ‘우리는 모두 조난자다’](2) 사선을 넘어 또 다른 사선에 서다-남한 땅에서 받은 싸늘한 첫 질문 “너 왜 왔어?”(2016. 12. 26 18:21)
2016. 12. 26 18:21 사회
탈북민이 남한 땅에서 사회구성원으로 자리하고 인정받기 위한 노력은 오랜 기간에 걸친 호소와 행동을 통한 변천사이기도 하다. 비무장지대의 MDL(중앙분계선)을 넘은 내가 국군 GP(경계초소)초소를 지나쳐 GOP(일반전초) 초소로 간 것은 비무장지대 안에서는 남과 북 어느 쪽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수년간의 DMZ 생활을 통하여 경험했기 때문이다. 중앙분계선을 넘으면서부터 귀순사실을 알리고자 허공에 총을 연발로 쏜 탓에 매캐한 화약 냄새가 전투방한복에 스몄고,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에 GOP에 도착하여 군홧발로 철책선을 찼다. 잠시 후 철책선을 가운데 두고 국군들과 마주섰고, 앳된 얼굴의 초소장은 신분확인 후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빨리 비무장지대를 벗어나고 싶은 나의 생각을 멈춰 세운 것은 예상치 못했던 초소장의 다음 요구였다. “입고 있는 방한복도 전부 벗어주세요.” 방금 헤치고 온 어둠길로 곧 북한군 추격조가 나타날 것만 같은 긴박한 순간이었지만 차마 전투방한복만은 벗을 수가 없었다. 포로가 아닌 귀순자라는 자존심뿐만 아니라 엄동설한의 DMZ에서 초췌한 모습으로 벗겨지는 것에 대한 기계적인 거부였다. 팽팽한 신경전이 흐른 뒤 초소장은 고집을 거두고 병사들에게 철책선 절단을 명령했고, 나를 DMZ 밖으로 유도했다. “제가 두 살 형이네요.” 군용 지프에 오른 나에게 초소장이 말을 건네 왔으나 차가 출발하는 바람에 대화를 잇지 못했다. 달리던 차는 어느 곳에서 정차했고, 밖에서는 한동안 실랑이가 벌어졌다. 군 본부로 인도가 먼저라는 쪽과 합심(합동신문센터)으로 가야 한다는 낮은 언성이 오갔으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이제는 안전하다는 안도감이 심한 피로감과 함께 몰려왔다. “너 왜 왔어?” 짧은 휴식을 마친 나에게 던진 A담당관의 첫 질문은 싸늘했다. ‘혹시 DMZ에서 전투방한복을 벗지 않은 것 때문인가?’ 오만가지의 생각 속에 얼떨결에 내뱉었다. “그럼 다시 돌아갈까요?” 아차 싶은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공포가 엄습했다. “그런 태도면 이곳에서 영원히 나갈 수 없어.” 비로소 나는 대북확성기 방송과 대북전단지를 통해 밝힌 귀순자에 대한 배려와 환영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으로 깨달았다. DMZ라는 사선을 넘어왔지만 또 다른 사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직관했다. 오기뿐만 아니라 자존심도 내려놔야 한다는 사실도 본능적으로 받아들였다. 10월 31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탈북민 단체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인권법 제정에 따른 인권기록 보존과 재단사업에 탈북민들의 참여를 보장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통일부가 북한인권 및 탈북자 지원사업을 통일부 퇴직 관료들의 일자리 사업으로 변질시키고 당사자인 탈북민을 배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탈북민들이 스스로의 권익을 주장하는 대표적 사례인 이날 기자회견은 대부분의 국내 미디어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 뉴포커스 제공 남한에 대한 첫인상 유관기관 직원이 결정 조사기간 내내 고압적인 태도가 한결같았던 A담당관과 다르게 B담당관은 부드러운 표정을 지녔다. 다소 긴장하고 불안한 내 시선의 대부분은 B담당관이 위치한 방향을 더듬었다. 식사도 거른 채 숙소에서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내게 B담당관이 내민 것은 삶은 달걀이 가득 들어 있는 봉투였다. 삶은 달걀을 좋아한다면서 앉은 자리에서 네댓 개를 해치우는 그의 모습에 그제야 나도 손을 움직였다. 대북방송에서 익히 들었던 먼저 온 귀순자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그들 모두를 맡아 이곳에서 내보냈다고 했다. 처음에는 A담당관과 B담당관의 태도나 제스처가 역할분담인 줄 알았으나 본시 그들의 캐릭터가 그런 거였다. 내가 A담당관을 경계하고 불편해하는 것을 알았는지 일상적인 대화나 행동들은 대부분 B담당관과 함께였다. 지금은 그들도 퇴직하여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전직 A담당관은 이따금씩 만날 때마다 구상 중인 사업들을 얘기하는데 선뜻 지르지 못하는 눈치다. 반대로 B담당관은 귀농을 선택했다. 봄이면 가끔 그의 농사를 도와주고 가을이면 일한 대가로 그 수확물을 받아온다. 우리는 그곳에서의 일들을 얘기하지 않는 대신 탈북민의 삶에 대하여, 살아가야 할 미래에 대한 얘기를 많이 나눈다. 삶은 달걀을 챙겨 여행 비슷한 것도 함께한다. 귀순자든 탈북민이든 입국 후 처음 마주치는 사람들은 합동신문센터 관계자들과 통일부 직원들, 그리고 신변보호를 담당하는 경찰들이다. 한국 사회에 대해 백지장 같은 탈북민이 몸과 머리에 처음 인식되는 국가의 모습은 그들을 통한 모습인 것이다. 그렇게 인식된 국가의 모습은 참으로 오래간다. 좋은 모습으로 인식하면 괜찮은 나라에 와서 살고 있다는 자부심과 고마움이, 나쁜 모습이 인식되면 두려움과 피해의식, 경계의 마음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분들을 대상으로 강의할 기회가 있으면 이 부분을 특별히 강조한다. 강의가 끝난 후 어떤 사람은 업무상 어쩔 수 없는 환경적 고충을 토로하기도 하고, 또 어떤 관계자는 가볍게 생각했던 부분이 그처럼 중요한지 몰랐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국가를 이루고 함께 살아가야 할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젊은 탈북 청년들은 한국 사회 이슈에 관심 탈북민이 이곳에서 사회구성원으로 자리하고 인정받기 위한 노력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과 국민의식 진전과 그 궤를 같이해 왔다고도 볼 수 있다. 탈북민의 첫 집단행동은 1990년대 중후반 합동신문센터에서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는 당사자들의 법정소송이었다. 피해자라고 주장한 여러 탈북민이 진행했던 소송은 패소했지만, 탈북민 대상의 비인간적 행태에 대한 첫 문제제기로 언론과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합동신문센터는 지금도 ‘탈북자 간첩사건’ 문제로 도마의 중심에 서 있다. 두 번째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것은 탈북민에 대한 국가의 비민주성에 대한 집단행동이었다. 2000년대 중반까지 탈북민은 복수여권이 아닌 단수여권만 허용되었는데, 이는 같은 국민임에도 일반국민과 탈북자가 다른 대우를 받은 것이다. 탈북민과 단체들이 여권 발급제한이 ‘차별행위’라며 항의시위에 나서고 소송을 제기한 덕분에 결국은 여권발급 기준이 완화됐다. 세 번째는 탈북민 정책의 비효율성에 대한 것으로, 수십 가지로 난무하는 탈북민에 대한 용어조차 제대로 정립하고 있지 못한 정부정책과 ‘남북하나재단’, ‘북한인권법실행’ 등에 탈북민이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집단항의였다. 특히 올해 10월에는 30개의 탈북단체와 수백명의 탈북민이 사상 처음으로 연합단체를 구성해 탈북민 사업에 탈북민 참여를 보장하라는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이는 탈북민 정책과 사업을 자기들만의 일자리 창출과 퇴직관료들의 재취업 도구로 전락시키면서도 당사자인 탈북민을 배제하고 있는 데 따른 반발이자 항의였다. 네 번째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양상들이 최근에 와서 확인되는 부분이다. 분단환경에서의 특수한 신분과 민감한 정치적 당사자임을 의식하며 움직였던 탈북민 사회에서 최근에 특히 젊은 탈북청년들을 중심으로 북한문제나 탈북민 문제가 아닌 사회 이슈 전반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가 두드러지고 있다는 점이다. ‘최순실 사건’으로 계속되었던 광화문집회에 자신들의 출신과 성향까지도 당당하게 밝히고 참여하고 있는 탈북청년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탈북민 사회의 지형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대학과 대학원 등에 다니고 있는 탈북청년들이 현재 2000명이 넘는다는 것은 남북한을 경험하고 민주주의를 학습하고 있는 그들의 성장과 새로운 역할에 대한 주목이자 충분한 관심이기도 하다. 합동신문센터에서 조사기간은 다른 탈북민에 비해 갑절이나 길었다. 센터의 식당에서 탈북민을 처음 보았는데, 어른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꽤 있었다. 오기 전, 대북확성기와 전광판을 통해 입국한 탈북민의 숫자를 매일같이 접했는데, 숫자가 많아 과장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아이들과 친해지고 싶어 식사시간이면 숙소의 온갖 간식들을 싸들고 식당에서 기다리기 일쑤였다. 어른들과 달리 경계라는 것을 모르는 듯 아이들은 곧 ‘삼촌’이라 불렀고, 그 아이들이 커서 지금은 대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 있다. 낯익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으면 하나원(사회적응을 도와주기 위해 운영하는 통일부 소속 교육기관)으로 간 것이라고 했다. 담당관에게 왜 나만 잡아 두냐고 항의했더니 하나원 혹은 사회 나가는 것보단 이곳이 더 편할 것이라고 했다. 어이없는 대답에 조사를 거부하고 단식을 시작했다. 난감해하던 담당관이 나를 차에 태우고 서울투어에 나섰다. DMZ에서 남쪽을 보며 평소 궁금했던 것이 세 가지 정도였는데, 하나는 파주의 ‘자유로’(고속화도로)로 다니던 자동차였다. 비무장 시절 한 번은 가깝게 지내던 정치장교에게 ‘자유로’에 차가 많다고 하자 대뜸 남조선의 모든 고속도로는 ‘자유로’를 통해서만 진입해야 하기 때문에 많아 보인다고 했다. 다른 하나는 휴전선 남쪽 155마일의 철책선을 길게 밝히고 있는 불빛이다. 정치장교는 워낙 남쪽이 북쪽을 무서워해서 전기를 끌어다가 철책을 밝히고 있는 거라고 했다. 또 다른 하나는 남쪽의 꽉 찬 나무숲에 대한 것인데, 정치장교는 대답 못했다. 그도 궁금했을는지도 모른다. 그 부분에 대한 남쪽 담당관의 교정은 가히 솔직했으나 조금은 적나라했다. 집에 자가용이 두 대인데, 그 중 연식이 오래된 자가용은 나에게 공짜로 줄 수도 있다고 했다. 문제는 차량 유지와 만족에 대한 것이라고 했다. 서울 시내를 환하게 밝힌 야경에 대해서는, 빌딩의 불빛 아래서 밤늦게까지 고되게 일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라고 했다. 나무가 많긴 하지만 서울 공기가 별로라면서 밤에 하늘을 보라고 했다. 별이 안 보인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서울투어를 하면 할수록 고민은 커져만 가고 있었다. 일자리는 알아서 찾아야 하고, 서울에 거주하고 싶으면 임대주택을 받아야 하는데, ‘하나원’에서 탈북민끼리 추첨하여 운이 좋아야 당첨 가능하다고 했다. 경쟁률이 높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혈혈단신에, 아는 것도 제대로 없다는 사실에 온갖 두려움이 밀려왔다. 사실 ‘멘붕’은 이미 겪어본 거다. 비무장지대에서 대북확성기를 제압하는 업무를 수행한 만큼 다른 것은 몰라도 남한의 일상적인 단어나 의사소통에는 자신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런 확신은 도착한 지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처음 KBS뉴스를 보는 순간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과 단어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뉴스, 앵커, 여당과 야당, 슈퍼마켓이나 인터넷과 같은 일상적 용어조차 처음 접하는 것이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10분 만에 TV를 꺼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북방송은 북한 주민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끔 용어를 교정하든지, 북한에서 쓰는 단어를 선택하여 내보냈던 것이다. 담당관의 걱정이 진심으로 다가왔다. DMZ 근무한 나, 탈북민들 사이에서는 왕따 합동신문센터에서 잔류가 내 의지가 아니듯이 하나원으로의 출발도 내 의지는 아니었다. 하나원에 도착한 날부터 나는 이른바 ‘왕따’였다. 중국과 제3국을 거쳐 오면서 서로를 대부분 알고 있는 탈북민과 다르게 휴전선 길로 온 나는 혼자였다. 태국으로 함께 왔으면 ‘태국패’, 베트남으로 왔으면 ‘베트남패’, 라오스로 왔으면 ‘라오스패’로 분류하여 불렸는데, ‘패’에 소속되어 있는 그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특히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그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였다. 내가 비무장지대에서 근무한 출신이라는 것이 소문나면서 탈북과정에서 그들이 겪은 여러 가지 일들이 반사적 분노로 표출돼 나에게 돌아왔던 것이다. 북한주민들의 탈북을 총으로 막았던 국경경비대원이 아니었는데도 DMZ에서 근무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를 공격하는 그들을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정착프로그램 강의에도 참가하기 싫어졌고 숙소에서 나오지 않거나 덩그러니 잔디밭에 혼자 앉아 있기 일쑤였다. 그런 내가 안쓰러웠던지 아이들이 먼저 왔고, 시간이 흐르자 형, 누나의 이름으로 고향사람들이 다가왔다. 그들에게 정이 들수록 하나원 퇴소 후 혼자 살길이 막막했다. 대부분은 하나원에서의 기간이 길다고 했지만, 가능하다면 그곳에 더 있고 싶었다. 추운 겨울에 한국에 와서 무더운 여름 어느 날에야 퇴소를 했는데, 내 얼굴에선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마구 쏟아졌다. 나를 데리러 온 담당 경찰은 그 모습을 보고 기가 찼던지 한마디 했다. “북한하고 달라서 보고 싶으면 언제든 가서 만나면 돼요.” 10년 후, 그때 그 사람들이 송년모임을 열어 모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유명을 달리한 분도 있고, 교도소에 있는 사람도 있다. 수배로 쫓기는 이도 있고 탈남하여 외국으로 간 사람도 있다. 메이저신문 기자로 유명해진 기자도 있고, 한의사·공무원·박사도 나왔다. 명함은 요란하지 않지만 아득바득 돈을 모아 집을 장만한 사람도 있고, 중견회사 간부로 아들 딸 여럿을 낳고 잘 키우는 사람도 있다. 구구절절 얘기하지 않아도 안다. 나처럼 그들도 사선을 넘어와 또 다른 사선에서 오늘까지 싸워왔다는 것을…. 2차로 간 노래방에서, 누군가 예약했을 곡을 누구랄 것 없이 합창했다. “그대여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 합시다 /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 그대 가슴 깊이 묻어 버리고 /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 떠난 이에게 노래 하세요 / 후회 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10년 전 우리가 마주했던 차디찬 풍경을 표현하기에는 나름 따뜻함이 배어 있는 가사라고 생각했다. 헤어지며 무리 속 누군가 고함질렀다. “10년 후에도 꼭 다시 보기다.” 여전히 서울 하늘에서는 별을 볼 수가 없지만, 노래 가사는 깊은 여운으로 오래도록 맴돌았다.
탈북 교수 주승현의 ‘우리는 모두 조난자다’
[우정(郵政)이야기]세계문화유산 시리즈 1호는 남한산성(2015. 11. 09 18:28)
2015. 11. 09 18:28 문화/과학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도입한 취지는 보존할 가치가 있는 인류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이 제도의 착안도 개발후진국의 문화재의 파괴, 유실, 훼손에서 비롯됐다. 이 제도가 도입될 당시의 기준이라면 세계문화유산을 많이 보유한 나라일수록 문화유산 보호를 게을리하는 ‘문화후진국’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유네스코는 한 해 45점만 등재심사를 한다. 등재신청도 한 나라에 한 건으로 제한하고 있다. 희소가치에는 권위가 부여되게 마련이다. 문화유산 등재 자체가 ‘국가적 자랑’이 됐다. 우리나라는 문화유산 강국이다. 세계문화유산 12개, 세계기록문화유산 13개, 인류무형문화유산 15개 등이 유네스코에 등재돼 있다. 하나같이 뛰어난 독창성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류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화재로 평가 받고 있다. 우정사업본부도 문화적 자긍심을 배양하기 위해 나섰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우표를 매년 발행하기로 했다. 지난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 시리즈 1호 우표로 채택됐다. 남한산성 행궁과 남문을 소재한 문화유산 시리즈 1호, 남한산성 우표. 요판인쇄기술이 적용돼 손끝으로 만지면 독특한 감촉을 느낄 수 있다. / 우정사업본부 제공 남한산성 하면 무엇보다 병자호란이 떠오른다. 조선 인조의 ‘삼전도의 치욕’ 때문이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3배9고두’로 청 태종에게 항복의 예를 치렀다. 이는 굴욕의 상징이다. 남한산성 역시 전쟁 패배의 역사적 현장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결코 치욕의 이름이 아니다. 적군에게 함락된 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 영조 때 실학자인 이중환이 쓴 는 “청나라 군사들이 처음 왔을 때(정묘호란) 병기라고는 날(刀)도 대보지 못하였고, 병자호란 때도 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고 적고 있다. 인조가 성문을 열고 나온 것은 추위와 식량 부족을 견디지 못한 때문이다. 패배를 모르는 남한산성의 역사는 무려 1200여년을 이어온다. 7세기에 백제 시조였던 온조왕이 도읍으로 정하고 산성을 쌓은 뒤 한 번도 함락된 일이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12㎞의 성벽으로 싸인 성 안은 험하지 않지만 성 바깥 산 밑은 살기를 띠고 있다. 삼국시대 때에도 남한산성의 수성군이 늘 승리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했다. 일제강점기엔 항일운동의 거점이었다. 하지만 그처럼 견고한 성채도 세월을 이기지 못했다. 허물어지고 무너지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새로운 축성술로 남한산성은 다시 태어났다. 통일신라 문무왕 때인 672년에 다시 쌓았다. 조선 인조는 남한산성을 증축했다. 숙종, 영조, 정조도 손을 봤다. 우리나라 산성축조법의 발달과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남한산성의 가치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세계적 관심을 모으는 것은 세계 유일의 산성도시라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주로 산에 성을 쌓았다. 당연히 군사적 목적이 훨씬 강조됐다. 따라서 도시의 기능은 미약했다. 군사작전이 필요할 경우 성곽 밖에 살던 사람이 성곽 안으로 들어온다. 예외가 있다. 주민이 거주하며 생활했던 남한산성이 그것이다. 당연히 내부의 마을과 주민생활을 보호하는 기능도 있다. 남한산성은 도시 형태를 갖춘 산성이었다. 성 안에는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샘이 있었다. 병자호란 당시 산성 안의 인구가 4000여명이나 됐다. 이와 함께 행궁도 빠뜨릴 수 없는 남한산성의 특색이다. 행궁이란 임금이 거둥할 때 머무르는 별궁을 이르는 말이다.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20여개의 행궁 가운데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갖춘 곳이다. 우정사업본부가 왜 세계문화유산 시리즈 1호 우표로 남한산성을 선택했는지 이해가 간다.
우정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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