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47 건 검색)
- 서울시, 봉제·금속·인쇄 등 ‘도시형 소공인’ 사회안전망 구축에 750억 투입
- 2023. 08. 22 11:19지역
- ..., 화재보험·사회보험 가입 지원 등에 5년간 총 750억을 투입한다고 22일 밝혔다. 지원 대상은 의류·봉제, 기계·금속, 주얼리, 인쇄, 수제화 5대 업종으로 상시 근로자 10인 미만인 곳이다. 현재 제조업...
- 보석·의류봉제·기계금속·수제화·인쇄…한우물 장인들 “후배 키워 기술 전수”
- 2022. 12. 15 21:53지역
- ... 우수숙련기술인’ 18명을 선정했다고 15일 밝혔다. 송씨를 비롯한 기술인 18명은 주얼리·의류봉제·기계금속·수제화·인쇄 등 분야에서 짧게는 15년, 길게는 50년 가까이 일해 왔다. 수상자들은...
- [서울25]강북구, 폐현수막 마대로 재활용해 봉제업계 지원
- 2022. 11. 08 16:39사회
- ... 만든 마대를 전달하고 있다. |강북구 제공 버려지는 폐현수막을 서울 강북구가 마대로 재활용해 봉제협회에 지원한다. 강북구는 환경부에서 받은 인센티브로 이같은 재활용 사업을 추진한다고 8일 밝혔다....
- 강북구마대폐현수막이순희
- [서울25]봉제객공도 근로자…성동구, 전국 최초로 ‘봉제 경력인증제’
- 2022. 11. 03 11:34사회
- ... 실력을 인증하기 위해 성동구가 전국 최초로 시도하는 것이다. 봉제 경력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동료 봉제인 3명의 보증과 경력사항을 기술한 신청서를 제출하는 서면심사와 공업용 재봉틀(본봉) 등으로...
- 성동구경력인증봉제객공정원오
스포츠경향(총 12 건 검색)
- 서울 성동구, 의류봉제 마케팅 교육 나서···생산에서 판매까지 척척!
- 2024. 11. 01 20:52 생활
- 서울 성동구 서울 성동구(구청장 정원오)는 8일부터 4주간 봉제인 역량 강화 및 봉제산업 활성화를 위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활용한 마케팅 교육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구는 매년 손패턴 교육, 캐드(CAD) 교육, 특종장비 수리 교육 등 다양한 봉제 전문인력 양성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올해는 관내 의류 봉제 종사자를 위한 캐드(CAD) 패턴 교육,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활용한 마케팅 교육을 새롭게 실시한다. 교육은 8일부터 29일까지 성동스마트패션센터(왕십리로21나길 5, 4층)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진행되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이해와 숏폼 콘텐츠 제작 등 마케팅 역량 강화를 위해 소상공인 전문 교육기관 ‘5초 광고’의 박수화 대표가 강사로 나선다. 생산한 상품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직접 게시하여 판매까지 원스톱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교육함으로써 봉제 시장 판로개척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줄 것으로 기대된다. 서울 성동구 구는 6일까지 선착순 20명 이내로 봉제인 및 관련 취·창업자 등 교육생을 모집하며, 수강 신청은 성동구청 누리집(홈페이지) 신속예약을 통해 하면 된다. 구는 2021년 4월부터 패션‧봉제 관련 영세업체에 창업과 협업을 지원하는 공간으로 성동스마트패션센터를 운영 중이다. 지난해 11월에는 왕십리도선동에서 행당동으로 시설을 확장해 이전 했다. 이전한 성동스마트패션센터에는 자동재단을 지원하는 공용재단실을 비롯해 전시와 판매, 교육이 가능한 다목적 공간과 제품 촬영 시설을 갖춘 창작스튜디오가 조성돼 패션·봉제 분야 창업과 협업을 위한 거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정원오 성동구청장은 “이번 봉제인 마케팅 교육이 봉제 역량 강화는 물론 봉제 시장 활성화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라며, “앞으로도 양질의 교육 프로그램 운영, 의류제조업의 스마트화 등 봉제산업 발전을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밝혔다.
- 자우림·실리카겔·김뜻돌·봉제인간 ‘2022 인천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2차 라인업
- 2022. 06. 07 17:00 연예
- 오는 8월 5일부터 7일까지 인천 송도달빛축제공원에서 개최가 될 ‘2022 인천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이 2차 라인업 발표와 함께 행사 전 마지막 할인티켓 판매에 들어갔다. 인천시가 주최하는 인천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은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에 따라 3년 만에 대면으로 관객을 맞이한다. 지난 달 12일 판매된 블라인드 티켓 3000장과 20일 1차 라인업 공개 후 판매된 얼리버드 티켓 7000장이 발매 즉시 매진되는 등 사전예매티켓 1만장이 전량 매진되며 큰 관심을 모았다. 새롭게 공개된 2차 라인업에는 TV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OST로 큰 사랑을 받으며 데뷔 25주년을 맞이한 자우림과 실리카겔, 김뜻돌, 봉제인간 등이 이름을 올렸다. 앞서 1차 공개된 출연진에는 2020년 그래미 어워드 ‘Best Alternative Music Album’을 수상한 뱀파이어 위켄드, 한국계 미국인 미셸 조너의 재패니즈 브랙퍼스트 등 해외 밴드를 비롯해 국내 대표 모던 록밴드 NELL, 잔나비 등 국내외 최정상급 아티스트들이 포함됐다. 출연이 추가되는 해외팀 3차 라인업은 이 달 중순 전후 발표될 예정이다. 신예 아티스트 발굴 프로그램 ‘펜타 슈퍼루키’도 현재 참가 밴드 모집 중이다. 오는 10일까지 접수 가능하며, 수상팀은 상금과 함께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서드무대 공연 기회가 주어진다.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마지막 할인티켓인 마니아티켓은 지난 3일부터 한정수량으로 판매되고 있다. 정가 대비 10% 할인가로 구매 가능하며 KB국민카드 결제 시 5% 추가 할인혜택이 제공된다. 인터파크, 티켓링크에서 구매할 수 있다. 인천관광공사와 경기일보가 공동주관하는 공연 정보는 인천펜타포트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하면 된다.
- 실리카겔김뜻돌봉제인간자우림
- 무봉제 접합 보온성↑ 미즈노골프, ‘소프트 스윙 다운’ 공개
- 2021. 10. 28 09:58 생활
- 미즈노골프가 본격적인 가을 라운딩 시즌을 맞아 ‘소프트 스윙 다운’을 27일 공개했다. 소프트 스윙 다운. 미즈노골프 제공무봉제 접합의 ‘웰딩(Welding) 공법’이 특징인 이번 소프트 스윙 다운은 일반 봉제 퀼팅이 아닌 고온의 접합 방식을 활용해 바람이 들어올 틈이 없는데다 깃털 빠짐 현상인 삼출 현상도 거의 없는 것이 장점. 일반 다운보다 공기의 함유량이 높아 보온성이 뛰어나다는 것이 미즈노골프의 설명이다. 여기에 5중 레이어 구조로 착용감이 편안한 것은 물론 발열 안감을 더해 보온성을 극대화한 것도 강점. 웰딩 다운 재킷은 등판의 패널 작업으로 움직임이 자유롭고 옆 라인은 스트레치성이 좋은 소재를 믹스해 스윙 시 불편함을 줄였다. 미즈노골프 관계자는 “짧은 기장과 사선으로 처리한 웰딩 라인은 경쾌하면서도 역동적인 분위기를 더해 일상에서 착용하기도 좋다”고 강조했다.
- 미즈노
- 문화공간 합작 10월 같이의 가치 ‘가야금 연주자 이민영-유대봉제 백인영류 산조’ 온택트 공연 개최
- 2021. 10. 22 20:26 연예
- 문화공간 합작(合作)에서 2021 상생 프로젝트 온택트 아트 콘서트 ‘같이의 가치’ 10월 출연진으로 선정된 가야금 연주자 이민영의 ‘유대봉제 백인영류 가야금 산조’가 오는 27일 오후 5시에 공개 된다. 10월 아티스트로 선정된 가야금 연주자 이민영은 고 백인영 명인의 제자로 현재 유대봉제 백인영류 보존회 호남지회 회장 과 예랑가야금앙상블, 청람가야금연주단 대표 등 많은 연주 활동을 하고 있다. 또 우수한 실력을 인정받아 제28회 전국전통공연예술경연대회 명인부 종합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 하였다. 공연프로그램 ‘유대봉제 백인영류 가야금 산조’는 가락의 변화를 강조하면서도 화려하고 즉흥적인,다른 유파와 상이한 맛을 자아낸다. 순간순간 “조”를 바꿔 다채로운 음을 구성하고 진계면 또한 남도소리의 恨(한)을 그대로 옮겨 놓았으며 끝부분 경드름 에선 경기 맛을 시원하고 깔끔하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10월 ‘같이의 가치’ 온택트 공연영상은 27일 오후 5시 리버원컴퍼니 네이버 TV와 유튜브 채널 그리고 에스엔제이스튜디오 유튜브 채널에 만나볼 수 있다.
- 가야금. 유대봉제이민영
주간경향(총 2 건 검색)
- [골목내시경]창신동엔 얼마나 많은 봉제공장이 있을까?(2019. 05. 10 17:17)
- 2019. 05. 10 17:17 사회
- 봉제협회나 인근 부동산에 물어봐도 대답은 한결같이 “잘 모른다”는 한마디. 그 많은 집들이 살림집과 공장 구분 없이 밀집돼 있기 때문이다. 대략의 셈법으로 대강 900여개 정도가 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창신동 봉제골목에는 약 900여개의 봉제관련 공장들이 밀집해 있다. 동대문 바로 옆 낙산을 따라 오르는 성곽이 있다. 성곽 바깥 비탈을 따라 촘촘히 이어진 골목이 창신동 봉제골목이다. 한때 국내 의류시장 7할이 동대문과 남대문 일대에서 팔렸고 그 옷의 상당량이 창신동 봉제골목에서 만들어졌다. 지금도 골목을 따라 걸으면 미싱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노찾사’의 민중가요 <사계> 중 봄의 노랫말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가 생생한 길이다. 옷 만드는 공장마다 오토바이가 옷짐을 부지런히 실어나른다. 한류의 한 부분으로 국내 패션산업의 중심에 선 동대문 의류시장은 한국전쟁의 산물이다. 전쟁 이후 구제품 옷시장이 열렸고 그 뒤를 평화시장 등 봉제공장이 뒤따랐다. 피난민들이 낙산 비탈에 판잣집을 지어 이뤄진 동네가 창신동이고, 평화시장 일대 봉제공장들이 정비된 후 창신동 주택가로 확산됐다. 그러니 지금의 봉제골목은 현대사의 산물인 셈이다. 봉제골목은 도시재생사업으로 새 옷을 입기 시작했다. 창신동엔 대체 얼마나 많은 봉제공장들이 있을까? 봉제협회나 인근 부동산에 물어봐도 대답은 한결같이 “잘 모른다”는 한마디. 그 많은 집들이 살림집과 공장 구분 없이 밀집돼 있기 때문이다. 더러는 방 하나에 공장 하나가 있을 정도로 창신동의 공장 수는 정확한 통계가 없다. 대략의 셈법으로 대강 900여개 정도가 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골목에 자리잡은 이음피움 봉제역사관 골목길가 열린 문 사이로 바삐 일하는 모습이 흔히 보인다. 창신동에서 보기 힘든, 간판 달린 공장 주인은 이 바닥에서 일한 지 38년이 됐다고 했다. 그는 “17살 때 고등학교 떨어지고 집에서 욕만 먹다가 서울로 야반도주했다. 친구를 찾아갔는데 이쪽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옷 일을 했으니 꼭 38년째”라고 말했다. 쪽잠을 자며 재봉 보조로 바닥 일을 배우다가 기술자가 됐다고 했다. 그런 후에도 남의 공장을 전전하며 옷 한 벌에 얼마씩 받는 객공으로 떠돌다가 하청공장을 연 지 10년이 됐단다. 늘그막에 떠돌이 신세는 벗었지만 봉제일이 좋던 꽃피던 시절은 이미 끝나버린 뒤였다. 동대문과 남대문 일대 의류 공급처 창신동 봉제골목 사람들의 사정은 대부분 비슷했다. 고향을 떠나 기술 배우는 일을 몸으로 익히고 남의 눈치 봐가며 품삯 일로 청춘을 보냈거나 노동이 천대받던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머리에 하얀 서리를 얹은 채 아직도 동대문 의류시장에 기대 사는 이들은 대부분 혹독했던 평화시장 다락방을 경험했던 사람들이다. 그래도 그 어려웠던 때를 견뎌낸지라 봉제골목에 자기 가게를 열 수 있었다. 봉제골목의 상징 중 하나인 전태일재단 그런 사정으로 창신동 봉제골목 어귀에는 전태일재단 건물이 있다. 지금 전태일재단 건물에는 풍물학교 수강생을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 있고, 인근 학생들의 방과후 공부방이 열리고 있었다. 젊은 전태일이 꿈꿨던 노동 존중의 시대로 가는 길은 현재진행형이고, 적어도 노동법을 읽는다고 빨갱이 딱지를 붙이는 시대는 끝났다. 전태일재단 인근 창신동 647번지 일대는 낙산 비탈길 중에서도 봉제공장이 가장 밀집해 있는 골목길이다. 비교적 산비탈 초입에 있어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20년 남짓 된 다세대주택들이 줄지어 있고 지층과 1층은 대부분 공장이 들어서 있다. 이 지역 봉제공장은 일대에서도 규모가 큰 편이다. 골목에서 원단을 내리던 이는 “여기는 차가 들어올 수 있어 큰 일거리를 다루는 공장이 많다. 여기서 또 작업에 따라 일거리들이 이리저리 흩어진다. 작은 일은 집에서도 하고 그런다”고 했다. 봉제골목의 주역인 소규모 가내공장 최근 창신동 일대는 도시재생사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어 동네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을씨년스럽던 공장지대가 아니라 멋을 내 통일된 간판도 달려 있고, 곳곳에 시각디자이너들의 손길이 드러나 있어 한결 밝아졌다. 골목 어귀에 창신동 봉제 일의 개념도도 걸려 있고, 계단에는 동시도 적혀 있으며, 벽에는 산뜻한 칠과 그림이 그려져 있다. 봉제 관련자뿐 아니라 사회적 기업과 도시재생사업팀이 여러 가지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몇 해 전만 해도 이 일대는 뉴타운 개발 예정지역이었다. 골목마다 부동산이 들어섰고 투기붐이 휩쓸고 갔다. 무허가 건물들도 집값이 치솟았다. 아파트가 들어서고 모두 한몫 잡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던 반면, 살던 곳에서 밀려나길 두려워하는 저항도 공존했다. 단춧구멍 작업을 한다는 이는 “여기가 동대문 지척이라 봉제 일 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여길 떠나면 일을 접어야지 어디 가서 이만한 자릴 다시 잡겠나”라고 했다. 집을 가진 이와 그렇지 못한 사람, 아파트가 들어서길 바라는 무리와 일자리를 지키려는 이들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벌이곤 했었다. 가게 주인은 “여기저기 현수막도 많이 걸리고, 부동산 업자랑 실랑이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업성을 이유로 창신동 숭인동 일대 뉴타운 사업은 2013년에 해제가 됐다. 이 지역에서 가장 흔한 일손 구하는 전단 대안정비사업과 도시재생사업 진행 중 지금 이 일대는 대안정비사업과 도시재생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아파트를 짓는 부동산 개발 일색의 사업에서 지역 특성을 살린 정비사업으로 방향을 튼 대표적인 사례가 창신동 일대의 정비사업이다. 그리고 봉제산업을 주제로 재생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골목길에 2018년 문을 연 이음피움 봉제역사관도 그 성과 중 하나다. 한껏 멋을 낸 새 건물에 봉제작업실과 역사관, 카페까지 들어서 있다. 골목길을 걷다보면 벽에 이 일대 봉제산업의 대강을 정리한 안내판도 붙어 있다. 골목을 거리박물관으로 꾸며 곳곳에서 봉제 일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뉴타운 사업은 무산됐지만 마을 분위기가 새로워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차츰 정비되는 분위기지만 아직 봉제골목 곳곳에는 예전 난개발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가파르고 좁은 골목길, 오직 사람의 두 발로 지나야 하는 실핏줄 같은 길들이 있다. 열린 문 사이로 실밥을 뜯는 모습도 보이고, 뭔지 모를 작업에 바쁜 모습도 볼 수 있다. 가내공장 주인은 “옷 한 벌에 수백 사람의 손이 들어간다. 주머니 만드는 사람은 주머니만 만들고, 단춧구멍 뚫는 사람은 단춧구멍만 뚫는다. 그것도 옷 종류마다 처리하는 공장이 다 다르다”고 설명했다. 다 전문분야가 따로 있어서 한 공정을 마치면 그 다음 공정으로 넘어가 이 일대가 유기적으로 함께 움직인다고 했다. 옷에 따라 다르지만 대강의 과정은 옷을 디자인하고 원단을 정해 설계하는 패턴, 그대로 천을 자르는 재단, 재단된 원단을 재봉틀로 이어 붙이는 재봉, 각종 부자재를 달고 주머니를 만드는 마무리, 완성된 옷을 다림질하고 실밥 등을 제거하는 완성의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일의 단계마다 공장의 위치와 일하는 시간대가 달라진다는 사실도 색다르다. 창신동 초입과 큰길가에는 주로 패턴 가게들이 보이고, 골목길로 접어들면 재단공장, 그 주변에 봉제공장들이 있고, 좀 더 깊은 곳에 마무리와 완성 공장들이 있었다. 공정이 진행되는 시간에 따라 완성 공장들은 앞 공정이 다 끝난 후 일을 받아 늦은 오후부터 시작해 새벽까지 작업을 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옷들이 새벽시장으로 나갔다. 현장에서는 아직도 미싱이며 ‘마도메’, ‘시아게’ 같은 일본말이 통용되고 있어 일하는 이들의 언어는 쉽게 알아듣기 힘들다. 요새 경기는 어떻냐고 묻자 “한 3분의 1 정도로 줄어든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원인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의류 바닥 분위기가 위축된 것은 사실인가 보다. 그런데도 골목마다 미싱사 하청 객공팀, 보조인력을 구하는 전단이 빼곡히 붙어 있다. 일이 줄어들어도 공정과 손을 줄일 수는 없고, 늘 일손이 들고 나는 것이 이 바닥 사정이란다. 숙녀복 전문이라는 공장 주인은 “사람마다 솜씨가 천차만별이다. 공장일도 늘었다가 줄었다가 대중이 없다. 디자인 하나가 터져 불티나게 팔리면 일도 밤낮 없이 바빠지고, 안 나가면 망하는 게 현실이다. 재단사는 가위에 자 하나 들고 떠돌고, 미싱사도 일 없으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것이 여기 생리”라고 들려주었다. 공장 임대 안내판과 사람 구한다는 간판이 함께 붙어 있는 것이 봉제골목의 현실이었다. 쉼 없이 들리는 재봉틀 소리에 숙연 비탈길과 골목 사이사이를 원단이며 옷짐을 싣고 달리는 오토바이가 창신동의 또 다른 주인들이다. 제 키를 두 배쯤 넘긴 짐을 싣던 오토바이 짐꾼은 “여기서 시장으로, 또 만리동이나 용두동까지 공장으로 짐을 나른다. 거래처마다 시간 지켜 물건을 전해주는 게 생명”이라고 했다. 고정 거래처들이 있고 공정마다 옮겨야 해서 일은 많다고 한다. 수입을 묻자 “생각보다 많이, 벌만큼 번다”며 웃음으로 답했지만, 수없이 많은 공장들을 시간에 맞춰 벅찰 만큼 짐을 싣고 비탈과 골목 사이사이로 누벼야 하는 일은 겉보기에도 쉽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오토바이는 자주 망가지고, 급히 오가다 보면 딱지 끊는 일도 많으며, 한 번 다치면 몇 달을 누워 있어야 하니 적게 벌어서는 버틸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길이 좁고 비탈질수록 오토바이 일꾼이 더욱 빛났다. 일은 줄었지만 일손까지 줄일 수는 없어 창신동 일대에도 외국인 노동자들이 늘고 있다. 고도의 기술이 필요 없는 단순 일자리에 중국인과 네팔 등 동남아 일꾼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그들은 한 사람이 자리를 잡으면 친지들이 따라 들어온다고 했다. 게다가 창신동 일대 싼 방값도 이주노동자들을 불러들이는 요인이다. 중국 가게에서 물건을 사던 이는 “고시원에서 살 돈이면 살 만한 방을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시장골목과 빨래방에서도 이주노동자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창신동 비탈길을 한창 오르다 보면 낙산공원이 나온다. 잘 정비된 낙산공원에서 서울 장안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쉼 없이 살아가야 하는 비탈 마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정경이 펼쳐진다. 비탈을 오르던 피로는 정상의 풍광이 보상했다. 비탈에 선 나무들은 굽어 있고 힘겹게 뿌리를 내리는 법이다. 골을 거슬러 오르는 바람을 견뎌야 하고 위태로운 경사에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세월을 지내온 봉제골목의 사람들도 그런 비탈길을 지나쳐 왔을 것이다. 경사진 골목에서 엿본 노동과 삶은 장엄하고 거룩했다. 창신동 봉제골목의 비탈진 길을 걸으면 쉼 없이 들리는 재봉틀 소리 앞에서 숙연해진다. 사는 일에 지칠 때 낙산 경사진 골목길을 한 번 더 걸어야겠다.
- 골목 내시경
- [인생도처유상수 객공(하청 봉제기술자)]몸이 아닌 마음에 맞추는 옷을 만든다(2017. 05. 02 15:19)
- 2017. 05. 02 15:19 사회
- 객공들은 남의 옷을 짓는 이들이다. 그저 옷 뒤에 숨어 한 땀의 바느질로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때문에 오직 실력만이 그 바닥에서 살아남는 힘이다. 지금처럼 전문적인 교육기관도 없던 시절이라 대부분의 객공들은 몸으로 배우고 경험으로 이치를 터득해야 했다. 을지로는 묘한 거리다. 서울 도심 한복판이면서 세련됨과는 거리가 있다. 조명가게와 철물점, 건축자재들을 파는 상가를 따라서 걷다 보면 을지로 4가쯤에 미싱상가가 나온다. 을지로와 청계천 사이 동네인 산림동, 집들은 낡았고 사람들은 아주 오래된 방식으로 일하고 있다. 한 건물을 들어서면 층마다 칸을 막은 작은 공장들이 있다. 낡아버린 건물 모습과는 달리 사람들은 바쁘게 일하고, 공간은 활기차게 살아있다. 재봉틀 소리가 들리는 문을 열자 양복을 꿰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속칭 객공 공장, 객공이란 노임을 받고 옷을 만드는 하청 봉제기술자다. 그 중 한 사람인 이철규씨. 그는 50년째 양복을 만든다. 재단가위로 머리 맞아가며 일 배워 “이젠 눈을 감고도 양복을 꿰맬 수 있습니다. 열일곱 살 때 기술을 배워서 스물한 살부터 객공밥을 먹었으니 참 오래됐습니다.” 충청남도 청양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세상 모르는 개구쟁이로 컸다. 목수였던 할아버지를 닮아 손재주가 남달라 어릴 적부터 동네에서 필요한 괭이자루며 호미자루는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잘한다는 칭찬이 즐겁기도 했고, 무엇인가 제 손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기쁘기도 했단다.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철없던 시절은 일찌감치 끝나고 말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고쳐 보겠다고 정신없이 사방으로 떠돌고, 형은 골 아픈 집안사정으로부터 도망치듯 군대로 가버렸다. 여덟 마지기 논농사는 오롯이 어린 그의 몫이 됐다. 같은 반 아이들이 가방을 들고 학교로 갈 때 그는 지게 가득 거름을 짊어지고 논으로 가야 했다. 논일이 끝나면 밭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창피해서 학교 가는 길을 멀리 돌아다녔습니다. 집에서 나갈 때나 돌아올 때 빈손으로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뭐든 지게에 져날라 가며 농사를 지었습니다.” 형이 제대를 하고 나서야 어린 농부를 졸업할 수 있었다. 먹고 살려면 기술을 배워야 했다. 선택지는 네 가지. 이발소와 중국집, 구둣방 아니면 양복점에 들어가 밑바닥부터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농촌 출신의 젊은이들이 대부분 겪어야 했던 일이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발소나 구두 일은 지금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양복기술을 배웠으니 평생 밥은 굶지 않고 삽니다.” 함께 구둣방에서 일하자는 친구의 청을 물리친 것은 양복점을 하던 친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소개로 일을 배우러 들어간 곳은 서울 염리동 양복점 공장이었다. 기술은 욕을 먹으며 배우고 맞아야 실수하지 않는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50년 동안 1만 벌 가까운 옷을 지은 양복 객공 이철규씨./김천 처음 들어가면 바지 만드는 조수 일부터 배우게 된다. 초짜 조수라도 결코 봐주지 않는 것이 그 바닥의 철칙이다. “무지하게 맞았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니 큰 재단가위로 머리를 맞아가며 일을 배웠습니다. 일이 바빠 잠은 작업대 위에서 자다가 굴러 떨어지기도 많이 했습니다.” 1960년대 말 그가 봤던 양복점 모습은 번창의 정점에 있었다. “하루에 양복 70벌을 만드는 곳도 있었습니다. 기술자 수십 명이 북적대면서 일하던 곳이 많았고, 아무튼 그 이후로는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조수로 1년을 꼬박 배우자 바지 일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고향의 양복점으로 돌아가 또다시 1년을 일했다. 조수 딱지를 떼고 준기술자로 일했는데 그와 함께 바지 만드는 기술자만 4명이 있었다. 읍내 양복점 치곤 꽤나 바빴지만 떠나야 할 일이 생겼다. 넷 중에 일을 제일 잘했는데도 직급을 올려주지 않았다. 양복점 주인은 자신의 동생만을 승급시켰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윗도리 일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뒤돌아보지 않고 다시 서울로 와버렸습니다.” 양복 일은 바지 만들기가 상대적으로 쉽고 윗도리는 공정도 복잡하고 훨씬 손이 많이 간다. 때문에 일종의 계급이 있어 상의 만드는 기술자가 임금도 더 많이 받는다. 그렇게 길을 들어서서 평생 바지만 만드는 사람도 있고 저고리만 만드는 이도 있다. 다시 2년을 조수로 일했다. 그리고 스물한 살부터 객공밥을 먹기 시작했다. 공장에서 생산하는 접착식 양복에 비해 수제양복은 그 과정이 복잡하다. 일단 디자인과 원단을 고르고 몸의 치수를 잰다. 치수에 따라 종이 위에 재단을 그려 자르고, 그 모양대로 원단 위에 재단선을 그어 옷감을 자른다. 여기까지가 양복점과 재단사의 손에서 이루어진다. 객공들에게는 재단된 옷감, 또는 옷본이 전달된다. 저고리와 바지를 대강 바늘로 꿰어 옷 모양을 만들어 가봉재한 옷을 입어보는 가봉 과정을 거쳐 다시 수정하면 옷을 만들기 위한 최종 재단이 결정된다. 이때부터 객공의 손이 움직인다. 상의 한 벌에 십만 번 이상 바늘땀 옷감이 울지 않고 몸에 딱 맞도록 심재를 받쳐서 손으로 꿰매는 것이 비접착식 수제양복의 핵심이다. 이때 숙련된 객공들의 노하우가 들어가는데, 옷감이 밀리거나 몸이 불편하지 않도록 재단선을 넣거나 천에 여유를 주는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다. 상의 한 벌에 대략 붙는 부자재는 100여 가지. 10만 번 이상의 바늘땀이 숨어 있다. 과정마다 열처리 테이프를 붙여 변형을 막거나 안감을 붙인다. 양복 옷감을 받쳐주는 심재도 소재별로 다양하다. 심재에 따라 바느질의 방향과 방법도 달라진다. 옷깃에는 끝까지 모양을 유지하도록 한 땀 한 땀 바늘선을 넣어 포인트를 살린다. 속 심재는 변형을 막기 위해 끓는 물에 옷감을 데쳐 일종의 열처리를 거친다. 이 모든 작업이 하루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기술과 소재도 계속 발전하고 있다. 조금만 뒤처져도 살아남기가 버거워진다. 수제양복 한 벌을 맞추면 객공들에게 돌아가는 품삯은 그 공에 비해 박한 편이다. 실력과 경력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저고리 한 벌에 15만원 남짓, 바지 한 벌에는 5만원 정도가 지급된다. 대략 20만원에서 25만원 정도가 객공임인 셈이다. 그 외에 재단비와 기타 비용이 있고 경우에 따라 특공이라는 특수공임도 덧붙는다. 수십 년 경력 최고 수준의 객공이 상의 한 벌을 수제작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꼬박 열두 시간, 하루 종일 일해야 한 벌을 겨우 만들 수 있다. 손이 느린 이들은 이틀에 한 벌 정도를 만들 수 있으니 기술의 완성도에 비해 객공임은 싼 편이다. 게다가 일거리가 점점 줄어드는 형편이라 지금의 임금은 15년 전의 수준과 같다. 물가에 비하면 공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볼 것이다. 양복 일을 배울 때 옷은 몸이 아닌 마음에 맞추라고 배웠다./김천 객공들은 남의 옷을 짓는 이들이다. 디자이너와 모델처럼 갈채와 명성을 얻지도 못한다. 양복점 주인보다 벌어들이는 돈도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그저 옷 뒤에 숨어 한 땀의 바느질로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때문에 오직 실력만이 그 바닥에서 살아남는 힘이다. 지금처럼 전문적인 교육기관도 없던 시절이라 대부분의 객공들은 몸으로 배우고 경험으로 이치를 터득해야 했다. 비슷하게 흉내 내서는 살아남지 못하고 특출난 것이 없으면 버틸 수 없다. 잘 만든 옷을 구해다가 뜯어가며 배운 적도 있다. 적어도 그 바닥에서 수십 년을 견딘 이들에게는 남다른 무엇이 있는 법이다. 객공으로 공임에 웃돈까지 받아가며 어느 정도 성공했다 싶었을 때 이철규씨는 욕심이 생겼다. 공장에서 세상 밖으로 나가보고 싶었다. 옷 뒤에 숨어 있기보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양복점을 하길 원했다. 그러기 위해 재단일을 배웠다. 잘 나가던 객공에서 월급 한푼 없는 재단사 보조가 됐다. 재단 일을 어느 정도 배웠다는 생각이 들자 다시 공장으로 돌아왔다. 스물일곱, 결혼하기 위해서는 다시 돈을 벌어야 했다. 결혼하고 5년 만에 원하던 양복점 문을 열었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남의 돈을 빌려 시장에 낸 가게는 생각만큼 수입이 없었다. 잘 나가던 객공들은 누구나 겪는 아픈 과정을 그도 겪었다.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일하는 한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또 자유롭습니다. 언제라도 쉴 수 있으니 남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됩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객공 일을 계속하고 있는 이철규씨는 장사 못하는 양복점보다는 차라리 객공이 낫다고 강조한다. 객공 세계에서는 가위 하나만 가지면 세상 어디서나 먹고 살 수 있다는 자부심이 있다. 한 벌의 양복에는 100개 이상의 부자재가 붙는다./김천 단골 잡기가 쉽다는 말에 솔깃하여 원단시장 근처에 가게를 냈다가 결국 2년 만에 문을 닫았다. 이철규씨는 다시 속 편한 객공으로 돌아왔다. “편하게 살지 말라는 게 하늘의 뜻인 것 같아요.” 이리저리 공장을 옮기다가 지금의 산림동에 자리를 잡은 지 10년이 됐다. 시내 복판이라 교통이 좋고 근처에 원단 상가며 부자재 가게들이 줄을 이어 객공 공장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입지를 갖췄다. 양복점들이 영화를 누리던 시절 양복의 중심지는 역시 명동과 소공동, 장안 멋쟁이들이 몰려 있고 나름대로 유행을 주도하던 곳이다. 다음은 이태원과 호텔들, 이곳은 과감한 패션이 주를 이루고 옷을 빨리 만들어 납품하는 것이 생명이다. 동대문과 종로 일대 양복점들은 저렴한 비용으로 승부를 보는 편이다. 양복점도 지역과 경향에 따라 흐름이 있다. 하지만 객공들에게는 그런 구분은 무의미하다. “실력 있으면 어디서든 찾아옵니다. 바쁘니까 돈을 더 주고서도 일을 시킵니다. 이 바닥에서는 누가 실력 있고 없는지가 뻔합니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양복점들이 직영공장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자체적으로 소화할 수 없는 물량만이 객공 공장으로 나왔다. 지금은 직영공장을 갖고 있는 양복점이 거의 사라졌다. 드라마 영향 등 수제양복점 관심 늘어 최근 들어 다시 맞춤양복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얼마 전 끝난 드라마 은 높은 시청률을 자랑했다. 한동안 강남 일대에 수제양복점이 줄지어 문을 였었다. 젊은 인재들도 양복업계로 유입되고 있다. 의상학과를 나와 문정동에서 양복점 ‘래보레이토리’를 운영하는 최정선 실장은 수제양복점이야말로 블루오션이라고 강조한다. “양복은 클래식입니다. 화려하게 패션을 따라가지 않아도 정말 멋있게 입을 수 있는 옷입니다. 기성복은 쉽게 살 수 있지만, 번거롭더라도 자신만을 위한 양복을 맞춰 입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정말 좋은 옷이란 자기에게 딱 맞는 옷이라고 한다. 양복이 불편한 옷이 된 것은 자신에게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철규씨는 맞춤양복은 세상에 꼭 한 사람만을 위한 옷이라고 강조한다. “선배들이 기술을 가르쳐주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했던 말이 있습니다. 몸에다가 옷을 맞추지 말라는 것이에요. 입는 사람의 마음에 맞추는 옷이 진짜 좋은 옷이라고 배웠습니다. 입을 때마다 자기에게 잘 맞는다고 느낄 수 있는 옷을 만들고 있습니다.” 50년 동안 남의 옷을 지으면서 그 사람의 몸보다 마음에 맞는 옷을 만들기를 원하는 바람. 그런 마음씨가 옷 만드는 고수의 생각이다.
- 인생도처유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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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제공장 시다에서 삼성SDS에 입사한 권세종의 파란만장 인생기
- 2005. 08. 01 화제
- “버스비가 없으면 뛰어가면 되죠. 최선을 다하는 인생이 최고의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졸업장이 정식 학력의 전부인 권세종씨. 열네 살에 상경, 봉제공장 시다로 출발해 대기업에 입사하기까지 그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서른이란 젊은 나이에 비해 또래보다 일찍 설움과 배고픔을 알아야 했던 그의 인생 이야기. 눈물을 훔치며 올라탄 서울행 열차 1989년, 열네 살 세종이는 벤치에 앉아 학교를 파하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집으로 향하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당장 먹고사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자신이 너무 처량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반찬 투정을 부리는 친구들의 모습을 생각하니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다음날 세종이는 무작정 서울행 기차를 탔다. 그리고 11년이 지난 후 세종이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도 인정받는 IT 전문가로 성장했다. 권세종씨(30)는 열네 살의 나이로 서울에 올라와 봉제공장 시다로 출발해 현재는 삼성SDS e-데이터센터에 근무하고 있다. 정식 학력이라고는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인 그는 세 살이 되기 전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여의고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마을 공중화장실을 보수한 곳이 그의 집이었으며, 끼니는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보리쌀과 밀가루로 연명했다. 식단은 항상 수제비였고, 우유나 과일 등을 먹는 것은 남의 얘기일 뿐이었다. 어린 시절 그는 딸기를 유독 좋아했다고 한다. 한번은 딸기가 너무 먹고 싶어 할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엉엉 운 적도 있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딸기 밭에서 일을 하고 품삯 대신 딸기 한 상자를 얻어왔다. 그날 그는 더이상 목구멍으로 음식을 넘기지 못할 지경에 이를 때까지 딸기를 먹었다. 위 속을 가득 채운 딸기 때문에 한참을 고생했어도 당시 그는 딸기를 배불리 먹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어렸을 때는 항상 밀가루로 수제비를 해 먹었어요. 그러다 보니 지금은 좋아하는 음식이 됐지만 그때는 너무 싫었어요. 어린 마음에 밥을 달라고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든 적도 있었죠.” 그는 유난히 먹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봉제공장 시다 일을 하고 받은 첫 월급으로 자장면 두 그릇과 짬뽕 한 그릇을 사 먹었다고. 어릴 적 못 먹고 자란 한 때문인지 그는 남들이 한 그릇을 먹을 때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 했다. “남보다 빨리, 많이 먹으려고 하다 보니 지금은 턱에서 소리가 나요. 요즘도 그런 습관이 아주 없어지지는 않았는데, 어려서 못 먹고 자란 한 때문에 지금도 먹는 것에는 돈을 아끼지 않죠. 유일하게 음식을 천천히 먹을 때는 회식 자리에서죠. 제가 고기를 잘 굽거든요. 가끔 식당 아주머니들이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했냐고 묻기도 해요. 회식 때면 동료들이 제 주위로 몰려드는데, 제가 구운 고기를 동료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아요. 또 회식 때는 공짜로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까. 빨리 먹을 필요도 없구요.(웃음)” 권세종씨의 고기굽는 비법은 가위질에 있다. 서울에 처음 올라와 봉제공장 시다 일을 할 때 그곳에서 하루 종일 뽕짝을 들으며 가위질을 했다. 그는 자신의 경쟁력을 뽕짝과 고기 굽는 기술이라고 자평한다. “재단가위는 굉장히 크고 무거워요. 지금도 춘천에서는 닭갈비를 자를 때 재단가위를 사용하더라구요. 공장 다니는 사람은 공장 다니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어요. 나름대로 깔끔하게 한다고 해도 머리에 실밥이 묻어 있거나 굳은살이 박힌 손은 감출 수가 없죠.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보면 딱 눈에 띄어요. 저도 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어렸을 때부터 가위질을 많이 해서 손에 굳은살이 많았어요. 그때는 그게 너무 부끄러워서 지하철을 탈 때마다 사람들이 볼까 봐 항상 손을 숨기고 다녔죠.” 그가 숨기고 싶은 건 손바닥의 굳은살만이 아니다. 얼굴에 쓰여 있는 고생한 사람의 흔적도 가리고 싶다. “제 가슴에 품고 있는 속담은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란 거예요. 예전에 찍은 사진을 보면 늘 인상을 써서 미간에 깊게 주름이 파여 있어요. 그때 제일 듣기 싫은 말이 ‘고생한 사람은 얼굴에 나타난다’는 거였죠. 그런데 어느 순간 내 인상을 멋지게 바꿔보자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 때부터 항상 긍정적인 사고를 하며 웃으려고 노력했죠. 어떤 기자는 인터뷰를 위해 저를 만나서 ‘고생한 거 거짓말 아니냐’고 묻더라구요. 부잣집 막내아들처럼 생겼다고.(웃음)” 실제로 지금 그의 얼굴에서 고생한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어릴 적 세탁소를 차리고 싶었다는 그의 손에는 굳은살과 다리미에 덴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미치도록 공부를 하고 싶던 청소년기 권세종씨는 살면서 처음 상경했을 때가 가장 두려웠다고 한다. 당시 그가 서울에 대해 아는 거라곤 그보다 먼저 서울에 다녀온 친구의 무용담이 전부였다. 전봇대에 붙어있는 전단지를 보고 연락하면 바로 취직을 할 수 있다는 친구의 말만 믿고 서울행 기차표를 끊었다. 하지만 서울에 도착한 그는 전봇대에 붙은 구인광고 전단지를 찾기도 전에 가죽 점퍼를 입고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서 도망쳐야 했다. “청량리역에 내려서 출구 앞에 섰는데 문득 ‘사람들을 잡아다가 새우잡이 배에 팔아 넘긴다’는 뉴스가 생각나더라구요.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이 전부 가죽 점퍼를 입고 나를 잡으러 온 사람 같았어요. 전봇대를 찾을 겨를도 없이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마음에 지하철을 탔죠. 그런데 지하철에도 사람들이 굉장히 많더라구요. 어디서 내려야 할지 몰라 당황하다가 고향인 영주하고 비슷한 느낌이 든 신이문역에서 내렸죠.” 그는 그곳에서 봉제공장 시다 일을 시작했다. 고향에 있는 할머니와 누나에게 생활비를 부치기 위해서는 밤낮없이 일을 해야 했다. 새벽에 신문을 돌리고 공장에 출근해서는 종일 원단을 나르고 가위질을 했다. 그렇게 힘든 하루를 보내면서도 그의 머릿속에는 배우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틈틈이 책을 읽었지만 혼자 하는 공부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그의 인생의 첫번째 전환점인 상록야학과 만난다. 그곳에서 그는 ‘포기란 성공을 위한 초석’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잠과의 투쟁을 벌였고, 사람들의 시선을 포기했다. 하루 1~2시간씩 자며 공부와 일을 병행한 끝에 그는 마침내 중·고등학교는 물론 대입 검정고시까지 합격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단순 무식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한번은 야학의 선생님이 ‘세종아, 나는 너를 보면 힘이 난다’고 해서 왜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버스비가 없으면 집에 가는 게 두려운데 저는 ‘집에 가는 버스비가 없으면 뛰어가면 되잖아?’라고 한다는 거죠.(웃음) 지금 같으면 돈을 준다고 해도 못 할 일인데 그때는 못 할 게 없었어요.” 권세종씨는 얼마 전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출간했다. 자신의 이야기가 힘든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지인의 말에 용기를 얻어 글을 썼지만 창작의 어려움을 뼈저리게 체험했다고 한다. 유난히 웃음이 많은 권세종씨는 요즘도 잠을 많이 못 잔다. 자신을 테스트하기 위해 매년 도전하는 자격증 시험에 응시해 벌써 10개가 넘는 자격증을 땄다. 또 언론에 얼굴이 알려지고 나서 기업이나 관공서에서 밀려드는 특강 요청 때문에 주말과 휴가도 반납한 상태다. 그의 기준에 따르면 ‘평범한 사람이란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라고 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며 레드와 옐로를 구별하고 싶은 마음에 악착같이 배움의 길로 들어섰다는 권세종씨. 이제 그는 또다른 세종이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담금질할 것이라고 한다. 글 / 김성욱 기자 사진 / 최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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