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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정치 복원? 17년 전 노무현, 한나라·민노당에서 배워라
연금정치 복원? 17년 전 노무현, 한나라·민노당에서 배워라(2024. 09. 16 06:00)
2024. 09. 16 06:00 정치
그간 정부 입장 부재로 개혁 실패…이번에도 공방만 하다간 같은 길 세대별 차등 인상 등 쟁점에 17년 전처럼 고난도의 정치력 발휘해야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 9월 4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현행 9%에서 13%로, 소득대체율은 올해 수준인 42%로 유지하는 내용을 담은 ‘연금개혁 추진계획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정부가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현행 9%에서 13%로 올리고 은퇴 전 소득 대비 연금액을 뜻하는 소득대체율은 올해 수준인 42%로 유지하는 개혁안을 지난 9월 4일 내놨다. 중장년일수록 보험료가 빠르게 오르도록 보험료율 인상 속도에 세대별 차등을 뒀고, 가입자들의 기대 여명과 가입자 수 증감에 따라 연금액을 조정하는 자동조정 장치를 2036년 이후 도입하는 방안도 검토한다. 정부가 구체적인 국민연금 개혁안을 내놓은 것은 2003년 이후 21년 만이다. 국민연금의 재정을 전망하고 보험료 등을 조정하기 위한 국민연금법상의 ‘재정계산’은 2003년 처음 했는데 2047년에 기금이 소진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참여정부는 이 계산 결과를 토대로 국민연금의 재정 안정을 위해 ‘더 내고 덜 받는’, 즉 보험료율을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낮추는 법안을 국회에 2003년 10월 제출했다. 이후 3년 8개월간의 진통 끝에 2007년 개혁이 이뤄져 보험료율 9%-소득대체율 40%(기존 소득대체율 60%를 2008년 50%로 낮춘 뒤 해마다 조금씩 떨어져 2028년 40%에 도달하도록 설계) 체제가 만들어졌다. 노인 중 소득하위 70%에게 지급하는 기초연금(기초노령연금)도 이때 도입됐다. 이후 17년간 국민연금 개혁은 없었다. 이명박 정부 초기인 2008년 두 번째 재정계산이 있었지만 이때는 ‘9%-40% 체제’의 안착이 주된 과제였고, 세 번째 재정계산이 이뤄진 박근혜 정부에선 기초연금-국민연금 연계 논란이 벌어져 국민연금 개혁을 논의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네 번째 재정계산이 이뤄진 2018년엔 개혁 기대감이 높았으나, 문재인 정부는 4개의 개편안을 병렬적으로 발표한 후 쟁점 논의를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에 넘겼다. 그러나 경사노위 역시 단일안을 내지 못하고 3개의 개편안을 발표한 뒤 활동을 종료했다. 그간의 개혁 실패 사례에서 공통으로 확인되는 것은 정부의 ‘입장 부재’였다. 윤석열 정부는 이번에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등을 비롯한 구체적인 정부안을 21년 만에 내놓았다. 국민연금 개혁 논의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충족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문제는 다음 단계다. 국민연금 개혁은 미래세대에게 지나친 짐을 지우지 않도록 세대 간 형평을 기하면서 적절한 노후소득 보장이란 애초의 제도 취지도 놓쳐선 안 되는 고난도의 정치 과정이다. 그런데도 정치 역량을 보여줬어야 할 국회는 여당이나 야당이나 수년간 자신의 견해를 밝히지 않은 채 사회적 대화나 전문가 합의만을 강조해왔다. 정치권이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는 동안 전문가들 사이에선 소득대체율 인상론과 재정안정론이 부딪쳐 접점 없이 논쟁만 되풀이됐다. 국민연금은 안 그래도 복잡한 제도인데, 양측 대립이 격해지면서 소득대체율을 올리면 노인빈곤 개선에 효과가 얼마나 있는지 등의 기초적인 사실관계마저 ‘합의’되지 않는 상황이다. 정부안이 마련됨으로써 개혁 논의의 출발선은 그어졌지만, 각 정당이 개혁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이번에도 정부안을 둘러싼 전문가 공방만 이어지다가 개혁의 불씨는 사그라들 것이다. 국회 의안과에 법안 서류들이 쌓여 있다. 연합뉴스 어떻게 해야 연금정치가 ‘가동’될까. 2007년 마지막으로 이뤄진 국민연금 개혁 과정이 한국형 연금정치의 본보기가 될 수 있다. 야당들은 정부안에 격렬히 반대하면서 정부안의 취약점을 보완할 대안을 각자 가져왔고, 정부는 이 대안들을 토대로 타협안(기초노령연금 도입)을 제시함으로써 돌파구를 만들었다. 이때 개혁에 실패했다면 국민연금 소진 시점은 여전히 2047년이었을 것이고(지난해 다섯 번째 재정계산에서는 소진 시점이 2055년으로 나타났다), 노인빈곤율을 낮췄다고 평가받는 기초연금제도는 지금 없었을 것이다. 2007년 연금개혁 과정을 통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연금정치의 ‘조건’을 살펴보자. ■2007년 개혁은 어떻게 가능했나 참여정부 시기 연금개혁 논의가 처음부터 불붙었던 것은 아니다. 2003년 6월 국민연금의 첫 번째 재정계산 결과를 토대로 정부는 보험료율을 15.9%(당시 보험료율 9%)로 올리고 소득대체율을 50%(당시 소득대체율 60%)로 낮추는 법안을 그해 10월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여야는 국민연금에 대해 별 논의를 하지 못한 채로 이듬해(2004년) 총선 국면을 맞았다. 이어 16대 국회 임기 만료로 정부의 법안은 폐기됐다. 당시 참여정부는 개혁 이전에 ‘제도 불신’부터 극복해야 했다. 2004년 여름 인터넷상에선 사실과 다른 ‘국민연금 8대 비밀’이라는 글이 확산했고 ‘안티 국민연금’ 운동이 벌어졌다. 정부는 ‘국민연금 비밀 바로알기’ 자료를 배포하고 가입자 불만을 사항을 제도 개선에 반영하면서 ‘안티 사태’를 진화한 뒤 국민연금 개혁 법안을 2004년 10월 다시 국회에 제출했다. 정부의 법안에 대해 야당들과 시민단체들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보험료 인상에 대한 반박도 있었지만, 국민연금 혜택을 받지 못하는 당시의 수많은 고령자 즉 광범위한 사각지대에 대한 대책이 없다는 것이 비판의 주된 내용이었다. 이때 야당인 박근혜 대표 체제의 한나라당은 비판에 그치지 않고 가장 먼저 정책 대안을 마련했다. 64세 이상 모든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초연금의 도입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기초연금의 소득대체율은 9%로 시작해 2028년까지 20%로 높이기로 하고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60%에서 20%로 크게 낮추자는 내용이었다. 국민연금 보험료율은 기존(9%)보다 낮은 7%를 제시했다. 여당인 열린우리당도 정부안을 수정한 대안을 마련했는데 소득대체율은 정부가 제시한 대로 낮추고(60%→50%), 보험료율 조정은 4년 뒤로 미루자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양당은 1년여 동안 각자의 안을 고집하며 대립했다. 2007년 2월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일과 가정이 함께하는 기업환경 조성보고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유시민 당시 복지부 장관 / 연합뉴스 지루한 대치 국면을 깨뜨린 것은 2006년 2월 새로 취임한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다. 이때 복지부는 두 차례에 걸친 내부 토론회를 통해 한나라당이 주장한 기초연금을 받아들여 ‘기초노령연금’ 제도를 도입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가장 큰 걸림돌인 재원은 국무조정실, 재정경제부, 기획예산처와의 회의를 통해 증세 없이 세출 구조조정, 비과세 감면·축소 등으로 조달하기로 했다. 복지 확대에 늘 부정적인 경제부처를 움직인 것은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었다. 유시민 당시 복지부 장관(현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지난해 유튜브 방송에서 기초연금 도입의 ‘결정적 장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첫해에 얼마 드는데?’ 물어보시더라고요. (중략) 기획예산처 장관님한테 ‘보건복지부 장관이 이렇게 한다니까 잘 얘기해서 도와주시오’ 전화하셔서 내부적으로 추진하기로 됐어요. 그 후 국회에서 대상을 늘려라 해서 ‘돈 더 주셔야 되겠는데요’ 했더니…. (중략) ‘아니 뭐 싫으시면 말고요. 어르신들 노무현이가 잘 모신다고 해놓고 잘 모신 것도 없지 않습니까’ 했더니 (대통령이) ‘알았어’ 하시더라고요.” 이상이 2006년까지의 얘기다. 이때까지는 정부 개혁안의 취약점을 파고들어 타당한 대안(기초연금)을 내세웠던 한나라당과 그 대안을 받아들인 정부의 ‘플레이’가 돋보였다면 2007년 마무리에선 ‘캐스팅보트’ 민주노동당의 활약이 컸다. 2006년 보건복지부가 각 신문에 실은 국민연금 개혁 광고 / 출처: 참여정부 정책보고서 2-23 국민연금 ■캐스팅보트 ‘민노당’의 활약 기초노령연금 도입을 담은 정부 법안이 다시 국회에 제출된 이후 개혁 논의는 급물살을 탔지만, 야당들은 여전히 정부안에 회의적이었다.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은 정부안에 맞서 국민연금·기초연금 단일안을 만들었다. 이 단일안은 한나라당보다는 민주노동당의 색이 강했다. 기초연금을 도입하면서도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을 크게 약화하지는 않도록 민주노동당이 한나라당을 설득해낸 것이다. 가장 보수적인 정당과 진보적인 정당이 손을 잡고 정책대안을 만들어낸, 한국 정치사에서 보기 드문 사례였다. 다만 ‘결전’이 이뤄진 2007년 4월 2일 국회 본회의에선 또 한 번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나라당-민주노동당의 기초연금·국민연금 법안과 정부의 국민연금 법안이 모두 부결되고 정부의 기초노령연금 법안만 통과됐다. 한나라당은 자신들이 민주노동당과 함께 만든 법안에 투표하지 않았다. 정부로서도 난감한 결과였다. “국민연금법 개정이 입에 쓰기에 기초노령연금법안을 사탕과 같이 올려놨는데, 약사발은 엎고 사탕만 먹었다”(유시민 전 장관)는 말이 나왔다. 기초연금만 도입하고 국민연금 개혁에는 실패했다는 비판 여론 속에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과 최종 협상을 이어갔다. 그리고 양당의 협상 결과는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의 앞선 단일안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은 낮추지만(60%→40%) 기초연금을 도입함으로써 노후소득 보장은 약화시키지 않는 법안이 만들어진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한나라당을 설득해 만든 연금 단일안이 없었다면 거대 양당의 협상 결과는 퍽 달랐을 것이다. ■타협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지난 9월 4일 정부가 발표한 국민연금 개혁안으로 다시 돌아오자. 2007년의 기초연금과 같은 타협점이 이번에도 나올 수 있을까. 일단 ‘전선’은 보험료율 인상 세대별 차등 적용을 둘러싸고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 자동조정장치가 급여 삭감으로 이어진다는 논란이 있지만, 정부는 한발 앞서 2036년·2049년·2054년 도입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충분한 논의와 세밀한 검토를 거쳐 추진할 필요가 있다”며 사실상 ‘중장기 과제’로 설정했다. 정부가 제시한 소득대체율(42%) 역시 민주당과 시민단체에서 강력 반발하고 있지만, 지난 9월 12일 국민의힘이 “42%와 45% 사이에서 국회에서 절충점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김상훈 정책위의장)며 협상할 공간을 만들었다. 앞서 21대 국회에서 여야는 보험료율 13%에는 합의했으나 소득대체율에선 43%(국민의힘), 45%(민주당)로 입장이 갈렸고, 이재명 대표가 국민의힘이 수정 제시한 44%를 수용하겠다고 했으나 국민의힘이 구조개혁도 해야 한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련의 ‘줄다리기’가 보여주는 것은 소득대체율 역시 타협의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세대별 인상 차등을 두고 여야가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까. 민주당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이 제도”가 저소득 중장년에게 부담을 줄 것을 우려하고 있다. 다만 “가입이력이 짧아 과거 후한 소득대체율의 혜택을 못 누린 중장년에게 청년보다 빠른 보험료율 인상은 부당할 수 있으므로 이들을 위한 감면 특례 등의 보완 등을 모색하자”(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는 제안도 있다. 사실 절충과 타협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르는 것은 무엇보다 ‘개혁 의지’다. 오 정책위원장은 “노무현 정부의 경우 정부안을 제시한 후 개혁을 달성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현 정부가 낸 정부안은 지난 2년 동안 안 내다가 떠밀려 낸 성격이 강해 앞으로 얼만큼의 추진력을 보여줄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야당들이 정책 정당으로서의 역량을 보여줄지도 미지수다.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장은 “2007년 국민연금 개혁 성공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만큼 주목해야 할 사람이 기초연금을 제안한 박근혜 전 대통령(당시 한나라당 대표)이었다고 생각한다”면서 “민주당이 연금개혁에 의지가 있다면, 비판만 하지 말고 박근혜처럼 역제안을 해보기 바란다”고 말했다. 기성정당에선 볼 수 없던 정책적 역량으로 거대 양당에 자극제가 됐던 민주노동당 같은 ‘캐스팅보트’가 없다는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개혁신당(3석)이 국민연금의 구연금·신연금 분리 대안을 내며 개혁 논의에 참여할 의지를 보이지만, 의석구조상(민주당 계열 175석·국민의힘 계열 108석·조국혁신당 12석) 영향력을 가지기 힘들다.
[주간경향이 만난 초선](9) “간호법이 여야 협치 복원의 계기 될지는 더 지켜봐야”
[주간경향이 만난 초선](9) “간호법이 여야 협치 복원의 계기 될지는 더 지켜봐야”(2024. 09. 02 06:00)
2024. 09. 02 06:00 정치
‘간호사 출신’ 전종덕 진보당 의원 인터뷰 전종덕 진보당 의원이 8월 28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저도 이제 합의안을 받아 내용을 살펴보던 중이었습니다.” 지난 8월 28일 오전 국회 본회의를 앞두고 전종덕 진보당 의원을 만났다. 이날 오후엔 여야 합의로 만들어진 간호법 제정안이 상정·통과될 예정이었다. 전 의원은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함께 22대 국회에 2명뿐인 간호사 출신 의원이다. 그러나 그는 법안을 다룬 보건복지위원회 소속이 아니다. 저간의 사정이 궁금했다. -법안을 살펴보니 어떤가. “얼추 보니 민주당 안이 많이 반영됐고, PA(Physician Assistant·임상 전문)간호사 합법화 내용이 주였던 국민의힘 안도 들어가 있다. 그동안 현장에서 주장하는 내용이 이제 반영된 거다.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고.” -PA간호사 역할의 범위 같은 것이 쟁점이 됐고, 의사들은 여전히 그 부분을 반대한다. “그렇다. 그동안 나온 국민의힘 안은 PA간호사 업무의 범위를 명시하니 투약이면 약사들과 부딪히고, 검사를 하면 방사선사들과 부딪힌다. 어차피 의사업무를 보조하는 형태로 현재도 진행하고 있어서 의사들과 충돌할 이유는 없는데 의사들 쪽에서는 영역을 넘어 의사업무를 침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간호사 파업은 어떻게 될 것 같나. “간호법 때문에 파업하는 것이 아니다. 큰 명제가 진료 정상화인데 현재 의료공백을 간호사나 보건의료 노동자들이 다 메꾸고 있다. 진료 정상화는 윤석열 정부가 풀어야 할 문제이기 때문에 당장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지금 의료현장은 심각하다. 업무 가중 수준의 문제를 넘어 의사들의 진료 거부로 손실이 발생했으니 임금을 인상할 수 없다고 한다. 더 나아가 임금 체불 문제도 있다. 어떤 병원은 ‘사직 처리를 안 한 의사들이 돌아오면 3~4개월치 월급을 한꺼번에 줘야 해서 임금인상을 못 한다’ 이렇게 나오고 있다. 결국 의사들의 공백을 병원 노동자들이 메꿨는데 병원 노동자들의 노고를 알아주는 것이 아니라 정당하게 처우를 개선해줘야 하는 것도 의사들 몫을 떼어놔야 하니까 못 준다는 것이다. 정부가 진짜 파업을 막으려면 이런 상황에 대해 제대로 감독하고, 의료공백을 메꾼 병원 노동자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줘야 한다.” “윤 대통령이 후보 때 한 약속을 스스로 뒤집으면서 책임도 지지 않는 전형적인 모습이 간호법이나 양곡법과 같은 민생법안들에 대한 태도로 나타난 것으로 본다.” -윤 대통령이 지난해 국회를 통과한 간호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 약속했던 법이다. 지금 현장에서 이행되고 있는 것을 그대로, 그다음에 의료법에 명시하는 내용이 그대로 들어가 간호사 영역의 기본법으로 발의된 것이다. 이게 국회에서 통과됐는데 그걸 직역 간의 갈등을 이유로 거부한 것이다. 결국 의사 눈치를 봤다고 생각한다. 의사들도 본인이 해야 할 업무를 간호사들이 다 해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종의 ‘밥그릇 싸움’을 하는 것이다. 양곡법도 마찬가지다.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 식량안보 차원에서라도 남아도는 재고를 정부가 전량 수매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목표가격이 수확기 산지 쌀값의 85%에 미치지 못할 때 정부가 지원해주게 돼 있는 변동직불제를 폐지하고, 공익직불제로 전환하면서 최소한 한 가마(80㎏)당 20만원 선은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본인이 했다. 그런데 지금 17만원 선이다. 정부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다. 결국 본인이 후보 때 한 약속을 스스로 뒤집으면서 그 책임을 다 약자들, 국민에게 뒤집어씌우면서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는 전형적인 모습이 간호법이나 양곡법과 같은 민생법안들에 대한 태도로 나타난 것으로 본다.” -여야 합의로 간호법이 통과됐다. 이를 계기로 ‘야당 법안 상정-여당 필리버스터-대통령 거부권-국회 무기명 투표로 폐기’라는 무한반복 과정이 해소될까. “그랬으면 좋겠다. 국민이 너무 피로감을 느끼고 있고, 정치불신이 극에 달해 있다. 그런데 그 상황과 관련해서는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지금은 정부가 너무 급하지 않나. 당장 의료대란으로 인한 국민 불안을 어떻게든 해소해야 하고, 그 누군가가 맡아줘야 하니 PA간호사들에게 전가하겠다는 것 아닌가. 추석은 다가오는데 응급실 뺑뺑이나 의대 정원 문제는 해소되지 않고 의료공백이 더 커질 상황이 되니까 윤석열 정부가 서두른 거다. 이게 여야 협치의 계기가 될 수 있을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 -간호사 출신으로 전문성이 있는데도 보건복지위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번 간호법 제정에도 직접 참여하지 못했는데. “보건복지위를 신청했지만 안 됐다. 상임위별로 원내교섭단체 숫자를 우선 배정하고 그다음에 비교섭단체에 배분하는데, 보건복지위 비교섭단체 몫이 1~2석밖에 안 됐다. 비교섭단체에서 이번에 4명이 신청했는데 난 아무도 신청하지 않은 농림위로 강제배정됐다. 국회의장께 강력항의했다. 지금 복지위엔 의사·약사 출신밖에 없는데, 현장에서 진짜로 일하는 보건의료 노동자 대표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국회의장께서도 노력해보겠다는 답을 받았다.” -공공병원인 강진의료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다 인력 감축 계획에 항의해 노조 활동을 한 것이 2002년 민주노동당 출신 최연소 도의원 등 정치 활동으로 이어졌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노동계로 돌아와 민주노총 사무총장을 지냈다. “현장에서 노동자로 살면서 법과 제도의 중요성을 너무나 느꼈다. 그동안 민주당에도 의존해보고 다른 새로운 당에도 의탁해봤지만, 결국 노동자나 서민의 목소리를 절실하게 듣는 정치권은 없더라. 노동자를 위한 정치 세력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이다. 그게 노동현장일 수도, 선거 참여나 제도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치와 노조·시민사회를 왔다 갔다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디를 가든 내 삶과 현장·정치를 바꾸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이었고 자리만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현장 활동에 국회 정책토론회까지 아주 많은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밖으로는 잘 안 드러난다. 주목 못 받는 이유가 진보당이 소수당이기도 하지만 개인보다 대의를 더 앞세우기 때문일까. “글쎄.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도의원 시절에도 민주당으로 오면 더 뜻을 쉽게 펼칠 수 있지 않겠냐는 말도 들었고, 여러 번 선거에서 떨어질 때마다 그런 제안이 없지는 않았다. 민주당 소속으로 정치할 바에야 그냥 시민으로 사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생각을 했다. 분명 쉬운 길은 아니다. 누군가 세력을 대표해서 뭔가 한다는 것은 부담스럽고 어려운 문제다. 진보정당 의원으로서, 또 내가 살아온 길도 오히려 정치나 정책에서 더욱 선명하고 국민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그런 내용을 부각하고 실현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정치인으로서 내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주간경향이 만난 초선
[꼬다리] 복원해야 할 마음
[꼬다리] 복원해야 할 마음(2024. 06. 05 06:00)
2024. 06. 05 06:00 정치
지난 5월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노란봉투법(노조법 제2·3조 개정안), 국민연금 개혁 등을 촉구하는 시민들이 차린 농성장 / 박하얀 기자 결혼을 앞둔 애인과 살림을 꾸린 지인이 탁상시계를 하나 샀다. 사고 보니 실제 시간과 따로 노는, 어딘지 엉성한 시계였다. 애인은 사도 왜 이런 걸 샀냐고 면박을 줬다고 한다. 당시 화원을 운영하는 이들에게는 비수기가 지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돈을 아끼려 최저가 제품을 온라인으로 구매한 것이라고 지인은 털어놨다. 마음이 상한 그는 얼마 뒤 울고 있는 애인의 뒷모습을 봤다. 그 모습이 가여웠다고 했다. 불쌍해서 사랑하고 사랑하니까 불쌍하다고, ‘가련한 마음’에 대해 지인은 말했다.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건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귀해진 시대라는 생각이 부쩍 든다. 타인이 처한 상황을 접하고 동정심만을 느끼고는 자신과는 철저히 분리하는 ‘타자화’가 비판받아 왔다면, 이제는 이런 마음을 갖는 것마저 기대하기 어려운 때가 온 것 같다. 특히 민의를 대변해야 하는 정치인에게 더욱더 그러하다. 21대 국회는 1만6000건이 넘는 민생법안이 폐기된 채 문을 닫았다. 17년간 이어온 논의 끝에 좌초된 연금개혁안을 비롯해 구하라법, 모성보호 3법 등이 폐기된 주요 법안으로 거론된다. 이 밖에도 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법안들이 윤석열 대통령의 책임 회피, 여야 의원의 정쟁 속에 발이 묶였다. 헌법재판소가 위헌 또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하며 개정을 요구한 법 35건(지난 5월 1일 기준)도 처리되지 않았다. 헌재가 2019년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형법상 낙태죄의 경우 개정 시한을 3년 반 가까이 넘겼다. 사안이 한창 언론의 주목을 받거나, 적정 규모의 인력이 조직돼 있어 정당과의 대화 창구를 모색할 여지가 있다면 그나마 ‘주요 법안’으로 다뤄지곤 하지만, 법안의 당사자인 시민 대다수는 자신들의 목소리가 입법부에 가닿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과로사 예방법, 스토킹처벌법 개정안, 장애인평생교육법, 외국인 아동의 출생등록에 관한 법률안 등 노동자·여성·장애인·이주민 같은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딛고 마련된 법안이 얼마나 많은가. 관련 법안은 소수자들의 희생이 있고 나서야 발의되는 경우가 상당한데 국회 논의 과정에서 이들은 또 한 번 소외된다. 여야는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다. 민생법안이 줄줄이 폐기된 직접적 원인으로는 여당이 채 상병 특검법 방패막이로 상임위원회를 보이콧한 행태가 지목된다. 여야가 사실상 합의했거나 이견을 보이지 않은 법안들까지도 상임위가 열리지 않으면서 폐기됐다. 하지만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이 불거지기 전에도 국회의 시간은 있었다. 21대 국회에서는 총 2만5849건의 법률안이 발의됐지만, 법안 처리율은 36.6%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이른바 홍보용으로 법안을 발의해 놓고 처리되도록 조정에 힘쓰지 않는 의원은 여야를 가리지 않는다. 국민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나마 복원됐으면 한다. 법안 하나하나에 서린 국민의 아픔을 직시했으면 한다. 심화한 여소야대 국면에서 갈등이 있다면 회피하지 않고 협의를 통해 풀어가는 모습을 정치인들이 보여주기를 바란다. 민주주의의 길은 대통령, 강성 당원들에 있기보다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여느 얼굴들에 있을 것이다.
꼬다리
[특별기고]한국사의 ‘공백’ 근대사 복원의 첫 단추는
[특별기고]한국사의 ‘공백’ 근대사 복원의 첫 단추는(2024. 02. 06 05:30)
2024. 02. 06 05:30 문화/과학
1996년 철거되는 구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 / 정준모 제공 근대를 대하는 이중적 태도 얼마 전 경복궁 월대가 복원됐다. 월대를 두고 “궁궐 안과 밖을 이어주는 매개 공간”, “임금과 백성을 이어주던 공간”이라며 다들 ‘복원’ 또는 ‘재현’의 의미를 강조했다. 하지만 월대는 중국 사신을 맞거나 임금이 과거를 보는 유생을 지켜보고, 백성들에게 곡식을 하사하던 권위주의, 전근대성, 봉건성, 비민주성, 비인간성의 조선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나마 월대의 복원 또는 재현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일제강점기 훼손된 조선의 상징을 회복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지금껏 우리 근대사에서 조선은 ‘회복’하고 일제는 ‘작파’의 대상이었다. 구 조선총독부 청사 ‘중앙청’ 앞에 광화문을 중건(1968)하거나, 구 조선총독부 청사였던 중앙청 철거(1995~1996)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다 갑자기 2000년대 들어 개항(1876) 이후 서양인과 일본이 세운 ‘근대건축물’ 보존을 시작했다. 문화재청은 ‘근대건축물’이라는 이름으로, 문화부는 ‘근대문화중심도시조성사업’을 시행해 군산, 목포, 부산, 대구, 포항 등에 산재한 적산가옥 등 일제강점기 자잘한 건물을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까지 동원해 ‘근대문화유산’이란 이름으로 보존 및 회복시켰다. 이렇게 우리는 광복 이후 일제강점의 역사를 기억하려는 ‘보존’과 당시의 치욕을 떨치려는 ‘작파’ 사이에서 갈팡질팡해왔다. 역사를 대하는 이런 이중성은 ‘경복궁 복원사업’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국 근대사의 아픈 고리인 고종과 대원군이 중건 공사를 완료한 1888년의 모습을 기준으로 복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는 이미 일제나 서구의 건축 양식이 한국건축에 녹아들던 시기였다. 그런데 근대에 대해 합의된 일관적인 정의가 없는 상황에서 국치와 일제강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러한 오락가락 현상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속은 쓰리지만, 기억과 재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근대에 대한 분명한 성찰은 필요하다. 특히 당시의 시대정신과 미감, 미학을 담아낸 근대미술품은 마땅히 보존돼야 하고, 국가와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근대미술품의 조사연구는 더욱 강화해 우리의 ‘근대’를 규정해야 한다. 이런 우왕좌왕의 배경에는 번듯한 근대미술관 하나 없는 대한민국의 실상이 있다. 근대미술이 국립현대미술관의 ‘부속품’이나 ‘하위 장르’ 정도로 치부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근대미술 화가 안중식의 1915년 작품인 ‘백악춘효’ 여름본(왼쪽)과 가을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오늘의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광화문 거리는 광복한 지 80주년이 다 돼가도록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을 표상하는 그 어떤 상징물도 없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격정적이며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근대’가 사라져 버리는 바람에 현대는 물론 현대미술 또한 뿌리 없는 나무처럼 어정쩡하고 기이한 형태로 오늘을 상실한 채 굴러가고 있다. 문화가 빠진 질곡의 근대사? 근대를 규정하는 정부나 국민의 시선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정치권은 진영이나 정파에 따라 멋대로 근대를 규정하고, 문화예술인들은 이에 맞장구치며 확대 재생산을 거듭하는 바람에 대한민국 근대사는 점점 더 왜곡돼 가고 있다. 이는 1차적으로 광복 후 우리의 근대에 대한 근본적인 규명 없이, 극복을 위한 부정 또는 의도적 외면으로 일관한 탓이다. 사실 근대란 인류사에서 왕정을 극복한 후 전개된 근대사회 시기로 개인을 존중하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지향한다. 또한 근대는 봉건영주 또는 귀족의 예속민으로 토지에 묶여 있던 인간이 여기서 벗어나 자유로운 노동자로 재탄생하는 국민국가의 성립을 뜻한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오늘날 문명국가의 시작인 근대와 근대국가의 성립과정을 도외시하는 사례가 없는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독립운동가이자 화가였던 박기정(1874~1948)의 묵죽 10폭 병풍. 130.3x30.3㎝, 종이에 먹 /최열 소장 근대 역사학은 19세기 국민국가라는 특별한 형태의 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역사가들은 자민족의 고유성을 강조하고, 민족적·지역적 테마를 자국의 형성과 발전이라는 차원에서 다룸으로써 국민국가의 역사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때 국가라는 추상적 공동체의 객관적 정체성을 도출하고자 등장한 게 바로 근대 미술관이다. 유럽의 근대, 독립 후 미국 도시들이 앞다퉈 미술관을 설립한 것도, 문화를 공유해 공감대를 이루고 이를 통해 국민을 통합하는 정치적인 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1945년 광복 후 총독부박물관과 총독부미술관을 일제로부터 돌려받아 국립박물관과 국립미술관으로 개편한 바 있다. 하지만 경복궁미술관이라 불렸던 국립미술관은 1969년 5월 국립박물관으로 흡수됐고, 같은 해 10월 새롭게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은 ‘근대미술’을 사실상 버렸다. 근대를 논의할 공간은 물론 시간마저 잃어버린 셈이다. 대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한 아시아·아프리카·남미 국가들은 국립미술관 등의 건립을 통해 이견이 존재하는 근대사를 문화적이며 예술적인 관점에서 정리하며, 나아가 정치와 사회적인 문제까지 객관적 합의를 했다. 피식민 시대 생산된 문화유산, 미술작품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며 문화적 자산, 국가의 상징으로 승화시켰다. 이로써 식민시대의 민족적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국가의 정체성을 구성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연유에서인지 근대 문화유산인 미술품을 다루는 국립미술관을 국립박물관에 넘겨주고, 그것도 모자라 5개월 뒤에는 타임머신을 타고 근대는 생략한 채 바로 현대로 와버렸다. 이로 인해 질곡의 근대사는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1939년 개관한 조선총독부미술관. 광복 후 국립미술관(경복궁미술관)으로 사용되다 1969년부터 1973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건물로 쓰였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한국 근대사 구하기 우리가 질곡으로 빠트린 한국 근대사는 선진 대한민국의 근대(modern)와 현대(contemporary)를 아우르는 상징적 시공간이어야 할 광화문광장을 문화평론가 최범의 지적처럼 오직 봉건왕조 시대의 ‘조선’으로만 채워진 기형적 모습으로 만들어버렸다. 현재 우리 근현대사는 재현된 조선에 치이고, 일제강점기에 의해 다시 한 번 강점당한 상태다. 우리의 근대는 여전히 미혹 속에 존재한다. 아픈 과거를 굳이 기억하기 싫은 탓이다. 그래서 논의조차 꺼리니 국민적으로 근대에 대한 합의된 해석이나 평가가 있을 리 없다. 이런 현실은 한국사의 ‘공백’이 되어 정치적 이해에 따른 이념적·정파적·자의적인 해석과 평가를 가능하게 만들면서 국민통합을 저해하는 논쟁적 소모품이 되고 말았다. 독립기념관에 전시 중인 구 조선총독부 청사(중앙청)의 부자재들 /독립기념관 제공 그 결과 민주 공화제의 국민국가, 근대국가의 성립이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근대사는 사라지고 이전투구의 상처뿐인 근대만 남았다.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친일미술론’은 이런 민망한 상황을 상징한다. 근대를 정치적·민족적 입장 또는 정파적 입장에서 상대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바람에 생긴 현상이다. 일제 청산을 위한 친일 미술 극복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일제강점기 항일과 반일, 민족 지사 화가들의 역사를 성찰하고 행적을 공부하는 일이 우선돼야 한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국립근대미술관’ 설립을 주장하는 까닭이다. ‘국치’와 ‘일제강점 35년’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거나 감출 이유는 없다. 과거의 상처가 깊을수록 오늘 우리의 성공이 그만큼 더 당당해지기 때문이다. 역경을 딛고 오늘의 선진 대한민국을 일군 자부심의 배가를 위해서도 우리 근대는 복원돼야 한다. 그 복원의 첫 단추는 바로 국립근대미술관 설립이다.
[문화캘린더]박세연이 복원한 명인 신쾌동(2023. 08. 11 14:48)
2023. 08. 11 14:48 문화/과학
▲국악 신쾌동의 가야금 일시 9월 2일 장소 서울돈화문국악당 공연장 관람료 전석 2만원 거문고산조의 명인으로만 알려져 있던 신쾌동의 음악을 재조명하는 공연이 찾아온다. 사라진 옛 명인들의 음악을 복원 및 재현하는 일에 힘써온 박세연이 신쾌동의 가야금을 복원해 관람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신쾌동이 남긴 가야금 연주자료를 바탕으로 가야금산조와 풍류, 남도민요 새타령을 복원해 연주한다. 이번 공연은 2021년부터 시작한 서울돈화문국악당의 ‘공동기획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열린다. 예술가의 안정적인 공연을 위해 극장 대관료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공연의 홍보마케팅과 인력지원 서비스도 제공하는 사업이다. 올해에만 10번의 공연이 열렸고, 11번째 공연 주자로 박세연을 선정했다. 박세연은 현재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단원으로 재직 중이다. 2016년부터 전통 음악으로만 구성된 ‘본연’ 시리즈 공연을 기획했고, 2020년에는 KBS 국악대상 연주 현악상을 수상한 바 있다. 박세연은 “공연을 통해 옛 명인 신쾌동의 음악적 이면과 깊이에 좀더 다가서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는 바람을 전했다. 한편 이번 공연을 다채롭게 할 고수로, 이태백 목원대학교 한국음악과 교수가 무대에 오른다. 또 윤중강 음악평론가가 공연 중 신쾌동의 음악에 대해 해설한다. 국악, 가야금 등에 대해 잘 모르는 관람객이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공연을 즐길 수 있게 배려했다. 공연은 인터파크나 서울돈화문국악당 누리집을 통해 예매 가능하다. 회차별 잔여 티켓이 있는 경우 공연 당일 현장에서 매표한 후 관람할 수도 있다. 02-3210-7001 ▲연극 잘못된 성장의 사례 일시 9월 5~25일 장소 두산아트센터 Space111 관람료 3만5000원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신만의 생존 방식을 만들며 살아온 사람들이 식물의 성장 과정을 바라보며 각자의 삶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연극은 관람객들에게 누군가의 삶을 예측하는 과정에서 ‘걱정을 가장한 편견’을 내보이고 있진 않은지 묻는다. 02-708-5001 ▲뮤지컬 궁 나와라 뚝딱! 일시 8월 5일~9월 24일 장소 경복궁아트홀 관람료 일반석 3만원 조선의 5대 궁궐을 바탕으로 한 가족 뮤지컬이다. 도깨비, 해치 등 한국 전설 속 주인공들이 궁궐의 역사와 왕, 신하 등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02-305-0525 ▲콘서트 청춘 썸머 나잇 일시 9월 2~3일 장소 서울어린이대공원 능동숲속의무대 관람료 양일권 13만9000원, 일일권 9만9000원 여름밤을 주제로 한 콘서트다. 거미, 정준일, 바다, 양다일 등이 참여해 무대를 꾸민다. 여름밤 다양한 이벤트와 함께할 수 있는 콘서트가 될 전망이다. 02-1644-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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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Hi-story](95)물체질·핀셋·현미경…월성 ‘사계’ 복원해 보니(2023. 08. 04 11:21)
2023. 08. 04 11:21 문화/과학
경북 경주 월성 해자에서 출토된 동식물 유체 등을 토대로 복원한 5세기의 환경. 해자의 물속~물가에 푸른 잎을 띄우고, 꽃을 피우는 여러 수생식물이 무성하게 자라는 풍경이었을 것이다. 가시연꽃이 가장 큰 군락을 이뤘고, 개연꽃, 마름, 붕어마름 등이 자생했을 것이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25t 트럭 100대 분량의 흙을 물체질로 걸러낸 끈기와 집중력의 결과물…. 얼마 전부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월성 해자(垓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에 판 물도랑 혹은 연못)와 그 주변의 고환경(古環境)을 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실감: 월성 해자> 전시회를 열고 있습니다. 경주 신라월성연구센터(숭문대) 전시동에서 일반에 공개되고 있는데요. 월성 해자에서 출토된 동물 유체는 물론이고요. 작은 씨앗과 미세한 꽃가루 같은 식물자료까지 학제 간 연구로 분석해 당대(5세기)의 환경을 복원해낸 건데요. 1㎜ 씨앗도 물체질과 현미경으로 걸러냈다  그런 영상을 만들어내기까지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주인공(고고학자)은 물론 아니었죠. 발굴구간에 쌓인 점토를 1m 이상 파내 일일이 물체질하는 고달픈 작업이었습니다. 물체질한 흙의 양이 25t 덤프트럭 100대분(2200㎥)에 달했다네요. 하지만 이렇게 앉아 잘 보이지도 않는 유물 조각을 한 점 한 점 눈에 불을 켜고 찾아내는 것 또한 고고학도의 몫입니다.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발굴구간이 해자인 덕분이죠. 산소가 일정하게 접촉하는 환경이어서 크게 썩지 않아서 그 속의 유기물들이 보존될 수 있었거든요. 그러나 점토 퇴적층이라 작은 씨앗 같은 미세 유기체를 구별하기가 어려웠죠. 그래서 그물 간격이 0.5㎜에 불과한 체로 걸러내는 작업을 반복해 찾아낸 거고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점토를 물에 풀어 놓은 다음 가라앉는 것은 골라내고 물에 뜨는 것은 일일이 핀셋으로 집어냈습니다. 육안으로 구별할 수 없는 유기물은 현미경으로 골라냈죠. 크기가 1㎜ 안팎인 오동나무 씨앗도 찾았고요. 1600년 전의 규조물(식물성 플랑크톤) 등도 걸러냈습니다. 저처럼 성질 급한 사람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찾아낸 씨앗 및 열매는 2만여 점이 출토된 가시연꽃 씨를 비롯해 머루, 버찌, 자두, 복숭아, 가래 등이었습니다. 또 느티나무, 느릅나무, 참나무, 소나무 꽃가루도 확인했죠. 찾아낸 씨앗과 열매가 70여 종에 달했습니다. 이런 유물을 토대로 복원된 1600년 전 ‘경주의 사계’를 돌아볼까요. 물체질로 걸러내고 핀셋으로 집어내고 현미경으로 관찰해 찾아낸 각종 식물유기체. 이런 과정 끝에 1600년 전 신라 월성 주변의 경관을 복원·재현해낼 수 있었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1600년 전 월성의 사계  해자는 나무기둥을 1.5m 간격으로 세우고 그사이를 판재로 연결한 형태로 조성됐습니다. 봄은 분홍색, 흰색으로 화사하게 꽃을 피우는 복숭아나무, 자두나무, 벚나무류로 수놓았을 겁니다. 요즘 경주가 봄철만 되면 벚꽃으로 물드는데요. 해자에서 ‘버찌’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경주 벚나무는 1600년 전에도 꽃을 피웠던 것 같네요. 여름철은 어떨까요. 해자의 물속~물가에 푸른 잎을 띄우고, 꽃을 피우는 여러 수생식물이 무성하게 자랐을 겁니다. 가시연꽃이 가장 큰 군락을 이뤘을 거고요. 개연꽃, 마름, 붕어마름 등이 자생했을 겁니다. 가을에는 붉은빛과 노란빛으로 물든 느티나무·느릅나무 숲이 눈에 띄었을 것 같습니다. 겨울철은 어떨까요. 소나무와 같은 사철나무가 눈에 덮여 있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해자에서 출토된 미세한 규조류와 꽃가루 분석을 통해 주변의 풍경도 어렴풋이 그릴 수 있습니다. 월성 주변 물가(발천~남천변)에는 느티나무·느릅나무숲이 존재했고요. 더 떨어진 주변 구릉이나 산지는 소나무와 참나무류의 숲으로 이루어졌을 겁니다. 새끼돼지, 곰, 터번 쓴 흙인형  해자에서는 궁궐 사람들이 식용 혹은 관상용으로 썼던 동식물의 흔적도 다수 확인됐습니다. 식물로는 벼·밀·조·콩 등의 곡식류, 박·외류 등의 채소류, 가래·개암 같은 견과류, 복숭아·자두·머루와 같은 과실류 등이 나왔어요. 또 멧돼지·말·개·소·사슴류 같은 동물뼈도 다량 나왔는데요. 바다사자·상어 척추·곰뼈 등도 보였습니다. 출토 뼈 중 30% 정도가 멧돼지류였고, 그중에서도 6개월에서 1년 정도 키운 돼지가 40%(26개체)였습니다. 골절된 후 뼈가 붙어가는 과정이 역력한 어린 돼지도 보였습니다. 치료를 받았다는 얘기죠. 신라인들이 5세기부터 안정적으로 돼지를 사육했다는 증거겠죠. 동물뼈 가운데는 고기를 얻기 위해 해체한 부위가 보였습니다. 월성 출토 동물뼈와 식물유기체 등을 토대로 복원·재현해본 1600년 전 월성 해자 주변의 모습 / 국립경주문화제연구소 제공 곰뼈(반달가슴곰 추정)가 15점 이상 나왔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삼국사기>는 “각급 군대의 지휘관 깃대에 ‘곰의 뺨·가슴·팔가죽 등으로 만든 장식’을 단다”(‘잡지·무관조’)고 했습니다. 곰가죽으로 각급 지휘관들의 장식을 제작하는 공장이 월성 근처에 존재했을 수도 있습니다. 해자 출토 유물 중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터번을 쓴 토우(흙인형)입니다. 눈이 유난히 깊은 이 토우는 오른쪽 팔뚝까지 내려오는 터번을 머리에 둘렀고, 소매가 좁은 카프탄을 입고 있는데요. 소그드인(중앙아시아 페르시아계 유목민)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찍이 동서교역에 종사해 상술에 능한 사람들이었죠. 경주에서는 상당수 페르시아계 유물이 여럿 보입니다. 실크로드의 동쪽 끝인 경주까지 동서양 교역이 활발했음을 알려주는 지표 유물입니다. 사람제사의 살풍경  세인의 이목을 독차지한 월성의 발굴성과는 따로 있었습니다. ‘사람제사(인신공희·人身供犧)’의 흔적이었죠. 본격 발굴을 시작한 2017년 서성문터의 인접 지점에서 나란히 누운 남녀 인골 2구가 노출됐습니다. 심상치 않았습니다. 인골 노출 지점이 성벽을 쌓기 위해 단단히 다진 맨 밑바닥층이었거든요. 남성은 신장 166㎝, 여성은 신장 153.6㎝ 정도로 측정됐습니다. 남성은 정면을 바라보고 누웠고요. 여성은 얼굴을 돌려 남성을 바라본 채 누워 있었습니다. 남성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요. 50대로 추정된 남녀의 영양 상태는 좋지 않았습니다. 유물의 위계도 높지 않았습니다. 4년 뒤(2021) 두 인골에서 50㎝ 떨어진 곳에서 또 인골 1구가 노출됐습니다. 10대 어린이(키 135㎝)로 추정됐습니다. 50대 남녀와 10세 전후의 어린이가 묻힌 양상이 흡사했습니다. 인골들은 성벽을 높이 쌓기 전에 땅을 다진 바닥층에 나란히 누워 있었습니다. 또 과거의 시굴·발굴 자료를 들춰보던 발굴단원이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1984~1985년(3구)과 1990년(최소 20구)에도 이 부근에서 23구가량의 인골이 쏟아져 나왔다는 겁니다. 월성 내부의 3호 건물지에서 확인된 120여 점의 벼루. 별다른 장식이 없는 실용적인 벼루가 대다수다. 벼루 중에는 여러 번 사용한 흔적이 역력한 것도 보인다. 평소에 썼다는 얘기다. / 국립경주문화제연구소 제공 불과 5~10m 떨어진 지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쪽 성벽을 쌓을 때 최소한 26명의 사람제사가 자행된 겁니다. 축성 과정에서 안전을 기원하고, 견고한 성의 완성을 바라면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월성벽은 통곡의 현장?  이번에 <실감: 월성 해자> 전시회 기사를 준비하면서 다소 감상에 빠졌습니다. 1600년 전 월성 해자 주변의 사계를 상상했거든요. 그런데 순간 ‘싸’해진 포인트가 있었어요. 그렇게 감상에 젖을 때인가, 바로 곁에서 성벽을 쌓을 때 죄 없는 사람들이 희생됐는데… 오히려 희생자들의 통곡이 울려퍼진 참상의 현장이 아니었을까, 뭐 이런 생각이 든 겁니다. 그래서 발굴자에게 물어봤더니 그래도 동시대는 아니라더군요. 이번 전시회에서는 대략 5세기(1600년 전)를 중심 연대로 삼아 복원·재현한 거고요. 사람제사가 자행된 시대는 4세기 중엽(35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는군요. 50~150년의 시차가 나는 거죠. 시대가 겹치지 않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되는데요. 물론 지금의 잣대로 1600~1700년 전을 평가할 수는 없겠죠. 죄 없는 생목숨을 줄줄이 죽여 묻는 풍습은 지극히 야만적이라는 딱지를 붙일 만합니다. 4대 임금인 탈해왕은 어려서부터 초승달 모양의 봉우리에 눈독을 들인다. 어린 탈해는 터무니없는 사기행각으로 법정소송을 일으켜 왜인 출신 호공의 땅인 초승달 모양의 봉우리를 빼앗는다. 사기행각으로 일본인 귀화자의 집을 빼앗은 탈해  2014년부터 시작한 월성 발굴은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됐는데요. 월성 내부는 2050년 이후까지 장기 조사가 진행되고 있고요. 성벽은 서성벽(사람제사의 흔적 발굴)에 이어 남성벽 조사를 앞두고 있습니다. 해자는 발굴은 물론 복원 정비까지 다 끝나 이번에 전시회를 하게 된 거고요. 이 기회에 ‘월성’과 ‘월성 발굴’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요점만 간단히 일별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무엇보다 월성의 주인을 두고 분쟁을 벌인 일화가 흥미롭습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종합해볼까요. 4대 임금인 탈해왕(재위 57~80)이 어릴 적에 ‘초승달 모양의 봉우리’(월성)를 보고 흠뻑 빠졌답니다. 그 봉우리의 주인은 왜국 출신인 호공이었죠. 어린 탈해는 앙큼한 계략을 썼습니다.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옆에 묻어 두고 “조상 때부터 우리 집이었는데 (호공이) 빼앗았다”고 주장했어요. 날벼락을 맞은 호공이 “무슨 소리냐”고 기막혀했는데요. 탈해가 생떼를 쓰자 결국 법정소송으로 이어졌습니다. 재판관이 탈해에게 “당신 집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고요. 탈해는 “우리는 대장장 가문인데, 땅을 파보면 그 증거가 나올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죠. 호공은 꼼짝없이 집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탈해가 사기행각을 펼쳐 초승달 모양의 땅을 수중에 넣었다는 겁니다. <삼국사기>는 “101년 탈해왕의 뒤를 이은 파사왕(재위 80~112)이 이곳에 성을 쌓고 옮겨 살았다”(‘본기·파사왕’조)고 했습니다. 박씨(파사왕)가 왕위에 오른 지 21년 만에 석씨(탈해)의 땅(월성)을 차지해버린 거죠. 당대 노른자위 땅이었던 월성의 소유권을 두고 치열한 분쟁이 벌어졌다는 뜻입니다. 금단의 땅이 된 월성  2014년 시작된 월성(둘레 2340m) 내부 조사에서 매우 흥미로운 착안점이 보였습니다. 2014년부터 시작된 월성 내부 발굴에서는 건물터 17개 동과 11만 점이 넘는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지금까지 7개 층의 문화층이 확인됐고요. 유독 고려시대의 유구·유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조선시대의 경우도 영조 연간(1735) 쌓은 석빙고만이 남아 있죠. 신라 멸망 이후 장구한 세월 동안 인적이 끊겼다는 뜻이죠. 멸망 후 천년왕국의 궁성터는 금단의 땅으로 터부시됐을 겁니다. 이곳은 101년 초축 이후 834년간이나 신라의 궁성이었죠. 지금까지의 월성 내부 발굴에서는 17개 동의 건물터와 11만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출토 유물 중에 한 건물터에서 120여 점이나 쏟아져나온 벼루가 시선을 끕니다. 내부에 먹이 묻어 있거나 장기간 사용으로 인해 면이 매끈하게 닳은 사례도 확인됩니다. 이 건물은 궁궐 내에서도 공무를 수행한 관청이었을 가능성이 짙습니다. 천존고와 만파식적  앞으로의 월성 내부 발굴에서 왕이 정사를 펼친 정전 같은 중심 건물이 확인되면 대박이겠죠. 그중에서도 조사단원들의 꿈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천존고’의 발굴입니다. ‘천존고’는 <삼국유사> ‘만파식적조’에 등장하는데요. 신라의 국보인 만파식적(萬波息笛·불면 모든 풍파가 사라진다는 대나무 피리)을 보관한 창고입니다. 신문왕(재위 681~692)이 월성의 천존고에 보관했다고 했는데요. <삼국유사>는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는 개며,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평온해졌다”고 했습니다. 만약 천존고와 함께 ‘만파식적’이 나온다면 세상이 뒤집어지겠죠. 월성 내부의 발굴은 ‘2050년+α’로 예정돼 있어요. 장기발굴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신라’ 국호는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덕업이 날로 새로워져 사방을 망라한다)’이라는 구절(<삼국사기> ‘신라본기·지증왕’조)에서 따왔죠. 삼국 중 가장 늦게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졌지만 결국 ‘삼한일통(三韓一統)’의 위업을 쌓았죠. 그런 신라 천년 역사를 이끈 궁성을 발굴한다는데 쉽게 끝나겠습니까. 불과 74년간(710~784) 도성이었던 일본 헤이조쿄(平城京) 유적도 50~100년을 목표로 장기발굴을 벌이고 있거든요. 물론 발굴 자체가 ‘유적 파괴’이긴 합니다. 이미 손을 댄 이상 50년이 아니라 100년, 아니 200년이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신라 천년 역사의 전모를 규명해 가기 바랍니다.
이기환의 Hi-story
“10년간 토종벼 400여종 복원했다”(2023. 01. 06 14:18)
2023. 01. 06 14:18 경제
ㆍ토종벼 지킴이 이근이 우보농장 대표 1910년대만 해도 토종벼가 전국에 1451개에 달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 비료를 이용해 생산량을 증대시킬 수 있는 일본의 품종이 보급됐기 때문이다. 한때 알곡이 영글면서 검게(북흑조) 물들기도 했던 벌판은 황금빛으로 통일됐다. 잃어버린 토종벼의 다양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근이 우보농장 대표가 1월 3일 경기도 양평군 토종자원단지에서 다양한 토종벼를 소개하고 있다. / 주영재 기자 이근이 우보농장 대표가 꿈꾸는 들판이다. 그는 10년 넘게 토종벼를 재배하면서 토종벼 보급과 확산을 주도하고 있다. 2011년 5평 크기의 텃밭에서 토종벼 30품종을 재배하면서 토종벼의 아름다움에 빠진 그는 조금씩 규모를 키워 현재는 총 3만7000평에서 371품종의 토종벼를 재배 중이다. 혼자 하는 건 아니다. 2021년부터 토종벼 유전자원 연구개발에 나선 경기도 양평군과 함께하고 있다. 토종벼에 관심이 있는 시민들은 무보수로 참여해 모내기를 한다. 전국의 토종벼 재배 농가가 모여 정보와 종자를 나누기도 한다. 지난 1월 3일 양평군 청운면 가현리 토종자원단지에서 그를 만났다. 비닐하우스 안에는 여러 이름표를 단 토종벼가 손목 굵기 정도로 묶여 걸려 있었다. 2021년부터 토종벼 절기 구독 서비스를 시작했다고 한다. 비닐하우스 한켠에 400g 단위로 포장된 상품이 일렬로 진열돼 있었다. 이근이 대표는 “대량으로 비료를 넣어 수확량만 늘린 쌀은 건강에도, 기후에도, 환경에도 좋지 않다”면서 “화학비료를 이용한 수량 중심의 농정의 틀을 일부라도 바꿔 유기적인 토종벼 농사가 가능한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토종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내 밥상에 오를 걸 내 손으로 직접 생산해보자는 생각에서 농사를 시작했다. 식탁의 중심은 쌀인데 토종쌀을 알게 되면서 정말 국가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토종벼는 1910년 이후부터 사라지기 시작해 1940년대 이후엔 거의 전멸됐다. 농촌진흥청 유전자원센터와 식량과학원 등에서 보존용으로 갖고 있으면서 육종에 일부 활용했을 뿐 그걸 증식해 농가에 권장하는 용도로는 쓰지 않았다. 일본 쌀이 맛있다는 선입견과 일본의 품종 개발이 앞서다 보니 그걸 그대로 따라갔다. 지금도 수량이 많지 않고 잘 쓰러지는데 왜 쓰냐라는 정도로 얄팍하게 이해하고 있다.” -토종벼를 보급한 과정은. “토종벼를 복원해 밥상에 올릴 때까지 최소 3년이 필요하다. 첫해 채종포(씨앗 받을 용도로 마련한 논)에서 50립 정도를 얻고, 이듬해 증식포에서 700g 정도로 양을 늘린 후에야 그다음 해부터 시험재배와 소량 공급이 가능하다. 땅에 적응해서 그 특성이 고정되는 단계까지 가려면 10년은 지켜봐야 한다. 지금은 유전자원센터에서 받은 451종 중 거의 전부를 복원했다고 본다.” -토종벼의 특징은. “2011년부터 토종벼를 심기 시작했다. 품종마다 개성이 강해 놀라웠다. 검거나 붉은 녀석도 있고 키도 제각각이고, 까락(이삭에 붙은 수염)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있었다. 북흑조라는 녀석을 봤을 땐 정말 이건 꼭 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볏대가 거의 대나무처럼 느껴질 정도로 굵고 빳빳해 기상이 느껴질 정도다. 토종은 농약과 화학비료로 키울 수 없다. 근본적으로 다르다. 키가 재배종보다 크기 때문에 비료를 주면 웃자라 넘어지기 쉽다. 그래서 유기적인 방식으로 키워야만 제 본질을 드러낸다. 기후위기 시대에 딱 맞다. 제값만 받는 구조가 마련되면 다품종 소량 생산으로 소농의 자립을 도울 수 있다.” -주력으로 삼는 품종이 있나. “개량종에 비해 맛과 수량, 병충해 저항성에서 떨어지지 않는 품종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걸 주력품종으로 정해 농가에 권장해 시험재배를 하고 있다. 양평군과 협력해 2021년 108개 품종을 심었고, 지난해에는 그중에서 추려서 45종을 재배 중이다. 토종벼 자체가 기계화가 안 되는 건 아니나 다양한 품종을 심다 보니 품종별로 열 평에서 한 평 정도밖엔 심지 못한다. 자발적으로 도시락 싸들고 와서 모내기를 함께해주는 도시 사람들의 도움이 크다.” -토종벼가 맛이 없어 도태됐다는 시각도 있다. “왜곡된 이야기다. 여러 품종의 토종쌀을 재배할 수 있게 되면서 제일 먼저 ‘테이스팅 워크숍’이라는 이름의 시식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 온 한 일본인 요리사가 ‘화도’를 맛본 후 깜짝 놀랐다. 고시히카리보다 맛있다고 평가했다. 화도는 까락이 붉은색이다. 벼꽃이 핀 후 출수기 이후의 논이 붉은색이다. 황금벌판이 아니라 붉은 벌판으로 비치게 된다. 대가 약해 잘 쓰러지니 키우기 어렵지만, 맛은 선호도가 굉장히 높다. 지금도 화도만 주문하는 요리사가 꽤 있다. 2021년 12월 양평군이 연 토종쌀 식미평가에서 블라인딩 테스팅을 했을 때는 1위가 토종벼인 귀도였다. 참드림이라는 재배종은 2위, 3위는 토종벼인 천주도가 차지했다. 10년 동안 토종쌀의 여운이 오래가고 풍미가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다만 수확량이 적어서 농부가 싫어하기 때문에 고가라는 점을 들어 설득할 수밖에 없다.” -벼의 수매 가격도 낮은데 가능할까. “지금 말린 벼를 기준으로 1㎏당 1500~2000원을 준다. 우리가 농가에 드리는 건 3500~4000원이다. 수확량을 포기한 대가다. 1평당 5000원 이상은 보장해야 한다. 유기농으로 건강하게 지어 소비자도 건강하게 먹게 하려면 그 정도는 보장해줘야 한다. 화학비료로 환경에 해를 입히는 농사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농부를 대접해야 건강하게 농사지을 수 있다.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농사를 지으려는 게 농부의 기본태도이다. 비싸게 유기농벼를 사준다면 농부가 굳이 비료를 쓰며 재배종을 키울 필요가 없다.” -추천하는 토종쌀이 있다면. “북흑조를 제일 많이 권장한다. 씹을수록 포만감이 느껴지고 묵직한 맛이 난다. 맛도 뛰어난데, 경관용으로 재배해도 좋다. 4년 전 새로 발견한 품종인 한양조도 추천한다. 이름을 보면 궁궐에서 쓰지 않았나 싶다. 원래 궁궐 진상용으로 자색 빛이 나는 자광도가 유명한데, 한양조는 그에 버금간다. 귀도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제사에 쓰던 쌀이다. 차진 맛이 으뜸이고 식감 또한 좋다. 전남 장흥의 한창본 농부가 육종한 적토미와 이영동 농부가 육종한 멧돼지찰벼도 추천한다.” -토종벼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자기 씨앗을 갖는 게 중요하다. 농부는 죽을 때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고 했다. 씨앗을 이어서 심어야 한다는 뜻이다. 농사를 그렇게 배웠다. 토종이어야 이어서 심을 수 있다. 그게 토종을 하는 가장 큰 이유다. 내게 농부의 기준은 ‘당신 씨앗이 있느냐’이다.”
윤석열, PK 보수 복원 이뤄낼까?(2021. 11. 12 12:03)
2021. 11. 12 12:03 정치
ㆍPK ‘정권교체론’ 높아… 지역 연고성, 정치적 카리스마 약하단 평가도 2016년 12월 9일. 국정농단 사태는 국회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 가결로 이어졌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26년 동안 유지됐던 보수지형이 대격변기에 빠져드는 초유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5년 뒤 국민의힘은 윤석열 대선후보를 선출했다.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중형을 끌어낸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 출신이 제1야당의 정권 탈환 선봉에 서게 되는 아이러니다. 윤석열 후보는 보수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윤 후보를 선택한 보수세력의 눈길은 부산·울산·경남(부울경·PK)으로 향한다. 대구·경북(TK)과 함께 보수를 지탱해온 양대 축. 하지만 국정농단 사태 이후 ‘스윙보터’화가 진행 중인 곳이다. ‘윤석열’에 투영된 보수의 꿈이 일장춘몽일지, 현실이 될지는 PK의 선택에 달렸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지난 7월 27일 부산 중구 자갈치시장을 방문해 랍스터를 들어 올리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흔히 PK로 통칭되는 부울경 지역은 과거 ‘야(野)도’의 중심으로 인식됐다. 두 번의 독재정권이 PK의 저항으로 무너졌다. 경남 마산의 3·15의거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고, 이승만 정권의 종언을 고했다. 1979년 부마 민주항쟁은 박정희 유신체제가 막을 내리는 단초가 됐다. ‘김영삼(YS)’이라는 독보적인 야권 지도자도 보유했다. ‘87년 체제’ 이후 3당 합당으로 ‘보수의 전성기’를 연 곳도 PK였다. 13대 대선 때 노태우 대통령은 부산 32.10%, 경남 41.17%를 득표했다. 3당 합당 이후 치러진 14대 대선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부산에서 73.34%, 경남에서 72.31%라는 ‘몰표’에 가까운 득표율을 올렸다. 국정농단으로 붕괴한 ‘보수 텃밭’ 울산시가 1997년 경남도에서 광역시로 승격된 뒤 치러진 15대 대선부터 18대 대선까지 보수정당 후보들은 부울경에서 최소 55%에서 60%의 득표율을 보였다. 일찌감치 승부가 갈려 투표 열기가 낮았던 17대 대선 때도 이명박 대통령은 부산 57.90%, 울산 53.97%, 경남 55.02%를 득표했다.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다시 한 번 부울경이 ‘보수 텃밭’임을 각인한다. 18대 대선 당시 그는 부울경에서 60%가 넘는 득표율을 보였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PK 민심에 강력한 소구력을 발휘했다. 대선에 앞서 같은 해 열린 총선, 그가 순회하는 부울경 지역 후보는 5%포인트 이상의 지지율 상승효과가 있다는 것이 정설처럼 퍼졌다. 하지만 PK 보수의 운명은 ‘2막’을 연 박 전 대통령에 의해 극적으로 뒤바뀐다. 임기를 1년 앞두고 터진 국정농단 사태로 자멸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박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치러진 19대 대선에서 홍준표 후보의 부울경 득표율은 30%대. 이전 대선에 비해 거의 반토막 수준으로 무너졌다. 이어진 2018년 전국 동시지방선거에서는 사실상 궤멸했다. 부울경 광역단체장을 모두 잃었고, 지역 지방의회에서 다수당의 위치도 빼앗겼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지난 7월 2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 김영삼 대통령 기념관을 방문해 김현철 김영삼민주센터 상임이사와 기념관을 둘러보고 있다. / 연합뉴스 윤석열에 투영된 ‘보수의 꿈’ 절치부심하던 PK 보수진영의 선택은 ‘윤석열’이었다. 그가 30년 가까이 누렸던 PK 보수세력의 영광을 재현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가능성은 반반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일단 환경적 요인은 나쁘지 않다. PK에서 정권교체론은 일단 다른 지역보다 높게 나타난다. 리서치뷰 조사(지난 6~7일,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고)에서 부울경의 프레임 공감도는 ‘정권교체’가 63%로 ‘민주당 재집권’(28%)보다 배 이상 높았다. 전국적으로는 정권교체 56%, 민주당 재집권 33%였다. ‘조국 사태’가 오늘날 ‘정치인 윤석열’을 있게 한 것은 그가 PK 보수진영에 부각되는 가장 강력한 자산이다. 윤 후보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에 대한 전방위 수사를 밀어붙이며 여권과 충돌했다. 조 전 장관 후임인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과의 ‘추·윤 갈등’은 현 정권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달았다. 현 여권과의 분명한 대립각이 필요했던 보수진영은 환호했다. 이른바 ‘반문(반문재인)의 기수’면서 기성 정치권에 몸담지 않은 ‘거물급 신인’이 등장한 셈이다. 윤 후보도 반문 이미지를 십분 활용한다. 그는 지난 5일 국민의힘 대선후보 수락 연설에서 “저의 경선 승리를 이 정권은 매우 두려워하고, 뼈아파할 것이다. 조국의 위선, 추미애의 오만을 무너뜨린 공정의 상징”이라고 주장했다. 또 “문재인 정권의 정당성을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아픔”이라고 자칭했다. 그가 과거 보수 후보들과 마찬가지로 국민의힘 PK 의원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도 PK 보수 복원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 예측하는 근거다. 하지만 회의론 역시 적지 않다. 그에게서 박 전 대통령이 갖춘 강력한 정치적 카리스마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가졌던 ‘성공신화’나 청계천 복원으로 대표되는 행정 성과 등 ‘스토리텔링’이 어렵다는 점도 불안 요인으로 꼽힌다. 지역적 연고성이 약한 것도 영남 출신이었던 두 전직 대통령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특히 과거와 같은 탄탄한 PK 기반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대선을 치러야 하는 것도 윤 후보로서는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역대 보수 대선후보들이 PK에서 과반의 득표를 할 수 있었던 데는 3당 합당으로 형성된 강한 보수 지형이 토대가 됐다. 하지만 국정농단 사건 이후 치러진 선거에서 PK의 보수 기반은 수차례 무너지거나 흔들리는 현상을 보였다. 회복의 가능성을 보인 것은 지난 4월 부산시장 보궐선거. 국민의힘 소속의 박형준 부산시장은 이 선거에서 62.67%의 득표율을 올렸다. 하지만 부동산 민심 이반이 강타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런 표심이 일회성일지, 연속성을 가질지는 예단하기 어렵다는 분석도 많다. 국민의힘 지도부가 호남 공략에 적극성을 보이는 것도 PK에서 과거와 같은 득표력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과 무관치 않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2012년 대선에 주목했다. 이 대표는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양자대결로 팽팽하게 붙었는데, 그때 박 전 대통령이 PK에서 올린 득표율이 60% 정도”라며 “윤 후보가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당시 박 전 대통령이 가진 카리스마와 PK 동원력을 갖기는 쉽지 않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갈수록 지역주의 투표 성향이 약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가 취약한 젊은세대나 호남지역으로 확대해 가야 한다”고 말했다.
표지 이야기
[표지 이야기]영남 보수 복원이냐, 스윙보터 유지냐(2021. 03. 26 13:00)
2021. 03. 26 13:00 정치
ㆍ부산 선거는 부울경의 바로미터… 결과 따라 차기 대선판 출렁 4·7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 돌입한 이후 유독 부산이 시끄럽다. 더불어민주당 중앙당 선거대책위원회가 연일 부산을 찾는 것은 물론, 문재인 정부 장관 출신들도 민주당 김영춘 부산시장 후보 선대위에 합류했다. 국민의힘도 경남과 울산 현역 의원들이 박형준 부산시장 후보 지원에 나서 힘 싸움에 밀리지 않을 태세다. 애초 부산시장 선거만 열릴 예정이었던 4·7 보궐선거에 대한 관심은 낮았다. 이후 서울시장 선거가 겹치면서 판이 커졌고, 국민의 이목도 ‘수도의 승부’에 맞춰졌다. 그런데 막상 후보가 선출되자 여당은 부산에 물량을 퍼붓고 있고, 국민의힘도 경남·울산 세력까지 가세해 전면전을 벌이고 있다. 부산의 표심은 PK로 명명된 부산·울산·경남(부울경)의 표심과 연동된다. 2022년 3월 차기 대선에서 재집권과 탈환을 노리는 여야로서는 물러설 수 없는 지역인 셈이다. 지난 3월 17일 부산 연제구 더불어민주당 부산시당에서 이낙연 중앙선대위 상임선대위원장(오른쪽)과 김영춘 후보가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친노·친문 대 친이·친박계 격돌 민주당의 김영춘 후보 선대위는 대선 캠프를 방불케 한다. 강경화 전 외교부, 박능후 전 보건복지부, 도종환 전 문화체육부 장관이 특별고문으로 합류했다. 장관 출신들은 김 후보가 문재인 정부 초대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할 당시 국무회의를 함께한 멤버다. 부산에 연고가 있거나 인연이 있는 민주당 소속 의원들도 협력의원단을 구성해 김 후보를 돕고 있다. 의원단 규모만 40명에 달한다. 민주당 의석수의 3분의 1이 넘는 60여명의 의원이 부산시장 선거에 투입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중앙당 상임선대위원장인 이낙연 전 대표도 부산시장 선거에 올인하고 있다. 올해 들어 7번이나 부산행을 택하며 진두지휘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한 지붕 두 가족’이었던 과거 친이(친이명박)·친박(친박근혜)계가 박형준 후보 지원을 위해 의기투합했다. 친박계였던 서병수 의원은 부산선대위 상임선대위원장을 맡았다. 또 명예선대위원장에는 비박(비박근혜)·친이계였던 김형오·정의화 전 국회의장,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 권철현 전 주일대사 등이 포함됐다. 고문단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 당 사무총장을 지낸 안경률 전 의원이 위촉됐다. 국민의힘 부산시장 선대위의 또 다른 특징은 울산 4선 김기현, 경남 3선 김태호 의원 등 경남과 울산 의원들이 합류했다는 점이다. 국민의힘이 ‘텃밭’으로 인식하는 부울경 선거에서 상호간 협력 체제를 구축한 것은 이례적이다. 2016년 20대 총선 전까지 ‘깃발만 꽂으면 된다’는 등식이 30년간 유지됐기 때문이다. ‘40%+알파’ 대 ‘60% 회복’ 지난 3월 16일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오른쪽)이 박형준 부산시장 후보와 함께 부산 부산진구 부산국제금융센터(BIFC) 63층 전망대를 방문했다. / 연합뉴스 민주당의 부산시장 선거에 대한 물량 공세도 대선급이다. 전·현 정부에서 10년 이상 논란이 됐던 가덕도 신공항 건설을 중심으로 숱한 지역의 난제들을 일거에 해결할 기세다. 중앙당이 주도하는 네거티브 공세도 불을 뿜고 있다. 이번 선거는 민주당 소속 시장의 성비위 사건이 원인이다. 또 지난해 4월 21대 총선결과로 보면 이번 보선의 승패가 기울었다는 분석이 대세였다. 그런데 민주당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부산시장 선거에 집중한다. 이번 선거가 갖는 의미를 역대 대선결과와 연결해보면 민주당의 ‘큰 그림’이 드러난다. 노무현 정부 이후 민주당이 정상 전력으로 대선에 임한 것은 2012년과 2017년 대선이다. 2012년 대선 때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의 부산 득표율은 39.87%. 문 후보가 당시 전국 득표율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게 3.63%포인트 차로 패했지만, 턱밑까지 추격한 배경이다. 2017년 대선 때 문 대통령은 부산에서 5년 전과 비슷한 득표율(38.71%)을 올려 당선됐다. 차기 대선은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전력 손실 없이 맞붙을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민주당은 집권 연장을 위해 ‘부산 40%’를 마지노선으로 잡는다. 이는 PK에서 40% 득표율을 올린다는 의미다. 부울경 40%가 무너지면 인구 규모를 감안하면 다른 지역에서 메우기가 쉽지 않다. 전통적 대선 전략 복원도 부산으로 향하는 배경이다. PK 출신 후보(노무현·문재인)를 통한 보수 텃밭 공략과 호남·서울 전통적 지지층 결합은 민주당의 승리 공식이다. 그런데 차기 대선에서 PK 출신의 잠룡 출현이 불투명해졌다. 김경수 경남도지사는 ‘드루킹 사건(인터넷 댓글 조작 사건)’으로 운명이 불확실하고, 김두관 의원은 아직 존재감이 약하다. 지역의 ‘인물’이 불확실해진 만큼 여권의 물량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민주당의 ‘PK바람’이 다시 잦아질 수 있다는 위기감도 작용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씨를 뿌린 PK 공략은 2018년 지방선거 때 확실한 열매를 맺었다. 오거돈 민주당 후보는 과반을 득표해 민주당 정당사에서 처음으로 부산시장에 당선됐다. 그런데 2년 9개월이 지난 현재 지역 민심은 예사롭지 않다. 지난해 총선 때 민주당 득표율은 44.31%로 하락했고, 의석수도 6석에서 3석으로 줄었다. 또 총선 직후 터진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비위 사건으로 이번 보선까지 유발했다. 부산의 ‘도로 보수화’는 민주당으로서는 치명타다. 국민의힘 역시 부산시장 보선을 재집권을 위한 가늠자로 판단한다. 보수세력이 부산에서 마지막 전성기를 맞은 것이 2012년 총선과 대선이었다. 중심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있었다.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는 부산에서 59.82%를 득표했다. 박 후보는 앞서 열린 총선에서 자당 부산 후보들이 올린 평균 득표율(49.58%)보다 10%포인트 이상 높은 득표율을 보였다. 보수의 몰락도 부산에서 시작됐다. 2014년 지방선거 때 새누리당 서병수 부산시장 후보는 50.65%를 득표했다. 야권 무소속 단일 후보로 나선 오거돈 후보에게 불과 1.31%포인트 차로 진땀승이었다. 그리고 2016년 총선 때 새누리당은 48.08% 득표했다. 처음으로 부산 18석 중 민주당에 5석을 내주며 사실상 참패했다. 이후 2017년 대선에서는 ‘탄핵 바람’으로 자멸했다. 이듬해 지방선거에서 서병수 후보의 재선 도전은 허무하게 끝났다. 37.16%의 득표율로 민주당 오거돈 후보(55.23%)에게 18.07%포인트 차로 참패했다. 박 전 대통령이 올렸던 ‘부산 60% 확보’는 이번 시장 보선에서 국민의힘의 지상과제다. 이는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찢어졌던 PK와 TK(대구·경북)의 ‘영남 보수’ 재건을 의미한다. 지난해 총선에서 보수세력의 부활 가능성도 부산에서 엿보였다. 전국에서 참패한 미래통합당은 부산에서 15석 확보해 부울경 재탈환의 가능성을 높였다. 그리고 불과 1년 뒤 예상치 못했던 시장 보선까지 치르게 됐다. 국민의힘으로서는 영남 보수 복원의 절호의 기회를 맞았고, 울산·경남 정치권까지 가세하는 총력전에 나선 이유다. 부산시장 보선은 부울경이 ‘스윙보터’로 자리 잡느냐, ‘영남 보수가 복원되느냐’의 바로미터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시선은 자당의 김영춘, 박형준 부산시장 보선 후보 대결의 너머를 주시한다. 양 당이 부산에서 벌이는 전면전의 결과에 차기 대선판은 또다시 출렁일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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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남북건설협력사업](2)개성 영통사 복원사업- 불교 및 문화유산 교류의 거점 기대(2021. 03. 26 12:59)
2021. 03. 26 12:59 문화/과학
북한 개성 영통사 복원지원사업은 남북 불교협력과 문화유산 교류 두가지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먼저 남북 불교협력 측면에서 영통사 복원사업은 신계사 복원사업과 더불어 불교계의 대표적인 협력 사업이었다. 사찰 복원 후 매년 법회와 행사를 개최했고, 2010년 천안함 사태로 5·24 북한 투자제한조치가 내려진 뒤에도 2015년까지 교류를 지속했다. 개성 영통사 복원 후 전경 /천태종 나누며 하나되기 제공 문화유산 교류 측면에서 영통사 복원사업은 대표적인 사찰 복원사업으로 의의가 있다. 남북 문화유산 교류는 1988년 7·7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계기로 국내에서 검토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남북 문화유산 교류는 일본 연구자 중심인 아시아학회에서 개최한 1990년 3월의 학술대회였다. 이후 남북 문화유산 교류는 2015년 이전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확대돼 약 35개 사업이 진행됐다. 개성 영통사 복원지원사업은 남북 불교협력과 문화유산 교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남북관계 개선 시 영통사가 불교 및 문화유산 교류의 거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영통사 지원사업의 시작 영통사는 개성시 용흥동 오관산에 있다.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이 11세인 1065년 영통사에서 출가했고, 입적 후에는 이곳에 탑비가 건립됐다. 영통사는 왕과 왕비의 진영(초상화)을 모신 왕실의 원찰로 매우 중요한 사찰이었으며, 조선 초기에도 개성의 대표적인 사찰이었다. 개성 영통사 복원 전 모습 / 한국학 중앙연구원 영통사는 1995~1996년 북한 대홍수 당시 절터를 덮고 있던 토사가 쓸려가며 흔적이 드러났다. 영통사 발굴조사는 김정일 위원장이 현장을 직접 방문하며 전국적인 사업이 됐다. 연 3만명이 동원됐으며 일본 다이쇼대학도 참여했다. 북한은 영통사 발굴 작업과 더불어 복원을 추진했다. 1999년 11월 북한 중앙통신은 영통사의 복원설계를 끝냈다고 발표했다. 복원설계에 따르면 영통사는 약 4만㎡의 부지에 고려시대 사원 건축술을 구현한 수십동의 건물을 짓는 것으로 기본 사찰지구, 동북 무덤지구, 서북 건축지구 등 세 구역으로 나눠 복원되며 사찰의 총 건축 면적은 약 2800㎡에 달했다. 국내 불교계는 의천이 개성 국청사에서 천태종을 개창했다고 주장하지만 북한은 영통사를 천태종 발원지라고 주장했다. 의천이 1065년 출가해 이 사찰에서 35년간 승려생활을 하며 천태종을 창시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1998년 5월 영통사 복원에 한국 천태종의 지원을 요청했다. 지원 요청은 재일동포 최준씨와 조총련 부의장 김수식씨를 통해 천태종 총무원장인 전운덕 스님에게 전달됐다. 천태종은 구두로 지원을 약속하고 현지답사를 제안했다. 북측은 천태종의 현지답사 제안을 승인했으며, 2000년 11월 천태종 스님, 신도 대표, 학자 등 13명이 방북해 현장조사와 복원을 협의했다. 개성 영통사의 중심 건물인 보광원에 모셔진 부처상 /천태종 나누며 하나되기 제공 북측은 영통사 복원을 추진하던 중 자재 부족 등으로 복원을 중단한 상태였다. 천태종과 북측은 영통사 복원지원 여부와 성지순례 등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했지만, 지원 방식(천태종은 현물지원을 하려고 했으나 북측은 현금지원을 요구)에 대한 이견으로 합의에 실패했다. 영통사 복원지원 관련 협의는 중국 베이징에서 2003년 4월 재개됐다. 양측은 2003년 8월 5일 베이징에서 한국 천태종이 북측에 기와 40만장을 지원한다는 합의서를 체결했다. 다만 복원공사 과정에서 몇가지 아쉬운 점들이 보였다. 먼저 영통사가 문화재급 사찰임에도 콘크리트로 복원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복원은 목재가 아닌 콘크리트 구조로 진행됐으며, 공정은 기둥과 벽체, 골조공사를 진행했다. 이것은 문화재 복원 소재에 대한 남북의 인식 차이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는 당연히 문화재를 전통 재료와 전통 방식으로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1세기 전만 해도 문화재 복원에 현대적 재료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국제적으로 긍정적 의견이 많았다. 북한 또한 콘크리트로 문화재를 복원하는 것에 문제의식이 없는 것으로 보이며, 많은 문화재를 콘크리트로 복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향후 남북 문화유산 교류 시 이러한 인식차 극복은 중요한 과제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영통사 복원에서 또 하나 아쉬운 점은 복원 시 고증의 정확성 여부다. 영통사 전각의 양식, 규모, 단청 등에 대한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복원설계가 단기간에 이루어졌으므로 원형에 가깝게 복원됐다고 확신하기 어렵다. 복원 지원사업의 과정 베이징 합의에 따라 기와의 최초 지원은 2003년 10월 27일로 결정됐지만 운송 방법을 두고 난항을 겪었다. 북측은 기와를 해로로 인천에서 남포로 운송한 후 다시 육로로 개성으로 운송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천태종은 해상 운송 후 다시 육상 운송을 하면 여러 번 옮겨 실으면서 기와가 훼손될 수 있고, 비용과 시간도 많이 소요되므로 육로를 통한 운송을 주장했다. 영통사 5층 석탑/천태종 나누며 하나되기 합의는 쉽지 않았으나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육로 운송을 지시하며 육로를 통해 2003년 10월 27일 최초로 기와 10만장을 지원했다. 연이어 11월 2차, 12월 3차 지원을 통해 총 26만장의 기와가 지원됐다. 그러나 4차 지원 준비 중 북측에서 기와를 영통사 복원 현장이 아닌 개성공단에 하역하고 돌아가라고 통지했고, 천태종이 동의하지 않아 4차 지원은 중단됐다. 이후 현장까지 운송하는 것으로 합의하고 2004년 2월 다시 지원을 시작했다. 2004년 3월 26일 영통사 29개 전각을 위한 46만장의 기와 지원이 완료됐다. 천태종은 2004년 6월까지 단청 재료도 추가 지원했다. 단청은 전문성이 요구되는 공사이므로 북측은 건축과 미술 전공 대학생 600명을 동원해 공사를 진행했다. 2004년 4월 11일 북한 용천역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천태종은 성금을 모금해 의료, 생필품 등을 지원하기도 하며 남북 간 신뢰를 높여나갔다. 이는 불교계가 단순히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이유로 사찰 복원사업을 벌이는 것이 아닌 평화적인 남북경협과 민간 차원에서의 인도적 교류라는 근본적 목적을 잊지 않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영통사 건축자재 전달식 모습 / 천태종 나누며 하나되기 제공 단청 지원 후 복원공사가 마무리에 접어들자 천태종은 건축 마감재 및 중장비 지원을 결정했다. 이는 향후 남측 신자들의 성지순례를 위한 도로공사까지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 장판, 창틀, 유리, 타일, 변기 등 건축자재와 더불어 불교예불 도구 및 집기 등 사찰운영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이 지원됐다. 불상은 북측에서 제작했는데 동불로 제작될 예정이었으나 용천역 폭발사고의 영향으로 석고로 제작했다. 개금(불상에 금을 덧씌우는 것)을 위한 재료는 천태종에서 지원했다. 복원공사지원은 2003년 10월 1차 지원부터 2005년 3월까지 총 16차에 걸쳐 시행됐다. 영통사 복원이 마무리돼 가던 2004년 11월에는 남북이 공동으로 ‘대각국사 열반대제’를 봉행하기도 했다. 2005년 10월 영통사 29개 전각의 복원공사가 마무리됐다. 1997년 유적조사를 시작한 후 8년 만이었다. 지원에 들어간 비용은 자재비, 인건비 및 운송비를 포함해 약 150억원에 달했는데 비용은 대부분 모금을 통해 마련했다고 한다. 영통사 낙성식은 2005년 10월 31일 열렸다. 낙성식에는 천태종을 중심으로 남측에서 300여명이, 북측에서는 조선불교도연맹 등 복원공사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낙성식 후에는 학술대회가 개회됐다. 영통사 복원공사 준공(낙성) 전 남북불교 교류는 부정기적이고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준공 후부터는 매년 정기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규모와 질도 달라졌다. 2007년 5월 29일 성지순례 시범사업이 시행됐으며, 성지순례는 총 8회에 걸쳐 6000여명이 참여했다. 성지순례 외에도 매년 영통사에서 부처님 오신 날, 대각국사 열반대제 등 불교 행사를 남북공동으로 열었다. 이 행사는 2009년 이후 악화된 남북관계에도 불구하고 2015년까지 지속됐다. 성과와 전망 변상욱 건축사 영통사 복원사업은 남북이 협력해 문화유산을 복원한 최초의 사례이며 민간협력사업에서 대규모 물품을 육로를 통해 지원하는 계기가 된 사업이기도 하다. 영통사 복원사업은 북측이 발굴, 복원설계 및 복원공사를 주도했고 남측은 건축자재, 장비 등을 지원했다. 향후 남북 문화재 공동 복원사업이 이루어지는 경우 북측이 주도하고 남측이 물자를 지원하는 방식이 주가 될 가능성이 커보여 영통사 복원지원사업은 중요한 사례가 될 것이다. 영통사 복원지원사업의 또 다른 중요한 의의는 건물 준공 후에도 지속적인 남북교류를 했다는 점이다. 2009년 이후 남북관계의 어려움으로 남북경협 및 인도적 지원이 대부분 중단된 상태에서 2015년까지도 교류의 명맥을 유지했다, 남북 불교 교류는 향후 남북관계 개선에 상당한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다시 보는 남북건설협력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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