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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주·송지영 부부의 속사정&경북 봉화 이사 계획
2013. 03. 07 18:41 화제
ㆍ1년 전 언론 첫 부부 인터뷰 이후 본지와 다시 만났다 계절이 네 번 바뀌고 나서야 부부는 뜨겁게 재회했다. 한 평짜리 어두컴컴한 방에서 외로운 싸움을 버텨낸 남편은 “나는 더 이상 가벼운 정치인이 아니다”라고 스스로 말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해졌고, 홀로 두 자녀를 돌보며 눈물조차 다 말라버릴 정도로 퍽퍽했던 시간을 견뎌낸 아내는 이제 그 누구보다도 씩씩하고 강한 여자가 됐다. 답답하고 서러운 마음에 가슴을 치는 날도 많았지만, 지금은 그 시간마저 감사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여유를 갖게 됐다는 정봉주·송지영 부부를 만났다. 법원의 실형 선고 이후 이별을 받아들이기까지 지난 2011년 12월 초, 부부가 첫 인터뷰에 나섰던 그때만 해도 정봉주(54) 전 의원은 더 이상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어 보였다. 그는 인기 팟캐스트 방송 프로그램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에 출연해 굵직한 정치적 이슈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거침없는 폭로전을 이어가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팬클럽 회원 수가 20만 명이 넘을 정도였다. 그만큼 인터뷰 내내 정 전 의원은 자신감이 넘쳤고, 아내 송지영씨(51)도 무척이나 뿌듯하고 행복해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보름 뒤, 그들은 전혀 다른 현실에 부딪혔다. 정봉주 전 의원이 BBK 주가 조작 사건과 관련해 허위 사실 유포죄로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구속 수감된 것이다. Q 오랜만에 다시 뵙네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년 2개월 전에 뵀죠. 그때 인터뷰를 마치면서 부인께서 “언제 또 무슨 일이 터질까봐 늘 조마조마하다”라고 했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송지영 맞아요. 그러고 나서 얼마 후에 대법원 판결이 나왔으니까 정말 일이 터져버린 거죠. 정봉주 아내가 고생 많이 했어요. 갑자기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큰 일이 벌어진 거잖아요. 아직도 저녁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많이 울어요. 제가 맘고생 많이 시켰어요. Q 실형 선고 소식을 들으셨을 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정봉주 수감 기간 내내 독방을 사용했는데, 그 방 크기가 엄청 작아요. 폭은 양팔을 다 뻗지 못할 정도고 이불을 펴고 누우면 위아래로 각각 30cm 정도씩 남는 길이예요. 공황장애나 폐쇄공포증에 걸리기 십상이죠. 그래서 저는 실형 선고를 받은 그날부터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까지 며칠 동안 집에서 미리 감옥에서 자는 연습을 좀 했어요. 저랑 아내는 평소에도 서로 살을 안 대고는 못 자는 스타일인데, 제가 조그마한 파우더룸 바닥에 누워 쭈그리고 자니까 아내가 다가오더라고요. 그때마다 아내에게 오지 말라고, 침대에 가서 얼른 혼자 자라고 했어요. 솔직히 실형 선고를 받고 나서부터는 가족 걱정을 할 겨를이 없었어요. 감옥에 들어가서 저 스스로 무너지면 안 된다는 것에만 집중했죠. Q 아내 입장에서는 여러 번 마음이 무너져내렸을 것 같아요. 어떻게 참으셨나요? 송지영 저도 각오를 단단히 했어요. 큰일도 큰일이지만, 이게 마냥 슬퍼한다고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러면 더욱 못 견디겠더라고요. 울지 말자고 결심하고 마음을 강하게 먹었어요. 남편이 구속되던 날 검찰청 앞에서 딱 한 번 울었던 거 빼고는 한동안 울지 않았어요. 심지어 남편이 구속된 다음날 제가 하고 있는 인테리어 디자인 일과 관련해 부산 일정이 잡혀 있었는데, 아무렇지 않게 출장을 떠나고 주어진 일을 했어요. 사람들 앞에서도 힘든 내색을 전혀 안 했고요. 제가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평소처럼 행동을 하니까 사람들이 오히려 신기하게 보더라고요. Q 두 분 모두 서로의 앞에서는 눈물을 참 많이 참으신 것 같아요. 정봉주 1월 말 즈음에 첫 면회가 있었어요. 설 연휴 마지막 날이었죠. 아내와 처제, 보좌관이 왔더라고요. 보좌관 앞에서 의원인 제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데, 아내의 얼굴을 보니까 한동안 참았던 눈물이 순간적으로 펑 터지더라고요. 너무 쪽팔려서(?) “아, 왜 자꾸 눈물이 나오지” 하면서 열심히 눈물을 닦았어요. 이대로 무너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 다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마음을 강하게 먹었고요. 송지영 저도 마음을 꽉 붙잡으며 씩씩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남편이 구속될 당시 입고 있던 옷, 코트, 구두, 벨트 같은 옷가지가 집으로 도착하던 날 감정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혼자 그것들을 하나하나 풀어보는데 희한하게도 신발을 보니 참 슬프더라고요. 그래서 신발을 끌어안고 정말 크게 소리 내면서 울었어요. 남편이 죄수복으로 갈아입고 신발을 벗는 모습을 상상하니까 정말 못 견디겠더라고요. 정봉주 나중에 아내가 그때 이야기를 편지에 적었더라고요. ‘짐승이 울부짖듯 울었다’라고 표현한 걸 읽으면서 마음이 참 아팠어요. 그런 말을 일찍 하면 제가 감옥 안에서 마음 약해질까봐 참고 참았다가 뒤늦게 털어놓은 거죠. 제가 사실 일부러 아이들 편지도 초반에는 절대 보내지 말라고 했거든요. 제가 무너질 것 같아서요. 그래서 아이들 편지도 6, 7개월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받았어요. 아이들과 면회도 그 후에야 했고요. Q 아버지의 수감 소식을 들었을 때 자녀분들의 충격이 꽤 컸을 것 같은데 어땠나요? 정봉주 작년에 큰아들이 중학교 3학년, 둘째 딸이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워낙 일찍 철이 들어서 그다지 큰 상처를 받지는 않았어요. 아이들은 이미 어릴 때부터 아빠가 국회의원이라는 것을 알고 거기에 맞춰서 살아왔거든요. 정치인 아빠에게 누를 끼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항상 어디에서든지 예의 바르게 행동해요. 물론 그런 생활에 대해 아이들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을지는 모르죠. 그래도 참 착해요. 제가 수감되고 나서도 주위 사람들이 “너희 아빠 요즘 뭐 하시냐”라고 물으면 정말 아무렇지 않게 “우리 아빠 감옥에 있는데요”라고 했대요. 나중에 면회 왔을 때도 엄청 밝았어요. “아빠, 여기가 교도소야?”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송지영 둘째 아이는 집에서 몇 번 운 적이 있어요. 남편을 보내고 한참 뒤 어느 날 아침에 “아빠가 꿈에 나타나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꼭 안아줬다”라면서 식탁에 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더라고요. 또 한번은 제가 몸이 안 좋아서 집에 누워 있었는데 제 곁으로 오더니 양 주먹을 불끈 쥐고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아빠가 무척 보고 싶다”라며 울더라고요. 그 때 딸아이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나요. 웬만하면 그런 분위기를 절대 안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딸이 저를 위로하고 제 등을 다독여주더라고요. 남보다 일찍 철이 들기도 했지만, 이런 일을 겪으면서 아이들이 더 어른스러워진 것 같아요. 지구 1+1/4바퀴와 맞먹는 소통의 거리 정봉주 전 의원은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2011년 12월 26일 서울 구치소에 수감됐고, 해를 넘겨 1월 17일에는 충남 홍성교도소로 이감됐다. 교도소 생활을 시작한 지 20여 일 만에 갑자기 지방으로 옮겨 가게 된 것을 두고 일각에서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그의 지지자들은 더 단단하게 결집했다. 비록 선거법상 향후 10년간 공직 선거에 출마할 수 없게 된 사실이 그동안 열심히 달려온 정치인 정봉주의 심장을 뻥 뚫어버리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는 가족과 팬들의 위로와 격려에 힘을 얻고 답답한 시간을 잘 견뎌낼 수 있었다. Q 부인께서 일주일에 두세 번씩 꼬박꼬박 면회를 가셨다면서요. 정봉주 어떤 수학자께서 제 아내가 저를 만나기 위해 서울과 홍성을 오간 거리를 수학적으로 계산해주셨는데, 그게 무려 지구를 1+1/4바퀴 도는 거리와 맞먹는다고 하더라고요. 정말로 매주 두세 번씩은 꾸준히 왔다 갔거든요. 남편인 제가 생각해도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에요. 기본적으로 저에 대한 사랑이 바탕이 되어서 그런 거겠지만, 아무래도 갇혀 있는 삶에 대한 안타까움도 커서 더욱 그랬던 것 같아요. 송지영 가뜩이나 호기심도 많고, 주변 일들 하나하나에 관심도 많은 사람인데 감옥 안에서 얼마나 바깥세상 일들이 궁금하고 신경 쓰일지 제가 누구보다 잘 아니까 남편이 더욱 안쓰러웠어요. 그래서 제가 이 사람을 조금이라도 덜 답답하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자꾸만 먼 길을 달려가게 됐고요. Q 편지도 자주 주고받으셨어요? 송지영 요즘은 교도소가 좋아져서 인터넷으로도 편지를 보낼 수 있어요. 법무부 홈페이지에 가입해서 오후 4시 안에 이메일을 써서 보내면 당일에 바로 남편이 편지를 받아볼 수 있더라고요. 처음에는 그걸 몰라서 계속 손으로 편지를 써서 부쳤거든요. 정봉주 아내가 저의 비서 역할을 완벽하게 해줬어요. 덕분에 몸은 갇혀 있어도 답답하지가 않더라고요. 게다가 제 팬클럽 ‘미권스(정봉주와 미래 권력들)’ 회원들이 그날 기사들을 취합한 것과 SNS 내용, 주요 이슈 키워드를 정리해서 보내주고 심지어 팬클럽에 올리는 글에 대한 댓글까지 모두 뽑아서 보내줬거든요. 그 덕분에 안에서 밖의 정치 상황을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었어요. 바빠서 신문도 잘 안 읽고 넘어가는 현직 국회의원들보다도 오히려 제가 현실을 더 객관적으로 ‘빠삭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거죠(웃음). Q 그동안 부인께서 가장 역할을 맡아 한창 크고 있는 두 자녀를 혼자 책임지면서 경제적인 부분을 해결해나가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송지영 맞아요. 면회를 자주 다니면서 남편의 비서 역할을 하고, 아이들까지 돌봐야 하다 보니 제 일을 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했어요. 남편이 수감 전에 썼던 책에서 나오는 인세와 예전에 조금 벌어놨던 돈을 쓰면서 최소한의 생활비로만 살았죠. 그런데 사실 따져보면 아이들의 교육비와 생계에 기초가 되는 비용 등을 제외하고는 돈이 거의 필요하지 않았어요. 남편을 지지해주시는 분들이 쌀이나 된장을 보내주고, 아이들의 생일이면 꽃다발과 케이크 선물도 챙겨주셨거든요. 설날에는 떡국 끓여 먹으라고 떡을 보내주시기도 했고요. 그래서 정말 적은 생활비로도 버틸 수 있었어요. 다만 남편의 면회 비용으로 한 달에 기본 2백만원 이상은 들었어요. 밥값과 자동차 기름값이 대부분이었죠. 그런데 그 돈도 남편 팬클럽 회원분들이 모금을 해서 마련해주셨어요. 그분들 아니었으면 어떻게 감당했을지 상상이 안 돼요. 정말 감사해요. 정봉주 지지자들의 힘이 정말 컸어요. 특히 ‘미권스’ 회원들이요. 면회를 신청하시는 분들이 무척 많아서 하루에 5명씩 면회 신청자를 받기까지 했죠. 경쟁률이 치열했어요. 제주도에서 몇 번이나 찾아오시는 분도 계셨고요. 팬클럽 회원들 중에는 좋은 직장에 다니는 분들도 있지만 비정규직으로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분들도 많아요. 그렇게 열심히 살면서 저를 찾아와 영치금까지 넣어주시는 걸 보면서 정말 울컥했어요. 한번은 3만원의 영치금과 함께 편지 한 통이 왔어요. 한진중공업 하청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분에게 3만원이 얼마나 큰 금액인지 잘 아는데, 그 귀한 돈을 제게 보내시면서 편지에다가 “그곳에 계시는 의원님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앞으로도 잊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의원님이 저희를 잊지 말아주세요”라고 쓰셨더라고요. 그걸 읽으면서 정말 하염없이 울었어요. 옥석 가려내고 ‘몸짱’으로 거듭나게 한 ‘홍성 불가마’ 지난 9월 가석방 예비 심사에서 모범수에 해당하는 S1 등급을 받았지만 법무부는 정봉주 전 의원의 가석방을 불허했다. “정치인 최초로 만기 출소라는 진기록까지 세웠다”는 정봉주 전 의원은 1년의 시간을 결코 억울해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도자기에 비유한다. 뜨거운 불 속에서 불순물을 걸러내는 과정을 반복하며 도자기는 더 고운 질감과 빛깔을 만들어내듯, 그 역시 자신의 내외적인 불순물을 걸러내고 더 단단해질 수 있는 기회를 준 홍성교도소를 ‘홍성 불가마’라고 부르며 뜨거웠던 지난 시간을 기억한다. Q 수감생활로 인해 잃은 것도 많았을 것 같아요. 현실적으로 어떤 부분들이 힘드셨나요? 정봉주 아마도 이런 기회가 없었으면 주변 사람들 중에 옥석을 가리지 못했을 거예요. 감옥에 있으면서 새삼 깨닫게 된 사실은 적은 겨드랑이 밑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점이에요. 송지영 남편이 갇혀 있는 동안 측근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변하기 시작했거든요. 당연히 교도소 들어가기 전에는 남편 곁을 지켰는데, 수감되고 나니까 남편이 이뤄놓은 작은 것들을 마치 자신들의 권력으로 생각하고 좋지 못한 행동들을 하더라고요. 배신감이 컸죠. 믿었던 사람과의 인연을 잘라내야 했고요. 남편도, 저도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으면서 참아내야 했어요. 저는 진심으로 남편의 수감생활이 가슴 아프지만, 이런 일들을 겪고 나서는 오히려 ‘만약에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정치인으로서 이 과정을 겪지 않았다면 큰일 났을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그 덕분에 이제는 사람 보는 눈이 생겼어요. 정봉주 믿었던 사람들이 아내에게 폭언을 하고 무시하기까지 했어요. 당연히 저보다 아내가 마음에 더 큰 상처를 입었죠. 오랫동안 깊이 믿어왔던 사람이 내게 등을 돌리고 탐욕에 가득 찬 사람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살아온 삶에 대한 자괴감이 심했어요. 그 와중에 아내가 혼자서 제 일을 다 해내는 걸 보는 게 고통 중의 고통이었고요. 한번은 너무 열이 받아서 저희 부부를 힘들게 한 사람들을 향한 분노의 편지를 썼어요. 다음날 그 편지를 다시 읽은 뒤 찢어버렸지만요. 그런 식으로 감정을 삭인 거죠. ‘에휴, 이게 결국 인간사이고 그냥 내가 이 감정을 접는 수밖에 없겠구나’ 하면서 썼다가 찢어버린 편지가 수십 통이에요. 그러면서 분노를 받아들이고 다시 정제된 감정을 되찾는 것도 큰 공부가 됐어요. 그래도 덕분에 주위에 있는 사람과 큰일을 할 때 이 사람이 나와 손을 잡아도 되는 동지인지 아닌지 확실히 가려낼 수 있게 됐어요. 송지영 저도 그랬어요. 주변 사람들의 악행을 글로 남겨놨어요. 미리 보여주면 감정만 더 상할 거 같아서 혼자 간직하고 있다가 남편이 출소하고 나서야 보여줬죠. 정봉주 뒤늦게 깨닫고 보니 저는 그동안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살아왔더라고요. 야단치고 가르치지 못할 거면 그냥 내쳤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고요. 정치라는 건 귀한 도자기 하나를 빚어서 거기에 맛있고 몸에 좋은 음식을 담아 국민에게 잘 먹여야 하는 건데, 아무래도 불순물이 들어간 도자기는 음식을 제대로 담기도 전에 쉽게 깨지게 마련이죠. 그런 점에서 볼 때 홍성교도소에서 보낸 시간은 제가 정치를 해나가는 데 해로운 불순물을 모두 태우는 감사한 기회였어요. 그래서 저희 부부는 홍성교도소를 ‘홍성 불가마’라고 불러요. 엄청 뜨거운 불가마에서 태울 건 다 태우고 좋은 것들만 살아남아 비로소 저를 더 깨끗하고 단단하게 완성시킨 거죠. Q 출소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는 기분이 어떠셨나요? 송지영 남편이 입던 옷을 벗어두고 간 그 자리에 1년 동안 그대로 놔뒀어요. 그러고는 남편 생각이 날 때마다 그 옷 냄새도 맡고 안아보면서 그리움을 달랬거든요. 한편으로는 1년간 이전과 전혀 다른 생활을 해온 남편이 돌아오면 어떤 일들이 생길까 이런저런 걱정을 했어요. 그런데 남편은 마치 어제 출장 갔다가 오늘 돌아온 사람처럼 변한 게 하나도 없었어요. 그게 정말 신기하더라고요. 하물며 외국을 며칠 다녀오더라도 시차 적응을 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게 당연한데, 이 사람은 1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왔는데도 전혀 변화가 없었어요. 특별히 먹고 싶은 것도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좋아하던 회를 1년이나 못 먹었는데도 회 먹으러 가자는 얘기조차 하지 않았어요. 정봉주 마음의 성찰이 완전히 이뤄진 거죠. 제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제가 살아가는 삶의 한 부분일 뿐이라는 깨달음을 얻었거든요. 고통스러웠던 시간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그냥 잠깐 잠을 자고 꿈에서 깨어보니 몸과 마음이 좋아진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출소하고 나서 도올 선생님과 명진 스님을 만났는데, 명진 스님께서 저더러 여느 스님들보다도 도력이 깊어졌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Q 마음뿐만 아니라 몸의 변화도 큰 것 같아요. 식스팩 복근을 가진 ‘중년의 몸짱’으로 돌아오셨잖아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정봉주 처음에는 이러다 죽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수감생활의 고통을 잊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어요. 하루에 두 시간 반 동안 운동했죠. 근육을 단련하기 위해서는 매 시기마다 어느 한계점을 넘어서야 하는데, 제가 하루에 팔굽혀펴기를 2백 개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1천 개씩 했어요. 기온이 35℃가 넘는 한여름에 좁은 감옥 방에서 그렇게 하다 보면 제가 흘린 땀으로 장판이 흥건했어요. 그래도 멈추지 않았어요. 수감생활을 버텨내는 방법이기도 했지만 저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했죠. 또 제가 얼마나 이 삶을 치열하게 살고 있는지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기도 했으니까요. 몸은 시각적으로 바로 보이는 거잖아요. 복근 하나만으로도 제가 이 안에서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느끼게 해주고 싶었죠. 저 때문에 교도소 안의 다른 재소자들 사이에서 헬스 열풍이 불기도 했어요. Q 탄탄한 근육들을 잔뜩 품고 돌아온 남편을 보면서 부인께서도 기분이 좋으셨을 것 같아요. 송지영 그렇죠. 남편 몸이 좋아지니까 새로운 남자와 사는 것 같은 기분도 들어요(웃음). 하지만 무엇보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렇게 건강해져서 돌아온 것에 정말 감사해요. 남편은 요즘도 팔굽혀펴기를 1천 개씩 하는 등 운동을 굉장히 열심히 해요. 그래서인지 저까지 긴장돼요. 저도 열심히 운동해서 뱃살 안 생기도록 노력해야겠어요(웃음). 서울 토박이 부부, 봉화 시골 마을로 떠나다 ‘정봉주’ 하면 ‘노원구 월계동과 공릉동을 지역 기반으로 하는 제17대 국회의원’이라는 그의 자기소개를 떠올릴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그가 정치적 고향 노원구를 떠나 경상북도 봉화군 비나리 마을로 이사를 결정했다. 누가 봐도 과감한 선택이다. 아이들은 학교 문제로 인해 이모 집에서 지내게 될 예정이란다. 서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내내 살아온 도시 남녀가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던 진짜 시골생활을 중년의 나이에 시작한다니, 설레면서도 두려움이 클 만도 하다. 대체 어떤 마음으로 새로운 도전을 결심했는지 속사정이 궁금하다. Q 봉화행 결정은 정말 의외인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가요? 정봉주 제가 봉화 정씨예요. 또 봉화는 제 조상인 삼봉 정도전의 철학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고요. 아버지의 고향인 봉화에서 정도전이 조선 맹자학의 시초와 뿌리를 내렸죠. 사실은 수감 기간 동안 정도전과 맹자에 대한 공부를 좀 했는데 진도가 통 안 나가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다짐했어요. 출소하면 봉화군으로 내려가야겠다고 말이죠. 그러던 차에 미국 존스홉킨스대학교로부터 장학금과 생활비를 지원할 테니까 오라는 제의를 받았어요. 아내는 좋은 기회이니 미국에 다녀오자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미국이 아니라 봉화로 가자고 얘기하니까 처음에는 “엥?” 하고 놀라더라고요(웃음). Q 그러실 수 있죠. 이사라는 건 남편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부인의 의사도 굉장히 중요한데, 어떻게 합의를 하셨나요? 정봉주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도올 선생님과 식사를 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그때 아내가 도올 선생님께 조언을 구해보자고 하더라고요. 도올 선생님은 제 얘기를 듣자마자 “미쳤냐. 미국? 거긴 왜 가냐. 걔네가 우리나라에 와서 배워야 한다. 봉화가 훨씬 좋다. 무척 신선하다. 봉화로 내려가는 건 정말 생각 잘한 거다”라며 적극적으로 봉화행을 권하셨어요. 미국에 가는 것보다 일단 봉화에 가서 제 뿌리에 대해서부터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요. 그렇게 결정이 된 거죠. 송지영 저는 개인적으로 예전부터 유학에 대한 아련한 꿈이 있었어요. 참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냥 봉화에 가기로 합의를 했어요. 일단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첫 번째는 이런 말 하기 쑥스럽지만 남편을 사랑하니까 남편의 뜻과 함께하고 싶었어요. 1년 동안 떨어져 지내서 그런가?(웃음) 특별히 말릴 이유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남편은 이미 정치적 삶에 들어섰으니까, 더 큰 뜻을 위해 가야 할 길이라면 반대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두 번째는 저도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도전을 해보는 게 괜찮을 것 같았어요. 제가 하는 인테리어 디자인이라는 게 늘 새로운 작업에서 영감을 받고 뭔가를 창조해내는 일이잖아요. ‘다이내믹한’ 남편 옆에서 그동안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리얼한 시골생활을 해나가면서 또 다른 재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물론 불편하고 힘든 일도 있겠지만 그만큼 얻는 것도 많을 것 같아요. 다만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게 좀 걸리긴 해요. 정봉주 봉화로 내려가는 또 다른 이유는 FTA 협정 때문에 다 죽어가는 농민들 곁에서 직접 무엇이라도 해보고 싶기 때문이에요. 농업은 모든 경제의 기본이에요. 농민들은 도시에서 살려야 돼요. 도시와 농촌이 연계돼서 한민족 네트워킹을 잘해나가면 농촌을 살릴 수 있어요. 제가 내려가서 농촌과 도시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싶은 마음도 커요. 말로만 농민을 살리자고 할 게 아니라 직접 그 사람들과 함께 먹고 생활하면서 삶을 나눠가다 보면 더 많은 게 보이지 않을까 싶어요. 정봉주 전 의원이 ‘전격 공개’했다. 그의 치열한 의지가 만들어낸 탄탄한 근육!Q 그곳에서의 구체적인 계획들이 있나요? 정봉주 봉화에 내려가서 살고 싶다고, 그곳에 대한 정보 좀 달라고 트위터에 글을 남겼더니 연락이 많이 왔어요. 그중 가장 적극적이었던 분이 비나리 마을에 살고 있다고 해서 아내와 같이 직접 내려갔죠. 시골 마을이지만 귀농인들이 꽤 있어서 전원주택과 마을공동체가 잘 형성돼 있더라고요. 저에게 추천해주신 분도 15년 전에 귀농해서 빌라를 짓고 살고 계셨어요. 한 건물에 여섯 세대가 모여 사는데 그중 한 집에 들어가서 살아보기로 했어요. 1년에 5백만원을 내면 방 두 개에 거실 하나인 25평 규모의 현대식 집에서 살 수 있어요. 1년 후 귀농에 성공해 정착을 하면 그중 2백만원을 돌려받지만, 서울로 돌아간다면 못 받는 거죠. 어차피 저희 부부에게 지금 당장 집을 살 돈도 없으니 일단 임대를 해서 살아볼 계획이에요. 거기 살면서 농민의 삶도 경험해보고, 비나리 마을의 특산품을 전국화시켜서 도시와 농촌을 연계해나가는 게 제가 하고 싶은 가장 큰 일이에요. Q 부인께서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세요? 송지영 비나리 마을에 화가가 한 분 살고 계신데, 마을 사람들에게 생활도자기 공예를 가르쳐주시더라고요. 마침 제가 대학에서 도예를 전공했거든요. 그곳에서 함께 생활도자기를 만들어서 판매도 하고, 도예 체험 캠프도 열어볼 생각이에요. 인터뷰를 마치며 정봉주·송지영 부부는 이르면 2월 중으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봉화군으로 내려갈 것 같다고 했다. 봄을 채 맞이하기도 전, 추위가 맹위를 떨치기로 전국적으로 이름난 봉화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두 사람은 오히려 담담해 보였다. 힘들었던 시간을 이겨내자마자 또 다른 도전을 선택한 부부. 위기를 기회로 삼으며 인생의 시련을 지혜롭게 극복해내는 방법을 터득한 그들을 이젠 그 무엇도 흔들지 못할 것 같다. 「레이디경향」 독자들을 위한 정봉주의 컴백 기념 선물 여전히 유쾌하지만 분명 변했다. 모든 이야기의 주제가 결국 자기 자랑으로 끝나던 ‘깔때기’ 화법이 확 줄어들고, 그 자리에 ‘사색과 성찰’이 자리를 잡았다. 정봉주 전 의원은 옥중에서 수백 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도올 김용옥 선생과 명진 스님, 제레미 리프킨 등 시대의 지성들과 교류하면서 생각의 깊이가 더 깊어졌고, 사고의 폭도 넓어졌다. 그는 지난 1년간 그렇게 더 단단해졌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출소 이후 한동안 칩거하며 옥중에서 쌓은 내공을 담은 한 권의 책을 내놓았다. 정 전 의원은 “독하게 공부하고, 치열하게 반성하고, 뜨겁게 사색했다. 지금 성찰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감이 이 책을 만들었다”라며 “이 한 권의 책에 나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라고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윤현진(프리랜서) ■사진 / 안진형(프리랜서) ■사진 제공 / 정봉주 ■장소 협찬 / 스튜디오 하늘(070-1544-7000) ■헤어&메이크업 / W퓨리피(02-549-6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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