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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의 여제’ 사라 장, 타고난 ‘음악 천재’에서 젊은‘거장’으로
바이올린의 여제’ 사라 장, 타고난 ‘음악 천재’에서 젊은‘거장’으로
2013. 01. 10 18:28 화제
한마디 한마디 대답이 끝날 때마다 ‘까르르’ 하고 마치 소녀처럼 웃는다. 앞뒤 두루뭉술하게 비슷한 내용의 질문을 던져도 까칠하게 되묻기는커녕 성실하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 및 거장 지휘자들과 협연하며 이 시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자리 잡은 음악가 사라 장의 인터뷰는 그렇게 진행됐다. ‘무척이나’ 사랑하는 것이 많고 ‘굉장히’ 즐겁고 고마운 일들이 가득한, 하지만 음악과 무대에 대한 마음만큼은 ‘정말’ 진지하고 깊은, 그녀의 진짜 모습을 봤다. 완벽한 연주에 녹아 있는 뜨거운 열정과 깊은 감성 ‘아파시오나토(Appassionato)’. ‘정열적으로’라는 뜻의 음악 용어다. 세계 최정상의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장영주·33)은 몇 년 전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일상을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했다. 확실히 무대 위 그녀는 언제 봐도 열정이 넘친다. 거침없는 활의 놀림과 선이 굵으면서도 섬세하게 표현해내는 선율은 깊이 있는 기품도 갖췄다. 모든 무대를 드라마틱하고 생명력 넘치는 연주로 채우는 그녀는 쉴 틈 없이 연주 여행을 다니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작업을 시도하고, 음악으로 세상과 만난다.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일상과 마주했을 때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달콤한 컵케이크 하나에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하는 밝고 씩씩한, 웃음 많은 ‘아가씨’다. 연습이 없는 날에는 좋아하는 드레스와 구두를 구경하러 다니고, 레이디 가가와 비욘세의 공연장을 찾아 신나게 몸을 흔들기도 한다. “저는 뭐든지 신나게 즐기려고 해요. 쉴 틈 없이 전 세계를 돌면서 공연을 하고, 음반 녹음을 하는 빡빡한 일정이지만 여러 도시를 다니는 것도, 새로운 곡을 연주하는 것도, 수많은 관객들과 만나는 것도 모두 정말 재미있어요. 가끔 지치고 피곤할 때가 있기도 한데, 또 금방 재미있는 일을 찾아요. 무엇보다 음악과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고 좋아요.” 음악가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네 살 때 바이올린을 처음 손에 잡았던 사라 장은 그로부터 1년 만에 필라델피아 지역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활동을 시작했다. 여섯 살에 뉴욕 줄리아드음대 예비학교에 입학해 여덟 살에는 세계적인 지휘자 주빈 메타와 리카르도 무티의 오디션을 받았다. 이후 곧바로 뉴욕필하모닉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계약을 맺게 됐고, 아홉 살 때 링컨센터에서 펼쳐진 뉴욕 필 신년 음악회로 데뷔하며 화려한 음악 인생의 막을 열었다. ‘전설적 바이올리니스트’로 칭송받는 거장 고(故) 예후디 메뉴힌이 “사라 장은 내가 들어본 가장 뛰어나고 완벽한, 최고의 이상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이다”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을 정도로 탁월한 테크닉과 풍부한 표현력이 돋보이는 연주자다. 1992년 4분의 1 사이즈 바이올린으로 ‘사랑의 인사’, ‘카르멘 환상곡’ 등을 연주한 데뷔 앨범을 발표한 이후 지금까지 총 18장의 정규 앨범을 내놓기도 했다. 1년에 1백 회가 넘는 숨 가쁜 연주 일정 속에서도 앨범 녹음 작업을 소홀히 하지 않고 왕성한 결과물을 만들어온 셈이다. “앨범 작업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에요. 음반 녹음은 당시에 느꼈던 영감을 영원히 고정하는 일이라 생각하거든요. 제 할아버지가 건축가이신데 예전에 저의 프랑스 파리 연주에 오셨을 때 ‘호텔 방에서 연습만 하지 말고 나가서 걷고 도시를 보고 빌딩을 보라’라고 하셨어요. 건축은 응축된 음악 같은 거여서 영감을 많이 받을 수 있을 거라 하시면서요. 그때 생각했어요. 그러한 영감이 녹아든 음악을 응축해 고정시킬 수 있는 게 앨범인 것 같더라고요. 연주는 하고 나면 사라지지만 앨범 속 음악적 기록은 영원히 남잖아요.” 2012년은 사라 장의 데뷔 앨범 발표와 장래가 유망한 젊은 연주자에게 주어지는 최고 권위의 상인 ‘에이버리 피셔 캐리어 그랜트’상 수상 20주년을 맞는 뜻 깊은 해였다. 이를 기념해 국내 팬들을 위해 전국 리사이틀 투어를 펼쳤고, 그동안 발매한 CD와 인터뷰 및 뮤직비디오 영상을 담은 DVD로 구성된 박스세트 발매도 앞두고 있다. “기념 박스세트가 나온다니 무척 기대되고 신나요. 제가 1992년에 앨범을 발표했지만 실제 녹음은 그 전해에 했었거든요. 아홉 살 때 스튜디오에 들어가서 생애 첫 연주 녹음을 한 거예요! 그건 세계 최연소 레코딩 기록이기도 해요. 그런데 벌써 20주년이라니, 정말 자랑스럽기도 하고 많은 분들께 감사한 마음도 커요. 지금 다음 앨범 레퍼토리를 생각하고 있는데, 이젠 좀 재미있는 걸 하고 싶어요. 최근에는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브람스 등 묵직하고 약간은 심각한 작곡가의 곡을 담았으니 다음에는 저도 연주하면서 웃을 수 있고 듣는 분들도 즐기실 수 있는, 대중적이면서도 사랑스러운 곡들을 골라 들려드릴 생각이에요.” 음악적 책임과 진심을 고민하게 된 ‘음악가’ 사라 장 작은 손으로 신들린 듯한 기교를 선보이던 ‘꼬마 신동’은 차곡차곡 쌓아온 음악적 성과를 바탕으로 마침내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섰다. 세월과 함께 음 하나하나는 더욱 깊어졌고, 연주자로서의 자세 또한 성숙해졌다. 음악가로서의 진심을 찾아가는 과정이 지난 20여 년의 시간에 오롯이 녹아 있다. “20년 전에는 ‘음악가’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저 바이올린 켜는 것이 재미있고 다른 도시에 가서 여행하고 연주하는 게 좋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 아마 10년쯤 전부터 음악적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함께 연주를 완성해내는 파트너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음악이 제 삶에서 어떤 부분을 차지하는지를 생각해보게 됐어요. 음악이 없었다면 ‘사라 장’도 존재할 수 없었을 거라는 사실도 깨닫게 됐고요.” 자신처럼 ‘신동’으로 주목받던 많은 이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잊히는 것과 달리 사라 장은 한결같은 모습으로 마침내 ‘거장’의 반열에 오른 드문 경우다. 젊은 나이임에도 다른 연주자들이 평생을 활동해도 이루지 못할 만큼의 활약을 펼치고 있는 만큼, 그녀의 ‘내일’ 또한 계속해서 기대하게 만든다. “인터뷰 때마다 슬럼프에 관한 질문을 많이 받는데, 저는 사실 슬럼프에 빠질 시간이 없었어요. 계속 연주를 했으니까요. 무대를 위해서는 언제나 최고의 음악적 컨디션을 유지해야 하거든요. 모든 연주의 책임은 제게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만약 슬럼프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더욱 가라앉기 때문에 항상 좋게 생각하면서 연주를 더 잘해야겠다고 마음먹어요. 지금까지 제가 몇백 번, 몇천 번 무대에 섰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바로 지금, ‘오늘’의 무대에서 최고의 연주를 선보여야 한다고 항상 생각해요.” 음악을 할 수 있는 지금이 ‘너무너무’ 행복하다는 그녀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어제보다 오늘 더 잘해야겠다’라는 마음으로 무대에 서면서 음악적 외연도 더욱 넓혀볼 생각이다. “앞으로 20년 뒤 제가 어떤 모습이 돼 있을지 생각해보면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엄마께 여쭤보면 아마도 ‘결혼은 언제 할 거냐’부터 말씀하실 것 같은데요(웃음). 어쨌든 저는 음악과 함께하는 제 삶이 무척이나 좋고요. 이제까지는 오케스트라와 콘체르토 무대를 많이 선보였는데, 앞으로는 실내악이나 현대적인 새로운 곡들을 좀 더 활발하게 해보려 해요. 물론 언제나 즐기면서 무대에 설 거고요.”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원상희 ■사진 제공 / ㈜마스트미디어>
절망의 끝에서 찾은 행복의 길! 바이올린 제작자 김호기씨
절망의 끝에서 찾은 행복의 길! 바이올린 제작자 김호기씨
2009. 11. 09 13:22 화제
ㆍ“손가락 이상으로 바이올린을 놓아야 했지만, 그 절망의 ㆍ끝에서 바이올린으로 시작할 수 있는 새 인생을 보았어요” 세계적인 가수 노라 존스가 애타게 찾는 사람이 있었다. 2년 전 자신의 이름을 붙인 바이올린을 선물한 한국인이었다. 바이올린에는 자신의 노래 ‘Sunrise’에서 영감을 받은 태양 문양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었다. 그 바이올린을 만든 사람은 바로 부산에 살고있는 김호기씨다.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찾은 그녀가 행복이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조용히 흘러가던 삶은 한순간 불어 닥친 풍랑으로 인해 방향이 달라지기도 한다. 바이올린 제작자 김호기씨(40).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그 소리에 매료되어 넉넉지 않는 형편에도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고, 이후로도 다른 길은 생각해보지 않았다. 대학 졸업 후 시립교향악단에 입단하면서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인생은 순탄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그런 그녀에게 손가락 이상이 감지되었다. 왼손이 조금 둔탁해지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아주 미약한 느낌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어요. 근래 들어 연습이 부족했거나 아니면 기초가 부실해서 손가락이 많이 둔해진 거라고만 여겼죠. 초심으로 돌아가 바이올린 연습에 매진하는 것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옛날 교본을 꺼내 처음부터 차근차근 연습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실력을 가다듬을 수 있는 기회라고 좋은 쪽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연습을 하면 할수록 손가락은 더 굳어졌다. “오케스트라에서 실수로 제 소리가 튈까봐 긴장감과 두려움에 떨었어요. 쓰면 쓸수록 손가락의 움직임은 더욱 둔해졌죠. 학생들 레슨이 끝나고 나서 약을 먹어야 할 정도로 머리가 아팠어요. 4개월 동안 한방치료를 받았지만 좀체 나아질 기미가 없었어요. 전에 없이 친한 친구에게 화를 내면서도 차마 털어놓지 못했어요.” 오케스트라 단원이라면 매년 치러야 하는 오디션 일정이 다가오면서 극심한 불안감으로 견딜 수 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결국 한방에서 별 효과를 보지 못하자 양방으로 치료 방법을 바꾸었다. 그러나 병원마다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다 미국에 사는 언니 집을 방문했다가 현지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는데, 결과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제 척추 뼈가 한쪽으로 완전히 휘어 있었어요. 자세 때문이 아니었죠. 제 척추 뼈는 다른 사람에 비해 무른 상태였어요. 거기에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느라 항상 한쪽으로 자세가 쏠렸기 때문에 모양이 틀어졌죠. 의사는 연주 활동을 중단하고 1년간 집중적으로 치료를 해보자고 했지만, 그렇다고 완치를 장담할 수는 없었어요. ‘이미 신경이 죽었으니 일단 하는 데까지 해보자’는 말만 들려줬죠.”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사형과도 같은 진단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미국에서 돌아온 후에도 연주 활동을 계속했다. 바이올린이 없는 자신의 삶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절망 끝에서 또 다른 길을 보다 마침 그녀가 존경하던 지휘자가 시향을 떠나게 됐다. 새로운 지휘자가 와도 계속 단원으로 남을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그러나 손가락을 더 이상 쓸 수 없는 순간이 올 때까지 계속 연주를 하고 싶었다. “음악을 할 수 없다니 인생이 끝나는 것 같았어요. 시간이 필요했었나 봐요. 제가 좀 느림보거든요. 결정하기까지 오래 걸렸어요. 일단 자기 자신이 중요한 거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고 이 문제에 대해 오래 들여다보았죠. 그러다 어느 날 마음속에 다른 색깔이 싹 일어나더라고요.” 힘든 고민 끝에 생각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으로 하는 일을 좋아하고 잘한다고 생각해왔다. 뭔가 만드는 것에도 자신이 있었다. 문득 예전에 바이올린 제작 영상을 보면서 ‘내가 만약 저 일을 하게 되면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바이올린 제작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었지만 기술적인 일이니 시간을 충분히 투자해서 익히면 될 것 같았어요. 남들보다 조금 늦었을 뿐,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죠.” 바이올린 제작 쪽으로 마음을 굳혔지만,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유학을 떠나야 했다. 미국은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 엄두도 못 냈다. 학비 부담이 없는 곳이어야 했다. 그러다가 이탈리아 크레모나에 유일한 국립학교가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오케스트라를 나오면서 퇴직금으로 받은 1천만원을 유학 비용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마음의 결정을 끝내고서야 부모님께 손가락 상태와 결심을 말씀드렸다. “제 이야기에 아버지는 ‘네 나이에 그런 결정을 하기까지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뼈아픈 고통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네 인생이니 네 결심이 최선일 테지’ 하시며 짧고 명료한 말씀으로 찬성하셨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유학 준비가 시작됐죠.” 코피 쏟고 쓰러질 정도로 남들보다 세 배 더 노력해 이탈리아어 하나 모르고 떠난 유학이었다. 간단한 어학연수를 마치고 스트라디바리 국제 현악기 제작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김호기씨는 동급생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학생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남들보다 몇 배나 열심히 해야 했다. “저는 느리더라도 확실히 한 단계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남들보다 어학 실력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두세 배 더 노력했고, 실기에 있어서도 과정 하나하나에 순간의 집중력과 열정을 쏟았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다니며 확실히 알 때까지 배웠어요.” 학교 장비를 외부로 가지고 나올 수 없기 때문에 그녀는 집에서도 실기 연습을 하기 위해 바이올린 제작에 필요한 장비를 구입했다. 그렇게 해서 거의 완벽하게 집에서도 작업할 수 있는 준비를 거금 500만원을 들여 갖추었다. 이렇게 장비를 준비해놓고 공부하는 학생은 드물었다. 학교 진도가 바이올린 제작의 3분의 1 정도 나갔을 때 그녀는 첫 악기를 완성했다. 악기를 완성하고 처음으로 연주한 첫 느낌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솔직히 희비가 엇갈렸어요. 연주 생활을 하면서 좋은 악기에 익숙했잖아요. 첫 악기니까 설렘과 두려움이 있었죠. ‘내가 만든 악기의 소리가 어떨까?’ 스스로 완성했다는 점은 반가웠는데 소리를 냈을 때의 실망감은 어쩔 수 없었어요. 무조건 기술적인 면만 감안해서 만들었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즐거워해야 했구나, 싶어요.” 지금 그녀의 첫 악기는 어디에 있을까? 첫 악기는 더 나은 소리를 내도록 하기 위해 고치거나 수정하지 않고 처음 그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가끔 꺼내어 연주해보기도 한다. 남들보다 세 배 더 열심히 하던 때를 기억하기 위해서다. 너무 열심히 하다 못해 쓰러지기까지 했었다. “집에 들어와 다시 새벽까지 일을 하고 아침에 일어나 빨래를 하려고 고개를 숙이는데 한쪽 코에서 코피가 터졌어요. 조금 놀랐지만 금방 괜찮아지겠지 하고 다시 고개를 숙이는데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피가 콸콸 쏟아졌어요. 급히 수건으로 코를 막았지만 피가 멈추지를 않았어요. 조금 지나자 변기가 피바다가 됐죠. 그렇게 한 시간쯤 되니까 하늘이 노랗고 어지럽기 시작했어요. ‘이대로 가버리면 아무도 모르겠구나’ 하는 마음이었죠.” 한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두껍고 단단한 큰 나무로 악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항상 틀이 필요했다. 늦은 밤, 그 틀을 만들려고 작업대의 물기에 통나무를 꽉 끼우고 온몸을 기울여 파고 있었다. 그런데 한순간 통나무가 물기에서 빠져 나오면서 엄청난 힘으로 튀어 오르며 머리를 강타했다. “눈앞이 깜깜했죠. 제 기억은 거기까지예요. 눈을 떠보니 다음날 아침이었어요. 그때까지 기절해 있었던 거예요. 안경은 완전히 찌그러진 채 내동댕이쳐 있었고요. 일어나려니 머리에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어요. 이마에는 주먹만 한 혹이 만져졌죠. 거울로 보니까 엄청나게 큰 혹이 솟아올라 있었어요. ‘만약 그대로 깨어나지 못했다면?’ 하는 생각에 아찔했어요.” 노라 존스와의 인연 6년간 인내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그녀는 드디어 마에스트로 자격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한국으로 금의환향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뜻밖의 불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믿고 의지했던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다. 이후 그녀는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니었다.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 시절 그녀는 우연히 듣게 된 음악이 마음을 두드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2003년 그래미상을 석권한 세계적인 뮤지션 노라 존스의 노래였다. 노라 존스의 음악은 그녀를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듯했다. 그 음악으로 인해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꽁꽁 닫았던 마음의 빗장을 열었다. 그 보답으로 그녀는 노라 존스를 위한 바이올린을 제작했다. 악기를 완성한 뒤 노라 존스의 노래 ‘Sunrise’에서 딴 태양 문양을 새겼고, 노라 존스라는 이름까지 붙여 넣었다. 그리고 “당신의 목소리가 나에게 커다란 위안이 됐습니다. ‘당신은 날 모르겠지만, 당신은 이미 훌륭한 친구입니다’라는 편지와 함께 보냈다. 그로부터 2년 뒤 한 재즈 관련 잡지에 ‘노라 존스 선물의 주인공을 찾습니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노라 존스가 김호기씨를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정말 기분이 좋았죠. 제대로 전달이 됐구나, 그리고 노라 존스는 내 생각대로 정말 좋은 사람이구나, 생각하니 희열이 느껴지더라고요. 음반사에 전화해서 이것만 전달해달라고 했어요. ‘그 바이올린에서는 좋은 소리가 날 것이다.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만든 것이니까. 훌륭한 친구라서 고맙다’라고요.” 그리고 얼마 후 노라 존스로부터 편지가 왔다. ‘내가 받은 놀라운 선물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럴 길이 없어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아름다운 바이올린이에요. 난 그 바이올린을 사랑합니다. 내가 받은 것 중 최고의 선물이에요. 한국에서 공연이 있다면 만날 수 있겠지요.’ 이후 노라 존스와 김호기씨의 인연은 수많은 기사를 통해 보도됐다. 이 일이 알려지고 나서 그녀와 지인들, 또 이 사연을 접한 수많은 사람들은 음악이 주는 힘과 감동에 대해 돌아보게 됐다. 바이올린 제작자로 성공적인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김호기씨. 그러나 여전히 누군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뭉클하다. “지금도 연주하고 싶은 마음이 참 커요. 오케스트라에서 악기를 조율하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이상해요. 그래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제 운명이 아니라는 생각은 안 해요. 거기에 대한 아쉬움은 있죠. 안 가본 길이 아니라 못 가본 길이니까.” 그녀는 자신이 만든 악기로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 행복하다.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의 이름이 붙은 악기를 저렴하게 팔기도 한다. 악기와 함께 자랐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앞으로의 꿈이나 목표에 대해서 물었다. “제 목표는 행복이에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보다 행복해지는 것이 더 중요하죠.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계속 저로 인해 사람들이 행복하다면, 그것처럼 행복하고 기쁜 일이 또 있을까요? 지금은 행복이란 자기 마음속에 있다고 생각해요.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불행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행복한 거죠.” 희망은 음악 속에서도 흐르고, 행복은 전염되기도 한다. 김호기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그 시간만큼은 기자도 행복했다. ■글 / 두경아 기자 ■사진 제공 / 김호기
세계최초로 청자 국악기 만든 바이올린 특기적성 교사 유연실
2005. 09. 01 화제
“불가능이오? 고정관념만 깰 수 있다면 불가능은 없죠!” 청자 국악기는 청자의 은은한 빛깔과 전통 악기의 애달픈 소리가 어우러져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대나무로만 만들 수 있다고 여겨지던 단소와 당적 등이 청자로 새롭게 태어났다. 청자 국악기를 만들어낸 이는 놀랍게도 바이올린 특기적성 교사 유연실씨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것을 이뤄낸 유연실씨의 값진 도전에 관한 인터뷰. 국악기 알기 위해 ‘재수 없다’ 소리도 감수 애절하고 구슬픈 소리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하지만 대나무 속을 지나온 소리와 청자를 돌아 나온 소리는 뭔가 달랐다. 좀더 맑은 음색이라고 할까? 지금까지 단소와 당적은 대나무가 아니면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전남 해남서초등학교 바이올린 특기적성 교사 유연실씨(43)는 빛깔 고운 청자로 국악기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 ‘발상의 전환’이 일궈낸 소중한 결실이다. “초등학교에서는 단소를 기본 악기로 배워요. 복도에 단소를 들고 가는 학생과 마주치면 연주해보라고 하는데 대부분 잘 못해요. 6년간 배우는데도 잘 못하는 것을 보고, 좀더 재미있게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청자 악기를 생각했어요.”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흙과 가깝게 살아와서 그런지, 흙으로 악기를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기를 만들어본 경험이 없고, 국악을 전공한 것도 아니기에 청자로 국악기를 만드는 데 드는 시간은 더디기만 했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 고민하던 유연실씨는 2003년 12월, 처음으로 석고 틀에 흙물을 부었다. 하지만 예상만큼이나 어느 것 하나 쉽게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그녀는 직접 만든 석고 틀에 흙물을 넣어서 악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매번 물의 양에 따라 악기의 형태와 소리가 달라졌다. 석고 틀에서 나온 악기는 가마에 한 번 굽는데, 이때 튜닝 과정을 거쳐야 한다. 가마에 들어갔다 나온 청자 악기는 원래 모양보다 18% 정도 작아지기 때문에 축소될 것을 미리 예상해서 음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또 초벌구이와 재벌구이를 거치면서 음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것을 예상해가면서 정확한 음을 잡아내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예의 주시를 했음에도 유약을 바른 후 초벌구이와 재벌구이를 거치면서 살아남은 악기는 10% 정도밖에 안 된다. 30여 개를 가마에 구우면 3~5개만 온전한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나는 것. 이렇게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청자로 만든 단소와 당적이 태어났다. “도자기와 흙의 성질을 모르는 초보자라서 더 힘들었어요. 물의 양이나 가마의 온도에 따라 악기의 모양이 달라지더라구요. 그리고 국악을 전공하지 않아서 국악기의 성질을 잘 모르거든요. 악기에 대해서 배우려고 국악기 만드는 분을 찾아갔더니 대뜸 ‘재수 없다, 빨리 가라’고 하실 정도였어요. 도자기로 어떻게 악기를 만드느냐는 거죠. 가족과 강진 성화대 도예학과 강광목 교수님의 도움이 없었으면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처음에는 가족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공무원인 남편은 학교 수업이 끝나면 작업실에서 밤을 새우는 아내를 이해하기 힘들었고,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은 자신에게 신경을 써주지 못하는 엄마에게 서운한 마음을 갖기도 했다. 그만큼 유연실씨는 악기 만드는 데 푹 빠져 있던 것. 하지만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녀의 진심을 이해한 가족들은 이제 가장 큰 힘이 되고 있다. 유연실씨는 청자 악기를 만들기 위해 1년 넘게 시행착오를 거치다가 드디어 지난해 완성된 악기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단소, 퉁소와 향피리를 강진 청자공모전에 출품해 새로운 시도라는 평가를 받으며 입선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악기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올해는 악기와 함께 캠코더로 소리까지 녹음해서 출품을 했다. 그리고 심사위원들에게 제대로 인정받아 특선을 차지하는 영예를 안았다. 유연실씨의 악기가 입소문이 나면서 많은 국악인들이 직접 연주를 했다. 이생강 선생도 그녀의 악기를 불어보고 독특한 음색에 놀랐다고 한다. 이런 결실이 맺어져 9월에는 국악 전문가와 초보자를 위한 음악 CD도 발표할 예정이다. 또 학생들을 위한 연주곡집도 발표할 계획이다. 요즘은 팬플루트와 비파를 청자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어린 학생들의 행동도 바로 잡아주는 청자 악기 유연실씨는 바이올린 특기적성 교사지만, 원래는 피아노를 전공하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곧잘 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피아노 대신 유아교육학을 전공했다. 부모님의 반대로 음악도가 되지 못했지만, 하고 싶은 음악을 하지 못한다는 ‘한’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래서 15년 전, 피아노 대신 바이올린을 잡았다. 처음에는 취미로 배우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10년째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금도 음악에 대한 열정은 누구 못지 않아요. 그래서 아들과 딸한테도 바이올린을 가르치죠. 전자바이올리니스트 유진 박이 해남에 왔을 때 아들이 한 무대에서 같이 연주하기도 했죠. 그래도 음악보다는 공부를 시키고 싶어요.(웃음) 부모 마음이 그런 건가 봐요.” 그녀는 특기적성 교사로 일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 학생들 때문에 청자 악기를 만들었고, 그 악기를 연주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보기 좋다고. 그녀가 만든 청자 악기를 가지고 땅끝예술제에 참가한 학생들은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청자 악기로 연습하는 아이들은 예전과 다른 행동을 보여줘 유연실씨를 흐뭇하게 만든다. “예전에는 자세를 바로잡아줘도 삽시간에 뒤틀어버리거든요. 그런데 청자 악기를 손에 쥐어주면 행동이 달라져요. 아이들도 청자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나 봐요. 그렇게 싫어하는 책상다리를 하고, 허리를 곧추세우는 모습이 너무 의젓해 보여요.(웃음)” 학생들은 악기를 배울 때면 행여 손에 쥐고 있는 악기가 깨질까 봐 조심스럽게 다룬다. 청자 악기는 외국인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 일본인은 청자 악기를 보자마자 30개를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하기도 했다. 단아한 청자의 빛이 그들을 매혹시키는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 악기를 판매할 계획은 없다. “청자 악기가 대중화되기는 어렵죠. 하지만 외국인에게 우리 문화를 알려주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세계의 악기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악기로 만들고 싶어요.” 유연실씨는 청자 악기가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기를 바란다. 누구도 성공하리라고 예상치 못했고, 가능하리라고 믿지 못하던 것을 이뤄낸 것은 그녀의 ‘편견 없는 생각’에서 비롯된 일이다. 이렇듯 하나의 도전을 이뤄낸 그녀는 현재 또다른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청자가 아닌 ‘타조 다리’로 악기를 만들어 새로운 음색을 찾아내려는 것. 고정관념을 벗어던지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유연실씨의 도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백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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