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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총 20 건 검색)

[주목! 이 사람] “박정희는 한국 쿠데타 중심 인물”(2020. 11. 27 15:52)
2020. 11. 27 15:52 사회
ㆍ「박정희 쿠데타 개론」 펴낸 송철원 현대사기록연구원 원장 <박정희 쿠데타 개론>. 독특한 이름의 책이 최근 출간됐다. 한국현대사를 뿌리째 흔든 쿠데타의 모든 실상이 그대로 기록된 책이다. 부산 정치 파동을 불러온 이승만 쿠데타부터 5·16쿠데타, 유신쿠데타 그리고 전두환 쿠데타까지 등장하고 있다. 쿠데타의 중심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란 인물이 있었다. 저자인 송철원 현대사기록연구원 원장(78)은 서문에서 “책의 제목이 <박정희 쿠데타 개론>인데 이승만과 전두환까지 포함한 것은 박정희가 한국 쿠데타의 중심이자 최정점에 있기 때문”이라고 적어놓았다. 송 원장은 10여년 동안 자료를 모으고, 준비한 끝에 이 책을 출간했다. 서울대 정치학과 4학년 때인 1964년, 송 원장은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참여하고, 박정희 정권의 학원사찰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송 원장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박정희 체제를 비판하는 글을 쓰면서 여러 고초를 겪게 된다. 1976년 건국대 교수직에서 해직됐다. 송 원장은 “박 전 대통령에 대해 개인적인 감정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없지만, 부정적인 선입견을 없애고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많은 기록을 보았다”고 말했다. 송 원장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는지 샅샅이 들여다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면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무작정 찬양과 무작정 비판 수준을 벗어나기 위해 각주를 되도록 많이 넣었고 책의 부피가 커졌다”고 말했다. 의사였던 송 원장의 부친, 송상근 씨는 아들이 도피하고 구속되는 과정에서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한 기록물을 수집·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들 때문에 철도병원 원장직을 사임한 부친은 미국으로 떠났다. 송 원장이 땅속에 묻었던 부친의 기록물은 민주화가 된 후 햇빛을 볼 수 있었다. 이 기록물은 2008년 국가기록원에 기증됐다. 이해에 송 원장은 부친의 기록 정신을 이어받아 민주화운동을 중심으로 한 기록사업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현대사기록연구원을 설립했다. <박정희 쿠데타 개론>은 현대사기록연구원에서 펴낸 하나의 성과물이라 할 수 있다. <박정희 쿠데타 개론>은 3부작이다. 1부는 박정희의 형성과 배경, 2부는 박정희 쿠데타의 배경, 3부는 박정희와 쿠데타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이 책은 박 전 대통령이 쿠데타를 일으킨 그 뿌리를 찾아가고 있다. 그 뿌리에는 식민주의 역사관이 있고, 메이지 유신이 있고, 만주가 있었다. 송 원장은 “박 전 대통령이 존경한다고 하는 요시다 쇼인은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지만 정한론을 펼친 인물이었다”면서 “박 전 대통령이 밀어붙인 새마을 운동, 교련, 국민교육헌장 등은 사실상 일본을 따라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 책에는 ‘박정희 시리즈 ①’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박정희 시리즈 ②는 <박정희와 일본>이라고 한다. ③은 <박정희와 박근혜>, ④는 <박정희와 전두환>, ⑤는 <박정희와 학생운동>, ⑥은 <박정희와 한국경제>로 예정돼 있다. <박정희와 한국경제>에는 어떤 내용이 실릴까. 송 원장은 “경제 발전은 했지만 영웅주의를 통해 한 사람의 공으로 돌린 것”이라면서 “오로지 통치자의 전지전능한 힘이 한국경제를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국민이 그 역할을 해낸 것”이라고 말했다.
주목! 이 사람
박정희 기념물, 너무 많지 않은가(2017. 11. 21 14:58)
2017. 11. 21 14:58 사회
ㆍ지금까지 세금 1310억원 쓰여… 구미시 박정희 생가에 향후 600억원 투입 11월 13일 오전, 서울 상암동 박정희기념관 앞에서 ‘박정희 대통령 동상 기증식’이 열렸다. 서울시 조례에 따라 서울시의 허가 없이 박정희기념재단에서 임의로 동상을 설치할 수 없었기에, 이날 행사는 동상을 제작한 이승만·트루먼·박정희 동상건립추진모임(동건추)에서 재단에 동상을 기증한다는 증서만 전달했다. 행사에서 좌승희 박정희기념재단 이사장은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대통령 기념관에 동상이 없는 데가 없다. 박정희 대통령뿐만 아니라 이승만,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기념관에도 동상이 있어야 제대로 된 나라”라며 서울시가 박정희 동상 설치를 허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정희재단과 보수인사들은 박정희 동상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국 방방곡곡에 박정희 기념물은 차고 넘친다.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해도 1310억원이 넘는 세금이 여러 박정희 기념물 제작과 관리에 투입됐다. 경북 구미시의 박정희 생가에는 향후 5년간 600억원가량의 예산이 더 들어갈 예정이다. 11월 13일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서 열린 박정희 동상 기증식에 참석한 조각가 김영원씨가 자신이 만든 박정희 동상의 축소판 조각상을 바라보고 있다. / 김창길 기자 가장 오래된 동상은 문래공원 흉상 박정희 동상만 해도 지난해에 철원 군탄공원 동상과 서울 성북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본관 서쪽에 위치한 동상 2기가 새로 생겼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유력 대권주자로 떠오르던 2011년은 박정희 동상의 전성기였다. 그해 9월, 경북 청도군의 새마을운동 발상지 광장에 오른손으로 무언가를 지시하는 듯한 자세의 박정희 동상이 섰다. 같은 해 11월에는 경기 성남 새마을중앙연수원 내부에 박정희 반신 동상이 섰다. 비슷한 시기 경북 구미시 박정희 생가에 설치된 박정희 동상은 높이만 5m에 달해 독재자 동상을 보는 것 같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정희 생가에서 6㎞가량 떨어진 구미초등학교까지 가는 길은 ‘박정희 등굣길’이라 불린다. 길가에는 소년 시절의 박정희 모습을 담은 동상이 설치돼 있다. 구미초 안에도 1991년 설치된 동상이 또 있다. 2년 전인 2009년에는 경북 포항 문성리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관 외부에 의자에 앉은 자세의 동상이 들어섰다. 여러 박정희 동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서울 영등포 문래공원에 서 있는 흉상이다. 문래공원은 과거 육군 6관구사령부가 있던 자리로, 5·16 쿠데타 당시 박정희 등 쿠데타 세력이 군 지휘를 했던 곳이다. 1986년 문래공원이 개장하면서 일반에 이 흉상이 공개됐다. 동상뿐만 아니라 수십억, 수백억 원의 세금이 쓰인 기념시설도 여럿 있다. 박 전 대통령의 고향인 구미시는 박정희 기념시설이 가장 많은 곳이다. 구미시 박정희로(상모동)에 위치한 생가는 박 전 대통령이 1917년 태어나 1932년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1997년부터 박정희 생가 인근에 기념관 계획이 수립됐고, 서울 상암동에 박정희기념관 건립이 확정된 이후에는 생가 주변을 공원화하는 방향으로 계획이 변경됐다. 2013년 생가 인근에 구미시 예산 58억원이 투입된 민족중흥관이 들어선 것을 비롯해, 2013년 초까지 286억원(경북도비 25억원, 구미시비 261억원)이 생가 공원화 사업에 쓰였다. 이후에도 사업은 계속돼 2014년에는 4억3600만원, 2015년 1억9500만원, 지난해에는 4억1772만원이 박정희 생가 주변공원 사업에 쓰였다. 박정희 생가 공원은 앞으로도 꾸준히 개발될 예정이다. 구미시 예산정보에 의하면 박정희 생가 공원사업엔 올해 1월부터 2021년 12월까지 총사업비 511억원이 쓰일 예정이다. 박정희 생가 공원 관리예산은 매년 11억~13억원 수준이 쓰이다가 지난해에는 30억468여만원이 쓰였다. 올해는 총 22억5400만원가량의 예산이 박정희 생가 공원 관리예산에 배치돼 있다. 구미시 예산에는 박정희 생가 공원과 별도로 새마을운동 테마공원 예산이 있다. 2009년 김관용 경북도지사가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건의해 조성된 새마을 테마공원은 올해 12월 개장 예정이다. 테마공원을 조성하는 데에는 총 870여억원(국비 293억원, 도비 151억원, 시비 426억원)가량이 쓰였다. 구미시 예산정보에 의하면 박근혜 정부 4년간 투입된 예산은 총 339억원이며, 올해에도 테마공원 조성에 구미시 예산 27억원가량이 쓰였다. 스쳐간 인연만 있어도 기념물 생겨 인근 지자체에도 새마을운동과 관련한 기념관들이 있다. 포항시는 1971년 9월 박 전 대통령이 문성리에서 국무위원들을 대동하고 비교행정회의를 주재한 것을 새마을운동의 시작으로 보고, 문성리에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관을 짓고, 일대를 체험공원으로 조성했다. 2011년부터 3년간 총 42억원이 공원 조성에 들어갔다. 올해엔 기념관 운영비용으로 1억8700만원의 예산이 배정돼 있다. 청도군은 1969년 박 전 대통령이 수해재해지역 시찰 도중 청도읍 신도마을을 방문한 것을 새마을운동의 시작으로 보고 신도마을에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공원을 세웠다. 2009년 기념관이 건립됐고, 이후 95억원(국비 45억원, 도비 17억5000만원, 청도군비 32억5000만원)을 들여 테마공원으로 만들었다. 청도군 예산정보를 보면 매년 7억원이 조금 넘는 비용이 새마을공원과 관련해 쓰이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잠시라도 인연이 닿으면 기념시설이 생긴다. 경북 울릉군은 1962년 박정희가 하루 머물다 간 옛 울릉군수 관사에 예산 10억원을 투입해 ‘근대문화유산 전시관’으로 만들었다. 전시관 내에는 박 전 대통령의 식사장면을 재현한 밀랍인형이 제작돼 있다. 문경시는 박 전 대통령이 문경심상소학교 교사 시절 묵었던 하숙집 청운각에 시비 17억원을 들여 정비를 해 기념공간으로 만들었고, 매년 4000만원가량을 유지비로 쓴다. 강원도 양구군에는 박 전 대통령이 1955년 7월부터 1년간 육군 제5보병사단장으로 재직했던 시절의 공관을 2009년 1억1600만원을 들여 복원했다. 서울시 중구 신당동의 박정희 가옥 주변도 2013년부터 ‘역사문화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개발이 진행 중이다. 박정희 기념공원이라는 구의회의 지적으로 올해는 관련 예산이 전액 삭감됐지만, 자유한국당 소속의 최창식 서울 중구청장은 ‘역사문화공원’ 추진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기리는 기념비나 박 전 대통령의 친필이 들어간 기념비, 현판 등은 전국적으로 수백 개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정희 대통령 전자도서관(박정희 기념재단 운영)에서 읽을 수 있는 ‘위대한 생애’에 의하면, 박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전국에 1200여점의 친필 휘호를 남겼다. 지난해 12월 15일 ‘독재자’ ‘유신망령’이라는 글귀로 훼손된 제주도 5·16도로 기념비는 박 전 대통령의 수많은 친필휘호 중 하나일 뿐이다. 박근혜 정부 동안 계속된 ‘박정희 찬양’에 경북 주민들도 지친 모양새다. 11월 16일 리얼미터가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박정희기념관 동상 건립에 반대하는 의견이 전체 응답자의 66.5%로 찬성 응답의 2배를 넘었다. 박정희 동상이 새로 들어설 예정인 서울에서는 반대 여론이 68.2%에 달했다. 대구·경북 지역에서도 박정희 동상 건립에 반대하는 의견이 54.2%로 절반을 넘었다.
[우정이야기]‘박정희 탄생 100돌 우표’ 정치적 논란(2017. 07. 18 11:08)
2017. 07. 18 11:08 경제
박정희 탄생(11월 14일) 100돌 기념우표 발행이 백지화됐다.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돌 우표’는 경북 구미시청이 지난해 4월 우정사업본부에 신청하면서 진행됐다. 지난해 5월 23일 제1차 우표발행심의위 회의에서 발행키로 결정했다. 당시 야당이던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의원들은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에서 박정희 우표 발행의 타당성을 따지면서 “박근혜 정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우상화하고 있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지난 5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자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민족문제연구소 등 진보진영에서는 ‘박정희 우표’를 ‘적폐청산’의 대상으로 지목했다. 우정사업본부는 결국 지난 7월 12일 우표발행심의위원회에서 발행 여부를 재심의한 끝에 취소를 결정했다. ‘박정희 우표’처럼 제작과 관련하여 재심의 대상이 되거나 철회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특히 전 정권의 계획이 정권교체 후 재심 결정으로 번복되자 정치적인 논란은 증폭됐다. 발행 결정이 내려졌을 때는 시민단체, 국가공무원 노조 등이 “친일파, 독재자의 기념우표는 나라망신”이라며 반대했다. 우표 제작이 철회되자 이번에는 “정권의 입맛에 따라 기념우표를 철회했다”며 우표 발행을 신청한 구미시와 보수단체 등이 들고 일어났다. 지난 2016년 3월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 특별사진전. /박민규 기자 ‘박정희’라는 이름 자체가 가장 큰 정치적 논쟁거리이자 이념의 시빗거리다. ‘그의 최대 업적’, 즉 경제발전이 민족, 인민, 인권을 훼손시키면서 얻은 대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1917년 선산(구미시로 통합)에서 태어났다. 문경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만주군으로 갔다. 군인이 되기 위해서다.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만주신문(1939년 3월 31일자)에 의하면 박정희가 지원서류에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라고 썼다. 당신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정부였다. 당연히 만주군은 광복군과 독립군을 궤멸시키는 데 앞장섰다. 광복 후에 육사 졸업과 함께 장교로 임관된 박정희는 친형 박상희의 영향을 받아 좌익분자들과 교류하면서 남로당에 입당했다. 그는 여순반란사건으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당시 한국군 수뇌부를 차지하고 있던 만주군 출신 선배들의 도움으로 감형에 이어 석방됐다. 이 같은 행적은 그에 대한 평가를 할 때면 늘 쫓아다니는 꼬리표다. 4·19혁명이 일어난 지 불과 1년 만인 1961년, 박정희를 비롯한 군부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반공태세의 강화와 부패 척결, 민생고 해결이 쿠데타의 명분이었다. 박정희는 장면 정권을 무너뜨리고, 군정을 거쳐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이것은 18년에 걸친 박정희의 장기집권과 군부독재의 시작이었다. 반공과 국가 번영이라는 명분 아래 인권과 언론을 탄압했다. 급기야 1972년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꾀하는 10월유신을 선포했다. 이로써 민주주의는 완전히 부정됐다. 이런 논리를 펴는 이는 ‘박정희 우표’ 발행을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반대로 경제발전의 업적을 내세우는 사람은 수치를 내세운다. 박정희가 집권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88달러에 불과하던 것을 집권 말기인 1978년에 1000달러까지 끌어올렸다.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의 문턱까지 다다르는 데 박정희 리더십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주장인 셈이다. 이 같은 팽팽한 논쟁이 박정희가 역사 속 기념인물이 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다. 국가와 문화의 상징인 우표는 적어도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나 역사적 쟁점은 피해야 하는 게 마땅한 일 아닌가.
우정이야기
[표지이야기]박정희 신드롬의 종말은 오는가
[표지이야기]박정희 신드롬의 종말은 오는가(2016. 12. 19 17:30)
2016. 12. 19 17:30 정치
ㆍ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대구경북 민심까지 흔들… 김재규 재평가론도 등장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혁명을 한 것입니다.”(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11월 초, 디씨인사이드 주식 갤러리를 중심으로 ‘10·26 의거 명예회복 추진위’(이하 추진위)가 결성됐다. 추진위는 김재규 전 정보부장이 법정에서 한 최후진술 내용을 자신들이 최초로 올린 글에 담았다. 이들은 10·26의 주역인 김 전 부장을 ‘의사’(義士)로 부르며, 김 부장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서울 영등포구 문래근린공원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옆에 김재규 부장의 흉상을 세우겠다는 취지로 텀블벅에서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다. 김재규를 ‘대통령을 살해한 내란범’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앞당긴 사람’으로 보는 시각은 소리소문도 없이 퍼지고 있다. 주식 갤러리 등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김재규의 사진이 담긴 티셔츠를 입고 박근혜 하야 촛불집회에 참석했다는 이들의 인증사진이 간간이 올라온다. 김재규 얼굴이 담긴 피켓도 등장했다. 경기도 광주시 삼성공원에 위치한 김재규 묘소를 참배하는 이들의 발길도 늘어나고 있다. 2011년 11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경북 구미시에 위치한 박정희 대통령 생가 인근의 박정희 동상 제막식에 참가하고 있다. / 연합뉴스 김재규 묘소 참배 발길 늘어나고 있어 박근혜 정부의 실정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역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작업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과연 좋은 지도자였는지 의문을 갖는 과정에서 김재규에 대한 긍정 여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김재규가 살아나는 것은 박정희 신드롬에 치명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규는 10·26의 주범일 뿐만 아니라, 중앙정보부장 시절 박 전 대통령에게 최순실의 부친 최태민의 비위사실을 알린 당사자다. 한 교수를 김재규를 ‘박정희의 충신’이라는 관점에서 재평가해야 한다며 “유신시대의 자료를 꼼꼼히 읽으면서 김재규란 사람이 자기가 잘릴 수도 있는데 박정희의 충신으로서 자기 몸을 던져서 최태민을 막으려 했던 것을 알게 됐다. 그때 최태민을 막았다면 오늘의 불행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런 내막이 최근 들어 다시 알려지면서 집회에 김재규 얼굴이 들어간 깃발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생기는 게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10·26 명예회복 추진위를 주도하는 이들도 박근혜 정부의 실정 때문에 등을 돌린 이들이었다. 추진위의 제안자 20대 청년 한운씨를 만났다. 그는 “인생 최대의 실수를 조금이라도 상쇄하기 위해서 이렇게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2012년 대선 당시 새누리당 청년당원으로 박근혜 후보의 당선을 위해 뛰던 사람”으로 소개했다. 그는 1년 정도 대통령인수위 청년특위, 새누리당 미래세대위원회 등에서 활동하다가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에 실망하고 탈당했다고 한다. 그는 “박근혜 정부 때문에 박정희나 김재규에 대해서도 더 관심 깊게 알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은 이어졌다. “과거 세대는 박정희에 대한 명확한 향수가 있는 반면, 청년세대는 그 시대를 살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박정희 시대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있는 건 아니다. 나도 ‘박정희가 민주주의는 탄압했지만 박정희 시대에 GDP가 올라간 건 사실이지’ 정도의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 들어 민주주의가 탄압을 받고 표현의 자유를 빼앗기는 일들이 생겨나면서 ‘박정희 시절처럼 민주주의가 탄압받으면 이렇게 되겠구나’ 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이다.” 한국 사회를 20년 가까이 지배한 ‘박정희 신드롬’은 IMF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생겨났다는 것이 정설처럼 굳어져 왔다. 물론 IMF 이전에도 박정희 향수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4년 8월 여론조사에서 박정희는 전·현직 대통령 중 정치력과 행정력이 가장 뛰어난 대통령으로 꼽혔다. 이때만 해도 박정희에 대한 ‘신격화’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설문 응답자의 40.5%는 박정희를 권위적인 지도자로 꼽았고, 민주적이라고 평가한 응답은 15.3%에 그쳤다. 경제분야에서 가장 공헌한 사람을 묻는 문항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박 전 대통령이 아니라 31.5%의 지지를 받은 정주영 현대 회장이었다. 2위는 13.0%의 선택을 받은 이병철 삼성 회장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11.8%로 3위에 그쳤다. 일반적으로 ‘박정희 신드롬’은 IMF 외환위기를 전후로 카리스마가 있는 지도자를 찾는 대중들의 요구가 반영된 현상으로 평가된다. 1997년 4월 여론조사에 따르면,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 박정희는 75.9%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다른 역대 대통령들 중 10%를 넘긴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박정희의 최장기 비서실장 김정렴의 회고록 와 류철균 이화여대 교수(필명 이인화)의 박정희를 모델로 한 대하소설 이 출간된 것은 IMF 사태 직전이었다. 조갑제 대표가 쓴 박정희의 일대기 의 1권이 출간된 것은 IMF 직후였다. 물론 진보진영에서는 박정희 신드롬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조 대표의 책이 나올 무렵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우익세력의 논리를 그들의 언어로 반박하는 를 출간했다. 하지만 박정희 신드롬의 흐름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다. IMF 기점으로 생겨난 박정희 신드롬 2000년대 들어서도 박정희 신드롬은 여전했다. 동아시아연구원이 2005년부터 5년마다 실시하는 ‘한국인의 정체성’ 여론조사에 따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1~3차 모두 역대 대통령 평가 1위를 기록했다. 지난해 광복절을 맞이해 갤럽에서 실시한 ‘우리나라를 가장 잘 이끈 대통령’ 설문에서도 박 전 대통령은 44%의 선택으로 1위를 기록했다. ‘박정희 신드롬’은 결국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을 이끈 밑거름이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당선으로 박정희 신드롬은 정점을 찍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경북 구미시에 있는 박정희 생가 방문객 통계에서 그 단면을 볼 수 있다. 2005년 4만6000명 수준이던 방문객 수는 매년 증가해 2013년 70만9000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올해까지는 감소세가 이어졌다. 올해 4분기까지 방문객은 29만4000명으로, 지난해 52만2700명의 절반을 약간 넘긴 수준이다. 특히 올해 4분기 방문객 수는 9만500명으로, 박 대통령 취임 이후 처음으로 분기당 10만명 이하로 내려갔다. 박근혜 정부 들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호감도가 ‘2위’로 발표되는 여론조사도 나오기 시작했다. 리서치뷰는 2013년부터 올해 9월까지 주기적으로 역대 대통령 호감도 여론조사를 발표했다. 2013년 12월 조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제치고 1위를 기록한 이후, 올해 9월 조사까지 두 전직 대통령의 순위는 그대로였다. 2013년만 해도 박근혜 대통령의 호감도는 19.0%로 2위였으나 조사를 거듭할수록 떨어졌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이제 박정희 신화의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는 TK(대구·경북)에서도 흔들리고 있다. 11월 이후 갤럽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4~5%를 유지하고 있다. TK에서도 많아야 10%의 지지율에 그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 이후 신드롬 주춤 한홍구 교수는 “우리가 드디어 박정희 신드롬을 박근혜에 대한 환멸과 함께 묻어버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박정희와 박근혜의 관계를 과거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와 3세의 관계로 비유했다. 한 교수는 “나폴레옹 1세는 유럽에 민주주의를 퍼뜨린 계기가 됐지만 결국 황제가 됐다. 나중에 그의 조카(나폴레옹 3세)까지 황제가 되니 프랑스 사람들이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나. 그런 반동적인 상황을 그린 것이 바로 이다. 프랑스처럼 우리 역사에서도 발전이 있으려면 (박근혜 정부와 같은) 반동을 무수히 거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 교수는 비선실세 최순실의 뿌리인 최태민에 대한 언론 보도가 쏟아지면서 박정희가 지금의 국정농단 사태에 책임이 있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고 봤다. 한 교수는 “박정희가 최태민 문제를 처리하지 못한 책임이 이번에 드러났고, 김기춘 비서실장이나 남재준 국정원장 같은 사람들을 통해 공안통치를 해온 것이 바로 박근혜의 박정희식 통치술이다. 유치원생까지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분위기에서 이제 박정희 신드롬은 미래세대에게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 교수는 “여전히 박정희를 신격화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은 박근혜의 지지율처럼 국민의 4~5% 내외일 것”이라며 “과거 설문조사에서 박정희가 못한 점을 물으면 대체로 독재정치와 민주주의 탄압을 꼽았는데, 이제는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게 중요 항목으로 나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12월 13일 한 네티즌이 경기도 광주시 김재규 묘소를 참배한 뒤 인터넷에 올린 사진. / 디씨인사이드 주식 갤러리 한편, TK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김태일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오래된 박정희 신화가 쉽게 무너질 것으로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TK에서 박정희는 신화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냥 ‘신’이다. 산에 있는 사찰을 돌아다니다 보면 부처님이나 관우장군의 영정을 모셔놓고 기도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TK의 사찰에는 박정희·육영수 내외의 영정에 기도하고 숭배하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TK지역에서만큼은 박근혜의 실패가 바로 박정희 신화의 붕괴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봤다. 김 교수는 “박정희와 달리 박근혜까지 ‘신’으로 생각하는 정서는 거의 없다. 하지만 박근혜는 ‘신의 딸’이었기 때문에 TK지역이 박근혜의 열렬한 버팀목이 됐던 것은 사실이다. 박근혜의 실패가 박정희에 대한 실망을 불러오고 있는 건 맞지만 박정희 신화에 큰 금이 갔다고 보기엔 아직 성급하다”고 말했다. 영남대에서 김 교수는 현대한국정치론을 강의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통치는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김 교수는 수업 중에도 박정희 신화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수업에서 ‘유신체제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권위주의 체제’라는 취지로 강의를 한다. 하지만 TK 출신 학생들은 어렸을 때부터 현재 자신들이 누리는 번영은 모두 박정희의 성과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기 때문에 박정희에 대한 존중감이 기본적으로 있다. 이런 학생들이 내 강의를 듣고 놀라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밥상머리 교육 등 사회화 과정의 차이인지 다른 지역 학생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느껴졌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TK지역까지 박정희 신화를 걷어내기 위해서는 ‘김재규 재평가론’으로는 어렵다고 봤다. TK 정서상 김재규를 긍정적으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대화를 열 수 없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박정희의 갑작스런 죽음이 동향 사람들의 연민과 동정을 자아냈고, 이를 경제발전 신화와 맞물려 수십년간 확대 재생산돼온 것이 박정희 신화의 실체라고 판단했다. “TK지역 박정희 신화 붕괴하지 않을 것” 김 교수는 김부겸 민주당 의원이 2014년 대구시장 선거에서 박정희 컨벤션센터 공약을 낸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박정희에 대한 좋은 ‘기억’과 박정희 신에 대한 ‘믿음’만 가진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토론과 설득이 아니다. 만주군 경력이나 유신독재 등 실제 박정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현실에서 보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 ‘역사적 재평가’로서는 훨씬 적절한 방법이라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김 교수는 “TK에서는 박정희에 대해 토론하고 따지기보다 맹목적으로 ‘훌륭한 분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평가가 많다. 다른 지역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이곳에서 민주화 세력은 박정희에 대한 ‘믿음’과 싸워야 하니까 미치고 펄쩍 뛰겠다. 그래서 현실 공간에 박정희의 잘잘못을 모두 나열한 공간을 마련해서 조금이라도 신화를 역사 영역으로 끌어당기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한홍구 교수도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준비하고 있다. 한 교수 등 지식인들은 지난해 10월 편찬 계획을 밝혔다. 한 교수는 “박정희는 이 열전에 당연히 들어가야 할 집중검토 대상자다. 박정희와 이승만만큼 반헌법행위를 한 사람이 없다. 다만 그들을 전면에 내세웠을 때 열전 작업이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도 있다. 우리가 박정희를 반헌법행위자로 선언할 역량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교수는 “그래도 박정희가 박근혜보다는 낫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그는 “박정희에게는 그래도 충신들이 있었다. 김재규 중정부장이나 박승규 민정수석처럼 자신의 직을 걸고 최태민 보고서를 올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김정렴 비서실장도 다른 비서관들에게 최태민과 어울리지 말라고 지시할 정도로 유신정권의 핵심 참모들은 분별력과 상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드러난 바로 볼 때 박근혜 정권의 참모 중에 최순실 문제에 대해 올바른 소리를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 아니냐”며 씁쓸해했다. 김재규의 변호사 안동일 “김재규는 10·26 정신이 헌법에 들어갈 것이라 말했다” 오랫동안 진보-보수를 가릴 것 없이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을 긍정적으로 보는 여론은 거의 없었다. 보수 세력은 김재규를 ‘박정희를 죽인 사람’으로 생각했고, 진보 세력은 ‘부마항쟁으로 유신정권을 몰아낼 기회를 박탈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던 안동일 변호사는 “김재규가 10·26 거사를 한 동기에 대해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화 인사들 중에는 10·26이 없었다면 이승만처럼 박정희를 끌어내릴 수 있었는데, 10·26 거사 때문에 박정희를 영웅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저는 10·26 거사가 있었기에 유신이 종식되고 긴급조치가 해제되는 등 김재규에게 민주화의 공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안 변호사는 “김재규가 유신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은 맞지만, 그는 오랫동안 유신헌법의 비판자였다”며 10·26이 우발적인 권력 내의 다툼에 불과하다는 세간의 평에 동의하지 않았다. “김재규는 유신헌법이 제정된 때인 3군단장 시절부터 유신헌법에 비판적이었다.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 시절에도 유신체제를 완화시키려 노력했던 인물이다.” 김재규는 1심 최후진술에서 10·26의 동기를 5가지로 설명했다. 그 중 첫째는 자유민주주의 회복이었고, 둘째는 국민의 많은 희생을 막는 것이었다. 안 변호사는 “세계적으로 우리나라가 독재국가로 몰리고 대미 관계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김재규는 유신체제를 무너뜨려 민주회복을 하자는 뜻에서 거사를 했다”며 “차지철은 캄보디아를 거론하면서 거기는 200만 명이 죽었는데 몇십만 명이 데모하는 게 별거냐고 말했고, 박정희는 ‘내가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재규는 ‘대통령 한 사람만 희생하면 되는데 왜 여러 사람이 피해를 봐야 하냐’는 생각에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 변호사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10·26 거사의 직·간접적 동기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재규는 유언을 남기기 전에 주변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대법원 재판이 끝난 후 안 변호사 등 변호인단은 신군부의 손길을 피해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안 변호사가 도피하면서 친구 집에 보관해 둔 10·26 재판기록은 26년이 지난 2005년에서야 란 책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안 변호사는 “전해 듣기로 김재규는 ‘언젠가 10·26을 혁명이라 부를 것이고, 헌법 전문에 4·19와 함께 10·26 혁명정신도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이승만 12년 독재를 깨뜨린 4·19가 헌법에 들어갔는데 18년 군사독재를 무너뜨린 10·26도 언젠간 헌법 전문에 들어갈 수 있지 않냐는 취지였을거라고 생각한다”며 말을 마쳤다.
표지 이야기
[유창선의 눈]‘박정희 패러독스’의 시간여행
[유창선의 눈]‘박정희 패러독스’의 시간여행(2015. 10. 19 17:11)
2015. 10. 19 17:11 오피니언
시간여행의 불가능성을 말하는 ‘할아버지 패러독스’라는 것이 있다. 나의 할아버지가 큰 범죄를 저질러 세상을 혼란 속에 빠뜨렸고, 그래서 나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 할아버지를 살해하기로 한다. 그러나 과거로 가서 젊은 시절의 할아버지를 살해하게 되면 나의 부모는 물론이고 나도 태어날 수가 없게 된다. 나는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 할아버지를 죽일 수 있지만, 정작 나는 할아버지를 죽일 수 없는 패러독스에 빠지게 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원인과 결과를 뒤바꿀 수 없다는 인과율 법칙이며, 역사가 뒤바뀔 수 있는 시간여행은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다. 으로 잘 알려진 아시모프의 소설 의 내용도 맥을 같이한다. 머나먼 미래의 지구에서는 시간여행이 가능해지고 ‘영원’이라는 이름의 기관이 설립되었다.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과거와 미래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며 잔혹하고 끔찍한 사건들이 발생하지 않는 방향으로 역사를 변경시켜 나간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SF소설 이상의 인문학적 사유가 깔려 있다. 아시모프는 주인공 앤드류 할런이 변화해가는 모습을 통해, 아무리 잔혹하고 끔찍한 인류의 역사라 하더라도 인위적으로 역사를 바꾸는 행위가 정당한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과거로 돌아가서 역사를 바꾸려는 시간여행의 시도가 SF소설이 아니라 2015년 한국에서 현실로 등장하고 있다. 한국사를 국정교과서를 만들어 가르치겠다고 정부가 발표한 것이다. 국정교과서가 필요하다는 여러 논리를 만들어 강변하고 있지만, 그 배경은 의외로 단순해 보인다. 어느 친박 핵심 정치인의 말대로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정치를 해왔던 박근혜 대통령이 이제 아버지 시대의 역사를 미화하기 위해 정권이 만드는 교과서 제작에 나선 것임을 세상은 이미 짐작하고 있다. 결국 과거로 가서 자신의 입맛에 맞게 역사를 변경시키겠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은 역사의 기록에 손을 대는 대통령이 되는 셈이다. 조선시대에 사초는 임금이라 해도 함부로 열어볼 수 없도록 했다. 역사기록의 객관성과 독립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 대통령은 조선시대 임금조차 함부로 할 수 없었던 역사를 수정하려 한다. 결국 부딪힐 것은 ‘박정희 패러독스’이다. 박정희 독재를 미화하기 위해 과거로 시간여행을 간다. 5·1 6쿠데타도, 유신독재도 우국충정의 불가피한 결단으로 기술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 나라가 지켜왔던 민주주의 역사는 송두리째 부정되고 만다. 그래도 민주주의를 향해 전진해 왔던 우리 현대사의 인과관계가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든 대통령의 생각에 맞게 역사를 뒤바꾸겠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시간여행이다. 시간여행에서 과거의 역사를 마음대로 건드리면 현재를 파탄시키는 재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난 대통령이 시간장벽에 부딪혀 현재로 돌아오는 길을 영영 찾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아니, 이미 진작에 대통령은 아버지의 시대 속에서 살기로 마음먹었는지 모른다. 국민이 살고 있는 현재보다는 그 곳에서 그 시절의 생각을 갖고 사는 것이 편한 듯하다. 대통령 개인의 행복이 역사의 불행이 되고 있다. 에서 시간여행을 갔던 앤드류가 했던 말이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역사는 원래 존재하던 그대로 남아 있거든. 콜럼버스와 워싱턴, 그리고 무솔리니와 헤러포드는 계속 존재하는 거야.” 그렇듯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박정희의 역사는 원래 그대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금주의 칼럼
[이상돈의 책을 통해 세상읽기]황용주를 통해 인간 박정희를 다시 생각한다(2015. 05. 12 14:31)
2015. 05. 12 14:31 문화/과학
이른 나이에 야인이 된 황용주는 그 후 세상에서 잊혀졌다. 황용주라는 이름은 문화방송과 정수장학회 문제가 제기될 때 잠시 거론될 뿐이었다. 황용주가 만났던 박정희는 민족주의자였지만 3선 개헌과 유신을 거치면서 박정희는 반공과 국가안보를 내세운 독재자로 변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 국무총리나 장관에 지명된 사람들이 청문회에 서면 야당 의원들이 “5·16이 혁명이냐, 쿠데타냐?”고 묻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러면 이들은 ‘쿠데타’라고 답을 하게 마련이다. 괜히 ‘혁명’이라고 답해서 시끄럽게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5·16을 ‘군사혁명’으로 지칭했다. 5·16 주체세력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군사혁명’이라는 단어는 쿠데타와 거의 비슷한 의미로 생각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5·16 전후사를 아는 사람들은 박정희가 대단히 복잡한 사람임을 알고 있다. 이에 비해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가 아는 박정희는 ‘유신 대통령 박정희’가 전부인 것 같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승만 정권의 무능과 부정부패를 개탄하고 군이 국가개조를 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더 나아가서 사회주의를 동경했던 인물이었다. 안경환 지음, 황용주 그와 박정희의 시대(2013년, 까치) 대구사범 동창, 문화방송 사장 역임 5·16 후 군사정부 시절에 있었던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필화 사건과 북한에서 파견되어 온 황태성을 처형한 사건은 박정희를 향한 좌익 혐의를 부인하고자 했던 조치였음은 이제 알려져 있다. 1963년 10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동아일보는 박정희 후보에게 좌익 전력이 있음을 크게 보도했는데,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다가 박정희 대통령을 도와서 국회의원이 된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것을 ‘수구 기득권 세력의 발악’이라고 지칭했다. 6·25 당시 북한군 치하에서 고생했던 서울 시민들이 압도적으로 윤보선 후보를 지지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유신 독재자로 알려진 박정희는 초창기에는 민족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 면모가 있었으나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반공주의자이자 자본주의자로 변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와 대구사범을 같이 다닌 황용주 역시 민족주의자이고 사회주의자였는데, 그는 젊은 나이에 부산에서 언론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안경환 교수가 펴낸 이 책은 이제는 잊혀진 황용주를 말년까지 추적해서 기록했다. 안 교수가 말하듯이 박정희는 황용주를 좋아해서 문화방송 사장에 임명했지만 김형욱 등 박정희의 측근들은 황용주를 의심했다. 1964년 가을에 월간 에 기고했던 평화통일론이 야당 의원들에 의해 문제가 되자 정권 내의 강경파들이 그에게 반공법을 걸어서 제거해 버린 것이다. 친미 반공노선으로 고착화된 박 대통령도 어쩔 수 없었다. 비슷한 주장을 군정기간 동안에 해서 사형을 당한 조용수에 비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황용주 전 문화방송 사장 황용주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부산일보 사주였던 김지태와의 관계다. 김지태가 소유했던 부일장학회와 문화방송이 5·16 후 국가로 넘어가는 데 있어서 황용주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정수장학회를 입안한 장본인이 황용주인 것이다. 해방 후 일본인 자산을 불하받아서 사업을 키운 김지태는 1949년에 부산일보를 인수했는데, 6·25 전란 중 부산이 임시로 수도 역할을 하자 그의 영향력도 커졌다. 1958년 10월, 김지태는 부산일보의 경쟁지인 국제신문의 주필로 필력을 자랑하던 황용주를 파격적인 조건으로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영입했다. 김지태는 같은 해 1월 부일장학회를 설립했고, 이듬해 4월에는 부산문화방송을 개국해서 우리나라에서 민간방송시대를 열었다. 자유당 말기의 독재에 대해 김지태와 황용주는 똑같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부산일보는 최루탄을 얼굴에 맞고 사망한 김주열군의 사체를 특종 보도해서 세계에 알렸고 이는 곧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는 계기가 됐다. 김지태와 황용주의 밀월관계는 5·16이 일어나면서 끝나고 말았다. 박정희는 오랜 친구이자 부산의 명망 있는 언론인 황용주에게 도움을 청했고, 황용주는 박정희를 자신과 같은 민족주의자로 생각하고 돕기로 했다. 박정희가 황용주를 통해서 김지태에게 거사자금을 요청했으나 답이 없어서 서운한 감정을 갖게 됐다는 주장도 있다. 무엇보다 김지태는 민주당 정권과 가까웠던 정치인이었으며, 자본가이자 기업가였다. 박정희는 혁명과업을 완수하고 원대복귀하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민족적 민주주의’를 내걸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황용주는 박정희를 내세워서 자신이 꿈꾸어 오던 민족주의를 이 땅에서 실현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미국 대사관은 황용주를 위험한 인물로 분류해서 감시했고, 박정희가 자신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시키기 위해 기용한 정일권 등은 황용주를 제거 대상으로 보았다. 부산일보·문화방송 헌납 과정의 역할 김지태는 1961년 서울에 문화방송 법인을 설립하고 12월에 방송을 시작했다. 그러나 1962년 5월, 김지태는 군사정부에 의해 체포됐고, 석방하는 조건으로 부산일보와 문화방송, 그리고 부일장학회를 헌납하는 각서에 서명을 했다. 이 과정에서 황용주가 자신을 키워준 김지태를 배신하고 언론을 장악하려던 박정희 쪽에 섰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황용주는 문화방송 사장으로 취임해서 월간 지 필화 사건으로 물러나게 될 때까지 재직했다. 황용주는 방송은 공적 기관이기 때문에 정부가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이 책은 전한다. 한편 박정희는 자신에게 비판적인 동아일보에 민간 방송을 허가했으니, 황용주가 박정희보다 사회주의 성향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른 나이에 야인이 된 황용주는 그 후 세상에서 잊혀졌다. 황용주라는 이름은 문화방송과 정수장학회 문제가 제기될 때 잠시 거론될 뿐이었다. 이 책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황용주는 박정희의 3선 개헌과 유신을 지지했고, 박정희가 사망하자 한없이 슬퍼했다고 한다. 황용주가 만났던 박정희는 민족주의자였지만 3선 개헌과 유신을 거치면서 박정희는 반공과 국가안보를 내세운 독재자로 변했다, 하지만 황용주의 시계는 여전히 1960년대 초에 머물고 있었다. 황용주는 유신체제 하에서 있었던 인혁당 사건 같은 인권유린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인간 박정희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박정희는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자가 아니었다. 보수주의 철학의 창시자인 에드먼드 버크는 혁명을 위험한 불장난이라고 비난했지만 박정희는 혁명을 꿈꾸고 정변을 일으켰다. 박정희는 민족중흥을 추구했던 국가주의자였다. 책은 황용주를 박정희와의 만남에 취해버린 로맨티스트로 그려냈다. 그가 잠시 무대 위에 있었을 때 남긴 일은 문화방송과 정수장학회인데, 우리는 아직도 그 후유증을 겪고 있다.
이상돈의 책을 통해 세상읽기
[신간]1970, 박정희 모더니즘外
[신간]1970, 박정희 모더니즘外(2015. 04. 07 15:27)
2015. 04. 07 15:27 문화/과학
1970, 박정희 모더니즘 권보드래 외 지음·천년의상상·1만9000원 박정희 시대가 남긴 기억과 상처를 되묻는 책이다. 1970년대 정치·사회·문화사를 분석하고 오늘날에도 박정희의 유산이 여전히 흘러넘친다고 말한다. 도시유감 전상현 지음·시대의창·1만6500원 파리, 선전, 디트로이트, 상파울루 네 도시를 선정해 이들 도시의 문제를 분석했다.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도시 빈민 문제부터 중산층의 도시 탈출에 따른 계층간 공간 분리 문제까지 다양한 현대 도시의 문제를 다뤘다. 과학의 열쇠 로버트 M. 헤이즌 외 지음·이창희 옮김·교양인·1만8000원 ‘힘과 운동’의 관계를 최초로 밝힌 뉴턴 역학부터 20세기 과학, 철학, 문화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양자역학, 상대성 이론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잊혀질 권리, 나를 잊어주세요 송명빈 지음·베프북스·1만2800원 정보사회의 발달로 인간의 삶은 한층 편리해졌지만, 자신이 공개한 아주 사소한 정보가 의도치 않게 범죄자들의 범행에 쓰이기도 한다. 이 책은 일상에서 개인정보 유출의 피해를 줄이는 예방법 및 디지털 흔적을 지우는 방법 등을 다루고 있다.
신간
[북리뷰]박정희 시대의 권력 이야기
[북리뷰]박정희 시대의 권력 이야기(2014. 01. 14 14:00)
2014. 01. 14 14:00 문화/과학
김충식 지음·폴리티쿠스·3만2000원 2014년 새해 첫 책으로 을 이야기하게 될 줄은 몰랐다. 2013년이 시작될 무렵까지만 해도 그랬다. 1983년에 태어나 철이 들 무렵 이미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된 나라에 살고 있었던 내게, 은 MBC 드라마 ‘제3공화국’과 마찬가지로, 그저 흥미 위주로 슬슬 넘겨보는 정치 비화 모음집에 지나지 않았다. 적어도 누구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제목이지만, 혹시 모를 사람들을 위해 간략하게 소개해 보자. 은 1961년 설립되어 1981년까지 유지된 대한민국 중앙정보부를 통해, 같은 시기의 한국 현대사를 서술하는 책이다.  중앙정보부를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박정희 시대를 이해할 수 없으며, 박정희 시대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오늘날의 역사에 대해서도 무지할 수밖에 없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와 그의 동료들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로부터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6월 10일 군부는 중앙정보부를 만들었다.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내놓은 후, 국가재건최고회의법과 함께 군부는 중앙정보부법을 공표하여 “미국의 CIA와 일본의 내각조사실을 절충한 정보수사기관”을 만들어낸 것이다. 국내외의 정보를 들쑤실 수 있고, 그 정보에 바탕하여 원하는 이를 구속수사할 수 있는, 희대의 권력기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 중앙정보부를 만들고 초대 부장을 역임한 사람이 김종필이다. 그는 농협중앙회에 보관되어 있던 한전의 주식을 강탈한 후 주식시장에 내다 파는 등의 수법으로 자금을 마련하고 공화당 창당작업에 나섰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화당을 통해 박정희가 대통령에 출마하였고 당선된 것이다.  중앙정보부와 박정희 정권의 역사는 이후로도 18년간 더 흘러가게 되며, 은 그 길고 복잡한 세계를 물경 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전달한다. 은 동아일보에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연재된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87년 민주화 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후, 김영삼과 김대중의 분열로 인해 노태우가 당선되어버린 바로 그 시점에, 저자 김충식은 중앙정보부와 박정희 정권에 대한 초대형 기획 연재를 진행한 것이다. 본문의 첫 문장은 “전두환 대위의 등장이 빠르다”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전두환, 노태우 및 육사 11기들이 시도한 63년 쿠데타 음모가 등장한다. 물론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긴 하지만, 아무튼 ‘살아있는 권력’들의 행적을 직설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셈이다. 2012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 개정증보판이 출간되었으며, 이 책의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인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민주화 이전의 대한민국을 살아온 사람들이 아닌, 나처럼 민주주의가 너무도 당연한 사람들을 위해 필자는 이 북리뷰를 쓰고 있다.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은 물론 민주주의와 헌법의 원리를 위배한 도전이며 일탈이지만, 대한민국이라는 신생 국가의 역사를 놓고 볼 때, 그런 시도가 없었던 경우가 오히려 드물다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불행히도, 국가정보원은 아직도 중앙정보부 시대의 권력을 휘두르고 싶어하는 듯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을 다시 펼쳐들고 우리가 겪어온 어두운 역사를 곱씹는 것은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닐 것이다.
북리뷰
[독자댓글]1050호 “신드롬·신화화 이후 ‘유사 박정희’ 경계를” 外 를 읽고
[독자댓글]1050호 “신드롬·신화화 이후 ‘유사 박정희’ 경계를” 外 를 읽고(2013. 11. 12 16:45)
2013. 11. 12 16:45 오피니언
“신드롬·신화화 이후 ‘유사 박정희’ 경계를” 죽은 자를 불러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정권인 거냐. 아버지보다 나은 대통령이 되려 하지 않고 끊임없이 망령을 불러내려는 작태는 한심하다 못해 무능의 극치를 보는 것 같다. 세상 오래 살다 보니 또 죽은 망령들이 하는 정치 꼴을 다 보네. _다음 청룡 ‘카리스마적 지도자’라고? 어이 없다. 무식하게 권력으로 억누르는 것이 ‘카리스마’가 아니다. 공동체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과 소통하며 부드럽게 설득할 줄 아는 힘, 그것이 카리스마다. _다음 드림차차 난 오히려 박근혜 대통령이 된 게 박정희 우화를 해체시킬 좋은 계기라고 생각한다. 4년 남았다. 결과가 뻔히 보인다. _페이스북 August Kim “‘태산 같은 각하’… ‘신’이 된 박정희” 김일성 수령 동상 앞에서 가슴을 쥐어 뜯으며 울던 북한 주민들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는데, 이제는 근거리에서도 볼 수 있구만. _다음 산야 대단하다. 박정희 사후 이렇게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왔다면 아무 말 안 하겠다. 근데 지금 와서 이렇게 한다는 게 정말 대단하다. 이러다 또 박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면 또 다른 권력에 줄을 서겠지? _다음 불만있음 떠나라 “박근혜 시대의 우경화 장기집권 노린 이념전쟁?” 수구세력의 이념논쟁에 대해서 진보진영이 더욱 선명한 ‘색깔론’ 공세를 펼쳐야 하는데, 현재 진보진영에서는 그럴 만한 주자가 없습니다. 최소한 사민주의적 색깔론이라도 들고 나와 대중들에게 호소력 있게 색조논쟁을 펼쳐야 하는데도 인물이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은 점점 이상하게 수구들이 자기 세상인 양 온갖 짓들을 다하고 있죠. _페이스북 Gwanyong Chung 청와대에서 유치원 재롱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실정을 해도 감싸주고 부추긴다. 고위공직자나 공무원은 연루된 사건이 수사 중이더라도 유·무죄와 관계 없이 정치적 차원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수사 결과나 재판 결과가 나온 뒤에야 처벌하면 범법공무원을 적시에 처벌할 수 없다. 성폭행범도 구속만 안 되면 임기를 마칠 수 있다는 건가. _다음 2ks “대한민국? 영남민국!” 대한민국이 경상도 나라인가? 왜 권력을 잡으면 특정지역 사람들만 능력이 있다고 임용을 하는지. “우리가 남이가”라며 지역갈등을 조장하면서 고향사람만 임용하는 악질·저질 정치지도자들 탓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렇게 계속 간다면 과연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_다음 시골장승
독자의 소리
[표지이야기]“태산 같은 각하”… ‘신’이 된 박정희(2013. 11. 05 17:59)
2013. 11. 05 17:59 정치
“하늘도 땅도 감응하는 각하…” 박정희가 되살아나고 있다. 친일ㆍ유신ㆍ반공ㆍ독재의 추억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단순한 향수를 넘어 ‘세상을 굽어 살피시는 분’으로 박정희를 신격화하고 있다. 그들에게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들의 이상이 구체적 인물로 현신한 것이다. “각하! 무지한 인간들의 생떼와는 상관없이, …따님의 국정 지지율이 60%를 넘었습니다. 각하의 철학과 비전에 하늘도 땅도 감응하고 있음입니다.” 손병두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이 추도사를 읊는 중간중간 “옳소!”와 같은 추임새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엄숙한 추도식 자리가 아니었다면 박수소리가 나올 듯한 분위기였다. 지난 10월 26일 국립현충원 박정희 대통령 묘역에서 열린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34주기 추도식은 쉴새없이 ‘각하’를 부르는 추도사와 추모객들의 열렬한 호응이 뒤섞여 진행됐다. 추도식에 수천 명 몰려들어 눈물 추도식이 진행되는 동안 간신히 감정을 억누르고 있던 추모객들 가운데 일부는 식이 끝나고 곧장 이어진 묘역 참배 순서에서 감정을 터뜨리기도 했다. 길게 늘어선 줄을 따라 계단을 오르는 동안 엄숙해져 있던 추모객들의 표정은 봉분 바로 앞에 다다르자 이내 눈물을 쏟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10월 25일 서울 강남구 도곡동 서울나들목교회에서 제1회 박정희 전 대통령 추모예배가 진행되고 있다. | 연합뉴스 “작년에 따님(박근혜 대통령)이 추도식에 왔을 때만 해도 (선거 전이라) 마음이 조마조마했는데 올해는 대통령이 됐으니 각하께서 얼마나 든든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울컥했다.” 추모객 이진숙씨(59)에게 박 전 대통령은 감정을 느끼는 존재일 뿐 아니라 ‘세상을 굽어살피시는 분’과 같았다. “각하와 육 여사님께서 따님 잘 돌봐주시고 우리나라가 모쪼록 더 잘 살게 도와주세요.”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한 10월 26일부터 박 전 대통령 탄생일인 11월 14일까지의 기간은 박 전 대통령 추모·계승을 표방하는 단체들이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이는 때다. 5·16혁명에서 1988년 쿠데타로 역사적 평가가 내려진 이후 숨죽여 왔던 박 전 대통령의 추종세력은 1997년 당시 월간조선 편집장이던 조갑제씨가 라는 박 전 대통령 일대기를 출간한 것을 기화로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까지 단순히 ‘박정희 향수’로 인식되던 추모 움직임은 기념관 건립 등 대규모 사업과 함께 ‘신격화’의 의혹을 받게 됐다. ‘박정희교’의 적자인 박근혜 대통령 집권은 어떤 새로운 흐름을 만들까. ‘따님’인 박 대통령은 이날 추도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대선을 앞두고 있던 지난해 33주기 추도식에는 참석한 바 있다. 당시 1만2000여명의 추모객이 몰렸던 데 비하면 적은 숫자지만 이날도 박 전 대통령 묘역 주변 도로는 5000여명의 추모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추모객들의 긴 참배 행렬이 끝나는 지점 뒤로는 주차된 관광버스가 현충원 정문까지 늘어서 있었다. 버스 앞유리에 붙어 있는 단체명은 각양각색이었지만 지역은 영남지역이 압도적이었다. 부산·대구·울산 등 광역시를 비롯해 경남·북의 전체 시·군 중에서 빠진 곳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추모객들의 대화 역시 대부분이 영남 말씨였다. “따님께서 대통령 안 됐으면 종북 빨갱이들 등쌀에 여기 오지도 못했을 수 있다”며 한 추모객이 운을 띄우자 주변에서 “맞다, 맞아” 하며 동의하는 말들이 일제히 쏟아졌다. 국가정보원과 군의 대선개입에 관한 의견을 묻는 질문을 던지자 질문을 받은 추모객 외에도 주변 여기저기서 대답이 들려왔다. “설사 (국정원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박 대통령이) 겨우 당선됐다 치더라도 결과적으로 보면 다행인 거다. 이름만 야당이라면서 간첩질한 놈들 줄줄이 나오는 것 보면 모르나.” ‘종북’ 세력과 맞선 박 대통령 부녀를 칭송하는 분위기는 뜨거웠다. 박 전 대통령의 ‘신격화’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종교학의 개념을 도입하면 박 대통령 당선 이후의 추모 움직임을 이해할 단서를 찾을 수도 있다. 종교학자 루돌프 오토를 통해 유명해진 ‘현현’ 개념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신의 반열에 오른 박 전 대통령이 현세에 드러낸 모습이다. 각 종교의 신비주의 전통에서 부정에 부정을 거듭한 끝에 드러나는 순수한 절대 존재는 신앙을 통해 경험된다. 박정희교의 믿음 안에서는 ‘종북’의 부정과 ‘유신’과 ‘근대화’라는 이상향의 추구가 박근혜 대통령이라는 구체적 인물로 현신한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경향은 기성 종교 안으로도 흡수될 수 있다. 하루 전인 10월 25일에는 서울 강남구에 있는 나들목교회에서 개신교계 최초로 박 전 대통령 추모예배가 열렸다. 추모예배가 열린 당일만 해도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예배 내용은 1인 미디어 ‘미디어몽구’가 예배 실황을 인터넷에 게재하면서 교계 안팎의 큰 관심을 모았다. 전면 십자가가 걸려 있던 곳에 걸린 박 전 대통령의 영정사진에 대해 보수적인 개신교인들이 우상숭배라며 분개한 것은 일면 당연한 반응이다. 신비주의 전통은 기성 종교의 체계를 흔드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일부 개신교ㆍ불교 지도자들 앞장 추모예배에서 성경 봉독과 설교, 찬송 등에 할애한 시간은 30분 남짓으로 짧았다. 대신 이후 대부분의 시간은 주최측이 “박정희 대통령의 기독교인으로서의 재발견”이라고 밝힌 순서에 집중됐다. 박 전 대통령이 한국교회 발전에 공헌한 업적을 소개하고, 추모헌시와 추모사가 이어졌다. “한국은 독재를 해야 돼!” 김영진 부천 원미동교회 원로목사의 발언에 참석한 신도들은 “아멘!”으로 화답했다. 결국 박 전 대통령의 유신독재가 교회의 발전으로 이어졌다는 말이 된다. 이 발언은 당시 추모예배에 참석한 목회자마저도 동의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추모예배 참석 교회의 교직자 ㄱ씨는 당시 예배 분위기를 전하며 “예상과는 달리 너무 노골적인 말이 난무해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하나님을 부르며 귀를 닫는 수밖에 없었다”며 “외부에 크게 알려져선 안 될 텐데 걱정했던 일이 그대로 벌어졌다”고 말했다.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를 비롯한 여권 인사들이 10월 26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 34주기 추도식에서 분향하기 위해 묘역으로 걸어가고 있다. | 연합뉴스 추모예배의 문제는 행사와 무관한 교회들 이름까지 끌어들인 데서도 발견됐다. 박 전 대통령이 유년 시절 출석한 일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구미 상모교회 등은 추모예배준비위원회가 일방적으로 해당 교회의 동의 없이 교회명을 사용했다고 밝혔다. 게다가 준비위측은 오는 11월 14일 박 전 대통령의 탄생일에 추모예배를 다시 열 것을 공언하기도 해 개신교계 내부에서 이를 저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ㄱ씨는 “역사적인 인물을 추모하는 예배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를 대놓고 정치적으로 악용하면서 인지도를 높이려 하고 있다”면서 “박 전 대통령 탄생일을 맞아 열리는 추모예배는 개인적으로나 개별 교회 차원에서 불참하는 것을 넘어 기독교계 전체가 나서서 막아야 더 큰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국 곳곳에 혈세로 신격화 작업 개신교계의 박 전 대통령 추모행사가 관심을 모았지만 박 전 대통령 추모사업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불교계였다. 지난 10월 12일 경주 불국사에서 열린 신라불교 영산대재에서 전면에 걸린 박 전 대통령의 초상화 역시 박 전 대통령의 신격화 흐름이 어떤 식으로 이어질지를 보여준다. 박 전 대통령은 신라불교의 위인들과 함께 숭모의 대상이 됐다. 박 전 대통령이 생전 불교계에 지원을 아끼지 않은 사실 때문에 그동안 불교계 일각에서는 박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추모법회를 열거나 개별 사찰 단위로 기념관을 건립하는 등의 사업을 진행해 왔다. 특히 지역의 중형 사찰들에서 열린 박 전 대통령 추모법회는 박 대통령의 취임 이후로 당선축하 법회를 겸해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박 전 대통령 ‘신격화’의 아킬레스건은 현실의 종교처럼 재원의 조달 문제다. 11월 14일 박 전 대통령 탄신기념 행사로 생가 일대에서 열리는 탄신제를 비롯, 박정희체육관에서 열리는 미술·서예 행사 정수대전까지 매해 경북 구미시의 예산지원이 들어간다.  박 전 대통령 기념사업에 가장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는 구미시의 경우 2015년까지 286억원(도비 18억원, 시비 268억원)이 들어가는 박 전 대통령 생가 주변 기념공원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사업으로 이전까지 박 전 대통령 동상이 구미 시내에서는 구미초등학교 한 곳에만 있던 데 더해서 2011년 높이 5m의 대형 동상이 새로 세워졌다. 대선 직전인 지난해 12월에는 민족중흥관이란 이름의 박 전 대통령 홍보관이 들어섰고, 현재는 새마을운동 테마공원 건설이라는 명목으로 초가들이 들어선 공원 및 추모관 건립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새마을운동의 이름을 내건 기념관 건설사업은 이미 같은 도내 포항시와 청도군에서 시행된 바 있어 중복된 사업을 경쟁적으로 벌여 혈세를 낭비한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포항시와 청도군이 각각 새마을운동의 ‘원조’ 발상지임을 주장하며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관 건립에 나선 데다, 구미시의 새마을운동 공원 역시 같은 성격으로 조성되고 있어 차별화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 세 곳의 지자체에서 벌이는 새마을운동 관련사업에만 모두 국비 462억원이 투입될 예정이다. 강원도 철원군의 경우 갈말읍 군탄리에 있는 군탄공원의 명칭을 ‘박정희 장군 전역공원’으로 개칭했다. 이 공원은 1963년 당시 박정희 육군대장의 전역식이 치러진 장소로, 1969년 육군 5군단이 기념비를 세운 데 이어 1976년 강원도가 기념비 일대 지역을 공원으로 조성해 박정희 장군 전역공원이라 이름 붙인 곳이다. 박 전 대통령 사후 5·16의 쿠데타 인정과 함께 1988년 지역 이름을 따 군탄공원으로 개칭돼 불려 왔다. 그러나 지난 3월 철원군 지명위원회가 지역 내 여론의 변화를 이유로 들며 처음의 이름으로 되돌린 것이다. 철원군 역시 공원의 이름만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예산을 들여 공원 확대사업을 시행할 방침이다. 이 확대사업은 국토해양부가 추경예산으로 편성한 8억8000만원이 추가로 투입되면서 전체 30억원대의 규모로 실시될 예정이다. 하지만 박정희교의 본산 영남지역과 달리 철원군은 군내 반대세력의 저항에 직면해 있다. 이 사업에서도 ‘각하의 철학과 비전’이 감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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