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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총 145 건 검색)

[알림] 손호철 교수와 함께, 쿠바· 멕시코 ‘품격’ 역사·인문 기행
[알림] 손호철 교수와 함께, 쿠바· 멕시코 ‘품격’ 역사·인문 기행
2024. 10. 02 14:27오피니언
... 열쇳말은 애니깽, 쿠바 혁명, 프리다 칼로로 대변되는 중남미의 열정입니다. 답사 길잡이로는 손호철 서강대 정치학과 명예교수가 함께 합니다. 화가가 되고 싶었던 정치학자, 진보적 사회운동가,...
[손호철 칼럼] 노무현의 길? 이재명의 길?
[손호철 칼럼] 노무현의 길? 이재명의 길?
2023. 12. 11 20:31오피니언
... 차버림으로써 국민들에게 짜증과 실망만 주는 ‘계양을’식의 ‘소탐대실’, 살려다 죽는 ‘생즉사의 이재명의 길’을 갈 것인가?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학 ...
손호철총선 오피니언
[손호철 칼럼] ‘1인 1/7표제’를 넘어서
[손호철 칼럼] ‘1인 1/7표제’를 넘어서
2023. 11. 20 20:38오피니언
... 이에 찬성해야 한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우리는 정말 1인 1표제인가? 이제 반민주적 1인 7표제, 1인 1/7표제를 넘어서야 한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학 ...
손호철총선 오피니언
[손호철 칼럼] 차분한 변화? 턱도 없다!
[손호철 칼럼] 차분한 변화? 턱도 없다!
2023. 10. 30 20:31오피니언
... 떠나, 윤 대통령이 남은 임기 3년을 레임덕으로 표류하여 국정이 망가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차분한 변화? 턱도 없는 이야기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학
손호철

주간경향(총 2 건 검색)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2) 농업노동자의 아버지 세사르 차베스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2) 농업노동자의 아버지 세사르 차베스(2025. 01. 10 15:30)
2025. 01. 10 15:30 국제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의 안창호 동상 옆에 설치돼 있는 멕시코계 노동운동가 세사르 차베스 동상/ 손호철 제공 “농민들은 한 자루의 감자와 같다.” 농민들이 자기 농지에 매달려 일하는 노동과정의 고립 때문에 한 공장에 모여 일하는 노동자들과 달리 감자처럼 한 자루에 모아놓아도 단결하지 못하고 각각 분리돼 있을 뿐이라는 카를 마르크스의 비판적 평가다. 그러나 중국혁명 등 여러 농민혁명이 보여주듯이 그의 평가는 틀렸다는 지적이 많다. 캘리포니아 등 미국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유럽과 아시아 등 소농 위주의 많은 나라와 달리 미국은 안창호가 일했던 리버사이드의 오렌지농장처럼 대농장들이다. 과거 남부의 대농장은 대부분 목화를 생산했고, 아프리카 노예에 의존했다. 대농장들은 노예해방 후에는 농업노동자에 의존하고 있다. 농업도 공장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택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캘리포니아 등 대농장의 노동자들은 멕시코계 등 스페인어권의 히스패닉계와 필리핀계 같은 ‘유색인종’ 이주노동자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그런 만큼 열악한 노동조건에도 불구하고 권리의식은 취약하고 이들의 조직화, 농업노동자 노동조합 건설은 꿈꾸지 못한 어려운 과제였다. ‘농업노동자 진군’ 부조서 동학 농민 떠올라 2021년 1월 막 취임한 조 바이든 대통령의 집무실이 공개됐다. 책상 위 가족사진 뒤에 작은 흉상이 놓여 있었다. 멕시코계 노동운동가 세사르 차베스(Cesar Chavez·1927~1993)의 흉상이다. 그는 농업노동자 노조의 건설이라는 어려운 과업을 이룬 전설적 지도자다. 우리는 아프리카계 민권지도자 마틴 루서 킹은 잘 알고 있지만, 세사르 차베스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하지만 그는 ‘멕시코계의 마틴 루서 킹’이다. 특히 히스패닉계가 인구의 20%로 아프리카계(13%)를 넘어서 미국 최대의 소수민족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2014년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차베스의 생일인 3월 31일을 연방 공휴일로 선포했다. 차베스 무덤 뒤에 새겨진 농업노동자 파업 부조는 한국의 동학농민들을 연상시킨다./ 손호철 제공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북으로 200㎞를 달려 베이커스필드 근처에 가면 역사적 유적이 나타난다. ‘세사르 차베스 국립기념물(National Monument)’이다. 그가 말년을 보낸 농장을 기념물로 만든 것이다. 기념물로 들어가자 아름다운 정원에 묘지가 나타났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답게 나무 십자가 앞에 차베스 부부가 누워 있다. 그 뒤에는 작은 벽 분수 위에 부조가 눈길을 끈다. 차베스를 따라 피켓을 들고 진군하는 농업노동자들의 모습이다. 그 모습이 전북 정읍에 조각된 동학농민군의 진군 모습과 빼닮았다. 갑자기 차베스가 전봉준처럼 보였다. 농업노동자의 처참한 생활을 고발하는 사진들. ‘비미국적 꿈’이라는 제목이 가슴을 후빈다. / 손호철 제공 ‘비미국적(Un-American) 꿈’. 전시관에 들어가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단어다. ‘대부분 유색인종인 이주농업노동자는 커뮤니티로부터 고립된 캠프에 살며 일해야 했고, 농장을 따라 이동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초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기 힘들었으며 인종주의와 멸시 속에 살아야 했다.’ 이주농업노동자의 삶을 압축한 표현이다. 게다가 지독한 가난이 따라다녔다. 전시관에 만들어 놓은 초라한 숙소 모형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든다. 캘리포니아 농업노동자의 처절한 삶을 그린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표현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에 분노의 포도가 하나 가득 가지가 휘게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넘어온 차베스 역시 대공황으로 경영하던 농장이 망한 뒤 이주농업노동자가 된 부모를 따라 여기저기 옮겨 다녀야 했다. 잦은 전학 때문에 중학교밖에 나오지 못했다. 허드레 노동현장을 전전하던 그는 현실탈출을 위해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커뮤니티 서비스 조직(CSO)에서 일하던 그는 1962년 노동운동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는 농업중심지인 중부 캘리포니아 델라노로 이사해 실업수당으로 버티며 농업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오랜 노력 끝에 그는 1964년 자신의 집을 사무실로 해서 전국농업노동자협회(NFWA)를 출범시켰다. 1965년 장미재배노동자들의 부탁으로 파업을 주도해 3일 만에 임금인상을 관철했다. 명성을 얻은 그는 역사적인 델라노 포도 파업에 뛰어들었다. 그가 이끄는 NFWA는 이 파업을 원래 시작했던 농업노동자조직위원회(AWOC)와 통합해 통합농업노동자들(UFW)이란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조합원이 7만명으로 늘어났다. 5년간 계속된 투쟁에서 그는 주 정부가 있는 새크라멘토까지 항의 행진도 하고 캘리포니아산 포도 불매운동을 벌이는 등 다양한 방식을 시도했다. 그는 간디를 따라 비폭력운동을 주장했다. 매우 종교적이었던 그는 기도회를 열고 서양에서는 드물게 단식투쟁을 통해 여론에 호소했다. 그 결과 임금인상, 작업조건 개선뿐 아니라 포도 포장지에 노동조합의 승인을 받았다는 표시를 하도록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전국적인 인물로 성장했고, 시사주간지 ‘타임’ 표지에까지 등장했다. 우리가 먹고 있는 캘리포니아산 수입 오렌지에는 이들 이주농업노동자와 차베스의 눈물이 묻어 있는 것이다. 정신혁명을 강조한 차베스의 지나치게 종교적 측면은 주로 사회운동과 갈등을 일으켰다./ 손호철 제공 ‘만국의 노동자 단결’은 이상론일까 전시관에는 1965년 델라노 포도 파업을 주도하는 젊은 차베스의 사진이 우리를 맞는다. 지도자들의 소개를 보니 차베스뿐만이 아니라 AWOC의 레리 이투리옹 같은 필리핀계 농민노동자 지도자들도 포함돼 있어 투쟁이 ‘소수민족 연합투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65년 역사적인 포도 노동자 파업을 주도한 세사르 차베스 사진 / 손호철 제공 전시관에 들어가면 파업 시위하는 농업노동자 사진이 맞이한다./ 손호철 제공 “우리 혁명은 정신과 가슴의 혁명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기고 있다.” 멕시코계답게 노동운동가로는 특이하게 신앙심이 강하고 종교적 투쟁에 크게 의존한 만큼 그의 ‘정신혁명론’이 크게 쓰여 있다. 이 같은 경향은 말년에 그를 ‘주류운동’으로부터 고립시켰다. 그는 자신과 다른 견해를 용납하지 않는 권위주의적 리더라는 한계도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비판적인 ‘좌파’를 ‘미국 공산당의 프락치’라는 근거 없는 죄명을 씌워서 숙청해버렸다. FBI에 따르면 미국 공산당이 UFW에 침투했다는 증거는 없다. 미국의 농업노동자 중 40%는 멕시코 등에서 밀입국한 불법노동자들이다. 그는 이들을 투쟁을 약화시키는 ‘적’으로 간주함으로써 인권단체들과 갈등해야 했다. 차베스 같은 지도자가 외국인 노동자를 적으로 간주해 이들을 고용하지 말라는 시위를 벌인 민주노총 건설노조 같은 편협한 시각을 가졌다니 충격적인 일이다. 기념관을 떠나며 나는 물었다. 국경을 넘은 노동자들의 연대는 불가능하고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라는 마르크스의 호소는 낭만적 이상론에 불과한 것인가?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 (1) 안창호가 세운 미주 최초의 코리아타운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 (1) 안창호가 세운 미주 최초의 코리아타운(2024. 12. 27 15:40)
2024. 12. 27 15:40 국제
트럼프 주의로 상징되는 격동을 겪고 있는 미국. 그 뿌리를 찾아서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2024년 말 두 달간 2만9000㎞를 달려 답사한 ‘미국사 뒤집어보기’를 연재한다.(편집자 주) 리버사이드. 미국 남캘리포니아의 중심도시 로스앤젤레스에서 동쪽으로 100㎞쯤 떨어진 작은 도시다. 나는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내려 렌터카를 찾자마자 2시간을 달려 리버사이드로 향했다. 중심가에는 아프리카계 민권운동의 대부인 마틴 루서 킹, 멕시코계 노동운동의 대부인 세사르 차베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길 건너편에도 비폭력저항 운동의 정신적 지주인 인도의 간디 동상이 눈에 띄었다. 세계적인 이들 운동가 사이에 친숙한 중년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 옆에는 반갑게도 한글이 보였다. ‘도산 안창호 기념공원’. 동상의 주인공은 안창호(1878~1938)였다. 우리 독립운동가가 킹 목사, 차베스, 간디와 어깨를 나란히 하다니! 리버사이드 중심가에 있는 ‘도산 안창호 기념공원’ / 손호철 제공 안창호 동상 옆에 있는 마틴 루서 킹 동상 / 손호철 제공 한 말의 격동 속에 ‘민족 대이주’, ‘코리아 디아스포라’가 시작됐다. 그중 한 곳이 미국이다. 1903년 1월 13일 인천에서 갤릭호에 몸을 실은 121명의 젊은이가 사탕수수노동자로 하와이에 도착했다. 공식적인 첫 미국 이민이다. ‘기회의 땅’ 미국을 찾는 한인은 계속 늘어나 미국 내 한인은 미국 인구국이 집계한 합법적 인구만 2017년 기준 190만 명을 넘어섰다. 특히 ‘서울특별시 나성구’라는 별명을 가진 로스앤젤레스에는 23만명이 살고 있고, 거대한 코리아타운이 있다. 이보다 앞서 최초의 코리아타운은 로스앤젤레스가 아니고 리버사이드에 세워졌고, 이를 주도한 사람이 독립운동가 안창호였다. 평안도에서 태어난 도산은 1894년 서울로 이사해 영어를 배우고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다. 서재필의 독립협회에서도 활동했다. 1902년 결혼한 도산은 서양을 배우기 위해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왔다. 우여곡절 끝에 오렌지농장으로 돈이 넘쳐나고 일자리가 많았던 리버사이드에 왔다. 여기에 정착한 그는 이곳에 많은 한인을 불러들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일본 영사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와이 한인들을 불러올 수 있도록 조치했다. “정직이 우리의 무기다.” 도산은 일본 노동자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일본 노무 관리관의 훼방에도 한인들이 이곳에 자리 잡는 길은 성실하게 일해 백인농장주들의 신임을 얻는 것으로 판단했다. “오렌지 하나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다.” 그는 솔선수범해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다른 한인들도 사명감을 가지고 그의 말을 따랐다. 그의 전략은 맞아떨어져 백인농장주들은 한인을 대거 고용하기 시작했고, 한인 노동자들을 전담할 한인노동국도 만들었다. 리버사이드 오렌지농장에서 일하는 도산 안창호 사진이 샌프란시스코한인회관의 파차파 캠프 전시회에 전시 중이다. /손호철 제공 ‘도산 안창호 기념공원’에 오렌지를 따는 도산의 모습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 손호철 제공 작업복 차림으로 오렌지를 가득 따는 도산의 사진이 누구보다 솔선수범한 그의 리더십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도산 안창호 기념공원’에 있는 그의 동상 옆에는 오렌지를 따는 그의 모습 등을 새긴 동판이 있다. “아니 왜 오렌지 따는 작업복 차림의 안창호가 아니라 양복을 입은 동상을 만들었지요?” 한인 미주 이민사와 안창호 연구의 권위자로 공원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캘리포니아주립대학(UC) 리버사이드의 장태한 교수의 답변이 충격적이다. “원래 작업복으로 하려고 했는데 한국 정부가 양복으로 하라고 해서.” 한심한 관료주의라니! 다행인 것은 장 교수 주도로 미주교포들이 모금해 동상을 오렌지 따는 안창호 동상으로 바꾸기로 했다는 것이다. 1905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세운 미주 최초의 코리아타운인 파차파 캠프 안내표지 / 손호철 제공 이번 답사를 위해 사전 조사를 하기 전에는 ‘실력양성론’ 등의 문제점 등 때문에 개인적으로 안창호를 아주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전 조사와 답사를 통해 그를 다시 평가하게 됐다. 과연 우리 독립운동가 중에 안창호처럼 직접 노동자로 일하며 대중을 조직하고 운동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노동 현장에 위장 취업해 노동운동을 조직했던 조선공산당 핵심 등 좌파운동가들을 제외하면 없을 것이다. 교민들이 낸 애국헌금을 가지고 사치스럽게 생활했다는 비판을 듣고 있는 이승만은 말할 것도 없고 김구 등 임시정부 지도부 대부분도 안창호와는 달랐다. “여기가 최초의 코리아타운인 파차파 캠프입니다.” 장 교수는 나를 ‘도산 안창호 기념공원’으로부터 2㎞ 떨어진 한적한 곳으로 안내했다. 세월이 100년 이상 지난 만큼 코리아타운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지만, ‘리버사이드시 문화관심장소 파차파 캠프’라는 팻말이 역사를 증언해주고 있었다. 팻말을 보고 있자니 조국을 잃고 태평양의 파도를 넘어 이곳에 와 자리 잡아 고된 농장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오렌지 따는 것이 나라를 되찾는 것이라 생각했고, 어렵게 번 돈을 조국 독립운동에 기꺼이 내놓았던 옛 선조들의 체취가 느껴져 울컥했다. ‘도산 안창호 기념공원’에 대해 설명하는 장태한 UC 리버사이드대학 교수 /손호철 제공 이곳은 원래 유니온 퍼시픽 철도직원들이 숙소로 사용하던 일종의 판잣집 동네로 철도에 가까워 매우 시끄러웠고, 1층 목조건물이 20여 채 있었다고 한다. 주목할 것은 파차파캠프가 가족중심의 공동체였으며 자치와 민주주의 교육장이었다는 사실이다. ‘술, 도박, 아편 금지’ 등 엄격한 규율을 정하고 위반하는 사람에게는 벌금을 내게 했고, 자치를 했다. “이 캠프는 ‘민주주의 한인공동체’로,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민주공화주의의 실험장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장 교수의 평가다. 미주이민 1세대로 리버사이드에 왔다가 27세에 사망한 김태석의 묘 / 손호철 제공 ‘김태석의 묘, 1898-1925’. 장 교수가 안내한 가까운 공동묘지에도 낯익은 한글이 나타났다. 리버사이드 이민 1세대의 묘지였다. 격동의 19세기 말에 한반도에서 태어나 20세기 초 어린 나이에 태평양을 건너 리버사이드로 온 그는 오렌지 농장에서 고생하다가 27세의 꽃다운 나이에 이곳 먼 이국땅에 묻히고 만 것이다. 리버사이드 코리아타운이라는 첫 답사를 끝내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문득 떠오른 것이 비극적인 도산의 이후 삶이다. 그는 1919년 임시정부 설립 움직임이 생기자 가족들은 미국에 남겨두고 혼자 성금을 모아 중국 상하이로 떠났다. 임시정부 내무총장 등으로 활동하던 그는 1924년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를 기다린 것은 ‘빨갱이’, 정확히 표현해 ‘볼쉐비스트’라는 투서였다. 그는 결국 추방당하고 만다. 이후 상하이에서 일제에 잡혀 와 투옥됐고, 병보석으로 풀려나 세상을 떠나야 했다. 투서의 배후와 관련해 연구자들은 이승만이 미주 한인사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안창호 등을 평소 모함했다는 사실, 이승만이 평소 안창호·박용만·김규식을 공산주의자라고 미국 정보기관에 통고했다고 자랑하곤 했다는, 이승만과 함께 활동했던 한 구미위원회 위원의 증언에 주목한다. 한국 정치의 비극인 ‘정적 빨갱이 만들기의 원조’가 바로 미국이고, 안창호가 그 첫 피해자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나는 씁쓸하게 리버사이드를 떠났다.
손호철의 미국사 뒤집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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