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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칼럼] 기술 주도 사회의 인간 중심성과 윤리적 설계
[IT 칼럼] 기술 주도 사회의 인간 중심과 윤리적 설계(2025. 01. 03 15:00)
2025. 01. 03 15:00 경제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끊임없이 쏟아지는 정보와 알림, 24시간 연결된 온라인 세상은 편리함을 넘어 때로는 숨 막히는 압박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기술 발전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인간은 그 속도에 맞춰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 주도 사회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과연 이 모든 기술 발전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과거에는 컴퓨터가 제공하는 입력 장치와 출력 장치가 명확히 분리돼 있었고, 사용자는 일방적으로 주어진 인터페이스의 규칙에 맞춰 정보를 입력했다. 그러나 이제는 음, 제스처, 시선 추적,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더 자연스럽고 직관적인 상호작용이 가능해지고 있다. 이러한 융합의 시대에 ‘인간(humanity)’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기술이 단순히 효율적인 도구가 아니라 개인의 가치관과 사회 제도를 재편하는 수준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특히 인공지능(AI) 분야에서 대두되는 윤리적·법적 이슈는 이미 세계 각국에서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생체 인식 기술을 활용한 감시시스템, 편향된 알고리즘으로 인한 차별 발생, AI가 생한 콘텐츠의 저작권 문제, 가짜 정보 생 등은 한두 해 지나면 끝날 사안이 아니며, 사회 전반의 합의와 제도 설계를 통해 꾸준히 조정돼야 할 영역이다. 기술적 진보에만 열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존중’이라는 근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AI의 결정 과정에 대한 투명과 사용자의 통제력 확보가 필수적이다. 즉 최신 기술이 제아무리 편리하더라도, 인류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개인정보 보호,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 그리고 대중이 기술의 의사결정 구조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감독할 수 있는 체계가 필수적으로 마련돼야 한다. 과거에는 ‘사용자가 컴퓨터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라는 기능적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나, 이제는 ‘기술이 어떻게 인간의 삶에 가치를 더하고, 인간의 문제 해결 방식에 부드럽게 녹아들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예컨대 음 비서나 챗봇이 사용자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개인화된 맥락과 정서를 얼마나 세심하게 고려할 수 있는가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 요소가 됐다. 더불어 기술이 인간의 한계를 보완하는 형태로 계속 발전하면서, 인간의 창의력과 감이라는 고유의 영역을 침범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잡음과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결국 기술 주도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중심과 ‘윤리적 설계(Ethical Design)’ 원칙의 확립이다. 기술은 인간이 그리는 미래를 실현하는 수단에 불과하므로, 인간이 어떤 가치를 세우고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고 싶은지에 따라 기술의 진화 방향도 달라져야 한다. 기업과 정부, 시민사회가 함께 고민하며 제도와 문화를 설계할 때, 인간이 기술에 몰입하면서도 소외되지 않는 지속가능하고 조화로운 디지털 생태계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기계가 상생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이미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이 거대한 전환의 주도권을 우리 스스로가 쥐고, 인간이 중심에 서는 기술 시대를 만들어나가는 일이다.
IT칼럼
가임기 성인 10명 중 1명만 “자녀 꼭 있어야 한다”
가임기 인 10명 중 1명만 “자녀 꼭 있어야 한다”(2024. 12. 20 14:14)
2024. 12. 20 14:14 사회
가임 연령대 인의 절반 이상은 ‘일생에 자녀가 없어도 무관하다’고 밝혔다. 자녀가 꼭 있어야 한다는 응답은 10명 중 1명에 불과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12월 20일 서울 서초구 양재 엘타워에서 ‘저출산·고령사회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 결과: 결혼, 출산, 세대 가치관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제36회 인구포럼을 열어 이 같은 결과를 발표했다. 보사연은 전국의 만 19∼79세 남녀 4000명을 대상으로 저출산·고령사회 대응 국민인식 및 가치관 조사를 시행했고, 이날 포럼에서는 만 19∼49세 가임 연령 남녀 2005명의 답변을 분석해 공개했다. 출산 관련 인식을 조사한 결과 자녀의 필요에 대해 ‘없어도 무관하다’는 답변이 전체의 52.6%로 절반을 넘었다. 이어 ‘있는 게 없는 것보다 낫다’(30.2%), ‘꼭 있어야 한다’(10.3%), ‘모르겠다’(6.9%) 순이었다. 별로는 여, 연령대별로는 20대, 소득수준으로는 낮을 때 자녀에 대해 소극적인 편이었다. 여의 63.5%, 19∼25세의 54.6%, 26∼29세의 57.2%가 자녀가 없어도 무관하다고 했고, 월평균 근로소득이 300만원 미만일 때도 이러한 경향이 강했다. 월 소득이 100만원 미만인 응답자의 59.5%, 100만∼200만원 미만일 때 54.8%, 200만∼300만원 미만일 때 55.6%가 자녀가 없어도 무관하다고 답했다. 이상적 자녀 수는 평균 1.33명이었다. 2명이 49.1%, 무자녀(0명)가 30.1%, 1명이 14.4%, 3명 이상이 6.4% 순이다. 무자녀라고 응답한 비율은 여, 25∼35세, 고졸 이하, 임시직 및 일용직, 미혼, 저소득 가구일수록 높았다. 배우자가 있는 남녀에 ‘추가’ 출산 계획을 묻자 19.2%만이 “있다”고 답했다. “없다”는 응답은 69.3%에 달했다. 추가 출산 계획이 없는 이유로는 ‘나 또는 배우자의 나이가 많아서’(20.5%), ‘양육비가 너무 비싸서’(18.2%), ‘경제적 사정이 어려워서’(16.0%) 등 순이었다. 결혼에 대한 인식도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다’는 중립이 49.3%로 절반에 가까웠다. ‘반드시 해야 한다’(4.7%), ‘하는 편이 좋다’(29.3%) 등 결혼에 긍정적인 답변은 34.0%로 나타났다. ‘하지 않는 게 낫다’는 부정적 답변은 14.8%였다. 결혼을 위해 필요한 조건으로는 4점 만점에 만족할 만한 일자리(3.41점), 주택비용 마련(3.36점), 결혼 후에도 일 또는 학업을 그대로 할 수 있는 환경(3.31점) 순으로 중요하게 생각했다. 결혼 준비 자금은 총 3억3996만원이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이 중 주택 마련 자금이 2억5517만원이었다. 연구를 담당한 김은정 부연구위원은 “여, 저소득, 20∼30대 청년층, 도시 지역 거주자일수록 결혼과 출산에 대해 더 부정적으로 인식했다”며 “결혼, 출산에 대한 인식 변화 노력이 중요하고 맞춤형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일자리, 주거비, 양육비 등 경제적 이유가 결혼 및 출산 의향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며 “좋은 일자리 창출과 주거비 안정화, 사교육비 등 양육비용 부담을 완화하고 다양한 부처와의 협업과 민관 협력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시네프리뷰] 서브스턴스-선정성과 서정성 사이의 기괴한 노스탤지어
[시네프리뷰] 서브스턴스-선정과 서정 사이의 기괴한 노스탤지어(2024. 12. 18 06:00)
2024. 12. 18 06:00 연예
많은 리뷰에서 “이 영화의 절정은 미쳤다”라고 평하고 있다. 부정하지 않지만, 이 작품의 진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드러난다. 모든 악몽과 난장을 서글픈 동화로 승화시키는 인상적이며 결정적인 장면이다. /찬란 제목: 서브스턴스(The Substance) 제작연도: 2024 제작국: 영국, 프랑스, 미국 상영시간: 141분 장르: 공포, 드라마 감독: 코랄리 파르자 출연: 데미 무어, 마가렛 퀄리, 데니스 퀘이드 개봉: 2024년 12월 11일 등급: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 <서브스턴스>가 올 5월에 열린 제77회 칸 영화제(각본상 수상) 경쟁 부문에 출품돼 첫선을 보인 이후, 파격적이고 극악무도한 영화라는 소문이 일파만파로 번졌다. 지난 9월 북미지역에서 개봉한 후에는 영화가 노골적으로 차용하고 있는 유명작품들에 대한 언급이 더해지며 과연 소문처럼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냐는 지적까지 쏟아졌다. 이런 가열한 논쟁과 소문이 영화에 대한 호기심을 증폭시키는 데 일조한 것은 자명하다. 시대를 직관하는 발칙한 수작인가? 과거 명작들의 명을 등에 업은 나태한 모방작인가? 필자는 전자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2024년을 되돌아보면 공포영화계에 가장 논란과 화제를 모은 작품은 <서브스턴스>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에어로빅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간신히 과거의 명을 이어가고 있는 여배우 엘리자베스(데미 무어 분). 어느 날 젊음을 회복할 수 있는 의문의 약품 ‘서브스턴스’의 존재를 알게 되고 사용을 결심한다. 문제는 그의 안에서 태어난 새로운 자아 수(마가렛 퀄리 분)가 젊음의 혈기만큼이나 강인한 욕망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이다. 여이라 그려낼 수 있었던 위험한 선정 <서브스턴스>는 ‘욕망’과 ‘중독’이라는 보편적인 화제를 한물간 여배우의 악몽을 통해 가시화하고 있는데 이 작품을 한마디로 응축할 수 있는 단어는 ‘자극’이다. 보통의 관객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자극적 요소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영상, 편집, 음악 등 모든 요소가 자극을 유발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데, 이는 141분이라는 짧지 않은 상영시간임에도 시작부터 끝까지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첫 번째 자극이자 이 영화를 도발적으로 만드는 요소는 ‘선정’이다. 엘리자베스의 비애로부터 탄생한 수는 바라보는 이의 내면에 잠재된 ‘에너지’를 자극하는 원초적이고 적인 생명력을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를 위해 감독은 다양한 영화적 기법을 총동원해 화려하고 과장된 인물과 배경을 연출한다. 더불어 이에 그치지 않고 아름다운 여체를 노골적으로 탐색하는 관음적인 시선을 반복해 보여준다. 젊음과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여주인공의 욕망은 작품의 주제를 구축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점에서 필연적 선택이자 묘사다. 하지만 사사건건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작금의 시대에는 자칫 인지 감수 문제로까지 불똥이 튈 수도 있고, 그래서 관객 처지에서도 불편할 수 있는 장면들의 나열은 용감함을 넘어서 도착(倒錯)으로까지 보여 의아하게 다가온다. 과거 걸작들에서 수혈해 낸 폭력 이런 위태로운 혐의를 벗어내고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감독이 여이기 때문이다. 여 스스로가 여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전제는 다소 과도하고 말초적인 장면에서 야기될 수 있는 오해를 일거에 누그러뜨린다. 지난 11월 말 개봉한 조 크라비츠 감독의 <블링크 트와이스>도 비슷한 예라 할 수 있다. 고립된 섬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파티에 초대된 한 여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 스릴러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 여 감독이 아니라면 함부로 묘사할 수 없었을 끔찍한 폭력의 전말이 드러난다. 두 번째로 두드러지는 자극적 요소는 ‘폭력’이다. 절정을 향해갈수록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데이비드 린치, 브라이언 드 팔마, 존 카펜터 등 과거 거장들의 이름을 떠올리게 되는 기괴한 신체 변형과 피 칠갑이 극에 달한다. 평소 영화광을 자처하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를 보며 숨어 있는 레퍼런스(Reference·참조작품)를 얼마나 많이 찾아낼 수 있는지 스스로 시험해 보는 것도 작품 외적인 즐거움이 될 것 같다. 많은 리뷰에서 “이 영화의 절정은 미쳤다”라고 평하고 있다. 부정하지 않지만, 이 작품의 진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모든 악몽과 난장을 서글픈 동화로 승화시키는 인상적이며 결정적인 장면이다. 독특한 장르 영화나 공포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영화다. 거듭해 환생하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amazon.com <서브스턴스>가 참고해 녹아낸 많은 선배 작품 중에서도 근간이 된 가장 중요한 작품은 1886년 출판된 영국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고전 단편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기이한 사례(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다. 최초의 영화화는 1908년 오티스 터너 감독이 연출한 16분짜리 단편이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영화는 루벤 마물리안 감독(1931)과 빅터 플레밍 감독(1941)이 각각 장편으로 연출한 흑백작품 두 편이다. 이외에도 ‘지킬’과 ‘하이드’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영화, 드라마는 그 수를 정확히 헤아리는 것 자체가 버거울 만큼 많다. 원작을 그대로 각색한 작품이야 당연하고, 코미디, 로맨스로 장르를 변형하거나, 제목부터 <지킬 박사와 시스터 하이드>(1971), <지킬 박사와 미스 오스본의 기이한 사건>(1981), <지킬 박사와 미스 하이드>(1995)처럼 양의 대결 구도로 그린 작품까지 등장했다. 현대에 이르러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는 과거 ‘다중인격’으로 불렸던 ‘해리 정체감 장애’를 설명하는 대명사 중 하나가 됐다. 더불어 많은 작품이 간접적이고 은유적인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국내에는 드라마 <두 얼굴의 사나이>(The Incredible Hulk·1977·사진)로 널리 알려진 마블 코믹스의 슈퍼영웅 <헐크>가 대표적 경우다. 실제로 2003년 극장용 대작으로 제작된 <헐크>를 연출한 이안 감독은 1931년에 만들어진 루벤 마물리안 감독의 영화를 참고했다고 밝혔다. 대척하던 두 인물의 몸과 정신이 바뀌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게 되는 구조로 진행되는 속칭 ‘스위치(Switch)’물 역시 넓은 범위에서 스티븐슨의 고전 영향력 안에서 파생된 장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시네프리뷰
[우정 이야기] ‘팝업 성지’ 성수동, 우체국 산타도 찾아간다
[우정 이야기] ‘팝업 지’ 수동, 우체국 산타도 찾아간다(2024. 12. 04 06:00)
2024. 12. 04 06:00 경제
우정사업본부가 서울 수역 인근 연무장길에 열었던 팝업스토어 ‘우체국 산타의 소원상점’ /우정사업본부 제공 한때 ‘굴뚝산업’이 자리하던 서울 동구 수동은 이젠 서울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광지가 됐다. 그중에서도 지하철 2호선 수역 인근에 있는 연무장길은 주말과 평일 저녁이면 청년들과 관광객이 도로를 빼곡히 메워 차량이 드나들기 어려울 정도다. 이들을 매혹한 것은 눈 깜짝할 새 운영하고 사라지는 ‘팝업스토어’(짧은 기간 운영되는 체험형 홍보 매장)다. 연무장길은 ‘팝업의 지’로 불린다. 매일, 매주 새로운 팝업이 들어서면서 매장은 교체되고 연무장길의 분위기도 단숨에 바뀐다. 연무장길이 팝업으로 유명해진 것은 공업지대였던 수동의 특 때문이다. 다양한 물건을 전시하고 체험할 수 있는 팝업은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주택보다 면적이 넓은 공장을 개조한 공간이 팝업에는 제격이다. 팝업이 인기를 끌면서 샤넬을 비롯한 고가 잡화 기업부터 증권사, 서울시, B2B 기업까지 업종과 주체를 가리지 않고 연무장길에 팝업을 열었다. 청년들에게 가볍고 쉽게 다가갈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소비자들이 지갑을 여는 연말은 팝업의 대목이다. 지난해 연말엔 수동에서 한 주에만 50개 넘는 팝업이 열리기도 했다. 인기 많은 팝업에 들어가려면 한 시간 넘게 줄을 서는 일도 흔했다. 다만 팝업을 연다고 저절로 청년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업의 특에 맞는 콘셉트를 구현해내거나 계절적 요소를 갖춰야 호응을 끌어낼 수 있다. 우정사업본부도 특을 살려 연무장길에 팝업 ‘도전장’을 냈다. 지난 11월 22일부터 28일까지 6일간 마스터카드사와 함께 ‘우체국 산타의 소원상점’이라는 주제로 연무장길에 팝업을 열었다. 연말연시를 맞이해 팝업을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연출했고, 물품을 배송하는 우체국의 특을 살려 ‘산타’라는 콘셉트를 구현했다. 팝업의 핵심 ‘포토존’도 곳곳에 배치했다. 또 우체국 예금에 대한 청년들의 친밀도를 높이기 위한 팝업도 겸했다. 팝업에 입장하면 산타 머니와 우체국 체크카드가 들어 있는 웰컴키트를 받고, ‘소원트리’, ‘산타의 여행사’, ‘산타의 선물가게’ 등에서 소원을 이루면 다양한 팬 상품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팝업스토어가 열리는 동안 ‘MZ세대’ 특화 캐릭터로 새롭게 디자인한 ‘영리한plus 우체국 체크카드’를 한정판으로 발급해 주기도 했다. 우체국 예금을 이용하지 않는 청년 세대가 우체국 체크카드를 직접 체험해 우체국 예금에 대한 친밀도를 높이려는 의도다. 팝업스토어에서 생기는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내부시설을 재활용이 가능한 소재로 제작한 것도 특징이다. 조해근 우정사업본부장은 “우체국 팝업스토어는 국가기관인 우체국이 ‘2030 세대’에게 친숙한 이미지로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시도”라고 밝혔다.
우정이야기
한은 기준금리 0.25%포인트 인하···성장률 전망 더 낮춰
한은 기준금리 0.25%포인트 인하···장률 전망 더 낮춰(2024. 11. 28 13:43)
2024. 11. 28 13:43 경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1월 28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이하 금통위)가 11월 28일 통화정책방향 회의를 열고 기준금리를 연 3.25%에서 연 3.00%로 0.25%포인트 더 낮췄다. 지난달 금리를 0.25%포인트 내려 3년 2개월 만에 피벗(통화정책 전환)에 나선 이후 두 차례 연속 인하다. 한은은 이날 수출 둔화와 내수 부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2기 정부 출범 위험 등을 반영해 올해와 내년 장률 전망치도 각 2.2%, 1.9%로 0.2%포인트씩 낮춰 잡았다. 금통위는 통화정책방향 회의 의결문에서 “장 하방 압력이 증대됨에 따라 기준금리를 추가 인하해 경기의 하방 리스크(위험)을 완화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또 “환율 변동이 확대됐지만, 물가 상승률 안정세와 가계부채 둔화 흐름은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금통위는 “금리 인하가 물가와 장, 가계부채와 환율 등 금융 안정에 미치는 영향과 정책 변수간 상충 관계를 면밀히 점검하면서 앞으로 인하 속도 등을 결정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앞서 2020년 3월 금통위는 코로나19 충격으로 경기 침체가 예상되자 기준금리를 1.25%에서 0.75%로 한 번에 0.50%포인트 낮췄고, 같은 해 5월 0.25%포인트를 추가 인하했다. 이후 아홉 번의 동결을 거쳐 1년 반 이상 기준금리 0.50% 수준의 완화 기조를 유지했다. 금통위는 2021년 8월 금리를 0.25%포인트 올리며 통화정책의 방향을 전환했다. 이후 2023년 1월까지 금리는 0.25%포인트씩 여덟 차례, 빅스텝 두 차례를 포함해 총 3.00%포인트 높아졌다. 이후 13차례 연속 동결로 3.50% 기준금리가 작년 1월 13일부터 올해 10월 피벗 직전까지 약 1년 9개월간 이어졌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이날 금통위를 마친 뒤 기자회견을 열고 “미국 신정부의 경제정책 향방에 따른 경기와 인플레이션의 불확실이 증대됐다”며 “장 경로의 불확실이 높아진 만큼 기준금리를 추가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 총재는 “(지난달에 이어) 기준금리를 추가 인하해 장의 하방 리스크를 완화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결정했다”며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하하면 경제장률이 0.07%포인트 높아지는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본인을 제외한 금통위원 6명 중 4명은 ‘인하’ 의견을, 나머지 2명은 ‘동결’ 의견을 각각 제시했다고 전했다. 동결 소수의견을 낸 금통위원은 유상대 부총재와 장용 위원이다. 지난 10월 유일하게 동결 의견을 낸 장 위원은 이번에도 기존 견해를 유지했다. 3개월 후 기준금리에 관한 의견인 ‘포워드 가이던스’도 3대3으로 팽팽하게 갈렸다. 이 총재는 “6명 중 3명은 향후 3개월 내 연 3.00%보다 낮은 수준으로 기준금리를 인하할 가능을 열어놔야 한다는 의견”이라며 “나머지 3명은 3.00%를 유지할 가능이 크다는 의견”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10월에는 금통위원 6명 중 5명이 향후 3개월 내 3.25%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이 총재는 “3분기에 수출 물량이 크게 줄었는데, 일시적인 요인보다는 경쟁 심화 등 구조적 요인이 크다고 판단했다”며 “수출 불확실장 전망 조정은 새로운 정보이고, 굉장히 큰 변화”라고 말했다. 기준금리 인하에 따른 원/달러 환율 상승 우려에는 “환율 변동을 관리하는 데 외환보유고가 충분하다”고 밝혔다. 이 총재는 “11월 이후에도 가계대출은 주택거래량 감소, 거시 건전 정책 영향 지속 등으로 당분간 둔화 흐름을 유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어 “가계부채를 조절하는 과정에서 가산금리가 오른 것은 금융안정 도모를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이었다”며 “내년 초부터 가산금리가 내릴 가능이 있으니 길게 봐달라”고 말했다. 이 총재는 국무총리 하마평에 관해 질문이 나오자 “저도 준비해왔다”며 “경제상황이 녹록지 않은 만큼 한은 총재로서 맡은바 현재 업무에 충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성미산마을이 30년간 만들고 바꾼 것
미산마을이 30년간 만들고 바꾼 것(2024. 11. 25 06:00)
2024. 11. 25 06:00 사회
육아 해결 위해 모여…약자와 함께 공동체를 만들며 ‘다양’ 자라 사회 변화 속 여러 고민…협동조합 통합 등 공동체 지속 대안 모색 지난 11월 18일 서울 마포구 산동 미산마을극장 입구에 ‘미산마을 30주년’ 기념행사를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김창길 기자 서울 도심 속 마을공동체 ‘미산마을’이 올해로 출범 30년을 맞았다. 1994년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국내 최초 협동조합형 어린이집인 ‘우리어린이집’이 문을 열었고, 그때를 미산마을 형의 씨앗이 심어진 해라고 본다. ‘육아’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모인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다양한 공동체를 만들었고, 이 공동체들이 개인의 삶과 지역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를 함께 대응해오면서 오늘의 미산마을에 이르렀다. 미산마을은 ‘마을공동체의 공 사례’(정부 정책 주간지 ‘위클리공감’ 블로그, 2013. 7)로 인정받는 곳이다. ‘풀뿌리 시민운동’의 대표 사례(경향신문, 2006. 12)로 불리기도 하고, ‘좌파 인물 양소’(국가정보원 ‘서울시장의 좌편향 시정운영 실태 및 대응방향’ 문건, 2013. 5)라는 왜곡된 시선을 받기도 했다. ‘특별한 공동체’임은 분명하다. 이는 미산마을이 지리적 개념의 ‘마을’이 가진 전통적 정체과는 다른 속을 지녔기 때문이다. 미산마을 사람들을 이렇게 말한다. “해발 66m의 작고 낮은, 그러나 마포구 유일의 자연산인 미산을 중심으로 연결된 크고 작은 70여개의 ‘커뮤니티 네트워크’(공동체들의 관계망)를 일컬어 ‘미산마을’이라고 한다.” 미산마을은 지난 30년간 무엇을 만들었고 앞으로 무엇을 만들어갈까. 지난 11월 18일 미산마을 일원인 동네책방 개똥이네 책놀이터에서 마을주민이자 활동가 4명을 만났다. ■미산마을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우리어린이집 설립 이후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 서울 산동, 망원동, 합정동 일대에 공동육아 어린이집 4곳이 순차적으로 개원했다. 1999년에는 초등학생 마을방과후(현 도토리마을방과후)가, 2004년에는 초·중·고 과정 대안학교 미산학교가 문을 열었다. 아이들의 장과 함께, 부모들의 필요로, 대안적 보육·교육기관들이 들어섰다. 우리어린이집 개원 당시 부모 조합원이었던 이경란씨는 “민주화 세대 부모들에게 꿈이 있었다. 민주화된, 평등하고 생태적인 사회에서 아이들이 자라기 바랐고, 그걸 구상한 사람들(‘공동육아 연구회’)이 있었다. 모집 공고를 냈는데 빠른 속도로 (조합원들이) 모였다”고 했다. 아이들이 자라며 어른들의 관계망 유지가 어려워지자 미산마을 사람들은 2001년 마포 두레생협(현 울림두레생협)을 만든다. 생협은 “초기부터 ‘지역과 함께’라는 취지를 분명히 했기 때문에 이후 마을축제, 미산 지키기 운동, 지역교육센터, 마을기업 추진 등에 생협이 가장 앞장서서 노력했으며 마을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위남, ‘도시 속에서 함께 살아남기’, ‘황해문화’ 2013 가을호). 생협은 마을공동체 확장의 주축이었다. 상대적으로 집값이 싼 지역을 찾아 2011년 산동으로 이사 온 박수경씨(개똥이네 문화놀이터 사무국장)도 육아로 인한 고립감을 해소하고자 생협 마을모임에 참여한 게 마을활동의 시작이었다. 그는 “아이가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마을활동이 확장됐다”고 했다. 지인의 소개로 우리어린이집을 알게 돼 공동육아를 시작했고, 아이가 초등학교에 가면서 개똥이네(2011년 창립) 일을 시작했다. 개똥이네는 동네책방이면서 주민 문화활동 프로그램과 초등학생 돌봄을 제공한다. 지난 30년간 미산마을에는 주민들의 현실적 욕구를 해결하고자 다양한 경제·생활·주거·문화·의료 공동체가 생겨났다. 어린이집부터 방과후, 학교, 반찬가게, 카페, 책방, 극장 등 이용할 공간도 다양해졌다. 협동조합형 마을기업, 비영리단체, 두레, 동아리, 단기 소모임 등 형태도 가지가지다. 그사이 어떤 공동체들은 해산하기도 했다. 이 공동체들은 주로 미산 주변 지역에 터를 잡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살지 않아도 미산마을 공동체 활동에 참여하면 미산마을 주민이라 여긴다. 미산마을 정체에는 ‘미산 지키기 운동’이 큰 영향을 미쳤다. 미산마을 공동체들은 2001~2003년, 2007~2010년 두 차례에 걸쳐 서울시·한양재단, 홍익재단의 미산 개발 계획에 반대하며 미산 지키기 운동을 벌였다. 생태 환경을 보호하자는 운동이었고, 아이들의 놀이 터전을 지키자는 운동이었다. 1차 투쟁은 공, 2차 투쟁은 실패였다. 이는 미산마을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내부 결속을 강화한 계기가 됐다. ■미산마을은 어떤 곳···어떤 사람들이 살까 서울 도심 속 마을공동체 ‘미산마을’의 마을활동가 박수경씨, 이경란씨, 홍정희씨, 조승연씨(왼쪽부터)가 지난 11월 18일 서울 마포구 산동 동네책방 개똥이네 책놀이터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했다. 김창길 기자 ‘내가 살아본 미산마을’은 어떤 곳일까. 이경란씨는 “미산마을은 편한 곳, 편리한 곳”이라고 말했다. “같이 만들어가면서 일도 많고 시간도 많이 쓰지만 그만큼 애 키우는 과정이 편했어요. 또 소비자로서도 대안적 소비가 가능해요. 먹거리를 선택하거나 아플 때 가야 하는 곳을 찾을 때나, 노인이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런 고민이 줄어들죠. 필요한 걸 대신 만들어주는 믿을 만한 사람들이 많은 곳인 거예요.” 박수경씨도 “필요하면 구해지는 곳”이라고 했다. 그는 “옷이나 음식 같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육아, 환경, 문화, 취미 등 어떤 영역이든 자기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찾아지고 없더라도 같이 만들겠다고 최소 몇 명은 나서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고 했다. 미산마을 공동체들을 연결하는 단체인 사단법인 ‘사람과 마을’ 운영위원장인 홍정희씨는 2002년 일하던 출판사가 있는 서교동으로 이사했다. 출판사가 경기도 파주로 이주한 후 회사를 그만두고 동네에서 할 만한 일을 찾다가 생협 마을 모임에 참여하면서 마을과 연결됐다. 그는 “미산마을은 안전한 마을”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의 행동반경이 마을공동체 안에 다 들어와 있어요. 물론 애들은 힘들어할 수도 있지만요(웃음). 장애인, 소수자 그리고 우리 모두 각자 모난 점이 있는데 삶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걸 재미난 것으로 승화해버리는 곳이에요.” 조승연씨는 자녀가 초등학생 때 대안학교를 알아보다 미산학교가 개교한 2004년 미산마을로 이주했다. 조승연씨는 “마을에서 장애인을 쉽게 만날 수 있고, 퀴어퍼레이드도 매년 하고 있다”며 “강좌를 듣거나 책을 읽지 않아도, 마을에서 산다는 것만으로 더 넓은 생각을 할 수 있어 자연스럽게 장할 수 있는 마을”이라고 했다. 미산마을 30주년 기획단-아카이브팀은 미산마을에 살거나 살았던 중학생 이상의 구원을 대상으로 지난 8월 15일부터 10월 11일까지 온라인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총 270명이 참여했다. 전체 구원보다는 마을활동에 적극적인 사람들의 생각일 수 있다고 아카이브팀은 설명했다. 응답자 특을 연령별로 보면 40대(48.1%)와 50대(30.0%)가 다수를 차지했다. 가구 형태는 3인 이상 가구가 83%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아카이브팀은 “미산마을을 자녀의 ‘교육 및 육아’ 활동에 중점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40대 부부와 자녀로 이뤄진 핵가족 중심의 공동체로 파악할 수 있겠다”고 분석했다. 실제 미산마을 참여 동기와 관련해 80%가 ‘교육 및 육아’라고 답했고, 미산마을에서 가장 만족하는 부분도 ‘교육 및 육아(72.6%)’가 꼽혔다. 미산마을의 이웃관계의 특징으로는 ‘다양한 마을활동을 통해 이웃과의 어울림(70%)’ 및 ‘비슷한 사고와 가치관(67%)’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많았다. 미산마을 사람들의 비슷한 사고와 가치관은 무엇일까. 주관식으로 질문했더니 총 119개 단어가 언급됐으며 공동체(200회), 돌봄(120회), 다양(78회), 생태(75회) 등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대안(72회), 연대(66회), 나눔(61회), 공감(52회), 협동(52회) 등도 많이 언급됐다. ‘미산마을 주민이 추구하는 다섯 가지 가치’를 주관식으로 물었을 때 응답을 워드클라우드 그림으로 시각화한 자료. 미산마을 30주년 기획단-아카이브팀 제공 ■의사결정 문화가 ‘미산마을의 역사’ 미산마을에서는 30년 동안 소수자, 사회적 약자와 함께 공동체를 만들면서 ‘다양’이 자랐다. 조승연씨는 미산학교 교사로 14년간 활동한 후 현재는 발달장애 청년들의 생활공동체 ‘사부작’(2017년 창립)에서 활동가로 일한다. 그는 “공동육아 기관에서 장애 통합 교육을 하는데 아이들이 졸업하고 사회와 단절되는 문제가 있었다”며 “일자리 위주의 대안적 활동만 있었는데, 꼭 일하지 않더라도, 시설에 가지 않고 마을에서 같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놀이·생활공간으로서 사부작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이어 “어제도 클럽을 열었다”며 “발달장애 청년들이 갈 클럽이 없으니까, 두 달에 한 번씩 클럽을 열고 논다(웃음)”고 했다. 마포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마포의료사협)이 운영하는 무지개의원은 소수자가 장벽 없이 다닐 수 있는 의료기관이다. 도시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대처해왔다. 관계망 지속을 위해선 안정적인 주거가 필요했던 미산마을 사람들은 2007년 첫 공동주택을 지었다. 이후 2009년 공동주택 전문 시행사인 ‘소통이있어행복한주택’(소행주)을 창업했다. 2010년대 들어 망원동 일대는 일명 ‘망리단길’이라 불리는 상권이 형되면서 미산마을도 젠트리피케이션(일명 둥지 내몰림 현상)의 영향을 받았다. 2014년 마을카페 작은나무가 폐업 위기에 내몰렸고, 마을 사람들이 서울시에 젠트리피케이션 대책을 요구하기도 했다. 작은나무는 이후 마을회관으로 이전했으나, 지난해 마을회관이 문을 닫았다. 미산마을 공동체들이 꽃길만 걸었던 것은 아니다. 이경란씨가 울림두레생협 이사장으로 있던 2010년 생협은 확장 방향을 두고 내부 논쟁을 벌였다. 그는 “그해 1년 내내 논의를 했고 이견을 묶어나가고 풀어나가면서 결론을 냈다”며 “그때 ‘다양한 의견을 통합해낼 수 있겠다’란 자신감도 생겼던 것 같다”고 했다. 소수의 목소리를 배제하지 않으면서 합의에 이르는 의사결정 문화 자체가 미산마을이 만들어온 역사다. 이경란씨는 이렇게 말한다. “공동육아 경험의 힘이 컸다고 봐요. 공동육아는 한 사람의 목소리를 배제하면 무너지는 거거든요. 조합원 모두의 목소리를 수렴하는 것이 연습이 돼 있던 것이죠.” 미산마을 공동체 구원들이 지난 11월 9일 서울 마포구 산동 서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마을축제를 기념해 단체사진을 찍었다. 사단법인 사람과 마을 제공 미산마을을 두고 ‘그들만의 세상’이라는 평가도 있다. 공동체 활동을 하려면 아무래도 조합원이어야 하고, 그 구원을 보면 고학력 중산층 사람들이 모인 마을이라는 생각에서다. 이경란씨는 “그런 이야기는 계속 있었고 이 지역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갈 수 있을까 고민해왔다”며 “그 출발이 마을축제(2001년~현재)였고 마포의료사협과 마포희망나눔이 (지역으로 확장하는) 다른 길을 내며 가고 있다”고 했다. 홍정희씨는 “마포희망나눔에서는 지역 어르신들과 주민들이 만나는 ‘청춘쌀롱’을 주 2회 진행한다. 보통 어르신 복지라고 하면 가정을 방문하는 형태인데 청춘쌀롱은 어르신들을 밖으로 나오게 했다”며 “또 고립가구가 될 수 있어 취약층으로 꼽히는 50대 1인 생활자들이 풍물도 하고 춤도 출 수 있도록 활동 영역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박수경씨는 “이 지역에서 미산마을 공동체로 묶이지 않는 가게 중에서도 발달장애 청년들이 이용하는 ‘옹호가게’가 늘고 있는 걸 보면 경계를 넘어 함께 마을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현재 미산마을의 고민 현재 미산마을도 사회 변화 속에 여러 고민을 안고 있다. 미산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마을에서 활동하는 강다운씨(26)는 미산마을에서 ‘청년의 자리’가 많이 없다고 했다. 그는 “여기서 자란 친구들 보면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기도 하니까 20대 초반엔 미산마을을 많이 떠난다”며 “한편으론 이 지역에 공동육아를 하는 청년 부모 외에 1인 청년 가구가 굉장히 많다. 이들도 공동체가 필요한데, 미산마을의 기존 공동체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이 맞나, 그들 나름의 생활공동체를 별도로 만들어가는 게 맞지 않나 이런 고민을 한다”고 했다. 공동체 운영을 ‘대면 만남’을 기반으로 했던 터라, 미산마을도 코로나19 유행을 거치며 변화를 겪었다. 박수경씨는 “코로나19 때 대면 모임이 사라져서, 그때 ‘열린 공간이 갖는 힘’을 생각했다”며 “세대가 바뀐 영향도 있는 듯한데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했다. 공동육아를 하는 부모들의 세대가 바뀌면서 세대 간 문화적 차이가 있다. 또 마을에 오래 살아온 이들과 최근에 새로 유입된 구원 간 마을활동 참여에 관한 인식 차이도 있다. ‘저출생’이 가장 위기감으로 다가온다. 박수경씨는 “공동육아 어린이집들이 마을활동의 기초단위이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아이들이 줄어들면 굉장한 위기라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이경란씨는 “생협의 경영상 어려움이 커지고 있는 것도 동네 아이들이 줄어든 영향이 있다”며 “큰 변화를 맞는 시기인 것 같다”고 했다. 지난 11월 20일 미산마을극장에서 주민들이 진행한 30주년 이야기자리(포럼)의 주제는 ‘돌봄’이었다. 아이 돌봄뿐만 아니라 살면서 다양한 상호 돌봄, 그리고 요양원·요양병원에서 죽음을 맞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돌봄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협동조합 간 통합, 마을 자산화, 마을활동가 양, 새로운 돌봄공동체 설립 등 공동체의 지속을 위한 여러 대안을 모색할 때라고 활동가들은 말했다. 다만 누군가가 앞장서 특정 방향을 정해놓고 이끌거나, 어떤 공동체를 꼭 살리겠다는 명분을 두고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미산마을이 위기와 갈등을 겪으며 자연스럽게 흘러왔듯이,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런 위기감은 미산마을만의 고민도 아닐 것이다. 마을공동체는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이경란씨의 말이다.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은 참 많이 있다고 생각해요. 마을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이(1년에 약 3000명) 있는데, 그런 분위기가 확산하는 걸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주류의 흐름이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조금씩 관계망이 퍼지는 것을 봅니다. 그런 것이 희망이 되지 않을까요.”
표지 이야기
성미산마을 30년…자연서 편견 없이 자란 게 ‘좋은 어른’ 될 자산됐다
미산마을 30년…자연서 편견 없이 자란 게 ‘좋은 어른’ 될 자산됐다(2024. 11. 25 06:00)
2024. 11. 25 06:00 사회
지난 4월 6일 서울 마포구 산동 미산에서 미산마을 아이들이 손바닥 텃밭 만들기 활동을 하고 있다. 사단법인 ‘사람과 마을’ 제공 1994년 9월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국내 첫 협동조합형 공동육아 어린이집인 ‘우리어린이집’(현재 산동에 있음)이 문을 열었다. ‘육아’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가 제시한 방식과는 다른 보육·교육 방식을 고민했던 부모와 교사들이 만든 기관이었다. 이후로 30년, 공동육아 어린이집이 전국 곳곳(현재 67곳)에 생겨났다. 우리어린이집의 30년 역사는 마을공동체 ‘미산마을’의 역사이기도 하다. 미산마을은 우리어린이집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우리어린이집 아이들은 미산마을에서 자랐다. 30년이면 ‘한 세대’가 바뀌는 세월이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다녔던, 미산마을에서 자란 아이들은 어떤 어른이 됐을까. 먼저 협동조합형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관해 간략히 설명하면, 만 5세 이하 아동들을 돌보는 민간 보육기관(일부 공립)이다. 부모가 출자금과 조합비를 부담한 조합원으로서 어린이집 운영 주체로 활동한다는 점에서 다른 민간 어린이집들과 차이가 있다. 부모와 교사가 함께 교육 프로그램, 생활 원칙 등을 정한다. 자연 나들이를 통한 놀이 중심 활동, 사교육·선행학습 지양, 친환경 먹거리 제공 등을 원칙으로 한다. ‘터전’(어린이집 공간)에서 아이들과 교사·부모들이 평어(격식을 갖춘 반말)를 사용함으로써 수평적 관계를 지향한다. 공동육아 이야기를 들으면 누군가는 ‘용감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유별나다’고 한다. 어떤 이는 ‘시대 흐름에 못 따라간다’고도 한다. 최근 ‘초등 의대반’을 넘어 ‘유아 의대반’까지 생긴 현실을 반영한 평가 아닐까. 모두가 같은 길을 걸을 순 없다. 과도한 경쟁 풍토 속에서 자란 청소년·청년들은 여러 어려움을 겪는다. 아이들에게 어떤 돌봄과 교육을 제공할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공동육아로 자라온 이들의 목소리도 들어봄 직하다. ■“자연에서 자랐던, 편견 없이 자란 경험이 자산” 미산마을에서 공동육아를 통해 자란 20~30대 청년 7명을 지난 11월 9일과 18일, 산동의 한 카페에서 차례대로 만나 인터뷰했다. 지난 11월 18일 전화로 1명을 더 만났다. 미산마을은 ‘미산’(산동 위치)을 중심으로 한 도심 속 생활공동체로 공동육아가 뿌리이자 핵심이다. 미산 주변에 우리어린이집 외에도 4개의 공동육아 어린이집(협동조합형 참나무·미산·또바기 어린이집, 위탁 운영형 구립 미어린이집)이 있다. 초등학생 방과후 돌봄기관인 도토리마을방과후(1999년 설립), 초·중·고 대안학교인 미산학교(2004년 설립)도 협동조합형 공동육아기관이다. 지난 11월 9일 서울 마포구 산동 한 카페에서 국내 첫 협동조합형 공동육아 어린이집인 ‘우리어린이집’과 초등방과후 ‘도토리방과후’를 다녔던 청년들이 주간경향과 인터뷰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혜수씨, 권예림씨, 강한결씨, 손수연씨, 강한얼씨. 김향미 기자 청년들에게 ‘어린 시절 기억’과 ‘공동육아 경험이 삶에 미친 영향’에 관해 물었다. 만 0세 때부터 초등학교 고학년 때까지 우리어린이집·도토리방과후를 다녔다는 손수연씨(30)는 ‘미산’을 기억했다. “그때는 미산에서 살았다고 할 정도로, 매일 미산에서 하루를 다 보냈어요. 그 계절에만 만날 수 있는 식물, 동물 다 채집하고 다녔고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놀거리를 항상 찾았던 것 같아요.” 서울 도심이라고 해서 자연과 가까이 지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말한 자연에서의 경험은 ‘많은 시간’에 방점이 찍혀 있다. 수연씨는 미대 입시와 관련한 일화를 들려줬다. 수연씨는 한 대학 실기시험에서 입체도형 ‘구’가 주제로 제시되자 ‘쥐며느리’를 그려 합격했다고 한다. 남들보다 뒤늦게 미대 입시를 준비했기 때문에 기술적인 역량은 다소 부족했다는 수연씨는 “그 대학에 최종 합격하진 못했지만 내 삶에 녹아 있는 걸 표현했는데 (실기시험에서) 합격한 걸 보고 내 생각대로 표현하는 게 맞다는 확신이 생겼고, 이후 원하는 대학도 가게 됐다”고 했다. 놀이와 여행도 이들의 기억에 남았다. A씨(34)는 우리어린이집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1학년까지 도토리방과후를 다니다 이사를 했다. 그는 새로운 학교에 가니 ‘자신만 아는 놀이’가 많았다고 했다. 그는 “전래놀이를 많이 했고, 같은 놀이도 많이 변형해서 만들어 놀았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다른 지역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다닌 후 미산학교를 졸업한 강다운씨(26)는 “미산학교에서는 한 학기에 한 번씩 친구들과 여행을 간다. 도보여행도 가고 밀양 송전탑 투쟁 현장에 가서 감 수확하는 것도 도와드렸고, 이런저런 여행이 기억에 많이 남아 있다”고 했다. 우리어린이집·도토리방과후에 다닌 강한얼씨(30)는 “날마다 모여서 같이 밥 먹고 기차 타고 놀러 가고 터전이랑 마을에서 시장놀이도 자주 했다”며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양한 경험은 진로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줬다고 한얼씨는 말했다. 그는 일반고를 다니다 3학년 때 전학해 제빵을 시작, 현재는 제주의 한 베이커리에서 일하고 있다. “부모님은 거의 처음부터 공동육아를 하신 분들이고요. 제가 학교를 옮길 때도, 제주에서 혼자 살기로 했을 때도 반대가 없었어요. 어떤 선택을 하는 데 있어서 집안 분위기나 자라온 환경 자체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마찬가지로 10년 이상 공동육아 환경에서 자란 강한결씨(28)는 “어릴 때부터 장애가 있는 친구들과 같이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배려하는 걸 익혔던 부분이 좋았던 것 같다”며 “지금은 제빵 일을 하고 있지만 사회복지 분야로도 일해보려고 했는데, 편견 없이 자랄 수 있었던 경험이 좋았다”고 말했다. 공동육아기관 다수는 장애 통합 교육을 한다. 다운씨는 “아주 뿌리 깊은 곳에 공동체 의식 같은 게 있어서 어떤 문제를 마주쳤을 때 해결하는 방식에서도 개인과 공동체를 같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며 “다른 사람들과 어떤 사건이나 문제를 바라보는 게 다르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대학원에서 불교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권예림씨(28)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관해 말했다. 공동육아기관에서는 아이들이 친구의 부모나 교사를 부를 때 ‘별명’을 부르고 평어를 쓴다. 권예림씨는 “또래들을 보면 보통 어른이나 조직의 상사와 소통하는 걸 어려워하는데 저는 교수님이나 어른들과 소통할 때 조금 편한 부분이 있다”며 “공동육아 하면서 친구 부모님이랑 정말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그분들이 저에게 호의적으로 대해주는 경험을 하다 보니까 권위적인 문화에 덜 위축되는 것 같다”고 했다. ■“다르게 자라온 것에 ‘방황’도···친절한 어른 경험” 이들은 공동육아에서 ‘졸업’한 뒤 중·고등학교 시기를 어떻게 보냈을까. 대안학교를 가지 않는 한, 학교에 다니면 학업 스트레스를 피할 길이 없었다. 이 시기를 건널 때 경험은 사람마다 달랐다. 부모님이 마을활동가로, 아기 때부터 공동육아 환경에서 큰 박혜수씨(27)는 “중학교 때까지는 큰 차이가 없었는데 일반계 여고를 다닐 때는 많이 방황했다”며 “친구들과 생각하는 부분이 다르고 학업적으로도 스트레스를 받아 부모님을 원망했던 것 같다”고 했다. 한결씨도 고등학교 때 비슷한 고민을 했다고 했다. 혜수씨는 다만 인이 된 후 스스로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고 되돌아볼 수 있었다. “‘소녀상 지킴이’ 활동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이런 환경에서 자라서, 되게 용기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부당한 것에 대해서도 말할 수 사람이 됐다고 생각했어요. 그냥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마을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A씨는 중·고등학교 시기 대안학교를 다녀 대학 입시 압박을 크게 받진 않았다고 했다. 다만 그는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면서 공인 영어시험 점수가 필요해 어학원을 다니면서 ‘기한 내 달해야 할 목표를 정해놓고 짜인 틀대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는 식’의 공부를 처음 해봤다. ‘한 번 죽어라 해보자’ 하는 마음을 먹기조차 어색하고 힘들었다”며 “그래서 제가 자라온 환경이 ‘울타리’라면 보호하는 울타리인지, 가두는 울타리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고 했다. 이들이 부모가 되면 공동육아를 선택할까. 한결씨는 “나중에 아이를 낳는다면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보내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실적으로 아이를 키우는 환경이 점점 뭔가 엄청나게 빨리 변하고 있어서, 옳고 그른 것을 정할 순 없지만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고민을 한다”고 했다. 다운씨는 “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 가끔 ‘우리가 어른이 돼서 아이를 낳더라도 부모들만큼 돈을 벌지 못하면 미산학교에 보낼 수 있을까’란 우스갯소리도 했다”고 했다. 공동육아기관은 공공 보육·교육기관과 비교해 추가 비용이 많다. 어린이집에서 교사 1명이 맡는 아동의 수는 국공립보다 훨씬 적고, 친환경 먹거리로만 식사와 간식을 제공하기에 인건비, 식재료비가 많이 든다. 우리어린이집이 생길 때 6세였던 B씨(35)는 25년간 미산마을에서 살았다. 결혼 후 미산마을을 떠난 B씨는 현재 만 3세 아이를 둔 엄마다. 아이를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보낼까 고민하다 “맞벌이로서 부모 참여 활동이 많아 어렵겠다”고 생각해 보내지 않았다. 공동육아를 두고 지금도 계속 고민한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아이가 그냥 원에 가는 게 아니라 어른들, 친구들과 교류하면서 같이 커갈 수 있는 동지가 생긴다는 점이 좋은 것 같아요. 아이에게 그런 집단을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미산마을과 같은 공동육아 환경에서 자라면 부모와 교사뿐만 아니라 다양한 어른과 ‘비스듬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서로의 가정을 방문해 함께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품앗이 돌봄을 뜻하는 ‘마실’이라는 문화가 있기에 가능하다. 부모 아닌 다른 어른과 관계를 맺은 경험은 현재까지도 힘이 된다고 이들은 말했다. 혜수씨는 “공동육아 환경에서는 ‘존재만으로도 빛난다, 예쁘다’고 말해주는 어른들이 있다”며 “부모가 없어도 무너지지 않고 관계를 유지하고 자기만의 사회를 꾸려갈 수 있는 기반이 있다는 것 자체가 든든하다”고 했다. 1994년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문을 연 국내 첫 협동조합형 공동육아 어린이집인 ‘우리어린이집’(현재 산동에 있음)의 개원 초기 아이들의 놀이 활동 모습(왼쪽)과 최근 놀이 활동 모습. 우리어린이집 제공 수연씨와 한얼씨는 나중에 아이가 생긴다면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자녀를 보낼 것이라고 했다. 수연씨는 “제가 경험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경험인지 아니까 보내고 싶다”며 “호주에 갔을 때 접한 육아 방식이 제가 커온 것과 같더라. 맨발로 아이들이 산에서 놀 수 있는 환경이었다. 공동육아가 아니면 해외에서 키우고 싶다”고 했다. 한얼씨는 “제가 마을에 있을 땐 활동적인 편이었는데 일반고에 가면서 소심한 격으로 바뀌었는데 ‘이곳에서 자유로웠구나’란 생각을 했다”며 “제주에서 마을 모임을 찾고 싶고, 제가 제주에 공동육아 환경을 만들어내고 싶은 생각도 있다”고 했다. 청년들은 ‘좋은 어른의 상’을 그릴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2001년 미산 개발 계획이 알려지면서 우리어린이집 부모들을 비롯해 미산마을 주민들은 미산 지키기 운동을 벌였다. 산에 텐트를 치고 숲속 공연을 하며 산을 지켰다. 이때 어린이로 미산에 있었던 청년들은 “어른들이 우리의 터전을 지켜주기 위해서 힘을 합쳐준다는 게 감동적이었다”고 했다. 혜수씨는 “아이들에게 ‘너희는 위험하니 오지 마’라는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함께 해결하는 방법을 알려준 것이고, 아이들을 배제하는 게 아니고 한 명의 인간으로서 대해준 것이다. 그런 친절한 어른이 돼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아직도 자유가 필요하다” 지금 자녀를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보내는 부모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또바기 어린이집 부모 조합원인 ‘쌀밥’(별명)은 자녀 2명을 이 어린이집에 보내고 있다. 첫아이를 임신하고 직장동료의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우연히 공동육아 게시물을 봤다. 그는 “아이를 기관에 보낸다면 저렇게 자연에서 뛰노는 곳에 보내고 싶다고 생각”했고 “교사 대 아동 비율과 마당이 있는 터전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아이가 매일 나들이를 가서 뛰놀고 자연과 가깝게 지내고, 다양한 어른들을 만나고 어른과 어른의 관계를 모델링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아요. 아이가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다른 부모 조합원 ‘호두’(별명)도 자녀 2명을 또바기 어린이집에 보내고 있다. 그는 “교육학 전공할 때 한 논문에서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접했고, 아이를 낳고는 인지교육 없는 놀이중심이라는 부분이 마음에 들어 이 기관을 선택했다”고 했다. “공부하면서 한국 공교육의 여러 문제를 마주했는데, 특히 자기 주도 학습능력이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여섯 살인 첫째 아이의 행동을 관찰해보면 스스로 학습하고 온전히 체화하는 게 보여요. 그게 놀이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서울로 인구가 몰리고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던 1970~1980년대 영·유아기 아동 돌봄을 위한 사회적 자원은 사실상 공백 상태였다. 당시 달동네 ‘야학’에서 공동육아의 싹이 텄다. 교육운동가, 학생들은 1978년 ‘어린이걱정모임’을 만들고 교사 양을 위해 해송보육학교를 만들었다. 이곳을 나온 노동자 출신 교사들이 1980년 서울 관악구 난곡동 철거민촌에 ‘해송유아원’을 설립해 운영한다. 그러나 1982년 새마을유아원법이 만들어지면서 어린이집과 탁아소를 제도권으로 강제편입, 해송유아원도 1984년 문을 닫는다. 이들은 같은 해 종로구 창신동에 ‘해송 아기둥지’를 설립하고 아이들이 도심 속 자연에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나갔다. 1990년 부모가 아이를 맡길 데 없어 문 잠그고 일하러 나간 사이 집에 불이 나 남매가 숨진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1991년 영유아보육법이 만들어졌다. 해송 아기둥지를 만든 교육운동가들도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공동육아 연구회’를 만들었다. 이 연구회에서 협동조합형 공동육아 어린이집이 시작됐다. 해송 아기둥지·공동육아 연구회 설립 구원이면서 우리어린이집의 초대 원장을 지낸 정병호 사단법인 ‘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 이사장(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은 지난 11월 12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그때 소수의 용감한 부모들과 교사들이 선례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정병호 교수는 “정부 누리과정(만 3~5세 공동 교육과정)을 만들 때 공동육아 모델을 참고하면서 일반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도 숲나들이를 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아이들을 자연 속에서 함께 키운다는 의미에서 아이들을 해방시켰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정 교수는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또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자유롭게 다양한 경험을 해야 공감 능력이나 지능 발달도 이뤄지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고 했다. 그는 “한국 교육 산업계를 비롯한 지배문화가 한국 부모들을 ‘소비자로서의 부모’로서 행동하도록 굉장히 압박하고 있다”고 했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고 싶어도 상대적으로 높은 비용은 진입 장벽으로 작용한다. 또 부모 참여를 원칙으로 해서 부모의 노동시간이 길고 불규칙하거나 한부모 가정이면 망설일 수밖에 없다. 정병호 교수는 “공동육아 어린이집마다 운영 특이 다 다르기도 하고 그 안에서 배제하지 않고 함께 가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며 “이혼 가정이 늘고 새로운 가족 형태가 나오는데 더욱 공동육아가 필요하다”고 했다. 협동조합형이 아닌, 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 등이 위탁운영하는 국공립 어린이집을 이용해볼 수 있다. 다만 아직 국공립형은 소수다. 무엇보다 사회 분위기가 아이들에게 학습만 강권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고, 최근 저출생으로 아이들이 줄면서 공동육아 어린이집들이 설 자리가 넓지는 않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만든 다음에 부모들이 자발적으로 초등방과후를 만들었습니다. 마을공동체가 됐고요. 미산뿐만 아니라 대전 뿌리와새싹 어린이집 같은 곳에서도 마을을 만든 사례가 있어요. 거기서 희망을 보죠. 30년 전에도 ‘한국 부모들은 아이를 안전하게만 키우고 싶어하고 학업을 신경 쓰니까 이런 교육은 안 된다’ 이런 말을 했어요. 그래서 해보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게 가능하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선택을 한 부모를 사회가 달달 볶지요. 그러니 같이 갈 공동체가 중요할 수밖에요.”
표지 이야기
[박수현의 바닷속 풍경](57) 인도네시아 부나켄-암컷? 수컷? 성을 바꾸는 ‘니모’ 흰동가리
[박수현의 바닷속 풍경](57) 인도네시아 부나켄-암컷? 수컷? 을 바꾸는 ‘니모’ 흰동가리(2024. 11. 20 06:00)
2024. 11. 20 06:00 문화/과학
2018년 인도네시아 해양국립공원인 부나켄을 찾았다. 그곳에서 이웃한 말미잘에 보금자리를 튼 흰동가리들을 만났다. 흰동가리는 농어목 자리돔과에 속하는 물고기로 전 세계에 27종이 있다. 몸에 새겨진 빨강 또는 주황과 흰색의 배열이 광대 분장처럼 보여 서구에서는 클라운피시(clownfish)라고 한다. 말미잘(sea anemone)과의 공생으로 아네모네피시라 불리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몸을 가로지르는 흰색, 세로줄을 특징화해 흰동가리라 한다. 흰동가리는 ‘니모’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2003년 개봉한 디즈니&픽사의 애니메이션 영화 <니모를 찾아서> 때문이다. 주인공 니모란 이름은 쥘 베른의 소설 <해저 2만리>에 등장하는 주인공 네모 선장에서 따왔다고 한다. 영화가 흥행에 공하자 전 세계 관상어 시장에서 흰동가리 수요가 폭증했다. 현재 관상어 산업의 세계 시장 규모는 2020년을 기준으로 약 50조원에 육박하고 있으며 한국 시장 규모은 5000억원 정도라고 한다. 흰동가리는 얕은 수심의 산호초 지대에서 말미잘과 공생한다. 대부분 말미잘 하나에 서너 마리가 함께 살고 있다. 이들은 철저한 모계 중심으로 덩치가 가장 큰 녀석이 암컷이다. 암컷이 죽으면 수컷 중 한 마리가 암컷으로 바뀐다. 수명이 13년 정도인 것으로 알려진 흰동가리들은 주로 열대와 아열대 해역에서 살아가는데 제주도 남쪽 연안에서도 발견된다.
박수현의 바닷속 풍경
김동연 “성병관리소 문화유산 지정, 동두천시 동의 없이는 못해”
김동연 “병관리소 문화유산 지정, 동두천시 동의 없이는 못해”(2024. 11. 08 14:35)
2024. 11. 08 14:35 사회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지난해 3월 21일 경기 수원시 경기도 청사 집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일 선임기자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철거 위기에 놓인 동두천시 병관리소를 동두천시 동의 없이 문화유산으로 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병관리소는 1960~1990년대 한국 정부가 미군과 기지촌 여들의 매매를 조장·방조하면서 병 치료 명목으로 여들을 강제 수용하던 장소다. 김 지사는 경기도 시민 1만411명이 동두천시 옛 병관리소를 경기도 문화유산으로 지정해달라고 낸 청원에 대해 11월 8일 ‘경기도가 임의로 지정하기는 어렵다’는 취지로 답변했다. 김 지사는 답변에서 “근현대문화유산보존법에 따르면 1973년 완공된 동두천 옛 병관리소 건물은 문화유산 지정 대상이 아닌 등록 절차를 거쳐야 하는 등록 대상”이라며 “등록신청서에 소유자 동의서를 첨부하도록 규정돼있어 건물 소유자인 동두천시의 신청이 선행돼야 한다”고 했다. 김 지사는 이어 “해당 법에서도 도 직권에 의한 임시 등록은 가능하도록 문을 열어두고 있지만, 소유자인 동두천시의 의견 청취는 필수”라며 “병관리소의 소유자이자 관리주체인 동두천시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김 지사는 동두천시가 실시한 주민 여론조사에서 철거 찬 의견이 60.4%라면서 “이런 상황에서 경기도는 동두천시, 시의회,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이를 최대한 반영될 수 있도록 긴밀하게 협의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또 “동두천시의 동의를 전제로 디지털 영상기록 및 기억 공간 확보, 기억의 표지석 설치 등 중재안을 제시하면서 갈등 조정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경기 동두천시 병관리소의 모습. 이혜리 기자 병관리소는 한국 전쟁 이후 남북 분단, 가난 속에서 한국 정부가 한·미 동맹과 국가안보를 앞세워 여들을 착취한 장소로 평가된다. 대법원은 2022년 9월 국가가 기지촌 여들에게 불법행위를 저질렀다고 처음 인정하고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시민들은 병관리소를 여 인권을 침해한 역사적 공간으로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동두천시는 관광지 개발을 위해 이 곳을 철거하겠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시민들로 구된 ‘동두천 옛 병관리소 철거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는 이날로 73일째 병관리소 앞에서 천막 농을 벌이고 있다. 경기도는 이재명 도지사(현 더불어민주당 대표) 때인 2020년 5월 전국 최초로 기지촌 여 지원 조례를 만들었지만, 김 도지사는 철거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김대용 공대위 대표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김 도지사의 답변은 경기도가 기지촌 피해 여들의 현실이 어떤지 살펴보거나, 미군 기지 문제에 대한 역사적 고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책임하게 낸 것”이라고 했다. 김 대표는 “소유자 동의가 없어도 도가 문화유산 임시지정을 할 수 있게 한 법의 취지는 해당 장소가 역사적으로 보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제대로 따져보자는 것”이라며 “(의견이 대립하는) 당사자들 외에 학자 등 전문가들이 조사해서 역사적 가치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인데 그런 절차가 없었다”고 했다. 누가 왜, 여 착취의 역사를 지우려 하는가[주간경향]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 8번지. 수도권 지하철 1호선 소요산역에서 불과 400m 떨어진 이곳엔 ‘병관리소(낙검자 수용소)’라고 불리는 2층짜리 건물이 있다. 수풀로 뒤덮이고 팻말도 없어 멀리서는 이 건물이 있는지조차 알기 어려운, 그런 곳이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동두천시에 병관리소 건물이 남아 있다. 병관리소는 1960~1990년대...https://www.khan.co.kr/national/incident/article/202410200900021
“지옥 같던 성병관리소···그걸 부수면 되나요”
“지옥 같던 병관리소···그걸 부수면 되나요”(2024. 10. 21 06:00)
2024. 10. 21 06:00 사회
병관리소 피해 여병 아닌데도 주사 맞혀” 증언 “국가 책임” 판결에도 사과 없어…역사 증거로 남겨야 2022년 9월 29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앞에서 미군 기지촌 여들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대법원 판결을 환영하고 있다. 이날 대법원은 국가가 주한미군 기지촌 매매를 조장·관리해 여들의 인권을 침해한 데 대해 배상하라는 판결을 확정했다. 문재원 기자 “지옥 같았다.” 45년 전 경기 동두천시 소요산 입구의 병관리소(낙검자 수용소)에 강제 수용됐던 일주일의 시간을 여 A씨(66)는 이렇게 표현했다. 지난 10월 15일 기자와 만난 A씨는 동두천시가 국가 폭력과 여 착취의 현장인 병관리소를 철거하려는 것에 대해 분노했다. 그는 “그곳에서 있었던 것도 억울한데 하나 남은 병관리소를 왜 없애느냐”며 “달러벌이를 해준 미군 위안부를 이제와 무시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A씨는 스물한 살 때인 1979년 지인과 동두천시에 놀러갔다가 병관리소에 끌려갔다. 갑자기 남들이 다가오더니 검진증을 요구했다는 게 A씨의 말이다. A씨가 검진증은 없고 신분증은 집에 두고 왔다고 하자 남들은 그를 승합차에 태워 병관리소로 데려갔다. A씨는 당시 미군과 결혼해 아기가 있었고 병에 걸린 상태가 아니었지만 병관리소에서 페니실린 주사를 맞았다고 했다. 그가 말했다. “검진도 안 했어요. 병이 없었는데 페니실린을 놨어요. 왜 주사를 놔주는지 몰랐지만 다들 주사를 맞는 거예요. 기운을 못 차리겠더라고요. 세상에서 제일 아픈 게 아기 낳을 때라고 하죠. (고통이) 그것보다 더한데, 그렇게 몇 시간을 아팠어요.” A씨는 “언니, 이모들이 많았다”며, 그중에서도 특히 페니실린을 맞고 기절했던 한 언니가 기억난다고 했다. A씨는 “(정신이 없는 듯) 이마를 계속 (쇠에) 찧어서 죽는 줄 알았다”며 “달걀과 콩나물국이 있어 이거라도 먹으라고 했는데 조금 먹더니 막 울어서 같이 울었다”고 했다. 1995~1997년 보건소에서 근무한 한 의사는 미군 위안부 피해 여들이 낸 국가배상 소송 재판에서 페니실린 투약의 위험을 증언했다. 이 의사는 “(페니실린은) 저렴하고 효력이 강력해 각광을 받기는 했지만 갖은 쇼크의 원인이 되는 부작용도 있는 약이었다”며 “그때도 이미 쇼크사 때문에 의사들로서는 회피하는 약이었는데, 그 약을 썼다”고 했다. 일각에선 위안부 여들이 돈벌이로 매매한 것 아니냐며 인권 침해를 부정하는 주장도 편다. 그러나 법원은 설령 위안부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한국 정부가 매매를 적극적으로 정당화·조장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강제 병 치료를 한 것이 위법의 핵심이라고 했다. 군사동맹의 공고화, 국가안보 강화, 매매 활화를 통한 외화 획득이라는 국가의 목적 달을 위해 위안부 여들은 도구가 됐다는 것이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도 과거 논문에서 “기지촌 형 과정은 식민지배자의 피식민지 여에 대한 지배, 군대 위안소의 유지, 남 욕의 안전한 배출과 병 통제, 외화벌이와 국가안보를 위한 것이었다”며 “단순한 인의 적 거래 관계나 적 자기 결정권의 논리로 접근하기 힘들다”고 했다. A씨는 병관리소에서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이 힘들지만 말해야 한다고 했다. 병관리소 철거는 과거뿐 아니라 미래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의미에서다. A씨가 말했다. “제발 병관리소 안 없애게 해주세요. 다음 세대에 또 모르는 거예요. 이스라엘도, 러시아도 전쟁을 하잖아요. 우리나라가 전쟁 안 난다는 보장이 없어요. 그러면 또 여들은 그런 일을 당할 수가 있어요. 절대로 잊지 못해요. 제가 병관리소의 증인이에요. 예전의 젊은 여들이 병 주사를 맞고 죽었다는 것을 증거로 남겨놔야죠. 정부가 그걸 때려부수면 되나요?” ‘보존이 미래’인데…여 착취의 역사 왜 지우려 하는가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 8번지. 수도권 지하철 1호선 소요산역에서 불과 400m 떨어진 이곳엔 ‘병관리소(낙검자 수용소)’라고 불리는 2층짜리 건물이 있다. 수풀로 뒤덮이...https://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dept=115&art_id=202410210600031&nv=stand&utm_source=naver&utm_medium=portal_news&utm_campaign=newsstand_3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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