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총 8,042 건 검색)
- 청와대 ‘세월호 7시간 문서’ 공개될 수도
- 2025. 01. 09 21:20사회
- ... 한다”는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다시 심리하라며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파기환송심에서 ‘세월호 7시간 문서 목록 등’이 외부에 공개될 수 있는지 다시 판단을 받게 됐다. 2017년 황교안 당시...
- 대법 “세월호 7시간 문서 비공개 결정 다시 판단해야” 파기환송
- 2025. 01. 09 11:13사회
- ... 한다”는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다시 심리하라고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파기환송심에서 ‘세월호 7시간 문서 목록 등’이 외부에 공개될 수 있는지 다시 판단을 받게 됐다. 2017년 황교안 당시...
- 10년 전 아픔 반복되다니…새해 첫날 제주항공 유가족 어루만진 세월호 가족
- 2025. 01. 01 14:43사회
- ... 2024년에 발생한 또 다른 참사에 비통한 얼굴이었다. 세월호 가족들은 이날 아침 목포 신안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리는 차례를 지낸 뒤 제주항공 참사 합동분향소를 찾았다. 지난 10년간 지내온 신년...
- “세월호·이태원 참사 때와 뭐가 다르냐”…이번에도 유족들은 동분서주 뛰어야만 했다
- 2024. 12. 30 17:03사회
- ... 이동하기 위해 3~4시간씩 대기했다. 유족들은 과거 참사를 떠올렸다. 한 20대 남성은 “이게 지금 세월호·이태원 참사 때랑 뭐가 다르냐”며 “그 때보다 나아진 게 하나도 없다. 또다시 트라우마를 겪게...
-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스포츠경향(총 1,498 건 검색)
- [인터뷰] ‘목화솜 피는 날’ 박원상·우미화 “세월호 유가족 役, 마음 무거웠죠”
- 2024. 06. 03 15:00 연예
- 영화 ‘목화솜 피는 날’ 신경수 감독, 우미화, 박원상, 조희봉.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죄책감을 가질 단어 하나, 세월호. 바다 한가운데에서 침몰한 세월호 속 꽃같은 아이들이 떠난지 벌써 10주기가 됐다. 유가족과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차곡차곡 쌓아 만든 영화 ‘목화솜 피는 날’(감독 신경수)이 그 미안한 마음과 희망을 가득 담아 그리운 아이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어제 제 아내도 동네 친구들과 단체로 영화를 보고 왔는데, 영화를 보고 미안해졌다고 하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다들 가진 마음일 거예요. 그래서 이 영화가 만들어진 거고, 이 작품의 의미인 거죠. 미안함을 넘어 기억하고, 이젠 다시 제자리를 찾아오려는 유족들의 이야기가 ‘목화솜 피는 날’의 키워드일 거예요. 우리가 매일같이 세월호를 품고 살 순 없어도 중간 중간 기억을 리셋할 수 있게, 이 영화가 그런 구실을 하길 바랍니다.”(배우 박원상) 배우 박원상. “지난해 이 프로젝트가 진행된다고 했을 때 깨달았어요. 저도 당시를 목격했고 미안했고 슬퍼했는데, 어느덧 일상으로 돌아와 살고 있었다는 걸요. 미안함을 다시 느꼈고요. 우리가 잊고 있던 부분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 계기가 됐어요. 또 이 작품을 찍으면서 유가족인 동수 부모님도 만났는데, 그분들이 그러더라고요. ‘기억은 제가 살아가는 힘이고 삶이에요’라고요.”(배우 우미화) 스포츠경향이 최근 만난 배우 박원상과 우미화는 ‘목화솜 피는 날’의 의미를 몇번이고 되새겼다. 그러면서 과거에 갇히지 않고 앞으로 함께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의 방법에 대해서도 저마다 생각을 들려줬다. 영화 ‘목화솜 피는 날’ 한 장면. 연기에 대한 무게감…“유가족을 연기하다니, 감히 제가요” ‘목화솜 피는 날’은 10년 전 사고로 죽은 딸과 함께 사라진 기억과 멈춘 세월을 되찾기 위해 나선 가족 ‘병호’(박원상)와 ‘수현’(우미화)의 가슴 뜨거운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두 사람이 배우로서 유가족을 연기한다는 건 그 무게감이 남다를 터였다. “짐작하는 바와 다르지 않았어요. 유가족을 연기하면서 ‘이 감정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 감히 내가 해낼 수 있을까’란 생각에 어려웠고 마음이 무거웠어요. 유가족의 지난한 10년을 다 담아낼 순 없으니 꾹꾹 바닥에 누르고 견디는 모습밖에 표현할 순 없겠구나란 생각이 들었죠. 또 ‘우미화’의 개인적인 눈물이 담기면 안 되겠다고 느껴 그 점을 경계하려고 했어요.”(우미화) “처음 이 작품이 제안왔을 땐 세월호란 소재 때문에 밀어내고 싶다는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어요. 내게 온 인연이니까요. 다만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감당할 수 있을까. 굉장히 여러 감정이 섞이더라고요. 대본을 더 꼼꼼히 보게 됐고요. 이 작품은 세월호 10주기를 기리는 것으로만 머물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첫 리딩날 한 장소에 모인 배우들을 봤는데, 그들의 얼굴을 보니 이내 ‘아, 할 수 있겠다’란 생각이 들었어요. 다 비슷한 생각으로 십시일반 모인 거라는 걸 느꼈거든요.”(박원상) 배우 우미화. 작품의 비하인드 하나 중 놀라운 건 이 작품을 촬영 8회차만에 완성했다는 점이다. ‘육룡이 나르샤’ ‘소방소 옆 경찰서’ 등을 히트시킨 신경수 PD의 영화 데뷔작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너무 놀라운 게 신경수 감독이 ‘소방서 옆 경찰서 그리고 국과수’ 촬영을 마친 뒤 일주일 만에 목포로 내려가서 8회차를 찍었다는 거예요. 지치고 힘들었을 텐데, ‘목화솜 피는 날’ 촬영현장에선 에너지가 더 올라왔더라고요. 늘 세월호 관련한 이야기를 담고 싶다고 했었는데, 그걸 할 수 있게 돼 힘이 난 모양이었어요. 피곤했겠지만 그런 기색 없이 에너지가 넘쳤죠. 그 덕분에 현장도 좋은 기운이 넘쳐났고, 우리도 피곤함 없이 촬영에 집중할 수 있었죠.”(우미화) 박원상은 이 작품으로 세상에 바라는 바도 명확해졌다. “목포 신안의 야적처럼 올라가있는 세월호 선체가 하루라도 빨리 제자리를 찾아갔으면 좋겠어요. 외면한다고 해서 잊혀지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10년, 20년이 흘러도 잘 보존해서 기억했으면 하고요. 그래야 벌어지지 말아야 할 일이 벌어졌을 때 과거처럼 말도 안 되는 시행착오를 더 이상은 겪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고든 책임져야할 사람들이 자기들이 필요한 것만 바라보면 안 되는데, 괜히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거나 벌어지면 안되는 일들이 10년간 계속 일어났고요. 이 작품 하나로 잘못된 걸 싹 다 수정할 수 없겠지만 이게 마중물이 되어서 또 다른 세월호, 이태원 사고 관련 영화들이 나온다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박원상) ‘목화솜 피는 날’은 전국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 인터뷰
- “기억하겠습니다” 조정석·박하선 등, 세월호 참사 10주년작 ‘목화솜 피는 날’ 응원
- 2024. 05. 23 10:42 연예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10년 전 사고로 죽은 딸과 함께 사라진 기억과 멈춘 세월을 되찾기 위해 나선 가족의 가슴 뜨거운 이야기를 그린 영화 ‘목화솜 피는 날’이 지난 5월 22일 개봉한 가운데, 셀럽들의 뜨거운 성원이 담긴 강력 추천 영상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영화 ‘목화솜 피는 날’을 개봉에 앞서 먼저 만나본 스타들은 하나같이 붉은 눈시울을 한 채 극장을 나섰다. 보이그룹 2PM의 멤버이자 배우 황찬성은 “이야기가 따뜻하고, 가슴 뜨겁게 만드는 영화다”라며 ‘목화솜 피는 날’이 전하는 뜨거운 이야기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배우 조정석은 “어느덧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는 게 놀랍다. 감명 깊게 봤다. 많이 사랑해 주시면 좋겠다”라며 영화를 향한 응원을 부탁했다. 배우 고창석은 “많은 분들이 ‘목화솜 피는 날’을 보시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지켜봤으면 한다”라며, 배우 정혜성은 “꼭 극장에 와서 봐주셨으면 한다. 잊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다”라며 세월호 참사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배우 이일화는 “나도 한 아이의 엄마로서, 가슴이 아팠다” 라며 영화 ‘목화솜 피는 날’이 관객들에게 위로와 따뜻함을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이들뿐 아니라, 배우 박하선, 공승연, 변요한, 최무성, 이준혁, 서호철, 홍서준, 윤주, 강서하 등이 ‘목화솜 피는 날’을 향한 응원을 전해왔다. 이처럼 수많은 셀럽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열띤 응원을 전한 영화 ‘목화솜 피는 날’은 세월호 참사 10주기인 2024년, 참사를 잊지 않고 애도하기 위한 영화 프로젝트 ‘봄이 온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영화다. 극 영화 중 유일하게 목포신항에 위치한 실제 세월호 선체 내부에서 촬영이 진행되었으며, 이외에도 안산, 목포, 진도 등 참사와 연관이 있는 세 곳의 로케이션으로 이야기를 더욱 리얼하게 담아냈다. 박원상, 우미화, 최덕문, 조희봉 등 베테랑 배우뿐 아니라 실제 유가족으로 구성된 극단 ‘노란리본’, 진상규명을 위해 힘쓰는 활동가들과 자원봉사자들이 배우로서 극에 참여해 더욱 진솔한 감정을 전달한다. 대한민국 스타들의 열띤 응원 속에 극장가에 깊은 울림을 전하는 영화 ‘목화솜 피는 날’은 전국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 “잊지 않길” 세월호 참사 10주기 프로젝트 ‘목화솜 피는 날’ 비하인드
- 2024. 05. 20 10:02 연예
- ‘목화솜 피는 날’ 포스터 세월호 참사 10주기 프로젝트 영화 ‘목화솜 피는 날’의 제작진이 제작 비하인드를 공개했다. 10년 전 사고로 죽은 딸과 함께 사라진 기억과 멈춘 세월을 되찾기 위해 나선 가족의 가슴 뜨거운 이야기를 그린 영화 ‘목화솜 피는 날’은 세월호 참사 10주기, 사건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이들의 소중한 마음이 모여 탄생한 작품이다. 영화는 사려 깊게, 그러면서도 진솔하게 세월호 참사를 이야기한다. 잠수사들이 차가운 바닷속에서 아이들을 건져 올리는 모습을 촬영한 영상들은 이번 세월호 참사 10주기 프로젝트에 단 한 컷도 사용되지 않았다. 참사 이후 10년이 지난 만큼 많이 잊힌 이야기를 다시 상기시키기 위해 자극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일란 총괄 PD는 아직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며, 여전히 사랑하는 이를 잃은 고통에 아파하는 유가족들의 마음을 헤아려 자극적인 장면들을 최대한 배제하고자 했다고 전했다. 영화 ‘목화솜 피는 날’을 통해 첫 스크린 연출을 맡은 신경수 감독은 처음 영화 작업을 제안받고, 대한민국의 창작자로서 응당 거절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가 고민 없이 도전할 수 있었던 한 가지 포인트는 바로 ‘세월호 선체 내부 촬영’이었다. 지금까지 몇몇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세월호 내부 모습이 세상에 공개되기는 했지만, 극 영화 중 세월호 안에서 촬영된 영화는 단 한 편도 없었다. 감독은 “세월호 참사 10주기 프로젝트의 기획과 제작에 (사)4.16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가 함께 하면서, 많은 이들이 세월호 참사를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는 모두의 마음이 모여 촬영을 가능케 했다”라며 소감을 전했다. 더불어 감독은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2014년부터 미디어 위원회로 활동해온 연분홍치마의 10년이 이 촬영을 가능케 했다” 라며 10년간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운동의 과정을 묵묵히 지켜온 미디어 활동가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건넸다. 10년의 세월이 흐른 만큼 부식된 세월호가 더 이상 촬영에 쓰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감독은, 세월호의 내부를 담은 마지막 영화가 ‘목화솜 피는 날’이 된다는 사실에 심혈을 기울여 그 안에 켜켜이 쌓인 감정들을 담아내고자 했다고 전했다. (사)4.16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가 공동 제작 주체로서 ‘목화솜 피는 날’에 참여하면서, 극단 ‘노란리본’ 소속 배우들이 직접 영화에 출연해 눈길을 끈다. 세월호 유족들의 연극치유모임에서 출발한 극단 ‘노란리본’은 참사로 아이를 잃은 유가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경수 감독은 “‘목화솜 피는 날’을 준비하며 처음으로 극단 ‘노란리본’에 대해서 알게 됐다. 이 영화의 여백을 채워줄 분들이 있다면 바로 ‘노란리본’ 어머님들이라고 생각했다”라며 함께해 준 배우들을 향한 감사를 전했다. 최덕문 배우는 “극 중에 유가족들의 내부 갈등을 말리기 위해 내가 그만하라고 악을 쓰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실제 유가족분이 뒤에서 나지막이 그만해, 단 한마디를 하셨는데 큰 울림이 왔다. 정말로 멈춰야 할 것 같고, 이 갈등을 해소하는 제동 장치로서 기능하는 느낌이었다” 라며 함께 한 배우들의 진심 어린 감정 표현을 향한 극찬을 전했다. ‘목화솜 피는 날’은 영화 곳곳에서 세월호 참사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진도의 어민들의 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촬영 스태프들이 탔던 배는 실제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탑승해 사고 해역까지 오갔던 배로 극 중 진도 어민 ‘기성’(조희봉)의 모티브가 된 선장이 직접 운전했다. 특히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이 이어진 세월호 내부에서 발견된 유류품을 씻어내는 장면은 유가족이 소품 준비 과정에서부터 꼼꼼하게 자문에 참여해 현실감을 더했다. 이처럼 실제 참사를 눈앞에서 겪은 이들의 소중한 참여로 완성된 ‘목화솜 피는 날’에 어떤 극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리얼한 묘사라는 관객들의 호평이 이어지고 있어 영화를 향한 기대감이 증폭되고 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 프로젝트의 마지막을 장식할 단 하나의 영화 ‘목화솜 피는 날’은 오는 5월 22일 개봉해 관객과 만난다.
- [SNS는 지금] ‘세월호 10주기’ ★들의 추모 물결 “10년이 지나도 잊지 않아”
- 2024. 04. 16 16:17 연예
- 박보영. 솔비. 도영. 각 인스타그램 캡쳐. 어느새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로 인해 304명의 생명이 별이 됐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 상당수의 국민들은 여전히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추모하고 있다. SNS에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해시태그를 사용하며 희생자를 애도하고 평안을 기원하는 게시물이 이어진다. 어떤 이들은 노란 리본 사진을 올리며 가슴 아픈 일을 기억했다.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안긴 사건에 대한 추모는 연예계에서도 10년째 이어지고 있다. 배우 박보영은 매년 4월 16일이 되면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스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박보영 인스타그램 그는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 종영 인터뷰에서 세월호를 언급하며 소신을 드러내기도 했다. 당시 박보영은 “실제 도봉순처럼 힘이 세다면 세월호를 들어 올리고 싶었다. 인터넷에서 봤는데 세월호를 잊을 수 없는 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고 발언했다. 이후 지속적으로 추모 물결에 동참한 박보영은 올해도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노란 리본 사진을 올리며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기억했다. 이승환 인스타그램 가수 이승환 역시 10년의 세월이 흐른 사건을 추모했다. 그는 16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세월호참사10주기 #기억은힘이세지’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한 장의 사진을 게시했다. 사진에는 ‘잊혀질 수 없으니 그리움도 어렵다. 마음에도 못 있고 하늘에도 못 있다. 가만가만가만히거기있으라. 가만가만가만히거기있으라’라는 글이 적혀있다. 소신껏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알려진 이승환은 지난 2019년, 희생자 추모에 이견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가수 솔비는 자신의 회화 작품으로 세월호 참사를 기억했다. 가수이자 작가인 솔비는 참사 1주기부터 자신의 그림으로 희생자들을 애도했다. 솔비 인스타그램 그는 16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오늘은 세월호 참사 10주기입니다.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어 “희생자분들과 유가족분들, 그리고 상처를 안고 살아가시는 생존자분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노랑 꽃밭을 그렸다”며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 속 작품에는 노란빛과 초록빛이 어우러져 꽃밭의 형태를 띄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는 매년 세월호 참사를 주제로한 그림을 새로 공개하며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NCT 도영 인스타그램 원어스 건희 프로필. 프롬(팬 소통 플랫폼) 스타들은 서로 다른 표현 방식으로 세월호 참사를 추모한다. 그룹 NCT 도영은 자신의 인스타그램 한 줄 소개란을 노란 리본으로 변경해 시선을 모았다. 그룹 원어스 건희 역시 프롬(팬 소통 플랫폼) 프로필 한 줄 소개에 노란 리본을 달아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있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희미해진 기억은 기록으로 다시 선명해질 수 있는 법이다. 매년 스타들이 기록하는 세월호 참사 추모 게시물은 사람들이 그날의 사건을 다시 되짚어보게 한다. 사람들은 이들의 추모를 보며 10년이 사건을 기억하며 주변의 안전까지 살피는 계기가 된다.
- SNS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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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실에서] 세월호를 이야기합니다(2024. 04. 17 06:00)
- 2024. 04. 17 06:00 오피니언
- 홍진수 주간경향 편집장 이번 호 표지 이야기를 어느 기사로 할지 고민했습니다. 주간경향 기사 마감일 오전에는 최종 결과가 나오는 총선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이달 16일에 10주기를 맞는 세월호 이야기를 할지 한참 생각했습니다. 결국 한동안은 전국민적 관심사로 자리할 총선을 선택했습니다. 대신 제가 쓰는 이 글에서는 세월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벌써 10년입니다. 아직도 그날, 2014년 4월 16일 점심때 제가 누구와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이 납니다. 회사 근처 김치찌갯집에서 회사 선배와 “세월호란 배에 사고가 났는데 전원 구조라 다행이다”라는 이야기를 했고, 점심을 먹다가 전원 구조가 오보라는 소식을 접하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그때의 그 당혹감이 머릿속에 지금도 어렴풋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습니다. 아시다시피 세월호 참사는 진행 중입니다. 세월호 참사로 많은 사람의 인생이 사라지거나 바뀌었습니다. 강산도 변한다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유가족의 상처는 여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4월이 오면 다시 세월호를 이야기합니다. 주간경향은 이번 호에서 유해정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 센터장을 만났습니다. 유 센터장은 유가족과 생존자 등을 제외하고는 가장 가까이에서 세월호 사건을 바라본 사람으로 꼽힙니다. 유 센터장은 인권활동가로 일하다 세월호 참사가 나자 진도로 내려갔습니다. 세월호 작가 기록단의 일원으로 2015년부터 세월호 기록을 담은 5권의 책을 냈습니다. 10주기를 기록해 달라는 가족협의회의 요청으로 2022년부터 유족, 생존자, 관련자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최근 <520번의 금요일>, <봄을 마주하고 10년을 걸었다> 등을 출간했습니다. 유가족이 경험한 혐오와 편견, 분명히 존재했지만 드러내지 못했던 가족들 간의 갈등 등을 솔직하게 담았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사회적 재난과 참사를 기록하고 연구하다 올 초 재난피해자권리센터를 설립했습니다. 센터는 따로 떨어져 있는 재난피해자들을 연결하고, 혐오에 노출되기 쉬운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4월 16일 열리는 세월호 10주기 기억식에서 공연되는 ‘4160인 합창’ 연습 현장도 다녀왔습니다. 세월호 유족과 시민 등 4160명이 현장 참여와 녹화영상으로 ‘가만히 있으라’, ‘네버엔딩 스토리’, ‘화인’,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잊지 않을게’,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등 6곡을 함께 부릅니다. 선곡과 노래 순서에 의미가 없을 수 없겠지요. 참사 순간의 비통함과 슬픔, 참사 이후 그리움과 회상, 아픔과 고통, 진상 규명의 의지, 기억 그리고 연대와 치유 등이 노래에 담겨 흐릅니다. 한국사회는 아직도 세월호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했습니다. 외면하고 덮어버리려는 노력이 되레 더 컸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세월호를 말할 때면 감정이 요동칩니다. 내년 이맘때 올해보다는 더 담담하게 세월호를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편집실에서편집실에서
- 세월호 10주기 4160인 시민합창 울린다(2024. 04. 15 06:00)
- 2024. 04. 15 06:00 사회
- 추모 무대 <세월의 울림>…‘가만히 있으라’ 등 6곡 메들리 지난 4월 6일 경기 안산 단원구청 대강당에서 진행한 ‘4160인 시민합창’ 전체연습에서 한 시민이 악보를 살펴보고 있다. 정희완 기자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4160인 시민합창단’이 꾸려졌다. 합창단은 오는 4월 16일 경기도 안산 화랑유원지에서 열리는 10주기 기억식에서 무대에 오른다. 합창의 제목은 <세월의 울림>이다. 참사를 추모하는 의미가 깃든 6곡(약 12분)을 메들리로 엮었다. 곡의 순서와 노랫말은 지난 10년의 세월을 관통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생한 사건과 감정, 정서가 함축돼 있다. <세월의 울림>은 침몰하는 세월호 선내에서 방송된 ‘가만히 있으라’로 시작한다. 그리움과 아픔을 표현한 ‘네버엔딩 스토리’와 ‘화인(火印)’, 진상규명의 의지를 다지는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로 이어진다. ‘잊지 않을게’로 기억을 약속하고, 연대의 뜻을 담은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로 마무리한다. ■이제 4월은 옛날의 4월이 아니다 본 공연에 앞서 지난 4월 6일 경기 안산 단원구청 대강당에서 2차 전체 사전연습이 진행됐다(1차 연습은 지난 3월 31일 진행). 시민 200여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손에 악보를 든 채 지휘자 박미리씨(48)의 말에 집중했다. 박씨는 이번 합창을 총괄하는 연출감독을 맡았다. 2015년부터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으로 구성된 ‘416합창단’의 지휘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호흡을 다 써서 부른다고 좋은 게 아니에요. 호흡이 짧아지면 짧아지는 대로, 그렇게 표현을 하면 훨씬 아름다워요. 호흡을 이었다가 빼고, 이렇게 하면 밀고당기는 느낌이 있어요. 다시 해보겠습니다.” 노랫소리가 강당을 꽉 채웠다.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등 4성부 합창이다. 박씨의 설명이 이어졌다. “보통 허밍은 둥글게 감싸주고 위로하면서 안아주는 느낌을 주고 싶을 때 들어갑니다. 세게 ‘아~’ 할 필요가 없어요. 테너가 허밍을 너무 세게 하면 소프라노 소리를 잡아먹게 됩니다. 소리를 내되 질감을 다르게 하면 됩니다.” 지난 4월 6일 경기 안산 단원구청 대강당에서 ‘4160인 시민합창’ 전체연습을 하고 있다. 정희완 기자 10주기 기억식 현장에 참석해 노래를 부르는 시민은 706명이다. 무대 맨 앞에 서는 416합창단 소속 33명도 포함한다. 지난해 9주기 때 구성된 시민합창단 304명보다 2배 이상 많다. 이에 따라 중앙무대에 더해 양쪽에 날개 모양으로 추가 무대를 설치해 합창단이 약 2000개의 객석을 에워싸는 구조가 된다. 나머지 시민들은 영상을 통해 참여한다. 노래, 수어, 악기연주, 율동 등을 촬영해 주최 측에 사전에 제출하면, 이를 기억식 현장에서 화면에 띄우는 방식이다. <세월의 울림>의 첫 번째 곡은 ‘가만히 있으라’이다. 가수 이승환씨가 작사·작곡해 2015년에 발표한 노래이다. 참사 당시 세월호가 기우는 상황에서 선내에 방송된 “가만히 있으라”는 내용을 담아 참사의 참혹함과 어른들의 책임을 표현했다. 참사 사망자 304명 가운데 250명이 단원고 학생들이다. 공연은 현재 단원고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영상을 통해 이 곡을 부르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현장에 참석한 청소년들이 이어받는다. 연습 중에 박미리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악보에 쉼표 보이시죠? 여기서 확 줄어들어야 해요. 그래야 가사 전달이 잘됩니다. 마지막에 반주가 다 빠지고 ‘가만히 있으라’ 목소리만 남게 됩니다. 객석에서 보면 조용하게 들릴 거예요. 그 울림을 상상하고 부르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곡은 그룹 부활의 ‘네버엔딩 스토리’이다. 멜로디와 가사에 짙은 그리움이 배 있다.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 가기를”이라는 후렴구로 유명하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노래를 통해 목소리를 낸 첫 번째 곡이라는 점에도 의미가 있다. 참사 발생 이후 유가족들은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 등을 촉구하며 단식과 행진, 삭발 등을 했다. 2014년 12월 유가족들은 연대해준 시민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자리에서 이 곡을 불렀다고 한다. 2015년에는 뮤직비디오가 제작되기도 했다. 지난 4월 6일 경기 안산 단원구청 대강당에서 진행한 ‘4160인 시민합창’ 전체연습에서 지휘자 박미리씨가 시민들에게 곡을 설명하고 있다. 정희완 기자 세 번째로 ‘화인’이 이어진다. 도종환 시인의 추모시에 가수 백자씨가 멜로디를 입혔다. 화인의 사전적 의미는 ‘쇠붙이로 만들어 불에 달궈 찍는 도장’이다. 가슴속에 새겨진, 평생 지울 수 없는 비통함을 그린 곡이다. 가사처럼 유가족들에게 4월은 더 이상 어느 따뜻한 봄날의 4월이 아닐 것이다. 2015년 참사 500일 추모제 때 유가족과 시민들이 함께 불렀다. 당시는 세월호가 인양되기 전이었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가 네 번째로 들어간다. 2016년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탄핵 촛불집회 때 많이 울려 퍼진 노래다. 민중음악가 윤민석씨가 만들었다. 다른 곡에 비해 멜로디가 경쾌하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등 노랫말에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향한 의지가 담겼다. 합창에서는 어린이들의 목소리로 곡을 시작한다. 박미리씨는 “세월호 이야기를 노래를 통해 아이들과 같은 자리에서 나눌 수 있다는 건 세월호 부모님들의 10년간 싸움의 큰 성과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작은 행동이 큰 울림으로 이날 합창연습에는 416합창단 소속 유가족 7명도 함께했다. 단장인 최순화씨(고 이창현 학생 어머니)는 인사말을 통해 “4160인 합창을 처음 시작한다고 했을 때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노래를 하게 될까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고 막막했다”라며 “하지만 많은 분이 힘을 합하고 노력해서 곡이 완성되는 것 같다”라고 했다. 이어 “제목이 <세월의 울림>인데, 이 노래를 함께했던 모든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울림이 되고, 세월호를 기억하는 모든 분에게 감동을 주는 큰 울림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지난 4월 6일 경기 안산 단원구청 대강당에서 진행한 ‘4160인 시민합창’ 전체연습에서 한 어린이기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를 부르고 있다(사진 위). 지난 4월 6일 경기 안산 단원구청 대강당에서 진행한 ‘4160인 시민합창’ 전체연습에서 홍기헌씨가 노랫말을 수어로 표현하고 있다. /정희완 기자 다섯 번째 곡은 기억하겠다는 약속과 다짐을 담은 ‘잊지 않을게’다. 마찬가지로 윤민석씨가 작사·작곡했다. 세월호 추모곡 가운데 가장 많이 불린 노래다. 10주기 기억식 현장에서는 객석에 있는 시민들이 먼저 부르도록 유도할 계획이다. 기억식 프로그램 안내 소책자에 가사도 실을 예정이다. 시민들이 첼로와 바이올린 등을 연주하는 영상도 함께 나온다. 마지막으로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를 합창한다. 정희성 시인의 시에 멜로디를 얹은 곡이다. 연대를 통해 슬픔과 아픔을 나누고 치유로 나아간다는 뜻이 읽힌다. 국내 재난참사 유가족들은 지난해 12월 ‘재난참사피해자연대’를 공식 발족했다. 세월호를 비롯해 삼풍백화점, 씨랜드 화재, 인천 인현동 화재, 대구지하철, 가습기 살균제, 공주사대부고 병영체험학습, 스텔라데이지호 등 8개 참사 유가족들이 참여했다. “우리가 겪은 참사를 누군가는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생명이 존중받는 안전한 사회를 위해 나아가고자 한다”는 게 연대체의 기본 정신이다. 시민들의 연대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이날 연습에 나온 수어 참가자 홍기헌씨(51)는 “10년 전에 세월호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한 적이 있다. 당시 한 어르신이 오셔서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알고 보니 단원고 학생의 외할머니였다. 가짜뉴스나 악성 댓글이 많은데 이 서명운동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고 하셨다”고 전했다. 이어 “이렇게 작은 행동도 피해 유족분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돼 이번 합창에도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충북 괴산에 거주하는 박성수씨(54)는 아내, 자녀 2명과 함께 왔다. 박씨 부부는 “10주기에는 추모 활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합창단을 신청했다”라고 했다. 이어 “사실 집에서 연습을 하지 못했다. 반주를 듣기만 해도 울컥했기 때문”이라며 “이렇게 많은 사람과 함께하니 제대로 부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제주에 거주하는 청소년 20여 명은 지난 4월 9일부터 자전거로 안산까지 이동한 뒤 합창에 합류한다. 이번 합창은 연습 과정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지난 2~3월 연습기간 동안 32개 단체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주최 측에서 강사를 파견했다. 여기에 유가족들도 동행했다. ‘세월호참사 10주기 위원회’에서 합창 실무를 담당하는 진수경씨는 “유가족은 시민에게 힘을 받고, 시민은 유가족에게 힘을 주는 자리였다”라며 “시민합창단은 세월호 참사를 주제로 많은 시민이 모인다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10주기가 끝이 아니라 생명이 존중되고 안전한 사회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난 4월 6일 경기 안산 단원구청 대강당에서 진행한 ‘4160인 시민합창’ 전체연습에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 최순화씨가 시민들에게 인사말을 하고 있다. 정희완 기자 ■10주기 이후에도… 최순화씨는 이날 연습이 끝난 이후 주간경향과 만난 자리에서 첫 곡인 ‘가만히 있으라’를 언급했다. “가만히 있으라가 없었다면 이렇게 참사도 발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또 세월호를 기억하고 추모하려는 시민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압력이 지금도 있다는 게 속상하고 화도 납니다.” 최씨는 10주기를 계기로 많은 행사가 개최되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다만 10주기 이후의 시간이 걱정이라고 털어놓았다. “이번 10주기로 세월호 참사가 끝났다고 생각할까 봐서요. 4월만이 아니라 다른 때에도 4월처럼 관심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의 문제이잖아요. 참사가 던지는 질문과 메시지를 더 많은 사람이 함께 연구하고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최씨가 말을 이어갔다. “세월호와 관련해 여전히 숙제가 많이 남아 있잖아요. 이런 숙제를 푸는 게 또 우리 부모들의 숙제입니다. 10주기 이후 내년, 후년에도 운동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해야죠.” 이번 시민합창은 10주기 이후에도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또 하나의 기록이자 기억의 매개로 남을 듯하다.
- “우린 10년 싸운 세월호 가족에게 빚졌다”(2024. 04. 15 06:00)
- 2024. 04. 15 06:00 사회
- 유해정 재난피해자권리센터장 인터뷰 지난 4월 6일 서울 중구 충무로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 사무실에서 유해정 재난피해자권리센터장을 만났다. 유 센터장은 2014년 세월호 참사 직후부터 유가족들의 곁에 머문 ‘세월호 참사 작가기록단’의 일원으로, 세월호 10주기 공식 기록집 <520번의 금요일>을 포함해 5권의 기록물 발간에 참여했다. 이효상 기자 2014년 4월 16일의 참사 이후, 세월호는 하나의 사회운동이었다. 시민들은 아침에 집을 나선 가족이 무사히 집에 돌아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종전까지 빠르게 ‘수습’해야 할 일이던 ‘재난’은, 사회가 인적·물적 자원을 투입해 진상을 규명하고 애도해야 할 대상이 됐다. 이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참사 이전까지 평범한 이웃이었던 희생자·생존자의 가족들이다. 그들은 단식과 삭발, 삼보일배와 100일을 넘는 농성도 마다하지 않고 사회의 맨 앞줄에서 ‘안전사회건설’을 촉구해왔다. 이들은 “지겹다”, “뭘 밝혀냈냐”고 말하는 사람들의 몫까지 대신해 싸웠다. “내가 먼저 당했으니 당신들은 당하지 말라”(책 <520번의 금요일> 중 준영 엄마 임영애씨의 말)는 마음이었다. 이들이 앞장서 싸우는 대신 국가에 재난의 수습을 일임했다면 우리 사회는 세월호 참사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교훈도 얻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 10년간 세월호 가족들의 싸움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들이 있다. 세월호 참사 작가기록단이다. 기록단은 참사 직후부터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가족들의 곁을 찾아 10년을 머물렀다. 역사는 길어지고, 기억은 희미해진 세월호의 10년을 어림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면, 기록단은 거기에 속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기록단의 일원인 유해정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 센터장을 지난 4월 6일 서울 중구 충무로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사무실에서 만났다. 세월호 참사 이전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자 인권운동가였던 그는 세월호 참사 이후 각종 재난의 피해자들을 연결하고 진상규명, 재발방지 등 피해자들의 마땅한 권리를 옹호하는 활동가가 됐다. 그는 “이태원 참사 직후에 이태원 유가족분들은 사실 세월호 가족들과 거리를 두려 했다. 9년을 싸웠는데 진상규명이 안 됐다고 봤으니까, 우리는 다른 길로 싸워야지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이태원 참사 이후 1년 6개월이 지났는데, 지금 이태원 유가족들은 ‘우리가 걸어온 시간은 세월호 가족들이 먼저 간 길에 발걸음을 포개면서 온 거다’라고 말씀하신다. 세월호 가족들은 운동을 만들었다. 다른 재난 참사의 피해자들이 또다시 목소리를 낼 때, 어떻게 하면 과오를 줄이고, 어떻게 역량을 결집할 수 있는지, 그 나침반 역할을 세월호 가족들이 했다”고 말했다. “세월호 이전보다 안전해졌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다. 그렇지 않다. 우리 사회가 재난에 더 신경 쓰고, 안전 문제에 대해 더 예민한 사회가 됐다고 본다. 세월호 가족들은 진상을 밝혀야 할 일이라는 걸 알렸다. 그렇게 특별법이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세월호 참사는 기존에 발생한 한국사회의 재난과는 달랐던 것 같다. “기존의 재난·참사는 사회적인 애도나 전국적인 관심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세월호 참사는 전국적 애도 속에서 정부나 국회 등 다양한 공적 기관이 인적·물적 자원을 투입하고 배분한 사건이다. 재난에 대해서는 처음으로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과 피해자 범주가 확장된 피해 구제를 위한 특별법이 만들어졌다.” 권위주의 정부에서 재난은 수습의 대상이었다. 시민은 정부의 재난수습을 선전하고, 이의 수용을 설득·계도하는 책무를 맡았다(유해정 논문 ‘정치적 애도를 통한 삶의 재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에서 시민은 구조, 교통정리, 헌혈 등 자원봉사를 통해 처음으로 재난에 참여했다.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에 이르러 ‘애도하는 시민’이 등장했지만, 추모 행렬은 한 달을 넘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는 달랐다. 시민들은 진도 팽목항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노란 리본을 달고, 촛불집회에 참여하며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이 흐름에 구심점이 된 것은 피해자의 가족들이었다. -기록단이 올해 3월에 세월호 참사 10주기 공식 기록집 <520번의 금요일>을 펴냈다. 책을 읽고 나니 세월호 유가족들이 진상규명·책임자 처벌만이 아니라 안전사회 건설을 요구했고, ‘안전’을 사회의 열쇳말로 만들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가족협의회(사단법인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피해자 가족협의회)의 활동을 정리해봤더니 참여하거나 주도했던 행사가 1년에 600~700건에 달했다. 가족협의회에 참여하는 200여 가정의 뜻을 모으는 과정이 순탄하기만 했겠나. ‘이렇게 감정 표출하면 안 될 텐데’ 싶을 정도로 회의 때는 서로 치열하게 싸웠다. 또 끝나면 같이 밥 먹으러 갔다. 가족협의회에서 모두가 평등한 한 표를 갖고, 치고받고 싸우면서 결론을 다듬어서 내놓는다. 부모 한 분 한 분이 위대하고 존경스럽지만, 전체가 모여서 논의하고 결정하고 실수를 만회하는 경험을 만들어 온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더 존경스럽다. 어떤 집단이 이렇게 10년을 할 수 있을까.” -<520번의 금요일>에서 ‘조직’과 ‘갈등’을 다룬 장을 썼다(이 책은 12개의 장을 6명의 작가가 나눠 썼다). 가족협의회 입장에서는 드러내기 쉽지 않은 이야기들인데 쓰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가족협의회가 2022년 봄에 10주기를 앞두고 그동안의 기록을 정리해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객관적이고 솔직한 백서를 써달라’고 했다. 호성 엄마 정부자님이 ‘평범한 엄마가 10년을 최선을 다해서 싸웠으니 객관적인 평가를 받고 싶다. 원치 않지만 누군가는 이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우리의 부족하고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줘야, 우리 같은 시행착오를 덜 겪지 않겠느냐. 그러면 우리 백서는 의미가 있는 거다’라고 말씀하셨다. 솔직하게 쓰려고 했다.” 세월호 가족들은 참사 직후 무엇을 믿을 수 있었을까. 언론은 ‘전원 구조’라는 희대의 오보를 냈다. 정부는 세월호 뱃머리가 서서히 물에 잠기는 걸 손 놓고 바라봤다. 그러면서 있지도 않은 ‘에어포켓’을 거론하면서 배에 공기를 불어 넣었고, 현장엔 단 2대의 헬기만 떠 있는데도 121대의 헬기가 구조 작업에 투입됐다고 선전했다. 세월호 가족들은 정부가 또 뭘 숨길지 몰라 2015년 8월 진도군 동거차도에 인양 작업을 감시할 천막을 쳤다. 배를 타고 가 낭떠러지를 끼고 산을 올라야 도착하는 천막을 가족들은 1주일씩 돌아가며 3년 넘게 지켰다. 가족들이 가만히 있었는데 저절로 이뤄진 건 없었다. 가족들이 청와대 항의 방문을 하고 나서야 박근혜 대통령 면담이 이뤄졌고, 국회에서 56시간을 대기하고 나서야 국회 국정조사 계획서가 통과됐다. 전국에서 650만명의 서명을 받고, 46일을 단식하고, 100일 넘게 광화문광장 노숙농성을 벌인 끝에 특별법이 겨우 통과됐다. 외부의 환경과 싸우는 동시에 가족들은 내부의 갈등도 조정해야 했다. 대리기사 폭행 사건처럼 가족들의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힌 사건도 있었고, 정부가 조장한 갈등도 있었다. 정부는 2015년 배·보상 기준을 발표하면서 배·보상 신청자에게는 5000만원의 국비 위로금을 추가 지급하기로 했다. 대신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일체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받았다. 이는 가족들이 최대한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는 쪽과 현실적으로 먼저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쪽으로 나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특별법들 이외에 세월호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 “세월호 이전보다 안전해졌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다. 그렇지 않다. 우리 사회가 재난에 더 신경 쓰고, 안전 문제에 대해 더 예민한 사회가 됐다고 본다. 세월호가 처음을 만든 것들도 많다. 재난이라는 건 그전까지 빨리 딛고 일어서는 것이었는데, 진상을 밝혀야 할 일이라는 걸 알렸다. 그렇게 특별법이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피해 회복의 범주도 넓어졌다. 과거에는 보상금으로 보상이 끝난다고 생각했는데, 신체로 나타나는 정신적 고통도 치료가 필요하다는 걸 처음으로 알렸다. 좌초된 배를 3년에 걸쳐 인양한 것도 거의 없던 일이고, 그 배를 보존한 것도 처음이다. 법원에서는 드물게 재난에 대한 국가 책임이 인정됐고, 기무사의 유가족 사찰 등 국가 폭력도 드러냈다. 그렇게 받은 국가배상금을 피해자들이 한 가정당 500만원씩 3억원을 모아 소외된 청소년들을 위한 기금으로 모은 것도 처음이다. 국회 농성도, 청와대가 있던 청운동에 진입해 농성을 벌인 것도 처음이었다.”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논의될 때 정부·여당의 가장 큰 반대 논거는 세월호였다. ‘세월호를 9번에 걸쳐서 조사했는데 새로운 진상이 밝혀진 게 있었느냐?’는 얘기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사회적 애도가 왜 크지 않냐고 묻는다면 세월호 참사에 대한 피로감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국가 차원에서 9번 진상규명을 시도했고 인적·물적 자원을 투입했다. ‘밝혀진 게 없지 않으냐’고 말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진상규명을 빼놓고 세월호가 많은 것을 바꿨지만, 진상규명이 너무나 주된 이슈였기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처럼 인식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그렇지만 진상규명이라는 것이 ‘위법하냐, 위법하지 않느냐’만을 가리는 조사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도 세월호를 계기로 알게 됐다. 법 위반만 없으면 검찰은 기소할 수 없고 사건은 무혐의로 종결된다. 그러나 재난·참사가 일어나는 데는 구조의 문제, 행정상의 공백, 문화적 측면이 모두 작용한다. 이제는 가족분들 사이에서도 ‘법적인 부분만 따져선 안 됐던 거구나, 제도를 바꾸고 구조를 바꾸고 관행을 바꿔야 했던 부분이구나’라는 걸 이해하고 인정하는 분들이 늘고 있다. 책임을 묻는 것도 사법적 책임만큼이나 정치적 책임이나 도덕적 책임도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9번의 조사가 밝혀낸 사실은 분명히 있다. 국가가 희생자들을 구조하지 않았다는 것.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했지만, 4월 19일에야 민·관·군 합동구조팀은 바다에 잠긴 선내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구조 실패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진 정부 관계자는 가장 먼저 사고 해역에 도착했던 해경 123정장 1명에 불과하다. -기존 진상규명에 대해 아쉬움은 없나. “저는 다 실패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조사에 관해서는 두 가지 얘기를 하고 싶다. 하나는 9번을 조사했다고 하지만 증인들은 모두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불출석했고, 증거는 대통령기록물 등으로 지정돼 접근할 수 없다. 손발 묶어놓고 조사하라고 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조사위원회 구성에 대한 아쉬움이다. 여야가 각자 몫을 추천하다 보니 위원들 일부는 각 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 법적·구조적·문화적 문제를 모두 다루기에는 구성이 법률 전문가들 중심이었다. 실무 조사관들도 각 부처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머잖아 복귀할 조직을 철저히 조사하는 게 부담스럽지 않았겠느냐.” 2014년 4월 17일 전남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 부근 해상에서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다. 해경과 해군은 실종자 수색 작업을 벌였지만 이날 선내 진입은 실패했다. 김영민 기자 -10주기가 왔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애도의 수명이 긴 까닭은 뭐라고 보나.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하나는 ‘봤다’라는 점이다. 무기력하게 서서히 침몰하는 걸 시민들이 모두 바라봤다. 두 번째는 부모들이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고 싸웠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이 나서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게 없다. 부모들은 10년간 후퇴하지 않고, 필요한 모든 자리에서 가장 맨 앞으로 나가 싸웠다. 전태일 열사도 사후 몇십 년간 이소선 여사가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아가셨기에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김용균씨도 김미숙 어머님이 모든 산재 현장을 찾아가시기 때문에 산재 문제를 알리는 이름으로 여전히 기억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그렇게 싸울 수 있었을까. “참담하고 슬프지만 어린 자녀들이 희생됐고, 그 수도 너무 많았다. 어떤 때는 매일 농성을 해야 한다. 희생자 가족이 많으니 내가 못 나갈 때 누군가 나가 줄 사람이 있었다. 슬프지만 그게 동력이 됐다. 이태원도 너무 참담하지만, 희생자가 세 자릿수였기에 대신 싸워줄 가족들이 있었다. 이건 희생자가 적으면 길게 싸우기도 어렵고, 사회변화를 요구하기도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떻게 모든 피해자분이 재난이 날 때마다 이렇게 싸울 수 있겠나.” -<520번의 금요일>을 보면 가족분들을 도왔던 시민이 굉장히 많이 있었다. 그런데도 지난 10년을 떠올리면 기억에 남아 있는 건 가족들을 향한 혐오 발언이었다. “사람들이 재난 피해자들을 혐오하고 모욕하는 건 그 사람의 개인적인 판단도 있겠지만, 정치인이나 정부 등 마이크를 쥐고 있는 사람들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한다. 언론에는 그런 내용이 보도되니까 그게 여론일 것이라 생각하는데, 피해자들의 곁을 지키는 사람들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해왔다. ‘가족들은 이렇게 열심히 싸우는데 눈물 닦으라고 가제 수건 챙겨준 게 뭐라고’, ‘같이 굶고, 울어준 게 뭐라고’ 이런 식이다. 혐오의 목소리는 크게 들리지만, 사실 실체는 없다. 곁을 지키며 따뜻한 말을 보태는 사람들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 가족들이 10년을 버틴 건 만났던 수많은 시민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는 10년 동안 부모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봤다. 안산에 생명안전추모공원 건설을 추진할 때인데 안산 시민들이 너무 반대하니까 시민들 마음을 돌리려고 노인정, 마을회관을 시민들이 선물로 보내준 양파를 들고 찾아다녔다. 한 어머니가 어떤 할머니께 양파를 드렸는데, 그 할머니가 ‘우리 동네에 납골당 들이려고 했냐’며 양파를 이 어머니 뒤통수에 던져버렸다. 어머니가 양파를 다시 할머니 손에 꼭 쥐여주면서 ‘할머니, 저는 욕해도 되는데 이거 드시고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라고 하더라. 경이로웠다.” -가족분들이 10·29 이태원 참사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을 것 같다. “세월호 가족분들이 좌절한 국면 중 하나였다. 당시 사참위(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진상조사에 대해 이렇다 할 입장을 못 내고 정리한 직후였는데, 2022년 10월 이태원 참사가 일어나고 가족들이 완전히 꺾였다. 8년 동안 정말 잘 안 울던 부모님들이 이태원 얘기만 하면 울었다. 가족들은 세월호 이후 이만큼밖에 못 이룬 게 속상하지만 사회는 바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청년들이 죽는 걸 보면서 가족들이 ‘사회도 못 바꿨구나’, ‘슬퍼하고 애도해 줬던 얼굴들이 떠올라서 고개를 들 수 없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를 두고도 ‘놀러 가다 죽었다’는 혐오의 말이 나왔다. 그래도 그 말이 나올 때까지 시간은 걸렸다. 그런데 이태원 참사에서는 하루 이틀 만에 쏟아졌다. ‘더 잘 싸웠어야 했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10년이 끝이 아니다. 앞으로 또 바꿔 나가야 할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시민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재난으로 인해 고통받은 피해자와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안전해지고, 누구든 재난에 맞닥뜨렸을 때 조금이라도 빨리 피해를 회복하고 다양한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됐다. 우리 사회는 가족들이 어렵게 한 발 한 발 내디뎌서 온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공로와 기여에 감사하기보다는 마치 특혜를 받으려고 했던 사람들처럼 매도하거나 ‘피해자가 왜 저래’ 하는 시선으로 쳐다본다. 사회나 정부가 지켜주지 못한 사람들인데, 문제를 어떻게 고치면 좋을까 고민하기보다 세상을 바꿔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을 손가락질한다. 피해자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이제 피해자가 그만 싸웠으면 좋겠다. 왜 피해자가 삼보일배하고 머리를 깎고…. 평생 고통을 안고 살아야 하는 가족들이 바란 건 진상을 알고 싶은 것 하나였다. 이태원 참사 가족들도 진상을 조사하는 특별법을 만들어 달라고 1년 반을 내달리고, 지금도 집에 못 돌아가고 있다. 매번 진상규명 특별법을 만들 것이 아니라 상설로 조사기구를 만들어서 전문적으로 조사해 통합적인 재발 방지 대책이 나올 수 있게 해야 한다. 가족들이 요구하는 게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이다. 기본법에 피해 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한 제도를 담을 수 있다. 그렇게 조사 인력들의 경험치를 축적하고, 피해자 지원을 조력하는 전문가들도 양성해야 한다. 이런 제도화가 없다면 재난이 일어날 때마다 피해자들 모두가 나와서 싸우는 상황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 [신간] ‘모래 뺏기 놀이’ 세월호 복기(2024. 04. 10 06:00)
- 2024. 04. 10 06:00 문화/과학
- 세월호, 다시 쓴 그날의 기록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 지음·진실의힘·3만5000원 “승객의 생명을 걸고 하는 모래 뺏기 놀이와 같았다.” 2016년 <세월호, 그날의 기록>을 쓴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기록팀)은 세월호 참사를 ‘모래 뺏기 놀이’에 비유했다. 수백 명이 타는 배를 가운데 두고 모래를 빼내듯, 참사를 막을 수 있었던 장치들을 하나씩 무력화했기 때문이다. 청해진해운은 18년 된 낡은 배를 일본에서 들여와 서류를 조작하고, 무리하게 증·개축했다. 운항할 때마다 해야 하는 복원성 계산, 화물량 확인, 고박 상태 검사는 배 바깥에서 흘수선만 확인하는 형태로 이뤄졌다. 무리하게 증·개축한 배는 조타 장비의 작은 고장을 견디지 못하고, 오른쪽으로 빠르게 선회하면서 왼쪽으로 과도하게 기울어졌다. 부실하게 묶어 놓은 화물이 한데 쏠리면서 복원성을 상실했다. 기관실 각 구역을 열어놓고 운항하던 선원들은 그 상태를 방치하고 빠져나가 침수가 급속도로 진행됐다. 해경지휘부는 구조에 나선 해경 123정에 사진·영상 송출, 보고 요구를 끊임없이 하면서 현장에 혼선을 줬다. 123정이 대공 스피커로 대피만 독려했더라도 현장의 구조 세력의 도움을 받아 많은 이들을 살릴 수 있었다. 기록팀은 2017년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의 침몰 원인 조사, 수사와 재판기록, 해외 전문기관의 조사 자료 등 지난 10년간 쌓인 자료를 새로운 관점으로 검토·분석했다. 국가 차원의 조사가 진행될수록 오히려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려는 열망과 의지가 흐려지는 걸 보면서 다시 고통의 기록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고 봤다.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 잠수함 충돌설을 붙들고 있던 사참위의 기우제식 조사, 형사처벌을 진상규명의 목표로 삼았던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참사를 낱낱이 복기하려는 용기를 새로운 희망의 시작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마포주공아파트 박철수 지음·마티·2만5000원 <한국주택 유전자>를 쓴 저자의 유작이다. 한국 아파트단지의 원형인 마포주공아파트의 시작과 끝을 파헤친다. 단지 내 인프라를 입주자가 부담하는 방식, 임대가 아닌 분양, 30년 후 재개발 등 한국 아파트단지의 특징은 모두 마포주공에서 시작됐다. 로봇 드림 사라 바론 지음·놀·1만9800원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등 여러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애니메이션 <로봇 드림>의 원작 그래픽 노블이다. 개와 로봇 사이를 스쳐 간 찰나의 계절, 함께한 기억이 남긴 찬란한 순간들을 코끝 찡하게 그려냈다. 대사 없이, 오로지 선과 면만으로 뭉클함을 자아낸다. 사이렌과 비상구 오유신 지음·이매진·1만6800원 학교 폭력을 겪은 학생이 교사가 돼 학교를 돌아본다. 성희롱 피해 교사, 초등학교 청소 실무사, 고등학생일 때 임신한 청소년 부모, 성인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를 진단받은 새내기 교사까지 학교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돌봄과 교육, 노동의 문제를 다룬다.
-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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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세월호 가라앉은 진실 ‘침묵행동’으로 밝혀낸다
- 2020. 04. 20 11:13 화제
- 세월호 참사 6주기인 16일 오전 서울 광화문에서 ‘세월호침묵행동’의 유희씨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최근 끝난 21대 총선에서 야당이 대패했다. 그 원인으로 다양한 문제가 지적되는 가운데 야당 후보들의 연이은 막말도 그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모 후보의 세월호 막말과 이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는 야당 수뇌부의 행보에 중도층 유권자들이 등을 돌렸다는 분석이 여러 곳에서 나왔다. 전 국민을 충격 속에 빠뜨리며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은 세월호가 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슬픔의 바다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세월호는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의 한 기준이 됐다. 세월호 참사의 정부 책임을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으냐, 이를 여전히 슬퍼하느냐 이제 그만 잊자고 하느냐 등으로 의견이 나뉜다. ‘촛불 시민’과 ‘태극기 부대’로 사람이 갈리기도 한다. ‘먼훗날 한국사회를 되돌아보면서 세월호 참사 이전 시대와 이후 시대로 나눠질 것’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그러나 세월호 침몰과 관련한 여러 의혹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그러는 가운데 세월호 희생자와 피해자를 모욕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그 수위도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이로 인해 “하루속히 세월호 참사의 모든 의혹들을 밝혀내고 책임자들을 합법적으로 처벌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피로감을 빨리 풀어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키우는 개인과 단체 또한 늘고 있다. ‘세월호침묵행동’도 그들 중 하나다. ‘세월호침묵행동’은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저녁이면 광화문 교차로에 나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스카프피켓행동’을 침묵 속에 진행한다. 또 일요일에는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혜화역 2번 출구 근처에서 세월호 관련 리본이나 배지 등을 나눠 주며 ‘세월호를 기억해 달라’고 호소한다. 더러는 일요일과 공휴일을 빼고 매일같이 청와대 앞에서 진상규명을 눈물로 호소하는 고 임경빈군의 어머니 옆에서 힘을 보태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세월호침묵행동’이 세월호 참사 관련 단체들 중 비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최소한의 ‘사람의 도리’를 할 뿐이다. 그래서 대표도 없다. 서로가 뭐를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저 세월호 희생자와 피해자들의 아픔을 보듬어 안아주고 싶을 뿐이다. 이를 위해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마다 강원도 원주에서 달려오는 사람도 있다. 이들의 첫걸음은 유희씨(40)가 지난해 5월28일 광화문에서 세월호 리본스카프를 들면서 시작됐다. 전날 청와대는 ‘세월호 특별수사단 설치와 전면 재수사’를 바라는 국민청원에 대한 답변에서 “아직 독립적인 수사체계를 말할 단계는 아니다”라며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지켜보자고 했다. 청와대가 문제 해결을 위해 팔소매를 걷어붙이기를 바란 시민 가운데 한 명이던 유씨로서는 어이가 없었다. 청와대 답변에는 의지도 없고, 내용도 없다고 생각했다. 사참위 뒤에 숨어 버린 청와대에 화가 났다. 그래서 홀로 광화문에 나서 침묵한 채 피켓을 들었다. 그런 유씨 곁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유씨는 “오래전부터 노란리본공작소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촛불정부의 책임있는 답변을 기다렸는데, 너무 실망스러웠다. 소리치지 않으면 가슴이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무작정 피켓을 들고 광화문에 섰다”고 전했다. 그로부터 11개월. 절대 녹록지 않은 시간이었다. “지나가면서 아무렇지 않게 세월호 희생자와 피해자를 모독하는 발언을 하는 사람이 많다. 더러는 ‘못된’ 유투버들이 찾아와 그런 말을 하고 녹화까지 해 간다. 그런 날이면 몸 안의 모든 장기가 뒤틀리는 듯한 고통을 겪는다. 지독한 몸살 같은….” 그러나 모든 이들이 그러는 것은 아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다가와 ‘힘내라’고 응원해 주고, 그럴 때면 정말 힘이 난다고 유씨는 전한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더욱 무장이 되는 느낌이다. 추운 날에는 핫팩을 잘 쓰는 요령이 생겼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우비를 입고 버틸 강단이 생겼다. 경빈이 엄마 등 세월호 유가족들이 모든 억울함을 풀었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피켓을 들 것이다.” 16일 오전 서울 광화문에서 ‘세월호침묵행동’의 김지수씨(오른쪽)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침묵행동을 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유씨 옆에서 함께 피켓을 들고 있는 김지수씨(55)는 “세월호가 점점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세월호는 희생자와 그들 가족의 문제가 아니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조차 밝혀내지 못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우리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겠냐”고 말했다. 김씨는 ‘이 일을 하면서 어떤 보람이 있느냐’는 물음에 “보람을 찾으려 하는 일이 아니다. 살려고 하는 일이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수백명이 한꺼번에 생목숨을 잃었는데, 그에 대한 진상규명도 이뤄지지 않고, 진실을 밝혀 달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되레 괴물이 되는 곳이라면, 그곳이 곧 지옥이다. 지옥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국회를 향해서도 쓴소리를 내뱉었다. 많은 의원이 가슴에 배지만 달고 겉으로만 행동할 뿐 세월호 진상규명 등 실질적은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16일 오전 서울 광화문에서 ‘세월호침묵행동’ 식구들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세월호침묵행동’에는 단원고 희생자 김동영군의 아버지 김재만씨(57)도 함께하고 있다. 김씨는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혀 달라는 것은 누구에게 보복해 아이들의 한을 풀기 위함이 아니다.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 다만 상대가 누구이고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아야 용서고 뭐고 할 수 있지 않으냐”고 말했다. 김씨는 이어 “진도에서는 장례를 치를 때 상주를 웃음짓게 할 정도로 흥을 돋운다. 나도 그러고 싶다. 세월호 참사의 모든 의혹이 밝혀지면 해마다 4월16일을 ‘슬픔을 기억하는 날’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더욱 안전해진 것을 기뻐하는 날로 만들고 싶다”고 덧붙였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세월호의 진실은 여전히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아 있다. 그곳이 더는 슬픔과 원통의 공간이 아니라 위로와 배려의 공간이자 ‘안전 교육의 장’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세월호침묵행동’의 소리 없는 외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상규명이 우선이다. ■세월호침묵행동은? 현재 세월호 참사 진실규명 등을 위해 활동하는 주축은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와 4월16일의 약속 국민연대다. 하지만 두 곳 외에도 전국적으로 수많은 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려 애쓰고 있다. 세월호침묵행동도 그중 하나로, 시민 10여명이 순전히 자신들의 주머닛돈으로 세월호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 가족들의 아픔을 보듬어안는 일을 해오고 있다. 정기적인 모임이 있고 여러 행동도 함께하지만 회비나 규칙 같은 것은 없다. 당연히 대표도 없다. 이들은 “세월호 참사의 아픔은 우리 사회가 잊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희생자 가족들이 사고 책임자들을 용서했을 때 비로소 씻어지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 광화문진상규면세월호 진실
- 세월호 다큐 제작한 김진열 감독이 남긴 1년의 스케치
- 2016. 01. 05 14:52 화제
- 김진열은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주로 개인의 삶을 파고들었던 그녀는 어느 한 집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로 가족을 잃은 이들이었다. ‘나쁜 나라’는 세월호 참사 피해 가족들의 이야기다. 참사 후 1년의 시간을 차곡차곡 담았다. 2015년 10월 개봉될 예정이었지만 두 달이 더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첫 장면이 마음에 걸린 탓이다. 본래는 생존 학생들이 사고 후 처음으로 등교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었다. 내부적인 논의 끝에 김진열(42) 감독은 첫 장면을 수정했다. 영화는 2014년 6월 5일 진도체육관에서 시작된다. 세월호 국정조사특별위원회의 첫 활동이 시작된 날이다. “기본적으로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요. 국정조사특별위원회와 첫 대화를 하면서 가족들은 정치인들만 믿고 기다려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죠. 상황적으로 가족분들이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어요.” 참사 직후 안산에는 시민기록위원회가 구성됐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기록하고 후대에 남기는 것이 목적이었다. 영상, 사진, 글, 만화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였다. 6년 전부터 영화 제작 워크숍을 위해 안산을 오가던 김 감독 역시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됐다. “전혀 낯선 지역이 아니다 보니 마음이 좀 더 쓰였어요. 제가 교육을 다니던 동네가 고잔동이었는데, 단원고등학교까지 걸어서 15분이에요. 오가면서 마주쳤던 아이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까 더 속상했던 것 같아요.” 그녀는 정일건·이수정 감독과 함께 다큐멘터리 연출에 뛰어들었다. 처음엔 너무나 큰 참사여서 어떤 식으로 기록해야 할지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연스레 김 감독은 ‘책임연출자’가 됐다. 영화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가족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유가족 내부 회의, 안산 분향소의 일상, 해경 회의, 국회 단식 농성, 도보 순례 등 유가족들이 1년간 밟아온 걸음들이 카메라 안에 담겼다.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정서적 흐름’이다. “편집할 때 의견이 두 가지로 나뉘었어요. 한쪽에서는 정치권에서 수사·조사권 합의할 때 어떤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고, 왜 유가족들이 합의안에 반대했는지 등 세부적으로 들어가길 원했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어차피 합의가 끝난 상황에서 그 과정을 다 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입장이었죠. 특별법이 통과되고 한참 뒤에 영화가 나올 거니까 너무 깊게 들어가기보다는 정서적 흐름에 중심을 두는 걸로 의견이 모아졌어요.” 사실 이 영화에는 내레이션이 크게 필요하지 않다. 간단한 자막만으로도 관객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전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민들에게 좀 더 친절하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약간의 내레이션이 필요하다고 김 감독은 판단했다. 영화 속에서 틈틈이 들리는 차분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배우 문소리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면 관객들이 좀 더 편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배우이고, 그중에서도 세월호 참사에 대해 마음 아파하고 관련된 활동을 하셨던 분이면 좋겠다 싶었는데 문소리씨가 거론됐어요. 문소리씨도 전체 의도를 파악하시고 나서 흔쾌히 참여를 결정해주셨어요. 모르긴 해도 많이 힘드셨을 거예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굉장히 감사했죠.” 카메라를 들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을 때부터 카메라를 든 건 아니었다. 2년 정도 작은 규모의 격주간지 사회부, 문화부에서 펜을 들고 현장을 누볐다. 기자에서 감독이 된 건 취재 과정에서 오는 갈증 때문이었다. “취재원을 겨우 두세 번 만나고 글을 쓰다 보니 내가 분명 잘못 쓰는 게 있겠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그런데 다큐멘터리를 보니까 카메라 앞에 서 있는 사람과 카메라를 든 사람이 되게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거예요. 단순히 한두 번 만난 관계는 아닌 것 같더라고요. 취재원과 오랫동안 밀착하지 못하는 것. 그걸 다큐멘터리가 해소해줄 수 있겠다 싶었어요.” 기자일 땐 새벽까지 일하며 원고 마감하는 게 너무 고단했다. 그런데 영상을 편집하면서는 밤을 새도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이 직접 카메라에 담았던 사람들을 편집 과정에서 또다시 화면으로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 다큐멘터리만의 매력이었다. “그렇게 밤샘을 해도 힘들지 않아서 이 일이 나하고 맞나 보다 생각하지만, 정작 후배들한테는 권하지 않아요(웃음).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들은 되게 느슨해요. 보통 1년에서 3년 정도의 기간을 두고 작업하는데, 매일같이 취재 대상과 밀착할 순 없잖아요. 자기 생활도 통제해야 하고, 생계를 위해 그 밖의 일도 해야 하죠. 그래서 후배들에게는 프로덕션에서 월급 받으면서 단기간에 ‘빡세게’ 배우고, 나이 들었을 때 독립 다큐를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해주고 있어요.” 전보다 더 잘하고 싶고, 남들에게 인정도 받고, 스스로도 최선을 다해 만들었다는 성취감을 느끼고 싶었다. 항상 이런 생각들에 짓눌려 다시 연출을 하기까지 7년이 걸렸다. 너무 오랜만이다 보니 감을 잃은 느낌이었다. 그만큼 이번 작업은 그녀에게 새로운 시도였다. “제 또래와 작업한 게 처음이었어요. 유가족분들이 저하고 비슷한 나이시거든요. ‘나도 나이 들었나 보다. 그래서 사람 대할 때 능글능글하게 척척 안기는구나’라는 생각도 들었고요(웃음). 이번 작업을 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안산 분향소에 가서 분향 한두 번 하고 가끔 뉴스에서 유가족분들 보고 마음 아파하는 정도로 끝났을 것 같아요. 이번 다큐멘터리를 통해 소시민들이 어떻게 시민으로 성장해가는지 보게 됐어요. 저에게는 큰 공부였죠.”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경험은 없다. 대학 때 학생운동도 하지 않았다. 선배들과 집회 현장에 가면 전경들을 뚫고 나와 홀로 김밥을 사 먹으러 갔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그녀의 관심은 항상 약자를 향해 있었다. 여성 장애인의 삶을 주목한 ‘여성 장애인 김진옥씨의 결혼 이야기’(1999), 비전향 장기수 할머니들의 모습을 담은 ‘잊혀진 여전사’(2005) 등 그녀가 만든 작품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줄곧 한 인물을 통해 뭔가를 보여주는 방식을 택해왔다. 다수가 모인 집단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건 ‘나쁜 나라’가 처음이다. 참사가 일어난 지 70일 정도 지났을 무렵, 진상 규명을 위한 서명을 받으러 전국 각지로 떠나는 유가족들과 동행했다. 막 초기 작업을 시작했던 그녀는 이때를 가장 마음 아팠던 순간으로 꼽는다. “대구 쪽에 갔을 때였어요. 유가족분들이 거리에 가만히 서 계시는 걸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슬퍼하고 힘들어해도 부족한데, 거리로 나가서 피켓 들고 외쳐야만 하는 상황이었잖아요. 아버님 한 분이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계셔서 그 모습을 촬영했는데, 너무 죄송스러웠어요. 촬영 내내 그런 순간들이 계속 있었던 것 같아요.” ‘노숙’은 필수 옵션이었다. 유가족들이 노숙을 하니 촬영을 위해서라도 같이 있어야 했지만 차마 그들을 두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집에 가지 못한 적도 많다. “‘저 먼저 갈게요’라는 말이 안 나왔어요. ‘오늘은 집에 가야 하는데’ 하다가도 밖에서 자는 일이 허다했죠. 왠지 모를 미안함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 유가족분들이 교대로 집에 가서 주무시더라고요. 저도 당당하게 집에 갔다 오겠다고 했더니 모두 ‘아~ 집이 있었겠구나’라고 하셨어요. 저도 집이 있다고 받아쳤죠(웃음).” 가족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건 둘째치고 어떻게 얼굴을 바라볼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고민했던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 유가족들의 정서가 스며들면서 점차 편안해졌다. “이제는 유가족분들과 같이 아이들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면서 깔깔깔 웃거든요. 그렇게 웃다가도 정적이 흘러요. 누가 우리를 보면 제정신 아닌 것처럼 보이겠다고 저희끼리 말하기도 해요. 이야기하면서 막 웃다가 갑자기 우는 분도 있어요. 그러면 저희는 개의치 않으면서 또 깔깔거리고…. 서로 힘든 걸 아니까요. 저 사람 실컷 울 수 있도록 내버려두자는 거죠.” 각자의 역할을 찾아서 무수히 많은 매체가 세월호 관련 기사를 쏟아냈지만 정작 제대로 된 보도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유가족들이 계속 고립돼갔고, 속보 영상을 내보내 그들의 상황을 알려야 하지 않느냐는 내부적인 고민도 많았다. 결국 영상팀은 애초 기획대로 기록 작업에 집중했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호 참사가 어느덧 잊혀져갈 시기에 영화가 세상에 나왔다. 위로를 해주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가족들은 그녀에게 타이밍이 좋은 것 같다는 말을 건넨다. “본인들이 겪었던 것의 10분의 1도 안 나온다고들 말씀하시죠. 그게 당연하고요. 저희가 담아낸 것보다 더 힘든 상황들이 많았으니까요. 이것저것 더 넣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분은 ‘그건 제작진의 몫이다. 우리가 거론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정리해주시는 분도 있었어요(웃음).” 그녀는 독립영화 시장에 대해서도 한마디 더했다. 올해부터 독립예술영화 전용관에 대한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이 모두 끊기게 된 상황. 대신 영화진흥위원회는 극장 자체가 아닌 특정 영화 배급을 지원하는 정책을 내놓았다. “사실 이번에도 대형 멀티플렉스를 뚫으려고 시도했는데 열어주지 않더라고요. 이제는 다들 세월호 참사에 대해 위축이 돼 있어서 어느 분야든 세월호와 관련됐다고 하면 스스로가 자기 검열하듯 열어주지 않는 것 같아요. 저희 입장에서는 독립예술영화 전용관이 무척 소중한 공간이에요.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으니까요. 문화라고 하는 건 수익 여부를 떠나 사람들이 폭넓게 향유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부분이 좀 어려운 것 같아요. 극장이 몇 군데나 버텨줄지, 영화인들은 그 걱정을 하고 있어요.” ‘나쁜 나라’는 김 감독의 영화가 아니라 모두의 영화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그녀의 카메라 앞에 일상을 노출해줬기 때문에 다큐멘터리로 제작될 수 있었고,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이고 후원했기에 개봉까지 갈 수 있었다. “모두가 몇 날 며칠 동안 배가 침몰하는 과정을 목격한 사람들이잖아요. 우리가 참 이기적이다 싶은 게, 어느 순간 피해자를 왜곡해서 비난하고 있더라고요. 제가 그날의 목격자로서 카메라를 들고 기록 작업을 했던 것처럼 각자의 역할이 있는 것 같아요. 이 영화가 지금 시점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가 됐으면 해요.” 지난 12월 14일부터 16일까지 진행된 세월호 참사 청문회에서 유가족들은 “모르겠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최선을 다했다”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어야 했다. 해가 바뀌고, 참사 2주기가 다가오고 있지만 아직도 모든 게 뿌옇고 캄캄할 뿐이다. <■글 / 노도현 기자 ■사진 / 원준희>
- 다시 찾아온 4월, 세월호 돌아보기
- 2015. 03. 25 15:43 화제
- 작년 4월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은 세월호는 아직도 차가운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 사고 후 1년. 도언 엄마 이지성씨와 함께 지난 1년을 돌아봤다. 또다시, 봄 따뜻한 봄 날씨가 반갑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작년 이맘때 세월호 사고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은 봄이 오지 않았으면 한단다. 안산 단원고 2학년 3반이었던 고 김도언양의 어머니 이지성씨(44)는 봄이 오는 게 두렵다고 한다. “작년 3월 중순쯤에 도언이가 친구들과 찍은 동영상이 있어요. 꽃향기도 맡고 나비도 보면서 까르르 웃는 모습이 담겨 있어요. 딱 이맘때죠. 그전에도 힘들었지만 봄이 다가오는 게 많이 두려워요. 새 학기가 시작돼서 도언이 또래들이 학교에 다니고, 곧 벚꽃도 피잖아요. 작년 어느 날 아침에는 도언이가 밖에 벚꽃이 많이 폈다며 사진 찍자고 하더라고요. 근데 제가 지각해서 안 된다고 말렸어요. 수학여행 가기 전엔 튤립축제 가자고 했었는데, 튤립은 5월에 피니까 수학여행 갔다 오면 가자고 약속했단 말이에요. 결국 그 약속도 못 지켰네요.” 그녀는 작년 4월 16일에 받았던 ‘전원 구조’라는 문자메시지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세월호에 탄 승객 전원이 구조됐다는 것이 오보로 밝혀진 뒤에도 아이들이 살아 돌아올 거라고 굳게 믿었지만 현실은 그녀가 생각한 것과 정반대로 흘러갔다. 세월호 참사로 인한 사망자는 295명, 9명은 실종 상태다. 단원고 학생 4명, 교사 2명과 일반 승객 3명이 아직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세월호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은 전보다 많이 줄어들었고, 세월호로 인해 드러난 우리 사회의 민낯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흐려져가고 있다. 남은 가족들의 삶 유가족들의 삶도 1년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우선 일터로 돌아간 부모들이 늘었다. 남아 있는 가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자식 생각에 일을 하기 힘들어 다시 그만둔 부모들이 많다. 누군가 미리 예고라도 해줬다면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었을 거라는 그들. 평화로운 봄날에 청천벽력같이 다가온 자식의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도언 엄마는 피부관리실을 운영하던 피부관리사이자 건강·산모 관리 등에 대해 강의하는 강사였다. 사고 이후에도 강의 요청이 계속 들어왔지만 그녀는 다시 강단에 설 수 없었다. “아이들이 왜 죽었는지도 밝히지도 못한 무능한 엄마가 누구를 위해 강의를 하겠어요. 미리 알았더라면 어떤 방법이든 가리지 않고 다 써봤을 거예요. 산이라면 밤새 땅이라도 파겠는데 바다는 그럴 수 없잖아요. 구조해주기만을 기다렸던 아이들이 우리를 얼마나 원망하면서 하늘나라로 갔겠어요. 그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때가 많아요.” 도언 엄마는 최근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있는 것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없어지는 게 안타까웠고, 자신이 남긴 기록이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언이가 발견되고는 일주일 동안 집에만 있었어요. 그런데 문득 ‘내가 힘이 없어서 내 새끼를 잃었는데 이렇게 무기력하게 앉아 있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어요.” 유가족들의 눈에 남아 있는 자식들이 들어온 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한참 뒤였다. 그들에겐 남아 있는 자식들의 슬픔을 보듬어줄 정신이 없었다. 도언이 오빠는 동생을 떠나보낸 두 달 뒤 군 입대를 했다. 도언 엄마는 아들이 입대하기 전까지도 아들의 분을 알아주지 못했다. “18년 동안 함께 지냈던 동생이 하늘나라로 떠났는데 얼마나 슬펐겠어요. 그런데 저는 피켓 들고 서명 받으러 다니느라 전혀 보듬어주지 못한 거죠. 그때 생각하면 많이 미안해요.” 유가족들은 지난 1년간 목 놓아 울 시간 없이 바쁘게 살았다. 그들은 세월호 사고의 진상 규명을 위해 전국으로 서명을 받으러 다녔다. 광화문광장과 국회 앞에서 피켓을 들고 진실을 밝혀달라고 외쳤다. 전국 곳곳에서 간담회를 열고 일반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유가족들은 외국에까지 지친 몸을 이끌고 가 교민들에게 세월호 사고에 대해 알리고 함께 얘기하는 자리를 가졌다. 이들은 3월 4일부터 18일까지 LA, 뉴욕 등 미국의 주요 도시들을 방문해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과 안전사회 건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간담회를 열었다. 도언 엄마는 고 박예슬양의 아버지 박종범씨와 함께 3월 19일부터 일주일간 캐나다를 방문해 교민들을 만났다. 문제는 ‘인양’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이 하루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이유는 딱 한 가지, ‘진상 규명’을 위해서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인양이 꼭 필요한 상황. 지난해 11월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들로 구성된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는 수중 수색을 종료한다는 정부의 결정에 동의하면서 동시에 세월호를 인양해 선체 내부를 수색할 것을 요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월호 내부 격실이 빠른 속도로 붕괴되고 있어 무리하게 수색 작업을 계속하면 또 다른 사고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피해 가족들은 수색 작업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남았지만 잠수사 가족들이 자신들처럼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길 원치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11일 수중 수색을 종료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인양 문제는 조금도 진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가족대책위원회는 올해 1월 26일부터 2월 14일까지 20일간 안산에서 팽목항까지 릴레이 도보 행진을 했다. 이는 세월호 인양과 실종자 수습 등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행진은 각 반별로 30여 명이 1박 2일간 하루 10시간 25km를 걸은 뒤 매일 저녁 7시에 다음 반과 교대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정말 힘들었어요. 새벽에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죠. 하지만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세월호의 진실에 두 걸음, 세 걸음 다가가고 있는 것 같았어요. 이른 아침에 함성 한 번 지르면 힘든 게 싹 풀려서 걷고 또 걸었어요.” 지난 2월 22일, 이완구 국무총리가 안산 화랑유원지에 마련된 세월호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그는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총동원해서 여러분과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겠다”라며 세월호 피해 가족들을 위로했다. 이날 일부 실종자 가족은 세월호를 인양해달라며 무릎을 꿇고 이 총리에게 호소했다. 이 총리는 그들의 손을 잡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지만 아직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해양수산부는 지난 1월부터 세월호 인양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전남 진도 인근 사고 해역을 관측·조사해오고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세월호 피해 가족들에게 가장 큰 힘이 되는 건 이들의 행동에 함께 동참하는 시민들이다. 그들은 정부나 언론은 바뀌지 않았더라도 시민들은 바뀌었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항상 쉽게 잊는 우리가 대한민국을 이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희생됐다”라고 말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청와대 앞에서 농성할 당시, 가족들 반대편에서 농성을 반대하는 피켓을 들고 있었던 주민들도 피해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눈 뒤엔 이내 피켓을 내리고 그들을 응원해줬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시민들이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가족들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도보 행진 때 한 노인은 그들에게 ‘빨갱이’라고 부르며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이유는 지겹다는 것이었다. 도언 엄마는 더 이상 세월호 피해 가족들을 정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말아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죽은 애들이 너희 애들밖에 없냐고 대놓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저희는 순수하게 내 새끼를 위해 외치는 거예요. 아이들이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잖아요. 저희를 ‘빨갱이’나 ‘종북좌파’ 같은 단어와 엮지 않으셨으면 해요. 저희를 나무라는 어르신들을 보면 가끔 제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해요. 내가 시민 한 명도 설득하지 못하는데 외국에 나가서 교민들을 설득하려고 하다니.”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사진은 가족들의 마음에 또 한 번 상처를 남겼다. 지난 1월 일간베스트저장소(이하 일베)에 단원고 교복을 입고 어묵을 먹는 한 남성의 사진이 올라왔다. 글의 제목은 ‘친구 먹었다’였다. 세월호 사고 이후 일베에는 배 안에 갇힌 사람들을 비유해 ‘오뎅탕이 돼버렸다’라고 비하하는 댓글이 올라왔다. 어묵을 먹는 사진 역시 세월호 피해 학생들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분향소에 한 청년이 찾아왔다.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말했다. 엄마들은 흔히 어른들이 하는 위로의 말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청년은 무릎까지 꿇고 죄인이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봉사를 하게 해달라고 했다. 엄마들이 특별히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대답하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봉사라도 좀 하게”였다. 그는 바로 그 비하 글과 관련된 가해자였다. “가해자가 두 명이에요. 한 명은 직접 글을 올린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글 올리라고 자극한 사람. 우리는 자극한 사람을 몰랐던 거죠. 문을 열고 당장 끌어냈어요. ‘이 정도 했으면 용서해야지’라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절대 용서할 수도 없고, 용서를 논할 가치도 없는 일이에요. 주한 미국 대사가 피습당했을 때도 사실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누가 배 타고 가라 했냐’라며 우리를 비하했던 사람들이 미국 대사 앞에서는 회복을 바란다며 사랑한다고 외치고. 진정한 부모라면 그럴 수 있을까요?”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는 것 세월호 피해 가족들은 세월호가 우리 사회에서 점점 잊히고 있는 게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정부에서 사고의 진실을 덮으려고만 한다면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몇 배 더 많이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참사 1주기를 한 달 앞둔 지난 3월 16일과 17일 세월호 피해 가족들은 팽목항과 청와대 앞에서 조속히 선체를 인양하고, 아홉 명의 실종자를 수습해달라고 정부에 호소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인양 계획조차 없이 참사 1주기를 맞을 수 없다면서 전국을 떠도는 가족들의 절박함에 응답해달라고 외쳤다. 세월호 사고 이후 그 어느 지역보다 비통함에 빠졌던 안산에도 봄이 오고 있다. 세월호 합동분향소가 있는 화랑유원지 근처 화정천 길엔 새싹이 돋았다. 날씨가 좀 더 따뜻해지면 나무에 연분홍빛 벚꽃들이 만개해 아름다운 풍경을 이룬다고 한다. 화정천 길은 하늘로 떠난 단원고 학생들이 아침마다 등교하던 길이기도 하다. 세월호 피해 가족들은 다가올 1주기를 어떻게 맞이할까. 이들은 4월 15일 다시 한번 사고 현장에 방문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도언 엄마는 배 안에 있던 아이들이 곧 구조가 될 거라고 굳게 믿으며 기다리고 있었던 현장을 다시 바라볼 수 있을지가 걱정이란다. 아이를 떠나보낸 엄마들끼린 가끔 이런 얘기도 나눈다고 한다. 벚꽃 피면 벚나무 꽃봉오리를 다 따고 다닐 거라고. 아직 이들에게 4월은 너무 가혹한 듯하다. 세월호는 지금… 세월호 참사 1주기 전까지 세월호 선체 인양 여부가 결정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정의당 박원석 의원이 3월 9일 해양수산부에서 받은 서면 답변 자료에 따르면 해수부는 “세월호 선체 인양 관련 기술 검토 태스크포스팀이 3월 말까지 기술 검토를 완료할 계획이며, 검토 결과 공표는 4월 이후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는 4월에도 선체 인양 계획이 확정될지 불투명하다는 의미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과 책임 등에 관한 진상 규명을 위해 설치된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이하 세월호 특위)는 아직 정식으로 출범하지도 못했다. 지난해 11월 세월호 특별법이 통과되고, 2월 17일 세월호 특위 설립 준비단이 마련한 시행령 안이 정부로 넘어갔다. 그러나 세월호 특위가 정부에 시행령 안을 송부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정부는 공식 답변을 하지 않고 있다. 정부가 적시에 직제·예산 마련에 필요한 지원을 하지 않으면 세월호 특위의 독립성 보장이 어려워질 수 있다. 세월호 특위 측은 정부 보고서를 재검토하는 수준으로 특위 활동을 마치진 않겠다는 입장이다. <■글 / 노도현 기자 ■사진 / 안지영, 경향신문 포토뱅크>
- 그날 이후 240일, 세월호 유가족의 목소리
- 2015. 01. 22 14:10 화제
- 2014년 4월 18일 금요일은 아이들이 수학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유가족들은 오늘도 사고가 난 그날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말한다. 아이들이 돌아오는 금요일이 진짜 오기를 함께 기다려달라고. 안 산 단원고 2학년 6반 신호성군의 엄마 정부자씨는 아들의 시가 지면에 실리길 원했다. 장래희망이 국어 선생님이었던 호성군은 책을 좋아했다. 엄마는 아들이 떠난 뒤에야 비로소 아들의 시를 읽었다. 그리고 아들의 시를 어느 책에라도 싣고 싶었다. 아들에게 작은 선물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책 작업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였어요. 호성이 어머님이 연락하셨더라고요. 호성이가 쓴 시가 있는데 책에 실어줄 수 있냐고요. 어머님께 시를 받고 펑펑 울었어요. 밑동만 남은 나무는 어머님 같고, 베어진 나무를 끌어안고 있는 건 호성이 같아서요.” 호성군의 시를 소개하는 김순천 작가의 옆에서 정부자씨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시는 놀랍도록 세월호 참사 상황과 맞아떨어졌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견했던 것처럼. 잘 자라던 나무를 베어 넘기려는 자는 누구일까. 그것을 말리지 않는 우리는 무엇일까. 공식 인터뷰집, 진상 규명 위한 중요한 자료 지난 1월 13일에 출간된 책 「금요일엔 돌아오렴」(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저, 창비)은 유가족들의 증언과 고백을 모아낸 가족대책위 차원의 공식 인터뷰집이다. 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대표 김순천)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직후부터 그해 12월까지 단원고 희생 학생 유가족들과 동고동락하며 그중 부모 13명을 인터뷰해 책을 펴냈다. “워낙 큰 사건이기 때문에 작가 한두 명이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어요. 영상팀과 사진팀, 구술과 기록 관리를 위한 학자팀이 모여서 함께 시민기록위원회를 만들었어요. 그 안에 작가기록단을 꾸렸고요. 이 책은 작가기록단이 마무리한 첫 번째 작업물입니다.” 작가기록단은 인터뷰를 하고 글을 정리했다. 더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윤태호, 유승하, 최호철, 손문상, 조남준, 홍승우, 마영신, 김보통 8명의 만화가가 총 13편의 삽화와 표지화를 그렸다. 특히 드라마 ‘미생’의 원작자로 잘 알려진 윤태호 작가는 살인적인 스케줄 가운데서도 책의 삽화를 요청받자 “이런 일에 나를 잊지 않고 동참시켜줘 정말 고맙다”라며 흔쾌히 작업을 해줬다고 한다. 세상에서 제일 슬픈 책은 무엇일까. 책을 펴자마자 눈물짓게 되는 책? 다 읽고 나서는 대성통곡이라도 하고 싶어지는 책? 만약 그렇다면 유가족들의 생생한 증언과 고백, 4월 16일에 멈춰버린 시간의 기억을 담은 이 책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책이다. 첫 줄을 읽기가 무섭게 눈시울이 젖어든다. 어떤 부분에선 한 줄 한 줄 읽어가기 어려울 만큼 목이 멘다. 큰 슬픔과 마주하기 두려워 “이제 그만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세월호 참사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은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지금, 기록집을 낸 것일까. “이 책은 그간 언론매체를 통해 보도되지 못한 유가족들의 애타는 마음, 힘없는 개인이 느끼는 국가에 대한 분노와 무력감, 사건 이후 대다수 가족이 시달리고 있는 트라우마 등이 고스란히 담긴 중요한 기록이에요. 9개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사건 당일의 일분일초를 또렷하게 기억해내는 부모들의 기억이 재구성됐다는 점에서 아주 신뢰할 만한 증언록이 될 거예요.” 첫 번째 공식 인터뷰집이란 의미를 가지는 이 책은 진상을 규명하는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고 김 작가는 말했다. 눈물바람으로 눈의 부기가 가라앉을 새가 없었던 정부자씨는 책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제목을 정한 사람이 미웠다”라고 했다. 제목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괜히 미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금요일은 아이들이 돌아오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더 이상 돌아오지 못한다. 무척이나 잔인한, 그러나 인정해야 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유가족들에게 금요일은 여전히 놓을 수 없는 현재진행형의 특별한 어느 날이다. 다시 한번 금요일이 왔으면… “알아요. 아이들이 살아 돌아오는 금요일은 영영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걸. 그래도요. 그래도 꼭 한 번 다시 금요일이 왔으면 좋겠어요. 우리 아이들이 오지 않더라도… 부모들이 아이들을 만나러 갈 수 있는 금요일이라도 말이에요. 그냥, 지금은 그래요. 진상 규명이라도 제대로 되는 것. 그게 지금 우리 부모들이 바랄 수 있는 유일한 금요일이지 않을까 해요.” 정부자씨는 자신은 그저 내 아이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싶은 엄마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 처한 상황이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살아내야 하는 삶이 무척 낯설다고 했다. 기자간담회 중 마이크가 전해졌을 때도 “헐벗은 느낌이다”라고 했다. 많이 배운 똑똑하고 잘난 사람도 아닌 자신이 왜 생판 모르는 기자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말해야만 하는지 좀처럼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간담회 시작 전부터 단상 앞에 앉아 소리 없이 눈물을 훔쳤던 정씨는 간담회 내내 그리고 끝나고 이어진 인터뷰에서도 ‘이 낯선 곳에서 왜 내가 이러고 있어야 하지’라는 생각만 든다고 했다.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서글픈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가 우리 빌라 반장이라 집집마다 관리비를 걷으러 돌아다녔어요. 그때마다 호성이가 뒤에서 손전등을 비춰주며 같이 다녀줬어요. ‘엄마, 엄마. 조심, 조심’ 이러면서요. 사고 난 뒤 동네 사람들이 저를 보면 ‘뒤에서 불 비춰주던 걔야?’ 그러면서 제 손을 잡고 엉엉 울어요. 대화 자체가 안 돼요. 그래서 이제는 제가 관리비도 못 걷어요.” 호성이는 엄마를 무척이나 아끼는 살가운 아들이었다. 그래서 정부자씨는 더욱 아들의 빈자리가 힘들다. 누군가는 이런 그녀를 보고 “호성이 엄마는 호성이 가고 나서 만능이 됐다”라고 했단다. 뭐라도 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이상한 병에 걸린 것 같다고 말했다. 멍하니 있으면 “엄마, 뭐 해?”라고 말하는 호성이 목소리가 들린단다. 그러면 분향소든 어디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돌아다닌다. 책에 대한 소감도 결국은 “진실을 밝혀달라”라는 간곡한 청을 한 번 더 하는 의미다. 사정하고, 울고, 떼쓰면 진실을 밝혀줄 줄 알았단다. 또 당연히 밝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다. 왜 이런 거냐고 정부자씨는 반문한다. 이게 사는 거냐고 한탄한다. 이건 사람 사는 데가 아니라고 발을 동동 구른다. “안산의 곳곳, 분향소, 팽목항, 광화문, 국회, 청운동에서 유가족들을 만났어요.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했어요. 304명이면 304개의 고통이 존재했죠. 우리 사회가 이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무엇을 빼앗아갔는지 분명히 알아야 해요. 책 작업을 한 작가로 느낀 것은… 이 작업을 하면 할수록 세월호 참사와 같은 일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란 거예요. 누구나 유가족이 될 수 있어요. 그렇기에 이 책은 유가족의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해요.” 김 작가는 평범한 유가족들이 얼마나 잘 견디며 싸워왔는지에 대한 삶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긴 인터뷰라고 했다.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유가족들을 이 책을 통해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말이다. 유가족의 아픔이야 가늠할 수조차 없지만 그들과 밀착해 지내면서 그들의 말을 생생히 듣고 기록한 작가들의 아픔도 만만찮았을 것 같았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이지만 선뜻 내가 하겠다고 나서지 못하는 일이었으리라. 안산에 살고 있던 김 작가가 이 기록 작업을 하게 된 것은 피할 수 없는 필연 같은 것이었다. “주요 희생 지역이 안산시 선부동, 와동, 고잔동이에요. 선부동에서 70명, 와동에서 69명, 고잔동에서 83명이 희생됐어요. 제가 살고 있는 선부동의 아파트에서만 15명의 아이가 희생됐어요. 고통의 한가운데 있었죠. 거리를 무시하지 못하겠더군요. 유가족과 인터뷰를 하고 오면 짧게는 하루 반나절, 길게는 며칠씩 앓아누웠어요. 다른 작가들도요.” 일상으로 돌아가는 사치를 꿈꾸다 공황장애로 집 안에서만 생활해온 김건우군의 엄마는 이제 광화문 천막을 지키며 아들을 위해 싸운다. 신승희양의 언니는 매일 밤 거인이 돼 배를 건져내는 꿈을 꾼다. 그러면서 차도에 뛰어들면, 아파트 위에서 뛰어내리면 금방 죽을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자신을 바보 같다고 탓한다. 수학여행 가기 싫어하는 아이를 굳이 떠밀어 보내곤 떨쳐내지 못하는 죄스러움에 몸부림치는 엄마도 유가족 부모들과 모임을 만들어 삶을 추스르려 한다. 암 말기에 접어들어 어떤 활동에도 나서지 못하는 한 어머니가 다른 유가족들에게 미안해하는 이야기도 담겼다. 304명이면 304개의 고통이 존재한다고 했던가. 304개의 고통을 전부 알진 못하더라도 책에 담긴 13명의 고통을 통해 조금이나마 아픔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책에 소개된 열세 분의 이야기는 우연과 우연이 쌓인 결과입니다. 어떤 분은 지면의 제약으로, 어떤 분은 자식 얘길 하는 게 사무치도록 아파 차마 인터뷰를 할 수 없어서, 한창 거리로 나갈 때는 시간이 없어서, 반대로 열심히 활동을 못하시는 분은 자격이 없다고, 또 어떤 분은 자신의 얼굴이 너무 알려졌다며 거절하셨어요. 매번 상황이 급변했죠. 평범한 시민이 어떻게 유가족이 될 수 있는지 정말 생생히 봤습니다.” 인터뷰의 끝은 결국 “진실을 밝혀달라”라는 울음 섞인 간절한 청이었다. 분향소로, 팽목항으로, 광화문으로, 국회로, 청운동으로 바쁘게 다니는 것도 진실 때문이다. 그렇게 길을 누빈 것처럼, 그렇게 책을 만든 것도 진실 때문이다. 아이를 먼저 보낸 엄마들은 가방에 약 한 보따리씩 싸서 갖고 다닌 지 오래다. 심리치료는 언감생심이고, 병원에도 가지 않는다. 입원하라는 말을 들을까 봐서다. 지금은 병원에 누워 있을 때가 아니다. 최근 생존 여학생 1명이 자살을 시도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생존 학생들 중 의사들이 장담할 정도로 경과가 좋은 학생이었다. 그런 아이가 죽고자 마음을 먹었다. 병원에서 눈은 떴지만 입은 닫았던 아이가 며칠 만에 말을 건넨 이는 죽은 단짝의 오빠였다. “그 아이는 ‘내가 죽으면 다시 어른들이 반성하고 진상을 규명해줄 것 같아’ 죽으려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만하고 일상으로 가장 돌아가고 싶은 건 우리예요. 하지만 보세요. 진실을 밝히지 않으면 살아 있는 아이조차 일상으로 돌아가 잘 살지 못해요. 죽은 아이, 산 아이 모두를 위해 우리는 멈출 수 없어요.”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두 번 세 번 죽일 만큼 아픈 말들과 서러운 오해들이 세상을 메우고 있다. 그런데 직접 만난 유가족들은 오로지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기만을 바랐다.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평범한 일상은 다시 누릴 수 없는 사치가 돼버렸다는 사실을. 그래도 꿈꾼다. 오늘 울고, 내일 다시 일어서서 진실을 밝히려 한다면 그 사치를 한 번쯤은, 하루쯤은 누릴 수 있지 않을까 말이다. 그래서 오늘도 낯선 장소에 부은 눈을 감추지 못하고 간다. 가서 말한다. 진실을 밝혀달라고. Mini Interview “유가족 기록, 고통의 언어이지만…진짜 사랑의 언어이기도 해요” 김순천(작가·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대표) 언론을 통해 유가족을 보는 국민과는 달리 유가족과 밀착돼 지냈다. 기록단으로서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유가족의 모습은 어떠했나? 교황이 방문하기 전날이었다. 광화문에서 같이 밤을 새우는데… 예슬이 엄마가 ‘거위의 꿈’을 틀어놓았다. 노래가 흐르는데 갑자기 예슬 엄마가 “예슬아, 보고 싶다!” 하고 소리를 지르더라. 차마 책에 다 담지 못한, 세상에 알리지 못한 이런 유가족의 모습들이 무척 많다. 뉴스나 신문에 유가족이 화내고, 소리 지르고, 어떨 땐 싸움도 하는 모습이 보이니까 그들이 별난 사람들인 줄 안다. 하지만 옆에서 본 유가족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다. 어떤 모습이었냐는 물음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를 만큼 말이다. 유가족에 대한 오해도 있는 게 사실이다. 세상의 오해가 안타까울 것 같다. 많다. 정말 무척이나 많다. 그중 가장 세상이 미울 만큼 안타깝고 속상한 게 보상금과 관련된 얘기다. 보상금을 받았다, 몇 억을 받았다 등등 온갖 억측이 많다. 하지만 지금 유가족이 받은 돈은 누구나 여행 갈 때 의무적으로 드는 여행자보험 보상금 그거 하나다. 그나마도 타가지 않은 분이 더 많다. 그 보상금을 받기 위해서는 아이들 사망신고를 해야 하는데, 사망신고를 안 한 거다. 아니 못하고 있는 거다. 하고 싶지 않으신 거다.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는 말이다. 정말 이분들은 돈 생각 안 한다. 생각해봐라. 세상천지에 자식 목숨하고 돈하고 바꿀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자꾸 돈과 결부시키는 세상의 시선이 참 잔인하다. 보상금 문제는 어떻게 진척되고 있는지? 앞서 말한 여행자보험, 일반인까지 다 가입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부모님들이 받은 보상금은 없다. 그리고 그런 말은 아예 꺼내지도 말라신다. 오해를 받으니까. 우리 사회는 현재 진실 규명을 해달라는 유가족의 청을 보상 문제로 바라본다. 책에 싣지 못했지만 꼭 소개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아직도 바닷속에서 나오지 못한 허다윤양의 이야기다. 아이돌 그룹 비스트의 양요섭을 좋아해서 부족한 용돈을 쪼개고 모아 잡지에 실린 그 가수의 브로마이드를 다 모아놨더라. 그 아이가 아직 못 나오고 있다. 지금 진도에 가면 바지선까지 다 철수했고 작은 부표 하나만 떠 있다. 다윤이 엄마는 그 차가운 바닷속에 자기 딸이 있다는 걸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신다. 많이 괴로워하고 방황하고 계신다. 어떤 때는 당신도 모르게 밖으로 돌아다니시고 그런다. 유가족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로는 무엇이 있을까? 마음은 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몰라 못하는 분들도 많다. 10반 주희양 어머님을 인터뷰할 때였다. 사람들이 욕하고 비난하는 게 힘들지 않으시냐 물었더니, 언젠가 여수 간담회 자리에 갔을 적 이야기를 하시더라.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자기 밭에서 딴 옥수수를 한 바구니 삶아 와서는 안겨주시는데, 바로 삶아서 가져오셨는지 옥수수가 뜨끈뜨끈하더란다. 이후 사람들이 공격할 때, 이상하게 할머니의 옥수수가 생각나신다고 했다. 뜨끈뜨끈하던 그 옥수수가, 그 온기가. 주희양 어머님은 그걸 사랑이라고 표현하셨다. 유가족을 살린 것도, 내동댕이친 것도 국민이다. 할머니와 같은 심정, 함께 있어주려는 것, 분향소라도 한 번 찾아주는 것과 같은, 정말 잊지 않아주려는 마음이 유가족에겐 큰 힘이 된다. 책이 드디어 발간됐다. 작가로서 소망이 있다면? 우리나라는 위험 사회다. 평범한 사람들 누구나 유가족이 될 수 있다. 남의 일이 아닌 나의 문제로 받아들여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유가족뿐 아니라 희생된 학생들, 일반인 분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함께 멈춰서 생각해봤으면 한다. 이 책은 고통의 언어로 쓰인 동시에 진짜 사랑의 언어이기도 하다. 나무 -신호성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는 곳 식물들이 모여 살 수 있는 곳 이 작은 나무에서 누군가는 울고 웃었을 나무 이 나무를 베어 넘기려는 나무꾼은 누구인가 그것을 말리지 않는 우리는 무엇인가 밑동만 남은 나무는 물을 주어도 햇빛을 주어도 소용이 없다 추억을 지키고 싶다면 나무를 끌어안고 봐보아라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강은진(객원기자) ■사진 / 김성구, 경향신문 포토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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