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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제공장 시다에서 삼성SDS에 입사한 권세종의 파란만장 인생기
2005. 08. 01 화제
“버스비가 없으면 뛰어가면 되죠. 최선을 다하는 인생이 최고의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졸업장이 정식 학력의 전부인 권세종씨. 열네 살에 상경, 봉제공장 시다로 출발해 대기업에 입사하기까지 그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서른이란 젊은 나이에 비해 또래보다 일찍 설움과 배고픔을 알아야 했던 그의 인생 이야기. 눈물을 훔치며 올라탄 서울행 열차 1989년, 열네 살 세종이는 벤치에 앉아 학교를 파하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집으로 향하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당장 먹고사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자신이 너무 처량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반찬 투정을 부리는 친구들의 모습을 생각하니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다음날 세종이는 무작정 서울행 기차를 탔다. 그리고 11년이 지난 후 세종이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도 인정받는 IT 전문가로 성장했다. 권세종씨(30)는 열네 살의 나이로 서울에 올라와 봉제공장 시다로 출발해 현재는 삼성SDS e-데이터센터에 근무하고 있다. 정식 학력이라고는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인 그는 세 살이 되기 전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여의고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마을 공중화장실을 보수한 곳이 그의 집이었으며, 끼니는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보리쌀과 밀가루로 연명했다. 식단은 항상 수제비였고, 우유나 과일 등을 먹는 것은 남의 얘기일 뿐이었다. 어린 시절 그는 딸기를 유독 좋아했다고 한다. 한번은 딸기가 너무 먹고 싶어 할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엉엉 운 적도 있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딸기 밭에서 일을 하고 품삯 대신 딸기 한 상자를 얻어왔다. 그날 그는 더이상 목구멍으로 음식을 넘기지 못할 지경에 이를 때까지 딸기를 먹었다. 위 속을 가득 채운 딸기 때문에 한참을 고생했어도 당시 그는 딸기를 배불리 먹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어렸을 때는 항상 밀가루로 수제비를 해 먹었어요. 그러다 보니 지금은 좋아하는 음식이 됐지만 그때는 너무 싫었어요. 어린 마음에 밥을 달라고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든 적도 있었죠.” 그는 유난히 먹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봉제공장 시다 일을 하고 받은 첫 월급으로 자장면 두 그릇과 짬뽕 한 그릇을 사 먹었다고. 어릴 적 못 먹고 자란 한 때문인지 그는 남들이 한 그릇을 먹을 때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 했다. “남보다 빨리, 많이 먹으려고 하다 보니 지금은 턱에서 소리가 나요. 요즘도 그런 습관이 아주 없어지지는 않았는데, 어려서 못 먹고 자란 한 때문에 지금도 먹는 것에는 돈을 아끼지 않죠. 유일하게 음식을 천천히 먹을 때는 회식 자리에서죠. 제가 고기를 잘 굽거든요. 가끔 식당 아주머니들이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했냐고 묻기도 해요. 회식 때면 동료들이 제 주위로 몰려드는데, 제가 구운 고기를 동료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아요. 또 회식 때는 공짜로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까. 빨리 먹을 필요도 없구요.(웃음)” 권세종씨의 고기굽는 비법은 가위질에 있다. 서울에 처음 올라와 봉제공장 시다 일을 할 때 그곳에서 하루 종일 뽕짝을 들으며 가위질을 했다. 그는 자신의 경쟁력을 뽕짝과 고기 굽는 기술이라고 자평한다. “재단가위는 굉장히 크고 무거워요. 지금도 춘천에서는 닭갈비를 자를 때 재단가위를 사용하더라구요. 공장 다니는 사람은 공장 다니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어요. 나름대로 깔끔하게 한다고 해도 머리에 실밥이 묻어 있거나 굳은살이 박힌 손은 감출 수가 없죠.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보면 딱 눈에 띄어요. 저도 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어렸을 때부터 가위질을 많이 해서 손에 굳은살이 많았어요. 그때는 그게 너무 부끄러워서 지하철을 탈 때마다 사람들이 볼까 봐 항상 손을 숨기고 다녔죠.” 그가 숨기고 싶은 건 손바닥의 굳은살만이 아니다. 얼굴에 쓰여 있는 고생한 사람의 흔적도 가리고 싶다. “제 가슴에 품고 있는 속담은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란 거예요. 예전에 찍은 사진을 보면 늘 인상을 써서 미간에 깊게 주름이 파여 있어요. 그때 제일 듣기 싫은 말이 ‘고생한 사람은 얼굴에 나타난다’는 거였죠. 그런데 어느 순간 내 인상을 멋지게 바꿔보자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 때부터 항상 긍정적인 사고를 하며 웃으려고 노력했죠. 어떤 기자는 인터뷰를 위해 저를 만나서 ‘고생한 거 거짓말 아니냐’고 묻더라구요. 부잣집 막내아들처럼 생겼다고.(웃음)” 실제로 지금 그의 얼굴에서 고생한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어릴 적 세탁소를 차리고 싶었다는 그의 손에는 굳은살과 다리미에 덴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미치도록 공부를 하고 싶던 청소년기 권세종씨는 살면서 처음 상경했을 때가 가장 두려웠다고 한다. 당시 그가 서울에 대해 아는 거라곤 그보다 먼저 서울에 다녀온 친구의 무용담이 전부였다. 전봇대에 붙어있는 전단지를 보고 연락하면 바로 취직을 할 수 있다는 친구의 말만 믿고 서울행 기차표를 끊었다. 하지만 서울에 도착한 그는 전봇대에 붙은 구인광고 전단지를 찾기도 전에 가죽 점퍼를 입고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서 도망쳐야 했다. “청량리역에 내려서 출구 앞에 섰는데 문득 ‘사람들을 잡아다가 새우잡이 배에 팔아 넘긴다’는 뉴스가 생각나더라구요.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이 전부 가죽 점퍼를 입고 나를 잡으러 온 사람 같았어요. 전봇대를 찾을 겨를도 없이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마음에 지하철을 탔죠. 그런데 지하철에도 사람들이 굉장히 많더라구요. 어디서 내려야 할지 몰라 당황하다가 고향인 영주하고 비슷한 느낌이 든 신이문역에서 내렸죠.” 그는 그곳에서 봉제공장 시다 일을 시작했다. 고향에 있는 할머니와 누나에게 생활비를 부치기 위해서는 밤낮없이 일을 해야 했다. 새벽에 신문을 돌리고 공장에 출근해서는 종일 원단을 나르고 가위질을 했다. 그렇게 힘든 하루를 보내면서도 그의 머릿속에는 배우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틈틈이 책을 읽었지만 혼자 하는 공부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그의 인생의 첫번째 전환점인 상록야학과 만난다. 그곳에서 그는 ‘포기란 성공을 위한 초석’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잠과의 투쟁을 벌였고, 사람들의 시선을 포기했다. 하루 1~2시간씩 자며 공부와 일을 병행한 끝에 그는 마침내 중·고등학교는 물론 대입 검정고시까지 합격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단순 무식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한번은 야학의 선생님이 ‘세종아, 나는 너를 보면 힘이 난다’고 해서 왜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버스비가 없으면 집에 가는 게 두려운데 저는 ‘집에 가는 버스비가 없으면 뛰어가면 되잖아?’라고 한다는 거죠.(웃음) 지금 같으면 돈을 준다고 해도 못 할 일인데 그때는 못 할 게 없었어요.” 권세종씨는 얼마 전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출간했다. 자신의 이야기가 힘든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지인의 말에 용기를 얻어 글을 썼지만 창작의 어려움을 뼈저리게 체험했다고 한다. 유난히 웃음이 많은 권세종씨는 요즘도 잠을 많이 못 잔다. 자신을 테스트하기 위해 매년 도전하는 자격증 시험에 응시해 벌써 10개가 넘는 자격증을 땄다. 또 언론에 얼굴이 알려지고 나서 기업이나 관공서에서 밀려드는 특강 요청 때문에 주말과 휴가도 반납한 상태다. 그의 기준에 따르면 ‘평범한 사람이란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라고 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며 레드와 옐로를 구별하고 싶은 마음에 악착같이 배움의 길로 들어섰다는 권세종씨. 이제 그는 또다른 세종이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담금질할 것이라고 한다. 글 / 김성욱 기자  사진 / 최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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