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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태겸의 풍경](74) 경북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왕자 탯줄 묻어…태교 명소로 각광(2024. 10. 16 06:00)
- 2024. 10. 16 06:00 문화/과학
- 성주라는 동네는 참 낯설다. 참외 말고는 알려진 게 별로 없다. 그나마 ‘언택트 성지’라는 수식어로, 찾는 이가 많지 않아 도리어 좋은 여행지로 포장돼 알려진 편이다. 처음 경북 성주를 찾았을 때 내 느낌은 그랬다. ‘이런 곳을 왜 몰랐을까.’ 세종대왕이 자손의 탯줄을 모아서 태실을 만들었다는 것도 몰랐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조선 왕조가 왕가의 탯줄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으며, 구태여 스스로 찾아보는 이도 없다. 세종대왕자 태실을 찾은 후 알게 된 것이 일제의 또 다른 만행이다. 조선의 왕가는 전국의 길지 중 길지를 골라 54기의 태실을 만들었는데, 이걸 일제가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한데 모아 버렸다는 것. 이제는 태봉산이니 태봉리 같은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세종대왕자 태실이 고스란히 지금에 이르고 있다는 게 반가운 건 그래서다. 선석사라는 사찰 곁, 태봉의 정상부에 태실은 자리하고 있다. 주차하고 조금만 걸으면 금방이다. 온종일 햇살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고, 여기에 19개의 태실이 조성돼 있다. 어느 곳을 봐도 주변이 훤히 내다보이는 위치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명당인 그곳. 따스한 볕이 목덜미를 어루만져 주기에 기분이 좋은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 정태겸의 풍경
- [이기환의 Hi-story](110)흠결을 찾을 수 없는 ‘고려판 세종’ 아세요?(2023. 11. 28 07:00)
- 2023. 11. 28 07:00 문화/과학
- 서울 종로 구기동 고려시대 건물터에서 확인된 ‘장의사’ 명기와. 이 건물터에서는 12~13세기 기와와 청자편 등이 출토됐다.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고려판 세종대왕’, ‘도무지 비판할 거리가 1도 없는 군주’…. 아니 고려 역사에 이런 임금이 있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고려사>에 나오는 표현이고요.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조에서도 “국난에 빠진 고려를 중흥시킨 영명한 군주”라며 롤모델로 삼은 분입니다. 바로 고려 현종(재위 1009~1031)입니다. 마침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이 바로 이 고려 현종 시대를 다루고 있죠. ■12세기 이전 ‘장의사’ 명문기와의 의미 실제로 현종의 자취와 유산이 개성(개경)도 아닌 서울 한복판에서 고고학 발굴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올해 3월의 일입니다. 서울 종로 신영동(실제 구기동) 도시형 생활주택 부지에서 고려시대 건물터(1382㎡)가 확인됐는데요. 건물터의 입지를 보니 개경의 만월대를 빼닮았고요. 출토 유물 또한 격이 엄청 높습니다. 연대를 판단할 수 있는 명문 기와(‘승안 3년’·1198)가 나왔어요. 지난 8월 또 하나 특기할 만한 유구와 유물이 확인됐어요. 기왕(3월)에 조사된 서울 신영동(구기동) 유적에서 10m 떨어진 곳에서 난방시설을 갖춘 건물터 1기가 노출됐는데요. 명문기와(‘장의사’명)와 함께 12~13세기 청자·도기 조각도 나왔습니다. ‘장의사’는 이 두 건물터에서 남쪽으로 350m 떨어진 현 세검정초교 자리에 있었던 사찰입니다. 어쨌든 두 건물터의 발굴성과는 ‘고려 현종’과 직·간접적으로 연결 지을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우선 삼각산(북한산) 승가사 뒤편 석굴에 조성된 등신좌상(승가대가상)을 봅시다. 좌상의 광배에 ‘태평 4년’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요. ‘태평’은 요(거란) 성종의 연호(1021~1031)이니 ‘태평 4년’은 1024년(현종 15)에 해당합니다. 현종이 승가굴에 조성된 승가대사상에 광배를 붙였다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지난 3월 서울 신영동(구기동( 도시형 생활주택 부지에서 확인된 고려시대 건물터(1382㎡). 확인된 건물지 가운데는 잔존 면적(길이 20.1×너비 5.5m)만 33.44평에 이르는 것도 있다.|수도문물연구원 제공 ■고려 국왕들의 삼각산 행차 이번에 발굴된 두 건물터(12~13세기)는 장의사터(세검정초교)와 삼각산(북한산) 승가사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고려사> 등은 ‘장의사-삼각산 승가사’와 관련된 매우 흥미로운 기사를 전하고 있어요. 고려 국왕이 개경을 떠나 승가사(굴)와 장의사에 행차하는 기사가 속출한다는 겁니다. 즉 “1090년(선종 7) 10월 19일 왕(선종)이 승가굴과 장의사에 행차했다”는 기록이 그렇고요. 9년 뒤인 1099년 숙종(1095~1105)의 삼각산 행차도 눈길을 끌죠. “왕이 왕비 및 원자, 대각국사 의천(문종의 동생·1055~1101)과 함께 삼각산 승가굴에 행차해 재를 올린 뒤 갖가지 선물을 하사했다”는 겁니다. 1104년(숙종 9) 8월 5일에는 숙종이 승가굴에 들러 기우제를 지냅니다. 이후 예종(재위 1105~1122)이 3차례에 걸쳐 승가굴과 장의사를 방문했고요. 1167년에는 의종(재위 1146~1170)이 승가사와 장의사에 들렀습니다. 그렇다면 장의사와 승가사 사이에 조성된 ‘두 건물터’는 국왕이나 왕실, 귀족들이 머무는 숙소가 아니었을까요. ■왕이 된 사생아 개경의 고려 국왕들이 왜 멀리 떨어진 삼각산 승가사까지 지체 높은 몸을 이끌고 올라가 재를 올렸을까요. 여기서 현종이 ‘짜잔~’ 하고 나타납니다. 사실 고려 현종에게는 숨기고 싶은 출생의 비밀이 있죠. 우선 고려 왕실에서는 근친혼이 성행했다는 것을 염두에 둡시다. 현종의 아버지 왕욱(王郁·추존왕 안종·?~996)은 태조 왕건(재위 918~943)의 여덟 번째 아들입니다. 어머니는 헌정왕후(?~992)인데요. 헌정왕후는 친언니인 헌애왕후(964~1029·목종의 어머니·천추태후)와 함께 태조의 7번째 아들인 왕욱(王旭·추존왕 대종)의 딸이었습니다. 두 자매(헌애왕후·헌정왕후)는 경종(태조의 넷째 아들인 광종의 맏아들)의 3번째와 4번째 부인이 됐습니다. 두 자매가 사촌 오빠(경종)와 혼인한 겁니다. 그렇다면 현종의 부모인 왕욱(안종·추존왕)과 헌정왕후는 삼촌-조카 사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삼촌-조카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섭니다. “남편(경종)이 죽고 사가에서 살던 헌정왕후가 꿈에서 눈 오줌이 온 나라에 흘러 은빛 바다를 이루었다. 점쟁이가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될 것’이라 풀이했다. 헌정왕후는 ‘과부가 어찌 아들을 낳겠느냐’고 쓴웃음을 지었다.”(<고려사> ‘후비열전’) 그러나 점쟁이의 말이 맞았습니다. 왕욱이 남편(경종)이 승하한 뒤 사가(私家)에 나가 있던 헌정왕후와 사통해 아들(현종)을 낳은 겁니다. 이와 같은 불륜 행각이 들통 나면서 왕욱(안종)은 유배를 떠났고요. 충격을 받은 헌정왕후는 갑자기 태동(胎動)을 느껴 아이를 낳다가 승하했는데요. 사생아로 태어난 아이는 ‘대량원군’이란 칭호를 받았습니다. 잇달아 확인된 고려건물터.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비정한 이모의 암살 기도 그런데 경종의 맏아들인 목종(재위 997~1009)이 성종의 뒤를 이어 등극하자 상황이 급변합니다. 대량원군(현종)의 이모지만 목종의 친어머니인 헌애왕후가 ‘견제’에 들어간 겁니다. ‘천추전’에서 아들(목종)을 대신해 섭정한 헌애왕후는 ‘천추태후’로 일컬어지며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데요. 그러나 아들인 목종의 성적 취향(동성애) 때문에 후사를 기대할 수 없게 되면서 딴마음을 품게 됩니다. 천추태후가 내연관계인 김치양(?~1009)과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민 겁니다. 그러자 조카인 대량원군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천추태후는 조카를 강제 출가시켜 삼각산(신혈사)으로 쫓아내는데요. 권력에 눈이 먼 이모는 조카를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고려사>는 “삼각산에 (천추)태후가 자주 사람을 보내 해치려 했다. 신혈사의 노승이 방에 땅굴을 파서 그를 숨기고, 그 위에 침상을 설치했다”(‘세가·현종 총서’)고 했어요. ■‘꼬끼요와 어근당’ 그 와중에 대량원군이 지었다는 시 두 편을 볼까요. “백운봉에서 흘러나온… 물이… 머지않아 용궁(龍宮)에 도달하리라(…不多時日到龍宮)”와 “…꽈리 튼 새끼뱀… 하루아침에 용이 되는 것 어렵지 않으리라(一旦成龍也不難)…”는 내용을 보면 심상치 않죠. “곧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선언했어요. 그런 대량원군이 꿈에 닭 우는 소리와 다듬이 소리를 들었답니다. 술사의 꿈풀이가 기막혔습니다. “닭 우는 소리는 ‘꼬끼오(고귀위·高貴位·높고 귀한 자리)’이고, 다듬이 소리는 ‘어근당(御近當·임금 자리가 가깝다)’이니 이는 왕위에 오를 징조”라 했다는 겁니다. 결국 강조(?~1010)의 정변(1009)이 일어나 김치양 부자가 죽임을 당하고요. 대량원군, 즉 현종에게도 우호적이었던 목종도 결국 시해당하고 마는데요. 올해 발굴된 고려건물터는 장의사와 승가사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만장일치로 왕위에 오르다 흥미로운 대목이 또 있어요. 천추태후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대량원군’을 차기대권 0순위로 꼽았습니다. 천추태후의 아들인 목종조차 “이제 태조의 후손은 오직 대량원군만이 남아 있다”(<고려사> ‘열전 채충순’)고 단언했는데요. 목종과 후사를 논의한 최항(?~1024) 같은 신하도 “왕위를 계승할 분은 오직 대량원군”이라고 했고요. ‘강조의 변’의 장본인인 강조도 목종을 폐위시킨 뒤 대량원군을 모셔 왕위에 올렸습니다. 그만큼 “다른 성씨(김치양의 아들)에게 사직이 돌아가면 큰일난다”(<고려사> ‘열전·채충순’)는 위기의식이 컸던 거고요. 그때 ‘낭중지추’였던 대량원군이 유일한 대안으로 꼽혔던 겁니다. ■조롱당한 임금 그렇게 만장일치로 등극한 현종에게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거란의 성종(야율융서·재위 982~1031)이 ‘강조의 정변’을 문책한다면서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죠(1010년 11월). 현종은 강감찬(948~1031)의 권유로 전라도 나주로 몽진(피란)을 떠납니다. 피란길에 현종은 여러 차례 곤욕을 치릅니다. 어떤 지방에서는 하급 관리들이 “왕께서는 나의 이름과 얼굴을 아느냐”며 조롱했고요. 숙소로 쳐들어온 무리 때문에 가까스로 몸을 피한 적도 있습니다. 전주에서는 반란에 가까운 무력시위가 벌어졌습니다. 건국 초 아직 민심이 고려조정에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결국 거란과의 전쟁은 현종이 거란에 입조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고 끝났습니다(1011년 1월 11일).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현종의 후손인 선종, 숙종, 예종, 인종 등이 승가사와 장의사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고 기록했다. 문화재청 제공 ■흥화진대첩, 귀주대첩 그러나 현종은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습니다. 또 거란이 요구한 강동 6성도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사이 성과 보루를 꾸준히 쌓아 또다시 벌어질 전쟁에 대비했습니다. 강감찬 같은 인물을 서북면행영도통사의 책임을 맡겨 대비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청사에 길이 빛날 귀주대첩을 이룹니다(1018~1019). 10만 거란군 중 살아 돌아간 자가 수천 명뿐이라죠. 이후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했죠.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치스러운 의식과 제도를 폐지하고 승려들의 횡포도 엄금하는 한편 굶주린 백성들의 구제에 힘씁니다. 성종 때 폐지된 연등회·팔관회를 부활시키고요. 설총(655~?)·최치원(857~?) 등을 추봉하고 문묘(공자묘)에 그들의 신주를 모셨습니다. 거란군의 침략을 불심으로 물리치려고 초조대장경의 제작에 착수, 6000권의 대부분을 완성했습니다. 1018년(현종 9) 5도양계체제라는 군현제의 골격을 구축합니다. 중앙집권제로 민심을 다잡고자 한 겁니다. ■세종대왕(현종)께서… 그후 고려는 현종의 후손이 왕계를 이어가는데요. 덕종(재위 1031~1034), 정종(재위 1034~1046), 문종(재위 1046~1083), 선종(재위 1083~1094), 숙종(재위 1095~1105), 예종(재위 1105~1122), 인종(재위 1122~1146) 등으로 이어집니다. 현종~인종의 130여 년간을 ‘고려의 전성기’라 합니다. ‘현종=세종대왕’이란 표현은 <고려사> ‘세가·고종’에 나와 있어요. 즉 1254년 10월 19일 고종(1213~1259)이 역대 왕들의 신위를 모신 태묘에 나가 “국난(몽골 침입)을 극복하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는데요. 이때 ‘현종=세종대왕’으로 지칭합니다. “세종대왕(현종)께서… 큰 난리를 평정해 중흥과 반정(反正)의 공을 세워….” 본래 ‘세종’은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거나 중흥시킨 군주에게 올리는 묘호(왕의 사후에 붙이는 호칭)입니다. 물론 고려 현종이 정식으로 ‘세종’의 묘호를 받지는 않았는데요. 그러나 고려시대 내내 위기에 빠진 나라의 기틀을 잡은 ‘세종대왕’으로 예우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무결점 국왕’ 보통 어떤 인물, 심지어 임금을 평가하는 사관들의 잣대는 ‘칼’ 같죠. 장점도 나열하지만, 단점 또한 그냥 지나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현종은 어떨까요. 완전히 ‘무결점 성군’으로 추앙됩니다. 당대의 사관인 최충(984~1068)과 이제현의 평가를 볼까요. “현종은… 오랑캐와 화호를 맺고, 전쟁을 멈추고 문덕을 닦으며, 세금과 요역을 가볍게 하며, 준수한 인재를 등용하고 정사를 공평하게 해서… 전국이 평안하고 농업과 잠업이 풍년이 들었다. 나라를 중흥시킨 왕(中興之主)이다.” 이 정도도 무결점 평론인데요. 이제현의 ‘한 줄 정리’가 눈길을 끕니다. “현종을 두고는 ‘나는 비판할 거리가 없다(如顯宗 吾無間然者乎)’는 것이다.”(<고려사절요> ‘현종 1031년 5월 25일’) 올해 발굴조사로 확인된 고려시대 건물터는 승가사와 장의사를 방문한 고려 국왕들의 숙소나 쉼터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조선조에서도 칭찬 릴레이 조선조 들어서도 고려 현종과 관련된 평가가 ‘극찬’으로 일관됩니다. 양성지(1415~1482)는 “전 왕조의 현종은 영명한 군주”(<세조실록> 1457년 3월 15일)라고 극찬하고요. 유성룡(1542~1607)과 윤두수(1533~1601)는 “고려 현종은 거란의 침입 때문에 나주로 피란했지만 결국 고려의 중흥을 이뤘다”고 강조합니다.(<선조실록> 1593년 윤11월 29일, 1594년 9월 19일 등) 어떻습니까. 우리가 잘 몰라봬서 그렇지 고려 현종, ‘찐’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군주가 아닙니까. 너무 일찍(40세) 승하한 게 안타깝기는 합니다. 어쨌든 그런 분의 흔적, 자취가 요즘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잇달아 등장하고 있죠. 후대의 임금들은 ‘성지순례 코스’로 현종의 박해 장소인 삼각산을 찾은 게 분명합니다. 3차 고려-거란 전쟁(1018~1019)에서 두 차례 대첩이 있었다. 첫 번째는 소가죽으로 강둑을 막아 터뜨린 흥화진(의주)대첩이다. 두 번째는 철수하는 거란군을 귀주성 인근 구릉에서 격멸한 귀주대첩이 있었다. 10만 거란군 중 살아 돌아간 자가 수천 명뿐이었다. 이후엔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했다. 전쟁기념관 소장 기록화
- 이기환의 Hi-story
- [이기환의 Hi-story](89)당뇨에 걸린 세종은 ‘대리청정’을 택했다(2023. 06. 23 11:17)
- 2023. 06. 23 11:17 문화/과학
- ‘세자(문종)는 반드시 나 같은 임금이 돼야 한다.’ 세자를 당신 같은 성군으로 키우려 했던 세종의 노심초사가 서려 있는 경복궁 전각이 있습니다. 오는 8월 31일 마무리를 목표로 복원공사 중인 ‘계조당’입니다. ‘계조(繼照)’라는 명칭은 ‘사방에 비치는 광명을 계승해 비춰준다(以繼明照于四方)’는 <주역> ‘이괘·삼전’의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따라서 ‘계조’는 왕위계승을 뜻합니다. ‘계조당’의 복원은 고종 연간에 재건(1886)하고, 5년 뒤 보수(1891)된 전각을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오는 8월 31일 완공을 목표로 복원 중인 경복궁 계조당. 공사가 거의 마무리됐다. 성군의 정치를 이어가려던 세종의 심모원려가 담겨 있는 전각이다.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1891년 계조당을 보수하면서 고종(재위 1863~1907)이 했다는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1443년 계조당을 세웠고, 세자(문종)가 대리청정했다. 세종 시대에 모든 제도와 문물, 법식을 다 갖췄고 가장 융성했다”(<고종실록> 1891년 2월 8일)고 했습니다. 고종은 “내가 세종의 업적을 계승한다고 할 수 없지만, 동궁(순종)은 나(고종)의 가르침을 준수해주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고종은 ‘세종처럼 나(고종)도 세자(순종)에게 대리청정시키겠다’는 뜻을 언급한 겁니다. 아니 이게 무슨 막말입니까. 고종이 감히 ‘세종 코스프레’를 한 건가요. 하지만 이해는 갑니다. 성군의 정치를 펼쳐 보이고 싶은 마음이야 고종인들 없었겠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세자-임금 계조당이 처음 건립된 것은 1443년(세종 25) 5월 12일이었습니다. <세종실록>은 “왕세자(문종)가 신하들의 조회를 받을 전각을 짓고, 이름을 계조당’이라 했다”고 했습니다. 즉 왕세자(문종)가 국왕(세종)을 대신해 국정을 이끌 ‘정당(正堂·집무실)’으로 건립된 겁니다. 좀 의아하죠.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고 하잖습니까. 게다가 성군의 정치를 펼치고 있던 세종이 왜 굳이 세자에게 그 막중한 국정을 맡겼을까요. 왕조시대엔 태자 혹은 세자를 두고 ‘국본(國本·나라의 근본)’이라 일컬었습니다. 보통 3세 때부터 시작되는 후계자의 양성교육은 ‘국본’을 튼튼히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세종은 그러나 어떠했습니까. 맏형(양녕대군·1394~1462)이 세자였고, 더구나 셋째 왕자였죠. 왕권하고는 거리가 멀었죠. 맏형이 폐위(1418년 6월 3일)되고 ‘졸지에’ 세자위를 물려받은 지 불과 두 달여 만에 왕위에 올랐습니다(8월 11일). 그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세종은 당신의 아들(세자)에게는 그런 전철을 밟게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준비된 후계자를 키우는 것, 그것이 바로 ‘대리청정’이었습니다. 도적이 들끓었던 세종 시대 1437년(세종 19) 세종이 대리청정의 의지를 공식 언급한 다른 이유도 있었는데요.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지나는데 조금도 다스린 효과가 없구나. 해마다 수재를 만나 기근이 끊이지 않고, 도적 떼가 날로 창궐해… 이제 세자에게 정무를 맡기고….”(3월 27일) <세종실록>은 “임금(세종)이 전 해(1436) 가을부터 대리청정의 뜻을 밝혔다가 반대에 부딪혀 결심을 접었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20년간 다스린 효과가 없다”는 세종의 말씀은 지나친 겸손이 아닌가요.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세종의 시대는 나라의 기틀이 마련되지 않은 건국 초였습니다. 인심이 흉흉했고, 범죄가 들끓었습니다. 예컨대 1439년 12월 15일 세종은 “복역 중인 사형수가 190명에 달하니 감형 좀 하면 어떠하겠느냐”고 운을 뗐습니다. 세종은 “근래 기근이 겹쳐 도적이 흥행하고… 사형수가 예전의 배가 되니 부끄럽게 여긴다”고 반성했습니다. 이건 약과입니다. “(왕실재산을 관리하는) 내탕고의 황금 술잔과 (제사를 관장하는) 봉상시의 은찬(銀瓚·제기)까지도 털렸다”는 기사(<세종실록> 1436년 윤6월 14일)도 등장합니다. 그랬으니 세종이 “별다른 업적을 이루지 못했다”고 자책하고 대리청정을 모색했던 겁니다. 계조당의 설계 조감도. 세종은 세자(문종)의 대리청정을 명하면서 세자가 신하들의 조회를 받을 전각인 계조당을 세웠다.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주상은 몸이 뚱뚱하고 고기만 먹어서…” 건강악화도 세종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세종은 타고난 ‘공부벌레’이자 ‘일벌레’였습니다. 건강을 챙길 시간이 없었겠죠. 오죽하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재위 1400~1418)이 세종에게 “주상은 몸이 뚱뚱한데 때때로 나와 놀면서 살 좀 빼야 한다”(<세종실록> 1418년 10월 9일)고 권했을까요. 태종은 “주상(세종)이 고기가 아니면 밥을 먹지 못한다”고 걱정하는 유언까지 남겼답니다(<세종실록> 1420년 8월 28일·1422년 11월 1일). 그러나 이때만 해도 “내가 본디 병이 없고 늙지도 어리지도 않았는데, 어찌 뒷날을 걱정하겠느냐”고 자신만만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젊은 날의 자신감이었습니다. 공부와 정사에 매달릴수록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결국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가까워지는 1436년 말과 1437년 초 사이에 대리청정을 공식 거론한 겁니다. 세종은 “나이 40을 넘겼지만 ‘예지(銳志)’가 흐려져 90세 늙은이나 다름없다”면서 “게다가 병까지 생겨서 정사를 보기가 견디기 어렵다”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종은 “세자의 나이가 스무 살을 넘겼고 학문도 깊고 지기(志氣)가 왕성해 능력이 있을 만한 때가 아니냐”면서 대리청정을 주장했습니다. 물론 다 넘긴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인사권과 병권, 형벌권, 외교사절 접견 등 국가의 대사는 과인이 맡을 것”(1437년 3월 27일)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죽어야 속이 시원하냐’ 임금이 대리청정을 원한다고 순순히 들어주는 신하들이 어디 있습니까. 바닥에 이마를 짓찧으면서 “아니 되옵니다!”를 외쳐야지 머뭇댔다가는 대역죄를 뒤집어쓸 수 있었습니다. 영의정 황희(1363~1452)를 비롯한 대소신료들이 극력 반대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집요했습니다. 무엇보다 건강이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하루에 한 동이 이상 물을 마시는 병(당뇨병)이 있고, 또 등 위에 부종(浮腫)을 앓고 있는데… 이제 또 임질(淋疾·성병이 아니라 요로결석으로 추정)이 걸렸다. 그러니….”(<세종실록> 1438년 4월 28일) 세종은 “(당뇨 때문에) 시력이 급격하게 떨어져 눈앞의 사람마저 구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호소했습니다. 1910년 무렵의 계조당 모습. 근정전 동쪽인 동궁 권역에 조성돼 있다. 계조당의 복원은 경복궁 중건 때 재건되고 보수된 건물을 모델로 삼고 있다.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이후 ‘대리청정하겠다’는 세종과 ‘아니 되옵니다’라고 버티는 신하들과의 다툼이 1442년까지 지루하게 이어집니다. 신료들은 ‘세자는 그저 부왕만 잘 섬기면 되는 자리’라고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정사가 한 곳(임금)에서 나와야지 두 곳(임금과 세자)에서 나오면 혼란이 생긴다는 거죠. “지금의 전하(세종)와 세자(문종)라면 좋겠지만 후세에 부자지간에 틈이라도 생기면 어쩔 거냐”는 것이죠. 흔히들 세종을 두고 ‘소통의 지도자’라 평하죠. 마냥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세종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정책을 두고는 결코 당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세종은 1442년(세종 24) 6월 16일 “이제 그대들과 토론하자는 게 아니라 그저 내 명을 전하는 것일 뿐”이라고 세자의 대리청정을 밀어붙였습니다. 신료들에게는 “너희는 임금의 병이 깊어져 손 쓸 수 없을 정도가 돼야 대리청정을 맡기겠느냐”고 윽박질렀습니다. 당대의 인물인 성현의 는 “지금도 궁궐 안에 가득 찬 앵두나무는 문종이 세자 시절 심은 것”이라고 전했다. /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세종은 밀당의 귀재 기어코 대리청정을 성공시킨 세종은 1443년 4월 17일 세자가 신료들의 조회를 받으며 정사를 펼칠 정당(집무실)을 세웠습니다. 그것이 계조당입니다. 세종은 원래 계조당을 남쪽을 향해 지었습니다. “세자가 남면(南面·남쪽을 향함)해서 정사를 펼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대소신료들이 벌떼처럼 일어났습니다. 태양을 향해 앉는 ‘남면’은 오로지 군주만의 방향이라는 겁니다. 신료들은 “하늘에 두 태양이 뜰 수 없다”며 일제히 반대했습니다. 그러자 세종은 여기서는 ‘그까짓 것’ 하며 양보합니다. ‘대리청정’을 받아냈으니 ‘남면’ 카드는 슬쩍 버린 겁니다. 결국 세자는 계조당 안에서 서쪽을 향하는 ‘서면’으로 대신들을 맞는 것으로 결정됐습니다. 세종은 ‘밀당’의 귀재였습니다. 세종을 쏙 빼닮은 세자 세자(문종)는 29세 때인 1442년(세종 24)부터 사실상 대리청정을 시작합니다. 사실 세종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세자가 당신(세종)을 닮아 성군의 자질을 타고났다는 겁니다. 예컨대 아버지를 닮아 학문을 좋아했던 세자(문종)는 한밤에 인적이 뜸해지면 책 한 권을 들고 집현전 학사가 숙직하는 거처까지 걸어와 밤새도록 토론했습니다. 그래서 집현전 숙직자들은 감히 관복의 허리띠를 풀지 못했답니다. 어느 날 숙직자였던 성삼문(1418~ 1456)이 밤이 늦어 세자가 행차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 옷을 벗고 누우려 했답니다. 문종의 효성은 지극했다. 아버지(세종)가 앵두를 즐기자 세자는 후원에 손수 앵두나무를 심어 앵두가 익으면 따다가 바쳤다. 세종이 그 앵두를 맛보고는 “외부에서 바친 앵두가 어찌 세자의 손수 심은 것과 같겠느냐”고 좋아했다.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그때 갑자기 문밖에 신 끄는 소리가 들리면서 “근보(성삼문의 자), 근보”했답니다. 이에 성삼문은 매우 놀라 허겁지겁 나가 절했답니다. 선비와 학문을 좋아하는 세자(문종)의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용천담적기>입니다. 효성 또한 대단했습니다. 아버지(세종)가 앵두를 즐기자 세자는 후원에 손수 앵두나무를 심었답니다. 세종은 세자가 따주는 앵두를 맛보고는 “외부에서 바친 앵두가 어찌 세자의 손수 심은 것과 같겠냐”며 좋아했답니다. 당대의 인물인 성현(1439~1504)은 “지금도 궁궐 안에 온통 앵두나무만 자란다”(<용재총화>)고 전했습니다. 측우기의 발명자는 문종 문종은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지(1450년 2월) 불과 2년 3개월 만(1452년 5월)에 승하합니다. 39세의 창창한 나이였습니다. 원체 병약했던 데다 어머니(소헌왕후·1395~1446)와 아버지(세종·1397~1450, 재위 1418~1450)의 삼년상을 잇달아 치르는 바람에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 겁니다. 재위 기간으로만 보면 너무 짧았습니다. 하지만 대리청정까지 합한다면 문종의 치세는 사실상 10년 정도는 됩니다. 그사이 세종은 웬만한 정사를 아들에게 넘기고 훈민정음 창제(1443) 및 반포(1446)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문종의 업적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1441년 4월 29일자 <세종실록>은 의미심장한 내용을 전합니다. “세자(문종)가 가뭄을 근심해 비 올 때마다 땅을 파서 젖어 들어간 깊이를 쟀다. 구리로 만든 원통형 기구를 궁중에 설치하고, 여기에 고인 빗물의 푼수를 조사했다.” 세종 시대의 업적 중 하나인 측우기의 발명가가 다름 아닌 세자(문종)였던 겁니다. <연려실기술>은 “문종이 천문을 잘 관측하고 후기(候氣)에 정교해 우레가 어느 때, 어느 방위에서 친다고 예언하면 반드시 적중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세종은 1436년 말에서 1437년 초에 대리청정을 공식 거론한다. “나이 40을 넘겼지만 ‘예지(銳志)’가 흐려져 90세 늙은이나 다름없다”면서 “게다가 병까지 생겨 정사를 보기가 견디기 어렵다”고 대리청정 할 뜻을 표명했다. ( 1437년 3월 27일)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문종의 치세가 오래됐다면… 1450년 절세의 성군(세종)이 승하했지만, 권력의 공백은 없었습니다. 모두 대리청정의 덕분이었죠. 문종은 특히 6품 이상까지 윤대(輪對·문무 관원이 교대로 궁중에 참석해 임금의 질문에 응대하던 일)를 허락했습니다. <연려실기술>은 “문종이 지위가 낮은 신하라도 온화한 안색과 부드러운 말씨로 응대해 언로를 활짝 열었다”고 전했습니다. 또 이민족과의 전쟁·전란사인 <동국병감>을 펴냈고, 역사서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편찬했습니다. 만만찮은 업적은 성군 아버지(세종)의 후계자 이양 방안, 즉 ‘8년여 대리청정’의 덕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종이 너무 일찍 승하하는 바람에 세자(단종·재위 1452~1455)가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를 잇는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만약 문종이 오래 왕위에 있었다면 계유정난(1453)과 같은 불행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문종은 세종의 치세를 계승했을 겁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제 어린 왕의 등극으로 쓸모가 없어진 계조당은 단종 즉위년(1452) 이후 9년 만에 헐리고 맙니다. 그래도 대리청정은 후대 왕세자의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의 모델로 활용됐습니다. 바로 경종(재위 1720~1724)과 영조(재위 1724~1776), 장조(사도세자·1735~1762), 정조(재위 1776~1800, 익종(효명세자·1809~1830) 등의 대리청정이죠. 지금 복원 막바지에 경복궁 계조당에는 ‘성군의 정치’를 잇고자 했던 세종대왕의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 이기환의 Hi-story
- [이기환의 Hi-story] 고려의 전설적인 ‘일타강사‘, 세종대왕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2023. 01. 25 15:38)
- 2023. 01. 25 15:38 문화/과학
- 사진은 <평생도 8곡병> 중 과거 급제 장면. ‘전설의 고려 일타강사’는 고려 충렬왕 때 제자 10명을 한꺼번에 급제시킨 강경룡이라는 인물이었다. 130여년이 지난 조선조 세종 연간에서도 그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조정에서 공론화된다.|국립중앙박무관 소장“(개성 용산동)…모퉁이에 한가로운 이 집을 지었는데…모든 선비들 물고기떼처럼 모여들어 공부에 뜻을 갖고….” 고려의 천재 문인이자 문장가인 이규보(1168~1241)가 지은 시(‘진수재·晉秀才)의 별장에 붙이다’)입니다. 시의 제목에는 ‘진수재가 관동(冠童·어른과 아이)을 모아 가르쳤다’는 부제가 뒤따릅니다. 한마디로 ‘진수재’라는 인물이 개성 용산에 학원을 차리니 학생들이 물고기떼처럼 모여들었다는 얘기입니다. 아마 진씨 성을 갖고 있는 진사 혹은 생원급 ‘일타강사’였던 것 같습니다. ‘진수재’ 같은 고려시대 ‘일타강사’ 이야기가 심심치않게 보입니다. ‘진수재’를 소개한 이규보 역시 학창시절 당대의 ‘일타강사’에게 배운 적이 있습니다. 다양한 조선시대 과거시험 답안지. 고려시대부터 ‘과거만이 출세의 외길’로 여겼기에 사생결단으로 ‘사교육 시장’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과거급제를 위해 당대 최고의 ‘일타강사’를 찾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대를 이어 고액과외 받은 이규보 부자 이규보는 당대 최고 명문이었던 개성의 문헌공도에서도 줄곧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영재였습니다. 그런 이규보는 1183년(명종 13) 실시된 국자감시(생원·진사시)를 코 앞에 두고 족집게 고액과외를 받았습니다. “공(이 이부)은 집에서 매양 관동(冠童·어른 아이)들을 모아놓고 글을 가르쳤는데, 나(이규보)도 지난 묘년(1183·계묘년)에 참여했습니다. 그 때 선생의 지위로 모셨고….”(<동국이상국집> ‘이 이부라는 이에게 드린다’) 무슨 얘기냐면 이규보는 그 해(1183년) 5월로 예정된 국자감시를 앞두고 있었는데요. 이때 아버지(이윤수·1130~1191)가 수주(수원) 수령으로 발령받아 임지로 떠나면서 이규보에게 ‘족집게 고액과외 선생’을 붙여주었습니다. 이규보의 시에 “묘(卯)년에 이 이부라는 분한테 배운 적이 있다”고 했는데, 1183년이 바로 계묘년이었거든요. ‘1183년 이규보의 과외선생=이 이부’였다는 예기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규보 가문의 ‘사교육’이 이규보의 셋째아들(이징)에게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이규보의 시(‘신 대장에게 내 아들 징을 가르치는 데 사례함’)에 나타나있는데요. “내 자식 우둔함을 혐의치 않고, 갈고 다듬어 옥 만들기를 기약하는데 그대의 후의를 무엇으로 갚을까.” 이규보는 이 시를 쓰면서 “신 대장(大丈)은 나이 80여 살인데 항상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는 각주를 달았습니다. “셋째 아들 징이 썩은 나무 같아 새길 수 없다”면서 신 아무개라는 과외선생에게 아들을 맡긴 겁니다. “신대장은 동몽(어린 학생들)이 배우기를 청하면 거절하지 않으니 학생들이 모여 글방(서숙·書塾)을 이뤘네.” 여기서 ‘대장(大丈)’이라는 직책이 흥미로운데요.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대장은 고려시대 죄인의 처벌을 실질적으로 담당하는 잡류직’이라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신 대장’의 신분은 일종의 구실아치(관청에 딸린 하급관리)였던 겁니다. 얼마나 유명한 ‘일타강사’였으면 그렇게 낮은 신분에도 천하의 이규보가 가장 아낀 아들을 가르쳤을까요. 이규보의 시를 보면 신 대장은 여든살이 넘도록 글방을 차려놓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전문학원 강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단원 김홍도의 ‘공원춘효도’. 조선 후기 과거제도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고발·풍자하는 풍속화이다. 과거 급제를 위해 온갖 부정행위가 자행되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안산시 소장■고려~조선을 들썩이게 한 레전드 강사 그런데 고려시대 대표적인 ‘일타강사’는 따로 있습니다. 그 명성이 후대의 조선조까지 알려진 ‘전설의 강사’였는데요. 이름이 <고려사>와 <세종실록>에까지 등장하니까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고려사>를 우선 볼까요. “이 노인은 비록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을 가르치는데 게을리하지 않아 제자들을 성공으로 이끌었구나. 어찌 공이 적다 하겠는가. 곡식을 내려주어라.”(<고려사> ‘세가·충렬왕’조) 때는 바야흐로 1305년(충렬왕 31)의 일입니다. 충렬왕(재위 1274~1308)이 유생 강경룡을 치하하고 곡식을 하사했다는 기사가 <고려사>에 실렸는데요. 대체 벼슬에 오르지도 못한 유생(강경룡)이 무슨 공을 세웠다는 걸까요. <고려사>와 이제현(1287~1367)의 <역옹패설>은 물론 조선의 정사인 <세종실록> 등에도 이유가 나오는데요. “강경룡이 집에서 제자를 양성했다. 1305년 실시된 국자감시(생원·진사시)에서 강경룡의 제자 10명이 모두 합격했다. 스승(강경룡)의 집에 합격한 제자들이 몰려가 스승을 뵈었다. 그 떠들썩한 소리가 밤새도록 끊이지 않았다. 마침 강경룡의 동네에 익양후 왕분(종친·고려 신종의 아들)이 살고 있었는데….” 시쳇말로 ‘강경룡 학원’의 소속학생 10명이 한꺼번에 과거(국자감시)에 합격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합격생들이 스승(강경룡)의 집에 찾아와 하루종일 마을이 떠나가도록 잔치를 벌였다는 겁니다. 마침 그 마을에 살던 종친(익양후 왕분·생몰년 미상)이 왁자지껄한 소리에 자초지종을 파악한 뒤에 이를 임금(충렬왕)에게 고했다는 겁니다. 이에 익양후의 보고를 들은 충렬왕이 강경룡을 크게 치하하면서 곡식을 내려주었다는 겁니다. 고려시대엔 공교육을 맡은 국자감 말고도 개인이 개경에 세운 12공도, 즉 12개 사학이 유명했다. 그중 최고 명문은 해동공자 최충(984~1068)이 설립한 ‘문헌공도’였다. 천재문인 이규보도 그 학교에 입학했다.■조선조 세종까지도 칭찬한 고려 ‘일타강사’ 그런데 13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조선왕조가 들어섰는데도 ‘강경룡 사례’가 ‘워너비’로 칭송 받았습니다. <세종실록>을 보죠. 당시 지성균판사 허조(1369~1439)가 세종대왕 앞에서 갑자기 ‘강경룡’이라는 인물을 소환합니다. “고려 충렬왕이~강경룡을 포창한 일이 있사옵니다. 지금은 유생 유사덕과 박호생이라는 사람이 자기 집에 서재를 차려놓고 수십명의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들을 법(<육전>)에 따라 특별포상 하신다면….”(1436년 10월8일) 이 무슨 말일까요. 허조는 “고려시대부터 한량·유생들이 서재(서당)을 차려놓고 학생들을 가르친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이 법전에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조선시대 들어서도 서울엔 국학(성균관 및 4부학당), 지방엔 향교를 각각 두었지만 개인이 서당을 시행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습니다. 허조는 교육의 혜택이 고루 전해지지 못하고 있는 개국초임을 강조했습니다. 허조는 조정의 힘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립학교 혹은 사설학원의 설립을 장려하자는 취지로 상소문을 올린 겁니다. 세종은 허조의 상소에 따라 유사덕과 박호생 등이 세운 ‘모범 사학(혹은 학원)’을 표창했습니다. 고려 최고의 천재 문인인 이규보도 1183년 과거(국자감시)를 앞에 두고 이이부라는 족집게 과외선생에게 배운 적이 있었다.■고려 12대 명문사학 이러한 사교육 열풍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멀리 갈 것도 없이 ‘고려시대부터’ 예를 들어보죠. 교과서에 배웠듯이 고려의 대표적인 국립학교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992년(성종 11) 창설된 국자감이었죠. 국자감은 1123년(인종 1) 국자학·태학·사문학·율학·서학·산학 등 경학(京師·6학)으로 정비됐구요. 그런데 국자감 교육에는 신분의 한계가 뚜렷했습니다. 국자학은 3품 이상, 태학은 5품 이상, 사문학은 7품 이상의 관리 자제들에게만 입학이 허용됐거든요. 그렇기에 지위는 좀 낮지만 머리가 좋은 가문의 자제들은 다른 문을 두들겨야 했습니다. 그것이 문벌귀족이 아니라 지방 향리 가문 출신인 이규보가 ‘사학(문헌공도)’를 택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중 고려 전통의 명문사학은 개경에 설립된 ‘십이공도(十二公徒)’입니다. 명문 사학 12개 학교는 ‘최충의 문헌공도, 정배걸의 홍문공도, 노단의 광헌공도, 김상빈의 남산공도, 김무체의 서원도, 은정의 문충공도, 김의진의 양신공도, 황영의 정경공도, 유감의 충평공도, 문정의 정헌공도, 서석의 서시랑도, 실명씨(失名氏)의 귀산도….’(<고려사> ‘선거지·사학’)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최고 명문은 해동공자 최충(984~1068)이 설립한 ‘문헌공도’였습니다. 이규보가 입학한 바로 그 학교죠. “1155년(문종 9) 설립한 문헌공도에 양반의 자제들이 문전성시를 이뤄 반을 9재로 나눴다. 낙성(樂聖)·대중(大中)·성명(誠明)·경업(敬業)·조덕(造道)·솔성(率性)·진덕(進德)·대화(大和)·대빙(待聘) 등이다. 무릇 과거에 응시하려는 자는 반드시 이 공도에 속해 공부했다.”(<고려사> ‘선거지·사학’) 얼마나 줄을 섰으면 9반으로 분반까지 했을까요. <고려사>의 구절이 가슴에 와 닿죠. “과거를 보려는 학생은 반드시 최충의 학교에 입학해야 했다”는 겁니다. 요즘으로 치면 가고싶은 대학, 가고싶은 직장에 가려면 명문 ‘문헌공도’에 입학해야 했다는 얘기니까요. 예나 지금이나 못말리는 ‘일류병’은 어찌 그렇게 똑같을까요. 1481년(성종 12) 5월27일 성균관 진사 이적(생몰년 미상)의 한마디가 고금을 초월한 ‘일류병’을 상징적으로 일러줍니다. “지금 인재선발은 오로지 과거에만 의존합니다. 과거로 출세하지 아니하면 ‘재주가 없다(비재·非才)’고 낙인찍고 으레 ‘별볼일 없는 관리(속리·俗吏)로 대우합니다.”(<성종실록>) 이규보(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에는 ‘진수재(晉秀才)’라는 시쳇말로 당대 사설학원의 강사를 주제로 한 시가 눈길을 끈다. 시의 제목에는 ‘진수재가 관동(冠童·어른과 아이)을 모아 가르쳤다’는 부제가 붙어있다. ‘진수재’라는 인물이 개성 용산에 학원을 차리니 학생들이 물고기떼처럼 모여들었다는 내용이다.■문헌공도의 여름철 ‘모의고사’ 각설하고 ‘과거 지상주의’가 판치는 세상이니 과거급제를 위한 교육이 극성을 떨었죠. 특히 최고의 명문이라는 ‘문헌공도’의 교육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정식 학기철은 물론이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에는 인근 사찰(귀법사 등)을 빌려 50일간 이른바 ‘하과(夏課·여름철 특별과외)’를 열었습니다. 문헌공도 출신 선배들이 특별강사로 초빙되었구요. ‘하과’의 특별시험 중에는 ‘각촉부시(刻燭賦詩)’라 해서 촛불에 금을 그어 시간을 정하고 시를 짓게 하여 글의 등급에 따라 등수를 정했는데요. 이런 시험을 불시에 치른다고 해서 ‘급작(急作)’이라고 했죠. 지금으로 치면 ‘수능대비 족집게 모의고사’였구요. 갓 급제한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출제경향과 예상문제, 그리고 답안지 작성요령을 전수해준 겁니다. 문헌공도에서 시작된 ‘하과’는 다른 사학에까지 요원의 불길처럼 퍼졌답니다. “12공도의 관동들이 해마다 여름철이면 산림에 모여 학업을 입히다가 가을이 되면 파했다. 용흥사와 귀법사 두 절에 많이 머물렀다”(<보한집>)는 등의 기사가 보입니다. 문헌공도와 같은 사립학교에서 이렇게 극성을 떠니 국립학교는 가만 있었겠습니까. 공교육의 장인 국립학교에도 ‘하과’가 퍼졌는데요. 대표적인 예로 고려말 대학자인 목은 이색(1328~1396)은 16~17살 때 국자감이 실시한 두 번의 구재도회(九齋都會)에서 무려 24~25회의 장원을 차지했답니다.(<목은집>) 그래도 생각해보면 ‘하과’는 사학이든 관학이든 학교의 테두리 안에서 실시한 공식 과외수업이라 할 수 있겠죠, 이것에 만족할 교육열이 아니었습니다. 이규보의 예에서 보듯이 ‘과거만이 출세의 외길’로 여겼던 이들은 사생결단으로 ‘사교육 시장’에게로 눈길을 돌렸고, 당대 최고의 ‘일타강사’를 찾았으니까요. 이규보는 셋째아들(이징)의 개인교습을 ‘신 대장’이라는 과외선생에게 맡긴 적이 있다는 사실을 시로 표현했다. 이규보는 “내 자식 우둔함을 혐의치 않고, 갈고 다듬어 옥 만들기를 기약하는데 그대의 후의를 무엇으로 갚겠냐”고 사례했다.■실패로 돌아간 일타강사의 과외 그렇다면 ‘사교육 열풍’은 과거를 위해, 출세를 위해 언제나 옳았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당장 어릴 적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고, 최고 명문인 문헌공도에서도 줄곧 1등을 차지한 이규보의 예를 들어볼까요. 앞서 1183년 5월로 예정된 국자감시를 코 앞에 두고 아버지가 족집게 고액과외 선생(이 이부)를 붙여주었다고 했잖습니까. 그러나 이규보는 그렇게 특별 과외를 받고도 그 해 시험에서 낙방을 했습니다. 이규보는 그 후에도 두 번이나 더 낙방을 거듭한 끝에 4번째 도전에서 겨우 급제했습니다. 이규보 같은 천재라도 ‘일타강사’의 족집게 과외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는 뜻입니다. 마침 고려를 풍미한 사교육 열풍을 곱지않은 시선으로 평가한 분도 있네요. 조선중기의 문신 황준량(1517~1563)의 <금계집>은 최충의 문헌공도를 ‘디스’하고 있는데요. “최충이 문헌공도를 설치하고 후학들을 가르쳐 세상에서 ‘해동부자(海東夫子)’라 일컬었다. 그러나 세상에 적용하여 도(道)를 밝힌 효험이 없었고 자신에 돌이켜 궁구(속속 파고들어 깊에 연구)한 실질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문하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모두 문장이나 수식하는 경박한 선비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근본을 힘쓰고 사특한 것을 억누르는 의리에 대하여는 듣지 못하여, 담론하는 것이라곤 단지 성현 말씀의 찌꺼기뿐이었습니다.” 황준량은 과거시험준비에만 몰두하느라 세상에 도움이 되는 참교육을 행하지 못한 고려의 사학을 개탄했던 겁니다.
- 이기환의 Hi-story이기환
- [우정이야기]세종시는 폐의약품 ‘우체통에’(2022. 12. 30 14:54)
- 2022. 12. 30 14:54 경제
- 미처 복용하지 못한 의약품을 사람들은 어떻게 처리할까. 2018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55.2%가 미복용 약을 쓰레기통이나 하수구·변기에 버렸다. 약국이나 보건소에 반환한다고 답한 비율(8%)의 약 7배에 달했다. 폐의약품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면 어디로 이동하게 될까. 2023년부터 우정사업본부가 세종시에서 시범실시하는 폐의약품 회수 우편서비스에 사용할 수 있는 폐의약 전용 회수용 봉투 / 우정사업본부 제공 2018년 기준 종량제봉투로 버려지는 생활폐기물의 하루 발생량은 2만361t이다. 이중 1만2163t(59.3%)은 소각되고 4008t(31.5%)은 매립한다. 종량제봉투에 담긴 폐의약품은 침출수 등을 통해 땅으로 유입된다. 이때 토양·수질오염 위험 또한 커진다. 항생제가 자연계로 흘러가면 생태계 교란뿐만이 아니라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슈퍼박테리아 등의 확산을 초래할 수도 있다. 폐의약품은 해외에서도 관리 대상이다. 유럽연합(EU)은 폐의약품에 관한 구체적 주의사항을 외부 포장에 기재하도록 했다. EU 회원국은 폐의약품 수거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규정도 있다. 프랑스는 2007년부터 폐의약품 회수를 의무화했다. 이후 10명 중 8명이 폐의약품을 약국으로 반환한다. 캐나다는 생산자 책임제를 적용해 폐의약품 수거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비영리단체가 폐의약품 회수 사업을 하고, 제약회사가 지원하는 방식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한국은 2023년부터 우정사업본부가 폐의약품 회수 우편서비스를 세종에서 시범 실시한다. 폐의약품을 세종시내 우체통에 넣으면 우체국에서 수거해간다. 우체국에서 모은 폐의약품은 다시 세종시 소각장으로 옮긴다. 우정사업본부는 시범 사업 시행 이후 폐의약품 회수 우편서비스를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폐의약품은 유효기간이 지난 약품, 변질·부패 등으로 사용할 수 없는 의약품을 모두 포함한다. 물약을 제외한 폐의약품을 전용 회수용 봉투 또는 일반 우편봉투에 넣은 뒤 ‘폐의약품’이라고 기재해 가까운 우체통에 넣으면 된다. 우정사업본부는 폐의약품 전용 회수용 봉투를 2023년 1월 중 가까운 약국에서 배부한다. 주변 우체통 위치는 인터넷 우체국 ‘우체통 위치정보 알리미 서비스’에서 찾을 수 있다. 앞으로 우체국은 우체통과 약국 등을 통해 수거된 폐의약품의 회수와 배송을 전담하게 된다. 기존에 수거 중인 약국, 보건소, 주민센터 등에서 회수한 폐의약품도 우체국 우편서비스로 분리 배출해 처리되는 과정을 거친다. 우체국만이 아니라 지자체도 폐의약품 수거에 나서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해 4월부터 ‘스타트서울맵’ 홈페이지(map.seoul.go.kr)를 통해 공공시설 516개소에 설치한 폐의약품 수거함의 위치 정보를 공개했다. 서울시 구청과 보건소, 주민센터, 복지관 등에 가면 폐의약품 수거함을 찾을 수 있다.
- 우정이야기
- [이기환의 Hi-story](41)세종대왕이 18남을 2열 횡대로 세운 이유(2022. 07. 08 14:24)
- 2022. 07. 08 14:24 문화/과학
- 얼마 전 ‘인종대왕 태실’과 ‘장조(사도세자)·순조·헌종 태봉도’가 보물로 지정예고됐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왕실의 태를 묻은 태실(인종태실)과 태실의 그림을 그린 태봉도 3점(장조·순조·헌종)의 문화유산 가치를 평가한 건데요. 태는 태아를 싸고 있는 조직입니다. 태아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태반과 탯줄’을 가리킵니다. 궁금증이 생기죠. 아무리 조선 임금과 왕족의 태라지만,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국가지정문화재로 대접해준다는 말입니까. 경북 성주 선석산 세종대왕 왕자 및 원손(단종) 태실의 배치도. 사진 아래쪽은 나이 순으로 진양대군(수양대군·세조)부터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등을 배치했다. 위쪽은 후궁이 낳은 서자 중 가장 연장자인 화의군부터 막내인 왕자 당까지 11명의 태실을 나란히 조성했다. 원손인 단종의 아기태실은 영응대군 태실에서 11.2m 정도 떨어져 있다. / 경북 성주군청·심현용 한국태실연구소장 제공 태를 묻는 이유 1570년(선조 3) 2월 1일 <선조수정실록>을 볼까요. “태실을 마련해 태를 묻는 풍습은 신라와 고려 사이에 생겼는데, 예부터 중국에는 없었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은 “김유신(595~673)의 태를 높은 산(충북 진천)에 묻었는데, 지금(고려)도 이 산을 태령산(胎靈山)이라 한다”고 기록했습니다. 또 <고려사> ‘지리지·진주(진천)조’에는 “김유신의 태가 신령으로 변했다”고 부연 설명했습니다. ‘태를 신령한 존재’로 본 겁니다. <세종실록> 1436년 8월 8일자를 볼까요. “사람이 ‘현명할지 어리석을지(賢愚)’, ‘잘될지 못 될지(盛衰)’가 모두 탯줄에 달려 있습니다.” <세종실록>은 “탯줄이 좋은 땅을 만나면 총명해져 학문을 좋아하고 구경(九經·9개 유교경전)에 정통하며, 원만하고 마음이 밝고, 병이 없게 되며, 높은 관직으로 승진하게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여자의 태도 좋은 땅을 만나면 얼굴이 예쁘고 단정해 남들이 우러러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세종실록>은 “길지란 땅이 반듯하고 봉긋하게 솟아 위로 공중을 바치는 듯해야 한다”고 친절하게 설명했습니다. 이걸 ‘돌혈(突穴)’이라 합니다. 그후 잇단 정변(계유정난·1453, 중종반정·1506, 인조반정·1623)의 패자(안평대군·연산군·광해군) 태실이 예외없이 파괴·혹은 훼손됐는데요. 태실의 파괴는 곧 조상과 이어지는 핏줄을 끊는다는 뜻이죠. 태를 왕조의 혈통, 즉 정통성의 상징으로 여겼던 겁니다. 왕자들의 태실과 떨어진 곳에 조성된 원손 단종의 태실에서는 “1441년 윤 12월 26일 원손의 태를 묻었다”는 아기태비가 보였다. 1453년 즉위한 단종의 태실은 군주의 격식에 맞게 가봉된 뒤 인근 성주 법전리 법람산으로 이안됐다. / 경북 성주군청 제공 2열 횡대로 집합한 세종의 아들들 태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역시 세종대왕입니다. 태실 제도를 확립시킨 분이니까요. 경북 성주 선석산(해발 742.4m) 끝자락에 봉긋하게 솟아오른 태봉(258.2m)이 있는데요. 태봉의 정상부 평탄지(남북 50m·동서 20m)에 세종대왕의 아들(18명)과 원손(단종) 등 모두 19기의 태실이 ‘2열 횡대’로 있습니다. 왕통을 이은 문종(재위 1450~1452)의 태실만 경북 예천(명봉산)에 따로 조성했고요. 다른 대군(7명)과 군(11명)의 태실이 두 줄로 서 있습니다. 앞줄은 왼쪽에서 진양대군(수양대군~세조, 1417~1468)~안평대군(1418 ~1453)~임영대군(1420~1469)~광평대군(1425~1444)~금성대군(1426~1457)~평원대군(1427~1445)~영흥대군(영응대군으로 개봉·1434~1467) 등의 순으로 조성했습니다. 뒷줄은 왼쪽에서 화의군(1425~?)~계양군(1427~1464)~의창군(1428~1460)~한남군(1429~1459)~밀성군(1430 ~1479)~수춘군(1431~1455)~익현군(1431~1463)~영풍군(1434~1457)~영해군(1435~1477)~담양군(1439~1450)~왕자 당(1442~?) 순이고요. 앞줄은 정부인(소헌왕후·1395~1446)이 생산한 적자를, 뒷줄은 후궁들이 낳은 서자를 태어난 순서대로 배치한 겁니다. 원손인 단종(1441~1457·재위 1452 ~1455)의 아기태실은 영응대군 태실에서 서북쪽으로 11.2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정체를 드러낸 세종의 19번째 아들 세종의 자녀가 18남 4녀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고개를 갸웃거리겠네요. 세자인 문종의 태실이 다른 곳에 조성됐다면 선석산 태실에는 17기(단종 태실 제외)만 남아 있어야 하는데, 왜 18기일까요. 이 선석산 태실의 배치도를 보면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세종대왕의 숨겨진 아들이 한분 더 있다는 겁니다. 그분이 바로 ‘왕자 당(?)’인데요. ‘왕자 당’의 아기비와 태지석에는 “1442년 7월 24일 오전 3~5시 사이에 태어났고, 태는 그해 10월 23일 묻었다”고 했습니다. 세종대왕 왕자들의 태를 묻은 선석산 태실에는 세조의 태실(아기태실+가봉태실)이 다른 형제들과 함께 그대로 남아 있다. 즉위 후 ‘가봉(加封·군왕의 격에 맞도록 태실을 별도의 길지에 옮기고 치장)’ 태실을 조성해야 했지만 세조가 “임금의 격에 맞게 석물만 따로 만들고 태실을 옮기지는 마라”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세조는 “형제들의 태가 여기 있는데 굳이 따로 태실을 옮길 필요가 있느냐”면서 형제애를 나타냈다. / 경북 성주군청 제공 그런데 왕실족보인 <선원보>에는 적·서자를 통틀어 ‘막내(18남)=담양군 거(1439년생)’라 했습니다. ‘1442년생 당’은 왕실 족보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럼 18번째(문종 제외) 태실의 주인공인 ‘당’은 과연 누구일까요. 없는 자식의 태를 묻지 않았다면 자명해지죠. 마지막 태실(18번째)의 주인공은 1442년에 태어난 세종대왕의 막내, 즉 19남인 왕자 당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왜 ‘왕자 당’은 왕실족보에 오르지 못했을까요. <세종실록> 1446년 3월 28일자를 볼까요. 즉 세종은 부인(소헌왕후·1395~1446)이 승하했을 때 “겨우 8세인 담양군(이거)은 가장 어리니 상복을 입지 말라”는 명을 내렸는데요. 그렇다면 담양군보다 3년 뒤에 태어난 ‘왕자 당’은 1446년 이전에 죽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심현용 한국태실연구소장은 “다섯 살도 채 안 돼 죽은 왕자였기 때문에 왕실 족보에도 올라가지 않거나 누락한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습니다. 그게 맞다면 18남 4녀로 알려진 세종의 자녀는 19남 4녀로 고쳐야 할 것 같네요. 세종은 세자를 빼고도 아들 18명의 태가 묻힌 선석산을 생각하면 얼마나 흐뭇했을까요. 날로 번창해가는 왕실을 떠올렸겠죠. 아닌 게 아니라 세종의 자녀들은 한결같이 총명했습니다. 세자인 문종을 볼까요. 그분의 치세는 짧았지만(2년 3개월) 대리청정(8년)까지 포함하면 10년간 세종의 치세를 완성시켰고요. 세자 시절, 측우기를 발명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수양대군(세조)은 석가모니의 일대기인 <석보상절>을 편찬하고 훈민정음으로 번역했고요. 셋째인 안평대군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서예와 시문, 그림, 가야금 등에 두루 능한 절세의 팔방미인이었죠.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등도 똘똘하기 이를 데 없었죠. 다른 군들의 능력 또한 아버지(세종)를 닮았다면 한결같이 빼어난 재주를 지녔을 겁니다. 조카, 동생들을 죽인 세조의 형제애? 선석산 태실에서는 또 하나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가 있습니다. 세조, 즉 진양대군(수양대군)의 태실입니다. 조카(단종)를 죽이고 등극한 세조라면 정통성 확보를 위해서라도 태실을 따로 옮기고 화려하게 치장했을 것 같죠. 그런데 왜 그 자리에 그냥 서 있을까요. 그렇지 않아도 그런 논의가 일었는데요. 세조는 “가봉(加封·임금의 예에 따라 석물을 얹어 치장)은 하되 옮길 필요는 없다”(<세조실록> 1462년 9월 14일)고 손사래를 칩니다. 결국 세조의 명에 따라 비를 세워 다른 왕자들의 태실과 구별짓는 것으로만 끝냈는데요. 세조의 한마디가 재미있습니다. 최근 보물로 지정예고된 장조(사도세자)와 순조, 헌종의 태봉도. 한결같이 풍수상 길지로 여겨진 곳에 조성돼 있다. / 문화재청 제공 “형제들의 태가 여기 같이 있는데 어찌 옮기겠는가. 다만 ‘수양대군(진양대군)의 비’라는 표석만 없애고 비석만 세워라.” 비석의 내용도 의미심장합니다. “아아! 빛나는 오얏나무(李·이씨 왕조를 뜻함), 1000가지 1만 잎사귀라… 성태(세조의 태)를 옮기지 아니하니… 검소한 덕이 더욱 빛난다”고 했습니다. 가히 눈물 나는 형제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조의 형제애는 진심이었을까요. 그보다 4년 전인 1458년(세조 4) 7월 8일 실록 기사를 볼까요. “선석산에 주상(세조)의 태실이… 난신 이유(금성대군)의 태실이 섞여 있고, 법림산(성주 가야산 기슭)에는 노산군(단종)의 태실까지 있습니다…. 유(금성대군)와 노산군(단종)의 태실을 철거하소서.” 무슨 말일까요. 원손 시절 단종의 아기태실은 세종의 아들(문종 제외 18명)과 함께 선석산에 묻혀 있잖아요. 그런 단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법림산에 따로 가봉태실을 꾸몄거든요. 그런데 1453년 일어난 계유정란에 안평대군이, 1455년 단종복위운동에 금성대군을 비롯해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 등이 연루되죠. 역적죄를 뒤집어쓴 안평대군의 태실은 이미 훼손됐고요. 1458년의 실록은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된 금성대군 등 형제 4명의 태실까지 파괴했다”고 기록한 겁니다. 선석산에 조성된 단종의 원손 시절 아기태실은 그냥 두었지만, 법림산(성주)에 따로 조성된 (단종의) 가봉태실은 이때 훼손된 거고요. 2차례의 정변에서 파괴된 선석산의 대군·군 태실 5기는 산 계곡 아래까지 굴러떨어져 있었는데요. 1977년 대대적인 보수·정비 때 그중 일부가 수습돼 지금처럼 복원됐습니다. 그런데도 세조는 ‘형제들과 함께 있겠다’고 형제애를 운운했군요. ‘악어의 눈물’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뭐 달리 볼 수도 있겠죠. 조카와 동생들을 죽이거나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죄를 뒤늦게나마 반성한 참회의 몸부림을 친 것일까요. 정조도 끊지 못한 안태의 폐습 세종 이후 왕실 자손의 태를 묻는 풍습은 성종(재위 1469~1494) 때 그 범위가 공주까지 확대되는데요. 세종이 세운 원칙, 즉 왕실의 태실을 한곳에 묻는 전통은 이어지지 못합니다. 풍수상 좋은 땅과 혈처 역시 단 한곳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죠. 그래서 세종 이후 임금들은 대부분 1인 1곳의 태실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니 폐단이 말도 못 했죠. 왕자·공주가 태어날 때마다 그들의 태를 묻는 안태 행렬을 맞이해야 했던 농번기 백성들의 번거로움은 물론이고요. 태실로 낙점되면 200~300보 거리의 사유지가 하루아침에 농사는커녕 출입도 불허되는 금단의 땅이 됐습니다. 훗날 영조(재위 1724~1776)가 나서서 “하나의 태봉에서 위부터 아래까지 차례차례 묻으라”(1758), “궁궐의 후원에 태를 묻어서 폐단을 없애라”(1765)는 지시를 잇달아 내리는데요. 영조의 뜻은 이어지지 않습니다. 정조(재위 1776~1800)가 1785년(정조 9) 아버지(사도세자·1735~1762)를 위해 가봉태실을 조성하면서 무너지고 맙니다. 사도세자는 왕위를 잇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가봉태실(왕위를 이은 뒤 치장한 태실)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거든요. 정조는 ‘할아버지(영조)-손자(정조)’로 이어진 비정상적인 정권 이양이 아니라 아버지(사도세자)를 거친 정통성을 갖춘 승계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겁니다. 일제는 서삼릉에 새롭게 조성한 왕과 왕자(공·옹주 포함)의 태실 공간을 한 일(一)자 형태로 구분했다. 일본을 상징하는 ‘날 일(日)’ 자 형태이다. 지하의 형태도 마찬가지다. 원형의 시멘트 관에 태지석과 태항아리를 묻고 그 위를 날 일(日) 자 형태의 시멘트 덮개를 씌웠다. / 심현용 한국태실연구소장 제공 날 일(日) 자로 복원한 일제 이렇게 전국 곳곳의 길지(명당)에 봉안돼 있던 조선왕실의 태실은 국권침탈 후 일제에 의해 제자리를 잃고 맙니다. 1929년 전국의 태봉 39곳을 훼철한 뒤 그곳에 조성돼 있던 태실 54위(태항아리 위주)를 경기 고양 서삼릉에 집단 이주시킨 겁니다. 조선 왕조의 만세안녕을 기원하며 봉안한 조선왕가의 태를 죽음의 공간인 무덤(서삼릉)에 묻어버린 셈이죠. 일제는 그렇게 꾸민 왕과 왕자(공·옹주 포함)의 공간을 한 일(一) 자 형태로 구분했다죠. 멀리서 보면 일본을 상징하는 ‘날 일(日)’ 자 형태입니다. 지하도 원형 모양의 시멘트 관에 태지석과 태항아리를 묻고 그 위를 날 일(日) 자 형태의 시멘트 덮개를 씌웠습니다. 심현용 소장은 “땅 위에서 땅 밑까지 조선 왕실의 생명성을 상징하는 태를 일본 안에 가둔 셈”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개 중에는 이런 말도 나올 것 같아요. 세종대왕이 쓸데없이 풍수지리가 접목된 태실 제도를 만들어 갖가지 폐단을 야기한 게 아니냐는 이야기 말입니다. 일리 있는 비판 같아요. 그러나 달리 생각할 필요도 있어요. 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태아와 엄마를 하나의 생명공동체로 묶어준 매개체죠. 한마디로 생명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요즘 제대혈을 보관하는 이들이 있다죠. 제대혈에 적혈구·백혈구·혈소판을 만드는 조혈모세포가 풍부하고, 연골·근육·뼈·신경 등을 만들 수 있는 간엽줄기세포가 다량 함유돼 있다면서요. 그렇다면 제대혈 보관은 1400년 가까이 이어온 안태의식의 현대적 버전이 아닐는지요. 조상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 이기환의 Hi-story
- 김정섭 세종연구소 부소장 인터뷰 “핵대응 기본전략, 선제타격 아닌 사후응징 억제”(2022. 02. 04 15:49)
- 2022. 02. 04 15:49 정치
- 북한의 잇따른 미사일 발사로 새해 시작부터 남북관계가 얼어붙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역점 사업인 ‘한반도 종전선언’의 불씨도 꺼져가는 모양새다. 2018년 정상회담을 계기로 반전을 맞았던 남북관계는 북미회담 결렬과 코로나19 확산으로 장기간 교착 상태에 빠졌다. 오히려 북한의 안보위협이 대통령선거 표심에 영향을 미치는 이른바 ‘북풍’에 주목해야 할 상황이다. 사진 / 이준헌 기자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우려를 낳는 것은 협상 방식을 과거로 되돌릴 조짐을 보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잇따른 도발과 제재, 이로 인한 위기가 극한에 치닫고 나서야 대화를 재개하곤 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경제적 피해는 고스란히 한국의 몫이다. 여론의 호응을 받지 못하더라도 정부가 북한과의 대화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할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플라자 프로젝트 11회는 김정섭 세종연구소 부소장과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한국의 안보전략’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국방부 기조실장을 역임한 김 부소장은 핵 전략·안보 분야에서 손에 꼽는 전문가다. 북핵 문제의 군사적 대응책으로 ‘선제타격’이 도드라지는 상황에서 그는 ‘사후 응징보복전략’을 강조한다. 인터뷰는 지난 1월 24일 경기도 성남시에 있는 세종연구소에서 진행했다. 이후, 지난달 30일 북한의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시험 발사가 진행되며 추가 서면 인터뷰를 했다. -북한의 잇따른 미사일 시험 발사는 ‘전략적 도발’을 재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나. 김정섭(이하 ‘김’) “올해 있었던 7차례의 시험 발사 대부분은 사거리 1000㎞ 이하의 단거리 미사일이었다. 핵실험, ICBM 발사 등으로 대표되는 전략적 도발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북한은 2019년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이후 전략적 도발은 자제해왔다. 대신 주로 단거리 전술 무기를 시험 발사했다. ‘북한판 이스칸데르’로 불리는 KN-23 단거리 탄도미사일 등이 대표적이다. 전략적 도발로 비난받을 수 있는 상황을 피하면서 국방력을 신장시켜 나가고 있다. 다만, 지난달 30일 발사한 화성-12형 중거리 미사일은 의미가 다르다. 괌 타격이 가능한 사거리를 갖고 있는 중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는 2017년 11월 이후 4년 만이다. 전략도발의 문턱까지 온 것이다.” -단거리 미사일 발사는 어떤 의미인가. 김 “북한의 군사력과 관련된 모든 행동을 ‘대외적 위협 메시지’로만 해석하는 건 오히려 정확한 해석과 대응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올해 잇따라 발사한 단거리 미사일에 한정한다면 이는 북한이 스스로 설정한 국방력 증강 계획을 따라가고 있다고 보면 된다. 북한은 2021년 1월의 제8차 당대회에서 ‘국방과학 발전 및 무기체계 5개년 계획’을 밝혔고, 극초음속 미사일이나 핵 추진 잠수함 등을 공언했다. 이미 밝힌 계획대로 실행 중인 상황이다.” -핵실험, ICBM 시험 발사 재개는 의미가 다르지 않나. 김 “그렇다. 단거리 미사일이 아니라 지난 19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에서 나온 ‘잠정 중지했던 모든 활동을 재가동하는 방안을 신속히 검토하도록 지시했다’는 내용이라면 의미가 다를 수 있다. 공개 문안을 보면, 누가 보더라도 북한 스스로 설정한 핵 실험 및 ICBM 발사 시험 모라토리엄(유예) 철회를 시사한 것으로 읽힌다. 북한은 미국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전략적 도발을 자제하며 상황을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1년이 넘도록 미국이 상황 관리만 할 뿐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자 판을 흔드는 강압외교에 시동을 걸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본다.” 김정섭 세종연구소 부소장이 지난 1월 24일 경기도 성남시 세종연구소 회의실에서 북한이 발사한 미사일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이준헌 기자 -바이든 정부의 대북정책이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와 차이가 있나. 김 “바이든은 트럼프의 ‘빅딜’이나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와는 달리 ‘정교하고 실용적 접근’을 강조한다. 인센티브를 주는데는 인색하다. 급박한 이슈들이 많다 보니 북한문제를 후순위에 뒀는데 결과적으로 ‘소극적 상황관리’가 되고 말았다.” -북한의 최종 목적은 무엇인가. 핵 미사일 실전배치인가, 핵위협을 통한 제재해제인가. 김 “전문가들은 북한이 핵을 소형화해 미사일 탄두에 장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는 최소 핵 두발 정도를 실을 수 있는 상황이고 단거리 미사일에도 한발 정도는 실을 수 있다고 추정한다. 북한이 두 가지 목적을 모두 추구하는 게 가능하다는 의미다. 북한으로선 미국을 군사적으로 억제하면서 외교 카드로도 활용하는 게 최상의 전략일 것이다.” -‘북풍’의 실체가 있다고 보나. 있다면 대선을 앞두고 북풍을 만드는 이유가 뭘까. 한국에 ‘진보 정부’가 들어서는 게 북한한테 이로운 것 아닌가. 김 “지금 상황은 문재인 정부를 계승하는 쪽에 유리한 방향은 아니다. 남북관계가 2017년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점도 실망스러운 결과다. 다만 정치국 회의에서 나온 발언을 보면 한국 관련 내용은 없다. 전부 미국을 향한 불만이고, 조치를 검토하라는 내용들이다. 북한의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한국정치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라기보다 북한이 집중하고 있는 대상은 미국인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미국의 중간선거 등을 고려했다면 몰라도 한국의 정치상황에 영향을 끼치려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미사일 발사로 ‘종전선언’은 사실상 물건너갔다는 해석도 있는데. 김 “종전선언은 사실상 어려워졌다. 정치국 회의에서의 발언 때문이 아니라 이전부터 북한은 종전선언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대북 적대시 정책 폐기’, ‘이중기준 철폐’를 전제조건으로 걸었다는 것도 종전선언이 북한에게 매력적이지 않은 선택지였음을 보여준다. 종전선언은 실질적 변화보다 정치적·상징적 선언에 가깝다. 그렇다면 북한에게 무슨 이득이 되느냐의 문제가 남는다. ‘별도의 이벤트’가 아닌 비핵화나 평화프로세스와 연동할 때 비로소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정확히 어떻게 연동해야 한다는 건가. 김 “종전선언은 2018년 비핵화 협상에 탄력이 붙었을 때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했다. 당시에 종전선언이 이뤄졌다면 분명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종전선언은 가동 시기에 따라 그 효과가 달라진다. 비핵화 협상은 북한이 조치를 내놓으면, 미국이나 한국이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패키지로 주고받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 속에 종전선언의 최적 위치를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 남북미 사이의 경색 국면을 타개하는 용도가 아니라 비핵화 협상 단계에서 ‘종전선언’ 카드를 꺼내야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의미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교착 국면에서 분위기 반전의 촉매제로 종전선언을 활용해 보겠다는 건데 이건 버거운 상황 아닌가 싶다.” 북한이 지난 1월 30일 중거리 탄도미사일(IRBM)인 화성-12형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밝혔다. /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미사일 도발에 대한 제재는 있을 것으로 보나. 김 “미국이 유엔 안보리를 통해 추가 제재를 모색했는데 사실상 중국이 거부했다. 모든 종류의 탄도 미사일 발사가 유엔 안보리 제재 대상인 것은 맞지만 그동안 미국도 단거리 미사일은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이나 러시아가 북한을 추가 제재하는 방안에 찬성할 것 같지는 않다. 미중경쟁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중국이 느끼는 북한의 전략적 가치가 올라갔다고 볼 수도 있다. 다만 미국의 독자적 제재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북한이 ICBM 발사와 같은 전략적 도발을 감행한다면 미국은 강경 대응에 나설 것이다. 북미 협상이라는 것이 늘 이런 과정이었다. 협상을 하다가 교착 상태에 빠지면 북한이 도발을 하고, 미국이 강경 대응을 하며 위기가 고조된다. 그러다 보면, 또 해결을 위한 대화가 열리곤 했다. 문제는 이러한 패턴이 일촉즉발의 위험한 순간을 지나야 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험난한 과정의 연속이라는 점이다.” -미국의 추가제재가 있다면 남북관계는 어떻게 되나. 김 “도발과 제재 분위기가 되면 남북관계는 굉장히 어려워진다. 북한이 당장 ICBM을 발사하거나 핵실험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검토’를 지시한 만큼 미국의 반응을 보고 구체적 행동 수준을 결정할 것이다. 다만 이대로 가면 기본 방향은 ‘대미강경책’이다. 베이징올림픽이 있기 때문에 곧바로 ICBM이나 핵실험으로 갈 것 같지는 않고, 단계적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영변 핵시설 재가동에 들어간다든지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인 북극성 4형, 5형 등을 시험 발사한다든지 하는 수순이다. 극초음속 미사일도 현재 1000㎞ 정도를 비행하는 수준인데 3000㎞ 이상으로 늘려서 실험할 수도 있다.” -‘극초음속 미사일’이 화제다. 이 때문에 ‘선제타격’ 논의까지 나오는데 어느 정도로 위험한 것인가. 김 “상당한 위협이다. 북한은 극초음속 미사일 개발 의지를 천명한 지 1년 만에 세 번이나 시험 발사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완성도는 높아질 것이다. 극초음속 미사일을 이해하려면 ‘탄도 미사일’과 ‘순항 미사일’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탄도 미사일은 일정한 포물선 궤적을 그리기 때문에 속도는 빠르지만 상대적으로 요격이 쉽다. 순항 미사일은 일정한 궤적이 아니라 유도신호를 받아서 움직인다. 이 때문에 느리지만 요격은 어렵다. 극초음속 미사일은 이들의 장점을 각각 합쳤다. 속도도 음속의 5배 이상으로 빠른데 회피기동, 변칙기동을 한다. 현실적으로 미사일 방어가 굉장히 어렵다. 다만 극초음속 미사일에 필요 이상의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반론도 있다. 사실 통상적 미사일이라고 하더라도 미사일 방어는 어렵다. 이 부분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미사일 800여발, 이동식 발사대 200개 이상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불과 몇분 만에 모두 탐지, 추적해 요격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장사정포와 다양한 미사일을 섞어 쏘는 전술로 나온다면 대응은 더 어려워진다. 이미 기존 미사일만으로도 한미 미사일의 방어역량을 초과해서 날라올 수 있다는 의미다. 완벽한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걸 인정한다면 엄청난 보복공격을 받을 수 있는 ‘선제타격’은 쉽게 나올 수 없는 발언이었다고 생각한다.” 지난 1월 30일 북한의 중거리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 이후 윤석열, 이재명 대선후보가 SNS에 올린 게시물 / 윤석열, 이재명 SNS 갈무리 -선제타격 외에 대안은 있나. 김 “선제타격은 핵 보복이 가능한 상황에서 합리적 선택이 될 수 없다. 북한은 이미 핵 보복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선제타격으로 일거에 북한의 모든 핵무기를 무력화할 수 없다면, 핵보복을 당할 수밖에 없다. ‘유사시에 북한 핵공격을 선제적으로 무력화하겠다’는 발언이 국민을 안심시키고 단호해보이는 것 같지만, 조금만 깊게 생각해 보면 얼마나 위험하고 현실성이 없는 것인지 금방 파악할 수 있다. 선제타격이 아니라 사후 응징억제가 북핵위협의 중심 대응 전략이 돼야 한다. 이는 북한이 핵을 사용했을 때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보복을 가할 수 있다고 위협함으로써 핵사용 자체를 억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냉전시대 나토의 핵전략 중심개념이기도 했고, 현재 우리 한국군이 갖고 있는 ‘압도적 대응’ 전략이 바로 응징억제의 일환이다. -현재 군사적 능력으로 가능한 대안인가. 김 “북한이 핵을 사용하면 정권이 생존할 수 없다는 점을 신뢰성 있게 밀어붙이면 된다. 핵을 핵으로만 대응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일종의 ‘도그마’다. 억제라고 하는 것이 꼭 파괴력이 비슷한 무기끼리만 성립하는 건 아니다. 상대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다면 첨단 재래식 무기도 신뢰성 있는 대응 방안이 될 수 있다. 여기에 미국의 확장억제가 함께 작동하기 때문에 북한은 군사행동 시 이중의 위험을 계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반도는 구조적으로 쌍방억제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환경이다. 북한도 남한을 쉽게 공격할 수 없고, 한미도 북한을 쉽게 공격하기 어렵다. 다시 말하지만 핵대응의 기본전략은 선제타격이 아닌 사후 응징억제다. 북핵 문제 역시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고위력의 지대지 탄도미사일, 정밀 공대지 미사일 등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응징보복 전력은 막강하다. 이런 전력을 대량으로 집중 운용해 김정은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를 응징할 수 있음을 보여주면 된다.” -그럼에도 ‘선제타격’처럼 공격적인 발언이 유권자들에게 더 잘 먹히는 듯하다. 김 “북핵 문제가 불거진 지 이미 몇십년이 흘렀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전쟁을 총과 대포로 무장한 군인들이 싸우는 전쟁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다. 선제타격을 강조하다 보면 북한도 선제 핵사용 유인을 갖게 된다. 먼저 타격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좋겠다.” 지난 1월 25일 이동식 발사차량에서 북한이 발사한 장거리 순항미사일이 날아가는 모습 /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해군 경함모 확보는 어떤가. 안보에 실질적 도움이 될까. 김 “이 부분은 원론적으로 언급하겠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이를 떠나서 우리 안보전략이 어떠한 것인가 생각해야 한다. 원거리 작전에 힘을 쏟아부을 것인가, 그게 필요한가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 우리 전략이 먼 바다에서까지 항공기를 실어서 전투력을 행사하는 걸 포함한다면 당연히 항공모함은 좋은 수단이다. 반면 근해 작전만 할 거라면 지상에서 발진하는 전투기로도 충분하다. 잠수함과 다른 수상함으로 서해에서 작전을 펼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또 한가지 고려해볼 것은 미래전쟁 개념이다. 과연 항공모함이 미래전에 맞는 무기체계냐 하는 것이다. 항공모함은 날로 발전하는 미사일에 취약하다. 우리 안보전략의 보다 명확한 방향을 정하고 논의해야 한다.” -모병제나 병사 월급 인상은 가능하다고 보나. 김 “병사 월급 인상은 찬성이다. 의무복무이지만 그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 사실 남자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누구나 군대에 가는데 이때 장교를 선택할 수도 있다. 장교를 선택해 복무하는 것도 의무복무의 일환인데 월급 개념의 처우를 해주고, 병사를 선택하면 제대로 된 보상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부터 이상하지 않나. 보상 수준은 합의를 이뤄야겠지만 분명, 월급 인상은 있어야 한다. 모병제도 이와 연계해볼 수 있는데 완전 모병제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순수 모병으로는 최소 수준의 군 병력 규모를 맞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 군 인력 구성에서 징집병의 규모가 60%에 달한다는 건 문제가 있다. 첨단무기체계 운용의 전문성과 숙련도 측면에서 기술집약형 전투부사관과 군무원 등을 점차 늘려가는 것이 전투력 향상에도 더 낫다고 본다.” -정규군 감소로 국방력이 약해질 가능성은. 김 “전쟁을 예전의 머릿수 싸움, 특히 상비군 규모만 생각하면 안 된다. 징집병 규모를 줄이되, 전투부사관과 군무원을 그만큼 늘리고 조리, 병원, 교육 등 비전투 업무는 민간에서 아웃소싱하면 총 국방인력에는 실질적 변화가 없다. 단기징집병 위주의 군대보다 전문성, 숙련도가 높아져 전투력은 더 나아질 것이다.” 북한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시험 발사하는 모습 /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다음 대통령에게 조언한다면. 김 “장군들은 항상 과거의 전쟁을 준비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대비해야 할 전쟁은 앞으로 있을 미래의 전쟁인데 과거에 경험했던 전쟁 방식으로만 준비한다는 얘기다. 막상 새로운 전쟁이 닥치고 나서야 대비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6·25전쟁 때의 프레임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말로는 북핵 방어 능력이 중요하다고 외치면서 아직도 국방예산의 72% 정도를 핵이 아닌 재래식 위협의 대응에 투자하고 있다. 차기 정부는 이런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해결해야 한다. 앞으로 우리가 직면할 안보적 도전은 과거와는 다른 양상일 것이다. 미중경쟁은 더 심각해질 것이고, 북핵 위협도 날로 고도화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구는 줄어들고 있다. 결국 4차 산업혁명에 기반한 미래전 양상에 어떻게 적응해갈 것인가 여부가 핵심이다. 싸우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혁신해서 전력 증강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병력 위주의 군대를 운용하지 말고 미래전에 걸맞게 군의 구조를 바꿔나가야 한다. 지금은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간이다.” 종전선언은 사실상 어려워졌다. 정치국 회의에서의 발언 때문이 아니라 이전부터 북한은 종전선언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대북 적대시 정책 폐기’, ‘이중기준 철폐’를 전제조건으로 걸었다는 것도 종전선언이 북한에게 매력적이지 않은 선택지였음을 보여준다.
- [이기환의 Hi-story](9)세종의 용인술, 신하들 재능 탈탈 털었다(2021. 11. 12 12:02)
- 2021. 11. 12 12:02 문화/과학
- 국립고궁박물관에서 12월 31일까지 매우 의미심장한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지난 6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출토된 세종 시대 등 조선 전기 금속활자와 옥루(자격루),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같은 과학기구 부품 등 금속유물 1775점 전부를 전시하고 있는데요. 시간이 나면 들러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제가 지난 6월부터 서울 인사동 출토 유물 기사를 준비하면서 뒤통수를 한대 맞은 기분으로 읽은 실록 기사가 있었습니다. 세종 연간인 1437년 발명한 일성정시의. 낮에는 해, 밤에는 별자리의 운행을 관찰해 시각을 측정하는 천문시계다. 세종은 천체의 운행을 꿰뚫어 보았고, 그에 맞게 발명한 24시간 주야시계인 일성정시의의 작동원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세종의 글 토씨 하나 고칠 수 없었다 1437년 4월 15일자 <세종실록>인데요. 세종의 명을 받은 승지 김돈(1385~1440)이 천문기구 일성정시의의 발명 내력과 원리를 쓴 기록입니다. 일성정시의는 낮에는 해, 밤에는 별자리의 운행으로 시각을 측정하는 천문시계입니다. 낮에 태양뿐만 아니라 밤에는 북극을 중심으로 항성이 규칙적으로 일주 운동을 한다는 사실에 착안한 조선의 발명품이죠. 김돈이 세종의 명을 받아 옮긴 일성정시의의 원리는 제 깜냥으로는 도저히 해득할 수 없을 정도로 고차원적입니다. 그래서 ‘아니 얼마나 천문학에 통달했으면 저런 해설을 달 수 있을까’ 하고 승지 김돈의 능력에 찬사를 보냈답니다. 그런데 글 중간에 반전의 내용을 읽고 무릎을 쳤습니다. “일성정시의의 제작 원리를 주상(세종)께서 직접 지어 나(김돈)에게 주면서 ‘과인의 글을 토대로 해서 경들이 다듬고 보태라’고 하셨다. 하지만 임금의 설명글이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도 쉽고 상세해 내(김돈)가 단 한자도 고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글 머리와 끝만 살짝 보태 그대로 지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세종께서 해시계와 물시계를 결합한 일성정시의의 제작 및 작동 원리를 꿰뚫고 계셨다는 말씀이죠? 그래서 김돈이 “토씨 하나 고칠 수 없었다”고 혀를 내둘렀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지 않았던 임금 다른 실록 기사 하나도 떠올렸는데요, <세종실록> 1423년 12월 23일자입니다. “임금(세종)은 늘 ‘난 말야. 책을 본 뒤에는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어’라 했다. 그 총명함과 학문 좋아하심은 천성이었다. 임금은 수많은 신하의 이름과 그 사람의 이력, 그 사람의 가계도까지도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지 않았다. 한 번 신하의 얼굴을 보면 몇년이 지나도 절대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아무개야!’ 하고 이름을 불러주었다.” 세종 때 주조된 갑인자 활자들. 인사동에서 발굴된 조선 전기의 금속활자 가운데는 1434년(세종 16) 개발한 갑인자가 여럿 보였다. 세종은 개발에 성공한 갑인자를 20만자 주조했으며, 하루에 40여장 찍을 정도 조판 인쇄 기술도 향상됐다고 좋아했다. /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이 기사만 볼 때는 ‘천재 임금의 애교 넘치는 자뻑’ 같죠. 아닙니다. 아까 언급한 1437년 4월 15일의 실록 기사를 보십시오. 세종은 게으른 천재가 아니었습니다. 100~200번은 기본이고, 1100번이나 읽은 책도 있었습니다. <세종실록>은 “주상께서는 수라를 들 때도 반드시 책을 펼쳐 좌우에 놓았고, 밤중에도 그치지 않았다”고 임금의 독서열을 침이 마르도록 상찬합니다. 공부에 관한 한 세종의 자부심도 대단했는데요. “내가 궁중에 있으면서 한가롭게 앉아 있을 때가 있느냐”면서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유익한 것”이라고 했답니다. 황희·맹사성 투톱 죽을 때까지 활용하다 딱한 생각이 듭니다. 이런 임금을 모시는 신하들이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맞습니다. 세종은 신하들을 절대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조금 심하게 말해 호호백발이 될 때까지 부려먹었답니다. 임금이 주야장천 근정전에 앉아 있으니 원로대신들까지 퇴근 후 집에 가서도 관복을 벗지 못했답니다. 임금이 언제 부를지 몰랐기 때문이죠. 가령 세종은 1427년(세종 9) 1월 황희(1363~1452)를 좌의정, 맹사성(1360 ~1438)을 우의정에 발탁하는 인사쇄신을 단행하는데요. 승하한 선왕(태종)의 영향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정치적 포부를 마음껏 펼치겠다는 선언이었죠. ‘황희-맹사성 투톱’은 1435년(세종 17) 맹사성이 76세의 나이에 은퇴할 때까지 8년간이나 지속됩니다. 황희는 또 어떻습니까. 1449년(세종 31)까지 무려 18년간 재상으로 세종을 보필하다가 87세의 나이에 은퇴했습니다. 세종은 은퇴한 두 분을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국사를 처리할 때 자문을 요청했습니다. 맹사성·황희 두 분은 약속이나 한 듯 은퇴한 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납니다. 맹사성이 79세(1438년), 황희는 90세(1452년)였습니다. 세종은 그야말로 ‘황희·맹사성 투톱’의 재능을 죽을 때까지 활용했던 셈이죠. 세종에게 탈탈 털린 이천 신하의 재능을 늙을 때까지 뽑아낸 예가 또 있습니다. 무관 출신의 과학자인 이천(1376~1451)인데요. 세종은 1420년(세종 2) 이천을 불러 “(태종 때 주조한) 활자의 글자 모양이 고르지 않으니 당신이 한번 새롭게 만들어보라”는 특명을 내립니다. 당시 금속활자는 모래주형(주물사)으로 주조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완성된 활자가 네모반듯하지 않고 모래알갱이가 붙어 있어 주조 상태가 고르지 않았습니다. 힘들게 활자를 주조했어도 조판 활자들을 고정하는 일도, 흔들림 없이 인쇄하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조판틀 밑에 밀랍(꿀찌꺼기)을 펴서 그 위에 글자를 배열한 뒤 인쇄했는데요. 그러나 아무리 말려도 부드러운 밀랍의 성질 때문에 겨우 두어장만 찍어내면 글자가 쏠리고 비뚤어졌습니다. 그렇기에 세종이 이천에게 “당신이 해보라”는 명을 내린 겁니다. 활자 주조와 조판·인쇄 때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던 이천이 난색을 표했지만 세종은 “당신 아니면 할 사람이 없으니 맡으라”고 강요했습니다. 결국 명을 받은 이천은 나름 온갖 방법을 짜내 급기야 새로운 활자를 주조하는데요. 이것이 경자년(1420년)에 주조된 ‘경자자’입니다. 경자자의 개발로 하루에 20여장 인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완벽주의자인 세종이 만족할 리 없었습니다. 세종은 14년이 흐른 1434년(세종 16) 다시 이천을 소환합니다. 당시 이천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59세)였습니다. 이천으로서는 나이도 많고, 더 이상의 활자 개발도, 조판·인쇄 때 고정할 방도를 찾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종이 누굽니까. 맹사성·황희 같은 분도 칠순·팔순이 넘도록 ‘쓰셨는데’, 환갑도 안 된 이천이 감히 명을 거절할 수 없었죠.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죠. 1434년(세종 16) 개발한 갑인자로 찍어낸 책들. 갑인자는 금속활자의 백미라는 찬사를 받는다. ①1448년(세종 30) 갑인자로 찍어낸 (국보 71호) ②1438년(세종 20) 간행된 권19(보물 552호) ③1436년(세종 18)에 간행해 배포한 (보물 1281-2호) / 간송미술관 소장 / 아단문고 소장 /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14년 만에 어쩔 수 없이 임금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이천은 갖가지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성과를 이뤄냅니다. 경자자의 단점을 상당 부분 보완하고, 조판·인쇄 때 글자들이 흔들리지 않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조판한 활자와 활자 사이의 빈 곳을 대나무로 끼워 고정한 겁니다(<용재총화>). 이것이 갑인년(1434년)에 개발한 ‘갑인자’입니다. 갑인자 개발로 하루에 40여장 인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특히 갑인자로 찍어낸 책은 글자 획에 필력(筆力)의 약동이 잘 나타나고 글자 사이가 여유 있게 떨어져 있으며, 판면이 커서 늠름합니다. 그래서 이 갑인자는 활자본의 백미로 일컬어집니다. 그 갑인자가 이번에 인사동에서 출토된 겁니다. 아닌 말로 이천이야말로 세종에 의해 그 능력이 ‘탈탈 털린 인재’였던 거죠. 세종은 금속활자의 개발에만 이천을 활용한 게 아닙니다. 장영실과 함께 혼천의와 간의, 일성정시의, 앙부일구 등도 실무 제작했습니다. 당대 세계 최고의 천문대로 평가받은 간의대를 건축한 이도 이천이었습니다. 세종도 대단하지만, 그런 세종의 끊임없는 요구를 모두 충족시킨 이천이라는 분도 참 대단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호의호식하는 너희보다 낫다” 사실 세종이 심혈을 기울인 것은 바로 천문관측이었습니다. 이유가 있었죠. 예부터 하늘의 성변을 제대로 관측하는 것은 하늘과 백성을 소통시키는 통치권자의 능력이었습니다. 세종은 가만있지 않았죠. 1420년(세종 2) 첨성대를 세우고 전문가들을 대거 발탁합니다. 은퇴 후 고향(장흥)에 낙향한 전 관상감 윤사웅(생몰년 미상)에게 역마를 보내 “이걸 타고 당장 상경하라”는 특명을 내립니다. 낙향한 은퇴관리에게 관용차를 보낸 셈이죠. 그렇게 재발탁한 윤사웅 등 천문 관리들을 경기 남양(화성)·광주·부평·인천 등의 수령으로 임명합니다. 서울 부근에 있어야 천재지변이 뜻밖에 일어나면 재빨리 상경할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승정원에서는 “저 미천한 무리를 큰 고을의 수령으로 발탁하다니 말도 안 된다. 빨리 명을 도로 거두시라”는 상소문을 계속 올렸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밤잠을 자지 않고 천문을 관측해 기상이변에 대비하고 있는 이들과 편히 호의호식하는 너희와는 비교할 수 없다”고 일축해버립니다. 세종의 시대에 부응한 장영실·박연 그렇다면 장영실(생몰년 미상)은 어떨까요. 장영실의 신분은 동래 관노 출신이었습니다. 세종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1421년(세종 3) 장영실을 관상감으로 불러 혼천의 제도를 연구하도록 했습니다. 장영실은 세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답니다.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는 “임금의 지혜를 받든 장영실의 기묘한 솜씨는 임금의 뜻과 정확하게 일치해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전합니다. 인사동에서 출토된 옥루(자격루)의 부품들 /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세종은 “장영실 등은 비록 지위가 천하나 재주가 민첩한 것은 따를 자가 없다”면서 “중국에 들어가 각종 천문기계의 모양을 모두 눈에 익혀 와 빨리 모방해 만들라”고 지시합니다. 장영실은 역시 천재 군주 세종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눈썰미였습니다. 1년 뒤 돌아온 장영실 등은 눈대중으로 외우고, 그려온 중국 흠경각과 보루각의 도해도를 바탕으로 1년 만에 조선에 돌아와 똑같은 것을 만들었습니다. 세종은 장영실 등이 눈썰미로 배워온 실력으로 자격루를 제작하자 “원나라 자격루보다 훨씬 정교한 물시계를 만들다니 기이하구나”라고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맹사성과 함께 세종 시대에 예악을 정비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박연(1378~1458)은 어떤가요. 세종은 일찍이 “율관(음악에 쓰이는 기본음을 불어서 낼 수 있는 대나무관)을 만드는 일은 박연만이 할 수 있다”면서 “악기를 박연에게 맡기면 소리와 가락(리듬)을 알아낼 것”이라고 신뢰감을 안겼습니다. <용재총화>는 “(세종 연간의) 사람들은 (박연과 장영실 등을 두고) 모두 세종의 시대에 응해서 태어난 인물들”이라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답니다. 천재 임금에 천재 신하들 이분들만이 아니죠. 조선의 역법인 <칠정산>을 편찬한 이순지(?~1465)와 김담(1416~1664), 간의대·보루각 조성에 공이 큰 김돈, <농사직설>을 편찬한 정초(?~1434) 등 손꼽을 수 없을 정도죠. 정초와 함께 각종 천문의기 설계에 간여한 정인지(1396~1478)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거론한 인물 중 정인지 등 상당수 인물은 순수 과학자라기보다는 문·무관 출신입니다. 하기야 천재 임금과 천재 신하들뿐이 아닙니다. 세종의 맏아들인 문종(재위 1450~1452)이 세자 시절 측우기를 제작했다는 <세종실록> 기록(1441년 4월 29일자)이 있습니다. 둘째 아들인 세조(수양대군·1417~1468, 재위 1455~1468)는 갑인자 가운데서도 대자(큰 글자)를 썼습니다. 세조의 글씨를 새긴 ‘대자 갑인자’를 주조했다는 얘기죠. 어떻습니까. 세종 연간에는 세종의 자녀들은 물론이고, 문·무신 등의 신료, 그리고 관노비까지 임금을 닮아 문과와 이과에 두루 능통한 천재들이 넘쳐났던 시절이었죠. 그런 분들이 의기투합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금속활자와 당대 세계 최고의 천문과학가구들을 발명한 겁니다. 천재 임금에 천재 정치가, 천재 관리, 천재 과학자들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세종 시대가 재림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 이기환의 Hi-story
- [꼬다리]‘멸균 도시’ 세종에서 기자가 할 일(2021. 02. 26 14:19)
- 2021. 02. 26 14:19 사회
- 세종의 사소한 일상에서 외외성과 행복을 찾기란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사람 간의 거리감도, 단조로운 풍경도 내가 이곳을 떠날 때까지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사람들이 세종시의 첫인상이 어떻냐고들 묻는다. 친구도, 가족도 없는 세종에서 앞으로 기획재정부와 같은 출입처만 보고 살아야 하는 내 처지를 은근히 궁금해하며 건네는 질문이다. 초반엔 북적거리던 서울과 비교해 한적한 세종이 좋다고 답했다. 정부세종청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행정타운은 마치 서독 본의 행정기관 절반을 흡수했다는 독일 베를린과 겹쳐 보였다. 세종시가 고유 색채로 개발했다는 회색톤(회색을 고유하다고 보는 발상!) 건물은 무채색 도시 베를린에 유학 온 것만 같은 느낌을 더 부추겼다. 2021년 세종 생활은 이러한 정신승리로 시작했다. 이 도시는 여러모로 독특했다. 세종은 층간 소음이 없는 게 특징이라고 한다. 건축 시공이 남다른 게 아니다. 주로 공무원들이 모여 사는 세종에선 윗집 사람도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일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어도 참고 산단다. 이곳만의 주말 에티켓도 있다. 가족과 함께 있다가 밖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아는 채를 안 한다는 게 시(市)의 룰이다. 직장 내 본인의 위치나 관계를 가족에게 보여주는 것은 실례라는 암묵적 합의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학부모로서 이웃과 만나는 일도 가급적 피한다. 최근 모 부처 사람이 유치원에 ‘부모의 공무원급에 따른 반을 새롭게 구성해달라’고 제안했다는 얘기가 돌 정도다. 어딘가 남다른 옷차림의 사람을 발견하는 일도 흔치 않다. 심지어 비둘기나 쓰레기를 보기도 어렵다. 세종을 ‘멸균 도시’라고도 부르는 이유다. 이 ‘멸균성’은 모두가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 비슷한 모습으로 산다는 걸 돌려 말하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서로 폐를 끼치지 않는 삶은 처음엔 편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세종의 삶을 구내식당 밥처럼 금방 질려 한다. ‘비둘기똥’과 같은 일상의 의외성까지 모두 제거된 이 공간은 시각적 환경마저 단조롭다. 그래서인지 공무원들에게서는 돌아갈 서울행을 기다리는 조바심이 자주 엿보인다. 최근 개봉한 픽사 애니메이션 <소울>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한 영혼이 삶의 의미를 찾는 여정을 다룬다. 이 영혼은 멀끔하고 화려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들에서 살아갈 의미를 찾는다. 어머니의 잔소리, 이발소에서 얻은 츄파춥스, 연인들의 재잘거림, 먹다 남은 피자 조각 같은 것들이다. 소란스럽고 귀찮기도 한 사람들의 관심이, 일상의 단조로움을 흔들어 놓는 길거리 낙엽 같은 것들이 우리에게 소소한 행복을 주지 않느냐고 영화는 묻는다. <소울>의 주인공처럼 세종의 사소한 일상에서 의외성과 행복을 찾기란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사람 간의 거리감도, 단조로운 풍경도 내가 이곳을 떠날 때까지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단, 세종인들이 규칙과 반복이 지배하는 삶을 참아가며 완성해놓은 일에서는 어떤 새로움과 의외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삶은 단조롭더라도 이들의 일은 어쨌든 사회를 조금 더 낫게 만드는 새로움을 위한 것이니까. 그걸 발견해서 전달하는 게 기자의 일이기도 하고. 세종을 한 해 전에 떠난 선배의 말이 귓전에 오래 남는다. “그래도 거긴 무에서 유를, 사람을 살리는 일을 창조하는 곳이야.”
- 꼬다리
- 세종 집값 껑충, 전용 84㎡ 10억 넘어(2020. 09. 21 12:21)
- 2020. 09. 21 12:21 경제
- ㆍ전셋값 상승폭은 더 커… 임대차 3법에 전세매물도 사라져 세종시 아파트값이 브레이크 없이 달아오르고 있다. 거래가 가장 많아 아파트값의 기준점이 되는 전용면적 84㎡의 실거래가는 지난달 이미 10억원을 넘었다. 세종시의 아파트 매매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세종시 어진동 밀마루 전망대에서 바라본 세종시 전경 / 연합뉴스 제공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에 따르면 7월 27일(계약일 기준) 세종시 새롬동 새뜸마을11단지 더샵힐스테이트 전용 84㎡는 11억원에 손바뀜했다. 불과 20일 전 실거래가(9억3000만원)보다 1억7000만원 오른 수준으로 역대 최고가다. 세종시 아파트 호가는 이미 10억원을 넘어선 지 오래다. 새롬동 등 주요 지역의 전용 84㎡ 호가는 13억원 안팎까지 올랐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이달 14일 기준 세종 아파트값의 올해 누적상승률은 36.48%에 달해 전국 1위다. 주간 상승률도 0.44%를 기록해 전국 최고다. 세종의 아파트값 상승세는 올해 초부터 시작됐다. 기간별로 2~3월에 상승폭이 컸다. 4~5월에는 상승세가 주춤했지만, 6월 중순부터 가격이 다시 뛰기 시작(6월 3주 0.98%, 4주 1.55%, 5주 1.48%)했다. 행정수도 천도론으로 가파른 상승세 정부세종청사 북측 인근에도 아파트촌이 많이 형성돼 있다. / 김희준 뉴스1 건설부동산부 차장 제공 7월엔 주간 변동률이 2.06%, 1.46%, 0.97%, 2.95%씩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부동산 업계에선 최근 더욱 달아오르고 있는 세종시 아파트값 상승의 원인으로 여당의 행정수도 이전 논의를 들고 있다. 세종시 A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서울 등 수도권의 문의전화도 많이 온다”며 “정부가 수도권 규제를 강화하면서 유동자금이 확실한 투자처로 세종시 아파트에 몰리고 있는 모양새”라고 전했다. 실제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달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국회가 통째로 세종시로 내려가야 한다. 청와대와 정부 부처도 모두 이전해야 한다”고 말해 천도론의 불을 지핀 상태다. 정부도 “국회에서 여야 공감대를 만들면 추동력이 생길 수 있다”고 화답했다. 이후 구체적인 로드맵(이행안) 등은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우원식 의원을 단장으로 하는 행정수도완성 추진단이 구성된 상태다. 세종시는 미국의 워싱턴처럼 행정 중심 수도로 전환하고 서울은 뉴욕처럼 경제 중심으로 만들겠다는 게 민주당의 복안이다. 소강상태긴 하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호재라는 것이 부동산 업계의 중론이다. 중촌동 B공인중개업소 대표는 “원래부터 가격 상승세가 꾸준히 이어진데다 행정수도 이슈가 불거지면서 최소한 연초보다 1억~2억원은 오른 것 같다”고 전했다. 지역 실수요자와 투자자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막 매물을 소개하고 오는 길이라는 C공인중개사는 “지역 투자자들은 이미 대전과 세종을 오가며 수익을 올리고 있다”며 “특히 (최근 행정수도 추가 이전 가능성에) 대전으로 움직였던 투자자들의 세종 재유입도 눈에 띈다”고 전했다. 아파트값을 기준점으로 한 세종시 전셋값의 상승폭은 더 크다. 이달 14일 기준 세종시 아파트의 전셋값은 지난주 0.87%에서 2.15%로 껑충 뛰었다. 전국 평균이 0.16%, 2위인 울산의 전셋값 변동률이 0.41%라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한 편차다. 여기엔 정부의 임대차 3법 도입의 영향도 컸다. 감정원 관계자는 “전세매물 부족 현상이 지속하는 가운데 금남면과 고운동, 도담동 등 상대적 저가 단지 위주로 상승세가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세계약 만료를 앞둔 한 세입자는 “새집을 알아볼 때마다 보증금이 2000만~3000만원씩 오르는 것 같다”며 “아이가 있어 전세를 큰 아파트로 옮기고 싶었는데 힘들 것 같다”고 토로했다. 공급 초과에서 수요 초과도 원인 전문가들은 세종시의 부동산 시장이 공급 초과에서 수요 초과 국면으로 접어든 것도 아파트값 상승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부동산114에 따르면 올해 세종시 입주물량은 약 5600가구로 2014년 이후 최저치다. 그간 2016년을 제외하고 2014년부터 매년 1만5000~1만7000가구씩 공급된 것과 비교하면 매우 적은 물량이다. 세종시에 거주하는 한 공무원은 “특별분양이 끝나는 시점인데 몇몇 청약에 떨어지고 이제는 분양 자체가 없어 아예 포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윤지해 부동산114 수석연구원은 “인구는 계속 유입되고 있는데 행정수도 이전이라는 호재까지 겹쳐 매매가가 상승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또 세종시 전셋값의 경우 상대적으로 낮게 책정됐지만, 기본적인 수요가 늘어나면서 매매가와 격차를 줄이고 있다는 설명이다. 세종시 아파트값과 전셋값의 상승은 인근 대전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14일 기준 대전의 주간 아파트값 변동률은 0.28% 상승했다. 전주에 비해 소폭 감소했지만 전국 기준으론 상승폭이 세종 다음이다. 유성구(0.48%), 서구(0.29%), 대덕구(0.23%) 등 정주 여건이 좋거나 개발 호재가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높은 상승폭을 보였다. 전셋값의 상승폭(0.23%)도 세종, 울산에 이어 세 번째로 높다. 부동산 업계에선 세종과 인근 대전 아파트값 상승은 당분간 꾸준히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행정수도 이전이 어떤 식으로 종결이 될지 모르지만, 아파트값의 상승세는 공급과 수요를 따져봐도 제동을 걸 소재가 없는 상황”이라며 “지금보다 더 오를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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