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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 6만5천원 무제한…‘기후동행카드’ 인천도 된다
- 2023. 11. 20 10:31 화제
- 내년 1월 선보이는 ‘기후동행카드’에 인천시도 함께한다. 서울시 제공 내년 1월 선보이는 ‘기후동행카드’에 인천시도 함께한다. 기후동행카드는 서울시가 내년 1월 도입을 준비하고 있는 무제한 대중교통 이용권으로, ‘월 6만 5천원’ 교통카드 하나로 서울 시내 지하철, 시내·마을버스, 공공자전거 따릉이까지 원스톱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다. 그 대상지가 서울에서 인천으로 확대된 것이다. 7일 서울시와 인천시는 교통분야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기후동행카드 참여 및 도시철도 현안 등 수도권 교통정책에 대한 두 도시의 협력체계 강화를 발표했다. 이번 수도권 확대 이용에 따라 시민들의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 9월 11일 기자설명회를 통해 2024년 1월부터 5월까지 기후동행카드를 시범 운영하고 보완을 거쳐 내년 하반기부터 본격 시행할 계획임을 발표했다. 서울시 시민참여 온라인 플랫폼 ‘상상대로 서울’에서 지난 9월 20일부터 10월 4일까지 진행된 설문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87.9%가 기후동행카드 이용 의사가 있다고 답했으며 응답자의 28.2%는 ‘적용 구간·교통 수단 확대’를 보완할 점으로 꼽았다. 서울시는 2024년 1월부터 5월까지 기후동행카드를 시범운영 후 하반기 본격 시행할 계획이다. 서울시 제공 이러한 시민들의 요구에 대응코자 수도권 3개 시·도는 지난 9월부터 수도권 교통기관 실무협의회를 개최해 기후동행카드 등 수도권에 공동 적용되는 교통권 출시를 논의해 왔으며, 이번 인천시의 기후동행카드 사업 참여 발표는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서울시와 인천시는 시범사업 기간 중에 광역버스 등 가능한 운송기관부터 참여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구체적 시기 및 방법은 수도권 교통기관 실무협의회를 통해 긴밀히 협의 후 발표할 예정이다. 또한 서울, 인천의 모든 시민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단계적으로 서비스 범위 확대할 계획이다. 인천시의 기후동행카드 참여를 시작으로, 서울~인천 지역의 도시철도 환경도 시민 편의 중심으로 변모할 것으로 전망된다. 인천시 역시 부족한 철도 기반시설로 출퇴근 등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만큼, 이번 업무협약을 계기로 서울도시철도 9호선과 인천국제공항철도의 직결 운행도 조속히 추진될 예정이다. 그간 9호선 및 공항철도 연장은 직결 열차 운행 및 운영비와 사업비 등 비용 분담에 대한 이견으로 그간 답보 상태에 놓여있었으나, 서울시장이 강조하고 있는 ‘수도권 주민도 서울시민’이라는 시정 철학과 인천시의 9호선-공항철도 직결에 대한 의지에 힘입어 빠르게 진전될 전망이다. 또한 직결 열차 투입에 따라 9호선 혼잡도도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도시철도 9호선과 인천국제공항철도의 직결 열차가 도입되면 인천시민이 많은 혜택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9호선 급행열차 혼잡도 8% 감소, 서울 강남권-인천공항 이동 시 환승 없이 이동 등 인천 및 서울시민의 철도 이용 환경이 크게 개선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향후 서울시는 인천시와 합의사항을 토대로 국토교통부 등 관계기관과 직결 운행에 대한 남은 협의 및 절차 등을 충실히 이행하여 조속한 기간 내에 직결 운행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할 예정이다.
- 한화리조트, 대한민국 동행 세일 함께 한다
- 2022. 08. 31 11:14 레저/여행
- 한화리조트 ‘대한민국 동행 세일’에 한화리조트가 함께 한다. 대한민국 동행세일은 중소벤처기업부가 소상공인 및 중소기업 제품의 소비 촉진을 위해 마련한 국내 최대 규모 할인 행사다. 한화호텔앤드리조트는 객실과 소상공인 상품을 연계한 패키지를 출시한다고 31일 밝혔다. 세일 기간은 9월 1일부터 7일까지이지만 한화리조트는 고객 편의를 위해 16일까지 판매 기간도 늘렸다. 한화리조트 설악 쏘라노는 속초의 수제 맥주 양조장 ‘몽트비어’와 함께 패키지를 구성했다. 디럭스 객실 1박과 몽트비어 내 가장 인기 있는 수제 맥주(하와이안IPA, 골든에일) 2병을 제공한다. 한화리조트 경주는 50년 장인의 명품 수제빵 ‘이상복 경주빵 세트(10개입)’와 디럭스 객실 결합 상품을 선보이고, 한화리조트 해운대는 디럭스 혹은 패밀리 객실 1박과 ‘아트모아갤러리’가 판매하는 DIY 유화 그리기 세트를 준비했다. 한화호텔앤드리조트는 동행 세일 외에도 소상공인을 돕는 지역상생 플랫폼 로컬라이브를 운영하며 다양한 중소, 소상공인의 제품 리브랜딩과 판로개척을 돕는다. 리브랜딩 제품으로 판매 중인 춘천참닭갈비는 호텔 셰프의 손길과 수차례 품평회를 거쳐 매월 매출이 올랐다. 홍천찐빵의 경우 로컬라이브 입점 후 매출이 전년대비 약 43% 증가했다. 이외에도 로컬라이브는 지난 5월 무안 양파와 의성 마늘 농가를 돕기 위해 기획전을 열어 소비 촉진에 기여한 바 있다.
- 한화호텔앤드리조트
- 서울시 여성안심귀가 서비스 동행 취재기
- 2013. 07. 04 16:46 화제
- 깊은 밤, 인적이 드문 주택가 골목길은 익숙한 우리 동네라 할지라도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두려운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여성에게 밤 귀갓길은 흉흉한 이야기가 귓가에 맴돌며 걸음걸음 두려움이 묻어나는 길이 되어버린다. 서울시는 지난 6월부터 여성안심귀가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다. 여성을 위해 밤길을 함께 걸어주는 서비스다. 기자가 서울 신당동으로 동행 취재를 나섰다. 동네 토박이로 구성된 스카우트 지난 6월 13일 오후 10시, 지하철 3호선 약수역 4번 출구에 노란색 조끼와 모자를 쓴 여성 1명과 남성 2명이 모였다. 이내 빨간색 경광봉을 흔들며 인적 드문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이들은 지난 6월 초부터 서울시가 시행하고 있는 여성안심귀가 서비스의 중구 지역 스카우트다. 현재 중구에만 총 28명, 11팀이 여성의 밤길을 함께하고 있다. 서울시에서는 15개 시범구에서 총 4백95명의 스카우트들이 활동하고 있다. 그들의 주된 업무는 밤 10시부터 새벽 1시까지 ‘안전귀가 지원’과 ‘취약지 순찰’이다. 안전귀가 지원이란 지역 주민이 늦은 시간 귀가하는 여성을 지키며 안전한 귀가를 돕는 일이다. 스카우트는 직무교육과 호신술, 여성 성폭력·성추행에 관한 대처 요령, 관련 법령교육도 마쳤다. 이날 기자와 함께 움직일 스카우트 팀의 구성원은 양재영씨(64), 나효은씨(50), 장준원씨(47)다. 유일한 여성인 나효은씨(중구는 조마다 꼭 한 명 이상의 여성이 포함된다고 한다)는 신당동에서 30년 넘게 살고 있으며 부녀회 회장을 맡기도 한 열혈 행동파다. 동네에서 흡연을 하는 청소년을 목격하면 호되게 야단칠 정도로 담력이 세다(가족에게 걱정 어린 잔소리를 자주 듣긴 하지만). 양재영씨, 장준원씨는 이번 스카우트 제도 이전에도 봉사활동으로 동네 방범활동을 해왔다. 게다가 3명 모두 딸을 둔 부모다. “딸이 없었다면 아마 이런 일에 관심을 덜 가졌을지도 모르겠어요. 딸이 수험생일 때는 3백65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지하철역까지 데리러 갔어요. 그럴 수 밖에 없는 세상이잖아요. 여기 세 사람 모두 내 딸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밤 10시 30분, 아직까지는 밤길도 환하고 사람들도 많이 다닌다. 그렇다고 긴장을 풀 수는 없다. 이곳은 주택가이기도 하지만 유흥업소도 많기 때문에 어디서 어떤 사고가 생길지 모를 일이다. 아직은 상황센터에 여성의 신청이 들어오지 않은 상태라 우선 동네 구석구석 불 꺼진 주차장과 공사장 등 우범지역을 순찰했다. 주택가 비탈길의 경사가 꽤 되지만 세 사람의 발걸음이 익숙하다. 짐을 들고 가는 어르신에게 도움이 필요한지 말을 걸기도 한다. “저희도 여기 살고 있는 만큼 마주치는 분들이 모두 동네 사람들이에요. 쉽게 말도 걸고 도울 일이 있으면 함께하는 거죠. 주민들은 순찰만으로도 든든하고 안심이 된다고 이야기해요.” 최근 이곳은 신축 공사 지역이 많아져 우범지역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밤에는 청소년들이 공사장 주변을 서성인다는 주민들의 민원이 빗발쳐 순찰과 방범은 필수다. 매일 밤 순찰하다 보니 그들에게 직업병 아닌 직업병도 생겼다. “밤길에 어슬렁거리며 혼자 걷는 남성들을 보면 눈을 뗄 수 없이 자꾸 쳐다보게 되고 따라가게 돼요. 괜히 범죄자로 의심하는 거죠. 이러다가 의심병 생길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죠. 세상이 워낙 흉흉하니 사전에 조심하는 수밖에….” 다행히 아직까지는 별일 없이 순찰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위급 상황이 생겼을 경우 스카우트는 가까운 자치구 경찰서와 원스톱 연계를 통해 신고를 하고 사고에 대처할 수 있다. 첫 번째 여성의 전화, 스카우트 출동 밤 11시 30분, 구청 야간 당직실에서 안심귀가 서비스를 이용하녀는 여성의 신청이 접수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밤 12시 약수역 8번 출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스카우트는 10분 전까지 역에 도착해 목적지까지 경로를 재차 확인했다. 서비스를 시행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터라 아직은 많은 신청이 들어오고 있진 않지만 뉴스를 통해 내용을 접한 몇몇 여성들이 이용하고 있다. 야근 후 귀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안녕하세요?” 약수역에 도착한 신청인과 스카우트는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스카우트는 신청인에게 목에 건 명찰을 이용해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확인시켜줬다. 간단한 상황실 보고가 끝난 후 신청인과 함께 귀가 노선을 확인했다. 오늘 안심귀가 서비스를 신청한 20대 후반의 최 모씨 역시 귀갓길이 야근으로 늦어져 도움을 요청한 것. “아무래도 밤 10시가 넘으면 귀갓길이 무섭잖아요. 게다가 인적이 드물어지는 밤이 되면 매일 다니던 골목길 걷기도 겁이 나요. 엄마가 오늘 아침 뉴스에서 이런 서비스가 있다는 걸 보시고는 알려주셨죠. 그래서 한 번 신청해봤어요.” 스카우트는 신청인의 동선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하고 1m 정도 떨어진 뒤편에서 걷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귀갓길을 지켜주기 위해 나왔다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내 뒤를 따라오는 것은 불편하게 마련이다. 신청자가 어색한 기색이 보일 때쯤 여성 스카우트 나효은씨가 나섰다. “저는 이 동네로 시집와서 벌써 30년을 살았어요. 부녀회 활동도 하다가 방범 봉사까지 하게 됐죠. 이 동네 구석구석이 내 손바닥 위에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의아한 눈빛을 보내며 “뭐 하는 거냐”라고 물어오기도 한다. 대략적인 서비스에 대한 설명해주니 “남자는 신청하면 안 되냐”라고 물어오기도 한다. 신청자가 집에 도착해 보고서에 사인을 한 후 안심귀가 서비스는 끝이 난다. “여성이라면 누구나 ‘바바리맨’을 한번 쯤 만나봤을 거예요. 저도 학창 시절에 그런 경험이 있어서 어두운 밤길이 특히 무서웠어요. 주말에는 이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오늘처럼 야근 후에 돌아오는 길에는 또 신청하고 싶네요.” 스카우트들과 인사를 나누고 신청자는 안전하게 집으로 들어갔다. “신청인이 집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는 순간에 가장 뿌듯함을 느낍니다. 마치 내 자식이 안전하게 내 품으로 돌아오는 기분이 들어요. 서울시가 안전하게 시행하고 있으니까 많은 분들이 이용했으면 좋겠어요.” 밤 12시 30분, 3명의 스카우트는 이제 마지막 남은 순찰지역을 돌아보기 위해 또 인적이 드문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안심귀가 서비스 이용하려면 서울시 안심귀가 서비스를 원하는 여성은 지하철이나 버스정류장 도착 30분 전까지 120 다산콜센터 혹은 자치구 상황실에 전화해 안심귀가 스카우트 서비스를 신청하면 된다. 상황실은 여성에게 귀가를 도울 스카우트 이름을 알려준다. 여성은 역에 도착해 스카우트의 신분을 확인하고 안전하게 함께 귀가한다. 밤 10시부터 새벽 1시까지 주중에만 이용할 수 있다. 시범 운영되고 있는 15개 자치구 상황실 전화번호 종로구 02-2148-1111 중구 02-3396-4001 성동구 02-2286-5200 광진구 02-450-1300 성북구 02-920-3300 강북구 02-901-6111 도봉구 02-2091-2091 은평구 02-351-8000 서대문구 02-330-1300 마포구 02-3153-8100 강서구 02-2600-6330 동작구 02-820-3119 관악구 02-880-3119 강동구 02-3425-5000 영등포구 02-2670-3000 이것도 알아두면 좋은 안심 서비스 심야 안심귀가 마을버스 서울시 성북구와 강북구는 늦은 시간 마을버스를 이용하는 여성, 노약자, 청소년들의 안전한 귀가를 위해 심야 안심귀가 마을버스를 운영하고 있다. 매일 밤 10시부터 막차 운행 종료 시간까지 어두운 이면도로 등 범죄 발생이 우려되는 지역일 경우 정류소가 아닌, 이용자가 원하는 곳에서 하차할 수 있다. 단, 시내버스와 중첩되고 정류소 간 거리가 150m 미만인 구간은 제외된다. 여성 안심택배 서비스 여성들이 택배를 받을 때 낯선 택배원을 대면하지 않고 거주지 인근의 무인 보관함에서 물품을 찾을 수 있는 서비스다. 이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거주지와 가장 가까운 보관함 주소를 물품 수령 장소로 지정하면 된다. 보관함 주소는 서울시 여성가족분야 홈페이지(woman.seoul.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품이 도착한 후 48시간 동안 무료이며, 이를 초과할 경우 24시간마다 1천원의 보관료가 부과된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김영길>
- 나누고 돌보는 아름다운 동행 서울시의회 김명수 의장·송윤미 여사
- 2013. 05. 02 17:58 화제
- 제8대 서울시의회 의장으로 서울시와 함께 1천만 서울 시민의 살림살이를 돌보고 있는 김명수 의장은 서울시정에 관한 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제5대 시의원을 지냈고 의장으로 선출되기 전 서울시의회 운영위원장으로 굵직굵직한 현안들을 처리해왔다. 뚜렷한 소신과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시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앞장서고 있는 그에게는 그를 전적으로 믿고 지원해주는 가족 그리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부인 송윤미 여사의 한결같은 내조가 있었다. 인왕산이 봄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어느 봄날, 닮은 마음을 가진 두 부부를 만났다. 사람과 복지를 생각하는, 시민들의 시의회 김명수 서울시의회 의장(54)과 송윤미 여사(52)와의 인터뷰가 있던 날은 제246회 서울시의회 임시회 개회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서울시정과 교육행정 등 다양한 현안에 대한 논의를 앞두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던 중 잠시 시간을 내 마련된 인터뷰. 인터뷰 장소인 부암동 서울미술관에 도착한 부부는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봄꽃들에서 쉬 눈을 떼지 못했다. 2010년 출범한 제8대 서울시의회 민주당 원내대표와 운영위원장을 거쳐 지난해 서울시의회 의장에 선출된 김명수 의장은 9개월째 의회를 이끌어오고 있다. ‘작은 대한민국’이라 불리는 서울시의 시정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만큼 그간 계절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앞만 보고 달려온 시간들이었다. “과거 당 원내대표와 운영위원장 시절에는 예리한 전략을 세워 시정 운영 과정을 감시하는 게 주요 업무였다면 의장이 되고 나서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 성과와 열매를 맺어내야 한다는 책임감이 커요. 서울시 공무원들을 비롯한 수만 명의 근무자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도 있고요. 의장이 된 뒤로는 하루가 어떻게 저무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빨리 흘러가네요. 서울시와의 협조와 견제 하에 최선을 다해 해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밀려드는 민원과 결제 건들을 처리하고 정책 방향 토론과 회의, 각종 행사에 참여하며 부지런히 움직이다 보면 시곗바늘은 어느덧 자정을 향하기 일쑤다. 최근 부쩍 살이 빠진 남편을 바라보는 송 여사의 마음은 여느 아내들과 다르지 않다. “남편이 두 달 만에 8kg이나 빠졌어요. 체력 하나는 자신 있어 하던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살이 빠지니 걱정도 되고 안쓰럽죠. 식사는 꼬박꼬박 챙기도록 하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아요. 아침엔 간단한 선식이라도 준비해서 빈속으로 출근하는 일은 없도록 하는 편이에요.” 3년 동안 의회 일을 해오면서 쌓였던 피로에 최근 긴장까지 더해지며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것 같다는 것이 김 의장의 자가진단. 긍정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성격의 그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사래를 친다. 어렵고 힘든 점이 많았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뛰어다닌 결과 서울시의회는 최근 비약적인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친환경무상급식 정책이다. 제8대 의회 운영위원장 시절 추진했던 무상급식 정책은 당시의 토건 중심 시정을 누르고 서울 시민들의 선택을 받았다. 그 결과 현재 대다수의 서울시 학생들이 무상급식 지원을 받고 있다. 김 의장의 시정 운영 능력은 시민과 복지 중심 정책에서도 빛을 발했다. 소득과 주거, 돌봄, 건강, 교육 등 서울 시민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복지 정책을 담은 5대 복지 공약이 순조롭게 집행 과정에 있고 노인 일자리 마련, 지역 소상공인 육성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 역시 계속해서 펼쳐 나가고 있다. ‘현장 속으로, 시민 곁으로’라는 슬로건처럼 서울 시민들의 삶이 녹아 있는 현장 속에서 함께 호흡하며 차근차근 문제점을 개선해 나가는 중이다. “사실 예전에는 서울시의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서울 시민들도 잘 모르셨어요. 지방 선거 때에도 시장이나 구청장보다 관심이 적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제8대 서울시의회가 출범한 이후로는 확실히 달라진 것을 느낀다는 시민들이 많아지셨어요. 그런 분들을 만날 때마다 사람과 복지 중심의 행정이 빛을 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습니다. 조금씩 성과가 나타나고 있고 또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이 계시니 몸 힘든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두 번째 만남에 프러포즈, 석 달 만에 웨딩마치 전남 화순이 고향인 김 의장은 젊은 시절 사회교육사업으로 성공한 뒤 아태평화재단 자문위원으로 후원 활동을 해오다 1998년 서울시의원에 선출돼 정치에 발을 들이게 된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송 여사를 만난 건 이제 막 서른을 넘긴 그가 사업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시기였다. “젊은 시절 교육사업가로 성공하겠다는 목표가 뚜렷했어요. 일에만 매달리다 보니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했죠. 이제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으니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학부모님들께 중매를 부탁드렸어요. 당시 꽤 많은 여성분들을 소개받았는데, 그중 딱 한 명 제 마음에 들어온 사람이 집사람이에요.” 그는 맨 처음 아내를 만났던 당시를 생생히 기억한다. 약속 장소에 그녀가 나타나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단다. 흔히 말하는 ‘첫눈에 반한’ 순간이자 일생의 동반자를 만난 순간이었다. 게다가 다방에서 차를 마신 후 그녀가 2차를 사겠다는 제안까지 했으니 그녀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음을 확신했다. 결정적으로 정이 많고 진지한 자신과 달리 활달하고 밝은 아내의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이 사람과 살면 돈이 없어도 우리 두 사람이 평생 부족함이 없겠구나’라는 심정이었다고. 결국 두 번째 만난 날 프러포즈를 하고 석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사실 아내는 그런 마음이 아니었다는 건 나중에야 들은 얘기다. “그 당시 저는 남편을 다시 볼 생각이 없었어요. 얻어먹고 끝내는 건 미안하니 제가 2차를 사고 깨끗이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남편은 정반대의 의미로 받아들였더군요(웃음). 결국 그 오해가 부부의 인연을 맺어준 계기가 됐지요.” 그녀가 기억하는 김 의장의 첫인상은 ‘사투리 쓰는 전라도 청년’이었다. 발목 위로 껑충 올라오는 양복바지에 말끝마다 진한 사투리가 묻어나오던 그 청년이 평생 배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단다. “그때나 지금이나 남편의 추진력은 대단했어요. 불쑥 저희 집에 찾아와 아버지께 결혼 승낙을 받는데 말을 무척 조리 있게 잘하는 거예요.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두 사람이 결혼하기로 되어 있던 것처럼 말이에요.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죠. 결국 부모님의 허락이 떨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식을 올리게 됐어요.” 하루빨리 부부가 되고 싶었던 마음에 김 의장이 잡아온 결혼식 날짜가 6월 6일이었다. 송 여사는 순국선열을 추도하는 현충일에 기쁜 마음으로 결혼식을 올릴 수 없다며 반대했지만 남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부부의 연을 맺은 지 어느덧 27년의 세월이 흘렀다. 가끔, 어쩌다 현충일에 결혼을 하시게 됐느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면 김 의장은 ‘허허’ 웃으며 이렇게 대답한단다. “부부가 국가관이 남달라서요”라고 말이다. 어르신들과 함께하는 ‘은퇴 없는 삶’ 사실 김 의장이 맨 처음 정치에 마음을 두었을 때 송 여사는 반대의 목소리를 냈었다. 결혼 후 1남 1녀를 두고 평범하고 소박한 행복을 맛보던 그녀에게 정치인의 길은 가시밭길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 힘든 길을 왜 가려고 하는지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도 점점 줄어들었고요. 솔직히 남편이 정치를 시작하고 나서 원망도 많이 했는데, 처음 시의원 선거를 치를 때 선거운동으로 밤새 끙끙 앓던 사람이 시민들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 이게 이 사람이 정말 원하는 삶이구나’라는 걸 알게 됐어요. 정치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남편이 원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 곧 저의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남편이 행복하면 저도 우리 가족도 다 괜찮을 거라고 믿었고 남편 역시 그 믿음을 져버리지 않았어요.” 성실함과 추진력, 송 여사가 아내로서 정치인 남편의 장점으로 꼽는 것이다. 김 의장의 업무는 귀가 후에도 끝나지 않는다. 전화벨이 울리는 한 남편의 업무는 계속된다는 것이 송 여사의 말이다. “집에 있을 때도 지역 주민분들께서 전화로 민원을 요청해오면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서 해당 부서나 담당자를 연결해 해결책을 마련하는 스타일이에요. 일을 추진하고 밀어붙이는 힘이 굉장히 강해요. 이런 부분을 주민분들께서 좋게 봐주시는 것 같아요.” 공무원은 고도로 발달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김 의장의 생각이다. 민원이 워낙 많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바로바로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결국 미뤄지고 사장되게 된다는 것.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해 신속하고 명확하게 해결점을 찾아내는 것이 시민의 혈세로 살아가는 공무원의 책임이자 의무다. “시민이 설령 불법을 저질렀다고 해도 공무원은 그 불법 사실만을 봐서는 안 됩니다. 왜 그 사람이 불법을 저지르게 됐는지, 그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살피고 찾아서 알려줘야 해요. 그것이 그 사람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정보거든요. 시민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과정에서 정말로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 역시 공무원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성공회대에서 사회복지학과 석사학위를 받고 오랜 시간 사회복지가로 활동해온 김 의장은 여러 복지사업 중 특히 노인 복지에 각별하다. 송 여사 역시 남편의 뜻에 따라 몇 해 전부터 요양보호사로 독거노인들을 돌보고 있는 중이다. 재가복지센터를 운영하며 어르신들을 찾아뵙고 요양보호사도 양성하고 있다. 고된 일을 마다하지 않고 뜻을 따라준 아내에게 김 의장은 고마운 마음이다. “‘나이를 먹어서도 함께할 사람이 있는 삶을 산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 삶이 저에게는 가족 그리고 어르신들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다시 개인의 입장이 되면 더 큰 정치를 하기 위해 저와 가족을 혹사시키지 않을 생각이에요. 어르신들과 함께하는 한 제 사전에 ‘은퇴’란 없습니다. 어르신들을 위한 요양사업을 통해 봉사하고,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우리 부부의 노년은 행복할 거라 생각해요. 그때까지 서울시와 가족을 돌보며 제 할 일을 열심히 해나갈 계획입니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이성원(프리랜서) ■장소 협찬 / 서울시립미술관 석파정>
- ‘함께’ 삶을 나누며 나이 들어가는 부부의 행복한 동행
- 2013. 03. 11 18:23 화제
- ㆍ이근후·이동원 부부 바야흐로 ‘100세 시대’를 준비해야 할 때다. 평균수명이 점차 늘어남에 따라 이제는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 걸음을 멈추고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나이 듦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행복한 노년의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 단순히 명절이면 찾아올 자식이 있고, 연금이니 보험이니 하는 최소한의 버팀목을 마련해뒀다는 사실만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일까. 하루하루 세월을 견뎌내는 과정 속에서 몸도 마음도 늙지 않으려 발버둥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아마도 그 해답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서로를 존중하고 의지하며 ‘함께’ 나이 들어가는 동반자와의 관계에서 상당 부분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언제나 재미있는 하루의 주인공으로‘오늘’을 살아가는 노부부가 직접 삶으로 깨달은 지혜 한 조각을 전하려 한다. 대가족이 한 지붕 아래서 행복을 누리는 비결 50년간 정신과 전문의로 일하며 환자를 돌보고 학생들을 가르쳐온 이근후(79, 이화여대 의대 명예교수) 박사는 근래 보기 드문 대가족을 이루어 살고 있다. 평생을 함께한 동반자이자 학문적 동지인 이동원(77, 이화여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박사와 2남 2녀의 자녀 그리고 손자 손녀까지 모두 열세 명이 한지붕 밑에서 생활한다. 다만, 4층짜리 건물에 각 가정별 현관은 따로 마련되어 있다. 한집이지만 분리된 다섯 공간이 모여 있는 형태다. 2002년 처음 서울 구기동에 집을 짓고 ‘동거’를 시작한 지 올해로 11년째, ‘예띠의 집’이란 이름으로 지켜온 이 가족 공동체는 여전히 건재하다. “처음 모두가 한집에 모여 살자는 제안을 한 건 큰아들 내외예요. 특히 큰며느리가 앞장서 의견을 구하기 시작했죠. 사실 저는 반대했었어요. 제가 시어머니를 30년 이상 모시고 살았는데, 언제나 저를 존중해주시는 분이셨고 잘해주셨지만 그래도 같이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게다가 나이 들어 남편과 오붓하게 살면 되지 뭐 하러 다 큰 자식들 눈치를 봐야 하나 싶어서 안 된다고 했더니 ‘어차피 부모님 중 한 분이 돌아가시거나 편찮으시면 자기들이 모셔야 할 텐데 자식들이 다 함께 모시고 살면 좋지 않겠냐’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육아 문제도 해결할 수 있지 않겠냐면서요. 당시 네 자녀 내외 모두 맞벌이를 하고 있었고, 아이들도 어렸거든요. 그때부터 온 가족이 진지하게 심사숙고에 들어갔죠.” (이동원)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어요. 좋은 뜻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부모 자식은 물론이고 며느리, 사위, 손자들까지 한 공간에서 지내다 보면 예상치 못했던 문제들이 일어나게 마련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같이 살더라도 반드시 각자 독립적인 생활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죠.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었어요.” (이근후) 성공적인 가족 공동체의 탄생을 위해 가족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거듭했다. 수십 번의 가족회의를 거쳐 형태와 방법, 방향과 세부적인 원칙을 논의했다. 어느 한 사람의 강압이나 주도가 아닌 각 가정의 생각과 의견을 바탕으로 한 합의점에 따라 일을 진행시켜나갔다. 이 박사 부부의 결혼기념일에 맞춰 준공식을 갖고 비로소 대가족이 탄생하기까지 꼬박 2년여가 걸렸다. “주변에서는 저희 가족을 보며 무척 신기해해요. 종종 부럽다며 비결을 묻는 분들도 있는데, 아마 이 모든 건 자녀들의 자발에 의해 시작됐고, 또 아주 작은 부분 하나까지도 모두가 충분히 의견을 내고 토론을 거쳐 합의에 이르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무엇보다 절대로 서로의 가정에 간섭하지 않고 최대한 독립성을 지켜준다는 원칙을 최우선으로 두고 노력한 결과예요.” (이근후) 물론 처음 2, 3년간은 불편한 점도 많았다. 예를 들면 따로 산다면 알지 못했을 소소한 점들 때문에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각자 다른 성격과 생활 패턴이 부딪히며 긴장 관계가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또한 처음 생활을 합칠 때처럼 대화와 합의를 통해 자연스럽게 해결해나갔다. 부모와 자식 관계를 떠나서 각각 독특한 개성을 가진 고유한 인간으로서 존중해주며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서로의 영역을 확보해주려는 노력은 오히려 가족 간 마음의 벽을 허물고 편안한 소통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살아가면서 필요에 따라 새롭게 추가되거나 개선되는 가족의 규칙들은 제약이 아닌 상대를 이해하는 계기로 활용됐다. 가족은 일정 부분만큼 생활을 공유하며 각자 사회에서 얻는 다양한 정보와 경험을 나누기도 하고, 거리낌 없이 소통하면서 안정적이고 활기찬 가족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그 안에서 이 박사 부부는 특히 바람직한 조부모로서의 역할에 집중하고 있다. 손자 손녀들과 함께 자주 시간을 보내며 사회활동에 바쁜 부모들이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을 담당해왔다. 나이를 먹어가며 가족 내에서도 사회에서도 새롭게 역할을 정립해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되는데, 이 박사 부부에게는 조부모로서의 활동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조부모 역할 탐구’는 이론 연구로 이어져 두 사람이 함께 활동하고 있는 사단법인 가족아카데미아에서 주요하게 다루고 있기도 하다. 가족 안에서 촉발된 다양한 관심과 주제들이 개인의 성취와 사회적 에너지로까지 이어진 셈이다. 함께 늙어가는 평생의 동반자, 아내 혹은 남편을 위해 오랜 세월 동안 함께 지내며 자녀를 키우고, 또 시대적 체험을 나누며 지적 자극을 주고받아온 부부는 지금도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다. 건강한 사회의 기초는 건강한 가정이라는 신념하에 지난 1995년 뜻을 모아 사단법인 가족아카데미아를 설립했고, 이후 학술 연구와 사회봉사활동을 전개해나가고 있다. 요즘은 아침이면 공원 산책을 끝낸 뒤 연구소에 나가 함께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 뒤 각자의 방에서 연구를 진행하거나 공부를 하고 글을 쓴다. 젊은 시절부터 함께 등산을 하고 연극이나 영화를 보러 다니기도 했으며, 이근후 박사가 30년간 꾸준히 이어온 네팔 의료봉사에 동행하기도 했다. 서로의 일과 공부에도 자연스럽게 영향을 끼쳐왔다. 사람의 마음을 섬세하게 들여다봐야 하는 이근후 박사에게는 사회학자인 아내가 큰 틀에서 지적해주는 조언이 유용하게 쓰였으며, 각 개인의 심리를 바탕으로 한 사회현상 연구를 진행하는 이동원 박사에게는 정신과 의사인 남편의 경험과 연구 성과가 큰 도움이 됐다. 그야말로 함께 늙어가는 동반자이자 평생의 동지인 셈이다. 물론 이들 부부에게도 늘 밝은 날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아내는 일생 동안 나의 허물과 부족함을 모두 받아주었다”라고 털어놓는 이근후 박사의 말처럼 아내 이동원 박사에게 남편은 생활의 어려움과 서운함을 많이 안긴 사람이기도 했다. “결혼 초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커서 힘들 때가 많았어요. 결혼할 때 진 빚을 갚느라 늘 허덕여야 했고, 시국 사건으로 감옥에 가 있던 남편을 대신해 네 명의 아이들을 키우면서 정말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생각도 안 날 정도로 정신없이 살았어요. 아이들에게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못해준 게 많아 사실 지금도 미안하고 가슴이 아파요. 피곤한 삶이 제 자신을 불안하고 예민하게 만들기도 했고요. 평생 서로 좋은 영향만 주고받으며 다정하게 산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저 또한 이혼이란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려본 적도 있어요. 사실 위기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언제나 만나게 되는 것이고, 결혼생활 또한 마찬가지죠. 두 사람 자체의 문제일 수도, 둘을 둘러싼 환경의 문제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우리 세대의 결혼은 지금과는 개념이 많이 달랐어요. 그리고 결혼생활을 그만뒀을 때 내 개인이 더 행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했었고요. 그래서 가능한 한 같이 살아가는 동안 가족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 노력했어요.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제가 집에 돌아오면 반겨주는 아이들과 이야기를 들어주는 남편이 있는 가정의 잔잔한 느낌이 제겐 큰 위안이 됐던 것 같아요.” (이동원) “둘이 같이 여성학 강의도 개설하고 공동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고, 취미활동도 주로 같이하러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주변에서는 저희 부부가 마냥 다정하게만 지내온 줄 알기도 해요. 하지만 다른 부부들처럼 맞지 않는 부분을 발견하고선 부부싸움도 하고 서로를 불편해하거나 원망한 적도 있어요. 또 제가 워낙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웃음) 아내 속이 시커멓게 타기도 했을 거고요. 하지만 저희가 이만큼 잘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서로를 존중하고 각각의 행복을 추구하려 했기 때문일 거예요. 우선 결혼생활은 현실이라는 것을 확고히 인식해야 해요. 결혼의 낭만을 꿈꾸는 사람은 낭만을 잃고, 반대로 낭만보다는 냉정한 현실을 두고 대화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낭만적인 부부가 된다고 하잖아요.” (이근후) 지금 시점에서도 매우 파격적인 시도에 해당하지만, 두 사람은 그동안 여러 차례 결혼계약서를 작성해보기도 했다. 매년 결혼기념일이 다가오면 계약서의 조항들을 다시 살펴보고 고쳐 쓰거나 새로운 약속들을 정하기도 했다. 상대의 좋은 점만 보며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과 달리 부부는 일상의 모든 것을 나누며 때로는 서로의 ‘맨얼굴’을 직시해야 한다. 그저 말로만, 다짐으로만 ‘잘하겠다, 노력하겠다’라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원칙을 정해 실천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낭만의 환상을 깨고 현실을 직시하는 것부터 “가만히 있어도 사랑이 유지될 거라는 낭만적 신화에서 벗어나는 것부터가 결혼생활의 시작이에요. 당장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이불을 누가 갤 것인지, 청소를 누가 할 것인지를 두고도 의견이 맞지 않아 서로를 미워하게 되고 계속해서 나쁜 감정들을 쌓아갈 수도 있어요. 소소하다고 여겨지는 문제들이 나중에는 두 사람 사이를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해요. 저는 가끔 예비부부들의 주례를 맡으면 이 이야기를 꼭 해줘요. 차분히 앉아서 두 사람이 서로의 ‘궁합’을 맞춰보라고요. 사주나 뭐 그런 게 아니고요. 각자가 큰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습관화되어 있는 자신의 행동들 중에서 남편에게, 아내에게 도움이 될 것은 무엇인지를 다섯 개씩 적어보는 거예요. 그리고 반대로 같은 맥락에서 상대방에게 받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도 함께요. 그 다음엔 둘을 놓고 궁합을 보는 거죠. 들어맞는 부분이 많다면 궁합이 잘 맞는 인연인 거예요. 만약 비슷한 부분이 없다면 앞으로 그 ‘구멍’을 넓혀가기 위해 무엇을 할지를 논의하는 거죠.” (이근후) “사랑도 공부하고 연습하면서 다루는 기술을 익혀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족이야말로 가장 가까운 사이이기에 더욱 배려하고 노력해야 하는 건데 우리는 종종 그 반대로 행동하곤 하죠. 자식들을 다 키우고 사회적으로도 은퇴를 한 뒤에야 겨우 서로를 돌아보는 부부들이 많아요. 하지만 관계라는 것이 그렇게 갑자기 발전될 수는 없거든요. 지금부터, 아니 가능한 한 결혼할 때부터 노력하는 것이 좋아요. 노년 또한 살아보니 갑자기 오는 게 아니더라고요. 일상의 연속이에요. 저는 어릴 때 제 인생의 30대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고, 아이들 키우고 살면서는 60대가 안 올 것 같다고 여겼었는데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예순이 훌쩍 넘어 있더라고요. 그러니 어느 특정한 시기에 ‘이렇게 살겠다’라는 다짐을 하고 실천을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인 것 같아요. 이 양반처럼 ‘매일매일 재밌게 살겠다’라거나 저처럼 ‘스스로 행복을 누리며 살겠다’라는 큰 방향만 있으면 돼요. 다만, 인생에 있어 중요한 건 두 가지, 일과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부부 사이에, 그리고 가족과 함께 또 사회적인 영역 안에서 제 역할을 찾아 관계를 쌓아나가면서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 중요해요.” (이동원) 부부간의 정서적 교감과 가족 안에서의 즐거운 소통이 삶을 더욱 윤택하고 재미있게 만들어준다고 말하는 이 박사 부부. 두 사람은 살아갈수록 약해지고 나빠지는 것들로 인해 위축되거나 불안해하지 말고, 그럴수록 더욱 현재의 상태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들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다만 모든 것들을 무조건 좋게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을 수긍하고 인정하며 그 다음으로 해결책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부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삶을 흐르게 만드는 에너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현실 앞에 주저앉아 찡그리고 불평하고 있는 이들에게, 귀중한 인생의 시간을 발견하게 해주는 노부부의 삶은 큰 귀감이 될 듯하다. 행복한 할아버지 이근후 박사의 건강한 가족을 위한 소통법 확실하게 거절하는 법을 배운다 나는 큰아들이 결혼한 뒤 며느리에게 거절하는 법부터 가르쳤다. 거절은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덕목이다. 우리는 거절에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솔직하게 ‘No’를 말할 수 있어야 ‘Yes’도 진짜 예스로 믿을 수 있다. 이 믿음의 토대에서 진정한 인간관계는 가능해진다. 가족관계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소위 고부 갈등은 서로에게 싫다. 좋다는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데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며느리에게 거절하는 법을 가르친 것은 시부모와 며느리로서의 상하관계가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 소통을 하고 싶어서다. 누구나 거절은 불편하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하다. 훈련을 통해 거절을 잘하고, 잘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감정에 솔직해진다. 웬만한 거절에도 상처받지 않는다. 이런 토대 위에서 시부모와 며느리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진정한 배려를 할 수 있게 된다. 서로를 행복하게 해주려는 진정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자녀의 10%만 알아도 충분하다 나이 든 부모가 장성한 자녀들과 소통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나이 들어 생기는 부모와 자녀 사이의 거리감은 당연하다. 아무리 친구처럼 지내도 부모는 자녀를 속속들이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어릴 적 키울 때처럼 자녀에 대해 모든 것을 알려고 한다면 오히려 갈등의 골만 깊어지고, 자녀는 불효자식이 되고 말 것이다. 장성한 자녀에 대해 10%만 알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부모는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 그 10%로 대화의 물꼬를 터라. 10%가 자녀의 취미일 수도 있고, 직업과 관계된 무엇일 수도 있다. 우선 중요한 것은 말을 거는 것이다. 사랑은 관리해야 한다 우리 부부가 50년 긴 세월 동안 큰 갈등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파트너십, ‘사랑의 열정’이 아니라 ‘사랑의 관리’ 덕분이었다. 결혼은 한 인간과 인간이 만나, 배우자를 통해 풍부한 인생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행복은 생의 기쁨과 슬픔, 괴로움을 함께 나누면서 서로 주고받는 긍정적인 상호작용이다. 서로에 대한 불만과 갈등을 두 사람이 함께 해결해가는 과정에 부부의 미래 모습이 담겨 있다. 인간이 변하기란 정말 어렵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불만스러운 점은 단지 조금 고쳐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게 행복한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이다. 특히 배우자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것은 중년 이후 부부들에게 더 필요한 일이다. 나이가 들면 남녀의 모습이 바뀐다. 그러니 남편은 권위적인 자세를 고집해서는 안 되며 예전의 수동적이고 온순한 아내의 모습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아내 또한 은퇴 후 남편들이 정서적으로 많이 기댄다고 해서 부담스럽게 느끼지 않아야 한다. 즉, 서로의 변화를 인정하고 그러한 변화에 적응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부부관계는 세월과 함께 새로 정립한다 나이가 들면 바쁘게 살아온 지난날과 달리 신체적으로 약해지고 생활 영역이 축소되어가며 활동력이 감소된다. 이 시기의 부부관계는 새롭게 부각되어야 한다. 생각해보면 노년기에 접어든 아내나 남편만큼 내 삶을 공감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남편과 아내는 자녀, 친구, 이웃 등 다른 사람으로는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존재다. 상대가 자존심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서로 격려하며 인정해주어야 한다. 옛날에 왜 그랬느냐, 당신 버릇은 평생 고치지 못한다, 여태 살아준 내가 바보다 등 노년의 부부는 과거를 곱씹으며 마치 이날을 기다렸다는 듯 서로에게 상처주기 쉽다. 그러나 그런 원망 속에 부부의 남은 삶은 과거보다 더 불행해진다. 그때 내 마음은 이랬노라, 이렇게 해주길 바랐었다는 말로 상대의 공감을 이끌고 어루만져주어야 한다. 또 나이가 들면 성 역할이 달라져야 한다. 노년기에는 성별이 아니라 관심, 능력, 육체적인 힘 등을 따져 가사를 분담하는 것이다. 서로를 인정하고 공통점을 넓혀간다 우리 부부의 행복은 순전히 100% 아내의 공이다. 그것은 아내가 나의 성격을, 나의 직업을, 나의 삶을 이해해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 또한 아내를 동지적 관계로 생각했다. 보통 아무리 부부라 해도 일에 대한 성취는 각자의 몫이다. 특히 학자인 아내와 나는 각자 고유한 학문 영역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의 생각을 존중했다. 하지만 서로에게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아내와 나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학문을 넘나들며 각자의 연구 분야에 깊이를 더했던 것 같다. 우리 부부의 삶을 그대로 좇아 산다고 성공할 수 없다. 단지 하나의 사례로 ‘저렇게 살아도 좋겠다’라는 정도면 된다. 사람마다 성격이나 환경 등 모든 것이 다르므로 이상적인 부부의 모습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부 서로가 동의하고 만족한다면 그 자체로 이상적인 부부 아닐까. 부부생활의 가장 중요한 팁이라면, 서로의 공통점은 나누고 나쁜 점은 모른 척 덮어주는 것이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안진형(프리랜서) ■참고 서적 /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이근후 지음·김선경 엮음, 갤리온)>
- 프리 선언한 김경란 아나운서의 봉사활동 동행기
- 2012. 10. 09 14:10 연예
- 안정적인 진행 능력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종횡무진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쳐온 김경란 아나운서가 지난 9월, 마지막 방송을 마치고 12년 동안 몸담았던 kbs를 떠났다. 이후의 행보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지금, 그녀가 봉사활동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태풍 피해를 입은 전남 강진의 수해 복구 활동과 제주 우도 아이들을 위한 나눔 봉사에 나선 것. 자신도, 이웃도, 세상도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제2의 삶’을 꿈꾸는 그녀의 아름다운 의지가 엿보이는 특별한 시간들이었다. 꿈꿀 기회를 선물하는 특별한 여행 이글거리던 한여름 태양이 한층 따사롭게 내리쬐던 9월의 어느 날, 아름다운 섬 제주도에 김경란 아나운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설레는 눈빛과 얼굴 한가득 편안한 미소를 담은 채였다. 공항에 도착한 그녀가 곧바로 향한 곳은 바로 ‘섬 속의 섬’이라 불리는 우도.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와 고운 모래가 깔린 하얀 백사장, 그리고 소박하지만 아기자기하게 자리한 마을이 조화로운 이곳에서 특별한 만남을 갖기 위해서였다. 성산항에서 배를 타고 15분, “안녕하세요”라는 우렁찬 목소리로 김경란 아나운서를 맞이한 이들은 바로 우도지역아동센터 어린이들이었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서 준비한 ‘휴머니즘 나눔 봉사’ 프로그램을 통해 이들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 것. 이날의 ‘소중한 만남’에는 양준혁 야구해설위원과 양준혁야구재단 관계자들, 일러스트레이터 밥장, 셰프 박상준, 성악가 최성봉, 사진작가 강연욱이 함께했다. 모두 초록우산 어린이재단과 지속적인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재능기부자들로, 우도 아이들과 함께 소중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열일을 제쳐두고 달려온 참이었다. 1박 2일에 걸쳐 진행된 ‘휴머니즘 나눔 봉사’는 아이들의 밝은 미래를 응원하는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의 취지에 따라 평소 다양한 문화·복지·교육적 혜택을 누리기 어려운 지역의 어린이들에게 특별한 기회를 제공하고자 기획됐다. 이번에 방문하게 된 우도는 천혜의 환경이 빚어낸 자연과 풍부한 관광자원을 갖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리적 접근성이 떨어지고 아이들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각종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곳이다. 일행은 아이들과 함께 야구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요리도 만들고, 사진도 찍고, 이야기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평소 다양한 경험과 기회를 접하기 어려운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큰 선물인 셈이었다. 재능을 매개로 소통하고 나누는 행복 우도지역아동센터에 들어선 일행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초록색 잔디밭 위에 한 줄로 나란히 서 있는 아이들이었다. 기상 사정으로 인해 예정 시간보다 다소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기다림에 지친 아이들이 일행을 마중하러 나온 것. 제대로 인사와 소개를 하기도 전에 우르르 몰려든 아이들은 오늘 처음 만났다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먼저 친근하게 다가와주었다. TV로만 보던 사람, 책으로만 접하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니 묻고 싶은 게 많았던 모양이었다. 삼삼오오 몰려든 아이들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열띤 질문 공세를 펼쳤다. 아이들의 활기찬 환영 인사에 힘을 얻은 이들은 저마다 각자의 특성을 살 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잔디밭 위에서는 ‘양준혁의 야구 교실’이 열렸고, 놀이터에서는 강연욱 작가와 최성봉의 놀이가 시작됐다. 김경란 아나운서는 특유의 온화함과 다정함으로 어린이집 꼬마들을 돌보았다. 곧이어 실내에서 준비된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로 했다. 먼저 그림 그리는 밥장 선생님과 함께 요리할 때 쓸 ‘나만의 앞치마’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저 그림 못 그려요”, “뭘 그릴지 모르겠어요”라며 망설이던 아이들이 밥장 선생님의 시범을 보고는 자신감을 얻어 쓱쓱 각자의 세계를 펼쳐나갔다. 앞치마 위에는 토끼, 강아지, 돼지, 심지어 용까지 각종 동물들이 뛰어놀고 빨강 노랑 형형색색의 꽃도 피어났다. 각자 그림 삼매경에 빠진 아이들은 곧 얼마 지나지 않아 화가 뺨치는 훌륭한 ‘작품’을 완성해냈다. 그리고 이어진 요리 교실. 벌써부터 요동치는 배를 부여잡고 조별로 흩어져 음식 만들기에 착수했다. 오늘의 메뉴는 모두가 좋아하는 햄버거와 핫케이크. 아이들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동글동글 패티를 다지고 신나게 반죽을 저었다. 주방기기 전문 기업 ‘테팔’은 프라이팬을 비롯한 모든 조리도구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나눔에 동참했다. 여기저기서 달콤한 냄새가 솔솔 퍼지고,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것들이 먹음직스러운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던 아이들은 앞 다투어 “선생님, 언제 먹어요?”를 연발했다. 그리고 다 함께 모여 시작된 저녁 바비큐 파티. 한쪽에서는 숯불에 고기를 굽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만든 음식들을 예쁘게 담아냈다. 좋은 사람들과 둘러앉아 웃으며 나눠 먹는 음식이니 뭔들 맛있지 않을까.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지만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맛있게 먹고, 먹여주고, 그리고 웃었다. 어울려 함께한 시간은 비록 길지 않았지만 일행은 그 안에서 다른 어떤 곳에서도 얻지 못할 벅찬 기분과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 먼저 웃음을 짓고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건네는 아이들 덕분에 우도를 찾은 어른들이 오히려 훨씬 커다란 행복을 맛봤다. 고된 일정 속에서도 전혀 피곤함을 느끼지 못할 만큼 편안하고 즐거웠음은 물론, 아이들에게 그동안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세상을 선물했다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그렇게 모두는 ‘함께’여서 행복했고, ‘함께’여서 아름다웠다. 1 밝고 순수한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이번 ‘휴머니즘 나눔 봉사’에 참여하면서 제가 세운 목표는 ‘아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자’라는 것이었죠. 이곳 아이들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다양한 경험을 할 기회가 부족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아니 솔직히는 열 명 정도는 오늘 저희와의 만남이 앞으로의 삶에 있어 하나의 특별한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요리는 재미있는 거구나’, ‘커서 아나운서 언니처럼 됐으면 좋겠다’ 등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긍정적으로 꿈을 가져보는 시간들이었으면 해요. 요즘 우리 사회에 점차 나눔의 문화가 정착되고 있잖아요. 예전보다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나눔을 실천하고 있고요. 참 좋은 모습이란 생각과 함께 한편으로는 나눔이 그저 유행이 되어선 안 된단 생각을 해요. 가장 중요한 건 진실함과 지속성이겠죠.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먼저 살피기보다 내 자신이 생각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늘 되새겨보고 확인하려 해요. 결국엔 제 입장에서가 아니라 함께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진정으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해봐야 한다는 결론이에요. 이번에도 역시 아이들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건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하고 행동했어요. 우리가 이번 기회에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자신감을 북돋워줬다면 어느 정도 만족스러울 것 같아요. 2 한 아이가 시종일관 제 옆에 앉아서 얼굴을 쳐다보는 거예요. 꿈이 저처럼 아나운서가 되는 거래요. 별다른 이야기는 건네지 않았어요. 그냥 계속 눈을 맞추며 웃어줬지요. 그러다 같이 핫케이크를 구울 때쯤이었나, 그 친구가 저를 또 가만히 바라보더니 “언니,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는 거예요. 그 마음이 무척 예뻐서 말이 목에서 턱 막히더라고요. “왜? 좋아서?” 그랬더니 고개를 끄덕거려요. 저도 참 좋더라고요. 아마도 그런 순간들인 것 같아요. ‘보람을 느꼈다’라고, ‘행복했다’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순간이요. 3 솔직히 제가 요리에 썩 소질이 있는 편은 아니거든요. 그래도 아이들이 워낙 열심히 하니까 저도 같이 신나게 햄버거를 만들었죠. 내심 ‘아이들이 안 먹겠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웬걸, 다들 막 욕심내면서 두 개씩 먹겠다는 거예요. 안타깝게 남은 게 많지 않아서 아이들 관심을 일단 핫케이크로 돌렸죠. 그런데 팬을 하도 오래 달구고 있었더니 굽는 족족 타는 거예요. 미안해서 어쩌나 생각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이상하다, 맛없다 말 한마디 없이 남기지 않고 다 먹더라고요. 그리고는 자기들이 저를 챙겨요. 참 신기하죠? 아이들의 마음은 어쩜 그렇게 투명하고 예쁠까요? 오늘 이곳에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이토록 순수하고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아이들에게 좋은 꿈을, 멋진 미래를 제시해준다면 정말 그렇게 잘 커나갈 텐데 말이죠. 우리가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고 봐요. 초롱초롱한 꿈을 꾸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아이들을 우리가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이들이 행복하다면 곧 우리 사회가 행복해지는 거잖아요. 다시 한번, 아이들에게 정성을 쏟고 사랑을 준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어요. 4 처음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아이티 봉사활동이었어요. 대지진으로 모든 것이 황폐하게 변해버린 그곳에서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굉장한 절망감을 느꼈어요. 이 기가 막힌 현실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과연 뭘까. 그저 준비한 식량을 나눠주는 것 외에 뭘 할 수 있을까. 참혹하고 괴로웠어요. 그렇게 이틀이 지나고, 지진으로 아빠를 잃고 엄마와 아이들만 살고 있는 한 가정을 방문했어요. 서로 말도 안 통하는데다 낯설기도 하고 저 또한 익숙하지가 않아서 그냥 서로 바라만 보면서 시간을 보냈죠. 그러다가 점차 눈도 마주치고 웃기도 하고, 아이들이 와서 제 팔을 이렇게 만지면서 꼬물꼬물 손가락을 움직이기도 하고 그러더라고요. 호기심이 친근감으로 바뀌는 과정인 거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이들이 저를 똑바로 바라보며 활짝 웃는데 그때 느낀 것이 바로 ‘희망’이었어요. 정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처참하기만 한 그 땅에서. 그 아이의 웃음은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했어요. 사실 저는 다른 사람들한테 쉽게 “괜찮아, 다 잘될 거야” 이런 이야길 잘 못하는데, 이 아이들은 눈으로 그 이야길 하는 거예요. 그 얼굴에서 희망을 봤어요. 그리고 그 희망을 키워가려면 지금부터 정말 어른들의 힘이 필요하겠다 싶었죠. 그 아이들이 잘 먹고 잘 크고 잘 배울 수 있도록. 그때부터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커졌어요. 사회가 힘을 합쳐 아이들을 제대로 키워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됐고요. 아이들에게 희망을 선물한다는 것이 정말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값진 거라는 걸 알게 됐거든요. 그래서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홍보대사 일도 맡게 된 거예요. 5 ‘김경란 퇴사 후 봉사활동 전념’이라는 기사가 났더라고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좀 더 비중을 두는 삶’이지 결코 투신하는 건 아니에요.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니거든요. 사람은 각자 가장 잘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제 위치에서 사람들에게 어려운 이웃들의 실상을 알리고, 사람의 마음 가운데 자리한 누군가를 돕고자 하는 마음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해야 해요. 또 사람들에게 참여를 유도하고 동시에 저도 물질적 후원이나 재능기부 등을 하는 것,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몫이라 생각해요. 저는 아나운서니까, 한국말로 진행하는 걸 제일 잘하는 사람이에요. 그렇다면 그 재능을 바탕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죠. 알리고, 동참을 호소하는, 또 사람들이 제 목소리에 귀기울이게 될 만한 그런 ‘좋은’ 사람이 돼야 해요. 이제 좀 더 자유롭게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됐으니 제 본래의 일도 이전보다 더 열심히 하면서 많은 분들께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직장인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틈틈이 더 시간을 내서요. 사실 제가 계속 회사에 다녔으면 이렇게 마음껏 봉사활동도 다니지 못하잖아요. 무엇보다 이런 제 행동이 단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지속되어서 결국에는 제 삶의 굳건한 한 부분이 되길 원해요. 6 퇴사 결정을 내리기까지 지난 2년 동안 고민을 많이 했어요. 직장생활 한 지 10년이 되던 해에 스스로에게 이런 물음을 던졌어요. ‘갑자기 내가 내일 하늘나라로 가게 된다면 과연 나는 후회 없이 보람 있게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랬더니 너무너무 억울해서 못 죽을 것 같은 거예요. 아직 하고 싶은 것도, 경험해보고 싶은 것도 많은데 도저히 세상을 떠날 수 없겠다 싶더라고요. 그렇다면 앞으로 다시 10년이 주어진다면, 그 10년을 지난 10년처럼 살 것인가 고민을 했죠. 아니더라고요. 물론 지난 10년, 저 정말 그 누구보다 치열하고 성실하게 살았는데요. 그렇다고 해서 ‘보람’과 ‘열심’이 꼭 같은 의미인 것은 아니더라고요. 보람차고 의미 있는 삶이었다고 하기에는 아쉬움이 많았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무엇을 하고 살면 내일 당장 죽는다고 해도 ‘한 번뿐인 인생 소중하게 잘 살았구나’라고 자부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제가 진정으로 뭘 하고 싶은지를 고민하게 됐죠. 무엇보다 스스로 보람되고 가치 있다고 여길 삶을 살아야겠더라고요. 제가 고민 끝에 찾은 그런 삶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주는 삶, 나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해지는 삶’이었어요.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하고 나니 제 인생에 대해 밑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어요. 또하나 중요한 건 제가 꾸역꾸역 참아가면서 누군가를 위해 산다면 그 또한 불행이겠죠. 제가 스스로 행복해야 나눴을 때 다른 사람도 같이 행복한 거 아니겠어요. 친구들과 함께 어울린다거나,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거나, 여행을 다닌다거나, 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가 좋아하는 것들 중엔 ‘이렇게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있었어요. 그래서 저 혼자가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함께 나눔을 고민하고 행복을 이야기하는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어요. 나눔이라는 게 꼭 누군가를 위해서 나를 희생하는 게 아니라 나누면서 나도 행복하고 내가 더 풍성해지는 것임을 스스로 느껴요. 그리고 이왕이면 다른 사람들도 저와 같은 마음으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면 좋지 않을까 싶어요. 7 아직 크게 실감은 안 나지만 12년이나 일했던 회사를 그만두니 허전하고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드네요. ‘이제 무엇을 할 건지’ 많이들 물어보시는데 아직까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어요. 정해진 건 앞으로 좀 더 이런 봉사나 나눔 활동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겠다는 것 정도요? 아, 그리고 이제 한 가지 고민을 시작했어요. 많은 이들이 제 이야기를 궁금해할 만한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해서요. 사실 나눔에 관한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되게 뻔할 수 있잖아요. 누구나 이야기하는 피상적인 것 말고 새로운 시각에서 바람직한 방향과 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러려면 제 삶 자체로 말을 걸 수 있어야겠죠. 그게 제가 드러나고 부각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제가 진정으로 충만하고 빛나는 삶을 사는 것으로, 말이 아닌 행동 그 자체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8 사실 인생이라는 게 계획을 꼼꼼하게 세운다고 해서 그대로 실현되는 것도 아니고, 세우지 않는다고 해서 넋 놓고 보내는 것도 아니잖아요. 물 흐르듯 흘러가는 하루하루를 적당히 즐기고 또 감사하면서 살아가고 싶어요. 또 제가 노력해야 할 부분에 대해 그때그때 깨어 있는 사람으로서 나태해지지 않고 하나하나 열심히 채워간다면 뭔가 길이 열리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요? 앞으로는 좀 더 여유를 갖고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하루를 어떻게 채워나갈까 하는 생각으로 설렐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싶어요.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요. 이제 정말 행복하게 그런 삶을 만들어갈 수 있을 듯해요. 세상 모든 어린이들이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초록우산 어린이재단과 함께해주세요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나갈 어린이들을 돕는 일은 세상 무엇보다 값지고 의미 있는 행동일 것이다. 1948년 한국 전쟁고아를 돕기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아동복지사업을 시작한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은 64년 동안 꾸준히 그 뜻을 이어오고 있는 아동복지 전문 기관이다. 현재 18만 명의 재단 후원자들과 함께 국내외 5만여 명의 어린이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아동의 생존·보호·발달·권리 증진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대표 상징인 ‘초록우산’은 ‘세상 모든 어린이들이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사랑으로 보호하고 도와줄 친구’라는 뜻.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 어린이의 꿈을 후원하는 ‘초록우산’을 활짝 펼치고 싶다면 주저하지 말고 당장 행동으로 옮겨보자. 후원 문의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희망나눔센터(1588-1940, www.childfund.or.kr)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제공 /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사진작가 강연욱)>
- 태국 고산족 마을에 희망을 심다! 조안과의 아주 특별한 동행
- 2012. 03. 23 18:01 연예
- 지난 1월 말, 배우 조안과 함께 태국 북부의 휴양도시 치앙마이에서 서너 시간 거리에 있는 오지마을 치앙다오와 팡을 다녀왔다. 태국말이 통하지 않는 소수민족들이 사는 곳이다. 매일 차를 타고 몇 시간씩 이동해야 하는 강행군이었지만 아이들의 미소와 눈물에 푹 빠져 지낸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이들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순수한 감성의 조안과 함께여서 더욱 빛났던 5일간의 기록을 「레이디경향」 단독으로 공개한다. 단일민족인 우리나라와는 달리 태국은 여러 왕조와 문화의 접경지대에 있기 때문에 말도, 문자도 다른 민족들이 공존하고 있다. 이번에 방문한 태국 북부의 치앙다오와 팡은 고산족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으로 가난한 이들이 많고 교육과 복지 혜택이 거의 없는 곳이다. 생김새는 한국 사람과 비슷하지만 피부가 더 까맣고 체구도 작은 라후족(고산지역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의 하나) 사람들은 하나같이 반짝이는 선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들을 돕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찾아가자 그들은 예의 수줍은 미소로 반겨주었다. 이번 방문은 국제구호단체 플랜인터내셔널이 돕고 있는 아이들과 시설을 방문해 현지 상황을 점검하고 아이들을 위해 준비한 작은 선물도 전하는 뜻 깊은 시간이었다. 아이들의 꿈이 자라는 템플스쿨 플랜인터내셔널의 지원을 받아 종교기관이 운영하는 고아원 템플스쿨은 4세부터 15세까지 30여 명의 아이들을 보살피고 있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도 있지만 가난 때문에 집에서 떠나온 아이들도 있어서 말 못할 사정을 짐작할 뿐이다. 아이들은 낯선 손님과 여러 대의 카메라가 들이닥치자 예의를 차려 인사를 했지만 어색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침 식사시간이어서 조안과 함께 아이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었다. 메뉴는 밥과 청경채 비슷한 채소볶음 그리고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만 내놓는다는) 말린 오징어튀김. 약간의 고기가 들어가긴 했지만 한창 자랄 나이의 아이들이 먹기에는 영양 면에서 부족해 보이는 것이 사실. 서툰 요리 실력이지만 아이들과 먹을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고 배식까지 하며 일일이 밥을 챙긴 조안은 그제야 밥 한 술을 떴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이번에는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말이 아니라 몸으로 소통하는 시간. 자칭 ‘저질 체력’이라면서도 지칠 줄 모르고 노는 조안과 아이들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기자도 배드민턴채를 들고 한 아이에게 덤볐다가 5분도 안 되어 헐떡거리며 기권 선언을 했다. 그러고 나니 좀 친해진 듯했다. 열심히 뛰논 아이들이 그새 더 까매져 있었다. 땀을 흠뻑 쏟은 뒤 함께 농장을 둘러보며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었다. 점심때 먹은 나물도 이곳에서 아이들이 직접 기른 것이라고 한다. 숙소를 둘러보며 아이들의 생활을 살폈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에는 농장 일과 청소 등을 한다고 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이곳을 떠나야 하는데, 키가 웃자란 몇몇 아이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부모님과 자오이, 세 식구가 생활하기에도 좁은 움막 같은 집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작은 강당에 둘러앉아 한국에서 가져온 선물인 그림물감과 스케치북, 장난감을 전달한 후에 두 사람씩 마주 보고 서로의 얼굴을 그렸다. 조안과 짝이 된 아이는 처음에는 표정도 없고 말도 없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말을 걸고 웃기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이들은 고산족 전통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와 그들의 삶의 모습이 담긴 전통 춤과 노래를 선보였다. 그곳을 떠나기 전, 나뭇잎을 먹을 수 있는 나무 한 그루를 정원에 심었다. ‘조안의 꿈나무’라는 팻말까지 달아서. 3년쯤 지나 다시 이곳에 올 수 있다면 나무가 자란 모습을 볼 수 있겠지. 차를 향해 계속 손을 흔드는 아이들과 아쉽게 작별을 하고 두 자매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조안이 만난 아이들 01 “엄마 얼굴이 그리워요” 날랏(11)·위몬(8) 자매 라후족 부락에서는 근친이나 성폭력으로 문제가 생기곤 한단다. 양아버지의 성폭력으로 집을 나와 고아원에서 지내는 날랏과 위몬 자매는 지난 가을 이후 보지 못한 엄마가 무척 그리웠다. 주말에 집에 다녀오는 친구들도 있지만 이 자매는 갈 수가 없었다. 고아원에서 30여 분을 달려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자매의 집에 닿았다. 시선을 외면하는 아버지는 한쪽에 자리해 있고, 오랜만에 자매는 엄마와 정을 나누었다. 그리고 소아마비 장애가 있는 자오이(10)의 모습에 마음이 아렸다. “보고 싶었지요. 그런데 먹을 것도 없고 배우지도 못하는 집보다는 그곳에 있는 게 나아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더 좋은 환경으로 보낸 거예요. 저는 (외국인이어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딸들은 커서 선생님이 됐으면 좋겠어요.” 미얀마와 라오스의 접경지대와 가까운 이곳에는 이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지만 태국 정부는 외국인들에게 신분등록을 잘 해주지 않는다. 등록 절차 또한 까다로워서 먹고살기도 힘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공서에 가는 것도 쉽지가 않다. 날랏과 위몬의 가족은 논밭도 없고 별다른 벌이가 없어서 날품을 팔면서 살고 있었다.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자오이는 고아원에 보낼 수도 없다. 잘 먹지 못해 앙상한 팔다리의 자오이가 손님들 온 것이 반가웠는지 방긋방긋 웃었다. 그 웃음이 마음에 걸려서 선뜻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양아버지 앞에서 말이 없던 두 자매는 엄마와 인사를 나누고 아쉬운 듯 고아원으로 향했다. 1 큰딸 나으와 막내동생. 엄마가 재혼해서 동생들과는 아빠가 다르다. 2 신분등록을 위한 마지막 절차를 끝낸 후, 기념촬영을 하는 나으의 밝은 모습. 3 시장에서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들을 사느라 나으는 신이 났다. 태국에서는 신분증이 없으면 중학교 교육도 받을 수 없고 정해진 지역을 벗어날 수도 없다고 한다. 자매가 엄마의 바람대로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힘겨운 관문을 많이 넘어야 할 것이다. 엄마와 함께 살 수 없는 두 자매와 집을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자오이의 행운을 빌며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 조안이 만난 아이들 02 “계속 공부하고 싶어요” 나으(13) 다음날, 나으네 집. 3남매 중 큰딸인 나으는 신분등록을 받지 못했다. 진학도 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지만 딸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동생들을 보살피거나 결혼을 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바람 앞에서 서운한 마음이 날로 커져가고 있었다. 실제로 조혼(早婚)은 라후족 부락에 일반적인 일이어서 동네에서 가장 어린 엄마가 고작 열네 살이었다. 고등교육을 받지 않고는 일자리 구하기도 쉽지 않은 터라 장래희망과 상관없이 10대 중반이면 가정을 꾸려서 살아가는 이가 대다수였다. 나으의 부모님과 학교 진학에 대한 얘기를 나눠보니 딸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 아니라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열세 살이면 충분히 독립할 수 있는 나이예요. 저도 그렇게 살았고요. 동네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살고 있는 처지라 중학교는 꿈도 못 꿔요. 도움을 받는다면 모를까. 한 달에 3천 바트(약 12만원) 정도를 버는데 중학교에 가려면 1년에 1만2천 바트(약 50만원)가 들거든요.” (엄마) 다행히 플랜인터네셔널의 도움으로 몇 달에 걸쳐 서류작업이 이뤄진 터라 당일에 신분등록을 마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조안은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차로 한 시간이 넘는 면사무소로 향했다. 사무관과 신분등록에 관한 인터뷰를 하고, 사진 촬영과 지문 날인을 한 후, 드디어 나으의 손에 신분증이 쥐어졌다. 그제야 소녀는 활짝 웃었다. 열세 살 소녀의 생에 있어서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 지켜보는 모두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러고는 인근 시장에 가서 중학교 진학에 필요한 가방과 신발을 사고 가족의 옷도 샀다. 나으네 가족을 위한 조안의 선물이었다. 그리고 집으로 가는 길, 아이가 이제 더 이상 서운해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조안이 만난 아이들 03 “오래오래 할아버지랑 살래요” 자헤(9)·자티(5) 형제 자헤와 자티는 부모가 없다. 이혼으로 각자 새로운 가정을 꾸렸고 형제는 할아버지 손에 맡겨졌다(태국에서는 이혼과 재혼이 매우 쉽다고 한다). 아빠는 근처에 살긴 하지만 경제력이 없는데다 아편중독으로 아이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 삼촌 둘도 함께 살지만 각자 먹고살기에도 바빠서 아이들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다. 할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애정과 보살핌을 주지만, 너무 가난해서 먹을 것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날 형제는 함께 들로 나가서 먹을 수 있는 나물을 캐어 오고, 할아버지도 바나나 나무의 먹을 수 있는 줄기를 땄다. 할아버지가 가끔씩 날품을 팔기는 하지만 일이 매일 있는 것은 아니란다. 알아서 먹을 것을 찾아와야 할 때가 많은데도 둘은 씩씩했다. 동네에 하나뿐인 유치원은 임시 학교여서 일주일에 3일밖에 열지 않는다. “저도 먹고살기 힘든 형편이지만 불쌍한 손자들을 어떻게 버려요. 아들과 며느리를 원망하지 않느냐고요? 이혼하고 다른 사람하고 결혼하는데 아이들을 데려갔으면 더 불행했을 거예요. 오히려 제가 키우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먹을거리를 찾아서 먹는 법을 가르치고 있으니 나중에는 아이들 힘으로 살 수 있을 겁니다. 다만 건강이 좀 안 좋아져서 걱정이에요.” 1 두 형제와 다정한 할아버지의 모습. 2 조안은 들에 나가 먹을 수 있는 나물을 캐고 나무 열매를 따왔다. 슬하에 네 아들이 있지만 의지하고 사는 건 두 명의 손자들뿐. 할아버지는 인신매매의 유혹에도 아이들을 보내지 않았다. 돈을 주고 아이를 데려가는 사람이 있는데, 데려가서는 무슨 일을 어떻게 시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란다. 가진 것 없는 할아버지의 끝없는 사랑에 모두가 눈시울을 붉혔다. 코끝이 빨개진 조안은 “감사하다”라는 말만 연발했다. 맨발로 다니기 일쑤인 자헤와 자티, 할아버지에게 흰 운동화를 선물하자 할아버지가 흰 치아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따뜻한 손길 덕분에 새롭게 탄생한 펑하이 학교 1 보수 작업으로 몰라보게 달라진 학교의 모습. 2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으로 감동을 준 쿵 선생님. 3 리모델링 전의 임시 학교. 넷째 날 오후, 자헤와 자티 그리고 나으가 다니는 펑하이 학교의 리모델링 작업이 있었다. 말이 학교지 제대로 된 칠판도, 책상, 의자도 없고 비가 오면 벽 사이로 비가 들이치는 간이 시설이었다. 일행은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보수 작업에 나섰다. 새로 산 책꽂이를 조립해 책으로 채우니 그럴듯한 도서관이 만들어졌다. 강당에서는 바닥 매트를 새로 깔고 먼지를 털어내고 칠판을 교체하는 등 새 단장에 여념이 없었다. 건물 벽에 페인트칠을 하고 바깥 단장도 했다. 보수 작업이 끝나자 학교는 이전에 비해 몰라보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학교에는 유치원생부터 초등학생까지 60여 명의 학생들이 있지만 교사는 한 명뿐이다. 워낙 외진 곳이기에 오려고 하는 교사가 없어서 쿵 선생님이 일주일에 5일을 이곳에서 혼자 생활하며 교육 수준이 각기 다른 아이들을 가르치는 형편이다. 선생님은 “와줘서 무척 기쁘다”라며 숨 돌릴 틈도 없이 애써준 조안에게 감사를 전했다. 포옹하는 선생님도, 조안도 울었다.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선생님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일인데 이렇게 감사해하시니 더 감사하고 미안한 맘이 들었다. 과자와 선물 보따리를 전해주고 돌아서려는데, 아이들이 자꾸만 붙들어서 한참을 헤어지지 못하고 긴 인사를 나눴다. 이어 차로 한 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곳은 면 소재지의 병원. 폐와 다리가 자꾸만 아프다던 자티네 할아버지가 걱정되어 진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할아버지가 엑스레이와 혈액검사를 하는 와중에 손자들도 간단한 건강검진을 했다. 다행히 큰 이상은 없었고 다만 담배를 끊어야 오래도록 아이들을 보살필 수 있다고 했다. 처방된 약을 드리니, 일일이 악수를 하며 감사하다고 하신다. 모쪼록 오래오래 건강하셔야 할 텐데…. 이렇게 모든 일정은 끝이 나고 깨끗하게 정비된 휴양도시 치앙마이로 돌아왔다. 하루에 다섯 시간씩 비포장도로를 달려 아이들을 만나고 온 피로보다는 안타까움이 앞섰다. 더 잘 산다고 꼭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교육을 받지 못해서, 배고파서 불행한 아이들이 더는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든다. 그러기 위해서 더 많은 관심과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미래를 선물할 수 있다면 마음이 가벼울 텐데. 아이들의 미소가 오래도록 맴돌 듯하다. [플랜코리아와 함께 사랑을 나눠요!] 플랜코리아는 1937년 설립된 국제아동후원단체 플랜인터내셔널의 한국지부다. 플랜은 UN 경제사회이사회의 협의기구로 한국은 1953년부터 1979년까지 후원을 받아오다가 1996년 세계 최초로 수혜국에서 후원국으로 격상됐다. 현재 플랜은 21개 후원국이 48개국 1백50만 명의 아이들과 9백만 명의 지역 주민들을 돕고 있다. 후원 신청&문의 02-790-5436, www.plankorea.or.kr ‘선생님은 “와줘서 무척 기쁘다”라며 숨 돌릴 틈도 없이 애써준 조안에게 감사를 전했다. 과자와 선물 보따리를 전해주고 돌아서려는데, 아이들이 자꾸만 붙들어서 한참을 헤어지지 못하고 긴 인사를 나눴다’ 사랑을 나누고, 사랑을 배우다 조안 “매 순간이 소중해서 무척 감사했어요” 케이블TV에서 방영됐지만 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한국형 수사드라마의 신기원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은 ‘특별수사본부 TEN’에서 검거 확률 10% 미만의 강력 범죄를 파헤치는 특수사건전담반 형사 남예리 역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그였다. 바쁜 스케줄도 스케줄이지만 한동안 인터뷰조차 하지 않았던 조안이 KBS-1TV 주말드라마 ‘광개토태왕’ 촬영 중 짬을 내어 태국 현지 봉사활동에 참여하기로 한 이유가 궁금했다. 며칠간 그녀를 지켜보면서 아이들을 좋아하는 마음을 충분히 느꼈지만 그래도 다른 이유가 있을 듯했다. 5일이 금세 가버렸네요. 태국까지 가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 항상 좋은 일을 하겠다는 생각은 품고 있었는데 일정이 잘 맞지 않았어요. 고아원에 몇 번 간 게 전부였죠. 사실 봉사활동이라고 하기도 그런 게, 좋은 일 하러 다니면 제가 얻는 것이 더 많거든요. 시간이 안 돼서 못 가다가 이번에는 마침 스케줄이 맞은 거죠. 기쁜 마음으로 ‘오케이’했는데 막상 결정하고 나니 걱정됐어요. 내가 도움이 될까? 착한 척만 하다가 오는 건 아닐까, 도움은 안 되면서 뿌듯함만 느끼고 오는 건 아닐까, 엄청 고민하고 긴장했어요. 그러다 꿈도 꿨어요. 날개가 언 새들이 지붕에서 떨어졌는데, 제가 발견해서 치료해주는 꿈이었어요. 플랜인터내셔널 관계자분께서 짧은 일정 동안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지만 이곳 아이들의 존재를 대신 알리는 게 제 역할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고아원에 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아이들은 누군가 일회성으로 한 번 다녀가고 나면 상처를 받는대요. 그런데 여긴 한국이 아니잖아요. 자주 오기도 힘들고요. 외부와 거의 접촉하지 않고 조용하게 사는 분들이라 더욱 조심스러웠어요. 손님 방문 자체가 이곳에서는 엄청 ‘큰일’이더라고요. 물론 매 순간이 그렇겠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자면요? - 순간순간이 다 소중하지만, 처음에는 웃지도 다가오지도 않던 아이들이 어느 정도 친해지자 제게 와서 안겼을 때요. 그리고 자오이가 문 앞에 마중 나왔던 때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아이였잖아요.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이가 사는 법이었다는 걸 알고는 부끄러웠어요. 저는 큰 축복을 받았으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었다는 걸 깨달았죠. 나으가 신분등록을 했을 때도 그렇고요. 할아버지께서 아이들을 그렇게 사랑하시는 줄 몰랐어요. 자식들을 원망하지도 않고 (자신에게) 두고 가길 잘했다고 하셨을 때 정말 대단해 보였어요. 신발을 신겨드리니 해맑게 웃으셨을 때, 병원 데리고 가줘서 고맙다며 제 손을 잡아주셨을 때가 기억에 남네요. 조안씨의 진심이 느껴져서 참 좋았어요. 그리고 조안씨는 유치원 선생님이 참 잘 어울려요. - 아이들한테 진심으로 대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돌아가서 죄책감을 느낄 것 같아서요. 아이들에게 거짓으로 대할 수는 없잖아요. 고등학교 때부터 아이들을 좋아했어요. 적성 테스트에서도 교사가 첫 번째로 나왔고요. 어렸을 때는 일찍 결혼하는 게 꿈이었는데 만약 유치원 교사가 됐다면 어땠을까, 가끔 생각해요. 벌써부터 아이들 생각이 자꾸 나네요. 과자 한 봉지만 쥐어주어도 “코큰캅(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던 모습이 눈에 선해요. 언제 다시 그 아이들에게 과자를 전해줄 수 있을까요. 이런 마음을 알아주면 좋을 텐데…. 연기를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그림도 잘 그리시던데요. - 전 사실 연기밖에 몰라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세금 낼 줄도 모르고 통장도 매니저한테 맡겨놔요. 그래서 사기 당하기도 쉬워요(웃음). 다행히 저는 좋은 분들 만나서 얼마나 감사한지(웃음). 기회가 된다면 만화를 그려보고 싶어요. 실은 동화책을 하나 냈어요. 제가 책을 낸 것만 해도 감사하지만, (제 능력에 대한) 아쉬움도 많았어요. 다음에는 인세 안 받고 작업을 하고 싶어요. 개인적으로 팀 버튼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그림 스타일을 좋아해요. 약간 독특하고 음울하면서도 익살스러운 느낌이요. 다음에 더 잘 준비해서 꼭 그림책을 내고 싶어요. 기자가 보기엔 완벽주의자 같던데, 맞나요? 평상시의 조안은 어때요? - 네, 제가 ‘모 아니면 도’예요. 청소도 내내 안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집 안 전체를 다 바꿔놔요. 신경 쓰기 시작하면 그런 면이 좀 있어요. 일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해서 항상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도 있고요. 이번에 연기한 ‘남예리’는 실제 제 모습이랑 비슷해요. ‘별순검’을 같이했던 이승영 감독님이 제일 먼저 저에게 대본을 주셨대요. “딱 네가 해야 된다”라고 하셔서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맡았지요. 주변에도 연기 말고 다른 일을 병행하는 분들이 많잖아요. 그런 분들 보면 어떤 생각이 들어요? - 처음에는 연기가 직업이라는 생각이 없었어요. 연기하는 것만도 좋은데 돈까지 주니까 신기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직업이 되어버려서 좀 슬프기도 해요. 연기 외에 다른 일을 하는 이유가 돈은 다른 데서 벌고, 연기는 즐기면서 하고 싶어서인가 봐요. 저는 연기하는 게 정말 좋아서 죽을 때까지 하고 싶거든요. 그러려면 정말 잘해야 하잖아요. 거짓말하지 않으면 (시청자들이) 진심을 알아줄 것 같아요. 새로운 것보다는 진짜로 보여드리고 싶어요. 가짜를 살지 말아야겠다고 늘 다짐해요. 조안씨 기사를 찾아보다가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이 “스타가 되고 싶지 않다”라는 거였어요. 무슨 뜻이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지만요. - 쉬지 않고 꾸준히 연기해온 데 대해 감사해요.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확 뜨는 바람에 연기력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일 없이 꾸준히 성장하면서 연기할 수 있는 것에도 감사하고요. 대중에게 믿음을 주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무게감이 느껴진다”라는 말은 제게 최고의 찬사이자, 연기자로서의 꿈이에요. 물론 조경진(조안의 본명)으로서의 삶도 행복하고 싶고요. 아직까지 조안은 예쁘고 매력적인 역할을 많이 맡았지만 30대에 접어들었으니 고민도 클 것 같아요. 한정된 배역만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없나요? - 지금은 배역이 들어오면 ‘최선을 다하자’라는 생각밖에 없어요. 사실 ‘광개토대왕’은 처음 하는 전통 사극이라 힘들었어요. 교장선생님이셨던 할아버지가 어릴 때 많이 혼을 내시는 바람에(웃음), 제가 어른을 무서워하거든요. 처음에는 고참 선배님들 사이에서 기가 죽었는데 여배우들이 없어서 그런지 무척 잘해주셔서 다행이에요. 3월부터는 김래원씨와 함께 영화 ‘드림’의 촬영을 시작해요. 저는 밝고 털털하고 착한 역할을 맡았어요. 연예계 일을 시작한 지 오래됐잖아요. 아무래도 좀 외로울 것 같아요. - 말을 터놓을 사람이 줄어들기는 해요. 오래 하다 보니 이쪽 일 하는 사람들만 만나게 되고요. 다른 직업을 가진 친구를 갖고 싶은데 기회가 없어요. 다양한 직업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요. 일할 때 말고는 거의 집에만 있어요. 제가 혼자 놀기의 달인이거든요(웃음). 만드는 걸 좋아해서 이것저것 만들고, 그림도 그리고요. 집에 돌아가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게 뭐예요? - 그냥 따뜻한 침대에 누워서 푹 자고 싶어요. 무방비 상태로 갔는데 생각보다 태국이 춥더라고요. 그러고 나서는 현지에서 찍은 사진을 지인들에게 보여주고 도움이 되어달라고 하고 싶어요. 아, 그리고 어머니께 아이들 만나고 온 얘기도 들려드릴 거고요(웃음). 이번 여정은 3월 2일(금) 오후 2시 30분, MBC에브리원에서 ‘저는 열세 살에 태어난 나으입니다’란 제목으로 방송된다. 조안과 아이들을 보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특별한 시간이 될 것이다. “아이들한테 진심으로 대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돌아가서 죄책감을 느낄 것 같아서요. 아이들에게 거짓으로 대할 수는 없잖아요. 벌써부터 아이들 생각이 자꾸 나네요” [취재 후기] 돌아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자꾸만 보고 싶다. 만났던 아이들 얼굴들이, 함께 갔던 마음씨 고운 사람들이…. 조안과는 사실 ‘혼자만 구면’이었다. 2003년엔가 잠시 단역배우를 하다 드라마 ‘첫사랑’ 촬영장에서 갓 데뷔한 배우 조안을 본 적이 있다. 풋풋한 소녀의 느낌은 어느새 세월이 흐른 만큼 숙녀로 바뀌었는데 여린 마음씨는 여전했다. 관록이 붙은 배우가 되어서도 조안은 잘 울고, 또 잘 웃었다. 그래도 여러 면에서 성장한 모습을 본 것 같아 새삼 뿌듯했다. 사실 연예인과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그녀와는 될 수 있을 듯하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인터뷰로 시작한 대화는 인천공항에 착륙하기 직전까지 거의 여섯 시간의 ‘밤샘 수다’로 이어졌다. 부디 다음 영화가 ‘대박’ 나기를, ‘사랑의 리퀘스트’로 이어진 아름다운 행보를 종종 볼 수 있기를, 그리고 ‘언젠가 태국에 다시 함께 가자’라는 약속도 지켜지기를 바란다. <■글 / 위성은(객원기자) ■사진 / 원상희 ■취재 협조 / 플랜코리아>
- 희망을 찾아 떠난 길 위에서 함께한 아름다운 동행
- 2012. 02. 07 15:59 연예
- ㆍ이병헌·김사랑·이범수·박진희·다니엘 헤니·배수빈·진구·이시영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덟 명의 배우들이 기아와 빈곤으로 허덕이고 있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의 제3세계 국가들을 횡단하며 안타까운 순간들을 함께했다. 오랜 가난과 전쟁의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처절하리만큼 결핍된 삶 한가운데에서 어렵게 생명의 끈을 이어가고 있는 이들의 손을 잡고 서투른 몸짓과 눈빛으로 소통한 187일간의 여정. 슬픔으로 얼룩진 척박한 땅에 새로운 미래의 씨앗을 뿌리며 나눔의 행복을 실천하고 돌아온 스타들의 따뜻한 이야기를 전한다. 이병헌 / 사랑을 나누러 간 곳에서 사랑을 배우다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지켜줘야 합니다. 우리는 그럴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서부에 위치한 말리. 우리나라 면적의 13배가 넘지만 절반 이상이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고, 나머지 절반 역시 사막과 다름없는 사헬지대로 되어 있어 언제 모래 속에 잠기게 될지 알 수 없는 나라다. 극심한 가뭄의 시작으로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버텨내지 못하고, 이로 인해 식량 위기는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 메마른 땅에서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고통을 받는 이는 죄 없는 아이들이다. 면역력이 약한 아이들은 갖가지 질병에 노출돼 있다. ‘가장 가난한 나라의 가장 슬픈 병’이라고 불리는 노마병이 그 대표적인 예다.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급속히 확산된 이 병은 영양 부족으로 인해 볼과 입 주변 등 얼굴 피부가 점점 썩어 들어가고, 치료 시기를 놓칠 경우 3주 안에 모든 피부로 전이되는 무서운 질병이다. 이외에도 아이들은 사막에서 불어오는 건조하고 따가운 모래바람으로 인한 뇌수막염과 실명 등의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다. 이병헌은 시력을 잃은 아이들에게 백내장 수술을 시켜주었다. 간단한 수술로 시력을 되찾을 수 있음에도 그럴 여력이 없는 탓에 평생 세상을 등지고 살아야 하는 그들에게 빛을 선사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현지의 모든 사람들을 치료해줄 수는 없었지만, 식구 중 세 명이 시력을 잃은 바이수 가족과 5년 전 시력을 잃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16세 소녀 가작두는 이병헌과 어린이재단의 도움으로 수술을 받고 시력을 회복했다. 마을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프로젝트도 준비했다. 이병헌은 그동안 무더위로 사람들을 괴롭혀왔던 태양을 역이용해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게 했다. 이로 인해 태양광 전기를 통해 우물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된 아이들은 더 이상 흙탕물을 마시지 않아도 되고, 마을 보건소 약품 창고가 재가동되면서 주민들이 뇌수막염을 예방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졌다. 또 말리의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을 위해 학교에 백열등을 설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이들은 이제 다시 건강한 미래를 꿈꿀 수 있을 것이다. 작은 관심과 사랑이 찾아준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는 말리의 미래이고 우리의 미래이다. 김사랑 / 아동 노동의 현실을 딛고 희망을 보다 “그들의 얼룩진 손에 책과 연필 그리고 교육의 기회를 찾아주고 싶습니다” 전 세계 카카오 생산량 2위국 가나. 초콜릿을 연상하면 떠오르는 달콤함과 달리 카카오 농장에서 열매를 따고 다듬는 대부분의 인력이 아이들로 이뤄진 씁쓸한 현실에 처한 나라다. 현재 가나에서 노동으로 고통받고 있는 아이들은 100만 명. 10세 미만의 어린아이들도 가차없이 노동에 투입되는 현실 속에서 어른들은 ‘값이 싸다’라는 이유만으로 일을 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자신들도 그러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이런 악순환이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상처투성이인 손으로 아이들이 일하는 곳은 전자쓰레기 소각장이나 금광 혹은 수심 2m가 넘는 어둡고 차가운 강이다. 때로는 생명까지 위협받는 환경에서도 어른들의 폭력과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묵묵히 일을 하는 아이들은 ‘아동 노예’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아이들이 아이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바라며 가나를 찾은 김사랑. 하지만 그녀는 유독한 매연이 나오는 전자쓰레기장에서 만난 고아 사무엘을 통해 혹독한 현실 속에서도 작은 희망을 보았다. 한 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구리를 채취하는 역경을 겪는 와중에도 학교에 다니기를 소망하며 대통령이라는 큰 꿈을 품은 사무엘은 오히려 김사랑에게 위로와 감동을 선사했다. 네 살 때 고기잡이배에 팔려와 노예처럼 맞고 굶으며 일을 해왔다는 아네사는 김사랑과 현지 NGO의 도움을 받아 엄마를 찾고 다시 어린아이의 미소를 되찾았다. 김사랑은 지금 가나의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하고 작은 도서관을 선물했다. 아이들의 거친 손에 무거운 그물, 날카로운 돌, 위험한 연잠들이 아닌 책이 들려 있기를 바라고, 학교에 갈 수 없는 환경의 아이들도 다양한 책을 접하면서 밝고 건강한 미래를 꿈꾸고 도약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장은 많은 아이들이 도서관을 찾을 수 없겠지만, 언젠가 가나의 모든 아이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드나들며 저마다의 소중한 꿈을 완성시켜갈 수 있는 곳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범수 / 검은 눈물의 땅, 모잠비크에 빛을 선물하다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자 아직 전하지 못한 말, ‘오브리가두(고맙습니다)’!” 한반도의 3.5배에 이르는 국토에 2천만 인구, 연 8%의 경제성장을 착실하게 이룩해 나가고 있는 모잠비크. 하지만 400여 년간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지배를 받고 30년 이상 지속된 내전의 아픔이 남아 있는 까닭에 여전히 아프리카의 최빈국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있다. 전쟁은 멈췄지만 모잠비크 땅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지뢰 때문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팔다리가 잘리거나 목숨을 잃고 있다. 10여 년 동안 이어진 자연재해 역시 이들의 삶을 힘들게 하는 주범이다. 한쪽에서는 홍수로 인해 넘쳐나는 물로 삶의 터전까지 잃어버렸고, 다른 한쪽에서는 우기에도 거의 비가 내리지 않아 더러운 물인 것을 알면서도 식수로 사용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런 물을 마시며 자라나는 아이들은 길게는 2년 이상 혈뇨 증상으로 고통받는다. 무엇보다 이곳의 가장 큰 문제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률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인의 31%가 에이즈에 걸린 죽음의 도시 모잠비크에서는 40세가 넘은 사람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이범수가 만난 16세 소년 넬리투 역시 에이즈로 인해 차례로 부모를 떠나보내고, 현재 자신마저도 에이즈로 고통받고 있었다. 이범수는 힘겹게 병마와 싸우며 홀로 할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반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는 기특하고 성실한 넬리투를 위해 빛을 선물했다. 모잠비크에서 수도 마푸투 지역을 제외한 다른 지역은 심각한 전력난을 겪고 있다. 이범수가 찾아간 나마차 마을 사람들 역시 해가 지는 동시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 안에서 생활해야 하는 불편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이범수는 이곳의 사정을 그냥 보고만은 올 수 없어 한국 정부의 수출입은행과 모잠비크 지역 전력청의 도움을 받아 안정적으로 전력이 공급될 수 있도록 태양열 발전 시설을 설치했다. 이를 시작으로 모잠비크 전역에 태양열 발전 시설을 건립하는 일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발전 시설을 설치한 마을의 길목마다 직접 전구를 달아준 이범수는 신이 버린 어둠의 나라라고 불렸던 모잠비크에 새로운 희망을 찾아주었다. 빛은 미래의 희망이고, 아이들은 그 빛과 함께 밝은 미래를 그려나갈 것이다. 박진희 / 형제의 나라 몽골, 유목민의 삶을 함께 아파하다 “20년 전 우리나라와 무척이나 닮아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합니다” 대초원을 벗 삼으며 말을 타고 달리는 자유로운 유목민과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용맹한 칭기즈칸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나라 몽골. 하지만 푸른 초원은 짧은 여름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일 뿐, 대부분의 계절에는 황량한 땅과 거친 바람만이 존재한다. 몽골인들은 이러한 가혹한 환경에서도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며 유목민의 삶을 지켜왔다. 하지만 자원 부국이라고 알려지면서부터 무분별한 개발이 이뤄졌고 이는 환경 파괴와 함께 사막화, 영하 5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 등의 이상기후를 불러일으켰다. 급격한 기후변화 때문에 유목민 삶의 전부였던 가축들이 몰살당하기 시작했고, 모든 것을 잃게 된 이들은 환경난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이제 유목민들은 죽은 동물과 낙태를 통해 버려진 태아의 시신들이 무분별하게 뒤섞인 쓰레기 매립지에서 재활용품을 찾거나, 외줄 하나에 목숨을 의지한 채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한 굴로 들어가 금을 캐면서 생활하고 있다. 박진희는 쓰레기 매립지에서 쓰레기를 주우며 작은 게르(몽골족의 이동식 집)에서 3대가 함께 생활하는 대가족을 만났다. 그녀는 살을 에는 매서운 추위 속에서 어린아이들까지 모두 나와 부모의 일손을 거드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검은 길이라고 불리는 금광 개발 역시 큰 문제를 안고 있었다. 불법 채금업자들이 금을 고르는 데 사용한 수은을 식수원에 버리기 시작하면서 마을 사람들이 암에 걸리고 죽어갔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혈관암에 걸린 세 살배기 주에크는 매일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통을 호소하지만, 아이를 위해 부모가 할 수 있는 건 진통제를 먹여 다시 재우는 일뿐이었다. 과거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어 더욱 마음이 쓰였다는 박진희는 쓰레기 매립지에서 만난 대가족을 위해 새로운 게르를 선물하고, “아이들이 주어진 환경 때문에 때로는 아파하고 넘어질지라도 계속 꿈을 키워갔으면 좋겠다”라며 직접 삽을 들고 ‘에코 지니 센터’를 만들었다. 생계를 위해 고된 하루를 보내는 이들이지만, 이제 이 공간 안에서 좀 더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니엘 헤니 / 영화보다 더 치열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만나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서는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아프리카 동부에 위치한 동물의 왕국 케냐. 하지만 그 명성과는 달리 60년 만에 닥친 극심한 가뭄으로 땅의 모든 것이 메마르면서 더이상 사람들이 살아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가장 먼저 동물이 죽어갔고 케냐의 전통 부족들이 오랜 세월 지켜온 보금자리도 이내 위태로워졌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장기간의 내전에 고통을 겪다가 넘어온 소말리아 난민들에게는 새로운 삶을 꿈꾸게 하는 기회의 땅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살아갈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소말리아 난민들의 최종 종착지는 세계 최대 규모의 난민촌으로 불리는 ‘다다브’. 최대 수용 인원이 9만 명인 이곳에는 현재 다섯 배가 넘는 50만 명의 난민들이 모여 살고 있다. 자식과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한 달 이상 걸어 도착하지만, 생활고는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구호단체에서 음식을 나눠주러 오는 날이면 주변 지역의 난민들까지 모여들어 음식을 얻기 위한 치열한 생존 다툼이 벌어진다. 결국 사고를 염려한 구호단체가 보급을 포기하고 떠나는 일이 부지기수다. 케냐 현지 난민들의 상황 역시 다르지 않다. 이들의 주거지는 수도 나이로비의 화려함 뒤에 가려진 판자촌 ‘키베라’. 이곳은 세계에서 세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비위생적이며 열악한 환경을 갖고 있다. 쓰레기와 오물이 흐르는 하천에 살면서 희망보다는 절망이라는 단어를 먼저 배울 것 같은 아이들. 꿈을 꾼다는 것 자체가 사치라고 느껴지는 키베라이지만 아이들의 꿈은 자라고 있었다. 영화에 관심 있는 빈민가 아이들을 위해 무료로 영화 수업을 하는 곳이 있다는 말을 듣고 다니엘 헤니는 ‘키베라 필름 스쿨’을 방문했다. 직접 만든 연극으로 진중하게 연기를 선보이는 아이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는 그에게서 오랜만에 평온함이 느껴졌다. 아이들을 통해 깊은 감동을 받은 다니엘 헤니는 그들의 소중한 꿈이 깨지지 않고 계속해서 키워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스크린 장비와 영상편집기를 선물했다. 경찰, 엔지니어, 의사, 조종사처럼 우리의 아이들과 똑같은 꿈을 키우며 살아가는 지구 저편의 아이들. 그 아이들의 꿈이 담긴 희망 영화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배수빈&진구 / 내전의 아픔을 보듬고 오다 “끝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을 통해 희망의 의미를 정확이 알았습니다”(배수빈) “살아도 죽은 것과 똑같다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습니다”(진구) 공식적인 내전은 끝났지만 아직도 크고 작은 분쟁이 계속되고 있는 나라 DR콩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고통스러운 전쟁’이라고 불릴 만큼 15년 넘게 이어진 내전으로 지금까지 400만 명이 죽고 난민으로 전락했다. 분쟁을 피해 도망 온 수만 명의 난민들이 모이는 곳은 동부에 자리한 마시시 난민촌. 피난 오던 중 반군의 총에 맞아 다치거나 죽는 경우도 많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생존이라는 목표만을 가진 채 이곳으로 넘어오고 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난민들이라고는 하지만 비극적인 상처를 안고 있는 이들이기에 몸과 마음 모두 성한 곳이 없다. 이곳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아이들이다. 전쟁고아만 해도 68만 명. 부모라는 따뜻한 울타리 없이, 가난은 오롯이 남겨진 아이들의 몫이 되었다. 세계식량정책연구소가 발표한 ‘2010 세계기아 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콩고의 5세 이하 어린이의 사망률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고통스러운 전쟁은 끝났지만 난민촌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에게 아픔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어른들의 이기심이 불러왔던 내전의 고통 그 중심에는 우리의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여리디여린 아이들이 있다. 천 개의 언덕을 가진 땅이지만 그 아름다운 풍경 뒤에 숨겨진 비극적인 역사를 가진 르완다. 단지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1994년 대학살이 일어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지닌 아픔의 땅이다. 100일간 무려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던 인류 최악의 인종사태가 벌어진 곳이다. 특히 은타라마 성당은 그 비극적이고 참담했던 학살의 순간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성당에 오면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5천여 명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았고, 그 유골들은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생후 2주밖에 안 된 아이를 업고 도망 왔다가 자식을 잃은 엄마의 넋이 나간 표정과 대학살 때 죽은 누나의 시신이 묻혀 있다는 집을 찾아 곳곳을 돌며 지난 6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땅을 파헤쳐온 남자의 모습은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를 묻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지도록 만든다. 살아도 죽은 것과 같은 삶이란 바로 이들의 모습이었다. 비슷한 내전의 상처를 갖고 있는 DR콩고와 르완다. 배수빈은 형제처럼 붙어 있는 두 나라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을 상의하고자 콩고에서 진구와 만났다. 이곳에서 만난 난민들은 전쟁에서 팔을 잃고, 성폭행 후유증으로 반신불수가 되고, 부모를 잃은 채 홀로 남겨져 외로움과 굶주림을 감당해야 했다. 배수빈과 진구는 아이들을 홀로 키우며 비가 새는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고 있던 할머니를 위해 새 지붕을 선물했다. 그리고 르완다로 건너가 대학살 때 무너진 건물을 보수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월드비전의 도움을 받아 ‘희망 센터’를 지었다. 앞으로 세워질 이 공간이 대학살의 기억으로 고통받던 르완다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어줄 것이다. 이시영 / 남수단, 아이들의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꿈꾸다 “더 일찍 찾아가지 못한 미안함이 아직도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아랍어로 ‘검은 사람들의 땅’이라는 뜻을 지닌 나라 수단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넓은 땅을 가졌다. 무려 9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불안한 지리적 약점은 급기야 중앙정부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북부 아랍계가 남부의 흑인들을 차별하면서부터 오랜 내전으로 번져갔다. 끝없는 전쟁으로 인해 50년 동안 200만 명에 달하는 남부 사람들이 희생되면서 사람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많은 시간 동안 이들을 괴롭혀왔던 지독한 내전은 남수단이 자유와 주권을 되찾으면서 2011년 7월 9일 끝이 났다. UN이 인정한 세계 139번째 나라가 된 것이다. 착취와 전쟁을 피해 북부로 내려갔던 사람들은 다시 고향을 찾았지만 자유 외에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상태이다. 아직 고향으로 내려오는 버스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피난 중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갓 태어난 아이들. 자유를 되찾은 뒤 태어난 축복의 첫 세대이지만 아이 일곱 명 중 한 명은 다섯 살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한다. 미숙아로 태어나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부병으로 고생하는 아이도 있고 화상을 입어 손이 다 뭉개진 아이도 있다. 이들은 별다른 치료를 받지 못하고 부모의 품에만 의지한 채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고 있을 뿐이다. 심각한 영양실조로 태어난 지 1년 4개월밖에 안 된 아이를 잃고 무덤가에 앉아 있던 엄마의 눈에는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 가득했다. 그렇다고 이곳이 모든 희망을 잃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홀로 남은 엄마를 도우며 열심히 생활하는 티 없이 맑은 아이들의 모습 속에서 남수단의 밝은 미래를 그려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도움이지만 그 아이들을 위해 남수단을 찾은 이시영은 망고 나무를 심었다. 훗날 망고가 익어갈 때쯤이면 가족은 망고를 판 돈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의 아이들에게도 희망은 있었다. 북쪽에서 아랍어를 써왔던터라 영어를 익히는 것이 어려울만도 한데 한 글자라도 더 배우려는 아이들의 열정만큼은 대단했다. 이시영은 월드비전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희망의 학교를 선물했다. 지금은 비록 힘들지라도 가난이라는 단어가 넘지 못할 단단한 꿈을 가진 아이들을 위해 ‘시영 스쿨’이 많은 기적을 만들어주길 바라본다. <■기획&정리 / 윤현진 기자 ■사진 제공 / 강영호, 박지만, 강연욱, 박철희 ■참고 서적 / 「눈물도 말라버린 그곳에서 우리는 희망을 보았습니다」(KBS 희망로드 대장정 제작팀, 시드페이퍼)>
- 임권택 감독과 22년 만에 재회! 강수연의 의미 있는 동행
- 2011. 03. 28 18:47 연예
- 강수연이 임권택 감독과 다시 만났다.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전 세계가 주목해왔을 만큼 인연이 깊다. 강수연은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며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두 번이나 누렸고, 덕분에 대한민국 대표 여배우의 자리에 올랐다. 그 후 22년, 한국영화를 상징하는 감독과 배우의 세 번째 만남이 성사됐다. 강수연이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했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시청 공무원(박중훈 분)과 그의 아픈 아내(예지원 분), 그리고 다큐멘터리 감독(강수연 분)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조선왕조실록」의 일부를 전통 한지로 복원하는 작업에 관여하게 되면서 얽히고 부딪히고 이해하는 과정을 그린 휴먼 드라마다. 강수연은 극중 한지의 아름다움을 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다큐멘터리 감독 민지원 역을 맡아 연기에 대한 변함없는 열정을 불태웠다. 임권택 감독은 이번 작품을 위해 2년여 동안 전주 지역의 아름다운 장소들을 직접 둘러보며 한지 장인과 관련 종사자들을 만나고, 전통 한지가 한겨울 차가운 물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완벽하게 재현하기 위해 겨울 촬영을 강행했을 정도로 식지 않는 열정을 보였다. 그 결과 영화는 마치 한지를 소재로 한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깊이 있는 느낌을 선사한다. 강수연 역시 한동안 한지에 푹 빠져 지내며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사실 한지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어요. 한지라고 하면 편지지나 편지봉투, 시골집 문에 바르던 창호지 정도로만 알았거든요. 그런데 감독님이 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마다 가슴에 뭔가 와 닿았어요. 그 후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한지에 무지했던 제가 실제로도 한지에 점점 빠져들게 됐고요.” 강수연은 매번 촬영장에 갈 때마다 임권택 감독으로부터 한지에 대한 자료를 건네받았다. 한자가 빼곡히 적힌 고문서들이었기에 처음에는 읽기도, 이해하기도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지의 매력을 알아가게 됐다고 한다. 영화 작업을 모두 마친 요즘에도 개인적으로 계속 관심을 갖게 됐을 정도다. 한지라는 색다른 소재도 눈에 띄지만 ‘달빛 길어올리기’가 더 주목받는 이유는 임권택 감독과 강수연의 만남 때문이다. 강수연은 1987년 임권택 감독과의 첫 번째 영화 ‘씨받이’로 동양권 여배우로는 최초로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월드스타라는 호칭을 얻었다. 1989년에는 임권택 감독과의 두 번째 영화였던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모스크바영화제에서 또 한 번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며 아시아 최고 여배우로 등극했다. 그래서일까, 그 후 22년 만에 불과 세 번째 작품으로 만난 두 사람이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다. “어릴 때부터 20년 넘도록 뵈어와서인지 감독님이 이제는 아버지 같아요. 감독님은 배우를 만들고 다듬고 감싸주시는 분이거든요. 감독님을 조금 어려워 할 수 있는 한참 어린 스태프들에게도 아들, 딸처럼 따뜻하게 잘 대해주시고요. 감독님이 오래 사셔서 앞으로 10년, 20년 후에도 함께 영화 작업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데뷔해 배우로 살아온 지 어느덧 41년이 된 강수연. 강산이 네 번은 바뀌고도 남을 지난 세월 동안 그녀가 출연해온 작품 수와 그 안에서 맺은 인연들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어떤 작품 속에서든 당당하고 야무지게 헤쳐 나가는 캐릭터로 뜨거운 에너지를 발산하는 강수연의 연기 열정은 앞으로도 당분간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듯하다. <■글 / 윤현진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 ‘한 번의 비상을 위한 천 번의 점프’ 오서 코치와 김연아의 동행
- 2009. 09. 10 16:07 화제
- 김연아와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는 브라이언 오서 코치가 3년간 김연아와 함께해온 이야기와 자신의 선수 시절 이야기를 책으로 펼쳐냈다. 김연아가 피겨를 사랑하고 즐길 줄 알도록만들어준 오서 코치의 부드러운 리더십과 김연아의 성장 스토리.수줍은 소녀와의 운명적인 만남 브라이언 오서와 김연아의 만남은 2006년 5월 어느 날에 이루어졌다. 김연아는 데이비드 윌슨에게 새 프로그램을 받기 위해서 캐나다 토론토를 찾았고, 김연아의 어머니는 그 기간 동안 브라이언 오서에게 김연아한테 점프를 가르쳐줄 수 있는지 물었다. 3주간의 짧은 기간이었기에 브라이언 오서는 흔쾌히 그 부탁을 받아들였고, 한국에서 온 작은 동양 소녀를 처음 만났다. 오서는 김연아의 첫인상에 대해 “당시 연아는 쭈뼛쭈뼛한 태도에 치아는 교정 중인데다가 영어는 한 마디도 못하고 팔 다리가 길기만 하지 컨트롤을 제대로 못하는 상태였다”고 회상했다. 프로선수로 활동하던 오서는 김연아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어떤 스케이팅 선수인지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연아가 스케이트화를 신고 링크에 내려선 순간, 교정기를 낀 수줍은 소녀는 사라졌어요. 저는 연아의 재능과 속도감 그리고 흠잡을 데 없는 전문적인 기술 등에 깊은 인상을 받았죠. 아니, 차라리 감동했다고 말해야 더 옳을 겁니다.” 연습 기간이 끝난 뒤, 김연아와 어머니는 공식 코치가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당시 오서는 프로 선수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코치를 맡게 되면 선수로서 활동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연아와 어머니의 강한 확신과 거듭된 부탁에 오서는 코치로서 진지한 삶을 고려하게 됐고, 결국 김연아의 코치를 맡기 위해 프로선수 생활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프로선수 생활을 접고, 코치로서 임무에 전념하게 된 내 인생의 중요한 전기는 바로 연아였죠. 선수에서 코치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는데, 나날이 성장하는 제자를 보는 것은 정말 특별한 즐거움이었어요.” 오서는 한국에 와서야 연아의 인기가 슈퍼스타처럼 대단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아를 처음 만난 2006년 겨울 한국에서 개최되는 아이스쇼의 총 안무감독을 맡아 한국에 온 것. 보통 김연아처럼 인기가 많은 스케이팅 스타는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이 있게 마련인데 연아는 어머니의 가르침 덕분에 인성이 밝고 긍정적으로 형성됐다. “연아는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점프 자세와 인성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백 번이든 2백 번이든 점프를 할 때마다 어머니가 늘 연아의 자세를 지켜봤기 때문이죠.”오서는 ‘내게 딱 맞는 스승’ 김연아 역시 브라이언 오서에 대해 “내게 딱 맞는 스승”이며 “얼음판 위에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유일하게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누누이 말해왔다. 이에 대해 오서는 “이 말은 스승이 제자에게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며 “내가 연아에게 그런 스승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라고 말했다. 브라이언 오서는 김연아가 과거 자신과 똑같은 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그녀를 잘 알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연아와 오서는 완벽주의자이고, 승부욕이 강하며 코치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점이 비슷하다. 오서는 김연아가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재능을 가졌다고 말한다. 1 연아를 위한 드림팀의 한 사람인 트레이시 윌슨과 함께. ⓒ Susan D. Russell 2 스핀 코치인 아스트리드 슈럽. 안무가인 데이비드 윌슨, 연아와 함께 ⓒ Susan D. Russell 3 연아의 세계 선수권 대회 우승 축하 파티에서. 연아가 금메달을 한국에 두고 와 내가 1987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받은 금메달을 대신 걸어주었다. 연아는 내 메달과 그녀가 받은 메달이 똑같다며 깜짝 놀랐다. ⓒ Susan D. Russell “연아는 내가 가르친 제자 중에 가장 뛰어날 뿐 아니라, 무엇이든 스펀지처럼 흡수해버리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어요. 내가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이든 배우려고 하는데 이는 정말 감동적인 모습이에요. 다행히 내가 프로선수로 활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가르치고 싶은 것을 직접 연아에게 보여줄 수 있었죠. 연아도 나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 같았죠.” 김연아의 안무가로 유명한 데이비드 윌슨은 김연아의 첫인상에 대해 “연아는 깡마르고 아주 긴 몸을 가진, 그리고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어린 소녀였다”고 기억했다. 김연아의 안무를 맡은 데이비드 윌슨의 첫 번째 과제는 바로 ‘무표정한 연아를 웃게 만드는 것’이었다. 심각한 얼굴 속에 감춰진 수줍음과 진지함,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2주가 지난 뒤, 김연아는 수줍고 조용한 동양 소녀가 아니라 얼굴을 활짝 펴고 웃으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줄 알게 됐다. 진정 스케이트를 즐길 줄 아는 소녀가 된 것이다. 윌슨 역시 김연아의 재능과 잠재력을 한눈에 알아보고 오서 코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연아는 타고난 재능과 아름다운 신체 라인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우아하고 부드럽고 아주 친절해. 그리고 믿을 수 없이 진지하고 굉장히 열심히 노력하지. 최고가 되기에 충분한 꼬마 숙녀야.” 오서는 윌슨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리고 “데이비와 김연아도 찰떡궁합”이라고 말했다. 윌슨은 최고의 표현력을 이끌어내고, 김연아는 윌슨이 제시한 연기를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기술과 감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연기를 다듬고 효과를 더해주는 역할은 바로 오서 자신의 몫이었다. 연아와 비슷한 과정을 먼저 거친 오서 코치, 세계 제일의 안무가인 윌슨까지 한 자리에 모이면서 이들 세 명은 최고의 드림팀이 됐다. “나는 네가 무척 자랑스럽다” 스케이팅 선수가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유연성’, ‘기본체력’, ‘지구력’이 강해야 한다. 침착하기로는 양궁 선수 이상이어야 하고, 체조 선수 이상으로 단단하고 강인해야 하며, 다이빙 선수처럼 우아해야 한다. 또 마라톤 선수처럼 폐활량이 좋아야 한다. 이런 조건이 모두 갖춰져야만, 스케이팅을 하기에 최상의 컨디션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김연아 역시 2006년부터 2008년까지 끊임없는 부상에 시달렸다. 오서는 이런 김연아에게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특별한 훈련을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오서 자신이 얼마나 김연아를 믿고 있는지 계속 이야기해주었을 뿐이다. 그 믿음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김연아는 부상 투혼에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종합 성적 3위를 내는 기적을 보여줬다. “연아가 스케이팅을 하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아무도 알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 고통을 참고, 야단법석을 떨지 않고, 심지어 미소까지 잃지 않는 연아의 모습, 그리고 좌절에 대처하는 방식이 무척 좋았어요.” 김연아는 2008 그랑프리 파이널 대회에서 평소보다 못한 실력을 보였다. 한국에서 열렸다는 점도 정신적인 부담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그 시합을 경험 삼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는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운동선수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최고가 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해내기 위해 우리는 연아와 함께 리듬을 발전시켰고, 연아는 ‘정상에 오르는 것’에 대한 중요함을 늘 인식하고 있었어요.” 무대에서 김연아가 늘 열심히 연기를 하고 내려오면, 오서는 그녀에게 “나는 네가 무척 자랑스럽다”는 말을 꼭 한다.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서는 실제로 김연아가 매우 자랑스럽다. 김연아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늘 배우는 자세로 열심히 노력한다. 그리고 그 점을 바로 곁에 있는 오서 코치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그는 더 이상 김연아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 “나는 말수가 적은 편이고, 연아도 야단스러운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최고를 향해 가는 그 외로움과 즐거움을 이심전심으로 알고 있어요. 이를 통해 관객에게 최고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도요.” 4 1988년 캘거리 올림픽 시상대에서. 브라이언 보이타노가 금메달, 브라이언 오서가 은메달을 땄다. ⓒ 브라이언 오서 5 세계라는 무대는 전혀 생각해본 적도 없는 것까지 경험하게 된다 ⓒ 브라이언 오서 6 2009년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키스 앤 크라이 존에서 점수를 확인하는 연아와 오서 코치. 연아는 피겨계에 길이 남을 멋진 연기를 보여주었다. ⓒ 브라이언 오서 7 오서와 데이비드 윌슨은 무표정한 연아를 웃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연아는 희노애락을 표현하는 완벽한 스케이터가 됐다. ⓒ 브라이언 오서숙명의 라이벌, 아사다 마오 김연아가 지금의 자리에 올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그녀의 라이벌 ‘아사다 마오’ 덕분이다. 세계는 자연스럽게 나이도 같고 실력도 비슷한 동양의 두 소녀,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를 종종 비교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숙명의 라이벌’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하지만 일본은 한국과 달리 피겨스케이팅에 대한 애정이 특별하다. 그리고 아사다 마오는 주니어 시절부터 일본에서는 ‘보석’처럼 여겨왔다. 오서는 김연아가 주니어 시절부터 아사다 마오 선수를 봐왔기 때문에 굉장히 자극이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잘 뛰는 사람과 달리기를 하면, 자연히 자신의 기록이 나아지는 것과 같은 이치죠. 저 역시 뛰어난 선수들과 경쟁하면서 한 단계 한 단계 최고를 향해 올라갈 수 있었어요.” 오서는 “김연아의 장점은 ‘단점이 없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김연아는 스케이팅 선수가 갖춰야 할 모든 조건을 갖췄을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 그 중 오서 코치가 생각하는 가장 큰 장점은 ‘스케이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다. 또 음악을 통해 스케이팅을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굉장히 큰 이점이다. 그러나 최고 중의 최고가 되기 위한 마지막 조건은 따로 있다. 바로 ‘정신력’이다. 오서는 김연아가 최고의 기술, 천부적인 음악성, 풍부한 표현력, 강인한 체력을 모두 갖췄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선수라도 세계무대에 서면 마음이 흔들리게 되어 있다. 그런데 김연아는 바로 어떤 무대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을 갖고 있다고 칭찬했다. “연아는 라이벌 아사다 마오보다 표현력에 있어서 훨씬 더 높은 경지에 다다른 상태예요. 하지만 세계적으로 훌륭한 선수들이 많기 때문에 긴장을 늦추지 말고 시야를 더 넓혀야 합니다.” 오서는 “내 모든 지식과 스케이트에 대한 열정을 연아에게 아낌없이 알려줄 것”이라고 말한다. “김연아는 피겨 인생의 1장에서 최고의 즐거움을 맛보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 장을 준비하면서 인간으로서 무엇을 남길 것인지 고민해야 하죠. 저는 김연아가 영적인 인간이 되도록 도움을 주고 싶어요.”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 스케이터들의 만남, 김연아와 브라이언 오서. 이 환상의 콤비가 다가오는 동계올림픽에서 얼마나 행복한 스케이터가 되어 돌아올지 기대된다.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제공 / 웅진지식하우스 ■참고 서적 / 「한 번의 비상을 위한 천 번의 점프」(웅진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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