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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후] 성폭력 피해자들은 더 많이 말해야 한다
[취재 후] 성폭력 피해자들은 더 많이 말해야 한다(2024. 07. 10 06:00)
2024. 07. 10 06:00 사회
이혜리 기자 성폭력 피해자를 취재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어떤 독자들은 성폭력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룬 기사가 피해자 관점에 지나치게 치우친 것 아니냐 할지 모른다. 실제론 그렇지 않다. 최대한 사실에 부합하는 기사를 쓰기 위해 기자는 피해자에게 피해 본 과정을 세밀하게 묻고, 또 묻는다. 각종 자료를 확인하고, 필요하면 교차 검증도 한다. 피해자로서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되뇌어야 하고, 2차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취재에 응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성폭력 피해자의 이야기는 숨겨지지 말아야 한다는 게 2018년 미투(#MeToo·나는 고발한다) 운동의 취지였다. 이는 각자의 마음속에 담아뒀던 성폭력 피해를 세상으로 끄집어내고 공적인 공간에서 말하면서 함께 해결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주축은 여성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해 대검찰청 통계 기준 성폭력 범죄자의 96.5%는 남성, 피해자의 87.5%는 여성이었다. 여전히 피해는 피해로 다뤄지지 못한다. “검찰은 무리한 기소를 했어요. 제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피해자는 이럴 것’이라는 범위에서 조금 벗어나니까 꽃뱀을 보는 시각으로 ‘그게 말이 돼요?’라고 묻는 거예요. 말이 안 될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가 정말로 겪은 것인데요.” 교제폭력(데이트폭력)을 신고했는데 검찰이 무고죄로 기소했고 최근 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은 A씨의 말이다. 피해자 진술 신빙성을 판단할 때 이른바 ‘피해자다움’의 편견을 가져선 안 된다는 대법원 판례가 나온 지 6년이 됐지만, 성폭력 피해자들은 가해자에게 역고소를 당하거나 무고죄로 수사받을 수 있다는 부담에 시달리고 있다. 기자가 만나본 그 어떤 판사도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 피해자의 진술을 믿는다”고 한 사람은 없지만, 편견을 배제하려는 노력조차 흔히 피해자 관점에 지나치게 치우친 것 아니냐는 반론에 부딪힌다. 급기야는 ‘피해의 경쟁’도 벌어진다. 여러 독자가 교제폭력 문제를 다룬 기사에 “남성 피해는 왜 외면하느냐”, “데이트 꽃뱀이 더 위험하다”고 댓글을 썼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 성별이 무엇이든 성폭력 피해를 본 사람은 보호받아야 한다. 타인을 무고한 사람은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한다. 동시에 어떤 맥락에서 성폭력이 발생하고 처리되는지, 본질이 무엇인지도 같이 고민해야 한다. 피해는 모두 피해다.
취재 후
[신간]시장으로 간 성폭력(2023. 02. 10 11:36)
2023. 02. 10 11:36 문화/과학
ㆍ성범죄 ‘감형 컨설팅’ 전성시대 <시장으로 간 성폭력> 김보화 지음·휴머니스트·2만1000원 미투 운동이 새 세상을 여는가 했더니, 이상한 시장이 생겼다. 성범죄 가해자가 역고소로 보복하고 터무니없이 적은 형량을 받고 풀려난다. 피해에 대해 용기 있게 입을 여는 사람이 늘자, 가해자를 위한 법적 서비스가 활성화되고 있다. ‘반성문 2부, 탄원서 2부, 서약서 1부, 심리교육수료증, 상담사의견서…’ 감형 패키지가 등장했고, 성폭력 가해자 보호 카페가 운영 중이다. 반면 대부분 피해자는 국선변호사나 무료법률서비스의 도움을 받는 데 그친다. 그마저도 예산 삭감으로 서비스의 질이 더 나빠지고 있다. 저자는 법이 가해자 중심적이라고 비판하는 기사나 관련 자료가 되레 가해자 관련 시장을 키우는 역설을 지적한다. 대신 변호사 시장의 홍보 과열과 고소 남용을 막을 업계 차원의 규제, 변호사 윤리 장전에 더 구체적 지침 적시, 법조인 성인지 감수성 훈련 등 해법을 제시한다. ▲헌책 낙서 수집광 윤성근 지금·이야기장수·1만7800원 서울 은평구의 한 헌책방 주인에겐 수상한 취미가 있다. 남들은 잘 사지 않는, 누군가의 흔적이 가득한 헌책을 수집하는 것이다. 책탐정에게 이 ‘흔적책’ 수집은 일종의 수수께끼 풀이다. 범상치 않은 표지의 <타인최면술> 속 ‘김○○ 부장 너는 내가 반드시 죽인다’라는 낙서를 보면서 최면의 효과를 탐구한다. <행복한 책읽기> 속지에 좌우 반전 글씨로 적힌 시 밑에서는 또 다른 시를 찾아낸다. 그는 “책이 가장 책다운 것은 읽는 사람의 이야기가 그 책에 남는 순간부터”라고 말한다. ▲H마트에서 울다 미셸 자우너 지음·정혜윤 옮김 문학동네·1만6000원 한인 마트에 장만 보러 가는 건 아니다. 뻥튀기를 담는 꼬마와 짬뽕 먹는 할머니를 보며 엄마를 떠올리기 위해 간다. 인디밴드 뮤지션인 한국계 미국인이 돌아가신 엄마와의 추억, 문화적 성장통 등을 음식 이야기로 풀었다. ▲세계사가 재미있어지는 39가지 길 이야기 일본박학클럽 지음·서수지 옮김 사람과나무사이·1만8500원 10만년 전 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나온 길, 동서 문화를 융합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비단이 만든 실크로드, 중세를 끝장낸 십자군 원정, 세계사 중심축을 옮긴 콜럼버스의 항해길 등 역사를 바꾼 길 이야기를 묶었다.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이길보라 지음·창비·1만6000원 ‘코다’(CODA·Children of Deaf Adults)는 농인 부모가 낳은 청인(소리를 들을 수 있는 비장애인) 아이다. 고요와 소리의 세계를 오가며 자란 이길보라 감독이 장애의 의미를 사유케 하는 논픽션 작품을 통해 거절과 포용의 경험을 말한다.
신간
성폭력 폭로한 선생님은 오늘도 징계와 싸운다(2022. 03. 04 14:54)
2022. 03. 04 14:54 사회
ㆍ유명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부터 ‘그루밍 성폭력’ 당해 ㆍ가해자 2020년 3월 사망…교육청 징계 안 풀려 수년째 사투 3년 전쯤 교사 A씨는 유명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모씨로부터 당한 ‘그루밍 성폭력’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폭로했다. 그루밍 성폭력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호감과 신뢰를 얻어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성폭력을 가하는 유형의 성범죄다. 의사 김씨의 환자로, 2년여간 치료를 받았던 A씨는 자신이 김씨의 정신적 지배하에 성폭행을 당했다고 SNS를 통해 주장했다. 당시 그는 자신 외에도 복수의 피해자가 있음을 확인했다. 실제로 A씨의 폭로 이후 추가 피해자들이 더 있다는 사실이 언론보도를 통해 밝혀지기도 했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그루밍 성폭력’ 고발했더니 김씨는 인기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름을 알린 유명 의사였다. 피해자들이 당했다고 밝힌 수법은 대부분 비슷했다. 정신과 의사로서 환자에게 사적으로 접촉해 병원 외의 장소에서 따로 만나 부적절한 행위를 이어가는 방식이었다. A씨의 폭로를 비롯해 유명 남성 연예인을 임의로 진단해 병명을 온라인에 공개한 일 등으로 인해 김씨는 2018년 3월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서 제명됐다. 자신이 운영하는 온라인 카페에 A씨의 신상, 허위사실을 포함한 상담 내용을 유포한 점도 고려됐다. 의사 김씨는 A씨를 모욕 및 사실적시 명예훼손 혐의(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위반)로 고소했다. A씨가 자신을 ‘피감독자 간음죄’로 고소한 데 따른 역고소였다. 대구지방검찰청 김천지원은 2019년 2월 20일 A씨에게 벌금 100만원의 약식명령을 내렸다. 아직도 남은 징계 문제는 여기서 시작했다. 이후 경상북도 김천교육지원청은 A씨에 대한 징계위원회를 열어 2019년 4월 15일 견책 처분을 내렸다. 모욕,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약식명령을 받은 A씨가 국가공무원법 제63조가 규정하는 ‘품위 유지 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해당 조항은 “직무의 내외를 불문하고 그 체면 또는 위신을 손상하는 행위를 한 때” 징계를 내릴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A씨는 납득할 수 없었다. 징계위원회에 진술서를 내고 정식 재판을 청구해 징계의 부당함을 입증해보이겠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실제로 정식 재판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의사 김씨는 A씨에 대한 처벌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공소도 기각됐다. A씨의 징계 근거가 된 약식명령의 효력이 뒤집힌 셈이었다. 하지만 징계처분은 여전히 살아 있다. 징계 이후 A씨는 소청심사를 청구할 수 있는 기간을 놓쳤다. 소청심사 절차의 존재를 잘 알지 못했고, 징계 이후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상태여서 제대로 대처할 경황이 없었다는 게 A씨 측의 설명이다. 실제로 그는 사건 이후 한 달가량 입원하기도 했다. A씨를 돕고 있는 경북교육청 성폭력피해생존자 부당징계 및 2차 가해 투쟁대책위(대책위)는 징계 이후 교육 당국의 대응도 문제라고 비판했다. 성범죄 피해자인 A씨를 조직에서 보호하지 못한, 이른바 ‘2차 가해’가 있었다고 했다. A씨의 징계를 담당했던 장학사가 2020년 4월 근무하는 학교를 찾아와 징계에 이의가 없다는 각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했다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울면서 거부해 서명은 하지 않았지만 구두로라도 동의할 것을 요구받았다는 게 A씨의 주장이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후 해당 장학사는 A씨가 있는 학교에 교장으로 부임했다. A씨는 또다시 충격을 받아 휴직했다. 피해자만 남아 A씨 측은 김천교육지원청에 징계를 직권취소해달라고 요구해왔다. A씨를 대리하는 박인숙 변호사는 “A씨가 정식 재판을 청구하겠다고 명확히 밝혔기에 약식명령이 뒤바뀔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는데도 징계한 것”이라며 “이는 특히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가 피해자를 상대로 보복성 고소를 한 상황에서 피해자 A씨에게 불이익을 준 것”이라고 지적했다. A씨 측은 이 점이 김천교육지원청이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성폭력방지법) 제8조를 위반했다고 본다. 해당 조항은 피해자 또는 성폭력 사실을 신고한 자에게 ‘불이익’을 줘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다. 불이익이란 징계, 전근, 집단 따돌림, 해고 등을 의미한다. 또한 약식명령이 확정되지 않았는데도 유죄임을 전제로 처분을 내려 무죄추정의 원칙과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A씨는 소장에서 “교육지원청은 원고(A씨)를 징계할 권한뿐만 아니라 보호할 의무도 갖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로서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고 있는 상황을 살피지 않고 2차 피해를 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책위에 속한 진광우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경북지부 정책국장은 “징계를 둘러싼 과정에서 벌어진 2차 가해에 대한 대응도 향후 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김천교육지원청은 절차적으로 문제없이 내린 징계여서 직권 취소는 무리라는 입장이다. 김천교육지원청 관계자는 “행정적 하자를 범한 게 아니라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징계했기 때문에 (A씨가) 법적인 구제 절차를 밟아오면 거기에 맞게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대책위와 김천교육지원청 측 설명을 종합하면 최근에도 김천교육지원청은 A씨 측에 법적 판단을 받아오라는 뜻을 전달했다. 아울러 김천교육지원청 측은 의사 김씨가 피해자에 대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혀 공소가 취하된 것과는 별개로, 나름의 근거를 바탕으로 공무원 품위 유지 위반이란 판단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소송을 제기했다고 해서) 징계를 취소하지는 않는다고 안내한 적도 있다”고 밝혔다. A씨는 지난달 말 서울행정법원에 김천교육지원청을 상대로 한 ‘징계처분 무효 확인의 소’를 제기했다. 가해자인 의사 김씨는 2020년 3월 사망해 자신의 행위에 대한 법적 판단을 피한 상태다.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는 사라지고 피해자만 남아 수년째 징계와 싸우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가 움츠릴 이유 없다”(2020. 12. 11 14:12)
2020. 12. 11 14:12 사회
ㆍ신지예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 “유독 성폭력은 피해자다움을 강요” 지적 지난 11월 20일, 신지예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가 부산지방법원에 섰다. 준강간치상 사건의 피해자로 증인신문을 받기 위해서다. 신문에 앞서 신 대표는 자신의 트위터에 증인대기실의 책장 사진을 올리며 “어린이들이 오면 읽을 수 있도록 책이 구비되어 있다. 이 방을 거쳐갔을 수많은 소녀를 떠올린다”고 썼다. 준강간치상은 정확한 판단이 가능하지 않은 상대방의 상태를 이용해 강간하고 상해를 입힌 것을 뜻한다. 사진/김기남 기자 2018년 페미니스트 서울시장 후보 신지예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한 변호사가 그의 선거포스터를 두고 ‘개시건방지다’고 말해 논란이 일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그는 ‘거칠 것 없는 젊은 여성 정치인’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하지만 성폭력 피해자의 이미지는 다르다. 한국사회에서 성폭력 피해자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사람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는 정치인 정체성과 피해자 정체성이 같이 갈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유독 성폭력 피해자에게 피해자답기를 바란다. 그러나 성폭력 피해자들이 일상생활을 못 할 정도로 힘들다면 대한민국은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 성폭력 범죄 신고율은 20% 이하로 추산되는데 신고된 범죄만 연간 3만건을 넘는다. 신 대표를 12월 8일 오후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한여넷) 대표와 여성신문 산하의 젠더폴리틱스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한여넷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망 이후, 정치계 성폭력이 너무 심각하다는 문제의식에서 만들어졌다. 페미니즘과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정치계 성폭력에 긴밀하게 대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 감사원에 국민감사청구를 제출한 상태다.” -지난 총선에서 서대문갑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힘들지 않았나. “무소속이 힘든 건 사실이다. 심정적으로 힘든 게 아니라 무소속 후보는 힘들 수밖에 없는 제도다. 지역에 사는 주민 500명 서명부터 시작해 후원도 정당이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힘들었다.” -3.2% 득표를 어떻게 평가하나. “서대문갑은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이성헌 당시 미래통합당 후보가 20년 동안 번갈아가며 당선된 곳이다. 양당 중심 정치를 끝장내고 새로운 정치시대를 열자고 주장하기에 적절한 곳이라고 봤다. 3.2% 득표는 아쉽다. 그래도 20~30대 득표율은 10~15% 수준이었다. 새로운 정치를 희망하는 유권자들이 많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런 면에서는 미래의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선거였다.” 올해 3월, 신 대표는 8년간 몸담았던 녹색당을 탈당했다. 크게 두 가지 이유였다. 개별 정당 차원에서나 전체 정치 구도에서나 절대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위성정당 논의에 녹색당이 참여한 것과 자신에게 발생한 성폭행이다. 일각에서는 신지예가 총선을 한달 앞두고 탈당했다며 비판했지만 성폭력 사건을 굳이 앞세우진 않았다. 위성정당 논란과 성폭행 사건이 별개인 것처럼 보이지만 신 대표는 ‘사실 연결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공동위원장이었음에도 위성정당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아무런 정보도 듣지 못했다. 동시에 그가 당에서 추진하려고 했던 ‘2020여성출마프로젝트’ 등은 사업 시작부터 예산 집행까지 번번이 막혔다. 그는 이런 분위기에서 ‘페미니스트 정치인’은 소외됐고, 그래서 ‘함부로 해도 되는 존재’가 됐다고 생각한다. 검찰은 가해자에게 징역 7년을 구형했다. 사건 직후 신 대표가 녹음해서 증거를 만들었고, 곧장 경찰에 신고했기 때문이다. 가해자는 성폭행은 인정하지만 성폭행 과정에서 상해를 입힌 것은 인정 못 하겠다는 입장이다. 형량을 줄이기 위해서다. 선고는 내년 1월 22일이고, 12월 31일까지 가해자 엄벌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모으고 있다. -지난달에 ‘신지예 전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성폭행 가해자를 엄벌에 처해주십시오’라는 탄원서가 공개됐다. “감사하게도 함께 조직 내 폭력에 목소리를 내주셨던 분이 탄원서를 써주셨다. 페미니즘 서울시장 후보를 내걸고 나온 사람을 성폭행한다는 게 쉽지 않은데, 그런 일이 일어났다. 당시 저는 공동위원장이었지만 당 내에서 정치적 역할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당에서 입지가 튼튼한 가해자가 ‘내가 이야기를 잘해볼 테니 만나자’고 했다. 가해자는 우발적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저는 계획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정당도 직장이다. 직장에서 ‘은따’(은근한 따돌림)를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도와주겠다고 한 뒤에 강간한 것이다.” -얼마 전에 재판에 출석했다. 당시 분위기는 어땠나. “상대측 변호사가 ‘상처가 될 질문을 하겠다’며 양해를 구한 다음, 성폭행을 당했는데 어떻게 선거에 출마할 수 있냐고 물었다. 회사에 못 나가야지만 상해폭행이라는 말과 같다. 성폭행 피해자는 죽을 듯이 힘들어서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어야 피해자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피해자도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맞으면 경찰에 신고하고 병원에서 진단서를 떼고 위자료를 받고 한다. 유독 성폭력은 피해자다움을 강요한다. 가해자 변호사 주장처럼 모든 성폭력 피해자가 일상생활을 못 한다면 대한민국은 돌아가지 않는다.” 사진/김기남 기자 -알리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공개하지 않을 이유는 또 없다. 정치계는 어떤 영역보다 성인지 감수성이 떨어져 있다. 이 사건을 통해 왜 정치가 바뀌어야 하는가? 왜 성평등이 더 나은 정치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를 말하고 싶었다.” -‘내가 유권자들에게 정치인으로 보이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을 했다는 기사를 봤다. “해결하고 바꾸는 사람으로서 유권자 앞에 서야 하는데, 성폭력 사건 때문에 나를 정치인으로 보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했다. 한국사회는 피해자가 약한 존재로 남기를 바란다. 정치인 이미지와는 잘 매치가 안 된다. 이런 사회적인 통념 때문에 많은 여성 정치인이 성폭력을 당하고도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다. 정치인은 사실상 임시직이기 때문에 내가 여기서 뭐라도 잘못했다가는 내 커리어가 다 무너지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이제는 다르게 생각한다. 성폭력 생존자는 강한 존재이며, 이 척박한 현실 속에서 무언가를 바꿀 의지를 지닌 이들이다.” -정치계 여성들이 자신의 피해를 고발하고 해결하려면 어떤 조력 혹은 시스템이 필요할까. “최소한 30%가 돼야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더 많은 여성이 기초의원, 국회의원에 당선돼야 한다. 이번 보궐선거가 매우 중요하다. 이번 선거를 통해 20·30 여성들이 정치적으로 훈련될 필요가 있다. 유권자를 넘어서 정치의 판을 바꾸는 사람이 돼야 한다.” 그의 정치적·사회적 활동은 중2 때 시작됐다. 두발 자유화 운동을 위한 ‘한국청소년모임’이라는 온라인 카페를 만들었다. 제도권 고등학교 대신 대안학교 ‘하자작업장센터’를 다녔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는 ‘이야기꾼의 책공연’이라는 사회적 기업에서 연극인으로 일하며 전국을 다녔다. 입시학원에 다니거나 자기소개를 써본 적은 없다. 이력만 보면 ‘대안적인’ 삶을 살아온 것 같지만 그는 “대안적 삶이라기보다는 과로와 저임금의 삶을 살았다”고 말했다. 대학에 갈까 고민했지만 입시 준비를 할 상황이 아니었다. 첫 직장은 사회적기업이라는 타이틀이 있었지만 보통 직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달 90만원 정도를 벌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대학에도 가보고 싶고 그런 문화에 들어가지 못한 게 아쉽기도 하다”며 “그래도 제가 갔던 길을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녹색당 가입은 우연이었다. 서울시청 앞 광장을 지나다가 녹색당 부스를 보고 후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입당했다. 이후 추첨제로 당 대의원이 됐고, 2016년 총선에서는 녹색당 비례대표로 출마, 2018년에는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다. 서울시장 선거 사상 최연소(당시 28세) 후보였다. 작은 정당의 젊은 여성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한계를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냥 주변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결국 정치가 답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그는 정치를 그만둘 생각이 없다. -어떻게 결국 정치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됐나. “서울 마포구 청년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쪽방촌 프로젝트를 했다. 쪽방촌 어르신들과 어울려 사는 프로젝트였다. 내 친구, 마을 사람들과 재미있게 사는 게 행복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망원동 재개발 바람이 불면서 그 사람들이 모두 ‘적법하게’ 쫓겨났다. 구제시스템이 없었다. 개인이 행복하게 살고 싶어도 법이 그렇게 놔두지 않더라. 나와 내 주변이 행복하려면 제도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정치인으로 성장하려면 정당에 속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정당이 있는 게 좋다. 하지만 현존하는 정당이 새로운 미래를 열 정당인가? 물음표다. 민주화 세대는 기득정당, 소수정당, 보수정당 진보정당 할 것 없이 포진해 있다. 민주화 세대가 주도권을 쥔 정당에서 결과는 정해져 있고 민주적으로 연출된 판만 있다. 어떤 정치인으로 성장할 것이냐를 생각했을 때, 기존에 있는 정당을 선택하는 것보단 우리 세대에 맞는 정당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당장 다음 보궐선거도 준비하고 있나. “공동전선을 만들어야 하고, 그를 위한 ‘영끌’이 필요하다. 원팀을 만들어서 이길 수 있는 제4지대를 만들어보고 싶다. 어떤 정당과 단체, 개인이 함께할 수 있는가? 일단 위성정당 사태와 같은 편법·위법은 안 된다. 그리고 박원순·오거돈 사건을 규명하고 해결할 의지가 있어야 한다. 이번 재보선에서 ‘영끌’하지 않으면 결국 민주당 서울시장이 나올 것이다. 민주당 서울시장이 박원순 성폭력 사건을 제대로 해결할 수 있을까. 이번 보궐선거가 왜 열리는지 기억해야 한다.” -정치를 계속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시간을 초월하는 이야기에 매력을 느낀다. 정치는 인류가 마라톤을 뛰고 있는 것과 같다. 다음 세대가 조금 더 낫게 살도록 노력한 사람들이 있어서 지금의 우리가 있다. 내가 죽더라도 나와 같은 열망을 가진 사람이 뒤를 이어서 뛰어주는 게 정치라고 생각한다.”
[표지 이야기]전시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언어는 없다(2020. 05. 29 14:50)
2020. 05. 29 14:50 사회
ㆍ위안부든, 정신대든 과거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된 언어 지난 5월 25일 피해생존자이자 활동가인 이용수 할머니의 2차 기자회견 이후 ‘정신대’와 ‘위안부’의 용어 차이를 두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언론은 ‘위안부’와 1944년 전 ‘여자근로정신대’를 비교하면서 용어의 혼동이 연구의 부족이나 시대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인 양 지적한다. 그러나 정신대는 1938년 총동원체제 이후 일상화된 용어였으며, 같은 시기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위안부’ 동원과 맞물려 결과적으로 ‘위안부’와 착종된 말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5월 25일 대구 수성구 만촌동 인터불고 호텔에서 2차 기자회견을 열고 발언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정신대와 위안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의 초대 대표 윤정옥은 17세 때인 1942년, 미혼여성을 ‘처녀공출’ 또는 ‘정신대 동원’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된 뒤 전쟁터로 끌려간 여자애들은 어떻게 됐을까, 궁금하고 걱정됐다. 여러 차례 서울역에 나가 해외에서 들어오는 징용자·징병자들을 붙들고 그 여자애들은 어떻게 됐는지 물어봤다. 어느 날 어느 남자가 툭 던졌다. “그 애들은 정신대가 아냐, 위안부야.” 윤정옥은 이때 ‘위안부’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무엇을 뜻하는지도 몰랐다. 일본과 한국의 책을 들춰보면서 ‘위안부’에 대해 추적했고, 일본군에게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임을 알았다. 일본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가 저지른 사건이라고 생각해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겠다고 결심했다. 1980년대 후반 여성활동가들이 공감했고, 그렇게 1990년 11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만들어졌다. 윤정옥은 정대협이 자신의 경험을 ‘정신대 피해’로 인식하고 있는 피해자들이 신고하기 위해 찾아올 수 있는 조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증언이 있었고, 언론은 일제히 ‘정신대로 끌려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에 대해 보도했다. 기사 중에는 ‘정신대’와 ‘위안부’가 혼용되었다. 2012년 제2차 아베 정권이 들어선 이후 역사부정을 통한 일본 사회의 우경화가 두드러졌다. 우익들은 일본에서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처음 보도한 <아사히신문>을 집요하게 공격했고 ‘여자정신대라는 명목으로 전장으로 연행돼’라는 기사를 쓴 기자가 정신대와 위안부를 구분 못 하는 날조 기자라고 공격했다. 그해 말 <아사히신문>은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한 기사는 오보였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정신대’와 ‘위안부’는 서로 다른 것으로 기정사실화되었다. 하지만 어째서 식민지 시기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이 정신대를 위안부로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았다. 이렇게 기억은 일본의 기억으로 덧칠됐다. 정신대는 일본어 ‘데이신타이(挺身隊)’의 한자를 한글로 표기한 것이다. 이는 ‘혼신을 다해 나아가는 부대’라는 뜻의 일본군 전시(戰時) 선전 용어다. 러일전쟁 중인 1905년 4월 13일 <아사히신문> 기사에서 일본군 장교를 ‘정신대 대장’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후 일본 언론은 학술정신대·무역정신대 등의 표현을 쓰면서 ‘국익’을 위해 헌신하는 조직에 정신대라는 미사여구를 붙였다. 이처럼 정신대는 국가에 대한 개인의 헌신을 미화하는 말이었다.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이 시행되고 본격적인 전시동원체제에 들어가면서 대중의 사상과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 ‘애국정신대’·‘농촌정신대’·‘국어(일본어)보급정신대’·‘산업정신대’ 같은 이름의 조직들이 생겨났다. 이 시기 정신대는 자발적인 전쟁협력의 외양을 띠었으나 거부하면 비국민이라는 낙인을 감수해야 했다. 1941년부터는 조선총독부가 14세에서 25세 사이 미혼여성을 근로보국대로 편성했다.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위안부가 되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 돈벌이를 빌미로 사라지는 여성들이 늘어났다. 일본이나 만주의 군수공장이나 종군간호부로 가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듣고 따라갔는데 소식이 끊겼다. 주로 ‘처녀들’이고 전쟁터에서 군인들의 빨래를 하거나 피를 뽑히거나 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밤에는 군인들의 위안을 해야 한다는 말도 뒤따랐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말들이 치안을 어지럽히는 유언비어일 뿐이라며 육군 형법 위반죄로 처벌했지만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1940년대 들어와서는 부락마다 처녀를 공출해 전선에 보낸다는 식으로 소문은 더 구체화됐다. 경남 양산의 김복동은 1941년 동네 구장이 ‘나라를 위해 데이신타이에 가야 한다’고 해서 따라갔다가 중국 광둥의 위안소로 보내졌다. 어머니가 데이신타이가 뭐냐고 했을 때, 구장이 “군복 만드는 공장에 가서 일하는 것”이라고 했다. 1945년 전남 승주의 이남님 또한 정신대로 뽑혔다는 구장의 말에 버마의 위안소로 보내졌다. 구장은 ‘정신대가 군인들의 밥과 빨래를 하거나 군복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하는 것’이며 ‘전쟁 덕분에 큰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1942년에 버마의 위안소로 동원된 이용녀는 싱가포르로 가는 배 안에서 ‘위안부’로 간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위안부’가 뭐하는 사람인지는 알지 못했다. 종전 후 위안소를 드나들었던 병사, ‘위안부’를 목격했던 동포, 정신대와 처녀공출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조선의 여자들이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일본군의 위안부가 되었다’는 서사를 완성했다. 이런 서사는 해방 직후부터 김학순이 등장할 때까지 언론 지면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일본 언론도 1960년대까지 ‘정신대나 위문대 명목으로 동원된 위안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사실 ‘위안부’도 미화된 언어다. ‘병사를 위안함으로써 전쟁승리를 돕는 여성’이라는 일본군의 관점이 배 있다. ‘국익을 위해 혼신을 다하는 조직’이라는 정신대의 말뜻을 생각했을 때 위안부든, 정신대든 과거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된 언어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아가 당시 식민지 여성들에게는 돈벌이 또는 새로운 삶의 기회라는 감언이설도 있었다. 정신대든, 위안부든 끌려간 여성들이 그 말의 의미를 실감한 것은 벗어나기 힘든 위안소 생활을 시작한 뒤였다. 살아남은 피해자들은 그 기억을 악몽이나 지옥으로 묘사하거나 망각이나 침묵으로 거부했다. 1990년대부터 국제사회는 ‘자유와 자율성을 박탈당한 전시 성폭력 피해자’라는 의미를 담을 용어로 전시 성노예라는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만약 우리 사회가 어떤 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말의 역사가 성폭력 피해자의 관점으로 세상을 전망하는 데 게을렀기 때문이다. 전시 성폭력 피해자의 역사를 쓰는 일은 성폭력의 재발을 막기 위해 중요하다. 이를 위해 타자화된 말들의 싸움에 휩쓸리기보다 언어의 역사성을 인식하고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만들기 위한 말을 찾아야 할 때다.
표지 이야기
[주목! 이 사람]‘국경없는의사회’ 코디네이터 알렉산드라 브라운 “감춰져 있는 성폭력에 대응해야 ”
[주목! 이 사람]‘국경없는의사회’ 코디네이터 알렉산드라 브라운 “감춰져 있는 성폭력에 대응해야 ”(2019. 11. 29 15:32)
2019. 11. 29 15:32 사회
성폭력은 어느 시대, 어떤 사회에서나 존재해왔다. 분쟁으로 불안정해진 땅에선 더 많은 위험이 도사린다. 낙인에 대한 두려움은 피해자들을 움츠리게 만들고, 폭력은 반복된다. 국제구호단체 ‘국경없는의사회’의 알렉산드라 브라운(55)은 여성·아동 건강과 성폭력 피해 지원 분야의 이야기를 발굴해 대중에게 알리는 의료 커뮤니케이션 코디네이터다. 17년간 호주를 기반으로 활동하며 우간다·남아프리카공화국·남수단·아프가니스탄·케냐 등을 누볐다. 11월 23일 ‘국경없는영화제’ 참석차 한국을 찾은 브라운은 “감춰져 있는 성폭력에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여성이 어린 자녀를 데리고 피난을 가는 상황을 예로 들어볼게요. 가장 큰 관심사는 음식과 물, 쉴 곳을 찾아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이죠. 피난길에 강간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더 빨리 해결해야 할 생존 문제가 눈앞에 있어요. 고통스러워도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 자체가 부족한 경우가 많죠. 무법지대라는 문제도 있고요.” ‘성폭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자리 잡지 못한 지역도 많다. 브라운과 동료들은 성폭력에 민감한 사회를 만들고자 애쓴다. 연극과 라디오 캠페인은 사람들에게 성폭력이 곧 ‘응급상황’이라는 점을 각인시키고 피해 지원을 안내하는 좋은 수단이다. 경찰·학교와 협력하기도 한다. 피해자들이 진료소에 찾아오면 우선 신체건강부터 살핀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하거나 의료적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땐 임신중절 수술을 한다. 아이를 키우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는 관련 서비스를 연결해준다. 피해자들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심리 상담도 한다. 피해를 입증할 수 있게 의료진단서도 발행한다. “사회마다 성폭력에 대한 인식이 다릅니다. ‘남성들에게는 그럴(성폭력)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곳도 있죠. 또 한국이나 호주도 마찬가지지만, 피해자들이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까’라고 생각하는 낙인의 문제가 있고요. 지난해 케냐 나이로비에서 한 젊은 여성이 성폭력을 당해 구급차에 실려왔어요. 상담이 끝난 뒤 우리가 무얼 더 해줄 수 있을까 물었더니 엄마에게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직원이 대신 엄마에게 딸이 겪은 일을 설명해줬죠. 저희가 피해자와 가족의 다리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11년 전 우간다에서 콩고민주공화국 국경을 넘은 난민들을 만났다. 이중 몇 명만 인터뷰하면 됐다. 하지만 다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며 줄을 섰다고 한다. 한 여성은 용기를 내 성폭행 경험을 털어놨다. 브라운이 할 수 있었던 건 묵묵히 듣고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는 “콩고 등의 성폭력 문제를 대중에게 알리고, 이 문제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해결 방법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전하는 이야기가 닿는 대상이 때론 다른 인도주의 기관이나 정부 관계자가 될 수 있어요. 많은 기관이 불안정한 지역의 성폭력 문제를 지적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해당 국가의 반응을 끌어낼 수 있죠. 전 세계에 만연한 ‘성폭력 낙인’을 깨뜨리기 위해서도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고요. 몇몇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소통을 이어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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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성폭력, 학폭위 처리 ‘난감’(2019. 10. 14 16:30)
2019. 10. 14 16:30 사회
ㆍ학교가 섣불리 개입하기 어려운 영역… 경찰 조사 내용 참고도 어려워 #1 최모씨(41)는 최근 셋째아이를 데리고 동네 놀이터를 갔다가 충격을 받았다. 초등학생 남자아이 무리가 놀이터에서 한 여자아이를 둘러싸고 성행위를 묘사한 행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4명의 남자아이는 미끄럼틀 위에 한 여자아이를 앉혀놓고 그 앞에서 성행위를 하는 듯한 몸짓을 하며 ‘놀이’를 하고 있었다. 합창하는 것처럼 신음소리까지 냈다. 무리 중 한 아이는 최씨의 첫째딸과 초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남학생이었다. 당장 뛰어가 혼을 내야 할지, 동영상 촬영을 해서 학교에 신고를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한 남학생이 최씨를 발견하자마자 서둘러 가방을 챙겨 도망치듯 자전거를 타고 달아났다. 최씨는 여학생에게 가서 “같이 집에 가자”고 했지만 아이는 “괜찮다. 조금 있으면 아빠가 퇴근하고 오실 거라 조금 더 여기 있다 가겠다”며 그의 도움을 거절했다. 최씨는 “무리 중 한 아이를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 신고하는 건 가능하지만 괜히 문제를 일으키는 게 아닐까 싶어 계속 고민만 했다”면서 “학폭위원 중 한 분을 알고 있어 에둘러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하니 ‘괜히 어른 싸움으로 번질 수 있으니 가만히 있어라. 당사자도 아니지 않느냐’고 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신입생 예비소집일에 어린이들이 교실을 들여다보는 모습.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 강윤중 기자 #2 정모씨(42)는 최근 아파트 상가 뒤편 구석에서 초등학생 3명이 여자아이 한 명을 희롱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여학생을 향해 “너는 몸무게가 얼마냐, 살이 많네” 등의 말을 던지다 한 남학생이 “내가 부엉이로 삼행시를 지을테니 네가 부! 해봐”라고 했다. 여학생이 “부”라고 하자 남학생이 “부랄이 니(네)”라고 했다. 이어 “엉” “엉덩이에”, “이” “이따(있다)”라며 여학생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나머지 두 아이는 망을 보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씨가 소리를 지르며 뛰어갔지만 아이들은 재빨리 도망갔다. 정씨는 “저렇게 어린 아이들이 범죄자나 할 법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경악했다”고 했다. 성폭력 심의건수 지난해 1000건 넘을 듯 초등학생 사이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범죄가 여전히 근절되지 않고 있다. 거기에 아이들의 가해행위가 점점 성인의 범죄 형태를 따라가고 있다. 여기에 ‘내 아이는 성폭력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왜 아이들이 장난으로 한 짓을 처벌하려 드느냐’는 학부모들의 비뚤어진 자식 사랑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교육부가 지난 8월 27일 발표한 ‘2019년 1차 학교폭력 실태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학교폭력 피해유형 가운데 ‘성추행·성폭력’은 전체 피해유형 중 3.9%를 차지한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 전체 설문을 뭉뚱그려 집계한 결과다. 초등학교만 따로 떼서 추이를 살펴볼 수 있는 통계는 지난해 국감에서 나온 자료가 유일하다. 김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최근 5년간 전국 초·중·고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 심의 현황’ 자료에 따르면 초등학교 성폭력 심의건수는 2013년 130건에서 2017년 936건으로 증가했다. 7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2018년도 학폭위 성폭력 심의건수는 교육부의 증감표를 토대로 산출하면 1000건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폭력 범죄의 특성상 신고되지 않은 피해건수도 상당할 것으로 교육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문제는 성폭력 피해는 학폭위에 접수가 돼도 학교가 정확한 사실파악을 하기 어렵다는 데에 있다. 성폭력 사건은 경찰이나 검찰 내에서도 충분한 교육을 받은 전담 수사관이 맡을 정도로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수사영역이다. 교사가 섣불리 개입하기 어려운 영역이라는 이야기다. 부산의 한 초등학교 교사 윤모씨(15년차)는 “어린 학생에게 성폭력 가해 또는 피해사실에 대한 질문을 던져 답을 끌어내는 것도 어렵고, 충실히 조사하겠다고 질문을 했다가 교사가 2차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굉장히 어려운 부분”이라고 말했다. 몇 달 전 초등학교 5학년 남녀 학생 무리가 방과 후 부모님이 없는 친구 집에서 ‘병원놀이’를 했다. 의사 역할을 맡은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주사를 놔주겠다며 눕힌 뒤 준강간행위를 했다. 피해 여학생은 며칠을 고민한 뒤 부모에게 이야기했고, 부모는 아이의 결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학교폭력 피해를 사유로 결석을 했을 경우 출석인정이 가능하다) 학교에는 간략한 피해사실만 알렸다. 대신 가해 남학생과 그 집에 함께 있었던 다른 아이 3명을 모두 경찰에 신고했다. 아이들은 학교가 서로 달랐다. 피해학교의 학교장은 가해자로 지목된 남학생의 학교에 학폭 접수사실을 알렸지만 피해학생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관계는 알려주지 않았다. “어떤 유형의 학폭보다 경찰 협조 절실” 가해학생의 학교는 자체적으로 학폭위를 열어야 하는 상황에 처했지만 남학생은 제대로 된 진술을 하지 못했다. 기본적인 사실관계 확인도 불가능했다. 아이는 몇 가지 질문을 받고 돌아간 뒤 다음날부터 등교하지 않았다. 그 아이의 부모는 “교사가 정확한 증거도 없이 우리 아이를 범죄자로 몰아세운다”고 항의했다. 경찰에 피해학생의 진술내용을 전달받으려고 했지만 경찰은 “공무상 비밀 누설로 처벌받을 수 있어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담당교사는 “성폭력 신고는 들어왔는데 가해학생 진술은 오락가락하고, 그나마도 더 묻지 못했다. 피해사실에 대한 정확한 진술이나 증거도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학폭위를 열어 징계를 할 수도 없어 모두가 난감한 상황”이라고 했다.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경찰은 학교폭력 사안이 신고됐거나 인지했을 경우 즉각 학교장에게 이를 통지해 협조하도록 하고 있다. 단, 성폭력은 예외다. 이 법 제5조 2항에 ‘성폭력은 다른 법률에 규정이 있는 경우에는 이 법을 적용하지 아니한다’는 규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신고가 접수됐다는 사실까지는 알려줄 수 있지만 그 외 구체적으로 고소인의 진술 등에 대해서는 수사기관이 알려줄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학교장이나 담당교사가 자체적으로 가해학생 또는 피해학생을 조사해 사실관계를 파악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부작용이나 학교와 교사를 상대로 한 학부모의 고소·고발 역시 학교가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는다. 경기도의 한 학교폭력 담당교사는 “요즘은 유치원 때부터 성폭력 교육을 하기 때문에 초등학교 저학년부터도 무엇이 잘못된 행동인지 다 알고 있다”면서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유사강간이나 준강간과 같은 행동을 ‘어린아이들의 장난’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말 요즘 초등학생들을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했다. 이어 “성폭력 건수가 전체 학폭 건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다고 해서 문제의 심각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성폭력 사건은 학교가 조사할 수 없는 영역”이라며 “경찰의 협조가 어떤 유형의 학폭보다 절실한데 수사기관의 협조가 법으로 막혀 있어 개선책 마련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만화로 본 세상] 친족 성폭력 피해자도 말할 용기를 얻었다(2019. 04. 16 09:32)
2019. 04. 16 09:32 문화/과학
네이버에서 연재를 시작한 웹툰 <27-10>은 친족 성폭력 피해자의 자기 기록 형식을 취하고 있다. <27-10>이라는 제목은 열 살부터 시작된 아버지의 성폭력을 스물일곱 살이 되어 말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미투운동’에 대해 언론들이 앞다퉈 조명하던 때 한 방송에서 ‘미투’가 어려운 사각지대로 친족 성폭력 문제를 언급했다. 성범죄는 신고율이 낮다는 특성이 있는데, 가해자가 친족인 경우는 더 그렇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AJS 작가의 만화 의 한 장면 / 네이버웹툰 친족 성폭력의 신고율이 처참하게 낮은 이유는 피해자가 놓인 권력관계의 강력함을 방증한다. 가족 같은 관계는 그 비합리적 요구를 가능하게 하는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부모는 자식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주기도 하지만,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쥐고 있다. 가장 아름답게 칭송되지만, 가장 잔혹한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친족 성폭력의 낮은 신고율은 이 문제의 복잡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부부를 제외한 가족관계는 ‘성적인 일’과 무관한 것처럼 여겨진다. 가족은, 실제의 가족들이 어떻건 간에, 평화롭고 안전한 곳이라는 관념이 지배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을 훨씬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인다. 특히 아버지가 가해자일 경우에는 믿기 어려워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그 말을 뒤집으면,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말할 때 ‘있을 수 없는 일’을 말한다는 공포와 자기 의심을 무릅써야 한다는 말과도 같다. 또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에게 피해당할 때 피해자가 느끼는 감정은 복잡하다. 그는 나를 강간했지만 ‘괜찮은 아빠’일 때도 있다. 나는 당장 먹고 입고 잘 곳을 그에게 의탁한다. 그러나 ‘미투운동’은 친족 성폭력 피해자에게도 말할 용기를 주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지난해 진행한 1359건의 상담 분석에서 유의미한 변화가 감지된 것이다. 피해자 지원방안 문의에서 ‘법적 지원’(723건, 60.8%)이 전년도에 가장 많았던 ‘심리·정서 지원’(719건, 59.7%)을 앞질렀다. 싸울 용기를 낸 이들이 늘어난 것이다. 피해자의 말하기는 단순한 고발 이상의 의미와 사회적 효과를 가진다. 아동 성폭력 피해자 너울씨는 <꽃을 던지고 싶다>라는 책을 통해 “사건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기록하면서” 일어난 변화를 이렇게 말했다. “내 몸과 마음의 고통이 형체를 갖게 되고, 그러면서 그 고통과 서서히 멀어질 수 있었다.” 그는 “내 안에는 빛나는 여러 자아가 있고, 성폭력 피해는 그 자아 중 일부에 생채기를 낸 것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네이버에서 연재를 시작한 웹툰 <27-10>은 친족 성폭력 피해자의 자기 기록 형식을 취하고 있다. <27-10>이라는 제목은 열 살부터 시작된 아버지의 성폭력을 스물일곱 살이 되어 말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주인공은 성인이 되어서 ‘아버지의 집’을 떠나고 심리상담을 받을 수 있을 만큼 변화한 후에야 비로소 자기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담담하게 자신을 직면하는 과정을 그려가는 과정이 뭉클하다. 직접적인 묘사 없이도 주인공이 느꼈을 아픔이 피부에 와닿게 하는 연출의 힘이 인상적이다. 2017년 부천만화대상을 받은 <아 지갑 놓고 나왔다>나 가족제도의 문제점을 통렬히 고발한 <그래도 되는가>도 같이 읽어보길 추천한다. 친족 성폭력 피해자의 목소리를 전하는 웹툰이 최근 몇 년 사이 눈에 띈다는 점은 시대의 변화상을 드러낸다. 떠들고, 설치고, 싸우는 여성들이 일궈낸 변화다.
만화로 본 세상
[표지 이야기]성폭력 피해자 돕는 피해자들(2018. 12. 24 14:13)
2018. 12. 24 14:13 사회
ㆍ조력받기 쉽지 않은 피해자들, 이제는 국가와 사회가 나서야 강민주씨는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이면서 다른 피해자들의 조력자다. 그는 2016년 5월 전남 CBS에 PD로 입사했다. 이전에는 기자 일도 했다. 수습 기간 내내 그는 일상적인 성희롱에 시달렸다. 윤모 당시 보도국장은 강씨를 바라보며 “피아노 치는 여자들은 엉덩이가 크다. 조심해야겠지?”라고 말했고 “내 성기에 뭐가 났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림/ 이아름 강씨는 성희롱을 성희롱으로 여기지 않는 분위기가 불편했다. 하지만 회사에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돌아오는 답은 “분위기 못맞춘다” “예민하다” 등이었다. 수습기간이 끝나자 회사는 해고로 답했다. 전남지방노동위원회는 이 사건을 부당해고로 판단해 강씨는 복직할 수 있었다. 그러자 회사는 ‘연봉계약서’를 들이밀며 강씨의 계약기간이 끝났다며 다시 해고했다. “그래도 선배는 상위 1%예요.” 전남 CBS의 성폭력 피해자는 강씨만이 아니다. 업무국장으로부터 추행을 당한 후배가 강씨에게 한 말이다. 업무국장은 노래방에서 후배의 입술에 뽀뽀를 하고 팔을 두 차례 쓰다듬었다. 후배는 곧장 문제를 제기하고 사과를 받았다. 하지만 계약기간이 끝나자 후배는 회사를 나갈 수밖에 없었고 회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잘 굴러갔다. 언론도 믿지 못하고 망설이는 피해자 미투 국면에서 강씨 사례는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전직 기자이자 PD라는 이유가 컸다. 그때마다 강씨는 후배 사례도 같이 다뤄달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후배 사례는 외면받는 경우가 더 많았다. 강씨는 “내가 두 번째 해고를 당했을 때보다 후배 사건이 외면받을 때 더 가슴 아팠다. 후배가 해고됐을 때 가장 많이 울었다”고 말했다. 강씨는 지금도 후배의 서면을 함께 작성하고 있다. 사회 곳곳에서 미투가 터져나오면서 자연스레 다른 피해자들을 만나게 됐다. 후배가 왜 자신에게 상위 1%라고 했는지 알게 됐다. 기자와 PD를 했던 강씨 입장에서 다른 피해자들의 대응을 들어보니 부족한 점이 보였다. 언론이 관심을 갖고 싶어도 사건 자체가 정리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강씨는 피해자들에게 가장 기본이 되는 ‘사건 일지’부터 만들게 했다. 언론과 피해자의 중간다리 역할도 자처했다. 언론사에서 연락이 오면 그에 맞는 피해사례를 구해줬다. 언론을 믿지 못하고 무서워하는 피해자 설득도 강씨 몫이었다. 그는 “나는 기자였고 PD이고 가족 중에 법조인이 있어 사건 진행에 도움이 됐다. 이런 환경은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는 내 노력과는 무관하게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도 싸워나가는 게 너무 힘들었다”며 조력자로 나선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국가인권위원회 결정문이 나오는 대로 회사로 돌아갈 예정이다. 그는 미투 이후 최근 1년에 대해 “살면서 이렇게 심도 깊게 사고해본 시간이 없었다”며 “그리고 직장 내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 좋은 선례가 별로 없다. 내가 좋은 선례가 되고 또 다른 피해자들이 좋은 선례로 남으면 서로는 물론이고 이후의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그렇게 조금씩 변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송보경씨도 성폭력 피해자이면서 조력자다. 문화예술계에 몸담고 있는 가해자는 언어적 성희롱에 이어 송씨의 팔꿈치를 눌러 제압한 다음 추행했다. 당시 송씨는 막 사진작업을 시작하려는 학생이었다. 몇 년이 지나 송씨가 SNS에 자신의 피해사실을 알리자 가해자는 전화로 “당시의 일을 사과한다”고 말했다. 송씨는 해당 통화 내용을 근거로 가해자를 고소했다. 한시적인 피해자 집중지원팀 가해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사과까지 했음에도 “누가 시켜서 한 사과”라며 송씨를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한 개인이 성폭력사건을 알리고 이후 법적대응까지 떠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 때 조력자가 큰 도움이 된다. 송씨도 그랬다. 그는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사건 대응을 못하고 있을 때 도움을 많이 받았다. 언젠가 갚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한국여성인권진흥원 ‘피해자 집중지원팀’ 채용공고를 봤다. 송씨가 개인적으로 피해자들에게 조력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전에는 피해자가 도움을 요청하면 개인의 역량으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몰랐고, 또 피해자의 요청을 들어주지 못하면 모두 자신의 탓인 것 같아 힘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어떤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한지 가르쳐준 적이 없다. 피해자도, 조력자도 개인의 경험과 판단에 근거해 사건을 진행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가 속한 집중지원팀은 피해자들의 신고부터 법률지원, 의료지원, 피해자 자조모임 등을 지원하고 있다. 자조모임은 피해자들끼리의 네트워크 형성을 위한 것이다.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피해자 공판에 동행하기도 했다. 송씨는 수차례 자살을 암시한 뒤 연락이 두절된 피해자를 찾기 위해 경찰을 만났고 가능하다면 위치추적까지 하려고 했다. 다행히 지금 피해자는 ‘동굴’ 밖으로 나왔다. 이럴 때 보람을 느낀다. 자신이 성폭력 피해자이기 때문에 더 조력을 잘할 수 있는 것인지에는 확신이 없다. 다만 “선생님은 제가 얼마나 고통받는지 모른다. 저는 고립되어 있다”고 말하는 피해자 때문에 낙담하는 일은 없다. “나도 고립돼 있었고 나를 도와주는 모든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아도 된다. 당신은 지금 힘들고, 힘들 때는 도움을 명확하게 받는 게 더 좋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말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된다. 그가 속한 집중지원팀은 올해 말까지만 운영된다. 보통 성폭력사건이 짧게는 1~2년, 법정으로 가게 되면 길게는 5년 가량 이어진다는 점에서 팀 운영기간은 지나치게 짧다. 사업이 끝나도 피해자들을 조력할 생각이냐는 질문에 송씨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많은 피해자들이 부채감과 책임감으로 서로를 돕고 있다. 하지만 피해자도 피해경험 이후의 삶을 모색해야 한다. 내게 고마워하며 ‘보경님처럼 저도 회복 이후에는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피해자들을 만나고 나면 마음이 복잡하다. 미투가 시작된 지 1년이 되어간다. 이제는 국가와 사회의 몫이 되어야 한다.”
표지 이야기
[한성열·서송희 부부의 심리학 콘서트 ‘중년, 나도 아프다’](85)성폭력 피해, 심리적 상처에서 벗어나는 길(2018. 03. 12 16:40)
2018. 03. 12 16:40 사회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좋은 방법은 그 당시와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다. 또한 피해자가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이 그들을 도와주는 제일 좋은 방법이다. 미투(Me Too) 열풍이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강하게 불고 있다. ‘태풍’이라고 불러도 과장이 아닐 정도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예술계, 연예계, 교육계, 종교계, 법조계, 실업계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은밀히 성폭력이 자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 어렵게 시작된 미투 운동의 결과로 우리 사회가 더 안전하고 정당한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한국YWCA 회원들이 서울 명동에서 미투운동 지지 손피켓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성폭력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거의 같은 패턴이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성폭행을 당한다. 이 일을 당한 직후 너무나 황당하고 수치스럽고 두려워 어찌 할지 몰라 혼자서 애태우고 고민하다가 주위에 있는 지인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대부분이 정작 필요한 도움을 받지 못하고, 큰 절망을 느끼고 혼자서 오랫동안 그 상처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가해자에게 응분의 책임 물어야 성폭력을 당한 것도 억울하고 괴로운데 이 아픔을 해소하지 못하고 짧게는 몇 년간 길게는 한평생 마음의 짐으로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중의 피해이고 아픔이다. 더군다나 이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과 비난을 보내는 사람들을 만나면 더욱 절망하게 된다. 그리고 심한 자책에 시달리기까지 한다. “그때 내가 조금 더 심하게 저항을 했다면…” “그때 내가 그 자리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냥 나 혼자 알고 있었더라면…” 등의 후회하는 감정에 시달린다. 심하면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기까지 한다. 죄책감을 느끼게 되면, 이제는 사건의 원인제공자가 자신이 되기 때문에 가해자가 처벌을 받는다고 해도 계속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되고 큰 짐이 된다. 과거는 다시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면서도 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악마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그럴 경우 평생 그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처벌을 받고 양지보다는 음지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 심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까지 발생한다. 이런 패턴은 성폭력의 경우뿐만 아니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을 겪은 거의 모든 피해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학생들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동급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또 사랑하는 사람에게 영문도 모른 채 버림 받는다면 이 또한 억울하고 절망적이며 오랫동안 가슴에 상처를 줄 수 있다. 직장에서 억울한 오해를 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이는 사건은 서로 다를 수 있지만, 그 사건을 통해 받는 심리적 피해나 괴로움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는 물론 가해자에게는 응분의 책임을 묻고 합당한 처벌을 내릴 수 있는 체계가 하루 빨리 마련되거나 정비되어야 한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무고한 피해자가 2중 3중의 피해를 받지 않도록 피해자에 대한 편견을 거둘 수 있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불의의 사고는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해자가 법적인 처벌을 받는다고 해서 그 사건이 종결되고 피해자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피해를 받았다는 사실과 그 사건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도 완전히 치유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응분의 처벌을 받았다고 해서 피해자의 억울함과 두려움, 절망감과 자책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실질적이고 꼭 필요한 것은 피해자가 느끼는 마음의 상처를 덜어주는 것이다. 동시에 피해자 스스로도 마음의 상처에서 벗어나야 한다. 비록 가해자가 처벌을 받는다고 해도 아픔이 조금 덜어질 수는 있을지언정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심리적으로 치유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는지’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피해를 입은 상황과 저항할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것도 물론 도움이 된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좋은 방법은 그 당시와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다. 또한 피해자가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이 그들을 도와주는 제일 좋은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을 갖고 공감을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공감해줘야 상대의 마음에 공감하기 위해서는 ‘너’의 입장이 되고 ‘너’의 말을 들어야 한다. ‘나’는 상대의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의 역할을 해야 하고, ‘나’는 마치 산울림처럼 상대의 말을 되돌려주는 역할을 할 때 상대는 자신의 마음을 진정 이해해준다는 느낌을 가지고 비로소 두려움과 부끄러움 없이 자신의 마음속 이야기와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다. 즉, 상대의 고통의 소리를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들어주어야 한다. ‘내’가 말을 적게 하면 할수록, 그리고 그 아픔에 공감하면 할수록 ‘너’는 더 많이 자신의 아픔에 대해 표현할 수 있다. 지나간 사건을 잊을 수는 없다. 다만 그 사건에 연관된 감정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 사건을 인지적으로 기억은 하지만, 그 사건 때문에 부차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자유스러워질 수는 있다. 예를 들면, 사랑하던 이성으로부터 배반을 당했을 경우 그 쓰라린 사건을 잊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사건과 연관된 감정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그 사건이 머리에 떠오를 때마다 그와 연관된 감정도 같이 느껴져 다시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과거의 사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한 사건에 결합되어 있는 인지적 요소와 감정적 요소를 분리시켜야 한다. 그러면 사건은 기억이 나지만, 그 사건 때문에 격렬한 감정이 올라오지 않기 때문에 큰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 회상할 수 있다.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감정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그 아픈 감정을 표현하고, 그 감정에 따르는 행동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성폭행을 당했을 때의 그 부정적 느낌을 표현하고, 가해자에게 느낀 그 감정을 행동으로 옮길 필요가 있다. 성폭행을 당할 때와 당한 후의 절망감과 수치심과 무력감을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상대에게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 느낀 그대로 표현하면 할수록 감정의 강도는 약해진다. 그리고 상대에게 느꼈던 적대적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행동으로 재현할수록 상대에게서 그리고 불행한 사건에서 감정적으로 자유스러워질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마음 놓고 부정적 감정을 표현하면서 실컷 욕하고 울 수 있는 사람과 장소이다. 성추행이나 폭행을 당했다는 사실 자체는 잊을 수 없다. 가해자를 다시 대면하거나 가해자를 떠올리게 하는 그와 유사한 인물이나 상황을 마주하게 될 경우 사건이 다시 떠오를 수 있다. 하지만 인지적 요소와 감정적 요소를 분리할 수 있다면, 사건이 기억은 나지만 감정은 그렇게 격렬하게 느끼지 않을 수 있다.
한성열·서송희 부부의 심리학 콘서트 ‘중년, 나도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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