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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칙은 흔들리고, 전략은 모르겠고’…동상이몽의 한·중·일 정상회담(2024. 06. 03 06:00)
- 2024. 06. 03 06:00 정치
- “역내 협력 강화할 것” “합의 내용 잘 모르겠다” 엇갈린 평가 윤석열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리창 중국 국무원 총리가 지난 5월 27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9차 한·중·일 정상회의에 앞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한·중·일 공동선언부터 북한의 군사정찰위성 발사까지. 외교·안보 현안으로 숨 가쁜 일주일이 지났다. 지난 5월 26일부터 27일까지 약 4년 반 만에 열린 제9차 한·중·일 정상회담은 엇갈린 평가를 낳았다. 정상회담 재개가 역내 협력을 강화할 것이란 긍정 평가가 나오는 반면, 합의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반론도 있다. 특히 회담 결과에 대한 한국과 중국의 해석이 각기 다르다는 점은 혼란을 가중했다. 이처럼 평가가 엇갈리는 것은 윤석열 정부만의 잘못은 아니다. 미·중 전략 경쟁이 본격화한 이후 중국이 포함된 관계에선 이러한 상황이 반복됐다. 긍정평가는 경제협력, 부정평가는 정치적 합의에서 나오는 식이다. 동북아 국가 간 경제는 협력하지만 정치적 협력은 어려운 상황, 이른바 ‘동북아 패러독스(Northeast Asian Paradox)’의 굴레다. 그렇다면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한·중·일 정상회담은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느냐가 문제다. 정상회담이 유도하는 방향은 경제협력을 통한 정치협력의 달성이다. 학계에서 이 가능성을 다룬 지 이미 수십 년이 넘었다. 온갖 방안이 제시됐지만 실제 외교 현장에서 구체적 성과로 가시화된 적은 없다. 동북아에서는 정치 현안이 경제 문제에 우선한다는 것만 확인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중·일 정상회담은 점차 각국 국내정치에서나 의미가 있는 회의로 변질하고 있다. 실상은 ‘만남을 위한 만남’에 그쳐도 ‘3국 협력 재가동’, ‘경제협력 확대’ 등으로 홍보하는 식이다. 한·중·일이 각각 자국 언론, 국민에게 설명하는 합의 내용, 표현부터 미묘한 차이가 발견된다. 하나의 회담, 하나의 공동선언에 각기 다른 해석이 세 가지나 나오는 ‘동상이몽’ 상황이다. 올해 열린 제9차 한·중·일 정상회담 역시 이러한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한국이 개최국이자 호스트(주인) 역할을 맡았지만 정상회담 성사 사실은 개최 일주일 전에야 발표됐다. 4년 반 만의 만남임에도 정상 간 논의 주제가 무엇인지조차 불투명했다. 그럼에도 한·중·일 정상회담 결과를 두고 정부는 ‘자화자찬’을 내놨다. 구조적 모순이 전혀 바뀌지 않은 상황에서 대체 무엇이, 어떻게 성과로 남았을까. 공동선언 속 ‘한반도 비핵화’, 성과 맞나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월 27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9차 한중일 정상회의 공동기자회견에서 리창 중국 국무원 총리의 발언을 듣고 있다. 왼쪽부터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윤 대통령, 리창 총리./대통령실 제공 “우리는 역내 평화와 안정, 한반도 비핵화, 납치자 문제에 대한 입장을 각각 재강조하였다”, “우리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한다”, “우리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한다”. 각기 다른 시기 나온 한·중·일 정상회담 공동선언문 내용이다. 첫 번째 문구는 지난 5월 27일 한·중·일 정상회의 직후 나온 공동선언문 속 내용이다. 두 번째 문구는 문재인 정부 시기인 2019년 12월 24일 제8차 한·중·일 정상회담(중국 청두 개최) 직후 나온 공동선언문, 세 번째 문구 역시 문재인 정부 시기인 2018년 5월 9일 제7차 한·중·일 정상회담(일본 도쿄 개최) 직후 나온 공동선언문 속 내용이다. ‘한반도 비핵화’ 관련 문구 중 어느 쪽이 더 의미가 명확한지는 분명하다. 지난 5월 27일,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은 한·중·일 정상회담 결과를 설명하는 언론 인터뷰에서 “지난 정권 말 중국에 대해 ‘눈치 보기 외교 한다’, ‘굴종 외교다’라는 말들이 나왔다. 지난 정부의 대중 외교에 대한 반성 차원에서 국민의 요구에 따라 상호 존중의 한·중관계를 만드는 정책을 추진해왔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정상회의 공동선언문에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을 포함하게 됐다는 논리다. 실제로 장 실장은 “한반도 비핵화란 표현이 (공동선언문에) 들어간 것 자체가 한반도 비핵화를 전제, 또는 목표로 설정했다는 것”이라며 “중국은 꽤 오랫동안 공식 석상에서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을 잘하지 않고 있다. 이번에 어쨌든 저 표현을 쓰는 데 동의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장 실장 발언은 과거 한·중·일 공동선언과 비교하면 어떤 부분에서 발전했다는 것인지 의미를 알기 어렵다. 또 중국 측 입장과도 미묘하게 다르다. 지난 5월 28일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한 중국의 기본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해당 발언은 “이번 정상회의 공동성명에서 한반도 비핵화 목표가 빠진 것이 중국의 반대 때문이라는 시각이 있는데 어떻게 보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이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는 외신은 한국 정부 설명과 달리 이번 한·중·일 공동선언 내용이 과거 공동선언에 비해 ‘톤 다운(수위 조절)’ 됐다고 본다는 것이다. 둘째는 중국이 말한 ‘한반도 비핵화’는 윤석열 정부 들어 긍정적으로 변한 것이 아닌 쌍궤병진(비핵화와 북·미 평화협정 동시 추진) 원칙의 연장선에 있다는 점이다. 이는 윤석열 정부가 말하는 ‘한반도 비핵화’ 방향과는 다르다. 이국봉 시베이(서북)사범대 석좌교수는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와 관련한 문구로 ‘重申(총션)’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이것은 ‘재천명’한다는 의미로 대화를 하기 위해 원래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는 정도”라며 “단어를 뭘 썼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중국은 한반도 핵 문제가 주한미군 등 남북 이외의 요소도 포함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북한만 비핵화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란 점”이라고 말했다. 설사 정부 설명대로 ‘한반도 비핵화’ 문구가 ‘성과’라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중국은 무엇을 얻었는지와 비교해봐야 한다. 이는 윤 대통령이 ‘하나의 중국’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와 연결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월 27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9차 한·중·일 정상회의 공동기자회견에서 발언을 마친 리창 중국 국무원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대통령은 기존 입장을 고수했나 한·중·일 정상회담 일정은 이틀에 걸쳐 진행됐다. 3국 정상이 함께 만난 것은 5월 27일이었고, 그 전날엔 한·중, 한·일 양자회담이 열렸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5월 26일 리창 중국 국무원 총리와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그런데 이날 진행한 양자회담을 두고 중국 외교부는 누리집에 “윤 대통령이 한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견지하고, 이런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뤄진 후 한국 정부의 입장은 하나의 중국 ‘존중’이다. 미국이나 한국 모두 하나의 중국을 두고 ‘원칙’이란 표현은 쓰지 않는다. 한국의 ‘존중’이나 미국의 ‘정책’이란 표현은 ‘원칙’을 대신하는 말이다. 전임 정부까지는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이 지속하기 바란다” 정도의 표현을 덧붙였다. 반면 윤석열 정부는 출범 이후 공식 석상에서 ‘하나의 중국’에 대한 별도의 입장 표명이 없었다. 다만 윤 대통령은 지난해 로이터통신과 인터뷰에서 “힘에 의한 대만해협의 현상 변경을 반대한다”고 말했다. 중국이 ‘내정간섭’이라고 적극적으로 반발하는 내용이다. 이는 ‘중국과 대등한 외교를 한다’는 윤석열 정부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로 사용됐다. 정부 논리대로면 중국 외교부가 밝힌 윤 대통령 발언은 심각한 사실 왜곡이자 외교적 결례다. 이에 대해 외교부는 지난 5월 27일 “우리 정부는 1992년 한·중 수교 이래 ‘하나의 중국 존중 입장’을 유지해왔으며, 이번 회담에서도 ‘그러한 취지의 발언’이 있었다”고만 밝혔다. ‘그러한 취지의 발언’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견지했다는 중국 측 발표에 항의했는지, 또 ‘힘에 의한 현상 변경을 반대한다’는 평소 주장도 전달했는지 등도 밝히지 않았다. 이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하나의 중국’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와 비교해보면 분명한 차이를 알 수 있다. 중국 국무원 누리집은 이번 중·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총리가 한 발언을 공개했다. “일본은 1972년 대만 문제에 관한 ‘일·중 공동성명’에서 결정된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이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상대국 국내 정치에 이용될 수 있는 발언 자체를 피하면서, 외교적으로 민감한 사항은 비껴갔다. 전문가들은 ‘하나의 중국’에 관한 입장 확인이 한·중·일 정상회담 개최의 전제조건이었을 것이라는데 대부분 의견이 일치한다. 외교전문가인 김준형 조국혁신당 의원은 “중국이 정상회담에 참여했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하나의 중국에 관한 입장을 확인받는다는 것”이라며 “어차피 정부가 입장을 밝혀야 했다면 차라리 빠르게 밝히고, 북한 비핵화와 같은 사안을 공동선언에 넣는 방식으로 외교전략을 짰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마지막까지 이 부분에 관해 정리가 안 되다 보니, 정상회담 개최 발표도 늦고 우리 의제를 협상에 적극적으로 반영하지도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즉 윤석열 정부는 ‘하나의 중국’, ‘대만해협’ 문제와 관련해 강경한 발언을 쏟아냈지만 정작 협상장에서는 지난 정부와 입장차가 없었을 것이란 의미다. 이처럼 흔들린 원칙, 전략은 필연적으로 결과도 모호하게 만든다. 한·중·일 정상회의 참석차 방한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왼쪽)와 리창 중국 국무원 총리가 지난 5월 26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양자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외교전략이 무엇인가 본래 한·중·일 정상회담의 주요 목적은 안보보다 경제문제에 맞춰져 있다. 실제로 공동선언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역시 공급망, 인적교류, 자유무역협정(FTA) 등의 내용이다. 이중 공급망 문제에 관한 합의는 중국의 ‘요소수 수출 제한’, 일본의 ‘반도체 핵심 부품 수출 규제’처럼 언제든 파기될 수 있는 정치적 선언에 가깝다. 인적교류 역시 유사하다. 박정진 일본 쓰다주쿠대 교수는 “‘대학 간 교류’는 고급 지식에 관한 협력 문제가 될 수 있어 미국의 견제 우려가 있다”며 “일본 내에서 해당 합의는 중국 전략에 말려든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고 지적했다. 한·중·일 FTA 역시 미국 중심의 시장 재편, 한·미·일 FTA도 가시화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느 정도로 구체성을 가질지 의문부호가 붙는다. 이를 제외하면 남는 것은 한·일 양자회담에서 나온 ‘라인 사태’ 언급 정도다. 윤 대통령이 기시다 총리와의 회담 이후 “(일본 정부가) 네이버에 지분을 매각하라는 요구는 아닌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며 일단락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윤 대통령 기대와 달리 일본 총무성 행정지도에 이어 지난 5월 29일 일본 개인정보보호위원회가 라인야후 측에 개선책 조기 실시를 압박한 사실이 알려졌다. 김 의원은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라인 사태가 한·일 간 외교 문제가 아니라고 하면 일본 정부에 면죄부를 준 것밖에 더 되느냐”고 지적했다. 한·중·일 정상회담에서 가시적 성과는 잘 보이지 않는다. 동북아 패러독스를 극복하지 못하면 ‘만남을 위한 만남’일 뿐이란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전략을 잘 세우면 결과는 다를 수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박 교수는 “한·중·일 정상회담은 중국이 원하지 않으면 개최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이 전제하에서 어떤 합의를 끌어낼 수 있을지 면밀한 전략검토가 필요하다”며 “안전보장 문제와 관련한 논의를 할 것이면 처음부터 한국이 비핵화 문제의 이니셔티브를 쥘 수 있게 새 로드맵을 제시하든가, 이게 어렵다면 과감하게 경제 문제에 집중해서 협의를 끌고 나갔어야 했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미·일에 편향된 외교에서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고도 놓친 셈”이라며 “정부가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모른다”고 말했다.
- 특집
- 이승만·트루먼 동상 왜 칠곡군 다부리에(2023. 08. 11 15:14)
- 2023. 08. 11 15:14 사회
- ㆍ다부동전적기념관에 백선엽 동상과 함께…명분도 사회적 합의도 없이 “높은 분들 결정” 경상북도 칠곡군에 있는 ‘다부동전적기념관’에 설치된 이승만과 전 대통령(오른쪽)과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 동상 /김찬호 기자 경상북도 칠곡군은 한국 현대사의 변곡점을 간직한 곳이다. 대구, 안동, 구미 등 주변 도시에 가려져 있지만 역사적 가치로만 보면 이들 지역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특히 전쟁사에 열광하는 이들에게 칠곡군 가산면은 성지와도 다름없다. 대구에서 북쪽으로 22㎞ 떨어진 곳, 상주와 안동에서 대구로 통하는 5번·25번 도로가 합쳐지는 곳, 왜관으로 향하는 908번 지방도로의 시발점이 되는 곳, ‘다부동’의 존재 때문이다. ‘다부동’은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라는 행정구역을 지칭한다. 하지만 이곳은 지명보다 역사적 사건으로 더욱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시기에 있었던 사건을 일컫는 고유명사 ‘다부동 전투’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일방적’ 남침으로 시작한 한국전쟁에서 국군은 초반 열세에 놓였다. 전 국토의 10% 정도만 남은 그해 8월, 국군과 미군이 주축이 된 연합군은 낙동강을 낀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고 약 55일간 치열한 사수전을 펼쳤다. 자료에 따라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낸 ‘6·25전쟁 주요전투’에 따르면 이중 8월 2일부터 28일까지 칠곡군 왜관읍과 가산면 다부동 일대에서 북한군 제1·제13·제15사단 및 제105전차사단의 진격을 저지해 대구를 사수한 일을 통칭 ‘다부동 전투’라고 부른다. ‘다부동 전투’는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라는 김일성의 지시를 꺾는 시발점이었다. 특히 승리의 주역 중 하나가 한국군 제1사단이라는 점이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한다. 당시 사단장이 백선엽 장군이었다. 이를 기리기 위해 1981년 ‘다부동전적기념관’이 문을 열었고, 희생한 사람들을 위한 충혼비, 전승비 등을 세웠다. 1951년 주민들이 세웠다는 백 장군 ‘호국구민비’ 역시 2003년 기념관 내로 옮겨왔다.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사실 그대로의 역사만 남긴 셈이다. 관람객이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기념관은 모범사례에 가까웠다. 문제는 관점이 달라지는 경우였다.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있는 그대로의 역사’는 도움이 되질 않았다. 그 결과 지난 7월, 딱 한 달 동안 다부동전적기념관에 동상 세 개가 들어섰다. 모두 역사적 인물을 대상으로 만든 동상이다. 특정 인물의 동상은 개인에 대한 추모, 참배의 도구가 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정치적 이용도 가능하다. 이 때문에 다원화된 사회에서 인물 관련 동상을 제작하거나 국가 관련 공간에 동상을 세우는 일은 쉽지 않다. 특히 인물의 공과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사회적 합의가 쉽지 않은 경우 더욱 그렇다. 지역 주민들은 동상 세 개를 두고 “높은 분들의 결정에 의해 섰다”고 했다. 이들 동상의 주인공은 각각 이승만 전 대통령, 백선엽 장군, 해리 S.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이다. 대체 왜 이곳에 동상이 섰나 경상북도 칠곡군에 있는 ‘다부동전적기념관’에 설치된 이승만과 전 대통령(오른쪽)과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 동상 /김찬호 기자 지난 8월 7일 경상북도 칠곡 현장을 찾았다. 최고 37도를 넘나드는 ‘폭염’이 한창이었다. 다부동전적기념관은 다부 나들목(IC) 지척에 있었다. 서울에서 출발하면 차로 세 시간, 부산에서 출발하면 두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였다. 주변에는 산, 도로 등을 제외하면 관광지, 유흥거리 등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동상을 세운다고 해서 많은 이들이 찾을 만큼 접근성이 뛰어난 곳은 아니었다는 의미다. 실제로 이날 점심 무렵 방문한 전적기념관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없었다. 기념관 부지는 설치된 계단을 기준으로 총 3개 층으로 나눌 수 있었다. 1층에는 주차장과 행정건물 그리고 각종 전차, 장갑차, 곡사포 등 군사 관련 무기가 전시돼 있었다. 가장 주요한 건물인 기념관은 별도의 건물로 3층에 있었다. 만약 7월 이전에 방문했다면, 2층은 관람객들이 쉬어갈 수 있는 쉼터 정도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난 한 달 동안 동상 세 개가 해당 공간을 채웠다. 경상북도 칠곡군에 있는 ‘다부동전적기념관’에 설치된 백선엽 장군 동상 / 김찬호 기자 어느 방향으로 접근하든 계단을 이용하면 무조건 동상과 마주친다. 3층에 있는 기념관 건물로 향한다면 피해갈 수 없다는 뜻이다. 이중 하나는 지난 7월 5일, 2층 한 구역에 세운 백선엽 장군의 동상이다. 백 장군은 실제로 다부동 전투에 참전했다. 인물에 대한 의미를 더하고, 빼며 논란을 자초하지 않는다면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지난 7월 27일 백 장군 동상이 정면으로 바라보는 지점에 높이 4.3m, 넓이 1.57m, 무게 3t으로 제작해 세운 동상 두 개다. 동상을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오른편에 있는 동상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다. 그 옆에 똑같은 크기로 나란히 선 동상은 해리 S.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이다. 한·미 두 전직 대통령이 경상북도 칠곡에 나란히 동상으로 서 있다. 동상에 대한 관람객의 생각을 들어보기 위해 약 6시간 남짓 머물렀다. 가족 단위 나들이객을 포함해 모두 24명의 관람객을 만났다. 이중 ‘기념관에 세워진 동상의 존재를 미리 알고 왔다’거나 ‘이승만·트루먼 동상이 이곳에 세워진 이유를 안다’고 답한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동상에 대해 설명한 후 돌아오는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대구에서 남편과 함께 나들이를 나온 A씨는 “이승만 동상인지 몰랐고, 저게 왜 여기 세워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저 동상은 여기 있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실제 전투에서 돌아가신 분도 아니고 그 옆에는 미국 대통령도 있던데 무슨 기준으로 동상을 세우는 것이냐”고 되물었다. 반면 영천에서 왔다는 김주섭 목사는 “이승만 대통령은 세계 최고의 엘리트 공부를 한 사람이자 건국 기초를 세운 사람이고,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전쟁에 개입해 공산화를 막았다”며 “동상이 들어설 만하다”고 말했다. 이들 외에 방학을 맞이한 아이들과 함께 온 관람객이 많았다. 대구에서 온 B씨는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긴 했는데 아이들이 누구인지 잘 모르고, 논란도 있는 만큼 굳이 설명해주진 않았다”고 말했다. 이들 동상을 왜 여기 세운 것인지 기념관 관계자에게 물었다. 해당 관계자는 “동상을 세우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건 꽤 됐는데 결정이 나지 않다가 7월에 급물살을 탔다”며 “기념관 측이 제작 비용을 대거나 한 것은 없고, 부지만 제공했다. 만료 시점 같은 것은 따로 없었다”고 말했다. 인물들을 둘러싼 논란 등에 대한 질문에는 “실제로 동상이 세워진 후 항의하는 사람들이 찾아오고, CCTV를 추가 설치하는 등의 조치는 있었다”며 “다만 기념관은 동상제작과 아무런 상관도 없고, 올해 1월 1일부터 기념관이 칠곡군 소속에서 경상북도 소속으로 변경된 만큼 동상 관리 및 예산편성은 그쪽에서 할 것”이라고만 답했다. 지난 7월 5일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 앞에서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회원들이 백선엽 장군 동상 제막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연합뉴스 정리하면 이렇다. 동상이 이곳에 세워진 명분에 대해서는 관람객도, 기념관 측도 모른다. 민원이 제기됐고, 경상북도가 받아들여 동상을 세우고, 향후 예산을 편성해 관리한다는 것이 밝혀진 내용의 전부다. 동상이 필요하냐를 두고는 의견이 엇갈린다. 이는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닌 해당 인물들에 대한 역사적·사회적 합의가 아직 없다는 의미다.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동상 설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쪽의 목소리가 더 큰 데 따른 일시적 결과일 뿐이다. 이들이 누구였는지는 쉽게 추정해볼 수 있다. 이승만·트루먼 전 대통령 동상은 2017년 제작됐다. 건립부지를 찾지 못하다가 최근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동상을 ‘왜 칠곡에 세웠느냐’라는 물음의 답은 제막 기념식 당시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한 발언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지사는 “2021년에 ‘이 동상이 2017년도에 완성이 됐는데 세울 데가 없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너무나 아팠다”며 “경북도가 우리나라에서 땅이 가장 넓으니 아직도 이런 분 모실 장소가 많이 있다. 추천해 주면 잘 모시겠다”고 말했다. ‘왜 이승만·트루먼 동상인가’ 하는 점은 윤석열 대통령이 설명한다. 제막식 당일 윤 대통령은 화환과 함께 강승규 사회수석을 보내 메시지를 전달했다. “6·25전쟁 당시 한·미 두 나라 정상의 동상은 바로 자유민주주의와 한미동맹의 표상”이라며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야말로 역사의 원동력이라 확신했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기초해 이 나라가 나아갈 비전과 전략을 마련한 선각자셨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한·미 두 전직 대통령을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한 정치적 동반자로 여기는 모양새다. 정말 그럴까. 동상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을까 이승만·트루먼 동상이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은 알고 보면 진풍경이다.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한국전쟁 중에 여러 차례 정치파동을 만들었다.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이 대표적이다.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 통과가 핵심이었다. 본인의 집권 연장이 목표였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5월 25일 0시를 기해 임시수도 부산을 포함한 영남과 호남 지방에 잔여 공비 소탕을 명분으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또 50여명의 국회의원을 국제공산당과 관련이 있다는 명분으로 연행했다. 이어 최종 8명을 구속했다. 당시 미국 트루먼 행정부는 방미 중이던 존 조지프 무초 대사를 한국으로 급히 귀환시키고, 5월 30일 계엄령의 조기 해제를 촉구하는 입장을 이승만에게 전달했다. 이승만은 미국이 내정에 간섭한다고 화를 냈다. 결국 미 국무부는 같은날 계엄권을 유엔군이 인수하는 방안에 대해 당시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장군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빨리 회신하라고 지시했다. 31일 클라크 장군은 미 합참에 전문을 보내 이승만 정부를 대신할 과도정부를 수립할 방안을 검토한다. 1952년 이후 주요 국면마다 계속해서 나오는 미국의 ‘이승만 제거계획’의 시작이다. 트루먼 역시 이승만에게 경고 메시지를 전달했다. 6월 2일 이승만은 국회가 24시간 내에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지 않는다면 국회를 해산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미 대사관 대리대사 라이트너는 트루먼이 이승만에게 발송한 친서에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트루먼의 승인을 받아 첨가했다. 결과적으로 클라크 장군이 1952년 7월 5일 ‘비상계획안’이란 이름으로 미 행정부에 보고한 이승만 제거계획은 시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1953년 이른바 ‘에버레디’ 계획 등을 준비하며 미국은 지속적으로 이승만 제거를 염두에 뒀다. 반공포로 석방을 비롯한 휴전문제가 엮인 1953년 이후 상황을 배제하더라도 트루먼과 이승만을 동일 선상에 놓는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에 가깝다. 윤 대통령이 말한 한미동맹의 표상이 상대국 지도자를 제거하는 작전까지 포함하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누가 역사를 이용하는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6월 5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이처럼 역사적으로 보면 한 공간에 선 동상 3개가 모두 논란의 대상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보면 정해진 수순을 잘 따라가는 것처럼도 보인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장관급으로 격상한 국가보훈부는 두 가지 눈에 띄는 업무를 추진했다. 하나는 백 장군 재평가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지난 6월 30일 서울 영등포구 공군호텔에서 열린 ‘백선엽 기념재단 창립대회‘에서 축사한 데 이어, 7월 5일 열린 동상 제막식에도 참석했다. 그리고 지난 7월 24일 국가보훈부는 국립대전현충원 누리집에 백 장군을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적은 문구가 법적 근거가 없다며, 이 내용을 삭제했다고 밝혔다. 국립대전현충원 누리집 ‘안장자 검색 및 온라인 참배’란에서 ‘백선엽’을 검색하면, 비고에 나오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2009년)’이라는 문구를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또 다른 하나는 이승만 재평가다. 특히 김황식 전 총리가 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지원한다. 이는 윤 대통령이 추진하는 사업으로도 알려져 있다. 실제로 윤 대통령은 지난 8월 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독립유공자 및 유족 158명과의 오찬에서 이종찬 광복회장에게 기념관 건립을 도와달라는 뜻을 전했고, 이 회장 역시 “적극 돕겠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은 지난 8월 1일 미리 배포한 ‘대한민국 정체성 선포식’ 개최 인사말에서 “이런 괴물기념관이 건립된다면 광복회는 반대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를 두고 오락가락하는 행태는 이철우 지사의 말을 통해 이해해 볼 수 있다. 이 지사는 “세계 각국을 돌아봤을 때 선진국일수록 영웅들의 동상이 우후죽순 많이 서 있다”며 “그분들이 다 공만 있고 과가 없느냐? 공과가 다 있다. 그런데 공이 크고 과가 작으면 공을 위주로 그렇게 동상을 많이 세운다”고 말했다. 쉽게 말해, 공이 크면 과는 덮을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공과 중 무엇이 더 큰가를 평가할 기준이 없다. 해당 논리대로라면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하루아침에 평가를 바꿔도 문제될 것이 없다. 기념관, 동상에 집착하는 것 역시 정치적 의도를 의심케 한다. 개인적 기억이 집단의 기억, 즉 역사가 되는 데는 사회적 의미를 매개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이를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기념관, 동상 등의 존재다. 1인 독재 체제의 북한, 역사적 인물을 신격화한 군국주의 일본에서 이러한 장치들을 정치에 잘 활용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8월 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독립유공자 및 유족 초청 오찬에서 이종찬 광복회장의 발언을 듣고 있다./대통령실 제공 전문가들은 정치적 필요에 따라 역사를 부각하고 빼는 행위를 경계하고 비판한다. 역사학자 알렉스 폰 턴즐만은 “조각상은 역사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역사적 기억에 대한 기록”이라며 “조각상은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지에 관해 특정 시점의 누군가가 생각한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지금,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헬렌 카는 “우리가 얼룩진 과거를 무비판적으로 고집할 때, 우리는 계속해서 현재를 더럽힌다”고 말했다. 헬렌 카는 역사학자 E. H 카의 증손녀다. 윤석열 정부는 역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논란이 있는 인물의 공을 부각하는 방식으로 재평가를 시도하고 있다. 특히 윤 대통령 지지층을 중심으로 이들 인물에 대한 긍정 평가가 높다는 점은 다양한 비판을 낳는다. 사회통합을 해칠 뿐만 아니라 국민 사이에 갈등의 골만 깊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윤석열 정부가 역사를 수정해 지지층 결집을 노린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 특집
- 속도 안 나는 ‘탈석탄’ 뒤 동상이몽(2021. 11. 12 12:02)
- 2021. 11. 12 12:02 국제
- ㆍ고효율 대체에너지 개발 아직… 인도네시아·호주 등 석탄 수익 ‘꽉’ 2018년 11월 28일(현지시간)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석탄화력발전소인 폴란드 베우하투프 발전소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 베우하투프|AP연합뉴스 “지구 평균기온 상승폭을 1.5도 이하로 제한합시다.” 2015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1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 당시 기후변화협약은 비교적 수월하게 맺어졌다. 195개에 달하는 나라가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여 지구 온도 상승폭을 제한하자는 파리 기후변화협약을 채택했다. 온실가스를 대거 배출하는 중국과 인도, 미국 등도 함께했다. 5년 후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삼림벌채 중단, 탄소제로 차량 개발 등 이전보다 구체적인 기후위기 대응 방안이 제안된 가운데 수많은 참가국이 멈칫한 제안이 있었다. “석탄 화력발전을 없앱시다.” 탈석탄은 탄소중립을 이루기 위한 핵심 과제다. 국제연구단체 글로벌탄소프로젝트(GCP)에 따르면 지난해 화석연료에서 배출된 이산화탄소 348억1000t 중 석탄에서 나온 이산화탄소는 139억8000t으로 가장 많았다. 석탄은 화석연료 중 같은 부피에 탄소 성분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탄소배출원이도 하다. 석탄 중 가장 많이 사용되는 갈탄과 무연탄 속 탄소 함량은 각각 60% 이상, 90% 이상이다. COP26에서 일부 국가들은 이러한 석탄 사용을 멈추자고 약속했다. 11월 4일 발표된 석탄 화력발전 중단 합의에는 2030년대까지 주요 선진국들이 석탄 화력발전을 중단하고, 2040년대까지 나머지 국가들이 여기에 동참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선언에 동참한 정부, 기관, 단체 약 190곳은 국내외의 새로운 석탄 화력발전소 투자를 중단하고 대체에너지를 신속히 도입하고, 노동자들과 지역사회에 이익이 되는 ‘정의로운 전환’을 이루기로 약속했다. COP26 의장국인 영국을 포함해 캐나다, 폴란드, 베트남, 칠레 등 국가와 영국 은행 HSBC, 캐나다 수출개발공사 등 단체가 COP26 탈석탄 선언에 참여했다. 탈석탄 발목 잡은 에너지난 문제는 석탄 화력발전 중단 합의에 참여한 나라는 COP26 참여국 197개 중 46개국뿐이었다는 점이다. 중국, 인도 등 석탄을 대량생산하고 대량소비하는 나라들은 동의국 명단에서 빠졌다. 기후변화 대응을 주요 국정 과제로 제시한 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 미국마저 동참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일부 국가들은 “일부 조항에만 찬성한다”고 단서를 달았다. 한국 산업부도 “탈석탄의 구체적 시점에는 동의하지 않았으며 원론적 차원의 지지”라는 입장을 밝혔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발생한 천연자원 수급 불균형으로 일어난 에너지난은 감소 추세였던 석탄 수요와 생산을 반등시켰다. 대규모 정전 사태를 겪은 중국의 올해 석탄 생산량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로이터통신은 중국의 올해 석탄 생산량이 지난해보다 4% 증가한 39억9700만t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실제로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는 10월 하루 1160만t이었던 석탄 생산을 1200만t까지 늘렸다. 대규모 탄광이 있는 네이멍구자치구와 산시성에는 연간 석탄 생산량을 1억6000만t 이상으로 늘리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제26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가 열린 11월 1일(현지시간) COP26 의장국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가 글래스고 회담장에서 연설하고 있다. / 글래스고|AP연합뉴스 텍사스주, 캘리포니아주, 워싱턴주 등 곳곳에서 정전이 일어난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은 올해 미국 내 석탄 사용량이 5억3700만t으로 전년 대비 23% 이상 급증할 것으로 예상했다. 석탄 생산량도 증가할 전망이다. EIA는 올해 미국 석탄 생산량을 지난해보다 14.5% 높은 6억1730만t으로 추산했다. 시장분석업체 IHS의 제임스 스티븐슨 연구원은 미국의 석탄 생산량 증가 이유는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하면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석탄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국제 석탄가격이 가파르게 오르자 10월 초 인도의 화력발전소 135곳 중 절반 이상이 3일도 버티지 못해 연료가 바닥날 수 있는 상황에 처했다. 인도는 전력 생산 약 70%를 석탄화력발전에 의존하고 있다. 결국 인도 정부는 국내 석탄 생산을 늘려 ‘자급자족’ 방식을 택했다. 에너지난 속에서 석탄 사용이 늘어나는 근본적인 원인은 대체에너지 기술 부족에 있다. 지난 수십년간 각국은 풍력, 태양광, 조력 등 친환경 대체에너지 기술을 개발해왔지만, 석탄 등 화석연료나 원자력을 능가할 만큼의 효율적인 에너지원을 찾지 못했다. 대체에너지 효율이 대부분 날씨에 따라 오락가락한다는 한계점도 있다. 석탄 수익 포기 못 하는 나라들 아직 고효율 대체에너지가 개발되지 않은 탓에 원자력발전 의존도를 줄이려는 나라들은 석탄화력발전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전기 생산 석탄화력발전 비중을 2010년 22%에서 9년 후 30%대로 늘었다. 올해까지 원자력발전소를 전면 폐지한다는 독일도 탄광 개발을 여전히 지속하고 있다. 독일은 현재 전력 약 28% 화력발전을 통해 생산하고 있다. 전력 생산 원료 97%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도 전력 생산 약 40%를 석탄화력발전에 의존하고 있다. 석탄 수요가 늘어나면서 석탄을 대량생산하는 나라들은 석탄을 통한 경제적 이권을 챙기려 하고 있다. 석탄 최대 수출국 인도네시아는 2021년 1월부터 7월까지 석탄을 수출해 380억달러(약 44조원) 수입을 남겼다. 인도네시아는 석탄 생산 중단 및 수출 제한을 위한 정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석탄화력발전소 폐지 기한도 다른 나라보다 늦은 2056년으로 설정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석탄을 많이 수출하는 호주도 석탄 생산과 사용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호주 정부는 10월 3개의 새로운 탄광 프로젝트 사업을 승인했다. 탈탄소 흐름으로 금융권이 석탄 채굴 회사에 대출을 해주려 하지 않자 의회에 석탄 채굴 회사를 위한 2500억호주달러(220조원) 규모의 대출 지원 계획을 제안했다. 호주 산업·과학·에너지·자원부는 지난달 공개한 보고서에서 석탄 수출량이 지난해 4억t에서 올해 4억3900만t에 달할 것이라고 밝혔다. 화력발전소나 탄광을 폐지할 때 들어가는 비용도 이들 국가의 문젯거리로 남아 있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2020년 호주 탄광산업 총수입은 약 732억8000만호주달러(약 65조원)이며 관련 산업 종사자는 약 3만9000명이다. 전력생산 90%를 화력발전에 의존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남아공 정부는 최근 유럽연합(EU), 미국 등으로부터 85억달러(약 10조원) 규모의 지원을 받고 탈석탄 정책을 가속화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남아공 전국금속노조는 광산 산업 종사자 10만명의 일자리가 위태로워진다며 정부 결정에 반대하고 있다.
- 금융권 노사 ‘주52시간’ 동상이몽(2018. 06. 25 15:54)
- 2018. 06. 25 15:54 경제
- ㆍ‘7월 조기도입’ 협상 중단, 불신만 쌓여… 노사 서로 책임 전가 “협상에 나선 은행장들이나 실무자들 모두 이런저런 핑계만 대며 결정을 하지 않는다. 조기도입의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다.”(금융노조 관계자) “현 근무 시스템에선 주 52시간 초과근무가 불가피한 직무가 많다. 이걸 예외로 두지 않고 주 52시간 근무제를 도입하면 법을 위반하게 된다.”(사용자협의회 관계자)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 5월 2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산업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에 참석,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발언을 듣고 있다. / 연합뉴스 노조 “사측, 조기도입 의지가 없다” ‘주 52시간 근로 조기도입’을 두고 두 달 넘게 협상을 벌여온 금융권 노사가 결국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교섭을 중단했다. 조기도입에는 노사 모두 공감했으나 시기와 대상 범위를 놓고 끝내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7월 조기도입’을 목표로 협상에 나선 노조는 “사측의 불성실한 교섭태도 때문”이라며 교섭 결렬의 책임을 사측에 돌렸다. 반대로 사측은 당장 주 52시간을 시행하기엔 문제가 많은 직무가 많고, 노조가 사측 권한 밖의 요구들을 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노조는 중앙노동위원회 중재가 실패로 돌아갈 경우 파업 등 쟁의행위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금융노조)은 지난 6월 18일 중앙노동위원회(중노위)에 임단협 조정을 신청했다. 노조는 앞서 15일 사측과 4차 대표단 교섭을 열고 3시간 30분간 격론을 벌였으나 접점을 찾지 못하고 교섭 결렬을 선언했다. 노사는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과 최대 65세까지 정년 연장, 점심시간 보장, 노조 추천 사외이사 근거 마련 등 52개의 안건을 두고 지난 4월 12일 첫 교섭을 시작해 이날까지 대표단 교섭 4회, 대대표 교섭 4회, 임원급 교섭 3회, 실무자 교섭 14회 등 모두 25회의 협상을 벌였다. 올해 산별 교섭 대표단은 KB국민·신한·NH농협·부산·한국감정원 등 5곳의 사업장 노사 대표와 금융노조 위원장, 금융산업사용자협의회 회장 등 모두 6대 6으로 구성됐다.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300인 이상 사업장들은 7월부터 ‘주 52시간’ 근무를 시행해야 하지만, 은행·보험·증권사 등 금융권은 특례업종임을 고려해 내년 7월 이후 시행으로 1년간 유예기간을 받았다. 내년 6월까지 도입을 하지 않아도 법적으로 문제될 게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금융권에 ‘주 52시간 근로 조기도입’이 추진 중인 이유는 정부의 강한 의지 때문이다.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은 지난 4월 은행장들을 만나 조기도입을 요청하는 등 정부의 직·간접적 압박이 컸다. 이에 은행장들은 조기도입에 뜻을 같이하고 대표단을 꾸려 협상을 벌여왔다. 금융권 안팎의 조기도입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노조는 도입시기를 7월로 잡았다. 금융노조 산하에 시중은행뿐만 아니라 7월부터 주 52시간 근무에 들어가는 국책금융기관 사업장도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섭은 중단됐고, 중노위 조정기간이나 지금까지 보인 노사 간 의견차를 감안하면 7월 조기도입은 사실상 물건너갔다. 노조는 사측의 불성실한 교섭태도가 결렬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불만을 표시했다. 금융노조 관계자는 21일 “교섭 결렬 전까지 은행장들이 참여하는 대표단 교섭이 4차례 열리는 데 그쳤다”며 “은행장들이 시간 내기 어렵다는 게 이유였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4월 12일 첫 번째 대표단 교섭은 상견례에 그쳤고, 세 번째 대표단 협상에서는 각 은행에서 실태조사한 결과를 통보한 후, 20여개 직군에서 근로시간 단축이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했다는 것이다. 노조 관계자는 “20차례 넘게 테이블에 앉은 실무교섭단마저도 ‘우린 권한이 없다’는 말만 반복하면서 협상 자체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며 “정부 눈치 때문에 주 52시간을 조기 도입하겠다고 하면서도 온갖 핑계를 대며 미루고만 있었다. 조기도입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말했다. 사측 “노조, 권한 밖 무리한 요구” 이 관계자는 사측의 “초과근무가 불가피한 20여개의 직무를 예외로 두지 않고 바로 시행하게 되면 법을 위반하게 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그동안 부당노동행위를 저질러온 점을 자백한 것”이라고도 했다. 노조는 중노위 중재가 부결될 경우 지부별 순회집회, 전 조합원 결의대회 등을 열고, 이후엔 조합원 전체 의견을 물어 본격적인 투쟁에 나설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측은 도입시기를 미리 정해놓고 급하게 결정하는 것보다 직무상황에 적합하게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도입하는 등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각 은행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본점 정보기술(IT)팀이나 인사팀, 홍보팀, 영업점의 기업금융 담당 등 많은 직군에서 주 52시간 근로를 당장 시행하기 어려운 만큼 다양한 예외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업무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일괄 적용할 경우 법 위반뿐만 아니라 서비스 질 저하 등 우려되는 사안들이 많다는 것이다. 사측은 특히 노조의 요구안 중에는 경영진 권한 밖의 무리한 내용들도 많다고 항변하고 있다. 사용자협의회 관계자는 “노동이사 선임 등의 경우는 주주들이 결정할 사안이지 경영진이 맘대로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라며 “정년 연장이나 임금피크제 연장 등도 현실적으로 당장 수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주 52시간 근무 조기도입을 개별적으로 추진 중이던 일부 은행들도 이번 교섭 결렬로 일정에 차질을 빚게 됐다. PC오프제와 선택근무제, 탄력근무제 등을 통해 주 52시간 근무제를 이미 시행 중이거나 시행을 앞둔 부산은행과 IBK기업은행 등을 제외한 나머지 시중은행들은 추이를 좀 더 지켜보겠다는 분위기다.
- [이미지는 거울이다](2) 인천 자유공원 -‘구국의 영웅’ 그 이면에는 현대사의 질곡(2016. 11. 08 19:19)
- 2016. 11. 08 19:19 사회
- 맥아더 동상은 오랜 시간 동안 자유의 상징이었고, 반공·안보교육의 장소였다. 그러나 동상을 둘러싼 논쟁은 2004년에 재점화되었고, 2015년 9월에는 철거와 수호를 주장하는 이들의 물리적 충돌까지 발생했다. 1957년 9월 15일, 일제히 울려대는 기적소리 속에서 동상 하나가 세워진다. 인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자리한 더글러스 맥아더의 동상이다. 어딘가 찌그러진 듯한 정모, 옥수숫대 파이프, 잘 다려진 근무복 위에 느슨하게 풀어헤쳐진 점퍼를 걸친 맥아더의 모습이 동상이 되어 한국인들의 기억에 깊게 박히는 순간이었다. 1957년 한국인들에게 이 동상은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1957년 당시 한국인들에게 맥아더와 그의 동상은 하나의 우상이었다. 생존 인물의 동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뜻밖의 일이다. 요즘이야 그런 불문율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기념물을 세우는 것은 거센 반발에 직면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 맥아더 동상보다 1년 앞서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건립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당시 민주당 국회의원 김영삼이 “독재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한 일이 있었다. 인천 자유공원에 세워진 맥아더 동상/경향신문 자료사진 신화적 존재에서 신앙으로 변해 동상 건립은 그해 4월 국무회의에서 급하게 결정된 것이었고, 그 재원은 정부 예산이 아닌 공무원 급여에서 1인당 100환씩을 공제해서 마련했다. 반대여론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성사되지 못했지만 정부는 미국에 거주 중인 맥아더 본인과 가족들을 제막식에 초청하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세웠다. 전후(戰後) 한국 사회에서 더글러스 맥아더라는 인물이 차지하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맥아더, 그리고 그의 동상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힌트는 제막식에서 최규남 문교부 장관이 한 연설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두 분의 맥아더 장군을 가지고 있으니, 즉 한 분은 미주(美州)에 살아계신 그분이요. 다른 한 분은 움직이지 않는 이 동상인데, 우리는 영원히 이 땅에 머무르는 이 맥아더 장군을 존경하고 싶다. 외면으로는 움직이지 않지만 실상 영원히 우리들의 가슴속에 움직이고 있는 이 분의 정의와 자유의 정신을 우리는 길이 추앙하는 것이다.’( 1957년 9월 16일 기사) 1950년대 한국에서 더글러스 맥아더는 그 자체로 정의와 자유의 상징이었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을 무찌르고, 한국전쟁에서는 부산까지 밀려났던 절망적인 전황을 뒤집었다. 그 당시를 살던 한국인에게 맥아더는 살아있는 신화였다. 그와 그의 동상은 ‘자유를 위한 영구적 투쟁의 표상’( 1957년 9월 15일 사설)이 되어 한국인들의 우상이 되었다. 맥아더 신화는 이승만 정부와 사회지도층뿐만 아니라 민중들에게도 깊숙하게 침투했다. 4·19혁명과 함께 독재자 이승만의 동상은 시위대의 손에 무너졌지만, 인천 시민들은 맥아더 동상에 꽃다발을 걸어주며 혁명의 성공을 축하했다. 맥아더 동상에 걸린 꽃다발은 ‘빨갱이의 선동’을 운운하며 시민혁명을 폄하하려는 시도들을 반박하는 근거가 되었고, 동상은 ‘반공·반독재의 4월혁명 정신의 선양’ ‘자유혁명의 꽃다발’(, 1960년 4월 30일)이 되는 장소가 되었다. 1964년에 맥아더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맥아더 장군을 모시는 무당들이 등장했고,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신화적 존재가 신으로 변한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을 고스란히 복사한 듯한 인물 묘사, 동상의 시선이 상륙작전이 이루어진 인천 앞바다를 향하게끔 계획되면서 기념물로서의 의미를 극대화한 점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이 동상이 기념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기념물을 통해 기억하고자 했던 역사가 모두에게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인지, 그리고 기념물이 자리할 장소와 그 역사가 함께 맞물리는지를 따져보았을 때 맥아더 동상은 현대를 대표할 만한 기념물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가 없다. 물론 이는 맥아더 동상의 ‘작품성’이 압도적으로 훌륭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넘어설 만한 기념물이 거의 존재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싶다.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국은 굳이 기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기념하는 기념물들을 쏟아내 왔다.(가장 안 좋은 사례로 ‘강남 스타일’ 조각을 들 수 있겠다.) 맥아더 동상은 오랜 시간 동안 자유의 상징이었고, 반공·안보교육의 장소였다. 수학여행으로 인천을 다녀온 어린 학생이 맥아더 동상을 ‘우리나라에 공을 많이 바치신 거룩한 분의 동상’(, 1958년 5월 26일 박재용의 ‘수학여행’)이라고 소개한 것처럼, 적잖은 사람들이 맥아더 동상에 큰 의미를 부여해 왔다. 30년이 지난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서야 변화가 감지되었다. 당시 민중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의 기획전 의 부대행사로 열린 토론회에서 소개된 맥아더 동상은 ‘자유를 위한 투쟁’의 상징이 아닌, ‘위압적이고 영웅주의적인 미술’ ‘한반도는 미국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1988년 12월 7일)의 한 사례로 소개된 것이다. 맥아더에 대한 재해석, 동상 논란 재점화 이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면서 생긴 일이다. 전쟁에 대한 새로운 연구들이 등장했고, 지식인층에 광범위하게 소개되면서 한국전쟁을 바라보던 고정관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구국의 영웅’ 맥아더의 알려지지 않은 모습들이 소개되며 맥아더에 대한 단선적 평가가 복잡다단하게 변화한다. 특출난 군인, 전쟁영웅이라는 단선적 평가에 끊임없이 정치적 입지를 위해 만주에 원자탄을 던져 전쟁을 더 크게 키우려 했던 사욕 넘치는 인물이었다는 점이 점차 더해진 것이다. 지금은 음모론으로 격하되었지만 ‘정치적 야심이 컸던 맥아더, 본토 회복을 꿈꾼 장제스, 그리고 국내 정치세력의 만회를 꿈꾼 이승만이 내심으로 전쟁을 원하지 않았겠는가’ ‘6·25전쟁 재해석 열기’( 1988년 6월 24일)라는 ‘3자 공모설’이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진지하게 제기되기도 했던 시절의 일이다. 분단이라는 현실과 우리 사회에 깊숙하게 개입하는 미국에 대한 의문들이 강하게 쏟아졌던 시절 말이다. 그렇게 맥아더라는 인물에 대한 시각과 함께 동상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균열이 일어났다. 누군가 위풍당당하게 느꼈을 맥아더 동상의 모습에서 다른 누군가는 권위주의를 느꼈다. 그리고 그 이면에 자리한 전쟁의 역사, 현대사의 질곡을 떠올렸다. 마치 점령군인 양 우월적 지위를 누리며 횡포를 부렸던 주한미군을 떠올렸다. 그리고 패권국가 미국을 생각했다. 1992년 인하대 총학생회는 맥아더 동상의 이전을 주장했다. 1993년에는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동상에 빨간 페인트를 뿌렸다. 동상을 둘러싼 논쟁은 2004년에 재점화되었고, 2015년 9월에는 철거와 수호를 주장하는 이들의 물리적 충돌까지 발생했다. 맥아더 동상은 여전히 자유공원에 서 있고,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맥아더 신앙은 어느덧 사람들의 기억 저편으로 희미하게 사라져가지만, 빈 자리를 또 다른 신앙이 채우기 시작했다. 바로 박정희 신앙이다. 온 나라가 최순실의 이름으로 시끄러운 와중에도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는 신앙이다. 그 신앙은 광화문 광장에 박정희 동상을 세우겠다는 당찬 포부를 내놓았다. 하지만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을 그 자리에 올려놓은 그 신앙을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박정희 동상이라는 상징을 통해 보여줄 그 신앙의 가치는 무엇이며, 그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와 민주공화국에 걸맞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짚어볼 때다.
- 이미지는 거울이다
- [클릭TV]〈동상이몽〉에 대한 기대와 우려(2015. 06. 22 16:39)
- 2015. 06. 22 16:39 문화/과학
- 토요일 오후 8시45분 SBS에서 방송되는 (이하 동상이몽)는 요즘 예능 판도에서 몇 안 되는 ‘착한 예능’을 표방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중·고등학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그의 부모가 함께 출연합니다. 사춘기 또는 성장기에 있을 수 있는 여러 고민을 놓고 근본적으로는 가족 사이의 이해와 노력을 강조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고민은 관찰 카메라 형태로 전달됩니다. 한 번은 부모의 시각에서, 한 번은 자녀의 시각에서 문제를 보고 이를 토대로 토론을 통해 결말로 나아갑니다. 의 제작진은 2013년 논란의 파일럿(시범) 예능 를 만들었던 이들입니다. 역시 학생을 주인공으로 다뤘다는 점에서는 과 비슷합니다. 당시 프로그램은 이승철, 엄정화 등 인기가수들이 출연해 문제 학생으로 낙인찍힌 아이들을 모아 합창단을 구성한다는 줄거리였습니다. 그러나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시 합창단을 꾸릴 때 지원했던 학생들이 과거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장면이 전파를 탔기 때문입니다. 방송 후 곧바로 온라인을 통해서 이 문제 학생들로 인해 고통을 받았던 다른 학생들의 절규가 터져나왔습니다. 결국 프로그램은 문제 학생의 비행을 미화한다는 논란에 시달렸습니다. 프로그램은 3회를 기약하고 마지막으로 합창공연을 통해 대미를 장식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의도보다는 논란이 커진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은 2년 사이 제작진이 청소년 문제를 보는 시각이 좀 더 촘촘해졌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제작진은 각종 상담이나 심리를 통해서도 인식의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 부모와 자녀를 섭외하고 방송 이후에는 꾸준히 연락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관찰 카메라를 시행할 때도 사생활 공개나 여타의 가능성에 있어서도 정밀하게 대응한다고 밝혔습니다.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 | SBS 청소년 문제는 대수롭게 넘길 수 있지만 이후 성인으로 자라나는 한 인간의 사고체계나 가치관을 정립한다는 측면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방송 역시 이에 접근할 때는 다른 프로그램보다 훨씬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가 된 가족들의 화해를 도모하고, 그 사이 패널들이나 MC들이 아낌없이 조언을 하고, 또한 재미도 만들어가는 모습은 예능 프로그램의 새로운 모습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려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바로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실마리가 되는 곳이 바로 방송 무대라는 점입니다. 비연예인인 학부모나 학생들은 방송환경이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평소의 심리상태로 문제를 바라보지 못할 가능성도 다분히 높습니다. 제작진이 문제 해결을 위해, 예를 들어 스타를 좋아해서 문제인 학생에게 직접 스타를 등장시키는 해법을 쓰는 것은 단순히 감정의 고조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됐다는 착시효과를 줄 수도 있는 겁니다. 다른 교양 프로그램에서 문제의 해결을 일상공간에서 시작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게다가 제작진은 감정의 고조를 위해 부모자식 사이에도 모르는 비밀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런 부분은 이후 정교하게 관리하지 않을 경우 또 다른 문제의 씨앗이 될 수도 있죠. 청소년 관련 예능은 잘 구성이 될 경우 사회에 널리 알려야 할 좋은 영향을 줍니다. 하지만 제작진의 오판이 더해지면 시청자에게 고통을 줄 수 있습니다. 은 그런 의미에서 제작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하는 프로그램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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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정이야기]동상으로 우뚝 선 근대 우정의 아버지(2012. 11. 20 13:49)
- 2012. 11. 20 13:49 문화/과학
- “미국 대통령을 만나 보았는가?” “그들의 접대는 과연 지극하던가?” “그 나라에 처음 가보았는데, 마땅히 그 장점을 취할 바 있던가?” 보빙사(報聘使)로 미국에 다녀온 홍영식에게 고종은 연신 질문을 던졌다. 질문이 무려 60가지나 이어졌다고 한다.(이기열, 정보통신 역사기행, 북스토리, 2006년) 보빙사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이듬해 푸트(L. H. Foote) 공사가 부임하자 이에 대한 답례로 조선이 미국에 파견한 최초의 외교사절단이다. 민영익을 전권대신, 홍영식을 부대신으로 한 10여명의 보빙사는 1883년 7월 26일 인천을 출발해 9월 18일 아서(C. A. Arthur) 대통령을 접견했다. 이날 뉴욕타임스는 보빙사 일행의 도착과 행색, 일정 및 조선에 대한 소개 기사를 자세히 실었다. 지난 11월 14일 포스트타워 앞에서 열린 초대 우정총판 홍영식 선생의 동상 제막식에서 홍석우 지식경제부장관이 축사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 근대 우편제도는 미국의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온 홍영식이 고종에게 우편의 중요성을 진언해 시작됐다. 고종은 1884년 4월 22일 우정총국을 개설하고 홍영식을 초대 총판에 임명했다. 당시 젊은 엘리트 관리로서 고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그는 우정제도에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보빙사로 방미하기 2년 전인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할 때도 역체국을 따로 찾아 우정제도에 대해 자세히 묻고 관련 자료를 챙긴 기록이 있다. 이듬해 말에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한 기구로 우정사(郵程司)가 설립되면서 협판 자리에 앉게 된다. 우정사는 도로·전신·우편·수로사업을 관장하는 기관이며, 협판은 부책임자에 해당한다. 미국에 보빙사로 파견된 때가 이 시기이다. 그는 미국 우정성과 뉴욕 우체국, 웨스턴유니온전신회사 등을 시찰하고 더욱 자극을 받았다. 보빙사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무엇보다 신식 우편제도의 시행을 강력히 주장해 고종을 설득한 것은 우편의 힘과 중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1981년 발굴된 그의 보빙사 복명기는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미국의 문물을 시찰했는지 잘 보여준다. 그런 과정을 거쳐 우정총국이 개설되고 그해 11월 18일 서울·인천 간 최초의 우편 업무를 개시함으로써 근대적 우편시대가 열린 것이다. 지난 11월 14일 우정사업본부는 서울 포스트타워(서울중앙우체국) 청사 앞에 ‘초대 우정총판 홍영식’ 동상 제막식을 가졌다. 서울교육대 이상갑 교수가 제작한 이 동상은 홍영식이 ‘우정총국을 창설하라’는 고종의 교서를 받들고 먼 곳을 응시하는 모습을 담았다. 선진문명과 개화에 대한 그의 굳은 신념과 실행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기단 상단부에는 최초의 우표인 문위우표 5종, 하단부에는 최초로 사용한 일부인을 각각 조각해 근대적 우편제도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를 조형화했다. 제막식에 참석한 홍석우 지식경제부장관은 “초대 우정총판의 동상 건립을 통해 어려운 우편사업 환경을 극복하고 국민과 함께 하는 우정문화를 구현하고자 한국 우정의 랜드마크인 포스트타워 청사 앞에 동상을 건립하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현재 홍영식 동상은 이번에 세워진 전신상 외에 우정박물관과 우정총국 등에 6기의 흉상이 있다. 홍 선생의 증손자인 홍석호씨는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역적 아닌 역적의 오명을 썼던 것이 참을 수 없었는데 여러 자료가 발굴되면서 그런 인식이 불식되니까 위안이 된다”며 “동상을 건립한 우정사업본부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홍영식에 대해서는 지금도 ‘대역죄로 처형됐다’는 등 논란의 소지가 있는 기술(記述)이 많다. 이번 동상 건립을 계기로 ‘근대 우정의 아버지’ 홍영식에 대한 후속 자료 발굴과 오류 수정, 재평가작업도 이루어졌으면 한다.
- 우정이야기
- [사회]보금자리에 돌아선 과천민심 ‘동상이몽’(2011. 09. 27 17:03)
- 2011. 09. 27 17:03 사회
- ㆍ여인국 시장 주민소환투표 추진… 자가주택자와 세입자 간 이해관계 달라 지난 9월 8일, 과천시장 주민소환운동본부(이하 ‘운동본부’)는 여인국 경기도 과천시장 주민소환을 위한 서명부를 과천시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했다. 서명에 참여한 과천시민의 숫자는 모두 1만2144명. 투표 발의에 필요한 과천시 전체 유권자 5만4707명의 15%인 8207명보다 4000명 가까이 많은 수가 서명에 참여한 것이다. 9월 8일 강구일 과천시장 주민소환운동본부 대표(오른쪽)가 과천시장 주민소환투표 청구 서명부를 제출하기 위해 과천 선거관리위원회에 들어서고 있다. 강 대표 옆의 현수막은 여인국 과천시장의 주민소환에 반대하는 단체가 붙인 것이다. / 연합뉴스 투표 발의가 성사될 경우, 올해 11월 초에 주민소환투표가 실시된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제기한 무상급식 주민투표와 마찬가지로 전체 유권자의 33.3%인 1만8217명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으면 투표함은 자동 폐기된다. 강구일 운동본부 대표(41)는 현재까지 2만여명이 가입되어 있는 ‘과천사랑’ 카페에서부터 주민소환 얘기가 나왔다고 전했다. ‘과천사랑’ 카페는 2005년 과천 시민들의 친목을 목적으로 개설된 카페로, 주민들끼리 생활·교육·주택문제를 논의하는 장소다. 강 대표는 여 시장 소환의 핵심적인 이유로 보금자리 유치로 인한 재건축 지연 문제와 집값 하락 문제를 들었다. 그는 “애초 국토부가 과천에 9641가구에 달하는 보금자리주택을 지정했을 때 시장은 무얼 했나. 과천시 전체가 2만2000여가구인데 그 많은 보금자리주택이 들어서면 기존 시민들은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 물었다. ‘보금자리 주택 들어서면 재건축 가격 하락’ 서명부 제출 2주 전인 8월 24일, 여 시장은 “국토부가 과천 보금자리주택 50% 축소 건의안을 수용했다”고 발표했다. 보금자리주택 물량이 절반인 4800가구로 줄어든 것이다. 강 대표는 “규모가 줄어들긴 했지만 보금자리주택으로 인해 30년 가까이 된 기존 아파트 단지의 재건축 가격이 떨어질 것이다. 사업성이 안 된다는 이유로 재건축이 지연될 것이란 점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그 외에 운동본부 측은 여 시장이 과천정부청사의 세종시 이전 뒤 뚜렷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점, 보금자리주택 공사로 과천시의 환경도시 이미지가 훼손된 점, 여 시장의 친척이 보금자리지구 수용 발표 직전에 아파트를 처분한 점 등을 소환의 이유로 제기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과천시는 한나라당 강세 지역이었다. 안상수 한나라당 의원이 내리 4선에 성공한 곳일 뿐만 아니라, 여인국 시장도 야당 열풍이 강하게 불었던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2위 후보를 16% 차이로 제치고 도내 유일한 3선 한나라당 기초단체장이 됐다. 당시 민주당 후보는 3위를 차지할 정도로 야당의 조직력이 약한 편이다. 하지만 시의회는 야당에 넘어갔다. 7석 중 4석이 민주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후보와 시민운동가 출신의 무소속 서형원 후보에게 돌아간 것. 이 때문에 보금자리 찬성 시민들 사이에서는 운동본부와 시의회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다. 하지만 강 대표는 여 시장 주민소환 운동과 야권은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재건축 문제가 걸려 있는 만큼 운동본부 지지자들의 상당수는 중장년의 아파트 소유자들이다. 여 시장 소환운동은 야권 등 정치와 무관한 순수한 시민운동이다”라고 말했다. 강 대표는 “우리는 한나라당 반대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능한 시장을 심판하겠다는 것이다. 여 시장에는 반대하지만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시민들도 많다”고 덧붙였다. 8월 11일 여인국 과천시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과천 지식정보타운에 건설 예정인 보금자리주택을 9600여가구에서 4800가구로 축소하는 방안을 국토부에 건의키로 했다고 밝혔다. 국토부는 8월 24일 여 시장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 연합뉴스 시의회 부의장인 황순식 진보신당 의원(34) 역시 운동본부 사람들과는 거리를 뒀다. 황 의원도 운동본부 측과 마찬가지로 보금자리 백지화를 주장했다. 하지만 황 의원이 내세운 이유는 재건축보다는 추진 과정의 불투명성과 환경파괴 문제, 주거 빈곤층 입장에서 지나치게 비싼 임대가격 등이었다. 황 의원은 “운동본부 측의 입장은 집값 하락에 대한 우려와 재건축 지연에 관한 걱정이다. 진보신당 의원으로서 이런 이유로 시작된 시장 소환에는 찬성도 반대도 하기 곤란하다”며 “차라리 여 시장이 사퇴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황 의원이 위원장으로 있는 진보신당 과천시 당원협의회는 이미 지난 8월 3일 성명서를 통해 “여인국 과천시장은 개발공약의 남발과 무능함으로 인한 시민들의 고통과 분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라”고 밝힌 바 있다. 황 의원은 여 시장의 소환 가능성을 높게 보진 않았다. 여 시장의 보금자리 절반 축소 발표 이후 주민소환 운동이 냉각기로 들어섰다는 설명이다. ‘시장에 반대하지만 소환운동 회의적’ 과천에 거주하는 세입자들은 여 시장에는 반대하지만 운동본부 측의 소환운동에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상가 세입자인 방순아씨는 한때 전국철거민연합 활동을 했을 정도로 반한나라당 성향이 강한 사람이다. 하지만 방씨는 운동본부 측이 재건축 추진세력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지금 소환운동 하는 사람들은 다들 자기 집이 있는 사람들이다. 재건축하면 그들은 이익을 보지만 나 같은 세입자들은 어딘가로 쫓겨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과천시장 소환투표가 성사될지, 성사되면 투표율이 33.3%를 넘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이번까지 단체장에 대한 주민소환투표가 제기된 것은 총 26회. 이 중에서 실제로 투표 발의까지 간 사례는 2007년 광역 화장장 유치에 나선 김황식 당시 하남시장과 2009년 해군기지 유치를 추진한 김태환 당시 제주지사 등 2건이다. 제주지사 소환투표의 경우 11%, 하남시장 소환투표는 31.3%의 투표율로 투표함이 개봉되지 못한 채 폐기됐다. 자가주택 비중이 높지 않은 것 역시 운동본부 측에는 악재다. 2009년 과천시 주택 점유형태별 현황을 보면, 전체 주택 17000여채 중 자가소유 비중은 39.2%인 6915채에 불과하다. 반대로 말하면 전세·월세 등 세입자 비중이 60.8%인 셈이다. 주민투표가 성사되기 위해서는 주택 자가소유자 대부분이 투표장에 나와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반면 주민소환 지지자들은 투표 성사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한 시민은 과천사랑 게시판에 “한나라당 지지자들 중에도 여 시장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 여 시장의 주요 지지층이었던 노년층 역시 보금자리주택으로 인한 환경파괴 문제로 시장에게 등을 돌렸다”는 글을 올렸다. 강 대표는 “설사 주민소환 투표가 성사되지 않더라도 앞으로 과천시장이나 시의원이 시민들을 우습게 보지 않을 것이란 경고의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 [여의도 라운지]충청권 의원 '동상이몽'(2004. 11. 11)
- 2004. 11. 11 정치
- 헌재 위헌판정에 따른 특별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만난 여야 충남지역 의원 10명은 정작 위헌사태의 책임공방으로 만남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말았다. 심대평 충남지사의 주선으로 10월 29일 홀리데인인서울에서 만난 이들은 "헌법 개정을 해서라도 행정수도는 건설을 추진해야 한다"는 원칙에 쉽게 합의했으나 한나라당 홍문표 의원이 '충청도신당론'을 제기하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홍 의원은 심대평 지사와 자민련 김학원 대표를 향해 "위기극복을 위해 초당적인 협력이 전제돼야 함에도 특정 정당을 흠집내고 한나라당 소속인 대전시장과 충북지사의 탈당을 촉구했다"면서 "위기를 당세 확장에 이용해선 안 된다"며 심 지사를 중심으로 한 충청권 의원들의 신당론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자민련 김학원 대표는 홍 의원의 항의에 대해 "한나라당 지도부가 헌재의 위헌결정에 박수치는 것을 보고 그런 것이니 서운하게 생각말라"며 이해를 구했으나 심 지사는 별무반응이었다. 김 대표는 이어 "정권의 명운을 걸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약속을 믿은 충청지역 주민만 속아넘어간 꼴이 되고 말았다"면서 "일차적인 책임은 열린우리당에 있다"고 주장했다. 열린우리당 문석호 의원은 이에 대해 "수도 이전을 누가 반대했냐"고 반문한 뒤 "이중행태를 보인 정당이 이제 와서 대통령에게 책임지라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며 역공을 취했다. 자민련 이인제 의원은 문 의원의 말을 받아 "노무현 정권은 수도 이전을 공약으로 탄생된 정권인 만큼 헌법 개정절차를 밟아서라도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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