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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 복지’ 한다면서 가난한 사람 병원 문턱 높이나
‘약자 복지’ 한다면서 가난한 사람 병원 문턱 높이나(2024. 10. 14 06:00)
2024. 10. 14 06:00 사회
정부, 의료급여 정률제 개편 추진…빈곤층 의료비 부담 늘어날 듯 참여연대, 빈곤사회연대, 보건의료단체연합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10월 2일 오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의료급여 정률제 개편 철회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중증 지적장애가 있는 김정수씨(가명·57)는 무릎 퇴행성 관절염으로 일주일에 한 번꼴로 정형외과를 찾아 주사치료나 물리치료를 받는다. 김씨는 ‘의료급여’ 1종 수급자라 의료비 걱정을 크게 하지 않는다. 의료급여제도(노동능력 유무에 따라 1·2종 구분)는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국가가 의료서비스를 지원하는 제도다. 무상은 아니고, 일정 금액을 본인이 부담한다. 1종 수급자는 의원(1차 의료기관)에 가면 1000원, 병원(2차)에 가면 1500원, 상급종합병원(3차)에 가면 2000원을 낸다. 약국에서 약을 지으면 500원을 낸다. 그런데 정부가 의료급여 본인부담체계를 이 같은 ‘정액제’에서 ‘정률제’로 바꾸겠다고 지난 7월 25일 발표했다. 의원에 가면 진료비의 4%, 병원에 가면 6%, 상급종합병원에 가면 8%를 본인이 부담하도록 하겠다는 내용이다. 2종 수급자는 1차 의료기관에서만 1000원 정액이고, 나머지는 정률제로 본인부담비를 냈는데 모두 정률제로 통일한다. 수급자들과 시민단체들은 의료비 부담이 늘 것이라면서 정부를 비판했다. 지난 10월 7일 시작한 제22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의료급여 개편을 두고 정부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빈곤층 의료비 부담 증가” 수급자들의 부담은 얼마나 늘까. 기초법바로세우기공동행동(기초법공동행동)이 김씨의 2023년 의료이용 기록에 정률제를 적용해 보니, 김씨의 연간 본인부담비는 4만7000원에서 18만4590원으로 늘어났다. 의원에서 물리치료까지 포함된 진료를 보고 1000원을 냈는데 정률제가 적용되면 2600원 정도를 내야 한다. 정부는 현재 수급자들의 건강관리를 유도하기 위해 월 6000원의 ‘건강생활유지비’를 지원한다. 수급자가 건강생활유지비를 다 쓰지 않고 남기면 현금으로 쓸 수 있도록 해준다. 정부는 정률제로 개편 시 본임부담이 증가할 수 있기에 ‘보호장치’로서 건강생활유지비를 2배(1만2000원)로 인상하겠다고 발표했다. 김씨의 경우 지난해 연간 7만2000원의 건강생활유지비를 받아, 본인부담금을 상쇄하고도 2만5000원을 받았다. 건강생활유지비가 2배로 뛰면 연간 14만4000원을 받지만, 김씨는 4만590원은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의료비만 보면 1년간 2만5000원 남던 것이 4만590원 부족한 것으로 바뀐다. 연간 4만590원이면, 한 달 3400원 정도다. 큰 액수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김씨 같은 수급자에게는 부담이 된다. 지난 10월 7일 서울 용산구 청파동 반빈곤운동공간 ‘아랫마을’에서 만난 김씨는 “무릎이 아파서 걷기도 힘들고 계단 같은 곳은 숨이 너무 가쁘다”며 “병원비가 오르면 부담이 되긴 하는데 그렇다고 병원을 안 갈 수는 없어서 다른 걸 조금 덜 써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김씨는 생계급여로 월 71만3102원을 받는다. 주거급여 수급자여서 주거비로 목돈은 안 들지만, 임대주택 관리비를 비롯해 식비·통신비 등 생활비로 71만여원은 늘 빠듯하다. 그는 식재료가 비싸기도 하고 혼자 밥 먹기가 힘들어 “하루 한 끼 먹을 때가 많다”고 했다. 잃어버린 휴대폰 기기값을 갚아야 해서 100만원을 따로 모아야 한다. 내년도 생계급여가 76만5444원으로 오르지만, 물가는 더 가파르게 오르고 의료비도 더 늘 수 있다. 김씨는 올해 3월부터 우울증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고 있다. 최근엔 두통이 심해서 신경외과도 자주 찾는다. 한 번에 먹는 약봉지가 3~4개다. 기초법공동행동이 지난 8월 김씨를 포함해 수급자 16명의 2023년 총의료비를 정액제일 때와 정률제로 바꿨을 때를 비교 분석했더니 이들의 연간 의료비는 평균 9만3319원, 최대 34만9791원 증가했다. 건강생활유지비 인상안을 적용했을 때는 16명 중 6명이 본인부담이 증가하며 그 금액은 평균 13만5000원이다. 뇌병변 장애가 있는 수급자 A씨는 지난해 척추증, 안검염, 담낭 결석, 만성복합치주염 등 9개 증상을 치료받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연간 본인부담비는 11만6500원(정액제)이었다. 정률제로 개편하면 46만6291원(정률제)으로 증가하는데, 인상된 건강생활유지비를 받아도 32만2291원을 본인이 부담한다. ■정부는 왜 정률제로 바꾸려 할까 의료급여제도는 1977년 건강보험제도와 함께 도입됐다. 2001년 이후엔 기초생활보장제 틀 안에서 운용되는 사회보장제도다. 건강보험 재정이 아닌, 국고(국비+지방비)로 의료비를 지원한다. 2007년 한 차례 개혁했다. 무상 제공에서 외래 진료 시 일부 본인부담(정액제)으로 바꿨다. 의료급여 지출이 급증하고 있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당시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이 이 개편안을 발표했을 때 사회 각계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의료접근성을 떨어뜨린다”는 비판이 일었다. 복지부는 2007년에 정한 정액 본인부담비가 17년째 유지되는 상황에서, 제도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정책 변화가 필요하다고 봤다. 의료급여 예산은 2007년 4조2000억원에서 올해 11조8000억원으로 늘었다. 물가와 생계급여, 진료비 등이 상승했음에도 의료급여 본인부담비는 동일해 수급자의 비용의식이 약화했다며 개편 취지를 설명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기자와 통화에서 “생계급여는 정해진 급여액을 지급하지만 의료급여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라서 수급자가 제한없이 이용할 수 있다. 적정 이용을 관리해야 하는 제도의 구조적 특성이 있다”며 “수급자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제도의 특성이 그러므로 개편을 통해서 합리적 의료이용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복지부는 건강보험 가입자와 의료급여 수급자 간 형평성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고 봤다. 의료급여 수급자가 건강보험 가입자보다 1인당 진료비가 3.3배 많고, 외래 이용 일수도 1.8배 많다는 통계를 근거로 제시했다. ‘수급자들의 생활비 수준을 봤을 때 의료비 증가가 부담될 수 있다’는 비판에 대해 복지부는 수급자 중 외래 이용이 많은 상위 9%(약 7만3000명)만 의료비가 증가한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국회 복지위에 제출했다. 서미화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받은 이 시뮬레이션 자료에 따르면, 외래 이용 상위 1%(월평균 22.6일)의 경우 의료비 부담이 월 6900원 증가한다. 복지부는 건강생활유지비를 2배 인상하면서 수급자 다수는 오히려 환금액이 늘고, 본인부담상한제(월 5만원 초과 시 초과금액 전액 환급)와 같은 보호장치가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많아야 월 6900원 는다는데, 그 정도는 괜찮은 거 아닐까’라는 질문을 해보자. 정성철 빈곤사회연대 활동가는 “수급자 중에는 10원 단위로 생활비를 나눠 쓰는 분들도 있다”며 “정액제일 때 의료비가 얼마가 들지 예측할 수 있지만, 정률제로 바뀌면 예측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서 (수급자들이) 의료이용을 덜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전은경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팀장도 “심리적으로 병원 문턱이 높아지는 것이 문제”라며 “본인부담금상한제가 있더라도 선지불 능력이 없는 상황이라면 병원을 가기 힘들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전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국장은 “당장은 정부 말처럼 부담이 크게 늘지 않을 수 있지만, 수가(의료행위 대가)가 인상되면 (진료비 대비) 정률제니까 당연히 본인부담비도 늘어나게 돼 있다. 4%라는 부담비율도 올릴 수 있고, 건강생활유지비도 (예산에 따라) 바꿀 수 있다”며 “공공부조인 의료급여제도 틀을 흔드는 일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이라고 했다. ■“공공부조 틀 깨는 것…‘약자 복지’는 어디로” 다음으로는 ‘의료급여 수급자가 건강보험 가입자와 비교했을 때 과다 의료이용을 하는 건 사실 아닌가’라는 질문. 김선민 조국혁신당 의원이 지난 10월 7일 국정감사에서 발언한 내용을 보면, 지난 10년간 의료급여와 건강보험 진료비 총액 증가 추이는 각각 1.99배와 2.07배로 차이가 없었다. 두 집단 간 1인당 진료비에서 격차가 발생하는 것과 관련해 정성식 시민건강연구소 연구원은 “수급자는 높은 고령화율·만성질환 및 장애 보유율, 낮은 소득·교육 수준 등 건강에 불리한 집단적 특성이 있어서 건강보험 가입자와 비교하려면 (통계) 보정과 연구가 더 필요하다”면서 “또 의료이용 빈도, 서비스 강도를 결정하는 것에는 의료 제공자(의료기관)의 판단도 영향을 미치는 부분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지난 10월 2일 오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열린 의료급여 정률제 철회 촉구 기자회견에서 한 참가자가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김정수씨와 종종 병원을 동행하는 주장욱 홈리스행동 상임활동가는 “의료서비스는 전문적인 영역이어서 당사자로서는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할 때가 많다”며 “지적장애가 있다든지 의료이용 판단을 할 때부터 취약한 분들이 있을 텐데 그분들의 사례를 면밀히 (정부가) 들여다보지 않고 소수의 과다이용자 몇 명의 사례를 일반화해 수급자의 의료이용을 ‘비용 덩어리’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의료급여 수급자들은 미충족의료(의료서비스가 필요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상태) 경험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진료비가 많이 드는 비급여 진료는 받기 어렵고, 의료서비스 강도가 높은 2·3차 의료기관도 덜 이용한다. 건강 상태가 짧은 시간에 개선되는 데 한계가 있다. 이는 1차 의료기관만 길게 자주 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그다음 ‘왜 지금일까’라는 질문. 복지부는 제도의 합리적 운용을 위한 고민은 수년 전부터 지속해왔으며, 2023년에 나온 제3차 의료급여 기본계획(2024~2026년) 등에 정률제를 적용하는 계획을 담았다고 밝혔다. 정성식 연구원은 “(3차 의료급여 기본계획·보건복지 백서 등을 참고해 비교한 결과) 2007년 개혁 때와 비교해보면 당시 의료급여 대상자를 차상위층으로 넓히면서 2006년 연간 총진료비가 전년 대비 20% 이상 급증세를 보였다”며 “반면 2018~2022년 5년 동안 의료급여 총진료비는 연평균 7.3% 증가했고, 이는 건강보험 총진료비 증가세(연평균 7.2%)와 유사하다. 그렇다고 2007년 개혁 때처럼 보장성 강화 정책을 추진한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정부는 과다 의료이용 사례로 ‘물리치료를 많이 받는 사례’를 제시했다. 정성식 연구원이 2021년 한국의료패널 데이터로 정률제 개편 시 수급자의 비용부담 변화를 분석했더니, 물리치료 외래 이용의 부담(수급자 1종·1차 의료기관 이용)은 2.6배 증가한 반면 비물리치료 외래 이용의 부담은 3.5배 증가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정률제 개편을 추진하려는 정책 근거가 불충분하다”는 게 정성식 연구원의 의견이다. 지난 10월 7일 국회 복지위 국정감사에서 서미화 의원은 “2000원으로 한 끼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의료급여 취약계층”이라며 “당사자들의 의견을 청취했느냐”고 질의했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당사자 의견 수렴은 하지 않고) 중앙생활보장위원회에서 논의를 했다고만 답했다. 김선민 의원은 “물론 수급자 중 1%의 경우엔 극단적인 사례가 있지만 관리 대상은 환자가 아니라 의료기관이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빈곤층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발상’이라는 두 의원의 질의에 조규홍 장관은 “본인부담비를 경감할 수 있는 보완장치를 만들겠다”고 답했다. 의료급여 수급자 중에 본인부담 예외 대상(아동·임산부·산정특례자 등)이 있는데, 이 대상군을 넓힐 방안을 찾을 것으로 보인다. 의료급여 본인부담 정률제 개편은 법 개정 사안은 아니다. 복지부가 의료급여법 하위법령을 변경하면 추진할 수 있다. 복지부는 국정감사를 비롯해 시민사회, 당사자들의 의견을 청취해 올해 연말까지 정책을 보완한 후 내년부터 개편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수급자 당사자들과 시민단체들은 정률제 개편안의 보완이 아닌 철회를 촉구한다. 이들도 불필요한 의료 남용을 줄이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의료기관 관리와 같은 다른 정책을 선행해볼 수 있을 텐데, 왜 가난하고 아픈 사람을 위한 예산부터 줄이려는지”(전은경 팀장) 묻는다. “감세 기조를 유지하면서 줄어드는 세수를 빈곤층의 의료접근성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메우면 안 된다”(정성철 활동가)고 말한다. “수급자들의 미충족의료 경험을 고려하면 오히려 보장성 강화 정책을 내놓아야 하는데 거꾸로 가는 정책”(정성식 연구원)이라고도 한다. 일관된 물음은 이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복지정책 철학은 약자부터 두텁게 보호하는 ‘약자 복지’가 아니었습니까.”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에 연간 3조3000억원 투입”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에 연간 3조3000억원 투입”(2024. 09. 27 16:21)
2024. 09. 27 16:21 사회
이상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제2차장(행정안전부 장관)은 9월 27일 “다음 달부터 시행되는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시범사업을 위해 연간 3조3000억원의 건강보험 재정을 투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장관은 이날 정부서울청사 서울상황센터에서 주재한 중대본 회의 모두발언에서 “정부는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등을 포함한 의료개혁 1차 실행방안을 차질 없이 이행하고, 5년간 20조원의 재정을 투자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 장관은 “상급종합병원의 인력 구조를 전문의와 진료지원(PA) 간호사 중심으로 재편할 것”이라며 “중증·희귀질환 등 고난도 진료에 집중하게 하고, 경증환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일반병상은 5∼15% 감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앞으로 중증수술 수가 인상, 중환자실 수가 50% 인상, 사후성과에 따른 보상 등을 위해 연간 3조3000억원의 건보 재정을 투입할 예정이다. 이 장관은 “최근 공개된 2024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건 통계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인구 1000명당 임상의사 수 순위에서 우리나라는 멕시코와 함께 OECD 회원국 중 최하위 수준을 기록했다”며 “부족한 의사 수를 늘리지 않고서는 필수의료와 지역의료 정상화를 위해 필요한 의료인력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또 “정부는 국민께서 언제, 어디서든 걱정하지 않고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의대 증원을 포함한 의료개혁 추진에 속도를 내고 있다”며 “의료계 여러분도 대한민국 의료체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의료개혁에 동참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위기마다 투입되는 공공병원…후유증은 알아서 해결해야
위기마다 투입되는 공공병원…후유증은 알아서 해결해야(2024. 03. 01 15:30)
2024. 03. 01 15:30 사회
팬데믹 이후 의사·환자 떠나고 적자만 남아…정부, 찔끔 지원하고 또 ‘역할’ 떠넘겨 전공의 집단사직이 시작된 지 3일째인 지난 2월 21일 서울 중랑구 서울의료원에서 의료진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 한수빈 기자 “이런 상황이 너무나 원망스러워요.” 지난 2월 27일 오전 11시 서울시 보라매병원, 보호자 A씨는 응급실로 급히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지쳐 보였다. 전공의들의 집단행동으로 의료 공백을 경험했는지를 묻는 질문에 그는 대답할 겨를이 없다는 듯 걸음을 재촉했다. 재차 묻자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맞아요. 우리도 그 피해자예요”라고 했다. A씨는 백혈병으로 쓰러진 가족을 데리고 지난 2월 25일 보라매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다. 원래 백혈병 치료를 받던 병원은 따로 있었다. 소위 ‘빅 5(서울대병원·세브란스병원·서울아산병원·삼성서울병원·서울성모병원)’라 불리는 상급종합병원. 그러나 중환자실도, 응급실도 환자를 받을 여력이 없다고 했다. A씨는 “의료 대란 때문이라고, 의사가 없다고 하더라고요”라고 했다. 급한 대로 보라매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다. 응급실은 응급처치를 목적으로 하는 까닭에 특정 환자가 오래 머물 수 없다. 응급실에서는 2월 26일부터 A씨에게 병상을 비워달라고 요구했다. A씨는 보라매병원 중환자실에라도 입원하길 원했다. 그는 “여기도 중환자실 입원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특실이든, 1인실이든 상관없으니 입원하게 해달라고 했는데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라고 말했다. 보라매병원은 “해당 환자는 골수이식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보라매병원이 골수이식을 할 수가 없어 입원 절차를 밟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전공의 이탈 사태와 무관한, 제공할 수 없는 의료서비스였다는 것이다. 원래 치료를 받던 병원에 다시 연락해 입원이 가능한지 물었는데 불가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됐다. 결국 A씨는 환자를 데리고 원래 치료를 받던 병원의 응급실로 일단 가기로 했다. 병상이 없다지만 기다리다 보면 자리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A씨는 “(보라매병원 측이) 다른 병원 응급실로 가려면 자진 퇴원확인서를 써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거 떼서 오는 길이에요. 사람이 쓰러져서, 급박한 상태로 왔어요. 이런 상황이 너무나 원망스러워요. 더 말 못 하겠어요”라고 말하고는 급히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야 하죠” 응급실 찾기 난항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방침에 전공의들이 집단사직을 하면서 발생한 의료 공백을 가까스로 메우고 있는 공공병원 한켠에서도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직은 균열 수준으로 막아내고 있지만, 사태가 길어지면 의료 대란이 현실화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응급실을 쉬이 찾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지난 2월 26일 오후 3시 무렵 서울 중랑구 서울의료원의 권역응급센터 일반병상은 모두 차 있었다(응급의료포털 참고). 오후 들어 한산해진 외래 진료 접수창구와 대조를 이뤘다. 이 병원 관계자에 따르면 이날 10여개 진료과의 오전 외래 진료 접수는 창구를 연지 3시간 만인 오전 10시 무렵 모두 마감됐다. B씨는 저혈압으로 식은땀을 흘리는 가족과 함께 서울의료원 응급실을 찾았다. 의료 대란 우려를 알고 있었기에 병원을 찾기 전 119에 연락해 주변 병원 응급실 이용이 가능한지 물었다. 서울 노원구에 사는 B씨 가족에게 가장 가까운 병원은 같은 노원구에 있는 인제대학교 상계백병원과 노원을지대학교병원이었다. 그러나 두 병원 모두 응급실에 환자를 받을 여력은 없다고 했다. 결국 B씨는 구급대를 불러 서울의료원을 찾았다. 소방 당국에는 내원이 가능한 응급실을 찾아달라는 문의가 급증하고 있다. 소방청은 지난 2월 16일부터 26일 사이 구급상황관리센터가 ‘병원을 찾아달라’는 구급대원의 요구에 병원을 지정해준 건수가 66건으로 전년 동월보다 73.7% 증가했다고 밝혔다. 평상시라면 시민들의 문의를 받은 구급대원이 자체적으로 병원을 찾아주지만, 응급실 이용이 어려운 병원이 늘어나면서 구급대원들도 쉽게 답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경기도 양주에 사는 C씨는 지난 2월 26일 폐렴에 걸린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의료원 응급실을 찾았다. 앞서 아버지는 ‘상급병원으로 가보라’는 진단을 받았고, 다른 종합병원에 진료 날짜를 잡아둔 상태였다. 그런데 이날 갑자기 호흡곤란 증상을 보였다. 큰 병원은 응급실 이용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2차 의료기관 위주로 알아봤다. 다행히 서울의료원이 환자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C씨는 이런 상황이 길어지진 않을지 걱정했다. 그도 그럴 게 C씨의 건강도 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24일 C씨는 갑작스레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출동한 119 구급대원이 대형병원 응급실은 이용이 어렵다며 경기도 양평의 양평병원 응급실로 이송했다. 부정맥이 의심됐는데도 심장질환을 다루는 진료과가 없는 양평병원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C씨의 보호자가 다른 병원으로 갈 수 없는지 물었는데 ‘사설 구급차를 이용해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C씨는 현재 집 근처 병원에서 정확한 병명 진단을 위한 검사를 받고 있다. C씨는 “(의료 대란으로) 지금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호흡곤란이나 위험한 상황이 또 발생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제가 이런 일 겪을 줄 몰랐는데, 갑자기 병원들도 이렇게 되고…”라고 했다. 위기 때만 소방수로 투입되는 공공병원 정부는 지난 2월 23일 보건의료 위기경보를 최고단계인 ‘심각’으로 격상하고 공공의료기관 가동을 최대치로 올리겠다고 했다. 공공병원들은 평일 외래 진료시간을 연장하는 한편, 주말·휴일에도 진료를 이어가기로 했다. 공공병원이 최후 저지선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점증할 환자들의 수요를 앞으로 얼마나 더 감당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일단 국내 의료체계에서 공공병원이 차지하는 비중부터가 작다. 기관 수 기준으로 전체 의료기관의 5%에 불과하고, 병상 수 기준으로는 약 10%에 그친다. 코로나19 유행기를 거치면서 공공병원들의 ‘기초체력’이 약화되기도 했다. 공공병원들은 2020년부터 2022년까지 2년 넘게 코로나19 감염병 전담 병원으로 지정됐다. 병상 상당수가 코로나19 환자용으로 전환되니, 일반 환자도, 의료 인력도 떠났다. 서울시에 따르면 서울의료원과 보라매·동부·서남·은평병원 등 시립 공공병원 5곳에 근무하는 의사는 743명으로 정원(846명)보다 100명 이상 부족하다. 전공의 집단 이탈로 공공병원 의료진은 더 줄었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립 공공병원 전공의 총 240여명 중 70%가량이 사직서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전공의 이탈 후 남겨진 의료진들의 업무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현재호 보라매병원 간호사는 “기존에도 의사 수 부족으로 의사들의 업무 일부를 간호사가 담당해왔다. 이번 사태로 간호사 업무 부담은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환자 몸에 삽입한 관을 제거하는 일을 간호사에게 맡긴다든가, 객담검사 시 채취한 가래를 처치하는 업무도 간호사에게 맡기고 있다. 환자 입장에서는 불안이나 불편이 가중될 수 있고, 간호사들 입장에서는 ‘실수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이 올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문제가 벌어지면 누가 책임질 수 있나”라고 했다. 서울시는 전공의 공백이 큰 서울의료원, 보라매병원, 은평병원에 대체인력을 충원할 인건비 26억원을 긴급편성했다. 의료진 45명 충원을 목표로 하고 있고, 일단 3개월간 예산을 지원할 계획이다. 지난 2월 26일 국립중앙의료원에서 만난 80대 남성 D씨의 다친 손. D씨는 지난해 9월부터 오른손가락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있다. 2월 21일 수술이 예정돼 있었지만 전공의 집단사직으로 수술 날짜가 연기됐다. 이효상 기자 공공병원에서는 수술 일정 연기를 통보받고 황망해하는 환자들도 적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지난 2월 26일 오전 국립중앙의료원에서 만난 80대 남성 D씨는 “원래는 2월 19일 입원해 21일 수술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전공의라는 사람한테 전화가 왔다. 20일부터 자기들이 없으니까 수술을 어쩔 수 없이 못 한다고 하더라. 죄송하다고 그러면서. 3월 4일 입원해 3월 6일 수술하기로 다시 날짜를 잡아주긴 했는데 또 그때 상황을 봐야 한다고 하더라”고 했다. D씨는 지난해 9월부터 오른손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있다. 넘어지면서 입은 부상으로 인대가 끊어져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다. 그는 “젓가락질도 못 하니까 빨리 수술해야 하는데 3월에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D씨는 이번 사태에 대해 “의사들도 욕심이 많지만 정부도 문제가 있다. 차츰차츰 인원수를 늘리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2000명 늘린다고 하니까 의사들도 반발하는 것 아니냐. 괜히 환자들만 피해 보고 있는 것 아니냐. 나도 급하지만 나보다 더 급한 사람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겠냐”고 했다. 서울의료원에서 만난 고령의 여성 환자 E씨도 무릎 수술 날짜가 한 달 뒤인 3월 말로 미뤄졌다고 했다. 그는 “나야 좀 불편하고 마는 거지만 정말 위급한 사람들은 어떡하냐. 의사들이 강하게 나오던데 좀 타협해서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경기도 안산에서 온 80대 여성 환자 F씨도 지난 2월 26일 약을 받으러 서울의료원에 왔다가 의사로부터 수술이 미뤄질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난해 10월에 잡아놓은 일정이었다. F씨는 “수술 날짜가 새로 잡힐 때까지 동네 병원에 다니면서 진통제를 맞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번 의료 대란에 코로나19 때의 혼란을 떠올렸다. F씨의 남편은 코로나19 시기 뇌경색으로 사망했다. 남편은 한밤에 뇌경색 증상을 보여 서울의료원을 찾았는데 수술을 해도 입원 병실이 없다는 말을 듣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급히 여의도 한 병원을 찾았지만, 그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나야 진통제라도 맞고 견디지만 응급환자는 시간 다툴 건데 어떡할 거냐. 남편 돌아가신 지 2년 됐는데, 그 상처도 안 가셨는데 그런 일이 또 나오게 생겼다”고 했다. “정부가 아쉬울 때만 공공병원을 찾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번 사태는 의사 인력 부족으로 지방 필수의료체계 붕괴가 가시화한 것이 원인이다. 지역거점 공공병원을 중심으로 한 지역별 의료체계가 갖춰졌더라면 우려의 상당 부분은 불식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코로나19 위기에 최전선에 투입된 공공병원들이 그 후유증으로 막대한 적자를 떠안았음에도 정부의 지원은 충분치 않았다. 국립중앙의료원은 2022년 4월 감염병 전담병원으로 지정됐던 공공병원들이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실적을 회복하는 데 4.3년이 걸릴 것으로 예측했다. 코로나19 기간 이들 병원에 발길을 끊은 환자들이 돌아오고 경영이 정상화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손실보상금 지원은 6개월 만에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나백주 을지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코로나19 사태가 2년 넘게 진행되면서 환자도 떠나고 수술하는 의사들도 공공병원을 떠났다. 2022년 말부터 일반병상을 받기 시작했지만, 새로 개업한 수준이라 환자들도 잘 오지 않았다. 정말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정부는 크게 신경도 쓰지 않다가 또 위기상황이 오니까 공공병원을 투입하고 있다. 이율배반적이다. 공공병원을 제대로 갖춰놓는 것이 이번 사태의 해법일 수 있다. 5%에 불과한 공공병원의 비중을 높여야 한다. 공공병원은 비교적 옛날 장비와 전통적으로 해왔던 의료 기술을 사용하지만, 치료 성적 자체는 민간병원과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의료비 부담이 적어 환자의 선택폭을 다양화할 수 있고, 민간병원의 신기술 도입에 의한 의료비 상승을 견제할 수 있다. 다시 이런 상황이 온다고 하더라도 공공병원이 재난상황에 대응할 여력이 충분하다면 정부의 협상력이 높아지는 효과도 있다. 공공부문에서 일하는 의사를 양성할 공공의대를 만들어 인력을 수급해야 한다. 동네 병·의원 등 1차 의료기관을 활성화하고, 종합병원 등 2차 의료기관은 공공병원을 중심으로 재편해야 한다”고 했다.
특집
[오늘을 생각한다]소아응급환자 안 받는 종합병원
[오늘을 생각한다]소아응급환자 안 받는 종합병원(2023. 06. 30 11:24)
2023. 06. 30 11:24 오피니언
응급의료법 제3조는 “모든 국민은 성별, 나이, 민족, 종교, 사회적 신분 또는 경제적 사정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아니하고 응급의료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도 또한 같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가 손 놓은 탓에 모든 국민은 응급의료를 거부당할 수 있으며, 외국인 또한 마찬가지다. 누구나 거부당할 수 있지만, 그 누구보다 거부당하기 더 쉬운 사람들이 있다. 바로 아동·청소년이다. 중증응급환자 위주로 응급의료를 수행하는 권역응급의료센터(복지부 지정), 광역시·도지사가 지정하는 지역응급의료센터, 시·군·구청장이 지정하는 지역응급의료기관 등 전국 413개의 응급의료기관이 있다. 적지 않은 숫잔데 왜 구급차를 타고 수백㎞를 달렸다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들려올까? 게다가 지난 3월 대구 청소년 사망 사건, 5월 서울 5세 아동 사망 사건은 결코 발생해서는 안 될 참사였다. 정치하는엄마들은 소아응급환자를 365일 24시간 받아주는 의료기관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하기 위해 전국 45개 상급종합병원에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상급종합병원이란 고도의 의료행위를 하는 기관으로, 종별가산율 30% 등 인센티브를 받기 때문에 경합이 치열하다. 상급종합병원이 되려면 소아청소년과 등 9개 필수진료과목 포함 20개 이상의 진료과목을 갖추고, 전공의 수련기관이어야 하며, 권역 또는 지역응급의료센터로 지정받아야 한다.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45곳 중 단 11곳만이 소아응급환자를 항시 수용한다고 답했다. 나머지는 응급실이 열려 있어도, 소아청소년과 당직의가 없으면 소아응급환자를 거부한다고 했다. 소아응급환자를 받는 요일과 시간을 정해둔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 소청과 당직의가 있을지 없을지는 환자가 와봐야 안다고 답했다. 와봐야 안다는즉슨, ‘뺑뺑이 돌라’는 소리 아니겠는가. 상급종합병원도 이 모양인데, 지역응급의료센터·기관의 현실은 불 보듯 뻔하다. 올해 전국 대학병원 50곳 중 38곳이 소청과 전공의를 한명도 확보하지 못했다. 개원의 평균 수입이 연간 2억5000만원인데 소청과는 1억800만원에 불과하니(2020년 기준), 소청과 수가를 인상하면 된다는 주장도 들린다. 그러나 올해 수가를 올려 내년에 전공의가 늘어난다 해도 전문의가 될 때까지 4년이 걸리는데 당장 오늘의 소아응급환자는 어떡하나? 지난 5년간 폐업한 소청과는 660여 곳, 올해 소청과 전문의 자격시험 합격자는 172명이다. 의사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지 말고, 소아응급의료를 전공의의 값싼 노동력에 기대 해결하려 들지도 말라. 연간 수익이 수천억대에 달하는 상급종합병원에서 소청과 당직의가 없다는 소릴 언제까지 들어야 하나? 기획재정부 출신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국민이 납득하도록 한번 설명해 보라.
오늘을 생각한다
[신간]노후를 위한 병원은 없다 外(2022. 10. 28 11:00)
2022. 10. 28 11:00 문화/과학
ㆍ‘달나라 엘리베이터’ 같은 병원들 <노후를 위한 병원은 없다> 박한슬 지음·북트리거·1만4500원 의사 한명이 하루 평균 환자 48.3명을 진료한다. 주요 선진국의 6배에 달한다. 도대체 왜 병원들은 중력이 6분의 1인 ‘달나라 엘리베이터’마냥 6배나 많은 사람을 태워야 할까. 급격히 늙어가는 한국사회에서 이 의료서비스가 유지될 수 있긴 할까. 대학병원 약사 출신으로 통계학을 공부 중인 저자는 간호사의 태움, 흉부외과 등 기피과, 의사 대신 수술을 하는 PA(Physician Assistant·의사 업무 일부를 위임받아 진료를 보조하는 인력), 지방의료 공백 등 의료계의 고질병을 쉬운 통계를 활용해 설명한다. 종합병원 의료진보다 고가의 검사장비가 돈을 더 잘 버는 상황은 종합테마파크에, 의사파업의 이유는 치킨집에 비유해 쉽게 와닿는다. 해법도 제시하지만, 사회가 바뀌지 않으면 의료 문제만 해결하는 방법은 없다는 결론도 적확하다. 인력 여유가 없는 노동현장의 과로사가 의료현장만의 것은 아니듯. ▲여행인문지리학잡론 민양지 지음·시대의창·2만2000원 세상에서 가장 긴 나라는 칠레일까? 아니다. 가로로 긴 러시아가 있고, 세로로 쳐도 브라질이다. 그렇지만 칠레에는 다른 ‘세상에서 가장’들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나라는 투발루일까? 아니다. 몰디브다. 82개국을 여행했고 지도에 푹 빠져 살아온, 한때는 여행사까지 차려본 저자가 각양각색의 ‘가장’(최고)과 함께, 여행하기 좋은 나라, 부국과 빈국, 늘 봄인 나라와 늘 겨울인 나라 등을 소개하며 ‘알아두면 쓸 데 있을지 모를’ 지식을 털어놓았다. 눈으로 떠나는 세계여행서로도 손색이 없다.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 양영희 지음·인예니 옮김 마음산책·1만4500원 제주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왜 북한을 추종하게 됐을까. 다큐 <디어 평양>, <굿바이, 평양>, <수프와 이데올로기>로 주목받은 양영희 감독의 산문집이다. 비극적 현대사가 녹아든 재일한인 가족의 삶을 생동감 있게 그렸다. ▲빅뱅의 질문들 토니 로스먼 지음·이강환 옮김 한겨레출판·1만6000원 ‘빅뱅’ 하면 떠오르는 게 미국 드라마나 K팝 그룹이라면 이 책을 읽을 자격이 충분하다. 대중과학서를 여럿 펴낸 이론물리학자가 거한 수식 대신 간단한 그래프만으로 상대성이론·다중우주 등 우주론의 정수를 들려준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1·12 유홍준 지음·창비·각 2만2000원 5대 궁궐과 조선왕조 유적을 다룬 9·10권에 이어 서울편을 마무리했다. ‘사대문 안동네’ 북악·인왕·북한산과 서촌·북촌·인사동을 꿰고, ‘강북과 강남’ 성북동·선정릉·봉은사·망우리를 엮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
신간
반려동물 진료비 병원마다 들쭉날쭉(2022. 04. 18 13:33)
2022. 04. 18 13:33 사회
ㆍ많게는 11배 차이… 표준수가제 조기 도입 불투명 주부 황정화씨(56)는 ‘댕댕이 토리’와 함께 살고 있다. 토리는 태어난 지 12년이 지난 시추 품종의 개다. 개를 친근하게 부르는 ‘멍멍이’와 글자 모양이 비슷한 데서 유래한 ‘댕댕이’란 표현을 황씨는 유독 좋아한다. 황씨가 어릴 적 고향인 경북 경주에서 흔히 볼 수 있던 토종견 ‘동경이’를 ‘댕갱이’로 불렀던 기억이 있어서다. 토리는 동경이와는 전혀 다른 종이지만 황씨 집에 들어와 산 10여년 동안 가족의 일원이 됐다. 황씨가 토리의 수술을 고민하는 것도 무엇보다 토리가 그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한 동물병원의 면회실에서 입원한 동물과 보호자가 만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동물병원에서도 억지로 수술을 권하진 않아요. 토리가 노견이라 수술 후 삶의 질이 더 높아질 가능성도 있지만 회복이 힘들어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어서요. 게다가 수술비까지 생각하면….” 황씨는 토리의 비장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수술을 잘한다는 동물병원도 수소문해보고 대학 부속 동물병원까지 알아봤다. 동물병원마다 수술비 차이가 많게는 150만원까지도 났다. 황씨 집안의 경제사정으로선 수백만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수술비와 향후 입원 및 치료비용이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그래서 더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다. “애들 아빠는 제일 싼 곳으로 가자고 하지만 그것도 내키진 않고, 그렇다고 토리한테 물어볼 수도 없으니….” 황씨 같은 사연은 어느 동물병원에 가도 쉽게 들을 수 있는, 흔한 일이 됐다. “정말 치료 가능성이 없으면 안락사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기도 하는데, 보통 20만원 내외인 그 비용도 내기 어렵다는 가구를 볼 때 맘이 아프죠. 그래도 안락사를 고려할 나이면 애정을 갖고 키워온 집이니까요.” 서울의 한 동물병원 개원의인 김모 원장은 ‘가족’의 ‘생명’을 두고 내리는 결정도 경제적 여건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냉정한 현실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바꿔 생각해봐도, 누구든 가족이 아프면 5대 병원의 유명 교수한테 데려가고 싶지만 아무나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절충형으로 내년부터 진료비 공시제 김 원장은 반려동물을 직접 돌보고 키우는 ‘가족’이 오히려 복잡한 감정 때문에 어려운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 자신이 최대한 객관적인 소견으로 내원한 반려동물의 현재 삶이 어떤 수준인지 점수로 매긴다. 반려동물 중 가장 수가 많은 개를 예로 들면, 통증과 배고픔, 위생상태, 활동성 등 7가지 항목마다 점수를 매기는 식이다. 다소 불편하지만 약을 먹으면 생활에 큰 지장은 없는 수준인지, 당장 수술이 시급한 상태인지, 아니면 이미 진통제를 써도 약효가 크지 않을 정도로 심각해 삶을 정리해줘야 할 정도인지를 숫자로 보여준다. 김 원장은 “내가 고안한 방법이 아니라 수의사라면 다들 아는 얘기지만 수의사마다 성향의 차이 때문에 점수를 언급하느냐 마느냐가 갈릴 뿐”이라며 “적어도 나는 이 방법이 반려동물 가족이 진료 진행 여부를 판단하는 데 도움을 주는 최선책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사람과 달리 동물 진료는 질환을 겪고 있는 몸의 상태가 어떤지 말로 들을 수 없기 때문에 더 쉽지 않은 면이 있다. 게다가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그동안 개와 고양이, 햄스터 등 일부 종에만 집중됐던 진료 대상이 점차 다변화되는 양상도 어려움을 더한다. 진료항목을 표준화하기 어려웠던 것도 이 때문이다. 또 동물 진료서비스를 소비하는 입장에서는 동물병원마다 진료비가 천차만별이라 불만이 컸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을 비롯해 이재명 민주당 대선후보도 선거 과정에서 반려동물 공약으로 ‘진료비 표준수가제 도입’을 내건 데는 이런 배경이 작용했다. 일단 현실만 놓고 보면 현재 동물 진료비는 병원이 ‘부르는 게 값’인 형편이다. 각 동물병원이 임대료나 인건비 등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에 따라 자율적으로 책정한다. 지난해 1월 한국소비자연맹이 동물병원 125곳을 대상으로 초진·재진·야간 진료비 편차를 조사한 결과 가장 싼 곳과 비싼 곳의 차이가 적게는 5배(초진)에서 많게는 11배(재진·야간)까지도 나타났다. 2017년 9월 소비자시민모임이 예방접종비와 혈액·엑스레이 등 검사비, 중성화 수술비용 등 가장 내원 빈도가 높은 진료항목에 대해 진료비 편차를 조사할 결과에서도 적게는 2배(DHPPL 접종)에서 많게는 6배(일반혈액검사·수컷 중성화 수술)까지 차이가 났다. 이러한 현실을 두고 수의사들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일단 현행법에 따르면 수의사들끼리 진료비 수준을 통일할 경우 담합으로 처벌받는다. 담합을 하려고 해도 각각의 세부적인 진료항목이 달라 담합이 이뤄지기 힘들다. 가장 흔하고 비용도 낮은 수준인 개 중성화 수술을 보면 수술 부위를 절개할지 아니면 절개 없이 복강경 수술로 할지에 따라, 또 마취약을 주사로 투여할지 아니면 호흡기에 씌우는 튜브를 통해 흡입시킬지 등에 따라 각기 비용이 달라진다. 경기 성남시에서 동물병원을 운영하는 수의사 조모 원장은 “사실 개인적으로는 표준수가제를 도입해도 별 상관 없다고 생각하지만 수의사회 차원에서 ‘선 진료항목 표준화’를 입장으로 정했으니 다른 병원 눈치 때문에 대놓고 표준수가제를 찬성할 수 없다”고 말했다. 2021년 11월 서울 노원구 중계동 등나무근린공원에서 열린 2021 반려동물 문화축제에서 시민들이 함께온 반려견과 허들을 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2024년부터 진료항목 표준화 그렇다고 개원 수의사들이 대놓고 표준수가제에 반대한다는 목소리를 내기도 쉽지는 않다.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인구가 늘어나고 동물권에 관심을 가지는 시민들도 늘어났기 때문에 이들을 ‘고객’으로 모셔야 하는 동물병원에서 소비자들의 요구와 배치되는 주장을 내걸 수도 없는 노릇이다. 특히 동물병원의 진료비가 서로 다른 현실을 익히 알고 있는 소비자들은 지역 내 각각의 동물병원 진료비 수준을 인터넷 커뮤니티나 카페 등에서 공유하는 일이 흔하다. 김 원장은 “인터넷에서의 평판과 입소문이 큰 영향력을 보이는 동네일수록 수의사들도 손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한수의사회 등 수의사 단체들이 줄곧 요구해온 ‘진료항목 표준화’는 일단 어느 정도 진척이 됐다. 진료비용을 표준화하는 ‘표준수가제’를 도입하려면 그보다 먼저 진료항목과 체계부터 표준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어느 정도 법에 반영된 상태다. 올해 1월 개정된 수의사법을 보면 농림축산식품부가 동물의 질병명, 진료항목 등 동물 진료에 관한 표준화된 분류체계를 작성해 고시해야 한다는 내용의 제20조 3항이 신설됐다. 동물병원 개설자가 게시한 진료비용과 그 산정기준 등을 조사해 공개하는 방안을 담은 제20조 4항 또한 신설됐다. 다만 제20조 3항은 2024년 1월 4일부터, 4항은 2023년 1월 4일부터 시행된다. 내년 1월 4일부터 함께 시행되는 조항 가운데엔 수술비용을 고지할 것과 진료비용을 게시해 쉽게 볼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이 포함됐다. 일단 내년 1월부터는 그동안 표준수가제 도입이 시기상조라는 주장에 따라 절충형 방안으로 제시된 ‘진료비 공시제’가 시행되고, 그 1년 뒤인 2024년 1월부터 진료항목 표준화가 시행에 들어간다. 보험업계를 비롯해 반려동물을 키우며 적잖은 진료비용 때문에 반려동물보험의 보편화를 기대해온 일부 소비자들은 후속조치로 표준수가제까지 도입해야 반려동물을 위한 보험이 활성화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 문제는 윤석열 당선인이 대선후보 시절 내건 공약인 표준수가제가 빠른 시일 안에 가시화될지 여부가 불투명하다는 데 있다. 지난 1월 20일 당시 윤석열 후보는 “동물복지공단을 설립해 개, 고양이 등 반려동물의 다빈도 고부담 질환에 대한 ‘표준수가제’를 도입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일단 표준수가제 도입에 앞서 특정 진료나 수술을 진행할 때 수의사가 행할 의료 행위나 절차 등을 담은 ‘진료항목 표준화’가 개정 수의사법 규정대로 2024년까지 원활하게 마련돼야 한다. 이 표준화된 진료체계 안에는 동물의 모든 질환에 따라 행해지는 수의사의 치료 행위 각각에 고유의 코드를 부여해야 한다. 해당 질환마다 가이드라인 제시 의무가 부과될 가능성도 있다. 반려동물 질환의 종류를 고려하면 막대한 시간과 노력이 투입되는 작업이다. 1월 20일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동물병원 진료비 표준수가제 도입 등 생활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 국회사진기자단 반려동물 시장 규모 갈수록 급증 표준수가제 논의는 진료항목 표준화가 완성된 시점부터 이뤄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뒤 표준수가제를 바탕으로 보험업계의 상품 개발 및 출시가 본격적으로 이어진다. 반려동물보험을 원하는 소비자가 당분간은 큰 기대를 걸기 어려운 실정이다. 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반려동물 관련 시장의 빠른 성장에 비해 유독 보험상품 개발만 뒤처진 이유가 수가를 산출하기 극히 힘든 동물병원 업계의 사정 때문이었다”며 “일단 진료항목이 표준화될 예정이어서 표준수가제도 도입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단시일 내에 정책 환경이 바뀔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국내에선 동물병원 표준수가제를 이미 시행한 적이 있다. 1974년 12월 수의사법 개정으로 ‘동물병원 진료보수기준’이 도입되면서 진료비는 수의사회가 정한 뒤 농수산부 장관의 인가를 받는 방식으로 시행됐다. 당시의 진료보수기준은 전국의 동물병원에 일괄적으로 명시된 액수를 적용하는 게 아니라 지역에 따른 차이를 용인하고 상한액과 하한액 사이에서 진료비를 정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이었다. 25년 가까이 시행되던 표준수가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경성카르텔 금지’ 권고안을 채택하는 등 국제적으로 담합 등 부당 공동행위에 대한 규제 여론이 강해지면서 1999년 사라졌다. 한동안은 시장 자율화 원칙에 따라 각 동물병원이 진료서비스 수준과 함께 가격으로 경쟁하며 소비자의 선택권을 넓혔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통계청이 지난해 9월 발표한 ‘2020 인구주택총조사’ 결과를 보면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가 312만9000가구에 달해 전체 가구 중 약 15%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개를 키우는 가구가 242만3000가구(11.6%), 고양이를 키우는 가구가 71만7000가구(3.4%)로 조사됐다. 이처럼 반려동물 양육 인구가 크게 늘어나 동물병원 진료 수요 역시 늘면서 진료비를 낮추기 어려운 요인으로 작용했다. 반려동물 진료서비스와 별개로, 일명 ‘펫코노미’로 불리는 전체 반려동물 시장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반려동물 시장 규모는 2015년 1조8994억원에서 2021년 3조7694억원 규모로 매년 성장해왔다. 오는 2027년에는 6조원 수준까지 성장해 유아용품 시장 규모를 따라잡을 것이란 전망까지 나왔다. 국내 유아용품 시장 역시 성장하고는 있지만 2019년 4조원대에 진입한 뒤로는 신생아 출산 감소로 성장세가 둔화되는 점과 대비된다. 펫보험 가입률 0.25% 불과 반려동물 양육 인구의 증가와 시장의 성장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부작용으로 유기동물이 늘어나는 현실 또한 나타나고 있다. 현재로선 높은 진료비에 부담을 느낀 양육가구에서 반려동물을 유기하는 비율이 높아졌다고 볼 만한 명백한 근거가 밝혀진 건 아니다. 동물자유연대가 지난해 4월 발표한 ‘2016~2020년 유실·유기 동물 분석 보고서’를 보면 2020년 기준 전체 동물 유실·유기 발생건수 12만8717건 중 0~2세 개체 발생건수가 9만8236건(76.3%)이었다. 나이가 들고 병들어 유기됐을 것으로 추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연령이 낮은 개체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국내에도 ‘펫보험’이라 불리는 개와 고양이 대상 보험상품이 있기는 하다. 2020년 기준 가입률이 0.25%에 불과할 정도로 반응이 저조할 뿐이다. 스웨덴(40%), 영국(25%), 일본(6%) 등과 비교하면 한국의 가입률은 매우 낮은 수준이다. 가입률이 저조한 가장 큰 이유는 보장되는 질병 범위가 제한돼 있고, 반려동물의 나이나 병원 방문 이력 등에 따른 제약도 있어 체감 혜택이 적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유기하는 행태를 방지하고자 잃어버린 동물에 대해 보상하는 내용도 없기 때문에 현재의 민간 보험상품으로는 유실·유기동물 증가를 막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때문에 진료비 부담에 대해선 공적 보험을 통해 보장을 강화하는 한편 반려동물 전담 기관을 신설해 관련 시장의 성장을 유도하는 방안을 일각에서 제시한다. 지난 4월 5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동물보호법 개정안은 전보다 더 포괄적인 동물권 보호 및 반려동물 관련 산업 육성안을 담고는 있으나 여전히 다양한 수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이 지난해 8월 대표발의한 ‘반려동물진료보험법안’은 공적 차원의 반려동물보험 도입과 함께 반려동물진흥원 신설 등의 방안을 담고 있다. 조 의원은 “진료비용이 반려동물 소유자에게 경제적으로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어 반려동물의 질병 등 예방 및 치료가 적시에 이뤄지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며 “반려동물 의료비에 왜 세금을 쓰냐는 반대가 있을 수 있지만 이미 농작물재해보험처럼 공적 지원이 필요하면 세금을 투입하는 사례가 여럿 있다”고 밝혔다.
특집
국내 1호 제주 영리병원 ‘논란’ 재점화(2022. 04. 18 13:32)
2022. 04. 18 13:32 사회
ㆍ제주지법 “내국인 진료 제한은 위법” 판결 후폭풍 지난 3월 14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의료 민영화의 첫걸음이 될 제주 영리병원을 국가가 매수해달라’는 제목의 청원이 올라왔다. 이 청원은 한 달간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받았다. 청와대는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은 청원에 공식 답변을 내놓고 있다. 영리병원 개설허가가 내려진 2018년 12월 당시 제주 서귀포시 헬스케어타운 내 녹지국제병원의 모습 / 연합뉴스 이 청원에 20만명 이상이 동의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영리병원은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김대중 정부 때인 2002년 경제자유구역법 제정을 둘러싸고 본격적으로 영리병원 논의가 시작됐으니 벌써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뀔 동안 1호 영리병원이 문을 열지 못한 건 의료비 증가, 의료공공성 훼손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 컸기 때문이다. 제주지법이 최근 제주도가 2018년 12월 중국 자본에 영리병원 허가를 내주면서 ‘내국인 진료 제한’ 조건을 붙인 게 위법하다는 판결을 내리면서 영리병원에 대한 우려가 다시 커지고 있다. 현행 의료법은 영리의료법인 설립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다만 외국인이 영리의료법인을 설립할 수 있는 샛길은 열려 있다. 정부는 2002년 경제자유구역법 제정을 통해 경제자유구역에 한해 외국인 전용 영리병원을 설립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내국인 진료 제한으로 수익성 보장이 어려운 탓에 외국인 투자 유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정부는 2004년 법을 개정해 내국인 진료도 가능하도록 했다. 2006년엔 한걸음 더 나아갔다. 제주특별법을 제정해 외국인이 제주도에서 영리병원을 열 수 있도록 했고, 내국인 진료 제한 조항도 처음부터 아예 두지 않았다. 관련 법제가 정비되면서 제주도에서 ‘국내 1호 영리병원’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중국 녹지그룹 자회사인 녹지제주헬스케어타운유한회사(녹지제주)가 2015년 6월 서귀포시 토평동 제주헬스케어타운에 녹지국제병원을 설립하겠다는 사업계획서를 제주도에 제출했다. 녹지그룹은 중국의 국영 부동산 개발회사다. 투자비는 778억원이었고 진료과목은 성형외과, 피부과, 내과, 가정의학과 등 4개였다. 보건복지부는 같은해 12월 녹지국제병원의 사업계획서를 승인했다. 1호 영리병원 허가와 소송전 녹지제주는 2017년 7월 47개 병상을 갖춘 건물을 짓고, 한 달 뒤인 8월 병원 개설 허가 신청서를 제주도에 제출했다. 영리병원을 두고 찬반 의견이 첨예하게 갈린 탓에 제주도는 6차례에 걸쳐 허가 여부 결정을 연기했다. 이런 상황에서 ‘의료민영화 저지와 의료공공성 강화를 위한 제주도민운동본부’는 2018년 2월 도민 1068명의 서명을 받아 공론조사를 하자고 제안했고, 당시 원희룡 제주지사는 이를 수용했다. 공론조사 결과 “개설을 허가하면 안 된다”고 대답한 비율이 58.9%로, “개설을 허가해야 한다”고 답한 비율(38.9%)보다 20%포인트나 높았다. “불허 권고를 수용하겠다”던 원 지사는 돌연 입장을 바꿔 같은해 12월 내국인 진료 제한을 조건으로 걸고 녹지국제병원 개설을 허가했다. 허가를 하지 않으면 투자자-국가 간 국제분쟁(ISDS)에 휘말릴 수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녹지제주가 “내국인 진료 제한 조건을 단 건 부당하다”며 병원 개설을 미루자 제주도는 2019년 4월 허가를 취소했다. “개설 허가 뒤 3개월 이내에 정당한 사유 없이 업무를 시작하지 않으면 허가를 취소할 수 있다”는 의료법 규정에 따른 조치였다. 녹지제주는 두가지 행정소송을 제기하면서 대응에 나섰다. 첫 번째는 제주도의 개설 허가 취소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이었다. 1심은 제주도의 처분이 정당하다고 봤다. 항소심은 1심 결론을 뒤집었다. 2심 재판부는 “녹지국제병원이 주된 이용 대상을 외국인 의료관광객으로 하면서도 내국인 이용을 배제하지 않는 방향으로 설립이 추진된 것으로 보이는데 제주도가 허가 신청 15개월이 지난 후에야 진료 대상자를 외국인 의료관광객으로 한정했다”며 “사업 계획이나 개원 준비계획 변경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지난 1월 녹지제주 측 손을 들어준 항소심의 판단을 유지했다. 두 번째는 개설 허가 시 내국인 진료 제한이라는 조건을 붙인 게 위법하다는 소송이었다. 제주지법은 지난 4월 5일 녹지제주 측의 손을 들었다. 1심 재판부는 “개설 허가는 기속재량행위(원칙적으로 행정기관의 재량이 허용되지 않는 기속행위의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중대한 공익상 이유로 재량에 따른 판단을 할 수 있는 행정행위)이기 때문에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부관을 붙일 수 없다”며 “제주특별법은 내국인 진료 허용을 전제로 외국의료기관 개설 허가 제도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내국인 진료 제한 조건은 입법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영리병원 허용 조항 삭제해야” 이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될 경우 제주도가 내국인 진료 제한이라는 조건을 다는 방식으로 영리병원 허가 결정을 내리는 건 불가능해진다. ‘외국인 전용 의료기관’이기 때문에 영리병원이 국내 공공의료에 미치는 영향이 없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어지는 셈이다. 영리병원은 건강보험 환자를 반드시 받도록 하는 ‘건강보험 당연지정제’가 적용되지 않아 수익성이 높은 진료에만 집중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주변 비영리병원에도 영향을 미쳐 국민 의료비 부담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 아울러 급여가 높은 영리병원으로 의료 인력이 쏠리면서 의료서비스 양극화가 발생할 수도 있다. 물론 하나의 영리병원이 국내 의료체계의 근간을 흔들긴 어렵다. 하지만 1호 영리병원이 들어서면 2호, 3호 설립 속도가 빨라질 뿐 아니라 국내 다른 병원들이 외국인뿐 아니라 내국인도 영리병원을 열 수 있게 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일 가능성이 커진다. 하나둘씩 빗장이 풀려 영리병원 비중이 빠르게 늘어나는 시나리오를 경계하는 이유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영리병원 허용 조항을 삭제하는 방향으로 경제자유구역법·제주특별법을 개정하자고 주장한다. 위성곤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영리병원 허용 조항을 삭제하는 내용의 제주특별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정형준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의 말이다. “녹지제주는 2019년 3월 개설 허가 취소 전 청문 절차에서 ‘제주도가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의료기관을 개설할 계획도 없는 녹지그룹을 거의 강요하다시피 해 투자를 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영리병원을 원하는 세력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내국인도 영리병원을 세울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징검다리로 외국인이 투자한 영리병원을 유도·활용하려는 것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제주도의 영리병원 허가는 정치적 차원의 접근이었다.” 제주도는 지난 4월 12일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를 열어 녹지국제병원 개설 허가를 취소하기로 했다. 대법원 판결로 되살아난 허가를 다시 취소한 것이다. 녹지제주가 병원 건물과 부지를 국내 법인에 매각해 ‘외국인 투자 비율 100분의 50 이상’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데 따른 결정이다. 당분간 이번 취소 결정에 대한 청문 절차와 ‘내국인 진료 제한’ 조건부 허가의 위법 여부를 다투는 항소심 등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우석균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동대표는 “지난 20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영리병원 하나 막는다는 게 쉽지 않다. 돈벌이하려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불씨를 살려두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꺼진 불도 계속 다시 봐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신간]아프다면서 병원에도 가지 않으시고 外(2021. 08. 20 14:41)
2021. 08. 20 14:41 문화/과학
ㆍ돌봄에 지친 당신에게 <아프다면서 병원에도 가지 않으시고> 차이자펀 지음·우디 옮김·갈라파고스·1만5800원 “아프다면서 왜 병원을 안 가세요.” 부모의 보호자가 된 자녀라면 한 번쯤 던져봤을 말이다. 부모만 떠올리면 마음이 갑갑해진다는 자녀들의 고민은 ‘돌봄은 곧 일방적인 의존과 희생’이라는 생각이 그 출발점이다. ‘지속가능한 돌봄’을 지원해온 노인정신의학 전문의인 저자는 이들이 겪는 문제를 심리, 관계, 질병 등 다각도로 분석하고 각각에 맞는 대응법을 제시한다. 매달 1000명에 가까운 노인과 보호자들을 만나며 어떤 문제는 의료의 도움이 아니라 ‘관계’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해결됨을 깨닫는다. 사실 자신보다 부모를 우선에 두는 희생적인 돌봄은 부모에게도 독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부모는 건강에도 자신감을 잃고, 자기 결정에도 의심을 품고, 이는 몸과 마음의 퇴화를 촉진하는 요인이 된다. 결국 지속가능한 돌봄을 위해 필요한 건 서로에 대한 존중과 인정이다. 이 책은 1부 자녀 편과 2부 부모 편으로 나눠 ‘돌봄의 기술’을 제시한다. ▲기계, 권력, 사회 박승일 지음·사월의책·2만2000원 인터넷 세계를 권력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풀어냈다. 새로운 권력이 된 빅데이터, 알고리즘, 사물인터넷은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일정한 경로로 이끈다. 새로운 권력은 교묘하다. 감시 대신 자유를 매개로 우리의 환경과 정신을 관리하고 통제한다. 저자는 권력의 새로운 통치 대상이 개인이나 집단이 아닌 ‘그들’이 속한 환경과 정신이라고 주장한다. 환경 최적화로 사용자의 사고화 행동을 관리·통제·제어하고, 자유와 참여 극대화로 정신적 능력을 강조한다. ▲당신의 수식어 전후석 지음·창비·1만6000원 변호사, 영화감독, 재미 한인 등 다양한 수식어를 가진 저자의 에세이다. 쿠바 혁명의 주역 ‘헤로니모’를 만나며 영화를 제작하는 이야기와 이를 통해 혼란스러웠던 정체성에 대해 나름의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그렸다. 경계를 초월해 다양성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더 큰 세상’을 마주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무기모토 산포는 오늘이 좋아 스미노 요루 지음·이소담 옮김·소미미디어·1만4800원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저자의 또 다른 청춘 소설이다. 대학 도서관에서 일하는 20대 여성 무기모토 산포는 평범한 일상을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며 기어이 즐거움을 찾아낸다. 개성 넘치는 ‘인생 천재’의 이야기는 현대인들에게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잔잔한 힐링을 선사한다. ▲남편이 해주는 밥이 제일 맛있다 박승준 지음·오르골·1만4000원 주방이라는 신세계와 직접 부딪치며 기록한, 서툰 은퇴 남편의 주방 적응기다. 주방 관련 소재를 망라해 주방을 넘어 우리의 삶 전체를 성찰하게 한다. 칼질 잘하는 노하우 등이 나오진 않지만, 주방 입문자의 현실적인 고민을 풀어감으로써 칼질할 ‘용기’를 준다.
신간
[암 병동에서](1)어느 병원, 어느 교수님을 선택해야 하나(2020. 08. 14 14:23)
2020. 08. 14 14:23 사회
“어느 병원, 어떤 교수님을 선택해야 할까요?” 이런 물음에 해답을 구하는 게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란 걸 이전에는 미처 몰랐다. 암과 마주친 사람들이 처음 마주하는 어려움은 병원과 교수를 고르는 것부터 시작한다. 누구나 암환자가 될 수 있다. 30·40대의 암 발병률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30대 아내가 갑작스럽게 암에 걸린 상황에서 보호자가 마주해야 하는 현실적인 고민과 감정 등을 8회에 걸쳐 매주 연재한다. 지난해 11월, 아내가 주초부터 미열이 있다고 했다. 직장 근처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았는데 열이 잘 안 떨어진다고 했다. 피곤하다고도 했다. 푹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나도, 아내도 생각했다. 금요일, 출근한 아내가 열이 조금 심해져 조퇴를 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회사 근처 병원에서는 혈액검사를 권했다. 보통 1차 의료기관은 검사 결과가 바로 나오지 않는다. 원인을 빨리 알고 주말 동안 쉬자는 마음에 아내를 데리고 집 근처 대학병원 응급실로 갔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혈액 속에 안 좋은 세포들이 보이는데요. 급성백혈병이 의심됩니다. 근처에 치료가 가능한 병원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응급실에 들어온 지 2~3시간 뒤, 우리는 황당하게도 앰뷸런스를 타고 암전문 A병원에 와 있었다. 그리고 토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2시에 1인실에 격리됐다. 오피스룩을 입고 나간 사람이 졸지에 환자복을 입게 됐다. 이렇게 갑자기 아내는 30대 중반에 혈액암 환자가, 나는 암환자의 보호자가 됐다. 보통 암이란 건 진단을 받고 입원을 한 뒤 치료나 수술을 한다. 단계 사이에 시간이 있으니 병에 대해 공부하고, 마음의 준비도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럴 수 없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실려 가듯 급박하게 병실까지 직행했다. 그러다 보니 이 병에 대해서 우린 아는 게 없었다. 내가 아는 급성백혈병이란 건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비극적인 설정으로 활용되는 병, 딱 그 수준이었다. 다음 날, 주치의가 병실로 찾아왔다. “골수검사를 해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지만, 혈액검사 결과만 봤을 때 급성골수성백혈병인 것 같다. 항암치료를 하고 조혈모세포 이식(골수이식)도 해야 할 것 같다.” 멍하게 하루를 보낸 우리에게 주치의는 엄청난 말들을 쏟아냈다. 급성골수성백혈병은 혈액 내 미성숙 백혈구(아세포)가 급격히 증가하는 병이다. 보통 말초혈액에서 아세포가 20% 이상이면 골수성백혈병이라는데 아내의 경우 98%였다. 무지렁이나 다름없는 우리는 질문을 쏟아냈고, 많지 않은 나이의 여의사는 최대한 많은 정보를 담아 우리에게 알려줬다. 지금 아내의 현 상태가 얼마나 위험한지, 이 병이 얼마나 어려운지, 치료가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그리고 어떤 부작용이나 후유증이 올지…. 모든 게 물음표, 보호자는 외롭다 보호자는 외롭다. ‘선택’을 해야 할 땐 더욱 그랬다. 막상 겪어보니 환자에게 결정권을 주는 건 잔인한 일이다. 환자는 회복에만 신경을 써야 한다. 대신 보호자가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을 정한 뒤 환자에게 “이러는 게 어떨까”라고 권하는 게 경험상 더 나은 방법이었다. “어느 병원, 어떤 교수님을 선택해야 할까요?” 포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질문이다. 이런 물음에 해답을 구하는 게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란 걸 이전에는 미처 몰랐다. 암과 마주친 사람들이 처음 마주하는 어려움은 병원과 교수를 고르는 것부터 시작한다. 내가 내린 결정에 환자의 생존 여부가 바뀔 수 있다는 부담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남들은 입원 전 하는 이 고민을 우린 입원하고 난 뒤 시작했다. 이 병원에서 치료받는 게 맞는 건지, 유명하다는 다른 병원을 그래도 찾아가는 게 나을지, 병원을 옮긴다면 언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든 게 물음표였다. 우리가 있는 병원은 암에 특화된 곳이지만 환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메이저 병원’은 아니다. 때마침 전화를 준 아내의 친지가 주변에 비슷한 경우를 봤다며 “무조건 B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필수 코스인 환우회 카페에 가입해 찾아보니 B병원은 이 분야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환자가 많으니 다뤄 본 케이스도 많고 권위자로 평가받는 교수도 있었다. 끝없는 검색 끝에 정보를 모아보니 큰 틀이 잡혔다.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유명한 병원은 두 곳이었고, 각 병원에 유명한 교수가 한 명씩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명의가 나에게 명의일까 우리 주치의에 관한 정보도 필요했다. 찾아보니 나보다 약간 어린 것 같았고, 같은 대학을 졸업한 후배였다. 이제 ‘교수님’이라고 불린 지 오래되지 않은 의사였다. 이름을 치고 검색을 해봐도 나이가 젊으니 업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검색결과 사이에 등장하는 메이저 병원의 나이 지긋한 권위자들의 이름에 한 번 더 눈이 갔다. 나이에 기댄 권위를 믿지 않는 편인데, 아내의 생존 앞에서는 그런 기준도 무너졌다. ‘일단 만나서 의견을 구하자.’ 서류를 들고 유명하다는 두 병원을 찾아갔다. 얼굴을 맞대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처음 찾아간 교수는 전원(병원을 옮기는 일)을 고민하는 보호자에게 냉담했다. 환자 차트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기도를 열심히 하라”고 조언했다. 의사를 만나러 왔는데 목사를 만나고 온 꼴이 됐다. 또 다른 병원의 유명 교수는 현실적인 환경을 이야기했다. 차트를 들여다보더니 “여기 입원하려면 몇 주 걸린다. 응급으로 들어와도 당장 입원할 수 없다. 그런데 환자 상태는 그렇게 대기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문득 다른 병원 교수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며 전원의뢰서를 부탁했을 때 주치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 실력 나쁘지 않아요.” 묵직했던 그 말이 떠나지 않았다. 표정은 건조해도 묻는 말에 정확하게 대답을 주던 의사였고, 덕분에 복잡했던 머릿속 의문들이 정리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아내와 이야기를 해보고, 그런 커뮤니케이션 궁합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이 병원이 갖는 장점도 있었다. 상대적으로 덜 붐비는 탓에 무균실을 이용하는 데 크게 제약이 없던 건 나중에 보니 행운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명의였다고 나에게 명의란 법은 없다. 내가 암환자의 보호자가 됐다는 소식을 들은 한 선배가 위로의 전화를 건 적이 있다. 그리곤 자기 어머니가 위암 진단을 받았다며 어느 병원으로 가야 할지 고민이라고 했다. 혈액암이라면 몰라도 위암에 관해 내가 아는 게 있을 리 없다. 그래도 해줄 수 있는 말은 있었다. “선배, 위암으로 유명한 교수들 검색해 본 뒤 급하지 않으면 모두 만나 대화해보세요.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일 거예요.”
암 병동에서
[포커스]공공병원들 제 역할하고 있나(2020. 07. 10 15:01)
2020. 07. 10 15:01 사회
ㆍ최소 인력 강제, 노동시간 제한, 상급 종합병원 수준의 확충 등 필요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공공병원이 더 많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국의 공공병원 수는 국공립대학병원을 포함해도 전체 병원의 5.7%(2018년 기준) 수준이다. 그렇다면 이 5.7%의 병원에서는 정말 공공의 서비스를 잘 받을 수 있을까? 공공병원에서 일하고 있거나 일했던 이들은 이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행동하는 간호사회 소속 간호사들이 7월 6일 청와대 앞에서 부족한 간호사 인력과 교육시스템, 낮은 공공병원 비중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행동하는 간호사회 제공 황은영씨는 간호사다. 첫 직장은 서울의료원이었다. 다른 대학병원에도 합격했지만 서울의료원에서 더 환자를 잘 돌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울의료원은 근무환경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간호사 1명당 환자 8명’을 강조했다. 이 정도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6~8명) 수준이다. 한국은 간호사 평균 1명이 15~20명을 감당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일단 간호사 1명이 감당해야 하는 환자는 10명가량이었다. ‘사수’ 간호사는 황씨에게 “출근하면 텀블러에 물부터 뜨라”고 가르쳤다. 그때가 아니면 하루 종일 물을 뜨러 갈 시간이 없다고 했다. 사수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끼니를 거르는 날도 잦았다. 실제 ‘2019년 보건의료노동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간호사의 63.2%가 일주일에 1회 이상 식사를 거른다고 답했다. 일주일에 3회 이상 식사를 거른다는 응답도 32.3%에 달했다. “실수하지 않게 해달라” 기도하는 간호사 문제는 서울의료원이 다른 공공병원에 비해 그나마 간호 인력 상황이 좋다는 편이다. 서울의료원은 간호 1등급 병원이다. 서울이 아닌 지역의 공공병원 상당수의 간호 등급은 3~4등급 수준이다. 배호원 보건의료노조 대구병원 지부장은 “3~4등급이 된 것도 병상 수가 기준이던 간호 등급을 환자 수 기준으로 바꿔서다. 모든 병원의 등급이 상향 조정됐다. 실제로 인력이 충원된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이런 환경에서는 환자를 ‘잘’ 돌보기 힘들다. 황은영 간호사는 매일 “실수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최원영 서울대병원 간호사는 “지금 병원들은 정말 최소한의 인력으로 운영하고 있다”며 “자잘한 실수들이 곳곳에서 일어난다. 그렇게 운영되다 보면 ‘하인리히 법칙’ 처럼 어느 날 큰 사고가 일어난다. 환자들이 갑자기 동시에 상태가 안 좋아질 때가 있다”며 말했다. 하인리히 법칙은 대형사고 1건이 발생하기 전, 그와 관련된 작은 사고 29건과 경미한 징후 300건이 존재한다는 내용이다. 한 지역의료원에서 일하는 간호사 김모씨는 나이트근무가 제일 두렵다. 사고가 일어났을 때 감당할 수 있는 인원이 적어서다. 김씨가 근무하는 병동의 나이트 근무 간호사는 두 명이다. 하지만 심페소생술에 필요한 인원은 세 명이다. 다른 병동의 간호사가 도우러 와야만 한다. 그 동안 다른 병동의 간호사의 환자는 방치되거나 또 다른 간호사에게 떠넘겨진다. 만약 심폐소생술 상황이 연이어 두 명, 세 명에게서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부족한 인원으로 상황을 제 때 발견할 수 있을까? 그 동안 다른 환자들은? 간호사들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 2017년 12월 서울 이대목동병원에서 그런 일이 발생했다. 신생아 네 명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심정지가 일어났다. 공공병원이 안고 있는 또 다른 문제는 규모다. 상급 종합병원(42개) 중 국공립대학병원을 제외하고 공공병원은 없다. 그렇다보니 큰 수술이 필요한 환자들은 애초에 민간 종합병원을 찾는다. 이는 환자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먼저 의료비 부담이다. 의료비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항목에서 차이가 발생한다. 비급여 항목은 의료기관이 자체적으로 금액을 정하기 때문이다. 가령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2018년 병원별 비급여 진료비용’을 보면 상급 종합병원에서 도수치료를 받을 경우, 최저 금액은 9500원, 최고 금액은 19만 5700원이었다. 20배 차이다. 상급 종합병원급 공공병원이 생긴다면 환자는 좀 더 ‘연속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대부분 민간 병원에서는 환자를 오래 입원시키지 않는다.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황은영 간호사는 “돈이 되는 건 검사, 수술, 짧은 입원이다. 수술 환자가 심하게 통증을 느끼는 건 며칠이다. 이 시기에는 무통주사 등 비급여 치료를 하기 때문에 돈이 된다. 이후에는 돈이 안 되니까 다른 병원으로 보낸다”고 말했다. 여기서 ‘다른 병원’이 주로 공공병원이다. 김모 간호사는 “의료원 외래환자가 민간 종합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다시 입원환자로 오는 경우가 있다”며 “이럴 때 묘한 무력감을 느낀다. 지역 의료원등 공공병원이 거점병원이 돼야 하는데 지금은 민간병원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만약 애초 공공병원에서 검사와 수술을 받는다면 어떨까? 환자 입장에서는 수술한 의사가 끝까지 봐주는 게 가장 좋다. 의료진 처우는 좋지 않은데 일은 비슷해 공공병원이 ‘관료화’ 되어간다는 지적도 나왔다. 김모 간호사는 “민간병원에 비해 의료진 처우는 좋지 않은데 일은 비슷하게 많고 환자들도 큰 수술은 민간병원을 선호하다보니 ‘무리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있는 게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응급실에서 근무하면서 해당 병원에서도 할 수 있는 수술이었는데 응급처치만 한 다음 민간 종합병원으로 보내는 경우를 종종 목격했다. 이보라 녹색병원 호흡기내과 전문의도 공공병원에서 일하며 비슷한 답답함을 느꼈다. 그는 “민간병원에서는 불필요한 처치나 수술이 문제고, 공공병원은 처치나 수술의 적극성이 떨어져서 문제라고 느꼈다”며 “공공병원에서만 받아주는 행려병자 같은 환자들은 강하게 뭘 요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공공병원이 여기에 익숙해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따라서 현장에서는 공공병원을 무조건 확충할 것이 아니라 지금 공공병원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최소 인력 강제 ▲의료진 처우 개선 ▲전공의 노동시간 제한 ▲적자 보전 ▲상급 종합병원 수준의 공공병원 확충 등이다. 이보라 전문의는 “2차 병원도 많이 있어야 하지만, 최고 난이도의 수술을 할 수 있고 희귀질환 환자들이 찾아갈 수 있는 수준의 공공병원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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