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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살인사건 그 후 14년…피해자 어머니 이복수씨 인터뷰
2011. 10. 28 16:32 화제
지난 10월 10일, 일명 ‘이태원 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인 아서 패터슨이 미국에서 붙잡혀 한국 송환 여부에 대한 인도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1997년 4월 일어난 한 대학생의 죽음은 피해자와 용의자는 있으나 범인은 밝혀지지 않은 미해결사건으로 남아버렸고, 그렇게 14년이 흐른 지금 다시 한번 세상의 눈과 귀를 집중시키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아들 생각에 밤잠을 설친다는 어머니는 이번에는 반드시 아들의 한을 풀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사건의 전모 아직도 많은 이들이 1997년 발생한 ‘이태원 살인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사건의 자세한 전말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아무도 죗값을 치르지 않은 ‘이상한’ 사건으로 남았다는 것 정도는 세간에 잘 알려져 있다. 1997년 4월 3일 밤 10시께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한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홍익대 휴학생이던 조중필씨(당시 23세)가 휴대용 주머니칼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피투성이인 채로 소변기 옆 귀퉁이에 쓰러져 있던 중필씨는 오른쪽 목 부위 세 곳, 가슴 부위 두 곳, 왼쪽 목 부위 네 곳, 무려 아홉 곳이 칼에 찔려 있었다. 급히 도착한 119구조대가 상태를 살폈을 때 이미 그는 사망한 상태였다.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당시 같은 가게에서 햄버거를 먹다가 중필씨가 있는 화장실에 들어간 아서 패터슨(당시 18세)과 에드워드 리(당시 17세). 두 사람은 모두 미국 국적 소지자로 리는 미국에서 태어난 재미교포였고,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패터슨은 주한미군인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와 있는 상황이었다. 수사당국은 이튿날 패터슨을 검거했고, 리를 쫓기 시작했으나 리는 4월 8일 검찰에 자수했다. 두 사람은 각각 살인죄와 증거 인멸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됐다. 당시 검찰은 리를 살인범으로 판단하고 수사를 진행했다. 근거는 부검 결과와 주변인들의 진술 그리고 거짓말탐지기 결과였다. 부검의의 소견에 따르면 가해자는 피해자보다 키나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수사가 진행될 당시 패터슨의 키는 170cm에 못 미쳤던 반면 리는 키가 180cm가 넘고 몸무게가 100kg 가까이 나가는 체격이었다. 거짓말탐지기 또한 리는 거짓을 말하는 것으로 판독되면서 리가 범인일 가능성에 좀 더 무게가 실렸다. 결국 살인죄로 기소된 리는 1997년 10월 서울지방법원과 1998년 1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다시 항소한 1998년 4월 대법원은 ‘단독 범행을 단정하기 어렵다’라는 이유로 무죄 취지의 판결을 내리며 다시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서울고등법원은 리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1999년 9월 열린 재상고심에서 대법원은 무죄 확정 판결을 내렸다. 그 사이 패터슨은 1998년 1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증거 인멸 등의 혐의에 대해 징역 장기 1년 6월, 단기 1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던 중 그해 8·15 특사로 풀려났다. 피해자 가족은 리가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난 데 대해 항의하며 정황상 범인으로 판단되는 패터슨을 살인 혐의로 고소했고 검찰은 재수사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알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출국금지 상태에서 패터슨을 수사하던 검찰이 출국금지 연장을 제때 하지 않는 바람에 그 틈을 탄 패터슨이 미국으로 출국해버렸고 사실상 수사는 중단되고 만 것이다. 한 남자의 억울한 죽음에 얽힌 전모를 살펴보면 대강 이렇다. 그리고 2011년 10월 그동안 행적을 알 수 없던 용의자 패터슨이 지난 8월 미국 LA 현지 사법당국에 체포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건이 발생한 지 14년 만이다. 살인죄 공소시효는 15년. 이제 6개월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다. 하지만 범죄인 인도 결정에 관련한 재판은 대개 길게는 3, 4년씩 걸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다양한 방안을 강구해봐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인생의 전부였던 아들, 암흑 같던 14년의 시간 지금 이 순간 패터슨의 송환 결정을 누구보다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아마 피해자 고(故) 조중필씨의 가족일 것이다. 1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는 어머니 이복수씨(69)는 하루 빨리 패터슨이 한국으로 송환돼 법의 심판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죄를 저지른 사람이 벌을 받아야 (사건이) 끝나는 거죠. 패터슨이 미국에서 체포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번에는 정말 억울하게 하늘나라로 간 우리 중필이 한을 풀어주고, 14년을 울면서 살아온 우리도 한을 풀게 되나보다 했더니 일단 그쪽에서 재판이 끝나봐야 안다고 하네요. 재판이 1년이 될지 그보다 더 길어질지도 알 수 없는데 그저 답답하기만 해요. 나는 점점 늙어가는데 결국 범인은 잡지도 못하고 가버리면 중필이 얼굴을 어찌 보나 싶고…. 아직까지 죽은 아들 붙잡고 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범인이 잡히지 않았으니 끝이 난 게 아니잖아요.” 애지중지 키우던 아들을 황망하게 잃은 뒤, 어머니는 하루도 마음 편히 누워본 적이 없다. 게다가 범인을 눈앞에서 놓치고, 풀어주고, 결국에는 아무도 죗값을 치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어머니를 더욱 분하고 서럽게 만들었다. “지금도 그 이야기를 꺼내기만 해도 온몸이 덜덜 떨려요. 분하고 억울하고 속상하고 서럽고, 어떤 말로도 제 마음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거예요. 가슴에 굉장히 무거운 덩어리를 얹어놓고 사는 기분이었어요. 요즘도 자주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하곤 해요.” 사건이 있었던 1997년 4월 3일 밤, 그 시간부터 어머니의 세상은 암흑이 되었다. 아들이 병원에 있다는 경찰의 전화가 걸려왔을 때까지만 해도 그저 교통사고가 나서 입원을 했나보다 생각했었다. 급히 달려간 순천향대병원에서 아들의 얼굴을 보러 들어가려는 자신을 막아선 사람들이 “칼에 찔린 상태다”라고 이야기하기에 “우리 아들은 싸움은커녕 생전 욕 한 번 안 하던 아이인데, 다른 사람에게 잘못 연락한 거 아니냐”라고 물었던 어머니였다. 언제나 순하고 착했던 아들이 한밤중에 칼에 찔려 영안실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결코 믿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 이복수씨는 앨범 속 아들의 모습을 가만가만 손으로 쓰다듬었다. “참 훤칠했네요”라는 기자의 말에 “어릴 때부터 키가 컸어요. 초등학교 입학 때도 맨 뒤에 섰는걸요. 팔 다리가 길고 몸이 날씬해서 양복 입으면 모델같이 멋있었어요. 주변 사람들도 멋지다고 그랬어요. 중필이가 아주 미남은 아니지만 호감 가는 얼굴이거든요”라며 오랫동안 혼자서 속으로만 생각했던 아들의 이야기를 이것저것 꺼내놓았다. “당시에 저는 제대로 중필이를 보지도 못했어요. 사람들이 아버지만 들어가서 보고 저는 가지 말라고 하도 말려서요. 아홉 곳이나 칼에 찔렸다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처참했으면 다들 못 보게 했겠어요. 사실 제 눈으로 확인하면 믿고 싶지 않아도 사실이 될까봐 겁이 나기도 했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때 얼굴이라도 만져볼 걸 그랬다는 생각에 후회가 돼요.” 위로 세 딸을 낳고 뒤늦게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아들인데도 막내라 그런지 살가운 성격이었던 중필씨는 엄마를 자상하게 챙겼다. 공부도 잘하고 바른 성격이라 학교 선생님들이나 동네 어른들께도 늘 칭찬만 받았었다. “저는 제 인생에서 중필이를 전부로 생각하고 살아왔어요. 그때만해도 딸을 낳으면 죄인 취급받던 분위기였는데, 딸 셋을 낳고 중필이를 얻었으니 얼마나 소중했겠어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쁜 마음으로 애지중지 키웠던 아이예요. 그런데다 크면서 말썽 한 번 부린 적 없고, 딸들보다 저한테 더 살갑게 구는 정말 ‘엄마라면 껌뻑 죽는’ 그런 아들이었어요. 아버지도 그래서 중필이를 아꼈고, 누나들도 싹싹한 동생을 예뻐했고요.” 이 세상 어느 누가 제 자식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냐마는 중필씨는 그렇게 어머니에게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존재였다. 가족 사이에서도 늘 웃을 일을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중필씨가 하루아침에 사라졌고 그때부터 가족은 눈물로 남은 세월을 살아왔다. “집에 ‘웃음’이란 게 없어졌어요. 중필이 생각이 나도 남편이나 딸들 모두 힘든 거 아니까 이야기도 못 꺼냈어요. 다들 만날 울면서 지냈어요. 남편은 한때 저를 무척 원망하기도 했었어요. 그때 중필이가 군대에서 다쳐서 의가사제대를 하고 지내던 상태였는데 만약에 그냥 군대에 있었으면 이런 일은 없지 않았겠냐는 거죠. 남편은 그냥 있으라고 했는데 제가 의가사제대를 고집했거든요.” 다시는 볼 수 없는 아들을 생각하면 지나간 모든 일이 후회스럽고 아쉽지만, 특히 틈만 나면 “가족끼리 같이 여행 한 번 가자”라고 말하던 아들의 그 바람을 들어주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프게 마음에 남아 있다. “중필이가 대학생이 되고 그렇게 클 때까지, 한 번도 가족 여행을 못 갔어요. 2006년이었나, 군대 가기 전 시간이 있을 때 진해군항제에 벚꽃 구경 가려고 했는데 제가 허리가 너무 아파서 결국 떠나질 못했어요. 그 다음해 봄에는 통증이 더 심해져서 또 못 가고요. 그 일이 있기 얼마 전에 가까운 데라도 다녀오자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렇게 되고 만 거죠.” 죽지 않고 살았더라면 이제 서른여덟. 한창 왕성하게 사회생활도 하고 바쁘게 살아갈 시기다. 아마도 마음 따뜻한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주말이면 올망졸망 귀여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아빠가 되어 있을 것이다. “14년 동안 매일 ‘중필이가 살아 있었다면’을 그려왔던 것 같아요. 이것도 했겠지, 저것도 겪었겠지, 이런 모습이 되었겠지, 저런 일도 있었겠지, 하면서요. 늘 사무치게 보고 싶지만 추석이나 설날 같은 때는 그리움이 더해요. 식구들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는 다른 집을 보면 아들 생각이 더 많이 나기도 하고, 분한 마음이 다시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그래요.” ‘잘못한 사람이 벌을 받는’ 상식이 이루어지는 사회 어머니 이복수씨를 비롯한 가족은 지난 14년 동안 조중필씨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여왔다. 도움이 될만한 시민단체를 찾아다니고 검찰, 국회 등의 권력기관에도 적극적인 해결을 촉구했다. 패터슨의 한국 송환과 재수사를 요구하는 집회를 하고, 시민들을 상대로 일일이 서명을 받으러 다녔다. 석연치 않았던 부실한 검찰 수사에 대해서는 대법원까지 가는 법정 투쟁을 벌여 2006년에 배상금 3천400만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아들이 세상에 없는데, 그리고 그 아들을 죽인 이들이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버젓이 살아가고 있는데, 돈이 무슨 소용이겠으며 어떻게 단념하고 조용히 살 수 있었겠는가. 어느 날 갑자기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故 조중필씨. 그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사진은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 조카와 함께 올림픽 공원으로 나들이를 나섰을 때와 대학 시절의 조중필씨 모습. 그는 지금 하늘나라에서 어떤 모습으로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을까. “얼마 전에 신문 보도를 보니 미국에서 잡힌 패터슨이 ‘한국에서는 나를 절대 못 데려 간다’라고 조롱했다면서요. 너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사건 직후 재판받을 때도 그랬어요. 두 사람 모두 우리한테 미안한 기색 하나 없었어요. 그 사람들 부모들도 사과 한 번 없었고요. 그리고 저는 살인범이 내 자식을 죽여놓고 어떻게 그렇게 편하게 지낼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시비가 붙었던 것도 아니고, 재미로 찔렀다고 했다잖아요. 기가 막힐 뿐이었죠.” 지금도 법정에서 봤던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몸서리가 처질 정도로 소름이 돋는다는 이복수씨는 이번만큼은 꼭 용의자를 데려와 한국 재판정에 세우고 범인을 명확히 밝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단순한 분노나 복수심을 넘어 그렇게 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14년 전 대한민국의 법과 권위를 믿고 아들의 사건을 맡겼던 어머니는 앞으로도 끝까지 대한민국 정부와 법을 원망하고 불신하며 살고 싶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나라 국민이 아무 이유 없이 이 땅에서 목숨을 잃은 거잖아요. 적어도 내 나라 국민만큼은 지켜주는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선량한 우리 국민은 지키지 못하고, 살인범은 두둔해서 이제껏 잘 살게 내버려둔 걸 생각하면 분해서 몸이 덜덜 떨리지만 그래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이번만큼은 제발 잘 해결해주길 부탁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이복수씨는 최근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미군 성범죄사건 등을 바라보면 마음이 더 무거워진다고 했다. 그리고 아들의 사건을 꼭 해결해야겠다는 각오를 더욱 다지게 된다고. 높은 자리에 있고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좀 더 책임감과 의무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노력해주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한편으로는 가족만큼은 아니겠지만 국민들도 중필씨 사건을 잊지 말고 힘을 실어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해본다. 마지막으로 “배운 것 없고, 아는 것 없다”라고 말씀하시고는 어머니가 기자에게 물었다. “그런데 잘못한 일을 저지른 사람한테 잘못한 만큼 벌을 받게 하는 게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일인가요?”라고. “상식적으로 잘못을 했다면 뉘우치고 사과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라고. 그의 물음이 끝까지 의문으로 남지 않도록 이제는 모든 진실이 명확히 밝혀지고 상식적인 판결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이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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