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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네프리뷰] 언데드 다루는 법-살아 있는 시체로 돌아온 나의 사랑이여(2025. 01. 15 06:00)
- 2025. 01. 15 06:00 연예
- 비현실적인 사건과 일상성의 충돌이 빚어내는 기이한 감성을 여성 감독 특유의 섬세함으로 차분하고 예민하게 포착해 낸다. 이에 걸맞은 뛰어난 배우들의 절제된 연기와 협연도 이야기에 깊이를 부여한다. /판씨네마㈜ 제목: 언데드 다루는 법(Handling the Undead) 제작연도: 2024 제작국: 노르웨이, 스웨덴, 그리스 상영시간: 98분 장르: 드라마, 공포 감독: 테아 히비스텐달 출연: 레나테 레인스베, 앤더스 다니엘슨 리, 바하르 파르스, 비욘 선드퀴스트 개봉: 2025년 1월 22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북유럽 영화는 장르를 초월해 공유하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기후환경에 어울리는 왠지 차갑고 건조한 느낌이다. 하물며 공포 영화라면 어떻겠는가?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돼 관객들에게 기억되는 북유럽 공포 영화를 다 끌어모아도 열 손가락 안에 들지 싶다. 일단 영화산업 자체의 규모가 크거나 제작이 활발한 나라들이 아니라는 사실도 기본적으로 주지해야 한다. <데드 스노우>(2009·노르웨이)로 대표되는 좀비 영화, <프릿 빌트>(2006·노르웨이), <보돔호수 캠핑괴담>(2016·핀란드), <레이캬비크 와일 와칭 매서커>(2009·아이슬란드) 같은 슬래셔(칼부림) 영화 같은 다양한 시도는 있었지만, 그 형세가 지속·확장되는 분위기는 아니다. 반면 판타지적 소재 안에서도 현실성을 담보로 한 ‘기괴한 드라마’ 형태의 작품들이 비평이나 흥행 면에서 선전한 경우가 많았고, 다수의 관객에게도 ‘북유럽 공포 영화’를 대표하는 일종의 대명사처럼 이해되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제1회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 소개된 <킹덤>(1994·덴마크)이다. 원래 TV를 위해 제작된 드라마를 모아 극장에서 상영한 탓에 4시간이 넘는 시간과 심야 상영 자체가 큰 화제가 됐다. 이후 한동안 대한민국에서 밤샘 심야 상영은 큰 유행을 불러오기도 했다. 흡혈귀를 소재로 한 <렛 미 인>(2008·스웨덴), 초능력 아동들이 등장하는 <이노센트>(2021·노르웨이) 같은 작품들은 국내에도 개봉해 호평받은 작품들이다. 상투적 장르에 대한 새로운 시선 연장 선상에서 이번에 개봉하는 <언데드 다루는 법>은 흔치 않은 북유럽 공포 영화의 최신작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반갑다.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 일대에 원인불명의 대규모 정전 사태가 발생한다. 이후 죽었던 사람들이 되살아나는 믿지 못할 일이 뒤 따른다. 꼬마 엘리아스를 잃고 관계가 소원해진 아버지 말러(비욘 선드퀴스트 분)와 딸 안나(레나테 레인스베 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에바(바하르 파르스 분)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남편 데이비드(앤더스 다니엘슨 리 분)와 자녀들, 그리고 오랫동안 동고동락해온 동성애인인 엘리자베트(올가 다마니 분)를 떠나보낸 후 누구보다 큰 상실감에 괴로워하던 노부인 토라(벤테 뵈르숨 분). 이들 앞에 꼭 한 번만이라도 다시 보고 싶었던 그들이 돌아와 서 있다. 최초의 좀비 영화로 거론되는 빅터 할페린 감독의 <화이트 좀비>(1932) 이후 20세기 말에 이르러 좀비 장르는 공포 하위장르로서 뚜렷한 위세를 점유하게 됐다. 넘쳐나는 편수만큼 다양한 변주가 이뤄졌는데 이 과정에서 ‘미라(Mummy)’, ‘스켈레톤(Skeleton)’, ‘리빙 데드(Living Dead)’, ‘언데드(Undead)’ 등의 다양한 표현과 개념이 정리됐다. 노련한 여류감독의 장편 데뷔작 노르웨이 출신으로 지난 10여년 동안 다수의 단편영화와 뮤직비디오, 광고 작업을 통해 내공을 쌓은 테아 히비스텐달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비현실적인 사건과 일상성의 충돌이 빚어내는 기이한 감성을 여성 감독 특유의 섬세함으로 차분하고 예민하게 포착해 낸다. 이에 걸맞은 뛰어난 배우들의 절제된 연기와 협연도 이야기에 깊이를 부여한다. 여기엔 원작 소설 작가인 욘 A. 린드크비스트의 남다른 시선과 감성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일찍이 흡혈귀에 대한 색다른 시선을 선보였던 첫 소설 <렛 미 인>을 통해 세계적 인지도를 얻게 된 것처럼, 이번 작품은 소위 ‘좀비’로 통칭하는 ‘살아 있는 시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카메라의 시선은 사건을 매우 조용하고 담담하게 쫓아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증폭되는 분위기는 단순한 ‘공포’나 ‘비애’로 표현할 수 없는 다층적 정서를 유출해 낸다. 특히 중후반부 니나 시몬(Nina Simone)이 부르는 자크 브렐(Jacques Brel)의 명곡 ‘나를 떠나지 마세요(Ne Me Quitte Pas)’가 흐르며 등장인물들의 처연한 모습을 나열하는 장면은 이 작품의 백미라 할 만하다. 표면적으로는 소재에 비해 자극적 이야기나 특출난 기교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극장을 나온 뒤에도 쉽게 떨쳐낼 수 없는 특별한 애수와 여운을 길게 남기는 작품이다. 차갑고 슬픈 환상의 작가 ‘욘 A. 린드크비스트’ /www.johnajvidelindqvist.com 이 작품의 중요한 홍보 포인트의 중 하나는 원작 소설의 작가인 욘 A. 린드크비스트(사진)다.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이 영화화한 <렛 미 인>(2008)의 인기에 힘입어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소설가다. 공교롭게 <렛 미 인> 역시 <언데드 다루는 법>보다 1주일 앞서 오는 1월 15일 다시 극장에 걸리는데 2008년, 2015년에 이어 세 번째 개봉이다. 린드크비스트는 1968년 스웨덴 블라케베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판타지에 심취했던 그는 10대 때부터 거리에서 마술쇼를 펼쳤고, 이후에는 코미디쇼나 드라마의 작가로 일하며 직접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소설가로의 전향을 결심한 후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흡혈귀 이야기 <렛 미 인>을 집필한다. 여덟 번의 퇴짜를 맞고서야 2004년에 어렵게 출판이 성사된 이 작품은 바로 베스트셀러로 등극하고 큰 주목을 받게 된다. 이듬해인 2005년 출판된 두 번째 소설 <언데드 다루는 법>에 이어 2008년 발표한 <나를 데려가>는 스웨덴 최고의 문학상인 셀마 라겔뢰프 상과 예테보리 포스텐 문학상을 받으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더욱 단단히 한다. 2011년 출간한 소설집 <묵은 꿈들은 흘려보내길>에 수록된 단편 ‘경계선’은 2018년 알리 아바시 감독에 의해 영화화돼 스웨덴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굴드바게상 작품상과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자기 소설을 원작으로 해 만들어진 영화 모두 각색에도 참여하며 애정을 드러내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제작자로도 나섰고 장의사 역으로 직접 출연해 초반에 잠시 등장한다.
- [박수현의 바닷속 풍경](60) 남극 케이프워싱턴-혹독한 남극서 피어나는 황제펭귄의 사랑(2025. 01. 15 06:00)
- 2025. 01. 15 06:00 문화/과학
- 2016년 12월 남위 74도, 황제펭귄 서식지 케이프워싱턴을 찾았다. 남극특별보호구역인 케이프워싱턴은 남극 빅토리아랜드 테라노바만 연안에 있는 장보고과학기지에서 15분 정도 헬기를 타고 가면 도착한다. 석양을 배경으로 마주한 황제펭귄 가족의 모습에서 혹독한 남극에서의 평화와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황제펭귄은 겨울에 알을 낳고, 태어난 새끼를 키우는 유일한 동물이다. 남극 곳곳에 흩어져 살다가 3월 말~4월 초 집단 번식지에 수천마리가 집단을 형성한다. 짝짓기를 마친 암컷은 겨울이 시작되는 5월 초~6월 초 알을 낳고, 7월 초~8월 초 알이 부화한다. 육아는 수컷의 몫이다. 수컷에게 알을 맡긴 암컷은 먹이를 찾아 바다로 떠난다. 수컷은 암컷이 돌아오기까지 4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영하 50도의 강추위와 초속 50m 이상의 눈보라 속에서 갓 태어난 새끼를 돌봐야 한다. 육아 중에 수컷은 얼음 조각을 깨어 수분만 섭취할 뿐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암컷이 돌아오면 드디어 수컷이 먹이 사냥을 위해 바다로 떠난다. 굶주린 수컷은 뼈에 남겨둔 약간의 지방에 의존해 바다로 향한다. 수컷이 기력을 회복해 다시 서식지로 돌아오면 이제 암컷과 함께 바다로 나간다. 남은 새끼들은 집단을 이뤄 부모를 기다린다. 12월의 남위 74도는 해가 완전히 저물지 않는 백야 기간이다. 태양의 고도가 낮아지면 남극의 석양이 얼음 평원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인다. 함께 크릴 사냥을 나갔던 부부가 새끼가 기다리고 있는 보금자리로 돌아오면 다시 모인 가족은 평화로운 남극의 밤을 맞는다.
- [신간] 새들에 띄운 소수자의 꿈과 사랑(2024. 10. 09 06:00)
- 2024. 10. 09 06:00 문화/과학
- 블랙버드의 노래 크리스천 쿠퍼 지음·김숲 옮김·동녘·1만8500원 크리스천 쿠퍼는 자신을 흑인이고 게이이며 SF와 판타지를 사랑하는 ‘괴짜’라고 소개한다.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마블 코믹스에서 작가이자 편집자로 일하면서 마블 작품에 퀴어 캐릭터를 만들어낸 그의 취미는 ‘탐조’, 즉 새를 관찰하고 탐구하는 것이다. 쿠퍼는 인종적 정체성은 숨길 수 없어도 가족을 비롯한 공동체 안에서는 안전했던 반면 성적 지향은 숨길 수 있는 대신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했다고 회고한다. 그런 쿠퍼에게 어디에서나 자기 방식대로 날아오르며, 거리낌 없이 경계를 넘나드는 새들의 세계는 도피처였다. 새 한 마리를 온전히 이해하기까지 많은 수고와 시간이 필요하듯, 한 사람을 이해하는 일도 마찬가지라고 쿠퍼는 말한다. 이 에세이는 탐조하던 많은 날 속에 쿠퍼 자신이 경험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고발한 기록이자, 소수자로 살아온 생존자의 일대기다. 쿠퍼는 이 책에서 자신이 만난 다양한 새를 소개한다. 미국 뉴욕에서 볼 수 있는 새들은 한국 독자에겐 낯설지만, 새들의 생김새나 울음소리를 묘사하며 탐조하는 재미를 들려준다. 노스탤지어, 어느 위험한 감정의 연대기 애그니스 아널드포스터 지음·손성화 옮김·어크로스·2만2000원 ‘노스탤지어(향수)’의 사전적 의미는 ‘고향을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 또는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다. 영국의 감정사학자인 저자는 노스탤지어가 현대사회를 움직이는 중요한 시대 정서라고 본다. 역사학, 심리학, 신경과학, 의학 지식 등을 종합해 400여 년에 걸쳐 노스탤지어가 어떻게 기능해왔는지 분석한다. 본래 ‘향수병’은 위험한 질병이었으나, 산업화 이후 대이동의 시기를 거치면서 점차 무해한 감정으로 바뀌었다. 현대사회에선 심리적 안정제로서 마케팅 수단, 정치적 선전도구, 인지치료 기술로 역할을 한다. ‘퇴행’의 상징이기도 했던 노스탤지어가 어떻게 고독의 시대를 치유할 정서로 기능하는지 전망한다. 어떤 일은 그냥 벌어진다 브라이언 클라스 지음·김문주 옮김·웅진지식하우스·1만8500원 인류는 역사적 사건의 명백한 원인을 찾으려 애쓰고, 원인과 패턴을 알면 현실을 통제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저자는 그것이 ‘착각’이며 세상일이 ‘우연히’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런 사례를 짚으며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안내한다. 대혼란의 세상 희망을 찾아서 김종대 외 지음·롤러코스터·1만7800원 오물풍선과 대북전단 등으로 대치국면에 있는 남북관계는 어떻게 될까. 전쟁터에서 인공지능(AI) 무기는 어떻게 통제하며 기후재난의 대처법은 무엇일까. 학계, 언론, 국제기구, 시민단체 등에서 활동하는 전문가 14명이 여러 위기의 평화적 해법을 모색한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 김금희 지음·창비·1만8000원 김금희 작가의 첫 역사소설이다. 동양 최대 유리온실이었던 창경궁 대온실을 수리하면서 그 안의 비밀이 드러나고 과거와 현재가 엮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건축물을 수리하듯 아픈 역사의 순간을, 상처받은 인생의 순간을 수리하고 재건하는 이야기다.
- 신간
- “두 팔이 돼준 아내, 존경하고 사랑합니다”(2024. 09. 16 06:00)
- 2024. 09. 16 06:00 스포츠
- 파리 패럴림픽에서 포기를 몰랐던 장애인 트라이애슬론 선수 김황태 김황태가 지난 9월 7일 인천 문학경기장 앞에서 인터뷰 도중 아내 김진희의 두 팔에 안겨 활짝 웃고 있다. 김세훈 기자 수영에는 정말 목숨을 걸었다. 한쪽 의수를 핸들에 고정한 채 탄 사이클도 위험했다. 철인 3종(트라이애슬론)에 참가한 두 팔 잃은 남편, 남편을 옆에서 도운 아내 모두 조마조마했다. 두 차례 큰 고비를 넘긴 뒤 뛴 마지막 달리기. 부부의 마음이 조금씩 편안하고 행복해졌고 레이스를 마친 뒤 함께 울고 함께 웃었다. 출전 11명 중 두 팔 없는 유일한 선수 장애인 트라이애슬론 선수 김황태(47·인천시장애인체육회)와 아내 김진희(45)는 지난 9월 2일 프랑스 파리 패럴림픽(장애인 올림픽)에 선수와 핸들러(경기 보조원)로 나섰다. 장애인 트라이애슬론은 수영 750m, 사이클 20㎞, 육상 5㎞ 합산으로 최종 순위를 정한다. 김황태는 2000년 감전 사고로 두 팔을 잃었다. 출전 선수 11명 중 두 팔이 없는 선수는 김황태가 유일했다. 지난 9월 7일 인천 문학경기장 앞에서 김황태와 김진희 부부를 만나 패럴림픽을 무사히 마친 소감을 물었다. 김황태는 양팔이 없으니 수영에 취약했다. 빠른 센강 물결을 허릿심으로 버티며 배영과 평영을 섞어 물살을 헤쳤다. 기록은 24분 58초. 1위와는 13분 이상 차가 났고 10위에도 7분 이상 뒤졌다. 김황태는 “수영을 하다가 힘이 빠지면 죽을 수도 있다”며 “살아나와야 한다는 마음으로 헤엄쳤고 수영을 끝낸 뒤 ‘이제 끝났다. 나머지는 시간이 걸려도 완주할 수 있다. 내가 포기하지 않으면’이라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아내는 수영을 마친 남편에게 물을 먹였고 사이클에 앉아 몸을 고정하는 데 힘을 썼다. 사이클도 위험천만했다. 경기 전날에는 손목과 핸들을 고정하는 잠금장치까지 고장나 대충 손을 봤는데 경기 당일에는 며칠 전 수리한 의수까지 말썽을 부렸다. 김황태는 “끈, 케이블 타이로 오른쪽 의수 팔꿈치 부위를 고정했고 잠금장치도 핸들에 묶었다”고 말했다. 오른쪽 의수는 핸들에 고정됐고 왼쪽 의수는 핸들에 걸쳐놓았다. 코스도 코블 코스(중세시대 마차들이 다니기 위해 만든 돌이 깔린 길). 김황태는 “넘어질까 봐 걱정하면서 탔다”고 말했다. 육상은 마라톤도 완주한 그가 가장 잘하는 종목이다. 그는 5㎞를 11명 중 5번째로 뛰었다. 레이스 막판 김황태는 저스틴 고드프리(호주)를 제치고 종목 합산 10위로 올라섰다. 김황태는 “고드프리를 제칠 생각은 없었다”며 “몸이 좋지 않아 보여 같이 들어오려다가 그가 한 바퀴가 더 남았다기에 어쩔 수 없이 내가 먼저 달려왔을 뿐”이라고 말했다. 김황태가 지난 2일 파리 패럴림픽 트라이애슬론 경기에서 사이클을 타고 있다. 오른쪽 의수가 케이블 타이 등으로 핸들에 고정돼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사이클은 35분 29초로 7위, 육상은 21분 19초로 5위. 3개 종목 합산 최종 순위는 10위(1시간 24분 01초). 불혹을 훌쩍 넘긴 나이,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 그 속에서 김황태는 포기를 몰랐고 “패럴림픽에 출전해 반드시 완주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두 팔이 돼준 아내 김진희가 늘 함께했기에 쓸 수 있는 아름다운 피날레. 김황태는 “김진희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라고 말했고 김진희는 “완주해줘서 고맙다”며 울먹였다. 김황태는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고 잘했다. 학창 시절 오래달리기에는 자신이 있었다. 해병대 복무 시절 ‘무적 해병’ 선발 대회에서 30분 동안 윗몸일으키기를 1500회 이상 했다. 한국 전체 해병 중 2위였다. 김황태는 23세 때인 2000년 8월 고압선에 감전돼 양팔을 잃었다. 결혼을 위한 양가 상견례를 한 달 앞둔 때였다. 아내는 “부모님 반대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며 “내가 남편을 보살피겠으니 이해해 달라며 떼를 부렸다”고 회고했다. 병원생활 1년 3개월. 김황태는 “죽는 중환자가 많았다”며 “나는 행운아”라고 말했다. 둘은 2002년 결혼했다. 그는 마라톤, 노르딕스키, 태권도에 도전했다. 그냥 이런저런 운동을 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패럴림픽에 출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노르딕스키로 2018년 평창동계패럴림픽에 출전하려 했지만, 무릎 십자인대 부상으로 포기했다. 태권도로 도전한 2020 도쿄패럴림픽 출전도 등급이 없어 무산됐다. 주위 권유로 시작한 철인 3종. 김황태는 “수영과 사이클이 어렵다는 건 알았지만 평소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면 아무 고민 없이 그냥 하는 성격이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김황태가 지난 2일 파리 패럴림픽 트라이애슬론 경기에서 결승선을 향해 뛰어오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잠잘 때 빼고 늘 붙어있는 아내 수영은 자유형, 접영, 배영을 섞어 배웠다. 빠른 유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나름의 방편이었다. 사이클은 실내에서 주로 연습했고 달리기는 인천 문학경기장을 돌았다. 아내는 2022년 남편의 정식 파트너가 됐다. 올해에는 패럴림픽까지 7개국을 함께 다녔고 국내에서 하는 모든 대회와 훈련도 함께 했다. 손으로 해야 하는 모든 일은 아내가 도맡았다. 김진희는 “잠잘 때 빼고 늘 붙어있을 수밖에 없었다”며 “정말 많이 다투고 싸웠다. 지금도 24시간 싸운다”고 말했다. 파리 패럴림픽 기간 부부는 긴장하면서도 행복했다. 김황태는 “수영 기록이 크게 뒤질 수밖에 없어 순위 싸움은 생각하지 않았다”며 “무사히 완주하자는 데 초점을 두고 편안하게 생활했다”고 말했다. 김진희는 “고비를 잘 넘기면서 완주하니 너무 행복하고 고마울 뿐”이라고 말했다. 김황태의 감동적인 완주는 각별한 관심을 끌었다. 부부는 “크게 잘한 것 없는 평범한 부부인데 너무 많은 관심을 받아 어리둥절하다”며 웃었다. 부부가 딱 붙어 생활하니 사람들 눈길을 끌게 마련이다. 김황태는 “안타깝게 보는 시선은 사양한다”며 “그냥 평범한 사람, 평범한 부부로 봐달라”고 말했다. 그는 “장애인들을 안쓰럽게 바라보기보다는 이들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도록 지원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진희는 “패럴림픽 선수촌에는 우리보다 더 심한 장애인이 많았다”며 “누구에게나 장애는 올 수 있다. 장애인을 계속 쳐다보는 시선이 장애인을 불편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김진희·김황태 부부가 파리 패럴림픽 경기를 마친 뒤 개선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대한장애인체육회 47세에 처음으로 출전한 패럴림픽. 다음 패럴림픽 때는 51세가 된다. 김황태는 “철인 3종, 마라톤은 기록이 나빠 다음 패럴림픽에 나서기 힘들다”며 “다른 종목으로 도전할까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아내는 “다음”이라는 말에 놀랐다. 아내는 “남편이 여유롭게 운동하고 나도 이제는 좀 여유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아내는 “현재 대학생인 딸도 아빠가 달리기만 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김황태는 오는 10월 중순 일본에서 열리는 철인 대회에 출전한 뒤 경상남도에서 벌어지는 전국 장애인체육대회에도 나선다. 김황태는 “종목과 상관없이 운동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김진희는 “남편이 할 수 있을 때까지 보호자 겸 핸들러로 함께하겠다”라고 화답했다.
- [이주영의 연뮤덕질기](32) 사랑에 대한 실재와 허상(2024. 09. 13 16:00)
- 2024. 09. 13 16:00 문화/과학
- 연극 <시뮬라시옹>·<랑데부>, 뮤지컬 <사의 찬미>·<박열> 연극 <시물라시옹> 공연 장면 / 예술창작공장 콤마앤드 및 파란오이 명절 연휴는 축복이자 재앙이다. 친지들과 모임 속 뼈있는 대화와 명절 음식 장만 여파는 회포를 푸는 것과 동시에 탈출을 꿈꾸게 한다. 명절 노동으로 불거지는 고부갈등과 부부갈등은 사랑하는 이들을 폭력의 주체로 만든다. 오죽하면 ‘명절 이혼’이라는 신조어가 생겼을까. 본질을 허상으로 대체하며 참고 참다 극단으로 치닫는 것보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선언하고 실재를 직시한다면 연휴의 축복을 만끽할 수 있을지 모른다. 가상 부부와 현실 연인의 동상이몽 연극 <시뮬라시옹>(최양현 작·이태린 연출)은 인공지능(AI)이 일상이 된 가까운 미래, 확장된 허상이 본질을 대체하면서 생기는 혼돈을 다룬다. 선욱(송철호 분)은 갑작스러운 비행기 사고로 아내 상아(신사랑 분)를 잃고 슬픔에 잠식되던 중 동료가 죽은 반려견을 AI로 복원해 상실의 아픔을 치료하는 것을 보게 된다. 아내를 복원하기로 결심한 선욱은 아내에 대한 데이터를 스캔해 AI 시스템에 연결한다. 이제 특수 안경만 착용하면 일상 어디에서든 AI로 복원된 아내와 함께할 수 있다. 복원된 아내와 처음 만난 날, 그리움에 사무친 선욱은 아내가 눈앞에 있는 현실이 믿기지 않아 오열하며 웃는다. 멜로드라마적 절정이다. 그림을 전공하고 피아노와 베이킹을 배우느라 바쁜, 쾌활한 아내와의 일상은 행복하면서 밋밋하다. 반복되는 나날이 답답해진 선욱은 ‘진짜 아내’를 재현하기 위해 일기장과 메모장, 휴대전화, 노트북 데이터 등 더 많은 데이터를 입력한다. 더 풍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AI가 재현한 아내는 진짜일까? 선욱은 아내의 심연을 접하고 충격에 빠진다. 행복의 절정이라고 생각해온 모든 관계와 기억이 상아 입장에서는 소외와 폭력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선욱은 AI로 복원된 아내와 언쟁을 벌이고 생전에도 해본 적이 없는 막장 부부싸움에 이른다. 서로의 바닥을 본 선욱은 그런데도 아내가 그립다. 그는 AI가 복원한 ‘진짜 아내’와 대면할 수 있을까. 시스템을 초기화해 아내의 허상을 다시 소환할까. 아니면 ‘진짜’가 존재하긴 한 걸까. <시뮬라시옹>이 부부의 ‘동상이몽’을 두 세계의 공존을 의미하는 거꾸로 매달린 가구들과 기술융합 등의 서사를 기반으로 다루었다면 연극 <랑데부>(문정희 원안, 김정한 작·연출, 최천중 작곡, 정소연 안무)는 정반대다. 무대 중앙에 놓인 가로로 긴 런웨이 중심으로 사방에 객석이 자리 잡고 있다. 일부 객석은 무대 위 두 남녀의 호흡과 땀방울을 공유할 정도로 가깝다. 검은색의 긴 런웨이 무대 위를 검은 정장의 남녀가 질주하면서 춤을 추고 과격한 행동을 하며 뛰어다닌다. 처음부터 실재와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겠다고 선언하는 무대예술이다. 다른 세상의 남녀가 우연히 만나 상처를 인식하고 이해하며 각자의 실재에 접근하는 과정을 다룬다. 로켓 공학자 태섭(박성웅·최원영 분)이 배달 짜장면의 맛이 잘못됐다고 항의하자 짜장면집 사장 지희(문정희·박효주 분)가 달려와 따지는 게 첫 만남이다. 자로 잰 듯 반듯해야 하고 신체접촉에 경기를 일으키는 강박증 환자 태섭은 자유로운 영혼의 무용수였던 지희와 맹렬히 싸우고 사과하면서 서로의 과거가 연결됐음을 깨닫는다. 지희의 상처가 태섭에게 축복이었던 상황을 확인한 순간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이야기와 춤으로 위무하지만,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질 수 없다. 실체를 공유할수록 닿고 싶으나 닿지 못하는 지점만 부상하기 때문이다. 중년에 이른 늦깎이 연인들의 소통은 로켓 발사 카운트다운과 남녀 2인무인 파드되(pas de deux)로 형상화된다. 서로를 놓아주기로 한 이들의 파드되는 그 어떤 러브신보다 애절하다. 이들은 현실적인 거리 두기에 성공할까. 아니면 불행을 감내하며 각자의 상처를 더 깊이 들여다볼까. 뮤지컬 <박열> 공연 장면 / 더블케이엔터테인먼트 근대 연인들의 목숨 건 연대 동시대 현대인들의 복잡한 심리를 다룬 작품들에 비하면 근대 암울한 시대에 대항한 연인들의 삶은 명확하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 실존 인물들을 다룬 창작 뮤지컬 <사의 찬미>와 <박열>은 어떤 측면에서는 <시뮬라시옹>과 <랑데부>보다 직설적이고 진보적이다. 짧고 소중한 생존의 시간 속 자아를 잃지 않으며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목숨보다 중요했다. 뮤지컬 <사의 찬미>(성종완 작·작사·연출, 김은영 작곡, 이헌재 드라마터그)는 1926년 8월 4일 현해탄을 건너던 부산행 관부연락선 안에서 실종된 극작가 김우진과 소프라노 윤심덕의 비극적 결말이 사실은 해피엔딩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에서 시작됐다. 전라도 거부의 아들로 와세다대학에 유학 중이던 김우진은 아이가 있는 유부남이었다. 도쿄음대생 윤심덕은 당대 유학생 사회에서는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주목받던 소프라노였다. 속절없이 사랑에 빠진 이들의 삶은 여러 드라마와 영화로 재현됐으나 뮤지컬 <사의 찬미>는 기존 서사를 거부한다. 1926년 8월 4일 현해탄을 건너는 관부연락선 위가 현재, 그들이 처음 만난 1921년을 과거로 놓고 시대의 아픔과 가족들에 얽힌 삶을 저울질하며 둘만의 삶을 도모하는 과정을 스릴러물에 담았다. 2013년 초연 후 올해가 일곱 번째 시즌인 대학로의 대표 흥행작품이다. 극 중 윤심덕이 부르는 ‘난 그런 사랑을 원해’는 현대인들의 심연을 드러낸 넘버로 알려져 있다. 독립운동가이며 아나키스트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부부의 삶을 다룬 뮤지컬 <박열>(이선화 작·작사, 성종완 연출, 이유정 작곡) 역시 마찬가지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6000여명의 조선인이 학살된 상황을 세상에 알리고 저항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권력에 맞서며 자유를 수호하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같은 세계관과 정체성을 가진, 연인에서 부부로 마지막까지 같은 방향을 향해 달린 동지로서의 삶은 동시대 현대인들이 흠모하는 이상향이다. 영화로 잘 알려진 박열 일대기와 달리 올해 두 번째 시즌인 뮤지컬 <박열>은 두 연인이자 부부의 확고한 연대와 확장된 사랑을 현대적인 록 발라드로 시원하게 표현했다. 연극 <시뮬라시옹>과 <랑데부>는 사상누각 같은 동시대 남녀관계의 실재와 허상을 들여다보며 솔직해지자고 말한다. 뮤지컬 <사의 찬미>와 <박열>은 근대 실존 인물들이 시대적인 암울함 속에서도 허상을 깨고 실재를 획득하는 용기를 다루고 있다. 모방이라는 의미의 ‘시뮬라시옹(simulation)’은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에 의해 원본을 대체한 허상으로 재해석됐다. ‘랑데부(rendez-vous)’는 서로 다른 세계의 만남과 조화를 상징한다. 친인척들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송편을 먹는 풍경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허상이다. 가부장 제도와 유교적 가치관에서 비롯된 허상에 매몰되기 전 각자의 실재를 인정하고 랑데부할 용기가 필요한 시기다. <시뮬라시옹>은 9월 15일, <랑데부>는 9월 21일, <박열>은 9월 29일, <사의 찬미>는 10월 27일까지 상연한다.
- 이주영의 연뮤 덕질기
- [시네프리뷰]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그냥 삶 자체로 힘든 이들을 위한 위로(2024. 09. 04 06:00)
- 2024. 09. 04 06:00 연예
-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는 원작의 장점을 극대화하면서도 짧은 이야기의 한계와 아쉬움을 풍성하게 펼쳐내는 데 성공했다. 흔한 연애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는 영화로 그보다 크고 넓은 삶의 성찰까지 전달하고 있다는 것은 큰 미덕이다. /㈜디오시네마 제목: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Sometimes I Think About Dying) 제작연도: 2023 제작국: 미국 상영시간: 93분 장르: 드라마, 로맨스 감독: 레이철 램버트 출연: 데이지 리들리, 데이브 메르헤예, 파르베시 치에나, 마르시아 드보니스 개봉: 2024년 9월 4일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장편 영화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의 원작은 2019년 스테파니 아벨 호로비츠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12분짜리 단편 영화로 유튜브로 볼 수 있다. 내성적인 여주인공의 독백으로 잔잔하게 진행되는 이야기는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한 남자를 향한 호감과 두려움 사이의 혼란스러움을 깔끔하게 그려낸다. 2019년 선댄스 단편영화 경쟁 부문에서 상영되고 2020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단편영화상 1차 후보에 선정됐다. 리메이크이자 확장판이라 할 수 있는 이번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는 원작의 장점을 극대화하면서도 짧은 이야기의 한계와 아쉬움을 풍성하게 펼쳐내는 데 성공했다. 프랜(데이지 리들리 분)의 삶은 무난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일찌감치 회사로 향하고, 열댓 명 남짓 근무하는 평범한 사무실에서 일한다. 소소한 업무와 대화로 하루가 지나면 느긋하게 자신만의 공간으로 돌아와 간편식으로 저녁을 먹고 잠시 퍼즐 책에 집중하다가 잠자리에 든다. 어느 날 정년 퇴임한 캐롤(마르시아 드보니스 분)을 대신해 로버트(데이브 메르헤예 분)가 출근한다. 그의 등장으로 이제껏 다른 이들과 분명한 선을 그어 자신의 평온을 지켜왔던 프랜의 마음 한구석에 균열이 시작된다. 통속적 제목을 초월하는 진솔한 인생 예찬 영화는 시작부터 인상적이다. 무대가 된 미국 오리건주 아스토리아 마을의 평온하고 일상적인 풍광이 서정적 음악과 함께 시선을 사로잡는다. 도로 위를 구르는 상한 과일, 도시너머 바다를 가로지르는 대형선박, 주택 계단을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내려오는 사슴, 비둘기에 둘러싸여 상념에 젖은 노인의 모습,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가느다란 풀잎, 뒤이어 바닷가 저 멀리 서 있는 여주인공이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응시한다. 프랜의 일상에서 잠시나마 생기가 되살아나는 순간은 문득문득 자신이 죽은 모습을 상상할 때다. 하지만 끔찍하거나 기괴한 장면과는 거리가 멀다. 숲속, 바닷가, 텅 빈 사무실 등 대부분 혼자임을 실감하는 다양한 장소에서 마치 잠든 것처럼 편히 누워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가 상상하는 죽음의 이미지란 죽음 자체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그에 맞닿아 있는 삶에 대한 과격한 애정의 역설임이 명확해진다. 마치 흔한 연애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는 영화로 그보다 크고 넓은 삶의 성찰까지 전달하고 있다는 것은 가장 큰 미덕이다. 원제목(Sometimes I Think About Dying)을 그대로 해석하면 ‘나는 때때로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이다. 한국어 제목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는 다소 통속적이고 허세도 느껴지지만, 영화가 품고 있는 양가적 감정을 제대로 반영한 탁월한 번역이라 생각한다. 소소하고 지리멸렬한 일상의 고귀함 주연을 맡은 데이지 리들리는 1992년,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출생이다. 케네스 브래너 감독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2017),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여성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클레어 맥카시 감독의 <오필리아>(2021)에도 출연했지만, 대부분 관객에겐 일명 <스타워즈> 시퀄 3부작으로 불리는 3편의 작품의 여전사 레이로 기억되고 있다. 그래서 이 작고 섬세한 작품에 설득력 있게 생명력을 불어넣는 연기가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리들리는 “세상과 주변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이 마음에 들었다. 대본에는 많은 아름다움과 기쁨이 가득했다”라고 회고하는데, 주연뿐 아니라 제작에까지 참여하여 특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영화가 시종일관 따뜻함과 유머를 잃지 않는 것은 냉소주의를 싫어한다는 레이철 램버트 감독의 취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감독은 모든 삶에는 미세하지만, 정교한 방향성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하는 농담이나 현재의 성가신 문제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먹는 도넛. 그것은 사소하지만, 초월적이며 굉장히 시적인 것들이다. 인간으로서 사소하지만 아름답고 어리석지만, 그 안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살아가는 힘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기쁘고 경사스러운 것이다.” 레이철 램버트는 2023년 인디와이어가 선정한 ‘떠오르는 여성 감독 28인’에 선정됐다. 제목만으로도 빛나는 영화들 /㈜영화사 조제 본편의 진위나 완성도를 떠나 제목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들이 있다. 뉴 저먼 시네마를 대표하는 감독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Angst essen Seele auf·1974)는 작품 속 나이와 인종을 뛰어넘는 남녀의 교감만큼이나 시적이고 철학적인 제목으로 관객에게 기억된다. 1990년대 중후반 불붙었던 예술영화 유행으로 한국에서는 23년 만에 개봉해 정식으로 관객들을 만났다. <미지수에 대한 방정식>(Équation à un inconnu)은 제목만큼이나 난해하고 인상적인 작품이다. 프란시스 사벨이 연출한 이 퀴어 로맨스이자 노골적 포르노는 1980년 개봉 직후 바로 잊혔다. 수십 년이 지난 후 감독 얀 곤잘레스는 게이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영화 <칼+심장>(Un couteau dans le coeur·2018)을 준비하기 위해 다양한 자료들을 조사하던 중 <미지수에 대한 방정식>을 발견했고, 이는 재평가 받는 계기가 됐다. 탐정영화의 대가로 대접받는 하야시 가이조 감독의 데뷔작 <꿈꾸는 것처럼 잠들고 싶다>(夢みるように眠りたい·1986)는 제목처럼 필름 느와르 스타일의 범죄 미스터리에 더해진 몽환적인 분위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리스의 거장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안개 속의 풍경>(Landscape in the Mist·1988)은 <시테라 섬으로의 여행>(1984), <비키퍼>(1986)와 더불어 일명 ‘침묵 3부작’으로 불린다. 아버지를 찾아 길을 나선 어린 남매의 힘겨운 여정은 뚜렷한 여운을 남긴다. 이자벨 코이제트 감독의 캐나다 영화 <나 없는 내 인생>(My Life Without Me·2003), 프랑스 감독 알랭 레네가 90세에 완성한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Vous n’avez encore rien vu·2012·사진)도 멋진 제목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작품들이다.
- 시네프리뷰
- [시네프리뷰] 러브 라이즈 블리딩-범죄 스릴러 또는 비범한 사랑 이야기(2024. 07. 10 06:00)
- 2024. 07. 10 06:00 연예
- 로즈 글래스 감독은 다양한 감독의 작품을 레퍼런스로 선정해 제작진과 출연 배우들에게 공유했다고 전해진다. 이 영화가 단순히 특정 시대의 장르영화를 넘어서는 좀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작품으로 읽힐 수 있는 확장성을 담보하는 중요한 단서다.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여러 측면에서 독특한 양상을 보이는 개봉작이다. 일단 지난 7월 4일 시작된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작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개봉일을 목전에 두고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는 것은 아예 없지는 않지만 흔한 경우는 아니다. 어쨌든 영화제 티켓은 예매 오픈 19초 만에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는 홍보사의 전언이다. 또 다른 특이점은 영화에 조연인 데이지로 출연한 안나 바리시니코프가 초대돼 레드카펫을 밟았고, 이후 영화제 기간 관객과의 대화, 정식 개봉과 관련한 홍보 행사를 병행한다는 점이다. 이 역시 감독이나 주연급 배우들이 홍보를 위해 내한하는 보통의 경우와 비교해 흔치 않은 형태다. 연출을 맡은 로즈 글래스는 1990년생으로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런던 칼리지 오브 커뮤니케이션에 재학하며 다수의 단편영화를 통해 내공을 쌓았다. 2019년 발표한 장편 데뷔작 <세인트 모드>(Saint Maud)는 토론토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이후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런던 비평가협회상 등 유수의 영화제에 초대, 수상했다. 글래스 감독은 단번에 주목할 만한 감독에 이름을 올렸다. <세인트 모드>는 앞서 제24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다소 무리로 보이는 개막작 선정을 고집한 이유가 어느 정도 이해된다. 사랑이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가 헬스장에서 매니저로 일하며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살아가던 루(크리스틴 스튜어트 분). 어느 날 운동에 열중하고 있는 새로운 얼굴 잭키(케이티 오브라이언 분)와 눈이 마주치고 둘은 단번에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뜻밖의 사건으로 인해 서로를 지켜주려는 두 사람의 헌신은 걷잡을 수 없는 폭력으로 변질한다. 마치 극 중에서 잭키의 뇌와 근육을 통제 불능의 상태로 만드는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은 것처럼 영화는 단순한 범죄물의 수위를 넘어 폭주한다. 더불어서 반복해 관객들에게 질문한다. 과연 이들에게 이성의 끈을 놓게 만드는 것은 ‘약물’일까, ‘사랑’일까? 외모부터 관객들의 이목을 휘어잡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케이티 오브라이언을 비롯한 배우들의 빼어난 연기와 호흡은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자 볼거리다. 영화는 198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부분에서 1980~1990년대를 풍미했던 저예산 범죄 스릴러를 추억하게 만든다. 당시 미국 서부의 황량한 사막 어딘가의 소외된 마을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스릴러들은 창의가 차고 넘치지만 검증받지 못한 신인 감독들이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선택하는 일종의 리트머스 같았다. 시대적 조류가 녹아든 새로운 범죄 스릴러 이런 영화 대부분은 사건의 시작에 있어 표면적 소재로 ‘금전’을 중요하게 부각시킨다. 일확천금을 손에 넣기 위한 인간군상이란 설정은 어떤 관객이라도 인물에 공감하고 마음을 열게 만드는 마법의 열쇠와도 같다. 하지만 정작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수면 위로 드러나는 갈등의 본질은 결국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치정과 시기, 질투가 난무하는 말초적 욕망이다. 존 달 감독의 <배반의 도시>(Red Rock West·1993), 폴 토머스 앤더슨의 <리노의 도박사>(Hard Eight·1996), 스콧 레이놀즈의 <스트레인저>(When Strangers Appear·2001)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특히 코엔 형제의 데뷔작 <분노의 추격자>(Blood Simple·1984)는 <러브 라이즈 블리딩>에서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글래스 감독은 이외에도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나 폴 버호벤, 쓰카모토 신야, 빔 벤더스 등 다양한 감독의 작품을 레퍼런스로 선정해 제작진과 출연 배우들에게 공유했다고 전해진다. 이 영화가 단순히 특정 시대의 장르영화를 넘어서는 좀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작품으로 읽힐 수 있는 확장성을 담보하는 중요한 단서다.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나름의 창의와 열정이 넘친다. 아쉽게도 20년 전쯤에 나왔다면 희대의 걸작 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만한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제목: 러브 라이즈 블리딩(Love Lies Bleeding) 제작연도: 2024 제작국: 영국, 미국 상영시간: 104분 장르: 범죄, 로맨스 감독: 로즈 글래스 출연: 크리스틴 스튜어트, 케이티 오브라이언, 안나 바리시니코프, 에드 해리스 개봉: 2024년 7월 10일 등급: 청소년 관람 불가 한국을 방문한 기대주 안나 바리시니코프 안나 바리시니코프와 그의 아버지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 people.com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러브 라이즈 블리딩>을 대표하는 게스트로 극 중 데이지를 연기한 안나 바리시니코프가 내한했다. 주인공인 루와 잭키, 두 사람의 범상치 않은 사랑 사이에 끼어들어 치명적인 위기를 조장하는 조연이다. 나름 중요한 역할이지만 감독이나 주연이 아닌 배우가 홀로 영화를 대표해 초대된 것 자체가 흔치 않은 경우라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1992년생으로 데뷔 후 주로 TV 시리즈에서 활약하고 장편영화는 소극적이었던 탓에 한국의 관객들에게는 더욱더 낯설게 느껴질 만도 하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유명무용가이자 1980년대 흥행작 <백야>(White Nights·1985)의 주연을 맡았던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좀더 호기심이 발동한다. 무용 전문가인 부모덕에 어려서부터 발레를 배웠지만, 너무 외향적인 성격 탓에 그만두고 여섯 살 때 오른 연극무대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배우의 길을 선택했다고 한다. 지금껏 그가 출연한 6편의 장편영화 중에서 케네스 로너건 감독의 <맨체스터 바이 더 씨>(Manchester by the Sea·2016)는 특별히 그의 존재감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작품으로 꼽힌다. 이번 작품에서도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어 좌충우돌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백치미 넘치는 인물을 연기한다. 이를 통해 단순히 기괴한 범죄물에 머물 수 있었던 이야기를 다채롭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앞으로 어떤 변신을 보여줄지 주목할 만하다.
- 시네프리뷰
- [시네프리뷰]노 베어스-영화와 현실 양쪽에서 비극으로 치닫는 사랑(2024. 01. 10 06:00)
- 2024. 01. 10 06:00 연예
- 권위주의 정권의 탄압과 시골의 미신이 ‘합작’해 두 연인의 사랑이 결국 비극으로 끝나는 과정을 영화는 감독 자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덤덤하게 묘사하고 있다. /엠엔엠인터내셔널㈜ 튀르키예 국경도시의 한 골목. 물건을 배달하는 사람들이 교차해 지나가고 술집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여성을 남자가 찾아간다. 남자는 여권을 꺼내 든다. 어느 여행객이 잃어버린 것이다. 여행객이 분실 신고하는 데 걸리는 시간, 약 사흘의 유효기간이 있다. 남자는 여자가 먼저 떠나면 나중에 따라가겠다고 말하고, 여자는 홀로 두고 떠날 수 없다고 말한다. 영화와 현실 속 두 연인의 평행이론 이것은 실제 이야기일까. 사실 영화의 인트로 연출이 너무 티가 난다. 보통 영화에서 그러듯, 거리를 걷는 평범한 사람들도 다 단역배우다. 나는 이 대목에서 봉준호 감독 영화 <살인의 추억>(2003)에서 송강호가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냐”며 날아차기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송강호가 날아차기하는 논두렁길은 아마 수없는 리허설 때문인 듯 잡초가 짓이겨져 있었다. 갑자기 화면의 전환. 지금까지 관객이 보고 있던 장면은 노트북 컴퓨터의 모니터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반체제 프로파간다를 찍는다며 출국이 금지된 감독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장면을 보며 원격으로 디렉팅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화면이 끊기면서 영화는 ‘감독의 현실’ 시간으로 넘어간다. 감독이 머무는 곳이 국경 시골이라 인터넷 신호가 잘 안 잡힌다. 사다리를 놓고 지붕 위에 올라가도 더 이상 인터넷이 안 된다. 원격으로 진행되던 영화 촬영은 중단됐고, 용을 쓰던 감독은 다 포기하고 사진기를 꺼내 동네 아이들을 찍는 한편, 집주인에게는 카메라를 들려주고 동네 처녀·총각의 약혼식 장면을 찍게 한다. 이 마을은 독특한 약혼식 풍습이 있다. 결혼을 앞둔 남녀의 친인척 동네 사람들이 모두 개울가에 모여 둘러싼 가운데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발을 씻는 세족식을 하는 것이다. 순박한 집주인이 찍어온 영상을 검토하는 가운데 조감독이 튀르키예와 이란 국경을 넘어 감독을 찾아왔다. 조감독은 밀수업자들 루트로 국경을 넘어 망명할 것을 제안했고, 국경 너머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온 감독의 차를 한 처녀가 가로막는다. 이 처녀는 낮에 집주인이 찍어온 영상 속 약혼녀였다. 이 마을의 또 다른 풍습은 태를 자를 때 미래의 남편 이름으로 자르는 것이다. 고잘이라는 이 여성은 야곱이라는 남자에게 시집가기로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고잘은 대학 중퇴생인 또래 친구 솔두스와 사랑에 빠져 있다. 고잘은 감독에게 수수께끼 같은 예언을 건넨다. “만약 당신이 내가 남자친구 솔두스와 찍은 사진을 가지고 있다면 결국 피를 보게 될 것이다.” 권위주의 정권 탄압과 국경 마을 풍습의 컬래버 이후 감독을 찾아온 마을 사람들과 촌장은 “그 사진을 내놓으라”고 감독을 설득한다. 그런 사진을 찍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 눈치다. 마을 사람들 사이의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고 분쟁이 발생한다. 감독이 자기 카메라를 가져와 한 장씩 찍은 사진을 보여줘도 믿지 않는 눈치다. 촌장은 마을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방안으로 ‘진실의 방’에 가서 사람들에게 “그 사진을 찍지 않았다”고 선언하라고 제안한다. 영화 제목의 곰은 그 과정에서 언급된다. ‘진실의 방’에 가는 길에 곰이 출현한다는 명분으로 마을 사람들이 같이 간다. 실제 곰은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다(no bears). 기성 권위를 지키거나 유지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영화의 후반부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여권 위조로 연인을 먼저 탈출시키려 했던 영화 속 사랑도 운명을 비관한 여성이 물에 투신하면서 끝난다. 결국 마을에서 쫓겨나듯 떠나게 되는 감독이 목격하게 되는 것은 야간에 국경을 넘으려다 국경수비대에 걸려 죽는 솔두스-고잘 커플이다(영화에서는 야곱과 고잘의 세족식이 이뤄졌던 개울가 바위에 피투성이로 누워 있는 솔두스만 비춘다. 고잘의 예언대로 “피를 본 것”인데, 사진은 진짜로 없었던 걸까). 권위주의 정권의 탄압과 시골의 미신이 ‘합작’해 두 연인의 사랑을 결국 비극으로 만드는 과정을 영화는 감독 자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덤덤하게 묘사한다. 2022년 9월 베니스영화제에서 공개돼 경쟁부문 최고영화상인 황금사자상을 노렸으나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황금사자상은 미국 다큐멘터리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에 돌아갔다. 전형적인 아트하우스 영화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작품들, 그리고 장이머우 감독의 초기작을 좋아하는 분들께 추천한다. 제목: 노 베어스(No Bears) 제작연도: 2022 제작국: 이란 상영시간: 107분 장르: 드라마 감독: 자파르 파나히 출연: 자파르 파나히, 나세르 하셰미, 바히드 모바셰리, 바크티아르 판제이, 미나 카바니 개봉: 2024년 1월 10일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수입/배급: 엠엔엠인터내셔널㈜ 이란 당국의 탄압에 맞선 감독의 현재진행형 ‘투쟁’ 영화 주인공이자 스토리텔링 주인공은 자파르 파나히 감독 자신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인물 중 그나마 필모그래피가 알려진 사람은 감독이 원격으로 찍는 영화 속 연인 바크티아르 판제이와 자라 커플을 맡은 남녀 배우다. 그중 자라 역으로 나온 미나 카바니가 이란 정부의 탄압으로 특히 널리 알려져 있다. 미나 카바니는 역시 이란의 여성 감독 세피데 파르시 감독의 영화 <레드 로즈>(2014)의 여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영화 내용 중 누드 신을 찍었다는 이유로 이란 정부가 ‘이란 최초의 포르노 여배우’라고 비난하면서 비자발적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현재 프랑스 파리에 거주 중이다. 세피데 파르시 감독의 다른 영화에도 출연하고 있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 인스타그램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수난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조감독으로 일하다가 <하얀 풍선>(1995)으로 칸영화제에서 장편 데뷔작상인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하며 입봉했다. 세 번째 작품인 <써클>(2000)로 베니스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오프사이드>(2006)로는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했다. 그러다 이란 민병대의 총을 맞고 숨진 여대생 네다 솔탄 추모식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돼 출국금지를 당한다. 2010년에는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과 이슬람공화국 반대 내용 선전’을 이유로 징역 6년형과 20년 동안 영화를 만들거나 각본을 쓰지 못하고 인터뷰와 출국도 금지되는 등의 형벌을 받는다. 전 세계 영화인들의 ‘파나히 석방탄원’을 받은 이란 정부가 2개월 복역 후 자택 구금조치를 취하자 그는 실내에서 카메라를 들고 찍은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2010)를 케이크 속 USB에 숨겨 베를린영화제에 출품하는 등의 ‘저항’을 계속한다. 2015년 자택 구금에서는 해제되지만, 여전히 출국은 불가능한 상태에서 자동차로 이란 곳곳을 다니며 찍은 <택시>로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3개의 얼굴들>(2018)로는 칸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다. 여전히 출국금지 상태로, 영화제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노 베어스>를 찍은 직후인 2022년 7월 감독은 다시 수감됐다. 2023년 2월 1일 그가 단식투쟁을 선언하자 당국은 이틀 만에 석방했다고 한다. 감독의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보니 지난해 11월에 동료들과 집에서 찍은 듯한 근황(사진·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마지막 게시물이다.
- 시네프리뷰
- [정태겸의 풍경](58)경북 봉화 청량산 청량사-‘청량산인’ 퇴계가 사랑한 가을 산(2023. 12. 07 07:00)
- 2023. 12. 07 07:00 문화/과학
- 가을이면 꼭 가보고 싶었던 산이 있다. 경북 봉화의 청량산. 대한민국에서 오지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역이어서 쉽사리 발걸음을 옮길 용기를 내기가 어려웠다. 여행이라는 게 그렇다. 좀처럼 마음 내기 어려운 먼 곳이어도 한번 다녀오면 자꾸만 갈 일이 생긴다. 그토록 가을마다 가고 싶었던 그곳에 다녀올 일이 종종 만들어졌다. 시기도 딱 좋았다. 단풍이 절정에 달하는 때. 그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다행히 이틀의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청량산은 퇴계 이황이 사랑했던 봉화의 절경이다. 오죽하면 퇴계는 도산서원에서 15㎞를 걸어 청량산에 올랐다. 스스로를 ‘청량산인’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가 도산서원에서 출발해 청량산을 오르던 길은 이제 ‘예던길’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트레킹 코스가 됐다. 청량산에서도 청량사는 절정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다. 첩첩이 늘어선 산자락 가운데에 쏙 박혀 있는데, 절의 가람 배치가 매우 묘하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부처의 세계로 다가가는 방식을 택한 다른 사찰과 달리 이곳은 산의 생김새를 따라 물음표처럼 전각을 배치해 두었다. 보통의 산사를 상상한 사람이라면 생각지도 못한 풍광에 깜짝 놀라게 된다. 그 독특한 산 한복판이 가을로 물들었다. 파란 하늘과 반짝이는 단풍의 빛깔. 모두가 입을 모아 “우와!”를 외친다. 퇴계가 사랑했던 이 산에서 나의 마음도 함께 물들어가고 있었다.
- 정태겸의 풍경
- 고향사랑기부제, 위기의 지방극장 구할 수 있을까(2023. 11. 27 07:00)
- 2023. 11. 27 07:00 문화/과학
- 개관 88년 맞은 ‘국내 최고 단관’ 광주극장…광주 동구청 제안으로 ‘100주년 프로젝트’ 11월 21일 찾은 광주극장 앞에 영화 <버텨내고 존재하기>를 소개하는 그림 간판이 걸려있다. 광주극장의 간판장이 박태규 작가의 그림이다. 주영재 기자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단관(單館·상영관이 하나인)극장이자 전국에서 유일한 대형 예술극장.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에 있는 광주극장 앞에 붙는 수식어이다. 광주극장은 올해 개관 88년을 맞았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의 혼란을 거쳐 도시화와 고도성장기의 전성기,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인한 쇠락을 모두 경험했다. 지금은 예술극장으로서의 정체성을 뚜렷이 하면서 꿋꿋이 버텨내고 있다. 지난 11월 21일 찾은 광주극장 매표소 입구 양옆으로 두 개의 그림 간판이 걸려있었다. 붓으로 그린 간판은 이제 광주극장에서만 볼 수 있다. 오른쪽 간판은 개관 88주년 광주극장 영화제의 상영작들을, 왼쪽의 간판은 영화 <버텨내고 존재하기>를 소개하고 있다. 광주극장의 ‘간판장이’ 박태규 작가가 개봉작을 담당하고, 광주극장이 운영하는 영화간판 시민학교의 수강생들이 각자 원하는 작품을 골라 그렸다. 이날 개봉 3주차를 맞은 <버텨내고 존재하기>를 봤다. 뮤지션 최고은이 동료 음악가들을 광주극장으로 초대해 이들이 매표소와 상영관, 영사실, 사무실, 계단과 복도에서 공연하는 장면을 모아 만들었다. 지난해 열린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한국경쟁 장편 작품상을 받았다. 극장 로비에서 <버텨내고 존재하기>를 보고 나온 관객 엄윤희씨(28)를 만났다. 경상도에서 온 독립영화 순례객이다. “광주에 오래된 극장이 있다고 해서 왔고, 오늘 마침 시간이 맞아 본 영화였어요. 이 영화를 이 공간에서 보니 특별히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밖에서 봤을 땐 영화를 볼 수 있을 정도의 시설을 유지하고 있을까 생각했는데 들어오니 생각보다 엄청 아늑했어요. 일반 상업영화는 솔직히 뻔하기도 하고, 수익을 목적으로 하다 보니 다양한 울림이나 공감을 얻기엔 힘들다고 생각해요. 독립영화는 실험적이기도 하고, 느낌과 스타일이 정말 다양하죠. 그런 영화를 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영화 제목처럼 버텨내고 존재하는 공간이 중요한 것 같아요.” 뮤지션이자 <버텨내고 존재하기>의 기획자인 최고은씨는 “고향 광주에 주변 예술인을 초대해 제가 생각하는 광주스러움을 보여주고, 나누는 커밍홈 프로젝트의 3번째 시리즈를 광주극장에서 진행했다”면서 “팬데믹으로 온라인 공연을 기획했는데, 광주극장이라는 공간을 영상으로 기록하자는 목표도 있었다”고 말했다. 최씨는 광주극장을 영화의 무대로 택한 이유에 대해 “장소가 가진 역사성,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지켜내려고 고민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면서 “경제적 이유로 정체성이 흔들릴 법도 한데 어떻게든 견뎌내고 있는 모습을 충분히 지지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영화의 첫 등장인물, 뮤지션 김일두가 ‘뜨거운 불’을 부를 때 그의 등 뒤로 햇살이 강하게 비쳤다. 광주극장은 여러 곳에 창이 많이 나 있어 계절마다, 하루마다 빛의 온도가 변한다. 광주극장을 찾는 이들이 꼽는 매력의 하나다. 영화에는 광주극장 곳곳에 비치는 빛의 따스함이 잘 담겼다. 이 공간의 매력을 많은 이가 알게 된다면 관객 수 감소로 위기에 놓인 광주극장에도 온기가 돌지 않을까. 주영재 기자 ■88돌 맞은 국내 최고(最古)의 단관극장 광주극장은 1933년 교육자이자 사업가인 최선진씨가 설립해 1935년 10월 1일 개관했다. 조선인이 설립한 광주 최초의 극장이자 1250석에 달하는 대극장이었다. 1930년 일본인이 세운 제국관과 함께 광주 지역 양대극장이었다. 광주극장을 한 문장으로 규정하면 “엄혹했던 일제강점기에 개관해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명맥을 지켜온”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1939년 조선영화주식회사 사장 최남주가 첫 번째로 제작한 영화 <무정>이 개봉됐다. 1945년 8월 17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전남위원회 결성이 이뤄진 곳이기도 하다. 광주극장 출입구 1과 2 사이에 있는 임검석의 흔적이 그 긴 역사를 보여준다. 1922년 일제의 검열이 시작된 이후 극장에 파견 나온 경찰은 임검석에 앉아 영화나 공연을 검열했다. 독립을 상징하거나 식민지배의 설움을 표현해 비위를 가스를 때마다 경찰은 호루라기로 주의를 줬고, 호루라기를 세 번 불면 공연을 중단해야 했다. 임검석은 해방 후에도 검열이나 선도를 위한 공간으로 남았다. 광주극장은 1968년 전기모터를 훔치려던 절도범이 불을 내 소실됐다가 이후 860석 규모로 다시 문을 열었다. 화재 이후 폐관의 위기를 한 차례 더 지났다. 2001년 극장 건너편에 유치원이 생기자 관할 관청에서 ‘유해시설’이라며 폐쇄 명령을 내렸는데, 2004년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전원일치 위헌결정으로 자리를 지켜냈다. 광주극장은 2002년 이후 예술영화전용관으로 운영되면서 문화공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뚜렷이 하고 있다. 일반 상업영화관에서 상영하지 않는 예술영화, 독립영화만 상영한다. 매년 광주극장 영화제를 개최해 영화의 다양성을 증진하고, 예술전시, 음악회 등 문화행사도 연다. 광주극장 매표소 유리창에 ‘광주극장 100년 프로젝트’ 홍보물이 붙어 있다. 주영재 기자 전성기에 20곳이 넘던 광주의 극장은 현재 대부분 사라졌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멀티플렉스의 공세를 이겨내지 못했다. 남은 곳도 간판과 역할이 바뀌었다. 1961년 개관한 제일극장은 2012년 롯데시네마 충장점으로 바뀌었다. 광주시민회관은 리모델링 통해 시민 문화공간 플랫폼으로 운영 중이다. 신동아극장은 건물은 아직 남아 있지만, 문을 닫은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 외 극장은 전부 사라졌다. 제국관은 해방 후 무등극장으로 변모해 광주극장과 함께 향토극장의 맏형 역할을 했는데 이 극장도 5년 전 문을 닫았다. 도시의 구심점이 원도심인 충장로에서 신시가지로 이동한 원인도 크다.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해지면서 사람들이 극장을 찾아야 할 이유가 줄었다. 충장로에서 50년째 수제화 가게 ‘노틀담’을 운영하는 임종찬 대표가 말했다. “광주 충장로 전성기 시대엔 어깨를 부딪치고 서로 다녔어요. 지금은 신도심이 개발되면서 뿔뿔이 흩어지고, 우리같이 오래된 가게들이 버티면서 유지하고 있죠. 옛날에는 영화를 보려면 극장에 와야 했잖아요. 영화를 보려고 줄 서서 기다리던 시절이었는데, 지금은 방송 채널이 수없이 많다 보니 완전히 달라졌죠.” 옛 극장, 지역 향토극장의 소멸은 광주만의 일은 아니다. 1895년 개관한 한국 최초의 극장인 인천의 애관극장은 현재 멀티플렉스로 바뀌었고, 1907년 개관한 단성사도 멀티플렉스로 변화를 꾀하다 운영난에 2008년 문을 닫았다. 지방의 단관극장들도 생존의 기로에 있다. 60년 역사의 단관극장 원주 아카데미극장은 시민사회 반발에도 불구하고 최근 철거됐다. 아카데미극장 운영이 어려워지자 원주시민들이 모금 운동을 벌였고, 결국 시도 보전과 재생을 결정했지만, 새로 바뀐 지자체장은 복원사업을 중단하고 철거를 결정했다. 전국의 옛 극장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상황이라 김형수 광주극장 전무이사(광주시네마테크 대표)는 광주극장이 최고의, 유일한이라는 수식어를 받는 게 그다지 달갑지 않다고 했다. “불과 5년 전 한국 영화 100주년 행사를 크게 열었는데, 그렇게 한국 영화 100년의 역사를 담았던 공간들이 지금 전국에 몇 개나 있는지 돌아보면 안타까울 뿐입니다. (원주 아카데미극장 사태를 보면) 시민들이 보전해서 문화공간으로 바꾸려고 하는데, 문화적 가치를 보전해야 할 행정기관이 앞장서서 그 공간을 폭력적으로 철거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임종찬 대표는 지역의 역사를 간직한 공간을 보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광주극장 옆 옛 조흥은행 건물이 최근 철거된 것도 아쉬워했다. “보전할 건물은 보전해야 하는데 하루아침에 사라져 안타까워요. 서울 성수동만 해도 옛날 공장지대를 보전하고 살려서 많은 변화를 만들어왔잖아요. 목포도 옛 벽돌집, 근대문화거리를 보존하고 있는데 광주는 그런 것들이 거의 없어져 버렸어요.” 광주극장 옆 ‘영화가 흐르는 골목’ 안쪽에 있는 독립서점 ‘소년의 서’ 벽면에 그림간판이 걸려 있다. 주영재 기자 ■문화예술인 보듬는 너른 품 향토극장들이 생존의 기로에 있던 2000년대 초 광주극장은 고민 끝에 멀티플렉스로 변하기보다 비주류 영화, 제3세계 영화, 예술영화에 특화된 극장으로 변신하기로 했다. 2002년부터 ‘레이트 쇼’를 열어 <레퀴엠>, <헤드윅> 등 일반 영화관에서 쉽게 접하기 힘든 작품, 좋은 작품이지만 극장에서 환대받지 못한 작품을 상영했다. 상영시간이 4시간이 넘는 <킹덤>의 경우 인터미션을 포함해 자정에 시작해 아침 6시에 끝났다. 예술영화전용관의 길은 험난했다. 김형수 대표는 “2009년 <워낭소리>가 개봉했을 때를 제외하곤, 절체절명의 순간들이 2000년대 이후 쭉 이어왔다”고 말했다. “레이트 쇼를 하면서 재밌게도 극장을 찾는 관객이 달라지는 모습을 봤어요. 좀더 발전시키려고 시도한 끝에 영화진흥위원회의 예술영화전용관 사업에 지역 극장으론 처음 선정됐어요. 하지만 그 이후 3~4년은 굉장히 힘들었어요. 연간 관객 수가 20만명은 돼야 당시 직원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관객 수가 연간 1만명대로 떨어졌어요. 극장문을 닫는 게 오히려 답이 아니냐는 고민을 하던 차에 여기저기서 극장을 팔라고 제안이 들어왔죠.” 극장을 팔라는 제안은 지금도 들어온다. 바로 옆 조흥은행 터를 매입한 이가 광주극장도 매입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광주극장 주변으로 옛 건물들이 헐리고, 고층건물들이 들어서면서 극장 안에 들어오는 빛의 풍경도 바뀌고 있다. 아직은 환하지만, 모를 일이다. 인천의 미림극장을 비롯해 지방의 오랜 극장들은 대부분 재개발 때문에 존폐위기에 있다. 그래서 김 대표는 조흥은행 터 바로 옆에 있는 한 노포에 자주 들러 물어본다. 그 노포 마저 팔릴 경우 ‘완충지대’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광주극장은 영화 제목처럼 버텨내고 존재하고 있다. 10월마다 영화제를 열고, 시민간판학교를 열어 극장간판의 역사를 지키고 있다. 정기적으로 회고전도 연다. 옛날 영화를 상영하는 ‘월간 클래식’ 행사도 연다. 공연은 물론 영화와 관련한 인문학 강연도 기획하고 있다. 다양한 영화·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광주극장과 그 옆의 ‘영화가 흐르는 골목’은 지역 문화예술인과 마을공동체 운동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 광주극장은 바로 옆 사택을 2015년 영화의집으로 리모델링해 격주로 영화모임을 연다. 광주극장의 간판장이 박태규 작가의 전시도 여기서 열렸다. 마당에서 매달 둘째 주 토요일 지역 소농들의 장터도 열린다. 그 앞쪽으로 인문사회과학예술 서점 ‘소년의 서(書)’가 있다. 서점을 세운 이는 임인자씨다. 인천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초·중·고를 나와 서울에서 살다, 2016년 광주에 정착했다. ‘변방연극제’ 예술감독 등 연극계에서 활동하다 지금은 서점 주인이 됐다. 서점 이름은 광주민중항쟁을 다룬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따왔다. 변방연극제를 운영하던 중 형제복지원 사건(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랑자를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일반 시민과 어린이를 불법 납치·감금하고 강제노역을 시키는 과정에서 구타, 성폭행 등 잔혹한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과정에서 589명이 숨졌다)을 다룬 <살아남은 아이>(한종선·전규찬·박래군)라는 책을 알리고 싶어 서점을 열었다. 광주극장과 그 옆에 나란히 선 건물 1층의 비건 빵집 ‘빵과 장미’, 서점을 합해 임 대표는 ‘3합’이라고 불렀다. 기후 총파업을 할 때 빵과 장미가 일종의 플랫폼이 돼 사람들이 모였다. 영화 골목은 대안적인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아지트가 됐다. 임 대표는 “광주극장이 오랫동안 뚝심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도시의 역사와 영화, 문화가 함께 공존하는 공간인 이 골목이 살아남길 바랐다. “한국은 단절의 역사잖아요. 식민 지배와 전쟁, 개발로 모든 것이 파괴되고, 뒤엎어지고, 갈려졌죠. 이런 한국사회에서 100년을 이어간다는 건, 혼자가 아니라 함께 지켜간다는 건 그것만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향사랑기부로 광주극장 100년 지킨다 광주극장은 영진위로부터 연간 1억원의 재정지원을 받고, 광주시로부터도 연간 1억원의 보조금을 받고 있지만, 극장의 정상 운영에는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영진위 지원금은 영화제 등 프로그램 운영에만 써야 한다. 극장 후원회원의 후원금도 버팀목이 되고 있지만, 모두 합해도 직원 8명의 인건비를 주기도 빠듯한 상황이다. 극장이 노후화돼 여름철마다 수해 피해를 보지만 시설 개선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관객도 코로나19 때보다 오히려 줄었다. 코로나19때 절반이 줄었다면, 지금은 다시 그 절반으로 줄었다. 광주극장의 전경과 상영관(아래) 주영재 기자 광주극장은 난국을 타개하고, 100년 주년까지 명맥을 지키기 위해 고향사랑기부제를 활용하기로 했다. 광주극장은 광주 동구청의 제안으로 고향사랑기부금 민간 플랫폼인 위기브와 함께 ‘광주극장 100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고향사랑기부제는 본인 주소지를 제외한 지역에 기부할 수 있는 제도로 기부자는 세액공제와 함께 기부금의 30%에 해당하는 가치의 답례품을 받을 수 있다. 10만원을 기부하면 100% 세액공제를 받아 전액을 돌려받는다. 김희선 광주시 동구 인구정책계장은 “광주 동구 기금운영심의위원회에서 광주정신을 담고 있는 광주극장을 후손에게 물려줄 극장으로 보존하자는 공감대가 있었다”면서 “기부금을 광주극장이 필요로 한 사업에 활용하고, 또 한편으로 관내 발달장애인 야구단을 후원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지난 6월 시작된 기부금 모집은 현재 목표액 5000만원의 절반 정도를 채웠다. 광주 동구청은 일단 향후 3년간 광주극장 지정기부 사업을 지속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 계장은 “내가 기부한 돈이 어디에 쓰이고, 그 결과는 어땠는지 보여준다면 내년에도 계속해서 기부할 수 있는 좋은 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면서 “답례품은 지역의 사회적 기업이 생산한 물품 위주로 구성했고, 지역예술인들의 작품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광주극장은 건물이 오래돼 손볼 곳이 많다. 모금액의 추이를 봐서 일단 첫 단계로 내부 안전성 검사와 좌석 교체를 할 예정이다. 신진아 광주극장 팀장은 “매년 여름 수해 피해를 보는데, 이런 곳을 먼저 보수할 계획이다. 외벽 도장을 새로 하고, 안전진단 등을 거쳐 일부 사무 공간에 남아 있는 석면 지붕도 철거한다. 좌석도 일부 교체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향후엔 노후화된 영사기와 스피커, 건물의 냉난방 시설도 교체해야 한다. 건물의 원형을 보존해야 해서 오히려 비용이 더 드는 편이다. 고향사랑기부제는 희망의 불씨가 되고 있다. 김 대표는 이렇게 덧붙였다. “시민들은 대단히 많은 지지를 보내주셨지만, 공적 영역에서의 변화를 피부로 느낀 건 지금이에요. 이 공간이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 속에서 지역의 문화자산이라는 자각을 하면서 광주 동구청에서 지원한 것이라고 봐요. 이렇게 손을 내밀어 주니 우리도 기운을 잃지 않고, 조심스럽게 100년이라는 극장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게 됐어요. 광주극장만이 아니라 지역의 존폐위기에 있는 극장들이 이런 방식을 통해서 지속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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