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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대통령 이명박 당선인 선거포스터 사진 찍은 박상훈
- 2008. 02. 15 화제
- 지난 선거는 이미지 전쟁이었다. 누가 좀 더 마음에 와닿는 이미지로 유권자들의 감성을 붙잡는지가 승부의 관건이 됐다. 미디어의 발달로 영상 광고와 UCC까지 등장했지만 그래도 후보의 이미지를 압축해 단번에 보여주는 것으로는 포스터 사진만 한 것이 없다. 당선자의 후보 사진은 누가, 어떤 고민을 거쳐 만들어낸 것일까. 박상훈 사진작가가 들려주는 사진 촬영 뒷이야기, 그리고 그의 사진 이야기. 당선됐다는 즐거운 생각이 만든 편안한 표정 12명이나 되는 후보자가 나오는 바람에 여느 때보다 치열했던 17대 대통령 선거는 후보자들의 포스터가 진열된 벽보 전쟁으로도 유명했다. 이명박 당선인의 포스터 사진을 촬영한 박상훈(55) 사진작가는 환하게 웃는 이 당선인의 사진을 찍고 나서 지난 대선의 승리를 예감했다고 한다. ‘웃는 표정’이 아니라 진짜 ‘웃고 있는’ 이 당선인의 얼굴을 프레임 속에 잡아냈기 때문이다. 보통 수백 장의 사진을 찍어놓고 서로 비교해가면서 가장 나은 것을 고르는데, 이 사진을 보는 순간 ‘더 볼 것도 없이 딱 이거다’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솔직히 이 당선인이 사진 촬영하기에 만만한 스타일이 아니라 촬영 전에 걱정이 있었죠. 좀 딱딱해 보이기도 하고 포토제닉한 느낌도 없고(웃음). 제가 고민했던 건 과장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어떻게 하면 부드럽고 친근감 있게 표현할까’였어요. 최종 결정된 이 사진은 억지로 만들지 않은 자연스러운 느낌이라 마음에 들었죠.” 카메라 앞에서 긴장하게 마련인 모델에게서 연출이 아닌 자연스러움을 이끌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바쁜 선거 일정에 치인 탓인지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선 이 당선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을 가지시라고 한 가지 주문을 했죠. 지금 후보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당선 축하 기념사진을 찍는다고 생각하라고 했어요. ‘지금 제가 청와대에서 대통령 사진을 찍고 있는 겁니다’라고 했더니 표정이 부드러워지시던데요.” 이 ‘즐거운 상상’은 이 후보의 얼굴에 편안함뿐 아니라 자신감을 새겨 넣으며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뒀다. 후보 느낌이 역력한 다른 후보 포스터들에 비해 이 당선인은 실제로 대통령이 된 것 같은 당당함이 배어나와 유권자들에게 더욱 신뢰감을 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 당선인은 처음에 “내가 눈이 작아서 웃으면 눈이 안 보이는데…”라며 신경을 많이 썼는데, 촬영한 사진을 본 후에는 웃는 모습이 시원스럽게 나왔다고 만족해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기 얼굴의 단점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사진이 나오면 그것만 주의 깊게 봐요. 하지만 매력적인 웃음을 보면 거기에 끌리는 거지 누가 눈만 들여다보나요. 저는 눈이 이 당선인보다 더 작은데도 이렇게 활짝 잘 웃잖아요(웃음). 콤플렉스를 의식하지 않게 하는 것도 사진가가 할 일이죠.” 그렇다면 사진에 대한 확신만큼 이명박 후보의 당선도 예감했을까. 박 작가는 이 당선인에게서 당당한 힘을 느꼈다고 했다. ‘내가 사진을 찍어줬으니까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진 촬영을 하며 “아직 멀었느냐”고 보채는 편인데 이 당선인은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적극적으로 촬영에 임하는 모습에 모델로서의 점수도 높게 주었단다. 이번 대선은 워낙 출마 후보가 많았던 탓에 각 후보 진영마다 포스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굉장한 노력을 쏟았다. 심지어는 사진을 찍고도 시간을 쪼개 두 번이나 재촬영을 감행한 후보가 있을 정도. 다른 후보들 사진이 신경 쓰일 법도 하지만 박상훈 작가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전·현직 대통령과의 특별한 인연 요즘 그를 두고 항간에서는 ‘대통령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002년 대선 때 ‘부르튼 입술’의 노무현 대통령 포스터 사진을 찍은 이도 그이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기념사진 또한 그의 작품이니 대통령과 인연이 예사롭지 않다. 이명박 당선인도 지난 대선에서 노 대통령 포스터를 찍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았다고 한다. “노 대통령과는 포스터 촬영 전에 두어 번 만났죠. 「노무현 죽이기」라는 책이 있는데 그 표지를 제가 촬영했거든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희호 여사께서 오슬로 기념관에 걸 사진을 새로 찍으려고 작가를 물색하다 제 포트폴리오를 보고 낙점해서 만나게 됐구요. 평화상을 수상하러 여사님이 함께 오슬로에 가셨다가 역대 수상자들 사진을 보니까 다들 멋있는데 남편 사진만 어색하고 이상하니까 속상하셨던 거죠.” 3대에 걸쳐 대통령들과 인연을 만들어오면서 기억에 남는 일도 많다. 촬영에 비교적 의욕적이었던 노 대통령, 이 당선인과 달리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진 찍는 것을 어려워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전날 있었던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의 영수회담 결과가 나빴던 탓에 얼굴이 더욱 굳어 있었다. 기분을 풀어보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특별한 인연을 찾아냈다. 김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한 프로그램에서 남대문 상인이 되어 ‘골라골라’를 외치며 좌판을 벌였던 적이 있는데 그 프로그램 담당 PD가 박 작가 동생의 부인이었던 것. 지금도 가끔 이야기할 정도로 그 경험이 재밌었다는 김 전 대통령의 얼굴이 화사해진 건 당연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김 전 대통령의 연륜과 무게감을 담은 사진이 탄생할 수 있었다. 노르웨이 기념관에 걸려 있는 그 사진은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영원히 보게 될 소중한 작품이다. 노무현 대통령 포스터 사진은 당시로선 새로운 시도였다. 이마에 깊게 파인 주름, 부르튼 입술이 적나라한 노 대통령의 모습은 ‘포샵질’ 한번 거치지 않고 담벼락에 그대로 나붙었다. 흰머리 한 올,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한 타 후보와 달리 피부결이 거칠게 드러났다. “노무현 대통령은 ‘투박한 질그릇’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뚝배기같이 친근하지만 단단하다는 느낌. 그분이 가진 소탈하고 서민적인 모습이 바로 유권자들이 그분에게 바라는 모습이라 생각했고 그 모습을 좋아할 것 같더라구요.” 배경으로 썼던 태극기도 낯선 것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태극기는 고리타분하고 강건하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그때가 바로 2002 월드컵으로 태극기가 하나의 문화 코드가 됐던 때였어요. 디자인적 가능성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태극기는 한 나라를 상징하는 의미도 있으니까 대통령 후보 포스터 배경으로 적당하다 싶어서 썼죠. 그땐 우리 포스터에만 있었는데 이번에 보니까 태극기가 많이 나왔더라구요. 생각나는 대로 마음껏 연출했는데 나중에 남들이 그걸 쫓아오는 재미가 사진을 하는 큰 즐거움이 돼요.” 포스터 사진을 찍으며 노 대통령을 만났을 때도 ‘이 사람 되겠구나’ 하는 느낌이 있었다. 당시 여론 조사 결과가 상당히 열세였는데도 불구하고 자신감 있는 ‘환한’ 모습에 어떤 직감 같은 것을 느꼈다고. “설득력이 굉장히 뛰어난, 논리적인 분이었어요. 촬영 중간 장난도 잘 치시고, 어렵지 않고 솔직한 모습이 인상 깊었어요. ‘대통령 되실 것 같다. 청와대에서 만나자’라고 말씀드렸죠. 사람의 기운이라는 게 있나 봐요.”분야를 넘나드는 편안한 그의 이야기 포스터 사진으로 또 한번 관심이 높아졌지만 원래 그는 풍경 사진, 광고 사진 등으로 이름을 떨쳐온 작가다. 특히 뉴욕페스티벌 한국인 최초 금상, 칸 국제광고제 금사자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의 스튜디오는 유명 스타들의 사진이 벽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들도 “아, 이거!”라고 할 만큼 알려진 그 사진들은 하나같이 담백하고 편안하다. “저는 꾸미는 게 싫어요. 속에 있는 것을 건드려 내면을 끌어내려고 하죠. 사람들은 결국 ‘진짜’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제 사진을 좋아하는 분들은 양념 맛이 아니라 재료 본연의 맛을 음미하고픈 분들이에요.” 수많은 스타들의 사진을 찍으며 그들이 가진 뒷모습을 발견해온 그다. 그중에서도 ‘주름이 만든 카리스마’라는 컨셉트로 찍은 안성기와 ‘눈물이 빛나는’ 김희애의 사진이 마음에 남는다고. 본인들도 그 사진을 가장 마음에 들어 할 정도로 특별했던 작품. 특히 김희애의 남편은 그 사진을 가지고 다니며 자랑할 정도 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가 스타나 상품 사진을 잘 찍는 ‘상업적인’ 작가라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십 년 넘게 새벽 사진을 찍어온 그는 여명의 오묘함을 담아낸 ‘새벽 시리즈’로 풍경 사진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나같이 똑같은 일출, 산세 풍경 대신 흐트러진 일상의 시작에 주목했던 것이다. “풍경 사진은 어떤 면에서는 많이 고통스러워요. 생각해보세요. 새벽에 잠도 안 자고 추울 때 나가기가 얼마나 싫겠어요. 기다리고 참고 고통을 즐길 수 있어야 좋은 풍경을 내 눈에 안을 수 있죠. 하지만 시시때때로 변하는 자연을 보면서 겸허함도 느끼고 자연 속에서 나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하게 되죠. 자연과 나, 나와 타인. ‘관계’라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해요.” 풍경, 인물, 광고 사진까지. 아직도 사진에 대한 ‘열정’으로 목마른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흐름은 바로 ‘소통’이다. 사람과 제품과 자연에 끊임없이 말을 걸고 생각을 나눌 때 그는 가장 행복하다. 그리고 그 소통의 결과를 책으로, 전시로 내놓으며 또 다른 소통의 길을 만드는 것이 흥미롭다. “한때는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야겠다고 나를 옭아맨 적도 있었죠. 하지만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알았어요. 이 세상에 완벽한 게 어디 있어요. 완벽하려는 노력 대신 사진을 좋아하는 열정을 거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고, 사람을 알아가는 게 좋아요. 아마 죽을 때까지 사람을 찍고 있을 겁니다.” 박상훈 작가는 아직 해보고 싶은 것이 많다고 했다. 꾸준히 진행하고 있는 작업의 결과물들을 선보일 사진전도 준비 중이다. 최근에는 현대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내’가 들어 있는 이 도심 속의 사람들에 집중하고 있다. “목표는 거창하지 않아요. 그저 좋은 작가, 훌륭한 작가가 되고 싶은 게 제 바람이에요. 나름 이런저런 결과물을 내놓았고 좋은 평가도 받았지만 아직 나는 ‘좋은’ 작가가 되지 못했어요. 운 좋게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됐고 타고난 예술적 기질이 조금은 있다는 데 감사해요. 그런 열정을 원천으로 삼아 더 많이 노력할 겁니다.” 그에게 사진이란 무엇일까.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같은 질문을 받지만 그때마다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고. 그만큼 사진이 가진 다양한 힘에 매료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어쩌면 물방울 같은 것이 아닐까요. 물방울은 하나의 작은 방울이지만 독립된 게 아니라 그릇을 이루고 바다가 되면서 의미를 만들잖아요. 세상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죠. 사진도 한 컷 그 자체만으로 완전한 것이 아니라 많은 이야기를 만들고 다양한 의미를 갖는 거예요. 소통의 매개가 되는 거죠.” 제17대 대통령 선거 당선인인 이명박도 그랬고, 그의 카메라 앞에 섰던 이들은 모두 “잘 찍어줘서 정말 고맙다”라는 인사를 남겼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없는 것을 억지로 만들어낼 수는 없다고. ‘잘 나왔다’고 생각되는 그 모습은 모델 본인이 가진 원래의 모습 중 한 단면이다. “저는 그 모습을 잘 찾아낸 것뿐이죠”라는 박상훈 작가. 억지로 애쓰지 않고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편안한 그의 사진이 정말 고맙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민영주
- 17대 대통령 당선인 이명박! 대통령이 되기까지
- 2008. 01. 28 화제
-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제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는 어린 시절 가난하고 힘들었지만 특유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무사히 대학교까지 졸업했고, 이후 현대건설에 입사해 초고속승진으로 35세 CEO 자리에 올랐다. 이후 정치권에 입문해 2002년 서울시장을 역임하면서 ‘청계천 복원사업’ 등 괄목할 만한 성과로 국민들에게 그 능력을 인정받으며 제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이명박 당선자의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의 여정을 살펴본다. “경제 살리는 대통령 되겠다” 어느 때보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제17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가 드디어 막을 내렸다. 이로써 대한민국의 민심을 뒤흔들던 ‘대선 열풍’은 한 차례 폭풍우처럼 사라지고, 이제 국민들은 새로운 시대를 준비할 일만 남았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당선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국민을 섬기겠으며,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경제를 반드시 살리겠다”며 당선 소감을 밝혔다. ‘반드시 경제를 살리겠다’는 것이 이 당선자가 여러 가지 비리 연루 의혹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유 중 하나다. “침체된 경제를 살려달라”는 국민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는 것. 그렇다면 국민들이 이 당선자에게 이토록 ‘경제 활성화’를 기대하는 이유가 뭘까. 국민들이 이 당선자를 신뢰하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드라마보다 더 격정적인 인생 여정에 있다. 이 때문에 이 당선자를 모델로 하는 TV 드라마가 두 편이나 제작되기도 했다. 가난한 시골 출신인 이 당선자는 중학교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길거리에서 풀빵 장사를 하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이후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부모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마쳤다. 대학 졸업 이후, 현대건설에 입사한 이 당선자는 선천적인 성실함과 저돌적인 추진력으로 단시간에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결국 29세에 이사로 승진,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현대건설의 CEO가 됐다. 이 당선자는 당시, 뛰어난 사업수완으로 대형 공사를 수차례 따내면서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총애를 받았다. 부인인 ‘김윤옥 여사’와 결혼한 것도 당선자가 현대건설에서 이사로 재직할 때였다. 불도저 같은 추진력을 가진 CEO 출신 대통령 사업가로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으며, 인생의 탄탄대로를 걷던 그가 정치권에 발을 들인 것은 지난 1992년 당시 신한국당 대표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전국구 공천을 통해서다. 이후 이명박 당선자는 1995년과 1998년 두 번이나 서울시장에 도전했으나 고배를 마신 뒤 미국 연수 길에 올랐다가, 2002년 세 번째 도전 만에 서울시장 자리에 올랐다. 그는 서울시장 선거공약이었던 당시 ‘청계천 복원사업’을 중심으로 ‘버스 전용 차선제’, ‘서울숲 조성’ 등을 과감하고 발 빠르게 행동에 옮겼다. 이후 서울 청계천은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되살아났고, ‘버스 전용 차선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사람들은 이명박 당선자를 두고 “역시 건설회사 사장답다”, “불도저라는 별명이 그냥 생긴 게 아니다”, “추진력이 정말 뛰어나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이렇게 서울시장 재임 당시, 시민들로부터 ‘추진력 강하고 능력 있는 CEO 출신 시장’이라는 인정을 받은 이 당선자는 자신감을 얻어 바로 대권 행보를 시작했다. 이명박 당선자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투톱 체제를 구축하며, 국민에게 지지를 얻었고, 2007년 8월 경선에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당당하게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됐다. 이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대선 출마 선언과 BBK 비리 연루 의혹이 대두되면서, 이 당선자의 대선 행보에 암운이 드리워지지 않을까 염려했다. 하지만 결국 검찰의 ‘무혐의’ 발표와 ‘경제를 살려달라’는 국민들의 염원이 합쳐지면서 이 당선자는 2007년 12월 19일 ‘청와대 입성’에 성공했다. 이명박 당선자는 당선 직후 “건국과 산업화, 민주화를 넘어 선진화로 가야 한다”면서 새로운 정부는 ‘경제의 선진화’에 무엇보다 주력할 것임을 밝히고, 이어 “한반도 비핵화를 통해 남북은 새로운 협력의 시대를 열어갈 것”이라고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이 당선자의 주요 공약은 10가지다. 이 당선자의 대표 공약은 ‘한반도 대운하’다. 기존 하천을 토대로 남한에 2100km, 북한에 1000km를 연결하는 운하를 만들어 경제 회생의 계기로 삼자는 것이다. 이는 환경단체 반대, 효율성 등 여러 가지 논란의 소지가 있어 발표 당시부터 많은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당선자는 현재 4%대에 머물러 있는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을 7%’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또 노무현 정부 때 유난히 침체됐던 ‘부동산정책’ 또한 사람들의 주요 관심거리다. 이 당선자는 ‘부동산 규제를 완화’하고, 다양한 형태의 주택 공급을 늘리는 것을 기본으로 한 ‘부동산정책’을 공약으로 내놓았다. 이밖에 ‘주택담보대출 금리인하’, ‘공교육 내실화’, ‘중소기업 맞춤형 지원’, ‘세계 최강 디지털 코리아’, ‘빈곤층 계층 할당제’, ‘실리 외교’ 등을 주요 공약 정책으로 내놓았다. 1천1백만 표를 얻어 50%에 가까운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명박 당선자. 경제 침체가 길어지면서 늘 진취적인 행보를 펼쳐온 이 당선자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불도저 같은 추진력’을 가진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지치고 힘들어하는 국민들에게 얼마나 ‘숨 쉴 수 있는 숨통’을 틔워줄 수 있을지 앞으로의 5년이 주목된다. 예비 퍼스트레이디, 김윤옥 여사의 ‘그림자’ 내조이명박 당선자가 대통령이 되기까지는 부인 김윤옥 여사의 ‘그림자 내조’가 톡톡히 한몫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당선자가 현대건설 이사로 재직할 당시 결혼한 김윤옥 여사는 이화여대 ‘메이퀸’ 출신으로 미모와 지성을 겸비했다. 하지만 이 당선자와 결혼한 이후, 김 여사의 일상은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이 당선자가 젊은 나이에 현대건설의 CEO가 됐기 때문에 늘 회사에서 살다시피 했다. 하지만 “중역의 부인은 참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는 친정어머니의 말씀을 새기며, 이 당선자를 위한 ‘맞춤’ 내조를 하게 됐다고 한다. 평소 털털하고, 통이 큰 성격으로 유명한 김 여사는 슬하에 1남 3녀를 두고 있으며, 남편 대신 자식들에게는 매우 엄한 교육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김 여사는 이 당선자에게 직접적인 고언을 잘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경선을 할 때도 “여자 이기는 남자 없다”며 “박 대표와 싸우지 말 것”을 조언했다. 이런 조언 덕분인지 이 당선자는 결국 박 대표와의 경선에서 승리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공식 선거운동 기간이었던 지난 22일 동안, 김 여사는 이명박 당선자가 가지 못하는 ‘재래시장’과 ‘여성, 독거노인’들을 찾아가 지원 유세 활동을 벌였다. 특히 김 여사는 노인 복지에 많은 관심을 보이며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이 당선자가 회사에 입사해 월급을 받았을 때는 이미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효도를 할 수가 없었다”며 “그래서 ‘노인 복지’에 관심이 많다”며 지지를 호소했다. 김 여사는 추운 날씨에도 하루에 보통 5~10개 정도의 지원 유세 일정을 소화하며, 이명박 당선자를 위한 ‘한 표’를 호소했으니, 가히 대통령 당선의 숨은 공로자라 할 만하다. 이 당선자가 대통령으로 뽑히던 날은 이들의 결혼기념일임과 동시에 이명박 당선자의 생일인 것으로 알려져 화제를 모았다. 결혼기념일을 잊지 않기 위해 이 당선자의 생일에 결혼 날짜를 잡았는데, 공교롭게 대선 투표일과도 겹치게 된 것이다. 이보다 기막힌 우연이 또 어디에 있을까. 평소 남편을 위해 고언도 아끼지 않는 털털한 성격의 김윤옥 여사가 앞으로 어떤 ‘영부인’의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이성훈, 경향신문 포토뱅크
- 경제 대통령 꿈꾸는 이명박 그를 일궈낸 부모의 이야기
- 2007. 04. 17 화제
- 37세의 나이로 현대건설 대표이사에 취임해 최장기 샐러리맨 CEO라는 역사를 남긴 이명박 전 서울시장. 성공한 리더십의 대표주자로 불리는 그는 지난 2월 출간된 이명박의 마음속 이야기 「새벽 다섯시」를 통해 어려움이 닥칠 때 도전하고 극복하는 힘을 주었던 주인공으로 어머니와 아버지를 꼽았다. 시련을 열정으로 이끌어준 이 전 시장의 부모를 통해 진정한 리더십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어머니의 리더십 당당하라, 직시하라. 정면 돌파 없이는 이길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학교와 나를 가로막은 장벽은 바로 어머니다. 어머니는 여러 자녀를 공부시키다가 도중 하차하는 것보다는 다른 자식들이 희생해서라도 한 명을 제대로 공부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다. 제일 똑똑한 자식에게 학비를 몰아주고, 그가 성공했을 때 남은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그러나 거기서 희생자가 되었던 내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기까지 한 일이다. 나의 학창 시절은 어머니의 ‘선택’에서 제외된 채 그렇게 흘러갔다. 그리고 10년 후, 20년 후 현대그룹이라는 대기업의 최고 책임자 자리에서 수많은 직원을 거느리면서, 또 공직의 임무를 맡으며 새로운 인재를 뽑는 자리에서 이따금 이런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 옛날, 어머니라면 어떤 선택을 하셨을까. 어머니의 무서운 길거리 특강 10대에 이미 거리 한복판에서 세상 사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나는,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는 뻥튀기 장사를 했다. 장사는 좀 나아졌지만 뻥튀기보다 더 힘든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여학교 앞에 나가 자리를 잡고 기계의 불을 조절해가며 뻥튀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 불거졌다. 아침 해는 야속하게도 기계를 돌리는 시커먼 손, 남루한 교복 차림, 땟국으로 얼룩진 내 얼굴을 훤히 비추는 것이다. ‘저 여학생들이 나를 보면 뭐라 할까….’ 아무리 자신을 추슬러도 뻥튀기 장사꾼 이전에 지나가는 여학생들과 같은 또래 남학생이라는 입장이 마음을 짓눌렀다. 내 앞을 지나치는 수많은 시선을 받을 때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너무 창피한 나머지 여학생들이 많이 지나가는 등교 시간에는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 시선을 피하기도 했다. 그들의 눈을 피할 방법은 없을까? 전전긍긍하다 보니 그럴 듯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구해 쓰는 거야, 밀짚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장사를 하면 그들 시선과 마주칠 염려가 없을 거다. 그렇게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뻥튀기 기계를 돌리고 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호통소리가 들렸다. “지금 뭐하는 기고? 장사하는 놈이 웬 밀짚모자고?” 어머니는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버럭 야단을 치셨다. 사람들이 지나가는 거리에서 큰소리로 야단맞는 게 창피하고 서럽기도 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어머니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말씀하셨다. “얘야, 사는 사람하고 파는 사람하고 시선이 마주쳐야 장사가 되는 기다. 상대방의 눈을 피하면서 어찌 물건을 팔래? 서로 마주치면 사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기는 기라.” 어머니는 야단치는 것이 아니었다. 장사를 하려면 사람들 눈을 마주 보고 당당하게 해라. 그래야 장사가 된다! 정면으로 부딪쳐라. 그래야 산다, 그래야 이긴다! 어머니의 매서운 ‘길거리 특강’은 내가 더 이상 밀짚모자를 쓰지 않는 것으로 끝이 났다. 사춘기에 맞닥뜨린 처절한 삶의 체험 현장 그 시절 나는 거리에서 두 부류의 사람을 경험했다. 내게는 곧 처절한 삶의 체험 현장이기도 했다. “학생, 고생이 많네. 몇 살이고? 부모님은 뭐 하시나? 공부는 잘하고? 그래, 열심히 해야지. 앞으로 좋은 일 안 있겠나”라며 좋은 말을 잔뜩 늘어놓다가 휭 하니 가버리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내게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게는 수치심만 안겨줄 뿐이다. 그런 사람을 만나는 날이면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애를 먹었다. 반대로 힘을 실어준 사람도 있다. “이거 모두 얼마지?”라고 한마디 묻고는 말없이 뻥튀기를 싸들고 사라진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방을 안쓰럽게 생각하는 마음, 도와주고 싶은 마음, 그러면서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배려를 느꼈다. 그런 사람을 만나는 날엔 어려움을 극복할 용기가 솟았고, 좀더 잘해야겠다는 마음도 생겼다. 생각해보면 나는 이미 10대 이전부터 두 부류의 사람들을 겪으며 살아왔다. 어린 눈에도 세상은 불공평해 보였다. 누구는 열심히 일하는데도 배를 곯고, 누구는 일하지 않는데도 잘 먹고 잘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사는 방 바로 옆에는 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거지 가족이 살았는데, 그 집 어른들이 마을을 한 바퀴 휙 돌고 오면 밥상에는 음식들이 한상 차려졌다. 우리 부모는 몸이 부서지게 돈을 버는데도 사는 모양으로 보자면 옆집 거지만도 못했다. 그렇게 모두가 열심히 일하는데 우리 집은 왜 이 모양일까. 뒤늦게 진가를 알게 된 부모님의 가정경영 1998년 늦가을, 김포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미국이 준비하는 21세기의 국가 경영에 대해 공부하고 싶었던 차에 워싱턴 D.C.의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와달라는 초청을 받고 1년간의 연구 과정을 갖기로 한 것이다. 그날도 LA 교포를 위한 시국 강연을 끝내고 홀을 빠져나오려는데, 늙수그레한 한 남자가 주최 측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주위에서 애써 만류해도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회장님을 잠깐만 만나게 해달라”고 우기고 있었다. 사람을 찾는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아 가까이 다가갔다. 박 아무개라고 소개하는데, 알고 보니 어릴 적 절간집에 함께 살던 이웃이었다.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어릴 적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렸을 때 저는 밥도 제때 먹고 옷도 회장님보다 나은 거 입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이 회장님 집보다 더 잘사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날 이때까지 저는 내 입, 내 자식 입에 밥을 넣어주는 일에만 매달려 살고 있는데, 회장님은 세상의 지도자가 되셨습니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어려웠던 그 시절 우리 부모님은 배고프다면 더운밥을 얻어다 먹이고, 추워하면 두꺼운 옷을 얻어다 입혔습니다. 그런데 회장님 부모는 안 그러셨어요. 얻어 입은 우리는 아직까지 제 입만 채우고 살고 있고, 회장님 형제들은 다 잘되셨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회장님 부모님께선 안 그러셨다”는 그의 말은 맞다. 어머니의 강직한 성품으론 아무리 굶주리고 헐벗어도 남의 것을 거저 구해온다거나 얻어다 입히는 일이 통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따뜻한 밥을 얻어다 먹이지 않았다. 아무리 배고파도, 추위에 떨어도 옷을 기워 입힐망정 얻어다 입히지 않았다. 야속하다 싶을 정도로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세상 사는 법을 익히도록 놔두셨다. 말 이전에 눈빛으로, 눈빛 이전에 기도로 세상의 어려움을 뛰어넘게 하셨다. 부족함을 통해 오히려 그것을 뛰어넘는 힘을 알려주려 하셨고, 형편이 어려울 때면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을 가르쳐주셨다. 힘들던 시절의 추억담을 나누면서 나와 그 사이엔 회한의 웃음이 번져갔다. 나도 잘 모르고 지내왔는데, 그 옛날 어머니에게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자식을 위하는 길인지를 찾아낸 그 친구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 “그 어른을 생각하면 복 받는 길이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아버지의 리더십 가난은 삶을 불편하게 하지만, 거지 근성만큼 위험한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살림에 보탬이 될 만한 일을 찾으려고 애쓰셨다. 포항의 판자촌 시절에는 고물상도 하셨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며 안 쓰는 물건을 수집해 단칸방 뒤에 정성껏 쌓아두곤 하셨다. 전쟁 통에 괜찮은 물건이라고 해봐야 몇 개 되지 않았고, 그나마 손질해서 손에 넣을 만한 돈으로 바뀌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이웃 소년이 먹을 것을 얻으러 우리 집 근처를 기웃거렸다. 아버지는 윗옷도 걸치지 않고 구걸하는 아이에게 당신이 팔아야 할 옷가지와 돈까지 쥐여주고서는 한마디 하셨다. “이놈아! 아무리 구걸을 하고 다녀도 옷은 입고 다녀야 할 것 아니냐. 이걸로 부모님께 국이라도 끓여드려라.” 건너편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체념 반 확신 반 말씀하신다. “아부지를 봐라. 우리 대代에는 못 누려도 후손이 복을 받을 기다.” 어머니는 마음이 부자면 나중에 정말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공부만 잘하면 뭐 해 가정교육이 잘돼 있어야지 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가치관이 재물에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그랬다면 자식들에게 미안해서 고개를 못 드셨을 것이다. 못 먹이고 못 가르쳐도 미안하다는 얘기를 하신 적이 없다. 어려운 가정 형편이었지만 자식이 바로 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신 아버지는, 학교 공부를 제대로 못 시켜서 그랬는지 평상시 학교 공부라는 말 대신 ‘가정교육’이라는 용어를 자주 쓰셨다. “공부만 잘하면 뭐 해? 가정교육이 잘돼 있어야지.”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 말씀이 듣기가 민망했는지 “부모로서 뭐 그리 잘해준 게 있다고 가정교육, 가정교육 하시느냐”고 따져 묻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들은 척도 안 하셨다. 한번은 마당 한쪽에 앉아 풀빵 틀을 닦는데 아버지가 곁으로 다가오셨다. “박아, 힘들지. 하지만 가난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 세상을 둘러봐라. 잘 먹고 잘살겠다고 남을 속이고 거짓과 타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설령 가난에서 벗어난다 해도 자기 이득밖에 챙길 줄 모르는 사람들이 이 나라를 얼마나 어렵게 하는가를….” 아버지는 거지 근성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가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셨다. “가난보다 더 무서운 게 거지 근성이라는 거다. 물론 가난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만 거지 근성처럼 위험한 것은 아니다.” 세상은 나 혼자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정직이 중요하다… 거지 근성을 갖게 되면 정직을 포기해야 한다… 그것은 결국 세상을 잃는 것과 다름없다…. 이런 나의 신념은 아버지를 보며 배웠다. 아버지는 언제나 상생의 이치를 마음에 심어주셨다. “나만을 위해 이 세상을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보다 더 적게 갖는 것에 불만이 생기는 법이다. 그래서 더 많이 갖기 위해 다른 사람을 속이게 돼. 하지만 그래서는 행복할 수 없다.” 아버지가 일깨워준 상생의 이치 사실 요즘 부모들은 자식에게 해줄 것을 다 해주고도 큰소리 한번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 잘해주는 아버지에게 감사하는 자식도 드물다. 아버지 어머니는 어려운데 자식은 전혀 어렵지 않고, 부모는 가난한데 자식은 부자인 가정이 많다. 또 이웃이 불우할 때 그 어려움을 외면하는 사람들도 있다. 평소 아버지가 늘 들려주신 말씀대로 자기 이득만 내세워서는 나라가 잘살 수 없다. 서울시장에 취임해서의 일이다. 옛날에 내가 살던 달동네를 찾았다. 수십 년 세월이 흘렀건만 비탈길 단칸방은 옛 모습 그대로다. 누가 살까 궁금해 문을 두드려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기척이 없다. 동네사람들은 치매로 거동을 못하는 노인이 사신다며 안쓰러워했다. 주위 분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문을 열었다. 컴컴한 방에는 노인 한 분이 벽을 마주하고 있다. 큰 충격을 받았다. 옛날에 살던 곳이 처량한 모습 그대로 있다는 것에 놀랐다. 한낮인데도 어두컴컴한 그 방은 세상과 단절돼 있었다. 어둠에서 나올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이 우리의 이웃에 산다. 설령 가족이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이 기초생활수급자들이니 부모를 모시는 데까지 손이 미치기 어렵다. 그렇다 보니 달동네 꼭대기 단칸방에서 삶의 악순환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복지관련 시 직원들과 이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저소득층 중증 치매 노인들을 모실 수 있는 요양소를 지어 자립이 어려운 분들을 모실 수 있는 제도를 모색해보았다. 노숙자 일자리 갖기, 청년 실업자를 위한 프로젝트 등 정신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삶의 의지를 북돋워줄 수 있는 몇 가지 사업을 동시에 시작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회 양극화의 원인과 해결 방안을 찾으려 하지만, 결국 양극화된 사회에 희망을 주는 것은 일자리와 복지 문제이다. 양극화 해소는 어려운 사람에게 나눠주고 도와주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일자리를 구해서 희망을 갖게 되면 사회 불평등은 자연히 사라진다. 국가도 가정을 기반으로 하는 커다란 공동체이므로 국민이 어려워하면 국가도 어려움을 함께 느끼고, 나라가 힘들어지면 국민도 함께 나라의 고통을 나눌 마음이 필요하다. 희망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싹을 틔운다. * 본문은 「이명박의 마음속 이야기 - 새벽 다섯시」(이화복 엮음·기획출판 책장)에서 발췌했습니다. ■기획 / 장회정 기자 ■사진 / 박형주 · 기획출판 책장 제공
- [유인경기자가 만난 사람] 취임 2년, 버스 중심 대중교통 개편 이명박 서울시장
- 2004. 07. 01 화제
- “말단 회사원에서 대기업 사장 거쳐 서울시장까지, 소신 있는 삶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이명박 서울시장은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만큼 바쁘다. 출근 길, 그는 소시민들의 삶을 몸으로 느끼기 위해 지하철을 이용한다. 요즘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오는 7월 1일 시작되는 버스 중심의 대중교통 개편에 쏠려있다. 시민들에게 “어유, 수고 많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면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는 이명박 서울시장의 취임 2년의 행보. #서울시민인 것이 자랑스럽게 하겠다 환갑이 넘은 영감님이 피부도 팽팽하고 걸음걸이도 청년처럼 활기차다. 목소리마저 짜랑짜랑 쇠기운이 느껴진다. 하루에 4시간도 못 잔다는데, 그리고 하루에 10여 곳의 행사에 참여하고 결제할 서류만도 수십 가지라는데 피곤한 기색도 없다. 산삼을 먹는 걸까? 아니면 몰래 마사지라도 받는 걸까? 이명박 시장을 만나면 그런 의구심이 든다. 청계천 복개 공사 시공 1년, 서울시장 취임 2년 그리고 버스 중심의 대중교통 체계 개편을 시행하는 7월 1일을 앞두고 이명박 시장의 스케줄은 상상을 초월한다. 각종 매스컴에 등장해 홍보도 하고, 다채로운 행사에 참여하느라 10분 단위로 스케줄이 짜여 있다.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 팽팽한 젊음의 비결을 알 것 같다. 즐겁고 신나기 때문이다. 그 어떤 보약이나 화장품보다 좋은 것이 신바람 아닌가. “요즘 서울시민들의 반응이 좋아 보람을 느낍니다. 작년에 청계천 복개 공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다들 불안해하고 걱정도 많이 하셨는데, 막상 공사가 진행되어도 교통대란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또 시청 앞 광장에서 파란 잔디를 밟고 서울 한복판을 여기저기 맘대로 걸어다닐 수 있으니 요즘 저를 만나면 ‘아유, 수고 많습니다’라고 악수를 청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정말 저를 믿고 협조해준 서울시민들께 감사드립니다.” ‘서울시민들에게 감사한다’고 하면서도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가득하다. 황인자 여성정책보좌관은 “여성부 등 다른 부처에서도 일했지만 서울시에서 일을 많이 배우고 진짜 일을 많이 한다”고 전했다. 일벌레 시장이 일도 많이 시키고, 수시로 체크하고, 또 안 되는 일을 되게 하라고 자극을 주기 때문이다. 이 시장은 여성 정책에도 밝고, 특히 서울 여성들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여성들의 국제화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하긴 딸이 셋이나 있으니 여성들의 권익이나 미래에 애정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게다. 이명박 시장은 무슨 질문을 해도 거침이 없고, 어떤 비난을 받아도 기죽지 않고, 대기업 사장 출신이 아니라 교수 출신처럼 적절한 비유와 사례를 들어가며 이야기를 잘한다. 그래서인지 좀 마음에 안 드는 질문을 하면 “그런 유치한 질문에는 답하기도 싫습니다” 등의 대답을 하는 것도 목격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도 옆집 아저씨처럼 아주 편안한 분위기를 만든다. 장사하며 야간 상고를 다니던 소년이 대기업 사장을 거쳐 서울시장에 되어서인지 소년 같은 미소부터 노인의 신중함, 소탈함, 주변을 완벽히 제압하는 카리스마, 앙드레 김의 옷을 입고 패션쇼에 나서거나 시트콤에 등장하는 쇼맨십, 곳곳에 필요한 자료와 책을 두고 수시로 공부하는 학구열까지 온몸으로 표현해낸다. 혜화동 시장 공관에서 시청까지 출근길에는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는 이 시장이 요즘 제일 애정을 쏟는 것이 버스다. 얼마 전엔 버스 옷을 갈아입히더니 7월 1일부터 버스 노선도 대폭 바꾸고 도로 가운데에 버스 전용차선을 만들었다. 한글학자들은 버스에도 영어를 쓰고, 너무 영어를 남발한다고 비난하지만 이 시장은 “서울을 국제도시로 만들고 서울 시민들에게 기초 교양 영어 공부를 시키는 것”이라며 전혀 기죽지 않는다. #행운도 만들어가는 노력파 한 서울시청 직원은 “우리 시장님은 하늘이 도우시는 분”이라고 했다. 아부성 발언은 하지 말라고 했더니 구체적인 사례를 든다. “시청이 주관하는 행사가 좀 많습니까? 특히 야외에서 행사를 할 때는 날씨에 신경이 쓰이죠. 그런데 날씨가 아무리 궂어도 이 시장님이 행사에 참석해 가위를 들기만 하면 말짱하게 갠단 말이에요. 작년 5월에 시청 앞 광장에서 ‘하이 서울 페스티벌’을 열었을 때도 비가 부슬부슬 내렸구요. 청계천 고가를 허무는 날, 일기예보에는 오후에 비가 온다고 하더라구요. 정말 역사적인 날이고 말도 많은 행사라 비까지 내리면 어떡하나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정작 시장님은 태연하신 거예요. “괜찮다, 난 현대에 있을 때도 행사에 참석해서 비가 온 적이 없다. 예정대로 진행하자” 하시더군요. 그런데 신기하게 행사중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고 행사가 끝나자 비가 내렸습니다.” 교회 장로여서 하나님이 편애하는 걸까? 그러나 이명박 시장은 운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모든 걸 치밀히 조사하고 철저히 대안을 준비하면 실패가 없다는 것이다. 행사 날짜를 정할 때도 몇 년 동안의 날씨 통계를 보고 준비해 확률적으로 비올 날을 피한다. 청계천 공사, 시청 앞 광장, 버스 노선 개편도 하루아침에 만든 것이 아니란다. 청계천은 서울시장이 되기 전부터 개인적으로 역사며 관련 자료를 공부했고, 주변 상인들과 만나 설득도 했다. 치밀하게 검토하고 연구하고 준비하면 운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그를 ‘여우 불도저’라고 했다. 불도저처럼 추진력이 강하지만, 막무가내식의 밀어붙이기가 아니라 영리하고 주도면밀한 여우 같은 면모를 보인다는 설명도 붙였다. 이 시장은 “여우가 아니라 컴퓨터 불도저, 컴도저란 말은 들었다”고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별명을 전해줬다. 이명박 시장의 왕팬이란 아줌마는 이렇게 말했다. “남자가 박력이 있어야 하잖아요. 이 시장은 22만 명이나 된다는 청계천 주변 상인들이며 수시로 데모하는 노점상들을 설득해 청계천을 뒤집었잖아요. 한다면 한다! 이런 정신도 멋있구요. 또 좀 잘난 척하는 것 같긴 해도 대통령이건 누구건 무서워하지 않고 소신 있게 말하는 것도 근사해 보여요. 무엇보다 집안은 가난한데 머리는 있는 이들이 거치는 길, 고시 공부하고 변호사 되어 정치하는 과정을 안 밟고 말단 회사원으로 시작해 사장 자리에 오른 게 마음에 들어요. 물론 미남은 아니지만….” 「신화는 없다」란 그의 자서전에는 물론 드라마 ‘야망의 세월’ 등에서 그의 소년기와 청춘기가 묘사된다. 제일 공부 잘하는 형만 밀어주느라 동생들은 고등학교조차 못 보내는 가난한 집안. 야간 상고에 적을 두고 생계를 유지하느라 10대에 온갖 장사를 다 해본 것이 소년 이명박이다. 그런데 그는 고시 공부를 하지 않은 것 역시 ‘너무 가난해서’라고 한다. “우리 집안이 권력에 한이 맺혀 출세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기도 했지만, 고시 공부를 하려면 공부에만 몰두하도록 누군가 먹여주고 입혀줘야 할 것 아닙니까. 난 밥값을 해결해야 해서 고시 공부할 엄두도 못 냈습니다.” 그렇게 얻어진 생활력으로 그는 현대건설의 신화를 이뤄냈고, 재산도 많이 축적했다. 지난해 그가 신고한 총 재산은 1백88억원에 이른다. 부럽기도 하지만 은근히 심술이 나서 “부자가 천국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데 돈이 너무 많은 것 아니냐”고 시비를 걸었다. “부자라는 건 나의 자랑입니다. 난 특히 청년들에게 열심히 노력하면 나처럼 출세도 하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싶습니다. 가난을 목표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난 정치인들이 재산 없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을 도와줄 돈도 못 벌어본 사람들이 누굴 위해 무슨 일을 하겠다는 겁니까?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가 돈 많다고 욕을 먹던가요? 부자가 욕을 먹는 사회는 그만큼 부패하고 폐쇄적이란 뜻입니다.” 돈 많다고 자랑하면서 나눠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너무 자신만만하고 당당해서 좀 얄미워 보이는 이명박 시장. 하지만 자꾸 이야기를 하다 보니 처음에는 못생겨 보이던 그의 얼굴이 잘생기게, 심지어 섹시하게 보였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열정과 자신감이 그를 빛나게 하나보다. Profile 경향신문사 「뉴스메이커」 편집장인 유인경 기자는 MBC-TV ‘아주 특별한 아침’, KBS-2FM ‘해피 먼데이’ 등에 고정 출연중이다. KBS-1TV ‘아침마당’ ‘100인 토론’ 등에도 얼굴을 내밀고 있으며, 인간미 넘치는 입담으로 꽤 많은 아줌마 팬들의 환호를 받고 있다. 물론 아저씨 팬도 많다. 글 / 유인경(뉴스메이커 부장) 사진 / 김석구 기자(경향신문 사진부)
- 유인경기자가 만난 사람
- [직격인터뷰]10년 넘게 간도 회복을 주장해온 이명박 서울시장
- 2004. 02. 01 재테크
- 1987년, 이명박 서울시장이 TV 프로그램에 출연, 간도의 영토 주권을 역설하는 강연을 했다. “경제와 국방은 국제 협력의 문제지만 영토는 배타적, 즉 타협할 수 없는 사안입니다.” 이 시장을 1월 9일 서울 시장실에서 만났다. 그의 주장은 변함이 없다. “역사와 영토는 주체의식의 문제입니다.” 그는 곧 간도 문제에 관한 국제적 여론 환기를 위해 국제 심포지엄을 열 생각이라고 말했다. “남한은 북한에, 북한은 남한에 미룬다면 간도는 영원히 회복할 수 없다” 간도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계신데요 1980년대 후반 사업차 중국 동북 3성과 구소련 연해주 등에 나들이가 잦았습니다. 그때 ‘간도가 역사적으로 누구의 영향력 아래 있는 땅인가’하는 의문을 갖게 됐습니다. 역사학자도 만나고 TV에 출연하는 등 간도영토권에 관한 여론을 환기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1980년대 당시 간도 문제와 관련해 강조했던 점은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두 가지입니다. 우선 간도가 조선의 영토가 아니라면 일본과 중국이 굳이 간도협약을 맺어 영토 조약을 체결했겠느냐는 것이지요. 이는 간도협약이 국제법적 효력이 있느냐는 문제에 앞선 것입니다. 조선 땅이니까 일본이 양도한다고 협약한 것 아닌가요? 둘째, 조선인의 간도 이주는 현대의 이민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역설했습니다. 간도 문제를 포함한 우리 역사가 중국의 영향력 때문에 왜곡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만일 중국의 의도대로 된다면 우리나라는 큰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남북 갈등은 확산되고 남한 내부에서도 내홍에 빠져 개방화 시대에 대응하기 어렵습니다. 개방화란 단지 기업과 상품 진출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와 역사도 개방화에 부응할 수 있는 중요한 상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런 문제는 국가와 정부가 앞장서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기업만 해외에 나간다고 (개방화에 적절한 대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서울시의 대응 방안은 무엇인지요? 간도 고토(故土) 회복을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검토중입니다. 한국, 북한, 중국, 미국, 러시아 등 세계의 사학자가 참여하는 간도국제심포지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고구려 역사는 우리의 역사입니다. 고구려 고분은 북한의 요청대로 유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적으로 등재돼야 합니다. 세계문화유적은 1국 1문화재의 원칙이 적용됩니다. 서울의 고구려 역사 유적을 적극 발굴해서 고구려 역사가 한민족의 역사임을 알릴 것입니다. 그 일환으로 서울 아차산 일대 보루군(群)을 북한의 고구려 유적과 함께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을 추진할 생각입니다. 정부는 고구려 역사 왜곡 문제조차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데요 한반도 문제와 관련, 중국의 영향력과 역할이 너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는 정면 대결을 피하고 싶겠죠. 그러나 역사와 영토는 타협할 사안이 아닙니다. 독도 문제가 어떻게 됐습니까. 역사와 영토는 국가적 중요 이슈입니다. 주권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는 일본의 교과서 역사 왜곡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역사와 영토 문제는 뚜렷한 입장을 갖는 게 주체입니다.우리 정부는 너무 소홀히 대처하고 있습니다. 중앙 정부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북한도 한국 정부에서 간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제기하길 기대하고 있는 눈치입니다 남북공동의 문제입니다. 남한은 북한에 미루고 북한은 남한에 미룬다면 역사는 왜곡되고 영토는 영원히 회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학계에 하고 싶은 주문도 있을 텐데요 역사학계에서는 중국의 주장에 반박할 수 있는 논리와 근거를 찾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선 관련 연구자를 집결시키고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야 합니다 글/김경은 (뉴스메이커 기자) 사진/경향신문 포토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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