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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총 5 건 검색)

[재무설계]신혼부부를 위한 자가 진단법(2010. 12. 22 17:35)
2010. 12. 22 17:35 경제
최근에 신혼부부들과 상담을 하다 보면 알뜰하게 계획을 세워서 수입과 지출을 관리하고자 하는 경향이 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은 어떻게 포트폴리오를 세워서 자산을 관리해 나가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더 많다. ‘적당히 저축’을 하고 ‘적당히 소비’를 하면서 지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돈을 관리하는 교육을 받아보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신혼부부는 처음부터 서로가 재무목표를 확인하고, 저축과 투자 그리고 지출의 범위를 합의하여 실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신혼의 달콤함이 너무 크면 나중에 그 비용을 줄이기가 생각보다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래의 체크리스트를 통해 현재 상태와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2011년 새해를 앞두고 새로운 마음으로 효율적인 미래를 준비해보면 어떨까 한다. 1. 월급의 50% 이상을 저축 및 투자한다. ( ) 2. 주택 구입 및 전세 대출금이 수입의 30%를 넘지 않는다. ( ) 3. 부부 중 한 명이라도 가계부를 작성한다. ( ) 4. 돈 관리에 있어 서로 상의한다. ( ) 5. 급여통장과 소비통장을 분리해 사용한다. ( ) 6. 긴급예비자금은 월급의 2.5배 정도를 확보하고 있다. ( ) 7. 주택자금, 노후자금, 자녀교육비에 대해 구체적인 재무목표가 있다. ( ) 8. 재무상태와 흐름을 주기적으로 점검한다. ( ) 9. 나와 내 가족을 위한 보장자산(보험)이 준비되어 있다. ( ) 10. 우리 가족을 위한 전문 재무관리사가 있다. ( ) ⊙ 8개 이상 : 그대로 유지하세요. 현재 상태는 매우 양호함. 이대로만 유지하면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하다. 그러나 맞벌이에서 외벌이로 바뀌거나 자녀의 출산 등으로 생활패턴이 크게 변화될 수 있으니 이에 대비해 두어야 한다. ⊙ 4~7개 : 고쳐야 할 부분이 많네요. 알고는 있으나 실천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인생 전반에 걸친 재무 이벤트들에 대하여 우선순위를 명확히 할 필요성이 있다. 무슨 일이든 결심보다는 작은 실천이 더욱 값진 것이다. ⊙ 0~3개 : 큰 위험이 예상되네요. 시간이 흐를수록 경제적 어려움이 커질 가능성이 매우 높아 지금이라도 부부가 상의를 해서 재무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쉬운 것부터 실천하는 행동이 필요하다. 언젠가 필자는 부부싸움의 90%가 돈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공감이 가서 빙그레 웃은 적이 있다. 돈이라는 것도 부부가 미리 준비하고 인내를 동반한다면 얼마든지 컨트롤 할 수 있는 것이다. 2011년 새해에는 돈에 지배당하지 않고 돈을 제압하는 첫 출발을 만들어보자. 이창식<KFG 종합재무설계사> co7050@naver.com
재무설계
[재무설계]맞벌이 신혼부부의 주택 구입(2010. 03. 04 10:30)
2010. 03. 04 10:30 경제
지난 1월에 결혼식을 올린 직장인 오씨(40) 부부는 화곡동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맞벌이여서 수입은 다른 외벌이보다 많지만 지출과 재테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신혼부부. 이 부부는 올해 화곡동에 단독주택을 구입해 들어가고, 가능하면 자녀를 출산한다는 계획이다. 또한 노후준비와 실비보험에 관심이 많으며, 앞으로 부부 간 돈 관리를 어떻게 해야 좋은지를 의뢰해 왔다. 상담 과정에서 부부가 보유하고 있는 자산과 부채를 정리해 보니 금융자산 가운데 현금성자산(정기예금 6000만원, 보통예금 500만원), 주식형자산(7000만원), 개인연금(300만원), 부동산사용자산(전세보증금 6000만원)이 파악됐다. 부채는 가계총자산대비 20% 정도가 적정수준이지만 오씨 부부는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아직은 신혼 초여서 목적에 맞지 않는 불필요한 금융상품의 가입도 없었다. 단기적 주택 구입에 있어서는 맞벌이 지속 여부와 신규 분양가의 변동 여부 및 인구 구조에 따른 수요를 감안해 주택계획을 세워야 하며, 추가적으로 들어가는 경비(취·등록세, 중개료, 법무사비용 등)를 감안해 무리한 구입보다는 앞으로 2~3년 뒤에 주택을 구입하도록 권유했다. 또한 일반 주택구입비 법칙인 6대4대3(본인자금 60%, 타인자본 40%, 월소득 대비 상환 30%)을 넘지 않도록 조언했다. 이를 위해 근로소득 가운데 100만원은 상호저축적금(3년), 60만원은 장기주택마련펀드에 가입해 목돈 마련의 틀을 준비토록 했다. 개인연금이 전무한 상태인 부부에게 변액연금 50만원과 여성 평균수명을 감안한 부인 명의의 20만원의 변액연금 추가 가입을 추천했다. 실비보험으로는 부부통합보험을 설계했다. 부부의 돈 관리에 있어서 무엇보다 대화를 통해 재무 공통목표를 먼저 설정하고, 단·중·장기 인생의 목표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구체적으로 실행 방안을 써서 결혼사진 옆에 붙여 놓고 늘 상기하며 살도록 조언했다. 조정목<FP(Korea Financial Group)·공인재무설계사> 010-5260-8088
재무설계
[재무설계]맞벌이 신혼부부의 맞춤 저축(2010. 02. 25 11:26)
2010. 02. 25 11:26 경제
지난해 봄에 결혼한 이씨(29)는 직장 근처인 평택에 신혼집을 마련해 생활하고 있다. 아내(30)도 인근 대학교에서 계약직으로 일을 하고 있다. 건설회사에 근무하는 이씨는 2년 뒤에 근무지를 옮길 예정이며, 이를 대비해 추가적인 전세자금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다. 내년에 출산이 예정돼 있지만 맞벌이는 유지할 생각이다. 상담 결과 단기적으로는 전세자금 준비 및 출산 준비에 대한 계획, 장기적으로는 노후 준비 등 재무 목표를 각각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씨 부부의 재정 현황을 살펴보면 목표에 맞지 않는 금융상품에 가입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A사와 B사의 변액유니버셜보험을 각각 50만원, 30만원 매달 납입하고 있었다. 연금저축에도 25만원씩 들어가고 있었다.  변액유니버셜보험은 장기 투자 상품이다. 이 보험 상품은 자녀교육 자금이나 노후자금 등 장기 목적에는 부합하지만 단기에는 해약환급금이 원금에 미달할 수도 있다. 연금저축 역시 10년 납입 후 55세에 연금 지급이 개시되는 상품이다. 이씨 부부는 이들 장기 상품에 저축액의 대부분을 투자하고 있었다. 이들 상품은 단기적인 전세자금 마련이나 출산 준비에는 전혀 맞지 않는 구성이다. 이에 따라 약간의 원금 손실이 나더라도 50만원 납입 변액유니버셜보험을 해약하고 대신 금리가 높은 저축은행 정기적금을 통해 전세자금을 마련하도록 했다. 연금저축은 펀드에 투자되는 연금펀드로의 전환이 가능해 전환을 권유했고, 입출금이 가능한 CMA에 계속 납입해 출산 준비를 하도록 했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 신혼 때 지출이 많은 경향이 있고, 이런 습관이 계속되면 출산 이후 자녀 양육비와 교육비가 더해지면서 저축이 힘들어질 수 있다. 따라서 신혼 때부터 지출을 잘 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종률<CFP(Korea Financial Group)·국제공인재무설계사> 018-632-1254
재무설계
[경제]신혼부부 전셋집 어디가 좋을까?(2007. 02. 20)
2007. 02. 20 경제
신규 역세권 대단지 주목… 발품 열심히 판다면 1억 미만도 가능 비록 전셋값이 크게 뛰었지만 부지런히 발품만 판다면 소액으로도 진흙 속 진주를 찾아낼 수 있다. 한동안 기승을 부리던 동장군이 물러가고 본격적인 결혼시즌이 다가왔다. 그러나 아파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신혼집 마련이 여간 고민거리가 아니다. 알뜰살뜰 모아온 적금통장을 깨고, 은행돈을 보태도 내집은커녕 전셋집 마련하기도 벅찬 게 현실이다. 하지만 부지런히 발품만 판다면 소액으로도 진흙 속 진주를 찾아낼 수 있다. 특히 신혼 때는 경제활동이 왕성하고 맞벌이 시기인 만큼 출·퇴근이 수월한 역세권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단지규모는 600~1000가구 이상인 대단지에 편의 및 교육시설 등이 풍부한 지역의 아파트를 택해야 실거주면에서 유리하다. 수도권에 있는 신규 역세권 단지라도 열심히 발품을 판다면 1억 원 미만으로 전세를 얻을 수 있다. 주로 지하철 4호선을 따라 늘어서 있는 비강남권 아파트와 지하철 1호선을 중심으로 놓여 있는 경기지역 단지의 20평형대 아파트는 주거 쾌적성까지 갖추고 있어 신혼부부뿐 아니라 어린 자녀를 둔 가정이라면 눈여겨보는 것이 좋다. 노원구 상계동 청암2단지는 2001년 6월 입주한 단지로 7개동, 지상 18~20층 규모의 602가구로 이뤄져 있다. 평형별로는 21평형 345가구, 25평형 257가구이다. 8500만~9500만 원이면 21평형을 전세로 얻을 수 있다. 지하철 4호선 상계역이 걸어서 5분 거리이고 상계시장, 삼창프라자, 상계중앙시장 등을 이용할 수 있다. 교육시설로는 덕암초, 상계제일중 등이 있다. 인근 공릉동 풍림아파트는 4개동, 지상 8~20층으로 14~44평형 1601가구 규모의 대단지다. 이 가운데 14평형 전셋값이 6000만~7000만 원에 형성돼 있다. 학군은 용원초, 중현초 등이 속한다. 지하철 7호선 공릉역이 걸어서 10분 거리로 강남권 출·퇴근도 수월한 편이다. 상계동 청암2단지 지하철서 5분 도봉구 창동 북한산현대홈시티는 입주 2년차를 맞는 새아파트로 25~38평형 557가구 규모의 중급단지이다. 이중 25평형과 26평형의 전셋값이 1억 원 안팎에 형성돼 있다. 지하철 4호선 쌍문역이 걸어서 5분 거리로 창동시장, 수송초, 창림초 등을 이용할 수 있다. 573가구 규모의 중랑구 면목동 늘푸른동아도 20평형 전셋값이 8500만~9500만 원선에 형성돼 있다. 지하철 7호선 용마산역이 걸어서 6분 거리이고, 동부간선도로를 이용해 강남권 진출입도 수월하다. 교육시설로는 중곡초, 용마중 등이 인근에 있다. 지역을 수도권으로 옮기면 25평형 안팎의 새 아파트를 1억 원 가량의 전세금으로 입성할 수 있다. 수원에서는 구운동 청구아파트가 24~51평형 527가구의 중급단지로 24평형 전셋값이 1억 원에 형성돼 있다. 국철 1호선 화서역이 걸어서 10분 거리이다. 농협하나로마트, 이마트 등을 이용할 수 있다. 학군은 정천초, 일월초 등이 속한다. 인근 율전동 밤꽃마을뜨란채는 1078가구의 대단지이다. 평형별 가구수는 22평형 174가구, 32평형 904가구이다. 이 가운데 22평형 전셋값이 8500만~9000만 원에 형성돼 있다. 인근에 밤밭저수지가 있어 주거 쾌적성도 좋은 편이다. 지하철 1호선 성균관대역이 걸어서 10분 거리이고, 상률초, 율전중 등을 이용할 수 있다. 서울 도심 접근성이 좋은 부천에서는 괴안동 신일해피트리가 23~40평형 320가구로 26평형 전셋값이 8500만~1억 원선에 형성돼 있다. 부안초, 부천동중으로 통학이 가능하고, 홈플러스, LG백화점 등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다. 최근 의정부~소요산 간 경원선 개통으로 서울 출·퇴근 여건이 좋아진 의정부시에서는 장암동 장암푸르지오1단지 24평형 전셋값이 9000만~1억 원선이다. 국철 1호선 회룡역이 걸어서 5분 거리이다. 의정부 장암초가 인근에 있고, 중랑천, 수락산 등을 이용할 수 있다. 의정부 장암동 출퇴근 여건 좋아져 경원선 개통으로 서울 출·퇴근 여건이 좋아진 의정부의 한 아파트. 자금 여력이 넉넉한 수요자라면 출·퇴근 여건이 좋고, 학군은 물론 생활편익시설이 풍부한 부도심권 새 아파트가 보금자리로 안성맞춤이다. 강남권에서는 도곡주공 1차를 헐고 들어선 도곡렉슬을 꼽을 수 있다. 26~68평형 3002가구 규모로 업무시설이 즐비한 테헤란로와 가깝다. 지하철 3호선 도곡역이 걸어서 5분 거리이다. 롯데백화점, 월마트, 영동세브란스병원 등 편의시설 이용도 수월하다. 학군은 대도초, 대청중, 숙명여중, 중대부고 등이 속한다. 인근 역삼동 역삼래미안 아파트도 1050가구 대단지로 편익시설도 풍부한 편이다. 지하철 2호선 선릉역이 걸어서 10분 거리이고, 도곡초, 역삼중, 단대부고 등으로 통학할 수 있다. 강남으로 출·퇴근 여건이 좋은 동작구에서는 삼성래미안3차를 꼽을 수 있다. 23~59평형 1656가구로 지하철 7호선 숭실대역이 걸어서 5분 거리이다. 성동구 옥수동 풍림강변 아파트의 경우 모두 269가구 규모로 한강 조망이 뛰어나고, 강남권 진출입이 수월하다. 지하철 3호선 옥수역이 걸어서 5분 거리이다. 달맞이봉공원, 한강시민공원 등을 이용할 수 있다. 이밖에 마포구에서는 염리동 GS자이가 32~57평형 534가구 규모로 교통여건이 뛰어나다. 지하철 5호선 마포역이 걸어서 4분 거리로 마포·여의도권으로 10분 이내에 닿을 수 있다. 학군도 뛰어난 편으로 염리초, 동도중, 서울여고 등을 이용할 수 있다.
경제
[秘錄환경운동25년]온산병 사태(3) ‘가짜 신혼부부’의 울산 첫날밤(2006. 04. 04)
2006. 04. 04 사회
‘늦바람’ 환경운동가 안병덕의 운명적 인연… 공해전사들 ‘반공협’으로 뭉치다 반공협 회원들은 공문연 등 반공해단체의 일선 활동가 역을 하면서 환경운동가로 성장했다. 사진은 공문연 자원활동가로서 공해강좌를 진행하는 반공협 소속의 이성실. 1981년 여름 어느 날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 묵직한 가방을 든 젊은 남녀가 울산행 고속버스에 올라탔다. 신혼부부인가? 한 호기심 많은 승객이 이들을 흘끔거렸다. 하지만 금방 무관심하다는 듯 길게 하품을 하고는 좌석에 머리를 기댔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잠든 듯하던 그 승객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다시 젊은 남녀의 동태를 엿보았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나이나 행색으로는 갓 결혼한 부부 같은데 자세히 뜯어보면 수상쩍은 구석이 있었다. 두 남녀는 한 좌석에 나란히 앉은 채 말이 없었다. 신혼부부라면 샘이 날 정도로 알콩달콩 사랑의 밀어를 나눌 텐데 그런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냉전’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도대체 어떤 관계일까! 당시의 대학문화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한 가지 추측을 할 수 있다. 대학가의 여름은 ‘농활(농촌활동)’의 계절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공활(공장활동)’도 많아졌다. 약간 나이가 들어 보이긴 하지만 두 사람은 농활이나 공활을 떠나는 대학생 아닐까. 이 정도면 놀라운 추리력이다. 하지만 틀렸다. 아니, 반은 틀리고 반은 맞다. 두 사람은 대학생은 아니지만 대학문화가 낳은 여름 이벤트 중 하나인 공활을 떠나는 길이었다. 그런데 흔히 말하는 공활(工活)이 아니다. 당시로서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공활(公活), 즉 공해 조사 활동 내지 반공해 활동이다. 공해(公害)는 영문 ‘Public Pollution’을 일본이 한자어로 직역해 쓰는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인 용어다. 사전적 의미는 산업활동이나 교통량의 증가 등으로 말미암아 공중의 건강이나 생활환경에 미치는 여러 가지 해를 일컫는다. 운동권에서는 이 공해와 관련한 활동을 공해추방운동, 반공해운동, 또는 그냥 공해운동이라고도 불렀다. 반은 직업인, 반은 활동가 반공협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공해운동권의 선배그룹 안병덕·조홍섭·이덕희(왼쪽부터). 그렇다면 울산행 고속버스에 올라탄 두 남녀의 정체를 파악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당시 대학가 반공해 서클이라면 공해연구회 말고는 찾기 어려웠으니까. 신부 같아 보이는 여자는 공해연구회 창립회원 4인방의 일원인 황순원(현 캐나다 유학 중, 전 환경과공해연구회 부회장)이었다. 좀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낯선 얼굴은 공해연구회에 뒤늦게 합류한 안병덕(현 에코생협 이사장, 전국귀농운동본부 공동대표)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건설회사에 취직한 안병덕이 공해연구회 회원이 된 것은 ‘운명적’이었다. 겸업 환경운동가의 전형이 되기 때문이다. 전업 환경운동가가 되기가 쉽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만 직업을 가진 채 활동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피곤한 노릇이다. 그는 46세가 되는 2000년까지 직장생활을 하면서 반은 직업인, 반은 활동가로 지낸다. 지금은 서울 근교에 귀농해 ‘환경’과 관련된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조중래(현 명지대 교통공학과 교수)와 서울공대 산업공학과 동기(72학번)인 그는 비교적 순탄하게 대학을 마쳤다. 2학년 때까지 조중래와 함께 움직이다 해군에 지원 입대하는 바람에 민청학련 사건의 광풍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공해연구회가 만들어지기 전인 1979년 초 졸업, 국제종합건설에 입사했다. 건설은 환경과 상극이다. 건설회사에 근무하면서 그는 환경문제와 정면으로 부딪치게 됐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환경에 대한 지식을 더 쌓는 것이었고, 이를 행동으로 옮겨 1981년 3월 서울대 환경대학원에 입학했다. 거기에 그의 인생을 결정지은 운명적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조중래가 운영하는 공해연구회였다. “대학 다닐 때 USIS(미국공보원)가 지원하는 파이오니아클럽에 몸담은 적 있다. 지금 보면 미국문화의 전초 역할을 했지만 우리에게 없는 환경문제를 접하는 기회가 됐다. 그런 인연도 있고 건설업무와도 관련이 있어서 환경대학원에 들어갔는데 중래가 하는 모임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됐다.” 안병덕의 최근 회고. 이때 그가 받은 문화적 충격은 당시 ‘공해운동권’의 모습과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그가 처음 공해연구회 모임에 나갔을 때였다. 황순원이 1980년 11·10 학내 시위로 구속됐다가 막 출감한 시점이었다. 조중래로부터 그런 얘기를 사전에 들었던 그는 ‘실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저렇게 곱상한 여자가 그렇게 대담한 일을 하다니! 그는 전에 없었던 묘한 흥분상태에 빠졌다. 경이로운 느낌은 만남의 횟수가 쌓일수록 무뎌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했다. 학부 시절 어설프게 운동권에 한발 걸쳤던 그로서는 1980년대 대학 분위기와 후배들의 태도, 공해운동이라는 영역 등이 매우 새롭고 신기하기만 했다. 이런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어느 날 조중래가 조용히 물었다. “순원이 어때?” 도둑질하다 들킨 아이처럼 그는 움찔했다. 하지만 곧 감정을 추슬렀다. 그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안 그래도 내가 얘기를 해 보려고 하는데….” “그래? 알았어.” 조중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나 착각은 서로 ‘코드’가 다를 때 생겨난다. 늦깎이 대학원생 안병덕은 기존 공해연구회 멤버와는 다른 문화적 토양에서 대학 시절을 보냈다. 그의 첫 번째 착각은 여기서 비롯됐다. 황순원의 자신에 대한 호의적 태도를 잘못 읽은 것이다. “나도 좋아하지만 선배로서지 그 이상은 아니다”라는 게 황순원의 답이었다. 그는 실망스러웠지만 마음을 정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속 썩이기 싫으니까 앞으로 후배로서만 대하겠다.” 서로에게 속을 보여주었다가 어긋났을 때 예전의 관계로 원위치하기 힘 드는 게 남녀관계다. 퇴짜를 놓은 쪽이나 당한 쪽이나 그런 자격지심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그는 걱정스러웠다. 둘의 관계가 어색해지는 것은 물론 자칫 공해연구회 모임 자체가 이상해질 수 있으니까…. 반공해 마당극 ‘나의 살던 고향은…’ . 퇴짜 맞은 늦깎이 대학원생 공해연구회 창립 멤버이자 황순원의 단짝 친구였던 최영남(현 기독교 전도활동)은 “안병덕 선배와는 늘 코드가 맞지 않았다”고 최근 회고한 바 있다. 이 대목에서도 그는 후배들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안병덕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 일 후에 (황순원이) 사무적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전과 다름없이 거리감을 안 주고 나를 많이 챙겨주었다. 그렇게 관계가 복원돼 그해 여름에 울산·온산 답사를 가게 됐다. 그때 조중래는 일이 있어서 나중에 온다고 했고, 최영남은 언니가 울산에 있어서 먼저 내려가 있었다. 그래서 휴가를 받아 둘이 고속버스를 타고 울산에 내려갔는데 최영남이 우리 가방을 보고는 ‘신혼가방 같다’고 놀리던 기억이 난다.” ‘가짜 신혼부부’의 울산 첫날밤 역시 ‘착각’으로 시작된다. 세 사람이 여관을 잡을 때였다. 그가 주인에게 “방 두 개를 달라”고 말하는데 여자들이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하나만 잡으라’는 것이었다. 결국 방 하나를 잡아 들어가서는 여자 후배들로부터 호된 야단(?)을 맞아야 했다. “돈도 없는데 어떻게 하려고 방을 두 개씩이나 잡으려 하느냐”고. 나중에 부산 사상공단 답사를 할 때였다. 이번에는 그도 자신 있게 나서서 “방 하나만 달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여관 주인의 표정이 험악해지더니 “우리는 혼숙은 안 받는다”며 거절했다. 조홍섭이 배우로 출연한 공해연극 ‘청산리 벽폐수야’. ‘서울의 봄’과 ‘광주사태’를 겪은 1980년대 초, 대학가는 나름대로 운동권 출신임을 자처했던 안병덕조차 ‘분위기를 모르는 남자’이자 ‘코드가 다른 구세대’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급변하고 있었다. 운동의 ‘빅뱅’ 상황이었다. 운동 공간이 급격히 확장되는 것은 물론 이념적으로도 끝을 모르고 깊이를 더해갔다. 그 파도는 상대적으로 학생운동의 변방으로 치부됐던 공대·자연대 등 이공계 대학에까지 미쳤다. 최영남·황순원의 숙명여대 후배인 이성실(현 자연그림책 작가, 화학과 81학번)과 이수경(현 환경과공해연구회 사무처장, 물리학과 81학번)은 뒷날 반공해운동협의회(반공협)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학생운동권 출신 환경운동가 그룹 1세대에 해당한다. ‘1980년대적 상황’이 만들어낸 자생적 환경운동권의 한 갈래라고 할 수 있다. 1학년 때 실험 짝이던 두 사람은 우정의 깊이만큼 많은 공감대를 가졌지만 관심사에서는 다른 점이 있었다. 이수경은 도시빈민운동을 꿈꾸었다. 운동은 해야 되겠는데 현장(공장)은 겁나고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학교에 다니면서도 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택한 것이 빈민운동이었다. 그는 난지도 야학으로 도시빈민운동에 입문했다. 이성실은 생각이 좀 달랐다. 어릴 때부터 책 읽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H.G.웰스의 ‘타임머신’을 읽었다. 마지막에 지구가 멸망하는 내용을 담은 이 SF가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지구환경문제’라는 거대담론을 어릴 때부터 가슴 한 구석에 담아놓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이 환경운동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선 것은 4학년 때였다. 이수경이 난지도 야학이 깨지는 바람에 방향감각을 잃고 헤매고 있을 즈음이었다. 이성실이 공해마당극 ‘나의 살던 고향은…’을 보러 가자고 꼬드겼다. 이수경의 최근 회고. “그때는 환경문제를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난지도 야학할 때 주민들이 파이프를 박아 거기 지하수를 식수로 사용했다. 야학 나오는 학생이 그 물을 먹으면 아프다면서 분석을 할 수 없느냐고 물었다. 그때 ‘이게 뭐가 중요하냐, 다 쫓겨날 판인데’라며 짜증을 냈으니까…. 성실이가 자꾸 공해문제연구소 가보자, 공해연극 보러가자, 공해강연 들으러 가자고 하는 게 귀찮았다. 솔직히 그때는 환경 얘기하면 좀 우습게 보았다.” 이 대목에서 마음이 여리기만 하던 이성실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네가 가자는 곳에 다 갔는데 너는 내가 환경연극 한 번 보러가자는데 그것도 못하느냐”고 화를 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수경은 ‘공해문제’를 접하게 되고, 마음도 달리 먹게 된다. 환경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빈민운동을 하면 훨씬 접근하기 수월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환경 얘기하면 우습게 보였다” 1984년 여름 두 사람은 한국공해문제연구소(이하 공문연)를 찾아갔다. 빈민운동을 하든 환경운동을 하든 찾아갈 곳이라고는 그곳 말고는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최열(현 환경재단 대표)·정문화(1998년 작고, ‘함께 사는 길’ 편집장 역임)가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이성실의 기억을 더듬어보자. “최열 선생님이 아기를 보고 있었다. 부인이 농민운동한다고 맡겨놓은 아기에게 김밥을 먹여가면서 우리에게 2시간 동안 열강을 했다. 그 전에 국립환경연구소에 지금의 인턴사원 비슷한 케이스로 일한 적 있었는데 거기서는 한계를 느꼈다. 거기 사람들은 ‘시집가더라도 이런 걸 알아두면 좋지’라는 식으로 말했는데 최열 선생님은 달랐다. 열심히 진지하게 설명해주는 열정이 좋았다.” 이 즈음 서울공대와 숙명여대 이과대를 주축으로 한 공해연구회, 숙명여대의 또 다른 그룹인 이성실·이수경 외에 또 한 그룹이 움직이고 있었다. 서울대 자연대 출신 이덕희(현 영화과학 대표이사, 환경운동연합 국제협력위원장)를 중심으로 한 ‘인천공해문제연구회’였다. 미생물학과 77학번인 이덕희는 서울대 학생운동의 강력한 한 축을 이룬 흥사단아카데미 회원이었다. 김성식(현 경기도 정무부지사)·허윤(현 위지소프트 대표)·박성현(전 나우콤 사장)·김두희(현 동아사이언스 대표이사)·이효추(현 명승건축 대표) 등이 그의 학내 아카데미 동기였다. 말하자면 ‘족보가 짱짱한’ 운동권이었다. 공대와 마찬가지로 자연대 소속 운동권의 태생적 고민도 전공과 사회운동의 관계였다. 전공이 가진 기능적 역할과 자신이 지향하는 사회적·국가적 역할을 어떻게 매치시키느냐는 이공계 운동권의 풀리지 않는 숙제이자 고민이었다. 1981년 학부를 졸업한 그는 시간을 벌기 위해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런데 그만 이태복(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필두로 한 ‘아카데미 패밀리’가 대거 연루된 전민노련·전민학련 사건(일명 학림사건)으로 덜컥 구속되고 만다. 이 때문에 옥고를 치르고 1983년 8월 석방된 그의 선택의 폭은 더욱 좁아졌다. 대학원은 이미 글렀고, 조직운동이나 지하운동도 어려웠다. 그해 10월 영인과학에 취직한 그는 암중모색에 들어갔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제물포고 출신인 그는 당시 인천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제 그가 가진 것은 ‘과학기술’과 ‘인천’이었다. 과학기술 운동… 그리고 인천을 근거지로 한 지역운동…. 그의 최근 회고를 들어보면. “과학기술의 모순이 가장 크게 나타난 게 현대에서 환경문제였다. 그때는 남동공단이 들어서기 전이었지만 부평·주안의 4·5·6공단이 문제가 많았다. 서구 해안을 따라 공해공단이 들어서서 다른 지역보다 공해가 심각한 편이었다. 공해문제는 인천에서는 지역문제이기도 했다.” 반공협 소속의 주요 활동가들. 안병옥·윤제용·황상규·이성실·김근배(왼쪽부터) ‘온산병 투쟁’의 핵 ‘반공협’ 마침내 그는 아이템을 정하고 사람을 찾았다. 황상근 신부(현 제물포성당 주임신부)가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인천공해문제연구회는 그와 박창기(현 프락시스 대표)·안영근(현 열린우리당 의원)·조용명(현 고교 교사)·이용식(현 인천발전연구원 연구위원) 등이 황 신부를 우산으로 삼아 그해 겨울 결성한 모임이었다. 환경운동권의 형성기였던 1980년대 초, 대학가와 학생운동권 일각에는 이런 뜻있는 ‘인자’들이 소모임으로 결합하거나 네트워크를 이뤄가고 있었다. 이들은 1984년 9월 반공협으로 뭉쳐지는데, 바로 이 반공협이 때마침 터진 ‘온산병 사태’를 거치면서 공문연의 ‘손발’이자 현 환경운동연합의 전신인 공해추방운동청년협의회(공청협)·공해추방운동연합(공추련) 등의 근간이 된다. 반공협에 참여한 인자들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세력은 학생운동의 본진 격인 관악(서울대) 그룹이었다. 자연대·공대·약대 등 자연계열 학생운동권은 선배인 조홍섭(현 한겨레신문 부국장·환경전문기자)과 마찬가지로 자연과학도의 사회참여 방법론을 놓고 치열한 고민을 한 경험이 있었다. 80학번 3인방 안병옥(현 시민환경연구소 부소장)·윤제용(현 서울대 응용공학부 교수)·김근배(현 전북대 교수·과학사)와 83학번 황상규(현 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 등이 그들이다. 이들 관악그룹과 공문연 자원활동가 이성실·이수경, 인천공해문제연구회의 이덕희, 연세대 박상철(회계사, 현 환경운동연합 감사), 공해연구회의 최영남·이동수(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환경과공해연구회 연구소장) 등 청년·학생운동가로 구성된 반공협은 ‘온산병 투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984년 크리스마스 다음날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일단의 젊은 남녀들이 울산행 고속버스에 올라탔다. 이번에는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금방 고개를 끄덕일 법했다. 최열 공문연 연구실장과 윤제용 등 낯익은 반공협 활동가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온산 공해실태조사를 떠나는 게 틀림없었다. 반공협 공해전사들의 첫 ‘온산 출정’이었다. 웬일인지 3년 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안병덕·황순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건 이상하게 볼 필요가 없었다. 황순원이 임신하는 바람에 반공협 일은 주로 최영남이 봐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병덕·황순원은 1981년 여름 온산 공활을 다녀온 뒤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해 10월 연인 사이가 됐고, 이듬해 9월 결혼에 골인했다.
秘錄환경운동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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