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옵션
닫기
범위
전체
제목
본문
기자명
연재명
이슈명
태그
기간
전체
최근 1일
최근 1주
최근 1개월
최근 1년
직접입력
~
정렬
정확도순
최신순
오래된순

주간경향(총 1 건 검색)

[구석구석 과학사](56)대도시 골목길, 서민의 짐 날라주던 리어카(2019. 05. 31 15:06)
2019. 05. 31 15:06 문화/과학
연탄이, 이삿짐이, 김장용 배추가, 쓰레기와 고물이, 적혈구 백혈구가 모세혈관을 타고 몸속 구석구석까지 돌 듯, 리어카를 타고 자동차도 다니기 어려운 골목 사이사이를 드나들었다. 일감이 오기를 기다리며 리어카와 지게에 기대어 잠이 든 짐꾼들. 1964년 촬영된 사진이다./경향신문 자료사진 1만원권 지폐 뒷면에는 한국 과학기술의 과거와 현재를 상징하는 세 가지 물건이 조금씩 그려져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국보 제228호), 혼천시계(국보 제230호), 보현산 천문대의 1.8m 천체망원경이다. 이 가운데 혼천시계는 조선 현종 때(1669년) 홍문관 천문학자 송이영이 만든 것으로 밝혀져 있는데 서양의 정교한 자명종 기술을 소화하여 동아시아 식으로 시간과 천체 운행을 표시하도록 만든 독특한 기계다. 이 혼천시계는 지금은 국보가 되어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지만 광복 전후까지만 해도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물건이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던 이 물건이 1930년대에 어떻게 궁 밖으로 흘러나왔을까. 고물장수가 리어카에 싣고 가던 것을 인촌 김성수가 인사동 거리에서 우연히 보고는 ‘양옥집 한 채 값을 주고’ 사들인 덕에 세상에 남아 각광받게 된 것이다. 이밖에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물건들이 광복과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지던 혼란한 시기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갔다. 더러는 누군가가 빼돌렸을 테고, 더러는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이들이 내버렸을 터이다. 경성제국대학을 접수하여 한국인의 대학으로 재건하기를 꿈꾸던 한국인 과학기술자들은 공덕리(현재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이공학부 건물을 미군이 사용하게 되면서 유리기구나 실험장비들을 거추장스럽다며 내다 버리는 모습을 보고 절망감을 느꼈다. 일일이 기록에 남지는 않았지만 이런 좋지 않은 일에도 리어카는 항상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근대 산업사회의 손수레, 리어카 서울대학교 초창기에 교수로 일했던 수학자 이임학(1922∼2005)은 1947년 남대문시장 한편의 쓰레기더미에서 <미국수학회보>를 발견하였다. 그는 리어카에 실려 폐지로 팔려갈 수도 있었던 학술지들을 들여다보다가 세계적 수학자 막스 초른(Max August Zorn)이 알 수 없다고 남겨둔 문제에 주목하였다. 그는 이 문제를 풀어 학회 편집인에게 편지로 보냈고, 그 결과는 2년 뒤 미국수학회보에 정식으로 실려 한국에도 뛰어난 수학자가 있음을 세계 수학계에 알리는 효시 노릇을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임학이라는 이름이 낯선 것은 그가 캐나다 유학 중 정부의 귀국 강요를 거부하고 결국 캐나다로 망명하였기 때문이다). 짐을 수레에 싣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인간이 바퀴를 발명한 이래로 늘상 해오던 일 아닌가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레 중에서도 리어카는 엄연히 근대의 발명품이다. 심지어 일상에서 당연히 여기는 물건치고는 유별나게도 발명한 때와 발명자의 이름이 정확히 기록으로 남아있다. 리어카라는 단어는 ‘뒤(rear)에서 미는 수레(car)’라는 뜻이라지만 영어 낱말치고는 어딘가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런 느낌을 주는 낱말들이 대부분 그렇듯 리어카도 일본에서 태어났다. 일본 시즈오카현의 모치즈키 도라이치(望月虎一)라는 이가 1921년 무렵 철근과 고무타이어 같은 소재를 이용하여 나무 손수레를 개량하였고, 당시 일본에 막 수입되기 시작했던 사이드카(sidecar)에서 유추하여 리어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리어카는 비교적 흔한 자재를 이용하여 싸게 만들 수 있었고 그러면서도 볼베어링 같은 부속을 이용한 덕에 많은 짐을 효과적으로 실어 나를 수 있었다.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급속하게 넘어가던 동아시아의 대도시들에서 리어카는 서민들의 짐을 날라 주며 물자의 유통에 큰 몫을 떠맡았다. 연탄이, 이삿짐이, 김장용 배추가, 쓰레기와 고물이, 적혈구 백혈구가 모세혈관을 타고 몸속 구석구석까지 돌 듯 리어카를 타고 자동차도 다니기 어려운 골목 사이사이를 드나들었다. 한편 리어카는 동력이 없이도 무거운 짐을 안정적으로 싣고 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잘 궁리하면 ‘바퀴 달린 주방’을 만들 수 있었다. 군고구마니 풀빵이니 냉차니 하는 군것질거리를 파는 행상들이 리어카를 개조하여 취사설비를 싣고 길가를 누볐고, 이들은 주기적으로 불량식품 퇴치를 내세운 단속 공무원과 실랑이를 벌이곤 했다. 리어카에 새겨진 노동의 흔적 한반도의 신문에도 1930년대부터 ‘리야카’ ‘리아카’ 등의 이름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초창기에는 그래도 꽤 값이 나가는 물건이라 도난사건에 대한 기사 같은 것이 많았지만 차차 우리 일상의 배경을 채우는 당연한 물건으로 녹아 들어갔다. 경제가 성장하고 서울 등 대도시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1960년대 이후 리어카가 신문에 나오는 횟수도 급격히 늘어난다. 새마을운동이 한창 기세를 올리던 1972년에는 김현옥 내무부 장관이 기자간담회에서 “지게부대를 리어카부대로” 바꾼 것이 새마을운동의 성과이며, 나아가 “리어카부대를 삼륜차부대로” 바꾸는 것이 새마을운동의 장래 목표라고 말하기도 했다. 요즘에는 골목길에서 리어카를 마주치는 일이 많이 줄었다. 좀 넓은 길은 자동차, 좁은 길은 전동카트 등이 나눠 맡으면서 가파른 골목길을 사람의 근력에만 의지해 올라가는 일은 줄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대도시의 재개발이 활발해지면서 가파른 골목길 자체가 많이 줄어들기도 했다. 예전의 가파른 동네 골목길들은 상당수 단지 안의 길이 되어서 이제 주위를 다니는 사람들의 눈에는 잘 띄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노동의 중요한 도구로서 리어카는 우리 곁에 있다. 우리가 낮에 도심에서 보지 못한다 해도 밤에, 새벽에, 변두리의 길가에서, 여전히 리어카를 밀고 끌며 다른 이들에게 꼭 필요한 노동을 공급하는 이들이 있다. 리어카는 손수레의 연장선 위에서 태어난 기술이지만, 산업사회의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진 덕에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리어카의 부속들은 비싸고 귀한 것들은 아니다. 산업 현장에서 남는 쇠파이프와 철근, 남는 타이어와 나일론 밧줄 같은 것들을 조합하면 리어카를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물건들이 부산물로 싸게 나올 수 있는 사회란 이미 산업화를 경험한 사회일 수밖에 없다. 농경사회에서 ‘남는’ 철근과 고무타이어를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리어카는 이른바 ‘인류세(anthropocene)’의 고유한 유물 중 하나로 남을 수도 있다. 나무 손수레가 썩어 자연으로 돌아간 뒤에도 오랫동안 산업사회에서 태어난 강철과 합성수지는 지구상에 남아 거기 아로새겨진 인간의 노동을 증언할 것이다.
구석구석 과학사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