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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목! 이 사람]대마초 연구하는 노의현 이사장 “대마는 유익한 풀, 죄가 없습니다”(2021. 02. 19 14:40)
- 2021. 02. 19 14:40 사회
- “대마는 죄가 없습니다.” 노의현 한국협동조합발전연구원 이사장(76)이 기자에게 건넨 책의 앞장에 적어 놓은 문구다. <대마와 대마초>. 지난 2000년 통합농협 초대 농협경제대표(CEO)를 역임했던 노 이사장의 첫 책이다. “식물 중 대마초가 가장 유익한 풀인데 왜 불법화했는지 추적해보고 싶었어요. 막상 도전해보니 우리나라에 관련 자료가 별로 없더라고요.” 완성까지 10여년 넘게 걸린 역작이다. 그렇다고 내용의 퀄리티가 떨어지진 않는다. 최신 연구성과와 쟁점·논의까지 꾸역꾸역 다 담아냈다. 사진/이준헌 기자 “대한민국만 너무 뒤처지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지난해 11월 미국 대통령선거가 있었잖아요? 이때 미국 4개주도 돌아섰습니다. 지난해 중반까지 대마초를 합법화한 주가 11개였다면 지금은 15개가 된 거죠. 미국은 연방법상으로는 금지했지만, 캐나다와 우루과이 같은 나라는 완전히 풀렸습니다. 담배 사듯이 살 수 있어요. 캐나다나 미국 캘리포니아 같은 큰 주에 바보 같은 사람들만 살아서 합법화했겠어요.” 노 이사장이 ‘대한민국만 뒤처져 있다’고 하는 것은 대마초의 오락적 사용, 끽연을 풀자는 것이 아니다. 대마의 산업적 이용이다. “대마의 의학적 효능은 크게 2가지가 규명됐습니다. 테트라하이드로칸나비놀(THC)이라고 도취를 일으키는 성분과 CBD로 약칭되는 칸나비디올이라는 성분입니다. CBD는 통증이나 진통을 완화하는 한편, 특히 소아 뇌전증에 효과가 있다는 것이 수십년 전부터 알려져 있어요. 전 세계 각국에서 이 대마에서 추출한 CBD 성분에 주목하면서 산업화하고 있는데, 한국은 ‘대마는 마약이다’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다 막고 있는 겁니다. 그게 안타깝다는 것이죠.” 그에 따르면 실제 미국은 2018년 농업법을 개정하면서 THC의 비중이 0.3%인 대마 재배가 전국적으로 허용했고, 일본도 THC가 안 들어간 CBD 제품들을 개발해 인터넷 등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데 비해 유독 한국만 낡은 규제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대마=마약’의 도식이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은 1970년대 중반 박정희 정권 시절 가수·연예인들을 중심으로 대마초 파동이 벌어지면서부터라고 그는 덧붙인다. 그 전까지는 대마초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다는 것.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동북아에서 재배되는 종은 THC 성분이 낮아 대마초를 피는 문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대마의 다른 이름은 삼이다. 동북아에서는 보통 베옷을 해입거나 밧줄을 만드는 등의 용도로 재배됐다. 대마초가 마약류로 분류되기 시작한 것은 대공황기 미국에서인데, 다분히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 노 이사장의 주장이다. 일본이나 한국에서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대마초=마약’ 규정이 그대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적어도 THC까지는 아니더라도 CBD 오일이나 대마 관련 산업 기회를 놓치는 것 같아 아쉬워 이렇게 책도 내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당장 CBD 의약품뿐 아니라 종이, 생분해 플라스틱 등 다양하게 산업화할 기회를 놓치는 것이 제일 아쉽다는 주장이다.
- 주목! 이 사람
- [언더그라운드 넷]‘텅 빈 대마도’ 보도는 선동? 윤서인씨 주장은 사실일까(2019. 09. 06 15:29)
- 2019. 09. 06 15:29 사회
- 지난 8월 초순 기자는 ‘kouhei2708’이라는 트위터 아이디를 쓰는 대마도 현지인의 트위터 글을 기사에서 인용했다. ‘한국 사람들이 하나도 없으니 대마도에 와주세요’라고 적은 관광 호소 글이다. 호소 대상은 앞서 기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 사람들이다.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지난 8월 28일, 다른 일본인이 이 현지인에게 멘션을 걸어 올린 글이다. ‘한국인이 격감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대마도에 가고 싶지만 금방은 무리이므로 우선 대마도산을 사서 응원하고 싶습니다.’ 글 타래를 보면 대마도를 돕기 위한 ‘아이디어’가 쏟아진다. 한국 대신 대마도로 수학여행을 가게 하자든가, 대마도 인근까지 항공이나 선박 요금에 국가보조금을 지급해 여행을 쉽게 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9월 5일 현재 그의 호소에 호응해 대마도 여행을 갔다는 ‘인증샷’은 적어도 이 트위터 사용자의 타임라인에는 올라오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넷 상의 말잔치’다. 윤서인유튜브 캡처 “<경향신문>은 한국인을 조롱하는 사람의 글을 퍼다 놓고 ‘호소’라고 하면서 정신 승리하고 있다.” 지난 8월 25일 우익성향 만화가 윤서인씨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기자의 기사를 두고 내놓은 주장이다. 그는 비슷한 시점에 대마도의 텅 빈 거리를 다룬 한국 방송 보도 역시 때마침 ‘오봉(한국 추석과 비슷한 일본 명절)’ 기간이라 문을 닫은 것을 두고 “한국 관광객이 없어 문을 닫은 것처럼 선동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윤씨 주장은 사실일까. 앞서 인용한 이 대마도 현지인이 혐한 성향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여름휴가는 대마도로 가볼까’라고 쓴 다른 사용자에 대한 답글에서 “연락주세요! 전부터 ‘K국’은 사절하고 있습니다. 숙박업소를 안내하겠습니다. 제철 음식을 싸게 먹을 수 있어요”라고 답하고 있다. 여기서 K국은 KOREA, 한국을 가리킨다. 일본 다른 지역민들을 향한 관광 호소, 맞다. “이즈하라항 쪽으로 가던 배는 전부 임시휴업에 들어갔습니다. 현재는 차로 2시간 거리 떨어진 히타카즈 배편만 있습니다.” 쓰시마 부산사무소 관계자의 설명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관광객 급감으로 지역경제 전체가 타격을 받아 힘듭니다. 일본 지역방송에서도 다뤘던 주제입니다.” 9월 4일 통화에서 윤서인씨는 “취재에 응하고 싶지 않다”며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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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더그라운드 넷]“당신만의 프라이빗 해변을 즐기세요” 어느 대마도 사람의 관광홍보(2019. 08. 09 14:38)
- 2019. 08. 09 14:38 사회
- “소원 성취했으니 앞으로 아베 관저를 향해 절하고 지내길.” 대마도에 산다는 한 일본인이 올린 트위터 글에 대한 한국 커뮤니티의 반응이다. “30년 가까이 일본 간토(關東)지방에 살다가 12년 전에 쓰시마(대마도)에 돌아와 살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 이 트위터 사용자가 글을 올린 것은 지난 7월 29일. 내용은 이렇다. 뽐뿌게시판 “한국인은 한 명도 없습니다. 당신만의 프라이빗 해변입니다. 캠프에서 바비큐도 가능합니다. 대마도에 와주세요.” 일본인을 겨냥한 호소다. 8월 7일, 다른 일본 트위터 사용자와 이 대마도 거주자 사이에 오간 트윗글이 눈길을 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정말 ‘조선인’은 한 사람도 없나요? 그러면 다음 여행지 후보에 넣겠습니다.”,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하긴 곤란하지만, 여객선 회사 두 곳이 휴무에 들어갔고, 3개사가 감편에 들어갔습니다. 한국계 면세점 두 곳이 문을 닫았고요.” 대마도 관광업계가 입은 타격은 생각보다 훨씬 크고 깊은 것으로 보인다. 8월 3~4일 현지에서는 이즈하라항 축제가 열렸다. 행사일정에 따르면 이틀째인 4일에는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 퍼레이드도 있었다. 한국 지자체의 불참 통보로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쓰시마 부산사무소 측 설명에 따르면 어쨌든 행사는 무사히 치렀다고 한다. “글쎄요. 행사 구경하는 사람들이 한국사람인지 일본사람인지는 모르니까요. 다만 개인적으로 토요일에 들어가 월요일에 나왔는데 터미널을 이용하는 손님이 확 준 것은 사실입니다.” 일본여행 불매운동이 벌어지면서 ‘한국인 출입거부’ 등 팻말을 내건 일본 상점 보도영상 같은 것이 다시 도는데? 쓰시마 부산사무소 관계자는 “가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과거 한국사람이 와서 싸웠거나 단체로 와서 요금을 안 내고 가는 등의 경험이 있던 가게”라며 “연령대가 높은 단체관광객들이 주류였던 과거에 벌어진 일이며, 젊은 층 위주로 바뀐 지금은 서로 예의를 지키며 거의 사라진 행태”라고 말했다. 앞서 인용한 트윗글과 관련해 이 관계자는 “실제 대마도 주민이 올린 글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며 “어쨌든 다시 관광이 활성화되려면 먼저 양국관계가 잘 풀려야 하는데 장기화될 것 같아 걱정”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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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서치]"대마초 합법화 반대" 76.1%(2005. 01. 11)
- 2005. 01. 11 사회
- 영화배우 김부선씨가 대마초를 금지하는 현행 법률이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위배한다며 위헌소송을 제기하자 사회 일각에서 '대마초 합법화'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일고 있다. 문화예술인들이 대마초 합법화를 촉구하는 선언을 하는가 하면 한국마약범죄학회도 대마초를 마약류관리법에서 별도로 분리해 별도 법률을 제정하라고 건의하는 등 그냥 묻어두기에는 간단치 않은 문제로 부상하고 있는 형편이다. 대마초를 합법화하자는 논리의 근거는 대마초가 담배나 술보다 중독성이 덜하고 위험한 행동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지만 의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검찰에서는 "말도 안 된다"며 강력히 맞서고 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리서치 전문기관 리서치랩(www.relab.net)이 전국 성인 남녀 1,058명을 대상으로 '대마초 합법화'에 대해 물어봤다. 그 결과 합법화에 반대하는 사람이 전체 응답자의 76.1%로 합법화에 찬성하는 23.9%보다 월등히 많아 아직까지 우리사회에서는 대마초를 용인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대마초 합법화에 반대하는 이유로는 '헤로인 등 마약류의 확산 위험'이 52.7%로 가장 많았으며, 그 다음으로는 30.4%가 지적한 '청소년 호기심 자극'이었고, '인체에 유해'와 '시기상조'라는 이유도 각각 9.7%와 7.2%였다. 한편 대마초 합법화에 찬성하는 이유로는 사회적으로 해악이 낮다(31.0%), 담배보다 중독성이 적다(27.6%), 행복추구권 위배(23.4%), 치료용으로 필요(18.0%) 순으로 나타났다. 김성수 기자 jiji@kyunghyang.com
- [긴호 9호세대 비화](36)'사석'이 대마를 잡다(2004. 09. 23)
- 2004. 09. 23 사회
- 긴급조치 9호 시대의 '영원한 도망자' 권형택(현 우리자원 대표,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사무총장)은 원래 11-11거사는 물론 어떤 데모에도 참여하지 않기로 돼 있었다. 양춘승(현 지환테크 대표, 관악민주포럼 회장)이 3월 거사에 나서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남아서 농법회 후배들을 건사하라"고 부탁했고, 그렇게 하기로 언약한 터였다. 그는 성격이 느긋하고 배짱이 두둑했다. 별명이 '곰'이었다. 그래서 농법회 내에서도 대외 업무는 활동성 강한 양춘승이 담당하고 내부 살림은 차분한 성격의 그가 책임지기로 역할을 분담한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개인적 진로도 대학원에 들어가기로 정해놓고 있었다. "농법회와 후배들을 부탁해" 하지만 26동 사건이 터지자 양춘승과 한 약속을 잊어버렸다. 아니 알면서도 지킬 수 없었다. 당시 농법회를 비롯한 서클은 가족적 유대감으로 뭉쳐 있었다. 피가 물보다 진한 것은 당연지사. 가족이 사고를 당하면 법도 명분도 필요 없다. 26동 사건으로 농법회 후배 최상일(현 문화방송 라디오본부 CP)이 구속되자 좀처럼 흥분하지 않던 그도 그만 '꼭지가 돌고' 말았다. 김경택(현 온샘미디어 대표)이 거사를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는 쉽게 결단을 내렸다. 최상일같이 성격이 곱고 여린 후배마저 감옥에 갔는데 그냥 졸업하는 것은 죄악이라 생각했다. 한사의 장기영(현 일용직 노동)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권형택은 서클 동기인 양기운(현 남원자활후견기관 관장)에게 은밀히 뒷일을 부탁했다. 양기운은 사대 체육학과 소속으로 3학년 때에야 농법회에 가입한 늦깎이 운동권이었다. 전북 남원 출신에 전라고를 졸업한 그는 고물상을 하던 아버지의 병환으로 가정환경이 극도로 어려운 중에 서울대에 입학했다. 그래서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는 친구뿐 아니라 선각자연하는 운동권에 대해서도 대단히 냉소적이었다. 이런 그의 엇나간 태도를 다잡아 준 선배-동료가 농법회 민인기(현 해남자활후견기관 관장, 희망해남21 운영위원)-이범영(전 민청련 의장, 작고)-양춘승 등이었다. 3학년 여름에 농법회 농활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뒤늦게 운동권에 뛰어든 그는 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당시 운동권에는 '비밀주의'가 극에 이르렀다. 서로의 일에 대해 아는 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특히 상대방의 모임이나 일에 대해 묻는 것은 금기로 여겼다. 뒤늦게 운동권이 된 양기운은 답답한 마음에 이것저것 물어보는 일이 잦았다. 그의 이런 행동은 운동권의 생리에 맞지 않았다. "저 친구 이상하다, 조심하라"는 얘기가 나왔다. 학내 사찰라인에서 프락치를 키운다는 소문을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던 운동권에서는 당연히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체육 전공자가 운동권이 된 예가 좀처럼 없던 터다. 소문은 유령처럼 돌아다녔다. 물론 그의 정체에 대해 대놓고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해명할 대상도, 방법도 없었다. 이런 차에 권형택을 통해 간접적으로 거사 계획을 접한 그는 펄쩍 뛰었다. 그 역시 최상일이 구속된 뒤 눈에 보이는 게 없을 정도로 이성을 잃고 있었다. 그는 이미 데모를 아름답게(?) 한 번 하고 감옥 갔다 나와서 농사지으러 고향에 내려가는 것으로 진로를 잡고 있었다. 그러니 고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나는 야전 스타일이고 형택이는 학자 스타일이었다. 형택이가 데모를 하겠다니 어이가 없었다. '무슨 얘기냐, 너는 공부하고 후배 지도나 해라, 데모는 내가 하겠다'고 했다. 형택이도 양보하지 않았다. 서로 옥신각신하다가 합의가 되지 않아서 결국 둘 다 하게 됐다." 정교한 작전 시나리오 쉽게 결단을 내리기는 문성훈(현 템피스투자자문 리서치센터 소장)도 마찬가지였다. 진주의 교육자 집안 출신으로 서울고를 나온 그는 이경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이경회는 1950~60년대 서울상대 운동권의 간판 서클이던 경우회의 후신이다. 경우회가 1968년 통혁당 사건을 겪고 나서 바꾼 이름이 이론경제학회였고, 문성훈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공식적으로 정치경제학회로 불렸다. 전통이 깊다 보니 족보도 화려하다. 박재윤(현 아주대 총장, 전 통상산업부 장관)-신영복(현 성공회대 교수)-김근태(현 보건복지부 장관)-김태동(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전 청와대 경제수석)-장명국(현 내일신문 발행인) 등이 1960년대 경우회의 면면이다. 1970년 초반 멤버는 정금채(현 안양군포환경운동연합 상임의장, 71학번)-김형기(현 경북대 교수, 72학번)-최영기(현 한국노동연구원장, 73학번) 등이 대표적이다. 문성훈의 74학번 동기로는 김삼수(현 서울산업대 교수)-조창환(현 서울 백석중 교사)-박경(현 목원대 교수)-이헌창(현 고려대 교수) 등이 있었다. 당시 이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구심점이 됐던 이가 68학번 박덕제(현 한국방송통신대 교수)였다. 그가 쉽게 감옥행을 결심한 이유가 이처럼 유서 깊은 서클의 리더라는 자존심만은 아니었다. 집안 내력도 간단치 않았다. 서울상대 71학번으로 뒷날 노동운동에 투신해 민주노총 산하 최대 산별연맹인 전국금속산업노동조합연맹 위원장을 지내는 문성현(현 민주노동당 경남도당 대표)이 그의 형이다. 그는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에 취직해 있다가 갑자기 그만두고는 노동현장으로 달려갔다. 문성훈에게 "대학 들어가면 서클활동을 해보라"며 이경회에 입회하게 한 사람이 그였다. 문성훈의 말을 들어보자. "나도 학교를 졸업하면 노동현장으로 갈 생각이었다. 서클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 당시 현장 얘기가 한창 많이 나올 때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철저한 검증 없이 수용한 측면이 있었던 것 같다. 데모하고 감옥 가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눈앞에 일은 있고 사람은 없으니까 내가... 해야 되는 것이었다." 6인조 거사팀이 구성되자 김경택은 정교하게 작전을 짰다(작전도 참조). 도서관을 거점으로 진지전을 펴려면 열람실에 있는 학생만으로는 부족하다. 밖에서 학생들을 끌고 들어가야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권형택의 말. "밖에서 시위하는 것은 성공하기 어려웠다. 춘승이도 5분을 못 버텼다. 그래서 경택이가 제안한 것이 진지전이었다. 학생식당에서 2명이 초동을 떠서 기관원을 끌어모으고, 다른 2명은 5동 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점심 먹으러 내려오는 교련반 학생들을 끌고 도서관으로 진입한다. 나머지 2명은 도서관에 있다가 학생들이 들어오면 문을 잠그고 농성체제로 들어간다. 이런 식으로 정교하게 작전을 짜서 시간대별로 시나리오를 만들고 현장답사까지 했다." 기관원을 유인하는 학생식당 시위는 양기운과 문성훈이 맡았다. 5동 앞에는 권형택과 장기영이 배치됐고, 김경택과 연성만(현 그린콜닷컴 이사)은 도서관에 미리 들어가 사전 정지작업을 하기로 했다. D데이는 11월 11일, H아워는 학생식당이 가장 붐비는 낮 12시 55분. 6인 주동자는 '필승 시나리오'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서클별로 요소요소에 후배들을 동원했다. 후배를 시위에 동원하려면 기술적인 노하우가 필요하다. "12시에 5동 앞에서 데모가 있으니 친구들을 끌고 오라"는 식의 전파는 자살행위다. 정보 유출뿐 아니라 그 후배가 연행됐을 때 구속 가능성 또한 높기 때문이다. 경찰 수사가 입체적으로, 그리고 고강도로 전개되면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대화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믿을 만한 후배에게조차 "12시에 5동 앞에서 기다려라, 책 줄게"라는 식으로 말한다. 나중에 후배가 조사를 받더라도 "나는 데모하는 줄 몰랐고 선배가 책 준다고 해서 갔다"고 오리발을 내밀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또 하나 잊어서는 안 되는 점이 주력 보호다. '싹수'가 보이는 후배들은 운동을 이어갈 수 있게 남겨놓아야 하는 것이다. 보통 거사팀은 여기서 딜레마에 빠진다. 장래를 위해서는 이들을 보호해야 하지만 눈앞의 거사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이들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을 동원은 하되 안전한 곳에 배치하거나 이중삼중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둔다. 권형택과 양기운은 농법회 주력군을 주로 학생식당에 배치했다. 11-11거사의 최종 목표는 도서관을 점거해서 농성을 벌이는 것이다. 농성부대는 열람실에서 공부하는 학생과 5동 앞 시위에 합류하는 교련반으로 구성될 것이다. 작전이 성공하면 이들은 전원 경찰에 연행되고 26동 사건 때 조사를 받았거나 요시찰 대상인 학생은 온전하지 못할 게 확실했다. 즉 5동 앞 시위조가 가장 위험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주력을 '사석'에 해당하는 학생식당으로 빼돌린(?) 것이다. 6인 주동자를 배치하는 데도 이런 점이 감안됐다. 학생식당 시위조의 임무는 학내 상주하는 기관원과 경찰, 교직원을 유인하는 것으로 끝난다. 적당히 시간만 끌면 되는 것이다. 선동력이나 시위 경험이 상대적으로 약한 양기운-문성훈을 식당에 배치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식당 앞으로 모여드는 군중 하지만 아무리 치밀하게 작전을 짜고 도상연습까지 했다고 하더라도 실제 상황은 시나리오대로 되지 않는다. 양기운-문성훈이 주동한 학생식당 시위가 생각 밖으로 커져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D데이인 11월 11일 오전. 권형택은 유인물을 가방에 가득 넣고 5동 앞에 대기하고 있다가 학생과 주임과 마주쳤다. 그는 허둥거리며 "경택이 못 봤느냐"고 물었다. '아차, 정보가 샜구나!'하는 생각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글쎄요... 못 봤는데요." 이날 오전 관악캠퍼스에서 김경택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관원과 교직원의 눈에 띄지 않게 신중하게 처신했기 때문이다. 데모가 벌어질 것이라는 낌새를 챈 학교 당국과 기관에서 그의 소재를 찾느라 부산을 떠는 사이에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12시 55분 학생회관 식당. 점심을 먹고 있던 학생들은 삐~하는 메가폰의 잡음과 흩날리는 유인물에 혼비백산했다. 이어서 메가폰을 통해 변조된 날카로운 쇳소리가 실내를 진동했다. "어려운 시대에 사는 학우여 모입시다. 짓밟힌 학원의 자유와 부당하게 구속된 동료 학생들의 권리를 찾읍시다. 권력과 돈으로 학생과 교수의 입을 막으려는 억울한 현실을 타개합시다..." 메가폰을 잡은 사람은 양기운이었다. 그가 선동 연설을 하는 사이에 문성훈은 준비한 유인물 200여장을 뿌렸다. 전광석화처럼 분위기를 휘어잡은 두 사람은 곧바로 '정의가'를 선창했다. "정의와 용기는 젊음의 생명, 승리의 깃발은 높이 솟았다..." 학생들이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 즈음 김경택은 연성만과 함께 도서관 4층 열람실에서 아크로폴리스 광장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린 사복형사들이 식당 쪽으로 황급히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마침내 작전이 개시됐다. 머릿속에서 수없이 반복했던 시뮬레이션. 이제 운명을 건 실전 상황에 돌입한 것이다. 4층 열람실에서는 학생식당과 5동 쪽이 한꺼번에 조망된다. 그는 연신 시계를 보면서 기관원과 교직원, 학생의 동선을 세밀하게 관찰했다. 5동에서 학생식당 방향으로 넓은 아크로폴리스 광장을 가로지르는 군중을 지켜보던 그의 눈에서 갑자기 당혹스런 기운이 스쳤다. 다시 한번 시계를 훔쳐본 그의 시선이 5동 쪽으로 향했다. 그를 당혹스럽게 만든 점은 군중이 식당 쪽으로 너무 몰려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5동 앞에 학생이 모이지 않게 된다.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두 번째 작전 개시 시간이 됐는데도 5동 앞은 썰렁했다. 권형택과 장기영이 유인물을 뿌리며 학생들을 모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허사였다. 사람이 모이지 않았다. 작전 차질의 원인은 식당 시위가 생각보다 커져버린 데 있었다. 식당조가 경찰로부터 제지를 당한 때는 '정의가'를 다 부르고 양기운이 민주구국투쟁선언문을 읽던 중이었다. 그 사이에 학생들이 식당 안과 건물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를 안 교련반 학생들도 평소처럼 5동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식당 쪽으로 뛰어내려갔다. "형택아, 그냥 들어와!" 김경택은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그는 5동 앞 시위조를 철수시킬 요량이었다. 상황 전개에 따른 작전 일부 수정은 사전에 머릿속에 수없이 반복해서 그려본 바였다. 그런데 권형택에게 그의 외침은 들리지 않았다. 옆에 있던 연성만이 말했다. "안 되겠는데요." 옳은 판단이었다. 그는 연성만에게 식당으로 내려가라고 '오더'를 내렸다. 식당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알 수 없어 통제가 필요했다. 그런데 아뿔싸! 다시 5동 쪽을 돌아보니 텅 비어 있는 게 아닌가. 권형택도 장기영도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이 무렵 학생식당은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양기운이 선언문을 읽는 중에 형사가 덮치고 옆에 있던 학생들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달려들어 몸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불가항력이었다. 덩치가 큰 양기운도 사복형사들에게 완전히 둘러싸여 들려나갔다. 문성훈이 군중을 통제하려고 했으나 그 역시 기관원의 표적이 되어 체포되고 말았다. 5동 앞에 있던 권형택은 교직원들에게 잡혀 경비실에 억류돼 있었다. 장기영은 몸을 피해 도서관으로 올라갔다. 그는 김경택을 만나 상황을 전해듣고 다시 식당으로 뛰어내려갔다. 김경택도 아래층으로 내려가 학생들의 진입에 대비했다. 장기영이 아크로폴리스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연성만이 군중을 도서관으로 인솔하고 있었다. 기관원과 경찰은 대부분 식당 안에 모여 있었다. 양기운-문성훈의 체포를 저지하는 학생들과 육탄전을 벌이고 시위 적극 가담자를 색출해 검거하는 데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연성만을 만난 장기영은 식당을 빠져나온 학생들을 이끌고 도서관에 진입했다. 그곳에는 김경택과 도서관장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이거, 뭐하는 짓이야." 도서관장이 결사적으로 학생들의 진입을 막고 있었다. 김경택은 난감했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이 경찰이 아니라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스승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완력으로 넘어뜨리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김경택은 도서관장을 밀치고 진입로를 열었다. 그러자 봇물 터진 듯 학생들이 4층 열람실로 밀려들었다. 그는 장기영과 연성만이 열람실에 들어온 것을 확인한 뒤 철문을 잠가버렸다. 어림잡아 400여명. 이 정도면 충분했다. 양기운과 문성훈이 식당 시위를 너무 멋지게 주동한 바람에 작전에 차질을 빚긴 했지만 결과는 성공이었다. 도서관이라는 목표를 탈환해 진지를 구축하기까지 절반의 희생이 있었지만 살아남은 세 사람은 승전의 희열을 나누었다. 열람실의 의자를 쌓아 철문 앞에 바리케이드를 친 뒤 창문으로 내다보니 아크로폴리스 광장에는 대군중이 형성돼 있었다. 학생이 경찰을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었다. 바로 그때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있던 군중의 시선이 일제히 도서관 4층 창문을 향했다. 빨간 점퍼를 입은 학생이 몸을 내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손에는 유인물과 메가폰이 들려 있었다. "놀부다!"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탄성을 질렀다. 그의 말대로 국사학과 3학년 연성만이었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 [독도]대마도나 내놔!(2004. 05. 20)
- 2004. 05. 20 사회
-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그린 한국 지도(팔도총도)를 보면 대마도는 엄연히 조선의 영토로 표기돼 있습니다. 일본인 스스로도 대마도를 한국 땅이라고 인정한 셈입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놓인 외로운 섬 대마도를 되찾기 위한 학계의 주장이 잇따르고 있다. 일부 시민단체에서도 '대마도 되찾기'를 위해 본격적으로 나서겠다는 태세다. 최근 원광대 사학과 나종우 교수(57)는 대마도가 한국 땅이었다는 역사적 사료를 제시하며 '대마도 회복론'을 펼치고 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지는 한-일 영토분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면 지금처럼 수세적 입장만 취할 것이 아니라 좀더 적극적으로 우리의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는 취지다. 나 교수가 자신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가장 먼저 내세운 것은 1085년 고려사의 기록. 그는 "당시 〈고려사〉를 보면 '대마도 구당관'이라는 호칭이 나오는데 구당관, 혹은 구당사는 변방이나 해상 요충지에 내려보낸 고려 시대 관직의 이름"이라고 설명했다. 역사적으로도 영유권 근거 많아 1368년 〈고려사〉의 '대마도 만호가 특산물을 바쳤다'라는 대목에서 등장하는 '만호'라는 호칭 역시 고려 시대 관 직의 이름이었다고 나 교수는 덧붙였다. 그는 대마도가 우리 땅이었다는 근거를 〈고려사〉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찾는다. "조선 초(1420년) 대마도 정벌 이후 조선에서 대마도주에게 보낸 교지를 보면 '대마도는 경상도에 예속되었으니 모든 보고나 문의는 본도의 관찰사에게 올리도록 하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후 조선에서 경차사-채찰사-선유사 등 변방에 보내는 관리가 대마도로 파견됐습니다." 이처럼 대마도가 우리 땅이었다는 역사적 근거가 많은데도 학계에서 연구를 충분히 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 교수의 불만이다. 그는 "일본은 일찌감치 대마도를 연구해 자신들의 논리를 개발했지만 우리는 고작 독도 문제가 불거질 때 단발적으로 문제제기 하는 수준"이라고 지적한 뒤 "이제부터라도 대마도의 역사-언어-풍습-자연 등에 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독도지킴이'로 유명세를 얻은 '독도유인도화국민운동본부'의 황백현씨(57)는 100년 뒤 대마도 전역에 무궁화를 꽃피우겠다는 목표를 향해 뛰고 있다. 황씨는 독도 문제가 다시 불거진 5월 4일에도 조용히 대마도를 방문했다. 대마도 '한국전망대'에 무궁화나무를 심기 위해서였다. "2년 전부터 대마도 곳곳에 무궁화 씨앗을 뿌려왔는데 이번에는 직접 약 30그루의 나무를 심고 왔습니다. 오는 7월 4일 열릴 예정인 '대마도 국경마라톤대회' 직전에도 다시 '무궁화 심기 작전'을 펼칠 예정입니다." 학계의 대마도 연구가 '대마도 회복'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차원이라면 황씨의 '무궁화 심기 작전'은 다소 엉뚱하지만 좀더 실천적인 방법인 셈이다. 최성진 기자 cs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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