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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목 내시경]정릉동-북한산 아래 재개발 아파트·달동네 공존(2021. 02. 19 14:41)
- 2021. 02. 19 14:41 사회
- 북악 능선의 북쪽 사면을 따라 흘러내린 곳에 정릉이 있다. 정릉은 조선을 연 태조 이성계의 둘째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다. 본디 지금의 덕수궁 주변에 있었다고 하는데 태조가 죽자 태종은 능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정릉 울타리를 둘러싸고 오래된 집들이 골목을 이룬다. 조선 태조의 둘째 왕비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을 중심으로 골목이 이어진다. 정릉은 북악산길을 따라가다가 교수단지 마을을 지나는 샛길로 내려오던가, 아리랑고갯길에서 갈라져 들어갈 수 있다. 정릉으로 가는 골목은 아리랑시장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과거의 영화는 어떠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동네 식당들이 이어진 흔한 식당 골목이다. 골목은 꽤 넓고 인근 아파트 주민들의 통로가 되고 있으나 팬더믹 사태로 풀 죽은 모습이 역력했다. 북악의 완만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비탈길을 거슬러 오르면 정릉 출입문이 보인다. 정릉을 둘러보려면 입장료 1000원을 내야 한다. 그래도 제법 많은 이들이 느린 걸음으로 능 유람을 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직후 피란민들 몰려들어 정릉은 동네 가운데 있어 평일에도 유람객들이 많이 찾는다. 정릉과 잇대어 교수단지라는 이름의 주택가 골목이 이어진다. 정릉의 묘역이던 곳이 1965년부터 민간에 매각되기 시작했고, 이곳을 서울대학교 교직원들이 주택단지를 만들어 교수단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예나 지금이나 땅과 집을 둘러싼 다툼은 여전해 몰래 땅을 팔아넘겼다는 송사가 붙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지금처럼 주택가의 꼴을 갖추었다. 골목 안 집들은 잘 지은 양옥들이나 벌써 반세기 정도 세월이 지나 낡은 모습으로 쇠락은 피할 수 없었다. 골목은 좁고 오가는 이들의 걸음은 느리다. 정릉을 에워싸고 있는 서울 정릉동은 넓은 지역이다. 북악 능선과 북한산 능선이 만나는 정릉천을 건너서도 골목길이 펼쳐져 있다. 일제강점기 돈암동의 근대한옥단지 개발로 주택가가 정릉 부근까지 밀려왔지만, 산자락 대부분은 남아 있다. 정릉 골짜기 일대가 지금처럼 주택가로 들어선 것은 한국전쟁 직후. 정릉 토박이 노인은 “자고 나면 피란민들, 특히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 골짜기 골짜기에 판잣집을 지었다. 아주 새까맣게 몰려들었다”고 말한다. 비탈 사이로 질서 없이 골목길이 생기고 집들이 들어섰다. 비교적 최근에는 산을 끼고 있는 입지와 상대적으로 저렴한 땅값에 힘입어 정릉동 일대 곳곳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자고 나면 재개발이 시작됐고, 해가 지나면 높게 아파트가 올라갔다. 그래도 능선 자락 곳곳에는 여전히 낡은 블록집들이 버티고 있다. 비탈 계단을 오르던 노인은 “잊을 만하면 재개발하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조합도 만들고 서명도 받고 다닌다. 그런데 사정이 좀 복잡하다. 국유지에 무허가로 앉아 있는 집들도 많고 건축 규제로 걸린 땅도 많아 더 이상 재개발은 힘들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도 큰돈의 유혹에 사람들은 무모함을 멈추지 않는다. 정릉 능역 일부를 불하받아 만든 교수단지가 있다. 정릉에서 내부순환로가 지나는 정릉로를 건너면 북한산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 정릉동의 오래된 골목이 있다. 산으로 뻗은 외길이라 길 끝에 시내버스 종점이 2곳이나 있는 외진 곳이었지만 삼양동으로 가는 터널이 뚫리면서 길음동과 미아동 일대의 아파트단지로 길이 이어지자 늘 차가 밀리는 번잡한 곳이 됐다. 마을이 자리 잡고 앉은 곳이 온통 능선과 구릉으로 주름진 곳이라 대부분의 골목은 가파르고 길들은 구부러졌다. 정릉우체국 근처가 시장통이라 붐볐으나 지금은 청수장으로 이어지는 큰길가에 간간이 마트들이 있어 장터거리의 분위기는 벗어났다. 우체국 뒤편 골목길은 한낮에도 한가한 모습이다. 80년대 이후 들어선 연립주택과 다세대주택들이 대부분이고, 최근 지은 공동주택들도 눈에 띈다. 골목은 멈춘 듯 보이지만 끊임없이 변해간다. 시장에서 장을 보고 무겁게 오르던 길은 택배 차량과 대형마트 배달 트럭이 오가며 찬거리를 내려놓고 있었다. 편해진 만큼 골목 안 사람들의 왕래도 줄어들었다. 골목엔 청년을 위한 공동주택도 있다. 청년 창업자를 위한 공동주택 골목 안에 꽤 독특한 이름의 공동주택이 보였다. ‘지금 도전숙(宿) 하하하’ 거창하게 ‘생각하다 도전하다 시작하다’라 쓰여 있는 공동주택은 청년 창업자를 위한 임대주택이라고 한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주거공간을 제공해 젊은이들이 창업과 생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데, 도전숙이란 이름은 어떤 연유로 지은 것일지 궁금했다. 그래도 이 오래된 마을의 골목 안에 현실에 도전하는 젊은이들이 오가는 모습은 좋은 풍경을 만들 것이다. 하지만 한낮의 골목은 적막했다. 골목을 거슬러 올라간 능선에서 북한산 전체와 남으로 북악 능선 그리고 그 비탈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의 집과 길이 한눈에 보였다. 오래된 집들과 새로 세운 아파트.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은 아름답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나 힘겨운 지옥을 만들고 있는지 지켜볼 수 있다. 박경리 가옥 가는 골목 골목 안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어김없이 주차된 차들이 버티고 있다. 비번인 듯 개인택시도 몇대 보였다. 오래된 골목의 불편함이 드러나 보인다. 새로 지은 공동주택은 1층 주차공간에 일터로 나간 이들의 빈자리가 보였다. 오래된 연립주택 앞에서 지적도를 펼치고 대화를 하는 이들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헐고 새로 지으라는 업자와 집주인 같았는데 표정은 진지하고 심각했다. 청수장을 향해 가다가 봉국사를 지나 정릉천을 건너면 안내판 하나가 눈에 띈다. 간판은 서쪽 능선 골목길을 향해 있고 ‘박경리 가옥’이란 이름이 영어로, 한자로, 일본어로 적혔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 원주로 가기 전까지 살던 집이 이곳에 있단다. 1965년부터 1980년까지 살았다고 하니 그의 작품 중 굵직한 것들을 엮어낸 산실이다. 골목 안 어느 집이 그의 집인지 도저히 알 수 없어 행인에게 묻자 손가락으로 알려준다. 박경리 선생을 골목에서 자주 만났다는 그는 “다 고치고 지금 그때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터만 남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라고 아쉬워했다. 불탄 채 방치된 양옥집과 경로당 사이에 대가의 집은 알맹이가 빠져나간 이름만으로 남아 있다. 완만한 비탈을 오르니 담벼락에 정릉 생명평화마을이라 쓰여 있다. 벽화의 흔적도 있는데 페인트칠은 벗겨졌고, 더러는 흉한 얼룩만을 남기고 있었다. 군데군데 남은 벽 그림들은 이곳을 스쳐 간 젊은 예술가들의 자취이다. 이곳에 사는 예술가들의 모습은 신문과 방송에도 여러 차례 소개된 바 있다. 가난이 별로 불편하지 않은 이들에게 이곳은 도시의 숨통이 됐다. 아직 달동네로 남아 있는 정릉 생명평화마을 골목 안 전봇대엔 간간이 월세며 전세 안내문이 붙어 있다. 서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싼 가격이다. 자본주의 세상이라 가격만으로도 시설이며 모습 따위를 짐작할 수 있다. 긴 가스통을 짊어진 배달부가 숨을 허덕거리며 비탈을 오르고 있었다. 구경꾼에게 뭘 살펴보냐고 묻던 노인은 “저 위로는 아직도 연탄 때는 집들이 있고, 아래로는 기름보일러로 고친 집도 있다. 방 두세칸짜리 마당 있는 집도 월세 20만~30만원이면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조금의 불편함을 감수하면 이 도시 어디서도 보기 힘든 싼값의 방이 그곳에 있다. 이제는 몇 남지 않은 서울의 달동네 중 가장 날 것의 모습이 이곳에 남아 있다. 옛 청수장 터는 국립공원 관리소로 북한산 아래 정릉 일대의 길과 골목은 모두 정릉천과 닿아 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모여 흐르는 곳을 따라 물길이 생기는 법이다. 예전 정릉천은 생활하수가 뒤섞여 차마 보지 못할 험한 꼴이었으나 지금은 하수관이 따로 정비돼 늘 맑은 물이 흘러내린다. 사람들은 정릉천을 따라 북한산으로 오르거나 아니면 반대쪽 행로로 즐겨 걷는다. 천변에는 잘 정비된 길이 있고, 개천을 건너는 다리도 여럿 보인다. 정릉천을 따라가던 길이 끝나는 곳부터 북한산국립공원이 시작되는데, 그곳이 정릉 마을의 또 다른 상징인 청수장이 있던 곳이다. 정릉을 기억하는 이들은 대부분 청수장이란 명칭 또한 기억할 것이다. 말 그대로 물 맑은 곳에 있던 유원지 요정이었다. 청수장이 없어진 후에도 북한산으로 가는 길 입구에는 닭백숙집이며 고깃집들이 즐비했다. 청수장이 있던 터는 국립공원 안내소가 됐다. 지금 그 이름을 가진 고깃집이 길 아래 끝자락에 있다. 이 일대 골목 곳곳에서 종교시설을 자주 만나게 된다. 크고 작은 교회들은 여느 마을과 마찬가지로 흩어져 있다. 가끔 가톨릭 수도사들의 수도원이나 수녀원이 골목에 숨어 있는 모습도 본다. 산 넘어 성북동 일대부터 정릉 골목 안까지 유난히 수도원이 많았다. 신덕왕후의 천도재를 지냈고 정릉을 지키는 사찰로 흥천사가 정릉 위 북악 능선에 있고, 정릉천 위 극락교 건너 경국사가 있다. 그런 큰절 외에도 골목의 끝자락 산과 붙은 곳에는 어김없이 작은 절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아마도 서울에서도 외진 곳에 산과 붙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을 주민 말로는 지금은 대부분 문을 닫거나 줄었다는데, 무당의 신당도 골목골목 많았다고 한다. 특히 국민대학교로 넘어가는 쪽으로 기가 세서 굿당이 많았다고 들려주었다. 그 흔적이 몇 군데 남아 북한산 자락을 끼고 골목 끝자락에서 인간 세상과 신들의 세상을 이어주는 굿당이 있었다. 정릉을 걷다 보면 도심과 떨어진 고요함과 산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세상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워도 거대한 산은 움직이지 않고 자리를 지킨다. 그 자락에 이리저리 얽힌 골목길은 세상사에 무심한 듯 조용하다. 정릉으로 향하는 골목 길가에는 고목이 된 버드나무 한그루가 버티고 섰다. 나무는 주변 건물에도 기죽지 않고 높이 가지를 뻗어 올려 당당한 기세를 펼치고 있었다. 버드나무는 그 특성이 입춘 지나면 곧바로 싹을 틔워 가장 먼저 봄을 알린다고 했다. 나무 아래서는 볼 수 없었지만 아마도 가장 높은 가지 끝에는 햇살이 내려앉아 쉬며 싹을 재촉하고 있을 것이다. 가지 끝 새로 뻗은 하얀 새 가지를 보니 곧 봄이 오겠거니 기대할 수 있다. 이제 곧 봄이 오면 조금 더 나은 날이 올 것이다.
- 골목 내시경
- [골목 내시경]금호동 골목-지금은 사라진 달동네의 희미한 그림자(2021. 01. 29 17:09)
- 2021. 01. 29 17:09 사회
- 매봉산과 대현산, 응봉산은 모두 서울 성동구 금호동을 감싸고 있는 산이다. 매봉산 능선의 서쪽으로 북악까지 서울 강북의 대부분이 내려다보이고, 남쪽으로 한강과 그 건너 강남 일대가 한눈에 보인다. 금호동은 산과 비탈을 깔고 앉은 동네이다. 1990년대 인기 드라마 「서울의 달」 무대가 금호동 골목이다. 금호동의 옛 이름은 무수말이고, 무쇠 마을이란 뜻이거나 물가 마을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한자로는 수철리(水鐵里)인데 그 또한 비슷한 뜻이다. 금호동의 남쪽 기슭이 한강과 연이어 있고, 한때 대장간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지금의 금호동은 다리 건너 강남이 가까우며 지척에 서울 시내가 있어 꽤 매력적인 주거지로 주목받는다. 그런 입지에 힘입어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금호동의 주인이 됐다. 아파트가 있는 자리는 대개 블록집들이 어지럽던 비탈진 마을이었다. 금호동은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 중 한곳이었는데, 지금 그 자취는 찾아보기 어렵다. 예전 모습 그대로 간직한 골목도 금호동 재개발 사업은 하늘과 가까운 구역부터 진행됐다. 덕분에 능선을 따라 전망 좋은 위치는 모두 아파트단지 차지가 됐다. 금남시장을 중심으로 가파른 골목은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60년 동안 자리를 옮기지 않고 있다는 골목 안 부동산업체 주인은 “이 동네는 하나도 안 변했다. 건너편 산자락에는 무허가 집들이 많았지만, 이쪽으로는 예전에도 기와집이 많았다. 골목도 집들도 별로 변한 게 없다”고 했다. 골목 안엔 군데군데 공영재개발에 대한 안내문이 붙어 있다. 그러나 수십년 동안 재개발로 골목골목 사람들의 마음과 욕심이 쑥대밭이 된 터라 골목마다 재개발 추진에 대한 벽보가 붙어 있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다. 재개발이 되긴 하냐는 질문에 한 주민은 “작년에 한바탕 난리를 쳤는데 별 진전이 없다. 올 3월이 지나서야 결론 난다는 소리는 들었다. 가망성은 없어 보인다”고 했다. 주민들 분위기도 하자는 쪽과 말자는 편이 반반이라고 했다. 일이 없어서 부동산에 놀러 와 하루를 보낸다는 한 주민은 “공공 재개발 쪽으로 추진한다는 데 돼야 하는 것 아니겠냐”고 했다. 그는 목포에서 일을 찾아 서울로 와서 금호동에 눌러앉은 지 5년이 됐다는데, 요즘이야말로 최악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비탈에 채소밭이 대부분이었던 금호동에 사람들이 몰려든 것은 해방 직후의 일이다. 일제에 징용으로 끌려가 전쟁 재난을 입었던 사람들이 돌아와 정착했던 전재민 마을이 금호동에 있었다. 백범 김구 선생은 당시 서울 시내 곳곳에 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모친과 장남 장례식에 들어온 조의금을 기부했는데, 1949년에 그 일부로 금호동 전재민 마을에 그들을 위한 주택과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백범학원을 지었다고 한다. 김구 선생이 어렵고 힘든 동포를 아꼈던 마음이 전해진다. 아마도 금남시장 근처 골목 안에 집과 학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택과 학교는 한국전쟁 중에 사라졌고 지금은 낡은 사진과 금호동 길가 기념비 속에만 그 흔적이 남아 있다. 40년 된 서점은 금호동의 명소이다. 금남시장 뒤편 골목 안 주민쉼터 벽에는 금호동의 오래전 사진들이 붙어 있다. 산비탈을 가득 메운 판잣집과 길과 집과 개천이 얼기설기 뒤엉킨 모습을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1990년대 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드라마 <서울의 달>은 금호동과 옥수동 달동네가 무대였다. 드라마 속 좁은 골목과 구멍가게들, 단칸방에 세 들어 살던 이들의 이야기는 지금 보아도 슬프고 재미있다. 사라진 것에 대한 향수 때문인지 유튜브에 올려 둔 <서울의 달>은 조회수가 많다. 집들은 달라졌고 사람들의 삶은 변했지만, 일과 밥과 꿈을 찾아 헤매는 모습은 지금이나 그때나 같기 때문일 것이다. 주민쉼터 벽에 기대서 담배를 피우던 중년의 사내는 “이 골목에 살던 사람들은 다 그대로다. 위쪽에 아파트 들어서면서 떠난 사람들 말고 여기 사람들은 그대로 머물러 살고 있다”고 했다. 버스정류소에서 골목으로 이어지는 샛골목마다 낮에 굳게 문을 닫은 주점이 야릇한 간판을 내걸고 있고, 여인숙을 닮은 낡은 여관들엔 ‘달방 있습니다’라는 푯말을 붙여 놓았다. 아무래도 골목 주점과 여관의 모습은 <서울의 달> 속 모습 그대로인 듯싶다. 비탈길은 모두 아파트단지로 이어진다. 현재도 드라마 <서울의 달> 속 모습 금호동엔 아주 오래된 동네 서점이 남아 있다. 도원문고. 주인장은 “서점 문을 연 지 올해 딱 40주년이 됐다”고 한다. 상가 건물 안 지하에 자리 잡은 책방은 크지는 않았지만, 구색은 갖추고 있고 계산대 옆엔 나름 시류에 맞는 책들이 꽂혀 있다. 학생 하나가 급히 들어와 참고서를 집어 들어 계산을 마치고 바삐 나갔다. 연초라 그런 듯 토정비결과 일력 그리고 수많은 참고서가 서점을 점령하고 있다. 책방 하느라 집 여러채 날려 먹었다는 주인은 “동네서점은 청소년들이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전초기지다.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공간 그 이상”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것이 이문도 박한 서점을 40년째 운영하는 이유라고 했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전국에 수천개 있던 서점들이 이제는 800에서 1000곳 정도만 남아 있다고 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결론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곳 말고도 금호동 비탈진 골목엔 별난 서점 하나가 숨어 있다. 클래식 책방이란 이름의 서점은 ‘여성의 이야기가 고전이 되는 책방’이란 깃발을 내걸었다. 페미니즘 전문 서점이라는데 뜨문뜨문 문을 연다. 주말서점이라고 하나 대부분 일요일에, 그것도 오후 잠깐 문을 열 뿐이다. 주인은 평일에는 직장생활하고 일요일 오후에나 나와 문을 열고 일을 본다. 금호동 골목길엔 구역을 따라 동호로길 또는 독서당길, 금호산길과 무수막길 등의 이름이 붙어 있다. 그중 독서당길은 금호동을 관통하는 큰길이다. 세종대왕이 신하들이 경치 구경으로 머리도 식히면서 책을 읽으라는 뜻으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을 지었다고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금호동에서 강남을 바라보는 풍광은 손에 꼽을 만큼 아름답다. 독서당 건물은 사라졌어도 길 위에 그 이름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금호동의 옛모습은 주민쉼터 벽에 오래된 사진으로 붙어 있다. 금호동 사람들이 움직이는 중심지는 지하철 3호선 금호역과 5호선 신금호역이다. 역을 나서면 비탈 위 아파트단지로 이어지는 마을버스가 줄지어 서 있다. 대부분의 마을버스는 역에서 출발해 단지마다 사람을 내려주고 다시 태워 역으로 돌아온다. 역을 중심으로 중소규모 마트들도 있어 장을 보고 바로 귀가할 수 있다. 시간에 여유가 있는 이들은 독서당길을 잠시 걸어 내려와 금남시장으로 향한다. 금남시장이 있는 금호삼거리 일대는 그야말로 금호동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다. 금호삼거리 근처에 병원과 학원, 마트와 상가들이 몰려 있다. 김이 솟는 만두와 찐빵 가게, 옷가게와 미용실도 수십년의 관록을 자랑한다. 금남시장에서 익숙하게 동태를 토막 치는 노인은 나이 80이 다 됐단다. 그는 50년 가까이 시장 길목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등은 굽었지만 눈빛은 아직 매섭고 칼을 다루는 손길은 녹슬지 않았다. 금남시장은 1949년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전재민 마을이 들어설 때 시장도 함께 문을 연 것이다. 당시 장사하던 이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그들의 다음다음 세대가 전을 열고 있다. 만둣집 할머니는 솥을 쌓으면서 “시장 규모가 예전보다 반의반이 줄어들었다”고 했다. 금남시장도 대부분 전통시장의 운명처럼 기울어 가는 모습을 감추기 어려웠다. 코로나19 팬데믹 사태에 그 기울기가 더 가팔라지고 버티기 힘들어진 모습이 역력하다. 큰길 가 가게들은 그나마 행인의 발길을 붙잡아 두지만, 시장 안 가게들은 대부분 한가했다. 그나마 아파트로 이어진 길목 반찬가게들은 활짝 문을 열어두었다. 반찬가게 주인은 “젊은 층에 맞는 반찬 만들어 내놓고, 전보다 싼 값으로 판다. 장 봐 가는 사람보다 그냥 만들어 놓은 반찬을 사가는 이들이 많아졌다”고 했다. 금남시장은 금호동의 오래된 역사이다. 손님 따라 가게 주인들도 연령대가 낮아졌다. 시장 안에는 젊은 취향의 가게들도 많아졌다. 간식 가게 주인은 배달통을 들고 나서며 “이제는 배달 앱으로 주문도 받고 배달도 한다. 이 사태가 좀 더 계속되면 아무도 못 버틸 것”이라고 했다. 그는 문을 닫자니 살길이 없고 문을 열면 적자는 계속 쌓여 막막하다는 심사를 털어놓는다. 기름집 주인은 더 격하게 말을 보탰다. “사람들은 층층이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다. 바닥에선 이렇게 비명을 지르는데 저 위층에선 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다. 세상이 벽처럼 느껴지고 오늘 하루는 또 어찌 버텨야 할지 캄캄하다”는 것이다. 금남시장 뒷길엔 ‘행복길 사랑길 골목길’이란 문구가 붙어 있으나 사랑도 먹을거리가 있어야 하고 궁핍 끝에 행복이 있을 리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출장 채비를 하는 수도 설비 업체 사장을 보며 시장 상인이 “저 사람만 요즘 신이 났다”고 했다. 금호동이 지대가 높고 노후한 주택들이 많아 요즘 같은 추위에 수도가 얼어붙는 집이 많기 때문이란다. 오토바이에 장비를 챙기면서 사내는 “돈 벌어서 좋긴 하지만 수도가 얼면 마음이 짠하다”고 했다. 메뚜기도 한철이라 겨울 지나 봄이 걱정이라고 했다. 그를 거들던 중년의 사내는 “하도급 공사 일을 주로 하는데 요즘 관공서에서 나오는 일은 모두 끊겼다. 코로나19 때문인지 아무 발주도 나오지 않는다. 작년 한 해가 그랬는데, 올해는 또 어떨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뱉는다. 이 골목 안 사람들의 마음도 얼어붙고 시름은 깊어간다. 이름에는 지나간 시절의 사연이 남아 있다. 독서당이 있었거나, 대장장이들의 마을이었거나, 물가에 살던 이들의 터전이었던 흔적은 금호동이란 이름에 깃들어 있다. 다만 그것들은 지금 찾아보기 어렵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발자국이 구부러진 골목에 남아 있다. 사람들이 지나간 자취가 길에 남으니 이 마을 골목의 좁고 어지러운 모습에서 지금은 사라진 서울 달동네의 희미한 그림자를 엿볼 따름이다. 오늘 우리가 걷는 행로가 또 다른 길을 만들 것이다. 질병으로 어렵고 힘겨운 시절에 오늘은 또 어떤 걸음을 내디딜 것인지, 그 걸음이 어떻게 앞길을 만들어 갈 것인지 금호동에 푯말로 남은 백범주택이나 학교의 흔적에서 실마리를 찾게 된다. 금호동 골목길은 여러모로 흥미롭고 곡절이 많다.
- 골목 내시경
- 도시재생사업이 달동네 살릴까(2019. 11. 18 14:56)
- 2019. 11. 18 14:56 경제
- ㆍ도시재생 전문업체 ‘익선다다’ 대전 소제동 되살리기 프로젝트 진행 대전역 동쪽 광장과 맞붙은 소제동은 대전의 마지막 달동네다. 산과 언덕은 없지만 길이 좁고 구불구불한데다 낡은 집이 모여 있어 달동네라는 별명이 붙었다. 처음부터 달동네는 아니었다. 1920년대 철도원을 위한 관사촌이 들어서면서 소제동은 오랜 기간 부자가 많이 사는 ‘부촌’으로 불렸다. 빈집이 즐비한 대전 소제동 골목길. 길 한가운데 고양이가 앉아 있다. / 반기웅 기자 대전 주변에 신도시가 생기면서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다른 지역 원도심처럼 소제동에는 떠나지 못한 사람들만 남았다. 낡고 조용한 동네였던 소제동은 2009년 재개발 사업 바람이 불면서 완전히 슬럼화됐다. 대전시는 2009년에 소제동 일대를 역세권 재정비 촉진지구로 지정했는데 재개발 소문은 그 전에 돌았다. 개발 시세차익을 노린 외지인이 집들을 마구잡이로 사들였고, 손바뀜을 거친 뒤 소제동 내 주택은 절반 가까이 빈집이 됐다. 집에 개·보수 비용을 들이기 싫은 주인들이 세입자를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재개발 사업은 10년 동안 지연됐다. 그 사이 소제동은 폐가가 넘치는 유령마을로 변했다. 건물 30곳 매입 카페·레스토랑 열어 2017년 죽은 마을 소제동을 되살리는 ‘재생’ 사업이 시작됐다. 사업의 주체는 종로 ‘익선동 프로젝트’로 이름을 알린 서울의 도시재생 전문업체 ‘익선다다’다. 이들은 소제동 일대 건물 30채를 매입했고, 이 가운데 10곳에 카페와 레스토랑을 열었다. 내년까지 20개 이상 매장을 열 계획이다. ‘핫플레이스’를 만들어 상권 활성화를 통해 소제동을 살린다는 구상이다. 익선다다의 초기 투자금은 도시재생의 마중물이 되고 자본은 재생의 주인공 역할을 한다. 전국 각지에는 익선다다를 비롯한 도시재생스타트업을 주축으로 뜨는 동네 만들기에 한창이다. 자본이 죽인 도시를 자본이 되살리겠다고 나선 셈이다. 과연 이들은 ‘전국의 소제동’을 되살릴 수 있을까. 기존 도시개발 사업과 달리 물리적 환경 개선뿐만 아니라 주민의 역량 강화를 통해 도시를 종합적으로 재생하는 정책사업. 국토교통부가 내린 ‘도시재생’의 정의다. 더 간결한 표현도 있다. 지역공동체가 주도해 지속적으로 혁신하는 도시(도시재생종합정보체계). 정부는 도시재생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지역주민’을 꼽는다. 동시에 지역주민은 도시재생 사업을 더디게 만드는 당사자이기도 하다. 도시재생사업의 전 과정은 주민 의견 수렴을 통해 이뤄진다. 이를 위해선 주민협의체를 구성해야 하지만, 협의체 구성부터 쉽지 않다. 도시재생 사업지 대부분은 이미 지역공동체가 파괴된 지역이다. 남은 주민들 역시 각자의 이해관계가 다른데다 도시재생을 ‘재개발’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사업 취지를 설명하는 과정부터 애를 먹는다. 반면 민간자본의 도시재생에서는 지역주민의 역할이 완전히 배제된다. 주민협의를 비롯한 일체의 과정을 건너뛸 수 있다. 자본이 원하는 건물이나 빈집을 골라 웃돈을 주고 매입을 하면 끝이다. 그동안 부동산 거래가 끊겨 떠나지 못했던 원주민은 시세보다 단돈 100만원이라도 더 쳐준다고 하면 선뜻 거래에 응한다. 수십 채의 부동산이 단기간에 팔리고 나면 일대 시세는 급등하기 시작한다. 정태일 대전도시재생지원 센터장은 “외부업체에서 소제동 일대 부동산을 집단 매집하면서 부동산 가격이 평당 300만원대에서 1000만원까지 올랐다”며 “부동산에 관심이 없던 지역주민들까지 이 기회에 한몫 잡아 빨리 떠난다고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부동산이 확보된 뒤에는 마케팅의 영역이다. 빈집과 폐건물을 리모델링해서 이른바 ‘뉴트로’ 감성을 입히고 인스타 등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힙 플레이스’라는 입소문을 낸다. 낡은 골목 사이에 감각적인 인테리어로 단장한 카페와 식당 대여섯 개만 있으면 뜨는 동네가 된다. 언론과 유튜브 등 각종 미디어는 새롭게 등장한 ‘핫플’을 반복해서 다룬다. 관광객 유치에 목마른 지자체와 공공기관이 알아서 ‘가볼 만한 곳’으로 홍보해주기 때문에 유명세를 탄다. 유동인구가 늘고 뒤이어 다른 비슷한 점포들이 들어선다. 주민들은 떠나고 손바뀜이 반복된다. 초반 매집한 세력은 되팔고 나가면 그만이다. 이원제 상명대 디자인대학 교수는 “도시재생이라고 하지만 주거지역을 상업공간으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며 “지역주민의 삶의 양식과 생태계를 배려하지 않은 개발 행위”라고 말했다. 만들어진 ‘핫플’에는 ‘약발’이 다할 때까지 투자자들이 몰린다. 부동산과 임대료는 계속 상승하고 일단 오른 시세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60년째 소제동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는 이종완(82)씨는 “이 동네 빈집을 만든 것도 서울 사람들이고 요즘에 들어와서 땅값 올린 사람들도 외지인들”이라며 “지금 장사하는 사람들은 잠깐 돈 벌고 챙겨서 나갈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주거지역의 상업공간화일 뿐’ 비판도 거주지를 상업공간으로 만드는 방식은 결국 서울 종로 익선동 일대와 경리단길 등 ‘뜨는 동네’마다 나타났던 ‘젠트리피케이션(주거 세입자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으로 이어진다. 과거 익선다다가 개발한 익선동 한옥마을 역시 현재 젠트리피케이션 진행 4단계(초기·주의·경계·위험) 가운데 ‘경계’ 상태에 처해 있다(국토연구원). 구본기 구본기생활경제연구소장은 “대부분의 도시재생스타트업에게 도시재생은 패션에 불과하다”며 “그저 개발이익을 추구하는 부동산 업체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지적에 대해 익선다다 측은 “거점을 만들고 유동인구를 늘려서 상권을 살리는 것도 도시재생의 한 방법”이라며 “최소 10년은 소제동에서 도시재생사업을 할 예정이기 때문에 부동산 시세차익을 노린다는 비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임차인이 계약 연장을 요구할 수 있는 기간을 10년으로 늘리도록 상가임대차보호법이 개정됐기 때문에 임차인이 쫓겨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익선다다의 도시재생 방식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해당 방식이 단기간 눈에 띄는 변화를 불러온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최근 도시재생 뉴딜의 가시적인 성과를 강조하고 있는 정부가 ‘익선다다 모델’로 눈을 돌리는 이유다. 현재 익선다다는 서울 중구와 전남 순천, 강원 춘천에서 도시재생 컨설팅 등 용역사업을 진행 중이다. 전국 도시재생 뉴딜 선정 지역에는 익선다다와 유사한 형태의 도시재생스타트업이 속속 진출하고 있다. 익선다다가 있는 대전시 역시 과거 성매매업소 밀집 지역으로 낙후된 대전역 인근 정동마을 개선 사업(정동미 프로젝트)에 익선다다의 투입 여부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정동마을은 2017년부터 지역 시민단체 주도로 도시재생사업(마을미술프로젝트)이 진행된 지역이다. 3년째 정동마을 도시재생을 진행하고 있는 황혜진 대전공공미술연구원 대표는 “성매매업주들에게 멱살을 잡혀가며 지역공동체를 만드는 데 3년이 걸렸다”라며 “범죄 발생률이 줄고 사람이 오갈 수 있는 마을로 만든 것도 큰 성과”라고 말했다. 임경수 지역재생활동연대 준비위원장은 “상업지역으로 변모되는 순간 반짝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기존에 어렵게 구성한 지역공동체는 완전히 소멸된다”고 지적했다. 정부·지자체의 성과 조급증은 도시재생 사업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 “도시재생은 긴 호흡이 필요한 작업이다. 예산을 줬으니 성과를 내라고 재촉하는 것은 재생사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공공의 역할과 민간의 역할이 적정 배분된 성공 모델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마강래 중앙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
- [문화내시경]달동네 옥탑방의 애환(2014. 03. 24 19:56)
- 2014. 03. 24 19:56 문화/과학
- 극단 달나라동백꽃은 작가 김은성과 연출가 부새롬, 그리고 이들과 뜻을 같이하는 젊은 배우 몇 명이 모여 결성한 극단이다. 자기만의 색깔을 지닌 일련의 공연들을 비롯해, 팟캐스트를 통해 널리 알려진 희곡낭독방송, 그리고 활발한 낭독공연 등으로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다. 2012년 연극계 주요 상을 휩쓴 외에도 등 대부분의 공연들이 좋은 평가를 받은 바 있고, 팟캐스트 최초의 희곡낭독방송인 역시 다채로운 레퍼토리와 엄청난 다운로드 수를 자랑하며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달나라동백꽃은 우리 근현대사와 동시대적 현실을 아우르며 이곳, 이 나라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 그 중에서도 특히 소외된 사람들의 힘겨운 일상을 진지하면서도 무겁지 않게, 날카로우면서도 담담한 시선으로 그리는 작품들을 꾸준히 올려 왔다. 극단의 창단 공연이자 레퍼토리 작품인 역시 서울 달동네의 옥탑방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한 가족의 삶과 애환을 그린 작품이다. 연극 | 극단 달나라동백꽃 제공 이 작품은 올해 베세토 연극제의 한국 출품작으로 선정되었으며, 5월 중국 공연에 앞서 대학로에서 다시 한 번 우리 관객과 만나고 있다. 서울 달동네의 한 옥탑방. 대학의 환경미화원으로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는 엄마 여만자와 한쪽 다리가 불편해 종일 집에서 자기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사는 딸 은하, 그리고 영화감독이 꿈이지만 현재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는 아들 은창이 함께 살고 있는 곳이다. 각박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며 아슬아슬하게 버텨가고 있는 이들 앞에 어느 날 친절하고 세련된 신방과 대학원생 일영이 등장한다. 일영을 통해 만자네 가족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삶을 꿈꾸게 되지만, 그는 파업 중인 여만자를 자신의 다큐멘터리 소재로 찍고 난 뒤 곧 떠나버리고 여만자네 가족은 다시 출구 없는 일상으로 돌아오게 된다. 대강의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 은 미국의 현대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즈의 대표작을 오늘의 한국 상황에 맞추어 번안, 각색한 작품이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미국의 몰락한 중산층 가족을 그린 테네시 윌리엄스의 을 김은성은 21세기 서울의 옥탑방 가족 이야기로 바꿨다. 연극 | 극단 달나라동백꽃 제공 이 작품 이외에도 극단 달나라동백꽃은 를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의 이야기로 풀어낸 이나, 을 6·25 전쟁 직후 시골 마을로 가져온 등에서 익숙한 해외명작을 한국적인 언어와 정서로 담아내는 일련의 작업을 이어 왔다. 이들의 번안 작업에서 특히 도드라지는 것은 ‘말’에 대한 관심이다. 작가 김은성을 중심으로 한 이들 단원들은 그간 꾸준히 우리말에 대한 연구와 애정을 쏟아오면서 우리말 고유의 음색과 정서를 무대 언어로 만드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1980년대 전남 벌교를 배경으로 한 , 1950년대 전남 보성에서 펼쳐지는 , 탈북자 목란을 통해 바라본 한국 사회를 그린 등의 작품에서 각기 맛깔스런 사투리와 정감 있는 언어로 뚜렷한 성과를 보여준 바 있다. 현재 공연 중인 역시 현대 우리말의 말맛과 정서를 고스란히 담아낸 생생한 대사들이 살아 숨 쉬는 작품이다. 특히 자기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은하의 섬세한 언어가 일영과의 관계 속에서 빛을 발한 뒤 다시 부서지는 순간들이 깊은 인상을 준다. 3월 30일까지 연우소극장.
- 문화내시경
- [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달동네 골목이 낭만일 수 있는가(2013. 08. 12 16:23)
- 2013. 08. 12 16:23 사회
- 도시의 욕망에 허기를 느낀 사람들에게 달동네 골목은 ‘옛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낭만적 대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남루하여 드러내기 싫은 일상이다. 황석영의 중편소설 은 20세기 중엽의 가난했던 시절을 견뎌낸 가난한 사람들에게 바치는 아름다운 찬가다. 가난한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 때문에 벌어진 숱한 상처와 악연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것을 끌어안고, 서로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마을에서 성장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고 들어서 아는 일이다. 은 복날 더위가 이글거리는 한여름, 변두리의 간이주택이나 움막집에서 넝마주이로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깊은 애정으로 그렸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는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가난은 없는 사람들끼리 서로 나누며 견디게도 하지만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에서는 소주나 막걸리가 가난한 마을의 시름을 덜어준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종종 그것이 통제되지 않는 폭력으로 급변한다. 막걸리에 취하여 귀가한 가난한 동네의 아버지는 종종 제 분을 못이겨 아내를 패고 아이들을 팬다. 가난은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한다. 절망과 환멸이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만든다. 삶의 밑바닥에 침전된, 지워지지도 않고 게워낼 수도 없는 가난의 기억은 학대와 조롱의 참담함으로 얼룩져 있다. 부산 감천마을에 그려진 이질적인 벽화. 늘어가는 ‘벽화 마을’들 시리즈로 유명한 소설가 조앤 롤링은 2008년 하버드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모님도 저도 가난을 겪었고, 가난이라는 것이 그리 달가운 경험은 아니라는 데에 저도 부모님과 생각이 같습니다. 가난하면 삶이 두렵고 버거워지며 때때로 심한 우울증을 느끼게 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가난에서 헤어나오는 것, 그것은 진정 자랑스러워 할 만한 일이지만 가난 자체를 낭만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늘날 서울이며 부산, 대구, 광주 같은 대도시는 물론이고 전국의 군소도시 읍·면·동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풍경이 있으니 바로 ‘벽화 마을’이다. 최근의 사례만 보자. 지난 6월 초, 경북과학대 봉사동아리가 칠곡군 기산면의 작은 마을을 방문해 벽화를 그렸다. 7월 초에는 대구 달서구 두류동에서 ‘파도고개 미로(美路)마을’ 타일 벽화 작업이 진행되었다. 7월 중순에는 경희대 학생들이 충남 청양군 운곡면의 시골 마을을 찾아 벽화를 그렸다. 7월 하순에는 농협중앙회 경남본부가 경남 거창군 주암마을을 찾아 담장 벽화를 그렸다. 경북농협 칠곡군지부 직원들도 칠곡군 가산면 학상리 마을에서 벽화 그리기 봉사를 했다. 8월 초순에는 경기도 시흥시 정왕본동에서 지역주민과 학생들이 함께 벽화 그리기를 했다. 이런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진다. 물론 그 순수한 뜻과 작업 후의 깨끗해진 마을 풍경을 무시할 수는 없다. 재정과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농촌이나 변두리의 가난한 마을을 그대로 두기보다는 갸륵한 정성과 뜻이 모여 조금이라도 말끔하게 단장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마을 가꾸기’의 핵심은 아닐 것이다. 더욱이 그 벽화에 그려진 소재가 그 마을의 역사나 문화와는 대체로 상관 없는 ‘낭만적인 풍경’이다. 가을동화 촬영지라는 안내문이 서 있는 강원도 속초 아바이마을. 그런 마을을 ‘구경’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고, 그리하여 그런 마을 자체가 ‘문화관광 콘텐츠’로 급변하고 있다. 그곳에서 드라마나 영화라도 찍게 되면 그 촬영장소를 찾는 이들이 부쩍 늘어난다. 충북 청주시 상당구 수암골목 1번지, 일명 ‘수암골’이 대표적이다. 청주의 대표적인 달동네인데 예쁜 벽화들이 비좁고 어수선한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다. 소지섭과 한지민이 주연한 드라마 의 촬영장소라는 점 때문에 찾는 이가 늘었다. 속초항에 가면 아바이 마을이 있는데 원빈과 송혜교가 출연했던 드라마 때문에 ‘가을동화 촬영지’라고 쓰여 있다. 그뿐인가. 미시령 쪽으로 가면 아예 공공도로 표지판에 ‘대조영 촬영지’라고 쓰여 있다. 2006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의 세트장이 거의 문화유산 수준으로 등극한 셈이다. 아무튼 가난한 마을을 구경하러 가는 행렬이 제법 길다. 부산 사하구 감천2동 달동네는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 ‘한국의 산토리니’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저 그리스 남쪽 에게해의 유명한 관광지 이름이 부산의 달동네에 붙은 것이다. 한국전쟁 때 피란 온 태극교도들이 먼저 판자촌을 형성했고, 그 후로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비록 가난한 동네지만 누구라도 받아들여줄 것 같은 이 산동네로 모여들어 한때 2만명 넘게 살던 곳이다. 그런데 이제는 부산 관광 1번지가 되었다. 주말에는 수천명씩 몰려든다. 지난 5월 말부터 3일 동안 열린 골목축제에 무려 3만여명이 다녀갔다. 가난을 구경하는 불편한 행렬들 가난한 동네를 구경한다는 것은 물론 단순한 ‘관광’이 아니다. 오늘날의 대도시는 획일적이며 비인간적이다. 도시는 비대해졌으나 그것을 만든 인간은 오히려 왜소해졌다. 하늘을 찌르는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는 부와 신분의 상징이며, 도시의 모든 욕망이 집중된 곳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아이 낳고 살 만한 인간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천시 강화도 온수리의 마을벽화. 그리하여 가난한 동네의 골목을 걸어보고 싶은 것이다. 담장 너머로는 그 옛날 가족들이 둘러앉아 국수를 먹던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허름한 동네의 공터에서는 어린 시절 어두워질 때까지 놀던 추억이 환각처럼 되살아난다. 잔인한 대도시의 냉혹한 직선에 짓눌리다 보니 가난한 동네의 곡선에 마음이 빼앗긴다. 그렇기는 해도 결국은 ‘구경’이다. 만약 어디 민속촌이나 테마파크에 ‘달동네’를 만들어놓는다면 찾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다. 그것은 모사물일 뿐이다. 청주의 수암마을이나 부산의 감천마을이나 서울의 홍제동 개미마을은 모사물이 아니다. 그래서 찾아간다. 문제는 사람이 아직 살고 있다는 점이다. 큼직한 렌즈가 달린 디카로 연신 ‘낭만’을 포착하는 사람도 있고, 스마트폰으로 달동네의 일상을 ‘훔치는’ 사람도 있다. 널어놓은 빨랫감도 찍고 평상에 앉아 쉬고 있는 할머니도 찍는다.찍는 사람에게는 가난이 찍을 만한 낭만적 풍경이지만,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어쩌면 남루하여 부끄러운 일상이다. 탄광지대로 유명한 강원도 철암의 삼방마을 사람들은 그래서 외지인이 드나드는 마을 입구의 한쪽을 막아버렸다고 한다. 벽화도 그려져 있고 옛 탄광지대의 흔적도 많이 남아 있는 곳이지만, 초라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싫고 함부로 카메라를 들이대는 외지인도 보기 싫기 때문이다. 도시의 욕망에 허기를 느낀 사람들에게는 가난한 동네의 비좁은 골목이 ‘옛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낭만적 대상이지만, 그러나 21세기 초엽임에도 여전히 20세기 중엽의 취약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낭만도 아니고 그래서 구경거리가 될 수는 없다. 정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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