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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총 13 건 검색)

[주간 舌전]“민주노총과 전교조 등이 더 이상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간 舌전]“민주노총과 전교조 등이 더 이상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2018. 11. 12 14:29)
2018. 11. 12 14:29 사회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11월 6일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한 발언이 파장을 불렀다. 임 실장은 이날 노동문제와 관련한 정의당 윤소하 의원의 질의에 “노조라고 해서 과거처럼 약자일 수는 없다는 견해를 밝힌 것”이라며 “민주노총이 상당한 사회적 책임을 나눠야 할 힘 있는 조직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정책이 힘을 얻으려면 노·사·정 대화 모델이 정착돼야 하는데 “여전히 힘에 부친다”며 민주노총 측과의 협의가 원만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청와대사진기자단 민주노총도 반박에 나섰다. 민주노총은 8일 기자회견을 열고 임 실장의 발언이 “노동조합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조차 없는 무지하고 오만한 말”이라며 “어이가 없을 지경”이라고 밝혔다. 최근 정부·여당과 민주노총 사이의 관계가 삐걱대는 현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다. 10월 25일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이 만나 노동현안을 두고 대화했지만 양측의 입장이 엇갈려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거리를 두고 있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이 정부와 여당을 묶어 “노동법 개악, 노동정책 후퇴와 더불어 공약조차 이행하지 않는 자신의 책임과 잘못을 가리기 위한 교묘한 물타기 정치공세”라고 비판하고 예정된 11월 21일 총파업 강행 의지를 밝히면서 양측의 갈등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주간 舌전
[원희복의 인물탐구]민주노총 위원장 김명환… 지략 갖춘 합리적인 노동운동가(2018. 02. 13 10:57)
2018. 02. 13 10:57 사회
그는 지략이 넘쳐 보였다.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며 파업을 지휘해 ‘신출귀몰’하다는 평가가 나온 것도 일리 있다고 생각됐다. 2013년 12월 22일 경찰 7000명이 건물을 겹겹으로 포위하고 그를 잡으러 출동했지만 깜쪽같이 사라졌다. 며칠 후 그는 멀쩡하게 나타나 다시 파업을 지휘했다. 덕분에 민주노총이 입주한 경향신문사 건물은 경찰의 해머로 출입문이 부서지고, 최루액으로 얼룩진 난장판이 됐다. 손님으로 와서 사무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그가 그 사무실의 ‘주인’이 됐다.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53)이다. “1월 31일 수서고속철(SR)이 기타 공공기관으로 지정돼 철도공사로 통합되는 과정을 밟을 것이다.(2월 6일 취임한 신임 코레일 사장도 통합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우리 철도노조가 요구했던 철도 민영화 반대, 수서고속철 분리 반대가 모두 옳았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이는 민주노총이 계속 주장했던 공공부문 민영화 반대로 이뤄진 성과다.” 박근혜 정권은 그를 검거하기 위해 압수수색 영장 없이 체포영장만 달랑 들고 경향신문사 건물에 입주한 민주노총에 난입했다. 그때 그의 도피에 대해 ‘화장실 은신설’, ‘간부실 도피설’ ‘기자 위장설’ 등 다양한 설이 쏟아졌다. 이제 그 진실을 말해달라는 요구에 “(하~하~하) 건물구조가 워낙 복잡해 내가 숨었던 곳이 어딘지 모르겠다”면서 “당시 11명 수배자 중 7명은 건물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왔다”고 말했다. 경찰의 경비가 허술했다는 ‘지능적’인 대답이다. 경찰 7000명 포위망 무력화한 주인공 위원장이 된 그는 요즘 매우 바쁘다. 조직을 개편하고 노동관계 인사들 만나랴, 진보정당 관계자를 만나랴, 무엇보다 청와대에 가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났다. 과거 ‘적대적’이던 정부와 민주노총의 관계가 매우 빠르게 정상화되는 분위기다. -문 대통령을 만나 “편했다”는 우호적인 평가를 했다. “문 대통령은 민주노총 부산본부 전신인 부산·양산본부 자문변호사, 지도위원으로 당시 노동사건을 많이 맡았다. 그래서 노동법 전문가다. 우리가 얘기하는 통상임금의 범위, 휴일연장 중복할증 등 노동 관련 용어를 거침없이 주고 받을 수 있어 편했다는 것이다. 아쉬웠던 것은 민주노총 요청에 예스냐 노냐는 즉답을 않은 것이다.” -노사정위 대표자회의에도 참석했다. 벌써 노사정위 복귀 얘기가 나온다. “아니다. 당시 노사정위원장이 밝혔듯이 노사정위 복귀를 논의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한국노총 위원장이 ‘3월 말까지 의제와 운영방식을 합의하자’고 제안했고 그 자리에서 6자가 모두 공감했다. 4월 임시국회에서 노사정위원회법을 개정해 새로운 명칭·구조·운영방식으로 바꿔야 한다. 노·사·정 6자 대화에 참여하는 것은 맞다.” -새 정부 들어 한상균 전 위원장 가석방이나 전교조 법외노조 취소도 이뤄지지 않았다. 특히 전교조 문제는 별도 입법 없이 정부가 결심만 하면 된다. 얻은 것 없이 너무 빨리 대화 테이블에 들어가는 게 아니냐는 평가도 있다. “박근혜 시대에 가장 큰 거악은 박근혜 정권이었다. 그 거악이 제거된 지금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동지들과 사회양극화를 해소하고 새롭게 변화하는 노동의 발언력을 높이는 것이다. 이는 우리만 주장해서, 우리가 공장을 멈출 힘만 높인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했다. 민주노총 요구가 이뤄진 것이 없는데 참여하는 것이 옳은가를 놓고 바로 전날까지 내부 논의를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6자가 모여 출발할 때 함께 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대화하면서 (한 위원장 석방, 전교조 문제· ILO 준수문제 등도) 함께 풀자고 판단했다.” -김 위원장은 국민파이고, 전 한상균 집행부는 현장파로 계파가 달라 그런가. “(하~하~) 누가 우리 보고 ‘신국민파’라 하더라.” -그건 중앙파 아닌가. “글쎄, 그러고 보니 그것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차이도 있다. 어쨌든 우리는 온건파다.(하~하~하~)” 사람 사는 곳에 왜 다른 견해가 없겠나.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시작이다. 특히 업종도 다른 80만 조합원은 각자 생각과 파벌이 있고, 특히 정치적 입장은 많이 다르다. 민주노총에는 크게 3개, 많게는 10개가 넘는 계파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것을 조정하고 이끄는 것이 위원장의 임무이고 또 정치력일 것이다. 그는 “달라진 시대에는 달라진 투쟁과 교섭이 있어야 한다”면서 “그것을 반영하는 것이 지도부이고, 그것을 잘 운영하는 집행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달라진 시대에 맞는 달라진 투쟁 강조 민주노총의 중요 계파요인 중 하나는 바로 정치세력화에 대한 입장이다. 흔히 노조의 정치참여나 정치파업을 불손하게 보는 사람이 있지만 이는 세계 노동조합과 정당 역사를 모르는 소치다. 민주노총도 강령 2호에 ‘우리는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실현하고, 제 민주세력과 연대를 강화하며, 민족의 자주성과 건강한 민족문화를 확립하고, 민주적 제 권리를 쟁취하며,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실현한다’고 명시돼 있다. 이번 6월 지방선거와 동시에 실시되는 울산 북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권오길 전 민주노총 울산본부장이 민중당 후보로 출마한다. 지방선거에는 많은 민주노총 출신 인사들이 입후보한다. 김 위원장은 “민주노총 정치세력화는 포기할 수 없는 과제”라며 “그러나 하나의 당을 만들어 ‘이거다’ 할 수 있는 단계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정의당, 민중당, 노동당 3개 진보정당과 공동대응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그는 사회변혁당과는 원내 전술 견해가 좀 다르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는 노동 적폐인 양대지침(쉬운 해고, 비정규직 양산)을 폐기했지만, 노동시간 단축을 추진하고 휴일 중복할증(주 40시간 이상 근무한 노동자가 휴일까지 일하면 기본수당 100%와 휴일·연장수당 각 50%를 더해 200%를 지급하는 제도)을 폐지하려 한다. 이는 전반적인 임금의 하향평준화라는 평가도 있다. “근로시간 단축은 3년간 단계적으로 하는데 문제는 휴일 중복할증이다. 요즘 공공기관은 휴일근무 안 하고 자동차공장도 주간 2교대 근무하고 주말은 다 쉰다. 원청이 그러면 1차·2차 하청도 다 그리 한다. 휴일에 이들이 쉴 때 일하는 사람이 바로 마트나 영화관에 근무하는 비정규직 서비스직종이다. 휴일근무와 연장근무가 불가피한 이들은 최저임금 수준의 노동자들이다. 이들에게 휴일 중복할증을 폐기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1월 19일 청와대에서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과 문재인 대통령이 간담회를 갖고 있다. / 청와대 제공 -이는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과도 맞지 않는다. “그렇다. 최저임금 흔들기는 자본가들의 꼼수라 생각한다. 임금이 올라 노동자들이 역사·교양을 쌓는 것을 자본가들이 무서워하는 것 아닌가. 또 임금이 올라 내수시장과 소상공인이 활성화되면 ‘수출만이 살 길’이라고 주장했던 대기업·재벌군 목소리가 축소되기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닌가 의심된다. 경제운영 기조가 중소상인과 서민경제로 바뀌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판단도 든다.” 민주노총이 매달리고 있는 것은 비정규직 문제다. 지난 6차에 걸친 민중총궐기 요인도 최저임금 1만원과 쉬운 해고·비정규직 양산 문제였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끊임없이 ‘귀족노조’라는 질시를 받아 왔다. 물론 이는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유(有)노조·대기업·정규직’과 ‘무(無)노조·중소영세기업·비정규직’ 사이의 교묘한 ‘이간질’로 비롯된 측면이 컸다. 철도청 검수원 출신 노·정 파트너십 기대 김 위원장은 “더 이상 큰 공장도 짓지 않고 새로운 공공기관도 생기지 않아 대공장·공공부문에서 조합원을 늘리기에는 한계가 있다”면서 “앞으로 조합원이 늘어날 곳은 건설노동자·마트 고용자·환경미화원·택배기사 등 특수고용노동자”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이들을 대상으로 조합원을 획기적으로 늘려 ‘200만 조합원 시대’를 만들 것이란다. 이를 위한 미조직 비정규 전략조직화 사업을 위원장인 자신이 직접 맡고, 늘어난 사업비 모두 비정규직·지역사업에 투입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노총 내부 개혁작업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우선 사업장 변화에 따라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취지에서 정책기능을 대폭 확충하고 있다. 정책연구위원에 객원연구원 제도를 도입하고 진보적 학자를 대폭 정책자문단에 보강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핵심쟁점에 즉각 사용 가능하고, 다가올 미래에 대응하는 보고서가 제공될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국민은 지난 촛불혁명 하면 ‘최순실 국정농단’만 떠올린다. 그러나 이는 촛불정신의 절반에 불과하다. 촛불혁명은 친일·독재 미화 역사교과서에서 시작해 박근혜 정권이 자행한 각종 민주주의 퇴행, 여기에 신자유주의 농정·경제정책에 신음하던 농민과 노동자들이 연대해 이뤄낸 산물이다. 거기에는 민주노총의 6차에 걸친 민중총궐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지금 이를 알아주거나 평가해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국민 홍보와 설득이 미흡했기 때문이다. 이에 김 위원장도 공감하면서 “선전활동은 독보적으로 치고 나가기 쉽지 않다”며 “교육선전실도 시대 흐름에 맞게 미디어소통실로 바꾸고 기관지 <노동과 세계>도 기자를 공개모집해 분위기를 쇄신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1965년 경기도 평택 출신이다. 황해도가 고향인 부모님이 먼 남쪽 목포까지 피난 왔다가 다시 고향을 향해 올라오던 중 평택에서 주저앉았다고 한다. 7살때 집안이 서울로 이사와 학교는 모두 서울에서 다녔다. 1985년 서라벌고를 나와 성균관대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대학 2학년 말 학내문제로 제적되고 곧장 노동현장에 뛰어들었다. 그는 “1987년 제적생으로 시위하다 6월 10일을 닭장차 안에서 맞았다”고 말했다. 1991년 철도청 공무원시험에 합격해 검수원으로 서울 용산 서울동차사무소에서 근무했다. 검수원은 기관차나 열차를 정비하는 업무로 낮에 열차가 운행하기 때문에 주로 밤에 일하는 힘든 업무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김 위원장의 ‘파트너’격인 이성기 현 노동부 차관도 바로 철도청 검수원 출신이라는 점이다. 같은 검수원 노동자 출신 노·정 파트너십도 기대되는 대목이다. 그는 1994년 전국기관차협의회의 기관사·검수원 파업에 참여해 구속·해고됐다. 당시 철도노조가 있었지만 쟁의권이 없는 공무원이 파업하기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 파업으로 60명이 해고되고 20명이 구속됐다. 그는 “그때 파업하면 즉각 파면이었지만 딱 하나 있던 것이 바로 30세 젊음이었다”고 말했다. 해고된 후 5년간 민주노총 공공연맹 조직실장으로 일하다 2004년 신규채용 방식으로 철도(코레일)에 복직했다. 2007년 철도노조 위원장 선거에 나섰지만 낙선, 2013년 다시 도전해 당선됐다. 철도노조 위원장 시절인 2013년 12월 3일 철도 민영화 기도에 반대해 23일간 당시로선 최장기 총파업을 이끌었다. 이로 인해 2014년 2월 구속됐지만 보석으로 나와 끈질긴 법정투쟁 끝에 2017년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그리고 2017년 12월 민주노총 위원장에 출마해 당선됐다. 김 위원장은 철도노조 총파업을 이끌기는 했지만 ‘지략을 갖춘 합리적인 노동운동가’라는 생각이 든다. 노·정문제보다 전통적인 노사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가 과제일 듯하다. 그의 생각은 80만 조합원의 대표답지 않게 평범하다. 그는 “돈이 많다고 하루 10끼 먹는 것 아니지 않나”라고 반문하며 “세 끼 먹으면서 나만 잘사는 세상이 아닌 더불어 사는 세상, 그 가운데 노동의 가치를 아는 세상을 원한다”고 말했다.
원희복의 인물탐구
민주노총 직선제 ‘삐거덕삐거덕’
민주노총 직선제 ‘삐거덕삐거덕’(2017. 12. 19 16:57)
2017. 12. 19 16:57 사회
ㆍ1차 투표 연장에 결선투표는 중단… 직선제 무용론까지 대두 지난 12월 14일 밤 10시, 민주노총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급하게 공고를 냈다. 결선투표를 중단하고 일부 투표소에서 재투표를 실시한다는 내용이다. 242개 투표소 8829명의 투표 결과 값이 입력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위원장을 뽑는 이번 선거는 계속 삐거덕거렸다. 전산 문제로 1차 투표 기간이 하루 연장되는가 하면, 결선투표를 하루 앞두고는 결선 자체가 중단됐다. 어떻게 8829개나 되는 투표 결과가 입력되지 않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남정수 민주노총 대변인은 “현장에서 입력이 제대로 안 됐거나 현장에서는 제대로 입력한 후 전송했는데 전송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한 경우들”이라고 설명했다. 누락됐던 투표 결과가 반영되자 각 선거본부 득표율에 변동이 생겼다. 4개 후보조 중 1위를 차지한 기호 1번 김명환 후보조는 그대로 1위를 유지했으나, 2위 이호동 후보조와 3위 조상수 후보조 간의 격차가 줄었다. 더 복잡한 상황은 다음부터다. 전체 투표를 다시 검사한 결과 2위와 3위의 격차(3910표)보다 무효표(4173표)가 더 많이 나왔다. 민주노총 선관위는 무효함, 용지초과함, 임의등재함이 나온 투표소에서 재투표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제 9기 민주노총 지도부 선출선거가 결선투표를 하루 앞두고 중단됐다. 지난 14일 오전 서울역광장에서 민주노총 관계자들이 투표물품 배송준비로 분주한 모습이다. / 연합뉴스 “동네 반장 선거도 아니고…” 이에 따라 무효함, 용지초과함, 임의등재함이 나온 294개 투표소의 조합원 4만9000여명은 19일과 20일 재투표를 하게 됐다. 1차 투표 이후 선거운동을 접었던 3번과 4번 후보조가 14일 밤부터 다시 선거운동에 나서는 황당한 상황도 벌어졌다. 이쯤 되니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동네 반장 선거도 아니고 너무 심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선거과정 내내 잡음이 일었기 때문이다. 가령 1차 투표 첫날인 지난 11월 30일 오전, 모바일과 ARS 전자투표소가 개설됐지만 오류가 발생해 투표가 중단됐다. 모바일 투표 오류는 사흘이나 지속됐다. 이에 민주노총 선관위는 1차 투표 마감 하루 전날에서야 급하게 투표기간을 하루 연장한다고 밝혔다. 기술적 오류로 모바일 투표에 참여하지 못했거나 참여했지만 완료하지 못한 이들이 많다는 이유였다. 물론 투표율은 높을수록 좋다. 더 많은 의견을 반영하자는 차원에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선거가 무산될 위기에 이르자, 모바일 투표 오류를 핑계 삼아 투표기간을 연장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투표율이 50% 미만일 경우 투표는 무산된다. 이런 상황을 두고 박성식 전 민주노총 대변인은 당시 “모바일 투표 시스템 오류 때문인지 현재 투표율이 낮다고 한다”며 “후보 간 승패를 떠나 저조한 투표율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노동운동은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실제 투표를 하루 연장했음에도 투표율은 55% 수준에 그쳤다. 2014년 치러진 첫 번째 직선제 투표율은 63%였다. ‘처음’에 대한 관심도가 높다고 해도 10% 가까이 낮은 투표율이 민주노총에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물론 외부적인 요인도 있다. 박 전 대변인은 “박근혜 정부보다 시대적 긴장감이 덜하고 언론의 문제도 있다”며 “80만명의 선거인데 언론은 이를 일반 노동자의 과제로 다루지 않고 특정세력의 문제로 다루는 측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핵심은 일반 조합원들의 무관심이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조합원 ㅇ씨는 “선거 관련 문자가 왔는데 전교조 상급단체가 민주노총인지 모르는 조합원들도 많다”며 “우리가 왜 민주노총 위원장을 뽑느냐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관심 부족·선관위 미숙함·기술적 문제 투표에 참가한 조합원이라고 다르지 않다. 언론노조 조합원 ㄴ씨는 “선거가 무산되면 6억원이 날아간다고 들었다. 조합비가 아까워서 투표했다”고 말했다. ㄴ씨는 자신이 어느 후보조에게 투표했는지 잘 기억하지 못했다. 금속노조 조합원 ㅊ씨는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이 O번을 찍으라고 해서 찍었다. 그게 아니라 해도 얼굴 아는 사람이 그 후보자밖에 없었다. 우리가 비정규직 투쟁할 때 자주 왔다”며 “정책이나 공약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무관심 선거에 기술적 오류까지 더해진 결과는 1번 김명환 선본의 압도적인 우위다. 기호 1번 김명환 후보조는 1차 투표에서 46.7%를 득표했다. 과반을 넘겼다면 결선까지 갈 필요 없이 당선 확정이다. 다른 3개 후보조는 10%대에 머물렀다. 김 후보조는 ‘깜깜이 선거’에서 유리한 점을 모두 갖췄다. 먼저 ‘인물’이다. 김 위원장 후보는 활동가 조직이 아닌 일반 조합원들이 그나마 아는 후보다. 김 후보는 2013년 철도노조 파업을 이끌면서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었다. 기호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1번 선거본부 관계자도 “대놓고 이야기하면 이렇게 관심 없는 선거는 1번에 쏠리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4번 선거본부 관계자는 “‘기호 빨’이 최소 5%는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요소, ‘조직표’다. 김 후보조는 노동운동 내 최대 정파인 ‘전국회의’ 상당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 전국회의는 정당운동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이 중 일부는 지난 10월 창당된 민중당의 현장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국회의 소속 활동가들이 집행부 주를 이루고 있는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와 전국건설노동조합의 경우, 1번 후보조에 대한 지지율이 90%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학비노조와 건설노조 조합원은 각각 5만여명 수준으로, 2위 후보조가 받은 표보다 많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직선제 무용론까지 대두된다. 한 비정규직 활동가는 “어차피 정파선거로 치러질 거면 이렇게 많은 비용과 시간과 노력을 들일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이런 직선제가 과연 민주주의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꼬집었다. 언론노조 조합원 ㅇ씨 역시 “다 마음에 안 들어서 그나마 덜 마음에 안 드는 사람에게 투표했다”며 “여전히 각 정파운동을 대표하는 ‘올드보이’들이기 때문이다. 정파운동을 아는 사람만 후보들 간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선거”라고 비판했다. 이번 선거과정에 대해 남 대변인은 “조합원들 관심이 부족했고 선관위의 미숙함으로 인한 기술적인 문제들도 발생한 선거였다”며 “일단 시작했으니 선거는 잘 치러야 한다. 선거 이후 평가를 통해 3년 뒤 다시 직선제를 하게 된다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원희복의 인물탐구]민주노총 사무총장 이영주… 도심 한복판에 연금된 박근혜 정권 제거 1순위(2017. 09. 26 11:16)
2017. 09. 26 11:16 사회
서울시 중구 정동길 5. 서울 정중앙 광화문 네거리에서 700m밖에 안 떨어진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이다. 이곳에 2년 10개월째 ‘연금’ 상태에 있는 한 여성이 있다. 한겨울에는 난방이 끊어진 건물 구석에서 냉기와 싸워야 하고, 더운 여름에는 샤워시설이 없는 화장실에서 대충 씻어야 한다. 물론 이번 길고 긴 추석 연휴에도 집에 갈 수 없다. 그는 80만 조합원의 합법적 노동조합인 민주노총 이영주 사무총장(52)이다. 그는 민주노총에서 처음 직선제로 선출된, 그리고 첫 여성 사무총장이다. 그는 2015년 11월 14일 이후 경찰의 수배를 피해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생활한다. 민주노총이 조사한 결과 그는 2015년 국가정보원과 경찰이 가장 많이 통신자료를 수색한 인물이었다. 그는 본인뿐 아니라 남편과 두 아들의 통신자료까지 탈탈 털렸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수석부위원장 출신 민주노총의 사무총장인 그는 박근혜 정권이 제거하려 했던 1순위 인물로 꼽혔다. 새로운 촛불정부가 들어선 지 4개월이 넘은 지금 이것이 ‘결과는 정의로워야 한다’는 지론에 맞는 것인가. 1계급 특진 현상금 걸린 수배인물 “여기서 일하다 먹고 자고 눈뜬다. 식사(점심·저녁)는 경향신문 구내식당(민주노총은 경향신문 건물에 입주해 있다)에서 해결하고 휴일에는 당직자가 밖에서 사다준다. 외국의 노총 간부들이 찾아와 ‘집으로 초대해 줘서 감사하다’고 한다. (하~하~ 그는 웃었지만 웃는 것이 아니었다) 작년 초 구속됐던 동지들이 ‘냉난방되고 샤워도 할 수 있는 서울구치소가 훨씬 편하다’고 하더라.” 초등학교 선생님이던 그는 두 아들의 어머니이고 한 남편의 아내다. 그러나 지금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지도, 어머니 역할도 전혀 못한다. 그는 “두 아들이 한 달에 한두 번 면회오듯 찾아온다”면서 “이번 추석 연휴에는 가족들이 번갈아 찾아오도록 날짜를 일일이 찍어줬다, 우리 가족이 민주노총 당직을 서는 셈”이라고 말했다. 그가 사무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이유는 그를 잡으면 1계급 특진이라는 ‘매우 큰 현상금’이 걸렸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권에선 그 1계급 특진을 노린 정·사복 경찰이 건물 주변에 쫙 깔렸다. 심지어 은밀히 폐쇄회로TV(CCTV)까지 설치했다. 박 정권이 무너진 지 4개월이 넘었지만 여전히 경찰의 수배조치는 해제되지 않고 있다. -얼마 전 노동부 장관이 이곳 민주노총을 방문했다. 정부가 수배 해제조치를 내리면 되는 것 아닌가. “그날 김영주 노동부 장관이 방문해 ‘한상균 위원장 실형 선고는 문제가 있다’고 발언했다. 그리고 돌아가 바로 ‘석방돼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그것이 현 정부의 한계와 정권의 정체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실형선고는 문제가 있지만, 석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한 위원장과 나는 공범으로 사안이 같다. 한 위원장을 석방할 의지가 있다면 수배를 해제할 텐데 그 의지가 없다.” 마침 지난 9월 15일 기독교·불교·천주교·원불교·천도교·한국종교협의회 등 6개 종단 지도자와 민변 등이 이번 추석에 한 위원장을 비롯한 30여명의 양심수 가석방을 요청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르지만 기대가 큰 것은 사실이다. 이 사무국장은 “민주노총 입장에서 가장 큰 행사가 11월 12일 전국노동자대회”라며 “적어도 그때까지 나와서 무대에 함께 섰으면 하는 기대가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가 임명한 문성현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노사정위) 위원장은 9월 19일 첫 기자회견에서 “민주노총은 내년 2월까지 노사정위에 들어올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노총은 1989년 노사정위를 탈퇴했고, 한국노총도 2016년 노사정위를 탈퇴한 상태다. 민주노총은 노정 교섭을 먼저하고, 노사 교섭을 거쳐 노사정 교섭으로 간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이 총장은 “노정 교섭도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노사정위에 나오라는 것은 너무 진도가 나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문성현 위원장은 민주노총 출신으로 처음 노사정위원장에 임명됐다. 별 감흥이 없는가. “어떤 사람이 됐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지금 민주노총에 노사정위에 들어오라는 얘기는 예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정리해고를 결정한 곳이 노사정위였고, 재작년 박근혜 정권이 노동개악을 시도했던 곳도 노사정위다. 새로운 정부는 새로운 노정 테이블을 가지고 말해야 한다.” -지난 5월 대선에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는 집권하면 ‘민주노총과 전교조부터 해체하겠다’고 공언했다. 이 총장은 전교조 출신에 민주노총 실무책임자로 두 해체 대상 모두에 포함된다. 결국 보수 측 제거대상 1호인 셈이다. “(하~하~) 홍준표 후보에게 대단히 감사하다. 이렇게 민주노총과 전교조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으니. 그런데 민주노총과 전교조를 어떻게 해산할지 되묻고 싶다. 민주노총·전교조는 해체가 불가능한 조직이다. 오히려 ‘공기나 바다를 없애겠다’는 공약이 더 쉬울 것이다. 전교조는 법외노조가 되면서 더 강해졌다. 법외노조 탄압 이전과 이후 조합원 수는 별 차이가 없다.” -박근혜 정권의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2013. 10. 24)조치가 왜 내려졌다고 보는가. 교학사 교과서 반대 때문인가. “박근혜 정권은 역사왜곡을 자행하고, 노동탄압을 통한 재벌의 안정적 독점 제공 등의 독재정권의 모든 경향성이 종합된 정권이었다. 교사들이 그 시기에 가장 뭉쳐 있었다.” -홍준표 후보가 민주노총을 해산하려 한 것은 노동조합이 정치집단이 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위원장은 끊임없이 정치세력화를 추진했고, 민주노총 내부에도 이런 노선에 반발하는 세력이 있었다. “우리 민주노총 강령 2호에 ‘우리는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실현하고 제민주세력과 연대를 강화하며, 민족의 자주성과 건강한 민족문화를 확립하고 민주적 제 권리를 쟁취하며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실현한다’고 분명히 명시돼 있다. 어떤 정당을 지지할 것인지, 특정 정당을 만드는 것인지에 대한 방법은 논의할 수 있지만 정치세력화는 민주노총의 목표이자 임무다.” 그는 2013년 5만 조합원을 가진 전교조 법외노조 탄압 국면에서 수석부위원장으로 위기 돌파의 책임자였다. 그는 해직 전임자를 내쫓고 비루하게 연명할 것인지, 아니면 민주화 투쟁의 역사성을 가지고 당당하게 맞설지를 결정해야 했다. 그는 “우리가 6개월 동안 고민하고 선택한 것은 물질적인 면보다 정신적인 면”이라며 “조합원이 감소하고 탄압이 심해져도 민주화 정신을 훼손시켜선 안된다고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용주 민주노총 사무총장(오른쪽)이 한상균 위원장과 백기완 선생과 함께 시위를 하고 있다. / 민주노총 제공 “정치세력화는 민노총의 목표이자 임무” 여기에 기름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였다. 마침 그날은 전교조가 정부청사 앞에서 농성을 시작하는 날이었다. 농성을 더 지속할 수 없어 곧장 세월호 투쟁으로 전환했다. 그는 “교사 입장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교사가 수없이 학생에게 한 말로 세월호 참사는 교사들에게 가슴에 박혔다”면서 “선생님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다, 박근혜와 전면전을 해야겠다’고 결의한 것은 선생님들 반성의 표시였다”고 말했다.(그는 이 대목에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이 사무총장은 역사왜곡이 ‘정신’을 유린한 것이라면, 노동개악은 ‘몸’을 괴롭히고 것이었고, 세월호 참사는 ‘가슴’에 칼을 꽂은 것이라고 비유했다. 분노한 선생님들은 2015년 11월 5일 제1차 민중총궐기에 붉은 깃발을 들고 앞서 나갔다. 그는 “민주노총 대중집회에선 금속노조나 건설노조의 활동이 컸는데, 그날은 공공부문 노조의 활동이 두드러졌다”면서 “그날 깃발 들고 가장 앞장선 사람이 전교조 선생님과 청년들이었다”고 말했다. 이 사무총장은 1965년 경기도 의정부 출신으로 83년 서울교대에 입학해 87년부터 교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의 교사생활은 평소 그의 생각과 달랐다. 그는 “아이들을 통제하고 굴복시키는, 학생에게 해서는 안될 것들이 위에서 지시로 내려왔다”면서 “내가 이러려고 교사가 됐나 하는 회의와 반성의 시기를 보낼 때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가 구세주처럼 다가왔다”고 말했다. 1987년 전교협에 가입해 적극 활동하던 그는 89년 전교조가 설립되자 당당히 투쟁선봉대장으로 섰다. 노동투쟁 현장에서 검게 타고 우락부락한 현장 노동자만 보던 TV 카메라 기자들은 ‘예쁘장한’(그는 50대지만 지금도 주름살이 거의 없다) 여성 투쟁선봉대장을 보고 집중 크로즈업을 했다. 이 화면을 보고 ‘반한’ 같은 전교조 교사가 그의 단식농성장을 찾아왔는데 그가 지금 남편이다. 전교조 초기 투쟁선봉대장으로 활약 그는 2012년까지 서울 중랑구 신현초등학교 선생으로 있다가 전교조 지부장, 수석부위원장(2013~2014)을 거쳐 2014년 민주노총 초대 직선집행부에서 한 위원장과 함께 사무총장에 선출됐다. 한 위원장의 쌍차투쟁은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그의 전교조 투쟁은 시청앞 등 거의 같은 장소에서 투쟁했지만 한 위원장은 그를 몰랐다. 나중에 ‘어떻게 모를 수 있나’라는 물음에 한 위원장은 ‘나는 여성에게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예상을 깨고 첫 민주노총 직선 위원장 선거에서 최종진 전 서울시지하철노조 위원장과 함께 위원장·수석부위원장·사무총장 러닝메이트로 당선됐다. 그는 한 위원장에 대해 “회의에서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려도 다음날 아침 ‘이렇게 하면 돌파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해결책을 구상해 온다”면서 “한 위원장만큼 돌파력과 집중력을 가진 활동가는 처음 봤다”고 평가했다. 한 위원장은 2015년 민중총궐기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2016년 12월 구속됐다. 대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현재 화성교도소에 수감돼 있다. 하지만 이 사무총장은 매주 옥중의 한 위원장에게 민주노총 상황을 보고하고 매주 화요일 사업 의견을 담은 ‘업무지침’을 받는다. 올해 말로 직선 지도부 3년 임기가 끝난다. 일부에서 거론되는 한 위원장의 옥중 출마설에 대해 그는 “지금까지 결정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말로 이를 부인했다. 그는 민주노총 직선 1기 지도부의 성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2015년 아무도 투쟁하자는 말을 하지 않을 때 박근혜 정권 퇴진을 요구한 것이 민주노총이었다. 아무도 모이지 않을 때 민중총궐기를 통해 13만명을 모은 것도 우리 민주노총이다. 지금 우리가 잊고 있지만 박근혜 정권의 노동개악이 우리 민중총궐기로 저지됐다. 우리 1기 지도부의 공약인 박근혜 퇴진과 노동개악 저지를 실현했다. 그리고 민주노총은 민주주의의 길로 나가고 있다. 그러면 큰 공약은 지킨 것이 아닌가. 3년차인 올해 비정규직을 의제로 총파업을 계획했는데, 그것을 못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는 올 연말 임기가 끝나면 경찰에 출석할 것이다. 수배조치가 해제되지 않았으니 바로 구속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 위원장과 공범이지만 위원장이 3년 실형을 받았으니 나는 3년 이하를 받지 않을까(하~하~)”라며 “위원장이 사면되고 내가 집행유예가 되면 전교조의 법외노조 투쟁과 해고무효 복직투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 동안 눈시울을 자주 붉혔다. 그는 피아노를 치며 초등학생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남편·아들과 외식도 하는 그런 보통 여선생님이었을 것이다. 책상 주변에 꽃화분이 가득한 보통의 여성이다. 그런 그를 삭발까지 하는 강인한 투사로 만들고, 이렇게 서울 한복판에 연금시킨 주범은 누구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비이성적 교육제도와 비인간적 노동조건, 그리고 비정상의 정치권력이 아니었을까.
원희복의 인물탐구
[원희복의 인물탐구]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 최종진 “우리는 새정부에 부담 아닌, 힘을 실어주는 것”(2017. 06. 13 13:18)
2017. 06. 13 13:18 사회
5월 24일 이번 촛불혁명의 ‘사령탑’이라고 할 수 있는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 해단식이 열렸다. 이날 해단식에서는 그동안 23회 촛불집회에 1588만2000명이 참여했다는 경과보고와 함께 앞으로 1억6700만원을 들여 백서를 만들겠다는 재정운영계획도 발표됐다. 퇴진행동은 이번 촛불혁명을 2016년 10월 27일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 자발적 시위에서 시작해, 10월 29일을 제1차 촛불시위로 규정했다. 누가 어떤 근거로 촛불혁명에 대해 ‘시대구분’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는 납득하기 어려운 기준이다. 이미 2015년 11월 14일 민주노총과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전국노점상총연합(전노련) 등 53개 시민·사회단체가 민중총궐기투쟁본부를 만들어 제1차 민중총궐기 이후 무려 5차례나 광화문과 전국에서 대규모 촛불시위를 벌였다. 그 과정에서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사망했다. 퇴진행동 주장대로 2016년 10월 29일이 촛불의 시작이라면 이전 10월 27일 박근혜의 1차 대국민 사과를 설명할 수 없다. 퇴진행동 시대구분대로 백서를 내는 것은 또 하나의 역사왜곡이 될 수 있다. 이번 촛불혁명은 최소한 민주노총과 전농·전노련 등 민중총궐기투쟁본부가 주도한 민중총궐기를 포함시키고, 오히려 선도적으로 박근혜 정권과 맞선 이들 53개 단체가 높게 평가돼야 정당하다. 그런데 이에 대해 평가가 인색한 편이다. 하지만 역사는 정확히 기술해야 한다. “민주노총 없이 촛불혁명 성공했겠나” 민주노총 최종진 위원장 직무대행을 만났다. -이번 촛불혁명에서 민주노총의 역할을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위원장이 구속된 상태에서 이런 일을 치러냈다. “하~하. 과찬의 말씀이다. 그러나 사실을 정확히 알아줘 고맙다. 그런 얘기를 우리 내부에서는 안 하지만, 70만~80만 조직을 갖춘 민주노총 없이 어떻게 촛불혁명이 이뤄질 수 있었겠나.” -홍준표 후보가 집권하면 ‘민주노총과 전교조를 해산하겠다’고 공약했다. 이번 촛불혁명의 주도세력을 정확히 본 것이라고 생각하나. “맞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점은 정확히 봤다.” 옆에 같이한 남정수 민주노총 대변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민중총궐기 때도, 퇴진행동 때도 공동대변인으로 이번 촛불혁명의 대언론 브리핑을 맡았다. 퇴진행동의 언론 브리핑도 주로 민주노총에서 했고, 마지막 해산식 사회도 그가 봤지만 민주노총의 역할은 과소평가됐다. “우리는 2013년 민주노총 침탈(경찰이 민주노총 사무실이 있는 경향신문 건물에 난입)을 보며 박근혜 정권은 노동자를 노예로 만들 것이라고 판단했다. 쉽게 해고하고, 기간제 파견을 확대하는 노동정책은 전 국민을 비정규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번 지도부는 총파업을 공약하고 당선됐다.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 때의 13만명은 대단한 것이었다. 바로 옆에서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를 맞고 쓰러졌다.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고 죄책감이 든다.”(이 대목에서 그는 잠시 목이 메었다.) 11·14 전국노동자대회 및 민중총궐기에 민주노총 단위 노조인 언론노조도 참여했고, 경향신문 노동조합 조합원인 기자 역시 참여했다. 당시 많은 언론이 ‘전국 전세버스가 동났다’고 보도했다. 이 전세버스는 ‘박근혜 퇴진’이라는 구호를 달고 서울로 올라왔다. 한 대에 수십 만원이 드는 전세버스를 임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곳은 그나마 ‘노동조합’ 조직이었다. -민중총궐기 국면에서 가장 힘든 때는 언제였나. “높은 차벽에 갇혀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할 때라고 할까. …사실 차벽을 넘어간들 우리가 청와대로 질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차벽에 막힌 노동권리, 차벽에 막힌 국민기본권, 차벽에 막힌 민주주의를 깨지 못한다는 것이 힘들었다. 특히 한상균 위원장이 구속되고 이영수 사무총장이 수배된 상황이라 힘들었다.” -민주노총은 6월 30일 총파업을 결의했다. 원래 중앙집행위원회 결의사항이긴 하지만 새로운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대립각을 세우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했던 사람들의 비난과 우려를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 결정은 대통령 당선 결정 이전 이미 중집위에서 결정한 사안이다. 3대 요구는 시급하다. 최저임금 시간당 1만원 문제는 500만 노동자의 문제다. 정부는 막연히 3년 내에 한다고 하는데 분명히 하라는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도 2000만 노동자의 절반인 1000만 노동자의 문제다. 이는 사회적 불공정과 불평등 해소는 물론, 경제 선순환의 핵심이다. 반드시 여기서 멈춰야 한다. 그리고 국제노동기구(ILO) 결사의 자유를 유보하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의 전제조건인데 26년이 지난 지금까지 안 지킨다. 노동조합의 요구는 핵심적 국민기본권인데 불온시하고 심지어 빨갱이라고 매도한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것은 즉시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나.”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즉시 인천공항공사를 찾아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약속했다. 국제노총(ITUC) 사무총장도 직접 만났다. 그런데 파업을 결의하는 것은 성급하지 않으냐는 것이다. “그 질문을 이해한다. 그렇지만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요구는 문재인 정부에 부담을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개혁작업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지금 문재인 정부가 박수받을 때 이 작업을 하지 않으면 갈수록 어려워진다. 또 서로 신뢰가 쌓여야 한다. 구속·수배자 해제, 장기투쟁사업장 법적 제재 해제, 먼저 이런 조치를 해야 한다.” “총파업 결의는 이미 대선 전 결정” 최 위원장 직무대행이 말하는 신뢰의 조건은 어찌 보면 간단하다. 한상균 위원장의 특별사면(6월 중순이면 형기의 절반을 복역해 합법적인 특별사면 요건이 된다), 민주노총 이영주 사무총장의 수배 해제, 민중총궐기 과정에서 기소된 1000명이 넘는 노동자에 부과된 수십 억원의 벌금 취소는 곧바로 할 수 있는 조치다. 그 자신도 세월호 가족들의 국회 앞 농성에서 같이 구호를 외쳤다는 이유로 기소된 것을 비롯해 10여건의 재판이 기다리고 있다. 그는 한상균 위원장의 근황에 대해 “며칠 전 국제노총 사무총장과 같이 춘천교도소에 면회갔다”면서 “한 위원장은 민주노총의 회의내용까지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고 전했다. 한 위원장은 촛불혁명의 절정기였던 지난 12월 21일 조합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금부터는 한상균을 석방하라’는 구호도 멈춰달라”며 “지금은 오직 박근혜 체제의 완벽한 탄핵과 단죄를 얼마만큼 단호하게 할 것인지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신의 석방문제가 촛불혁명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번 촛불혁명 국면에서 가장 극적인 상황은 언제였나. “2016년 9월 25일 백남기 농민이 사망했을 때다. 전날 우리는 부검의가 사인을 조작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긴급히 ‘시신을 지키자’고 결의했다. 경찰이 병원 출입을 막았지만 다행히 이를 뚫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들어왔다. 서로 스크럼을 짜고, 쇠사슬을 묶고 밤을 새웠다.” -11월 5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백남기 농민 장례식 노제가 촛불혁명의 기폭제가 됐다. 그때까지 야당은 촛불광장에 나오지 않았다. “맞다. 그날까지 야당은 광장에 나오지 않았다.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질서 있는 퇴진’과 ‘영수회담’을 제안했다가 비난을 받기도 했다.” 처음 박근혜 퇴진을 시작한 민중총궐기투쟁본부와 백남기농민대책위를 비롯한 64개 단체는 11월 9일 더 많은 시민·사회단체를 합류시키기로 하고 전국대표자회의를 출범시켰다. 이로써 퇴진행동에는 1500개 시민·사회단체가 가담하고, 마지막에는 2300개 단체까지 늘어났다. 민주노총 최종진 위원장 직무대행을 비롯한 지도부가 5월 12일 새정부에 교섭을 제안하고 있다. / 김영민 기자 -학자나 언론 등이 평가에 인색한 이유에는 민주노총의 홍보력 부족 때문도 있다. “음~.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계성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민주노총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유신·독재·보수반동세력이 끊임없이 덧씌워 온 탓이다. 그게 70년 켜켜이 쌓인 적폐다.”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총은 정의당과 민중연합당을 지지하기로 선언했다. 민주노총의 정의당 지지는 처음이다. “계속 촛불집회를 하면서 ‘촛불 대선후보를 만들자’고 생각했다. 지난 2월 초 민주노총이 정의당, 민중연합당, 노동당, 변혁당 등에 정파를 망라한 민중경선 방식을 통해 대통령후보를 내자는 안을 냈다. 그러나 정파 간 이해 때문에 안 됐다. 아쉽다. 어떤 교수는 민주노총이 후보를 내면 정권교체에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해 속상했다. 민주노총 정치세력화가 왜 정권교체에 걸림돌이냐.” 노동법 석사학위, 노동문제 이론 겸비 최 권한대행은 “심상정 후보가 얻은 200만표가 정의당 능력만으로 나왔을 것으로 보는가”라고 반문했다. 사실 민주노총과 전농, 민중의 꿈, 민중연합당 등 진보진영은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이미 3차 원탁회의를 마치고 연내(지방선거 전) 진보정당 건설에 합의한 상태다. 그는 1958년 경북 의성 출신으로 안동농고를 나왔다. 면 단위 중학교에서 공부는 잘했지만 형편이 어려워 대학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나마 안동농고를 졸업하면 취업이 쉬웠기 때문이다. 당시 형편이 어렵고 똑똑한 학생들은 취업이 잘되는 공고, 농고, 상고에 많이 진학했다. 한상균 위원장(전남 기계공고)도 비슷한 처지였다. 그는 1983년 서울시 기능직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서울시 지하철에 배치됐다. 마침 그해 서울시 지하철이 공사로 전환되면서 지하철공사 전동차 차량정비직으로 근무했다. 하루종일 운행한 지하철을 밤새워 정비하는, 낮과 밤이 뒤바뀐 곳이다. 이런 과정에서도 방송대(법학)를 졸업하고 고대 노동대학원에서 노동법 석사학위를 받았다. 노동문제에 대해 실제와 이론을 모두 갖춘 것이다. 그는 1988년 지하철노조 창립에 가담해 11월 지회장이 됐다. 그의 노조활동은 곧 평탄치 않은 삶의 시작이었다. 1989년 3월 지하철노조 창동지회장으로 첫 번째 구속됐고, 1994년 지하철노조 총파업 당시 철도·지하철노조 조직쟁의국장으로 두 번째 구속·파면됐다. 1998년 1월 집행유예로 석방돼 사면·복권되면서 복직해 전국지하철노조협의회 사무처장, 2009년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장이 됐다. 그리고 2014년 쌍용차 한상균 위원장과 함께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에 당선됐다. 최 권한대행의 3년 임기는 올해 말로 끝난다. 임기가 끝나면 서울시 지하철로 되돌아 가지만 내년이 곧 정년이다. 연임 여부를 묻는 질문에 “쉬운 일이 아닌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마지막으로 그는 “중요한 시기에 부끄러움이 없이 최선을 다했다”면서 “구속된 한상균 위원장과 수배 중인 이영수 사무총장 등 시작했던 사람들과 같이 마무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원희복의 인물탐구
[원희복의 인물탐구]‘민중의 꿈’ 상임공동대표 윤종오 국회의원 “민주노총 중심 진보대통합 시작”(2016. 11. 15 15:05)
2016. 11. 15 15:05 정치
지난 10월 24일 박근혜 대통령이 느닷없이 국회 시정연설에서 개헌 발언을 했다. 아무도, 심지어 국회의장조차 예상하지 못한 폭탄발언이었다. 막후 얘기로는 이날 저녁 JTBC의 최순실 게이트 폭로를 덮기 위해서라는 ‘그럴듯한’ 해석이 나왔다.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청와대와 내각이 사퇴하고, 전국적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지금 박 대통령은 하야 일보직전까지 가 있다. 현역의원 최초로 ‘대통령 하야’ 시위 바로 그날, 국회 본회의장 박 대통령 바로 앞 면전에서 ‘#나와라 최순실’이라는 손팻말을 들고 시위를 하는 국회의원 두 사람이 있었다. 무소속 윤종오(울산 북구)·김종훈(울산 동구) 의원이었다. 두 사람은 현역 의원으로서 처음으로 박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다. 당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이후 여러 대권주자들을 비롯한 정의당, 민주당 의원들의 하야 성명이 줄을 이었다. 두 의원의 행위가 값진 이유는 공허한 구호가 아니라 남보다 앞서, 그것도 당사자 면전에서 벌인 시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윤 의원은 ‘걸리는 것’이 있었다.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됐기 때문이다. 김종훈 의원이 전날 “윤 의원은 검찰이 기소한 상태로 너무 튀면 안 좋다”고 손팻말 시위를 만류했지만 그는 “걱정마라”면서 강행했다. 윤 의원에게 먼저 현 정국에 대한 생각부터 들어봤다. “하야가 유일한 해법이다. 하야 이후 조기 대선을 치러야 한다. 국민주도형 국민내각을 구성해야 한다. 내각에는 ‘박근혜 게이트’에 협조·수수방관하고 진실규명을 방해했던 사람을 제외하고, 야권과 시민사회, 촛불을 든 국민들이 참여한다. 여기에서 역사를 거꾸로 돌렸던 사건들, 국정교과서 문제와 개성공단 폐쇄, 문화계 블랙리스트, 백남기 농민 사망 진실규명, 노동법 개악 등 이런 것을 제자리에 갖다 놓는 작업을 해야 한다.” 원래 그에게 얘기를 들으려 했던 것이 지난 10월 18일 진보진영의 대통합을 위해 ‘민중의 꿈’이 출범했고, 윤 의원은 바로 이 조직의 상임공동대표(강병기 상임공동대표)이기 때문이다. 윤 대표는 “11월 20일 중앙 공식출범식을 하기로 했는데, 하야정국으로 일정을 미뤄놨다”면서 “부산·경남·울산·대전 등은 이미 대표자와 실무책임자 등 기본조직이 다 갖춰져 있고 조직원을 늘리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민중의 꿈’에 대한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민중의 꿈이 표방하는 것은 ‘하나의 진보’ ‘세상을 바꾸는 정치’이다. 윤 대표는 “민주노총이 중심이 돼 진보대통합 운동을 시작한 것”이라며 “노동자·농민·빈민 등 아래로부터 시작해 정의당·민중연합당 등을 통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민중의 꿈은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정치조직화 선제기구이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하부 기구는 아니다. 윤 대표는 바로 이 부분, 성격 규정에 매우 조심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또 민중의 꿈은 진보대통합이 이뤄지면 발전적으로 해체된다. 그렇게 본다면 자연스런 창당과정인데도 극구 ‘창당은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래로부터 정의당·민중연합당 통합 민주노총은 2012년 통합진보당 경선비리 사태 이후 정치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거리를 둬 왔다. 민주노총 일부 단위조직이 계속 통합진보당을 지지했을 뿐이다. 이번 작업은 민주노총이 다시 본격적으로 정치권과 결합하는 것으로, 교도소에 수감 중인 한상균 위원장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됐다. 하지만 이 진보대통합 성사 여부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의당은 이 진보통합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입장으로 알고 있다. “정의당이 공식적으로 불참을 선언한 적은 없다. …거리를 두는 것은 맞는데… 노회찬 의원은 ‘우리는 샛강 하나 두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심상정 대표는 이미 정의당이 진보정당임을 포기하고 대중정당으로 가기로 표방한 것 아닌가. “뭐… 공식적으로 선언한 바는 없고. …판단컨대 민중연합당과 거리를 두는 정국이라고 본다. 지금 정의당도 한계가 많지 않나? 정의당은 노동자·기층농민에 대한 뚜렷한 지지기반이 있는 당이 아니다. 반면에 저희는 확실하게 노동자층에 지지를 받고 당선됐다. 정의당이 명망가 두 분이 정당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기층조직이 있고, 여기에 민주노총의 지원이 결합되면 국정운영의 한 축을 담당하는 진보정당의 틀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과거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사례를 보면 어설픈 진보를 모으다 결국 감정만 쌓인 채 분열했다. 이후 후유증이 더 크지 않았나. “진보적 가치였던 무상의료나 무상급식도 처음 말할 때는 너무 급진적 주장이 아니냐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민주당·새누리당도 선제적으로 받아들이는 보편적 가치로 자리잡았다. 그런 점에서 과거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의 역할은 상당히 긍정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윤 대표는 “만들려는 통합진보정당도 대중정당, 진보적 대중정당으로 51%의 득표로 정권을 창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원론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은 차이가 크다. 이번 총선에서 진보진영 총득표율은 지역 2.4%·비례 8% 정도로, 과거 13%에 비하면 턱없이 추락했다. 게다가 세계의 진보정당은 대부분 다른 정당과 정책연합이나 선거연대를 통해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는 것이 현실이다. 윤 대표는 “어제(11월 8일) 한상균 위원장 면회를 했는데, 정국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고 ‘이번 하야정국에서 힘을 모아 박 대통령을 하야시켜야 한다’고 했다”면서 “박 대통령이 지은 죄에 비하면 한 위원장의 범죄사실은 미약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항고심에서 집행유예로 나왔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나눴다고 전했다. 그는 지난 통합진보당 분당 과정에서 당을 끝까지 지켰다. 종북몰이가 한창인 상황에서도 오히려 지역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이석기 내란음모 부분이 무죄 판결을 받지 않았나. 말이 안 되는 것이 내란음모도 없는데 무슨 선동이냐”면서 “사법부가 무리한 판결을 한 것으로, 역사가 다시 심판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이 해산되는 데 빌미를 준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고 말했다. 지난 총선 때 지역에서 심각한 종북공세를 받은 것으로 안다. “TV토론 때 내가 상대후보에게 ‘내가 종북과 관련된 것 단 하나만이라도 예들 들라’고 요구했는데, 단 한마디도 못하더라. 그냥 종북몰이인 거다. 실제는 종북공세가 안 통한 선거였다. 보훈단체가 나를 많이 지지했다.(그는 특전사를 제대한 보훈대상자다) 18년간 지역에서 나를 지켜 본 사람들이 안다.” 그런데도 검찰이 4번이나 압수수색했다. 본인이 왜 타깃이 됐다고 보나. “말도 안 되는 수사이고, 억지 기소다. 이번 선거 분위기가 좋았는데, 무리하게 선거법을 위반할 이유가 없었다. 아마 노동법 개악이 이 정부의 핵심 정책이고, 거기에 반대하는 노동자 출신인 내가 국회에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거기에 당을 없애면서까지 싹을 잘라낸 통합진보당 출신이 국회에 돌아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울산지검에는 유우성 간첩조작 사건에 관여했던 검사와 통합진보당 해산과정에서 정부 측 법률 대리인을 했던 검사가 고위 간부로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역에서 진보통합을 거쳐 야권통합 과정에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정리에 나서면서 분위기가 반전됐다고 했다. 그는 “선거기간 내내 종북공세에 시달렸는데, 문 전 대표가 와서 해소됐다”면서 “오히려 문 전 대표가 종북공세로 고생한 것에 마음으로 미안하다”고 말했다. 11월 8일 국회 정론관에서 ‘민중의 꿈’ 윤종오 상임공동대표(사진 가운데)가 강병기 상임공동대표(사진 왼쪽)·김종훈 공동대표(사진 오른쪽)와 함께 ‘민주적 국민내각’을 제안하고 있다. / 민중의 꿈 제공 기초·광역의회 의원 거쳐 구청장에 당선 윤 대표는 1963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부터 부산에서 자랐다. 그는 “아버지는 48페이지 동양화(화투) 그리는 예술가였다”며 웃었다. 구청장 시절 그가 쓴 책 에는 아버지가 집에서 벌인 도박판을 그가 뒤집어 엎어버리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다 보니 가정형편은 어려웠고, 심지어 쌍둥이 여동생을 남의 집에 양녀로 보내기까지 했다. 그는 어머니가 부산 서면극장 앞에서 콩국수 노점상을 하다 파출소에 연행되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 그는 “구청장 할 때 노점상을 무조건 단속하지 않고, 상생하는 관대한 정책을 편 것도 어머니에 대한 기억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부산공고 기계과를 나온 그는(그는 부산공고가 웬만한 인문계 학교보다 대학을 더 많이 진학한 좋은 학교였다고 자랑했다)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은 꿈에도 꾸지 못했다. 첫 직장은 거제도 조선소 용접공이었다. 그리고 제대 후 현대자동차에 입사했다. 그는 “1분에 차가 1대씩 나오는데, 못하는 운동이 없을 정도로 운동신경이 좋은 나도 57초, 58초 걸렸다”면서 “인간이 아니고 로봇이었다”고 기억했다. 허리를 펼 시간도 없이 일한 그는 ‘1년만 참자, 1년만 참자’를 되뇌며 견디다 1987년 노동자투쟁 때 메가폰을 잡고 노조 결성에 앞장섰다. 윤 대표는 1998년 제2대 지방선거에서 노동자 후보로 기초 구의원에 선출되면서 ‘의정활동’을 시작해 3·4대 지방선거에서 당선돼 광역시의원으로 활동했다. 2010년에는 울산 북구청장에 당선됐다. 그는 구청장 시절, 전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친환경 무료급식 모델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행정과 시민단체, 농민이 참여하는 지역공동체 형식의 친환경급식 모델이었다. 그는 또 지역의 작은 도서관을 활성화하고, 주민참여 행정 등을 폈다. 그러나 그는 2014년 야권분열로 인해 1.8%포인트 차이로 구청장 재선에 실패했다. 그는 구청장 낙선 후 곧장 현대자동차 생산라인으로 돌아갔다. 베라크루즈 생산라인이었다. 그래도 구청장까지 했으면 사무실 차려놓고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의 이런 행동은 의외였다. 회사도 껄끄럽게 여길 법했다. “허~허~. 일단은 생계를 책임진 가장이니 본업으로 가는 것이 맞다. 노조활동을 대신해 정치를 하다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는 것은 상식이어야 한다. 생산현장에 돌아가니, 회사보다 후배들이 ‘할 만하냐’ ‘몇 년 만이냐’고 물어보며 부담스러워 했다. 솔직히 힘들었다. 팔·다리·어깨가 아픈 단순 반복 일인데, 왜 힘들지 않겠나.” 윤 대표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사막에 던져 놓아도 살아나오는 오뚝이인생 아닙니까ㅋ’라고 써 놓았다. 이는 배고픈 어린시절, 힘든 공수부대와 현대자동차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오뚝이처럼 일어선 의미라고 설명했다. 사실 그는 최초의 블루칼라 출신 지역구 국회의원이다. 그동안 노동운동가 출신 의원이 적지 않았지만, 대학 학생운동 차원에서 노동계에 뛰어든 경우이거나 비례대표 의원이었다. 명실상부한 블루칼라 지역구 국회의원 1호는 바로 그였다. 그가 진보정당의 고질적 문제였던 몇몇 명망가 중심의 정당 틀을 어떻게 바꿀지 지켜보자.
원희복의 인물탐구
[원희복의 인물탐구]민주노총 위원장 한상균… 이 시대 노동·인권·사법의 바로미터(2016. 07. 11 18:05)
2016. 07. 11 18:05 사회
유권자 69만1136명이면 울산시 88만6000여명보다 적지만 제주도 45만1000여명보다 많다. 이 정도 유권자가 선출한 대표의 수적 영향력은 웬만한 광역자치단체장 이상이다. 나이가 되면 ‘천부적’으로 주어지는 보통 투표권과 달리, 회원으로 가입하고 회비를 납부하는 이익단체의 대표는 더욱 단결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다. 그는 한국노총과 함께 합법적인 대한민국 양대 노동조합 중 한 축의 대표다. 하지만 그는 7월 4일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에 ‘3중2 120’이라는 수인번호를 단 누런 색 죄수복을 입고 피고인석에 앉아 있었다. 그가 법정에 들어서자 방청석에서 박수와 함께 “힘내세요” “승리하십시오” “파이팅” 소리가 연발로 터져나왔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오른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는 방청석을 둘러보며 눈인사를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재판장 심담 부장판사(함철환·박가람 배석판사)가 양형이유를 길게 낭독하는 것을 들으며 가벼운 웃음까지 띠어 보였다. 오히려 옆에 앉은 변호사들이 참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과 대비됐다. “동지들이 무죄라 생각하면 무죄” 심 재판장은 “피고인 일어서라”고 말했다. 그가 일어섰다. 심 재판장은 “징역 5년에 벌금…(방청석에서 ‘우~’ ‘뭐냐’는 야유소리가 터져나왔다) 7일 안에 항고할 수 있으며….” 심 재판장의 선고는 방청객의 항의와 야유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심 재판장은 황급히 법정을 빠져 나가고 사전에 계획된 듯 피고인석 주변을 경위들이 에워쌌다. 그는 경위들이 붙잡은 오른손을 겨우 빼내 치켜들면서 “투쟁” 한마디를 외쳤다. 경위들은 손으로 그의 입까지 막으려 했다. 그는 더 이상 꼼짝 못하고 경위에게 끌려 나갔다. 이튿날 한상균 위원장은 면회자를 통해 “동지들이 무죄라 생각하시면 무죄라고 생각합니다. 독재정부 때보다 노동자들의 저항에 대한 탄압은 더 가혹하고 교묘합니다. 이러한 탄압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태세가 필요합니다”라는 소감을 전했다. 그러나 이 ‘공식적’이고 ‘사무적’인 메시지가 아닌 부인을 면회한 자리에서는 “군대에 간 아들 제대하기 전 면회를 갈 기회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소감을 전했다고 한다. 그는 지난 5월 군에 간 아들이 군복을 입은 자랑스런 모습을 보고 싶어했던 평범한 아버지였다. 군에 간 아들을 면회하고픈 그의 개인적 기대는 징역 5년이라는 중형으로 이뤄질 수 없게 됐다. / 김정근 기자 그는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를 주도해 경찰을 다치게 했다는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등의 혐의로 구속돼 검찰 구형 8년·법원 5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같은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복역한 전과가 있다. 이번에 중형이 선고된 배경에는 누범기간 중에 같은 범죄를 저지른 점도 포함됐다. 그의 중형 선고에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민중연합당, 녹색당 등 야당은 일제히 “사법부가 인권과 민주를 지켜주지 못한 판결을 내린 것은 매우 유감”이라는 비난 성명을 냈다. 국제적 비난도 쇄도했다. 그의 중형 소식이 알려지자 국제인권연맹(FIDH)과 세계고문방지기구(OMCT) 등 인권단체와 국제노총(ITUC), 유럽노조총연맹(ETUC) 등 노동단체는 공식성명을 냈다. 이들은 “계속되는 노조 집행부에 대한 탄압과 위협, 가혹한 처벌을 비판한다”고 주장했다. 국제앰네스티도 “그에 대한 유죄판결은 부당하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밝혔다. 심지어 제32차 유엔인권이사회는 지난 6월 17일 발표한 한국 조사보고서에서 한상균 위원장을 직접 거명하며 “다른 사람의 불법행위에 의해 야기된 손해에 집회 주최자가 책임지도록 하는 것은 과도하고 불합리하다”면서 “한국 법은 여러 영역에서 국제인권법 기준과 배치되고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존중, 보호, 촉진해야 할 의무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이밖에 전 세계 86개 노동조합과 산별노조는 한국 대통령에게 석방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고, 한국 대사관·영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국제인권단체와 국제기구에서 대한민국 한 개인에게 이렇게 관심을 나타낸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이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서 대표적 양심수에게 보였던 ‘국제적 예우’였다. 사실 경찰이 그에게 적용했던 ‘소요죄’는 권위주의 정권의 절정기인 1986년 이후 처음이다. 소요죄는 비록 검찰 기소단계에선 빠졌지만 검찰은 징역 8년을 구형했다. 집회 주최자에게 징역 5년의 중형을 선고한 것은 전두환 시절 사법부뿐이다. 조영건 구속노동자후원회 대표(경남대 명예교수)는 “과거 권영길·단병호 등 노동운동가들에게 집행유예 정도 선고했는데, 이 정부 들어 유독 실형을, 그것도 중형을 선고한다”고 말했다. 현재 60명 정도의 노동자가 투옥돼 있다. 결국 한상균은 30년 전으로 되돌아 간 2016년의 기본권·노동·인권·사법의 바로미터임을 의미한다. 쌍용차 노조위원장에 ‘3전4기’ 당선 한상균은 1962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가난했지만 그는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1975년 대통령 박정희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해 ‘100만 기능인 양성계획’을 발표하고, 전국에 19개 시범 공업고등학교를 지정했다. 그 중 하나가 한상균이 진학한 전남기계공고(현 광주공업고등학교)다. 장학금을 주고, 100% 취업을 보장하는 이곳에 공부 잘하고 가난한 어린 인재들이 몰렸다. 그러고 보면 한상균은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가 키운 ‘인재’였던 셈이다. 전남기계공고를 졸업한 한상균은 지프 생산업체인 거화에 입사했다. 이 회사의 전신은 신진자동차로 이후 동아자동차를 거쳐 1986년 쌍용그룹에 인수되면서 쌍용자동차로 바뀌었다. 그는 쌍용자동차에서 주어진 일만 하는 평범한 노동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1987년 민주화 국면에서 노조 설립 추진위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위원장이 되지 못했다. 민주노총 등 노동·시민단체들이 7월 4일 서울중앙지법에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의 중형 선고를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원희복 선임기자 그는 무려 세 번이나 위원장 선거에 떨어지고 2008년 11월 네 번 만에 당선됐다. 쌍용차 노조 고동민 사무국장은 “공장에서 가장 힘든 곳이 직접 조립하는 생산라인”이라며 “노조위원장에 나설 정도라면 지원부서와 같은 상대적으로 편한 자리를 회사에서 제안했을 텐데 한상균 위원장은 20년 동안 한 번도 생산라인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세 번의 낙선에도 힘든 현장을 지키며 노조위원장을 꿈꿨다는 것은 집념과 의지가 매우 강한 인물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그를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그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고동민 사무국장도 “네 번째 도전 때도 당선은 어렵다고 봤는데, 하루 2~3시간만 자면서 새벽까지 생산라인을 돌며 조합원을 설득했다”면서 “결국 구조조정을 우려한 노조원의 바닥민심을 움직여 1·2차 투표에서 모두 1등으로 당선됐다”고 말했다. 노조위원장에 당선된 직후인 2009년 1월 회사는 법정관리를 신청하고 그 해 4월 2646명의 노동자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그는 구조조정 철회를 요구하며 5월 21일부터 77일간 평택공장 점거 파업을 주도했다. 물과 음식이 끊긴 가운데 무자비한 경찰특공대와 용역에 대항했던 쌍용차 농성은 당시 TV로 생중계됐다. 그는 농성이 끝난 후 징역 3년을 선고받고 2012년 8월 만기 출소했다. 하지만 그는 석 달 만인 11월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송전탑에 올라 171일간 고공농성을 벌였다. 흔히 ‘쌍차사태’로 불리는 쌍용차 노동투쟁은 점거·고공·해외 원정 농성 등 투쟁의 다양성은 물론, 종교계의 지지를 끌어내고 국회의원 출마를 통한 정치투쟁도 이뤄졌다. 그래서 ‘쌍차사태’는 노동투쟁의 종합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이 ‘쌍차사태’를 주도하면서 노동계의 핵심인물로 떠올랐다. 2014년 12월 사상 처음 직접 선거로 치러진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서 그의 ‘신화’가 재연됐다. 그는 정부의 노동법 개정에 총파업으로 맞서자는 ‘박근혜에 맞선 노동자 살리기 총파업’을 공약으로 당선됐다. 노동계의 한 분석가는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서 한상균의 현장파가 승리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면서 “그는 선명성과 20년간 민주노총을 장악했던 중앙·국민파에 대한 세대교체 분위기로 당선됐다”고 풀이했다. 민주노총에는 3개 계파가 존재한다. 단병호가 이끌던 중앙파와 이수호의 온건 노선의 국민파, 그리고 이갑용을 위시한 강성 현장파다. 정치적으로 중앙파는 정의당, 국민파는 더민주, 현장파는 해산된 통합진보당과 가깝다. 간선제 시절 위원장은 보통 이 세 계파의 합종연횡으로 선출했고, 직선에서 다수인 중앙파와 국민파에서 당선자가 나올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과는 달랐던 것이다. 선명성으로 민주노총 위원장에 올라 민주노총 위원장이 된 그에게 첫 번째 시련은 2015년 4월 세월호 1주기 희생자 추모집회 때 집시법과 교통방해죄로 기소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4월 24일 공약대로 10만 총파업을 주도했다. 파업 반대파조차 “뻥파업인 줄 알았는데 공약을 지켰다”고 그를 높이 평가했다. 노동계의 한 분석가는 “민주노총 파업은 규모도 크고 국민경제에 미치는 등 파급도 커 집회만 열고 실제 파업에 돌입하지 않는 보통 ‘뻥파업’이 일반적”이라며 “상대적으로 과격하다는 현장파도 마찬가지였는데, 한상균 위원장은 달랐다”고 말했다. 쌍차사태를 통해 그는 강성 이미지가 심어졌다. 보수언론인 류근일씨는 그를 1920년대 중국공산당 내 급진파인 이립삼에 비교해 ‘맹동주의자’ ‘극렬주의자’ 등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게다가 보통 ‘뻥파업’이 아니라 공약을 지키는 파업 돌입은 정부로부터 ‘요주의 인물’이 되기에 충분했다. 특히 그는 노조가 진보정당의 뿌리가 돼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조영건 구속노동자후원회(구노회) 대표는 “지난 총선 직전 민주노총이 중심이 되는 진보연합정당 창당을 추진했다”면서 “민주진영 다수가 그의 계획을 지지했지만 일부 계파의 정략적 반대로 이뤄지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지난 총선에서 진보정치 세력이 크게 약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상균의 활동반경이 노동계를 넘어 정치권까지 넘보는 상황을 정권이 그냥 보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정권의 요주의 인물’이며 1급 수배자였다. 그를 체포하기 위해 신문사에 경찰력을 투입하고, 나중에 조계사에까지 경찰력을 투입하려고 했던 것이 이를 방증한다. 한상균은 지난해 12월 10일 조계사에서 스스로 걸어 나와 경찰에 잡혔다. 그는 지난 6월 13일 법정 최후진술에서 “저는 살인범도 파렴치범도, 강도범죄나 폭동을 일으킨 사람도 아닌 해고노동자”라며 “저는 해고를 쉽게 하는 노동개악을 막겠다며 투쟁하고 있다. 이것이 지금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1급 수배자 한상균의 실질적인 죄명”이라고 일갈했다. 하지만 법원은 그에게 징역 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그렇다고 한상균의 인생이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지금까지 보여준 그의 집념에 비추어 그렇다. 실제 그는 지금도 여전히 민주노총을 지도하고 있다. 변호인을 비롯한 민노총 지도부가 거의 매일 면회를 해 그의 메시지를 받아 오고 있다. 그는 옥중에서 7월 20일 20만 민중총궐기 대회와 7월 22일 금속노조 15만 총파업을 지도하고 있다. 산별노조 위원장은 물론 단위 사업장까지 무려 1000곳이 넘는 곳에 총파업을 권유하는 편지를 쓰고 있다고 한다. 그를 자주 면회한 조영건 구노회 대표는 “그는 결의로 일을 치러내는 특유한 인간형이고, 자신을 던지는 희생형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원희복의 인물탐구
[만화로 본 세상]-그들은 어쩌다가 민주노총 변호사가 됐나(2016. 05. 03 11:30)
2016. 05. 03 11:30 문화/과학
작가는 “복권에 당첨돼 놓고도 당첨 안 됐다고 생각하고 살라는 거랑 뭐가 달라”라고 반문하며 왜 그런 삶을 사는지 납득할 수 있는 명쾌한 계기를 찾는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다. 결정적인 순간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긴 길 위의 여러 선택들이 모여 오늘을 만들어 냈음을. 만화 이 수록된 책 의 표지.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법조인 49명이 당선됐다. 전체 국회의원의 16.3%나 된다. 그 중에서도 단연 화제가 된 인물은 서울 은평갑 당선자인 ‘세월호 변호사’ 박주민이다. 더불어민주당 영입인사였지만 비례대표 명단에 오르지 못했고, 투표 24일 전에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은평갑에 공천을 받았다. 당선은커녕 선거운동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염려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유일하게 다른 유력 야당후보와 단일화에 성공하고 결국 54.93%의 큰 지지로 당선됐다. 그는 광화문과 청운동에서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 노숙을 많이 했다. ‘거리의 변호사’는 그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거리에서 남들보다 자외선을 많이 쐰 탓인지, 거칠한 피부와 듬성한 머리숱 때문에 변호사라고 말하지 않으면 노숙하는 다른 유가족들과 구분이 가지 않았다는 주변 증언이 이어졌다. 현재 방송 중인 드라마 (KBS2)의 실제 모델이라는 말도 들린다. 작가 기대와 다른 그들의 법대 진학 이유 조들호 변호사(박신양 분)는 사법시험을 수석으로 합격하고 대한민국 최고 로펌 대표의 딸과 결혼한 잘 나가는 검사였다. 한순간 재벌과 법조권력이 결탁한 조작 사건에 대항했다가 모든 것을 잃고 노숙자로 전락하고 만다. 그 뒤 동네 변호사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박주민 변호사도 외견상 대원외고·서울법대 졸업, 사법시험 합격, 대형로펌 변호사로 이어지는 엘리트 코스에서 노숙을 일삼는 거리의 변호사로 급변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조들호를 떠올리나 보다. 이처럼 드라마나 영화 속에 나오는 변호사들은 승승장구하다가 어떤 큰 사건을 만나 각성하여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로지 정의만을 추구하는 인권변호사로 변신하곤 한다. (MBC 2014년 방영)의 김석주 변호사(김명민 분)가 기억을 상실하여 전과 전혀 다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재미를 위해서는 극적인 서사가 필요하지만, 동일한 서사의 반복은 진부하기도 하다. 때로는 오늘에 이르게 한 복잡한 인생경로를 틀에 박힌 서사에 끼워 맞추는 것처럼 보인다. 박주민 변호사는 법대 시절부터 변호사로서 사회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법률운동을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사법시험 준비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하지만, 틀에 박힌 서사로는 좋은 학벌을 가지고 사시합격하여 대형로펌에 다니던 사람이 갑자기 누리고 있던 혜택을 포기한 것으로 재구성된다. 전형적인 서사는 실제와 얼마나 일치할까. 웹툰 으로 유명한 최규석 작가는 만화 에서 전형적인 서사의 한계를 보여준다. 만화 은 민주노총 법률원 설립 10주년을 기념하여 발간된 (미지북스 발간)에 수록되어 있다. 작가가 민주노총 법률원 소속 변호사들을 실제 인터뷰하여 사실성과 재미를 균형감 있게 담았다. 작가는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예전 같지는 않지만 ‘여전히 폼 나는 직업의 대명사’인 변호사가 가진 이미지와 민주노총으로 대변되는 ‘노동운동이 가진 기피의 이미지’를 대비시켜 보려는 얄팍한 계산을 했다고 고백한다. 그가 인터뷰 전 그리는 민주노총 변호사는 “고향에 플래카드까지 나부낄 만큼 자랑스럽고 촉망받는 길을 마다하고 기어이 가시밭길을 택하는/ 적은 수임료와 엄청난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불타는 정의감으로 시대의 폭력에 맞서는 양심적 지식인 혹은 적의 화살을 맞아가며 아군의 퇴로를 지키는 비장미 넘치는 장수”다. 이런 사람들은 어쩐지 평범한 법대생들과 달리 어릴 때부터 사회의 부조리를 깨닫고 법으로서 약자를 대변하겠다고 결심했을 것만 같다. 위인전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싹수가 달랐다고 해야 스토리가 뽑히는 법이다. 작가의 기대와 달리 법대에 진학한 이유에 대하여 “문과에서 공부 잘하면 보통…”, “그냥 성적에 맞춰서…”, “집에서 가라고”라는 대답이 나온다. 보통의 법대생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사법시험을 본 이유에 대해서는 한술 더 떠 “법대에 갔으니까요”, “집에서 보라고 해서요”, “제대하고 보니 다들 사시 준비를 하고 있길래…”, “행시에 떨어져서…”라는 대답이 이어진다. 인권변호사 스토리에 필요한 비범함이 보이지 않는다. 재판이 끝나면 불리한 상황에서 변호사가 울려고 해 재판장이 재판을 연장했다는 일화에서는 노동변호사가 법정에서 사자후를 토하면서 투쟁하는 흔한 이미지가 산산이 깨져 버리기도 한다. 민주노총 법률원 변호사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최규석 작가의 만화 의 한 장면. 변호사법 제1조 제1항에 충실한 선택 세속적인 욕망은 없냐는 질문에 큰 집이나 큰 차가 가지고 싶다고 답하는 그들은 정의만을 바라보는 영화 속 히어로가 아니라 평범한 이웃에 가깝다. 낮에는 주로 상담하거나 재판을 하고, 밤에서야 서면을 작성하느라 야근과 과로가 일상이 된 생활도 다른 송무 변호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 강도가 보수에 비해 높은 편이고, 노동 관련 소송은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많아 사건 자체에 대한 부담감은 다른 일반 변호사보다 더 높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장기 투쟁 노동조합이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우울감이나 IMF 사태 이후 노동조건이 악화되는 현실에서 느끼는 패배감과도 싸워야 한다. 소송에서 이겼을 때도 멋지고 폼 나게 현실이 확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민주노총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가족관계에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법대에 갈 때만 해도 “예쁜 여학생과 함께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사람”, “그냥 막연하게 정장 쫙 빼입고 미국 변호사 자격 따고 외국어로 막 대화하는 성공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어쩌다가(?) 민주노총 변호사가 된 것일까. 설립 때부터 법률원에서 일하고 있는 권두섭 변호사는 사법연수원 시절 노동법학회 총무를 했다가 민주노총에서 법률상담을 자주 하게 되었고, 어느새 당연히 민주노총에 오는 걸로 되었다고 말한다. 인생을 바꿀 만한 극적인 사건 하나 없이. 권 변호사는 “그냥 대학 졸업하고 직장 취업한 보통사람들처럼 생각하면 어렵지 않다”고 말하지만, 작가는 “복권에 당첨돼 놓고도 당첨 안 됐다고 생각하고 살라는 거랑 뭐가 달라”라고 반문하며 왜 그런 삶을 사는지 납득할 수 있는 명쾌한 계기를 찾는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다. 결정적인 순간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긴 길 위의 여러 선택들이 모여 오늘을 만들어 냈음을. 변호사법 제1조 제1항은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민주노총 변호사들은 매순간 그 사명에 따라 작은 선택들을 이어간 것이다. 때로 이 일이 가치가 있는지 회의하고 좌절을 극복해 가면서. 그들의 위대함은 거기 있다.
만화로 본 세상
[비상식의 사회]그래도 민주노총은 없어지지 않는다(2016. 04. 05 16:24)
2016. 04. 05 16:24 사회
박근혜 정권이 그날의 민중총궐기대회를 가지고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무슨 국가변란의 거대한 조직사건을 만들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서울구치소 정문으로 올라가는 길 옆에 피어 있는 홍매화는 붉게 흐드러져 있었다. 봄기운이 천지에 가득한 것 같았다. 좁은 접견실에서 철창을 사이에 하고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만나기 전까지는 나도 봄기운에 취해 있었나 보다. 그러나 아직 민주주의의 봄은 멀리 있었다. 120번 수번을 단 죄수복의 한상균 위원장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고, 쥐고 있는 손에 부르르 힘이 갔다. 한상균이 같혀 있는 것은 개인 한상균이 아니라 민주노총이 갇혀 있는 것이고, 우리나라 노동자가 갇혀 있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씩씩한 모습 보이려 애써 웃는 얼굴이었지만, 억울함과 분노의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의 죄목은 집회와시위에관한법률 위반과 그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과 특수공무집행방해죄, 일반도로교통법 위반 등이었다. 참 구차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12월 10일 조계사에서 은거하던 한상균 민주노총위원장이 자진퇴거해 남대문서로 압송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소요죄를 적용한 검찰의 의도는 그런데 한상균 위원장과 접견을 하면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한상균 위원장을 구속하게 된 주요 사건은 지난해 11월 14일에 있었던 민중총궐기대회인데, 공동주최한 모든 단체의 책임자를 소환하는가 하면, 그 일로 인해 민주노총의 조직실장 등 중앙 상근자 4명이 더 구속되었고, 산하 연맹이나 산별노조·지역본부 일꾼들도 다수 구속되는 등 대대적인 수사를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날 집회가 경찰의 무리한 차벽대응으로 인해 다소 과격하게 진행되기는 했지만, 광우병 촛불사태 이후 진행된 여러 번의 촛불시위의 진행과 정부의 대응을 미루어 보면 너무 과도한 측면이 있다. 오히려 그날 경찰의 무리한 진압 과정에서 규정을 어긴 물대포의 발사로 시위에 참가한 농민이 맞고 쓰러져 뇌사상태에 빠지는 등 과잉진압의 책임을 대회 참가자들에게 전가하려는 술책 정도로 생각했는데, 진행되는 상황으로 보면 그 이상의 무엇이 있는 것 같아 염려스럽다. 우선 경찰이 한상균 위원장을 송치하면서 소요죄를 적용했다는 사실이다. 형법상의 소요죄는 ‘다중이 집합하여 폭행, 협박 또는 손괴행위를 함으로써 사회적 평온을 헤치는 행위’로, 1년 이상 10년 미만의 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는 범죄이지만 이 범죄행위가 갖는 실제 의미는 훨씬 엄격하고 상징적이어서 함부로 적용되지 않았다. 이 법이 실제 적용된 사례는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과 1986년 5·3 인천항쟁 두 번이었다. 경찰은 이번 민중총궐기대회를 자기들 표현으로 1980년 광주사태나 1986년 인천사태 수준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고, 수사지휘를 받는 경찰이고 보면 이것은 더 상부의 판단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검찰이 한상균 위원장을 소요죄 적용을 빼고 기소한 걸 보면, 법 해석의 무리나 증거 불충분 등으로 우선은 유죄 판결이 어렵겠다는 판단을 한 것 같으나 아주 포기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 뒤에도 경찰은 민중총궐기대회 참가자 1500명 이상을 소환 조사했고, 그 중 891명을 수사대상자로 했다거나 최근에 밝혀진 대로 민주노총의 주요 간부를 포함한 다수의 조합원들에 대한 집중적 통신자료 수집 행위 등이 그것을 방증한다 할 것이다. 박근혜 정권이 그날의 민중총궐기대회를 가지고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무슨 국가변란의 거대한 조직사건을 만들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법 취지에도 맞지 않는 북한의 행태를 빌미로 테러방지법을 무리하게 통과시키는가 하면, 유일하게 남은 사회적 저항세력인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 운동에 대한 탄압을 집요하게 벌여가고 있는 것이 모두 별개의 일이 아닌 것 같다. 지난 하반기부터 노동개혁이란 이름으로 폭력적으로 국회와 정치권을 공격하고 있는 것도 실제로는 내용보다 국민을 대상으로 중요 의제를 선점하고 이데올로기 공세를 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짧게는 박근혜 정권의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볼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일당독재 체제로의 장기집권 음모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잃었던 10년을 되찾았다며 시작한 이명박 정권은 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지며 수구정권의 면모를 갖추려는 노력을 기울이며, 그들이 이상으로 삼고 있는 토건 중심의 개발독재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북한과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교묘히 활용하여 북한의 위협을 과대포장하고 안보의식을 강화함으로써 위기의식을 최대한 과장했다. 착한 국민을 속여 다른 생각을 못하게 만든 것은 조선일보 등 수구 언론과 이명박 정권이 애써 구축한 종합편성 채널이었다. 쓰레기 신문, 방송이란 소리를 당연한 듯 들으면서도 박근혜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즐겁게 수행하고 있다. 저항세력의 뿌리를 뽑겠단 말인가 거의 유일하게 남은 저항세력인 민주노동조합을 파괴하기 위해 헌법정신은 말할 것도 없고 구체적 법률 조문까지 무시하며 탄압에 몰두했다. 공무원노조의 설립 신고를 하찮은 절차상의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노동조합법과 국제법상 적극적으로 보장하도록 되어 있는 해고노동자의 조합원 자격을 문제 삼아 9명의 해고자가 포함되었다고 6만 전교조를 시행령의 규정을 핑계로 법 밖으로 몰아낸 것이 세계가 경악하고 있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이다. 법을 가장 모범적으로 준수해야 할 책임이 있는 정부가 실질적 사용자 역할을 하는 정부 투자 공기업에서 산별교섭 기피 등 불성실 교섭은 말할 것도 없고, 임금 등 가이드라인을 정하는가 하면 단체협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등 노동 관련법을 거의 무시하고 있다. 또한 노사관계를 원활하게 하여 쓸데없는 노사분쟁을 미리 예방해야 할 정부가 일방적으로 사용자 편을 들어 노사관계를 악화시키며 노동조합의 설 자리를 없게 만들고 있다. 결국은 민주노조를 국민의 적으로 만드는 일에 정부가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정권이 집요하게 통과시키려는 이른바 노동개혁법안도 따지고 보면 경제파탄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돌려 더 쉬운 해고, 더 낮은 임금과 그것을 제도적으로 가능케 하는 비정규직의 양산을 통해, 노동자의 몫을 더 줄여 재벌기업에 몰아주자는 것이다. 그것을 알고 저항하며 싸우는 민주노조가 박근혜 정권으로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저항세력을 꺾지 않으면 영구집권체제 구축이 어렵겠다는 판단이 그들에게는 아픈 현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해 11·14 민중총궐기대회는 그들에게는 하나의 위기이자 기회로 판단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볼 수도 있다. 시위대가 서울 도심을 뒤덮고 교통을 마비시킬 정도로 위협적이었고,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야기된 폭력사태를 역이용하기 좋은 조건이기도 했다. 그래서 경찰은 소요죄의 칼을 빼들고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쓰레기 언론을 동원해 기선을 잡은 경찰은 우선 자기들이 명백한 책임이 있는 백남기씨 문제를 무시하고 뭉개버렸다. 1차 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다음은 민주노총 등 저항세력을 이 기회에 한 칼에 보내는 일이다. 조계사의 보호를 받고 있던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여론을 조작·동원하여 스스로 출두하게 만들었다. 2차도 성공이었다. 이제 뿌리를 뽑는 일만 남았다. 거대한 음모는 진행 중이다. 총선 여론을 감안하며 시기를 조정하고 있을 뿐이다. 총선에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판단이 서면 투표일 전에 터트릴 것이고, 불리하다고 여겨지면 총선 뒤의 새로운 역관계 속에서 더 가혹한 피의 잔치를 준비할 것이다. 어떤 그림을 그릴지 우리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상식 밖의 일이 버젓이 벌어질 것만 같아 벌써 소름이 돋는다.
비상식의 사회
민주노총 직선제가 ‘넘어야 할 산’(2014. 11. 04 14:55)
2014. 11. 04 14:55 사회
ㆍ투표율 50% 넘기지 못하면 무효 처리… 2만곳 넘는 투표소 투명관리 관건 민주노총이 창립 20주년을 앞두고 위원장 직선제 문제로 들썩거리고 있다. 선거권을 가진 조합원만 약 65만명이 참여하는 초대형 이벤트이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은 이전까지는 대의원들에 의한 간접선거로 위원장을 선출했다가 이번부터 직선제로 바꿨다. 선거는 위원장과 수석부위원장, 사무총장이 팀을 이뤄 출마하는 러닝메이트 방식으로 치러지며, 3명 중 1명 이상이 여성이어야 한다. 10월 31일까지 선거인명부가 확정된 상태이며, 이후 후보등록, 선거운동, 투·개표 과정이 남아 있다. 민주노총은 직선제를 위해 2만여 곳에 투표소를 설치하고, 6억원 이상의 예산을 사용할 예정이다. 민간이 주도하는 단일 선거로서는 이례적인 규모다. 투표는 12월 3일부터 9일까지 일주일 동안 현장거점 투표와 현장순회 투표, ARS 투표, 우편투표 등 네 가지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번 선거로 탄생할 위원장은 박근혜 정부의 후반 3년간 민주노총을 이끌게 된다.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본부에 직선제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 백철 기자 민노총과 임원진 위상 강화 기대 신승철 위원장은 “직선제는 단절된 민주노총 내부의 소통을 혁신하고 노동자 직접민주주의의 성과를 세상에 알리는 자부심이 될 것”이라면서 “가맹·산하조직은 더욱 가깝게 연결되고 중앙과 조합원의 관계는 ‘서로’에서 ‘우리’로 발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상 초유의 임원진 직선제를 앞두고 민주노총 내부에서는 기대 반 우려 반이다. 민주노총 위원장 직선제 논의는 16년 전부터 시작됐다. 1998년 당선된 이갑용 위원장은 임원 직선제를 공약으로 했다. 하지만 직선제로의 규약 개정이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됐다. 시간이 흘러 2009년이 돼서야 임원 직선제 내용이 규약에 포함됐다. 하지만 준비 부족 등 실무적인 이유로 지속적으로 시행 시기는 연기됐다. 2012년 12월에도 도입될 예정이었지만 그해 5월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논란이 터지면서 또 유예됐다. 당시 김영훈 위원장은 직선제 유예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지난한 논의 끝에 지난해 1월이 되어서야 2014년 12월 직선제 선거가 확정됐다. 민주노총은 8월부터 직선제사업본부를 설치해 본격적인 실무작업에 들어갔다. 9월에는 전국 선거관리원에 대한 순회교육을 진행했다. 10월 14일에는 ‘민주노총 20년, 새로운 전망과 투쟁’이라는 주제의 토론회도 개최했다. 노동계 인사들은 위원장 직선제가 민주노총의 떨어진 위상을 회복하고, 임원진의 대표성도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1998년에 이갑용 위원장과 함께 직선제 논의를 주도했던 허영구 좌파노동자회 대표는 “대통령이 다섯 번 바뀌는 동안 간선제가 유지되면서 일반 조합원들은 위원장이 누군지도 모르는 게 현실”이라면서 “민주적인 위원장 선출과정을 통해 민주노총의 위상도 다시 세우고, 조합원들의 의식도 각성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신귀섭 민주노총 선관위 사무국장은 조합원과의 약속을 지키는 차원에서라도 임원 직선제 선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민주노총은 정권이 공약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해 왔다. 그렇다면 우리부터 약속한 바(직선제)를 지켜야 한다. 또한 직선제로 선출될 임원진은 아무래도 기존 임원진보다는 더욱 책임감을 갖고 활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치러질 직선제가 넘어야 할 산도 많다. 우선 공직선거와 달리 민주노총 직선제 선거는 50%의 투표율을 넘겨야 한다. 현행 노동조합법 16조에 따르면, 노동조합 임원 선거는 전체 조합원 과반수가 투표에 참여한 뒤,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하도록 되어 있다. 민주노총의 규약도 마찬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신귀섭 사무국장은 “1차투표에서 50% 투표율이 나오지 못하면 투표함을 열어보지도 못한 채 끝나는 거다. 하지만 한때 직선제를 반대하던 분들까지 직선제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만큼 충분히 50%는 넘길 것”이라고 설명했다. 1차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을 경우 상위 2개 선본이 결선투표에 오른다. 결선투표는 법적으로도, 민주노총 규약상으로도 50% 투표율 제한이 없다. 민주노총은 이미 3개 이상의 선본이 출마할 것으로 예상하고 결선투표 준비까지 마쳤다고 밝혔다. 20인 이하 사업장 투표가가 전체 80% 문제는 2만여곳에 이르는 투표소를 얼마나 투명하게 관리할 수 있느냐이다. 80% 이상의 투표소가 20인 이하의 사업장에 배치되면서 투표소가 늘어났다. 일각에서는 투명한 선거관리가 가능한 대규모 사업장을 제외한 나머지 곳은 부재자 투표처럼 우편투표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하지만 우편투표가 직접·비밀선거의 원칙을 훼손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 데다, 예산도 더 많이 들어 결국 우편투표는 일부 부재자 투표에만 적용됐다. 대신 민주노총은 투표와 개표를 분리시켰다. 산별노조에서 투표를 담당하는 대신, 개표는 지역본부 차원에서 이뤄진다. 이렇게 되면 한 쪽에서 부정을 저지르더라도 다른 쪽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게 민주노총의 설명이다. 한국보다 조직이 잘 된 유럽의 노동조합도 하지 않는 직선제를 굳이 할 필요가 있느냐는 문제인식도 있다. 민주노총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노동조합 총연맹 수준에서 임원 직선제를 하는 곳은 네덜란드와 아르헨티나뿐이다. 민주노총·한국노총보다 조합원도 많고, 조직력도 좋은 유럽 선진국에서도 총연맹 임원은 간선제로 뽑는 것이 일반적이다. 허영구 대표는 “독일의 경우 산별노조 조합원 숫자만 100만 단위가 넘는다. 한국에선 총연맹이 총파업 등 투쟁 지침을 내리지만 유럽의 경우 산별노조 단위에서 지침을 내린다”면서 “총연맹이 직접 노동자 투쟁을 주도해야 하는 한국 현실과 산별노조의 협의체로서의 기능만으로도 충분한 유럽이나 미국의 사례를 곧바로 비교할 순 없다”고 말했다. 한국노총에서도 2004년 임원 직선제를 도입하려 했었다. 하지만 현실화하진 못했다. 예산과 관리인력 확보 등의 문제 때문에 오랜 논의 끝에 직선제 도입은 철회됐다. 대신 한국노총은 임원을 뽑는 선거인단의 숫자를 4배가량 늘려 더 많은 조합원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방향을 택했다. 2004년 직선제 논의에 참여한 바 있는 강훈중 한국노총 대변인은 “임원 선거 때 체육관에 선거인단이 모여 투표를 한다. 이 정도도 실무 준비하는 게 만만치가 않다”며 “민주노총 선거권자가 60만명이라고 볼 때, 투표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선거공보물을 만들고 보내는 일도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귀섭 민주노총 선관위 사무국장은 “수십만명을 대상으로 처음 실시하는 직선제인 만큼 한치의 오류도 없이 선거가 끝날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며 “세계에서 손꼽히는 직선제 사례를 만들어가는 만큼 색안경을 끼기보다는 그 의의를 생각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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