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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내시경]창신동엔 얼마나 많은 봉제공장이 있을까?(2019. 05. 10 17:17)
2019. 05. 10 17:17 사회
봉제협회나 인근 부동산에 물어봐도 대답은 한결같이 “잘 모른다”는 한마디. 그 많은 집들이 살림집과 공장 구분 없이 밀집돼 있기 때문이다. 대략의 셈법으로 대강 900여개 정도가 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창신동 봉제골목에는 약 900여개의 봉제관련 공장들이 밀집해 있다. 동대문 바로 옆 낙산을 따라 오르는 성곽이 있다. 성곽 바깥 비탈을 따라 촘촘히 이어진 골목이 창신동 봉제골목이다. 한때 국내 의류시장 7할이 동대문과 남대문 일대에서 팔렸고 그 옷의 상당량이 창신동 봉제골목에서 만들어졌다. 지금도 골목을 따라 걸으면 미싱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노찾사’의 민중가요 <사계> 중 봄의 노랫말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가 생생한 길이다. 옷 만드는 공장마다 오토바이가 옷짐을 부지런히 실어나른다. 한류의 한 부분으로 국내 패션산업의 중심에 선 동대문 의류시장은 한국전쟁의 산물이다. 전쟁 이후 구제품 옷시장이 열렸고 그 뒤를 평화시장 등 봉제공장이 뒤따랐다. 피난민들이 낙산 비탈에 판잣집을 지어 이뤄진 동네가 창신동이고, 평화시장 일대 봉제공장들이 정비된 후 창신동 주택가로 확산됐다. 그러니 지금의 봉제골목은 현대사의 산물인 셈이다. 봉제골목은 도시재생사업으로 새 옷을 입기 시작했다. 창신동엔 대체 얼마나 많은 봉제공장들이 있을까? 봉제협회나 인근 부동산에 물어봐도 대답은 한결같이 “잘 모른다”는 한마디. 그 많은 집들이 살림집과 공장 구분 없이 밀집돼 있기 때문이다. 더러는 방 하나에 공장 하나가 있을 정도로 창신동의 공장 수는 정확한 통계가 없다. 대략의 셈법으로 대강 900여개 정도가 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골목에 자리잡은 이음피움 봉제역사관 골목길가 열린 문 사이로 바삐 일하는 모습이 흔히 보인다. 창신동에서 보기 힘든, 간판 달린 공장 주인은 이 바닥에서 일한 지 38년이 됐다고 했다. 그는 “17살 때 고등학교 떨어지고 집에서 욕만 먹다가 서울로 야반도주했다. 친구를 찾아갔는데 이쪽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옷 일을 했으니 꼭 38년째”라고 말했다. 쪽잠을 자며 재봉 보조로 바닥 일을 배우다가 기술자가 됐다고 했다. 그런 후에도 남의 공장을 전전하며 옷 한 벌에 얼마씩 받는 객공으로 떠돌다가 하청공장을 연 지 10년이 됐단다. 늘그막에 떠돌이 신세는 벗었지만 봉제일이 좋던 꽃피던 시절은 이미 끝나버린 뒤였다. 동대문과 남대문 일대 의류 공급처 창신동 봉제골목 사람들의 사정은 대부분 비슷했다. 고향을 떠나 기술 배우는 일을 몸으로 익히고 남의 눈치 봐가며 품삯 일로 청춘을 보냈거나 노동이 천대받던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머리에 하얀 서리를 얹은 채 아직도 동대문 의류시장에 기대 사는 이들은 대부분 혹독했던 평화시장 다락방을 경험했던 사람들이다. 그래도 그 어려웠던 때를 견뎌낸지라 봉제골목에 자기 가게를 열 수 있었다. 봉제골목의 상징 중 하나인 전태일재단 그런 사정으로 창신동 봉제골목 어귀에는 전태일재단 건물이 있다. 지금 전태일재단 건물에는 풍물학교 수강생을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 있고, 인근 학생들의 방과후 공부방이 열리고 있었다. 젊은 전태일이 꿈꿨던 노동 존중의 시대로 가는 길은 현재진행형이고, 적어도 노동법을 읽는다고 빨갱이 딱지를 붙이는 시대는 끝났다. 전태일재단 인근 창신동 647번지 일대는 낙산 비탈길 중에서도 봉제공장이 가장 밀집해 있는 골목길이다. 비교적 산비탈 초입에 있어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20년 남짓 된 다세대주택들이 줄지어 있고 지층과 1층은 대부분 공장이 들어서 있다. 이 지역 봉제공장은 일대에서도 규모가 큰 편이다. 골목에서 원단을 내리던 이는 “여기는 차가 들어올 수 있어 큰 일거리를 다루는 공장이 많다. 여기서 또 작업에 따라 일거리들이 이리저리 흩어진다. 작은 일은 집에서도 하고 그런다”고 했다. 봉제골목의 주역인 소규모 가내공장 최근 창신동 일대는 도시재생사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어 동네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을씨년스럽던 공장지대가 아니라 멋을 내 통일된 간판도 달려 있고, 곳곳에 시각디자이너들의 손길이 드러나 있어 한결 밝아졌다. 골목 어귀에 창신동 봉제 일의 개념도도 걸려 있고, 계단에는 동시도 적혀 있으며, 벽에는 산뜻한 칠과 그림이 그려져 있다. 봉제 관련자뿐 아니라 사회적 기업과 도시재생사업팀이 여러 가지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몇 해 전만 해도 이 일대는 뉴타운 개발 예정지역이었다. 골목마다 부동산이 들어섰고 투기붐이 휩쓸고 갔다. 무허가 건물들도 집값이 치솟았다. 아파트가 들어서고 모두 한몫 잡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던 반면, 살던 곳에서 밀려나길 두려워하는 저항도 공존했다. 단춧구멍 작업을 한다는 이는 “여기가 동대문 지척이라 봉제 일 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여길 떠나면 일을 접어야지 어디 가서 이만한 자릴 다시 잡겠나”라고 했다. 집을 가진 이와 그렇지 못한 사람, 아파트가 들어서길 바라는 무리와 일자리를 지키려는 이들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벌이곤 했었다. 가게 주인은 “여기저기 현수막도 많이 걸리고, 부동산 업자랑 실랑이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업성을 이유로 창신동 숭인동 일대 뉴타운 사업은 2013년에 해제가 됐다. 이 지역에서 가장 흔한 일손 구하는 전단 대안정비사업과 도시재생사업 진행 중 지금 이 일대는 대안정비사업과 도시재생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아파트를 짓는 부동산 개발 일색의 사업에서 지역 특성을 살린 정비사업으로 방향을 튼 대표적인 사례가 창신동 일대의 정비사업이다. 그리고 봉제산업을 주제로 재생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골목길에 2018년 문을 연 이음피움 봉제역사관도 그 성과 중 하나다. 한껏 멋을 낸 새 건물에 봉제작업실과 역사관, 카페까지 들어서 있다. 골목길을 걷다보면 벽에 이 일대 봉제산업의 대강을 정리한 안내판도 붙어 있다. 골목을 거리박물관으로 꾸며 곳곳에서 봉제 일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뉴타운 사업은 무산됐지만 마을 분위기가 새로워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차츰 정비되는 분위기지만 아직 봉제골목 곳곳에는 예전 난개발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가파르고 좁은 골목길, 오직 사람의 두 발로 지나야 하는 실핏줄 같은 길들이 있다. 열린 문 사이로 실밥을 뜯는 모습도 보이고, 뭔지 모를 작업에 바쁜 모습도 볼 수 있다. 가내공장 주인은 “옷 한 벌에 수백 사람의 손이 들어간다. 주머니 만드는 사람은 주머니만 만들고, 단춧구멍 뚫는 사람은 단춧구멍만 뚫는다. 그것도 옷 종류마다 처리하는 공장이 다 다르다”고 설명했다. 다 전문분야가 따로 있어서 한 공정을 마치면 그 다음 공정으로 넘어가 이 일대가 유기적으로 함께 움직인다고 했다. 옷에 따라 다르지만 대강의 과정은 옷을 디자인하고 원단을 정해 설계하는 패턴, 그대로 천을 자르는 재단, 재단된 원단을 재봉틀로 이어 붙이는 재봉, 각종 부자재를 달고 주머니를 만드는 마무리, 완성된 옷을 다림질하고 실밥 등을 제거하는 완성의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일의 단계마다 공장의 위치와 일하는 시간대가 달라진다는 사실도 색다르다. 창신동 초입과 큰길가에는 주로 패턴 가게들이 보이고, 골목길로 접어들면 재단공장, 그 주변에 봉제공장들이 있고, 좀 더 깊은 곳에 마무리와 완성 공장들이 있었다. 공정이 진행되는 시간에 따라 완성 공장들은 앞 공정이 다 끝난 후 일을 받아 늦은 오후부터 시작해 새벽까지 작업을 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옷들이 새벽시장으로 나갔다. 현장에서는 아직도 미싱이며 ‘마도메’, ‘시아게’ 같은 일본말이 통용되고 있어 일하는 이들의 언어는 쉽게 알아듣기 힘들다. 요새 경기는 어떻냐고 묻자 “한 3분의 1 정도로 줄어든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원인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의류 바닥 분위기가 위축된 것은 사실인가 보다. 그런데도 골목마다 미싱사 하청 객공팀, 보조인력을 구하는 전단이 빼곡히 붙어 있다. 일이 줄어들어도 공정과 손을 줄일 수는 없고, 늘 일손이 들고 나는 것이 이 바닥 사정이란다. 숙녀복 전문이라는 공장 주인은 “사람마다 솜씨가 천차만별이다. 공장일도 늘었다가 줄었다가 대중이 없다. 디자인 하나가 터져 불티나게 팔리면 일도 밤낮 없이 바빠지고, 안 나가면 망하는 게 현실이다. 재단사는 가위에 자 하나 들고 떠돌고, 미싱사도 일 없으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것이 여기 생리”라고 들려주었다. 공장 임대 안내판과 사람 구한다는 간판이 함께 붙어 있는 것이 봉제골목의 현실이었다. 쉼 없이 들리는 재봉틀 소리에 숙연 비탈길과 골목 사이사이를 원단이며 옷짐을 싣고 달리는 오토바이가 창신동의 또 다른 주인들이다. 제 키를 두 배쯤 넘긴 짐을 싣던 오토바이 짐꾼은 “여기서 시장으로, 또 만리동이나 용두동까지 공장으로 짐을 나른다. 거래처마다 시간 지켜 물건을 전해주는 게 생명”이라고 했다. 고정 거래처들이 있고 공정마다 옮겨야 해서 일은 많다고 한다. 수입을 묻자 “생각보다 많이, 벌만큼 번다”며 웃음으로 답했지만, 수없이 많은 공장들을 시간에 맞춰 벅찰 만큼 짐을 싣고 비탈과 골목 사이사이로 누벼야 하는 일은 겉보기에도 쉽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오토바이는 자주 망가지고, 급히 오가다 보면 딱지 끊는 일도 많으며, 한 번 다치면 몇 달을 누워 있어야 하니 적게 벌어서는 버틸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길이 좁고 비탈질수록 오토바이 일꾼이 더욱 빛났다. 일은 줄었지만 일손까지 줄일 수는 없어 창신동 일대에도 외국인 노동자들이 늘고 있다. 고도의 기술이 필요 없는 단순 일자리에 중국인과 네팔 등 동남아 일꾼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그들은 한 사람이 자리를 잡으면 친지들이 따라 들어온다고 했다. 게다가 창신동 일대 싼 방값도 이주노동자들을 불러들이는 요인이다. 중국 가게에서 물건을 사던 이는 “고시원에서 살 돈이면 살 만한 방을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시장골목과 빨래방에서도 이주노동자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창신동 비탈길을 한창 오르다 보면 낙산공원이 나온다. 잘 정비된 낙산공원에서 서울 장안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쉼 없이 살아가야 하는 비탈 마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정경이 펼쳐진다. 비탈을 오르던 피로는 정상의 풍광이 보상했다. 비탈에 선 나무들은 굽어 있고 힘겹게 뿌리를 내리는 법이다. 골을 거슬러 오르는 바람을 견뎌야 하고 위태로운 경사에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세월을 지내온 봉제골목의 사람들도 그런 비탈길을 지나쳐 왔을 것이다. 경사진 골목에서 엿본 노동과 삶은 장엄하고 거룩했다. 창신동 봉제골목의 비탈진 길을 걸으면 쉼 없이 들리는 재봉틀 소리 앞에서 숙연해진다. 사는 일에 지칠 때 낙산 경사진 골목길을 한 번 더 걸어야겠다.
골목 내시경
[인생도처유상수 객공(하청 봉제기술자)]몸이 아닌 마음에 맞추는 옷을 만든다(2017. 05. 02 15:19)
2017. 05. 02 15:19 사회
객공들은 남의 옷을 짓는 이들이다. 그저 옷 뒤에 숨어 한 땀의 바느질로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때문에 오직 실력만이 그 바닥에서 살아남는 힘이다. 지금처럼 전문적인 교육기관도 없던 시절이라 대부분의 객공들은 몸으로 배우고 경험으로 이치를 터득해야 했다. 을지로는 묘한 거리다. 서울 도심 한복판이면서 세련됨과는 거리가 있다. 조명가게와 철물점, 건축자재들을 파는 상가를 따라서 걷다 보면 을지로 4가쯤에 미싱상가가 나온다. 을지로와 청계천 사이 동네인 산림동, 집들은 낡았고 사람들은 아주 오래된 방식으로 일하고 있다. 한 건물을 들어서면 층마다 칸을 막은 작은 공장들이 있다. 낡아버린 건물 모습과는 달리 사람들은 바쁘게 일하고, 공간은 활기차게 살아있다. 재봉틀 소리가 들리는 문을 열자 양복을 꿰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속칭 객공 공장, 객공이란 노임을 받고 옷을 만드는 하청 봉제기술자다. 그 중 한 사람인 이철규씨. 그는 50년째 양복을 만든다. 재단가위로 머리 맞아가며 일 배워 “이젠 눈을 감고도 양복을 꿰맬 수 있습니다. 열일곱 살 때 기술을 배워서 스물한 살부터 객공밥을 먹었으니 참 오래됐습니다.” 충청남도 청양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세상 모르는 개구쟁이로 컸다. 목수였던 할아버지를 닮아 손재주가 남달라 어릴 적부터 동네에서 필요한 괭이자루며 호미자루는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잘한다는 칭찬이 즐겁기도 했고, 무엇인가 제 손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기쁘기도 했단다.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철없던 시절은 일찌감치 끝나고 말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고쳐 보겠다고 정신없이 사방으로 떠돌고, 형은 골 아픈 집안사정으로부터 도망치듯 군대로 가버렸다. 여덟 마지기 논농사는 오롯이 어린 그의 몫이 됐다. 같은 반 아이들이 가방을 들고 학교로 갈 때 그는 지게 가득 거름을 짊어지고 논으로 가야 했다. 논일이 끝나면 밭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창피해서 학교 가는 길을 멀리 돌아다녔습니다. 집에서 나갈 때나 돌아올 때 빈손으로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뭐든 지게에 져날라 가며 농사를 지었습니다.” 형이 제대를 하고 나서야 어린 농부를 졸업할 수 있었다. 먹고 살려면 기술을 배워야 했다. 선택지는 네 가지. 이발소와 중국집, 구둣방 아니면 양복점에 들어가 밑바닥부터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농촌 출신의 젊은이들이 대부분 겪어야 했던 일이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발소나 구두 일은 지금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양복기술을 배웠으니 평생 밥은 굶지 않고 삽니다.” 함께 구둣방에서 일하자는 친구의 청을 물리친 것은 양복점을 하던 친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소개로 일을 배우러 들어간 곳은 서울 염리동 양복점 공장이었다. 기술은 욕을 먹으며 배우고 맞아야 실수하지 않는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50년 동안 1만 벌 가까운 옷을 지은 양복 객공 이철규씨./김천 처음 들어가면 바지 만드는 조수 일부터 배우게 된다. 초짜 조수라도 결코 봐주지 않는 것이 그 바닥의 철칙이다. “무지하게 맞았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니 큰 재단가위로 머리를 맞아가며 일을 배웠습니다. 일이 바빠 잠은 작업대 위에서 자다가 굴러 떨어지기도 많이 했습니다.” 1960년대 말 그가 봤던 양복점 모습은 번창의 정점에 있었다. “하루에 양복 70벌을 만드는 곳도 있었습니다. 기술자 수십 명이 북적대면서 일하던 곳이 많았고, 아무튼 그 이후로는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조수로 1년을 꼬박 배우자 바지 일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고향의 양복점으로 돌아가 또다시 1년을 일했다. 조수 딱지를 떼고 준기술자로 일했는데 그와 함께 바지 만드는 기술자만 4명이 있었다. 읍내 양복점 치곤 꽤나 바빴지만 떠나야 할 일이 생겼다. 넷 중에 일을 제일 잘했는데도 직급을 올려주지 않았다. 양복점 주인은 자신의 동생만을 승급시켰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윗도리 일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뒤돌아보지 않고 다시 서울로 와버렸습니다.” 양복 일은 바지 만들기가 상대적으로 쉽고 윗도리는 공정도 복잡하고 훨씬 손이 많이 간다. 때문에 일종의 계급이 있어 상의 만드는 기술자가 임금도 더 많이 받는다. 그렇게 길을 들어서서 평생 바지만 만드는 사람도 있고 저고리만 만드는 이도 있다. 다시 2년을 조수로 일했다. 그리고 스물한 살부터 객공밥을 먹기 시작했다. 공장에서 생산하는 접착식 양복에 비해 수제양복은 그 과정이 복잡하다. 일단 디자인과 원단을 고르고 몸의 치수를 잰다. 치수에 따라 종이 위에 재단을 그려 자르고, 그 모양대로 원단 위에 재단선을 그어 옷감을 자른다. 여기까지가 양복점과 재단사의 손에서 이루어진다. 객공들에게는 재단된 옷감, 또는 옷본이 전달된다. 저고리와 바지를 대강 바늘로 꿰어 옷 모양을 만들어 가봉재한 옷을 입어보는 가봉 과정을 거쳐 다시 수정하면 옷을 만들기 위한 최종 재단이 결정된다. 이때부터 객공의 손이 움직인다. 상의 한 벌에 십만 번 이상 바늘땀 옷감이 울지 않고 몸에 딱 맞도록 심재를 받쳐서 손으로 꿰매는 것이 비접착식 수제양복의 핵심이다. 이때 숙련된 객공들의 노하우가 들어가는데, 옷감이 밀리거나 몸이 불편하지 않도록 재단선을 넣거나 천에 여유를 주는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다. 상의 한 벌에 대략 붙는 부자재는 100여 가지. 10만 번 이상의 바늘땀이 숨어 있다. 과정마다 열처리 테이프를 붙여 변형을 막거나 안감을 붙인다. 양복 옷감을 받쳐주는 심재도 소재별로 다양하다. 심재에 따라 바느질의 방향과 방법도 달라진다. 옷깃에는 끝까지 모양을 유지하도록 한 땀 한 땀 바늘선을 넣어 포인트를 살린다. 속 심재는 변형을 막기 위해 끓는 물에 옷감을 데쳐 일종의 열처리를 거친다. 이 모든 작업이 하루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기술과 소재도 계속 발전하고 있다. 조금만 뒤처져도 살아남기가 버거워진다. 수제양복 한 벌을 맞추면 객공들에게 돌아가는 품삯은 그 공에 비해 박한 편이다. 실력과 경력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저고리 한 벌에 15만원 남짓, 바지 한 벌에는 5만원 정도가 지급된다. 대략 20만원에서 25만원 정도가 객공임인 셈이다. 그 외에 재단비와 기타 비용이 있고 경우에 따라 특공이라는 특수공임도 덧붙는다. 수십 년 경력 최고 수준의 객공이 상의 한 벌을 수제작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꼬박 열두 시간, 하루 종일 일해야 한 벌을 겨우 만들 수 있다. 손이 느린 이들은 이틀에 한 벌 정도를 만들 수 있으니 기술의 완성도에 비해 객공임은 싼 편이다. 게다가 일거리가 점점 줄어드는 형편이라 지금의 임금은 15년 전의 수준과 같다. 물가에 비하면 공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볼 것이다. 양복 일을 배울 때 옷은 몸이 아닌 마음에 맞추라고 배웠다./김천 객공들은 남의 옷을 짓는 이들이다. 디자이너와 모델처럼 갈채와 명성을 얻지도 못한다. 양복점 주인보다 벌어들이는 돈도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그저 옷 뒤에 숨어 한 땀의 바느질로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때문에 오직 실력만이 그 바닥에서 살아남는 힘이다. 지금처럼 전문적인 교육기관도 없던 시절이라 대부분의 객공들은 몸으로 배우고 경험으로 이치를 터득해야 했다. 비슷하게 흉내 내서는 살아남지 못하고 특출난 것이 없으면 버틸 수 없다. 잘 만든 옷을 구해다가 뜯어가며 배운 적도 있다. 적어도 그 바닥에서 수십 년을 견딘 이들에게는 남다른 무엇이 있는 법이다. 객공으로 공임에 웃돈까지 받아가며 어느 정도 성공했다 싶었을 때 이철규씨는 욕심이 생겼다. 공장에서 세상 밖으로 나가보고 싶었다. 옷 뒤에 숨어 있기보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양복점을 하길 원했다. 그러기 위해 재단일을 배웠다. 잘 나가던 객공에서 월급 한푼 없는 재단사 보조가 됐다. 재단 일을 어느 정도 배웠다는 생각이 들자 다시 공장으로 돌아왔다. 스물일곱, 결혼하기 위해서는 다시 돈을 벌어야 했다. 결혼하고 5년 만에 원하던 양복점 문을 열었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남의 돈을 빌려 시장에 낸 가게는 생각만큼 수입이 없었다. 잘 나가던 객공들은 누구나 겪는 아픈 과정을 그도 겪었다.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일하는 한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또 자유롭습니다. 언제라도 쉴 수 있으니 남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됩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객공 일을 계속하고 있는 이철규씨는 장사 못하는 양복점보다는 차라리 객공이 낫다고 강조한다. 객공 세계에서는 가위 하나만 가지면 세상 어디서나 먹고 살 수 있다는 자부심이 있다. 한 벌의 양복에는 100개 이상의 부자재가 붙는다./김천 단골 잡기가 쉽다는 말에 솔깃하여 원단시장 근처에 가게를 냈다가 결국 2년 만에 문을 닫았다. 이철규씨는 다시 속 편한 객공으로 돌아왔다. “편하게 살지 말라는 게 하늘의 뜻인 것 같아요.” 이리저리 공장을 옮기다가 지금의 산림동에 자리를 잡은 지 10년이 됐다. 시내 복판이라 교통이 좋고 근처에 원단 상가며 부자재 가게들이 줄을 이어 객공 공장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입지를 갖췄다. 양복점들이 영화를 누리던 시절 양복의 중심지는 역시 명동과 소공동, 장안 멋쟁이들이 몰려 있고 나름대로 유행을 주도하던 곳이다. 다음은 이태원과 호텔들, 이곳은 과감한 패션이 주를 이루고 옷을 빨리 만들어 납품하는 것이 생명이다. 동대문과 종로 일대 양복점들은 저렴한 비용으로 승부를 보는 편이다. 양복점도 지역과 경향에 따라 흐름이 있다. 하지만 객공들에게는 그런 구분은 무의미하다. “실력 있으면 어디서든 찾아옵니다. 바쁘니까 돈을 더 주고서도 일을 시킵니다. 이 바닥에서는 누가 실력 있고 없는지가 뻔합니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양복점들이 직영공장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자체적으로 소화할 수 없는 물량만이 객공 공장으로 나왔다. 지금은 직영공장을 갖고 있는 양복점이 거의 사라졌다. 드라마 영향 등 수제양복점 관심 늘어 최근 들어 다시 맞춤양복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얼마 전 끝난 드라마 은 높은 시청률을 자랑했다. 한동안 강남 일대에 수제양복점이 줄지어 문을 였었다. 젊은 인재들도 양복업계로 유입되고 있다. 의상학과를 나와 문정동에서 양복점 ‘래보레이토리’를 운영하는 최정선 실장은 수제양복점이야말로 블루오션이라고 강조한다. “양복은 클래식입니다. 화려하게 패션을 따라가지 않아도 정말 멋있게 입을 수 있는 옷입니다. 기성복은 쉽게 살 수 있지만, 번거롭더라도 자신만을 위한 양복을 맞춰 입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정말 좋은 옷이란 자기에게 딱 맞는 옷이라고 한다. 양복이 불편한 옷이 된 것은 자신에게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철규씨는 맞춤양복은 세상에 꼭 한 사람만을 위한 옷이라고 강조한다. “선배들이 기술을 가르쳐주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했던 말이 있습니다. 몸에다가 옷을 맞추지 말라는 것이에요. 입는 사람의 마음에 맞추는 옷이 진짜 좋은 옷이라고 배웠습니다. 입을 때마다 자기에게 잘 맞는다고 느낄 수 있는 옷을 만들고 있습니다.” 50년 동안 남의 옷을 지으면서 그 사람의 몸보다 마음에 맞는 옷을 만들기를 원하는 바람. 그런 마음씨가 옷 만드는 고수의 생각이다.
인생도처유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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