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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대승의 소수관점] (50) 뒤처리 전문, 한국 민주주의(2024. 12. 20 15:00)
2024. 12. 20 15:00 정치
지난 12월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국민촛불대행진에 참석한 시민들이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자 환호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한국 민주주의의 최대 강점은 내적 위협이 발생할 때 뚜렷이 드러난다. 윤석열의 내란 직후, 한국 시민이 보여준 반응 속도와 강도를 보라. 세상 어디에도 이런 강력한 방어 장치를 갖춘 민주주의가 없다. 많은 사람이 여기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감탄만 하기에는 뭔가 찝찝하다. 불과 2년 전 윤석열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도 한국 시민이었다. 외부의 폭력이 개입한 적도 없고, 선거 부정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인민의 일반 의지는 민주주의 선거제도를 통해 그를 선택했다. 물론 ‘난 그를 찍지 않았다’고 원망 어린 항변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게 별 소용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권력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결정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대통령이 된 자가 2년 뒤에 군사쿠데타를 시도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민주주의에서 상상 가능한 최악의 악몽은 무엇일까? 광인(狂人)이 국가수반으로 선출되는 상황 아닐까? 정상적 민주주의는 결코 이런 상황을 용납하지 않는다. 한 인물이 국가 권력의 정점에 오르려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검증 장치를 통과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그런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벌써 두 번째다. 2013년에는 아무런 판단 능력이 없는 꼭두각시를 청와대로 보냈고, 4년 뒤에 탄핵했다. 2022년에는 과대망상과 음모론에 빠진 인물을 대통령으로 뽑았고, 2년 만에 다시 탄핵하는 중이다.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곳에서도 권력자의 부패나 무능은 흔한 일이지만, 한국에서 벌어진 사건은 그런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전진이 아닌 원상회복 한국 민주주의는 뒤처리 전문이다. 위협이 발생하면 신속하고 확실하게 처리하지만, 위협 자체를 예방할 역량은 없다. 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망나니가 만든 난장판을 정리하는 데는 뛰어나지만, 망나니의 등장 자체를 막지는 못한다면, 이걸 과연 유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직후, 미국 정부는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높이 평가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런 말을 듣고 자부심을 느껴도 되는 걸까? 사실 그것은 제 발에 제가 걸려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회복력 아닌가? 마냥 뿌듯해하기에는 뭔가 멋쩍은 상황이다. 진지하게 자문해야 할 때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과연 정상적인가? 한국은 민주주의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나라인가? 지난 12월 3일 이후의 상황을 보며, 적지 않은 사람이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는 완전히 다르다. 군사 정권은 역사의 앞길을 막고 있는 거대한 장애물이었고, 그것을 제거하는 작업이 곧 민주주의를 향한 전진이었다. 반면 박근혜와 윤석열 탄핵은 앞마당에 떨어진 오물을 치우는 작업에 가깝다. 이런 작업의 목적은 전진이 아니라 원상회복이다. 더럽고 귀찮은 일을 처리하면 원래 상태로 돌아가게 될 뿐, 더 나은 상태로 이행하지는 않는다. 윤석열 파면과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은 별개의 문제다. 지난 8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지난 12월 14일 서울 한남동 관저에서 윤 대통령이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발표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2017년 박근혜 파면이 확정됐을 때, 모두가 ‘시민의 승리’를 자축했다. 그때 승리의 의미는 무엇이었나? 오랜 정당 정치를 거쳐 대권주자가 된 후, 민주적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당선된 자가 알고 보니 ‘비선 실세’의 꼭두각시였다. 그로 인해 상상을 초월하는 난장판이 만들어졌는데, 한국 시민은 다행히 그 뒤처리를 무사히 마쳤다. 승리가 이런 뒤처리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2016년의 시민은 승리한 것이 맞다. 하지만 승리가 한국 민주주의의 진전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한국 시민은 결국 패배했다고 말해야 한다. 2024년이 2016년의 패배를 증언한다. 비슷한 난장판이 다시 벌어졌고, 이번에는 군사쿠데타라는 훨씬 더 심각하고 직접적인 위협을 가져왔다. 승리의 의미 지난 12월 14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이후 또다시 ‘시민의 승리’를 자축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고 있다. 이번에는 승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헌법재판소가 탄핵 인용 결정을 내리고, 윤석열이 파면되고, 그와 주변 일당이 내란죄로 처벌받고, 정권 교체가 완료되면, 그것이 승리일까? 이번에도 승리가 뒤처리의 성공을 의미한다면, 이 모든 절차가 끝난 후 마음껏 시민의 승리를 기뻐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떤 민주주의를 만들 것인지 고심하는 사람이라면 인내심을 가지고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수년 혹은 수십 년이 지난 후, 한국 민주주의의 정상성과 안정성이 비로소 보장된 다음에야 승리를 자축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안정성과 정상성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어떤 세력이 집권하든 간에 큰 사고 없이 국가를 운영하다가 임기를 마무리하고, 선거를 비롯한 정상적 절차를 통해 권력 구조가 교체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민주주의는 이러한 최소한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지난 20년 동안 당선된 다섯 명의 대통령 중 세 명이 국회에서 탄핵 소추됐다. 그중 한 명은 파면됐고, 또 다른 한 명은 헌재 결정을 앞두고 있다. 이 두 사람이 쫓겨난 것은 권력 다툼에서 패배했기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정상성의 기준에서 완전히 벗어난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 둘은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가? 한국 민주주의는 어떤 방식으로 비정상적 상태에 있는 정치인을 걸러내는가? 대통령이 되려는 인물이 갖추어야 할 최소 조건에 관해 한국 시민들은 최소한의 공통 기준을 가지고 있는가? 이제 모두의 관심이 점차 다음 단계로 옮겨가고 있다. 탄핵 이후 더 큰 변화를 준비해야 한다는 말을 부정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문제는 변화의 수준이다. 다음 대선에서 정권 교체를 하면 될까?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는 걸 지난 8년의 시간이 보여준다. 다음 정권에서 더욱 과감한 개혁 정책을 추진하면 될까? 그런 시도는 긍정적 변화를 가져오겠지만, 개별 정부의 정책으로 한국 민주주의 자체를 바꿀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럼 대통령제를 내각제로 교체하는 수준의 변화가 필요할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과연 그게 문제의 해결책일지, 문제를 다른 문제로 교체하는 꼼수일지는 두고 봐야 한다. 지금은 더욱 근원적인 수준의 변화를 계속 상상하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국 민주주의는 우리의 상상을 벗어나는 수준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을지 모른다.
박이대승의 소수관점
[신간] 쿼바디스, 미국 민주주의(2024. 11. 06 06:00)
2024. 11. 06 06:00 문화/과학
병든 민주주의, 미국은 왜 위태로운가 토마 스네가로프, 로맹 위레 지음·권지현 옮김·서해문집·1만8800원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고, 미국은 민주주의의 나라라고 하는데 미국 대선 국면에선 혐오, 비방, 폭력 등 내부 갈등이 극대화한다. 이를테면, 4년 전 미 대선 이후 의회에서의 폭력 사태 같은 일들. 프랑스 저널리스트인 토마 스네가로프와 역사학자인 로맹 위레는 미국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고 진단한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미국 민주주의의 기원과 발전, 위기의 경로를 ‘결정적 순간’ 여섯 가지를 꼽아 설명한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구상한 미국의 민주주의는 무엇이며, 이는 유럽의 제국주의와는 어떻게 조응했는지, 또 미국이 힘 있는 국가로서 세계적인 권위를 획득하기까지 고립과 확장의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작용했는지 설명한다. 베트남 전쟁, 테러와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미국 민주주의가 어떻게 변화, 혹은 위기를 맞았는지 정리한다. 특히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문헌 자료와 지도, 그래픽 등을 풍부하게 넣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한국은 미국과 다른 역사를 써왔지만, 현재 ‘민주주의의 위기’를 들여다보는 것은 필요한 일일 것이다. 사랑과 통제와 맥주 한잔의 자유 김도미 지음·동아시아·1만7000원 사회활동가인 김도미가 암 경험자로서 쓴 에세이. 암 투병기나 극복기가 아니다. 한국사회의 ‘환자 역할’에 대한 불만 사항을 쓴다. 김도미는 암 경험자를 둘러싼 근거 없는 항암 정보와 ‘절대 안정’이라는 신화가 오히려 암 경험자의 건강을 위협하고 사회 복귀를 가로막는다고 말한다. 김도미는 암 경험자들이 박탈당한 자유에 대해 말한다. 그는 환자를 지나치게 통제하고 죄책감을 강요하는 암 치유 문화를 비판하며 “몸에 대한 윤리는 나를 잘 돌보는 데에도 있지만 나를 즐겁게 하는 데에도 있다”고 역설한다. 기존 의료·복지제도가 환자들을 과열된 암 치유 문화로 내몰고 있다고 지적한다.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유홍준 지음·창비·2만2000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의 산문집이다. 인생의 한 장면을 회고한 글들, 문화재와 관련한 이야기들, 백남준·신영복·홍세화·김민기 등 예술가와 스승, 벗에 관해 쓴 글들을 모았다. 글쓰기 조언을 담은 ‘문장수업’을 부록으로 실었다. 관조하는 삶 한병철 지음·전대호 옮김·김영사·1만6800원 재독 철학자인 한병철은 현대사회에서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삶’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그로 인한 인간 행위는 인간성과 자연을 훼손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무기력한 상태와는 다른, ‘무위’가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창조적인 삶의 태도라고 역설한다. 눈치 없는 평론가 서정민갑 지음·오월의봄·1만7200원 자신을 ‘대중음악의견가’로 칭하는 서정민갑이 20여 년간 음악을 듣고 쓰는 노동과 생활 이야기를 책으로 냈다. 권력이든 민중음악이든, 그는 ‘눈치 보지 않고’ 의견을 낸다. 평론의 기준, 내용, 형식, 역할 등 대중음악평론가로서의 ‘직업관’을 소개한다.
신간
[김유찬의 실용재정](45) 민주주의의 위기와 조세재정정책(2024. 09. 13 16:00)
2024. 09. 13 16:00 경제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9월 4일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해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는 소득과 자산 상위 0.1%나 0.01%에 속하는 계층에게 부와 소득이 지나치게 집중된 세계에 살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여기에 더해 0.1%의 사람, 1000명 중의 1명에게 도움이 되고 나머지 999명에게 해로운 세제개편을 진행하고 있다. 1명의 이익을 위해 999명이 희생당하는 체계가 정치적으로 가능하고, 그런 효과를 가지는 세법이 국회에서 통과된다면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것과 같다. 현재 절실하게 필요한 조세재정정책은 한국의 소득 및 자산 상위 0.1%의 자산 축적 경로를 파악하고, 이에 대응하는 세제개편과 재정정책일 것이다. 이러한 정책의 장기적 실천을 통해 양극화가 초래하는 불평등과 저성장의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다. 그러려면 조세제도의 전면적인 개편과 함께 적극적인 재정정책이 필요하다. 자산·소득 상위계층에 구멍 뚫린 조세제도 우선 조세제도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소득세가 바로잡혀야 한다. 한국의 소득세 최고세율은 45%로 추가되는 지방세 부담까지 고려하면 50%에 달한다. 세율 수준으로서는 부족하지 않다. 다만 최고세율이 적용되는 과세표준 구간이 매우 높게 설정돼 있고, 금융소득 등 자산소득에 대한 취약한 과세가 문제점으로 거론된다. 법인세의 문제는 3000억원 이상이란 매우 높은 과세표준 구간에 대해서만 24%의 세율이 적용된다는 점이다. 또 국가전략산업에 대한 매우 높은 수준의 투자세액공제와 연구개발(R&D) 세액공제 등으로 기업이 실제로 부담하는 세율 수준도 매우 낮다. 기업에 대한 이런 혜택은 낮은 배당 성향의 한국적 상황에서 궁극적으로 기업의 대주주들에게 귀속된다. 윤석열 정부는 지금까지 가업상속공제라는 명분으로 상속세를 약화시켜 왔는데, 여기에 더해 자녀 공제를 대폭 늘리고자 한다. 민주당은 배우자 공제를 크게 늘리겠다고 한다. 상속세 형태가 유산세 제도인 이상 어떤 명분이든 상속세 부담을 줄이기만 할 뿐이다. 상속세 납부 후에 남은 자산이 배우자의 몫이 되거나 자녀의 몫이 되는 것은 그들이 정하는 것이다. 상속세는 대를 이어가는 양극화 문제를 완화하는 데 가장 중요한 조세제도인데, 이를 약화한다면 양극화가 대폭 강화되는 기제로 작용할 것이다. 한국에는 조세제도에 자산 및 소득 상위계층들을 위한 특별한 구멍들이 있다. 우선 국외 전출자에 대한 출국세 제도를 들 수 있다. 출국세는 대주주인 거주자가 해외 이주 등의 사유로 출국하는 경우 출국 당시 소유하고 있는 국내 주식 등의 평가 이익을 양도소득으로 보아 양도소득세를 매기는 것으로 2018년부터 적용되고 있다. 내국인이 외교부에 해외 이주 신고를 하는 경우 납세증명서를 외교부에 제출해야 하는데, 국외 전출자의 요건은 출국일 전 10년 중 5년 이상 국내에 주소 또는 거소를 둘 것, 출국일 직전 연도 소유주식 등의 비율·시가총액 등을 고려해 대주주에 해당할 것 등이다. 대주주는 상장·비상장·코스닥·코넥스 구분 지분율 1~4%, 지분 금액 15억~40억원을 기준으로 한다. 주식양도차익에는 국제적으로는 거주지국 과세원칙이 적용된다. 따라서 해외 이주를 하면 과세권이 다른 나라로 영구히 넘어가기에 당사자가 국내에 거주하는 기간 형성된 양도차익은 해외 이전 시점에 과세를 하겠다는 취지로 국외 전출자에 양도소득세를 부과하는 제도가 생겼다. 반면 부동산양도차익은 부동산 소재지국 과세가 국제적으로 통용돼 문제가 없다. 그런데 한국의 제도는 대주주가 아닌 여러 종류 주식에 분산 투자한 부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데 상속세 문제도 남아 있어서 상당한 과세 공백이 생기고 있다. 더 중요한 이슈는 경제적 실질 원칙(실질과세의 원칙)과 남용 방지 규정이다. 실질과세 원칙은 헌법상 기본이념인 평등의 원칙을 조세 법률관계에 구현하기 위한 실천적 원리다. 조세 부담을 회피할 목적으로 실질과 괴리되는 비합리적인 형식이나 외관을 취하는 경우 그 형식이나 외관에도 불구하고 실질에 따라 담세력이 있는 곳에 과세해 부당한 조세 회피행위를 규제, 과세 형평을 제고해 조세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규범이다. 그런데 조세법률주의와의 관계에서 실질과세 원칙의 실현이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다. 조세법률주의는 법률의 근거 없이는 국가는 조세를 부과·징수할 수 없고, 국민은 조세의 납부를 강요받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실질과세 원칙을 강하게 적용하자는 측은 조세 법규를 다양하게 변화하는 경제생활 관계에 적용해 예측 가능성과 법적 안정성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세법률주의의 형해화를 막는 불가분적 관계로 판단한다. 즉 실질과세 원칙의 적용을 통해 조세법률주의의 맹점이 보완된다고 본다. 이에 반대하는 측은 과세권의 남용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돼 납세자의 재산권을 침해해 조세법률주의와 충돌할 염려가 있다고 우려한다. 한국의 경우 법원이 후자의 입장을 상대적으로 강하게 대변해 실질과세 원칙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 긴축적 통화·확장적 재정정책 조합 필요 양극화와 민주주의 위기 극복을 위한 재정정책 운영의 측면에서는 경제 운영 체제의 변화가 요망된다. 조지프 스티글리츠나 토마 피케티 같은 학자들의 참여와 노력, 미국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버니 샌더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 등의 활약으로 불평등 이슈가 진보학자들이나 시민단체들의 의견을 넘어 공론의 장에서 주목받기도 했다. 코로나19 유행 시절 방역·소득지원을 위한 재정정책의 투입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고,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발생으로 통화정책의 한계도 나타났다. 바람직한 거시경제정책의 조합은 인플레이션과 부동산 연착륙을 위해 긴축적 통화정책을 유지하면서 확장적 재정정책을 통해 경기침체에 대응하고 취약계층을 지원하는 것이며, 소득 및 자산 상위계층을 겨냥한 조세정책으로 필요한 세원을 마련해 재정의 지속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경제의 장기적 성장을 위해서는 ‘과업지향의 재정정책(Mission oriented Fiscal Policy)’이 필요하다. 경제 전환과정에서는 국가가 해야 하고 국가만이 할 수 있는 혁신적 역할이 있는데, 이는 큰 규모의 재정지출을 수반한다. 예를 들어 에너지전환을 위해선 정부가 정책 프레임을 결정하고 먼저 인프라에 투자해야 한다. 민간이 감당할 수 없는 전환기 비용을 지원하고 동시에 공정한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교육과 주거, 일자리, 디지털화 등의 영역에서 사회적 투자가 필요하다. 이러한 투자는 잠재성장률을 높여주고 장기적인 성장을 견인한다.
김유찬의 실용재정
[김유찬의 실용재정](44) 0.1%의 힘과 민주주의의 위기(2024. 08. 23 16:00)
2024. 08. 23 16:00 경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박찬대 원내대표, 신임 최고위원들이 지난 8월 19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0여 년간 토마 피케티를 필두로 이매뉴얼 사에즈나 게이브리얼 저크먼 같은 젊은 학자들이 불평등과 경제성장과의 관계를 집중 조명하며 세계의 시선을 끌었다. 이들은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한 정도를 시기별·지역별로 방대한 자료 수집을 바탕으로 측정했다. 소득과 자산 상위 0.1%나 0.01%에 속하는 계층에게로의 부와 소득의 집중경로와 집중도, 그 의미를 부각했다. 1명이 999명의 경제를 어렵게 하는 세상에 살면서 그 교묘한 체제를 시장경제 혹은 민주주의라고 착각하게 하는 현실을 제대로 분석한 것이다. 이들은 불평등 혹은 자산축적의 경로를 밝히려고 노력하며 과세를 통한 문제해결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피케티는 저서 <21세기 자본>에서 경제성장률보다 자본수익률이 높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 보여주었다. 그에 따르면 자본수익률이 높은 중요한 요인으로 자본에 대한 저율과세가 꼽힌다. 미국의 예를 보면 근로소득세는 대체로 비례세적 부담구조다. 하지만 자본에 대한 저율과세 때문에 미국에서 종합소득세 부담은 소득 최상위 계층(상위 0.1%)에게, 소득 상위계층(상위 10%)보다 훨씬 낮게 나타난다. 미국의 상위 0.1%의 자산축적 경로는 장기자본소득에 대한 저세율, 지주회사(Holding Companies), 국제적 조세회피(조세피난처) 등의 요인이 크다는 것이다. 노동시장의 낮은 노조조직률과 이민정책으로 임금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점도 유효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낙수효과 미작동, 세계 경험이 증명 윤석열 정부는 2024년 세제 개편안을 통해 2022년과 2023년에 이은 세 번째 ‘부자 감세’ 세법 개정안을 제시했다. 올해 세법 개정안에서는 상속세와 금융투자소득세 등 자산 및 자본소득에 대한 세 부담을 줄이겠다고 했다. 상속세 부담 완화는 불평등과 경제 양극화라는 우리 시대 최대의 경제·사회적 위기 요인을 더 키우겠다는 것이다. 이번 정부 세제 개편안에서 주목할 또 다른 사안은 자본소득에 대한 과도한 혜택이다. 주주환원 촉진 세제(배당소득에 대한 분리과세 확대),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세제지원 확대 등은 근로소득과 비교해 이미 과도한 자본소득에 대한 세제 혜택을 더 확대하는 것이다. 공정하지 못하고 세수가 부족한 현실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 정책적 판단이다. 국민경제에서 성장은 상대적으로 소비성향이 높은 소득 하위계층의 가처분소득을 늘려줄 때 가능하며 이를 통해 성장과 세수의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2024년 정부 세제 개편안이 제안하고 있는 개인들의 자본소득에 대한 세 부담 경감은 소득 상위계층의 가처분소득을 늘려주는 것으로 성장과 세수의 선순환을 가져오기 어려운 내용이다. 윤석열 정부가 시행하고자 하는 세제개편, 소득과 자산 상위계층을 위한 감세 정책은 ‘낙수효과’라는 가상적이고 이념적인, 경제 주변부에 미치는 전달 효과가 성공적으로 작동하면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낙수효과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 세계의 경험이 웅변하고 있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대처 영국 총리 이후 전 세계는 신자유주의적 정책과 경제의 글로벌화와 이동성 있는 생산요소인 자본에 대한 과세를 지속해서 낮춰왔다. 결과적으로 자본 및 자본소득에 대한 점유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소득 상위 및 최상위 계층의 세금을 줄여주었다. 해당 기간 소득과 자산의 양극화는 심각해지고 소득 중하위 계층의 실질 소득은 정체됐으며 자산점유율은 계속 낮아졌다. 낙수효과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그 이상의 명백한 증거가 필요할까. 이 상황에서도 윤석열 정부와 경제관료들은 낙수효과만 반복해 되뇌고 있다. 한국의 소득 및 자산 상위 0.1%의 자산축적 경로는 어떠할까. 세제가 허용하는 경로로는 주식 및 부동산의 양도소득을 포함한 전반적인 자본소득에 대한 우호적인 세제도 작용하지만, 미국과 다른 점은 법인세의 낮은 실효세율을 들 수 있다. 미국의 법인세 체계와 달리 한국은 배당세액에 대한 공제를 허용한다. 미국에서는 법인세를 납부한 후 남은 소득을 주주들에게 배당하면 이에 대해 배당세액공제 없이 다시 한번 주주 차원에서 소득세가 부과된다. 이것은 매우 큰 차이를 만든다. 그 외에 법인세제에서 높게 설정된 최고세율 적용 과세표준구간, 통합투자세액공제, 연구개발(R&D) 세액공제 등이 법인세의 낮은 실효세율을 가능하게 해준다. 법인의 대주주들은 이러한 특혜를 낮은 배당 성향, 느슨한 회계 관행의 환경에서 매우 유리하게 즐길 수 있다. 그 외에 가업상속공제 등의 제도를 포함한 상속세제도 한국의 소득 및 자산 상위 0.1%의 자산축적 경로로 들 수 있겠다. 상법이나 공정거래법이 허용하는 경로로는 재벌기업들의 일감 몰아주기와 합병, 물적 분할 등의 기업구조변경, 다주택자들의 부동산 투자, 지주회사 등이 있다. 지주회사는 재벌그룹의 지배체계에서 과거 순환출자 역할을 대체하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피케티, 사에즈, 저크먼이 말하는 과세를 통한 불평등 해소는 소득 최상위 계층이 누리는 소득 대부분이 자본소득이기 때문에 이동성이 강한 성격의 자본이라는 생산요소에 대해 과세가 가능한가가 관건이다. 경제학의 전통적 시각에서는 조세 경쟁(tax competition) 때문에 어렵다, 바람직하지 않다는 시각이 있었으나 저크먼은 과세가 가능하다고 보았고 정책적 선택일 뿐이라고 분석했다. 자본에 대한 과세는 필요하며 다만 과세 실행을 위해 국제 공조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국제 공조로 자본에 대한 과세 실행해야 과세의 국제적 공조와 관련해 세계에서 지난 10년간 시도한 내용은 크게 보아 국가 간 금융정보의 교환과 다국적기업에 대한 15% 최저한세에 대한 논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것이 있다. 국가 간 금융정보 교환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고 볼 수 있으나 다국적기업의 저세율 국가로 이익 이전은 여전하다. 이를 통해 글로벌 법인세의 10% 수준의 손실이 생기는 것으로 평가된다. 글로벌 최저한세는 이제 거의 의미가 없어졌다고 봐야 한다. 저크먼은 자본소득에 대한 국제적 공조를 통한 실효성 있는 과세를 위해 여섯 가지 제안을 했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세계적으로 억만장자들(Billionaires)에게 2%의 자산세(순부유세)를 부과하고 다국적기업에는 법인세 25%의 최저한세를 규정해 빠져나갈 구멍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과세의 실효성 확보를 위해 나라마다 출국세를 도입하고 국세기본법에 경제적 실질 원칙과 남용방지 규정을 빈틈없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국제적으로 자산 등록제를 실시해 과세의 기본 인프라를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보았다. 0.1%의 사람, 1000명 중의 1명에게 도움이 되고 나머지 999명에게 해로운 세제 개편이 윤석열 정부에서 진행되고 있다. 1명의 이익을 위해 999명이 희생당하는 체계가 정치적으로 가능하고, 그런 효과를 가지는 세법이 국회에서 통과된다면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야당이 제 역할을 착각할 때 시작된다.
김유찬의 실용재정
[신간] 민주주의, 그 한계 너머의 것들(2024. 07. 31 06:00)
2024. 07. 31 06:00 문화/과학
민주주의,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애덤 셰보르스키 지음·이기훈, 이지윤 옮김·후마니타스·2만3000원 ‘평등’을 지향하는 ‘민주주의’를 정치체제로 택한 사회에서 왜 불평등은 해소되지 않고 있을까. 비교정치학자인 애덤 셰보르스키는 “민주주의에서 시민은 평등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평등하다’는 명제는 시민 각 개인의 특성을 포함한 개념이 아니라 익명성의 다른 말이기 때문이다. 셰보르스키는 평등뿐만 아니라 자기 통치(자치), 자유 등 민주주의의 이상적 가치들이 현실에선 한계가 있음을 역사적·현대적 사례와 데이터를 제시하며 설명한다. ‘자치’의 주체인 인민은 단수형이지만, 현실에서 복수의 인민이 추구하는 질서는 저마다 다르다. 그래서 자기 생각과 다른 정권이 집권하는 걸 목도한다. 셰보르스키는 민주주의가 ‘할 수 없는 것’, 즉 한계를 아는 것은 도리어 민주주의가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또 민주주의의 한계를 알아야 선동·폭력의 정치로 넘어가지 않을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가 민주주의 틀 안에서 자치·평등·자유라는 이상을 더 잘 실현할 수 있을까’란 질문에 답하고자 했다. 역사의 오류를 읽는 방법 오항녕 지음·김영사·2만3000원 역사가도 틀린다. 조선시대 왕릉의 안내도, 역사학자의 논문이나 저술, 중·고등학교의 교과서는 물론 유학의 대가들도 틀릴 수 있다. 역사가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선사 연구자이자 기록학자인 오항녕 전주대 대학원 사학과 교수가 동서고금 역사가들이 실수했던 사례들을 ‘유쾌하게’ 풀어낸다. 영화 <300>, <광해> 등 우리에게 익숙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그린 역사적 배경이나 사건에 대한 여러 오류도 읽어낸다. 광해군·사도세자에 대한 인물평, 실학·허학 논쟁,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둘러싼 논란 등 조선사의 주요 쟁점도 다뤘다. 오 교수는 역사의 빈틈과 오류를 읽는 것이 역사 공부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먼지 요제프 셰파흐 지음·장혜경 옮김·에코리브르·1만7000원 이 책의 부제는 ‘거실에서 우주까지, 먼지의 작은 역사’다. 먼지 알갱이가 뭉쳐서 지구로 자라난 과정부터 내 주변 작은 꽃가루 먼지가 어떻게 큰일을 해내는지도 알려준다. ‘먼지는 기후의 구원자일까, 킬러일까’란 질문의 답도 찾아본다. 19개 장 끝에 실린 ‘먼지 퀴즈’가 흥미를 돋운다. 음식조선 임채성 지음·임경택 옮김·돌베개·3만2000원 임채성 일본 릿쿄대 경제학부 교수가 일제강점기 조선의 식품산업과 음식문화를 연구했다. 당시 조선의 쌀, 소, 홍삼, 우유, 사과, 명란젓, 소주, 맥주 등 주요 식료품의 생산·유통·소비를 분석했다. 조선의 식품산업이 일제를 지탱해주는 기반 중 하나였다는 점을 밝혀낸다. 물속의 입 김인숙 지음·문학동네·1만7000원 김인숙 소설가의 ‘미스터리·호러 단편선’으로, 주요 문학상 수상작부터 미발표작까지 단편 13편을 한데 모았다. 첫 장을 장식한 단편 ‘자작나무 숲’에선 할머니의 시신을 유기하려는 손녀딸의 움직임으로 시작한다. 마지막까지 ‘서스펜스’(극적 긴장감)를 느낄 작품들을 엄선했다.
신간
“디지털 시민참여 확대, 정부 신뢰 높이고 민주주의 강화”(2024. 04. 08 06:00)
2024. 04. 08 06:00 사회
미코 라스크·신복용 헬싱키대 연구진·페르투 얌센 시트라 스페셜리스트 인터뷰 페르투 얌센 핀란드 혁신펀드 스페셜리스트와 미코 라스크 헬싱키대 소비자사회연구센터 교수, 신복용 소비자사회연구센터 박사후연구원(왼쪽부터)이 3월 29일 서울 광화문 주한핀란드대사관에서 ‘한국과 핀란드의 디지털 시민참여’를 주제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핀란드와 한국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유사한 점이 많아요. 지정학적으로 러시아를 포함한 강대국과 인접해 있고, 비교적 최근에 독립해 국가적인 정체성과 민족성을 강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화와 교육, 국가적 연구개발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터넷 보급률과 디지털 리터러시(문해력) 측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죠. 하지만 핀란드는 한국과 비교해 정부에 대한 신뢰, 부패지수, 정부 혁신, 언론 신뢰도, 행복지수 등 민주주의와 관련된 여러 측면에서 앞서 있어서 우리가 배울 부분이 있습니다.” 지난 3월 29일 서울 광화문 핀란드대사관에서 만난 신복용 헬싱키대학 소비자사회연구소(Centre for Consumer Society Research) 박사후연구원은 디지털 시민참여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핀란드는 유엔이 해마다 발표하는 세계행복보고서에서 올해까지 7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지난 3월 발표된 이 보고서에서 한국은 지난해보다 5계단 상승한 52위였다. 공적 기관에 대한 신뢰도가 양국 행복지수의 격차를 만든 주요 요인 중 하나라는 분석이 나온다. 핀란드는 행정의 투명성을 높이고, 정책의 성과를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도록 정보 공개에 적극적이다. 일례로 핀란드 헬싱키 시정부는 선출직 공무원의 공약 이행 상황을 시 홈페이지에 백분율로 표시하고 변동이 있을 때마다 업데이트한다. 이날 신 연구원과 함께 만난 미코 라스크 헬싱키대학 정치경제학부 교수, 페르투 얌센 핀란드 혁신펀드(Sitra) 스페셜리스트는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시민참여의 확대가 정부의 신뢰성을 높이고, 민주주의를 강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약 보름 일정으로 한국을 찾은 이들은 경기 수원시의 ‘새빛톡톡’, 서울시의 엡보팅(M-Voting) 같은 디지털 참여 서비스의 성과를 측정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경기연구원과 공동 연구 협약도 맺었다. 도시의 민주주의 비교 평가, 선의의 경쟁 기대 소비자사회연구센터는 기후 대응을 정부 정책의 주류로 만드는 방안, 데이터 기반 사회로의 변화 속에서 프라이버시의 문제 등을 연구했다. 정치학자, 인류학자, 인공지능 연구원 등이 함께하는 이 연구소에서 최근 주력하는 분야는 디지털 시민참여다. 빅데이터 분석과 인공지능에 기반을 둔 ‘코크리에이션 레이더(Co-Creation Radar)’라는 이름의 디지털 시민참여 평가 도구를 개발해 핀란드 헬싱키, 스웨덴 예테보리를 비롯해 유럽 내 여러 시 정부와 협력해 실증하고 있다. 시민의 정책 제안이나 민원 등 시민이 행정에 참여해 만들어지는 데이터의 양은 많은데, 대부분은 방치된다. 연구진은 이런 공개데이터를 활용해 시민참여의 민주적 측면을 측정하는 지표를 개발했다. 동향 분석과 시각적 분석, 자연어 처리 등을 이용한 내용 분석 혹은 기계학습을 통한 예측 모델 등으로 기존에 접근할 수 없었던 많은 양의 시민참여 데이터를 분석하고 있다. 특히 국가보다 도시에서 이뤄지는 활동에 집중했다. 라스크 교수는 “시민의 민주주의 참여를 고취하고,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도시의 민주주의 품질과 관련한 성과를 평가할 방법을 고민하며 만든 도구”라며 “시민의 정책에 대한 평가나 참여예산제도(시민이 예산편성에 직접 참여해 재정 운영의 투명성, 재원 배분의 공정성을 높이는 제도)가 도시 차원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서 도시의 민주주의 수준을 측정할 수 있는 지표를 만들려는 목적이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빅데이터·기계학습 분야를 연구하는 신 연구원은 “도시 내에서도 어떤 지역에서 시민의 소통이나 참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지,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런 소통·참여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모니터링할 수 있는 기능을 개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공무원은 시민의 정책 욕구를 빠르게 파악하고, 필요한 정책을 인공지능의 추천을 받아 도입할 수 있다. 정책 도입의 영향을 평가할 때도 유용하다. 라스크 교수는 “헬싱키시는 시민의 피드백을 연간 1만8000건 정도 받는데, 이 피드백 데이터가 쌓이면 방대해진다. AI를 이용하면 시민의 수요가 어디서 나오는지 파악하고,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 다만 이 알고리즘을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공동 개발해 개방성과 투명성을 갖추게 하고, 특정 집단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험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도시마다 겪는 문제가 다르므로 거시적 지표 외에도 해당 도시와 협업해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합한 지표를 개발한다. “도시가 뒤처진 부분을 가려내고, 민주적 참여를 가속할 수 있는 방안을 보여주는 최초의 도구”라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이 평가 도구가 전 세계 많은 도시에 확산하면, 국제적 비교 작업을 수행할 수도 있다. 라스크 교수는 “도시의 민주적 참여를 제대로 평가하고, 다른 국가의 다른 도시와 비교하면 조금이라도 더 자신의 도시를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한 경쟁, 민주적 참여를 향한 선의의 경쟁을 촉발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시민 참여예산제, 도시 전체 재정으로 확대 실험 서울시의 올해 시민참여예산은 500억원이다. 시 전체 예산(45조원)의 0.109%다. 핀란드도 상황은 비슷한데, 최근 핀란드 혁신펀드는 참여예산의 범위를 도시 전체 재정으로 확대하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얌센 스페셜리스트는 “시민 패널이 도시나 지역에 필요한 사업을 숙의 민주주의 형태로 논의해 도시의 재정 기획에 더 넓은 형태로 참여하게 된다”면서 “물론 이런 실험으로 대의제를 우회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책 결정자들이 일할 때 시민들의 의견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길 원한다”고 말했다. OECD는 2021년 발표한 ‘핀란드 공공기관에 대한 신뢰의 원동력’이라는 이름의 보고서에서 ‘핀란드 역설’을 언급했다. 정치인·행정기관에 대한 높은 수준의 신뢰에도 불구하고 시민이 참여해 정치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보는 ‘효능감’은 낮은 수준에 있다는 뜻이다. 참여예산의 확대는 시민의 정치 효능감을 높일 수 있다. 얌센은 “(국제적으론 높지만) 시민의 공무원에 대한 신뢰가 낮고, 공무원은 시민들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양방향으로 신뢰가 낮은 상황인데 이 프로젝트는 의사결정 과정의 투명성을 높이고, 선출직 지자체장과 공무원, 시민 사이의 신뢰를 구축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지난 3월 7일 스웨덴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는 연례보고서에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지수가 28위에서 47위로 하락했고, 민주화에서 독재화로 전환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디지털 도구를 활용한 시민참여가 이런 민주주의 후퇴를 막는 데 도움이 될까. 라스크 교수는 “핀란드에서도 NGO나 정당에 가입해 활동하는 시민의 수로 보면 시민의 정치활동이 줄어들고 있다. 이젠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일상에서의 민주적 경험이 참여의 동기가 돼야 한다. 민주주의는 신뢰와 뗄 수 없고, 정치 참여로 신뢰도를 높이면 정책을 실행하기 쉽고, 시민의 저항도 줄일 수 있다. 결국 거시적 차원에서의 차이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IT 칼럼]AI 그 이상의 AGI… 민주주의 위기의 예고(2024. 03. 05 06:00)
2024. 03. 05 06:00 경제
Photo by Cash Macanaya on Unsplash 2024년은 ‘선거의 슈퍼볼’ 해다. 전 세계 40개국 이상에서 세계인구 40% 이상이 투표권을 행사한다. 현대 민주주의가 정착된 이래 가장 많은 선거가 동시에 치러지는 역사적인 시점이기도 하다. 한편으론 빅테크 기업들이 인공일반지능(AGI) 개발을 목표로 치열한 경쟁을 펼치는 첫해이기도 하다. 특히 메타는 지난 1월 오픈소스 기반의 AGI 개발이라는 위험한 미션을 제시하며 AGI 열풍에 보란 듯 불을 댕겼다. 학습 과정이 진행 중인 오픈소스 AI ‘라마 3(LLaMa 3)’는 그들이 선보이는 AGI의 원형이라며 자랑까지 했다. 2024년은 이런 맥락에서 ‘AI 정치 세대의 첫 등장’을 의미한다. ‘AI 정치 세대’란 선거운동 과정에서 AGI 수준에 버금가는 인공지능 기술을 직·간접적으로 활용하거나 당락에 영향을 깊게 받은 세대다. 이전에도 몇 차례 딥페이크 같은 인공지능 기술이 선거에 활용된 사례가 있지만, 올해와 비교해선 안 된다. 챗GPT 등장 이후 고도화한 AI가 전면적으로 선거에 개입할 수 있는, 최적의 여건이 조성된 첫해이기 때문이다. 이들 AI 정치 세대는 임기 말께 AGI와 조우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 기술을 탄복할 만한 무언가로 평가할 것이다. AI로 당선에 도움을 얻었거나, 낙선에 결정적 영향을 받았거나 하며 그것의 위력을 맛본 터이기에 그렇다. 이들이 정무적 활용 가치에 주목한다면 정치적 의사결정에 더 많이 참고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위험성에 대비하기 위해 더 가까이 둘 것이다. 어느 용도로 활용될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자신에게 위임된 대표와 대변의 권한을 AGI에 재위임하는 최악의 결정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국회는 AGI에 유독 취약해 보인다. 정량적 입법 성과주의, 이념적 양극화, 갈등 조정 기능 외면 등 속도전과 효율성을 압박하는 정치 환경은 AGI 의존도를 높일 수 있다. 민주주의 그 자체를 위험에 빠뜨릴 뇌관이 될 수도 있다. ‘여의도 래커’라는 단어가 상징하는 것처럼 이슈만 등장하면 AGI를 활용해 자신에게 유리한 논평을 발표하고, 관련 법안을 쉽게 생성해 수일 안에 발의할지도 모른다. 이미 대한민국 국회는 ‘입법 어뷰징’이 난무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속도전 민주주의가 AGI로 더욱 강화되는 국면으로 흘러갈 수 있다. AI 정치 세대는 이 구조적 조건 앞에서 의사결정의 자율성을 AGI에 의탁하는 수준에 머물진 않을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더 다양한 이익이 대표될 수 있는 좋은 민주주의를 위한 DNA조차 AGI에 빼앗길 것이다. 그렇다고 경제적 효율화와 성과 최적화를 핵심 가치로 학습하게 될 AGI가 좋은 민주주의를 위해 의사결정을 제안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국내의 입법자들은 느리고, 때론 비효율적이며 유약하기만 한 민주주의의 과정을 AGI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에 어떻게 저항하고 대응할지 고민해야 한다. 선거 때마다 불거져 나오는 특정 세대의 투표권 배제론이 AGI 능력 이하 시민 배제론으로 확장되지 않도록 관리도 해야 할 것이다. AI의 정치적 세례에 도취한 뒤 AGI의 유용성을 경험하게 되면 그땐 늦다.
IT칼럼
[박이대승의 소수관점](37)민주주의의 진정한 적은 누구인가?(2024. 03. 01 15:30)
2024. 03. 01 15:30 정치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독재자는 민주주의의 도래를 저지한다. 억압적 권력자는 폭력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하지만 이들이 무슨 짓을 하든 민주주의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에 대한 상상과 욕망은 더욱 강렬해지고, 끊임없는 저항이 일어날 뿐이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적은 민주화 이후에 등장한다. 한국 민주주의가 상상의 대상이 아니라 현실의 제도로 구축돼야 하는 시대가 도래하자, 그 제도를 내부로부터 무너뜨리는 질병도 함께 나타났다. 지금의 거대 양당은 민주주의의 실행자보다 그런 질병을 퍼트리는 병원체에 가깝다. 위성정당은 그들이 만들어낸 최악의 질병이다. 공통의 규칙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 있지만,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오랜 노력의 결실이라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위성정당은 가짜 이름을 내건 빈껍데기 정당이고, 그 결실을 무력화하는 천박한 꼼수다. 이런 꼼수가 실행될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다수가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공통의 규칙 따위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파렴치한 정치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수많은 유권자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의석을 늘릴 수 있다면, 선거제도의 파행을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형식적 법과 제도는 만들었지만 그걸 제대로 실행하려는 사람이 없으니, 제도는 제도 아닌 것이 된다. 위성정당의 등장이 의미하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가 공통의 정치적 규칙을 수립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흔히 그런 규칙을 게임의 공정한 룰에 비교하는데,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르다. 정치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세력 간의 경쟁이 아니라 공동체의 삶을 함께 운영하는 활동이다. 정치는 공동체의 구성원이 공유하는 공통의 원칙과 가치에 기초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선거제도는 단순히 정당 간 경쟁을 공정하게 관리하기 위한 게임의 룰이 아니다. 선거는 인민의 일반의지를 형성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고, 제도의 세부 내용 전체가 이러한 목적에 충실하게 구성돼야 한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정당 지지율에 부합하도록 의회를 구성하는 것이 일반의지를 더 민주적으로 형성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공통의 규칙으로 수립하려는 시도였다. 위성정당은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조롱한다. 한국에 떠도는 미신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선진국은 정당 사이의 협의와 타협으로 국가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반면, 한국의 정당들은 서로의 이념과 원칙만 내세우면서 극단적 갈등으로 치닫는다.’ 이런 논리에 빠진 사람은 모든 정치적 문제를 거대 양당 간 협상의 문제로 축소한다. 정치란 이런 것이 아니다. 이른바 선진국, 즉 자신의 고유한 민주주의 모델에 따라 어느 정도 안정된 정치를 운영하는 서구 국가와 한국의 근본적인 차이는 정치적 협상의 유무가 아니라 정치적 공통 규칙의 유무에 있다. 그런 규칙의 종류와 수준은 다양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 중 하나를 꼽자면, 합리성의 규칙이 있다. 정치는 합리적 언어의 소통을 통해 이루어지는 활동이고, 법과 제도는 모순이 없는 정합적 체계로 구축돼야 하며, 모든 정치적 행위는 헌법의 기본 원리에 따라 정당화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정치 공동체와 공통의 표준 공통 규칙의 부재는 단순히 정당 정치의 수준이 아니라 정치 공동체 전체의 문제다. 공동체(community)란 공통의 것(common)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한국의 언어 및 문화 공동체는 너무나 확고해서 ‘우리나라 사람’과 ‘외국인’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경계를 만들 정도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 공동체는 어떠한가? 민주주의 정치 공동체에서는 모든 구성원이 시민이라는 동등한 지위를 공유한다. 그 공동체의 삶을 유지하는 것은 수많은 규칙의 체계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에 따라 공동체의 여러 영역을 구분하고 관계 맺는 규칙들이 구성된다. 거시적으로는 국가, 정치, 사회, 가족의 관계가 규정돼야 할 것이고, 구체적인 수준마다 그에 맞는 규칙이 필요하다. 예컨대 국가와 기업, 서울과 지방, 교육과 시장의 관계 등을 다루는 공통의 규칙, 또한 언론과 의회, 정당과 정당, 사회운동과 정치의 관계에 관한 규칙도 있어야 한다. 어떤 규칙이 공통의 것으로 공유되려면 객관적 표준으로 수립돼야 한다. 정치 공동체를 운영하는 것, 즉 정치란 표준 규칙을 수립하고 개선하는 작업이다. 한국에는 제대로 된 정치적 표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의 근대화는 외부의 규칙을 변형해 내면화하는 과정이었다. 미국, 유럽,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 뒤섞이고, 그마저 한국 현대사의 정치적 변화를 통해 왜곡되면서 규칙의 표준 체계를 정합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예컨대 ‘모든 개인은 시민으로서 평등하다’라는 민주주의 헌법의 원리조차 여전히 표준 규칙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소수자들이 국가와 사회의 폭력에 직면하고, 파업하는 노동자는 노골적 탄압을 받으며, 성평등은 어느새 금기어가 돼버렸다. 한국의 모든 논쟁이 이른바 진영 논리로 수렴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공통된 규칙이 없고, 그것을 수립할 의지도 없으니, 모두가 자기 세력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만 움직인다. 한국에서 정치는 공동체를 운영하는 활동이 아니라 국가의 권력과 재화를 독점하기 위한 경쟁으로 이해된다. 어떤 규칙에 따라 공동체를 운영할 것인지가 아니라 누가 정권을 잡을 것인지가 정당 정치의 근본 질문이 됐다. 표준 규칙의 체계가 없으니, 정권의 성격에 따라 국가 운영의 방향이 널뛰듯 바뀐다. 이는 한국 정당 정치의 특징만이 아니다. 지금 보건 영역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보라. 보건제도의 목적과 체계가 공통의 규칙으로 존재하지 않으니, 모두가 자기 직종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한 싸움에만 몰두한다. 이번 총선에서는 모든 종류의 규칙이 사라지고, 의회권력을 향해 경쟁하는 잡다한 세력의 이합집산만 남았다. 총선 관련 뉴스를 보라. 정당이 어떻게 합쳐지거나 찢어지고, 누가 어느 정당으로 갔고, 누가 공천을 받았거나 받지 못했다는 소식만 가득하다. 연예면과 정치면의 구별이 사라지고,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논쟁은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이는 정치 공동체와 정당 정치가 완전히 분리된 결과다. 위성정당은 이런 엉망진창의 상징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진정한 적은 공통의 것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자들, 정치 공동체를 망각하는 자들이다. 물론 정치인들만 여기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박이대승의 소수관점
[서중해의 경제 망원경](24)민주주의 퇴보, 미완의 제도에 내재된 딜레마(2024. 02. 07 05:30)
2024. 02. 07 05:30 경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월 21일(현지시간) 뉴햄프셔주 로체스터 유세 중 청중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로체스터 로이터=연합뉴스 2024년은 선거의 해다. 올해 60여개 국가의 40억명에 해당하는 역사상 가장 많은 인구가 선거에 참여한다. 국민이 지도자를 선출한다는 의미에서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현재 인류의 절반 정도가 선거 민주주의가 시행되는 나라에 살고 있다. 그런데 선거 민주주의의 역사는 아무리 길어도 200여 년에 불과하다. 긴 인류의 역사에 비하면 아주 짧은 최근에 나타난 제도다. 선거 민주주의는 완숙한 제도가 아니라 시행착오 과정에 있는 미완의 제도다. 한국은 1948년 제1대 국회의원선거와 제1대 대통령선거를 시행한 이래 선거 민주주의를 실행해오고 있다. 1948년 당시 선거 민주주의를 실행하고 있는 나라는 30개국에 불과했다. 76년째 선거 민주주의를 이어오고 있는 대한민국은 이 점에서 충분히 긍지를 가질 만하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지만 선거를 통해 반드시 민주주의가 신장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폭군이 출현하기도 하고, 국민 다수가 혐오하는 극단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기도 한다. 선거를 통해 폭군이 출현하는 것은 과거의 히틀러만이 아니다. 2021년 1월 6일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지지자들이 2020년 대선이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며 의사당에 난입했다. 민주주의의 최전선이라는 미국에서 극우로 치닫는 미국 보수와 선거 결과를 부정하는 정치지도자를 보게 되면서 세계 시민들은 경악했다. 2024년 초 현재 상황이라면 다가오는 11월 미국 대통령선거에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로 나설 확률이 높다. 올해 세계 여러 나라의 선거에서도 예상 밖의 놀라운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미국을 포함한 어느 나라에서도 민주주의는 퇴보할 수 있다. 이는 민주주의에 내재한 딜레마다. 민주주의 역설과 트럼프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영국 철학자 칼 포퍼(1902~1994)는 서양사상에 내재한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 작업에 착수했다. 그 결과로 나온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 1945년 영국에서 출판됐다. 이 책에서 포퍼는 열린 사회가 숙명적으로 가지게 되는 3가지 역설을 언급했다. 완전한 자유는 강자에 의한 약자 억압을 가져온다는 자유의 역설, 무한한 관용은 관용의 소멸을 가져온다는 관용의 역설, 그리고 다수결 원칙에 근거한 민주주의는 폭군 정치로 귀결될 수 있다는 민주주의의 역설이 그것이다. 이들 역설 중 특히 민주주의의 역설은 오늘날 혼돈의 정치상황을 조명하는 길잡이가 된다. 트럼프와 같은 극우 보수주의와 최근 유럽에서 성행하고 있는 포퓰리즘 정치가 선진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출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그 근본 원인을 민주주의에 내재한 본질적 특성으로 설명한다. 책은 자유와 관용이 사라진 전체주의를 비판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유혈 사태나 폭력 없이 폭군을 제거할 수 있으려면 국가는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정부를 국민이 다수결로 (즉 민주적 절차로) 해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민주주의란 ‘다수의 지배’처럼 모호한 것이 아니라 국민이, 특히 총선거를 통하여 정부를 해산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한 제도를 의미한다. 통치자를 국민이 통제하고 해임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이다. 국민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심지어 통치자의 의지에 반하여 개혁을 이룰 수 있는 제도가 민주주의이다.” 포퍼의 과학철학은 누구나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매우 단순한 사실에서 출발한다. 일반인이든, 통치자이든, 과학자이든 인간이라면 항상 옳을 수 없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 상대방을 인정할 수 있게 되고 이런 과정을 통해 사회와 정치와 과학이 진보할 수 있다. 포퍼의 과학철학을 정치 영역으로 확장하면 ‘기존의 정치체제가 잘못된 길로 들어설 때 어떻게 하면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가’가 관건이 된다. 위의 인용문에서 포퍼는 분명하게 그 답을 제시한다. 현실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되려면, 폭력을 통하지 않으면서 민주적 절차로 통치자를 통제하고 해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오류 가능성에 기반을 둔 포퍼의 과학철학은 정치영역에서는 민주적 개혁에 정당성을 제공하는 개혁의 정치철학이 된다. 2021년 1월 6일(현지시간)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워싱턴에서 열린 2020년 미국 대통령선거 결과 인준에 반대하는 시위 도중 미 국회의사당 벽을 오르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딜레마 애석하게도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선거는 진보를 지향하지 못하고 극단의 정치의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 있다. 선거가 개혁으로 나아가는 길이 되지 못하고 기성체제와 기득권을 공고히 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1년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연구센터가 한국, 미국, 일본, 프랑스 등 17개 선진국 국민을 대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조사 대상국의 상당수는 ‘매우 필요하다’고 응답했는데, 정치 개혁의 필요성이 가장 높고 경제 개혁과 의료 개혁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정치 개혁의 필요성에서는 이탈리아(89%), 스페인(86%), 미국(85%), 한국(85%) 등에서 아주 높게 나왔다. 반면 뉴질랜드(24%), 스웨덴(34%) 싱가포르(39%)에서는 정치 개혁의 필요성이 낮게 나왔는데, 이는 현재 정치체제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은 정치 개혁의 필요성뿐 아니라 경제 개혁의 필요성(72%)도 매우 높게 나왔다. 이 여론조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각국의 정치체제가 과연 개혁을 제대로 해낼지에 대해 얼마나 확신하는가’라는 질문이다. 17개 국가 응답자의 절반 정도는 개혁이 필요하지만 정치체제가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라고 답했고, 응답자의 18% 정도만 개혁을 해낼 것이라고 답했다. 국가별로는 이탈리아(73%)가 가장 비관적으로 답했고, 반면 싱가포르와 뉴질랜드, 스웨덴 등에서는 할 수 있다는 응답이 과반수를 넘었다. 한국은 정치 개혁이 필요하다는 응답자 중에서 3분의 1 정도가 실제로 개혁을 할 수 있다고 신뢰했고, 나머지 3분의 2는 신뢰하지 못한다고 응답했다. 기존의 정치체제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은 매우 높지만 기존의 정치체제가 개혁을 수행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신뢰가 매우 낮다는 조사 결과는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딜레마를 확인시켜준다. 필요한 개혁의 실패는 (폭군까지는 아니더라도) 전제정치 또는 극단의 정치의 빌미를 제공한다. 미국의 극우 보수주의와 유럽의 포퓰리즘 정치가 이 딜레마의 한 단면이다. 한국은 여기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서중해의 경제 망원경
[할 말 있습니다](43)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2023. 11. 20 07:12)
2023. 11. 20 07:12 정치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1월 1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디지털 전환의 시대 디지털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일상에서 경험한다. 디지털에 의한 세상의 변화는 단지 도구나 방법이 바뀌는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디지털 기술을 도입하는 조직, 기업, 정부 등 활용 주체의 구성과 성격, 적용하려는 구체적인 대상의 정의와 구조, 다른 대상과 이루어지는 관계의 변화와도 관계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서 교육 분야를 보자면, 바로 얼마 전의 나이스(NEIS·교육행정정보 시스템)의 오류 사례가 있다. 과거의 종이 기록으로 관리하던 교육환경은 이제 더는 상상할 수 없다. 시스템의 오류는 교육 구조 전체의 실패로 연결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문제로 인식된다. 종이에 쓰이던 개개인의 교육 관련 기록을 단지 컴퓨터 파일로 바꿔 저장하는 수준이 아니다. 교육 정보는 구조화된 데이터 집합으로 관리되며, 한 사람의 평생에 관계하며 영향을 준다. 의료 분야도 디지털 기반으로 바뀐 지 오래다. 병원에 진료를 접수하는 순간 건강보험 시스템을 통해 환자에 대한 보험 지원 여부, 질병 치료 및 건강검진 이력 등의 통합 데이터로 개인의 건강 관련 정보를 관리한다. 당연히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도 전산 시스템에 저장되고, 치료에 적용되는 첨단 의료 장비도 디지털에 의해 제어되며, 환자의 병력을 추적, 조회한다거나 투약, 처치 등 치료의 전 과정이 데이터베이스에 의해 관리된다. 데이터 운영 시스템이 모든 사람의 건강과 생명에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증권, 주식을 사고파는 자산 거래 시장도 사실상 거대한 디지털 플랫폼이다. 증권 거래를 위한 계좌관리나 등록된 자산 정보의 관리 등은 트레이딩 전용 프로그램의 기능으로 제공된다. 은행 등 금융 시스템과도 오차 없이 연결돼 있다. 플랫폼을 이루고 있는 프로그램의 작은 오류 하나가 기업을 파산하게 하거나 투자자에게 큰 실패나 성공을 안길 수 있다. 심지어 그러한 투자를 가이드하는 정보의 제공 방법도 대부분 유튜브와 같은 온라인 방송 플랫폼에 의존한다. 실제에서 지폐 뭉치나 금괴가 오가지 않아도 충분히 보장되는 자산의 가치 유지와 안전성을 디지털 기술이 담보하고 있는 셈이다. 디지털이 우리 사회의 기반 구조이자 운영체제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은 이 밖에도 제조, 유통, 문화예술, 공공 서비스 등 더 많은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더욱 다양하고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게 될 것이고, 더 많은 사람이 기술에 익숙해지게 되면서 디지털 시스템의 영향력이 가지는 절대성은 증대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단 한 분야, 우리나라 정치는 디지털과는 아주 먼 거리에 있는 듯하다. 디지털 플랫폼 정부, 전자정부 등의 표현은 꽤 익숙하게 접한 것 같은 기억이 나지만, 실제 우리의 정치 현상을 잘 살펴보면 뭔가 디지털이 제공하는 특징과는 다른 인상을 준다. 21대 마지막 국감이 시작된 지난 10월 10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열린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가 파행됐다. 이날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신원식 국방부 장관 임명 철회를 주장하는 피켓을 좌석마다 붙인 데 대해 국민의힘이 국감장 출입을 거부하면서 회의는 시작조차 되지 못했다. 연합뉴스 ■디지털 기술의 특징 디지털 기술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이 특징을 이해함으로써 디지털 전환이 가지는 의미와 구체적인 대안 모색의 방법을 도출해볼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은 명료성과 계량성을 가진다. 명료성은 참과 거짓, 진행과 중단, 유효와 무효가 명확하게 구분된다. 조건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는 있지만, 그 역시도 명료한 값이며 중간은 없다. 명료성과 같은 맥락에서 디지털 기술 적용의 결과는 모두 숫자로 표현이 가능하다. 이러한 계량화는 논리적인 표현인 수식에 의해 모든 것을 기술할 수 있는 디지털 기술의 범용성을 제공한다. 명료성과 계량성에 의해 디지털 기술은 예측이 가능한 논리 구조를 만들어낸다. 이를 확장해 확률적인 가능성이 높은 통계적 산출 결과에 도달할 수 있게 한다. 즉 예측이 가능한 모델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한국 정치가 예측 불가의 난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의 문제를 상기한다면 정치 분야에 디지털 기술을 적용하고자 하는 시도는 더욱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디지털 기술은 합리성과 체계성을 바탕으로 한다. 듀이의 십진분류 체계에서 프로그래밍, 디지털 분야는 자연과학(500)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지식, 학문의 일반 분류인 총류(000)에 속한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디지털이 모든 분야를 포괄할 수 있는 체계에 대한 이론, 또는 지식이라는 점이다. 디지털 기술은 그 자체로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그것이 적용되는 다른 대상에 체계를 부여하는 특징을 가진다. 그리고 체계를 수립하는 과정에서의 원칙은 합리성을 확인하는 반복 과정이다. 소요되는 자원이 적절하게 공급되는지, 입력과 출력이 인과성을 갖추고 있는지, 비생산적이거나 불필요한 요소가 포함되지는 않는지 등에 대한 관리가 이루어진다. 합리성을 갖춘 체계는 결과적으로 효율성을 높이게 된다. 디지털 전환이 이루어지는 여러 사례는 대부분 효율성 제고를 기본 목적으로 한다. 마찬가지로 정치 분야에서도 디지털 전환을 꾀하려면 일정한 수준 이상의 효율성을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을 견지해야 한다. 디지털은 전파성, 재현성을 제공한다. 디지털은 특정 요소의 무한 복제가 가능하다. 한가지 시스템 환경에서의 데이터나 파일이 다른 환경이라도 일정한 조건으로라면 동시에 존재·실행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빠르게 전파될 수 있으며, 원본과 사본의 구분 없이 동일한 정보를 재현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빠른 전파와 정확한 재현은 어떤 논리적 표현에 의한 정보나 결괏값의 집합인 데이터가 투명하다는 점을 보증하며 전체 과정과 결과를 신뢰하게 해준다. 이처럼 디지털의 전파성과 재현성은 투명성과 신뢰성이라는 가치를 부여하는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의 으뜸 덕목을 투명성과 신뢰성이라고 할 때, 이는 디지털을 통해 보완·강화될 수 있다. 정치의 디지털 전환은 필연적이다. 지금부터 이를 전제로 현실의 정치를 디지털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는 명료하지 않다. 정책의 일관성도 부족하고 목적이 다른 의도에 의해 변질하는 사례가 허다하다. 과도하게 주관적이기도 하다. 체계 중심이라기보다는 권력자의 심기 중심이다. 당연히 합리적이지 않으며 효율성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대단히 후진적이고 위험한 수준이다. 또 오늘날 한국 정치는 권위의 장막 속에 은폐돼 있다. 정치적 의사결정이나 인사제도의 운영은 투명하지 못하며, 대중의 신뢰를 얻고자 노력하지도 않는다. 정치가는 여론을 왜곡, 조작, 호도하는 기술에 익숙하다. 공공적 가치, 공동의 협력은 기대하기 어려운 풍토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지난 10월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리는 윤석열 대통령의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에 앞서 로텐더홀에서 침묵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정치에 대한 냉소와 신뢰 회복을 위한 원칙 사실 정치가 우리 일상에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현실 정치에 무관심하고 정치인을 불신하는 사람이 꽤 많다는 점은 매우 모순적으로 들린다. 우리나라 유권자 중 꽤 많은 수가 정치를 믿지 못하거나 심지어 정치에 대해 혐오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파행을 지켜보면서 쌓인 정치에 대한 실망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도대체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는 무엇에서부터 만들어지는 것일까. 우선 일상을 살아가는 일반 유권자들이 정치에 기대하는 바는 다음과 같은 상식으로 정리해볼 수 있을 듯하다. 누구나 직접 정치를 한다는 것은 이상에 가까운 조건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종류의 대리인을 필요로 하고, 이것이 현대의 대의민주주의, 또는 의회주의의 기초 논리다. 정치에서의 대리인은 특정한 어떤 판단이나 행동을 대신하는 것의 의미를 넘어 대중이 가지는 권위와 정당성을 위임받아 대표자라는 종합적인 자격을 가지고 대리행위에 임한다. 유권자가 이러한 위임에 동의하는 이유는 그의 리더십을 믿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13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동북아역사재단,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연구재단 등에 대한 국회 교육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 권은희 국민의힘 의원이 4세대 나이스 문제 관련 자료를 PPT로 띄운 채 질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치인의 리더십은 투명성, 청렴성, 헌신성, 감수성, 실무에서의 유능함과 다수에 대한 관리 능력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덕목은 비단 현재만의 특별한 희망이 아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다양한 시행착오를 경험해온 것도 사실이다. 수많은 희생과 노력이 있었고, 민주주의는 그 중심이념으로서 작동해왔다. 법을 중심으로 하는 제도와 국가 조직이 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일종의 플랫폼으로서 법치주의 국가, 정당 조직, 시민 자치기구 등을 의미한다. 문제는 그것이 충분히 완성된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지속적으로 개선과 혁신을 이뤄야 변화하는 역사적 흐름에 조응할 수 있고, 시민의 기대치를 충족시킬 수 있다. 현실에서는 인기나 능력 중심으로 엘리트의 정치적 주도권을 인정하는 풍토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실상 중요한 정치인의 덕목은 주목되지 않는 상황이다. 정치에 대한 불신이 구조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제대로 된 정치 플랫폼을 만들기 위해 견지돼야 하는 원칙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대중적이고 개방적인 구조의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 소수 집단이 주도하는 정당, 계보와 인맥이 힘을 발휘하는 정치 문화는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정치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다수의 참여를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둘째, 권력 집중을 근본적으로 해소하는 분권정치가 이뤄져야 한다. 권력의 집중은 수많은 폐단을 낳는다. 반대자를 억압하거나 진실을 왜곡하거나 책임을 회피해 공공의 이익에 해가 되는 등의 모든 부정적인 행위는 이른바 “내가 칼자루를 쥐고 있다”는 권력 의식에서 만들어진다. 권력이 집중되는 것은 이익보다 해악이 압도적으로 많다. 현재 한국의 제왕적 대통령제가 그 정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권력 집중을 타파하려면 합리적인 시스템 가동 환경으로서의 분권형 정치 플랫폼이 필요하다. 지난 11월 2일 서울 동대문구 경동시장 청년몰 옥상에 들어선 야시장 테이블에 휴대용 모니터를 이용한 모닥불 영상이 재생되고 있다. 연합뉴스 셋째, 공개성과 투명성의 원칙을 세워야 한다. 권력의 집중은 권한(지위), 정보, 자금의 독점에서 비롯된다. 인사 시스템의 파행, 이익과 관련된 민감한 정보의 악용, 예산 배정의 권한 남용 등은 모두 공개와 투명의 원칙이 세대로 세워지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들이다. 투명하고 불가역적인 공공 정보 관리 체제 하에서 권력의 기초가 되는 모든 자원을 재배치해야 한다. 넷째, 상호주의와 숙의민주주의의 안착이 필요하다. 나만 항상 옳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민주주의의 정신 또한 개인의 능력보다는 다수의 지배를 이루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집단의 저력을 근간으로 한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 서로의 의견이나 시각이 다를 수 있다는 전제를 인정하는 상호주의의 원칙으로 다자 간의 협의와 합의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정치 원리를 숙의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오늘날 당연함에도 거의 실현되거나 지향되지 않는 이상 중의 하나다. 비용이 많이 든다, 비효율적이다 등의 이유가 빈번하게 소환한다. 종래의 방식에서는 그런 핑계가 가능할 수도 있었지만, 현대의 디지털 기술은 숙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충분한 자원과 환경을 제공한다. 다섯째, 직접민주주의의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모든 사안을 ‘물리적으로’ 직접 처리하는 것은 소모적이고 무의미하다. 직접민주주의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의 논리다. 중요한 것은 내용의 직접성이지 절차의 직접성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한 생각이다. 대개는 대의자를 자처하며 일정한 권력 독점 집단에 편승하고자 하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들의 논리인 경우가 많다. 반대로 직접민주주의의 한계를 인식하고 내용적인 실현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과제를 해결하는 일은 중요하다. 개인의 정치적 의사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데이터 시스템이 있고, 그 내용이 대의체제 안에서 정확하게 반영된다면 이는 직접민주주의가 실현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현대의 직접민주주의는 결국 이러한 정치 참여의 직접성을 실현하고 검증하는 구체적인 대안이 돼야 한다. 여섯째, 다양성에 조응하는 정치를 준비해야 한다. 시대의 변화는 이미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 개개인을 존재하게 한다. 이를 적절하게 평가하거나 수용하지 못하면 손해나 실패를 피하기 어려운 구조화된 사회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른바 다양성의 시대가 등장한 셈이다. 이러한 다양성과 관련한 사안들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방법을 찾고 대안을 찾는 일이 정치의 중요 과제로 떠올랐다. 특히 복지, 문화, 지방행정 등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로 자리 잡고 있다. 다양성은 데이터의 수집·분석과 평가를 통해 현황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확정하고, 이에 대한 인식과 대응 체계를 적용하는 방법으로 풀어야 한다. 이는 디지털 기술에 의한 데이터 관리 도구가 아니면 접근조차 불가능한 실정이다. 따라서 다양성을 수용하는 정치는 디지털화된 플랫폼 정치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HD현대의 디지털 헬스케어 솔루션 계열사인 메디플러스솔루션이 삼성전자 스마트TV 전용 암환자 건강관리 서비스 애플리케이션(앱)을 개발한다고 지난 11월 14일 밝혔다. 연합뉴스 ■미래형 정치의 시작 당장 바꾸는 일이 결코 쉬울 수는 없다. 그럼에도 변화를 외면하면 기다리는 건 결국 실패와 죽음뿐이라는 사실 또한 명징하다. 정치를 바꾸자는 말은 무성하게 있었다. 청년정치, 지역정치, 소수자 지향, 전문가 리더십 등 다양한 대안이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들이 실패하거나 여전히 답보상태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정치구조는 인적 연결고리에 기반한다. 학연, 지연, 계파로 구성된 인간적 관계의 복잡한 사슬로 이루어진 구조다. 앞서의 모든 퇴행은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에서 기인한다. 많은 유권자, 대중이 이 사실을 안다. 하지만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모색은 매우 부족하다. 새로운 정치는 시스템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시스템 기반이라는 말은 주관성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행위를 하는 사람이 누가 되더라도 기본적인 작동과 결과가 명확하며, 예측가능한 과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시스템에 충성한다”는 누군가의 꽤 유명한 발언은 공직자와 시스템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한다. 현실에서 그러한 시스템이 실현되고 검증되는 과정이 진행 중이라면 대다수 유권자, 시민들은 정치를 신뢰하고 지지하는 입장을 가질 것이다. 현재의 3할이 넘는 무당층의 존재는 ‘과시적 선언’과 ‘배신적 행위’의 괴리를 반증하는 지표이다. 이제 퇴행의 정치는 사라져야 한다. 기후위기, 생태 종의 소멸, 물과 공기의 오염, 자원과 식량의 고갈, 인구절벽, 초고령화, 소외와 자살, 갈등과 혐오의 중첩으로 인한 폭력, 전쟁, 학살. 흔하게 접하는 뉴스의 타이틀이다. 너무나도 암울한 미래가 다가오는 듯하다. 퇴행적인 정치 구조는 이러한 미래에 대응할 수 없다. 근본적인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이는 시대적인 필연이기도 하다. 그 중심에 디지털이 있다. 디지털은 인류를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비전이자 동력이다. 정치가 미래를 설계하고 그것을 다져나가는 실천이라고 정의할 때, 정치는 결국 디지털과 결합할 때만이 그 본질적인 의미와 정상적인 기능을 회복하고 인류에게 구원과 희망을 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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