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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후보 직격 인터뷰]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대선 후보 직격 인터뷰]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2012. 11. 06 17:37 화제
ㆍ사람과 사회를 생각하는 따뜻한 원칙주의자 유신정권에 맞선 대학생으로,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선 인권변호사로, 참여정부 시절 참모로, 원칙과 사명에 따른 삶을 살아온 문재인 대선 후보는 이제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리더로서 새로운 운명에 맞서고 있는 중이다. 대선 D-60, 문재인 후보를 만났다. 부인이자 가장 든든한 조력자 김정숙 여사와 함께 인터뷰에서 한꺼풀 벗은 문 후보를 만날 수 있었다. 브라운 컬러로 재킷과 스커트를 맞춰 입은 부부가 인터뷰 장소에 들어섰다. 문재인 대선 후보는 지난 6월 대선 출마 선언을 시작으로 두 달간의 민주통합당 경선을 치렀고, 민심과 여론을 듣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숨 가쁜 대선 레이스를 달려오는 동안 줄곧 함께였지만, 두 사람이 정식으로 언론 에 모습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였을까, 고된 일정을 마치고 저녁 늦게 시작된 인터뷰에도 문 후보는 한결 편안한 모습이었고 인터뷰 역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무엇보다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모습, 그리고 확고한 정치 철학을 들어볼 수 있었던 것이 큰 수확이었다. 운명을 받아들이다 “40대 이후 최고의 일탈은 정치를 시작한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문재인 후보는 정치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참여정부 퇴임 이후에는 경남 양산에 스스로를 ‘귀향 보내듯’ 가 보금자리를 틀었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소박한 농부의 삶을 꿈꿨다. 그런 그를 다시 국민 앞에 서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그는 자신의 책 「운명」에서 ‘더 이상 절망의 시기가 반복되지 않기를 소망한다’라고 썼다. Q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가 되신 지 한 달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바쁜 행보를 이어가고 계신데, 지난 한 달 동안을 지내온 소감은 어떠신지, 그리고 그간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일은 무엇인지요? A ‘선거는 체력전’이라는 말을 절감하고 있어요. 그동안 건강관리를 꾸준히 해온 편이었는데, 워낙 강행군이다 보니 체력이 달립니다. 몸이 아프면 국민들에게 염려를 끼치는 것이라는 아내의 이야기도 듣고 있고요. 대선 후보가 된 뒤 경기도 평택에 있는 쌍용차 치유 공간인 ‘와락센터’를 찾았는데, 그곳에서 만난 한 해고자의 부인이 생각납니다. 제 이야기를 마치고 마이크를 넘겨드렸는데 말씀도 꺼내시기 전에 복받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더군요. 말하지 않아도 그 절박함이 느껴져서 저를 비롯한 그곳에 계신 분들이 모두 따라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갑작스러운 실직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와 가족들이 무려 스물세 명이나 됩니다. 해고가 곧 ‘죽임’이라는 사실에 몸이 떨렸습니다. 그들에게 국가가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몸이 떨렸고요. 대통령이 되면 국민들의 아픔을 함께 나눠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한 자리였습니다. 그분들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Q 문재인 후보님 못지않게 김정숙 여사님도 바쁜 시간을 보내고 계실 듯합니다. 정치인 아내 입문 소감은 어떤지, 요즘 하루 일정은 어떻게 되시나요? A 우선 아침 7시에 일어나 텃밭에 심은 채소에 물을 주고 아침 식사를 준비합니다. 요즘 남편 체력이 많이 떨어져서 식사는 주로 단백질 위주로 챙기고 있어요. 그러고 나서 남편이 입고 나갈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고르죠. 요즘에는 저도 공식 일정이 많아졌어요. 관심 분야부터 잘 모르는 분야까지 하루에 네다섯 가지 일정을 소화하고 나면 금세 저녁이 되더라고요. 사실 이제까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라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에요. 하지만 남편의 선택을 존중하고 저의 노력이 남편에게도 힘이 된다면 괜찮습니다. 현장에서 소중한 이야기를 들을 때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Q 최근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보시고 많은 눈물을 흘리셔서 화제가 됐습니다. 원래 눈물이 많으신 편인가요? A 요즘 눈물이 많아졌어요(웃음). 원래 영화나 휴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면 눈시울이 자주 붉어지는 편인데, 이번처럼 사람들 앞에서 대책 없이 울어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개혁이라는 것은 현실에서 이미 이익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의 반대에 늘 부딪히게 마련입니다. 그 벽을 깨는 것이 참 힘든데 그런 부분을 영화에서 보여주었더군요. 무엇보다 곳곳에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이 많았어요. 중용외교 때문에 관료들에게 공격받는 장면이라든지, 중전의 폐위를 주장하는 신하들에게 “조강지처를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말하는 장면이라든지요.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감정 수습이 안 돼서 혼났어요. 밖에는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울면서 나갈 수도 없고, 수습하는 시간이 길어지다 결국 들켰지요(웃음). Q 이번 대선이 ‘문재인의 운명’, ‘박근혜의 꿈’, ‘안철수의 생각’ 간 대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통령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기까지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은 무엇인가요? A 사실 그동안 정치가 제 운명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도 사회 변화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었죠. 그러다 현 정부 5년 동안 너무나 많은 국민들이 상처 입고 도탄에 빠지는 것을 보며 차츰 저의 사명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두 분의 서거입니다. 특히 노 전 대통령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참 힘들었습니다. 단지 슬픔 때문에 힘든 것만은 아니었어요. 검찰의 표적수사와 정치적 탄압이 있었고 민주주의의 파탄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정권을 재창출하지 못하고 넘겨주며 발생한 일에 대한 책임감과, 그로 인해 힘들어하는 국민께 송구스러운 마음이 컸습니다. 다시 바로잡아야겠다는 사명감도 점점 강하게 자리를 잡았고 결국 제가 감당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저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Q 참여정부 시절부터 참모 역할을 해오셨는데 유권자들 입장에서는 지도자로서 카리스마가 부족한 것이 아니냐는 인식이 있습니다. A 저는 카리스마가 장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카리스마가 지도자의 덕목이라 말하는 것은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일종의 영웅주의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요즘은 오히려 보다 많은 사람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부드럽고 겸손한 수평적인 리더십이 지도자에게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Q 이번 대선 후보들을 보면 부드럽고 친근한 이미지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안철수 후보도 소통을 강조하고 있고요. 그 안에서 자신의 차별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대중과 소통할 때 가장 크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A 대중 정치인으로서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모두 부드럽게 보이려고 노력하지요. 그 안에 얼마나 진정성이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들을 듣고, 존중하고, 공감할 줄 아는 마음이 체화돼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체질적으로 민주적인 사고나 경험이 체화돼 있는 것과 머리로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소통해야 한다고 말로만 해서 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출마 선언을 할 때부터 SNS 등을 통해 국민들의 공론을 모아왔습니다. 대통령 되고 나서 대통령의 행정명령으로 가장 먼저 시행할 정책들도 ‘국민명령 1호’라는 이름으로 모집하고 있고요. 현재 3천5백여 건 정도 들어와 있는 상태입니다. 앞으로도 그런 노력을 계속하려고 합니다. 원칙주의자 남편과 감수성 풍부한 부인 40년을 함께한 연인이자 동지 신혼 초 아침밥을 먹으며 바둑을 두는 남편을 보고 아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수준에서 가장 좋은 바둑판을 선물했고, 남편은 음악을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스테레오 오디오를 마련했다. 40여 년의 시간, 순탄치 않았던 삶을 함께한 부부의 눈빛에서 서로를 향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읽을 수 있었다. Q 집 냉장고에 이것만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식품이 있는지, 그리고 항상 채워져 있는 식품은 무엇인지요? A 남편이 생선과 해산물을 좋아해요. 생으로 먹는 채소나 껍질째 먹는 과일도 좋아하고요. 그래서 저희 집 냉장고에는 해산물과 과일이 항상 들어 있어요. 요즘은 바빠서 아침 대용으로 간단히 먹을 만한 것들이 있죠. 찰떡과 달걀, 채소, 과일이 냉장고를 채우고 있습니다. Q 아내로서 남들은 잘 모르는 남편의 세 가지 매력과 단점을 꼽는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김정숙 첫 번째는 굉장히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 두 번째는 제가 남편을 좋아하는 이유 중 매우 중요한 것인데,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주고 사랑해준다는 것, 세 번째는 살아온 삶의 진정성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너무 원칙을 지킨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에요. 조금은 쉬웠으면, 조금만 여유로웠으면 할 때가 있어요. 문재인 원래 이런 이야기는 양쪽 다 들어봐야 해요(웃음). 저도 얼렁뚱땅 넘어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더 원칙을 지키려고 마음을 다잡는 거예요. Q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문 후보는 어떤 사람인가요? A 남편은 굉장히 자상하고 가정적인 사람이에요. 가족과 밥 먹는 시간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아이들과 함께 시간 보내는 걸 최고의 휴가로 생각하는 사람이죠.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이지만 또 ‘딸 바보’예요. 시험공부로 밤을 새야 하는 딸이 무섭다고 하니까 옆에서 졸면서도 같이 있어주는 아빠입니다. Q 문 후보의 유세 현장에서 김정숙 여사가 남편을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진이 네티즌들 사이에서 화제였습니다. 부인이 남편을 그토록 진심 어린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참 부럽다는 반응이었는데요. 현장에서 남편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김정숙 여러 복잡한 심정이 묻어 있는 눈길이에요. 그날이 무척 추웠거든요. 남편이 원래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참 힘들어하는데, 새벽부터 밤까지 최선을 다해 해내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 응원하고 싶었어요. 남편이 감당하고 있는 현시대의 아픔에 대해 저 역시 공감하고 있다는, 그런 사인의 눈빛이기도 했고요. 내면 깊이 남편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 눈빛이 나오지 않았나 싶어요. 문재인 저희 부부가 다른 부부들보다 특별하게 사랑한다거나 또 제가 특출나게 잘하는 남편도 아닙니다. 그래도 평범하지만 행복하게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하고요. Q 혹시 두 분이 살아오시면서 이혼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나요? 김정숙 저희는 당시 시대적 상황 때문에 결혼을 하기까지도 굉장히 힘들었어요. 보고 있으면서도 또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 헤어지게 될까 불안하고 그렇게 그리운 상황의 연속이었어요. 그렇게 애태우던 상황에서 결혼을 하고 나니 정말 이 세상을 다 얻은 것같이 즐거울 수밖에요. 결혼을 한 뒤에도 남편이 사회와 함께하는 삶을 살며 결코 순탄한 결혼생활은 아니었지만, 그런 경우 둘 중 하나예요. 아내로서 적극적으로 지원하거나 아니면 아예 등을 돌리거나. 저는 적극적인 지원을 택했고 지금 여기까지 왔네요. 문재인 저도 이혼 생각 안 해봤습니다. 딴 데 갈 데가 없으니까요(웃음). Q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와 감수성이 풍부한 부인, 언뜻 보기에 굉장히 다른 두 분이신데, 서로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김정숙 남편이 아주 논리적인 법학도임에도 문화와 예술을 이해하는 감수성을 기르는 데 제가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봐요(웃음). 남편 마음속에 숨겨져 있던 예술에 대한 감성이 저를 만나면서 더욱 풍부해지지 않았나 싶고요. 저는 감수성이 너무 강해서 절제력이 부족한 편이었는데 남편을 통해 절제력을 얻었어요. 삶이란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라는 걸 배웠죠. 문재인 동감입니다(웃음). Q 두 분께 가장 소중한 물건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문재인 가장 소중한 물건이라기보다 가장 오래된 물건이 있는데요. 바둑판입니다. 결혼했을 무렵부터 가지고 있던 물건이에요. 그러고 보니 제가 나름 바둑 고수인데 청와대 들어간 이후부터는 바빠서 한 판도 못 뒀습니다. 김정숙 결혼을 하고 나서 보니 남편이 바둑을 무척 좋아하는 거예요. 아침 밥상에서도 꼭 바둑 복기를 하더라고요. ‘아, 이 사람 취미는 바둑이구나’ 해서 당시 제가 알고 있던 수준에서 최고로 좋은 바둑판을 선물했어요. 그리고 음악을 좋아하는 저는 스테레오 오디오를 받았죠. 바둑판은 아직 그때 것인데 오디오는 좀 더 좋은 것으로 두 번 정도 바꿨어요(웃음). 원칙과 소통으로 공감정책 이끌어낼 것 뛰어난 인권 감수성으로 서민들의 아픔을 함께해온 문재인 후보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경험을 통해 체화된 것은 다르다고 강조했다. 가장 시급한 국정 과제로 일자리 창출을 꼽으며 목소리를 높이다가도 반려동물 이야기에 금세 누그러지는,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의 부드러운 면도 엿볼 수 있었다. Q 정책을 살펴보면 교육 비중이 높습니다. 문 후보님께서는 어떤 교육관을 가지고 자녀를 가르쳤는지 궁금합니다. A 저는 되도록 간섭하지 않고 자유롭게 맡겨두는 편입니다. 제 변호사 생활이 참 힘들었어요. 고통스럽기도 했고요. 그래서 그런지 보통은 아버지들이 아들에게 자기가 하는 일들을 물려주고 싶어 하는데 저는 아이들이 인문 계통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공부를 하기를 바랐어요. 세상의 정치에 너무 고통받지 않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바람이 있었는데 비교적 잘 자라주었다고 생각합니다. Q 잇따른 성범죄 사건도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데요. 관련 대책은 어떻게 세우고 계신지요? A 성폭력 범죄는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 자신의 인격과 존엄성을 스스로 버리는 인면수심의 행위입니다. 무엇보다 단호히 처벌할 생각입니다. 친고죄 폐지로 처벌률을 높이고, 양형 기준을 강화할 것입니다. 특히 아동청소년 성범죄의 경우 양형 기준에 ‘집행유예 금지’를 포함시킬 예정입니다. 맞벌이 부모의 경우 아이들이 혼자 방치되는 것을 많이들 걱정하시는데, 방과후교실과 지역 아동센터 등을 연계하는 ‘아동 지킴이 네트워크’를 구축해서 아이들이 홀로 방치되는 일이 없도록 할 계획입니다. Q 김정숙 여사가 보시기에 아내로서 박근혜 후보, 안철수 후보보다 ‘남편 문재인’이 더 유리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서민의 아픔을 아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남편은 사법고시에 합격하기까지 지독하게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시댁이 달걀 행상, 연탄 배달을 할 정도로 힘들게 사셨고, 출세가 보장된 로펌을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인권변호사가 됐습니다. 남편은 살아온 삶의 대부분을 우리 사회의 소외받고 가난한 분들과 함께 보냈어요. 서민의 아픔과 눈물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함께해본 것은 큰 차이가 있지 않을까요? 서민을 잘 아는 남편이 서민을 위한 정치를 보다 잘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Q 선거 끝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김정숙 저는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한 열흘만 푹 쉬고 싶어요. 문재인 저는 쉴 수 있는 형편이 안 될 것 같은데요. 당선되면 북한 쪽에 특사를 보내서 취임식에 초청하는 일을 제일 먼저 할 것 같아요. 최근 남북관계가 좋지 않다 보니 마음이 급합니다. 당선이 안 되면 양산으로 가야죠. 저를 기다리는 식구들에게로(웃음). Q 요즘같이 여론을 많이 들으실 때도 없을 듯합니다. 국민들의 가장 시급한 요구가 어떤 것이라고 느끼십니까? A 가장 시급한 건 일자리 창출이라고 봅니다. 총선 때도 그렇고 지역을 다니며 한 분 한 분 만나다 보면 제발 일자리 좀 만들어달라고 간곡하게 말씀하십니다. 얼마 전 노량진 고시촌을 찾았는데 시간과 돈에 쪼들리는 고시생들이 길거리에 서서 ‘컵밥’이라는 것을 먹고 있더군요. 저도 함께 먹었는데, 얼마나 사는 게 각박하면 이렇게 끼니를 때울까 싶었습니다. 젊은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겪는 일이 실업입니다. 마음껏 꿈을 펼쳐도 부족할 나이에 날개가 꺾인다는 것이 기성세대로서 가슴 아픕니다. 그래서 좀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서 젊은이들이 꿈과 능력을 펼칠 기회를 주는 것, 이것이 현재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Q 힐링이 대세입니다. 문 후보님께서는 어떻게 힐링하십니까? A 제가 자연을 좋아합니다. 산도 좋아하고 여행도 좋아하고 야생화, 나무, 개와 고양이도 좋아합니다. 개와 고양이들도 저를 좋아하고요(웃음). 자연과 동물에서 힐링을 찾는 편인데 요즘은 전혀 못하고 있죠. Q 양산에서 반려동물들을 키우셨던 것으로 압니다. 요즘은 어떻게 돌보고 계시나요? 문재인 양산에서 개 세 마리와 고양이 두 마리를 길렀어요. 개들은 마루와 바우, 깜이고, 고양이는 찡찡이와 뭉치예요. 원래 제가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에 풍산개를 길렀는데 다녀와서 보니 새끼를 낳았더라고요. 이웃에서 진돗개를 한 마리 주셔서 세 마리가 됐고, 고양이는 딸이 기르던 고양이와 버려진 고양이를 한 마리 더 데려와 두 마리가 됐어요. 지금 서울에는 개 한 마리와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와 기르고 있고 나머지는 이웃들에게 맡겨놓은 상태입니다. 김정숙 남편이 고양이와 개를 얼마나 좋아하냐면요. 술을 마시고 오면 양복을 벗지도 않고 마당에 주저앉아 개를 안고 노래를 불러요. 무슨 노래인지도 모르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한참을 쓰다듬고 있어요. Q 요즘 사람들을 보면 분노하고 피로합니다. 어디서부터 누그러뜨릴 수 있을까요? A 국민들께서는 결국 ‘불공평하다’라는 것에서 분노를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같이 어려울 때는 잘 견딜 수 있어요. IMF 때도 함께 힘을 모아 견뎠죠. 그런데 지금은 사회적으로 부가 부족한 상황이 아니거든요.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지만 힘든 사람들이 무척 많습니다. 결국 공평하지 않다는 것이죠. 대기업과 재벌은 너무 많은 돈을 벌고 있고 중소기업과 재래시장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중산층은 무너졌고요. 이런 것들에서 오는 박탈감과 상실감이 결국 분노와 피로로 이어진 것이라고 봅니다. 공평과 정의. 그로 인해 국민이 행복해지는 것이 정권 교체를 통해 우리 사회가 반드시 되찾아야 할 국정 과제이자 저의 정치철학입니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이주석>
야권 대선 후보로 급부상하고 있는 문재인의 운명 그리고 진심
2011. 08. 31 18:21 화제
공식석상에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의 문재인 이사장이 지난 7월 말 정동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에세이집 「운명」 출간 기념 북 콘서트를 통해 대중과 만나는 자리를 가졌다. 그는 이날 “해야 할 일이 있다. 어떤 위치에서든 노력할 것이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야권의 차기 대선 후보로 떠오르고 있는 그의 이 말 한마디는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문재인, 그가 누구인지 만나보자. 노무현이 아닌 문재인으로 나선 첫 행사 지난 7월 29일 오후 7시 30분께. 서울 정동의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의 로비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문재인 이사장이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과 참여정부 시절의 이야기, 처음으로 공개하는 자신의 인생사를 엮은 에세이집 「운명」의 출간과 관련해 열린 북 콘서트 ‘우리들의 운명’에 참석하기 위한 사람들로 성황을 이루었던 것. 로비 한편에 자리를 잡고 노무현재단의 후원 회원을 모집하는 봉사자들과 “노무현 정신을 살립시다!”라고 외치고 있는 배우 문성근도 눈에 띄었다. 북 콘서트가 열리기 전 취재진에 둘러싸여 반가운 인사를 나누던 한명숙 전 국무총리도 이날 초대받은 손님 중 한 명이었다. 북 콘서트의 진행은 성공회대 겸임교수이자 이번 행사의 기획자 탁현민 교수가 맡았다. 인디 밴드 ‘일단은 정석이네’의 축하 공연이 끝나고, 드디어 문 이사장이 등장했다. 1층과 2층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이 일제히 환호를 보냈다. 뜨거운 반응이 나오리라 예상치 못한 듯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번졌다. 패널로는 오마이뉴스의 오연호 대표와 「운명」의 집필을 도운 양정철씨가 참석했다. “이렇게 많은 분이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2주기를 추모하는 의미로 많은 사람이 제게 책을 쓰라고 권유했습니다. 노 대통령과 오랜 세월을 같이했고, 노무현재단의 이사장을 맡고 있으니 제가 가장 먼저 그 작업을 해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책을 쓴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이제 한 정권이 끝나가고, 국민은 희망을 갈구하고 있지요. 우리는 더 이상 절망의 시기가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가 역사에 남긴 것들을 정직하게 증언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문 이사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에세이집 「운명」의 집필 동기를 이야기했다. 천천히 또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운명」은 노 대통령과의 인연, 참여정부 시절의 증언 이외에도 문재인 이사장의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 결혼 등 개인사에 대한 부분이 따로 구성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 패널들의 질문을 받던 문 이사장은 “개인적인 이야기는 끝까지 넣지 않으려고 했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양정철씨가 “이 책에는 문재인 이사장에 대한 부분도 필요했다. 노 대통령이 남긴 꿈과 목표를 가장 잘 아는 사람, 실현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 우리도 알 필요가 있다”라며 한마디 거들었다. 양씨의 말을 듣던 문 이사장은 난처한 웃음만 지었다. 문재인 대통령? 확실한 입장은 다음으로 “저는 지금까지 반장에 뽑힌 적도 없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그 흔한 줄반장 한 번 못해봤어요. 노 대통령이 취임을 앞두고 저희 부부를 서울로 초대해 청와대로 와달라고 부탁하셨을 때도 저는 정치는 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어느 당에도 입당한 적이 없어요.” 문 이사장 옆에 앉은 오연호 대표와 양정철씨는 “그는 권력 의지가 없어 문제다”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문 이사장의 성향이 노 대통령의 뜻을 가장 잘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며 객석의 호응을 유도했다. 북 콘서트를 보러 온 많은 관객은 약속이라도 한 듯 ‘문재인 대통령’을 외쳤다. 공연장의 분위기는 달아올랐고, “대선에 출마해달라”라는 외침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문 이사장은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웃기만 했다. 몇 분 후 문 이사장이 입을 열었다. 1 경희대 법대 3학년 때 음대 1학년이던 지금의 부인을 처음 만났다. 왼쪽부터 문재인 이사장과 그의 부인. 2 문 이사장은 7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부인은 군 복무 중인 그를 찾아올 때 안개꽃 한 다발을 사오곤 했다. 3 특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 특전여단 제3대대에 배치된 그는 폭파 과정 최우수 표창을 받기도 했다. 4 노 대통령은 자신을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고 소개할 정도로 그를 신뢰했고, 가깝게 지냈다. 5 청와대 생활을 정리하자마자 그는 네팔의 히말라야로 갔다. 조용하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차기 대선을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여권과 야권의 단일 구도입니다. 그것만 성사된다면 우리는 변화를 시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 대통령이 강조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될 테니까요. 오세훈 시장은 굉장히 빼어난 인재입니다. 또 손학규 대표도 정치 내공이 상당한 분이고요. 어느 편이 되던 야권의 단일화를 위해 힘쓸 것입니다. 하지만 대선 출마에 대한 확실한 입장은 다음으로 미뤄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문 이사장은 “오랜 지인들은 저에게 ‘절대 정치에는 나서지 말라’라고 조언했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자신이 어떤 성품이고,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분들의 의견이 맞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는 앞서 말한 것처럼 노 대통령이 추구한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발 벗고 나설 준비를 마쳤다는 의중은 감추지 않았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정말 걷잡을 수가 없는 지경입니다. 비정규직은 늘어만 가고, 세금도 늘어만 갑니다. 절박한 이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한 노력할 작정입니다. 제가 보태는 힘이 헛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 이사장이 차기 대선까지 바라는 것은 오직 야권의 단일 구도라고 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직접 대선 후보로 출마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계속 답을 미뤘다. 또 그는 우리 역사에서 단 한 번이라도 야권이 제대로 통합된 자세를 보여주었다면 지금 우리 사회가 겪는 고통은 크게 줄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국(서울대) 교수나 안철수(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허락한다면 그분들의 능력으로 함께 이루고 싶습니다. 두 분 모두 부산 출신이신데, 제 뜻을 받아줄지는 모르겠습니다(웃음).” 북 콘서트의 2부는 탁현민 교수가 문 이사장에게 시민들이 보내온 질문을 하나씩 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오빠라고 불러도 되느냐?”라는 한 시민의 질문에 문 이사장은 고개가 젖혀질 정도로 크게 웃었다. 그리고 노 대통령과 강원도 수해 지역을 다니던 때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번은 노 대통령과 강원도 수해 지역에 방문했습니다. 그때 피해 규모가 심각해서 전국 각지에서 강원도로 자원봉사를 온 분들이 많았어요. 저희가 노 대통령을 모시고 현장을 방문하자, 어떤 자원봉사자께서 ‘대통령님, 오빠라고 불러도 되나요?’라고 하셨어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는 ‘노무현 오빠 오빠’ 하면서 저희를 반겨주셨지요. 저라면 글쎄요…. 우연히 저를 만나신다면 오빠라고 부르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웃음).” 문 이사장은 공연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다소 긴장이 풀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대선 출마에 대한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정권 교체만이 이 나라의 살 길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또 노 대통령이 이루지 못한 세상을 만드는 데 힘쓰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이후 지방 투어로 이어지는 북 콘서트 행사를 두고 문재인 이사장의 공식적인 대선 행보가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어머니의 연탄 배달, 허드렛일 도운 어린 시절 그럼 문재인 이사장은 누구인가. 그는 자신이 노무현 대통령과 닮은 점이 많다고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어린 시절의 가난이다. 그의 부모는 함경남도 흥남의 문씨 집성촌인 ‘솔안마을’ 출신이다. 그의 부친은 당시 명문이던 함흥농고 출신으로, 북한 치하에서 흥남시청 농업계장을 지냈다. 그러던 중 1950년 12월 국군과 미군이 두만강까지 올라갔다가 예상치 못한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한 상황에서 흥남 마을 사람들을 미군 선박에 태워 거제도로 피난시킨 ‘흥남 철수’ 때 고향을 떠났다. 길어야 2, 3주일만 피해 있으면 된다는 예상과 달리 문 이사장의 부모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거제도에서 터전을 다시 일궈야 했다. 문 이사장은 「운명」에서 “아버지는 포로수용소에서 노무 일을 했다. 어머니는 거제에서 달걀을 싸게 사서 머리에 이고, 나를 업은 채 부산에 건너가 파는 행상을 했다. 그걸로 조금씩 저축을 했고, 돈이 약간 모이자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조금 전에 부산 영도로 이사했다”라고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또 그는 어머니가 연탄 배달을 하거나 허드렛일을 할 때도 자주 도왔다고 했다. 한번은 연탄을 실은 수레가 미끄러져 가볍게 다친 적도 있다고 했다.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자식들의 교육에 가장 신경 쓴 그의 부모님 덕분에 초등학교를 무사히 마친 그는 당대 명문인 경남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처음 등교해보니 입학 전에 학원에서 영어를 배워온 아이들이 많았다. 나는 처음부터 기가 죽었다. 노는 문화가 전혀 달랐고, 용돈 씀씀이도 큰 차이가 나서 함께 어울리기가 어려웠다. 어쩌다 친구들 집에 따라가보면 나로서는 처음 보는 호사스러운 집에, 정원에, 가구가 놀랍기만 했다. 그에 더해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도련님으로 떠받들어지는 모습에 더 주눅이 들곤 했다”라고 당시를 설명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는 특별히 공부에 매진하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으며 보냈다.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보내며 읽고 싶은 책을 실컷 읽었다. 또 그는 고3 때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다 정학을 맞은 경험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역사학을 전공하고 싶었던 그는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법과나 상과를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는 첫 입시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입시 공부를 등한시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대학 입시에 실패했다. 재수 끝에 당시 후기였던 경희대 법대에 입학했다”라고 고백했다. 그는 학교 부근에서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 이렇게 그의 서울 생활이 열렸다. 부인과의 연애는 면회의 역사 문 이사장은 경희대 법대 3학년 무렵 지금의 부인을 만났다. 당시 5월 초 ‘법의 날’에 맞춰 열리던 ‘법 축전’이란 이름의 법대 축제에서 파트너로 처음 만나 즐겁게 보냈다고 한다. 그는 “호감이 갔다. 그러나 이후 만남을 이어가진 않았다. 내가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교내에서 한 번씩 만나면 눈인사를 나누는 정도였다”라며 부인과의 추억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던 중 1975년 4월 비상학생총회에 참가한 문 이사장은 페퍼포그(최루탄)에 맞아 실신을 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누군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는 것을 느꼈는데, 그 주인공이 지금의 부인이다. 그후 문 이사장은 구치소에 수감되었는데, 어느 날 부인이 면회를 와서 작은 신문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경남고가 전국 야구대회에서 우승했다는 톱기사가 실려 있었다. 문 이사장은 야구를 매우 좋아했다. ‘법 축전’ 때 학년 대항 야구 시합에서 학년 주장을 맡아 우승한 적도 있을 정도다. 부인이 그런 일을 기억하고 있다가 그가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해 신문을 가져다준 것이다. 그는 “세상에 아무리 야구를 좋아한들 구치소에 수감된 처지에 야구 소식에 무슨 관심이 있을까? 그래도 그런 생각을 한 아내가 귀여웠다. 감방에서 그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나곤 했다”라며 당시의 풋풋했던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심지어 그가 공수부대에 입대했을 때 부인은 흔히 군 장병의 면회 때 챙겨가던 통닭이나 빵 대신 안개꽃 한 다발을 가져왔다고 했다. 애인이 면회를 왔다는 소식을 들은 동기들이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려고 우르르 문 이사장에게 몰려와서 난처했다고도 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동기들에게 안개꽃을 조금씩 나눠준 일도 소개했다. 부부는 7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경희대 음대 졸업 후 서울시립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하던 부인과 함께 문 이사장은 부산으로 내려갔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했지만, 판사 임용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검사는 그의 체질에 맞지 않고, 변호사가 되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그는 부산행을 결정했다. 그의 운명은 어떻게? 부산에서 문 이사장은 사법연수원 동기인 박정규씨의 주선으로 노무현 변호사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는 “무엇보다 느낌이 달랐다. 내가 만난 법조인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아주 소탈했고, 솔직했고, 친근했다”라고 노 대통령과의 첫 만남을 표현했다. 그들은 서로가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고, 부산 부민동에 ‘변호사 노무현·문재인 합동 법률 사무소’를 냈다. 이 일이 그들을 평생의 운명으로 엮어놓은 계기가 된 것이다. 노 대통령은 2002년 부산 선대본부 출범식에서 “사람은 친구를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고,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입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당시 선대본부장을 맡았던 문 이사장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항상 존대를 했다. 그러다 편한 높임말을 쓰게 된 계기는 문 이사장이 청와대에 들어간 이후다. 그도 웬만하면 ‘형님’이라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있는 성격이지만, 30년 지기인 노 대통령에게만큼은 ‘선배님’을 넘어선 그 어떤 호칭도 쓰지 못했다고 했다. 당시에 노 대통령은 어려운 사람들, 노동자, 소외된 계층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노동·인권 변호사로 방향을 굳힌 뒤였다. 따라서 동업을 하게 된 문 이사장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변호사로서 스스로 깨끗해야 한다. 대의를 위한 실천에 있어서도 한계를 두지 않고 철저해야 한다’라는 노 대통령의 원칙을 배웠다. 일반적이던 법조계의 커미션도 끊고, 가슴 아픈 처지의 사람들을 돕는 데 매달렸다. 또 골프장 건설을 반대하는 환경운동가의 편에 섰던 이유로 그는 지금까지 그 흔한 골프 한번 배워보지 못했다. 국회의원을 거쳐 대선 후보에서 대통령이 된 노무현을 떠나보낸 뒤 부산에 남은 그는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기로 했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취임식 전 노 대통령은 문 이사장에게 함께 일해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절대 정치는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다시금 못 박은 그는 노 대통령과 함께 참여정부의 시작과 끝을 함께했다. 그리고 사람 사는 세상을 함께 만들자던 노 대통령을 떠나보냈다. 국장의 상주를 맡았던 문 이사장은 ‘나까지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라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노 대통령이 남긴 것들을 지켜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살아남은 자들의 책무, 그가 남기고 간 숙제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충격, 비통, 연민, 추억 같은 감정을 가슴 한구석에 묻어두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그를 ‘시대의 짐’으로부터 놓아주는 길이다”라는 말로 「운명」의 서두를 쓴 문재인 이사장. 아픔과 고통을 겪고 일어선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차근차근 구상했다. 그리고 이제 조심스럽게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표현대로 ‘살맛 나는 세상,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그의 진심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어릴 적 가난의 기억은 살아가면서 그대로 인생의 교훈이 됐다. 더 이상 가난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혼자 잘 살고 싶지도 않았다. 어려운 시기에 우리가 받았던 도움처럼 나도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살고 싶었다. 자라서 학생운동을 하게 된 것도, 인권 변호사가 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굴곡이 많고 평탄치 않은 삶이었다. 돌아보면 신의 섭리 혹은 운명 같은 것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어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한가운데에 노무현 변호사와의 만남이 있었다. 그는 나보다 더 어렵게 자랐고 대학도 갈 수 없었다. 어려운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나보다 훨씬 뜨거웠고, 돕는 것도 훨씬 치열했다. 그를 만나지 않았으면 적당히 안락하게 그리고 적당히 도우면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치열함이 나를 늘 각성시켰다. 그의 서거조차 그러하다. 나를 다시 그의 길로 끌어냈다.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야말로 운명이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 - 문재인의 「운명」 중 <■글 / 정은주(객원기자) ■사진제공 / 이성원, 도서출판 가교 ■참고 서적 /「운명」 (문재인 저, 도서출판 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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