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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세월호 가라앉은 진실 ‘침묵행동’으로 밝혀낸다
2020. 04. 20 11:13 화제
세월호 참사 6주기인 16일 오전 서울 광화문에서 ‘세월호침묵행동’의 유희씨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최근 끝난 21대 총선에서 야당이 대패했다. 그 원인으로 다양한 문제가 지적되는 가운데 야당 후보들의 연이은 막말도 그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모 후보의 세월호 막말과 이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는 야당 수뇌부의 행보에 중도층 유권자들이 등을 돌렸다는 분석이 여러 곳에서 나왔다. 전 국민을 충격 속에 빠뜨리며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은 세월호가 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슬픔의 바다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세월호는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의 한 기준이 됐다. 세월호 참사의 정부 책임을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으냐, 이를 여전히 슬퍼하느냐 이제 그만 잊자고 하느냐 등으로 의견이 나뉜다. ‘촛불 시민’과 ‘태극기 부대’로 사람이 갈리기도 한다. ‘먼훗날 한국사회를 되돌아보면서 세월호 참사 이전 시대와 이후 시대로 나눠질 것’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그러나 세월호 침몰과 관련한 여러 의혹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그러는 가운데 세월호 희생자와 피해자를 모욕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그 수위도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이로 인해 “하루속히 세월호 참사의 모든 의혹들을 밝혀내고 책임자들을 합법적으로 처벌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피로감을 빨리 풀어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키우는 개인과 단체 또한 늘고 있다. ‘세월호침묵행동’도 그들 중 하나다. ‘세월호침묵행동’은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저녁이면 광화문 교차로에 나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스카프피켓행동’을 침묵 속에 진행한다. 또 일요일에는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혜화역 2번 출구 근처에서 세월호 관련 리본이나 배지 등을 나눠 주며 ‘세월호를 기억해 달라’고 호소한다. 더러는 일요일과 공휴일을 빼고 매일같이 청와대 앞에서 진상규명을 눈물로 호소하는 고 임경빈군의 어머니 옆에서 힘을 보태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세월호침묵행동’이 세월호 참사 관련 단체들 중 비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최소한의 ‘사람의 도리’를 할 뿐이다. 그래서 대표도 없다. 서로가 뭐를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저 세월호 희생자와 피해자들의 아픔을 보듬어 안아주고 싶을 뿐이다. 이를 위해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마다 강원도 원주에서 달려오는 사람도 있다. 이들의 첫걸음은 유희씨(40)가 지난해 5월28일 광화문에서 세월호 리본스카프를 들면서 시작됐다. 전날 청와대는 ‘세월호 특별수사단 설치와 전면 재수사’를 바라는 국민청원에 대한 답변에서 “아직 독립적인 수사체계를 말할 단계는 아니다”라며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지켜보자고 했다. 청와대가 문제 해결을 위해 팔소매를 걷어붙이기를 바란 시민 가운데 한 명이던 유씨로서는 어이가 없었다. 청와대 답변에는 의지도 없고, 내용도 없다고 생각했다. 사참위 뒤에 숨어 버린 청와대에 화가 났다. 그래서 홀로 광화문에 나서 침묵한 채 피켓을 들었다. 그런 유씨 곁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유씨는 “오래전부터 노란리본공작소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촛불정부의 책임있는 답변을 기다렸는데, 너무 실망스러웠다. 소리치지 않으면 가슴이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무작정 피켓을 들고 광화문에 섰다”고 전했다. 그로부터 11개월. 절대 녹록지 않은 시간이었다. “지나가면서 아무렇지 않게 세월호 희생자와 피해자를 모독하는 발언을 하는 사람이 많다. 더러는 ‘못된’ 유투버들이 찾아와 그런 말을 하고 녹화까지 해 간다. 그런 날이면 몸 안의 모든 장기가 뒤틀리는 듯한 고통을 겪는다. 지독한 몸살 같은….” 그러나 모든 이들이 그러는 것은 아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다가와 ‘힘내라’고 응원해 주고, 그럴 때면 정말 힘이 난다고 유씨는 전한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더욱 무장이 되는 느낌이다. 추운 날에는 핫팩을 잘 쓰는 요령이 생겼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우비를 입고 버틸 강단이 생겼다. 경빈이 엄마 등 세월호 유가족들이 모든 억울함을 풀었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피켓을 들 것이다.” 16일 오전 서울 광화문에서 ‘세월호침묵행동’의 김지수씨(오른쪽)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침묵행동을 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유씨 옆에서 함께 피켓을 들고 있는 김지수씨(55)는 “세월호가 점점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세월호는 희생자와 그들 가족의 문제가 아니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조차 밝혀내지 못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우리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겠냐”고 말했다. 김씨는 ‘이 일을 하면서 어떤 보람이 있느냐’는 물음에 “보람을 찾으려 하는 일이 아니다. 살려고 하는 일이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수백명이 한꺼번에 생목숨을 잃었는데, 그에 대한 진상규명도 이뤄지지 않고, 진실을 밝혀 달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되레 괴물이 되는 곳이라면, 그곳이 곧 지옥이다. 지옥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국회를 향해서도 쓴소리를 내뱉었다. 많은 의원이 가슴에 배지만 달고 겉으로만 행동할 뿐 세월호 진상규명 등 실질적은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16일 오전 서울 광화문에서 ‘세월호침묵행동’ 식구들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세월호침묵행동’에는 단원고 희생자 김동영군의 아버지 김재만씨(57)도 함께하고 있다. 김씨는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혀 달라는 것은 누구에게 보복해 아이들의 한을 풀기 위함이 아니다.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 다만 상대가 누구이고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아야 용서고 뭐고 할 수 있지 않으냐”고 말했다. 김씨는 이어 “진도에서는 장례를 치를 때 상주를 웃음짓게 할 정도로 흥을 돋운다. 나도 그러고 싶다. 세월호 참사의 모든 의혹이 밝혀지면 해마다 4월16일을 ‘슬픔을 기억하는 날’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더욱 안전해진 것을 기뻐하는 날로 만들고 싶다”고 덧붙였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세월호의 진실은 여전히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아 있다. 그곳이 더는 슬픔과 원통의 공간이 아니라 위로와 배려의 공간이자 ‘안전 교육의 장’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세월호침묵행동’의 소리 없는 외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상규명이 우선이다. ■세월호침묵행동은? 현재 세월호 참사 진실규명 등을 위해 활동하는 주축은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와 4월16일의 약속 국민연대다. 하지만 두 곳 외에도 전국적으로 수많은 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려 애쓰고 있다. 세월호침묵행동도 그중 하나로, 시민 10여명이 순전히 자신들의 주머닛돈으로 세월호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 가족들의 아픔을 보듬어안는 일을 해오고 있다. 정기적인 모임이 있고 여러 행동도 함께하지만 회비나 규칙 같은 것은 없다. 당연히 대표도 없다. 이들은 “세월호 참사의 아픔은 우리 사회가 잊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희생자 가족들이 사고 책임자들을 용서했을 때 비로소 씻어지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광화문진상규면세월호 진실
세월호 다큐 제작한 김진열 감독이 남긴 1년의 스케치
2016. 01. 05 14:52 화제
김진열은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주로 개인의 삶을 파고들었던 그녀는 어느 한 집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로 가족을 잃은 이들이었다. ‘나쁜 나라’는 세월호 참사 피해 가족들의 이야기다. 참사 후 1년의 시간을 차곡차곡 담았다. 2015년 10월 개봉될 예정이었지만 두 달이 더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첫 장면이 마음에 걸린 탓이다. 본래는 생존 학생들이 사고 후 처음으로 등교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었다. 내부적인 논의 끝에 김진열(42) 감독은 첫 장면을 수정했다. 영화는 2014년 6월 5일 진도체육관에서 시작된다. 세월호 국정조사특별위원회의 첫 활동이 시작된 날이다. “기본적으로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요. 국정조사특별위원회와 첫 대화를 하면서 가족들은 정치인들만 믿고 기다려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죠. 상황적으로 가족분들이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어요.” 참사 직후 안산에는 시민기록위원회가 구성됐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기록하고 후대에 남기는 것이 목적이었다. 영상, 사진, 글, 만화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였다. 6년 전부터 영화 제작 워크숍을 위해 안산을 오가던 김 감독 역시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됐다. “전혀 낯선 지역이 아니다 보니 마음이 좀 더 쓰였어요. 제가 교육을 다니던 동네가 고잔동이었는데, 단원고등학교까지 걸어서 15분이에요. 오가면서 마주쳤던 아이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까 더 속상했던 것 같아요.” 그녀는 정일건·이수정 감독과 함께 다큐멘터리 연출에 뛰어들었다. 처음엔 너무나 큰 참사여서 어떤 식으로 기록해야 할지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연스레 김 감독은 ‘책임연출자’가 됐다. 영화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가족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유가족 내부 회의, 안산 분향소의 일상, 해경 회의, 국회 단식 농성, 도보 순례 등 유가족들이 1년간 밟아온 걸음들이 카메라 안에 담겼다.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정서적 흐름’이다. “편집할 때 의견이 두 가지로 나뉘었어요. 한쪽에서는 정치권에서 수사·조사권 합의할 때 어떤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고, 왜 유가족들이 합의안에 반대했는지 등 세부적으로 들어가길 원했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어차피 합의가 끝난 상황에서 그 과정을 다 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입장이었죠. 특별법이 통과되고 한참 뒤에 영화가 나올 거니까 너무 깊게 들어가기보다는 정서적 흐름에 중심을 두는 걸로 의견이 모아졌어요.” 사실 이 영화에는 내레이션이 크게 필요하지 않다. 간단한 자막만으로도 관객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전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민들에게 좀 더 친절하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약간의 내레이션이 필요하다고 김 감독은 판단했다. 영화 속에서 틈틈이 들리는 차분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배우 문소리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면 관객들이 좀 더 편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배우이고, 그중에서도 세월호 참사에 대해 마음 아파하고 관련된 활동을 하셨던 분이면 좋겠다 싶었는데 문소리씨가 거론됐어요. 문소리씨도 전체 의도를 파악하시고 나서 흔쾌히 참여를 결정해주셨어요. 모르긴 해도 많이 힘드셨을 거예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굉장히 감사했죠.” 카메라를 들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을 때부터 카메라를 든 건 아니었다. 2년 정도 작은 규모의 격주간지 사회부, 문화부에서 펜을 들고 현장을 누볐다. 기자에서 감독이 된 건 취재 과정에서 오는 갈증 때문이었다. “취재원을 겨우 두세 번 만나고 글을 쓰다 보니 내가 분명 잘못 쓰는 게 있겠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그런데 다큐멘터리를 보니까 카메라 앞에 서 있는 사람과 카메라를 든 사람이 되게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거예요. 단순히 한두 번 만난 관계는 아닌 것 같더라고요. 취재원과 오랫동안 밀착하지 못하는 것. 그걸 다큐멘터리가 해소해줄 수 있겠다 싶었어요.” 기자일 땐 새벽까지 일하며 원고 마감하는 게 너무 고단했다. 그런데 영상을 편집하면서는 밤을 새도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이 직접 카메라에 담았던 사람들을 편집 과정에서 또다시 화면으로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 다큐멘터리만의 매력이었다. “그렇게 밤샘을 해도 힘들지 않아서 이 일이 나하고 맞나 보다 생각하지만, 정작 후배들한테는 권하지 않아요(웃음).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들은 되게 느슨해요. 보통 1년에서 3년 정도의 기간을 두고 작업하는데, 매일같이 취재 대상과 밀착할 순 없잖아요. 자기 생활도 통제해야 하고, 생계를 위해 그 밖의 일도 해야 하죠. 그래서 후배들에게는 프로덕션에서 월급 받으면서 단기간에 ‘빡세게’ 배우고, 나이 들었을 때 독립 다큐를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해주고 있어요.” 전보다 더 잘하고 싶고, 남들에게 인정도 받고, 스스로도 최선을 다해 만들었다는 성취감을 느끼고 싶었다. 항상 이런 생각들에 짓눌려 다시 연출을 하기까지 7년이 걸렸다. 너무 오랜만이다 보니 감을 잃은 느낌이었다. 그만큼 이번 작업은 그녀에게 새로운 시도였다. “제 또래와 작업한 게 처음이었어요. 유가족분들이 저하고 비슷한 나이시거든요. ‘나도 나이 들었나 보다. 그래서 사람 대할 때 능글능글하게 척척 안기는구나’라는 생각도 들었고요(웃음). 이번 작업을 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안산 분향소에 가서 분향 한두 번 하고 가끔 뉴스에서 유가족분들 보고 마음 아파하는 정도로 끝났을 것 같아요. 이번 다큐멘터리를 통해 소시민들이 어떻게 시민으로 성장해가는지 보게 됐어요. 저에게는 큰 공부였죠.”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경험은 없다. 대학 때 학생운동도 하지 않았다. 선배들과 집회 현장에 가면 전경들을 뚫고 나와 홀로 김밥을 사 먹으러 갔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그녀의 관심은 항상 약자를 향해 있었다. 여성 장애인의 삶을 주목한 ‘여성 장애인 김진옥씨의 결혼 이야기’(1999), 비전향 장기수 할머니들의 모습을 담은 ‘잊혀진 여전사’(2005) 등 그녀가 만든 작품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줄곧 한 인물을 통해 뭔가를 보여주는 방식을 택해왔다. 다수가 모인 집단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건 ‘나쁜 나라’가 처음이다. 참사가 일어난 지 70일 정도 지났을 무렵, 진상 규명을 위한 서명을 받으러 전국 각지로 떠나는 유가족들과 동행했다. 막 초기 작업을 시작했던 그녀는 이때를 가장 마음 아팠던 순간으로 꼽는다. “대구 쪽에 갔을 때였어요. 유가족분들이 거리에 가만히 서 계시는 걸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슬퍼하고 힘들어해도 부족한데, 거리로 나가서 피켓 들고 외쳐야만 하는 상황이었잖아요. 아버님 한 분이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계셔서 그 모습을 촬영했는데, 너무 죄송스러웠어요. 촬영 내내 그런 순간들이 계속 있었던 것 같아요.” ‘노숙’은 필수 옵션이었다. 유가족들이 노숙을 하니 촬영을 위해서라도 같이 있어야 했지만 차마 그들을 두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집에 가지 못한 적도 많다. “‘저 먼저 갈게요’라는 말이 안 나왔어요. ‘오늘은 집에 가야 하는데’ 하다가도 밖에서 자는 일이 허다했죠. 왠지 모를 미안함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 유가족분들이 교대로 집에 가서 주무시더라고요. 저도 당당하게 집에 갔다 오겠다고 했더니 모두 ‘아~ 집이 있었겠구나’라고 하셨어요. 저도 집이 있다고 받아쳤죠(웃음).” 가족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건 둘째치고 어떻게 얼굴을 바라볼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고민했던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 유가족들의 정서가 스며들면서 점차 편안해졌다. “이제는 유가족분들과 같이 아이들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면서 깔깔깔 웃거든요. 그렇게 웃다가도 정적이 흘러요. 누가 우리를 보면 제정신 아닌 것처럼 보이겠다고 저희끼리 말하기도 해요. 이야기하면서 막 웃다가 갑자기 우는 분도 있어요. 그러면 저희는 개의치 않으면서 또 깔깔거리고…. 서로 힘든 걸 아니까요. 저 사람 실컷 울 수 있도록 내버려두자는 거죠.” 각자의 역할을 찾아서 무수히 많은 매체가 세월호 관련 기사를 쏟아냈지만 정작 제대로 된 보도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유가족들이 계속 고립돼갔고, 속보 영상을 내보내 그들의 상황을 알려야 하지 않느냐는 내부적인 고민도 많았다. 결국 영상팀은 애초 기획대로 기록 작업에 집중했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호 참사가 어느덧 잊혀져갈 시기에 영화가 세상에 나왔다. 위로를 해주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가족들은 그녀에게 타이밍이 좋은 것 같다는 말을 건넨다. “본인들이 겪었던 것의 10분의 1도 안 나온다고들 말씀하시죠. 그게 당연하고요. 저희가 담아낸 것보다 더 힘든 상황들이 많았으니까요. 이것저것 더 넣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분은 ‘그건 제작진의 몫이다. 우리가 거론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정리해주시는 분도 있었어요(웃음).” 그녀는 독립영화 시장에 대해서도 한마디 더했다. 올해부터 독립예술영화 전용관에 대한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이 모두 끊기게 된 상황. 대신 영화진흥위원회는 극장 자체가 아닌 특정 영화 배급을 지원하는 정책을 내놓았다. “사실 이번에도 대형 멀티플렉스를 뚫으려고 시도했는데 열어주지 않더라고요. 이제는 다들 세월호 참사에 대해 위축이 돼 있어서 어느 분야든 세월호와 관련됐다고 하면 스스로가 자기 검열하듯 열어주지 않는 것 같아요. 저희 입장에서는 독립예술영화 전용관이 무척 소중한 공간이에요.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으니까요. 문화라고 하는 건 수익 여부를 떠나 사람들이 폭넓게 향유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부분이 좀 어려운 것 같아요. 극장이 몇 군데나 버텨줄지, 영화인들은 그 걱정을 하고 있어요.” ‘나쁜 나라’는 김 감독의 영화가 아니라 모두의 영화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그녀의 카메라 앞에 일상을 노출해줬기 때문에 다큐멘터리로 제작될 수 있었고,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이고 후원했기에 개봉까지 갈 수 있었다. “모두가 몇 날 며칠 동안 배가 침몰하는 과정을 목격한 사람들이잖아요. 우리가 참 이기적이다 싶은 게, 어느 순간 피해자를 왜곡해서 비난하고 있더라고요. 제가 그날의 목격자로서 카메라를 들고 기록 작업을 했던 것처럼 각자의 역할이 있는 것 같아요. 이 영화가 지금 시점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가 됐으면 해요.” 지난 12월 14일부터 16일까지 진행된 세월호 참사 청문회에서 유가족들은 “모르겠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최선을 다했다”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어야 했다. 해가 바뀌고, 참사 2주기가 다가오고 있지만 아직도 모든 게 뿌옇고 캄캄할 뿐이다. <■글 / 노도현 기자 ■사진 / 원준희>
다시 찾아온 4월, 세월호 돌아보기
2015. 03. 25 15:43 화제
작년 4월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은 세월호는 아직도 차가운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 사고 후 1년. 도언 엄마 이지성씨와 함께 지난 1년을 돌아봤다. 또다시, 봄 따뜻한 봄 날씨가 반갑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작년 이맘때 세월호 사고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은 봄이 오지 않았으면 한단다. 안산 단원고 2학년 3반이었던 고 김도언양의 어머니 이지성씨(44)는 봄이 오는 게 두렵다고 한다. “작년 3월 중순쯤에 도언이가 친구들과 찍은 동영상이 있어요. 꽃향기도 맡고 나비도 보면서 까르르 웃는 모습이 담겨 있어요. 딱 이맘때죠. 그전에도 힘들었지만 봄이 다가오는 게 많이 두려워요. 새 학기가 시작돼서 도언이 또래들이 학교에 다니고, 곧 벚꽃도 피잖아요. 작년 어느 날 아침에는 도언이가 밖에 벚꽃이 많이 폈다며 사진 찍자고 하더라고요. 근데 제가 지각해서 안 된다고 말렸어요. 수학여행 가기 전엔 튤립축제 가자고 했었는데, 튤립은 5월에 피니까 수학여행 갔다 오면 가자고 약속했단 말이에요. 결국 그 약속도 못 지켰네요.” 그녀는 작년 4월 16일에 받았던 ‘전원 구조’라는 문자메시지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세월호에 탄 승객 전원이 구조됐다는 것이 오보로 밝혀진 뒤에도 아이들이 살아 돌아올 거라고 굳게 믿었지만 현실은 그녀가 생각한 것과 정반대로 흘러갔다. 세월호 참사로 인한 사망자는 295명, 9명은 실종 상태다. 단원고 학생 4명, 교사 2명과 일반 승객 3명이 아직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세월호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은 전보다 많이 줄어들었고, 세월호로 인해 드러난 우리 사회의 민낯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흐려져가고 있다. 남은 가족들의 삶 유가족들의 삶도 1년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우선 일터로 돌아간 부모들이 늘었다. 남아 있는 가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자식 생각에 일을 하기 힘들어 다시 그만둔 부모들이 많다. 누군가 미리 예고라도 해줬다면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었을 거라는 그들. 평화로운 봄날에 청천벽력같이 다가온 자식의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도언 엄마는 피부관리실을 운영하던 피부관리사이자 건강·산모 관리 등에 대해 강의하는 강사였다. 사고 이후에도 강의 요청이 계속 들어왔지만 그녀는 다시 강단에 설 수 없었다. “아이들이 왜 죽었는지도 밝히지도 못한 무능한 엄마가 누구를 위해 강의를 하겠어요. 미리 알았더라면 어떤 방법이든 가리지 않고 다 써봤을 거예요. 산이라면 밤새 땅이라도 파겠는데 바다는 그럴 수 없잖아요. 구조해주기만을 기다렸던 아이들이 우리를 얼마나 원망하면서 하늘나라로 갔겠어요. 그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때가 많아요.” 도언 엄마는 최근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있는 것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없어지는 게 안타까웠고, 자신이 남긴 기록이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언이가 발견되고는 일주일 동안 집에만 있었어요. 그런데 문득 ‘내가 힘이 없어서 내 새끼를 잃었는데 이렇게 무기력하게 앉아 있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어요.” 유가족들의 눈에 남아 있는 자식들이 들어온 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한참 뒤였다. 그들에겐 남아 있는 자식들의 슬픔을 보듬어줄 정신이 없었다. 도언이 오빠는 동생을 떠나보낸 두 달 뒤 군 입대를 했다. 도언 엄마는 아들이 입대하기 전까지도 아들의 분을 알아주지 못했다. “18년 동안 함께 지냈던 동생이 하늘나라로 떠났는데 얼마나 슬펐겠어요. 그런데 저는 피켓 들고 서명 받으러 다니느라 전혀 보듬어주지 못한 거죠. 그때 생각하면 많이 미안해요.” 유가족들은 지난 1년간 목 놓아 울 시간 없이 바쁘게 살았다. 그들은 세월호 사고의 진상 규명을 위해 전국으로 서명을 받으러 다녔다. 광화문광장과 국회 앞에서 피켓을 들고 진실을 밝혀달라고 외쳤다. 전국 곳곳에서 간담회를 열고 일반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유가족들은 외국에까지 지친 몸을 이끌고 가 교민들에게 세월호 사고에 대해 알리고 함께 얘기하는 자리를 가졌다. 이들은 3월 4일부터 18일까지 LA, 뉴욕 등 미국의 주요 도시들을 방문해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과 안전사회 건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간담회를 열었다. 도언 엄마는 고 박예슬양의 아버지 박종범씨와 함께 3월 19일부터 일주일간 캐나다를 방문해 교민들을 만났다. 문제는 ‘인양’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이 하루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이유는 딱 한 가지, ‘진상 규명’을 위해서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인양이 꼭 필요한 상황. 지난해 11월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들로 구성된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는 수중 수색을 종료한다는 정부의 결정에 동의하면서 동시에 세월호를 인양해 선체 내부를 수색할 것을 요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월호 내부 격실이 빠른 속도로 붕괴되고 있어 무리하게 수색 작업을 계속하면 또 다른 사고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피해 가족들은 수색 작업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남았지만 잠수사 가족들이 자신들처럼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길 원치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11일 수중 수색을 종료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인양 문제는 조금도 진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가족대책위원회는 올해 1월 26일부터 2월 14일까지 20일간 안산에서 팽목항까지 릴레이 도보 행진을 했다. 이는 세월호 인양과 실종자 수습 등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행진은 각 반별로 30여 명이 1박 2일간 하루 10시간 25km를 걸은 뒤 매일 저녁 7시에 다음 반과 교대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정말 힘들었어요. 새벽에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죠. 하지만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세월호의 진실에 두 걸음, 세 걸음 다가가고 있는 것 같았어요. 이른 아침에 함성 한 번 지르면 힘든 게 싹 풀려서 걷고 또 걸었어요.” 지난 2월 22일, 이완구 국무총리가 안산 화랑유원지에 마련된 세월호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그는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총동원해서 여러분과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겠다”라며 세월호 피해 가족들을 위로했다. 이날 일부 실종자 가족은 세월호를 인양해달라며 무릎을 꿇고 이 총리에게 호소했다. 이 총리는 그들의 손을 잡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지만 아직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해양수산부는 지난 1월부터 세월호 인양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전남 진도 인근 사고 해역을 관측·조사해오고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세월호 피해 가족들에게 가장 큰 힘이 되는 건 이들의 행동에 함께 동참하는 시민들이다. 그들은 정부나 언론은 바뀌지 않았더라도 시민들은 바뀌었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항상 쉽게 잊는 우리가 대한민국을 이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희생됐다”라고 말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청와대 앞에서 농성할 당시, 가족들 반대편에서 농성을 반대하는 피켓을 들고 있었던 주민들도 피해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눈 뒤엔 이내 피켓을 내리고 그들을 응원해줬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시민들이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가족들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도보 행진 때 한 노인은 그들에게 ‘빨갱이’라고 부르며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이유는 지겹다는 것이었다. 도언 엄마는 더 이상 세월호 피해 가족들을 정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말아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죽은 애들이 너희 애들밖에 없냐고 대놓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저희는 순수하게 내 새끼를 위해 외치는 거예요. 아이들이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잖아요. 저희를 ‘빨갱이’나 ‘종북좌파’ 같은 단어와 엮지 않으셨으면 해요. 저희를 나무라는 어르신들을 보면 가끔 제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해요. 내가 시민 한 명도 설득하지 못하는데 외국에 나가서 교민들을 설득하려고 하다니.”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사진은 가족들의 마음에 또 한 번 상처를 남겼다. 지난 1월 일간베스트저장소(이하 일베)에 단원고 교복을 입고 어묵을 먹는 한 남성의 사진이 올라왔다. 글의 제목은 ‘친구 먹었다’였다. 세월호 사고 이후 일베에는 배 안에 갇힌 사람들을 비유해 ‘오뎅탕이 돼버렸다’라고 비하하는 댓글이 올라왔다. 어묵을 먹는 사진 역시 세월호 피해 학생들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분향소에 한 청년이 찾아왔다.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말했다. 엄마들은 흔히 어른들이 하는 위로의 말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청년은 무릎까지 꿇고 죄인이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봉사를 하게 해달라고 했다. 엄마들이 특별히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대답하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봉사라도 좀 하게”였다. 그는 바로 그 비하 글과 관련된 가해자였다. “가해자가 두 명이에요. 한 명은 직접 글을 올린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글 올리라고 자극한 사람. 우리는 자극한 사람을 몰랐던 거죠. 문을 열고 당장 끌어냈어요. ‘이 정도 했으면 용서해야지’라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절대 용서할 수도 없고, 용서를 논할 가치도 없는 일이에요. 주한 미국 대사가 피습당했을 때도 사실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누가 배 타고 가라 했냐’라며 우리를 비하했던 사람들이 미국 대사 앞에서는 회복을 바란다며 사랑한다고 외치고. 진정한 부모라면 그럴 수 있을까요?”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는 것 세월호 피해 가족들은 세월호가 우리 사회에서 점점 잊히고 있는 게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정부에서 사고의 진실을 덮으려고만 한다면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몇 배 더 많이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참사 1주기를 한 달 앞둔 지난 3월 16일과 17일 세월호 피해 가족들은 팽목항과 청와대 앞에서 조속히 선체를 인양하고, 아홉 명의 실종자를 수습해달라고 정부에 호소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인양 계획조차 없이 참사 1주기를 맞을 수 없다면서 전국을 떠도는 가족들의 절박함에 응답해달라고 외쳤다. 세월호 사고 이후 그 어느 지역보다 비통함에 빠졌던 안산에도 봄이 오고 있다. 세월호 합동분향소가 있는 화랑유원지 근처 화정천 길엔 새싹이 돋았다. 날씨가 좀 더 따뜻해지면 나무에 연분홍빛 벚꽃들이 만개해 아름다운 풍경을 이룬다고 한다. 화정천 길은 하늘로 떠난 단원고 학생들이 아침마다 등교하던 길이기도 하다. 세월호 피해 가족들은 다가올 1주기를 어떻게 맞이할까. 이들은 4월 15일 다시 한번 사고 현장에 방문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도언 엄마는 배 안에 있던 아이들이 곧 구조가 될 거라고 굳게 믿으며 기다리고 있었던 현장을 다시 바라볼 수 있을지가 걱정이란다. 아이를 떠나보낸 엄마들끼린 가끔 이런 얘기도 나눈다고 한다. 벚꽃 피면 벚나무 꽃봉오리를 다 따고 다닐 거라고. 아직 이들에게 4월은 너무 가혹한 듯하다. 세월호는 지금… 세월호 참사 1주기 전까지 세월호 선체 인양 여부가 결정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정의당 박원석 의원이 3월 9일 해양수산부에서 받은 서면 답변 자료에 따르면 해수부는 “세월호 선체 인양 관련 기술 검토 태스크포스팀이 3월 말까지 기술 검토를 완료할 계획이며, 검토 결과 공표는 4월 이후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는 4월에도 선체 인양 계획이 확정될지 불투명하다는 의미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과 책임 등에 관한 진상 규명을 위해 설치된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이하 세월호 특위)는 아직 정식으로 출범하지도 못했다. 지난해 11월 세월호 특별법이 통과되고, 2월 17일 세월호 특위 설립 준비단이 마련한 시행령 안이 정부로 넘어갔다. 그러나 세월호 특위가 정부에 시행령 안을 송부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정부는 공식 답변을 하지 않고 있다. 정부가 적시에 직제·예산 마련에 필요한 지원을 하지 않으면 세월호 특위의 독립성 보장이 어려워질 수 있다. 세월호 특위 측은 정부 보고서를 재검토하는 수준으로 특위 활동을 마치진 않겠다는 입장이다. <■글 / 노도현 기자 ■사진 / 안지영, 경향신문 포토뱅크>
그날 이후 240일, 세월호 유가족의 목소리
2015. 01. 22 14:10 화제
2014년 4월 18일 금요일은 아이들이 수학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유가족들은 오늘도 사고가 난 그날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말한다. 아이들이 돌아오는 금요일이 진짜 오기를 함께 기다려달라고. 안 산 단원고 2학년 6반 신호성군의 엄마 정부자씨는 아들의 시가 지면에 실리길 원했다. 장래희망이 국어 선생님이었던 호성군은 책을 좋아했다. 엄마는 아들이 떠난 뒤에야 비로소 아들의 시를 읽었다. 그리고 아들의 시를 어느 책에라도 싣고 싶었다. 아들에게 작은 선물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책 작업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였어요. 호성이 어머님이 연락하셨더라고요. 호성이가 쓴 시가 있는데 책에 실어줄 수 있냐고요. 어머님께 시를 받고 펑펑 울었어요. 밑동만 남은 나무는 어머님 같고, 베어진 나무를 끌어안고 있는 건 호성이 같아서요.” 호성군의 시를 소개하는 김순천 작가의 옆에서 정부자씨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시는 놀랍도록 세월호 참사 상황과 맞아떨어졌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견했던 것처럼. 잘 자라던 나무를 베어 넘기려는 자는 누구일까. 그것을 말리지 않는 우리는 무엇일까. 공식 인터뷰집, 진상 규명 위한 중요한 자료 지난 1월 13일에 출간된 책 「금요일엔 돌아오렴」(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저, 창비)은 유가족들의 증언과 고백을 모아낸 가족대책위 차원의 공식 인터뷰집이다. 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대표 김순천)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직후부터 그해 12월까지 단원고 희생 학생 유가족들과 동고동락하며 그중 부모 13명을 인터뷰해 책을 펴냈다. “워낙 큰 사건이기 때문에 작가 한두 명이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어요. 영상팀과 사진팀, 구술과 기록 관리를 위한 학자팀이 모여서 함께 시민기록위원회를 만들었어요. 그 안에 작가기록단을 꾸렸고요. 이 책은 작가기록단이 마무리한 첫 번째 작업물입니다.” 작가기록단은 인터뷰를 하고 글을 정리했다. 더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윤태호, 유승하, 최호철, 손문상, 조남준, 홍승우, 마영신, 김보통 8명의 만화가가 총 13편의 삽화와 표지화를 그렸다. 특히 드라마 ‘미생’의 원작자로 잘 알려진 윤태호 작가는 살인적인 스케줄 가운데서도 책의 삽화를 요청받자 “이런 일에 나를 잊지 않고 동참시켜줘 정말 고맙다”라며 흔쾌히 작업을 해줬다고 한다. 세상에서 제일 슬픈 책은 무엇일까. 책을 펴자마자 눈물짓게 되는 책? 다 읽고 나서는 대성통곡이라도 하고 싶어지는 책? 만약 그렇다면 유가족들의 생생한 증언과 고백, 4월 16일에 멈춰버린 시간의 기억을 담은 이 책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책이다. 첫 줄을 읽기가 무섭게 눈시울이 젖어든다. 어떤 부분에선 한 줄 한 줄 읽어가기 어려울 만큼 목이 멘다. 큰 슬픔과 마주하기 두려워 “이제 그만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세월호 참사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은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지금, 기록집을 낸 것일까. “이 책은 그간 언론매체를 통해 보도되지 못한 유가족들의 애타는 마음, 힘없는 개인이 느끼는 국가에 대한 분노와 무력감, 사건 이후 대다수 가족이 시달리고 있는 트라우마 등이 고스란히 담긴 중요한 기록이에요. 9개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사건 당일의 일분일초를 또렷하게 기억해내는 부모들의 기억이 재구성됐다는 점에서 아주 신뢰할 만한 증언록이 될 거예요.” 첫 번째 공식 인터뷰집이란 의미를 가지는 이 책은 진상을 규명하는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고 김 작가는 말했다. 눈물바람으로 눈의 부기가 가라앉을 새가 없었던 정부자씨는 책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제목을 정한 사람이 미웠다”라고 했다. 제목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괜히 미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금요일은 아이들이 돌아오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더 이상 돌아오지 못한다. 무척이나 잔인한, 그러나 인정해야 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유가족들에게 금요일은 여전히 놓을 수 없는 현재진행형의 특별한 어느 날이다. 다시 한번 금요일이 왔으면… “알아요. 아이들이 살아 돌아오는 금요일은 영영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걸. 그래도요. 그래도 꼭 한 번 다시 금요일이 왔으면 좋겠어요. 우리 아이들이 오지 않더라도… 부모들이 아이들을 만나러 갈 수 있는 금요일이라도 말이에요. 그냥, 지금은 그래요. 진상 규명이라도 제대로 되는 것. 그게 지금 우리 부모들이 바랄 수 있는 유일한 금요일이지 않을까 해요.” 정부자씨는 자신은 그저 내 아이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싶은 엄마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 처한 상황이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살아내야 하는 삶이 무척 낯설다고 했다. 기자간담회 중 마이크가 전해졌을 때도 “헐벗은 느낌이다”라고 했다. 많이 배운 똑똑하고 잘난 사람도 아닌 자신이 왜 생판 모르는 기자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말해야만 하는지 좀처럼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간담회 시작 전부터 단상 앞에 앉아 소리 없이 눈물을 훔쳤던 정씨는 간담회 내내 그리고 끝나고 이어진 인터뷰에서도 ‘이 낯선 곳에서 왜 내가 이러고 있어야 하지’라는 생각만 든다고 했다.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서글픈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가 우리 빌라 반장이라 집집마다 관리비를 걷으러 돌아다녔어요. 그때마다 호성이가 뒤에서 손전등을 비춰주며 같이 다녀줬어요. ‘엄마, 엄마. 조심, 조심’ 이러면서요. 사고 난 뒤 동네 사람들이 저를 보면 ‘뒤에서 불 비춰주던 걔야?’ 그러면서 제 손을 잡고 엉엉 울어요. 대화 자체가 안 돼요. 그래서 이제는 제가 관리비도 못 걷어요.” 호성이는 엄마를 무척이나 아끼는 살가운 아들이었다. 그래서 정부자씨는 더욱 아들의 빈자리가 힘들다. 누군가는 이런 그녀를 보고 “호성이 엄마는 호성이 가고 나서 만능이 됐다”라고 했단다. 뭐라도 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이상한 병에 걸린 것 같다고 말했다. 멍하니 있으면 “엄마, 뭐 해?”라고 말하는 호성이 목소리가 들린단다. 그러면 분향소든 어디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돌아다닌다. 책에 대한 소감도 결국은 “진실을 밝혀달라”라는 간곡한 청을 한 번 더 하는 의미다. 사정하고, 울고, 떼쓰면 진실을 밝혀줄 줄 알았단다. 또 당연히 밝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다. 왜 이런 거냐고 정부자씨는 반문한다. 이게 사는 거냐고 한탄한다. 이건 사람 사는 데가 아니라고 발을 동동 구른다. “안산의 곳곳, 분향소, 팽목항, 광화문, 국회, 청운동에서 유가족들을 만났어요.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했어요. 304명이면 304개의 고통이 존재했죠. 우리 사회가 이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무엇을 빼앗아갔는지 분명히 알아야 해요. 책 작업을 한 작가로 느낀 것은… 이 작업을 하면 할수록 세월호 참사와 같은 일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란 거예요. 누구나 유가족이 될 수 있어요. 그렇기에 이 책은 유가족의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해요.” 김 작가는 평범한 유가족들이 얼마나 잘 견디며 싸워왔는지에 대한 삶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긴 인터뷰라고 했다.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유가족들을 이 책을 통해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말이다. 유가족의 아픔이야 가늠할 수조차 없지만 그들과 밀착해 지내면서 그들의 말을 생생히 듣고 기록한 작가들의 아픔도 만만찮았을 것 같았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이지만 선뜻 내가 하겠다고 나서지 못하는 일이었으리라. 안산에 살고 있던 김 작가가 이 기록 작업을 하게 된 것은 피할 수 없는 필연 같은 것이었다. “주요 희생 지역이 안산시 선부동, 와동, 고잔동이에요. 선부동에서 70명, 와동에서 69명, 고잔동에서 83명이 희생됐어요. 제가 살고 있는 선부동의 아파트에서만 15명의 아이가 희생됐어요. 고통의 한가운데 있었죠. 거리를 무시하지 못하겠더군요. 유가족과 인터뷰를 하고 오면 짧게는 하루 반나절, 길게는 며칠씩 앓아누웠어요. 다른 작가들도요.” 일상으로 돌아가는 사치를 꿈꾸다 공황장애로 집 안에서만 생활해온 김건우군의 엄마는 이제 광화문 천막을 지키며 아들을 위해 싸운다. 신승희양의 언니는 매일 밤 거인이 돼 배를 건져내는 꿈을 꾼다. 그러면서 차도에 뛰어들면, 아파트 위에서 뛰어내리면 금방 죽을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자신을 바보 같다고 탓한다. 수학여행 가기 싫어하는 아이를 굳이 떠밀어 보내곤 떨쳐내지 못하는 죄스러움에 몸부림치는 엄마도 유가족 부모들과 모임을 만들어 삶을 추스르려 한다. 암 말기에 접어들어 어떤 활동에도 나서지 못하는 한 어머니가 다른 유가족들에게 미안해하는 이야기도 담겼다. 304명이면 304개의 고통이 존재한다고 했던가. 304개의 고통을 전부 알진 못하더라도 책에 담긴 13명의 고통을 통해 조금이나마 아픔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책에 소개된 열세 분의 이야기는 우연과 우연이 쌓인 결과입니다. 어떤 분은 지면의 제약으로, 어떤 분은 자식 얘길 하는 게 사무치도록 아파 차마 인터뷰를 할 수 없어서, 한창 거리로 나갈 때는 시간이 없어서, 반대로 열심히 활동을 못하시는 분은 자격이 없다고, 또 어떤 분은 자신의 얼굴이 너무 알려졌다며 거절하셨어요. 매번 상황이 급변했죠. 평범한 시민이 어떻게 유가족이 될 수 있는지 정말 생생히 봤습니다.” 인터뷰의 끝은 결국 “진실을 밝혀달라”라는 울음 섞인 간절한 청이었다. 분향소로, 팽목항으로, 광화문으로, 국회로, 청운동으로 바쁘게 다니는 것도 진실 때문이다. 그렇게 길을 누빈 것처럼, 그렇게 책을 만든 것도 진실 때문이다. 아이를 먼저 보낸 엄마들은 가방에 약 한 보따리씩 싸서 갖고 다닌 지 오래다. 심리치료는 언감생심이고, 병원에도 가지 않는다. 입원하라는 말을 들을까 봐서다. 지금은 병원에 누워 있을 때가 아니다. 최근 생존 여학생 1명이 자살을 시도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생존 학생들 중 의사들이 장담할 정도로 경과가 좋은 학생이었다. 그런 아이가 죽고자 마음을 먹었다. 병원에서 눈은 떴지만 입은 닫았던 아이가 며칠 만에 말을 건넨 이는 죽은 단짝의 오빠였다. “그 아이는 ‘내가 죽으면 다시 어른들이 반성하고 진상을 규명해줄 것 같아’ 죽으려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만하고 일상으로 가장 돌아가고 싶은 건 우리예요. 하지만 보세요. 진실을 밝히지 않으면 살아 있는 아이조차 일상으로 돌아가 잘 살지 못해요. 죽은 아이, 산 아이 모두를 위해 우리는 멈출 수 없어요.”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두 번 세 번 죽일 만큼 아픈 말들과 서러운 오해들이 세상을 메우고 있다. 그런데 직접 만난 유가족들은 오로지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기만을 바랐다.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평범한 일상은 다시 누릴 수 없는 사치가 돼버렸다는 사실을. 그래도 꿈꾼다. 오늘 울고, 내일 다시 일어서서 진실을 밝히려 한다면 그 사치를 한 번쯤은, 하루쯤은 누릴 수 있지 않을까 말이다. 그래서 오늘도 낯선 장소에 부은 눈을 감추지 못하고 간다. 가서 말한다. 진실을 밝혀달라고. Mini Interview “유가족 기록, 고통의 언어이지만…진짜 사랑의 언어이기도 해요” 김순천(작가·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대표) 언론을 통해 유가족을 보는 국민과는 달리 유가족과 밀착돼 지냈다. 기록단으로서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유가족의 모습은 어떠했나? 교황이 방문하기 전날이었다. 광화문에서 같이 밤을 새우는데… 예슬이 엄마가 ‘거위의 꿈’을 틀어놓았다. 노래가 흐르는데 갑자기 예슬 엄마가 “예슬아, 보고 싶다!” 하고 소리를 지르더라. 차마 책에 다 담지 못한, 세상에 알리지 못한 이런 유가족의 모습들이 무척 많다. 뉴스나 신문에 유가족이 화내고, 소리 지르고, 어떨 땐 싸움도 하는 모습이 보이니까 그들이 별난 사람들인 줄 안다. 하지만 옆에서 본 유가족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다. 어떤 모습이었냐는 물음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를 만큼 말이다. 유가족에 대한 오해도 있는 게 사실이다. 세상의 오해가 안타까울 것 같다. 많다. 정말 무척이나 많다. 그중 가장 세상이 미울 만큼 안타깝고 속상한 게 보상금과 관련된 얘기다. 보상금을 받았다, 몇 억을 받았다 등등 온갖 억측이 많다. 하지만 지금 유가족이 받은 돈은 누구나 여행 갈 때 의무적으로 드는 여행자보험 보상금 그거 하나다. 그나마도 타가지 않은 분이 더 많다. 그 보상금을 받기 위해서는 아이들 사망신고를 해야 하는데, 사망신고를 안 한 거다. 아니 못하고 있는 거다. 하고 싶지 않으신 거다.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는 말이다. 정말 이분들은 돈 생각 안 한다. 생각해봐라. 세상천지에 자식 목숨하고 돈하고 바꿀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자꾸 돈과 결부시키는 세상의 시선이 참 잔인하다. 보상금 문제는 어떻게 진척되고 있는지? 앞서 말한 여행자보험, 일반인까지 다 가입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부모님들이 받은 보상금은 없다. 그리고 그런 말은 아예 꺼내지도 말라신다. 오해를 받으니까. 우리 사회는 현재 진실 규명을 해달라는 유가족의 청을 보상 문제로 바라본다. 책에 싣지 못했지만 꼭 소개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아직도 바닷속에서 나오지 못한 허다윤양의 이야기다. 아이돌 그룹 비스트의 양요섭을 좋아해서 부족한 용돈을 쪼개고 모아 잡지에 실린 그 가수의 브로마이드를 다 모아놨더라. 그 아이가 아직 못 나오고 있다. 지금 진도에 가면 바지선까지 다 철수했고 작은 부표 하나만 떠 있다. 다윤이 엄마는 그 차가운 바닷속에 자기 딸이 있다는 걸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신다. 많이 괴로워하고 방황하고 계신다. 어떤 때는 당신도 모르게 밖으로 돌아다니시고 그런다. 유가족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로는 무엇이 있을까? 마음은 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몰라 못하는 분들도 많다. 10반 주희양 어머님을 인터뷰할 때였다. 사람들이 욕하고 비난하는 게 힘들지 않으시냐 물었더니, 언젠가 여수 간담회 자리에 갔을 적 이야기를 하시더라.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자기 밭에서 딴 옥수수를 한 바구니 삶아 와서는 안겨주시는데, 바로 삶아서 가져오셨는지 옥수수가 뜨끈뜨끈하더란다. 이후 사람들이 공격할 때, 이상하게 할머니의 옥수수가 생각나신다고 했다. 뜨끈뜨끈하던 그 옥수수가, 그 온기가. 주희양 어머님은 그걸 사랑이라고 표현하셨다. 유가족을 살린 것도, 내동댕이친 것도 국민이다. 할머니와 같은 심정, 함께 있어주려는 것, 분향소라도 한 번 찾아주는 것과 같은, 정말 잊지 않아주려는 마음이 유가족에겐 큰 힘이 된다. 책이 드디어 발간됐다. 작가로서 소망이 있다면? 우리나라는 위험 사회다. 평범한 사람들 누구나 유가족이 될 수 있다. 남의 일이 아닌 나의 문제로 받아들여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유가족뿐 아니라 희생된 학생들, 일반인 분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함께 멈춰서 생각해봤으면 한다. 이 책은 고통의 언어로 쓰인 동시에 진짜 사랑의 언어이기도 하다. 나무 -신호성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는 곳 식물들이 모여 살 수 있는 곳 이 작은 나무에서 누군가는 울고 웃었을 나무 이 나무를 베어 넘기려는 나무꾼은 누구인가 그것을 말리지 않는 우리는 무엇인가 밑동만 남은 나무는 물을 주어도 햇빛을 주어도 소용이 없다 추억을 지키고 싶다면 나무를 끌어안고 봐보아라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강은진(객원기자) ■사진 / 김성구, 경향신문 포토뱅크>
세월호 참사 100일 끝나지 않은 이야기
2014. 07. 31 17:35 화제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과 일반인 희생자 등 2백94명이 영영 가족들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하늘의 ‘별’이 된 지도 100일이 지났다. 전 국민이 안타까움과 슬픔을 함께했고 기나긴 추모 행렬이 이어졌지만, 일상으로 돌아온 많은 이들에게 그날의 아픔은 어느새 기억 저편으로 희미해져가고 있는 중이다. 사고 발생 석 달째를 맞이한 현재, 희생자 가족들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을 짚어봤다. “아들이 보고 싶어서 아들놈이 입던 옷을 입고 나왔습니다. 아들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아들 옷 입고 아들 바지 입고 아들 양말 신고 다닙니다. 보고 싶습니다. 딱 한 번만, 한 번만 만져보면 좋겠는데….”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고 최성호군의 아버지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눈물은 하염없이 두 뺨으로 흘러내렸다. 결국 아버지는 고개를 숙인 채 통곡하고 말았다. 희생자 가족들의 마르지 않는 ‘피울음’에도 이제 그들은 점점 잊히고 있는 분위기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커녕 되레 가족들을 둘러싸고 억측과 오해들까지 난무하고 있다. 국회에 맡겼던 ‘세월호 특별법’ 제정은 정치권의 정쟁에 밀려 ‘침몰 위기’의 상황에 놓였다. 가족들은 단식 농성까지 벌이며 호소하고 있지만 돌아오지 못하는 아이들처럼 우리 사회는 이들에게 아무런 응답을 해주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별’이 된 우리 아이들을 잊지 말아주세요” 이제 썰렁해진 전남 진도 팽목항에는 30명도 되지 않는 가족들만 남아 하루 종일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4백76명 중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10명(7월 18일 기준)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행여나 살아 돌아올까, 하는 희망을 접지도 못한 채 100일이 다 돼가도록 팽목항 지킴이가 돼버렸다. 한 희생자 가족은 “오늘도 아무 소식이 없다…”라는 말만 되뇌었다. 진도경찰서 관계자는 “정말 안타깝다. 가족들이 하루에 몇 마디도 나누지 않은 채 무거운 침묵만 계속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시신이라도 찾은 가족들은 이제 머리를 싸매고 길거리로 나선 모습이다. 대부분의 가족들은 무엇보다 국민이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가족들은 전국을 한 달여 동안 순회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서명운동을 벌였다. 서명지에는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안전한 나라 건설 특별법 제정 촉구’ 등의 내용이 담겼다. 이렇게 모은 서명만 모두 3백50만여 건. 지난 7월 15일 전국에서 모인 서명지들이 4백16개의 노란 상자에 담겨 국회로 배달됐다. 하지만 국회의 대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고 있다.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과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이 7월 11일부터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TF’를 가동하고 머리를 맞댔지만 특별법 조항을 놓고 충돌하면서 가족들의 요구는 뒷전으로 밀렸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미 공개적으로 가족들에게 약속했던 특별법 제정이었지만 새누리당 쪽의 반대가 심했다. 쟁점은 특별법에 따라 설치될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을 부여할지 등이다. 새누리당은 수사권 부여가 현재의 형사 사법체계를 뒤흔든다는 논리로 반대하고 있다. “한국은 형사소송법상 검찰만이 수사권·수사지휘권·기소권을 갖는데, 진상조사위에 수사권을 부여하면 이는 헌법과 법률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다”라는 설명이다. 반면 야당은 특별사법경찰관으로 임명된 진상조사위원이 검사의 수사 지휘를 받게 하면 가능하다고 맞섰다. 이 와중에 가족들은 국회의 조속한 법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 아예 안산 합동분향소를 떠나 국회 앞에 주저앉아버렸다. 밤샘 농성에 이어 단식 농성까지 벌였다. 거리로 나선 생존 학생들과 희생자 가족들 살아 돌아온 생존 단원고 2학년 학생 38명도 7월 15, 16일 1박 2일에 걸쳐 진상 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도보 행진을 했다. 단원고에서 국회까지 47km에 이르는 거리를 쉼 없이 걸었다. 힘없이 둘러멘 가방들에는 주렁주렁 명찰들이 걸려 반짝였다. ‘박채연’, ‘김빛나라’, ‘김지인’, ‘유예은’.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친구들 이름이다. 출발 직전 취재진 앞에 선 신영진군(17)은 “친구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길에) 나섰다. 진실을 꼭 밝혀주시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도보순례’에 나선 가족들도 있다. 세월호 참사로 아들을 잃은 두 아버지다. 단원고 고 이승현군의 아버지 이호진씨(56)와 누나 이아름씨(25), 고 김웅기군의 아버지 김학일씨(52)는 7월 8일부터 안산 단원고를 출발해 팽목항까지 40여 일간에 걸친 도보순례를 하고 있다. 거리는 750km가량이다. 천주교 신자인 이들은 5kg의 십자가를 멘 채 작렬하는 태양 아래 하루에 평균 9시간씩 고행 길을 걷고 있다. “엄청난 참사가 일어났는데 아무도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 해 우리라도 지기로 했다”라는 것이 가족들의 뜻이다. 이들이 원하는 건 단 한 가지, “세월호를 잊지 말아달라”라는 호소뿐이다. 그러나 결국 국회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다음 회기로 제정 건을 연기했다. 여야는 서로 “돌연한 협상 결렬 선언”, “(여당은) 거부와 회피로 일관했다”라고 처리 무산 책임을 전가하는 공방을 벌이면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에 희생자 가족들은 특별법 제정 조항 등에 반대로만 일관한 새누리당을 비판하고 나섰다. 희생자 가족 대책위원회 김병권 위원장은 7월 17일 서울 광화문 앞 기자회견에서 “새누리당은 이러한 특별법은 ‘전례가 없다’라면서 반대하고 있지만, 세월호 참사도 전례가 없었던 일임을 잊었나”라며 “심지어 대통령과 여야가 모두 약속했던 것을 왜 지키지 않는가”라고 성토했다. 기자회견 직후 단식 농성 중이던 희생자 가족 2명이 그 자리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지만 정치권은 여기에도 응답하지 않았다. 희생자와 그 가족들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 가족들은 상실감으로만 고통을 받고 있는 게 아니다. 일부의 억측과 오해는 가족들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 참사 진상 규명 노력을 폄훼하는 소문과 정치권의 부실한 특별법 논의가 원인이 되고 있다.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야당 측이 발의한 특별법안에 담긴 ‘세월호 희생자 전원 의사자 지정’, ‘단원고생 대입 특례’ 등의 조항 때문에 일어났다. 온·오프라인을 통해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 아니냐”라는 누리꾼 등 일부 시민들의 반응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부는 욕설과 비꼬는 말이 섞여 확산되기도 했다. 가족들은 억울해하고 있다. 진실 규명과 재발 방지 호소를 위해 특별법 제정을 요구한 것인데, 다른 사람들은 보상금이나 특혜를 받기 위해 나선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한 유가족은 “‘전원 의사자 지정’, ‘대입 특례’ 같은 조항은 유가족들이 낸 입법청원안에는 없는 헛소리일 뿐이다”라고 잘라 말하고는 “그런데 헛소리가 참소리가 되게 생겼다”라며 허탈해했다. 실제로 가족들은 피해자 전원을 의사자와 의상자로 지정해달라는 요청을 공식적으로 정치권에 제안한 적이 없다. 가족들이 대한변호사협회와 함께 작성해 국회에 청원한 특별법안에도 이 같은 내용은 없다. 단원고 학생을 위한 ‘대입 특례학’ 조항 역시 가족들의 특별법안에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특히 정부는 아직 보상 문제를 놓고 가족들이 공식 논의를 한 적도 없는 상태다. 가족대책위가 청원한 특별법안에는 보상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명시된 내용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 책임의 원칙’ 정도만 적혀 있다. 유경근 가족대책위 대변인은 “피해에 따른 보상은 당연한 조치이겠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에 관련 협상을 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어둔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방현수씨(20)의 어머니 김기숙씨(50)는 “어느 부모가 죽은 새끼를 앞세워 목돈을 바라겠나. 끝까지 조사해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것인데 와전돼서 속상하다”라고 말했다. 단원고 2학년 고 박혜선양의 어머니 임선미씨는 7월 13일 기자회견에서 “엄마, 아빠의 심정으로 법안을 처리해달라고 하지 않았나. 우리는 수면제 없으면 잠을 못 잔다. 배 속에 열 달 동안 있던 내 새끼…”라고 말하고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진실을 규명해달라고 했지만 오해만 받는 상황 속에서 가족들의 마음에는 또 다른 슬픔과 분노만 쌓여가고 있는 셈이다. 세월호 참사 100여 일간의 기록 4월 16일 오전 8시 52분쯤 4백76명 태운 세월호 침몰 시작 4월 18일 구조 인력, 선체 2층 화물칸 문 열고 선체 첫 진입 4월 19일 이준석 선장 등 승무원 3명 구속 4월 27일 서울광장 합동분향소 운영 시작 5월 19일 박근혜 대통령 ‘눈물의 대국민담화’ 통해 해경 해체 발표 국회 ‘세월호 임시국회’ 개회 6월 3일 희생자 합동 49제 거행 6월 26일 박 대통령, 사고 책임지고 사의 표명했던 정 총리 유임 결정 7월 8일 감사원, 감사 결과 발표 “정부가 총체적 무능” 7월 11일 여야, 세월호 특별법 제정 위한 TF 가동 7월 14일 가족들, 특별법 제정 요구 단식 농성 시작 7월 15일 단원고 생존 학생 38명, 진상 규명 요구하는 도보행진 특별법 제정 촉구 시민 3백60만여 명 서명 7월 17일 여야, 세월호 특별법 제정 처리 무산 1 “많은 친구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으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다”며 1박 2일 도보 행진에 나선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 2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 3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농성 중인 한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이 17일 세월호 탑승 당시 학생들이 찍은 동영상이 상영되자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기획 / 노정연 기자 ■글 / 박홍두 기자(경향신문 사회부)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세월호 사고 발생 한 달 “정말 가만히 계실 건가요?”
2014. 05. 27 15:55 화제
이번엔 다르다.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며 시간이 약이 될 거라 서로 다독이지 않는다. 하루하루가 얼른 지나가버리길 바라지도 않는다. 지금까지 해오던 것처럼 ‘가만히 있다’간 다음은 누구 차례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정말 가만히 계실 건가요?” 이제 어른들이 답할 차례다. 지난 5월 12일 오후 6시 서울 종각역 4번 출구 앞. 가슴에 노란색 리본을 단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역 입구 근처에 간이 탁자를 펴고, 담담한 표정으로 준비해온 종이 더미를 차곡차곡 정리했다. 요란한 구호를 외치거나 서로 힘을 내라는 격려는 하지 않았다. 다만 지체하지 않고 준비한 것을 하나하나 행동으로 옮길 뿐이었다. 선대인경제연구소의 선대인(42) 소장이 주축이 돼 결성된 다음 카페 ‘세월호와 대한민국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이하 세대행동)’ 회원들이었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유가족을 위로하며,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행동하고자 결성된 자발적인 순수 시민 모임이다. 요즘 ‘세대행동’ 회원들은 거리로 나와 세월호 침몰 사고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하는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날이라도 따뜻했다면 좋았으련만, 해가 지기 시작하니 기온이 더욱 떨어져 긴 소매의 재킷을 몇 번이고 여미게 되던 유난히 쌀쌀한 저녁이었다. 오가는 사람은 많았지만 서명을 받는 것은 결코 쉬워 보이지 않았다. 이름, 주소, 전화번호 그리고 가볍게 흘리는 사인 하나면 되는 서명, 빠르면 30초,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공들여 써도 채 1분이 안 되는 시간이지만 오가는 사람들은 무척이나 바빠 보였다. 탓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서늘한 바람이 부는 서울의 밤은 어딘지 모르게 슬픔이 가득했다. 노란색이 이다지도 아련한 색이었던가. 바람에 흩날리는 노란색 리본 끝이 사정없이 휘날렸다. 꼭 누군가를 부르는 손짓 같았다.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일 선 소장에게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들고, 직접 회원들과 거리로 나와 행동하게 된 계기부터 물었다. “세월호 사고 소식을 아침 뉴스를 보고 알았어요. 점심때까지 보도된 뉴스 내용도 그렇고, 크게 인명 피해가 없을 것 같아 마음을 놓았죠. 그런데 퇴근하고 집에 왔는데 상황이 그대로인 거예요. 사망자 수가 나오고, 실종자 수도 어마어마해요. 시간이 자꾸 흐르니, 생존 가능성이 낮아지고요. 일순간에 터져버린 폭탄 테러도 아니고… 구조되지 못하고 배와 함께 침몰하다니요. 미치고 팔짝 뛰겠더라고요. 정말 안타까웠어요.” 충격에 빠진 건 선 소장뿐 아니었다. 어린 학생들이 차가운 바닷물에 배와 함께 침몰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국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한 셈이 됐다. 침몰하는 배에서 단 한 명도 구조되지 못했다. 모두 할 말을 잃은 시간이었다. 선 소장은 문득 하버드 대학 유학 시절 빌 게이츠의 졸업식 축사가 떠올랐다고 했다. ‘창조적 자본주의’라는 주제로 연설을 한 빌 게이츠의 마지막 말은 “30년 후 당신의 성공을 이야기할 때, 당신의 직업적 성취뿐 아니라 이 세계의 불평등과 부조리를 위해 얼마나 싸웠는지 평가하라”였다. “‘세대행동’이란 카페를 제안하기까지 저도 많이 머뭇거렸어요. 지금도 웬 오지랖이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냐며 선입견을 갖고 보시는 분들도 많아요. 그런데요, 이게 그냥 온라인상에서 떠들고 말 일일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드는 거예요. 그때 빌 게이츠의 졸업 축사 생각나더군요.” 선 소장은 SNS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피력해왔던 영향력 있는 인사 중 하나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깊은 의문에 빠졌다고 한다. ‘사람들이 나 떠들라고 팔로우한 건가?’,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맺은 온라인의 인연을 오프라인 밖으로 끌어내 의미 있는 에너지를 만들 수는 없을까?’ 하는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경제연구소의 소장이자 경제사회 저술서의 저자이지만,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 우리 사회를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활동가로 나서는 것도 중요할 것 같았다. “세월호 참사 후 국민들은 정부와 여당의 무력과 무능을 알게 됐어요.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는 적당히 감춰져 있었죠. 이번 사고로 온갖 비리를 한꺼번에 여실히 들켜버린 거예요. 야당이라도 멀쩡했다면, 언론이라도 제대로 보도했다면, 시민사회가 국민 뜻을 대변해 욕구를 분출시켜줬다면…. 모든 게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된 거죠.” 모두가 현실에 갑갑함을 느꼈다. 뭐라도 하고 싶은데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통로를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누구라도 먼저 나서서 제안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있지 않고 행동할 것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에 ‘세대행동’ 카페가 만들어진 건 세월호 사고 후 2주가 지난 2014년 4월 30일이었다. 처음 카페 명은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지만, 카페 회원들과 상의 후 ‘세월호와 대한민국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이라고 명칭을 변경했다. 줄여 ‘세대행동’이라 부른다. 카페 이름에서 모임에 가입한 시민들의 의지와 뜻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가만히 있지 않고 행동하겠다는 것이다. 카페가 개설된 지 2주 만에 가입 회원 수가 2천5백 명에 육박할 정도로 시민들의 참여가 뜨거웠다. 카페 대문에는 ‘아이들이 묻습니다. 정말 가만히 계실 건가요?’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세대행동’의 활동은 크게 4가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세월호 사고의 정확한 실상을 알려주는 정보를 모아 많은 사람들이 그 참상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저장하고, 세월호 사고를 계기로 좀 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시민들의 의견을 교류하고 힘을 모으며,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에서 함께할 수 있는 행동을 제안하고, 이런 비극적 사고가 재발되지 않도록 정부와 정치권을 감시, 압박해 올바른 제도와 정책, 법률을 마련할 수 있도록 힘을 모으는 것이 목표다. “많은 분들이 호응해주고 계세요. 서명운동도 처음 시작한 날부터 지금까지 한 지하철역당 최소 3, 4백 명씩은 동참해주시고요. 한 군데서만 하는 게 아니라 일정을 짜서 카페 회원들이 서울 지하철역 여러 군데서 받으니까요. 하루 평균 8천 명 정도 서명을 받았어요. 오프라인에서는 이 정도면 아주 대단한 결과죠.” 서명운동은 세월호 사고의 철저한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및 안전한 나라 건설을 위한 특별법 제정, 범국민 진상조사위원회 구성 촉구에 관한 범국민 서명운동이다. 목표치는 없다. 그저 유가족 대책위에서 “이제 그만하면 됐다”, “충분하다”, “이제 멈춰달라”라는 요청이 있을 때까지 계속 받을 생각이다. 현재 5만 명 이상이 서명에 동참했다. 많은 국민들이 참여해주긴 하지만 서명운동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저 같은 사람도 이렇게 거리로 뛰쳐나올 정도면…. 다들 줄이라도 서서 해주실 줄 알았거든요. 길을 걷다가 서명을 통해 뜻에 동참해주시는 것도 기적을 만드는 작은 움직임입니다.” 서명운동, 재능기부, 기금 모금… 기적이 되는 작은 움직임들 서명운동에 자원봉사로 참여한 카페 회원들 중에는 바쁜 시간을 쪼갠 시민들이 많다. 선 소장의 설명에 의하면 사회운동가나 활동가는 거의 없다고 한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카페에 올라온 도움 요청을 보고 찾아온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봉사에 참여하고 있다. 종각역 서명운동 현장에서 보았지만, 갈 길이 바쁜 사람들에게 서명을 호소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잠시 생업도 접고 서명운동에 동참한 시민들의 마음이 느껴져 뭉클해졌다.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노란색 리본 아래에는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모두가 말하는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답답한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줄 수 있는 작은 기적 중 하나다. “안산에서 만난 어느 학부모님은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20년 전에 삼풍 사고가 있었다. 그때도 문제가 많다고 했지만 아무도 행동하지 않았다. 그리고 20년 후 우리 아이들이 희생자가 됐다. 말만 하지 말고 행동하자. 그렇지 않으면 시간과 장소는 다르지만 또 사고가 날 것이고 그다음은 다른 아이들, 그러니까 내 아이들이 희생자가 될 거다’라고요.” 그저 나와는 상관없는 멀리 사는 어떤 아이가 죽었구나, 하고 말 일이 아니라고 했다. 이번에도 바뀌지 않는다면 다음에는 누가 희생자가 될지 스스로에게 자문해볼 때다. “안산에 두 번째 분향을 갔을 때였어요. 대책위 분들을 만나고 한 번 더 조문하고 나오는데, 유가족들이 계시는 천막에서 찢어질 것 같은 통곡이 터져 나오는 거예요. 보통의 곡소리와는 다른, 정말 뭐랄까요. 비정하고 한 서리고 안타까운 울음소리가 일제히 수십 명이 한꺼번에요.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심장에 날카로운 표창이 수백 개가 박히는 아픔이 느껴졌어요.” 세월호에 탑승했던 단원고 학생들이 서로 손을 잡고 기도하는 동영상이 처음 나오던 날이었다. 그 울음소리와 그 울음의 연유를 들은 선 소장은 차 안으로 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울었다고 했다. 그리고 정말 무엇이라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 안타까운 죽음들이 헛되지 않도록 말이다.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 만든다는 말, 맞습니다. 시작이 어려울 뿐이지 할 일이 많아요. 작게는 서명운동을 해주셔도 좋고요. 여러 가지 스티커나 포스터를 붙이고 달고 다니면서 의견을 표현하는 것도 좋아요. 재능기부부터 기금 모금까지 다양한 일에 참여할 수 있어요. 하고자 하는 마음과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노력, 그것이면 족하다고 봐요.” ‘세대행동’은 수신료 거부 운동을 통해 언론의 정상화를 촉구하고 있으며, 스티커와 현수막 등을 디자인하고 배포해 누구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시민들이 모여 50개의 요구사항을 발표하는 시민선언도 한다. 이와 관련해 아름다운 재단의 지원을 받아 시민백서도 발간 준비 중이다. 가만히 있으라고 한 어른들의 말을 들은 우리의 아이들은 어떻게 됐나. 이제 정말 가만히 있을 거냐고 묻는 아이들의 말에 이제 어른들이 답할 차례다.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 가입 회원 1천 명이 넘는 자발적인 시민 모임 세대행동(http://cafe.daum.net/dontforgetsewol) 인터넷 포털 다음 카페에 개설된 시민 모임이다. 선대인경제연구소 선대인 소장이 주축이 돼 만들어졌다. 첫 명칭은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으나, ‘세월호와 대한민국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로 개명했다. 줄여서 ‘세대행동’이라 부른다. 유가족 대책위를 대신해 범국민 서명운동을 펼치고 있다. 언론의 정상화를 위해 수신료 거부 운동도 제안했다. 세월호와 관련된 시민백서도 발간할 예정이며, 세월호와 같은 참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엄마의 노란 손수건(http://cafe.daum.net/momyh) 안산에 사는 엄마 셋이 주축이 돼 만들어진 세월호 문제 해결을 위한 엄마들의 모임이다. 세월호 침몰 사고 후 자식을 잃은 엄마들의 마음을 십분 공감하며 같이 자식을 키우는 엄마들이 연대하기로 한 것. 처음에는 안산 지역 엄마들이 중심이 돼 활동할 목적이었으나 많은 엄마들의 호응으로 회원수 8천명이 넘는 전국적인 모임으로 발전했다. 엄마의 마음으로 사고 원인은 물론 구조 과정까지 진상 규명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목표다. 침묵시위와 촛불집회 등에 참여하며 유가족을 대신해 엄마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세진요(http://cafe.naver.com/sejinyocafe) ‘세진요’는 ‘세월호 사건의 진실을 요구합니다’라는 카페 명의 줄임말이다. 네이버에 개설된 카페로 순수 시민 모임. 5천 명에 육박하는 회원들이 모여 세월호에 관련된 자료들의 진실과 의혹들을 모으고 있다. 법적 대응, 강력 대응하겠다는 고소 고발이 난무하는 가운데 진짜 진실이 무엇이고, 가짜는 무엇인지 가려보자는 의도로 개설됐다. 진실과 의혹, 언론 보도, 해외 언론 번역본 등의 세월호 관련해 최대한 많은 자료를 모아놓은 것이 특징. Mini Interview “사고 다음날이 내가 세월호에 탑승할 예약일이었다” 김종자(60, 주부, 경기 안산시 단원구 거주) 침묵시위에 참가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그동안 정치니 시위니 하는 것들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 나이 이제 60이다. 그런데 지인이 일인시위를 했다더라. 그 소식을 듣고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도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주위 사람들에게 물으니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집회가 있다고 알려주더라. 참가한 소감이 궁금하다. 많이 울었다. 나는 안산에 살고 있다. 지금 여기는 전쟁 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사고를 당했다. 도시 전체가 웃음이 사라졌다. 유족들을 직접 알진 못해도, 같은 동네 사람으로 건너건너 다 안다. 하루 세 끼 챙겨 먹고 있는 것도 어떨 땐 미안하다. 그곳에 가서 한 자리 차지해주고 있는 것도 큰 도움이 된 것 같았다. 이번 참사로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것 같다. 사실 내가 단원고 학생들이 탄 그 배에 예약돼 있었다. 사고 다음날이 내가 그 배를 타고 제주도를 가는 날이었다. 어린 학생들이 사고를 당했지만, 어쩌면 내가 사고를 당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구조 과정을 보면서 더 무섭더라. 이건 바로 내 일이었다. 이제 가만있지 않을 셈이다. 어떤 방법으로 ‘가만있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할머니라 인터넷도 할 줄 모른다. 그래서 젊은 사람처럼 대단한 일은 더 할 줄 모른다. 하지만 촛불집회에 나가 앉아 있어보니, 이렇게 어른들도 나와주는 걸 보고 젊은이들이 힘을 얻는 것 같더라. 방송국 뉴스에도 크나큰 실망을 했다. 딸에게 물어보고 한 군데 독립 언론에 한 달에 1만원씩 후원을 시작했다. 투표도 꼭 할 거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난 다음에 세상 사람들 관심도 사라지면 그때 동네 사람으로서, 이웃으로서 밥을 해주든, 청소를 해주든 뭐든지 도움을 줄 생각이다. 동네 사람들끼리도 이런저런 말을 많이 하는 중이다. <■기획 / 노정연 기자 ■글 / 강은진(객원기자) ■사진 / 고이란(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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