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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후보에게 드립니다 '한국여성의전화의 10대 제안'
대선 후보에게 드립니다 '한국여성의전화의 10대 제안'
2022. 03. 03 11:11 화제
한국여성의전화는 대통령 선거를 일주일 앞둔 지난 2일 여성폭력 없는 세상·성평등한 사회를 위해 대통령 후보가 반드시 약속·이행해야 할 10대 과제를 발표했다. 한국여성의전화 측은 “가정폭력 특별법과 성폭력 특별법이 제정된지 25년이 넘었고, 작년 스토킹처벌법까지 제정되었지만 여전히 가해자가 처벌되지 않는 현실, 피해자의 사법제도 및 지원체계 접근을 가로막는 각종 조치, 여성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여성혐오·성차별 문화는 만연하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한국 사회의 현황을 “성평등 추진체계 없는 성격차 지수 108위의 나라”, “가정유지를 위해 가정폭력 가해자를 ‘무사히’ 돌려보내는 나라”, “가해자의 처벌과 배상 책임을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나라”,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의 스토킹을 돕는 나라” 등으로 진단하고 가정폭력, 성폭력, 데이트폭력, 스토킹 등 여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급한 법제도 개선 방안과 사회·문화적 인식개선을 위한 핵심 정책 과제를 제시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발표한 10개 과제 중 1번은 강력한 성평등 정책 추진체계 구축이다. “여성가족부는 성평등 정책보다는 보육, 청소년, 가족 정책에 주력하고 있어, 사실상 국가의 성평등을 책임지는 주무부서로서 제대로 기능하기 어려운 현실”이라며 여성폭력 근절 및 성평등 정책 추진을 위한 대통령 산하 총괄 전담기구 설치 및 예산 확대, 피·가해자 성별과 관계에 따라 여성폭력 실태와 사건처리 결과를 파악할 수 있는 국가 통계시스템 마련, 중앙정부 각 부처 및 지자체별 ‘양성평등정책담당관실’ 상설화 및 기능 강화, 고정 예산 확보 등의 구체적인 방안을 제안했다. 그외 과제는 다음과 같다. 2. 가정폭력에 대한 가정유지·보호 관점 폐기, 3.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여성폭력, 처벌원칙 및 지원체계 마련, 4. 피해자의 ‘합의할 권리’와 ‘합의하지 않을 권리’ 보장, 5. 생존권 보장을 위한 여성폭력 피해자의 개인정보 보호 제도 정비, 6. ‘동의’ 여부에 기반을 둔 성폭력 사건처리 관점 확립, 7. 여성폭력 피해자 지원, 안정적 예산 확보 및 차등·선별 지원정책 폐지, 8. 여성의 임신중단 권리 및 재생산권 보장, 9. 여성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여성혐오·성차별 문화 및 인식개선, 10.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 한국여성의전화는 “이렇듯 열악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대선 국면에서 유력 후보와 정당은 ‘여성가족부 폐지’, ‘성폭력 무고죄 처벌 강화’, ‘비동의강간죄 도입 유보’ 등 혐오와 배제를 정치적 도구로 논란 불러일으키기에만 열중할 뿐, 여성 정책에 관한 심도있는 논의를 찾아보기 어렵다”며 성평등 사회를 위해 대선 후보와 정당이 반드시 약속하고 이행해야 할 10개 과제를 각 후보 캠프 및 추후 대통령 당선인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전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여성폭력 없는 세상·성평등한 사회를 위해 대통령 후보가 반드시 약속·이행해야 할 10대 과제의 세부 사항은 한국여성의전화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여성의전화10대과제대통령후보에게드립니다
[주부들, 이것이 궁금하다]3인의 대선 후보에게 묻다
2012. 11. 06 17:38 화제
정치는 무엇보다 생활과 가까워야 한다. 사람들은 막연한 경제성장률보다 시장바구니의 시금치 값이나 매일 타는 버스 요금 동결에 더 민감하기 때문이다. 주부들이야말로 안정된 생활정치를 만들어갈 중요한 유권자다. 12월 대선을 앞두고 「레이디경향」 독자들로부터 문재인, 박근혜, 안철수 후보 3인에 대한 취재 요청이 쇄도했다. 독자들의 연령, 직업, 관심사 등을 고려한 주부 20명의 질문을 취합, 후보들에게 직접 답변을 받거나 기자들의 취재로 재구성 했다. Q TV로 만나는 ‘정치인 박근혜’는 왠지 모를 거리감이 있습니다. ‘인간 박근혜’는 어떤 사람인가요? _방송 편집 일을 하는 37세 김진국씨 언젠가 많은 분들이 모인 곳에서 인사를 드릴 기회가 있었는데, 워낙 사람들이 많다 보니 제가 책상 위에 올라가서 인사를 하게 됐습니다. 근데 그때 제 스타킹에 구멍이 나 있어서(웃음). 저라고 그렇게 항상 완벽하고 모범생 스타일은 아닙니다. 실수도 하고 또 농담도 즐겨 주고받고 그럽니다. Q 문재인 후보님, 대통령 후보들 모두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민생 안정을 꾀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는데요. 국가경제를 책임지는 사람이기 이전에 실제로 가정경제는 어떻게 관리해왔는지 궁금합니다. 또 부부 중 경제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는지와 자산 관리는 어느 분이 담당하는지도 궁금하네요. 만약 본인께서 주로 관리를 하는 편이 아니라면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려주세요. _물가가 올라 추석 때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고 걱정하는 52세 주부 박영순씨 가정경제의 관리는 숫자에 밝은 사람이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 아내가 문화예술가적 정서가 많아서…. 숫자와 관련된 것은 주로 제가 하는 편입니다. 특별한 재테크 방법은 없습니다. 수입은 가족 생활비와 어머님 용돈, 그리고 후원금 등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제 용돈으로 책값을 조금 정해놓습니다. 조금씩은 적금을 듭니다. 그 일은 주로 아내가 합니다. Q 안철수 후보님, 성격이 매우 차분하고 쉽게 화를 내지 않을 것 같은데요. 스트레스 받을 때 본인만의 해소법이 있나요? _손님들에게 스트레스 받고 있는 백화점 영업직 사원 39세 유승연씨 걷는 걸 좋아합니다. 예전에 기업(안철수연구소)을 운영할 때 머리가 복잡해지거나 일이 안 풀리면 정처 없이 걸었습니다. 서초동 소나무사거리에서 출발해 테헤란로 지나 삼성역까지 걸으면 두 시간 정도 걸리죠. 깜빡하고 지갑을 두고 나간 날은 다시 걸어서 돌아와야 해 왕복 네 시간 가까이 걸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물론 요즘은 시장이나 행사장 등에서 걷는 일이 무척 많아졌지만 ‘사색하며 걷기’는 당분간 어려울 것 같아요. Q 박근혜 후보님께서도 아이돌 그룹 중 좋아하는 멤버가 있나요? 또 싸이의 ‘강남스타일’도 들어본 적이 있는지요? _인터넷 검색이 취미인 29세 송정현씨 솔직히 아이돌 그룹의 음악을 많이 듣지는 못하지만,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여러 번 들어봤습니다. 리듬도 흥겹고 가사도 무척 재미있더라고요. ‘강남스타일’에서 힌트를 얻어 제가 연설을 할 때, 지역별 발전 방안을 얘기하면서 어디어디 스타일로 발전시키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지역민들께서 무척 좋아하셨습니다(웃음). Q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몸에 지닌 물건을 통해 그 사람을 더 잘 파악할 수 있더군요. 문재인 후보님의 소지품 중 항상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 있다면 무엇인지, 혹은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물건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_별걸 다 궁금해 하는 결혼 30년 차 59세 주부 이길순씨 제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물건은 많습니다. 제 손때가 묻고 추억이 있는 것은 다 좋아합니다. 그중에서도 아버지의 낡은 점퍼를 좋아합니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아버지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꺼내보곤 합니다. 또 하나는 아내가 짜준 스웨터입니다. 결혼 후에 짜주었는데, 그 마음이 생각나서 볼 때마다 미소가 지어지곤 합니다. 다른 것으로 다시 짜려고 하는 것을 막았지요. 무척 좋아서요. Q 안철수 후보님은 정치 경험이 많지 않으신데 이상적인 이미지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본인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_아침마다 신문을 정독하는 42세 문선희씨 꿈을 꾸지 않은 사람이 과연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웃음). 그리고 혼자 꾸는 꿈은 단순한 꿈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같은 꿈을 꾸면 그것은 현실이 된다는 말이 있는데요. 이미 제가 출마하면서 저와 같은 꿈을 꾸는 많은 분들이 뜻뿐만 아니라 행동을 같이해주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미 제가 꾸었던 꿈, 그리고 국민이 바라는 변화는 이 현실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되네요. Q 박근혜 후보님, 정계 입문 후 가장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요? _스물 셋에 결혼해 내년이면 큰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는 30세 조남희씨 일단 나이를 열다섯 살 더 먹었습니다(웃음). 그렇게 15년간의 연륜이 쌓이는 동안 저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가장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이제 대통령 후보로서 나라의 미래를 기대하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분들의 기대와 꿈을 하나하나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 그것이 가장 달라진 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더불어 우리나라도 꽤 많이 바뀌었습니다. 정치문화도 변했고, 국민의식도 높아졌고, 정치제도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정치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만 해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도 받고 보이지 않는 장벽도 많았는데, 지금은 그런 것들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Q 문재인·안철수 후보님께 질문합니다. 1980년대엔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 주된 관심사였을 것 같은데요. 이를 제외하고 두 분이 청춘 시절에 가장 치열하게 했던 고민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개인적인 고민이면 더 환영합니다. _대선 후보의 내밀한 속내가 궁금한 강원도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38세 최계영씨 젊은 시절 저는 편안한 삶과 의로운 삶 사이에서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 사이에서 갈등했지만 돌아보면 늘 의로운 쪽으로 갔다는 걸 알았습니다. 교도소에 가면서도 두렵지 않았던 건 그것이 의로운 선택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시에 합격하고 나서 유명 로펌을 거절하고 지방으로 내려간 것 또한 그런 고민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인 삶’을 고민하지 않았다면 거짓일 것입니다. 가난했고 그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젊은 날 저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의로운 삶이었지만 가장 고민이 되는 건 ‘어떻게 먹고살 수 있을까’였습니다. 지금의 청춘들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남들을 도우면서, 사회에 가치 있는 사람이 되면서 동시에 잘 먹고살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무엇인가를 혼자 독차지하지 않고 서로 공평하게 나누게 된다면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청춘들의 꿈과 삶이 일치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대학 시절 가톨릭학생회에서 의료봉사를 다니면서 만났던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의대 본과 2학년부터 4학년까지 3년 동안 서울 구로동과 두메산골 무의촌 등에서 진료 봉사활동을 했는데, 너무 가난하니까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륜마저 무참히 버려지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구로동의 한 성당에서 주말마다 진료를 할 때 만난 어느 초등학생 여자아이는 아버지는 병으로 죽고 어머니는 집을 나가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는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신문 배달을 하며 병든 할머니를 돌봤는데, 중학생이 된 뒤 할머니를 돌보는 것이 힘에 부치자 아이는 가출했고 할머니는 굶어 숨진 채로 발견됐습니다. 그렇게 무력한 사람들은 사회가 돌봐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을 보고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 제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많이 고민했죠. Q 박근혜·안철수 후보님, 지금까지 겪은 시련 중 가장 큰 것이 있었다면 무엇이었나요? 또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_이별의 아픔을 여행으로 달래고 있는 31세 전나영씨 가장 아팠던 순간은 아무래도 어머니,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던 때입니다. 무척이나 고통스러워서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순간이기도 하고요. 의사에서 경영자로 안철수연구소를 창립했을 때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회사를 경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뼈저리게 깨달았고, 직원들의 월급을 겨우 맞춰서 주고 나면 다음달이 얼마나 빨리 오는지, 또 월급날이 다가오는구나 하는 생각에 밤잠을 설친 적도 있습니다. 특히 1997년 무렵 외국기업들의 공격적인 시장 진입을 버텨내는 와중에 과로로 입원했었는데 병실에서 우리나라가 IMF 관리체제에 들어선다는 방송을 보며 정말 안철수연구소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때가 가장 힘들었던 때인데, 오히려 결과적으로 외환위기가 안철수연구소에 커다란 기회가 되어 회사 경영을 보수적으로 하면서 빚 없이 유지하게 됐고, 어려운 상황에서 버티는 힘을 얻게 됐으며, 고급 인력들을 확보할 수 있게 돼 이후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Q 문재인 후보님께 묻습니다. 부인과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결혼을 결심한 결정적 계기가 있었는지, 결혼을 후회한 적은 없는지요? _후보자의 연애사가 궁금한 전라도에서 채소가게를 운영하는 53세 이옥자씨 아내와는 1974년 5월 초 법대 축제에서 파트너로 처음 만났습니다. 그리고 서로 학교에서 마주치면 눈인사 정도 하고 지내는 사이였지요. 그 다음해 4월 학내에서 유신 반대 시위가 있었어요. 시위대가 교문을 나서려고 하니까 경찰이 페퍼포그로 최루탄을 쏘아댔죠. 당시 저는 총학생회 총무부장으로 대열 앞쪽에 있었는데, 그걸 얼굴에 정면으로 맞고 정신을 잃었어요. 최루탄 가스를 뒤집어쓰고 쓰러져 있는데 누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는 걸 느끼고 눈을 떴죠. 아내였어요. 그때 운명 같은 걸 느꼈어요. 아, 이 사람이 내 평생의 운명이구나 하고요. 아마 그때 이 사람하고 결혼하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아내는 연애하는 내내 제가 감옥에 가고, 군대에 가고, 고시공부 하러 산에 가고 할 때마다 늘 먼저 찾아오고 항상 제 곁에 있어주었습니다. 지금도 본인이 원하지 않던 일을 묵묵히 감당하고 저를 지켜주고 있습니다. 아내에게는 연애할 때나 지금이나 늘 미안하고 고맙고 그렇습니다. Q 박근혜·안철수 후보님도 열등감을 느낀 적이 있으신지요? _이름을 밝힐 수 없는 52세 안 모씨 누구나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지 않나요? 남들처럼 평범하고 단란하게 가정을 꾸리고 사시는 분들을 보면 늘 부럽기도 합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저에게 부족한 그런 점 때문에 평범함의 가치를 존중하고 평범한 분들의 행복을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를 보고 아주 똑똑한 엘리트라고 하는데, 막상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열등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웃음). 어느 대학교에 초청받아 강연을 하는데 얼굴에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이 어디냐고 물어보더군요. 제 대답은 ‘없다’입니다. 그리고 대통령 후보가 되고 나서 정말 많은 분들이 현장에서 저를 먼저 알아보고 다가와 다정하게 인사해주시고 악수해주시는 것을 보고서, 그 많은 분들의 열정과 애정을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Q 박근혜·문재인 후보님께 묻습니다.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은 무엇인지, 인생 혹은 사회·정치적 활동에 있어 좌표나 지침이 돼준 구절,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있다면 함께 소개해주셨으면 합니다. _파주에 위치한 출판사에 근무하고 있는 34세 강미영씨 대부분의 분들도 그렇겠지만 부모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저의 정치 철학, 예를 들어서 외교안보 분야라든가, 경제관이라든가, 역사관 등의 근간을 만들어주셨고, 어머니로부터는 남을 배려하는 것에 대해 배웠습니다. 물론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와 지금은 시대가 엄청나게 달라졌습니다. 나라가 처한 상황도 다르고, 국민의 요구도 다릅니다. 하지만 기본 정신만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게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저의 사고가 바뀌는 결정적 계기가 된 책은 고(故)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였습니다. 종전의 통념을 바꾸는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을 경험했습니다.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허구일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저자의 주장에도 공감했지만 꼼꼼한 자료와 근거로 실증해나가는 방식이 감명 깊었습니다. 리영희 선생은 작고하시기 전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목숨을 걸고 진실을 사회에 알리는 선생의 태도는 저의 지표가 됐습니다. Q 박근혜 후보님께서는 학창 시절 어떻게 공부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문재인·안철수 후보님! 우리나라처럼 입시 경쟁이 심한 사회에서 자식들이 어떤 사람으로 자라길 바랐는지, 실제로 어떻게 교육했는지요? _쌍문동에서 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는 28세 이은솔씨 요즘 스스로 학습, 자기주도 학습 이런 말들을 하는데, 제 학창 시절에는 스스로 알아서 공부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모두 제가 고액 과외를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시는데, 그렇지 않거든요. 영어도 수업시간 이외에 버스를 타고 등교할 때나 방 청소를 할 때 등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서 단어를 외우고 소형 카세트로 테이프를 들으면서 배웠습니다. 다행히 성적은 괜찮았습니다. 제 경험으로 볼 때 공부는 본인이 목표를 세우고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달려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제 교육정책의 핵심도 학생들의 꿈과 끼를 키워주는 교육입니다. 제 부모님은 교육열이 대단히 높은 분이었는데, 한 번도 제게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하거나 간섭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도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한 적이 없습니다. 본인들이 원하는 것을 즐겁게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지요. 다행히 아이들이 잘 자라주어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였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웃음). 교육은 무조건 이기는 게 목표가 아니라 함께 잘 사는 사회가 목표가 돼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잘할 수 있는 길을 찾아주는 게 교육의 목적이 돼야 합니다. 그러려면 사회 전체가 함께 변해야 하고요. 교육이라는 것은 교육 자체를 개혁하는 것만으로는 크게 바뀌기 어렵습니다. 특정 직업만 안정적으로 돈을 많이 번다면 모든 대학교가 여기에 맞출 것이고, 거기에 따라 초등학교 교육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사회적 기회가 공정하게 주어질 수 있도록 사회의 인센티브 시스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입시제도는 안정적으로 운영하면서 소외계층에 기회를 주기 위한 기회균등전형의 정원을 확대하며, 창의력을 키워주는 교육 시스템이나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Q 문재인 후보님, 언론을 통해 알려진 부인의 남편 사랑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본인이 생각하는 ‘정치인이 아닌 자연인 혹은 남자 문재인’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또 나이 쉰이 넘어서도 부인의 애정 듬뿍 담긴 시선을 받는 비결이 있다면? _남자로서의 매력이 궁금한 언론업계 종사자 35세 김재연씨 일단, 제 아내는 대학 시절에 제 눈빛을 보고 반했다고 말했습니다(웃음). 경상도 남자들이 일반적으로 표현에 약하고 아내랑 도란도란 말하고 하는 그런 것을 잘 못합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대신 저희는 마음으로, 눈으로 많은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변호사를 했지만 사실 살아오면서 경제적으로 아내를 풍족하게 해주지도 못했고, 연애 시절부터 옥바라지다 뭐다 고생을 많이 시켰어요. 학생운동을 하다가 인권변호사 생활을 오래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요. 그래서 아내가 속도 많이 상했을 거고, 원망도 했을 겁니다. 그런데 아내는 제가 살아온 삶이 그래도 올바르다고, 괜찮은 삶이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저를 믿고 응원하고 지금까지 오지 않았나 싶어요. 그리고 사랑은 주는 만큼 받는 게 아닌가 싶은 게, 사실은 제가 아내를 무척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듯해요. Q 안철수 후보님께서는 맞벌이 부부신데요. 평소 집안일을 많이 돕는 편인가요? _서로 얼굴 보기 힘든 의사 커플 아내 35세 최승희씨 아내나 저나 요리를 잘하지는 못합니다. 그나마 제가 국수나 파스타 등을 만들죠. 아내는 제가 면을 잘 삶는다면서 계속 저보고 해달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요즘은 일이 많아져서 집안일을 거의 못하는 편인데, 평소에는 쓰레기 분리수거나 식기세척기 그릇 정리 등 집안일을 같이합니다. Q 안철수 후보님, 본인이 생각하는 최고의 일탈이나 삶의 터닝 포인트가 있다면? _노래방을 운영하는 55세 정희영씨 정치인으로 변신한 것입니다. Q 요즘 후보들의 매체 노출 빈도가 잦아지는 것을 보며 대선이 가까워졌음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은 한 사람을 대변하는 수단인 동시에 정치인들에게는 이미지 메이킹 전략이 될 수 있잖아요. 때문에 방송이나 신문에 후보들이 등장할 때마다 스타일을 유심히 보게 됩니다. 각 후보별로 어떤 점에 중점을 두고 스타일링을 담당하고 있는지, 단골 미용실이나 의상실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_신사동에서 10년째 의상실을 운영하고 있는 43세 황은애씨 평소에는 편안하면서도 실용적인 스타일을 좋아합니다. 좀 과감하게 바꿔보라는 요구들도 있고, 저도 그러고 싶을 때가 있지만 박근혜 스타일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을 더 좋아하시는 분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찢어진 청바지를 입어보라는 얘기도 들었는데, 막상 입으면 스캔들이 될 것 같습니다(웃음). 10년 이상씩 오래된 옷들도 많은데, 의상은 개인적으로 하던 곳에서 필요할 때 하고, 요즘 트렌드에 맞게 조금씩 수선해서 입기도 해서 딱히 의상으로 비용이 많이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대신 브로치로 포인트를 줍니다. 독창적인 디자인의 브로치를 좋아하거든요. 주변에서 스타일리스트를 두라는 말씀들을 많이 하시는데, 아직은 저의 패션 감각을 믿고 있습니다(웃음). 좀 실망스러우시겠지만 최근 이용하는 단골 미용실은 국회 이발소입니다. 스타일은 전문가가 만들어줄 수도 있지만, 결국 지나온 삶이 스타일을 결정하는 거 같습니다. 어디서 머리를 다듬든 인생이 보여주는 스타일은 변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이용하는 양복점도 없습니다. 주로 기성복을 사서 입습니다. 대체로 맞는 편입니다. 요즘은 살이 많이 빠져서 입던 옷을 수선해서 입기도 합니다. 마음은 스타일을 통해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행사마다 모임마다 만나는 분들을 생각하면서 그분들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 시장에 가도 점퍼보다는 저를 만나러 오시는 분들에 대한 예의로 양복을 입습니다. 흰색 와이셔츠와 정장을 즐겨 입는 편입니다. 옷은 ‘자신을 표현하는 언어’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저는 워낙 오래된 거라 의식을 못하고 있었는데요. 제가 양복 차림에 배낭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고 많은 분들이 특이하다고 하세요. 한 10년째 메는 가방인데요. 별 게 다 들어 있습니다. 밀린 신문과 잡지, 각종 메모, 칫솔 등 특별할 거는 없는 잡다한 물건들이 늘 가득 차 있어서 좀 무거워요(웃음). 대선 출마 선언 이후 생각보다 스타일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다섯 살 때부터 2:8 가르마였는데, 이마를 가렸던 그 앞머리가 약간 올라간 것 정도? 그리고 평소에 답답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던 넥타이를 지금은 이런저런 이유로 자주 해야 하는 것 정도라고 할까요? 전문가에게 의뢰한 세 후보의 이미지 컨설팅 (퍼스널 브랜딩 그룹 YHMG 윤혜미 대표) 이미지를 개선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균형감과 특징 살리기다. 얼굴 전체의 균형감을 위해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비대칭의 윤곽이나 피부 보정을 위해 메이크업을 하기도 한다. 화면에 노출되는 모습과 실제 모습은 다르기 때문에 몸 전체의 균형을 잡아서 표현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지만, 정치인에게 미디어를 잘 활용하는 방법으로도 몸의 균형감을 살리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예를 들어 바스트 컷 이상이 화면에 비치는 경우가 많은 정치인들의 이미지는 키가 크고 작은 것보다는 주변 사람들과 밸런스를 효과적으로 맞추는 것이 급선무라 하겠다. 체구가 작은 후보자를 보필하는 사람은 그보다 너무 커서 상대적으로 후보자가 더 작아 보이게 해서도 안 되고, 후보자보다 튀는 의상이나 중심이 되는 표현의 스타일링을 해서도 안 된다. 대중매체의 다양화로 TV 토론회가 많이 진행되는데, 이때도 균형감이 중요하다. TV 화면 비율을 고려했을 때 어깨와 얼굴의 비율이 3:1이어야 시청자들의 시선을 후보자 얼굴에 집중시킬 수 있다. 따라서 재킷의 디자인이나 헤어스타일 등을 활용해 균형 잡힌 비율을 맞춰주는 것도 필요하다. T.P.O.에 맞는 옷차림 전략도 신경 써야 한다. 의상에 메시지를 담고 스타일링한다는 것은 국민과의 소통에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하는 외적 신뢰도를 형성할 수 있다. 농민과 시장 상인들을 만나러 갈 때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이지웨어를 선택하고 이질감을 주는 사치품을 삼가는 것이 좋다. 의상을 고를 때는 색상도 중요하다. 단순히 색이 주는 의미를 이용해 넥타이를 골라야 하지만, 본인에게 맞는 색을 고르고 그 색을 이용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가장 올바르다. 예를 들면 여성들이 많은 자리에는 부드러운 이미지를 줄 수 있는 핑크 컬러를 활용한다. 핑크는 가장 수동적인 색상으로 친밀감과 함께 자신과 타인에 대한 적의를 누그러뜨리고 따뜻함과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 반대로 남성이 많은 곳에는 블루 컬러가 좋다. 블루는 남성들에게 가장 사랑받고 선호하는 색상으로 존경, 충성, 성실, 신뢰 등을 상징한다. *박근혜 후보의 올림머리 자신의 단점을 최대의 무기로 만드는 이미지 쇄신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다. 박근혜 후보에게 가장 큰 메리트이자 가장 큰 핸디캡은 ‘여성’라는 점이다. 자신만의 스타일 센스를 고수하고 지키는 것은 좋으나, 국민과 소통의 도구로 이미지를 활용한다는 차원에서 시대에 맞는 패션을 선보이거나 헤어스타일에 변화를 보여줄 필요도 있다. 평소에는 편안하면서도 실용적인 스타일을 좋아한다는 박근혜 후보가 대선의 행보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V존에 메시지를 담고 어깨의 각을 살려야 한다. 여성이라는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켜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최대의 장점으로 만들기를 기대한다. *문재인 후보의 백발 정치인보다는 학자의 풍모를 풍긴다. 백색의 머리칼에 둥근 안경으로 짙은 눈썹과 맑은 눈을 가리지 않는 센스 또한 돋보인다. 그러나 그만의 색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2012년 국민이 원하는 대통령상에 부합하는, 조금은 강한 카리스마를 위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연구해 보여줄 필요가 있다. 자신만의 이미지나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언제 어디서나 무난해 보이는 비서실장의 패션은 이제 버릴 때가 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그는 누군가를 보필하는 사람이 아닌, 한 나라의 국민을 이끄는 강한 리더로서의 자존감을 소통의 도구로 강화시킬 차례가 아닌가 한다. *안철수 후보의 화이트 셔츠 관상학자들이 좋아할 법한 코와 얼굴 전체에서 풍기는 후덕함은 호감형 인상을 준다. 둥글둥글한 인상부터 다듬어지지 않은 긴 머리, 넉넉한 셔츠에 헐렁한 슈트가 그의 서글서글함을 더욱 심화시켜준다. 크지 않은 키에 둥글둥글한 몸 선은 우리나라 중년의 대표적인 체형에 가깝다. 정형화되지 않은 노타이에 슈트 차림으로 어디서나 얼굴에 미소를 머금는다. 늘 입던 블루나 화이트 계열의 모노톤 셔츠와 블랙 혹은 그레이 계열의 슈트로 대한민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편안함으로 겸손함을 표현한다. 하지만 방송과 매체의 전달력을 높이려면 무채색의 세련됨보다 지금 안 후보에게 부족한 파워풀한 변신의 이미지를 채도 높은 강열한 색으로 돋보이게 해줘야 한다. Q 대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유명 점술가의 점, 운세인데요. 세 분의 2012년 하반기 운세, 기운이 궁금합니다. 또 운세상으로는 누구의 당선 확률이 가장 높은지도 궁금합니다. _분당구 서현동에 살고 있는 두 딸의 엄마 55세 김미진씨 생년월일시로 본 3인의 사주(청송철학관 김정섭) 편관역마격(偏官驛馬格) 혁명가 사주. 여성의 몸으로 남자들 사이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주다. 그러나 든든한 배경이 없어 항시 외로움을 타는 운명이다. 측근에서 모두 남자 역할을 하려 한다. 조력자가 많아 오히려 중심점을 잡지 못한다. 즉 사공이 많아 배가 좌전우전하는 형국. 어머니상으로 매우 이상적이다. 두루 베푼다 하여 어려울 때마다 지혜롭게 처신한다. 인수재격(印綬財格)으로 글공부를 많이 해 재물을 만드는 사주다. 사람을 가르치는 학자의 운명이다. 환경이 잘 조성된 고고한 난초의 사주다. 도와주는 사람이 많다. 주변 사람들이 자양분을 주고 거름을 주어 본인을 빛나게 해준다. 그러나 주변에 학자들만 모여서 문제다. 그중에는 철새가 많다. 연년생생격(年連生生格)으로 평생을 만들어가는 운명이며 오행연주격(五行連珠格)으로 다섯 가지 오행이 구슬처럼 꿰어져 있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좋은 사주다. 이런 사주는 자기주관과 철학이 뚜렷하다. 때로는 고집이 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를 지지하는 든든한 세력들이 모여 제2의 도약을 위해 움직인다. 앞으로 3개월간 사주의 기운이 세다. 단, 11월에 큰 모사에 주의해야 한다. 2013, 2014년의 국운경제가 힘든 건 올해가 마지막이다. 2013년 계사년에는 합(合)이 들어온다. 늘 싸우기만 했던 하늘과 땅이 합이 된다. 우리나라가 국제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빛낼 시기다. 국민이 대통령을 도와주면 줄수록 세력은 커진다. 더욱이 2014년은 갑오년이다. 꽃봉오리가 피는 시기다. 구태의연했던 60년 모사 정치가 끝난다. 철새, 기러기들은 역사 속에 사라진다. 또 통일의 초석을 이룰 수 있다. 대선 후보 부인 2인의 관상 (수원과학대학교 교양과 김태균 교수) 대선주자뿐만 아니라 그들의 부인은 어떤 사람들일지 궁금하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얼굴이 될 예비 퍼스트레이디 두 사람의 관상을 의뢰했다. 사진으로 보는 관상은 한계가 있으나 김태균 교수의 40년 경험을 바탕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해보기로 했다. 문재인 후보의 부인 김정숙 이마의 명궁이 솟아 남편의 뜻을 존중하고 출세시키는 현모양처형이다. 얼굴 전체 인상도 수더분하고 부드럽다. 이런 관상은 남편의 일을 신뢰와 존경의 마음으로 뒷바라지하고 결코 간섭하지 않는다. 본인의 주관이 없어서가 아니라 듣고 보는 것을 가슴에 새기고 밖으로 잘 표현하지 않는 성향 때문이다. 남의 어려움을 잘 들어주는 덕성도 있어 상대방에게 각을 세우며 대립하지 않는 원만한 성격의 소유자다. 현재의 운세와 앞으로의 운세 모두 살아온 과거보다 더 강하고 화려해 보인다. 안철수 후보의 부인 김미경 눈이 매우 선명하고 맑아 보인다. 전택궁이 넓고 시원하다. 눈썹이 좀 옅은 편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주관이 매우 뚜렷하고 본인의 판단에 확신이 차 있다. 실제 이런 경우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자신의 생각을 확신하므로 남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코와 입의 모양이 활동적이며 비판 성향도 적지 않은 편이다. 현재 50세의 운은 물론, 앞으로의 운세도 강한 편이라 남편의 상황과 상관없이 본인의 일은 지속적으로 잘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Q 얼마 전 지인이 고민 끝에 개명을 했습니다. 사람마다 이름에 따라 정해지는 삶과 운명이 있다고 하던데, 대선 후보 3인의 이름에는 각각 어떤 뜻이 있는지와 이름과 연관된 성격은 어떤지 궁금해지네요. _두 아이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는 일산 맘 36세 오영혜씨 성명학관점에서 본 3인의 특성(비결원 안희성 원장) 한 사람의 이름에는 단순히 길흉을 넘어 사주와 성격, 일생의 큰 흐름과 주변 관계까지 아우르는 운명이 담겨 있다. 좋은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추운 겨울날 따뜻한 코트를 입고 있다거나 평생 분실할 걱정이 없는 부적을 한 장 갖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만큼 이름이 그 사람의 운을 좋은 방향으로 인도해주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수리성명학(이름의 각 글자, 한자 획수의 합으로 길한 수와 흉한 수를 따지는 것)과 부족한 오행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이름을 지어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점차 한글을 음양오행으로 바꿔 기운의 조화를 꾀하고, 사주에 맞는 좋은 소리의 기운 값을 찾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이름을 감정하면 그 사람의 성격, 재물복, 직업, 평생운 등을 비교적 잘 짚어낼 수 있다. 특히 이름을 40년 이상 지속적으로 불러줬을 때, 소릿값의 영향이 절대적으로 커져 한 개인의 정확한 운명을 감정할 수 있게 된다. 이에 국내 성명학 분야의 1인자이자 동방대학원대학교 성명사주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안희성 원장을 만나 한글소릿값으로 감정한 대선 후보 3인의 면면을 들여다봤다. 종전 수리작명법으로 보면 각 한자의 획수 합이 딱 맞게 좋은 수로 나오는 잘 지은 이름이다. 한글소릿값의 기운으로 따져봤을 때도 이름 자체가 아주 잘 지은 상생을 이루고 있다. 가장 큰 특징은 명예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장군감으로, 용의 꼬리보다는 차라리 뱀의 머리가 되기를 좋아한다. 천성은 여자지만 남자 같은 성격의 소유자이며, 고지식한 면과 굳은 의지, 한번 마음을 먹으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추진력, 욱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화를 내는 등 남성적 이미지에 가까운 성격을 갖고 있다. 조직을 이끄는 리더십도 뛰어나며 강력한 카리스마를 형성하는 이름이다. 정확하고 조심성이 많은 대신 융통성이나 포용력은 부족한 편이다. 사주명리학에 나오는 여러 가지 살(殺) 중 하나인 괴강(魁?) 성품이 이름에 들어 있다. 괴강 성격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강하게 저항하며 뜻을 세우면 굳건히 밀고 나가는 편으로, 순국열사 같은 이들의 성품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고집이 무척 세고 자기 주관 또한 뚜렷하다. 그러면서도 종합적으로 볼 수 있는 눈과 다양한 시각을 갖고 있어 모두가 앞으로만 향할 때 옆, 뒤를 함께 볼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온화한 외모와 대중 친화적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고독을 즐기며 속마음을 남에게 쉽게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다. 이름만 놓고 봤을 때 매우 논리적이며 똑똑한데다 순발력이나 표현력까지 좋아 한마디 말을 하면 그 말이 날개 돋친 듯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다만 그런 점에서 성급하게 말이나 행동을 해 후회하는 경우가 많으니 항상 주변 사람들과 논의해 자신을 가다듬는 것이 좋다. 종전 작명법에서 말하는 글의 획수에 따른 조화가 원격, 형격, 이격, 정격 모두 잘 짜여 있다. 안철수라는 이름을 주관하고 있는 기운은 ‘나라의 녹을 먹는다’라는 ‘관(官)’으로, 그중에서도 편관에 해당된다. 국가시험 같은 공식적 통로를 통하지 않고 공무원이 되는 편관(偏官)은 예전의 과거 급제나 지금의 공무원 시험·고시 등으로 벼슬길에 오르는 정관(正官)과 달리 선출직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등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름에 많이 보이는 관(官)이 오행이 나타내는 성분 중 하나인 식신(食神)에 의해 극(剋)이 심하게 이루어져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이 이름은 성격이 꼼꼼하고 치밀하며 섬세하고 여린 듯하지만 뚜렷한 자기 주관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세심한 점이 자칫 타인에게는 우유부단하게 비칠 수도 있지만 누구보다 확실한 소신과 프라이드를 가진 사람이다. 주변 사람들에 의해 떠밀리거나 끌려다니는 것 같아 보여도 자기 의지대로 움직인다는 뜻이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것 같으나 타인의 평가나 시선을 중요시 여겨 멋, 품격, 품위를 지키려 노력한다. Q 저는 사상체질의학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요. 사람마다 체질에 따라 건강은 물론 생활습관 및 성향, 성격, 특성 등이 모두 다르게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대선 후보 3인은 각각 어떤 체질적 특성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_광화문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48세 김남순씨 사상체질의학으로 본 3인의 성격(김문호 한의원 원장) 아침부터 밤까지 전국을 누비며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나고, 하루 24시간을 세세히 쪼개 다양한 일정을 소화해내고 있는 대선 후보들을 바라보며 그 강인한 체력과 활동력에 놀라울 때가 있다. 남들보다 두세 배는 철저하게 건강관리를 해야 할 것 같은 대선 후보들. 건강이 삶에 미치는 영향력을 떠올려봤을 때 대통령 선거를 앞둔 지금 이 시점에서 과연 대선 후보 3인방은 어떤 체질을 타고났으며, 또 그 기질이 각자 삶의 지형을 어떻게 바꾸어놓았는지 살펴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오랜 기간 국회의사당 의원회관에서 한방진료실을 운영하며 정치인들의 건강을 살펴왔고, 지금도 국회 앞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며 ‘의원 보는 한의사’로 TV·라디오 패널로 활동하고 있는 김문호 원장이 직접 연구하고 체득한 내용을 바탕으로 대권주자들을 꼼꼼히 분석했다. 전형적인 태양인에 가깝다. 육체적 체질은 폐대간소(肺大肝小)라 하여 폐기관지 계통이 강하고 간장이 약한, 다시 말해 애간장을 끓여 마음을 쓰는 체질을 타고났다. 생각이 무척 많기에 그만큼 신중할 수밖에 없다. 겁이 많지만 비겁하지는 않다. 폐기관지가 강하다는 말은 담대하고 그릇이 크다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건강상으로는 대장, 간, 췌장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 폐기관지 계통이 민감하고 쉽게 충혈되는 편이기 때문에 그 사촌 격인 대장 쪽에 문제가 생겨 용종이나 대장암이 발생할 수도 있다. 간장 계통의 용량이 적어서 스트레스를 간에서 다 분해하지 못하면 급성 타격이 올 수 있다는 점 을 명심할 것. 또 간의 부담이 췌장이나 담으로 옮겨가면 당뇨병, 황달의 우려가 있다. 간의 열독이 넘치면 혈압, 고혈압, 중풍, 뇌경색 계열의 병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이런 사람일수록 그 열을 식혀주는 폐기관지 계통이 튼튼해 스스로 보완 작용을 하게 된다. 태양인으로서의 특성을 정신적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박근혜 후보는 양질의 태양인에 속하는데, 다른 세 체질의 장점을 모아놓은 경우라 볼 수 있다. 소양인의 부지런함, 소음인의 내성적이면서도 깊은 사고, 태음인의 장기적인 판세를 내다보는 지혜로움을 함께 갖추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태양인과 태음인의 복합 체질이라고 볼 수 있다. 객관성을 담보하는 데 있어서는 자칫 편협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는 전형적인 태양인보다는 훨씬 유리하다. 태음인은 대체로 머리가 좋다는 평가를 받는데, 이는 단순히 IQ가 높다는 뜻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이 뛰어남을 의미한다. 그저 상황을 분석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향후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을 예상하고 그에 따른 대비책까지 마련해 판세를 주도해나간다. 문재인 후보는 전체적으로 이 흐름을 이끌어나가는 것이 능숙한 사람으로, 고집은 있되 아집은 부리지 않는 성격이다. 강인한 육체가 주어진 반면 정신적인 영혼은 무척이나 다양한 체질이다. 아주 순수하면서도 고집스러운 근성이 혼재돼 있는데, 마치 어른과 아이가 함께 내재돼 있는 형상이다. 체질적으로 폐대간소한 태양인의 특성과 간대폐소한 태음인의 특성을 함께 갖고 있기에 양쪽 모두 강해서 생기는 특성이 나타날 수도, 반대로 양쪽 모두 약해서 생기는 건강상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건강하려면 아주 건강할 수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는 체질이란 뜻이다. 체력과 스트레스 관리를 제대로 한다면 무병장수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활동을 시작한 이상 이미 바쁜 생활과 스트레스 누적이 심할 것이므로, 앞으로 건강과 마음 관리가 중요하다. 또 문 후보 개인적으로는 정치적 동지이자 친구를 잃게 된 데 대해 지켜주지 못한 한이 내면에 크게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외부에 대한 분노나 적개심보다 내면적 죄책감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훨씬 큰데, 보통의 사람들은 그러한 감정을 떨쳐내기 위해 더욱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하지만 문 후보는 터뜨리기보다는 오히려 흡수해 새로운 에너지로 바꾸어내는 사람이다. 태양인과 소음인의 특성을 함께 갖고 있다. 태양인의 리더적 기질과 소음인의 부드럽고 침착한 성격이 복합돼 있다. 대선 출마를 공식화하기까지 상당히 오래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내성적이고 겁이 많으면서도 무척이나 신중한 체질적 특징에서 연유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소음인은 결과에 대한 확신이 들 때나 혹은 자신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꼼꼼히 따진 후에야 행동을 취하는 편인데, 안 후보가 그러한 문제를 이겨내고 출마 결정을 내린 데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자 하는 태양인의 사명감과 경영자로서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체질적 측면에서 살펴봤을 때 안 후보는 누구보다 고집이 센 사람이다. 물론 협소한 의미의 자기중심적 고집이 아니라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고집이다. 즉, 신념이 강한 유형인 셈이다. 그가 사업에 크게 성공한 것도 모든 일에 꼼수를 쓰지 않고 자기 신념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혹자들은 문·안 후보의 단일화가 정해진 수순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안 후보는 체질상 그런 정치판의 짜여진 계산과는 맞지 않는 사람이다. 현재 강하게 부르짖고 있는 정치 개혁, 정당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자신을 불쏘시개 삼아 끝까지 갈 마음을 먹고 있을 것이다. 감시자 혹은 경계자의 역할을 자처하는 성격이 내재돼 있고, 사회적·시대적 요구에 순응해 신념을 이끌어나가는 기질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건강상으로는 급성간장 질환을 주의해야 한다. 심장에 갑작스러운 부담이 올 가능성도 크다. 체질적으로 술이 몸에 안 받는 편이므로 억지로 참고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 안 후보에게 가장 좋은 보약은 바로 잠이다. 아무리 일정이 바쁘더라도 밤에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글 / 김지윤, 이유진, 이연우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사진 제공 / 각 후보 대선 캠프>
[대선 후보 직격 인터뷰]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
[대선 후보 직격 인터뷰]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
2012. 11. 06 17:37 화제
ㆍ노련한 정치 9단, 주부의 마음을 헤아리다 서울 서교동 한 갤러리에서 만난 박근혜 대선 후보는 어떠한 질문에도 지체 없이 답을 돌려주었다. 특히 주부들의 골머리를 앓게 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묻어나는 답변은 정치 9단의 내공을 실감케 했다. 정작 여성 월간지를 언제 읽어보았는지는 묻지 못한 것이 지금 이 순간 아쉬움으로 남는다. 인터뷰가 있던 지난 10월 13일은 대권에 도전한 빅3 후보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날이었다. 2012 과학기술나눔마라톤대회에서 두 후보를 만난 소감에 대해 묻자 박근혜(60) 후보는 “앞으로 그런 일이 종종 있지 않겠느냐”라는 짧은 답을 미소와 함께 건넸다. 수년간 다져온 몸 튼튼, 마음 단단 정치인 체질 ‘대세론’의 순풍을 타고 일찌감치 대한민국 첫 여성 대통령의 꿈을 향해 뛰기 시작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비교적 여유 있는 행보로 대선에서 레이스에 임하고 있다. 위기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선거의 여왕’의 승부수는 이번 대선 최대의 관전 포인트다. Q 자기 관리가 철저하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체력뿐만 아니라 스트레스 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A 요즘은 시간이 없어서 못합니다만, 한때 테니스와 탁구를 좋아했고 더 젊었을 때는 수영, 배드민턴 등을 했어요. 그런 게 쌓여서 지금의 제 체력이 되지 않았나 싶네요. 음식은 골고루 먹고, 특히 현미밥을 즐겨먹어요. 아침은 꼭 챙겨 먹고요. 선거 때 주로 차 안에서 김밥이나 도시락으로 끼니를 해결하다 보면, 흔들리지 않는 곳에 편하게 앉아서 밥만 먹을 수 있어도 그게 보양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마음을 다스리는 비법이라고 하면 어려서부터 워낙 많은 일을 겪고 자라 내공이 쌓여서 그런지 마인드 컨트롤이 자동적으로 됩니다. 이런 생각도 해요. ‘만약 신이 있다면, 평생 한 사람에게 주는 고통의 총량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힘겨운 일이 생기면 어려울 때를 생각하면서 마음을 편안히 하고, 되도록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Q 주말이나 특별한 일정이 없을 때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시나요? A 여유가 있을 때는 주로 독서나 단전호흡같이 마음을 다스리는 일에 시간을 많이 쓰는 편이에요. 재미없어 보일지 모르겠지만, 제가 지금까지 건강한 삶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비결 가운데 하나죠. 또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거나, 트위터에 올라온 글도 읽고, 제 생각을 올리고 하는 일에도 시간을 많이 보내는 편이에요. 저도 나름 이공계 출신이라(웃음). 우리 정치인들 중에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제가 제일 먼저 만들었고, 트위터나 페이스북도 빨리 시작했어요. 싸이월드 일촌들도 많고 ‘트친’, ‘페친’도 많아서 올라온 멘션들 읽고 저도 몇 줄 올리다 보면 시간이 휙 지나가기도 합니다. Q 조카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시다고요. 조카가 가장 사랑스러울 때는 언제인가요? A 조카가 태어나서 저와 처음으로 눈을 마주쳤을 때, 그때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어요. 조카가 크면서 여러 가지 재롱을 부린 것도 기억이 납니다. 그림을 하나 그렸는데, 거기 어울리지도 않는 장소에 엉뚱하게 강아지 한 마리를 그려놨기에 왜 거기에 그렸냐고 했더니, “그건 제 맘이에요”라고 해서 웃은 적이 있어요. 생일에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나면, 케이크가 없을 때도, 허공에 대고 “후후후~” 하며 촛불을 끄는 척하기도 해요. 운명과도 같았던 정계 입문 박근혜 후보에게 ‘인생에서의 모험’은 언제였느냐고 물었더니 비상대책위원회를 맡아서 당의 색깔을 바꿀 정도로 과감한 결단을 내렸던 시기를 이야기했다. 이에 ‘소소한 일탈’을 말하는 것이라고 바로잡자 그제야 웃음을 터뜨리며 “노래방에 많이 갔었지요”라며 답했다. 노래방에 ‘한창’ 다닐 때 애창곡은 김종환의 ‘존재의 이유’였다고. Q 정치 인생 중 들은 가장 황당했던 루머가 있다면요? A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애를 낳아서 그 애가 서른 살이라는 그런 허황된 네거티브가 있더라고요. 말도 안 되죠. Q 학창 시절 친구들과는 가끔 만나시나요? 그분들을 만나면 자신의 삶과 비교도 하게 될 텐데, 그땐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궁금합니다. A 사실 거의 만나지 못해요. 특히 정치를 시작하고 나서는 개인 시간이 없어서 더 어렵습니다. 얼마 전에 성심여고 동창회가 있어서 다녀왔는데, 다들 평범하게 사는 모습이 참 좋아 보이더라고요. 나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부럽기도 했고요. 하지만 인생이란 것이 원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겠죠. 평범한 삶은 아니지만, 나라를 위해 모든 시간을 쏟을 수 있는 장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Q 결혼을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으셨나요? A 20대 시절 부모님 살아 계실 때였죠. 그 뒤에는 그런 거를 어렴풋하게나마 생각하고 할 상황이 아니었어요. Q 초등학교에 청와대에 들어가서 평생 공적인 삶을 사셨는데, 다시 태어난다면? A 평범하게(웃음), 정치인 아닌 삶을…. Q 인생의 갈림길에서 정치인의 삶을 선택하게 된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A 솔직히 저 자신이 선택하고 말고 할 것이 없었습니다. 모든 게 한꺼번에 몰려왔기 때문이죠. 처음으로 인생의 갈림길에 섰던 때는 아무래도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인 것 같아요. 프랑스에서 유학 중이었는데, 갑작스러운 비보를 듣고 정신없이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공부를 중단해야 했고, 어머니의 빈자리를 메워서 5년 동안 퍼스트레이디로 살아야 했지요. 모든 것이 국민과 관련된 자리라서 저 자신의 인생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버지마저 돌아가시면서 평범한 서민의 삶으로 돌아가 살다가 IMF 사태 때 국가 부도 위기를 보면서 정치 입문을 결심했습니다. Q 한 개인의 삶으로 봤을 때는 젊었을 때 큰 불행을 겪으신 건데, 그 아픔을 어떻게 극복하셨는지요? A 그때는 내가 미치지 않고 사는 게 신기한 일이다, 라고 할 정도로 견디기 힘들었어요. 그럴 때는 두 가지 길이 있는 거 같아요. 자포자기해서 아예 쓰러져버리는 것과 고통을 딛고 일어나 뭔가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목표를 세워서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요. 당시에 제가 책을 엄청 많이 읽고 고전을 찾아 읽으면서 마음 다스리기를 했어요. 그림 하나를 보더라도 예를 들어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를 보면서 멋있다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거친 파도에도 굳건하게 서 있는 바위처럼, 나도 저렇게 살 거야(웃음)’라고 마음 다지기를 많이 하니까 그게 마음의 근육이 되더라고요. Q 그런 일련의 사건이 박 후보님께 남긴 흔적이나 트라우마는 없을까요? 인상이 차갑다거나 성격이 폐쇄적일 거라는 편견이 있기도 한대요. A 사실은 그런 게 저에 대한 낙인찍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건 있죠. 세상에 나와서 경험이 너무 없으면 순진한 마음에 모두가 자기 마음 같은 줄 알고 속아 넘어가기도 하고 뒤통수도 맞고 그러잖아요. 생각지도 못한 아픔과 배신이란 것을 겪고 나면 매사에 신중하게 되죠. 그렇다고 의심을 하는 건 아니지만, 사람을 덜커덕 믿진 않아요. 왜냐면 경험이 쌓였으니까요. 그게 신중한 거지, 폐쇄적인 건 아니지요. Q 예전에 어머님께서는 ‘청와대 내의 야당’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대통령께 쓴소리를 많이 하셨다는데, 곁에서 그런 조언을 해주는 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안 드세요? A 다른 후보들은 부부가 뛰고 계시죠(웃음). 그것도 좋은 일이죠. 남편이 못 가면 부인이 가고 그런 것도 좋은데, 저는 지역구 선거 때도 혼자 다 했어요. 더 많이 뛰고 더 많이 가면서요(웃음). 국민의 행복을 지켜주고 싶다 “저는 가족이 없지만… 가족을 행복하게 지켜드리고 싶다.” 박 후보는 이렇게 말했지만, 자신의 인생이 희생이나 포기와는 거리가 멀다고 못을 박았다. ‘나의 행복과 나라를 위한 행복은 따로 있지 않다’라는 생각은 아주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다고 했다. ‘개인적인’이라는 토를 굳이 달지 않으면, 어떠한 질문의 답이든 정치와 국민으로 향했던 이유였다. Q 대권 도전에 나서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정치생활을 하면서 저같이 여러 국민을 전국적으로 다니면서 만난 사람도 없을 거예요. 당이 큰 위기를 겪을 때 제가 전면에 나서서 국민께 호소를 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저를 믿어주시고 저희 당을 살려주시는 과정을 보면서 정말 감사했어요. 그렇게 국민과 만나서 껴안기도 하고 마주 보고 얘기도 나누면서 감동적인 순간들이 대단히 많았거든요. 그 마음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정치 인생 마치기 전에 국민께 반드시 보답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어요. 또 제가 따로 가족이 없잖아요. 어머니, 아버지도 젊었을 때 갑자기 돌아가셨고요. 제 마음 한구석에는 오순도순 살아가는 가족의 모습이 소중하게 담겨져 있어요. 놀이터 같은 곳에서 가족들을 만나면 그 행복을 지켜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Q 박 후보님께서 독재적인 카리스마를 갖고 있다고 표현하는 이들도 더러 있습니다. A 정치를 하는 데 유연하고 부드러운 것도 필요하지만 강한 것도 필요해요. 그게 없으면 어떤 것 하나도 제대로 못해낼 겁니다. 국민의 공감대를 얻어서 소신껏 결정한 일이 있다면 그대로 밀고 나가서 결론을 봐야지 주변에서 바꾸자고 한다고 해서 흔들린다면 무엇 하나 제대로 될 수가 없을 겁니다. 그럼 국민도 믿을 수 없을 거고요. 저는 그런 식으로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고 보거든요. 이해관계에 얽힌 사람들이 저를 공격하더라도 강하게 소신대로 가는 게 옳다는 거죠. 그걸 가지고 고집이나 불통이라고 한다면, 정말 그런 식으로는 정치권에서는 해낼 수 있는 일이 없을 거예요. Q 도대체 ‘수첩’에는 어떤 내용들을 그렇게 빼곡히 적으시는 겁니까? 그 내용은 별도로 저장·관리를 하시는지요? A 제 수첩 안에는 민생 현장에서 국민들로부터 들었던 애로사항이나 고충 같은 것과 정책적인 내용들, 제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많이 적혀 있습니다. 국민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런 수첩이 꼭 필요해요. 그냥 한 번 적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녁에 다시 정리해서 담당자들에게 개선할 수 있는지 챙기도록 부탁합니다. Q 여성 정치인으로서 한 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요? A 2004년에 제가 당 대표를 맡고 있을 때, 한 여성 당직자가 야근을 해야 하는데 어린이집에 두고 온 딸을 돌볼 사람이 없어 여기저기 다급하게 전화를 돌리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됐어요. 다음날, 저는 회의에서 어린이집 설립을 공식적으로 제안했는데, 당사에 공간이 없고 투자 대비 효과가 미비하다는 이유로 반대 의견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저는 그때 이렇게 얘기했어요. “어린이집 하나 없는 정당에서 무슨 보육정책을 논합니까?” 그렇게 해서 2004년 7월 1일, 우리나라 정당 사상 최초로 당사 안에 ‘신나는 어린이집’이 문을 열게 됐습니다. 한 번씩 거기를 가면 아이들이 저를 고모라고 부르면서 함께 놀았는데, 정말 행복했어요. Q 일부에서는 박 후보님께서 결혼과 출산의 경험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여성 유권자들과의 공감이 부족하지 않겠나, 하는 우려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아울러 우리나라 여성들, 특히 주부들에게 가장 절실한 정책이나 변화는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A 그런 식이면 남성 정치인들은 아예 여성과 공감이 전혀 없지 않을까요?(웃음) 중요한 것은 경험의 유무가 아니라 얼마나 그 사안에 대해 절실한 마음과 진정성을 갖고 하려는 의지가 있느냐, 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여성으로서 너무나 많은 짐이 우리나라 여성들의 두 어깨를 누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요. 여러 가지 여건은 제대로 구비돼 있지 않은데 여성이 해야 할 일, 여성에게 요구하는 일들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저는 여성의 행복을 위해 임신부터 양육까지 국가가 책임지는 제도와 환경을 만들 겁니다. 우선 여성의 임신과 육아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 임신기부터 출산 이후까지 종합적인 지원 체계를 마련하고, 임신기 근로시간 단축제를 실시해서 엄마들이 마음 편하게 출산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하며, 아빠의 달을 도입해서 아빠도 출산과 양육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할 생각입니다. 또 획일적이 아닌 여성들이 원하고 바라는 보육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이를 맞춤형 보육 시스템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가령 전업주부이신 분들도 아이들을 잠깐 맡길 수 있도록 하고, 파트타임으로 일하시는 분들도 이용할 수 있는 그런 시스템으로 전환할 계획입니다. Q 최근 주부들은 뉴스 보기가 겁난다고 합니다. 성폭력 등의 강력 범죄가 잇따르고 있는데요.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어떤 대책을 가지고 계신가요? A 제가 당 대표를 하던 2005년 4월 국회 대표 연설에서 성범죄자들에게 전자발찌를 채우는 ‘전자발찌법안’을 처음으로 제안했습니다. 당시 성범죄자들의 인권 보호를 이유로 반대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동이나 여성에 대한 성폭력 범죄만큼은 철저하게 예방하고 처벌해야 한다는 생각에 결국 통과시켰습니다. 전자발찌법안이 시행된 이후 성폭력 재범률이 많이 줄어들었어요. 그런데 이 제도를 도입하기 이전의 성범죄자에게는 전자발찌를 채울 수 없기 때문에 끔찍한 일이 다시 발생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도 도입 이전의 성범죄자에 대해서도 전자발찌 착용을 확대하고, 신상공개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분산돼 있는 정부의 성폭력범에 대한 관리 체계를 일원화하는 것도 시급해요. 그래서 성폭력범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통합·관리하고, 각 부처의 역할 분담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동 성폭력의 주 대상이 아무도 돌봐줄 사람이 없는 맞벌이 부부나 저소득층 자녀들입니다. 이 아이들에 대한 특별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방과 후 어린이 돌봄 서비스와 가정 내 아이 돌보미 파견 사업을 확대하겠다고 약속드렸는데, 반드시 실천하겠습니다. Q ‘박근혜의 국민행복캠프’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박 후보님께서 생각하시는 행복 또한 남다를 듯합니다. A 저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즐거움을 느낄 때 행복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행복한 국민이 만드는 것이 국가경쟁력이죠.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 당하겠어요? 그 사람은 실력이 좋아지지 말라고 해도 좋아집니다. 그런 국민들이 만드는 가치 창출의 합이 GDP가 되어야 합니다. 금융, 부동산 등으로 거품을 만들고, 그것을 합해서 GDP라고 하니까 이 GDP의 크기가 국민 행복과 연결이 안 되는 것이죠. 지금은 창의성이 요구되는 시대인데, 우리 국민은 신명이 나지 않으면 잘 안 되는 국민이에요. 신명이 나고, 재미가 있을 때 창의성이 나오는데, 그게 우리 국민성과도 맞습니다. 국가는 그렇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죠. 그게 제일 중요한 할 일입니다. 쓸데없는 규제도 없어야 하고, 법도 공정하게 누구나 지켜야 하며, 한 번 결정한 것은 신뢰가 가도록 지켜야 하고요. 이 모든 것이 국민을 행복하게 하고, 국가경쟁력이 높아지게 하는 굉장히 중요한 인프라겠죠. <■글 / 장회정 기자 ■사진 / 이주석, 종합여성지 공동취재단>
[대선 후보 직격 인터뷰]안철수 무소속 대선 후보
[대선 후보 직격 인터뷰]안철수 무소속 대선 후보
2012. 11. 06 17:37 화제
ㆍ국민이 제 삶의 멘토입니다! 9월 19일, 안철수 후보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대권주자로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민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대선 후보 대열에 뒤 늦게 합류한 터라 언론 인터뷰가 전무한 상황이었는데, 그런 그가 첫 인터뷰 매체로 여성지를 선택했다. 정치에 대한 생각부터 가족 이야기까지 안철수 후보에게 궁금했던 모든 것. 안철수(50) 후보가 지난 10월 16일 인사동의 한 카페에서 대선주자로서 여성 월간지 기자들과 첫 만남을 가졌다.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에 잘 정돈된 헤어스타일이 그동안 교수로서 보여줬던 털털한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스타일이 좀 바뀌셨나요?”라고 물었더니 “헤어 드라이하는 시간이 좀 걸리고, 넥타이 매는 일이 잦아진 정도”라고 답했다. 안 후보는 대선 출마 선언 이후, 한 달여 동안 대권주자로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처음 해보는 일들이라 진땀을 뺄 만도 한데, 이에 대해 안 후보는 “생각보다 할 만한데요? 공포영화에서도 귀신 나오기 전이 무섭지, 막상 귀신이 나오고 나면 안 무섭잖아요”라며 환하게 웃었다. 평소 일주일에 4, 5회 근력운동을 즐겨 했던 습관이 요즘 체력적으로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한다. 얼마 전 마라톤 경기를 뛰었는데, 2km를 뛸 때까지 숨도 차지 않을 정도로 체력은 자신 있다고. 특유의 재치 있는 입담으로 화기애애하게 분위기를 이끌었던 안철수 후보와의 일문일답을 공개한다. 대선 출마, 1년의 고민 끝내 내린 결론 안철수 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급상승한 것은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 이후부터다. 대중은 “현실 정치가 새롭게 바뀌어야 한다”라며 깨끗한 이미지가 강점인 안 후보에게 무한한 사랑과 지지를 보냈다. 처음에는 선뜻 정치에 나서기 어려워했던 안 후보는 4·11 총선이 끝난 뒤 깨끗한 정치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확인하고 진지하게 정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선 출마는 1년여의 신중한 검토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안 후보는 “한 번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고 후회도 하지 않는 성격이다”라며 각오를 다졌다. Q 대선을 약 3개월 앞두고 출마를 결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안 후보님의 멘토는 누구입니까? A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부터 새로운 정치, 깨끗한 정치에 대한 국민의 열망이 높고 종전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크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죠. 저에게 그러한 정치 판도를 바꿔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도 무겁게 느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고민해가는 가운데 많은 분들을 비공개로 만났어요. 농업에 종사하는 분, 나이 드신 어르신, 그리고 시장에 계시는 분들도 만났는데, 그 과정에서 그런 분들의 꿈을 제가 풀어가야 한다는 결심에 이르렀고, 지금도 국민이 내주신 숙제를 제대로 잘 풀어가야 한다는 부담을 갖고 있죠(웃음). 저의 삶에서 많은 멘토들이 있었지만, 비공개 일정에서 만난 국민들이 저를 오늘에 이르게 한 멘토라 하겠습니다. Q 출마 과정에서 ‘우유부단하다’, ‘답답하다’, ‘정치인의 목소리가 아니다’라는 약점을 꼽는 시선이 있었습니다. A 제가 고민을 할 때는 치열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고민합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직업을 자주 바꾼 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의사에서 경영자로 직업을 바꿀 때 많은 분들이 반대를 했어요. 경영은 못할 거라고요. 그때도 정말 잘할 수 있을까 6개월을 고민했는데, 그렇게 고민을 해서 결론을 내리고 ‘이제 다시는 의사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결심했죠. 그리고 경영자로서 매진했고, 직원들 월급을 걱정하면서 지난 삶을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결정과 검토는 신중하게 하지만 결정을 내린 이후에는 어느 누구보다 과단성 있게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는 성격입니다. Q 정치 인프라가 없다는 점을 가장 큰 약점으로 지적받고 있는데, 선거운동을 해보시니 다른 후보에 비해 정치 인프라가 부족하다고 느끼는지요? A 과거 정책을 만들던 캠프의 방식은 폐쇄적이고 수직적이에요. 그들이 만들어서 일방적으로 대중에게 던져주고 판단을 요구하는 방식이죠. 요즘은 여성단체, 환경단체 등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들 모임에서 본인들이 생각하는 대선 후보들의 바람직한 방향을 쏟아냅니다. 그 내용을 들어보면 현장의 진짜 경험이 묻어나죠. 몇 명의 전문가가 큰 방향만 정해주고 정교하게 다듬으면 그게 21세기형 정책 공약인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캠프를 구성한 지 한 달이 안 됐는데, 벌써 정책이 정리되고 있는 게 바로 그런 이유에요. 지금은 저희 캠프만 이런 방식을 채택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정책 공약에 대한 의견 수렴 방식이 이런 식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안철수의 영원한 지지자, 가족 안철수 후보의 힘은 가족에게서 나온다. 대학교때 만난 부인 김미경 서울대 교수와 안 후보의 보물 1호라고 밝히는 딸 안설희씨가 그 힘의 원천이다. 25년 동안 한결같이 안 후보의 곁을 지켜주면서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받고 있는 김 교수와 해외 유학 중인 딸은 그의 영원한 지지자이다. Q 부인 김미경 교수와 어떻게 만나셨는지 궁금합니다. 또 안 후보님의 대선 출마에 반대는 안 하셨는지, 내조는 어떻게 하고 계신지도 궁금합니다. A 제 아내는 대학 다닐 때 가톨릭 학생회에서 1년 후배로 만났어요. 학교생활과 봉사활동을 같이하면서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는 좋은 느낌이 들어 사귀게 됐고 결혼도 했죠. 마음의 흔들림 없이, 후회 없이 지난 25년을 함께 했습니다. 제가 정치를 시작한다고 하니 당연히 걱정을 했지만 결코 반대하지는 않았어요. 선거운동 시작하고부터는 본인도 교수이고 강의도 많지만, 시간 나는 대로 도와주고 있습니다. 요즘은 저 대신 여러 행사에도 자주 가주어 많이 고맙죠. Q 김미경 교수님은 의사이자 학자입니다. 만약 영부인이 된다면 김 교수님의 인생이 통째로 바뀌게 되는데, 이에 대한 부담감이 상당할 것 같습니다. A 제 아내는 저의 동반자이기도 하지만 교수로서 자신의 일을 갖고 있는 전문가이기도 하죠. 남편인 제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아내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은 아닌가, 늘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아내가 영부인이 된다면 직업적인 특성을 반영해 지금까지의 영부인보다 더 많은 일과 공헌을 하고, 관심사를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레이디경향」 주요 독자층은 20~40대 주부들이고, 영유아부터 중고등학생까지 자녀를 키우는 학부모이기도 합니다. 안 후보님 역시 딸을 두셨는데, 입시 경쟁이 심한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에서 어떤 교육관을 가지고 임했는지요? 또 우리나라 교육의 가장 큰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시며, 어떤 대책을 제시하실지 궁금합니다. A 딸은 저의 보물 1호입니다(웃음). 부친이 가난한 동네에서 병원을 열고 환자들을 치료해주시는 것을 보고서 감명을 받았는데, 저도 딸아이에게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려고 애썼고, 어릴 때부터 함께 책을 읽고 아이가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려고 노력했어요. 어릴 때부터 무엇을 해라, 말라 라고 일일이 지시하는 일이 없었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게 하는 것을 중요한 교육법으로 삼았습니다. 사실 지금 교육 문제가 국민들을 무척이나 고통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지나친 입시교육에, 대학을 나와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현실에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데 교육 문제는 교육제도만을 고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교육의 중요한 부분을 결정하는 사회구조, 예를 들어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 그리고 지방에도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 수 있다면, 꼭 대학에 가지 않더라도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면, 지금의 입시 과열은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Q 유학 중인 딸 안설희씨는 아버지의 정치 참여에 어떤 입장인가요? A 처음에는 반대를 했어요. 우리나라 정치가 매우 거칠고 사람을 힘들게 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버지가 정치인으로 나서는 것을 바로 찬성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열렬한 지지자들 중 한명이에요. Q 「레이디경향」의 독자들이 기대할 만한 여성 정책으로는 어떤 게 있을까요? A 저는 편견이 없는 편이라 사람들을 만나면 나이, 고향, 출신학교 등을 물어보지 않아요. 저에게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녀 성별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안 연구소를 공동으로 처음 시작한 사람들도 여성이었습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에서, 기본적으로 세상을 보는 눈 자체가 남녀 차별은 있을 수 없다고 보면 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차별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그걸 제대로 되게 바꿔나가야겠죠. 구태의연한 정치 끝내겠다 안철수 후보는 정치 경험이 전무하다. 때문에 이런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 선거에 나올 수 있냐고 의아해하는 시선들도 있다. 이에 대해 안 후보는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은 정치인이기 때문에 대통령에 당선돼도 구태의연한 낙하산 인사는 없을 것이다”라며, 이를 오히려 자신의 장점으로 내세웠다. Q 정치 경험이 없습니다. 일각에서는 국정 수행 능력을 의심합니다. 이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요? A 정치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 혼자서 대한민국이라는 큰 사회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기는 힘듭니다. 출마 이후 많은 분들이 저를 도와주겠다고 자발적으로 연락해오셨고, 현재 선거 캠프도 그런 분들로 구성됐습니다. 이들 중에는 처음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분도 있고 정치뿐만 아니라 기업, 사회, 국가 등 다양한 조직에서 실제로 일하면서 연륜을 쌓은 분들도 많습니다. 이런 분들과 함께 국정을 이끌어가는 것이기에, 정치 경험이 없다고 해서 그것을 바로 국정 수행 능력으로 문제 삼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Q 정치권의 검증이라는 걸 받아보니 소감이 어떤가요? A 검증은 당연히 거쳐야 할 과정이죠.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는 계기지만, 그게 네거티브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사실에 근거하지 않거나 ‘아니면 말고’라는 식의 검증은 단순한 ‘의혹 제기’라고 봅니다. 논문 표절 같은 부분도 의혹 제기만 한 거잖아요. 그게 사실이 아님에도 의혹 리스트에 적혀 있더라고요. 그런 게 네거티브죠. Q 박근혜 후보, 문재인 후보와는 구별되는 안철수 후보만의 장점과 차별성은 무엇인가요? A 저의 장점은 어느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은 정치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국민이 구태의연한 정치로 손꼽는 것 중의 하나가 권력을 잡게 되면 공직을 마치 전리품처럼 나누는 것입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낙하산 인사가 끊임없이 문제가 되어왔어요. 제가 대통령이 되면, 국민의 뜻에 따라 가장 적재적소의 인물들을 일하는 자리에 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대통령이 되면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가 1만 개 가까이나 된다는 말이 있다고 하는데, 법률에 의해 정해진 대통령 임명직 외에 그런 자리를 최소화하겠습니다. 또 법률에 의해 정해진 대통령의 임명권도 여러 방식으로 국민의 뜻을 물어가면서 신중하게 행사하겠습니다. Q 야권 단일화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단일화에 대한 생각과 만약 단일화를 한다면 언제쯤으로 예상하는지요? A 야권 단일화를 바라는 국민의 뜻도 충분히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일화보다 더 본질적인 국민의 요청은 ‘분열과 기만, 증오의 정치’를 그만 끝내달라는 것이 아닐까요. 정치는 국민의 삶을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중요한 분야임에도 우리 정치권은 여전히 20세기에 머물러 있어요. 따라서 정권 교체를 이루는 것과 정치 쇄신을 이루는 것 모두 중요한 문제이며, 단일화는 결코 목표가 아니라 정치 쇄신의 결과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일화를 하게 된다면 그 시점 또한 국민이 정해주시지 않을까요? 충분히 준비해야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다 안 후보는 청춘콘서트 등으로 젊은 층과의 소통을 중시해왔다. 젊은이들을 위한 중소기업 활성화 방안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도 그 일환이다. 안 후보는 젊은 층에게 새로운 도전을 위해 “남보다 시간을 두세 곱절 더 투자할 각오를 하라”라고 조언한다. Q 젊은이들에게 모범적이고 열정적인 대표 인물로 손꼽히는데, 평소 자기관리를 어떻게 하는지 궁금합니다. A 일본인 수학자 히로나카 헤이스케가 쓴 「학문의 즐거움」이란 책에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나는 남보다 시간을 두세 곱절 더 투자할 각오를 한다. 그것이야말로 평범한 두뇌를 지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라는 구절이 있어요. 저는 항상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제가 젊은이들에게 자주 하는 이야기 중에 하나는 “새로운 도전은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시간을 아끼고 잠을 줄여 충분한 준비가 돼야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저도 이와 같은 각오로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Q 안철수 후보님의 오늘이 있게 한 인생의 키워드 하나를 꼽는다면요? 또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A 제가 어떤 직업을 선택할 때 세 가지 기준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인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인가’, ‘계속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인가’이죠. 특히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인가’를 많이 생각하는데, 예전에 어떤 인터뷰에서도 드린 말씀인데요. 사회에 대한 부채의식은 어릴 때부터 책을 읽으면서 생겼습니다. 사회 구성원의 일원으로 많은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작은 역할이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어요. 저는 이름보다는 삶에 흔적을 남기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직접 쓴 책, 안랩(구 안철수연구소)이라는 기업, 가르치던 학생들 모두가 열심히 살았던 흔적이고, 매 순간마다 부족하나마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해왔다고 생각합니다. Q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복지나 급여의 차이가 많은 편이라 구직자들이 중소기업을 기피하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구직자들이 중소기업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 방안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A 전체 기업의 99.9%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이나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경로가 막혀 경제성장이 정체되고 있어요.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발전한다면 양질의 일자리는 대폭 늘어날 것입니다. 따라서 중소기업의 성장을 위해 기업의 성장 단계별 필요와 특성에 맞게 경제·사회적 자원을 적절하게 공급하는 맞춤형 성장 전략을 추진하고 싶어요. 먼저 공정한 시장경제의 질서 확립을 통해 중소기업을 대기업 집단의 독점력 남용에서 보호해 자신의 성장 기반을 확충하도록 돕겠습니다. 고위험 투자의 리스크가 있는 엔젤 투자, 벤처 투자 등에 대해 투자 손실 공제제도와 세제 지원을 도입하고 융합기술, 신성장 분야에 대한 정부 지분 투자를 확대하며, 정부의 국책연구기관을 중소기업 R&D 지원에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또 모든 정부 조달 물품은 가능한 한 중소기업, 사회적기업, 협동조합으로부터 구매하도록 하여 이들 기업의 수익성 제고를 최대한 유도하겠습니다. Q 국민이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는 부분인 국내의 가계 부채와 부동산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셨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구상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A 우리나라는 가계 부채와 부동산 경기 침체로 또 상당한 고통을 겪고 있는데요. 내년에 어쩌면 우리나라에 심각한 경제 위기가 닥칠지도 모른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입니다. 일단 경제적 위기는 온 국민이 합심해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과 대책을 경청하고, 그중에서 가장 올바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다행히 우리 국민이 IMF를 겪으면서도 놀라운 위기 극복 능력을 보여줬기 때문에 합심만 한다면 어떤 위기라도 더 훌륭한 기회로 만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 Q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관람하셨다고 들었는데, 소감이 궁금합니다. A 영화에서 왕은 신하들과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원하는 걸 주는 거래를 합니다. 천민 출신의 그림자 왕이 보기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적으로 안 맞는 거죠. 천민 출신의 왕이 국민을 위해서 상식적인 정치와 옳은 선택을 했다는 점에서 메시지의 울림이 컸습니다. 영화는 시대의 사람들과 코드가 맞으면 영화의 완성도와 함께 시너지 효과가 나죠. ‘광해’가 그런 영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이주석>
사진으로 보는 대선 후보들의 연대기
2012. 11. 06 17:37 화제
‘미래를 결정짓고 싶다면 과거를 보라’라는 공자의 말이 있다. 비록 단 한 장의 사진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메시지가 담겨 있을 것이다. 대선 후보 3인의 과거 사진을 통해 그들이 살아온 인생과 추구해온 가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 안에서 우리의 미래 또한 함께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사진 제공 / 각 대선 후보 캠프>
[대선 후보 직격 인터뷰]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대선 후보 직격 인터뷰]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2012. 11. 06 17:37 화제
ㆍ사람과 사회를 생각하는 따뜻한 원칙주의자 유신정권에 맞선 대학생으로,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선 인권변호사로, 참여정부 시절 참모로, 원칙과 사명에 따른 삶을 살아온 문재인 대선 후보는 이제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리더로서 새로운 운명에 맞서고 있는 중이다. 대선 D-60, 문재인 후보를 만났다. 부인이자 가장 든든한 조력자 김정숙 여사와 함께 인터뷰에서 한꺼풀 벗은 문 후보를 만날 수 있었다. 브라운 컬러로 재킷과 스커트를 맞춰 입은 부부가 인터뷰 장소에 들어섰다. 문재인 대선 후보는 지난 6월 대선 출마 선언을 시작으로 두 달간의 민주통합당 경선을 치렀고, 민심과 여론을 듣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숨 가쁜 대선 레이스를 달려오는 동안 줄곧 함께였지만, 두 사람이 정식으로 언론 에 모습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였을까, 고된 일정을 마치고 저녁 늦게 시작된 인터뷰에도 문 후보는 한결 편안한 모습이었고 인터뷰 역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무엇보다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모습, 그리고 확고한 정치 철학을 들어볼 수 있었던 것이 큰 수확이었다. 운명을 받아들이다 “40대 이후 최고의 일탈은 정치를 시작한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문재인 후보는 정치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참여정부 퇴임 이후에는 경남 양산에 스스로를 ‘귀향 보내듯’ 가 보금자리를 틀었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소박한 농부의 삶을 꿈꿨다. 그런 그를 다시 국민 앞에 서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그는 자신의 책 「운명」에서 ‘더 이상 절망의 시기가 반복되지 않기를 소망한다’라고 썼다. Q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가 되신 지 한 달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바쁜 행보를 이어가고 계신데, 지난 한 달 동안을 지내온 소감은 어떠신지, 그리고 그간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일은 무엇인지요? A ‘선거는 체력전’이라는 말을 절감하고 있어요. 그동안 건강관리를 꾸준히 해온 편이었는데, 워낙 강행군이다 보니 체력이 달립니다. 몸이 아프면 국민들에게 염려를 끼치는 것이라는 아내의 이야기도 듣고 있고요. 대선 후보가 된 뒤 경기도 평택에 있는 쌍용차 치유 공간인 ‘와락센터’를 찾았는데, 그곳에서 만난 한 해고자의 부인이 생각납니다. 제 이야기를 마치고 마이크를 넘겨드렸는데 말씀도 꺼내시기 전에 복받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더군요. 말하지 않아도 그 절박함이 느껴져서 저를 비롯한 그곳에 계신 분들이 모두 따라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갑작스러운 실직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와 가족들이 무려 스물세 명이나 됩니다. 해고가 곧 ‘죽임’이라는 사실에 몸이 떨렸습니다. 그들에게 국가가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몸이 떨렸고요. 대통령이 되면 국민들의 아픔을 함께 나눠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한 자리였습니다. 그분들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Q 문재인 후보님 못지않게 김정숙 여사님도 바쁜 시간을 보내고 계실 듯합니다. 정치인 아내 입문 소감은 어떤지, 요즘 하루 일정은 어떻게 되시나요? A 우선 아침 7시에 일어나 텃밭에 심은 채소에 물을 주고 아침 식사를 준비합니다. 요즘 남편 체력이 많이 떨어져서 식사는 주로 단백질 위주로 챙기고 있어요. 그러고 나서 남편이 입고 나갈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고르죠. 요즘에는 저도 공식 일정이 많아졌어요. 관심 분야부터 잘 모르는 분야까지 하루에 네다섯 가지 일정을 소화하고 나면 금세 저녁이 되더라고요. 사실 이제까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라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에요. 하지만 남편의 선택을 존중하고 저의 노력이 남편에게도 힘이 된다면 괜찮습니다. 현장에서 소중한 이야기를 들을 때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Q 최근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보시고 많은 눈물을 흘리셔서 화제가 됐습니다. 원래 눈물이 많으신 편인가요? A 요즘 눈물이 많아졌어요(웃음). 원래 영화나 휴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면 눈시울이 자주 붉어지는 편인데, 이번처럼 사람들 앞에서 대책 없이 울어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개혁이라는 것은 현실에서 이미 이익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의 반대에 늘 부딪히게 마련입니다. 그 벽을 깨는 것이 참 힘든데 그런 부분을 영화에서 보여주었더군요. 무엇보다 곳곳에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이 많았어요. 중용외교 때문에 관료들에게 공격받는 장면이라든지, 중전의 폐위를 주장하는 신하들에게 “조강지처를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말하는 장면이라든지요.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감정 수습이 안 돼서 혼났어요. 밖에는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울면서 나갈 수도 없고, 수습하는 시간이 길어지다 결국 들켰지요(웃음). Q 이번 대선이 ‘문재인의 운명’, ‘박근혜의 꿈’, ‘안철수의 생각’ 간 대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통령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기까지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은 무엇인가요? A 사실 그동안 정치가 제 운명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도 사회 변화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었죠. 그러다 현 정부 5년 동안 너무나 많은 국민들이 상처 입고 도탄에 빠지는 것을 보며 차츰 저의 사명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두 분의 서거입니다. 특히 노 전 대통령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참 힘들었습니다. 단지 슬픔 때문에 힘든 것만은 아니었어요. 검찰의 표적수사와 정치적 탄압이 있었고 민주주의의 파탄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정권을 재창출하지 못하고 넘겨주며 발생한 일에 대한 책임감과, 그로 인해 힘들어하는 국민께 송구스러운 마음이 컸습니다. 다시 바로잡아야겠다는 사명감도 점점 강하게 자리를 잡았고 결국 제가 감당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저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Q 참여정부 시절부터 참모 역할을 해오셨는데 유권자들 입장에서는 지도자로서 카리스마가 부족한 것이 아니냐는 인식이 있습니다. A 저는 카리스마가 장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카리스마가 지도자의 덕목이라 말하는 것은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일종의 영웅주의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요즘은 오히려 보다 많은 사람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부드럽고 겸손한 수평적인 리더십이 지도자에게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Q 이번 대선 후보들을 보면 부드럽고 친근한 이미지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안철수 후보도 소통을 강조하고 있고요. 그 안에서 자신의 차별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대중과 소통할 때 가장 크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A 대중 정치인으로서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모두 부드럽게 보이려고 노력하지요. 그 안에 얼마나 진정성이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들을 듣고, 존중하고, 공감할 줄 아는 마음이 체화돼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체질적으로 민주적인 사고나 경험이 체화돼 있는 것과 머리로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소통해야 한다고 말로만 해서 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출마 선언을 할 때부터 SNS 등을 통해 국민들의 공론을 모아왔습니다. 대통령 되고 나서 대통령의 행정명령으로 가장 먼저 시행할 정책들도 ‘국민명령 1호’라는 이름으로 모집하고 있고요. 현재 3천5백여 건 정도 들어와 있는 상태입니다. 앞으로도 그런 노력을 계속하려고 합니다. 원칙주의자 남편과 감수성 풍부한 부인 40년을 함께한 연인이자 동지 신혼 초 아침밥을 먹으며 바둑을 두는 남편을 보고 아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수준에서 가장 좋은 바둑판을 선물했고, 남편은 음악을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스테레오 오디오를 마련했다. 40여 년의 시간, 순탄치 않았던 삶을 함께한 부부의 눈빛에서 서로를 향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읽을 수 있었다. Q 집 냉장고에 이것만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식품이 있는지, 그리고 항상 채워져 있는 식품은 무엇인지요? A 남편이 생선과 해산물을 좋아해요. 생으로 먹는 채소나 껍질째 먹는 과일도 좋아하고요. 그래서 저희 집 냉장고에는 해산물과 과일이 항상 들어 있어요. 요즘은 바빠서 아침 대용으로 간단히 먹을 만한 것들이 있죠. 찰떡과 달걀, 채소, 과일이 냉장고를 채우고 있습니다. Q 아내로서 남들은 잘 모르는 남편의 세 가지 매력과 단점을 꼽는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김정숙 첫 번째는 굉장히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 두 번째는 제가 남편을 좋아하는 이유 중 매우 중요한 것인데,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주고 사랑해준다는 것, 세 번째는 살아온 삶의 진정성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너무 원칙을 지킨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에요. 조금은 쉬웠으면, 조금만 여유로웠으면 할 때가 있어요. 문재인 원래 이런 이야기는 양쪽 다 들어봐야 해요(웃음). 저도 얼렁뚱땅 넘어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더 원칙을 지키려고 마음을 다잡는 거예요. Q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문 후보는 어떤 사람인가요? A 남편은 굉장히 자상하고 가정적인 사람이에요. 가족과 밥 먹는 시간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아이들과 함께 시간 보내는 걸 최고의 휴가로 생각하는 사람이죠.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이지만 또 ‘딸 바보’예요. 시험공부로 밤을 새야 하는 딸이 무섭다고 하니까 옆에서 졸면서도 같이 있어주는 아빠입니다. Q 문 후보의 유세 현장에서 김정숙 여사가 남편을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진이 네티즌들 사이에서 화제였습니다. 부인이 남편을 그토록 진심 어린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참 부럽다는 반응이었는데요. 현장에서 남편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김정숙 여러 복잡한 심정이 묻어 있는 눈길이에요. 그날이 무척 추웠거든요. 남편이 원래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참 힘들어하는데, 새벽부터 밤까지 최선을 다해 해내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 응원하고 싶었어요. 남편이 감당하고 있는 현시대의 아픔에 대해 저 역시 공감하고 있다는, 그런 사인의 눈빛이기도 했고요. 내면 깊이 남편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 눈빛이 나오지 않았나 싶어요. 문재인 저희 부부가 다른 부부들보다 특별하게 사랑한다거나 또 제가 특출나게 잘하는 남편도 아닙니다. 그래도 평범하지만 행복하게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하고요. Q 혹시 두 분이 살아오시면서 이혼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나요? 김정숙 저희는 당시 시대적 상황 때문에 결혼을 하기까지도 굉장히 힘들었어요. 보고 있으면서도 또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 헤어지게 될까 불안하고 그렇게 그리운 상황의 연속이었어요. 그렇게 애태우던 상황에서 결혼을 하고 나니 정말 이 세상을 다 얻은 것같이 즐거울 수밖에요. 결혼을 한 뒤에도 남편이 사회와 함께하는 삶을 살며 결코 순탄한 결혼생활은 아니었지만, 그런 경우 둘 중 하나예요. 아내로서 적극적으로 지원하거나 아니면 아예 등을 돌리거나. 저는 적극적인 지원을 택했고 지금 여기까지 왔네요. 문재인 저도 이혼 생각 안 해봤습니다. 딴 데 갈 데가 없으니까요(웃음). Q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와 감수성이 풍부한 부인, 언뜻 보기에 굉장히 다른 두 분이신데, 서로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김정숙 남편이 아주 논리적인 법학도임에도 문화와 예술을 이해하는 감수성을 기르는 데 제가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봐요(웃음). 남편 마음속에 숨겨져 있던 예술에 대한 감성이 저를 만나면서 더욱 풍부해지지 않았나 싶고요. 저는 감수성이 너무 강해서 절제력이 부족한 편이었는데 남편을 통해 절제력을 얻었어요. 삶이란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라는 걸 배웠죠. 문재인 동감입니다(웃음). Q 두 분께 가장 소중한 물건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문재인 가장 소중한 물건이라기보다 가장 오래된 물건이 있는데요. 바둑판입니다. 결혼했을 무렵부터 가지고 있던 물건이에요. 그러고 보니 제가 나름 바둑 고수인데 청와대 들어간 이후부터는 바빠서 한 판도 못 뒀습니다. 김정숙 결혼을 하고 나서 보니 남편이 바둑을 무척 좋아하는 거예요. 아침 밥상에서도 꼭 바둑 복기를 하더라고요. ‘아, 이 사람 취미는 바둑이구나’ 해서 당시 제가 알고 있던 수준에서 최고로 좋은 바둑판을 선물했어요. 그리고 음악을 좋아하는 저는 스테레오 오디오를 받았죠. 바둑판은 아직 그때 것인데 오디오는 좀 더 좋은 것으로 두 번 정도 바꿨어요(웃음). 원칙과 소통으로 공감정책 이끌어낼 것 뛰어난 인권 감수성으로 서민들의 아픔을 함께해온 문재인 후보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경험을 통해 체화된 것은 다르다고 강조했다. 가장 시급한 국정 과제로 일자리 창출을 꼽으며 목소리를 높이다가도 반려동물 이야기에 금세 누그러지는,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의 부드러운 면도 엿볼 수 있었다. Q 정책을 살펴보면 교육 비중이 높습니다. 문 후보님께서는 어떤 교육관을 가지고 자녀를 가르쳤는지 궁금합니다. A 저는 되도록 간섭하지 않고 자유롭게 맡겨두는 편입니다. 제 변호사 생활이 참 힘들었어요. 고통스럽기도 했고요. 그래서 그런지 보통은 아버지들이 아들에게 자기가 하는 일들을 물려주고 싶어 하는데 저는 아이들이 인문 계통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공부를 하기를 바랐어요. 세상의 정치에 너무 고통받지 않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바람이 있었는데 비교적 잘 자라주었다고 생각합니다. Q 잇따른 성범죄 사건도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데요. 관련 대책은 어떻게 세우고 계신지요? A 성폭력 범죄는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 자신의 인격과 존엄성을 스스로 버리는 인면수심의 행위입니다. 무엇보다 단호히 처벌할 생각입니다. 친고죄 폐지로 처벌률을 높이고, 양형 기준을 강화할 것입니다. 특히 아동청소년 성범죄의 경우 양형 기준에 ‘집행유예 금지’를 포함시킬 예정입니다. 맞벌이 부모의 경우 아이들이 혼자 방치되는 것을 많이들 걱정하시는데, 방과후교실과 지역 아동센터 등을 연계하는 ‘아동 지킴이 네트워크’를 구축해서 아이들이 홀로 방치되는 일이 없도록 할 계획입니다. Q 김정숙 여사가 보시기에 아내로서 박근혜 후보, 안철수 후보보다 ‘남편 문재인’이 더 유리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서민의 아픔을 아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남편은 사법고시에 합격하기까지 지독하게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시댁이 달걀 행상, 연탄 배달을 할 정도로 힘들게 사셨고, 출세가 보장된 로펌을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인권변호사가 됐습니다. 남편은 살아온 삶의 대부분을 우리 사회의 소외받고 가난한 분들과 함께 보냈어요. 서민의 아픔과 눈물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함께해본 것은 큰 차이가 있지 않을까요? 서민을 잘 아는 남편이 서민을 위한 정치를 보다 잘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Q 선거 끝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김정숙 저는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한 열흘만 푹 쉬고 싶어요. 문재인 저는 쉴 수 있는 형편이 안 될 것 같은데요. 당선되면 북한 쪽에 특사를 보내서 취임식에 초청하는 일을 제일 먼저 할 것 같아요. 최근 남북관계가 좋지 않다 보니 마음이 급합니다. 당선이 안 되면 양산으로 가야죠. 저를 기다리는 식구들에게로(웃음). Q 요즘같이 여론을 많이 들으실 때도 없을 듯합니다. 국민들의 가장 시급한 요구가 어떤 것이라고 느끼십니까? A 가장 시급한 건 일자리 창출이라고 봅니다. 총선 때도 그렇고 지역을 다니며 한 분 한 분 만나다 보면 제발 일자리 좀 만들어달라고 간곡하게 말씀하십니다. 얼마 전 노량진 고시촌을 찾았는데 시간과 돈에 쪼들리는 고시생들이 길거리에 서서 ‘컵밥’이라는 것을 먹고 있더군요. 저도 함께 먹었는데, 얼마나 사는 게 각박하면 이렇게 끼니를 때울까 싶었습니다. 젊은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겪는 일이 실업입니다. 마음껏 꿈을 펼쳐도 부족할 나이에 날개가 꺾인다는 것이 기성세대로서 가슴 아픕니다. 그래서 좀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서 젊은이들이 꿈과 능력을 펼칠 기회를 주는 것, 이것이 현재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Q 힐링이 대세입니다. 문 후보님께서는 어떻게 힐링하십니까? A 제가 자연을 좋아합니다. 산도 좋아하고 여행도 좋아하고 야생화, 나무, 개와 고양이도 좋아합니다. 개와 고양이들도 저를 좋아하고요(웃음). 자연과 동물에서 힐링을 찾는 편인데 요즘은 전혀 못하고 있죠. Q 양산에서 반려동물들을 키우셨던 것으로 압니다. 요즘은 어떻게 돌보고 계시나요? 문재인 양산에서 개 세 마리와 고양이 두 마리를 길렀어요. 개들은 마루와 바우, 깜이고, 고양이는 찡찡이와 뭉치예요. 원래 제가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에 풍산개를 길렀는데 다녀와서 보니 새끼를 낳았더라고요. 이웃에서 진돗개를 한 마리 주셔서 세 마리가 됐고, 고양이는 딸이 기르던 고양이와 버려진 고양이를 한 마리 더 데려와 두 마리가 됐어요. 지금 서울에는 개 한 마리와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와 기르고 있고 나머지는 이웃들에게 맡겨놓은 상태입니다. 김정숙 남편이 고양이와 개를 얼마나 좋아하냐면요. 술을 마시고 오면 양복을 벗지도 않고 마당에 주저앉아 개를 안고 노래를 불러요. 무슨 노래인지도 모르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한참을 쓰다듬고 있어요. Q 요즘 사람들을 보면 분노하고 피로합니다. 어디서부터 누그러뜨릴 수 있을까요? A 국민들께서는 결국 ‘불공평하다’라는 것에서 분노를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같이 어려울 때는 잘 견딜 수 있어요. IMF 때도 함께 힘을 모아 견뎠죠. 그런데 지금은 사회적으로 부가 부족한 상황이 아니거든요.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지만 힘든 사람들이 무척 많습니다. 결국 공평하지 않다는 것이죠. 대기업과 재벌은 너무 많은 돈을 벌고 있고 중소기업과 재래시장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중산층은 무너졌고요. 이런 것들에서 오는 박탈감과 상실감이 결국 분노와 피로로 이어진 것이라고 봅니다. 공평과 정의. 그로 인해 국민이 행복해지는 것이 정권 교체를 통해 우리 사회가 반드시 되찾아야 할 국정 과제이자 저의 정치철학입니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이주석>
민주통합당 손학규 대선 예비 후보 부인 이윤영 여사
민주통합당 손학규 대선 예비 후보 부인 이윤영 여사
2012. 09. 13 16:19 화제
세상에 나를 웃게 하는 사람만큼 좋은 사람이 또 있을까. 이윤영 여사에게 남편 손학규 후보는 36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웃음 많고, 인정 많은 사람. 그런 그이기에 ‘저녁이 있는 삶’을 떠올릴 수 있었고, 또 그런 세상을 만들 거라고 이 여사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센스 있는 옷차림에 활력이 넘치는 중년 남성을 보면 정작 그보다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 법이다. 워낙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우렁각시 내조’로 더 잘 알려진 민주통합당 대선 예비 후보 손학규(65) 상임고문의 부인 이윤영(66) 여사에게는 주부 선배인 만큼 묻고 싶은 점이 많았다. 첫 질문부터 손 후보의 건강관리 노하우를 물었으니 말이다. 약사 출신 부인이니 더욱 특별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컸다. “예비 경선 합동 연설회 현장에 갔었어요. 안에 들어가지는 않고 로비에 있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절절하게 내뿜는 그 목소리에 뭉클해지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때 문득 앞으로 (남편이) 정말 건강해야겠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어요. 지금까지 그런 걱정 없이 여기까지 왔다는 게 고맙기도 했고요.” 건강관리는 특별한 게 없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밥 한 톨 남기지 않는 버릇을 들인 손 후보는 마치 승려들이 공양하듯 밥공기를 헹궈낸 물을 마시는 것으로 식사를 마친다. 정성껏 차려낸 아침상을 뚝딱 비우고 집을 나서는 뒷모습을 보면서 안도감을 느끼는 아내의 마음. 대권 도전에 나선 남편을 둔 부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흐뭇한, 그날의 첫 만남 노란 은행나무 길 저편에서 검게 물들인 군복을 입은 한 남학생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어학연구소를 찾는다고 하자 그는 다짜고짜 “남자 찾으러 왔군”이라고 대꾸하더니, 차 한 잔 하자며 학림다방으로 이끌었다. 어학 공부를 위해 서울대를 찾았던 이화여대생 이윤영 여사는 그렇게 평생의 동반자 손학규 후보를 만났다. 이 대목에서 이 여사는 무심하게 지나가는 듯한 말로 말했다. “그렇게 청춘은 시작됐고….” 동숭동 학림다방은 4·19혁명, 5·16 군사정변 이후 청년 민주화 운동의 산실이 됐던 곳이다. 그의 전화를 받고 학림다방으로 달려가보면 언제나처럼 선후배들과 모여 앉아 시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젊은 분위기가 마냥 좋았다. 거침없던 꽃다운 나이의 손학규는 어딘가 풍운아 같은 느낌을 풍겼다. 하지만 여자친구에게는 다정다감했다. 옆자리에 앉아서 얘기를 듣다 보면 그는 어느새 뽀얀 앙금이 가라앉은 막걸리 잔에 손가락을 넣어 휘휘 저어서 다시 건네곤 했다. 그 시절 두 사람이 얼마나 붙어 다녔던지 이 여사는 문리대 동창 모임에서 “몇 학번이셨죠?”라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무엇이 딱히 좋아서, 어떤 점이 유난히 미더워서 결혼을 결심했던 것 같지는 않단다. 군 복무 시절 마지막 외출을 나온 손 후보는 그날도 어김없이 선후배들과 어울렸고,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둘만 남을 수 있었다. 늘어선 상가마저 문을 닫아 어두운 청계천 거리를 걷던 중 손 후보가 “우리 이제 결혼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한 것이 돌이켜보니 프러포즈였다. “처음 든 생각은 ‘하필이면’이었어요(웃음). 마침 공사 중이었는지 군데군데 못이 박힌 널빤지와 철근이 널린 곳을 조심조심 지나는 길이었거든요.” 그날의 기억은 이후 불쑥불쑥 고개를 들곤 했다. ‘못이 삐죽삐죽 튀어나온 곳에서 결혼하자는 말을 들어서 이렇게 가시밭길을 걸어가나?’라는 야속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7년의 연애 시절 동안에는 학생운동으로 수감생활을 했던 손 후보는 1974년 결혼식을 올린 뒤에는 노동운동으로 수사기관에 쫓기는 몸이 됐다. 가장의 빈자리를 대신해 이 여사는 약국을 운영하며 생계를 책임졌다. 형사들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남편의 은신처를 대라고 강요하거나 아예 진을 치고 있고 있었다. 한번은 형사의 협박에 못 이겨 얼토당토 않은 동네로 안내했다가 머리를 쥐어박히기도 했다. 어린 딸을 둘러업은 채 안기부에 끌려갔던 일화도 전해진다. “어느 날인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얗게 차려입은 형사가 찾아와서 또 추궁하기 시작했어요. 똑같은 질문을 계속 반복하니까 그때까지 참아왔던 설움이 북받쳐서 울음이 나왔어요. 한 번 터지니까 걷잡을 수 없는 통곡이 되더군요.” 서슬이 퍼런 형사조차 어쩔 줄 몰라 하며 뒷걸음질 쳤다. 지금에야 “형사들이 우리 집을 지켜줬다”라며 웃으면서 말할 수 있지만, 당시의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10·26사태가 아니었다면 손 후보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다. 부마항쟁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내려갔다가 김해 보안대에 끌려가 48시간 동안 구타를 당했다.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단장이 박정희 대통령의 피격 소식을 듣고 자리를 뜨지 않았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모를 일이다. 아마도 같은 시각, 이윤영 여사는 일주일간 생사 확인이 안 되던 남편을 찾아서 홀로 부산행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가 갑자기 딱히 어딘지도 모르고, 또 이유도 알지 못하는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최근에서야 이 여사는 당시 손 후보가 생사를 넘나들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고 한다. 부부끼리 통하는 일종의 텔레파시는 아니었을까. “그때는 힘들었지만 잘 넘겨서 여기까지 왔으니까, 돌아봤을 때 결코 나쁘지 않은 인생이에요. 그렇게 살지 않았다면 좀 심심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웃음). 제가 생각해도 악바리였어요. 우리 때는 선배, 후배들이 다들 그런 상황을 현명하게 잘 넘겼어요. 믿음이나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살벌한 감시의 눈을 피해 손 후보가 잠시 약국에 다녀간 적이 있다. 당시 골목길에 있던 꽤 여러 명의 동네 주민들이 약국집 새댁의 남편을 발견했지만 어느 누구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엄청난 포상금이 걸려 있었음에도 말이다. 오히려 쌀집을 하는 집주인 아주머니는 바쁜 이 여사를 대신해 딸아이를 돌봐줬고, 이웃의 연탄집 아주머니는 밀린 기저귀를 빨아 주곤 했다. 그 시절 이웃들의 정을 이 여사는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다. 믿음으로 함께한 세월 올해로 결혼생활 39년째를 맞이했지만 부부가 온전하게 함께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이 여사는 ‘플러스마이너스 제로’라고 표현했다. 긴 공백기를 손 후보가 어느 정도는 만회한 모양이다. 30대 중반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남편을 따라가 함께 지냈던 시절, 그리고 2008년 당 대표로서 제18대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춘천에서 칩거하던 2년여의 시간을 이 여사는 인생의 보너스로 새겨두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덕분일까, 이후 손 후보는 ‘함께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라는 큰 구상을 안고 정계에 복귀할 수 있었다. 민주화운동을 한다고 가정을 뒷전으로 했던 남편을 원망한 적이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는 짐짓 ‘남편의 대의에 따르는 당연한 희생이지 않겠느냐’라는 뻔한 답이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여사는 예상을 벗어났다. “그때 저에게는 딱히 민주화라는 의식이 없었어요. 그냥 남편이 옳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죠.” 군 복무 시절에 면회를 갔는데 손 후보의 표정이 영 언짢더란다. 이유인즉, 후임병이 장작 대신 농부의 나무 수레로 불을 지펴 혼을 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여사는 “오죽 추웠으면 그랬겠느냐. 이해해주면 좋겠다”라고 했지만 그는 쉽사리 노여움을 풀지 않았다. 농민에게는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운송수단을 망가뜨린 데 대해 단단히 화가 났던 것이다. “참 ‘양질’의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을 굳히게 된 건 어머님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보게 되면서부터예요. 첫 만남에서부터 어머니 얘기를 했거든요. 어머님께서는 제가 처음 댁으로 뵈러 갔을 때 귀한 화문석을 깔아주시고 또 정갈하고 맛있는 밥을 차려주셨어요. 그런 집안 분위기가 저로 하여금 남편의 모든 것에 대해 안심하게 했던 것 같아요.” 손학규 후보는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시댁 식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 여사는 남편이 ‘사랑을 굉장히 많이 받고 자란 막내둥이’라는 느낌을 받았단다. 비록 아버지가 안 계셨지만 어머니와 형, 누나들의 사랑을 넘치게 받고 자라서 심성이 올바르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남매들 의가 참 좋아요. 모이면 술도 잘하고, 또 노래도 잘 부르세요. 조카들까지 가세해서 흥을 돋우죠. 제 친정에서는 생일이면 그저 미역국 한 그릇 나눠 먹는 게 끝이었는데, 시댁은 달랐어요. 결혼 후 남편이 수배 중일 때 어머님께서 형님과 함께 제 생일이라고 약국에 찾아오셨어요. 케이크와 함께 가족이 보낸 선물을 한아름 들고서요.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따뜻한 정이 넘치는 집안이죠.” 손 후보가 쫓기는 몸이 된 지 1년이 지났을 무렵 어머니에게 간암 선고가 떨어졌다. 혼자 힘으로 10남매를 키우느라 퉁퉁 부은 두 손으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던 분이셨다. 병상에서도 항상 막내아들을 위해 기도하셨다고 한다. 오래지 않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 손 후보는 제 발로 장례식장을 찾았다. 체포될 것이 불 보듯 뻔했음에도 말이다. 예술적인 기질을 물려받은 두 딸 손학규 후보는 경기고 재학 시절 밴드부와 연극부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예술적인 기질이 넘치는 핏줄을 물려받아서일까. 큰딸 원정씨는 ‘디 오써’, ‘영원한 평화’ 등의 작품 번역 및 드라마투르기를 맡은 연극인으로, 대학 재학시절 유명 영화 주간지 주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둘째 딸 원평씨는 국내 영화제 수상 경력이 있는 영화감독으로 활약 중이다. “얼마 전에는 둘째가 단편영화 시사회에 초대해서 다녀왔어요. 처음 영화 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정말 놀랐어요. 반대를 하려는 게 아니라 경이로웠죠. 딸들이 이런 인생을 살 거라고는 정말 짐작도 못했어요. 덕분에 내가 모르는 삶도 있고, 새로운 가치도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줘서 고마워요.” 돌아보면 유난스러운 엄마였다고 했다. 행여 뒤척이며 자는 동안 목에 감기기라도 할까봐 잠들기 전에 머리카락을 곱게 땋아주는 세심한 엄마인가 하면, 호되게 야단을 치는 엄한 엄마이기도 했다. 아빠의 긴 공백으로 인해 엄마는 더욱 단단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손 후보는 생에 가장 행복했을 때가 언제였느냐는 질문에 항상 “큰딸이 태어났을 때”라고 답한다. 원정씨가 태어나던 1975년, 그의 수배 생활도 시작됐다. 한창 뺨을 부비고, 보듬고 싶을 시기에 2년이 넘는 생이별을 겪었을 가족의 고통을 더 말해 무엇할까. “얼마 전에 앨범을 정리하다 보니 큰딸이 대학 때 저에게 보낸 쪽지가 있더라고요. ‘엄마, MT 좀 보내주셨으면 좋겠어요’라고(웃음). 그거 보고는 가슴이 아팠어요. 내가 왜 그렇게 아이를 엄하게 길렀을까 하고요.” 하지만 딸들의 진로에 대해서는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그런 딸들은 반려자 또한 소신껏 찾았다. 손 후보는 당 관계자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족과 친지만 모아놓고 조촐하게 딸들의 결혼식을 치렀다. 최근 큰사위인 연극연출가 김동현씨의 투병 소식이 알려지기도 했다. 뇌종양 진단을 받은 것은 5년 전, 지금은 수술 전 내려놓았던 대학 강의까지 다시 맡게 됐을 정도라니 호전되고 있음은 분명한 듯하다. 이 여사는 딸 부부의 이야기라며 말을 아꼈다. “서로 잘 의지해서 이겨낸 것이 참 기특해요. 아직은 더 지켜봐야겠지만 언젠가 두 사람의 용기에 대해서 얘기할 기회가 있을 거예요. 다른 아픈 분들에게도 힘이 될 거라고 믿어요.” 손학규라면 가능한, 저녁이 있는 삶 영국 유학 후 대학 강단에 서다가 1993년 광명을 재보선에서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한 손학규 후보는 보건복지부장관, 경기도지사를 거치며 행정력을 인정받았다. 그동안 이윤영 여사도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주민들이 피해를 입지는 않을까, 노심초사 잠 못 이루는 생활에 익숙해졌다. ‘내가 꼭 필요한 자리가 아니면 함께 가지 않는다’라는 것이 내조의 지론이지만, 이 여사에게 손 후보는 “언제나 머릿속에 있는” 존재다. “정치가 뭔지는 잘 모르지만, 이 사람이 하는 것이 정치라면 괜찮을 거라는 믿음은 있어요. 정치인의 부인이라면 남편의 관할 지역은 물론 온갖 비난까지도 감싸 안아야 해요. 오죽하면 팔자가 아니고서는 못한다는 말들을 하겠어요. 남편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없이는 해내기 힘들 거예요. 저 역시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여기까지 따라왔겠어요?” 이 여사는 “손학규라는 사람의 아내라서 고마운 점이 참 많다”라고 했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이끌려 다녔던 유세 현장이다. 하지만 주민들과 일일이 손을 맞잡고 눈을 마주하는 순간순간의 느낌이 자신을 변화시켰다고 한다.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진 것 역시 손학규 후보와 살면서 얻은 귀한 덤이란다. “처음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슬로건을 들었을 때는 덤덤했어요. 그런데 큰 반향을 일으킨다는 얘기를 들으니 그런 삶을 위해서는 정말 큰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경제도 탄탄해야 하고, 치안도 빈틈이 없어야 할 거고…. 국민이 무엇에 목말라 있는지 새삼 돌아보는 계기가 됐죠. 꼭 저녁이 있는 삶을 만들어주었으면 좋겠고, 손학규라면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요.” 이윤영 여사를 언급할 때면 ‘우렁각시 내조’라는 수식이 왜 빠지지 않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오래 입어 후줄근한 러닝셔츠 차림이 가장 편한 사람, 현관문을 여는 순간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환하게 웃을 수 있게 하는 사람, 고생스러웠던 과거를 그저 조용한 미소로 공유할 수 있는 사람, 무엇보다 치열한 청춘을 함께 건너온 ‘동지’ 같은 사람. 손학규 후보의 곁에 이런 든든한 아내가 있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어 보인다. <■글 / 장회정 기자 ■사진 / 민영주 ■사진 제공 / 손학규 홈페이지>
민주통합당 김두관 대선 예비 후보 부인 채정자 여사
민주통합당 김두관 대선 예비 후보 부인 채정자 여사
2012. 09. 13 16:19 화제
김두관 후보의 부인, 채정자 여사는 연애와 결혼 이야기를 솔직 담백하게 전해주었는데 뜻밖에도 이혼을 생각했던 힘들었던 가정사까지 거침없이 들려주었다. 하지만 알고 보면 ‘내조의 정석’을 실천하고 있는 채정자 여사. 김 후보가 큰 뜻을 품고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렇듯 마음 든든한 내조가 있었다. 여고생 때 만난 더벅머리 총각과 10년 연애결혼 최근 경남도지사를 중도 사퇴하고, 민주통합당의 경선에 도전장을 내민 김두관(55) 후보는 후발주자로 대선 예비 후보 대열에 이름을 올리면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이런 김 후보 옆에서 더욱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부인 채정자(53) 여사다. 채 여사 역시 최근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국민과 소통과 교감을 시도하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그 와중에 잠시 시간을 낸 채 여사를 서울 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날 수 있었다. 요즘 오렌지 컬러가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이라는 걸 알았을까. 은은하고 고급스러운 오렌지 컬러 재킷을 입은 채정자 여사가 환하게 웃으며 기자를 맞았다. 스타일리스트나 헤어, 메이크업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화장과 머리는 물론 의상 선택까지 손수 챙겼다고 하는데, 센스가 대단했다. 이장 출신으로 군수, 행정자치부 장관, 경남도지사, 그리고 대권에 도전하는 김두관 후보의 부인으로서 쉽지 않은 길을 걸어왔을 텐데, 김 후보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는지 궁금했다. “저희는 연애결혼을 했어요. 남편을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였죠. 당시 제가 부산에서 살고 있었는데, 남편이 고3때 공무원 시험 공부를 위해 부산으로 왔었거든요. 친척집에서 우연히 남편을 만났는데, 제 스타일이 아니었어요(웃음). 보통 여고생의 남자 보는 기준은 멋있고 잘생긴 사람이잖아요. 그때 더벅머리를 한 남편을 보면서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나’싶어 굉장히 쌀쌀맞게 대했던 기억이 나요.” 하지만 더벅머리 총각은 자신을 쌀쌀맞게 대했던 여고생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 이후로 그 친척집에 자주 놀러 왔고 자연스럽게 친분이 쌓이면서 ‘오빠’, ‘동생’ 사이로 편안하게 지내기 시작했다. “제게 오빠가 없어서 그랬는지, 편안한 오빠 같은 느낌이 좋았아요. 무슨 이야기를 해도 ‘허허허’ 웃으면서 받아주고, 순박했어요. 자기가 가진 게 없었는데도 늘 당당하고 거리낌 없는 모습도 보기 좋았고요.” 그렇게 1년에 두세 번씩 만나면서 지내다가 채 여사가 스물한 살이 되던 어느 날, 그 더벅머리 오빠로부터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프러포즈였다. “사실 남편은 부산에 내려와도 친구들을 먼저 만나고, 본인 볼 일 다 끝나고 나서야 저를 만나러 와요. 연애를 잘 못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제 마음이 왜 움직였는지 몰라요(웃음). 어느 날 편지 다섯 장을 주더라고요. 제가 자신을 편안하게 해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면서요. 문제는 남편이 그 당시부터 정치를 할 생각을 품고 있었기에 자신과 결혼하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고 말했죠. 경제적인 부분까지 다 책임져야 하니 자신과 인생을 함께해달라고 말 못하겠다며, 보통 사람처럼 살고 싶으면 다른 사람을 만나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속으로 결혼하면 별수 없이 가정을 책임질 수밖에 없겠지, 라고 생각했어요.” 프러포즈를 받고도 몇 년이 더 지난 후 만난 지 10년째 되던 해 두 사람은 결혼을 하기에 이르렀다. 채 여사는 결혼을 하면서 지혜롭게 머리를 굴려서 ‘이 남자가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만들어야지’라는 야심 찬 포부도 세웠다. 하지만 이런 속셈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채 여사는 기자를 향해 “제가 결혼 후 얼마 만에 남편을 내려놓았을 것 같으세요?”라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고, 기자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3개월이에요”라고 답했다. 첫 번째 사건은 신혼여행을 다녀온 직후 남편의 무단 외박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당당한 모습으로 들어오는 남편의 모습에 채 여사는 오히려 할 말을 잃었다. “결혼 초반에 못된 버릇을 단단히 고쳐놓겠다고 얼마나 벼르고 있었겠어요. 결혼 3일 만에 무단 외박이라니, 큰 충격을 받았죠. 그런데 남편은 오히려 저에게 일이 있어서 못 들어온 건데 화를 내다니 섭섭하다고 하는 거예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 뒤로도 남편은 12시 이전에 집에 들어오는 날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결혼 3개월 만에 채 여사는 ‘안방 문을 열고 들어오면 내 남자, 안방 문을 열고 나가면 남의 남자’라고 생각하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남편에 대한 기대를 모두 접었더니, 마음이 굉장히 편안해졌다고 한다. 결혼 7년 동안 한 번도 생활비 받아본 적 없어 일찌감치 정치에 뜻을 두었던 김 후보는 결혼한 이듬해인 1988년 총선에 출마했다. 아무런 지지 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말이다. 누가 봐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승산은 없었다. 그러나 남편이 그 선거에서 노린 의도는 상대 후보자에게 견제 세력이 있으니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것이었다. “너무나 무모했지만 말릴 수가 없었어요. 힘들었다기보다 서럽고 가슴 아픈 선거를 치렀지요. 당시 야당은 ‘빨갱이’라는 질타를 받았거든요. 그때 마음고생했던 것에 비하면 지금 힘든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사이 아이들도 태어났다. 하지만 남편은 여전히 경제활동은 뒷전이었고, 야권에서 농민운동을 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있었다. 채 여사의 부모님들도 상처를 받으며 힘들어했다. 결국 결혼 3년 만에 채 여사는 ‘이혼’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결혼 3년째가 되니까 이제 더 이상 함께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중에 저 아이들의 인생이 어떻게 될까 싶은 마음에 ‘내 한 몸 희생해서 세 사람 한번 살려보자’라는 결론에 이르게 됐어요.” 채 여사는 남편이 남해군수가 될 때까지 결혼 7년 동안 한 번도 생활비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시어머니까지 모시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가계를 이끌면서 살아야 했던 채 여사는 안 해본 일이 없다. 남대문과 동대문에서 옷을 떼어다가 옷가게도 직접 운영했고 꽃가게, 북카페, 뼈다귀 해장국집은 물론 해수욕장에서 국수도 팔고 주점도 운영했다. “지금 생각하면 다시는 그렇게 못할 것 같아요. 당시 남편에게 ‘이럴 거면 왜 결혼을 했느냐? 자유롭게 혼자서 하고 싶은 일이나 하면서 살지!’라고 따졌더니, 그냥 웃으면서 한마디만 하더라고요. ‘우린 운명이야’라고요.” 채 여사는 슬하에 직장생활을 하는 딸(25)과 대학생인 아들(24)을 두었다. 자녀들의 교육에 대해서는 욕심부리지 않고 아이들이 하고 싶은 걸 배우게 해줬다. 채 여사도 원래 간호대학을 가거나 미술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여자는 안된다’는 아버지의 반대 때문에 대학진학은 생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너희 인생은 너희들 거니까 인생이 아름답고 즐거울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하라고 말하곤 했죠. 학원은 가고 싶지 않으면 가지 말라고 했고, 대신 학교수업을 철저하게 하라고 했어요. 대신 책이나 신문 읽는 습관을 들이고 뉴스를 꼭 챙겨 보게 했어요.” 채 여사의 교육 방침 중 특이한 건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는 방식이다. 집안일을 ‘봉사활동’이라고 규정짓고, 재활용쓰레기 버리기, 청소기 돌리기, 설거지하기 등 한 건에 5백원씩 용돈을 준 것. 독서나 예습, 복습 등 공부를 하면 좀 더 많은 용돈을 줬다. 때문에 아이들은 용돈이 많이 필요하면 집안일을 열심히 도와주거나 스스로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자식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는 말이 있잖아요. 남편에게도 우리 아이들이 당신의 뒷모습을 보고 자라고 있다는 말을 많이 했어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늘 부재중이던 아버지의 빈자리는 항상 채 여사가 대신했다. 아이들은 너무 바쁜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이럴 때 채 여사는 “아빠가 일이 많아서 쉬지 못하시는데, 너희들에게 좋은 나라를 만들어주려고 바쁘신 거란다. 우리가 더 많이 이해해드리자, 라고 말해주곤 했어요. 다행히 아이들이 저와 대화를 많이 하면서 컸기 때문에 큰 불만 없이 잘 자랐어요. 지금은 아빠를 자랑스러워하고 많이 응원해주죠.” 오늘보다는 더 나은 내일이 올 것이다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가 많았기 때문에 채 여사는 늘 ‘오늘보다는 더 나은 내일이 올 것이고, 나도 즐기면서 살 수 있게 될 것이다’라고 주문을 외우고 다녔다. 그럼에도 채 여사를 가장 힘들게 했던 일은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남편의 선거 패배였다. 지금까지 총 열네 차례 크고 작은 선거들을 치러왔고, 부부는 선거에서 떨어질 때도 훌훌 잘 털어버리곤 했다. 하지만 2008년 총선 때는 달랐다. 당시 김 후보는 상대 후보에 비해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지역 출신의 다른 후보가 다시 공천을 받으면서 그 후보에게 몰표가 쏟아진 것. 50년 만에 고향 땅을 밟은 1백억원대 자산가에게 김 후보는 패배했다. “저희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게 농어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우리 만 한 사람이 없다는 자긍심이었어요. 그런데 농어민들은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 자산가를 선택한 거죠. 당시 남편은 많이 절망했고, 정치를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도 했어요. 대한민국 땅을 떠나고 싶다고까지 말했죠. 그런데 며칠 뒤 여기서 그만두고 도망가면 ‘패배자 김두관’으로 남지 않겠느냐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말을 하더군요. 그렇다면 우리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했고, 남해에서 다시 새 출발을 했죠.” 채 여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 역시 남편이 선거에 당선됐을 때다. 사실 결혼 7년 만에 처음 남해군수에 당선됐을 때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주위에서는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기에 울면서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단다. 하지만 채 여사는 당선이 확정되는 순간, ‘앞으로 잘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앞서 소름이 끼치도록 착잡했다고. “축하는 많이 받았는데 환하게 웃을 수는 없었어요. 그 뒤에 행정자치부 장관이 됐을 때도 마찬가지였죠. 중앙정부에 들어가서 잘할 수 있을까 걱정했죠. 하지만 2010년 경남도지사에 당선되던 날에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죠. 경남에서 야권 도지사가 당선된 게 처음이었거든요. 그만큼 굉장히 뿌듯했고, ‘우리가 해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최근 김 후보는 아내의 내조에 90점을 주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채 여사는 “제 역할이 크지 않다”라며 그 점수도 과하다고 손사래를 쳤다. 밖에 나가서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집안일은 전혀 신경 쓰지 않도록 해주는 것 이외에 한 게 뭐가 있겠느냐는 것. 다만, 아침 밥상은 신경 쓰는데, 그 이유는 “밖에서 인간적으로 존중받고, 대접받을 수 있도록 잘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숱한 경험들로 살림의 달인이 된 채 여사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분을 한 번도 부른 적이 없다. 개인적으로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데, 특히 시어머니가 함께 살고 계시기 때문에 밖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고 난 후 집에 오면 시어머니께 꼭 그 음식을 해드렸다. 또 남편 일의 특성상 손님 접대가 많다 보니 집에는 항상 밑반찬과 채소들이 준비돼 있어 손님이 오면 언제든지 푸짐한 한정식을 차려냈다. “제가 음식 장사를 할 때부터 ‘먹는 음식은 보약’이라고 생각해와서 요리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써요. 그래서인지 아이들과 시어머니, 남편 모두 건강한 편이에요. 남편은 가리는 것 없이 다 잘 먹고, 운동도 좋아하죠. 특히 무척 긍정적이라 스트레스를 잘 받지 않는 성격이에요. 만약 그 스트레스를 담고 살아왔다면 아마 폭발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무엇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습관이 있어서 이해를 잘하는 것 같아요.” 정치 일정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고파 사실 채 여사는 남편이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했을 때 ‘절대 반대’를 외쳤다. 경남도지사 임무를 열심히 잘하겠다고 호언장담하며 인사하고 다녔는데, 도정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나오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결혼 25년 만에 처음으로 언성이 높아질 정도로 크게 부부싸움을 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도민들에게 배신감을 주면서 중도 사퇴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계속 반대를 했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이 자리에 그대로 머물면 역사에 죄인이 될 수밖에 없고, 그런 마음으로 도민들에게 어떻게 행복을 줄 수 있겠느냐고 저를 설득하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죠. 이 자리에 안주하고 싶은 이 마음조차 사심일 수 있겠구나, 라고요. 그래서 동의했어요.” 채 여사가 대선 출마를 반대한 이유는 자신의 몸 상태와도 관련이 있었다. 채 여사는 도지사 선거가 끝난 직후 유방암 1기 판정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아직 몸의 컨디션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에 외부활동을 하는 게 여의치 않았던 것. 하지만 시대가 ‘서민 대통령’을 부르고 있다고 믿고 있는 남편의 마음을 돌려놓기란 쉽지 않았다. 채 여사는 남편의 가장 큰 장점을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는 욕을 먹더라도 과감히 실천하는 정신’이라고 꼽았다. 김 후보가 이장 시절부터 마을 사람들에게 욕을 먹으면서 공정한 이익 분배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 후보가 국정 운영을 맡아도 그런 부분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는 것. “제가 많이 준비되어 있지 못해서 아직은 부족합니다. 그래도 남편과 뜻을 같이하는 운명인지라 헌신하는 자세로, 모르는 건 배워서라도 해야겠지요. 약자의 편에 서서 일하겠다는 남편의 그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내조하는 게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후보와 채 여사는 정치 일정을 마치고 난 후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이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여유를 갖고 많은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때문에 고향 후배들이 건네는 막걸리 잔을 마음 편하게 받아 마실 수 있도록 후회 없이 노력할 것이라고 한다. “남편은 늘 공평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어요. 뜨거운 가슴에 가족이 있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과 국민이 있는 사람이죠. 남편의 그 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싶어요. 이제 그것이 제 꿈이랍니다.”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원상희 ■사진 제공 / 김두관 대선 예비 후보 사무실>
야권 대선 후보로 급부상하고 있는 문재인의 운명 그리고 진심
2011. 08. 31 18:21 화제
공식석상에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의 문재인 이사장이 지난 7월 말 정동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에세이집 「운명」 출간 기념 북 콘서트를 통해 대중과 만나는 자리를 가졌다. 그는 이날 “해야 할 일이 있다. 어떤 위치에서든 노력할 것이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야권의 차기 대선 후보로 떠오르고 있는 그의 이 말 한마디는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문재인, 그가 누구인지 만나보자. 노무현이 아닌 문재인으로 나선 첫 행사 지난 7월 29일 오후 7시 30분께. 서울 정동의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의 로비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문재인 이사장이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과 참여정부 시절의 이야기, 처음으로 공개하는 자신의 인생사를 엮은 에세이집 「운명」의 출간과 관련해 열린 북 콘서트 ‘우리들의 운명’에 참석하기 위한 사람들로 성황을 이루었던 것. 로비 한편에 자리를 잡고 노무현재단의 후원 회원을 모집하는 봉사자들과 “노무현 정신을 살립시다!”라고 외치고 있는 배우 문성근도 눈에 띄었다. 북 콘서트가 열리기 전 취재진에 둘러싸여 반가운 인사를 나누던 한명숙 전 국무총리도 이날 초대받은 손님 중 한 명이었다. 북 콘서트의 진행은 성공회대 겸임교수이자 이번 행사의 기획자 탁현민 교수가 맡았다. 인디 밴드 ‘일단은 정석이네’의 축하 공연이 끝나고, 드디어 문 이사장이 등장했다. 1층과 2층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이 일제히 환호를 보냈다. 뜨거운 반응이 나오리라 예상치 못한 듯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번졌다. 패널로는 오마이뉴스의 오연호 대표와 「운명」의 집필을 도운 양정철씨가 참석했다. “이렇게 많은 분이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2주기를 추모하는 의미로 많은 사람이 제게 책을 쓰라고 권유했습니다. 노 대통령과 오랜 세월을 같이했고, 노무현재단의 이사장을 맡고 있으니 제가 가장 먼저 그 작업을 해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책을 쓴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이제 한 정권이 끝나가고, 국민은 희망을 갈구하고 있지요. 우리는 더 이상 절망의 시기가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가 역사에 남긴 것들을 정직하게 증언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문 이사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에세이집 「운명」의 집필 동기를 이야기했다. 천천히 또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운명」은 노 대통령과의 인연, 참여정부 시절의 증언 이외에도 문재인 이사장의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 결혼 등 개인사에 대한 부분이 따로 구성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 패널들의 질문을 받던 문 이사장은 “개인적인 이야기는 끝까지 넣지 않으려고 했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양정철씨가 “이 책에는 문재인 이사장에 대한 부분도 필요했다. 노 대통령이 남긴 꿈과 목표를 가장 잘 아는 사람, 실현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 우리도 알 필요가 있다”라며 한마디 거들었다. 양씨의 말을 듣던 문 이사장은 난처한 웃음만 지었다. 문재인 대통령? 확실한 입장은 다음으로 “저는 지금까지 반장에 뽑힌 적도 없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그 흔한 줄반장 한 번 못해봤어요. 노 대통령이 취임을 앞두고 저희 부부를 서울로 초대해 청와대로 와달라고 부탁하셨을 때도 저는 정치는 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어느 당에도 입당한 적이 없어요.” 문 이사장 옆에 앉은 오연호 대표와 양정철씨는 “그는 권력 의지가 없어 문제다”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문 이사장의 성향이 노 대통령의 뜻을 가장 잘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며 객석의 호응을 유도했다. 북 콘서트를 보러 온 많은 관객은 약속이라도 한 듯 ‘문재인 대통령’을 외쳤다. 공연장의 분위기는 달아올랐고, “대선에 출마해달라”라는 외침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문 이사장은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웃기만 했다. 몇 분 후 문 이사장이 입을 열었다. 1 경희대 법대 3학년 때 음대 1학년이던 지금의 부인을 처음 만났다. 왼쪽부터 문재인 이사장과 그의 부인. 2 문 이사장은 7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부인은 군 복무 중인 그를 찾아올 때 안개꽃 한 다발을 사오곤 했다. 3 특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 특전여단 제3대대에 배치된 그는 폭파 과정 최우수 표창을 받기도 했다. 4 노 대통령은 자신을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고 소개할 정도로 그를 신뢰했고, 가깝게 지냈다. 5 청와대 생활을 정리하자마자 그는 네팔의 히말라야로 갔다. 조용하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차기 대선을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여권과 야권의 단일 구도입니다. 그것만 성사된다면 우리는 변화를 시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 대통령이 강조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될 테니까요. 오세훈 시장은 굉장히 빼어난 인재입니다. 또 손학규 대표도 정치 내공이 상당한 분이고요. 어느 편이 되던 야권의 단일화를 위해 힘쓸 것입니다. 하지만 대선 출마에 대한 확실한 입장은 다음으로 미뤄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문 이사장은 “오랜 지인들은 저에게 ‘절대 정치에는 나서지 말라’라고 조언했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자신이 어떤 성품이고,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분들의 의견이 맞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는 앞서 말한 것처럼 노 대통령이 추구한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발 벗고 나설 준비를 마쳤다는 의중은 감추지 않았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정말 걷잡을 수가 없는 지경입니다. 비정규직은 늘어만 가고, 세금도 늘어만 갑니다. 절박한 이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한 노력할 작정입니다. 제가 보태는 힘이 헛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 이사장이 차기 대선까지 바라는 것은 오직 야권의 단일 구도라고 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직접 대선 후보로 출마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계속 답을 미뤘다. 또 그는 우리 역사에서 단 한 번이라도 야권이 제대로 통합된 자세를 보여주었다면 지금 우리 사회가 겪는 고통은 크게 줄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국(서울대) 교수나 안철수(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허락한다면 그분들의 능력으로 함께 이루고 싶습니다. 두 분 모두 부산 출신이신데, 제 뜻을 받아줄지는 모르겠습니다(웃음).” 북 콘서트의 2부는 탁현민 교수가 문 이사장에게 시민들이 보내온 질문을 하나씩 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오빠라고 불러도 되느냐?”라는 한 시민의 질문에 문 이사장은 고개가 젖혀질 정도로 크게 웃었다. 그리고 노 대통령과 강원도 수해 지역을 다니던 때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번은 노 대통령과 강원도 수해 지역에 방문했습니다. 그때 피해 규모가 심각해서 전국 각지에서 강원도로 자원봉사를 온 분들이 많았어요. 저희가 노 대통령을 모시고 현장을 방문하자, 어떤 자원봉사자께서 ‘대통령님, 오빠라고 불러도 되나요?’라고 하셨어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는 ‘노무현 오빠 오빠’ 하면서 저희를 반겨주셨지요. 저라면 글쎄요…. 우연히 저를 만나신다면 오빠라고 부르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웃음).” 문 이사장은 공연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다소 긴장이 풀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대선 출마에 대한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정권 교체만이 이 나라의 살 길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또 노 대통령이 이루지 못한 세상을 만드는 데 힘쓰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이후 지방 투어로 이어지는 북 콘서트 행사를 두고 문재인 이사장의 공식적인 대선 행보가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어머니의 연탄 배달, 허드렛일 도운 어린 시절 그럼 문재인 이사장은 누구인가. 그는 자신이 노무현 대통령과 닮은 점이 많다고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어린 시절의 가난이다. 그의 부모는 함경남도 흥남의 문씨 집성촌인 ‘솔안마을’ 출신이다. 그의 부친은 당시 명문이던 함흥농고 출신으로, 북한 치하에서 흥남시청 농업계장을 지냈다. 그러던 중 1950년 12월 국군과 미군이 두만강까지 올라갔다가 예상치 못한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한 상황에서 흥남 마을 사람들을 미군 선박에 태워 거제도로 피난시킨 ‘흥남 철수’ 때 고향을 떠났다. 길어야 2, 3주일만 피해 있으면 된다는 예상과 달리 문 이사장의 부모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거제도에서 터전을 다시 일궈야 했다. 문 이사장은 「운명」에서 “아버지는 포로수용소에서 노무 일을 했다. 어머니는 거제에서 달걀을 싸게 사서 머리에 이고, 나를 업은 채 부산에 건너가 파는 행상을 했다. 그걸로 조금씩 저축을 했고, 돈이 약간 모이자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조금 전에 부산 영도로 이사했다”라고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또 그는 어머니가 연탄 배달을 하거나 허드렛일을 할 때도 자주 도왔다고 했다. 한번은 연탄을 실은 수레가 미끄러져 가볍게 다친 적도 있다고 했다.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자식들의 교육에 가장 신경 쓴 그의 부모님 덕분에 초등학교를 무사히 마친 그는 당대 명문인 경남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처음 등교해보니 입학 전에 학원에서 영어를 배워온 아이들이 많았다. 나는 처음부터 기가 죽었다. 노는 문화가 전혀 달랐고, 용돈 씀씀이도 큰 차이가 나서 함께 어울리기가 어려웠다. 어쩌다 친구들 집에 따라가보면 나로서는 처음 보는 호사스러운 집에, 정원에, 가구가 놀랍기만 했다. 그에 더해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도련님으로 떠받들어지는 모습에 더 주눅이 들곤 했다”라고 당시를 설명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는 특별히 공부에 매진하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으며 보냈다.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보내며 읽고 싶은 책을 실컷 읽었다. 또 그는 고3 때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다 정학을 맞은 경험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역사학을 전공하고 싶었던 그는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법과나 상과를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는 첫 입시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입시 공부를 등한시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대학 입시에 실패했다. 재수 끝에 당시 후기였던 경희대 법대에 입학했다”라고 고백했다. 그는 학교 부근에서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 이렇게 그의 서울 생활이 열렸다. 부인과의 연애는 면회의 역사 문 이사장은 경희대 법대 3학년 무렵 지금의 부인을 만났다. 당시 5월 초 ‘법의 날’에 맞춰 열리던 ‘법 축전’이란 이름의 법대 축제에서 파트너로 처음 만나 즐겁게 보냈다고 한다. 그는 “호감이 갔다. 그러나 이후 만남을 이어가진 않았다. 내가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교내에서 한 번씩 만나면 눈인사를 나누는 정도였다”라며 부인과의 추억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던 중 1975년 4월 비상학생총회에 참가한 문 이사장은 페퍼포그(최루탄)에 맞아 실신을 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누군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는 것을 느꼈는데, 그 주인공이 지금의 부인이다. 그후 문 이사장은 구치소에 수감되었는데, 어느 날 부인이 면회를 와서 작은 신문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경남고가 전국 야구대회에서 우승했다는 톱기사가 실려 있었다. 문 이사장은 야구를 매우 좋아했다. ‘법 축전’ 때 학년 대항 야구 시합에서 학년 주장을 맡아 우승한 적도 있을 정도다. 부인이 그런 일을 기억하고 있다가 그가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해 신문을 가져다준 것이다. 그는 “세상에 아무리 야구를 좋아한들 구치소에 수감된 처지에 야구 소식에 무슨 관심이 있을까? 그래도 그런 생각을 한 아내가 귀여웠다. 감방에서 그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나곤 했다”라며 당시의 풋풋했던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심지어 그가 공수부대에 입대했을 때 부인은 흔히 군 장병의 면회 때 챙겨가던 통닭이나 빵 대신 안개꽃 한 다발을 가져왔다고 했다. 애인이 면회를 왔다는 소식을 들은 동기들이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려고 우르르 문 이사장에게 몰려와서 난처했다고도 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동기들에게 안개꽃을 조금씩 나눠준 일도 소개했다. 부부는 7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경희대 음대 졸업 후 서울시립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하던 부인과 함께 문 이사장은 부산으로 내려갔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했지만, 판사 임용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검사는 그의 체질에 맞지 않고, 변호사가 되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그는 부산행을 결정했다. 그의 운명은 어떻게? 부산에서 문 이사장은 사법연수원 동기인 박정규씨의 주선으로 노무현 변호사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는 “무엇보다 느낌이 달랐다. 내가 만난 법조인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아주 소탈했고, 솔직했고, 친근했다”라고 노 대통령과의 첫 만남을 표현했다. 그들은 서로가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고, 부산 부민동에 ‘변호사 노무현·문재인 합동 법률 사무소’를 냈다. 이 일이 그들을 평생의 운명으로 엮어놓은 계기가 된 것이다. 노 대통령은 2002년 부산 선대본부 출범식에서 “사람은 친구를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고,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입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당시 선대본부장을 맡았던 문 이사장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항상 존대를 했다. 그러다 편한 높임말을 쓰게 된 계기는 문 이사장이 청와대에 들어간 이후다. 그도 웬만하면 ‘형님’이라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있는 성격이지만, 30년 지기인 노 대통령에게만큼은 ‘선배님’을 넘어선 그 어떤 호칭도 쓰지 못했다고 했다. 당시에 노 대통령은 어려운 사람들, 노동자, 소외된 계층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노동·인권 변호사로 방향을 굳힌 뒤였다. 따라서 동업을 하게 된 문 이사장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변호사로서 스스로 깨끗해야 한다. 대의를 위한 실천에 있어서도 한계를 두지 않고 철저해야 한다’라는 노 대통령의 원칙을 배웠다. 일반적이던 법조계의 커미션도 끊고, 가슴 아픈 처지의 사람들을 돕는 데 매달렸다. 또 골프장 건설을 반대하는 환경운동가의 편에 섰던 이유로 그는 지금까지 그 흔한 골프 한번 배워보지 못했다. 국회의원을 거쳐 대선 후보에서 대통령이 된 노무현을 떠나보낸 뒤 부산에 남은 그는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기로 했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취임식 전 노 대통령은 문 이사장에게 함께 일해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절대 정치는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다시금 못 박은 그는 노 대통령과 함께 참여정부의 시작과 끝을 함께했다. 그리고 사람 사는 세상을 함께 만들자던 노 대통령을 떠나보냈다. 국장의 상주를 맡았던 문 이사장은 ‘나까지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라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노 대통령이 남긴 것들을 지켜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살아남은 자들의 책무, 그가 남기고 간 숙제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충격, 비통, 연민, 추억 같은 감정을 가슴 한구석에 묻어두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그를 ‘시대의 짐’으로부터 놓아주는 길이다”라는 말로 「운명」의 서두를 쓴 문재인 이사장. 아픔과 고통을 겪고 일어선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차근차근 구상했다. 그리고 이제 조심스럽게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표현대로 ‘살맛 나는 세상,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그의 진심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어릴 적 가난의 기억은 살아가면서 그대로 인생의 교훈이 됐다. 더 이상 가난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혼자 잘 살고 싶지도 않았다. 어려운 시기에 우리가 받았던 도움처럼 나도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살고 싶었다. 자라서 학생운동을 하게 된 것도, 인권 변호사가 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굴곡이 많고 평탄치 않은 삶이었다. 돌아보면 신의 섭리 혹은 운명 같은 것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어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한가운데에 노무현 변호사와의 만남이 있었다. 그는 나보다 더 어렵게 자랐고 대학도 갈 수 없었다. 어려운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나보다 훨씬 뜨거웠고, 돕는 것도 훨씬 치열했다. 그를 만나지 않았으면 적당히 안락하게 그리고 적당히 도우면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치열함이 나를 늘 각성시켰다. 그의 서거조차 그러하다. 나를 다시 그의 길로 끌어냈다.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야말로 운명이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 - 문재인의 「운명」 중 <■글 / 정은주(객원기자) ■사진제공 / 이성원, 도서출판 가교 ■참고 서적 /「운명」 (문재인 저, 도서출판 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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