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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방글라데시 최저임금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다(2013. 12. 10 14:54)
2013. 12. 10 14:54 국제
새 최저임금으로는 의류노동자들이 집세나 교육비는커녕 밥값조차 감당하기도 벅차다. 지난 4월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 외곽 사바르에 있는 의류공장 ‘라나 플라자’ 건물이 붕괴되면서 1127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그보다 5개월 전인 지난해 11월에는 타즈린 의류공장에서 불이 나 110여명의 노동자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아무런 화재 안전장비도 갖춰져 있지 않고,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는 노후 건물에서 이들이 목숨을 걸고 일한 대가로 받은 돈은 한 달 38달러(약 4만원)에 불과했다. 라나 플라자 붕괴사고를 통해 열악하다는 표현으로는 모자랄 방글라데시의 의류공장 실태가 만천하에 드러나자, 방글라데시 정부는 여론에 떠밀려 최저임금을 인상했다. 12월부터 적용되는 새 최저임금은 66달러(약 7만원). 이전보다 77% 인상된 금액이다. 임금협상 때마다 5% 인상안을 놓고서도 노사가 진통을 겪는 우리나라 상황에서 보면 77%란 인상률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하지만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은 ‘최저임금 100달러’를 요구하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지난 11월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다카 외곽에서 시위를 벌이던 방글라데시 의류공장 노동자들이 경찰과의 충돌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동료 여성을 황급히 들어 옮기고 있다. | 다카|AP연합뉴스 11월 29일에는 최저임금 시위를 벌이던 의류공장 노동자 2명이 경찰과의 충돌과정에서 사망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이에 격분한 노동자들이 의류공장에 불을 지르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과연 노동자들의 욕심이 지나친 것일까. 왜 이들은 임금이 77%나 인상됐는데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일까. 저임금에 시달리는 의류노동자들 방글라데시 의류공장 노동자들의 요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방글라데시의 물가 사정부터 알아둘 필요가 있다. 방글라데시의 최저임금이 마지막으로 인상된 것은 2010년이었다.  2010년 이후 방글라데시의 물가는 28% 올랐다. 다카의 권위 있는 연구기관인 ‘정책대화센터’의 최근 통계를 보면, 방글라데시 3인 가구에 필요한 한 달 기본 식재료 비용은 67달러다. 결국 새 최저임금으로는 의류노동자들이 집세나 교육비는커녕 밥값조차 감당하기도 벅차다. 애초의 최저임금이 워낙 낮았던 탓에 77%란 인상률은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의류공장 노동자인 조흐마 베굼은‘미국의 소리’와의 인터뷰에서 “쌀을 비롯한 모든 생필품의 물가가 너무 비싸 66달러로는 한 달 생활이 불가능하다”면서 “이 월급으로 우리보고 뭘 먹고 어디서 살란 말이냐”고 말했다. 66달러 최저임금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신입에게는 교육기간인 3개월 동안 최저임금보다 적은 62달러만 지급할 수 있도록 예외조항을 만들었다. 만약 공장주가 신입의 업무 발전 속도가 느리다고 판단할 경우 이 예외 기간은 3개월 더 연장될 수도 있다. “너무 부족하다”는 의류공장 노동자들의 절규와 달리, 다국적 의류업체들은 최저임금 인상액이 “너무 많다”며 아우성이다. 방글라데시에 공장을 둔 의류업체들은 “66달러 최저임금은 우리보고 문을 닫으란 소리와 같다”면서 “54달러 이상은 절대 수용할 수 없다”고 버텨 왔다. ‘극도로 낮은’ 방글라데시의 노동비용 이점 때문에 방글라데시를 선호해 온 이들 의류업체는 방글라데시의 최저임금 인상이 캄보디아, 인도, 스리랑카 등 다른 저임금 국가에 영향을 미칠까 우려하고 있다. 월마트나 H&M에 옷을 납품하고 있는 방글라데시의 한 의류공장 상무이사는 “이들 다국적 의류기업과 당장 다음 시즌 납품을 위한 협상에 들어가야 하는데 (어떤 요구를 해올지) 걱정이 크다”고 월스트리트저널에 말했다. 최저임금 인상에 거세게 저항하고 있는 이들 기업은 라나 플라자와 테즈린 의류공장 사고 희생자들의 보상 책임조차 외면하고 있다. 타즈린 의류공장 화재의 희생자 112명은 사고 후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보상금을 받지 못했다.  의류업체들이 타즈린 공장 희생자들에게 총 600만 달러의 보상금을 책임져야 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지만, 이들은 지금도 돈 내기를 거부하고 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한 공장들 방글라데시 노동자연대의 칼포나 아크터는 “그나마 유럽의 의류업체들은 나은 편”이라면서 “미국 의류업체들은 단 1페니도 낼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다. 정말 역겨운 일”이라고 현지 언론 데일리스타에 말했다. 특히 비판은 월마트에 쏠리고 있다. 영국 시민단체인 ‘Clean Clothe Campain’의 사만다 마허는 “타즈린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들의 절반가량이 월마트에 납품됐지만, 월마트는 일말의 책임감도 보이지 않고 있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희생자 112명 중 97명은 그나마 방글라데시 정부가 준 보조금이라도 받았지만, 불에 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어 신원 확인이 불가능한 15명의 희생자 유족들은 단 한푼도 받지 못했다. 라나 플라자 붕괴사고의 희생자들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의류업체들은 사고 이후 6개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보상금 액수를 놓고 줄다리기만 하고 있다. 이탈리아 의류업체인 베네통은 보상금산정위원회에 참가하기조차 거부해 오다가 최근에서야 여론의 압력에 밀려 위원회 논의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최저임금과 보상액 논의만 지지부진한 것이 아니다. 여전히 많은 의류공장 노동자들이 언제 불에 타고,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공장건물에서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다. 라나 플라자 붕괴 후 방글라데시 정부는 모든 공장을 대상으로 안전진단 프로그램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부의 안전진단 프로그램 관계자들은 지난 10월 말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프로그램 출범 이후 진단을 진행한 공장은 아직 단 한 곳도 없다”고 털어놨다. 정부는 진단을 받아야 할 공장 목록조차 확정하지 않았고, 진단을 진행할 감독관 역시 보강하지 않았다. 지난 10월 초에도 다카 외곽의 의류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잔업 중이던 노동자 10여명이 사망했는데, 당시 공장에는 화재 안전시설이 설치돼 있지 않았다. 블룸버그통신은 이 공장이 단 한 번도 정부로부터 안전점검을 받은 적이 없었다고 보도했다. 방글라데시 대학 연구팀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현재 방글라데시 의류공장의 5분의 3은 붕괴위험에 노출돼 있다. 의류산업이 수출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캄보디아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캄보디아는 지난해 40억 달러 이상의 의류상품을 수출했지만, 의류노동자의 최저임금은 80달러 수준이다. 작업공장 화재위험과 아동 노동 문제도 끊이지 않고 지적되고 있다. 현재 캄보디아 의류회사의 대부분은 방글라데시와 마찬가지로 해외 다국적 기업의 소유다. 캄보디아 의류노동조합 대표인 아쓰 쏜은 “선진국의 의류기업들이 자신들의 순익을 조금이라도 노동자와 함께 나눈다면 최저임금을 150달러까지 올릴 수 있을 것”이라면서 “하지만 기업은 노동자들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캄보디아데일리에 말했다.
[커버스토리]난민 인정 | 방글라데시 출신 수피안
[커버스토리]난민 인정 | 방글라데시 출신 수피안(2007. 07. 17)
2007. 07. 17 사회
“집권당이 테러, 살기 위해 왔어요” 방글라데시는 여전히 국내 정치 상황이 혼란스러운 곳이다. 오랜 정적인 방글라데시민족주의당(BNP)과 아와미 리그(Awami League)가 총리직을 주고받는 등 현실정치를 주도했지만 양측 총리 출신들이 서로 인사도 하지 않을 만큼 적대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서도 양측의 유혈충돌에다 전국적인 소요사태가 몇 달간 계속되며 사망자가 속출하자 쿠데타를 일으킨 과도정부군이 과도내각을 앞세웠지만, 지난 1월 22일로 예정됐던 총선을 연기한 이후 사실상 계엄령을 선포한 상태다. 방글라데시와 미얀마 접경지대인 치타공지역에 살던 수피안씨(Sufian·31). 당시 방글라데시 야당연합의 대표 격인 ‘아와미 리그’의 치타공시(Chittagong city) 제7구역 대표로, 또 사회복지단체의 총무(general secretary)로 활동하던 그가 한국행을 결정한 2005년 가을은 양 정치세력의 투쟁이 가장 격렬한 시기였다. “당시 집권당인 BNP의 정치 박해와 살해 협박이 극심해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떨어져 있어야 했다”는 수피안씨는 “정치적으로 발전했고, 방글라데시 출신 난민들이 상당수 있어 한국행을 택했다”고 밝혔다. 학창시절, 모범생으로 남다른 리더십이 있었던 그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정치적인 관심이 늘어 야당인 ‘아와미 리그’의 학생위원회에 가입했다. 집권당의 권력 남용을 비판하고 혁신하기 위해서였다고. 이후 그는 집권당과 경찰의 비리와 부패에 대항하기 위해 당원을 모으고 집회를 여는 데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집권당과 경찰은 그를 ‘말썽꾼(trouble maker)’라고 부르며 시찰 대상에 올렸다. 수많은 쿠데타와 정적 암살, 상대 정파에 대한 폭탄테러 등이 현재도 자행되고 있는 방글라데시에서 정당 활동, 그것도 야당 활동을 한다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수피안씨는 구체적인 사유 없이 경찰에 체포되어 잔인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고, 그의 가족은 수시로 들이닥치는 경찰과 테러단체들 때문에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수피안이 정치적 망명을 택한 계기가 된 결정적 사건이 있었다. 방글라데시는 민족과 지역, 정치적 입장에 따라 주민간 갈등이 심하다. 자치구의 경계 문제를 두고 신경전을 펼치던 끝에 수피안이 속한 지역의 아와미 리그의 당원들이 상대 지역 BNP의 한 당원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경찰을 등에 업은 BNP 당원들의 보복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어느 날은 테러집단이 총을 쏘며 집에 들이닥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는 그는 “이후 잠도 편히 잘 수 없었고, 특히 가족의 안전이 중요했기 때문에 난민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와 같이 ‘살기 위해’ 많은 당원이 난민의 길을 선택했다고 한다. 2005년 9월 10일. 그는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한 달 단기비자는 난민신청과 지위 인정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때 누군가 외국인투자비자(D-8)를 활용하면 6개월 이상 체류가 가능하다고 해 돈을 주고 대행을 맡겼다. 그러나 당시 출입국관리소는 이 같은 브로커들을 집중단속하고 있었고, 그는 결국 출입국 보호시설에 억류됐다. 그는 “불법인지는 꿈에도 몰랐다”며 “생명의 위협이 있는 방글라데시로 돌아가야 한다는 두려움 탓에 판단력이 흐렸던 것 같다”고 말했다. 억류되어 있는 상태에서 출입국관리소 직원의 도움을 받아 난민 지위 신청을 한 수피안씨. 하지만 4개월간의 ‘난민 아닌 억류’ 생활은 그에게 마음은 물론 건강에도 큰 상처를 주었다. 이후 그는 불면증과 신경성 위염 등으로 3개월간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그리고 신청 1년 만인 지난 5월 3일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미국의 형에게서 돈을 얻어 공탁금을 내고 나와 치료를 받았지만, 이후 난민신청자는 일자리를 얻을 수가 없어 어렵게 지내야 했다”는 그는 “한국 정부가 난민신청자에게 파트타임 정도의 생계활동은 보장해주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몇 달이 지나도록 “기다리라(just wait)”고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신청자들은 어려운 생활 속에서 희망을 잃어간다고 그는 비판했다. 조국의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수피안씨는 요즘 무역업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 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펼치겠다는 것이다. 또한 난민인정을 받는 데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은혜도 조금씩 갚아갈 예정이라고 한다.
표지 이야기
[커버스토리]난민 인정 | 방글라데시 줌마족 출신 로넬
[커버스토리]난민 인정 | 방글라데시 줌마족 출신 로넬(2007. 07. 17)
2007. 07. 17 사회
“난민 인정 받아도 푸대접받기 일쑤” “○○은행 옆길로 5분 정도 걸어오다가 ◇◇수퍼에서 ‘꺾어’ 경사진 골목으로 쭉 올라온 다음 ▲▲세탁소 앞에서 전화해주세요.” 외국인의 길 안내 솜씨를 보면 그가 얼마나 오래 한국살이를 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로넬씨(40)는 완벽했다. ‘지시’ 대로 나아가자 그가 말한 랜드마크(?)가 딱딱 나타났고 곧 골목 끝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그가 보였다. 난민지위를 인정받은 지 약 3년째, 한국생활은 12년째인 로넬 차크마 나니씨를 지난 5일 아현동에서 만났다. 그의 고향은 방글라데시 동남쪽의 치타공 산악지대(CHT)로 이 지역 13개 소수민족을 일컬어 줌마족이라고 부른다. 차크마족의 일원이었던 그는 줌마족의 자치권을 위해 싸우다 고향을 등지게 됐다. “아주 어렸을 적 삼촌의 장례식이 기억나요. 삼촌은 시장에 갔다가 방글라데시 독립군이 쏜 총에 맞아 죽었어요. 당시 방글라데시는 동파키스탄이었고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투쟁을 벌이고 있었죠. 그런데 방글라데시 독립군이 우리 줌마족이 파키스탄을 지지한다며 무차별적으로 죽였어요. 사실 줌마족 지도자 중엔 방글라데시 지지자가 더 많았는데도 말이죠. 저는 진짜 이유는 민족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방글라데시의 주류인 벵갈리족은 이슬람교를 믿고 벵골어를 쓴다. 반면 줌마족은 자신들의 고유언어를 쓰고 종교도 불교·힌두교·가톨릭 등 다양하다. 벵갈리족과 줌마족은 한눈에 구분할 만큼 서로 외모도 다르다. 이런 차이는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방글라데시가 독립한 뒤 탄압의 강도는 더 거셌고 줌마족은 자연스럽게 자치권을 요구했다. 게릴라군도 만들었다. 그의 아버지도 게릴라였다. 고등학생인 그도 게릴라군에 참여했다. 그는 졸업 직전인 1986년 10월, 실종된 방글라데시 정부군을 죽인 혐의 등으로 군에 체포되어 법정에 섰다. 그 사이 꼬박 3년의 옥고를 치렀지만 다행히 살인혐의는 벗었다.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족 품으로 돌아온 그는 고교를 졸업한 뒤 대학을 다녔다. 그의 일상은 정보기관의 감시 때문에 늘 불안했다. 집에 누군가 다녀가면, 곧 정보기관원은 그를 불러 집에 다녀간 사람이 누군지 캐물었다. 게다가 방글라데시 정부군이 치타공 산악지대 곳곳에서 민간인 수십 명을 살해했다는 소식이 잊을 만하면 날아들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는 고향을 떠나 인도를 거쳐 태국의 방콕·파타야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줌마족 출신 10여 명과 함께 인민민주연합전선(UPDF)에 가입해 자치운동을 펼쳤다. 이들과 의기투합한 것이 한국행의 계기가 됐다. “사정이 어려워 다들 유럽·일본 등으로 떠날 때였죠. 그때 한국에 가본 적이 있다는 줌마족 형이 그러더군요. 한국에는 아직 줌마족이 알려져 있지 않다고. 그래서 제가 대답했어요. ‘그럼 제가 한국에 가겠다’고요.” 선뜻 한국행을 결심한 데는 한국은 ‘민주화된 국가’라는 어렴풋한 ‘믿음’이 있었다. 그는 1994년 한국으로 건너왔다. 한국생활는 물론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가 믿었던 ‘민주화된 국가’는 이방인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국인 동료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였고 월급은 때때로 밀렸다. 그는 방글라데시 정부와 줌마족 간의 평화협정 체결로 2년간 고향에 갔다. 탄압과 박해는 여전했다. 눈물을 삼키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번엔 독하게 마음을 먹고 줌마민족네트워크 한국지부를 만들어 줌마족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발로 뛰었다. 덕분에 그와 줌마족의 이야기는 언론에 간간이 소개됐다. 그는 2년 6개월 전에 한국정부로부터 난민지위를 인정받았다. 2년간의 힘겨운 기다림 끝에 이뤄낸 성과였다. 하지만 법적 지위를 인정받은 후에도 로넬씨는 여전히 이질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은행에 가서 난민여행증명서(정부가 난민에게 여권대용으로 발급해 준 증명서)를 보여주면 ‘이런 것 말고 당신 나라에서 발급해 준 여권을 보여달라’는 대답이 돌아와요. 대출은 물론 신용카드 발급도 힘들죠. 운전면허시험도 보기 힘들고요.” 그는 “법무부는 늘 이 자격증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다르다”고 말했다. 병원이나 은행, 관공서에서 외국인등록증(신분증)을 내밀 때면 늘 담당직원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신용카드도 만들고 운전면허증도 딴 로넬씨는 난민들 중에서 운이 아주 좋은 편에 속한다. 그는 “인식 부족으로 정당한 권리조차 챙기지 못하는 난민이 많다”며 “법무부가 각 부처·관공서 등에 난민권리에 대해 홍보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포에서 아내 졸리 데완(30), 아들 주니(9)와 살고 있는 로넬씨는 아직은 아들의 재롱을 여유롭게 지켜볼 수 있는 행복한 가장이다. 얼마 전까지는 가구공장에 다녔다. 지금은 아름다운재단에서 활동비를 지원받고 있어 형편이 크게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아들의 앞날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그의 ‘웃는 눈매’에도 그늘이 드리운다. 무엇보다 아들을 지금처럼 안정적인 환경에서 키울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외국인은 아파서 일을 빠지면 바로 해고예요. 월급이 끊기면 당장 월세를 낼 수 없어 집에서 나와야 하고요. 만약 그렇게 되면 기댈 곳 없는 우리 세 식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죠.” 이런 걱정에 빠져들 때면 로넬씨는 난민에게 일자리를 소개해주는 등 고용보장을 해주는 유럽으로 간 줌마족들이 슬며시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18년 전의 결심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여기에서 줌마족의 현실을 더 널리 알릴 겁니다. 한국사회의 ‘다문화 이해도’를 높이는 데 기여하고 싶은 소망도 있고요. 참, 제 아들 주니는 최초의 재한줌마인 2세랍니다. 제 아들이 한국아이들과 더불어 바르고 훌륭하게 잘 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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