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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희복의 인물탐구]법타 스님 “북에 있는 각 종교 성지순례한다”(2019. 10. 07 14:25)
- 2019. 10. 07 14:25 사회
- 탈북한 한모씨가 여섯 살 아들과 함께 서울에서 굶어 숨진 사건이 최근 발생했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는 나라의 사회복지 전달 시스템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다. 아쉬운 것은 이를 보도한 특정 언론은 탈북자임을 강조해 남북갈등 요소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경북 영천에 있는 은해사 회주 법타 스님은 일찌감치 탈북자 결연사업을 하고 있다. 그는 지난 9월 30일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민주평통 운영위원 임명장을 받고 ‘탈북자 자매결연사업’을 본격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임명장을 받기 전인 9월 27일 서울 성북동에 있는 조그만 ‘통일법당’에서 그를 만났다. -얼마 전 탈북자 모자가 굶어죽었다. 지금도 여전히 탈북자가 발생하고 있나. “탈북여성 대부분이 중국인에게 인신매매당한 피해자다. 돈 벌러 중국에 갔다가 인신매매를 당한 뒤 ‘억지 결혼’해 애 낳고 좀 자유로워지니 도망치는 것이다. 만주·시베리아 일대에 그런 탈북자가 20만명 정도다. 운 좋은 사람이 남한으로 와 지금까지 3만2000명 정도 된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남한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렵게 산다. 그들에게 무연자비(無緣慈悲), 즉 조건 없이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 민주평통 50인 운영위원 중 한 명 -민주평통에서 ‘탈북자 결연사업으로 작은 통일을 이루자’는 운동을 시작했다. 언제부터 하던 일인가. “개인적으로 10여년 전부터 탈북자 40여명의 양부모 맺기 사업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 민주평통 운영위원 임명장을 받고 본격적으로 할 생각이다. 민주평통에는 50명의 운영위원이 있고 자문위원만 1만9000명이다. 이들 전부 지역 유지로 명함이나 새기고 배지 달고 폼 잡고 다닌다. 그동안 민주평통은 세미나 등을 많이 했던데 이론이 부족해 통일을 못하나. 탈북자 3만2000명도 감당 못하는데 통일이 돼서 2500만명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나.” -스님의 휴대폰 음악소리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다. “아무리 정치를 잘해도 끝은 통일이다. 전쟁을 통한 무력통일이 아니라 평화통일이다. 이는 후손들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그래서 어린아이들 노래로 했다.” 탈북자를 돕는 사업은 종교인으로서 어찌 보면 지극히 ‘상식적’이고 ‘기초적’인 사업으로 보인다. 하지만 법타 스님은 남북문제에 관해서 거의 ‘프로’ 수준이다. 그가 민주평통 1만9000명의 자문위원(국내 1만5400명, 해외 3600명) 중에도 ‘핵심’인 50인 운영위원의 한 명인 것도 그 때문이다. 사실 그는 일찍부터 ‘통일사업’에 뛰어들어 불교계는 물론 범종단, 통일단체에서도 손꼽히는 인물이다. 법타 스님은 1989년 7월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다. 전대협이 임수경 학생을 파견해 큰 반향을 일으킨 그 행사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법타 스님은 서의현 총무원장에게 북한에 간다고 말하고 홍콩을 거쳐 베이징으로 갔다. 그리고 6월 25일 주중 북한대사관에 가서 ‘미국 학생’ 신분으로 비자를 받고 평양행 비행기를 탔다. 기자가 ‘서 총무원장이 방북을 승인했는가’라고 묻자 그는 “허락할 리가 있나, 또 허락하지 않는다고 안 가나, 그냥 통보한 것이지”라며 “내가 임수경보다 앞서 30여년 만에 혼자 북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보다 앞선 그해 3월 문익환 목사는 소설가 황석영과 재일교포 작가 정경모 등과 같이 평양을 방문했다. 당시 나라 안팎은 온통 ‘통일의 꽃’ 임수경에게만 관심이 쏠렸지 그의 방북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귀국한 그는 1992년 사단법인 평화통일불교협회(평불협)를 만들어 ‘통일보살’ 운동을 시작했다. 민족고(民族苦)와 사회고(社會苦)의 원인은 분단이라는 논리로 월간지 <하나로>를 발행했다. 그는 “첫 세미나로 ‘불교와 통일’을 했고, 다음 세미나 주제로 ‘주체사상과 불교’를 하기 위해 주제발표자와 토론자를 찾았지만 아무도 없었다”면서 “잡지 <하나로>에 이런 세미나를 한다는 안내광고를 낸 것이 문제가 됐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100여 차례 북한 방문 1994년 7월 그는 남영동 치안분실로 끌려갔다. 그는 “박종철처럼 물고문은 안 당했지만 인간의 자존심이 완전히 말살됐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돼 7년간 지루한 재판을 받아야 했다. 김대중 정부 들어서 비로소 사면·복권이 됐다. 집행유예 기간 중에도 통일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1997년 북측과 불교 조사, 사찰 복원 등의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북한은 대형 수해 등으로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고난의 행군’ 중이었다. 그는 “그때 ‘밥이 통일이고 밥이 평화다’라는 말을 절감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97년 황해도 봉산군에 있는 정방산 성불사에 국수공장을 지었다. 우리 가곡 <성불사의 밤>에 등장하는 바로 그 절이다. 그가 이곳에 국수공장을 지은 것은 북한에 성불사를 비롯한 70여개 유서 깊은 절이 있음을 알리고 싶어서였다. 그는 “98년부터 금강국수공장이 가동되고 인천항에서 진남포항으로 매달 밀가루 60톤씩을 실어 날라 7800명 분의 국수를 만들었다”면서 “고난의 행군 시기 북녘 동포를 먹여 살리는 데 기여했다”고 말했다. 비용은 통일부 지원과 회원·신도의 성금으로 충당했다. 통일부 집계로 이 국수공장을 통해 북에 50억원 가까이 지원한 것으로 돼 있다. 국수공장은 평양에 한 곳 더 세워졌고 이는 이명박 정부 들어 대북지원을 금지한 2010년 5·24조치 전까지 계속했다. 법타 스님은 그동안 평양을 50~60번, 금강산을 33번 가는 등 100여 차례 방북했다. 가장 최근에 간 것은 2011년이다. 묘향산 보현사에서 열린 ‘해인사 팔만대장경 1000년 조국통일 기원 남북 불교도 합동법회’에 참석했다. 현재 남북교류는 완전히 막혀 있다. 평양에서 남북 정상이 감격적인 연설을 하는 모습을 본 지 불과 1년 만이다. 북측은 북·미 정상회담을 위해 10월 5일 미국과 실무회담을 여는 등 한반도 주변 상황이 변하고 있다. 법타 스님은 “분단도 타의에 의해 됐지만, 지금 통일도 타의에 좌우되고 있다”면서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모두 우리의 통일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법타 스님은 이런 상황에서 남북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부산히 움직이고 있다. 이해학 목사, 김종수 신부, 김원웅 광복회장 등과 ‘겨레살림 공동체’를 만들어 지난 8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북한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 관계자를 만나 남북 성지순례를 논의했다. 그는 “유엔·미국 제재가 심하니 종교계가 북에 있는 절과 성당·교회 성지순례를 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면서 “일단 숨통을 틔워보자”고 말했다. 그는 또 10월 15일 평양에서 열리는 2022년 카타르 월드컵축구 아시아 2차예선 남북 경기를 관람할 남측 응원단 준비도 하고 있다. -통일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뭔가. 혹 가족 중 통일운동을 하다 고통을 받았거나 이산가족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것 전혀 없다. 미국에 공부하러 가서 처절하게 느꼈다. 우리 민족의 고통은 분단 때문임을 절감했다. 게다가 종단이나 스님들은 통일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어 나라도 나서게 됐다.” -유독 평화를 강조한다. 물론 불교의 가르침이겠지만, 특별한 이유가 있나. “내가 출가해 동국대 2학년을 마친 1968년 월남전에 끌려갔다. 사단 수색중대에서 극한상황을 겪어보니 생과 사가 둘이 아니더라. 그래서 전쟁을 통한 통일은 안 된다고 단언한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것이 전쟁이다. 살상을 했나. “안 했다. 밤에 1개 분대씩 매복하는데 베트콩을 봤는데도 총을 쏘지 않고 그냥 지나가라고 뒀다. 나는 분대원들에게 염주를 쥐어주며 관세음보살을 외우게 했다.” -직접 전투에서 겪은 참상은 어떠했나. “헬기를 타고 적지에 뛰어내리는데 고참이 제일 먼저 뛰어내리고 다음은 신병이, 마지막에 고참이 뛰어내린다. 총알이 날아오는데 뛰어내려야 했다. 베트콩 지휘관을 사살했는데 피가 바위에 혈죽처럼 튀었다. 고참병이 신병 담력을 키운다고 그 월맹군 사체의 음낭을 만지라고 했다. 그 음낭을 만졌던 신병 하나가 피×을 싸며 기절해 후송 보낸 적이 있다.” -법타 스님이 주지로 있던 은해사는 경북 영천에 있다. 영천에 3사관학교가 있고, 대구·경북의 보수적 분위기에서 ‘빨갱이 스님’으로 통하면 신도들이 오는가.(웃음) “누구는 주지가 ‘전라도 스님’이라고 한다.(웃음) 내가 거기 주지를 12년간 했고 신도도 많이 온다. 내가 사태를 객관적으로 보는 사람이라고 다 안다. 특히 대구·경북 오피니언 리더들과 통한다.” 법타 스님은 지난 5월 12일 부처님 오신 날에 은해사를 찾은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무례를 꾸짖어 화제가 됐다. 황 대표는 대구·경북지역 국회의원 7~8명과 은해사를 찾았다. 그런데 황 대표는 합장도 않고, 관불의식도 손을 가로지으며 거부했다. 법타 스님은 국회의원에게 “부처님에게 절하는 것과 어른에게 절을 하는 것이 무엇이 다른가”라며 “교회 장로인 고 김영삼 대통령도, 이명박 전 대통령도 다 했다”고 비난했다. 이 사실은 <경향신문>을 통해 단독 보도됐다. 광주민중항쟁을 현장에서 목격 법타 스님의 속세 얘기를 들었다. 스님은 1946년 4월 8일 초파일에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중학교부터 불교학생회를 열심히 했다. 청주상고를 마친 1965년 속리산 법주사에서 추담 스님을 은사로 입산했다. 추담 스님은 한용운 선생과 독립운동을 같이 하던 사이다. 그는 1967년 장학생으로 동국대 인도철학과에 진학했고, 76년에 이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컸고, 특히 박정희·김종필 군사정권이 싫었다”고 말했다. 1980년 광주 무등산에 있는 원효사 주지를 하면서 광주민중항쟁을 현장에서 목격했다. 그는 “전남대·조선대 불교학생회에 강의하다 현장을 꼬박 목격했고, 특히 전남도청 앞 무덕전에 있는 80여구 시신 앞에서 일일이 염불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1985년 <불교신문> 부사장을 마치고 혼자 미국으로 건너가 미주리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해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대구불교방송 초대 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스님은 남북화해에 기여한 공로로 2004년 만해대상과 민화협과 <경향신문>이 주최하는 제2회 민족화해상을 받았다. 2006년에는 ‘정일형·이태영 민주통일상’, 2011년에는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현재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 평화통일불교협회 이사장 등으로 후원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이 와중에 공부를 계속, ‘조선불교도연맹 연구’로 북한학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하고 있다. 법타 스님은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당부했다. “어떤 자리에서 어떤 행위를 하든지 주인이 되라. 그 자리가 진리의 자리, 부처님의 자리다. 이것이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는 의연 스님의 가르침이다. 특히 ‘심생즉 종종법생(心生卽 從從法生) 심멸즉 종종법멸(心滅卽 從從法滅)’ 즉 마음이 생기면 모든 것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이것이 ‘일체유심조’,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는 원효 스님의 가르침이다. 특히 민중불교, 민중과 함께 통일운동을 하는 것이 바로 원효 스님의 가르침이다. 후배들도 이런 것을 이어갔으면 좋겠다.”
- 원희복의 인물탐구
- [언더그라운드 넷]성지순례는 계속된다, 빠밤!(2009. 02. 19)
- 2009. 02. 19 사회
- 이른바 ‘성지’ 게시글에 달린 성지순례 댓글들. |DC인사이드 ‘성지순례‘라는 말이 있다. 인터넷 검색 엔진에 ‘성지순례‘라는 단어를 넣으면 이스라엘·요르단을 간다는 여행사 광고나 방문기만 주르륵 뜬다. 하지만 누리꾼이 말하는 성지순례는 다르다. 성지(聖地)는 말 그대로 성스러운 곳이다. 하지만 여기선 종교적 뉘앙스는 거의 없고, ‘인터넷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 처음 발생한 장소’를 뜻한다. 단지 의미만 있어서는 성지가 되기 어렵다. 성지가 새로 만들어낸 코드를 읽고 재해석한 누리꾼의 ‘반응’이 결합되어야 한다(따라서 댓글을 달 곳이 없으면 근본적으로 인터넷 성지가 되기가 어렵다). 그리고 이 ‘반응을 확인하는 재미’에 누리꾼이 정기적으로 오가야 성지가 된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성지순례‘의 첫 시작은 2001년 7월, ‘복숭아 맛’이라는 누리꾼이 쓴 “오늘 산 중저가 형 모델 싸게 팝니다”라는 게시물부터다. 게시물에서 비롯된 소동은 이미 DC인사이드 김유식 대표가 책에서도 쓴 적 있고, 여러 차례 보도도 되었으니 생략하자. ‘성지’는 꾸준히 탄생한다. 지난해 11월 말, 조선일보의 한 신입기자가 자신의 블로그에다 ‘미네르바의 IP 추적기(記)’를 올렸다. 이 기자는 “미네르바의 IP 주소를 보면 ‘여의도의 SK브로드밴드 주식회사’이며 구글 등으로 IP를 검색해보면 미네르바로 추정되는 사람의 실명까지 나온다”라고 주장하며 “내가 혼자서 2시간 만에 찾은 걸 왜 아무도 안 찾았는지 좀 의문이다”라고 글을 남겼다. 누리꾼은 “그런 식으로 검색하면 나는 KT방배동 근무 직원”이라며 조소했다. 유동IP에 대한 ‘오해’가 ‘대참사’를 낳은 것이다. 성지순례가 막 시작될 순간, 해당 기자는 블로그 게시글을 삭제했다. 뒤늦게 성지로 발견된 곳도 있다. 제목은 평범하다. ‘삼성전자 vs 온게임넷,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8 결승전’. 소녀시대 축하무대 사진 기사다. 누리꾼의 관심을 끈 것은 사진 설명이다. “어리다고 놀리지 말아요, 빠밤” 소녀시대의 노래 ‘소녀시대’의 가사다. 누리꾼은 열광했다. “기자질 쉽다”는 비아냥도 있지만, 압도적인 것은 ‘빠밤’이라는 후렴구의 응용이다. “여친 좀 생기게 해주세요 빠밤”, “헌터즈 카페에서 왔다감 빠밤” “소시갤에서 성지순례 빠밤” 식이다. 성지순례 글들을 보면 “~빠밤” 이야기가 다양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지금까지 계속 퍼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나저나 저 사진 설명에 얽힌 사연이 궁금하다. 기사를 전송한 e스포츠포털 포모스의 강영훈 기자는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지난해 8월에 찍은 건데 화제가 된 지는 뒤늦게 알았다”라며 “덕분에 메일도 몇 통 받았고 MSN에 등록한 친구들로부터 오랜만에 안부 인사도 받았다”고 말했다. 예상대로 사진 기사는 전송한 시리즈 기사 중 하나인데, 연속된 사진 중 하나의 사진만 떼어내 사진 설명을 읽으니 생긴 오해라는 것. 그는 “기자생활 쉽게 한다는 말은 오해라고 생각해서 그리 기분 나쁘지 않다”라며 “사실 소녀시대 얼굴도 구분 못하는데 ‘기자가 ‘소시빠(소녀시대 마니아)’가 아니냐’는 이야기는 조금 억울하다”고 덧붙였다.
- 언더그라운드. 넷
- [여행&레저]천주교 성지순례-고난과 영광의 발자취(2007. 12. 25)
- 2007. 12. 25 문화/과학
- 성탄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된 길은 그 첫걸음부터 순교와 수난의 험난한 발자취로 이어졌다. 200여 년 전 이 땅에 처음 교회가 세워진 후 무려 1만여 명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죽어갔다. 그중 절반은 자신의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무명의 순교자들이다.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갔다. 그것은 바로 진리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구현하는 길이기도 했다. 이 땅의 천주교 사적지들에는 어느 곳이나 진한 감동의 눈물이 배어 있다. 그 눈물로 죄를 씻고 용서를 구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횡성 풍수원성지 한국인 신부가 지은 최초의 성당 강원 횡성군 서원면 유현리 산골짜기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풍수원 성당은 아름답다. 웅장하달 수 없으나 지극히 단아하고, 고색창연하지 않으나 깊은 내력마저 감추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서구식 건물이면서도 주변의 산세와 어긋난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어쩌면 그런 느낌은 이 성당의 탄생 내력과 무관치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앙촌이자 한국인 신부가 건립한 최초의 성당이기도 한 풍수원 성당.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용인을 근거로 한 4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8일 동안 피난처를 찾아 헤매다 가까스로 정착한 곳이 지금의 풍수원이었고, 그때부터 풍수원 일대는 신앙공동체 생활의 터전이 되었다. 그 후 1866년 병인박해 때와 1871년 신미양요 때 관헌들을 피해 온 신자들이 합류하면서 풍수원은 본격적인 신앙촌으로 자리 잡았다. 일부는 화전으로, 일부는 토기점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20여 년간 숨어 지내던 주민들은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될 때까지, 처음 풍수원을 찾아들었던 때까지 치자면 무려 80여 년 동안 목자 없이 오로지 평신도들로만 신앙공동체를 유지해왔다. 신앙의 자유를 확보한 그 이듬해부터 신도들은 목자가 없는 양 떼들을 위해 신부가 상주해 돌보아주기를 강력히 열망하게 되었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1888년 당시 조선교구에서는 풍수원 본당을 창립하고 초대 신부로 프랑스 출신 르 메르를 임명했다. 르 메르 신부는 이로써 춘천, 화천, 양구, 홍천, 원주, 양평 등 12개 군을 관할했고, 당시 신자 수는 2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양식 성당 건물을 알지 못했던 이들은 초가집 20여 칸을 성당으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1896년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한 정규하 신부가 주도하여 1905년 현재의 성당을 착공했고, 1907년 준공에 이어 1909년 낙성식을 거행했다. 한국인 신부가 지은 첫 번째 성당이자 이 땅에 들어선 네 번째 성당인 풍수원 성당은 1982년 강원도 지방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었다. 풍수원 성당은 신도들이 직접 벽돌을 굽고 재목으로 쓸 아름드리나무를 구해오는 등 자체의 힘으로 지었는데, 그들이 보여준 열성은 가히 후대 신도들이 본받을 만한 것이었다. 총 건립비는 6000원. 당시 1500원이란 거금을 희사한 김말구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술만 취하면 공사장으로 올라와 “내 돈 내놓으라”고 생떼를 썼다. 보다 못한 정 신부가 “말구, 너 이리와! 네 돈 다 가져가라!”고 호통을 치면, “신부님,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며 꽁무니를 뺐지만 다시 술에 취하면 어김없이 공사장으로 올라왔으니, 그 허튼 실랑이를 지켜보던 신도들을 웃음으로써 공사판의 노고를 씻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 풍수원 성당에는 대강의실, 온돌방 5개, 유물전시관 등을 갖춘 피정의 집이 있어 개인이나 단체로 피정을 원하는 순례자들을 맞고 있다. 고아한 자태의 본당 건물은 가끔 드라마나 영화의 촬영장소로 쓰이고 있으며, 성당 왼쪽 언덕에는 ‘순례의 길’이 조성되어 있어 예수의 생애를 따라가며 수난과 영광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다. 군데군데 들어선 신도들의 무덤을 스쳐 지나 십자가의 예수상에 이르는 이 길은 사색을 겸한 산책로로 더없이 좋은 길이기도 하다. 지금 풍수원 성당은 성역화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대지 257만4000㎡(78만 평)에 바이블파크 등을 조성하는 사업이 마무리되면 풍수원 성당은 한국 천주교의 대표 성지로 거듭날 것이다. 안성 미리내 성지 성 김대건 신부의 넋이 흐르는 곳 경기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에는 은하수가 흐른다. 그것은 현세의 은하수가 아니라 영원히 하늘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 피우는 불빛으로 이루어진 미리내다. 미리내 성지는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 때 모진 탄압을 피해 숨어든 천주교 신자들이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밭을 일구고 그릇을 구워 팔며 살았던 곳이다. 그때 그들이 피워낸 삶의 불빛들은 은하수처럼 슬프고도 아름답게 흘렀고, 그 불빛은 지금도 세상의 길을 밝히는 구원의 빛으로 흐르고 있다. 더구나 거기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신부의 넋과 그 어머니의 넋이 성모의 넋이 되어 미리내 건너 나란히 누워 있는 곳이다. 26세에 생을 마친 성 김대건의 일생은 짧디 짧았으나 그가 남긴 자취는 영혼으로 영원하다. 정든 부모형제와 생이별을 하고 낯선 이국땅에서 새로운 문명에 정진하기를 10개 성상, 그 숱한 어려움을 무릅쓰고 최초의 방인 사제가 되어 이 땅에 돌아온 그는 한국 천주교의 개벽을 알린 성인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도 추호의 두려움이 없었다. “나의 최후의 시각이 다가왔으니 여러분은 나의 말을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 사람과 교제한 것은 오직 우리 교를 위하고 우리 천주를 위함이었으며, 이제 죽는 것도 천주를 위하는 것이니 바야흐로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에 영보를 얻으려거든 천주를 믿으시오.” 마침내 희광이의 칼을 대하고서도 그는 태연하게 “이 모양으로 있으면 칼로 치기 쉽겠느냐?”고 묻고 “자, 준비가 되었으니 쳐라!” 하고 말했다. 국사범으로 처형당한 죄수는 통상 사흘 뒤에 그 주검을 연고자가 찾아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그의 경우 장례마저 가로막아 참수된 자리에 묻고 파수를 두어 지켰다. 하지만 죽음을 피해 살아남은 신도들은 그를 그대로 둘 수 없었으니, 그중 이민식은 파수의 눈을 피해 치명한 지 40일이 지나 김 신부의 주검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시신을 등에 지고 험한 산길을 틈타 150리 되는 길을 밤에만 걸어 일주일 만에 자신의 고향인 미리내에 도착했다. 자신의 선산에 김 신부의 묘를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보살피던 그는 그로부터 7년 후 페레올 주교가 선종함에 따라 유언대로 김 신부의 곁에 안장했다. 그 무렵 김 신부의 어머니인 고(高) 우르술라마저 비극적인 처지에서 숨을 거둔다. 7년 사이로 남편과 아들을 여의고 이 집 저 집 문전걸식하다시피 한 눈물겨운 생애였다. 이민식은 그녀도 아들 곁에 모셔 생전에 함께 있지 못한 한을 위로했다. 그리고 자신 역시 92세까지 장수의 생을 마감한 후 그 곁에 묻혔다. 미리내는 1883년 공소가 설치되었는데 3년 뒤인 1886년 본당으로 승격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성역화 작업은 1972년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성모성심수도회와 천주성삼성직수도회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을 비롯해 김대건 신부 동상, 피정의 집 등이 들어섰다. 1980년에는 김 신부의 묘소가 있는 경당 옆에 9만9000㎡(3만평) 규모의 광장을 조성하고, 성당에서 경당에 이르는 길 가에 14처 조각을 설치하는 한편, 1987년부터 1989년까지 2년에 걸친 대역사 끝에 103위 성인 기념 대성전이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당진 솔뫼 성지 성 김대건 신부의 탯자리, 내포신앙의 못자리 솔뫼는 ‘한국의 베들레헴’이다. 미리내가 성 김대건 신부의 넋이 묻혀 있는 곳이라면, 솔뫼는 그의 태가 묻힌 곳이기 때문이다.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당시에는 면천고을 솔뫼)에서 태어난 김대건 신부는 박해를 피해 할아버지 김택현을 따라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로 이주할 때인 일곱 살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그뿐 아니라 이곳은 그의 증조부 김진후, 종조부 김한현, 선친 김제준에 이어 김대건 신부까지 순교자 4대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솔뫼는 김대건 순교 100주년이 되던 해인 1946년 몇몇 뜻있는 신도가 그가 난 집터와 소나무 우거진 뒷동산 1만6500㎡(5000평)을 사들여 비석을 세우고 주변 경관을 가꾸면서 성지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솔뫼는 충청도에서 제일 살기 좋은 땅 내포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1784년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부터 이존창이 복음을 전파한 충청도의 천주교 신앙은 일찍이 내포지역에서 부흥을 이뤄 충청도 전 지역으로, 더 나아가 전라도 북부나 경기도 또는 경상도 북부까지 확산되었다. 내포지역은 김대건 신부의 조모 이씨의 삼촌인 이존창이 천주교를 다른 곳보다 먼저 전파한 이래 그동안 숱한 신부와 수녀·수사를 배출해오면서 ‘한국 천주교의 못자리’라고 불리고 있다. 솔뫼에서 남서쪽으로 6㎞ 정도 떨어진 신리에 있는 ‘조선교구청’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제5대 조선교구장 안 다블뤼 주교가 이곳에서 순교사료를 정리하고 성서의 한글번역작업 등을 수행하다가 붙잡혀 보령군 오천면 갈매못에서 처형당한 비극적인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솔뫼 성지에 들어서면 우선 왼쪽 김대건 신부의 생가터에 남아 있는 아담한 돌우물과 함께 청신한 솔밭과 대밭이 찾는 이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게 한다. 오른쪽 피정의 집 안에 있는 성당에는 1984년 내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성한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가 특수 제작한 유리기구 안에 안치되어 있어 여기에 신도들이 볼을 맞추는 ‘유해친구의식(遺骸親口儀式)’이 미사 때마다 행해진다. 솔밭길을 따라 오르면 갓을 쓴 한복 차림에 왼손에 성경책을 안고 오른손을 들어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모습의 김대건 신부 동상이 서 있다. 그 주위로는 예수가 십자가를 메고 걸었던 고난의 길을 본뜬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어 김대건 신부의 고난에 찬 일생을 묵상하며 걷게 한다. 솔뫼는 이름처럼 사철 삽상한 솔바람이 이는 언덕이다. 가을의 끝에서 이 언덕의 잔디들이 누렇게 변해갈 즈음, 솔방울을 대여섯 개씩이나 매단 솔가지들이 땅에 떨어져 누우면, 마을사람들은 이것을 ‘비둘기’라 부르며 주워다 불쏘시개로 쓰곤 했다고 한다. 뒤이어 축복처럼 눈이 내려 솔밭을 덮으면, 마치 성탄 트리와도 같은 소나무 아래서 구원을 기도하기도 했을 것이다. ‘한국의 베들레헴’ 솔뫼의 겨울은 그렇게 깊어가는데, 솔뫼의 솔밭을 거닐면 어디선가 또 다른 성자의 탄생을 알리는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는 듯도 하다. 천주교 대전교구에서는 199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사업으로 김 신부의 생가를 복원하고 박물관 겸 경당을 건축하기로 결의했고, 생가 복원은 2005년에, 기념관은 2006년 3월에 축성했다. 1998년 충청남도는 성 김대건 신부 생가터를 지방문화재로 지정했다. 솔뫼 성지 피정의 집은 130여 명이 숙박할 수 있고, 개인·단체 피정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마련하고 있어 원하는 신자들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익산 나바위 성지 성 김대건 신부가 첫발을 디딘 곳 전북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금강가에 나바위가 있다. ‘나바위’라는 이름은 이 지역에 있는 화산(華山)과 연관되어 있다. 우암 송시열은 이 산이 너무 아름답다고 해서 ‘화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산의 줄기가 끝나는 곳에 마당처럼 너른 바위가 펼쳐지는데, 이름 하여 나바위다. 오늘날 화산 위에 자리 잡고 있어 ‘화산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나바위 성당은 이 너른 바위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이다. 나바위 성당은 1897년 이곳에 주임으로 부임한 베르모렐 신부가 동학혁명 때 망해버린 김여산의 집을 1000냥에 사들여 개조한 후 성당으로 사용했다. 한국 초기 본당의 하나로서 당시의 풍속에 따라 남녀 좌석을 칸막이로 막고 출입구도 따로 내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지켜지고 있다. 흰 구름들 자우룩 내리는/ 결 고운 바위산 나바위에는/ 바위 속에서도 나무들 무성합니다/ 망금정에서 바라보는 금강과 황산벌엔/ 영원한 청년의 숨결이 가득하고/ 나는 그리움으로 밀려오는/ 거룩한 상처의 향내 맡습니다/ 목숨 버려야 목숨 건지는 노래/ 하늘과 땅 맞닿는 여기 언덕에서/ 나는 바람 한 점에도 손 가벼워지기를/ 햇살 한 올에도 어깨 따뜻해지를/ 촛불 속에서 눈을 감습니다/ 내가 살아서 죽고/ 또한 죽어서 살아날 때/ 나는 비로소 작은 미소 하나로 남아/ 숨은 나뭇잎 하나 깨우는 것입니까/ 이윽고 흰 구름들이/ 설렘의 숲으로 하늘 가득 우거집니다 -김영수 ‘목숨 버려야 목숨 건지는-나바위에서’ 나바위는 금강의 선착장이었다. 1845년 10월 12일 밤, 한 청년이 배에서 내려 이곳에 발을 내딛었다.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한국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이었다. 그는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작은 배 한 척에 몸을 실어 이곳에 신부로서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그때 그의 발밑으로 금강의 거친 탁류가 넘실거리며 흘렀다. 마치 닥쳐올 고난을 예고하듯. 그가 나바위에 도착하기까지 여정 또한 파란만장했다. 1836년 12월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로 고국을 떠나 다음해 6월 마카오에 도착한 그는 1844년 12월 부제품을 받고, 이듬해 1월 천신만고 끝에 홀몸으로 의주 변문의 수구문을 통해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다. 하지만 3개월 뒤 다시 11명의 조선인 선원들과 함께 라파엘호라는 작은 목선을 타고 떠나 6월 4일 상하이에 도착, 8월 12일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는다. 그리고 그 길로 함께 간 조선인 선원들과 두 외국인 신부들과 함께 귀국길에 오른 것이다. 귀국한 지 1년 만에 관헌에게 붙잡혀 순교함으로써 고국에서 그의 사목활동은 너무나도 짧은 것이었지만, 그가 남긴 족적만큼은 한국천주교사에서 가장 찬란한 자취였다. 나바위 성당은 1897년에 설립되었으나 성당 건물은 1906년에 완공되었다. 1916년에는 목조벽을 벽돌조로 바꾸고 고딕식 벽돌조의 종각을 증축했다. 한옥건물에 기와를 얹은 성당은 특이한 회랑 덕분에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어 지방문화재(사적 제318호)로 지정되었다. 올해로 110주년을 맞는 나바위 성당은 일제강점기, 6·25를 거치면서 민족과 애환을 같이했다. 1907년 계명학교를 세워 1947년 폐교될 때까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애국계몽운동을 통한 구국에 앞장섰고, 신사참배에 저항하던 사제와 신자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6·25 당시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성당을 지킨 사제 덕분에 단 며칠을 제외하고는 매일 미사가 봉헌된 기록도 갖고 있다. 나바위 성당은 1955년 성 김대건 신부 순교비를 세우고, 1991년에는 피정의 집을 건립했다. 300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대건교육관 외에도 소규모 피정자를 위한 피정의 집이 따로 마련되어 있고, 피정의 집 전반 운동장은 6600㎡(2000평) 규모로 야영장으로도 활용된다. 칠곡 한티 성지 피난처에서 처형지로, 완벽한 순교 성지 대구·경북지방의 진산인 팔공산은 경주 남산과 맞먹는 부처님의 땅이다. 팔공산 안에 현존하는 절이나 암자만도 무려 쉰다섯 곳에 이르고 절터만 남은 곳 또한 적지 않다. 그 팔공산의 북쪽 자락을 비집고 한티 성지가 있다. 팔공산은 예부터 대구를 지키는 군사적 요새였다. 팔공산괴의 주령인 인봉에서 가산까지는 20㎞ 정도로, 한티는 가산과 주봉인 팔공산 사이에 위치하며, 가산에서 동쪽에 7㎞ 떨어진 깊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가산산성(사적 216호)은 임진왜란 이후 대구를 지키는 외성으로 난이 일어날 때마다 인근 주민들이 피난하던 내지의 요새였고, 6·25 때는 최대의 격전지 중 하나기도 했다. 한티 또한 오랫동안 천혜의 은둔지로서 박해를 피해 나온 교우들이 몸을 숨기고 교우촌을 이룬 곳이다. 한티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인근의 신나무골과 비슷한 때인 1815년 을해박해와 1827년 정해박해 후에 대구감옥에 갇힌 신자의 가족들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이곳에서 살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 어쨌든 한티에는 매우 일찍부터 신자들이 자리를 잡아 대구와 영남지방 교회의 터전이 되어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더 확실한 것은 1837년 서울에서 낙향하여 신나무골에서 얼마간 살았던 김현상 신도 가정이 1838년과 1839년 기해박해 때 신나무골보다 더 깊은 산골인 이곳 한티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 후 그의 가족들은 1860년 경신박해 때까지 이곳에서 살다가 대구로 나가 대구지역 첫 신자 가정 중 하나가 되었으며, 그 후손들은 초창기 대구교회를 창설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860년 경신박해로 뿔뿔이 흩어진 신자들은 박해가 뜸해지자 다시 모여들어 오히려 더 큰 규모로 성장했다. 1862년도 베르뇌 주교의 성무집행보고서에는 “칠곡의 굉장히 큰 산 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는 40명가량이 성사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차례의 박해를 간신히 넘긴 한티마을은 1866년 병인년의 대박해로 마침내 ‘최후의 날’을 맞는다. 1868년까지 3년간 유례없이 혹독했던 병인박해는 평화롭던 마을을 순식간에 피바다로 만들어버렸고, 수십 명의 신자가 한자리에서 몰살당하는 비극을 남겼다. 지금도 첩첩산중 길을 가다 보면 깨진 옹기조각, 사기조각이 발길에 채이는 한티 성지는 수십 명의 신자가 무더기로 처형된 비극의 현장으로 군데군데 그들의 묘지가 산재해 있다. 그중 이름과 그 행적이 밝혀진 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 묘비가 서 있는 대구 날뫼 출신 서태순, 이공사가 등과 박해를 피해 신나무골로 피신했다가 다시 한티의 옹기골로 숨어든 배손의 일가족, 조가롤로와 부인 최발바라, 동생 조아기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무명 순교자로 그 이름을 남기지 않고 있다. 한티마을 입구 송림사 앞쪽에는 대구대교구가 운영하는 성가양로원이 있는데, 순례자들은 대부분 이 앞에서 발을 멈추고 묵주의 기도를 시작하고 걸어서 한티에 이른다. 이곳에는 1983년 피정의 집이 건립되었고, 대구 시내에서 피정의 집까지는 말끔하게 포장도로가 나 있고, 팔공산 관광도로가 바로 한티를 지난다. 칠곡군 지천면 연화동에 있는 또 하나의 사적지인 신나무골에서 한티까지의 30리 산길은 도보 순례 코스로 아주 적합하다. 기획|유성문 toulei.com 참고 및 인용 ·한국의 성지(www.paxkorea.co.kr) 쪾최성민 ‘그곳에 다녀오면 살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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