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옵션
닫기
범위
전체
제목
본문
기자명
연재명
이슈명
태그
기간
전체
최근 1일
최근 1주
최근 1개월
최근 1년
직접입력
~
정렬
정확도순
최신순
오래된순

주간경향(총 3 건 검색)

[표지이야기]위로하러 왔다 위로 받고 가는 참 신기한 광화문 단식농성(2014. 08. 18 17:32)
2014. 08. 18 17:32 사회
한 달을 훌쩍 넘긴 단식 농성에도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는 꼿꼿했다. ‘4월 16일’을 의미하는 416인의 동조단식 농성단은 그 수를 알 수 없을 만큼 늘어났다. 긴 기다림 끝에 교황의 시복식 미사에 참여한 유가족들은 다시 특별법이라는 기다림 앞에 서 있다. 선선했던 날씨가 다시 본래의 여름 기온을 회복한 8월 1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세월호 가족과 시민 농성장 천막을 찾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늘기 시작했다. 416명을 염두에 두고 설치한 천막은 금세 비좁아졌다. 오후가 되면서 바닥에서 올라오는 분수에 더위를 식히는 어린이들의 모습에, 그 모습을 바라보는 시민 농성단의 눈에 일순 비쳤던 부러움이 겹쳐졌다. 다만 한 사람, ‘유민이 아빠’는 지열이 올라오는 천막을 정좌한 채 지킬 뿐이었다. 8월 1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세월호 가족 농성장에서 청소년들이 세월호 가족 지지 집회를 열고 있다. | 권호욱 선임기자 세월호 희생자인 단원고 2학년 김유민양의 아버지 김영오씨의 가슴에 써 있는 단식일수는 30일을 넘어섰다. 광화문 시복식이 열리는 16일이면 34일째다. 당초 김씨와 함께 단식에 나선 15명의 가족들이 건강상의 문제로 병원에 이송되면서 이젠 김씨만 남게 됐다. 강한 햇볕이 내리쬐지만 막아주는 것은 천막 한 채뿐, 후끈한 열기 속에서도 김씨는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앉아 이따금씩 찾아오는 시민들을 맞고 있었다. 몸무게는 40㎏대까지 떨어졌다. 초췌한 얼굴은 검은 빛으로 혈색이 좋지 않다. 그러나 잊지 않고 찾아와 인사하는 시민들을 마주할 때마다 김씨의 웃음은 밝게 빛났다. 하루 150여명의 시민들 동조단식 “…고맙습니다.” 낮게 잠겨 흘러나오는 김씨의 목소리는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작아져 있었다. 가까이에 있는 자원봉사자들이 통역처럼 말을 대신 전할 때도 많다. 사정을 아는 시민들은 물론 취재진들도 대화를 길게 잇진 않는다. 침묵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짧은 대화지만 김씨를 위로하러 온 시민들은 되레 자신이 위로받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농성장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비장하고 묵직한 분위기일 줄 알았고, 나도 대통령과 국회에 화가 많이 나서 속에 끓어오르는 게 있었거든요. 근데 유민이 아버지 얼굴 보니까 그런 감정은 멀리 가고 반대로 평온하고 또렷한 기분이 드는 게 참 신기했어요.” 부산에서 왔다는 허지연씨(42)는 아픔을 나누러 왔지만 깨우침을 받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세월호 사고 발생일인 4월 16일을 의미하는 416인의 동조단식 농성단은 12일부터 꾸려졌다. 동조단식을 시작한 12일부터 시민사회·노동단체를 비롯해 종교인과 영화인 등 다양한 분야의 시민들이 단식 행렬에 동참했다. 12일 오후부터는 농성장 곳곳에 마련된 천막을 일반 시민들이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동조단식 참여인원이 하루 평균 150명에 이를 정도로 계속해서 늘면서 당초 이름이었던 416인의 명목상 의미는 사라졌다. 농성장에는 점차 활기가 돌았다. 신청업무를 담당한 대책회의 관계자는 “공식적으로 신청하지 않고 단식에 참여하는 시민들도 있어 정확한 인원을 파악하기가 힘들 정도”라고 밝혔다. 여름방학이 끝나가는 시기인데도 농성장을 찾은 중·고등학생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친구들한테 말하면 괜히 착한 척하는 것 같아서 혼자만 왔다”는 고교 2학년 김모군(17)은 “자기 나라 국민이 이런 일을 당했는데 정부의 대처가 이것밖에 안 된다는 게 너무 이해가 안 가서 직접 한 번 찾아왔다”고 말했다. 12일 오후에는 ‘고교생도 알 건 안다’라는 이름의 집회도 열렸다. 100여명의 청소년들에 어른들까지 합세하면서 청소년만의 신선한 발언들이 호응을 얻었다. 강원도 원주에서 왔다는 최준호군은 “여야가 이번 특별법을 두고 야합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정치인들이 중·고등학생들에겐 관심 없다”며 “우릴 깔보지 않고 무서워하도록, 더 이상 중·고등학생들이 당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거리에서 집회와 시위로 알려야 한다”고 발언해 또래와 어른들 모두에게서 큰 박수를 받았다. 수백명의 동조단식 인원과 자원봉사자, 시민들이 모여 있지만 때론 다른 생각을 가진 방문자들에게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14일에는 70대로 추정되는 신원을 알 수 없는 한 노인이 김영오씨가 있는 곳에 들이닥쳐 “한 달을 굶었으면 죽었어야지” 같은 폭언을 한 시간 동안 하다 간 일도 있었다. 하지만 농성장을 지키는 세월호 가족들과 동조농성단 시민들을 가장 긴장하게 만든 것은 경찰이 강제철거에 나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강제철거 안 한다는 경찰 못 믿어” 광화문 농성장으로 동조농성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크게 늘어난 12일에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인 강우일 주교가 “광화문광장에서 단식농성 중인 세월호 희생자 가족이 광화문 시복식 행사 때문에 물리적으로 퇴거당하거나 쫓겨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히며 농성장 천막 침탈에 대한 걱정은 사라지는 듯 보였다. 경찰 역시 “천주교계와 방한준비위의 입장을 존중할 것”이라며 강제적인 농성장 해산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했지만 농성장을 지키는 시민들에게선 불신과 불안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분위기였다. 농성장 주변으로 물대포 차량과 경찰버스가 주차할 때마다 시민들은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하루 24시간을 꼬박 새워 청와대 가는 길에 앉아 있었잖아요. (13일) 오전에 기자회견 마친 가족들이 청와대 쪽으로 몇 걸음 떼니까 바로 질질 끌어가고 둘러싸서 오도가도 못하게 한 게 경찰 아닙니까. 그러니 믿을 수가 있겠냐고요.” 13일 세월호 가족들과 시민농성단의 기자회견 이후 경찰이 일방적으로 가족들을 끌어내는 불상사가 재연됐다는 주장이다. 시민 정인주씨가 쓴웃음을 지으며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교황님 입국 전에 경찰이 (농성장) 다 치워버릴까봐 몇날 밤을 새운 사람들도 많다. 이게 경찰 때문인지 소심한 우리 탓인지 헷갈리더라. 천주교에선 ‘내 탓이오’ 그러잖아.” 세월호 가족들과 농성단은 14일 오후가 돼서야 시름을 돌렸다. 교황방한위와 세월호 가족 간의 협의 결과 가족 600명이 광화문에서 열리는 시복식 미사에 참여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농성장은 유가족 농성장 천막 2채만 남기고 일시 이동하기로 합의했다. ‘유민이 아빠’도 16일이면 광화문 시복식 미사 자리로 발걸음을 옮긴다. 가장 낮은 곳을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광화문에 도착하기까지 천막 속에서 33일간 이어진 유민 아빠의 기다림. 그 기다림은 이제 특별법이라는 마지막 결과를 향하고 있다.
표지 이야기
[표지이야기]세월호 유가족 단식농성장 찾은 만화작가 엠마뉘엘 르파주 인터뷰(2014. 08. 18 17:30)
2014. 08. 18 17:30 사회
ㆍ“김영오씨 진실함이 마음을 움직였다” “분노는 진실을 요구하게 합니다. 진실을 요구하며 싸우는 이곳에서 그들과 강하게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8월 12일 오후 서울 광화문의 세월호 유가족 단식농성장을 한 프랑스인 작가가 찾았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단식농성 중인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가 있는 천막이었다. 세월호 희생자를 상징하는 소녀의 얼굴을 그려 건넨 그는 이어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플래시몹 대열에도 합류해 대형 인간 리본을 만드는 데 동참했다. 엠마뉘엘 르파주. 2008년 두 달에 걸쳐 체르노빌 현지를 탐사한 경험을 그림과 함께 르포 형식으로 풀어내 2012년 출간한 은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한국에서도 지난해 부천만화대상 해외작품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르파주는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소련은 물론 작가가 살고 있던 프랑스가 진실을 감추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는 데 실망했다. 22년 만에 직접 찾아간 체르노빌에서 작가는 그곳에 자리 잡고 실제 삶을 살아가는 주민들의 목소리를 통해 잊혀진 진실과 마주했다. 13일부터 열린 제17회 부천국제만화축제 참석차 한국에 온 그가 세월호 유가족 농성장으로 먼저 발걸음을 향한 이유도 똑같았다. 바로 “인간성과 진실에 대한 추구”였다. 8월 12일 서울 광화문 세월호 단식농성장을 찾은 르파주 작가가 유가족인 김영오씨에게 직접 그린 그림을 전하고 있다. | 김태훈 기자 세월호 농성장을 직접 찾은 느낌은 어떤가.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생동감 있는 모습이 가슴에 와닿았다. 과거 체르노빌에서처럼 국가가 은폐한 진실을 요구하는 현장을 직접 와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오게 됐다. 딸을 잃은 김영오씨의 모습에서 가족을 잃은 아픔과 그 진실한 목소리가 나라의 경계를 넘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김영오씨에게 그려준 소녀의 얼굴은 누구를 염두에 두고 그린 것인가. “유민이의 얼굴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릴 수 없었다. 그림의 소녀는 어느 한 희생자의 얼굴이 아니라 세월호 사고로 희생된 모든 이들을 상징하는 뜻으로 그린 얼굴이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그리고 세월호에서 공통된 인상을 찾을 수 있나. “체르노빌 당시 10대였는데 그때 프랑스 정부는 체르노빌의 방사능 위험이 프랑스까지는 미치지 않는다며 진실을 숨겼다. 단지 아이들에게 하듯 시민들을 안심시키려고만 한 것이다. 2년 전 일본 후쿠시마를 방문했을 때도 같은 것을 느꼈다. 인류가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 말이다. 세월호 사고도 비슷하다. 사고가 난 이유와 대처방법에 대한 진실은 그것이 고통스럽더라도 어른답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민들을 애들처럼 보는 정부는 진실은 숨기고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만 늘어놓는다.” 한국은 원자력발전소의 밀집도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후쿠시마 이후 국가 정책의 전환은 없었다.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프랑스는 가장 많은 원전을 갖고 있는 나라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노후해 설계수명을 지나서까지 연장가동하는 비율도 높다. 그럼에도 원전의 전력공급을 대체할 방안을 못 찾았다며 계속 가동 중이다. 그 이면에는 원전을 수출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는데, 결국 원전문제는 어느 한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답이 나온다. 체르노빌의 여파가 유럽 전체로, 후쿠시마는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로 문제가 확산된 것처럼 핵문제를 비롯해 수많은 사회문제가 인류 전체의 문제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작가 엠마뉘엘 르파주 | 이상훈 선임기자 국가가 진실을 감췄다는 점 외에 인간이 만든 재앙으로 인간의 삶을 앗아간 사건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체르노빌에 가기 전 그곳이 온통 잿빛의 음울한 곳일 거라는 막연한 짐작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서 본 봄의 풍경은 작품에서도 표현한 것처럼 생명력 넘치는 자연의 모습 그대로였다. 정말 놀라웠다. 다만 그런 아름다운 모습과 달리 높은 방사능 수치 때문에 인간은 겉으로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세월호 사고 같은 경우도 역시 결국은 인간이 스스로를 땅에서, 삶의 공간에서 추방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다.” 작품에서는 그런 재앙 이후에도 삶을 이어가려는 사람들의 생명력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동이 멈춘 발전소 건물이나 금지구역의 시가지 건물은 흑백 톤의 직선을 써서 죽어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면, 사람이 살고 있는 공간은 부드러운 곡선에 따뜻한 색조를 써서 대비시켰다. 죽음의 공간이라는 그곳에서도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는 걸 말하려고 표현기법을 달리한 것이다. 이곳(세월호 농성장)에서도 은폐된 진실 때문에 죽어가기는커녕 오히려 진실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생명력이 넘치는 광경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여러 작품을 통해 국제적 차원의 문제에서 그 중심에 선 예술가로 참여해 오는 동안 어떤 목표가 있었나. “어려운 질문인데, 우선 나의 창작이 단순한 메시지 전달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밤중에 화살 쏘기’란 프랑스 속담처럼 쏜 화살을 어디서 찾을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내 작품이 불러올 결과가 어떤 것일지도 내다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예상 못한 놀라운 결과를 만난다. 이번에 한국에 오게 된 것, 세월호 농성장까지 와서 투쟁하는 사람들과 연결된 것 모두가 그렇다. 체르노빌도, 세월호도 하나의 특수한 사건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내고 서로 떨어져 있는 이들을 연결시키는 것을 경험했다.” 체르노빌에서 경험한 현지 주민들의 삶이 세월호 유족을 포함한 한국인들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 “서로를 갈라놓는 차이보다 서로를 연결해주는 공통분모와 연대감이 더 중요하다. 체르노빌에도 비극과 불행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소와 행복도 있었다. 우리가 친밀감과 연대감을 느끼는 것은 누군가의 불행이나 행복을 나와 가깝게 공감하는 데서 온다. 진정한 인간성이란 삶의 모든 모습들을 함께 추구하는 싸움 안에 자리 잡고 있다. ‘팔을 떨어뜨리지 말라’는 표현이 있다. 포기하지 말고 힘을 내라는 뜻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는데 이 기회에 오히려 한국의 사회문제들이 그저 잊히지 않고 새롭게 관심을 일깨울 수도 있을 것이다.”
표지 이야기인터뷰
[세계]사원 단식농성장서 릴레이 삭발시위(2008. 04. 16)
2008. 04. 16 국제
티베트 망명정부 있는 북인도 다람살라 현지 리포트… 매일밤 수천 명 기도문 외우며 촛불행진도 티베트 사태에 대해 항의하며 삭발 시위를 하고 있는 티베트인과 외국 관광객들.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북인도 다람살라는 평온을 되찾았다. 3월 10일부터 시작해 보름 정도 지속되었던 대규모 시위는 줄어들었다. 외국인 관광객이 예전처럼 줄을 잇고 있고 상가와 식당도 활기 있어 보인다. 소요 사태를 염려해서 우리 정부는 한동안 다람살라를 여행 자제지역으로 선정했다. 대사관에서는 현지 교민들에게 일일이 전화하여 시위에 동참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다람살라에서 세계인들이 걱정할 만한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의 절인 남걀 사원 근처에는 아직도 티베트인들의 분노가 남아 있다. 중국 당국의 발포로 희생당한 사람들의 모습이 걸려 있고 매일매일 게시판에 소식이 전해진다. 사원 앞에 마련된 천막 안에서 다람살라의 스님들과 티베트인 200여 명이 돌아가며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촛불시위대 많을 때는 6000명 달해 사태 이후 매일 희생자를 위한 기도회가 열리고 있다. 아침 8시면 다람살라의 모든 스님이 남걀 사원에 모이고 기도는 오후 3시 30분까지 계속된다. 기도가 진행되는 중앙법당 밖에서는 티베트인들이 절을 하거나 함께 기도한다. 간간히 외국인 여행객도 동참하여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만약 있을지도 모를 테러를 막기 위해 절 주변은 철저한 경비가 이뤄지고 있었다. 인도 남걀사원의 촛불집회. 오후 5시 30분. 거리의 티베트인 상가가 분주히 문을 닫기 시작한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과 스님까지 버스 정류장 근처 시장거리로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6시 30분부터 촛불을 들고 남걀 사원까지 행진한다. 구호는 없다. 모든 생명에게 행복이 깃들기를 바라는 기도문을 외울 뿐이다. 손마다 티베트 국기를 들거나 몸에 두른 모습에서 독립을 원하는 무언의 절규가 살아 있다. 평소 2000명 남짓한 시위대는 많을 경우 5000명이나 6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주말에는 티베트 학교(TCV) 고학년생들이 촛불 행진과 함께 철야기도를 하고 있다. 사원광장에 도착한 촛불 시위자들은 희생자를 위해 묵념을 하고 그날 전해진 소식을 듣고 해산한다. 특별한 날에는 대형 화면으로 티베트의 현지 상황이나 기타 중요한 장면을 상영하고 있었다. 지난 3월 29일 달라이 라마는 델리에서 돌아오는 길에 남걀 사원 앞에서 잠시 차를 세웠다. 절 앞에 걸려 있는 희생자들의 얼굴을 일일이 살펴보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단식 농성자들과 함께 기도문을 외우고는 돌아갔다. 그날 이후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인들에게 과격한 시위를 자제할 것을 촉구했다. 델리에서 달라이 라마와 인도 총리가 비공식 회견을 했으리라는 확인되지 않은 관측이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지난해부터 급속히 밀착되고 있는 인도·중국 관계를 고려하여 시위를 막아달라는 인도 정부의 강력한 요청을 받았다는 것이다. 본토 가족에 불이익 미칠까 노심초사 4월 6일 남걀 사원 법당에 달라이 라마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한 시간 반가량 승려들과 함께 희생자를 위해 기도했다. 이후 달라이 라마는 내·외신 기자들 앞에서 성명서를 발표했다. 3월 28일 중국과 세계를 향해 발표한 메시지와는 달리 티베트 본토의 티베트인을 향한 내용이었다. 그는 느리고 강한 티베트말로 성명서를 낭독했다. 눈여겨볼 만한 내용은 베이징 올림픽이 잘 치러지기를 바라며 티베트인들은 어떠한 방해도 하지 말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이는 올림픽 보이콧을 주장하는 티베트인 대부분의 바람과는 상반되는 내용이다. 망명 티베트인의 정치 잡지 ‘티베트 자유포럼’의 발행자 남라는 이 점에 대해 의견을 밝혔다.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 중도노선은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 주장의 정당성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점에 동감합니다. 하지만 올림픽 보이콧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공감하지 않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종교 지도자이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티베트 독립은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적극적인 대응 수단을 가져야 하고 올림픽 거부와 중국 상품 불매운동도 충분히 비폭력 노선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다람살라의 시위가 조용해진 이면에는 중국 정부가 외부와의 통신을 철저히 차단하여 티베트 내의 새로운 시위 소식이 흘러나오지 않는 점도 한몫을 한다. 중국 정부는 사태 초기 인터넷과 전화를 통해 현장 소식이 외부로 전해지고 나서 세계 여론이 악화되고 티베트인의 감정을 자극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더 이상 생생한 현지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는다. 티베트 본토에 가족을 두고 있는 망명자들은 혹시라도 불이익이 닥칠까 봐 걱정하는 분위기다. 다람살라의 까둡 체랑은 가족과 통화한 내용을 이렇게 설명했다. “전화가 잘 연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 공안에서 외부와의 전화 내용을 모두 보고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어쩌다 통화가 돼도 현지 소식을 직접 물어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그쪽 날씨가 어떠냐?’ 이렇게 물어보면 ‘구름이 많이 끼었다가 강풍이 불어서 다 사라졌어.’ 이렇게 대답합니다. 시위를 준비하다 강력한 단속에 무산됐다는 뜻입니다. 중국 공안에 통화 내용을 보고해도 날씨를 물었다고 이야기하면 되니까 그렇게 대충 알아듣는 식으로 대화합니다.” 사태가 일어난 지 한 달이 가까워지고 소강 상태에 접어들자 관심을 불러일으킬 새로운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남걀 사원 단식농성장 앞에서 매일 수십 명의 티베트인이 삭발 시위에 나서고 있다. 그 중에는 외국인 관광객도 동참하고 있었다. 타이완에서 온 여자 관광객 등자오려는 즉석에서 서명하고 머리를 깎으며 내내 울었다. “타이완 본토인도 티베트인과 같은 억압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잊혀진다면 세상의 희망도 사라질 것입니다. 머리카락은 다시 자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티베트와 타이완의 슬픔은 되풀이되어선 안 됩니다.” 4월 9일 델리에서 승려를 포함한 200명의 티베트인이 약 1000㎞ 떨어진 보드가야까지 50일간의 평화 행진을 시작했다. 출정식을 행할 때 인도 힌두교 지도자 스와미 아그니비수는 현장을 방문해 일행에게 일일이 축복을 내려주고 함께 구호를 외쳤다. 현지 인도인 티베트인 주장에 냉담 그러나 현지 인도인들은 티베트 망명자의 주장에 냉담한 분위기다. 최근 중국과 진행되고 있는 경제·군사적 협력에 방해가 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인도에 거주하는 200만 명의 티베트인은 라싸 봉기 한 달째인 4월 10일 인도 각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뭄바이에서 남인도 각지의 승려 3000여 명이 모여 3일 동안 단식과 시위를 벌였다. 델리에서도 2만여 명의 티베트인이 단식과 항의 농성을 했다. 인도 행정부 인근의 델리 잔따르만따르 공원 근처에서 집회가 시작되자 인도 경찰은 서둘러 저지선을 치고 시위 진압경찰을 투입해 현장을 통제했다. 한 달 전쯤 시위대가 중국 대사관에 몰려가 페인트를 투척하고 유리창을 깨며 격렬한 시위를 벌인 후 티베트 시위대는 요주의 대상이 되었다. 인도 각지에서 모인 시위대는 연좌농성장인 대규모 천막 앞 6차선 도로를 가득 메우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티베트에서 살육을 중단하라’ ‘후진타오는 물러나라’ ‘인도와 국제 사회는 티베트를 도와달라’는 주장을 반복해서 외쳤다. 베이징 올림픽의 성화가 지나가는 지구촌 곳곳에서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올림픽 성공을 기원한다는 달라이 라마의 바람과는 달리 소란은 계속될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인들에게 이번 사태에 대해 “무력감을 금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 무력감을 안고 라싸 봉기 한 달째가 되는 날인 4월 10일 일본을 거쳐 미국 순방길에 나섰다. 이미 오래전에 정해진 미국의 대중강연을 강행하기로 한 것이다. 고국의 백성들이 흘리는 피와 눈물 속에서도 세상 사람들에게 삶의 평화와 지혜를 이야기해야 하는 달라이 라마의 고뇌가 그 속에 있다. 망명정부 다와 체링 외교협력부 장관 “티베트 문화를 인정하고 종교의 자유를 달라” 티베트 망명정부 외교협력부 다와 체링 장관. 티베트 망명정부는 현재 외부 언론과 접촉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 사태가 있은 후 달라이 라마는 인도 정부와 인터뷰를 제외하고 두 차례 메시지 발표만 했을 뿐이다. 세상에 전해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불필요한 오해나 혼선을 빚게 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뿐 아니라 내각 수반인 삼동 린포체도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티베트 망명정부 외교협력부 다와 체링 장관으로부터 공식 입장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망명정부 안의 대표적인 중국통이다. 중국과의 실질적인 협상 창구이며 이번 사태를 계기로 차기 타이완 대표부 대사로 내정되었다. 과거 중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12년 형을 선고받고 6년 동안 수감생활을 한 후 망명했다. 그에게 이번 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을 물었다. “독립을 요구하는 티베트의 시위는 늘 있어 왔습니다. 새로운 일은 아닙니다. 다만 올림픽을 앞두고 중국 정부에서 과도한 무력진압으로 인명 살상을 낳은 것이 사태가 커진 계기입니다. 라싸 시위 이후 암도 지방에서 중국 군경이 절에 들이닥쳐 승려들의 방을 수색하여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찾아냈습니다. 그 중 한 분은 절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존경받는 스님인데 사진을 빼앗아 찢으려 하자 몸으로 막았습니다. 구타와 폭력 끝에 두 명의 승려가 사망하자 그 지역 절을 중심으로 티베트인의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지금 티베트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티베트 망명정부의 요구에 대해서 묻자 침통한 대답이 이어졌다. “우리는 공식적으로 완전한 독립 요구를 접었습니다. 단지 티베트 언어를 지키고 문화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특히 종교의 자유를 바라고 있습니다. 티베트는 전통적인 불교 국가입니다. 종교교육도 제한된 채 외형적인 명맥만 지키라고 강요합니다. 종교적인 믿음 속에서 평화롭게 살겠다는 희망은 결코 폭력적이거나 중국을 위협하는 요구가 아닐 것입니다.” 이번 사태의 전망에 대해 물었다. “쉽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중국 정부는 대화를 공언하지만 실질적인 창구는 봉쇄하고 있습니다. 대외적으로 사실을 왜곡하며 망명정부를 압박할 것입니다. 티베트인들의 요구에 대해 무차별적인 진압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절망하지 않고 비폭력과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할 것입니다. 티베트인들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람살라(인도) | 김천 mindtemple@gmail.com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