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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20·30대 여성 타깃 ‘자본주의 패션’ 강력 단속 나섰다
- 2022. 05. 11 09:34 패션
- 최근 북한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일명 ‘자본주의 스타일’에 대해 북한 정부의 강력한 단속과 제재가 이어지고 있다.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북한이 젊은층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일명 ‘자본주의 패션’에 대해 더욱 강력한 단속에 나섰다. 미국 매체 인사이더는 미국 비영리 언론인 ‘라디오 프리 아시아(Radio Free Asia)’의 내용을 인용해 “최근 북한이 피어싱, 스키니 청바지, 염색 헤어스타일, 영문 로고가 있는 의상 같은 ‘자본주의 패션’에 대해 더욱 강한 단속에 나섰다”고 전했다. 또한 매체는 “패션 단속은 특히 20~30대 여성을 타깃으로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 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청년동맹)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 갈색 머리 염색 그리고 외국 글자가 크게 쓰여있는 옷, 스키니 진 패션을 반사회주의적 관행이자 자본주의적 행위로 규정하고 단속에 나섰다. 만약 한 사람이 단속당했을 경우 순찰대는 비슷한 스타일을 한 젊은이들이 더 없는지 그 지역을 샅샅이 뒤지고 적발한 이들을 청소년 연맹 사무실로 데려간다. 단속된 범법자들은 서면으로 그들의 ‘범죄’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북한 당국이 ‘허락한 스타일’의 옷을 가져다주고 환복 후에야 풀려날 수 있다. BBC에 따르면 북한이 서구 패션 트렌드를 금지한 배경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연설이 있다고 보도했다. 김 위원장은 최근 연설을 통해 서구의 헤어 스타일과 의상은 ‘위험한 독’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에 북한은 올바른 패션 스타일에 대한 전국적인 ‘교육회’를 열기도 했다. 라디오 프리 아시아는 “심각한 경우 적발된 이의 근무지에 적발 사실이 통보되고 이름과 집 주소, 직장 등의 정보가 방송을 통해 공개된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한 북한의 한 익명 제보자는 “강력한 단속 하에서도 북한 젊은이들은 외화나 TV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입으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 북한군보다 강하고, 호환마마보다 무섭다? 사춘기의 최고점 ‘중2병’ 대탐구
- 2013. 07. 08 15:38 육아/교육
- 반 애들이 보는 앞에서 선생님에게 질 수 없다는 허세와 엄마에게 밀릴 수 없다는 오기 그리고 친구 패거리에 대한 집착으로 귀결되는 중2병. 세상이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소리치며 지질해 보일 바엔 죽는 게 낫다고 말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면 “오 마이 갓!”이란 탄식이 절로 나온다. 중2병, 사춘기의 다른 이름 요즘 ‘중2병’이 화두다. 아이가 말대꾸만 해도 중2병이라 하고, 허락받지 않고 머리 염색을 하거나 치맛단을 줄여도 중2병인 것 같다고 하소연이다. 초등학생이나 고등학생이 이유 없이 반항하고 속을 썩이면 중2도 아닌데 그런다고 걱정을 한다. 중2병의 본래 뜻은 중학교 2학년 또래의 사춘기 청소년들이 흔히 겪게 되는 심리적인 상태를 빗댄 말로 자아 형성 과정에서 ‘자신은 남과 다르다’ 혹은 ‘남보다 우월하다’ 등의 착각에 빠져 허세를 부리는 사람을 얕잡아 부르는 일종의 인터넷 속어다. 1999년에 일본의 한 라디오 방송에서 처음 사용됐는데, 그 뒤 우리나라에서는 의미가 조금 변질돼 연령대를 불문하고 사용된다. 중2병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널리 알려진 중2병의 전형적인 ‘증상’을 살펴보면 된다. ‘서양 음악을 듣기 시작한다, 맛도 없는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다, 인기 밴드에 대해 뜨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정색한다, 무엇이든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엄마에게 프라이버시를 존중해달라고 말한다, 사회와 역사에 대해 좀 알게 되면 ‘미국은 추잡하다’ 라고 한다등이 있다. 사춘기 특유의 감수성과 상상력, 허세가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 할 점이 있다. 왜 중학교 2학년이 사춘기 특유의 심리 상태를 표현하는 대표 학년으로 지목됐는가, 하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그 원인을 크게 세 가지로 꼽았다. 아직 성인에 미치지 못하는 초등학생과는 달리 성인에 가깝게 신체 발달이 이루어지는 시기라는 점과 대학 입시에 부담이 큰 고등학생과 달리 상대적으로 학업에서 자유롭다는 점 그리고 인터넷 발달로 정보 획득이 용이하다는 점이다. 특히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요즘 아이들의 인터넷 사용이 사춘기의 큰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요즘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 아이들은 없다. 이것은 어른과 아이가 접하는 정보가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른과 아이의 구분이 없어진 것이다. 과거에 어른이 어른일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이 모르는 정보를 먼저 배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어른들이 아이들에 비해 지식이 달리는 형국이다. 그러니 아이들을 통제할 수도 통제될 리도 없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어른의 지혜가 아닌 단순 정보에 불과한 지식이라도 말이다. 한창 반항기에 접어든 아이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꼴이랄까. 무엇이 괴로울까?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의 ‘2012년 상담 경향 분석 보고서’에 의하면 청소년들의 상담 요청 고민들은 가족, 일탈 및 비행, 학업과 진로, 성, 성격, 대인관계, 정신건강, 생활습관 및 외모, 컴퓨터·인터넷 사용, 정보 제공, 법률 정보, 활동, 기타의 13가지 카테고리로 분류된다. 그중 총 1만1백66건의 상담을 분석한 결과 우울·위축, 강박·불안, 충동(분노) 조절 문제, 자살·자해 등 정신건강과 관련된 상담이 전체의 약 25.5%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대인관계(24.9%), 가족 문제(14.2%)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상담 요청 학생은 중·고등학생이 가장 많았고, 호소 영역별로는 초등학생은 가족 문제, 중학생은 대인관계, 고등학생은 정신건강에 대한 것이 많았다. 남녀 청소년의 호소 유형에도 차이가 있었다. 남학생의 경우 인터넷 과다 사용이나 충동적이고 공격적인 성격, 학교폭력, 학교생활 부적응, 등교 거부 등 주로 외형적인 행동으로 문제를 드러내는 경향이 강했고, 여학생의 경우 소극적이고 과민한 성격이나 친구관계, 따돌림 및 왕따, 자해와 자살 문제 등 관계와 성격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특히, 자해와 자살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향은 여학생이 훨씬 두드러졌다. 「십대들의 쪽지」 발행인 강금주 변호사는 1980년대 후반 정도까지는 이성 문제로 인한 상담 요청이 가장 많았다고 했다. 그 다음으로 성격이나 외모 고민, 친구 문제 정도다. 친구 문제의 내용도 싸운 친구와 화해하는 방법이나 진정한 친구 찾기와 같은 다소 순수한 고민들이 주를 이뤘다. 그런데 2000년을 지나면서 그 상담 내용은 급속히 변했다. 무엇보다 성 문제에 대한 변화가 크다. 단순 이성 교제나 성 지식에 대한 고민에 지나지 않던 질문은 완전히 끊겼다. 인터넷을 통해 다 충족되기 때문에 궁금한 점이 없어진 것이다. 대신 성폭행이나 성추행 등 성 관련 문제들에 대한 문의가 증가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이전에도 이런 문제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 쉬쉬하던 것과는 달리 드러내놓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로 변한 데다 성교육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강 변호사는 청소년 성 문제의 경우 완전히 ‘성인 사회의 축소판’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 성추행 같은 일은 보상받을 수 있는 ‘건수’로 생각하는 경향마저 있어 놀라움을 자아내고 있다. 부모는 아이를 너무 모른다 사춘기 자녀 문제로 어려움을 호소하는 부모들이 많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답답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욱이 덩치까지 커버린 ‘어른 아이’의 폭주를 감당하지 못해 두려움마저 느끼는 경우가 태반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변했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사춘기 문제들의 종류가 늘고, 그 내용이 다양화되긴 했지만 이전에 없던 문제가 새로 생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금 부모들이 겪고 있는 아이들의 문제는 이전에도 있어왔던 것이며 오히려 변한 쪽은 부모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모들은 기본적으로 사춘기 아이들의 특성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기초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소식을 접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아이’의 이야기일 뿐, 자신의 아이와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 아이 문제가 어렵고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아이를 파악하지 못하니까 말이다. 아이에게 직접 도움을 주고 해결하기보다는 학원에 보내듯 외부의 도움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정신과 진료를 받게 하고 있다”, “무료 상담이라 효과가 없는 것 같아 유명 심리치료로 바꿔주었다”라면서 부모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하고 면피하려 한다. 자신은 할 도리를 다 했다는 것이다. 분명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하지만 부모가 아닌 타인에게 아이를 무조건 맡기려는 자세는 되레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심지어 일부 아이들은 심리적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는 것에 대해 스스로 장애아라고 받아들이기도 하기 때문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또 전문가들은 사춘기 자녀 문제에서 일정 부분 학교 선생님의 권위를 인정해주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아이의 학교생활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분명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부모가 알고 있는 자녀의 모습은 극히 일부다. 학교에서의 내 아이, 친구들 안에서의 내 아이는 집에서의 모습과 완전히 다를 수 있다. 비록 선생님에게 조금 부족한 면이 보일지라도 최소한 아이들 앞에서는 선생님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태도를 유지할 것을 전문가들은 권했다. 그래야 아이들도 선생님 말을 듣고 학교생활 또한 지도가 가능해진다. 결과 아닌 자연스러운 과정 ‘상상 속의 관중’이라는 말이 있다. 사춘기 아이들은 그만치 타인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한다. 그래서 부모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문제를 단순히 ‘쪽팔리다’라는 이유로 격렬하게 반항하거나 거부하는 것이다. 사춘기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스스로를 ‘남과 다르다’라고 전제하며 사고한다. 예를 들면 어른들 눈에는 위험천만해 보이는 오토바이를 면허도 없이 운전해 질주하는 데에는, 자신은 죽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발달이 우리 아이들의 사춘기를 더욱 심화시키기도 했다. 인터넷 게임이나 스마트폰을 통해 나쁜 성인문화까지 빠르게 배운다. 아이들은 자살부터 왕따까지 모방하기가 무척 쉬워졌다. 여기에 학업 스트레스까지 더해져 무기력증이나 우울증, 폭력적인 성향까지 정신적인 고통도 추가됐다. 사춘기 아이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는 과업을 진행 중이다. 중2병이란 ‘병’ 앞에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누가 뭐래도 아이들이다. 사춘기를 거치지 않고 어른이 될 수는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다 거쳐가는 과정이다. 아이가 말대꾸를 한다면, 아이가 방문을 잠그기 시작했다면, 아이가 머리에 염색을 하고, 교복 치마를 짧게 수선했다면 일단 화를 내기에 앞서 어떤 ‘단계’에 들어섰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부모가 훈육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어도 된다. 시간을 들여 관찰하면 부모는 본능적으로 다 알게 돼 있다. 관찰하고 대화하자. 어쩌면 그것으로도 많은 것을 풀 수 있다. 어떤 부모는 “담배 냄새를 폴폴 풍기는 녀석과 무슨 대화를 하냐”라고 성토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그 아이와 마주 앉은 덕택에 아이의 흡연 사실을 알게 됐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중2병도 결국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몸부림이다. 부모가 중심을 잡고 ‘너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애기해주어야 한다. 분명한 기준을 정하고 끝없이 대화하면 된다. 말을 해도 먹히질 않는다는 정도로 끝내는 게 아니라 아이가 받아들일 때까지, 아이가 변할 때까지 말하는 게 적정한 양이자 기간이다.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중2병 테스트 1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2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오랜 시간 망상에 빠져 스스로를 만화 주인공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 4 나 자신이 우울증에 빠졌다고 생각한다. 5 미니홈피나 블로그에 오글거리는 글을 많이 적어놓는다. 6 유난히 이성 앞에서 허세를 부린다. 7 비현실적인 소설을 쓴다. 8 혼자서 중얼거린다. 9 칼을 갖고 다니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10 파멸·피·광기 등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단어를 거리낌 없이 내뱉는다. 11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에게는 이유 없이 강하게 대한다. 12 뭐든 부정적으로 보는 성향이 크다. 13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말을 내뱉고는 멋있다고 생각한다. 14 나는 남들보다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15 스스로 큰 상처를 갖고 있다고 여긴다. 16 온라인에 쓰는 글에 ‘…’를 많이 붙인다. 17 주먹으로 벽을 치거나 가래침 뱉는 걸 자랑스럽게 여긴다. 18 깡패를 우상이라고 여긴다. 19 종종 자살을 생각한다. 20 아무 이유 없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남들을 바라본다. -체크된 항목이 10개 이상이면 중2병, 15개 이상이면 남에게 민폐 끼치는 수준, 18개 이상이면 상담이 필요하다. 중2병을 앓고 있는 사춘기 아이들의 실제 고민은 무엇일까? 사례 1 인터넷 게임에 중독됐어요(고3 남학생) 갑작스러운 부모의 이혼으로 인터넷 게임에 몰두하기 시작한 A군. 학기 중에는 컴퓨터 때문에 매일 지각해 학교에서 징계까지 받았다. 방학 중에는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 게임만 할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상담은 이렇게: A군과 A군의 어머니는 5개월 정도 각각 개인 상담을 받았으며, A군은 추가로 인터넷 중독 치유 학교에 다녀왔다. 현재는 게임을 전혀 하지 않고 있으며, 경제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대학 입시에 도전 중이다. 또한 체력관리를 위해 복싱학원에 매일 다니고 있다. 사례 2 끊임없는 자살 시도. 죽고 싶어요(중3 여학생) 엄마의 재혼으로 새아빠와 함께 사는 것이 너무 괴로운 B양.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항상 외롭고, 우울한 감정을 느낀다. 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상황이라 학비는 물론 급식비를 내는 것도 어려운 형편이다. 모든 것에서 좌절을 느끼며 집에 혼자 있을 때 습관적으로 손목을 칼로 그어서 자해를 했다. 또 자살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상담은 이렇게: 인터넷 채팅을 이용한 사이버 상담을 통해 개인 상담을 받게 된 B양. 상담자는 경제적으로 지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었고 정신건강의학과 치료와 약물치료를 받도록 하면서 상담을 병행했다. 그동안 힘들었던 속마음을 표현하게 하고, 정서적으로 안정이 될 수 있도록 지지해주며 친구를 사귀는 법에 대해서도 조언해주었다. 사례 3 친구 없는 학교생활이 무척 힘들어요(중3 여학생) 이사 이후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등하교를 하지 않게 되면서 그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학교 내에서 따돌림을 받게 됐다는 C양. 다른 친구들을 사귀어보려 해도 이미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친해진 아이들 틈에 끼는 것은 어려웠다. 친구 없이 혼자 학교생활을 한다는 것이 무척 힘들어 아침마다 울면서 학교에 간다고. 곧 2박 3일간의 학교 수련회가 있는데 친구 없이 잠까지 자야 하는 그 상황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고 호소했다. 상담은 이렇게: 힘들어하는 C양에게 충분한 공감을 해주며 정서적인 안정을 찾도록 했다. C양이 친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도했던 방법들을 같이 탐색해보았고, 어떻게 하면 원만한 교우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방법들을 지도해주었다. 또 수련회 참가 부분은 담임교사나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도록 권유했다. 사례 4 욱하는 성격, 친구를 때리게 돼요(중1 남학생) 운동선수를 목표로 하다가 그만둔 D군. 그로 인해 기초 학습이 부족해 수업시간에 집중하기가 어려웠고, 학교 공부를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욱하는 성격에 자격지심까지 더해져 힘이 없는 친구를 때리기도 했고, 학교 선생님들과 문제를 자주 일으켜 결국 강제 전학 직전에 이르게 됐다. 상담은 이렇게: D군은 자신도 착해지고 싶고, 성숙해지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계속 오해를 받게 됐고, 그때마다 화가 나서 마찰을 빚게 됐다고 한다. 정기적인 상담으로 학교폭력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대화와 감정 기술 등을 습득해 원만한 대인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분노를 조절하고 이를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훈련을 연습하게 했다. 사례 5 해준 것도 없이 간섭만 하는 부모님이 짜증나요(초6 남학생) 학교 갔다 집에 오면 엄마는 공부와 관련된 것만 물어보고 잔소리만 해서 괴롭다는 E군. 너무 짜증이 나고 화가 나서 자신도 모르게 부모님께 욕을 하고 물건을 집어던졌다. 그 일로 인해 아버지에게 심하게 체벌을 당했고 가출을 하고 싶다는 마음밖에 들지 않는다. 또 자주 싸우는 부모님 때문에 항상 짜증이 나고, 사사건건 간섭하는 엄마는 답답하기만 하다. 상담은 이렇게: 원만하지 못한 부부관계가 자녀에게 심리적인 불안정감을 형성한 것이다. 사춘기 자녀의 발달 과정에 대한 부모교육이 절실했다. 부모에게 화가 난 감정을 언어로 어떻게 표현하면 되는지 상담을 통해 연습하도록 했고, 자신이 부모님께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색해보았다. 청소년 상담과 동시에 부모교육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회복됐다. 사례 및 상담 결과 제공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 상담연구지원팀 Mini Interview “중2병, 원래 있어왔던 문제들로 목소리 커지고 더 많이 공개됐을 뿐!” 중2병을 앓고 있는 자녀로 인해 많은 부모들이 힘들어하고 있다. 문제는 늘 있어왔다. 없던 게 새로 생긴 건 아니다. 이전에는 아이 혼자 속상하고, 설레는 조용한 사춘기였다면 요즘은 드러낸다는 게 다르다. 다만, 사춘기로 표현되는 문제들이 매우 다양해져서 부모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더 어려워한다. 아이들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현장에서 느끼기엔 부모도 정말 많이 달라졌다. 부모가 달라졌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과거에는 아이 문제가 곧 부모 자신의 문제였다. 아이들을 상담소에 데리고 오더라도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라고 물었다. 하지만 요즘은 학원에 맡기듯 한다. “자, 아이 데리고 왔어요” 하고 뒤로 빠지는 식이다. 책임감이 없다기보다 요즘 부모들이 워낙 바쁘다. 자기 살기도 바쁜 거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진짜 어른이 얼마 없다. 사춘기 문제로 부모가 힘들고, 사회가 힘들다는 것은 우리가 아이들에게 버팀목이 돼줄 만한 어른 노릇을 못하고 있다는 것의 방증이다. 사춘기를 겪고 있는 아이들의 목소리는 커졌는데 그 목소리를 감당할 어른은 약해졌다. 중2병으로 대표되는 아이들의 고민이 궁금하다. 우리 원에서는 1년에 8만 건 정도를 상담한다. 상담 내용을 분류하면 13가지 카테고리로 정리된다. 그중 가장 많은 것은 대인관계이고 그 다음이 가족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따돌림 관련 문제가 증가했고, 가족 간의 갈등도 이전부터 있어왔지만 그 내용을 보면 옷차림이나 화장, 인터넷, 스마트폰 사용 문제 등 갈등거리가 다양해지고 주제도 새로워졌다. 엄마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문제를 하나 꼽는다면? 단연 스마트폰 문제다. 언제 사주면 되는지 물어올 정도로 꼭 사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해 조언하자면 안 사주면 좋겠지만(웃음), 사주어야 한다면 최대한 늦으면 늦을수록 좋다는 거다. 또 “알았어. 대신 공부나 잘해” 하면서 아무런 기준 없이 덥석 사주어도 안 된다. 스마트폰은 아이들의 생활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물건이다. 어떤 것을 구입할 건지, 요금제는 어떤 것을 선택할지, 어떻게 사용할 건지 아이와 상의하고, 일상생활에서도 아이와 합의된 규칙을 가지고 꾸준히 관리해야 한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부모들이 힘들다고 하지만 실상 아이가 특별히 나쁜 짓을 저질렀다기보다는 아이에 대해 부모로서 아는 것이 없어 놀라고 불안한 것이다. 요즘 부모는 너무 바빠서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자신의 아이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부모가 많지 않다. 같은 문제가 터져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부모들의 태도가 다른 것은 누가 얼마만큼 더 알고 있는가, 하는 정보의 차이다. 학원은 어디가 좋은지 알면서 아이 문제는 어디서 도움을 받고 상담받을 수 있는지는 모른다고나 할까. 부모가 성숙하지 않으면 아이 문제는 늘 어렵기만 할 것이다. 사춘기 자녀를 대할 준비, 알려고 하는 노력만으로도 많은 것이 개선된다. 아무리 혹독한 중2병을 앓았더라도 이겨낸 사례들이 있을 것이다. 중학생 아들의 인터넷 게임 문제로 상담을 요청받은 적이 있다. 아이를 만나보니 게임을 잘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나름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제지하니 문제가 생긴 거다. 상담을 진행하면서 알고 보니 어머니는 아이가 다니고 있는 학교의 선생님이었다. 아이는 자신이 24시간 감시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직장생활로 바쁜 엄마가 어린 시절 자신을 방치했다고 생각했다. ‘대체 엄마가 나한테 해준 게 뭐냐’라는 원망도 했다. 중요한 건 그 엄마의 자세였다. 아이의 문제가 자신에게서 비롯됐음을 인정하며 상담에 적극적이었고, 아이가 아닌 자신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아이에게 정식으로 사과도 했다. 어느 날 상담을 받고 돌아가는데, 엘리베이터에 탄 후 아이가 말없이 엄마 손을 꼭 잡더란다. 상담이 성공하려면 상담자와 아이, 부모 삼박자가 그야말로 잘 맞아야 하지만, 결국 성공의 열쇠는 부모가 가지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했다. 전문가의 구체적인 가드라인을 듣고 싶다. 청소년들이 가장 기대하는 사람이 신뢰가 가는 성인 친구라고 한다. 신뢰가 간다는 것은 일관성을 뜻한다. 성인 친구라는 것은 어른이되, 친구같이 동등한 위치를 말한다. 즉, 일방적인 관계는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녀가 사춘기가 됐다면 도 닦을 때가 됐다고 생각하라(웃음). 엄마에게 말대꾸하고 비꼬고 반항하는 것을 우리 쪽 전문 용어로 ‘게임 걸기’라고 한다. 아이들의 게임 걸기에 말려들면 안 된다. 그러면 싸움만 일어나고 엄마도 상처받는다. 엄마가 미운 게 그 시기 아이들이다. 애들은 애들대로 편한 것만은 아니다. 고민도 많고 진짜 힘들다. 어른으로서 단단하게 버텨줄 것을 부탁하고 싶다. 학부모들에게 당부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상담기관으로는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이 있고, 각 시도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청소년상담복지센터가 있으며, 교육부 쪽으로는 위(Wee)센터가 있다. 모두 무료다. 사춘기 자녀가 있다면 적어도 이 정도 기관은 알고 있는 게 좋다. 그리고 사설 상담기관들을 이용하려면 상담자가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 정도는 확인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심리, 교육, 사회복지 등 관련 학과 전공을 기본으로 상담과 관련된 국내 학회가 두 군데 있는데, 적어도 학회 발급 상담 자격증은 갖고 있어야 어느 정도 공신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강은진(객원기자) ■사진 / 조민정, 안진형(프리랜서) ■도움말 / 이영선(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 상담 교수), 강금주(「십대들의 쪽지」 발행인)>
- [동네 이야기]북한산 둘레길 걷기
- 2010. 10. 13 15:08 레저/여행
- ㆍ개성 만점 13구간, 어느 길 걸어볼까 북한산 국립공원 외곽을 싸고도는 북한산 둘레길이 개방되며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에 이어 서울에도 걷고 싶은 길이 열렸다. 북한산과 도봉산 산자락을 휘감으며 2개의 동심원 형태로 이어지는 북한산 둘레길은 누구나 쉬엄쉬엄 걸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길이다. 북한산 둘레길은 기존의 샛길을 연결하고 다듬어 북한산 자락을 완만하게 걸을 수 있도록 조성한 저지대 수평 산책로다. 전체 63km 중 현재 개통된 구간은 서울시 구간과 우이령길을 포함한 44km. 물길과 흙길, 숲길, 마을길과 같은 다양한 표정의 길들이 소나무숲길, 순례길, 흰구름길, 솔샘길 등 13개의 테마를 가지고 이어진다. 9곳의 전망대, 벤치와 침상 등 35곳의 쉼터에서 북한산과 서울시의 전경을 만끽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둘레길 곳곳에 자리 잡은 유적지와 공원, 체험관을 통해 역사와 문화, 숲의 생태를 만나볼 수 있어 아이들과 함께하기에도 좋다. 북한산 둘레길이 시작되는 소나무숲길 구간은 웅장하면서도 우아한 자태의 소나무 숲 사이로 산책로가 드리워진 길이다. 길이 넓고 완만해 산책을 즐기기에 제격. 강렬한 송진 향이 온몸을 감싸고 북한산 둘레길 중 유일하게 우이계곡을 따라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순례길은 헤이그 밀사인 이준 열사와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독립유공자 묘역이 조성된 구간이다. 나룻배를 띄울 수 없는 낮은 강에 통나무와 솔가지, 흙을 이용해 만든 ‘섶다리’를 건널 수 있다. 북한산 둘레길 13구간을 한눈에 안내받을 수 있는 둘레길 탐방안내센터도 잊지 말고 들러보자. 12m 높이의 구름전망대가 설치된 흰구름길은 앞의 두 구간에 비해 다소 오르내림이 있는 구간인데 2시간 정도 여유를 갖고 걷는 것이 좋다. 리드미컬하게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숨이 차오른다 싶을 때쯤 구름전망대를 만날 수 있다. 북한산과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용마산, 아차산의 탁 트인 풍광과 장난감같이 작아진 서울의 풍경이 한눈에 펼쳐지고 시원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이 어느새 바람에 씻겨진 지 오래다. 그 밖에도 평창동 마을과 사지능선이 함께 어우러진 평창마을길 구간, 둘레길 중 유일하게 성문을 통과하는 구간은 옛성길 구간, 구기터널 상단 지역의 계곡을 횡단하는 60m 길이의 스카이워크를 걸으며 주변 경관을 즐길 수 있는 구름정원길 구간 등 개성 만점의 13구간이 이어진다. 길을 잃을 걱정은 접어두자. 곳곳에 설치된 안내판과 탐장지원센터가 방문객들의 길잡이가 되어준다. 함께 걷다 보면 더욱 즐거운 길, 북한산의 가을을 걸어보자. 북한산 둘레길 가는 길 ● 북한산 둘레길 13구간은 크게 소나무숲길~솔샘길 구간, 명상길~구름정원길 구간, 마실길~우이령길 구간으로 나뉘며 원하는 코스를 선택해 즐길 수 있다. 우이령길 입구에서 시작되는 소나무숲길은 수유역 3번 출구로 나와 120번, 153번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하차, 5분 정도 걸으면 입구에 다다를 수 있다. 2구간인 명상길은 길음역 3번 출구에서 143번, 110B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하차, 5분 정도 걸어 정릉주차장에서 시작된다. 마실길 구간은 진관생태다리 앞에서 시작되는데 구파발역 3번 출구에서 마을버스 7724번을 타고 진관외동 종점에서 하차, 3분 정도 걸으면 시작점을 만날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북한산 국립공원 홈페이지(http://bukhan.knps.or.kr)를 참고하자.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이성원, 노정연>
- 동네 이야기
- 월드컵 스타, 북한 대표 정대세는 왜 울어야 했을까?
- 2010. 07. 29 16:21 화제
-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은명실 공히 스타 탄생의 무대였다.발 빠른 공격수로 큰 두각을 보였던북한 대표 정대세가 그 중 하나다.그는 월드컵 본선 첫 경기 시작 전,북한 국가가 울려 퍼지자눈물범벅이 되도록 우는 바람에화제가 되기도 했다.그는 왜 그리 서럽게 울었을까. 월드컵 개막 시합에서 흘린 눈물의 의미 정대세(26)를 말하려면 일본 사회 재일교포들의 삶을 먼저 알아야 한다. 일본에 재류하는 외국인들은 ‘외국인 등록법’에 따라 외국인 등록을 해야 한다. 재일교포들은 한국 국적을 갖거나 ‘조선’이라 불리는 북한 국적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엄밀히 말해 북한 국적은 국적이라 말할 수 없다. 일본과 국교 수립이 안 된 북한은 국가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북한을 나라로 정한 재일교포는 그저 무국적자와 같다. 국적이 아니라 개인의 출신을 나타내는 역할만 할 뿐이다. 그러나 월드컵에서 북한 대표로 뛴 정대세의 국적은 북한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다. 정대세의 아버지 정길부씨는 한국 국적의 재일교포 2세다. 어머니 리정금씨는 조선을 선택해 무국적자인 재일교포 2세다. 둘째 아들로 태어난 정대세는 아버지 국적을 그대로 이어받아 한국 국적이 된 것이다. 그런데 왜 그는 북한 대표가 됐을까. 정대세의 성장기가 그 답을 말해준다. 그가 멀리 떨어져 있는 북한을 자신의 조국이라고 생각하고 북한 대표로 활동한 이유는 학창 시절을 민족학교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정대세의 어머니는 북한에서 세운 민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그녀는 아들 대세가 취직 차별 등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정신을 품고 세계로 나아가길 원했다. 소수파인 재일인이지만 일본에서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래도 정대세의 국적은 한국인데 왜 굳이 북한 민족학교를 다녀야 했을까. 일본에는 한국이 세운 학교도 분명 있다. 그러나 그곳은 현재 대부분 일본어로 수업을 한다. 반면 북한이 세운 민족학교는 100% 조선어를 쓰고 나라에 대한 교육도 엄격하게 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는 점점 ‘일본 학교화’ 되어가고 있는 한국 학교가 아닌 여전히 ‘코리안 정신’을 가르치는 민족학교를 선택한 것이다. “저는 민족학교에서 자라 제 자신이 ‘재일’이라는 것을 똑똑히 자각할 수 있었어요.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강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죠. 일본에서 소수자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우리 학교에서 배웠어요.” 그로 하여금 굳게 먹은 신념을 더욱 강하게 자각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바로 축구였다. “일본 학교와 대전하면서 제가 조선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곤 했죠. 그러니까 지고 싶지 않았어요. 지면 마음의 지축이 흔들리니까요.” 정대세의 경우 한국 대표의 길도 있었고 일본으로 귀화해 일본 대표가 될 수 있는 길도 열려 있었다. 혹 북한 대표팀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을까? 그는 그건 우문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사실 부러울 때도 있었죠. 일본 대표였다면 더 많은 돈도 벌 수 있고, 잘 통하는 동료 선수도 있을 수 있고, 무엇보다 유니폼을 자기가 빨지 않아도 되니까요(웃음). 그러나 제가 일본 대표로 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는 일본 대표로 경기를 한다면 죄책감에 시달릴 것 같다고 했다.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혼의 포효’ 같은 것도 없을 것이다. 그는 결국 북한 인공기를 달고 월드컵 본선 무대에 섰다. 세계인이 주목하는 꿈의 무대에서 북한 국가가 울려 퍼진다. 평소에도 감수성이 예민한 그는 가슴이 뭉클해졌을 것이다. “북한의 국가를 들을 때마다 학창 시절과 입학식, 졸업식 이런저런 장면이 떠올라 눈물보가 터집니다.” 정대세의 인생 고비 때마다 등장한 것이 바로 북한 국가였다. 일본인들은 북한의 이미지와 겹치는 민족학교에 호의적이지 않다. 북한 관련 납치 문제나 미사일 공격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우익 성향의 일본인들은 그들을 공격 대상으로 본다. 교복처럼 입는 ‘치마저고리’를 칼로 찢는 테러가 지하철에서 일어날 정도다. 어쩔 수 없는 북한 대표팀과의 갈등 한국 국적으로 북한 대표가 되는 일은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그는 대학 2학년 때 이미 염원했던 북한 대표로 선발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한국 국적을 가진 북한 대표는 없었다’는 이유로 번번이 무산됐다. 정대세는 속상했다. 이날을 위해 숱한 어려움과 차별을 이겨냈는데 한국 국적이란 이유로 월드컵 무대에 서는 꿈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아무 죄도 없는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다. 부모님과의 언쟁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런데 J리그 데뷔 2년째 되던 봄, 드디어 기회가 주어졌다. FIFA에 국가대표팀 자격은 ‘원칙적으로 해당국 국적을 가진 동시에 대표 경력이 없어야 한다’고 돼 있었다. 국적 증명은 여권으로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여권 수속을 밟은 적이 없는 정대세에게 한국 여권이 없었던 것이다. 또 일본 국적법으로는 한국인이니 일본 여권도 없었다. 한국 여권, 일본 여권도 없으니 그는 무국적자에 가까웠다. 재일조선인축구협회는 이 법의 틈새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FIFA에 재일조선인의 역사적 경위를 설명해 유권해석을 의뢰했다. 그리고 정대세가 북한 여권을 만들 수 있도록 북한 정부와도 담판을 지었다. 꿈에 그리던 북한 대표가 된 정대세는 2008년 동아시아선수권대회부터 활약했다. 월드컵 예선 주전으로 뛰기도 했다. 그렇지만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란 정대세가 막상 그 속에 들어가니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였다. 북한 대표팀에는 의료용품조차 제대로 갖춰 있지 않았다. 심지어 유니폼도 색이 바랬고 그마저도 선수들이 욕실에서 직접 빨아야 했다. 옷을 빨다가 등번호가 떨어지는 낭패를 겪기도 했다. 유니폼 한 벌을 지급받으면 몇 년을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J리그의 풀 서포트 환경에서 축구를 했던 그는 ‘이런 환경에서 북한이 강해질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마저 더해갔다. 축구 전술이나 스타일도 익숙하지 않아 짜증이 났다. 불만이 극에 달했을 때 그를 바로세운 건 어머니였다. “너는 네 자신을 잃어버렸다. 네가 그렇게 잘났니? 너는 재일의 대표란 걸 잊지 말아라. 겸허해져라.” 생전 처음 들은 어머니의 혹독한 질책은 충격이었다. 정대세는 자신이 바뀌어야 팀이 바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북한 선수들과 의사소통부터 하기로 했다. 전에는 사고방식이 달라 사귀는 것이 귀찮아 잘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먼저 말을 걸고 그들과 긴 시간을 함께 보내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북한 선수들도 그의 방을 찾아오기 시작했고 일본에서 가지고 온 노트북이나 게임기에 관심을 보였다. “그건 뭐네? 내래 한 번 해보게 빌려달라우. 고건 뭔 음악이네? 한번 들어보자우. 고 책 무척 재밌갔는데? 내래 빌려가도 되갔네?” 북한 선수들은 이런저런 물건에 흥미가 많았고 호기심도 왕성했다. 축구화나 유니폼을 사다달라고 하는 동료들도 많았다. J리그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 이것저것 물어보곤 했다. “네래 봉급은 얼마나 받네? 많이 주네?” 북한 선수들은 보기와는 달리 착하고 순수했다. 감독에 대해서는 물론 동료들끼리도 뒤에서 험담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북한팀에는 마침 눈치 없이 별난 선수가 하나 있었다. 정대세는 작심하고 그 선수에 대해 물어보았다. “저 선수 말이야, 다들 어떻게 생각해?” “본인이 없는 데서 기런 말 하면 안 돼.” 정대세는 알게 모르게 북한 선수들을 얕보았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들은 더 순수하고 배울 점이 많았다. 축구 역시 ‘돈’이 아닌 오직 ‘승리’를 위해 달렸다. 북한 선수들과 소통이 원활해지면서 팀워크도 살아났다. 그는 이번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북한 대표팀을 이끄는 공격수로 큰 활약을 펼쳤다. 덕분에 해외 구단의 눈에 띈 그는 월드컵이 끝나는 동시에 독일 프로리그 분데스리가 ‘보훔’의 러브콜을 받았다. 비록 2부 리그지만 유럽 무대로의 진출인 만큼 이번 이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꿈이 모두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보훔에서 제 축구 경력을 향상시키고 싶어요. 이번 시즌 목표는 10득점입니다. 제 모든 기량을 발휘해서 최종 꿈인 프리미어리그 진출의 발판을 만들겠습니다.” 정대세는 일제강점기 이후 남북으로 갈린 우리 역사의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선수다. 우리가 그를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며 선전을 기원하는 이유다. Mini Interview 「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 선수」의 저자 스포츠 전문 기고가 신무광 정대세, 정이세, 안영학, 량용기, 리한재 등 일본에서 자신의 국적과 이름을 고수하며 뛰고 있는 재일교포 선수들의 이야기를 쓴 「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 선수」의 저자 신무광씨에게 ‘일본 사회에서의 재일 선수들의 입장’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일본 사람들이 재일 선수들을 보는 시선이 어떤가? -아무래도 재일교포는 일본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다. 외모는 똑같고 3, 4세는 일본어가 유창하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인들은 정대세나 안영학처럼 한글 이름으로 J리그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을 용병인 줄 안다. 이번 월드컵에서 북한 선수로 뛰는 모습을 보고 뭐라 하던가? -일본 사람들은 재일교포가 왜 일본에 있는지 그 이유도 잘 모른다. 그래서 정대세와 안영학이 북한 대표팀으로 뛰는 것을 보고 의문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본에서 재일교포라는 것을 숨기고 활동하는 운동선수들도 많지 않나? -그런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일본 이름으로 활동하거나 귀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한국인이라고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제3자가 ‘커밍아웃’시키는 것도 옳지 않다. 각자의 인생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대세나 안영학처럼 스스로 재일임을 밝히고 뛰는 선수들은 대부분 북한이 세운 민족학교 출신이다. 일본 사회에서 재일 선수들에 대한 책을 내면서 부담감은 없었나? -그래서 축구라는 소재를 택했다. 재일교포의 문제를 얘기할 때 차별 문제, 선거권, 영주권 문제 등 정치적인 복잡한 문제들이 많다. 그걸 이야기하면 머리가 아파진다. 그 대신 누구나 즐기는 스포츠를 통해 정치적으로 해결 못하는 문제를 다뤄보자고 생각했다. 정대세 선수의 눈물이 일본에서도 화제가 됐나? -그렇다. 정대세가 브라질전에서 떨어뜨린 눈물은 큰 의미가 있다. 일본인들은 ‘왜 저리 울까?’ 하는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왜 그는 일본에서 재일교포라는 삶을 선택했을까? 왜 북한 대표로 뛸까?’ 하는 의문을 끌어내는 것만으로도 재일교포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쓴 책을 본 선수들의 반응은 어땠나? -일본에서 책이 나왔을 때 다들 좋아했다. ‘서로가 서로의 삶에 대해 알게 되고 어떤 고민이 있는지’ 책을 통해 알게 됐다는 선수들의 연락을 받았다. 특히 정대세는 형 정이세 관련 글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며 장문의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외모와 달리 참 마음이 여린 친구다(웃음). “북한의 국가를 들을 때마다 학창 시절과 입학식, 졸업식 등 이런저런 장면이 떠올라 눈물보가 터집니다” <■기획&정리 / 이유진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보훔 홈페이지 ■참고 서적 / 「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 선수」(신무광 저, 왓북)>
- [새희망 새터민]북한 국보 악기 ‘소해금’ 연주자 박성진
- 2009. 01. 16 화제
- 박성진은 2006년에 들어온 새터민이다. 그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평양예술학교에서 소해금을 전공한 음악가다. 그의 아버지는 경상도 출신이다. 남쪽이 고향인 아버지 때문에 학교를 졸업해도 출신 성분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예술단에 제대로 배치가 되지 않았다. 희망을 잃은 그는 탈북을 결심했다. 아득한 몽골 사막을 건너서 박성진(38)을 만난 것은 지난 12월. 연말이 되니 여기저기 그를 찾는 곳이 많다. 인터뷰를 하는 날도 군 관련 단체 송년파티에 초대를 받았다. 그가 연주하는 소해금에서는 애절하면서도 힘이 있는 소리가 난다. 그는 평양예술학교에서 소해금이라는 악기를 전공했다. “소해금은 1960년대 북한이 복고주의를 없애자는 운동에서 만들어진 악기예요. 해금을 개량한 것으로 민족적 소리를 가지면서도 바이올린 소리와 유사한 음색을 내죠.” 북한에서는 국보로 지정하기도 했다. 해금과 바이올린의 중간 소리를 내며 다른 악기와도 융합이 잘 된다. 특히 마이크와 상성이 좋아서 스튜디오 녹음 작업에 자주 이용된다. “남한에서는 재즈와 국악의 퓨전 공연이 많잖아요. 그래서인지 재즈 뮤지션들이 합주해보자고 꽤 제의를 해와요.” 그가 북한을 탈북한 계기 중 하나도 음악이었다. 남쪽이 고향인 아버지 탓에 명문 음악학교를 졸업해도 예술단에 들어가지 못했다. 북한의 ‘출신 성분’이란 사회 전반에 흐르는, 벗어나기 힘든 엄격한 신분 제도와 같다. “아버지가 경상도 출신이라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어요. 부모님, 삼촌, 누이 세 명과 2005년에 중국으로 탈북했죠. 몽골을 통해 2006년에 한국으로 들어왔어요.” 브로커들의 말만 듣고 몽골 사막을 횡단해야 했다. 이정표도, 불빛도 보이지 않는 아득한 사막이었다. “남자 보통 걸음으로 1시간 가다가 90도로 꺾어 또 30분 동안 직진하면 몽골 국경이 나온다는 거예요. 말이 쉽지, 사막 한가운데서 곧바로 직진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아요. 게다가 보통 걸음으로 1시간 걷는다는 게 너무 막연한 표현이잖아요.” 결국 길을 잃은 그는 밤 9시에 출발했지만 다음날 아침 7시가 돼도 도착지를 알리는 이정표는 보이지 않았다. 식량도 물도 없는 상황이었다. 함께 간 사람들 사이에서 ‘이쪽이다. 저쪽이다’ 의견이 분분했다.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하면 이대로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희미한 불빛이 눈앞에 보이더군요. 국경 초소인지 민간인의 집인지 모르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서 아버지와 제가 들어갔어요. 하늘이 도왔는지 사막 양치기의 집이더군요. 그 사람은 일 년에 한 번 그곳에 오는데 바로 그날이었던 거죠.” 양치기의 도움으로 무사히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실제로 몽골 사막을 통해 탈북하는 사람들 중에는 물과 식량이 없어 굶어 죽거나 얼어 죽는 사람들이 많단다. 가수의 꿈 그리고 결혼 한국에 온 박성진에게 북한과 가장 큰 차이점을 물었더니 대중가요의 자유로운 노랫말을 꼽았다. 생활하는 것에 질적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비슷하단다. “대중음악은 생활상을 반영하는 수단이잖아요. 한국은 노래 주제가 다양해요. 반면 북한은 노래 주제가 정해져 있어요. 수령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죠. 차이는 그 정도예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어디나 결국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에게 가장 많이 묻는 것 중 하나가 북한에도 연애가 가능하느냐는 질문이다. 북한도 나름의 범위에서 하고 싶은 건 다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자유 연애는 물론 이혼조차 가능하단다. 우리는 북한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고 무지했던 것이 아닐까. “저도 북한에 있을 때는 남한에 대해 오해가 많았어요. 남한은 자본주의니까 막연히 돈을 위해서는 뭐든 다 하는 곳인 줄 알았어요. 막상 와보니 발달된 복지정책에 많이 놀랐어요. 개인의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불우한 이웃이나 독거노인을 위해 연탄도 나르고 봉사도 하더군요. 그는 남북한이 서로 오해하고 있는 부분과 반 세기 동안 벌어진 틈을 조금이나마 좁히는 일을 하고 싶다. “제가 정기적으로 판문점에서 공연을 해요. 판문점 관광객을 위해 30분 정도 연주를 하고 북한에 대한 이야기도 해요. 저는 민족의 분단이라는 현실과 아픔에 대해 객관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입장이잖아요. 뿌듯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이루고 싶은 소망은 북한에서 못다 이룬 꿈을 한국에서 이루는 일이다. 그는 트로트 가수 장윤정의 ‘첫사랑’이란 노래를 소해금으로 연주해주면서 가수에 대한 꿈을 키웠다. 기획사를 통해 음반 준비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 북한의 미사일 실험 뉴스가 터지면서 남북관계가 냉각되기 시작했다. 자연히 박성진의 앨범 작업이 무기한 미뤄지고 말았다. “이미 곡은 다 받아놓은 상태예요. 남북한 정세에 따라 영향이 많더라고요. 기회를 기다리고 있어요. 운이 따라주면 하는 거고, 아니면 부담없이 제가 좋아하는 음악을 하려 해요.” 박성진은 자신이 무사히 한국에 도착한 데는 하늘의 뜻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는 국내 유일한 소해금 연주자다. 새해에는 한국의 전통 악기와 소해금과 결합하는 작업도 생각하고 있다. “1월부터 장윤정씨가 일본 투어를 간대요. 함께 참여해야 할 것 같고요. 기회가 되면 국악하는 분과 함께 어울려보고 싶어요.” 혼기가 꽉 찬 나이니 결혼도 해야겠다. 그는 현재 교제 중인 여자친구가 있다. “결혼해야죠. 2009년 화창한 날을 하루 잡아서 할 겁니다. 결혼은 둘이 만드는 하나의 작품이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긴 해요. 부모님도 벌써 일흔이신데 외아들이 빨리 손자들 안겨드려야죠.” 그는 앞으로도 남북간의 문화적 이질감과 거리감을 좁히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단다. 소해금 연주도 중요하지만 가수로서 자신의 노랫소리도 들려주고 싶다. 3년 차 새터민 박성진의 새해 소망이다.■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이성훈
- ‘국사 무당’ 심진송이 말하는 북한 김정일의 관한 예언
- 2008. 10. 13 화제
- 지난 7월 말이었다. 무속인 심진송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요즘 빈번하게 북한 관련 꿈을 꾼단다. 아무래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김일성 사망 예언을 시작으로 국내 정세의 굵직한 사건을 맞히고 ‘국사 무당’이라는 호칭이 붙은 무속인이다. ‘설마’ 하며 만남을 차일피일 미루다 일이 터지고 말았다. 지난 9월 9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건강 위독설 보도가 워싱턴 AP통신을 통해 흘러나온 것이다. 북한 김정일, 예전의 당찬 모습 되찾기는 힘들 듯 “왜 이제 왔어? 그렇게 오라고 할 때는 안 오더니.” 기자를 대면한 심진송(58)의 첫마디다. 김정일(66) 국방위원장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것 같다는 전갈을 받은 지 두 달 만에 그를 만났다. 사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때도 건강한 모습이 언론에 공개됐던지라 갑작스러운 그의 말을 쉽게 수긍하지 못했다. 기억에서 가물가물 잊고 지낼 즈음 사건이 일어났다. ‘김정일 건강 이상설’에 관한 외신과 국내 기사가 봇물처럼 터져나온 것.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린 것이 기억났다. “내가 인터뷰하자고 할 때 했어야지. 이제 와서 뭐라고 할 건데? 이제 이 인터뷰가 나와 봤자 기자랑 나랑 짜고 했다고 하지, 누가 믿겠어?” 심진송은 늦은 만남에 대한 섭섭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나도 실향민이야. 신의주가 고향이라 그곳에 그리움을 가지고 있어서일까? 북한에 대한 꿈을 자주 꾸는 편이지. 김일성 사망 때도 꿈을 많이 꿨어. 북한의 논두렁, 밭두렁 풍경이 펼쳐지고 호랑이같이 큰 흑견이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우는 모습을 봤지.” 최근 그의 꿈속에도 북한의 풍경이 눈앞에 나타났다고 한다. 북한 주민들의 빈곤한 생활상이 그대로 그려졌다는 것. 김일성 사망 때와 똑같은 패턴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배고파서 울고 있더라구. 그리고 황구가 울고 있는 거야. 지난번 꿈처럼 큰 덩치는 아니었지만 말이야. 그때 꿈에서 깨고 딱 생각이 나는 거야. 아무래도 김정일이 자기 아버지하고 같은 병으로 쓰러져서 못 일어나겠구나!” 그의 말을 빌리면 현재 당뇨와 혈압 문제로 쓰러진 김정일 위원장은 쉽게 일어나기 힘든 상황이라고 한다. “그 사람은 결국 예전 모습을 찾기는 힘들어. 씩씩하고 당찬 모습으로 돌아가기는 무리란 말이야. 북한 정세가 혼란스럽더라도 그 쪽은 사상 무장이 돼 있으니 버틸 거야. 하루아침에 붕괴되지는 않겠지. 본격적으로 문제가 발생하는 건 다음 승계가 결정되는 내년부터 일거야.” 북한의 권력 후계 문제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촉각을 곤두세우는 부분이다. 중심을 잃은 북한의 앞날은 누가 권력을 잡느냐에 따라 극단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차남 김정철(27) 쪽으로 가닥을 잡는 듯했다. 그리고 그는 민감한 시기인 만큼 신중한 외교 정치가 필요하다고 누누이 언급했다. “우리나라는 유감이지만 올해보다 내년이 더 안 좋을 거야. 소의 해거든. 우리(무속인) 세계에서는 ‘이변이 많은 해’라고 하지. 내년에 아마 미국 대통령도 결정되지?” 그리고 그는 북한이 우리와 같은 말, 같은 풍습을 가진 우리 민족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족이 어려우면 도와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 그는 김일성 사망 10주기에 큰 이벤트를 계획했었다. 북한 백두산 계곡 밑에서 6·25전쟁 당시 죽은 군인과 민간인들을 위한 영혼제를 지내려 했다. 그러나 주위의 만류로 무산되고 말았다. “요즘 좌파, 좌파 하는데 나도 그 쪽으로 몰릴 수 있다고 언론계 지인들이 극구 말렸어. 간첩으로 오인받을 수 있다는 거야. 그걸 허락받으려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보낼 장문의 편지도 준비했었는데 말이야.” 그는 틈만 나면 중국을 통해 신의주 다리 중간까지 가서 고향 땅을 바라보곤 한다. 가슴이 답답할 때는 자유로를 타고 임진각 통일동산을 찾는다. 그런 그가 아직도 금강산을 가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의아했다. 여기에 놀라운 사실이 숨겨져 있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만류 때문이었다. 황 전 비서관으로부터 ‘절대 이북에 가지 말라’는 신신당부의 말을 들었다는 것. 그가 노동당 비서로 있을 당시 김정일 위원장이 그의 에세이집 「신이 선택한 여자」와 「또 하나의 세상」을 읽었다는 것이다. “황장엽씨 말로는 김정일 책상에 내 에세이 두 권이 놓여 있었다는 거야. 그러면서 ‘이 애미나이 꼭 한 번 만나야겠다’라고 했다네? 그 말을 듣는 순간 섬뜩한 거야.”하늘하고 땅을 섞어서 맷돌질로 갈아야 북한의 향후 사정도 중요하다. 하지만 요즘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경제 침제와 암울한 전망들이다. 심진송에게 우리나라 경제가 언제 좋아지는지, 언제 서민들의 입에서 “이제 좀 살 만하다” 소리가 나올 수 있는지를 물었다. 정답을 알려준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을 정도로 우리 상황이 절실하지 않은가. “한 가지만 이야기할까? 나, 올해 재수굿(집안에 재수가 형통하기를 비는 굿) 한 번도 안 했어. 나라 운이 기본이 돼야 그것도 하는 거야. 전부 다 죽어가는데 굿한다고 돈이 벌리겠어? 안 벌려.” 그는 요즘 사람들 만나기가 두렵다. 입만 벌리면 “죽겠다. 언제 괜찮아지냐?”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에게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해줄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안쓰러운 마음에 부적을 써주는 것이 최선이다. 공짜 부적은 효력이 없으니 단돈 만원, 5천원, 아니 천원이라도 받고 써준다. “나도 매일 기도하고 답을 기다려. 할아버지(신)께 ‘몇 월부터 괜찮아지겠냐?’고 묻지만 답을 안 주셔. 그저 그러셔. ‘너희가 보릿고개를 모르냐? 허리띠를 더 졸라매’ 그러면 내가 미치는 거야. 사람들은 이런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니잖아. 지금도 충분히 허우적대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주 죽으라는 얘기지.” 그는 우리나라 경제가 앞으로 몇 년간 힘들 거라 전망했다. 요즘에는 시도 때도 없이 전화벨이 울린다. 새벽 3시에도 전화를 걸어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자신에게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다. “내일은 오늘보다 좋아질 것이다”라는 희망의 말 한마디다. “오늘 아침에 아는 은행 직원이 찾아왔어. ○○은행이 합병되면 직원을 다 자를 것 같대. 자신은 어찌 될 것 같나 묻는데 딱 보니까 잘리겠더라구. ‘너 마누라 뭐 하지?’ 하고 돌려 말하는데 벌써 얼굴이 새파래져. 눈치를 챈 거지.” 말 한마디로 그들이 돌아가서 얼마나 번민에 휩싸일까. 그 생각만 하면 그도 우울증에 빠진다. 요즘은 신당에서 울면서 기도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우리 사회가 중산층이 없어졌잖아. 나라가 힘들어질수록 죽는 건 우리 서민들뿐이야. 빈부가 막 섞여야 돼. 그래야 되는데…. 아이고 답답해.” 그는 손으로 가슴을 탕탕 치며 통탄했다. “나도 마음이 약해지나봐. 웬만하면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주려고 해. ‘조금만 고생하면 된다. 마흔세 살이면 빌딩이 보여’ 이렇게. ” 그는 삶이 팍팍해지고 민심이 흉흉해도 어려움을 넘으면 더 참된 삶을 만들 수 있는 것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사람이 길이 있는 곳을 가는 건 의미가 없어. 없는 길을 발견해서 가야 보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절망하지 말고 힘을 내보자구.” 그는 높으신 분(?)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무속인으로서 아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말이다. “자고로 없는 살림에 가정을 잘 꾸려나가야 ‘그 집 며느리 살림 잘한다’고 칭찬을 했어. 다 갖춰져 있다면 누군들 못할까. 그러니까 지금 힘든 시기가 진짜 실력자에게는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는 거지.” 그를 단지 무속인일 뿐이라고 치부한다면 그렇게 봐도 좋다. 하지만 그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카운슬러이며, 나라를 위해 매일 물을 떠놓고 기도를 하는 국민의 한 사람이다. 그의 이야기가 맞는지 틀리는지는 시간이 지나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일이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이성훈, 심진송 제공
- 남북정상회담 공식수행원으로 북한에 다녀온 김화중 전 장관
- 2007. 11. 14 화제
- 전 보건복지부 장관, 현 여성단체협의회장 김화중이 한반도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갈 남북정상회담에 공식 수행원 자격으로 동행했다. 그 긴박하고 가슴 벅찼던 3일간의 여정을 생생하게 전한다.처음 남북정상회담 공식 수행원 명단에 올랐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가 생각난다. 내 이름이 명단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고는 무척 놀랐다. 역사적인 책임감으로 어깨가 무거웠고,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꿨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내게는 여성단체 대표로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그동안 서울대학교 교수로, 또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지내면서 북한에 대한 연구와 관심은 필수적이었기에 북한의 의료는 물론 정치, 경제 상황까지 익숙했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좀 더 면밀한 준비가 필요했다. 우선 북한에 관한 정치, 경제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통일부에서 보내준 책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 여성단체 사람들을 만나며 의견을 모았다. 여성 대표로 북한을 방문하는 것이기에 그들의 요구를 충분히 알고 있어야했다.6개월 전과 달라진 평양 시내 나는 그동안 북한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 여성단체협의회 회장,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상임의장, 통일부 통일고문으로 북한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지난 4월에는 민화협의 양묘사업(묘목을 키우는 일)을 추진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평양은 아직도 나무를 떼고 있어 산에 나무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실정이다. 매해 홍수가 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평양 여성이나 남성들은 매일 똑같은 의상을 입고 다녔다. 나는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북측 관계자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우문이었다. 나도 1960~1970년대에는 교복을 맞춰서 그것만 입곤 했었는데, 그동안 어려웠던 시절을 잠깐 잊은 것이다. 현재 북한의 상황이 학창 시절과 비슷한 걸로 보아 남한의 70년대 초반 수준으로 가늠되었다. 북한은 전력 사정이 좋지 않다. 이 때문에 평양 시내에는 가로등이 없어 밤이 되면 깜깜해진다. 건물들은 칠이 안 된 상태로 초라했다. 평양국제공항은 텅 비어 있다. 비행기라곤 우리가 타고 온 비행기 단 한 대뿐이었다. 그런데도 북한 사람들의 얼굴은 참 밝았다. 가난하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다. 북한은 빈부 격차가 크지 않으니 어떤 것이 잘사는 건지 잘 모른다. 70년대의 나도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그런데 불과 몇 달 만에 평양 시내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건물에는 모두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가장 예쁜 옷을 입고 거리로 나왔다. 놀랍게도 평양 시내 가로수에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조명 장식을 달아놓아 어두웠던 밤거리가 환해졌다. 거리에는 남측 방문단을 환영하는 많은 인파가 몰렸다. 그들은 우리를 보기 위해 앞을 다퉈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모두 동원되어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서 우리를 진심으로 환영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머무른 3일 동안 어디서든 우리만 보면 손을 흔들며 반가워했다. 그들을 보며 ‘우리는 하나’라는 생각이 피부에 와 닿았다.앵무새처럼 김일성, 김정일을 이야기하는 북한 주민들 남한 방문단의 안내원들은 모두 사회나 정치학을 전공한 대학 교수들이었다. 그들은 중요한 외국 회의에도 참여하는 사람들로 소위 고위층에 속했다. 차로 이동하면서 그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들은 세계에서 사회주의를 가장 성공시킨 나라가 북한이라며 체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이 김일성 수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덕분이라고 찬양했다. 그는 남한이 잘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전혀 부럽지 않다고 했다. 빈부의 격차보다는 차라리 모두 가난한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의 능력이나 자질에 따라 교육을 받아야지 돈이 있다고 공부하고 없다고 공부를 못 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고 묻기도 했다. 나는 거기에 대해 “남한에서도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게는 장학금이 주어지고 기초생활보장도 된다”고 대답해주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북한에서는 하라는 만큼만 일을 한다. 우리는 일을 하는 만큼 돈을 버니까 생산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는 내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하는 듯했다. 분야별 회의에서 남북의 여성 지도자들이 모였을 때였다. 우리는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영유아 사업과 여성 보호를 의제로 준비했다. 그러나 그들은 “김일성 수령님, 김정일 장군님이 이렇게 잘해주셔서…”와 같은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회담이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참다못한 나는 “알았다. 이제 그만하라. 공동선언문에 반대할 사람 아무도 없다. 구체적인 방안을 이야기하자”고 잘라 말했다. 내 이야기에 그들은 “좋다”면서도 통일 이야기와 준비해온 체제 찬양만 계속했다. 우리는 결국 서로 벽만 보고 이야기한 셈이다. 회담이 끝나고 “구체적인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다. 그러려고 모인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북측 사람들도 웃었다. 나는 “우리 자주 만나기로 하자. 그렇게 되면 발전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며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북한 사람들은 아이에서부터 할머니, 지식인 할 것 없이 모두 입만 열면 김일성, 김정일을 찬양했다. 그것도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절절하게 이야기한다. 김일성 대학에 방문할 일이 있었다. 그곳에는 김일성, 김정일이 언제 다녀와서 어떤 이야기를 남겼는지 모두 기록해놓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김일성, 김정일의 한마디 한마디가 대단한 듯했고, 어쩌다 눈빛이라도 마주치는 건 굉장한 일이었다. 나는 안내원에게 “참 재미있다. 북한에서는 입만 열면 김일성과 김정일을 찬양하는데 우리는 입만 열면 노무현 대통령 비판이다”라고 말했다. 북한 사람들에게 체제 비판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눈물을 흘리며 김일성, 김정일 찬양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들 자신이 그렇게 좋고 행복하다는데 굳이 비판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상대방 체제의 다른 점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매순간 손에 땀을 쥐게 했던 정상회담 이번 정상회담은 초반부터 5년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서로 얼싸안았던 그때와는 달리 노무현 대통령과 굳은 얼굴로 악수만 한 것이 이번 환영식의 전부였다. 대통령뿐 아니라 방문단들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회담을 위해 가져온 의제들이 많아 부담감이 컸으니 더욱더 긴장됐을 것이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의 만찬에서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없었다. 우리는 이번 회담이 잘되지 못한 채 돌아가면 얼마나 야단이 나려나 하는 걱정뿐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둘째 날인 10월 3일 점심 때까지 이어졌다. 하루를 더 머물러야 할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날 협의가 잘 안 된다면 저녁 때 ‘아리랑’ 공연도 보지 못할 거라고 했다. 함께 간 재벌 총수들도 모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전 회담을 마치고 난 노무현 대통령은 굉장히 힘든 얼굴로 “개방, 개혁이 어디서나 좋은 말인 줄 알았는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았다. 신중하게 써야겠다”고 했다. 우리는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오후 7시가 조금 안 됐을 때였다. 모두 잘 해결이 됐다는 연락이 왔다. 우리가 제안하는 것을 그쪽에서 다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놀라운 결과였다. 그때까지 가장 힘든 문제는 상호체제를 인정하지 않는 데에 있었다. 북측이 원하는 건 적화통일이고, 우리가 원하는 건 자본주의통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상호체제를 인정하기로 하니, 그 뒤의 모든 문제들은 일사천리로 해결이 됐다고 한다. 모든 것이 성공적으로 합의되고 나자 김정일의 표정도 밝아졌다. 마지막 환송식장에서는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우리는 테이블마다 그에게 술을 권했다. 그가 답례로 테이블을 돌면서 웃으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첫날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남북이 상호 협동해야 하는 이유 정부의 대북사업에 대해 많은 이들이 ‘퍼주기식’이라고 쉽게 비판하곤 한다. 그러나 직접 북한을 방문하고 오랫동안 북한에 대해 연구한 나의 생각은 다르다. 우선 개성공단만 해도 그렇다. 개성공단은 남한과 아주 가까운 군사 요충지다. 그런데 북한은 그곳을 우리에게 내주었다. 그들이 전쟁을 하려고 했다면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개성에 방문해보니 개성공단만 내준 것이 아니라 개성시 전체를 내준 것이었다. 개성시를 우리가 4단계로 개발하기로 되어 있었다. 만일 북한이 우리에게 강릉시를 내달라고 했다면 주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신의주까지 철도를 놓자고 제안한 것은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다. 중국이나 러시아 등으로 편리하게 나아가려면 북한을 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철도를 운행할 물량 자체가 거의 없는 편이다. 물론 미래에는 분명 북한에게도 큰 도움이 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북한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북한에서 잘 받는다는 봉급이 7만원 정도고, 보통이 5만원 정도다. 북한의 예산은 남한의 국방비보다도 적다. 값싼 노동력 때문에 요즘 북한 시장에 많은 선진국들이 관심을 두고 있다고 한다. 남과 북은 말이 통하고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상호협력만 한다면 많은 부분에서 유리할 것이다. 이번에 협의된 사안 중에 조선회사 건립이 있다. 한국의 조선 기술은 세계적이다. 세계 각지에서 배를 만들어달라는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그런데 배를 만들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하지 않아서 그 주문을 다 못 받고 있다. 대우조선 사장이 전 세계를 다니면서 배를 만들 수 있는 곳을 찾았지만, 어떤 곳보다 북한이 적지라고 판단했다. 남북이 함께 조선사업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저렴한 노동력으로 생산성을 높일 수 있게 되고, 북한에게는 고용창출과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남북정상회담 합의문1 다음달 남북총리회담 개최 2 다음달 남북 국방장관회담 개최 3 남북정상회담 정례화 원칙적 합의 4 서해에 공동어로수역 추진 5 통일지향적으로 남북의 제도, 법률 정비 6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 7 이산가족 상봉을 확대하며 영상편지교환사업 추진 8 백두산 관광을 실시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백두산-서울 직항로를 개설하기로 합의 9 북경올림픽 남북단일팀 원칙적 합의 10 한국전쟁 종전을 위한 3자 혹은 4자회담 추진■정리 / 두경아 ■사진 / 이주석·경향신문포토뱅크
- [세계의 결혼]북한- ‘결혼은 혁명, 동지적 집단 형성의 의미’
- 2006. 08. 01 재테크
- 북한은 우리와 한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분단의 세월만큼이나 생활양식에 큰 차이를 보인다. 가정도 하나의 혁명 집단으로 결혼에서 애정이 밑바탕이 되기보다는 사회에 대한 헌신이나 당과의 이상에 대한 일치를 더 중시한다. 그래서 북한 결혼식은 무엇보다 ‘가정의 혁명화’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제3세계 국가 결혼식만큼이나 생경한 북한의 결혼식을 들여다보자.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하면 처벌? 북한에서는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하면 ‘부화사건’(간통사건의 북한말)화되어 처벌을 받게 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연애는 공개적이기보다는 비밀리에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1980년대 말 이래 젊은이들 사이에는 당국의 직·간접적 통제에도 불구하고 연애와 결혼을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는 풍조가 확산되고 있어 자유연애가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에서는 젊은 남녀가 중매나 연애로 만나 데이트하는 것을 ‘산보’라고 한다. 때문에 아무에게나 함부로 ‘산보나 하자’고 말해서는 안 된다. 산보하는 남성은 여성에게 ‘○○동무’, 여성도 남성에게 ‘○○동무’ 혹은 ‘○○동지’라고 부른다. 동지는 동무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최근 들어 자유연애가 보편화되면서 북한 젊은 남녀들의 데이트 현장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평양의 청춘 남녀들이 주로 찾는 ‘산보’ 코스는 모란봉 공원, 평양 체육관 앞 광장, 대동강변 오솔길, 보통 강변 등이다. 우리처럼 다방이나 카페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야외를 활용한다. 대개 남자들이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먼저 연애할 것을 제의하며, 약속은 전화가 많이 보급되어 있지 않은 탓에 주로 편지로 한다. 이때 여자들은 편지지에 손수 그림을 그리거나 수를 놓기도 한다. 북한에서 연애는 곧 결혼을 의미하기 때문에 여자들은 ‘산보’제의를 아주 신중하게 받아들인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중매결혼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1980년대 들어서는 연애결혼이 증가하는 추세이다. 북한엔 결혼식장이 따로 없고 대부분 소속기관, 마을의 공공회관이나 신랑신부 가정집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일부 간부계층과 부유층은 규모가 큰 음식점에서 결혼을 하기도 한다. 신랑신부는 청첩장을 따로 만들어 돌리지는 않으며 인편이나 전보 등으로 결혼날짜와 장소 등을 알린다. 신랑은 주로 양복을 입고 신부는 한복을 많이 입는다. 결혼식 순서는 주례 겸 사회자의 주례사, 부모님께 술잔을 드리는 의식, 기념 촬영, 피로연 순으로 진행된다. 신혼여행을 가는 경우는 드물다. 여행을 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자기 고장의 경치 좋은 장소를 찾아 반나절 정도 나들이를 가는 것으로 신혼여행을 대신한다. 北 외교관, 미혼자가 없다 사회주의 체제가 낳은 독특한 결혼식 중 하나가 북한 외교관의 결혼이다. 북한 외교관은 미혼자가 없다. 북한은 외교관을 해외에 파견할 때 기혼자를 우선적으로 내보낸다. 미혼자는 서둘러 결혼을 해야 해외로 파견될 수 있다. 북한이 기혼자를 우선적으로 내보내는 것은 성적인 욕망 때문에 이른바 ‘혁명 과업’을 완수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것. 만약 결혼할 대상이 없거나 중매가 성사되지 않아 결혼을 못한 외교관의 경우, 일단 해외로 파견한 다음 ‘소포결혼’을 시킨다. ‘소포결혼’이란 당 중앙위원회에서 처녀를 골라 외교관 부인 교육을 시킨 뒤 해당 외교관에게 보내 강제로 결혼시키는 것을 말한다. 배우자에 대한 남성의 의견은 무시되며 대사의 주례로 약식결혼을 한 뒤 부부로 살아가게 된다. 북한은 외교관들에게 가능하면 자식들과 가족을 본국에 두고 부부만 나가도록 종용한다. 망명이나 탈출을 못하도록 북에 있는 가족을 ‘볼모’로 잡아두는 것이다. 최근 북한은 식량난이 심화된 이후로는 오히려 도시 처녀들이 농촌 총각과 결혼하는 사례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경제특구로 지정된 나진·선봉지역의 생활환경과 수준이 크게 개선됨에 따라, 북한 여성들이 원하는 최상의 배우자는 나진·선봉에 거주하는 남자라고 한다. 현재 북한의 결혼 풍속은 점점 악화되는 경제 상황에 따라 빠르게 변하고 있다. 생존을 위한 결혼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볼 때 여자와 남자가 만나 한 가정을 이루는 결혼의 신성한 의미가 퇴색되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 정리 / 이유진 기자 자료발췌 / 통일부
- 세계의 결혼
- 북한에서 상큼한 달래 향기를 타고 찾아온 5인조 밴드 달래음악단
- 2006. 08. 01 연예
- 곧 상큼한 달래 향기를 타고 북에서 온 5인조 밴드 달래음악단이 모습을 드러낸다. 어려서부터 춤과 노래를 전공하며 연예인의 꿈을 키웠던 이들은 데뷔 무대를 앞두고 삼복더위도 잊은 채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달래처럼 향긋한 봄내음으로 실타래처럼 엉킨 남북의 마음을 풀고 싶다는 달래음악단을 만났다. “‘탈북자’가 아닌 북한 문화에 관심을 가지면 낯선 북한 문화가 쉽게 다가올 거예요” “처음 TV를 켰을 때 ‘왜 벗고 춤을 추나’ 생각했어요” 최근 어수선한 국제 정세 때문에 남과 북의 마음은 한여름인 7월에도 꽁꽁 얼어붙어 있다. 그런 와중에도 상큼한 달래 향기로 얼어붙은 남북의 마음을 녹이겠다고 나선 여성 그룹이 있다. 한옥정(28), 이윤경(23), 허수향(22), 강유은(19), 임유경(19)으로 구성된 단래음악단. 이들은 오는 8월 초 첫 방송 출연을 앞두고 연습실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모두 북한이 고향인 이들은 북에서 미처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기 위해 삼복더위 중에도 안무와 노래 연습으로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큰언니 옥정씨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요즘,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한다. “춤과 노래 연습에 낮밤 구분 없이 바쁘게 생활하고 있지만 좋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전혀 힘들지 않아요. 지금은 연습하고 싶을 때 연습하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지만 북에 있을 때는 그러지 못했거든요. 누군가 정해놓은 시간과 규율에 따라 움직여야 했어요.” 북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성악을 전공했다는 옥정씨는 달래음악단에서 보컬을 맡고 있다. 옥정씨뿐 아니라 달래음악단 멤버들은 아코디언을 비롯한 악기 연주는 물론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못하는 게 없는 만능 재주꾼들이다. 어려서부터 무용을 배운 윤경씨는 북에 있을 때부터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연하는 게 꿈이었다고 한다. “연예인이 꿈이라기보다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제가 가진 장기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북한에서도 대중음악을 하는 보천보전자악단이나 클래식을 선보이는 만수대예술단 등이 있는데,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측면에서 남과 크게 차이는 없는 것 같아요. 다만 무대 의상은 많이 틀리더라구요.” 윤경씨뿐 아니라 달래음악단 멤버들은 허름한 청바지나 몸매를 드러내는 옷을 입은 남한 연예인들을 보고 무척 놀랐다고 한다. 평양이 고향인 유은씨는 남과 북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처음 TV를 켰을 때 ‘왜 벗고 춤을 추나’ 생각했어요. 북에서는 지금 입고 있는 편한 운동복 차림으로는 절대 무대에 설 수 없거든요. 주로 한복과 드레스가 무대의상이에요. 물론 평소에는 뭘 입어도 상관없구요.” 달래음악단이 앞으로 방송 활동을 하면서 입게 될 옷은 한복이다. 이들의 무대 의상은 한복 연구가이자 디자이너인 김예진씨가 맡았다.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명사의 한복을 디자인한 김예진씨는 달래음악단의 음악과 가장 잘 어울리고 무대에서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무대의상을 준비하고 있다. “가족들 생각만 하면 너무 속상하고 마음이 아파요” 강유은씨는 지난 1월 KBS1-TV ‘피플 세상 속으로’의 ‘반갑습네다. 남한!’ 편에 소개됐다. 당시 어머니, 오빠와 함께 출연한 ‘피플 세상 속으로’에서 유은씨는 홍연희라는 가명을 썼다. “홍연희는 가명이고 강유은이 본명이에요. 당시에는 첫 TV 출연이라 실명을 쓴다는 게 부담스럽더라구요. 달래음악단에 처음 합류할 때도 가명을 쓸까 생각했는데, 앞으로 대중 앞에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리고 노래를 선보이기로 마음먹은 이상 실명을 쓰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죠.” 실향민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고, 젊은 세대에게 북한의 대중음악과 문화를 알리기 위해 뭉친 이들은 아직 낯선 남한 생활이 익숙지 않다고. 때문에 처음 기획사 측에서 ‘5인조 여성 밴드 그룹’을 결성하자고 말했을 때도 반기기보다는 경계하기에 바빴다. 막내 유경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 모두 어릴 때부터 무용이나 노래 등을 전공해서 남한에서 그 기량을 펼칠 수 없을까 생각하고는 있었어요. 하지만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큰 편이에요. 나중에 들은 얘긴데, 남한에서는 공개 오디션에 작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수만 명까지 몰려든다고 하더라구요. 저 역시 그들처럼 연예인이 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일단 상대에 대한 지식이나 믿음이 없을 때라 결정하기가 쉽지 않더라구요.” 결국 달래음악단은 기획사 측에서 멤버 각각의 가족을 만나 취지를 설명하고 발품을 판 덕에 탄생했다. 하지만 막상 싱글 앨범을 발표하고 안무를 연습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언론에 모습을 알리고 인터뷰를 하는 것은 여전히 부담스럽다고 큰언니 옥정씨는 말한다. “인터뷰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북에 있는 가족 얘기가 나오게 되는데, 모두 가족 중 일부를 북에 두고 와서 그런 얘기만 나오면 동생들이 모두 얼어버려요. 저 역시 가족들 생각만 하면 너무 속상하고 마음이 아파요.” 언니의 얘기에 동생들은 모두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모든가 즐길 수 있는 멋진 북한 문화 보여드릴게요” 달래음악단의 달래는 겨우내 얼었던 땅을 뚫고 봄을 알린다는 의미다. 그리고 향긋한 달래의 봄내음을 닮고 싶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다. 수향씨는 “영어가 아닌 우리말로 된 이름을 짓고 싶었다”고 말한다. “북에서는 영어를 거의 쓰지 않아요. 이름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구요. 남한에서는 영어를 너무 많이 쓰는데, 좋아 보이진 않더라구요. ‘달래음악단’은 오랜 시간 멤버들끼리 머리를 맞댄 끝에 탄생한 이름이에요.” 달래음악단은 아직 공식적인 활동을 하기 전인데도 국내는 물론 해외 언론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로이터 통신과 일본 니혼 TV는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이들을 집중 조명할 계획이라고 한다. 니혼 TV는 매주 일요일 방송하는 한 프로그램에서 15분간 특집으로 다룰 예정이며 영국 BBC, 미국 ABC 등도 달래음악단의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을 직접 방문할 계획이다. 정식 데뷔전부터 이렇듯 많은 국내외 언론들이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해 윤경씨는 오히려 부담스럽다는 뜻을 내비친다. “사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탈북자 출신’이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우리도 탈북자란 꼬리표를 떼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건 알아요. 하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탈북자란 말 대신 ‘실력파 가수’란 말을 듣고 싶어요. 우리 이름 앞에 붙는 ‘탈북자’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우리가 보여드리는 북한 문화에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럼 50년 넘는 분단의 벽에 가려 이해하지 못했던 북한의 문화를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문화 차이 때문인지 녹음과 안무를 끝마치고 이제 데뷔를 눈앞에 두고 있는 유경씨는 아직까지 가수가 됐다는 게 실감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직 가수가 됐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북한에서는 앨범을 냈다고 가수가 되는 게 아니라 인기를 얻어야 그제야 연예인으로 인정해줘요. 문화적인 차이겠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얻을 때까지 열심히 노력하려구요. 앞으로 우리 노래에 남한 분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도 되고 조금은 두렵기도 한데, 모든 분들이 즐겨 부를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달래음악단은 자신들의 노래가 남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기대 반, 두려움 반이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간직한 꿈을 남한에서 펼쳐보이는 달래음악단이 이름만큼이나 좋은 결실을 얻길 바란다. 글 / 김성욱 기자 사진 / 박형주
- 통일에 대한 새로운 해법 제시한 북한전문기자 김현경
- 2006. 08. 01 화제
- “Mr. 김정일! 우리의 미래와 희망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김현경을 만나기로 한 날, 공교롭게도 북한은 오전 3시 30분경 동해를 향해 미사일 6기를 발사했다. 아니다 다를까, 인터뷰를 미루자는 전화가 걸려왔다. 북한은 그런 존재다. 평소 인식하지 못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큰힘을 발휘하는…. 반공 교육을 받고 자라 지금의 평화 무드에 자칫 혼란을 겪는 우리 세대에게 북한 전문 기자 김현경이 명쾌한 답을 주었다. “미국 입장에서 북한은 귀찮고 성가시고 골치 아픈 존재이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절박한 상대는 아니에요. 반면 북한은 죽기 살기로 덤벼들어야 하는데 문제는 퇴로가 없다는 거죠. 때문에 위기를 증폭시키는 방법을 선택한 거고, 그로 인해 우리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된 거예요. 우리나라가 할 일은 위기를 관리하고, 위험을 줄이는 것이겠죠.” 7월 5일 발생한 미사일 사건은 대미 압박용, 즉 협상 촉구를 위한 모션이라는 게 일단 김현경의 풀이다. 남북과 미국에 관해 비교적 객관적이고도 알기 쉬운 해석을 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방송의 꽃 아나운서에서 현장 속으로 뛰어들다 일요일 아침이면 아이들과 함께하던 MBC ‘야! 일요일이다’의 친근한 아나운서 ‘언니’였던 김현경이 북한과 인연을 맺게 된 건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1989년 첫아이의 출산 휴가를 마치고 막 복직했을 때 ‘통일전망대’를 진행하던 친구가 직장을 그만두게 되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됐고, 1994년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이 전해졌을 때 보도국 임시 파견 근무를 하다가 아예 북한 담당 기자로 전업하게 됐다. 그로부터 17년간 MBC ‘통일전망대’ 진행자이자, 북한 전문 기자로 남북한과 통일문제를 다뤄온 그녀가 최근 「Mr. 김정일, 차 한 잔 하실까요」(한얼미디어)라는 ‘당돌한’ 제목의 책을 냈다. “북한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잘 모르는 사람들이 건네는 첫마디는 ‘무섭지 않아요?’예요. 저는 딱히 무섭거나 어색한 느낌을 받은 적이 없어요.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어 있으니 포기도 빨라지고, 무엇보다 북한에서는 휴대폰이 울리지 않으니까 심적으로는 편안하다고나 할까요(웃음). 드라마를 봐도 우리의 6, 70년대 작품처럼 감정선이 단순한 편이라 사고 자체가 단순해지는 거 같아요.” 김현경의 책은 굉장히 담백하다. 분량은 많지만 내용은 무겁지 않아 술술 읽힌다. 남북간의 근래 역사가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취재 현장의 뒷얘기, 북한 주민들과의 인연도 흥미롭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문득 드는 생각은 ‘북한 전문 기자 김현경의 통일이야기’라는 부제와는 달리 ‘통일’이라는 단어가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는 것. 김현경은 통일이 어떠한 형태로 이뤄질지 아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금 통일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서로 공통점을 찾아서 조금씩 넓혀가는 것입니다. 각자의 정부와 군대는 유지하면서 자유롭게 남북을 오갈 수 있는 단계가 그 시작이 되겠죠. 이후의 상황은 서로 그리는 모습이 다르기 때문에 그때 가서 조율해야 할 거 같아요.” 우리에게 북한은 어떤 존재일까. 불과 십수 년 전만 해도 사람도 아닌 붉은 늑대로 그려지며 언제고 도발을 꿈꾸는 괴뢰로 그려졌다. 하지만 이제는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해도 국민적인 동요가 미미할 정도로 존재감이 희미해지지 않았나 싶다. 김현경 역시 “이산가족이 되면 삼일절과 광복절에 덕수궁에서 만나자”는 얘기를 하고 자랐다며 우리가 지금 누리는 평화가 과연 공고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품기도 한다고 털어놓았다. “우리는 북한에 대해서 어려서부터 많이 배운 세대잖아요. 전혀 모르는 대상이라면 호기심을 가지기라도 할 텐데 저마다 북한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다 보니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게 안타까워요. 남녀관계도 그렇듯, 일단 대화의 기본은 귀를 기울이는 거잖아요. 북한에 대해서도 거창한 논리보다는 그들이 뭐라고 얘기를 하는지, 미사일을 쏜 의도는 무엇인지에 대해 일단 한번 들어보자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북한은 언젠가 하나가 되어야 할 존재라고 들려주세요 차분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김현경은 그야말로 초고속 인생을 살아왔다. 대학 졸업반 시절 가장 먼저 입사 시험을 치른다는 이유로 응시한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해 MBC에 입사한 이듬해 교양국 선배 PD와 결혼식을 올렸고 그 다음해 첫아이를 출산했다. SBS를 거쳐 현재 한국종합예술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남편은 아나운서에서 기자로 전업하는 데 큰 힘을 준 공신이다. “생계의 목적이나 의무의 틀을 벗어나 평생 가져갈 수 있는 일을 해라”는 조언 덕분에 큰맘 먹고 기자로 전업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중학교 1학년인 두 딸은 ‘남다른’ 엄마를 둔 덕분에 북한에 대해 상대적으로 거리감을 느끼지 않고 자랐다. 남북회담 당시 특별히 마련된 직통 전화 덕분에 “엄마 지금 평양이야”로 시작하는 전화까지 받아온 터라 더욱 그렇다. 가족과는 두 차례나 금강산에 다녀왔다. 첫 여행은 당시 선보인 ‘파격 세일’ 혜택 덕을 보고자 떠난 것이었지만, 아이들은 그 이상의 뿌듯함을 얻어왔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굉장히 충격을 받은 듯했어요. 차를 타고 군사분계선을 지나면서 남에서 북으로 이동했고, 생김새가 사뭇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조심 해야 하는 경험을 했으니까요. 하지만 금강산의 절경에 놀라고, 북한 사람들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기도 하며 여행을 마치고는 굉장히 흐뭇해했어요.” 이미 금강산 관광을 했다는 1백20만 명에 속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하자, 김현경은 레저, 먹을거리, 볼거리를 위한 여행으로 접근해도 될 만큼 괜찮은 가족 휴양지라고 귀띔했다. 이동 중 촬영 금지, 특히 군인 촬영 금지 조항만 지키면 문제 될 것이 없으며, 심리적 안도를 원하면 현지에 남쪽 사람이 운영하는 호텔을 이용하면 된다고 조언했다. “금강산 갈 때마다 그 길이 놓이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나를 떠올려 봅니다. 이젠 참 많이도 바뀌어서 우리의 쉼터가 그들의 일터가 된 상황이잖아요. 우리 관광객이 묵는 호텔에 북한 주민이 출근을 하거든요. 그렇게 서로 얽혀서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지나친 의무감 혹은 적대감은 금물이란 걸 알면서도 북한을 생각하면 우리의 가슴은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가워지게 마련이다. 굳이 냉정해지지 않아도, 북한은 더 이상 감정적인 차원의 대상이 아니다. 주식, 부동산, 환율, 원유가격 등 우리의 경제와도 직결된 문제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녀들에게는 무어라 말해줘야 할까. “옛날에는 하나의 나라였고, 지금은 나뉘어 있지만, 다시 합치기를 바라는 존재지만 서로 생각이 조금 다르다고. 그래서 좀더 친해지고 화해해서 친구 사이가 된 뒤에 정말 하나가 될 거라고 얘기해주면 어떨까요?” 혹시 책을 낸 뒤에 그 쪽(북측)에서 답변이 왔느냐고 물었더니, “아직 전화가 안 왔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김정일 위원장은 남측 언론사 사장단과 해외교포 언론인은 만난 적이 있는데 기자와 인터뷰한 전례가 없다. “차 한잔할 기회가 된다면 취재는 당연한 거고, 그 사람이 생각하는 미래, 변화, 도약, 희망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어요.” 글 / 장회정 기자 사진 / 이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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