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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진의 국방 B컷](6) 북 미사일 ‘KN-23’ 이름이 4개나 되는 까닭은(2024. 05. 03 16:00)
- 2024. 05. 03 16:00 정치
- 북한 미사일은 종류도 많고, 종류마다 붙여진 이름도 많다. 예를 들어 <2022 국방백서>가 ‘이스칸데르형 전술유도탄’으로 설명한 북 미사일을 살펴보자. 앞서 2020년 합동참모본부는 이 미사일을 ‘19-1 SRBM(단거리탄도미사일)’으로 지칭했고, 한·미 군사정보당국은 ‘KN-23’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하지만 정작 이 미사일을 발사한 북한이 스스로 붙인 이름은 ‘화성-11가형’ 신형전술유도탄이다. 미사일 하나에 붙은 이름만 4개인 셈이다. 이와 같은 북한 미사일 종류와 명칭을 하나도 아니고 모두, 시리즈별로 외우고 있다면 진정한 ‘밀덕(군사 마니아)’이라고 할 만하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2019년 5월 10일 공개한 ‘북한판 이스칸데르’ 미사일의 발사 장면 / 연합뉴스 ■사라진 ‘한국형 코드’ 이처럼 북한 미사일 이름이 여러 개인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은 개발한 무기 명칭을 군사비밀로 분류해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미국과 나토 국가들은 사회주의 국가의 신형 무기를 발견하면 자체 코드를 붙인 명칭을 부여했다. 냉전 시절인 1957년에 소련이 제작한 ‘R11’ 미사일이 대표적이다. 서방 정보기관은 1960년대 초반 이 미사일의 존재를 발견하고 ‘스커드’란 나토 코드명을 붙였다. 북한 미사일도 마찬가지다. 한·미 군사정보당국은 북한이 신형 미사일을 잇달아 발사하자 체계적 분류의 필요성을 느끼고는 발견된 순서에 따라 북 미사일에 ‘KN-코드명’을 붙였다. KN은 ‘North Korea(북한)’의 영문 머리글자를 앞뒤로 바꿔 붙인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KN-23’ 이스칸데르형 전술유도탄은 미국이 위성 등 정찰·정보자산으로 파악한 23번째 미사일이란 의미다. 이처럼 발견 순서대로 명칭을 붙이다 보니, 일부 미사일의 경우 북한이 나중에 개발한 미사일인데도 먼저 개발한 미사일 번호보다 앞선 숫자가 붙은 예도 있다. 한·미 군사정보당국은 북한 미사일이 최초로 식별된 곳의 지명을 따서 미사일 이름을 붙인 적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1990년 5월 함경남도 함주군 노동리에서 확인한 북한 준중거리 탄도미사일 ‘노동 미사일’이다. 노동리에서 발견했다고 해서 부른 명칭이고, ‘KN-코드’로는 ‘KN-5’다. 북한이 붙인 노동 미사일의 이름은 ‘화성포-7형’이다. 무수단과 대포동 같은 북한 미사일 이름도 노동 미사일처럼 지명을 붙인 사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집권 이후 북한의 미사일 시험 발사가 빈번해지고, 발사 장면은 물론 열병식에까지 미사일을 노출하면서 관련 정보량은 급격하게 늘어났다. 그러면서 일반 국민 사이에서도 북 미사일 종류와 명칭에 관한 관심이 늘어났고, ‘KN-코드’ 시리즈 명칭이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러나 언론이 보도한 ‘KN-코드’에 관해 군 당국은 공식 확인을 일절 해주지 않았다. 한국군이 ‘KN-코드’ 명칭을 공개하는 것을 미군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KN-코드’는 미군의 우주·미사일 담당 기관이 부여한 것으로, 미국 측이 군사비밀로 취급할 것을 요청해 한국군은 지금도 외부에 공식적으로 공개하지 못하고 있다. 전시작전통제권만 미군에 있는 게 아니라 북한 미사일 코드명의 공개 권한도 미국 측이 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이에 따라 북한 미사일 위협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의 알권리가 제한되고 있다는 비판이 군 안팎에서 제기됐다. 그래서 나온 것이 2020년에 등장한 ‘숫자 코드’로, ‘한국식 코드명’ 분류법이다. 이는 당시 합참 정보본부장 겸 국방정보본부장이었던 김영환 중장(육사 42기)이 시도했다. 김 정보본부장은 북한의 발사체 분석 및 평가에 있어 한국군의 역할이 큰데도 무조건 미국 측의 지시에만 따르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판단했다. 그의 주도 아래 군 당국은 ‘연도-순서’별로 전년도에 발사된 북 미사일의 명칭을 붙였다. ‘19’는 발사체 발사 연도(2019년), 그다음에 나오는 숫자는 발사된 순서에 따른 일련번호였다. 가령 ‘19-1’은 북한이 2019년에 처음 발사한 미사일이라는 식이다. 이렇게 해서 ‘KN-코드’와는 다른 체계인 한국군 자체 코드가 ‘19-1’부터 ‘19-6’까지 부여됐다. 그러나 김 정보본부장이 2020년 전역하면서 한국식 코드 명칭도 함께 사라졌다. ■북의 미사일 명칭 공개 북한은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과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를 잇달아 한 뒤 조선중앙텔레비전 등 공식 매체를 통해 관련 영상과 사진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붙인 명칭을 함께 공표했다. 이는 대외적으로 북한이 미사일을 포함한 신무기 능력을 외부에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북한이 공개한 영상만 보고도 발사체의 연료가 무엇인지도 쉽게 파악이 됐다. 불꽃이 촛불 모양이면 액체형, 치마 모양이면 고체형이다. 북한은 2021년 10월 11일, 북한의 무기박람회 ‘자위-2021’에서 ‘화성포-17형’이라는 다탄두로 추정되는 ICBM을 공개했다. 지난해 4월 14일에는 최대사거리가 1만5000㎞인 고체연료 3단 ICBM을 발사하면서 ‘화성포-18형’이라는 이름을 밝혔다. 북한은 자신들이 발사한 SLBM도 ‘북극성’이라는 이름을 붙여 공개했다. 미국 핵잠수함 SLBM 이름도 북극성이란 의미를 가진 ‘폴라리스’다. 미국과 북한의 SLBM 명칭이 똑같은 셈이다. 북한은 미사일뿐만 아니라 새로 시험하거나 배치하는 신형 무기의 명칭도 잇달아 공개했다. 신형 무인정찰기의 이름은 ‘새별-4형’인데 외형이 미 RQ-4 글로벌호크와 거의 같아 ‘북한판 글로벌호크’로도 불린다. 북한은 2012년부터 11년간 개발했다는 핵 무인수중공격정의 이름도 ‘해일’이라고 밝혔다. 북한은 “은밀하게 작전수역에 잠항해 수중 폭발로 초강력적인 방사능 해일을 일으켜 적의 함선 집단과 주요 작전 항을 파괴 소멸한다”며 명칭의 의미까지 설명했다. 북한이 자체적으로 신형 미사일 명칭을 공개하자 언론에서도 굳이 한국군 당국이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는 KN 코드명을 보도할 필요가 없어졌다. 북의 KN 시리즈 미사일 초기형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독사’로 불리던 KN-02 이동식 단거리 지대지미사일은 이미 폐기했다. 북은 KN-03으로 불리는 스커드B와 KN-04인 스커드C 등 액체연료 미사일도 도태시키고 있다. 북 ICBM은 온도가 7000도 내외인 대기권 재진입 시 열과 압력으로 생기는 ‘화학적 삭마(깎이고 갈림)’를 극복하지는 못한 것으로 한·미 군사정보당국은 본다. 화학적 삭마 현상으로 발생하는 수천도 고온의 플라스마 흔적이 북 ICBM 발사 후 대기층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화학적 삭마 시 탄두부가 안정적 형태로 깎여야 예정된 궤도를 비행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대기권 밖으로 튕겨 나가거나 대기권 재진입 직후 폭발하게 된다. 북한이 화학적 삭마 현상까지 극복해 ICBM 발사에 성공하면 한·미가 ‘KN-코드’ 숫자를 더 높여 명칭을 부여할 가능성이 있다.
- 박성진의 국방 B컷
- [내 이름 걸고 추천하는 맛집](18) 최송현 / 부산 해운대 ‘보리문디’(2024. 04. 24 09:47)
- 2024. 04. 24 09:47 사회
- 결혼 전 ‘남편 웃음’ 완성 시켜준 맛과 향 밖에서 안이 훤히 보이는 보리문디. 주인 김성훈 간판이 걸려 있다. “처음으로 웃을 수 있는 기일이네.” 결혼 전, 남편의 고향 부산에 처음으로 함께 갔던 2019년 11월. 해운대 선술집 ‘보리문디’에서 청주와 맛있는 음식에 취해갈 때쯤 그가 말했다. 아버님은 내가 남편과 만나기 전 세상과 이별하셨는데, 갑자기 떠난 아버지의 빈자리에 목 놓아 울지도 못한 장남은 기일이 있는 11월엔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침잠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내가 함께여서 5년 만에 아버님 기일에도 웃을 수 있게 됐다며 고맙다고 했지만, 나는 그 웃음을 완성 시켜준 ‘보리문디’가 참 고마웠다. 옛 경상도의 주 재배 곡물인 ‘보리’와 경상도 출신의 사람을 장난스럽게 표현한 ‘문디’를 결합한 ‘보리문디’는 경상도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담고 있는 이름이다. 가게 이름만큼이나 크게 ‘주인 김성훈‘이라고 적힌 목조 간판이 눈에 들어온 순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요리하는 셰프에 대한 기대도 높아졌다. 미닫이문을 열자 8석 남짓의 바 자리가 눈에 들어왔고 마치 자주 드나들었던 공간처럼 온기가 느껴졌다. 셰프님 바로 앞 두 자리가 다행히 비어 있었다.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셰프와 마주 앉는 바 자리가 어색했다. 낯선 이에게 마음을 닫아두었던 나와는 달리, 처음 만나는 상대와도 금세 편안한 분위기를 만드는 남편 덕분에 새로운 경험이 시작된 것이다. 남편은 1,000명이 넘는 교육생에게 스쿠버다이빙을 가르쳐 왔는데, 그들의 직업, 나이, 성별이 무엇이든 바닷속에선 탱크 속 기체로 숨 쉬는 다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에 일이 더 재밌어졌다고 했다. 그와 함께하며 나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나 경계를 덜어내어 간다. 2019년 보리문디 앞에서 남편(당시는 남자친구)과 함께 아이스크림처럼 녹는 고등어 봉초밥 고등어를 사랑하는 우리는 고등어초회(시메사바)와 고등어 봉초밥을 주문했다. 셰프님이 내게 정겹게 말을 걸어주셨고, 남편을 결혼할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동년배의 부산 사나이 둘은 서로의 공감대를 확인하며 편해져 갔다. 대화를 정겹게 나누면서도 손이 바쁘게 움직이던 셰프님이 완성된 음식을 건네주셨을 때, 자동반사로 우리의 탄성이 터졌다. 원형 접시에 가지런히 꽃처럼 둘린 고등어초회 위에 노란빛의 깻가루가 둥글게 뿌려져 있었는데, 짙푸른 색에서 은빛으로 그러데이션 되는 고등어 등 부분과 선홍빛의 속살, 송송 썬 싱그러운 초록 파가 완성한 아름다운 색 조합이 예술작품 같았다. 고등어초회는 산패가 빠른 고등어를 운송하기 위해 살균력이 있는 식초에 담근 것이 기원이다. 과정이 간단해 보여도 싱싱한 고등어를 선택해 소금과 식초로 제대로 절여 그 특유의 맛과 향을 만드는 것이 정말 어려운 기술이어서 일식 요리 고수를 가리는 척도라고도 한다. 파와 생강을 올린 회 한 조각을 간장에 찍어 입에 넣었는데 고소한 맛과 부드러운 식감, 온몸에 퍼지는 풍미가 감동 그 자체였다. 셰프님의 정성이 가득 담긴 우엉 장아찌, 유자 단무지, 직접 담은 보리 된장을 곁들인 오이 등의 반찬을 음미하며 그 감동은 더 증폭됐다. 눈물 나게 맛있다며 셰프님 앞에서 열광하는 중에 고등어 봉초밥이 등장했다. 젓가락으로 집기 좋게 사각 김 안에 쏙 안긴 고등어 초밥이 사이좋게 꼭 붙어 일렬로 자리하고 있었다. 밥과 김이 어우러진 통통한 고등어살이 입안에서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 음식을 만들어 준 고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음식을 맛본 마니아의 생생한 반응을 볼 수 있는 바 자리. 나는 그 진짜 매력을 보리문디에서 처음 알게 됐다. 보리문디는 메뉴판의 제일 앞 장이 매일 달라진다고 한다. 그날의 가장 싱싱한 식재료를 손님에게 내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음식을 다 먹어버린 우리는 어느새 메뉴판을 다시 정독하고 있었고, 청주 한 병을 다 비운 후 하이볼을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올해로 스쿠버다이빙 강사 10년 차가 된 나는 2019년,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스쿠버다이빙 단체인 PADI의 글로벌 홍보대사가 되었는데, 임명 후 첫 행사였던 필리핀 세부의 수중 촬영 대회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우리 커플의 이야기를 셰프님이 즐겁게 들어주셨다. 남편과 내가 직접 촬영한 바다 생물 영상도 보여드리고, 이 맛있는 음식을 자주 먹고 싶다며 서울로 오시라는 농담 섞인 진담도 건넸다. 그렇게 우리는 보리문디의 열혈 팬이 되었고, 지난 5년 동안 부산에 갈 때마다 우리의 저녁 한 끼는 항상 보리문디였다. 쌓여온 시간 속에 셰프님과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응원하게 되었다. 왼쪽 김성훈 셰프님, 글에서 이야기한 1층 바 자리 개업 10년 이후의 꿈도 응원 올해 초 내 인생 첫 에세이 <이제 내려가 볼까요?>를 출간했다. 스쿠버다이빙을 소재로 한 인생과 사랑 이야기가 담긴 이 책을 우리 부부와 바다 이야기를 소중하게 함께 나눠주신 김성훈 셰프님께도 꼭 드리고 싶어 지난 3월 부산을 찾았다. 아쉽게도 고등어 금어기라 고등어초회를 맛볼 순 없었지만, 덕분에 줄무늬 전갱이와 단새우회를 참 맛있게 즐겼다. 더 오르려는 계획대로 되지 않아 상처받았던 마음을 놓고, 내려가도 좋다는 마음으로 삶을 대하기 시작하니 소소한 행복을 자주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는 내 책의 이야기가 보리문디에서도 펼쳐졌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아쉬움이 더 멋진 새로운 만남으로 이어지는 기회가 될 수 있다니! 삶의 오묘한 흐름에 마음이 놓인다. 하루에도 수많은 식당이 개업하고 폐업하는 요즘, 셰프님은 처음 보리문디를 열었을 때 이 가게를 10년 동안 유지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올해로 11년째가 되어 이미 그 꿈을 이루셨으니 혹시 다음 꿈도 있으신지 여쭸다. 새로 오픈한 덮밥 전문 일식당 ’하데나‘를 잘 성장 시켜 서울에도 매장을 내고 싶다고 하셨다. 5년 전 서울에 개업하시라는 농담에 수줍게 반응하셨던 셰프님이 이 대단한 음식 맛을 서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실 맘을 갖게 된 것이 참 감사했다. 다음 날 점심, 시어머님을 모시고 하데나를 찾았다. 아귀 간 덮밥, 참치 덮밥, 연어 덮밥을 주문했는데 모든 메뉴에 ’아! 제발 서울에도 오픈해주세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사장님의 다음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이제부터 부산에서 우리 부부의 저녁은 보리문디, 다음 날 점심은 하데나로 고정이다. 단새우회 줄무늬 전갱이 사시미 고등어봉초밥 고등어초회(시메사바) 필자 최송현 연어덮밥을 맛있게 먹는 필자. 애견동반이 가능한 식당이라 반려견 레오와 함께 했습니다. 필자는 2006년 KBS 아나운서로 방송 생활을 시작했다. 2008년 퇴사 후 연기자로 다수의 드라마, 영화에 출연했고, 다양한 방송 활동 중이다. 수중 영상을 촬영하고 수중 전문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2024년 1월, 에세이 <이제 내려가 볼까요?>를 출간했다.
- 내 이름 걸고 추천하는 맛집
- [편집실에서]이름의 의미(2024. 03. 06 06:00)
- 2024. 03. 06 06:00 오피니언
- 홍진수 주간경향 편집장 이름이란 무엇일까요. 조금 더 나아가 이름이 남거나 사라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온 이름의 첫 번째 풀이는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물, 단체, 현상 따위에 붙여서 부르는 말”입니다. 두 번째 풀이는 “사람의 성 아래에 붙여 다른 사람과 구별하여 부르는 말”입니다. 국립국어원이 알려주듯이 이름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다른 사람(것)과의 구별’입니다. 한명 한명이 하나의 우주나 마찬가지인 사람을 다른 우주와 구분 짓게 하는 첫 번째 조건이 이름입니다. 그러니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시인 정현종이 시 ‘방문객’에서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표현한 ‘사람이 오는’ 절차 중 하나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결이 좀 다르긴 하지만 김춘수의 시 ‘꽃’도 이름의 중요성을 노래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오래전 이름이 사라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본에 끌려가 사도광산에서 일한 조선인 수백명이 아직 이름을 찾지 못했습니다. 주간경향 이번 호는 이들의 잃어버린 이름을 찾아 표지 이야기로 다룹니다. 2021년 12월 일본 정부는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추천하기로 했습니다. 앞서 2015년에는 군함도(하시마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사도광산은 예전부터 조선인이 강제동원 됐다고 알려진 곳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사도광산에 끌려간 뒤 사라졌는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한 조선인의 명부를 작성하기나 했는지, 작성했다면 숨기고 있는지조차 아직 모릅니다.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만 떠돕니다. 일부 명부를 찾아냈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일본 정부가 공식 확인을 하지 않는 이상 ‘카더라’ 수준에 머무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그 기간을 ‘16~19세기 중반’으로 한정했습니다. 조선인 강제노역 논란은 비껴가겠다는 속내가 보입니다. 주간경향은 일제강제동원위 위원으로 활동한 정혜경 박사가 20여 년간 추적해 작성한 사도광산 피해자 명단을 받아 공개합니다. 명단에 나오는 사람은 700명이 넘습니다. 이름뿐만 아니라 본적, 생년월일 등 더 자세한 인적사항도 있습니다. 정 박사는 한국의 자료와 일본의 여러 자료를 수집해 이들의 명단을 교차 검증했습니다. 이를 토대로 당시 사도광산에 동원된 조선인들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나이는 14세부터 48세까지이고 출신 지역은 주로 충남·북, 강원, 경기, 경북, 전남·북도 있습니다. 온갖 자료에 산재한 그들의 이름을 찾아 명부로 만드는 순간, 잊혔던 그들의 존재도 소환됐습니다. 700여명의 이름을 주간경향 지면에 꼭꼭 눌러 기록합니다. 그래도 숙제는 남습니다. 찾아낸 만큼의 이름이 아직 기록되지 않은 채 묻혀 있습니다.
- 편집실에서편집실에서
- [단독]찾지 못한 절반의 이름…‘사도’에 또 묻고 갈텐가(2024. 03. 04 06:00)
- 2024. 03. 04 06:00 정치
- 일본 사도광산 강제동원 조선인 1519명 중 747명 명단 확인 일본 니가타현 사도섬에 남아 있는 사도광산 모습/정혜경 제공 ‘747명 그리고 772명’. 이름이라도 ‘찾은 자’와 이름조차 모른 채 ‘남겨진 자’의 숫자다. 모두 1519명의 ‘사람’들은 1939년 2월부터 1945년 7월까지 충남, 충북, 전남, 전북, 강원, 경기 등의 고향을 떠나 ‘강제’로 배를 타야만 했다. 목적지는 이름조차 낯선 일본 니가타현의 작은 섬. 일본에서는 헤이안 시대 말부터 사금 산지로 명성을 떨쳤던 곳. 당시도 지금도 사람들은 이곳을 ‘사도’라고 불렀다. 섬에 도착한 사람들이 향한 곳은 광산이었다. 전범기업 미쓰비시광업(주)의 작업장이 그곳에 있었다. 낯선 곳으로 끌려온 이들은 익숙지도 않은 광부일을 해야 했다. 갱을 파고 금 등의 광석을 채굴하는 일이었다. 많은 이들이 죽었다. 진폐증이 대표적 사유다. 채굴 과정에서 ‘폭파’라는 일본말을 알아듣지 못해 사망하는 때도 비일비재했다. 운이 좋아 섬에서 탈출했거나 해방 이후 살아 돌아와도 탄광 생활의 흔적은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후유증으로 가족들 앞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광산 강제동원은 끝끝내 이들의 삶을 파괴했다. 사도는 결코 아름답거나 추억할 만한 공간이 될 수 없는 곳이었다. 조선인들이 일본 니가타현 사도섬에 있는 광산으로 징용 가는 길. 실선은 부산에서 니가타를 거쳐 사도로 가는 길. 점선은 원산에서 니가타를 거쳐 사도로 가는 길을 나타낸다. ‘사람’이 몇 명이나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간은 흘렀다. 한일 간의 건설적인 미래를 명분으로 아물지도 않은 상처는 덮였다. 비극도 잊히는 듯했다. 그런데 이 기억이 해방 반세기가 훌쩍 넘은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떠올랐다. ‘아름다운 일본’, ‘세계인들이 함께 지켜야 할 근대산업유산’의 상징으로 ‘사도’가 재등장했다. 강제동원 사실과 관련한 일본의 태도는 한결같다. “사실을 입증할 문서, 명단이 있으면 내놓아 보라”는 것이다. 자발적 참여로 왜곡하거나 동원 인원을 축소하려는 목적이다. 나라가 없던 조선사람들이 공적 문서를 만들 수는 없다. 사도 역시 마찬가지다. 공식적으로 조선인 동원 인원수나 명단을 밝힌 자료는 없다. 당시 사도에서 작업장을 운영한 미쓰비시광업(주)과 사도광업소는 온전한 자료를 남기지 않았다. 그나마 미쓰비시광업(주)이 출간하려 했던 책의 미완성 원고, 이른바 <사도광산사 고본> 845쪽에 ‘합계 1519명을 이입했다’는 문장이 남아있다. ‘이입’은 일제가 조선 사람을 동원할 때 사용한 용어다. 해당 사실을 통해 두 가지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사도광산에 최소 1519명의 조선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명확한 숫자가 기재된 만큼 이들의 신상을 확인하는 작업도 했을 것이란 추론이다. 그렇다면, 이를 기록한 자료가 어딘가 남아 있을 수 있다. 현재까지 일본 정부나 미쓰비시는 사도와 관련한 자료는 비공개 처리하거나 존재 자체를 언급하지 않는다. 결국, 이들이 누구인지는 파편화된 증언, 흩어진 기록을 그러모아 합치고, 대조해 밝혀내는 수밖에 없다. 이는 식민 수탈이라는 불행한 역사를 딛고 성립한 국가라면 반드시 책임지고 수행했어야 할 일이기도 하다. 국가를 대신해 이 일을 한 것은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이다. 사도와 관련해 공개된 모든 자료를 그러모아 일일이 이름을 찾았다. 그렇게 이름 일부라도 밝혀낸 사람이 747명이다. 이름은 존재에 대한 증명이다. 막연히 숫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닌 이들이 누군가의 아들, 형제, 남편, 아버지였음을 보여준다. 피해자 김종운, 피해자 남상옥, 피해자 도치경, 피해자 류지달, 피해자 문수병, 피해자 이청길 등이 일본이 그토록 내놓아보라고 말한 피해자들의 이름이다. 그리고 최소 772명이 남았다. 이름도 나이도 고향도, 왜 죽었고 어디에 묻혔는지조차 모른다. 가족이 한국에 생존해 있더라도 이들이 사도광산 강제동원 피해자임을 여태껏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광복 후 한국 정부가 시행한 강제동원 피해 조사에서조차 이들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다. 즉, 일본으로 강제동원 돼 현지에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밝혀낸 747명의 이름은 현재까지 공개된 모든 자료를 참고한 결과다. 이제 나머지 빈 공간을 채워야 할 것은 비공개 자료를 소장한 일본 정부와 이들을 관리했을 전범기업 미쓰비시다. 반일, 친일, 과거사, 미래 등 정치적 수사로 뒤범벅된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잊지 말아야 한다. 일제가 강제로 끌고 가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것은 기계나 동물이 아닌 ‘사람’이다. 검증 정 위원은 2004년부터 2015년 12월 31일까지 존재한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 지원위원회(이하 위원회)’의 조사과장을 지냈다.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조사, 연구, 대응 등을 모두 경험한 전문가다. 정 위원이 제작한 명부에는 피해자의 이름, 생년월일, 본적 등의 기본사항이 기재돼 있다. 정 위원은 이를 한국 측 자료, 일본 측 자료로 나눠서 교차 검증했다. 한국 측 자료로 참고한 것은 ‘대일민간청구권결정대장’, ‘일정시피징용징병자명부’, ‘왜정시피징용자명부’, ‘위원회 피해조사 명부’다. 대일민간청구권결정대장은 ‘청구권자금의 운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1971년 5월 21일부터 1972년 3월 20일까지 신고를 받아 보상금을 지급한 자료다. 이 자료에는 신고인의 인적 사항만 적혀 있어 피해자의 이름과 피해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런데 국가기록원이 소장한 별도의 대일민간청구권 신고자 명부에는 신고자와 피해자의 이름이 함께 적혀 있었다. 정 위원은 두 곳 모두에서 공통으로 나오는 신고자 7930명을 1차로 추렸다. 이렇게 확보한 7930명의 피해자 명단을 일본에서 나온 사도광산 관련 명단과 다시 비교했다. 그 결과 사도광산에서 사망한 8명의 이름을 찾았다. 소위 조선인 징용자 등에 관한 명부 중 순직산업인명부. 미쓰비시 사도광산이라는 이름을 명시한 유일한 일본 정부 소장 명부. 우측 상단에 미쓰비시 사도광산이 명확히 찍혀 있다./정혜경 제공 다른 자료를 검증하는 방법 역시 유사했다. 일정시피징용징병자명부에는 총 22만8724명이 수록돼 있다. 1953년 열린 제2차 한일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당시 정부가 전국 단위로 조사하고 도별로 취합한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다. 이 명부에서 사도광산 피해자 19명을 찾았다. 왜정시피징용자명부에는 총 28만5771명이 수록돼 있다. 1958년 열린 제4차 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제작됐다. 당시 노동청이 전국 단위로 신고를 받아 도별로 취합했다. 총 57명의 사도광산 피해자를 찾을 수 있었다. 가장 많은 피해자가 발견된 것은 위원회가 조사해 작성한 피해조사 명부다. 2005년 2월부터 15개월간 신고받은 21만8639건을 분석했다. 먼저 피해조사 의결서에 ‘사도광산’을 적시한 경우를 추려서 피해자를 확정했다. 또 사도광산이 위치했던 ‘니가타현’을 적은 경우를 추려내고, 작업장의 상세 주소를 확인해 사도광산 피해자인지 확인했다. 주소가 나와 있지 않은 때도 있었다. 이때는 그와 함께 강제동원 된 동행자 정보를 찾아서 사도광산 피해자인지 최종 판단했다. 피해자 명부를 보면 근거자료 항목 중 피해조사(동역자)라고 적힌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동행자를 통해 확인한 피해자다. 그 결과 위원회 명부에서는 총 224명의 사도광산 피해자 이름(동역자 포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 측 자료는 피해자 신고, 조사 등을 취합해 만들었다. 그나마 확인이 쉬운 편이다. 일본 측 자료는 애초에 이런 형태가 아니다. 파편화된 자료를 하나하나 확인해야 한다. 명단을 작성하기 위해 참고한 근거 자료만 총 15개다. 이 중 가장 많은 피해자가 확인된 것은 ‘조선인연초배급명부’다. 당시 사도광산에 끌려간 피해자들에게 회사는 담배를 지급했다. 담배는 노동의 고통을 잊게 하는 수단으로 어린아이에게도 지급했다. 이마저도 총 세 가지 버전으로 나뉘어 있다. 모두 확인해 최종적으로 495명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머지 자료도 유사한 검증 과정을 거쳤다. 일본 니가타현 사도광산으로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에게 회사는 담배를 지급했다. 사진은 담배를 지급한 내역을 기록한 ‘조선인연초배급명부’/정혜경 제공 한·일 양국 정부가 만들거나 소장한 것이 아닌 자료는 ‘기타 근거 자료’로 분류했다. 예컨대, 일본시민단체의 현지조사 자료도 있고 1943년 당시 일본 언론의 보도 등도 포함된다. 그 결과, 사도광산 피해자로 확정한 747명 대부분은 두 개 이상 문서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정체 명부를 통해 사도광산에 동원된 피해자들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우선, 나이다. 문서 중 일부에 피해자의 당시 연령이 표기돼 있어 확인이 가능했다. 이는 강제동원된 시점이 문서 속에 표기된 나이 보다 이를 수는 있어도 더 늦을 수는 없다는 의미다. 14세부터 40세까지 있다. 충남에서 강제동원 된 1924년생 이병기는 고작 18살에 현지에서 사망했다. 일부 학자들은 사도광산 노동자들은 동원이 아닌 자발적 지원으로 모였고, 대우도 좋았다는 주장을 한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명부 특기사항을 보면 ‘탈출’ 항목이 있다. 1943년 6월, 사도광업소가 작성한 보고서에 현장에서 탈출한 조선인 통계가 있었다. 1942년 3월 기준, 동원한 1005명 중 148명이 탈출했다는 내용이다. 사도광산은 섬이다. 사실상 도망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전체 동원자 중 14.7%가 목숨 건 탈출을 시도했다. 실제 탈출에 성공했던 사도광산 피해자 임태호씨는 “작업 상황이 열악하고, 위험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죽음을 맞닥뜨리는 일이었으므로 하루하루가 공포 그 자체였다”는 증언을 남겼다. 광업소 측은 이런 상황을 두고 ‘자유방종적이고 부화뇌동하는 조선인의 민족성 탓’이라고 했다. 광복 후 이들이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회사는 값싸게 부리던 숙련공이 빠져나가 광산이 타격을 입을 것을 우려했다. 조선인들에게 일을 강요했으나 응하지 않자 밥을 주지 않았다. 일본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강제동원할 때는 계획적으로 수송했지만 귀환은 책임을 지지 않으려 했다. 1945년 9월 1일에야 <조선인집단이입노무자 등의 긴급조치에 관한 것>이라는 지시 문서를 내려보냈는데 ‘귀환하라’는 원칙만 있을 뿐 언제, 몇 명을, 어떻게 수송하란 내용이 전혀 없었다. 구체적인 계획은 같은해 9월 12일에야 나온다. 피해자들이 자비를 들여 배를 구해 나오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이 얼마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명부에도 한계는 있다. 한국식 이름 세 글자가 모두 확인된 경우는 747명 중 584명이다. 나머지는 문서에는 있지만 이름을 적은 부분이 흐릿하거나 훼손돼 식별이 불가능하다. 이들 163명 중 2명은 창씨와 생년월일 등은 확인 가능하나 한국 이름을 알 수 없다. 그 외에는 이름의 한 자, 혹은 두 자만 식별 가능했다. 또 일본식 창씨를 다시 한국식 이름으로 재번역하는 과정에서 정확한 이름을 알 수 없게 된 사례가 있다. 이럴 때는 가능한 이름 모두를 표기했다. 불완전하다. 하지만 이름 일부라도 찾을 수 있었다면 상황이 나은 편이다. 나머지 772명은 존재 자체를 알 수가 없다. 일본이 모든 자료를 공개하고, 협력하지 않는 이상 현 단계에서 이들을 찾아낼 방법이 없다. 강제로 고향을 떠난 이들의 이름조차 돌아오지 못하는 곳이 ‘사도’다. 그럼에도 일본은 이곳을 전 세계인들이 함께 추억하고, 지켜야 할 세계유산으로 추천했다. 이들은 사도를 강제동원도 이름조차 돌아오지 못한 772명의 사람들도 없는 곳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미래 일본은 근대화 흔적을 간직한 곳들을 몇 개의 유산군으로 묶어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고 있다. 시작은 ‘메이지산업유산’이다. 명칭부터 의도가 있었다. 메이지는 일왕 무쓰히토의 연호다. 자연스럽게 메이지 시대라고 하면 기간이 한정된다. 1867년부터 1912년까지다. 1938년부터 시작한 강제동원 역사가 자연스럽게 빠진다. 결국, 2015년 세계유산 등재에 성공했다. 하시마섬, 이른바 군함도가 그 대표적 사례다. 일본은 주변국의 반발을 의식해 군함도 강제동원 역사를 소개하겠다고 했다. 이 약속은 지금까지 지켜지지 않았다. 일본이 다음 목표로 설정한 것은 사도섬 내에 있는 광산 유적의 세계유산 등재다. 군함도처럼 기간을 에도시대(1603년~1868년)로 한정하고, 사도섬만의 금 제련 기술을 강조해 이미 2023년 세계유산위원회에 신청서를 제출했다.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 곳곳에 세운 다양한 형태의 사적지 안내판과 관광지도판/정혜경 제공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 여부는 올해 7월 인도 뉴델리에서 결정된다. 세계유산위원회가 회의를 열고, 합의하는 방식이다. 세계유산위에는 2024년 기준 총 21개국의 위원국이 있다. 한국은 2027년까지를 임기로 지난해 위원국이 됐다. 일본 역시 2025년까지 위원국이다. 각국 대표가 전문가가 아닌 만큼 세계유산위는 자문기구를 별도로 둔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이코모스)다. 이코모스는 올해 5~6월 사도의 세계유산 등재 여부에 대한 의견을 최종 권고할 예정이다. 산업유산 전문가인 부산 경성대 강동진 교수는 “이코모스의 권고는 전문가들의 결정인 만큼 그대로 반영되는 경우가 많다”며 “어떻게든 이 권고에 ‘강제동원을 포함한 사도섬 전체 역사(Full-History)를 밝히라’는 내용이 들어갈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사도광산 문제는 외교부 공공문화외교국 유네스코과가 담당한다. 외교부 관계자는 “다양한 외교채널로 노력하고 있지만 이코모스 쪽과의 접촉 등 구체적 전략은 밝힐 수 없다”며 “우리 정부 입장은 강제동원을 포함한 전체 역사가 반영돼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해당 논리대로라면 적어도 사도광산에 강제동원된 조선인 규모, 노동실태, 피해 사실 등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이코모스나 위원국들에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해 묻자 외교부 관계자는 이번에는 “세계유산위는 유산과 관련된 이야기나 사회적 가치 등을 보지 역사 판정자는 아니다”고 말했다. 최소한 요구를 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원하는 바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 이대로면 설사 일본이 사도광산 강제동원 역사를 반영한다고 해도 정부가 내용을 검증할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일본이 군함도 강제동원 역사와 관련한 합의를 왜 무시하고 있는지 정부 스스로 돌아볼 때다. 사도광산이 세계유산이 된다면 적어도 확인한 747명과 돌아오지 못한 772명의 이름까지 반드시 밝혀서 새겨져야 한다. 사도광산 강제동원 피해자 747명 명부는 아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도광산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
- 표지 이야기
- [내 이름 걸고 추천하는 맛집](17)김도진 | 30년 세월 은행원 지갑과 마음을 연 냉목삼(2024. 02. 28 06:00)
- 2024. 02. 28 06:00 사회
- 서울 을지로 ‘전주집’ 서울 입정동 시절 전주집 외관. 1989년부터 2021년 말까지 영업했다. /김도진 제공 직접 고기를 썰고 있는 홍성준 대표의 모습. 오른쪽이 부인 박연숙씨다. 김도진 제공 1989년 4월에 개업했으니 벌써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서울 중구 입정동 청계천변 청소년회관 맞은편에 자리한 전주집은 필자가 행원 시절부터 다니기 시작한 오래된 식당이다. 1991년 2월 대리 승진을 했을 때부터 직급별 승진 시에 동료들과 함께 회식하던 곳이다. 은행장 취임 후 모 언론사의 ‘맛있는 만남’ 코너에서 필자를 초대해 맛집을 소개한 적도 있는데, 그때도 나의 선택은 어김없이 전주집이었다. 깨끗한 집도 아니고 비싼 집도 아니지만, 편안하게 먹을 수 있는 푸근한 집이라는 점이 오랜 세월 함께하면서 느낀 전주집의 매력이다. 기업은행은 일 년에 두 번 인사를 한다. 전국적으로 3000명에 가까운 직원이 승진과 이동 등의 발령을 받게 된다. 그러면 은행 주위의 식당은 기업은행 직원들로 늘 붐비곤 했다. 그중에서도 전주집은 기업은행 직원들이 가장 애용하던 단골 식당 중 하나였다. 부담 없는 가격에다 많은 직원이 동시에 들어갈 수도 있었으니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기업은행 직원들이라고 하면 주인장 부부가 그리도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해 주셨으니 자주 들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또 직장인들의 회식이라는 게 당시만 해도 1차를 마치면 2차로 이어지는 게 ‘국룰’이었다. 을지로3가 주변에 호프집까지 즐비해 전주집은 회식 장소로선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은 ‘힙지로’라고 불릴 만큼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거리가 됐지만, 그때만 해도 을지로는 그저 옛날 운치가 넘치는 정겨운 뒷골목이었다. 도기 가게, 인쇄공장 등 낙후된 골목길의 모습이 어우러져 시골에서 올라온 필자에게는 묘한 동질감마저 선사해 주던 곳이었다. 홍성준 대표와 부인 박연숙씨가 필자의 사진이 담긴 기사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왼쪽). 전주집의 대표 메뉴 을지로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본론으로 돌아와서 전주집 얘기를 좀 해볼까 한다. 전주집은 삼겹살을 불판에 올린 다음 콩나물과 부추를 같이 데워 먹는 맛이 일품이다. 파무침에 달걀을 섞어 먹으면 금상첨화다. 마지막에 콩나물과 부추 그리고 김치와 남은 고기를 볶아 볶음밥으로 먹으면 화룡점정이 따로 없다. 전주집은 생고기를 급랭시켜 작업한다. 굽기도 쉽고 부드러우면서도 고소한 맛이 일품인 냉동 목삼겹살을 내놓을 수 있는 비결이다. 홍성준 대표의 얘기를 빌리면 초기에는 냉동된 고기를 직접 손으로 얇게 썰어야 했단다. 팔과 어깨가 무척 아파 병원 치료를 받으면서 썰었다고 한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간다. 모두가 힘들게 살던 시절이었고, 어려운 시기였다. 지금은 육절기를 사용하니 한결 편해졌다고 한다. 전주집은 초기에는 단층이었다. 얼마 뒤 증축해 2층에선 비교적 여유 있는 식사도 가능해졌다. 당시 2층에서 서빙하던 한 아주머니가 계셨는데, 갈 때마다 필자를 알아보고는 친절하게 응대해 주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입정동 시절을 뒤로하고 전주집은 재개발지구로 편입돼 2021년 12월 31일까지 영업하고선 문을 닫았다. 다행히 2020년 11월 옛날 가게에서 멀지 않은 수표동에 마련해 운영 중이던 2호점이 지금은 전주집의 명맥을 잇고 있다. 수표동에 새 둥지를 튼 것 역시 기업은행 본점과 멀지 않은 곳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홍 대표의 생각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수표동 인근 지역 역시 한때는 전형적인 인쇄골목이었다. 지금은 완전히 바뀌어 ‘힙한’ 공간이 됐다. 외국인들도 종종 눈에 띈다. 현재의 서울 수표동 전주집 입구 /김도진 제공 예전 가게가 2층이었던 것과 달리 수표동 전주집은 3층이다. 옥상에 루프톱까지 마련해 실제로는 4층과 같은 효과를 내고 있다. 여름이나 가을이면 옥상의 지붕을 열어 놓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운치 있는 식사가 가능하다. 입정동 시절이 전형적인 노포 느낌이었다면, 수표동 전주집은 요즘 세대의 젊은 감성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깨끗한 실내 인테리어에다 공간도 넓어 고객들이 여유롭게 식사를 할 수 있다. 서울의 밤을 만끽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특히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명소가 됐다. 문득 옛날 생각이 떠오른다. 개업했다며 홍 대표의 부인 박연숙씨가 직접 떡을 들고선 은행을 찾아왔다. 이후로도 개업 기념일이 되면 박씨는 은행 부서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떡을 건넸다. 그는 나를 볼 때마다 그때 너무 고마웠다는 인사를 빼놓지 않는다. 주스 한 잔을 내밀며 격려를 전했다나 뭐라나(워낙 오래전 일이어서 사실 필자는 기억이 뚜렷하지 않다). 심지어 당시를 회상하다가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하니 필자로서는 그저 과분할 따름이다. 주인장 부부 모두 천성이 착한 분들이다. 그들을 알게 돼 직장생활의 애환을 달랠 수 있었고, 은행장이라는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생각하니 보통 인연이 아니다 싶다. 퇴임 후에도 새로 이전한 수표동 가게를 가끔 찾는다. 갈 때마다 항상 손님이 가득하다. 활기 넘치는 분위기에 덩달아 힘이 나고 기분이 좋아진다. 식당 입구와 손님 대기 장소에 걸려 있는 필자의 사진을 보면 열정적으로 동분서주하던 현역 시절이 새삼 그리워지기도 한다. 어느 정도 기틀을 잡은 가게에 아들마저 힘을 보태고 있으니 이제 더욱 번창할 일만 남았다. 오랫동안 손님들과 함께하는 전통과 역사의 전주집이 되기를 바란다. 주인장 부부의 건강을 기원한다. 필자는 1959년생으로 1985년 IBK기업은행에 입행했다. 전략기획부장, 부행장을 거쳐 2016년 12월 제25대 은행장에 취임했다. 2019년 12월 퇴임했고, 현재 한국평가정보 이사회 의장과 법무법인 세종에서 고문직을 맡고 있다. <내면을 깨우는 사색>(2022), <내 인생의 나침반>(2023) 등의 서평 모음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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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이름 걸고 추천하는 맛집](16)김현정 | 서울 방배동 ‘미미치킨’(2024. 01. 22 05:30)
- 2024. 01. 22 05:30 문화/과학
- 맛있고 아름다운 옛날식 동네치킨집 밤이 내리면 네온등 아래 치킨 냄새가 자욱하다. 바람 좋은 계절엔 가게 앞에 간이테이블도 펼쳐진다. /김현정 제공 이름은 ‘미미’. 의미는 알 수 없다. 40년 넘게 이어온 이름이라고 했다. 20년 전 가게를 인수한 지금의 주인 부부 역시 한참 전부터 내려온 가게 이름을 자신들 이름인 양 순순히 받아들였다. 치킨집인 것을 감안하면 미미(味味), 맛을 뜻하는 한자가 두 번 들어간다고 짐작할 뿐이다. 그렇다. 맛있고 또 맛있는 곳. 이것은 동네 치킨집 이야기다. 해 질 무렵, 서울 지하철 7호선 내방역 1번 출구를 빠져나오면 이미 그곳이 멀지 않음을 직감한다.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냄새만 맡아도 저절로 몸이 반응하는 음식. 코끝을 자극하는 고소한 냄새를 따라 열 걸음만 가면 눈앞에 그곳이 나타난다. 빨강, 파랑 네온등이 켜진 ‘양념치킨’이라는 글자와 그 아래 분주하게 치킨을 튀기고 있는 주인장의 모습. 자 이제 다 온 것이다. 누군가는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서울 방배동, 이른바 ‘부자 동네’라는 서초구 한복판에 촌스러운 옛날식 네온간판이라니. 손바닥만 한 가게 앞 켜켜이 쌓아둔 플라스틱 의자와 허름해 보이는 실내 정경이 의심스럽다. 레트로가 유행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마주한 이 ‘레트로’는 인위적인 레트로가 아니다. 여긴 그냥 ‘옛날식’ 치킨집 아닌가. 문 앞에서 망설이는 사이 주인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속는 셈 치고 여길 들어가? 말아? 장면 1 2011년 가을. ‘미미치킨’ 에서 만화책을 읽고 있는 일곱 살 아들. 올해 고3 수험생이 됐다. /김현정 제공 2011년 가을, 허름한 운동복 차림의 아저씨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앞장세운 건 유치원생 꼬마 하나. ‘늘그막에 얻은 아들인가?’ 새치가 허옇게 내려앉은 아비는 ‘프라이드’ 하나에 생맥주 한 잔을 앞에 두고 치킨 살을 바르느라 분주하다. 만화책에 정신이 팔린 아들 입에 연신 고기를 넣어주고 있었던 것. 가게 사장님 눈엔 그게 그리 짠~ 해 보였다고 한다. ‘애 엄마는 어딜 가고? 혹시 혼자서 키우나?’ 그러고 보니 무릎 나온 운동복이 눈에 들어왔고, 표정도 어딘가 청승맞아 보이는 게 아닌가. “아유, 애가 이렇게 책을 좋아하면 나중에 큰사람 되는데….” 강냉이를 평소보다 수북이 담아내며 말을 걸어봤지만 아이 아빠, 그냥 씩 웃고 말더란다. 그리고 며칠 뒤, 청승맞고 짠했던 이 부자는 예상치 못한 일행과 함께 가게에 들어섰으니…. “제가 출장 간 사이 애 아빠가 여길 왔는데, 사장님이 너무 잘해주셨다면서요?” 한바탕 마주 웃으며 긴 인연은 시작됐다. 만화책 읽으며 살코기 받아먹는 아들과 그 앞에서 맥주잔 부딪히는 부부의 모습. 이제 고등학생이 된 아이는 자주 보이지 않았고, 티격태격하며 치킨을 뜯던 부부는 집에 갈 때면 아들 몫을 따로 챙겨 돌아가곤 했다. 장면 2 2019년 봄. 한없이 풀어져 흐늘거렸던 그때의 마음을 SNS에 자랑했다. /김현정 페이스북 캡처 2019년 봄. 그런 날이 있다. 무언가에 의해 마음이 무너진 날. 종일 괜찮은 척 버티느라 너덜너덜해진 몸을 이끌고 퇴근하는 길. 왠지 나도 그게 해보고 싶었다. 월급날 치킨 한 마리 사 들고 흔들흔들 골목길을 올라갔다던 그 시절 아버지들 정취 같은 것 말이다. 내방역 앞 빨강과 파랑 네온사인 간판을 보며 홀리듯 그곳에 들어갔다. “사장님, 저 프라이드 하나 포장이요.” 한구석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나에게 여주인이 말을 걸었다. “생맥주 한 잔 줄까요?” 어느새 탁자 위엔 맥주잔과 강냉이가 놓였고, 공짜 맥주 한 모금 꼴깍 들이키자 마음이 왈랑왈랑해졌다. 이게 뭐라고 왜 눈물은 삐져나오는지…. ‘오늘 하루 나 참 잘했다.’ 흔들흔들 노래를 흥얼대며 골목길을 올라갔다. 그 시절 아빠의 마음처럼. 이쯤 되면 궁금할 테다. 당신네 추억은 짐작하겠으나 맛은 어떻길래 이렇게 호들갑이냐고. 정말 맛집이기는 한 것이냐고. 맛의 경지는 20년 넘는 꾸준한 시간이 보증한다. 본식에 앞선 곁들임부터 내공이 엿보인다. 채 썬 양배추로 쌓아 올린 봉긋한 언덕 위에 흩뿌린 케첩과 마요네즈의 조화. 그렇다. 옛날 경양식집에서 봤던 바로 그 샐러드다. 독일 비어홀의 풍경이 인쇄된 벽지 아래서 우리 가족은 누가 먼저 이 맛있는 언덕을 허물어버릴 것인가를 늘 고민하곤 한다. 핵심은 그러나 역시 치킨이다. 퍽퍽살과 쫀득살이 제대로 섞이도록 공들여 자른 단면과 매일 바꾸는 신선한 기름, 짜지 않게 염지한 살코기가 3박자로 풍성한 조화를 이뤄낸다. 감자를 좋아한다면 ‘브라보’를 외칠지니, 따로 주문하지 않아도 치킨 위에 웨지감자와 프렌치프라이가 수북하다. 양념보다는 프라이드를 추천한다. 아무것도 찍지 않은 본연의 맛도 좋지만, 함께 나오는 후추소금에 콕, 때론 기분에 따라 빨강 양념 소스에 꾹 눌러 찍으면 각자 개성 있는 맛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신의 한 수! 유튜브 요리 채널에서 힌트를 얻은 사장님이 개발한 ‘매운 소스’가 있다. 경험하고 싶다면 고추치킨을 주문할 것. 청양고추가 송송 박힌 진갈색 간장 소스가 프라이드 옆에 등판한다. 끈적한 소스에 치킨을 콕 찍으면, 알싸한 매운맛과 단맛이 동시에 감돌아 차가운 맥주를 절로 찾게 된다. ‘치킨 한 입+맥주 한 모금’의 무한루프가 시작되고야 만다. 감자튀김 수북한 프라이드를 필두로 ‘좌 샐러드’ ‘우 매운 소스’가 좌정했다. 이 순간 왕이 부럽지 않다. /김현정 제공 치킨이 지겹거나 이미 배가 부른 상태라면 철판에 지글지글 구워 나오는 닭똥집을 주문해도 좋다. 큼직한 통마늘과 고추를 함께 볶은 쫄깃한 구이가 튀긴 음식을 싫어하는 이들에게 제격이다. 통째로 구워 나오는 개코먹태 역시 마요네즈 소스와 함께 맥주를 부르는 요물 중 하나. 개코의 어원을 알 길은 없지만, 큼직한 그 자태가 과연 ‘개코’다운 태도와 맛을 뽐낸다. 철판에 구워나오는 닭똥집. 알싸한 고추의 향이 맥주를 부른다. 냄새? 없다! /김현정 제공 소중한 이들을 만났을 때, 오래된 친구와 기분 좋게 취하고 싶을 때, ‘미미치킨’은 나에게 빠지지 않고 가야 하는 장소가 됐다. 한껏 폼을 잡느라 값비싼 식당에서 밥을 먹고도 마무리는 이상하게 그곳이었다. 부질없는 일들로 속앓이할 때도 미미의 문을 열고 난데없는 어리광을 부려왔다. “사장님, 저 오늘 회사 관뒀어요. 잠깐 쉬려고요.” 괜찮다는 토닥임, 말없이 씩 웃어주는 주인 부부의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야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화려하지 않지만 한결같은 미미처럼, ‘잠시 멈춰서도 괜찮다고, 천천히 가도 된다고’ 위안받는 밤. 이름은 ‘미미’. 의미는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이렇게 믿는다. 미미(味美), 맛있고 또 아름다운 곳. 다정함으로 마음의 허기를 채우는 장소. 치킨 한 마리, 생맥주 한 잔으로 굳어진 마음이 녹아내리는 나만의 맛집. 필자는 2003년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거쳐 2013년부터 JTBC 뉴스룸에서 <앵커브리핑>을 썼다. 앵커브리핑 종영 이후에는 KBS <뉴스9>에서 이소정 앵커와 호흡을 맞춰왔다. 3년 전부터는 백석예술대학교 극작과에서 학생들과 만나고 있다.
- 내 이름 걸고 추천하는 맛집
- [내 이름 걸고 추천하는 맛집](15)오수잔나 | 마음까지 데우는 프랑스식 집밥(2023. 12. 26 07:00)
- 2023. 12. 26 07:00 문화/과학
-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파란대문’ 식당 ‘파란대문’에 들러 메뉴를 앞에 두고 포즈를 취한 오수잔나 고문 /오수잔나 제공 거의 한평생을 수도(首都)에서 살았다. 미국 워싱턴에 살았고, 한국에 와서도 서울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나라가 다른 만큼 두 곳은 음식도 천지 차이다. 엄마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이고, 아빠는 독일과 폴란드계 미국인이다. 엄마가 어린 시절부터 먹어온 음식과 아빠가 어린 시절부터 먹어온 음식은 달랐다고 한다. 두 분의 결혼으로 인해 유럽의 서로 다른 음식문화가 우리 집 식탁에서 한데 섞인 셈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엄마가 원하는 음식과 아빠가 원하는 음식은 수시로 달랐다. 그 덕분에 매번 풍성한 식탁 앞에서 뭘 먹을까 선택해야 하는 즐거운 고민에 빠지곤 했다. 게일어(아일랜드 제1공용어)나 독일어, 폴란드어를 할 줄 몰라도 어릴 때부터 아일랜드 전통 음식이나 독일, 폴란드 음식에는 꽤 익숙한 편이었다. 미국을 떠나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엄마의 호박파이와 고구마파이, 그리고 그 위에 살짝 녹아 있는 마시멜로가 많이 그립다. 미국 워싱턴 조지타운대학교에서 미국학을 전공하던 중 1980년 평화봉사단(The Peace Corps)의 일원으로 봉사활동을 하려고 한국에 왔다. 어쩌다 보니 한국에서 취직하고 결혼도 했다. 요즘 기준으로는 아이도 둘이나(!) 키웠으니 지금껏 잘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사실 싱글맘으로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란 게 녹록지 않다. 나 역시 직장생활하며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평일 저녁에는 아이들 식사 챙기는 일이 늘 골칫거리였다. 아침에는 직접 구운 토스트나 샌드위치로 어떻게든 버텼지만, 헐레벌떡 퇴근해 제대로 저녁을 차리는 일은 간단치 않았다. 운 좋게도 우리 집 살림을 살뜰히 살펴주시고, 아이들에게 맛있는 저녁 식사까지 만들어주시는 아주머니를 만나 워킹맘 생활의 큰 시름을 덜 수 있었다. 식당 ‘파란대문’ 내부에서 석파정 서울미술관이 창문 너머로 보인다. 오수잔나 제공 주말이 되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자주 산책을 했다. 봉사활동으로 한양도성 길라잡이를 하며 문화재 자문위원을 맡고 있던 내게 걷기란 ‘누워서 떡 먹기’ 같은 것이었다. 지치지도 않고 3~4시간쯤은 거뜬히 걸을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산책하러 나갈까?” 하고 물으면 아이들이 “무서워”라며 농담을 할 정도였다. 주말 산책은 나와 아이들 사이의 오랜 습관이자 암묵적인 관습과도 같았다. 주말이면 나는 아이들하고 동네를 산책하며 터놓고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그동안 걸었던 도성길이나 궁궐길이 셀 수 없이 많다. 그 과정에서 음식이 어찌 빠질쏘냐. 주중에 학교 급식과 아주머니가 만든 한식만 주로 먹던 아이들에게 이국적인 음식을 먹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동네를 산책하며 가게를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천편일률적인 프랜차이즈 음식점보다는 개성이 넘치는 소규모 개인 식당을 선호하는 편이다. 산책을 하다가 지칠 때쯤 되면 눈여겨봐 둔 음식점으로 향한다. 지금 소개할 서울 종로구 부암동의 ‘립 스테이크’는 그중 한곳이다. 건식으로 숙성시킨 스테이크가 어찌나 맛있던지 그날 이후 나와 아이들은 이 음식점의 ‘찐’ 팬이 되고 말았다. 한국인들에게 스테이크란 특별한 날 먹는 음식이다. 뭔가 의미부여를 하게 된다는 뜻이다. 미국인들에게 스테이크는 사뭇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고향에서 먹던 집밥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식당 ‘파란대문’ 입구. 가게 이름처럼 파란 문이 시그니처다. 오수잔나 제공 단골이 된 우리는 갈 때마다 셰프 내외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어느새 자연스레 서로 안부를 묻는 이웃이 됐다. 몇 년 전 그 셰프한테 내 고민거리를 털어놓은 적도 있다. 당시 고3 엄마였던 나는 수능을 보러 갈 아들의 점심 때문에 큰 고민을 안고 있었다. 베테랑 전업주부들도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수능 도시락을 어떻게 싸서 아들 손에 들려보내야 할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닌 상태였다. 그 얘기를 들은 셰프가 흔쾌히 자신이 직접 수능 도시락을 싸주겠다고 나서는 것 아닌가. 특급셰프가 정성스레 만든 소고기볶음밥과 파인애플 간식을 들고 수능 시험장으로 들어선 아들은 문제도 잘 풀었다. 흔쾌히 남의 집 아들 수능 도시락을 만들어준 셰프를 생각하면 지금도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재료의 수급에 따라 메뉴가 바뀔 수도 있기 때문에 칠판에 메뉴를 적어둔다. 오수잔나 제공 그렇게 특별한 인연을 맺은 ‘립 스테이크’였는데 어느 순간 셰프의 건강 문제로 문을 닫고 말았다. 주말 산책을 할 때마다 그리 허전할 수가 없었다. 다른 곳도 가봤지만 한국에서 먹는 서양 음식은 대부분 거기서 거기였다. 이탈리아 음식점이 대세였고, 어딜 가나 비슷한 맛이었다. 메뉴도 비슷했다. 이탈리아에 가면 지역마다 정말 다양한 식재료와 메뉴가 있는데, 한국에서 먹는 이탈리아 음식은 거의 동일했다. 어디에서나 먹을 수 있는 그런 서양 음식 말고, 그 식당만의 독특한 맛과 개성을 자랑하는 음식을 우리 가족은 찾고 있었다. ‘립 스테이크’를 향한 그리움이 더 커져만 갔다. 희소식이 들려왔다.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한 셰프가 부암동 석파정 건너편에 있는 ‘파란대문’이라는 가게를 지난해 인수했다는 소식이었다. 앞치마를 둘러메고 다시 주방에 선 셰프를 보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우리 가족은 여지없이 또 ‘파란대문’의 단골이 됐다. ‘립 스테이크’가 스테이크 요리 중심이었다면 ‘파란대문’은 프랑스식 집밥 전문이다. 점심, 저녁의 세트 메뉴로 식전 빵인 포카치아, 그린 샐러드, 메인 요리, 와인이나 맥주 혹은 음료수 중 한 가지가 함께 나온다. 메인 요리는 스텍아쉐(흔히 우리가 아는 햄버거스테이크)와 머스타드 디종 소스, 잠봉 스테이크와 처트니 소스, 치킨 스테이크와 치미추리 소스, 해산물 파케리 파스타 등 모두 4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그러고도 가격은 1만8000원이다. 서울 시내에서 누리는 호사가 아닐 수 없다. 잠봉 스테이크와 처트니 소스 /오수잔나 제공 되도록 인스턴트 소스나 시판 재료를 사용하지 않으려는 점도 이 식당의 특징이다. 매일 포카치아, 치아바타, 피아디나 3종류의 빵을 구워낸다. 돼지고기를 숙성해 잠봉(돼지다리살로 얇게 저민 햄)을 직접 만든다. 양파와 파프리카를 캐러멜색이 나도록 볶아 졸인 처트니 소스도, 치킨 스테이크를 재울 때 사용하는 치미추리 소스도 모두 주방에서 직접 만든다. 스텍아쉐 요리에는 주로 그레이비 소스를 곁들이지만, 혼자 주방을 보기 때문에 고기 육수로 그레이비 소스까지 만드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해 머스타드 디종 소스로 대체했다고 한다. 셰프의 고집과 애정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러한 정성 덕분인지 여기서 음식을 먹으면 미국에 살 때 먹던 집밥 느낌이 난다. 건강 문제로 일을 중단했던 터라 더 그랬는지 모르지만, 셰프는 주방으로 돌아오면서 오래 먹어도 속이 편안한 맛을 추구하겠다고 선언했다. 그게 ‘파란대문’의 콘셉트가 됐다. 어떻게 생각하면 맛이 조금 밋밋하다 싶을 수도 있는데, 식사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속이 더부룩해본 사람들은 안다. 고기를 먹은 후에도 속이 편하고, 입안이 마르지 않는 데서 오는 포만감과 안도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치미추리 소스에 재운 치킨 스테이크 /오수잔나 제공 지난 10월 아들이 결혼했다. 예전처럼 매주 셋이 함께 동네 산책을 할 수는 없게 됐다. 딸은 여전히 나와 함께 살고 있어 종종 산책길에 나선다. 굳이 이곳에서 식사를 하지 않더라도 가끔 ‘파란대문’에 들러 인사를 건넨다. 그 정도로 익숙한 식당이다.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그래도 엄마가 만들어준 음식이 최고란다. 딸은 엄마표 프렌치토스트, 아들은 그릴드 치즈 샌드위치를 소울 푸드로 꼽는 데 주저함이 없다. 어디까지나 그건 아이들 생각이고 엄마인 나로선 남이 만들어준 음식이 가장 맛있다. 이를테면 ‘파란대문’ 음식이 내겐 바로 엄마표 집밥이다. 필자는 1958년 미국에서 태어나 자랐다. 조지타운대학교에서 미국학을 전공한 후 1980년 평화봉사단으로 경남 사천의 한 보건소에서 일했다. 이후 김덕수 사물놀이패에 연구생으로 입단했다가 해외 공연 매니저로 약 12년간 근무했다.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등 다양한 매체에서 에디터로 10년간 일하기도 했다. 2005~2006년 남이섬 교육문화원 원장을 맡았고, 2006년부터 지금까지 대성그룹에서 고문을 맡아 회장 보좌 업무를 하고 있다. 서울 KYC한국청년연합 도성길라잡이(해설사), 우리문화숨결 궁궐 길라잡이를 맡으며 한국의 전통문화유산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도 함께하고 있다.
- 내 이름 걸고 추천하는 맛집
- [내 이름 걸고 추천하는 맛집](14)김주영 | 음식에 담긴 놀라운 치유의 힘(2023. 12. 04 07:00)
- 2023. 12. 04 07:00 문화/과학
-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지오쿠치나 입구 /김주영 제공 경기 성남시 ‘지오쿠치나’ 저는 가정의학과 의사입니다. 한때 큰 병원에서 열심히 진료도 보고, 연구도 하면서 살다가 지금은 지방간질환 분야의 디지털 치료기기를 만들어보고자 회사 생활을 열심히 하는 중입니다. 예전 병원에서 암 생존자 클리닉과 비만 클리닉을 담당했습니다. 건강검진센터 상담도 맡았군요. 어느 클리닉에 가든 제가 듣는 많은 질문은 “뭘 어떻게 먹어야 하나요?”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염분은 적게, 정제된 당분 섭취를 줄이고 과다한 포화지방 섭취를 줄이면서 매 끼니 채소는 골고루 드시라는…. 무슨 질환을 앓든, 설사 병이 없더라도 건강한 음식의 구성은 이처럼 대개 비슷하지요. 건강한 음식은 분명히 장기적으로 우리를 건강하게 만들고 질병에 걸릴 확률을 줄여줍니다. 예방의 효과가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돼 질병예방과 건강증진이란 부분을 새롭게 배우면서 환자들을 전인적으로 대하는 방법과 영양 및 운동의 중요성을 깨우쳤습니다. 대부분의 환자는 섭생과 함께 어떻게 운동해야 건강해지는지를 물었습니다. 제가 만나는 환자들이 10년 뒤, 20년 뒤에도 정말 활력 있고 건강한 삶을 영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진심을 담아 제가 가진 모든 지식을 쏟아부었습니다. 10년여의 세월이 흘렀고, 나름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답변을 내놓을 정도는 됐습니다. 그럼에도 “음식이 과연 약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미국은 모든 음식 하나하나를 쪼개 분석합니다. 한국도 따라갑니다. 총칼로리가 얼마인지부터 시작해서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포화지방, 염분, 콜레스테롤, 단순 당류, 미량 영양소 등으로 분해한 영양 피라미드와 영양 권장표에 따라 이렇게 먹어라, 저렇게 먹어라 하는 식으로 국가 차원에서 사람들에게 권장합니다. 문화와 사회적 환경 및 전통이 어우러진 식사의 개념에 건강이 결합하면서 음식은 영양소로 환원됐으며, 나아가 ‘치료제’ 같은 개념으로 변질하고 말았습니다. 음식을 영양소의 조합으로 보는 환원주의가 만연하고 건강기능식품과 비타민, 미네랄 등 시장이 커진 배경입니다. 음식을 낸다는 것은 그러나 영양소를 단순히 공급하는 행위를 넘어섭니다. 일종의 치유와 사회적 연결고리를 만들어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음식을 통해 문화를 맛보기도 하지요. 그 과정에서 따라오는 미각의 즐거움은 덤이자, 인생을 행복하게 이끄는 핵심요소입니다. 3년 전 둘째가 좀 많이 아팠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음식에 대해 신경을 쓰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면역력이 떨어지지는 않을까, 영양소는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을까? 식사를 잘해야 몸이 잘 이기고 버틸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각종 채소를 데치거나 삶아 비빔밥을 만들었고, 음식에 아주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치료로 인해 구역감이 생기면서 음식을 토할 때가 많았습니다. 체중이 10㎏ 가까이 빠졌어요. 그럴 때마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걱정만 커졌지요. 정기적인 입·퇴원을 반복하던 어느 날, 아이한테 물었습니다. 이따 퇴원하면 뭐가 먹고 싶냐고. 병원에서 나오는 밥은 절대 안 먹는다고 해서 그날은 둘 다 아침과 점심을 쫄딱 굶은 터였습니다. 퇴원하기만을 기다렸는데 정말 힘도 들고 배도 고팠습니다. 그때 들려온 아이의 대답. 맛있는 이탈리아 음식이 먹고 싶다더군요.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30분. 여는 장소가 있는지 폭풍 검색에 나섰습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의 ‘지오쿠치나’라는 곳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영업 중이라고 했고, 평점도 좋아 일단 그리로 가야겠다 싶었습니다. 입구가 정말 다른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피자 굽는 냄새와 인테리어가 잘 어우러져 들어가기만 해도 하루의 배고픔과 피로가 없어질 듯한 환상에 빠져들었습니다. 또한 따뜻한 벽돌 느낌의 아기자기한 소품들은 보기만 해도 사람을 따스하게 위로하고 행복해지는 느낌을 주더라고요. 메뉴를 보다가 먹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세 가지를 골랐습니다. 리코타 치즈를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데 이것과 채소의 조합이 환상적이었습니다. 원래 가장 만들기 어려운 요리 중 하나가 샐러드잖아요. 그 집 샐러드는 드레싱과 채소가 잘 어울리면서 치즈와 하나되는 느낌을 선사했습니다. 오랜만에 맛있는 샐러드를 먹으니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까지 좋아졌어요. 샐러드 /김주영 제공 내친김에 ‘멜란자네’란 요리가 궁금해 시켜봤습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가지 위에 라구소스와 바질, 그리고 치즈를 곁들였는데 정말 부드러우면서도 달콤한 토마토의 향과 바질향이 환상적으로 잘 어울렸어요. 멜란자네 /김주영 제공 마지막으로 여기 시그니처 메뉴로 불리는 ‘지오크레마’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화덕 파스타인데 크림소스가 매콤해 전혀 느끼하지 않았어요. 지오크레마 /김주영 제공 아이가 평소보다 1.5배 정도는 먹었던 듯합니다. 그러면서도 속이 불편하다거나 소화가 안 된다는 소리 한번 안 하더군요. 오랜만에 잘 먹는 모습을 보니 엄마로서 참 행복하고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날 음식은 제게 너무 큰 행복을 가져다줬습니다. 음식을 영양소로 분해해서 내린 결론은 아니었습니다. 식당의 입구부터 분위기, 향, 맛에 이르기까지 뭐 하나 모자란 게 없었습니다. 물론 음식을 먹기 전의 특수한 상황이 중요하게 작용했음을 부인하긴 어렵겠지요. 어쨌거나 그날 그곳에서의 음식은 지금까지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아이가 오랜만에 즐겁게 많이 잘 먹었고, 행복해했고 전혀 토하지 않았다는 점이겠지요. 굶고 지쳐 있던 우리가 그날 받은 음식의 감동은 그 어떤 약보다 강력한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음식은 단순히 영양소를 넘어섭니다. 약도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특정 음식을 먹는다고 질환을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건강하게 연결돼 있어야 합니다. 음식을 먹는다는 건 문화와 정서를 나눈다는 뜻이지요. 건강한 음식을 즐거운 마음으로 어울려서 먹으면 건강해집니다. 같은 논리로, 무슨 병에 걸렸다고 해서 내가 뭘 잘못 먹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복합적인 여러 원인의 소산이니까요. 이것 하나만 기억하면 됩니다. “(가짜가 아닌) 진짜 음식을, (급히 먹지 않고) 천천히, (불안하거나 우울한 느낌 없이 )기분 좋게, (혼자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드신다면 치료 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습니다.” 필자는 2003년 가정의학과 전문의를 취득하고, 20년 가까이 질병예방과 건강증진, 특히 비만 치료에 관심을 가지고 진료를 했다. 디지털 치료기기를 통해 보다 많은 사람에게 인생의 가치와 건강을 통합한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목표로 지난해 스타트업 분야에 뛰어들었다.
- 내 이름 걸고 추천하는 맛집
- [내 이름 걸고 추천하는 맛집](13)김영기 | ‘지랄맞은’ 내 혀를 아찔하게 후려친 ‘을지로 인셉션’(2023. 11. 03 11:12)
- 2023. 11. 03 11:12 사회
- ㆍ서울 을지로 ‘비어할레’ 얇게 썬 족발과 부추의 조합이 일품인 을지로 ‘비어할레’의 훈제족발 어릴 적부터 내 입맛은 관대하지 않았다. 해질녘 노을빛에 허리춤까지 잠긴 부엌에서 엄마가 뚝뚝뚝 오이를 썰면, 비명을 지르며 코를 부여잡고 방으로 숨곤 했다. 수박은 수박바만 먹고, 김밥은 우엉 금지였으며, 복국엔 담긴 미나리부터 건져냈다. 만두에 김치를 곁들어 먹으면서도, 김치만두는 싫었다. 땡감이 곶감 되도록 손도 대지 않아 호랑이가 힘들어했다. 덕분에 내가 거듭 손대는 무언가는 종종 주변의 주목을 받았다. 안정적으로 맛있는 음식이라는 징표였기 때문이다. 이토록 까탈스러운 이 인간이 뭔가를 맛있어한다면. 언젠가 남동생이 그랬다. “형이 맛있다고 할 정도면, 확실히 누구나 좋아할 만한 거니까.” 특별히 혀가 섬세할 리는 없다. 그저 ‘호불호’에 모질고 박할 뿐이다. 취향을 타는 음식일수록 내겐 감점이었다. 지금도 들깨가 들어간 음식은 먹지 않는다. 민트 초코와 녹차맛 아이스크림은 스푼까지 넉넉히 챙겨 양보한다. 김, 통깨, 깻잎, 고수 따위를 뿌린 음식도 멀리한다. 올리브유나 아보카도유는 새 프라이팬 닦을 때도 안 쓴다. 기준이 불분명하지만 대개 향이 강한 것들이다. 조연이 주연을 압도하는 꼴을 못 본다. 10여 년 전 대학원생 시절, 내 전공은 시각 디자인이었다. 지도 교수님은 다행히 날 무척 예뻐했다. 동기 중 유일한 남학생이라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그것보다는 이론적 토대와 이를 활용한 독자적 연구 모델, 실증적·정량적·정성적인 접근에 무척 목말라하며 미술이론을 전공한 제자를 찾던 차, 문득 내가 눈에 띄었다고 본다. 당시 미술 분야의 주먹구구식 논문에 질려 있던 교수님은 뭔가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원했다. 물론 나는 그런 연구에 관심이 없었다. 그냥 그림을 좀 그리며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슬슬 포트폴리오나 쌓으며 말이다. 아무튼 난 연구장학생(R/A)으로 찍혀 교수님과 국가과제 연구를 수행하기에 이른다. 학회에 등재할 소논문 외에도 교재를 포함한 각종 저서를 집필 중이던 교수님에게 나는 그럭저럭 예리한 칼이었다. 무딘 티가 날 때면 가끔 밥이나 술을 사주시며 칼날을 갈아주곤 했다. 감칠맛이 시원한 맥주를 부른다. 그런데 군데군데 ‘지랄맞은’ 내 입맛은, 무슨 메뉴라도 없어서 못 드시는 교수님과는 도통 맞질 않았다. 언젠가 교수님이 지인의 식당을 전세 내고는 동기 중 나와 내 동기 여학생, 딱 둘을 초대했다. 자연산 농어와 제철 전어를 그 자리에서 잡아 연탄불에 직접 구워 주셨다. 친구분인 식당 주인은 내 다리만 한 농어를 옆에서 직접 회를 떴다. 눈이 달렸다면 누구나 빤히 보이는 정성을 차마 거역할 수 없어 세계적인 탐험가 ‘베어 그릴스’와 똑같은 표정으로 전어 한 마리를 가득 베어 물었다. 손바닥 반만 한 게 무슨 뼈가 그리도 많은지. 눈알은 또 왜 그렇게 생겼는지. 고소하다는데 도대체 어디가 고소한 건지. 연탄불 맛을 뚫고 스멀스멀 콧구멍을 찔러대는 비린내는 또 왜 이리 짙은지. 재차 권하는 교수님의 서슬에 몇 마리 우적우적 억지로 삼키는데 문득 눈물이 고였다. 정신이 혼미해 그만 의자를 굴리며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지만. 교수님은 얼른 일으켜 세우며 잘 썰어 놓은 ‘두툼~한’ 농어 한 젓가락을 내 입에 밀어 넣으신다. “야, 천천히 먹어. 맛있다고 그렇게 욱여넣다 체해. 많으니까 더 먹어.” 물컹한 식감 너머로 물씬 들이닥치는 비릿한 흙내. 그에 맞서 마늘이 다 파묻히도록 쌈장을 찍어 삼킨다. 그 옆의 오이채까지 차마 손댈 순 없었다. 눈치 없이 활기차게 헤엄치는 수조 속 농어를 손짓하며 교수님이 윙크한다. “체면 차리지 말고 막 먹어. 쟤도 있으니까.” “을지로 콜?” 힘겨운 식생활에 지칠 무렵 교수님의 연락. 길을 나서며 각오를 다진다. 혀야 힘내자. 굽이굽이 연탄 냄새 후미진 골목 어림에 푸르죽죽한 글씨로 내걸린 컴컴한 간판 ‘Bier Halle’. 맥주만 파리라 다짐하며 들어서자 교수님이 손을 흔든다. “이걸 먹어야 해. 이거 먹으러 여기 오는 거야.” 디자이너 아니랄까 봐 선명하고 단호하게 두들기는 손끝에 가려진 글씨 ‘훈제 족발’. 수십 년째 원조 배틀 중인 ‘장충동 할매’들 손맛도 두루 본 바, 딱히 끌리지 않았다. 돼지 발이 맛있어봐야 뭐. 양념부추 두어 줄기를 고명 놓듯 족발에 얹어 먹으면 고소함에 뇌리가 아찔해진다. / 김영기 제공 놀랍게도 그날 난 두 접시를 해치웠다. 특이하게도 훈제이면서 냉족발이다. 살짝 차다. 그래서 얇게 썰어 나온다. 박힌 분홍색 살코기를 따라 기름기가 거의 없는 무광의 고기 표면. 족발과 수제 햄에 한 발씩 담긴 중성적인 비주얼이 뇌쇄적이다. 양은 인색한 편. 손바닥보다 조금 큰 접시에 깔린 뼈를 대충 뜯으면 몇 점 없다. 별다른 소스나 고명도 없다. 다만 양념부추 한 주먹을 함께 낸다. 이 부추가 또 특별하다. 은은하게 매콤한 가운데 살짝 남은 아삭한 풀기와 부추 풋내가 씹을수록 올라온다. 쪽파를 썰어 넣은 새우젓을 곁들이는데, 붉은 국물에 적신 하얀 잔새우가 모양새도 깔끔하다. 새콤달콤 상쾌하면서 끝이 쓰지 않고, 적당한 간이 기분 좋게 혀끝을 꼬집는다. 우선 얇게 켠 훈제 냉족발 한 점을, 넙데데한 사기 재질의 손바닥만 한 앞접시에 훤히 펼친다. 양념부추 두어 줄기를 고명 놓듯 얹는다. 마무리로 쪽파를 품은 새우젓 한 꼬집을 족두리 씌우듯 올린다. 고기의 한쪽 끄트머리를 집어 다른 쪽과 맞닿게 감싼다. 그대로 말아 올려 주저 없이 통째로 와앙! 5초만 씹으면 갓난아이도 무심코 맥주잔을 거머쥘 만치 농후한 고소함에 뇌리가 아찔해온다. 동서남북 골고루 혀를 후려치는 깊은 감칠맛에 마치 미뢰를 안마하는 기분까지 밀려든다. 이미 시켜 둔 생맥주로 시원하게 한 모금 입가심을 한다. 족발 맛이란 게 사실, 서너 점이면 으레 견적이 나온다. 그냥 먹어 보고, 싸 먹고, 찍어 먹고, 다시 그냥 먹고. 듬직하면서 뻔한 맛이랄까? 반면 이 냉족발은 온화한 훈제 향에 식감이 단단하고 야무지면서 간이 세지 않은 덕인지, 먹어도 먹어도 야금야금 또 들어간다. 도무지 물리지 않는다. 이 혀끝의 기적엔 사실 양념부추의 공이 상당하다. 시험 삼아 한 줄기 집어삼킬 때 입속을 종횡무진 단독 드리블하는 부추의 신선함도 범상치 않지만, 냉족발과 새우젓의 눈부신 티키타카 끝에 터지는 현란한 맛의 골은 가히 스페인 국가대표팀급이다. 사람이든 음식이든 합이 이렇게 중요하다. 맛도 맛인 만큼 이 부추의 몸값이 공짜일 순 없고, 따로 추가해야 한다. 나설 때마다 느끼는 또 한 가지, 별로 시킨 게 없다 싶은데도, 카드가 생각보다 묵직하게 긁힌다. 여기 맥주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아도 기본은 한다. 몇몇 외산 생맥주도 있지만 기본 생맥주만으로도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간다. 영수증을 구기며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입맛 며칠 다시다 바보처럼 또 찾는 곳이다. 더 추워지기 전에 한번 들를 참이다. 티키타카 합심해 올해를 꾸린 내 새우젓과 부추 같은 사람들 잡아끌고 말이다. 족발 한 점 휘적이며, 이미 몇 번 언급한 듯하지만 한 번만 더 해야겠다. 교수님과 처음 온 이야기부터. 필자는 현대미술의 일상화, 생활화, 보통화에 뜻을 둔 전시 기획자이다.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강연도 다니고 전시디자인에도 관심이 많다. 작가들이랑 노는 것도 좋고, 특히 놀아도 공식적으로 일이 되는 건수를 가장 좋아한다. 미술평론 웹진 ACK의 공동 저자이며, OCI미술관 부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 내 이름 걸고 추천하는 맛집
- [내 이름 걸고 추천하는 맛집](12)박영욱 | 대 이어 고수해온 불판과 낙지의 남다른 조화(2023. 10. 13 11:06)
- 2023. 10. 13 11:06 사회
- ㆍ서울 종로구 ‘서린낙지’ 서린낙지를 찾은 북오션 박영욱 대표 / 박영욱 제공 출판 기획자와 출판사 대표, 에이전시 대표로 살아온 출판계 28년을 정리한 책 <내일도, 처음처럼> 출판기념회를 막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다. 주간경향 편집장의 ‘내 이름 걸고 추천하는 맛집’ 원고 청탁을 받고 ‘내 인생 맛집은 어디일까’ 장고를 거듭해온 터였다.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르는 맛집이 있었다. 내 인생의 달콤쌉쌀한 희로애락의 사연을 고스란히 간직한 ‘서린낙지’다. 바로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 전원을 켰다. 서린낙지는 너무 유명해 긴 설명이 필요 없는 진짜 진국 같은 맛집이지만 나와의 인연은 이 글 안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깊고도 넓다. 내가 서린낙지를 처음 만난 시기는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뒤늦게 군대를 장교로 전역하고 서른에 출판계에 뛰어들었다. 당시 나는 딱히 출판계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편집 일도 반복적이라 출판이 평생 갈 길일까 고민하던 때이기도 했다. 우연히 ‘전철우’라고 귀순한 한 방송인의 출판기념회가 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마침 그 책을 출판한 출판사의 편집장이었던 친구가 초대해 난생처음 출판기념회라는 걸 참가해봤다. 뒤풀이가 이어졌다. 2차는 피맛골 열차집에서 했다. 지금은 이전했지만, 당시 열차집은 피맛골 초입에 있었다. 노릇노릇 구워 고소한 빈대떡과 막걸리가 일품이었다. 피맛골은 ‘마차를 피하는 골목’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민중의 애환이 서린 문화유산이었다. 청계천 재개발과 더불어 사라져 못내 아쉽다. 열차집의 강력한 인상에 이끌려 며칠 뒤 광화문 교보문고에 시장조사를 갔다가 점심을 먹으러 피맛골 골목으로 발길을 돌렸다. 밤에는 안 보이던 생선구이 백반집들이 즐비했다. 주인장들이 입구에 서서 참치, 고등어, 갈치를 굽고 있는 모습이 지금도 선명히 떠오른다. 특히 무더운 여름에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생선을 굽고 있는 모습은 삶의 치열함이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그 모습에 반해 별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생선구이를 즐겨먹곤 했다. 백반집과 생선구이집이 모여 있던 그 골목길 끝에 서린낙지가 있었다. 서린낙지와의 인연을 말하려다 보니 서론이 길어졌다. 서린낙지의 첫인상은 이질적이어서 생경한 느낌이었다. 피맛골 가게들이 좀 노후한 한옥이라면, 서린낙지만 양옥집 1층에 있었기 때문이다. 메뉴도 생선 일색이던 이웃 식당들과는 달랐다. 낙지볶음 요리는 가격 면에서도 좀더 비쌌다. 그때 받은 서린낙지에 대한 인상은 ‘출판사 박봉으로 다니기엔 가격이 좀 부담스럽다’였다. 맛도 너무 매워, 제대로 즐기지는 못했던 듯하다. 그렇게 서린낙지는 내게 그냥저냥 좀 색다른 음식점 정도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러다 피맛골이 도시정비사업으로 사라지면서, 서린낙지는 2009년 서울 종로구의 ‘르메이에르 종로타운’으로 이전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그새 월급쟁이에서 ㈜한성출판기획과 북오션을 창업한 오너가 됐다. 자연스럽게 기자들이나 작가들, 직원들과 서린낙지를 자주 찾았다. 종로 쪽에서 약속이 많았는데, 매번 장소를 물색하기도 번거로웠지만 한 달에 한두 번 먹는 서린낙지의 매콤함에 푹 빠져 나도 모르게 저절로 그쪽으로 발길이 향하게 됐다. 그렇게 10년이 지나니 점심 약속이 있을 때면 으레 자동으로 찾는 단골집이 되고 말았다. 다녀온 분들은 아시겠지만, 서린낙지의 독특한 맛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서린낙지를 처음 먹어보면 선뜻 이것이 낙지볶음인가 싶다. 서린낙지니까 당연히 낙지볶음을 떠올리겠지만 막상 불판에 올려진 음식을 보면 갑자기 헷갈리기 시작한다. 일단 주문을 하면 포일로 감싼 일명 부르스터(휴대용 버너) 불판 위에 콩나물, 김치, 베이컨, 소시지, 채소, 감자가 올려져 나온다. 그 불판에 매운 낙지볶음 한 접시를 붓는다. 그리고 좀 끓어오를 때까지 기다리거나 익혀서 나온 낙지를 먼저 먹는다. 대다수 손님이 참지 못하고 소주 한 잔을 시킨다. 목을 축이며 기다리다 보면 사이드 반찬으로 직접 만든 것으로 보이는 투박한 단무지와 따뜻한 콩나물국, 동치미, 겨자 소스가 나온다. 이 반찬은 먹다 보면 존재 이유를 알게 된다. 10분 정도 시간이 지나 불판을 골고루 섞어주면 낙지 양념이 스며들어 먹기 좋게 익어간다. 베이컨이 익으면 바로 그 순간이 온다. 매운 낙지와 베이컨을 쌈 싸듯 싸서 먹는 순간 말이다. 어디에서도 맛보기 어려운 음식 조합의 탄생이다. 혹시 아직 안 가본 분이라면 색다른 미식 경험을 하게 되리라고 자신 있게 추천한다. 평소 잘 안 먹는 소시지를 겨자 소스에 찍어 먹는 맛이 일품이다. 서린낙지의 매콤함은 처음에는 모르나 중간쯤 먹다 보면 혀끝이 아릴 만큼 매운 풍미가 올라온다. 혀의 뜨거움을 식히라고, 단무지나 동치미 국물, 콩나물국으로 쓰린 속을 달래라고 사이드 반찬을 주는구나, 그제야 이유를 알게 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낙지 맛이 덜 매워지기 시작했다. 나도 나이가 제법 들어 이젠 매운 걸 못 먹어야 정상인데, 이상한 일 아닌가. 주인장에게 물어보니 덜 맵도록 무슨 조치를 한 건 아니란다. 매운맛에 적응이 됐구나! 내가 내린 결론이다. 그래도 옛날에 느꼈던 그 매운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양념장을 추가로 달라고 해서 넣어 먹곤 한다. 아삭거리는 식감이 좋아 추가로 콩나물을 몇 번 더 시켜먹고, 매운 낙지에 소주 한 잔을 곁들이면 땀과 함께 쌓인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듯하다. 서린낙지는 1959년 문을 열었다. 현재 박범준 대표의 할머니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2대인 아버지대에 현재의 음식 구성을 완성했고, 3대째 가업을 잇는 중이다. 3대째 이어가는 노포 음식점 찾기가 여간해선 쉽지 않은데 뚝심이 느껴진다. 변함없는 맛도 그렇지만 조금만 장사가 되면 프랜차이즈 가맹 사업을 벌이는 게 추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 아닌가. 그런 점에서 서린낙지가 대전이나 군산의 모 빵집처럼 프랜차이즈를 거부하고 본래의 맛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서린낙지는 광화문에 가야만 그 맛을 느낄 수 있다. 내 사무실이 있는 마포 어디에도 없다. 무수한 낙지집이 있지만 비슷할지언정 서린낙지만의 독특한 맛을 따라갈 수는 없다. 단지 흉내만 내고 있을 뿐이다. 매년 1월 시무식 후에는 직원들과 서린낙지에서 점심을 함께한다. 코로나19로 몇 해 건너뛰다 올해 다시 식사를 했다. 매운 낙지를 먹으면서 지난해의 묵은 때를 벗겨내고, 설레는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했다. 한 해가 무탈하길 빌었다. 올해 시무식 때 보니 일하는 분들이 대거 바뀌었다. 내가 운영 중인 출판사인 ㈜북오션도 직원들이 비교적 오래 근무하는 편이지만, 서린낙지도 만만치 않았다. 20년여의 세월이 쌓이면서 단골 축에 끼었는지 아주머니들이 차츰 반갑게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휴식시간에 무료함을 달래라고 책 선물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세월에 장사 없다고, 이들도 나이가 들어 기력이 달리면서 최근 들어 세대교체가 많이 이뤄졌다고 한다. 6년 후면 북오션은 창업 30주년을 맞는다. 6년 뒤의 일이라 아주 먼일 같지만, 세월이 주마등처럼 금방 가는 걸 보면 그리 먼일도 아니다. 그때까지 서린낙지도, 나도 다 무탈하길 바란다. 필자는 다소 늦은 서른에 출판사에 들어왔다. ‘학사장교 전역과 국문과를 나온 소설가 지망생’이라는 문학의 자양분으로 1년 8개월 뒤에 출판 기획사인 한성출판기획을 창업해 1700여 명의 저자를 발굴했다. 그 뒤 번역 에이전시를 창업해 번역자 양성에 힘썼다. 문학 에이전시인 옵션에이전시를 운영했고, 편집디자인 회사인 P&P디자인을 창업하기도 했다. 이어 출판사 ㈜북오션과 깊은나무를 창업해 600종의 서적을 발간했다. 현재 출판사들 외에도 유튜브 채널 ‘쏠쏠TV’와 ‘쏠쏠라이프’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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