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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영의 연뮤덕질기](39) 사람답게 산다는 것
[이주영의 연뮤덕질기](39) 사람답게 산다는 것(2025. 01. 03 15:00)
2025. 01. 03 15:00 문화/과학
뮤지컬 <글루미 선데이>·연극 <타인의 삶> 등 연극 <타인의 삶> 공연 장면. 프로젝트그룹 일다 미로 같은 길을 지나 객석과 무대가 연결된 넓은 공간에 이르렀다. 중앙에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커다란 스크린이, 한쪽 테이블 위에는 먹거리가, 원형으로 둘려 있는 의자에는 방석과 봉제 인형이 놓여 있다. 경쾌한 음악이 흐르는 파티룸이다.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천장에 매달린 줄에 외투를 걸고 자리에 앉아 둘러보니 기묘하다. 안쪽에 모여 앉은 관객들과 뒤에 걸려 있는 외투들의 조합이 마치 ‘산 자와 죽은 자의 회합’ 같다. 파티극 <2024 망각댄스_4.16편> 10년(김수정·전웅 구성·연출, 극단 신세계 공동창작)은 티켓 판매와 동시에 전 회차가 매진됐다. 소규모 ‘파티극’과 ‘망각댄스_ 4.16 10년’이 어떻게 공존하는지 궁금해서다. 중3 아이 손을 잡고 들어선 공연장에는 관객 수만큼이나 많은 창작 출연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관객 한명 한명 감정 상태를 돌보기 위한 배려다. 사전에 문자로 공지돼 관객 대부분은 적극적으로 작품에 참여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 창작진들이 준비한 대본을 순서대로 낭독하며 ‘파티극’에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상식에 관해 묻는 파티극과 감청극 대본은 이미 알려진 팩트 중심의 나열이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부터 2024년 12월 말 공연 당일까지의 대규모 재난과 참사, 정치·사회적인 변화와 위정자들의 대처를 짧게 기록했다. 연극적인 요소는 연도가 바뀔 때마다 당시 유행 가요가 나오며 화려한 조명이 등장하는 정도다. 관객과 출연진은 스트레칭도 하고 물도 마시면서 쉬엄쉬엄 낭독에 임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연도가 진행될수록 평온했던 단체 낭독은 거대한 드라마 극으로 바뀐다. 관객 각자의 경험과 배경, 문제의식 등이 울먹이거나 분노하는 발성과 표정, 서로를 위로하고 다독이는 태도를 통해 공유되면서 예상치 못한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창작 초연 연극 <타인의 삶>(손상규 각색·연출, 이단비 드라마터그, 카입 사운드, 김종석 무대, 김형연 조명) 역시 현 시국에 대한 풍자와 상식적인 대처 방안을 제시하는 작품으로 입소문을 타 연일 매진이다. 2007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동명의 영화 감독이자 각본가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의 원작을 배우이자 연출가 손상규가 직접 각색해 초연을 올렸다. 비밀경찰과 감청 전문가가 수십만 명에 이르렀던 1984년 동독, 비즐러(윤나무·이동휘 분)는 자타가 공인하는 완벽한 사회주의자다. 연인관계인 작가 드라이만(정승길·김준한 분)과 여배우 마리아 질란트(최희서 분)를 감청하던 중 동독 장관 브루노 햄프(김정호 분)의 비행(非行)을 알게 된다. 생존을 위해 브루노에 성적으로 부역하는 마리아의 고통과 예술가로 살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드라이만의 현실에 고뇌하던 비즐러는 어느새 이들을 비호하는 역(逆)감청 시스템을 만들어 간다. 무대는 6개의 의자와 몇 개의 간단한 소품이 전부다. 명확한 무대예술과 조명디자인, 강력한 캐릭터성과 전달력은 관객을 사로잡는다. 감청 행위를 여러 각도의 조명을 활용해 거대한 그림자극으로 연출한 부분은 비밀경찰에 대한 공포감을 극대화한 명장면이다. 독일 통일 이후 생존한 드라이만이 자신도 감청을 당했고, 동시에 보호받았음을 깨닫는 순간 역시 압권이다. 그의 집 천장과 벽에서 쏟아지는 폐쇄회로 라인들이 똬리를 튼 뱀처럼 바닥에 꿈틀거리고 비즐러가 각색한 감청 기록 문서가 산더미처럼 쏟아진다. 연극이기에 가능한 감정적 스펙터클이다. 뮤지컬 <글루미 선데이> 공연 장면. 네오 프로덕션 창작 초연 뮤지컬 <글루미 선데이>(성종완 작·작사, 김달중 연출, 김은영 작곡, 남경식 무대, 조철민 조명)는 인간의 존엄에 대한 각자의 질문과 답을 제시한다. 헝가리 피아노 연주자 셰레시 레죄가 1933년 발표한 노래 ‘글루미 선데이’에 얽힌 실화가 바탕이다. 동명의 1999년 영화(롤프 슈벨 감독·닉 바르코프 원작)와 닮았으나 한국적인 창작 뮤지컬로 재해석돼 상징과 은유가 가득하다. 19세기 중반 헝가리 부다페스트 14구역. 요리 솜씨가 뛰어난 자보(최재웅·김종구·정문성 분)는 아름다운 집시 연인 일루나(이정화·허혜진·이지연 분)와 레스토랑을 연다. 피아노 연주자 안드라스(정민·유승현·홍승안 분)는 일루나에게 반해 즉석에서 곡을 만들어내고 ‘글루미 선데이’라고 이름 짓는다. 자보와 일루나는 그를 환영하고 세 남녀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한스(이진혁·반정모·홍기범 분) 역시 일루나에 반해 청혼하지만 거절당하고 자살을 시도했으나 자보가 살려낸다. 자보의 레스토랑에 유명인들이 드나들면서 안드라스의 곡은 음반으로 발매돼 인기를 끌지만 청춘의 자살을 유도한다는 오명을 쓴다. 존엄을 지키기 위한 선택의 기로 제2차 세계대전이 극으로 치닫고 독일 장교 한스는 레스토랑을 점거하며 압박한다. 안드라스는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자살을 선택하고 일루나는 자보를 살리기 위해 한스에게 모든 것을 내준다. ‘글루미 선데이’의 음률에 맞춰 작품은 시종일관 우울하고 느리게 진행된다. 어두운 조명과 안드라스의 피아노 연주는 당시 부다페스트 자보 레스토랑으로 시공간을 옮겨 놓는다. 회색조 미장센의 유일한 빛은 일루나와 대여섯 개 테이블 위에 놓인 꽃장식이다. 순수하고 평온했던 일상에는 붉은 꽃이, 위기와 죽음이 이어지는 과정에는 점차 흰 꽃이 놓인다. 파티극 <2024 망각댄스_4.16편> 10년을 통해 관객들은 두 번의 탄핵 정국과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까지 떠올리며 깨닫는다. 연이은 사회적 재난은 정치권의 무능한 원인 규명과 대처에서 싹트는 악순환임을. 출연진들은 공연 말미, 이 위험하고 답 없는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생존 중인 관객을 위한 축하 파티를 연다. 희생자들을 향한 역설적인 애도의 퍼포먼스다. 출연진들이 환호하며 ‘생존 축하 파티’를 진행할수록 관객들은 오열한다. 분노와 고통의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위로하고 희생자들을 애도한다. 말 그대로 ‘죽은 자와 산 자가 서로를 위무’하는 ‘파티극’이다. 더불어 옮고 그름, 상식과 비상식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행동에 옮긴 한 비밀경찰의 작은 항거이자 연대를 다룬 <타인의 삶>과 각자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여러 결단을 담아낸 <글루미 선데이>는 2025년 을사년(乙巳年) 새해를 맞는 우리들의 심연 어딘가와 맞닿아 있다. 새 을(乙)과 뱀 사(巳)는 서로 만나 상충하지만 이를 통해 새로운 변혁과 조화를 끌어낸다는 초심의 글자들이다. 파티극 <2024 망각댄스_4.16편> 10년은 상연이 끝났다. <타인의 삶>은 1월 19일, <글루미 선데이>는 1월 26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의 연뮤 덕질기
“산재 인정은 기적”…이주노동자 유족의 지난한 2년
“산재 인정은 기적”…이주노동자 유족의 지난한 2년(2024. 12. 30 06:00)
2024. 12. 30 06:00 사회
유족과 베트남 공동체의 노력으로 힘겨운 법정 싸움 끝 승소 판결 건설현장의 불법·정부기관 부실 조사로 잊힌 죽음 다시 밝혀내 민주노총 전국건설노동조합이 2021년 4월 서울 중구 덕수궁길에 ‘산재 사망 건설노동자 시민 분향소’를 설치했다. / 권도현 기자 “좀더 버텨볼게. 혈압이 떨어지는지 눈앞이 빙빙 돌고 힘이 하나도 없네.”(즈엉 반 응웬) “이번 일 끝나면 힘들지 않은 일당 자리를 찾자.”(김윤정씨) 김윤정씨(35)가 남편 즈엉 반 응웬과 나눈 대화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2022년 11월 18일, 두 사람이 문자메시지를 나눈 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응웬은 일터에서 쓰러졌고, 이내 사망했다. 부검 결과 사인은 급성 심장사. 당시 응웬은 32세였고, 아이는 첫돌도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이 때문에, 아이를 위해서, 아이가 있어서 힘을 냈어요.” 지난 2년간 윤정씨는 응웬의 죽음이 산업재해였음을 인정받기 위해 싸웠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싸움이었다. 애초에 돌연사는 한 해에 산재로 인정되는 사례가 17건(2022년 기준)에 불과할 정도로 산재 인정이 드물게 이뤄진다. 더구나 응웬은 불법 하도급이 만연한 건설업에서 일했다. 그가 일한 시간을 증명할 서류는 형식적으로만 작성돼 있었고, 응웬이 ‘진짜 일한 시간’을 증언해 줄 동료들은 일감을 찾아 이 현장 저 현장을 떠돌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베트남 출신의 응웬은 흔히들 ‘불법’이라고 말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였다. 때문에 윤정씨와 사이에 아이를 얻고도 혼인신고를 하지 못했다. 역시 베트남 출신으로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윤정씨는 자신이 응웬의 ‘유족’이 맞다는 걸 입증한 이후에야 본격적인 산재 인정 여부를 다툴 수 있었다. “기적이에요.” 윤정씨의 지난한 싸움을 도왔던 원옥금 이주민센터 동행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행정법원은 2024년 12월 19일 응웬의 죽음이 산재임을 인정해 달라며 윤정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윤정씨의 손을 들어줬다. 원 대표의 말에 담긴 것은 가까스로 산재가 인정됐다는 안도감만이 아니다. 이주노동자들이 더 비공식적이고, 더 힘들고, 더 위험한 일을 도맡고 있지만, 사고가 일어났을 때 구제 가능성은 기적에 가까울 만큼 비현실적으로 적다는 한탄이 담겼다. 응웬의 죽음과 윤정씨의 싸움은 한국사회의 일면을 보여준다. 일을 시키면서도 일하는 사람을 책임지지 않는 회사, 다단계 하도급과 불법이 일상이 된 업계, 이 구조의 제일 밑바닥에서 과중한 업무를 떠안는 이주노동자들, 이런 모든 구조적인 모순에도 불구하고 회사가 제출한 형식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산재가 아니라고 판단하는 정부기관. 한국사회의 이 고착된 구조를 뚫고 응웬의 죽음의 원인을 밝혀낸 건 베트남 이주민 공동체였다. 더 위험하고 더 힘든 일로 딸과 함께 차에 타고 있는 생전의 즈엉 반 응웬. 응웬은 2022년 11월 32세의 나이로 건설현장에서 숨을 거뒀다. 유족 제공 2019년 한국에 입국한 응웬은 건설현장 철근공으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왔다. 체류 자격 없이 일한 미등록 노동자였다. 철근공은 철근을 운반해 자르고 구부리고 묶어 벽이나 바닥이 될 곳에 넣고 고정한다. 무거운 철근을 다루는 일이라 팔꿈치나 무릎에 무리가 가기 십상이다. 응웬이 마지막으로 일했던 곳은 인천 검단의 아파트 건설 현장이었다. 응웬은 2022년 11월 5일부터 숨을 거둔 11월 18일까지 열흘 정도 이곳에서 일했다. 이전처럼 철근공으로 일했지만 일하는 방식이 달랐다. 철근공들이 모인 팀인 ‘석방팀’의 일원으로 일했기 때문이다. 석방팀은 건설업체로부터 일감을 따낸 팀장이 팀원을 모집해 꾸린다. 일한 시간이 아니라 작업한 면적에 따라 보수를 받는다. 일종의 도급이다. 철근공들이 철근을 채우면 콘크리트를 타설해 벽과 바닥을 만드는 공정이 이어지는데, 이 공기를 맞추기 위해 석방팀이 활용된다. 석방팀에 일을 맡기는 건설업체는 석방팀이 몇 명이고, 어떻게 일하는 지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오로지 요구하는 건 정해진 시간 내에 일감을 끝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석방팀은 일감이 많은 날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 늦게 퇴근하고, 쉬는 시간이나 식사 시간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일에 매진한다. 건설업체가 정한 마감 시한을 지키기 위해 일하는 속도에 대한 압박이 심할 수밖에 없다. 일감이 너무 많으면 석방팀장이 사람을 더 구하기도 하는데, 사람이 늘수록 개개인이 가져가는 몫은 줄어든다. 일이 고된 석방팀의 유일한 장점은 후한 보수였다. 일당직 철근공으로는 하루에 17만~19만원을 벌었지만, 석방팀으로 일한 열흘간 응웬은 하루평균 27만원을 벌었다. 응웬도 석방팀 일이 힘든 걸 알았지만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했기에 이 일을 시작했다. 2022년 1월 응웬과 윤정씨 사이에 딸이 태어났다. 응웬은 미등록 이주노동자였기에 윤정씨와 혼인신고도 할 수 없었고, 딸을 호적에 올릴 수도 없었다. 한국 국적이 있는 윤정씨와 혼인신고를 하면 결혼비자를 받을 수 있지만, 그전에 미등록으로 지냈던 기간만큼 범칙금을 내야 했다. 제반 비용까지 합치면 3000만원가량이 필요했다고 한다. 합법적인 가족으로 살기 위해 시작한 일은 끝내 응웬의 목숨을 앗아갔다. 응웬은 처음 경험하는 석방팀의 업무 속도를 버거워했다. 다음날 콘크리트를 타설한다는 공사 일정이 나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안에 일을 끝내야 했다. 응웬은 석방팀에서 일을 시작하고 주변에 “팀장의 눈치가 보이고 팀원들에게 미안하다”, “다른 일을 알아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응웬의 베트남 출신 동료 A씨는 법원에 제출한 진술서에서 “응웬은 석방팀의 일원으로 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이런 방식에 적응을 못 해서 많이 힘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사망 당일 아내 윤정씨에게 “아침부터 힘이 없다”고 말했던 응웬은 팀장에게 조퇴 의사를 밝혔다. 전날 팀원 한 명이 그만둬 안 그래도 인력이 부족한 터라 팀장은 처음엔 난색을 표하다 응웬의 상태를 보고 조퇴를 허락했다. 그러나 응웬은 택시를 잡는 방법을 몰랐고, 결국 다시 현장으로 복귀해야 했다. 몸이 보내는 위험신호를 참고 일하던 응웬은 이날 오후 3시쯤 쓰러진 뒤 이내 사망했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죽음 윤정씨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베트남어로 “한국말에 혼백이 날아간다는 말이 있나요. 너무 황당하고 기가 막혀서 심장이 벌렁거렸어요”라고 했다. 윤정씨는 황망하게 응웬의 장례를 치렀다. 응웬과 근로계약서를 쓴 전문 건설업체에서는 단 한 사람이 장례식장을 찾았다. 윤정씨는 “딱 한 명 찾아왔어요. 사장은 아니고 팀장 위에 있는 사람이래요. 힘내라는 격려 한 마디 없었어요. 일 때문에 사망한 것 같은데 장례비만 주고 그 후에는 모른 척했어요. 그 회사 이름을 아직도 제대로 몰라요”라고 했다. 응웬조차 자신과 근로계약서를 작성한 회사의 이름은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불법 하도급을 숨기기 위한 형식상 계약이었기 때문이다. 건설산업기본법은 일감을 따낸 수급인이 다시 일감을 떼주는 재하도급을 원칙적으로 금지한다. 법이 허용하는 것은 ‘발주처-종합건설업체(원청·시공사)-전문건설업체(하도급)-건설노동자’로 이어지는 계약구조다. 때문에 응웬은 표면적으로는 전문건설업체 B사와 근로계약을 썼다. 그러나 실제로는 ‘철근사장’이라는 인물로부터 재하도급을 받은 석방팀의 일원으로 일했다. 실제로 석방팀이 몇 단계의 재하도급을 거쳤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기형적인 고용구조는 회사가 사망한 노동자에 대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책임감마저 희석한다. 응웬의 죽음은 한동안 산재가 아닌, 경찰이 조사하는 변사사건으로 다뤄졌다. 윤정씨도 “응웬이 미등록이니까” 산재보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산재를 신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산재보험 가입자는 개별 노동자가 아니라 사업장이다. 사업장에서 일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급권이 있다. 윤정씨는 지인의 귀띔에 뒤늦게 산재 신청을 했지만, 한국어가 유창하지 않은 그에게는 무엇 하나 쉽지 않았다. 혼인신고가 안 된 상황에서 응웬의 유족임을 밝히기 위해 돈을 빌려 딸의 유전자 검사까지 해야 했다. 윤정씨는 “결혼을 안 해서 사실혼이잖아요. 각종 서류를 준비하는데 돈이 많이 들어갔어요. 엄청 복잡하고 힘들었어요”라고 했다. 급성 심장사 등 돌연사가 산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단기간 업무 부담이 늘었거나, 사망 전 12주 동안 주당 평균 노동시간이 60시간을 초과했다면 산재로 인정될 가능성이 크다. 얼마나 오래 일했는지를 입증하는 게 첫 관문인 셈이다. 그러나 불법하도급이 만연한 건설업의 제일 밑바닥에서 일했던 응웬의 경우에는 노동시간을 정확히 산출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다. 베트남 결혼 이주여성이기도 한 원옥금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제조업처럼 한 곳에서 일하면 알기 쉬운데, 건설업은 어느 현장에서 일했는지를 찾아내는 것도 힘들었어요. 기껏 일한 현장을 찾아내도 며칠 나오다가 며칠 안 나온 경우가 있어요. 그러면 그때는 다른 현장에서 일했을 수 있는데 찾을 수가 없어요. 고인 휴대전화를 다 뒤져보고, 현장 찾아서 동료들 이야기를 듣는 걸 반복했어요.” 근로복지공단은 2023년 11월 “발병 전 12주 동안 1주 평균 업무시간은 37시간 7분”이라며 응웬의 죽음이 산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응웬이 사망 전 열흘 동안 석방팀에 근무하면서 단기간 업무량이 급증했다는 점은 고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단은 회사 측이 제출한 자료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다. 예컨대 회사 측은 해당 건설현장의 노동자들이 점심시간을 포함해 하루 2시간을 쉬었다며 응웬이 일한 석방팀도 2시간을 쉬었다고 주장했다. 공단은 이 주장을 바탕으로 응웬의 근무시간에서 하루 2시간씩을 일률적으로 뺐다. 그러나 석방팀은 높은 노동강도로 인해 하루 두 차례 10분가량 쉬는 것이 전부였고, 점심시간도 30~40분만 주어졌다. 공단 측의 조사는 충실했다고 보기 어렵다. 공단의 요양업무처리규정은 심장질환 등을 조사할 때 동료근로자 등의 진술을 확보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그러나 응웬이 일한 석방팀의 팀장이었던 베트남 출신 노동자 C씨는 법정에서 “제가 알기로는 (근로복지공단에서) 팀원 가운데 누구도 부르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조사 과정에서 회사는 거짓도 섞었다. 회사 측은 응웬의 가슴에 수술 자국이 있다며 기존 병력이 있었을 가능성을 암시했다. 그러나 부검 결과 응웬의 가슴에서는 아무런 수술 자국도 발견되지 않았다. 윤정씨는 “남편이 사망하고 아무 도움은 못 줄망정 거짓말하고 책임 회피하는 것이 너무 분했다”고 말했다. 2년 만의 산재 인정 대부분의 이주노동자 유족과 달리 윤정씨는 공단의 산재 불인정 판단에도 불구하고 소송을 택했다. 원옥금 대표, 사건을 맡은 박다혜 변호사와 함께 응웬의 죽음을 증언해 줄 동료들을 찾아 나섰다. 마지막 현장에서 함께 일했던 이들과 어렵게 연락이 닿았다. 그들이 새로 일하고 있는 현장에서 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밤늦게 만나 증언을 수집했다. 다행히도 석방팀원들 대부분이 윤정씨와 말이 통하는 베트남 노동자였다. 이는 일이 고단한 철근공, 그중에서도 힘든 석방팀 일을 사실상 이주노동자들이 도맡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응웬과 열흘간 함께 일한 것이 인연의 전부인 A씨는 흔쾌히 진술서를 써줬다. A씨는 진술서에서 “응웬은 철근공으로 일해왔지만 일당으로만 일을 했습니다. 석방팀은 도급이라 아침 체조도 생략하고 정해진 근무시간도 없습니다. 늘 빨리하라고 재촉받고 진도가 늦으면 안 되니까 최대한 빨리 일을 해야 합니다. 일당으로 일하는 것보다 훨씬 힘듭니다”라고 했다. 석방팀장이었던 C씨는 바쁘게 일터를 오가는 와중에도 진술서를 쓰고,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진술도 했다. 그가 인천 검단 현장에서 일한 내역을 기록한 노트는 응웬의 업무강도를 입증하는 주요 증거가 되기도 했다. C씨는 진술서에서 “응웬씨가 죽은 날은 일이 많고 한 사람이 일을 나오지 않아서 작업량이 더 많았습니다. 응웬씨가 몸이 피곤하고 힘들다고 일찍 퇴근하고 싶다고 했는데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응웬씨가 쓰러진 후에 팀원 4명을 더 충원해서 불렀습니다”라고 했다. 동료 A씨가 베트남으로 귀국하면서 한때 연락이 끊기기도 했다. 원옥금 대표는 페이스북에 응웬의 동료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고, 이 편지가 베트남 공동체를 통해 알음알음 전파되면서 다시 A씨와 연락이 닿게 됐다. 원 대표는 “같이 일했던 동료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일이 힘들어서 사망했는데 아무 보상도 없다는 걸 직접 눈으로 본 사람들이었다. (동료들이) 자신들도 그런 일을 겪지 않을까 걱정되고 무서운 마음도 있고, 미등록(노동자)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권리라는 게 있으니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적극 도와줬다. 산재 인정이 되고 동료들에게도 바로 알려줬다. ‘너무 기쁘고 다행스럽다’고 하더라”고 했다. 서울행정법원 재판부는 석방팀의 특성으로 인해 업무강도가 급증했다는 유족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사망 직전 고인에게 급격하고 과도한 육체적 부담과 스트레스가 있었다고 보이고, 이로 인해 급성 심정지가 발병, 사망에 이르렀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현장의 불법, 정부 조사 기관의 실패로 잊힌 죽음을 유족과 베트남 공동체의 노력으로 다시 밝혀냈다. 박다혜 법률사무소 ‘고른’ 변호사는 “원옥금 대표님이 통·번역 지원을 해주셨다. 그런 지원이 없이 이 사건을 맡았다면 동료 노동자들을 수소문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고, 어디서 일하는지를 알아도 소통이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불법 하도급이라 형식적인 근로시간만 기록돼 있고, 실질적으로 어떤 노동을 했는지는 가려져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근로복지공단의 역할이 필요한데 충실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 사건을 다룰 때 공단의 역할을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특집
[이주영의 연뮤덕질기](38) 팬덤으로 거듭난 세계 속 한국 뮤지컬
[이주영의 연뮤덕질기](38) 팬덤으로 거듭난 세계 속 한국 뮤지컬(2024. 12. 20 15:00)
2024. 12. 20 15:00 문화/과학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위대한 개츠비> 등 브로드웨이에 진출한 한국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공연 장면 / 유튜브 채널 영상 캡처 한국적 민주주의의 새로운 실천양식으로 부상한 K팝 팬들의 ‘응원봉 시위’가 화제다. 정치학자인 한나 아렌트가 저서 <인간의 조건>에서 명시한, 진정한 자유를 위한 ‘정치적 행위’에서 ‘팬’들의 연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하는 나날이다.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와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 중국 상하이 등에서 한국 뮤지컬이 자리를 잡아가는 것도 ‘덕후’(열성팬)들의 관심과 연대가 피워올린 나비효과다. 평단과 관객들의 호평을 받으며 오픈런(작품성과 흥행성을 인정받아 무기한 상연) 공연 중인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과 <위대한 개츠비>, 상하이대극원(중국 최초의 오페라 전용극장)에서 매년 공연 중인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등은 초연부터 팬덤(특정 분야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창작·제작진과 관객들의 열정으로 지금에 이르렀다. 한국적 팬덤이 세계화의 뿌리 지난 10월 프리뷰 기간을 거쳐 11월부터 브로드웨이 벨라스코 극장에서 오픈런 공연 중인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박천휴 작·작사, 윌 애런슨 작·작곡, 마이클 아덴 연출)은 발랄하면서도 애잔하다. 인간을 보좌하는 헬퍼봇이지만 수명이 다돼 덤덤하게 홀로 살아가던 올리버와 클레어의 따뜻한 인간애를 담았다. 브로드웨이 버전은 한국판의 상당 부분을 반영했다. 한국적인 배경과 서사, 영상에 사용되는 한국어 문구까지 그대로 장면화했다. 400석 미만 소극장의 3인극은 브로드웨이로 가면서 1000석 규모의 4인극으로 바뀌고 조명과 소품으로 구분한 올리버와 클레어의 공간은 두 개가 됐다. 라이브 재즈밴드는 6인 규모로 뒤에 자리를 잡아 등장인물과 소통한다. 아날로그 정서는 유지하되 사랑을 확인하기 전 망설이는 안타까움은 덜고 1960년대 재즈 음반과 화분, 반딧불이로 대변되는 낭만을 보탰다. 진입장벽 높은 브로드웨이에서 처음부터 1000석 규모에 오픈런으로 출범한 것도 특별하다. 브로드웨이에서 첫선을 보이는 작품 중 10% 정도가 장기 공연에 들어가는 경향을 감안하면 큰 혜택이자 도전이다. 초연부터 꾸준했던 한국과 아시아 각국 라이선스 공연의 팬덤 덕이다. 티켓 사이트를 찾아보니 프리뷰 공연이 시작된 지난 10월부터 호평 일색으로 연말 몇몇 회차는 매진이었다. 1700석 규모의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주당 100만달러(약 14억4000만원) 이상의 매출을 20주 연속 달성한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제임스 하울랜드 작곡·마크 브루니 연출·신춘수 총괄 프로듀서)는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원작을 각색한 초호화 쇼뮤지컬이다. 19인의 재즈밴드 라이브 연주자들을 비롯해 1년 넘게 프리뷰 단계부터 함께해온 앙상블은 이 작품의 세계관으로 작동한다. 덕분에 프리뷰 기간 관객 반응을 보며 상당 부분 수정한 후 브로드웨이에 최적화한 작품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문학작품으로 공감대 형성 첫사랑이지만 유부녀인 데이지를 잊지 못해 매일 파티를 여는 개츠비의 삶은 2막 중반까지 화려하다. 데이지 부부와 주변 인물로 대표되는 무기력한 상류층의 사건·사고와 개츠비의 정체가 드러나고 파국으로 치달으면서 화려함은 공허함으로, 1920년대의 혼돈은 동시대의 혼돈으로 치환된다. 기존의 동명 영화나 뮤지컬과의 차이는 데이지를 비롯한 여성 캐릭터에게 목소리를 부여한 점이다. 데이지의 속내가 담긴 넘버들은 이 프로덕션만의 재해석이다. 빌보드 캐스트 앨범부문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OST가 인기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상하이대극원에서 매년 상연하는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공연 장면 / 상하이대극원 제공 호평과 흥행성적은 그대로 런던 웨스트엔드 진출로 이어졌다. 2025년 4월에는 2300석 규모 런던 콜리세움에서도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가 동시 상연될 예정이다. 단독 리드 프로듀서인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가 브로드웨이 현지에서 직접 섭외한 창작·출연진들은 대본 개발부터 프리뷰 공연까지 한 스텝씩 밟으며 지금에 이르렀다. 신춘수 대표 혼자 리드하고 책임지는 시스템이다. 위험도가 높은 만큼 결정은 빨라 기획한 지 4년여 만에 지금의 반향을 끌어냈다. 십수 년 다양한 시행착오를 거친 신춘수 대표의 경험에서 비롯된 도전이다. 지난 10월부터 11월까지 상하이대극원에서 100회 기념 공연을 한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김경주 작·작사, 오세혁 각색·연출, 이진욱 작곡)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한국 창작 뮤지컬이다. 방대한 원작은 문체까지 압축한 대사와 넘버, 연기 등으로 시각화돼 원작보다 더 강렬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죽음과 삶을 넘나드는 매개로 사용되는 흙, 물, 회칠 분장, 광기의 안무, 다채로운 조명 디자인은 이 작품의 정동(情動·신체 변화가 잇따르는 강렬한 감정 상태)이다. 아버지 표도르의 광기와 네 아들의 전혀 다른 경련이 대표 넘버인 ‘헛소리’로 시각화된 4분은 맹수 같은 다섯 남자의 노랫말 전투를 보는 듯하다. 2018년 국내 초연 이후 네 번째 시즌에 이른 이 작품은 2022년 중국 상하이대극원이 라이선스 계약 후 자체 제작하면서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거듭났다. 한국에서는 중소극장에서 2개월여 상연했으나 상하이대극원에서는 600석 중극장을 거쳐 1500석 대극장 공연으로 확장됐다. 여러 도시 순회공연을 통해 중국 내 팬덤이 커지면서 팬들의 2차 창작이 이어지고, 독서 토론 등으로 열기가 지속하고 있다.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의 오리지널 연출이자 중국에서 새로운 작품을 공동창작 중인 네버엔딩플레이 오세혁 대표는 필자와 지난 12월 13일 e메일 인터뷰에서 “상하이대극원과 대극장 뮤지컬 <세이킬로스>, 나오인과 중극장 뮤지컬 <위험한 연민> 등을 개발 중”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 뮤지컬의 해외 진출이 활발해지는 현상에 대해선 “해외 뮤지컬 시장에서 한국 창작진과 제작진은 계약조건 이상으로 헌신하고 협력한다. 계약 관계를 넘어 동반자 관계로 발전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며 “사람 대 사람으로 접근하는 태도가 한국 뮤지컬의 저력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모든 예술 활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간극을 메우며 사람 대 사람의 관계를 중시하는 태도다. 해외에서 장기공연에 들어간 한국 뮤지컬은 대부분 열정적인 창작진들과 관객의 연대가 활성화돼 있다. 미디어 학자 헨리 젠킨스는 연구자이면서 게임과 영화 등의 광팬인 자신의 정체성을 들여다보며 아카팬(Aca-Fan·아카데믹 팬의 줄임말) 개념을 도출했다. 그는 스스로 “두 세계 사이의 격차를 메우는 존재”이며 “소비자와 시민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더 큰 공간을 여는 방법을 찾는 것을 도전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응원봉’을 들고 잘못된 것에 대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광장에 모인 K팝 팬들과 좋은 작품을 알리고 함께 느끼고자 하는 뮤지컬 팬들은 ‘더 큰 공간을 함께 연다’는 점에서 같은 지향점을 가진 아카팬들이다. 이 글에서 언급한 작품들의 최신 공연 클립들은 모두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이주영의 연뮤 덕질기
[이주영의 연뮤덕질기] (37) 위기에서 빛나는 우정의 연대
[이주영의 연뮤덕질기] (37) 위기에서 빛나는 우정의 연대(2024. 12. 06 15:40)
2024. 12. 06 15:40 문화/과학
뮤지컬 <긴긴밤>·연극 <사일런트 스카이> 뮤지컬 <긴긴밤>의 노든과 새끼 펭귄 장면 / 라이브러리컴퍼니 이미 여러 번 읽은 루리 작가의 <긴긴밤>(2021·문학동네)을 뒤적이며 ‘긴긴밤’을 지새웠다. 과거 악몽이 되살아나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살아생전 다시 겪을 일 없을 거로 생각했던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12·3 비상계엄 사태)는 44년 전 트라우마를 들쑤셔 놓았다. 비상계엄을 글로 배운 중학생 아이가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묻는다. 희망과 절망이 교차한 ‘서울의 봄’(1979년 10월 26일~1980년 5월 18일 전국적 민주화운동)과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 이야기를 복기했다. 아이는 대통령이 발호하는 비상계엄이 준전시 상황임을 인식하고 계엄군이 국회에 진입하는 뉴스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뮤지컬 <긴긴밤> 흰바위 코뿔소 노든의 가족을 공격한 밀렵꾼을 대하는 새끼 펭귄의 분노와도 같다. <긴긴밤>(양소영 작·작사, 박보윤 작곡, 황희원 연출, 이철 무대)은 루리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 동화가 원작인 창작 초연 뮤지컬이다. 200석 남짓한 작은 무대는 반타원형 초원이 덧대어진 시공간 융합 공간이다. 아프리카 평원부터 사막, 도심 동물원, 거대한 바다와 물웅덩이, 습지 등 이야기가 진행되는 지구 곳곳의 공간이 시간대를 넘나들며 진행된다. 오묘한 공간에 편안한 면바지와 셔츠 차림의 새끼 펭귄(연지현·이정화·설가은 분)이 ‘따닥따닥’ 캐스터네츠를 울리며 등장한다. 자신의 아버지들인 흰바위 코뿔소 노든과 펭귄인 치쿠 및 윔보, 작은 ‘알’ 상태였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다. 아울러 작품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자신은 그냥 펭귄일 뿐 이름이 없는 점도 강조한다. 이 작품에서 ‘이름이 있다는 것’은 ‘동물원에 구속된 적이 있다는 것’이다. 펭귄은 이름이 없는 대신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감내해온 자유인임을 강조한다. 고통을 이겨내는 불면의 긴긴밤 흰바위 코뿔소 노든(홍우진·강정우·이형훈 분)은 코끼리 무리에서 자라났다. 아프리카풍의 삼바 리듬에 맞춰 춤을 추며 등장하는 어린 노든에게 코끼리 가족들은 “코가 길지 않아도 너는 훌륭한 코끼리야.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어”라고 덕담을 안긴다. 독립 후 가족을 이루어 살던 노든은 뿔을 탐내는 밀렵꾼에게 가족을 다 잃는다. 동물원에 갇혀 악몽 속 긴긴밤을 보내던 중 코뿔소 앙가부(박근식·박선영 분)가 얘기를 하면 나아진다고 조언하자 조금씩 마음을 연다. 마음껏 달리는 게 꿈인 앙가부를 위해 동물원 탈출을 계획하던 노든은 또다시 밀렵꾼에게 앙가부를 잃고 전쟁에 휩싸인다. 한쪽 눈을 실명한 치쿠(유동훈·이규학 분)는 ‘알’을 같이 키우던 친구 윔보를 잃고 함께 키우던 알을 보호하기 위해 노든과 동행한다. 알이 부화한 새끼 펭귄의 터전인 바다로 가기 위해서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대표 넘버 ‘바람보다 더 빠르게’에서 “바람보다 더 빠르게. 저 끝까지 달려가. 바람보다 더 빠르게 어디로든 달려”를 반복하는 것은 자유를 만끽하는 대신 책임을 지고 고독을 즐기겠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작은 무대지만 극에 빠져들수록 거대한 평원이 동시에 아른거린다. 앙가부와 노든의 질주 본능을 반영한 동선, 새끼 펭귄이 종국에 도달하는 거대한 바다는 조명과 음향만으로 벅찬 감동을 준다. 새끼 펭귄과 노든, 치쿠 등이 긴긴밤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면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이끌어준 우정의 연대 덕이다. 연극 <사일런트 스카이>(로렌 군더슨 작, 김민정 윤색·연출, 김종석 무대, 이수경 영상)는 사후 노벨 물리학상 후보자에 언급된 천문학자 헨리에타 레빗(1868~1921)의 삶과 동료들의 연대를 그린다. 헨리에타(안은진 분)는 대학 졸업 후 하버드대학 천문대에서 항성의 밝기를 검수하는 계산원으로 근무한 여성 천문학자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천체 망원경을 거의 만져보지 못했다. 당시 천체 망원경 조작은 남성들의 전유물이어서이다. 여성학자들이 볼 수 있는 것은 남성 천문학자들이 촬영한 사진 건판(Dry plate·빛을 받으면 검게 그을리는 용액을 바른 뒤 말린 유리판을 망원경 뒤에 끼워 넣어 별빛을 검은 반점으로 남긴 판)뿐이다. 연극 <사일런트 스카이>의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성운과 별무리 장면 / 국립극단 다른 존재의 인정 시너지 창출로 그는 왕성한 호기심과 끈기로 수년간 사진 건판 수천 장을 분석해 동료들과 변광성의 체계를 목록화했다. 맥동 변광성(맥박처럼 주기적으로 빛의 밝기가 변하는 별)인 세페이드 변광성(Cepheid variable star)을 분석해 또 다른 우주가 존재함을 입증해낸 것이다. 여성 참정권 투쟁이 겨우 거론되던 시대, 헨리에타는 많은 연구 업적을 이룩했음에도 주요 연구자로 학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사회적인 제약 속에서 동료들과 여동생 마거릿 레빗(홍서영 분)과 동료 피터 쇼(정환 분) 등은 그의 끈기와 연구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며 함께한다. 작품은 밤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처럼 시적이고 잔잔하다. 가족을 돌보거나 사진 건판을 분석하는 것이 전부였던 헨리에타의 삶을 무대화하기 위해 창작진은 그의 인생을 돌아보았다. 평생 흠모했던 천체 망원경 관측과 연구에 영감을 준 여동생 마거릿의 연주, 유럽 여행의 감동 등 그 삶의 인상적인 공간과 기억이 무대예술로 구현돼 마치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따뜻하게 반짝인다. 마지막 장면은 헨리에타가 평생 거의 만져보지 못한 천체망원경을 통해 별을 관측하자 무대 전체에 별 무리와 성운이 가득 영사되는 장면이다. 크리스마스트리로 상징하는 꿈의 실현 같다. <긴긴밤>은 고단한 삶과 사건 사고를 겪고 ‘긴긴밤’을 지새우던 등장인물들이 서로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이야기를 또 다른 누군가와 나누기도 하면서 고통을 극복하는 사랑과 연대에 대한 작품이다. 새끼 펭귄이 관객들에게 세 아버지 이야기를 전하는 것도 긴긴밤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일지 모른다. <사일런트 스카이>에서 헨리에타가 가장 의지했던 여성 천문학자 윌러미나 플레밍(박지아 분)과 애니 캐넌(조승연 분)과의 젊은 시절 에피소드는 이 작품에서 가장 활기 넘치는 장이다. 서로 다른 스타일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각자의 연구에 도움을 주던, 전혀 다른 존재들이 서로를 이해하며 시너지를 창출하는 과정이다. 명분 없는, 법리에 어긋난다고 평가되는 지난 12월 3일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3시간여 만에 여야 국회의원 190명의 동의로 해제됐다. 밤새 뉴스를 같이 본 아이와 새벽에 짧은 잠을 청했으나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 긴박한 역사적 퇴행은 일단 마무리가 된 듯하나 새로운 문제가 산적해 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우정은 친구와 적을 구별하지 않는 친구이면서 적이고 적이면서 친구가 될 수 있는, 친구와 적의 갈등과 해소를 동시에 포용하는 관계”라고 강조했다. 집단지성과 우정의 연대는 생각보다 큰 힘이 있다. <사일런트 스카이>는 12월 28일, <긴긴밤>은 2025년 1월 5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의 연뮤 덕질기
[이주영의 연뮤덕질기](36) 조각난 꿈에 대한 애도와 위로
[이주영의 연뮤덕질기](36) 조각난 꿈에 대한 애도와 위로(2024. 11. 22 15:30)
2024. 11. 22 15:30 문화/과학
연극 <붉은 웃음>·<전시의 공무원>, 뮤지컬 <홀리 이노센트> 등 연극 <붉은 웃음>의 120년 시공간이 융합된 무대 위에서 1인다역 중인 윤성원 배우. 더줌아트센터 ‘청운(靑雲)’은 ‘이상(理想)’을 의미한다. ‘청운의 꿈’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년기의 보석 같은 가능성이다. 누구나 한번은 큰 포부를 품고 나아간다. 그러나 한국 청년들의 현실은 암울하다. 청년 세대(19∼34세)의 5%인 54만여명이 고립·은둔자(한국보건사회연구원 고립·은둔 청년 실태조사 연구, 2021)에 속한다. 1인 가구 급증과 만연한 전세사기, 주식과 비트코인 급등락 등 불안정한 경제·사회 속 장기화한 고용불안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들 중 ‘청년 고독사’로 이어지는 경우도 매년 늘어 국가 차원의 대책 마련도 시급하다. ‘청운의 꿈’을 꾸어야 할 청년세대가 도대체 왜 고독사로 몰리고 있는 것일까? 창작 초연 연극 <붉은 웃음>(김정 연출·하수민 재창작·남경식 무대)은 2024년 11월 은둔·고립 청년의 심연을 들여다보면서 시작한다. <붉은 웃음>은 전쟁의 참상을 세밀하게 느낀 레오니트 안드레예프(1871~1919)의 소설을 2024년 한국에 빗대어 재창작한 1인극이다. 흙이 가득 채워진, 원초적이고 회화적인 무대는 두 개의 시공간으로 나뉜다. 왼쪽은 2024년 한국 청년의 고독사 현장으로 검은 봉지가 산처럼 쌓여 있다. 오른쪽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두 다리를 잃고 생환한 러시아 장교의 고독사 현장으로 백지 원고가 쌓여 있다. 120년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배우 윤성원은 과거와 현재 청년들의 심연을 여러 캐릭터로 대변한다. 극단적 개인화의 늪과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전쟁의 광기가 폭력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이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감각적으로 파고든다. 마치 그 시대, 그 캐릭터에 접신한 듯 냉철하고 광적이다. 새로운 양식의 예술적 씻김 2024년 유품 관리사로 분한 윤성원 배우는 흙더미 깊숙이 파묻힌 고인의 유품을 발굴하며 그의 고독과 공포를 되새긴다. 무대 뒤 가득 ‘내가 없어지면 누가 날 찾을까, 지금 보고 싶은 사람 없음, 먹고 싶은 것 던킨도너츠’ 등 고독사한 청년들의 파편이 여러 필체로 영사된다.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버스 타고 출근해서 일하는 것’이라는 속내가 드러나자 관객들은 비애를 삼킨다. 러·일전쟁에서 아군끼리 싸워 두 다리를 잃고 말라 죽어간 장교의 동생으로 분한 윤성원 배우는 잉크 없는 펜으로 수십장 기록한 형의 ‘백지 절규’를 흡입한다. 각 시공간의 폭력적 현실에 자아를 놓아버린 청년들의 심연은 윤성원 배우를 매개로 강렬한 신체 움직임과 발성을 통해 관객들의 심연과 맞닿는다. 흙더미를 파헤치며 구르거나 박차고 뛰어오르는 현대무용처럼, 혹은 발작처럼 반복되는 움직임은 천장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 속에서 전환기를 맞는다. 관객과 상호작용을 통해 매회 조금씩 다르게 재해석되는 (이승에 맺힌 원한을 씻고 극락에 가도록 이끄는) ‘예술적 씻김’이다. 연극 <전시의 공무원>에서 본분에 충실하려는 말단공무원 갑순(김려은 분)과 갑돌(김시유 분). ㈜파인플레이 연극 <전시의 공무원>(오세혁 작·변영진 연출·박성민 무대)에도 특별한 씻김이 등장한다. 여기서 애도하는 대상은 국가가 학살한 민간인과 위선 속에서 꿈을 상실한 주인공이다. 해방된 한반도에서 청운의 꿈을 안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갑돌(김시유 분)과 갑순(김려은 분)은 일제강점기 공무원으로 살며 회한만 남긴 부모 세대의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결심한다.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대통령 포함 고위 공직자들이 탄 피란 열차에 탑승해 위선으로 가득한 그들의 지시에 따르던 갑돌과 갑순은 보도연맹 명단에 있는 농부들을 학살하라는 지시에 고민하던 중 그들의 무고함을 깨닫는다. 성실하고 순박한 갑순과 갑돌은 장애가 있는 양민들을 부축하고 서로 부족한 것을 메꾸며 온기 가득한 피란 행렬을 이끌던 중 연합군의 경북 칠곡 다리 폭파 작전에 휩쓸린다. 민간인들이 모두 연합군과 국군에게 학살되는 현장을 목도해야 했던 갑순과 갑돌은 이들을 대신하는 무명천 인형들의 조각난 신체를 이어붙이며 통곡의 씻김을 수행한다. 기밀문서를 보관해 위정자의 기만을 폭로하려 한 갑순에게 위에서 시키는 대로 총구를 겨눈 갑돌의 딜레마도 잠깐, 결국 모두 죽음에 이른다. 출연진들이 관객과 무릎을 맞대며 격렬한 신체 연극으로 풀어낸 비애의 마당극은 모든 악기가 총동원되는 장엄한 한판으로 애도의 퍼포먼스를 마무리한다. 스크린으로 확장된 청춘의 비애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최양현 작·영상, 이태린 연출)는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을 배경으로 전북 남원 서도리 출신 스무 살 소년의 꿈이 어떻게 상실되는지 ‘극중극’으로 담아낸다. 첫 장면은 2023년 북 토크 현장이다. 노년의 최영우가 남긴 육필 원고를 다듬어 출간한 현재의 작가이며 최영우 외손자 이경현(김세환 분)이 최영우(김세환 1인2역)의 파란만장한 삶을 전하며 본격적인 라이브 필름 퍼포먼스 공간으로 전환된다. 사방에 라이브 캠을 들고 있는 카메라맨이 돌아다니고 배우들과 건물 및 인체 모형을 섬세하게 재현한 디오라마(diorama)와 무대 위 등장인물, 자료화면이 스크린에 실시간 상연된다. 일반 연극과 달리 등장인물의 감정이 시시각각 클로즈업돼 80여년 전 인도네시아 포로수용소와 재판정, 태평양 함선이 생동감 있게 와닿는다. 일본 패망과 함께 일본인으로 취급돼 전범 재판을 받고 인도네시아 형무소에 수감된 청년 최영우의 삶은 고향을 떠난 지 5년 만에 피골이 상접해 귀향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창작 초연 뮤지컬 <홀리 이노센트>(천유정·한재림 대본, 천유정 연출, 이나오 작곡, 김장연 영상)는 길버트 아데어의 동명 소설 원작 영화 <몽상가들>(2005)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1968년 프랑스 68혁명을 배경으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영화관에 상주하다시피 하는 영화 마니아이자 자유로운 영혼인 쌍둥이 남매 테오와 이사벨, 미국 유학생 매튜의 자아 찾기 탐색전이 시작이다. 혁명의 물결 속 폭력과 학살을 목도하며 침잠한 그들은 서로를 탐닉하고 방탕에 빠지지만 결국 세상의 부조리에 항거하는 것을 택한다. 일련의 갈등과 화합, 성찰의 미장센(화면구성)은 무대 전체를 감싼 하얀색 커튼에 영사되는, 시네필(영화광)이 사랑하는 영화들이다. 창작진들은 원작 소설에 언급된 영화의 편집 영상을 이용해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청년의 방황을 그렸다. 마지막 바리케이드에서 부조리에 저항하는 시위 중 스러진 매튜가 미국인 유학생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원작 소설, 영화와 다른 뮤지컬 창작진들의 재해석이기도 하다. <붉은 웃음>의 ‘붉은 웃음’은 광기와 허상이 점철된 기괴함이다. 죽은 자 위의 산 자, 산 자 위의 죽은 자가 뒤엉켜 공존하는 인간사에서 <전시의 공무원> 갑순과 갑돌이 반복해서 되뇌며 울부짖는 “밟지 마세요. 아버지가 밟히고 있네. 죽어서도 밟히고 있네”에 담긴 염원은 무엇일까. 나의 선의와 작은 꿈에 대한 바람을 알아달라는 아우성은 아닐까.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외치는 <홀리 이노센트>의 청년들과 꿈에서도 그리는 고향으로 향하는 기차 시간을 뇌리에 새기며 사는 조선인 최영우의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희망은 오로지 꿈을 향한 자유가 보장된 삶이다. 2024년 11월 현재 한국은 청년들의 소박한 바람에 응답할 준비가 돼 있는가. ‘청운의 꿈’에는 짝꿍처럼 따라붙는 요건이 있다. 바로 ‘자중자애(自重自愛)’다. 자기의 몸을 소중히 해 스스로 아끼고 가꾼다는 의미다. <붉은 웃음>·<전시의 공무원>·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는 오는 12월 1일, <홀리 이노센트>는 12월 8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의 연뮤 덕질기
[이주영의 연뮤덕질기](35) 평화를 향한 초국가적 연대
[이주영의 연뮤덕질기](35) 평화를 향한 초국가적 연대(2024. 11. 08 16:00)
2024. 11. 08 16:00 문화/과학
연극 <퉁소소리>·<햄릿>, 뮤지컬 <조로: 액터뮤지션> 등 연극 <햄릿> 공연 장면. 예술의전당 제공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전쟁이나 재난으로 고향을 떠나 타지를 떠도는 이들을 흔히 난민(難民·refugee), 이로 인해 타지에 정착하는 경우 ‘이주 난민’ 혹은 ‘디아스포라(Diaspora)’, 이중 정치적인 견해나 태도를 고수하며 중립에 있는 이들은 ‘경계인(境界人·liminality)’이라고 칭한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는 디아스포라의 역사이기도 하다.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장기전에 접어들고 북한 파병 문제가 국제적으로 대두되면서 일상을 돌아보고 반전운동을 각성하게 만드는 작품들이 상연되고 있다. 창작 초연 연극 <퉁소소리>(고선웅 각색·연출, 김대한 무대, 장태평 음악, 김시화 안무)는 임진왜란으로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이 30여 년간 동북아시아를 떠돌다 해후하는 대서사시다. 개막을 앞두고 있어 연습실에 찾아가 보니 동아시아 각국의 언어가 종횡무진이다. 한·중·일 언어는 기본이고 베트남어까지 대사로, 각국 전통 음률로 쏟아진다. 한국 공연인데 외국어 대사와 외국 전통 음악이 쏠쏠하다. 전쟁통에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 타국으로 흘러 들어가 겪는 사연들이라 언어와 무관하게 모두 이해된다. 원작은 조선 중기 문신 조위한의 소설 <최척전>(1621)이다. 1막은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으로 아내와 아들을 잃고 명나라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최척(박영민 분) 이야기가 중심이다. 옥영(정새별 분) 역시 남장을 한 채 남편을 찾아 헤매다 아이와 부모도 잃고 일본으로 떠밀려 간다. 서로를 그리워하며 연명하던 최척과 옥영은 상단을 따라 안남(베트남)까지 흘러갔다가 기적처럼 해후한다. 사연 마디마디를 구수하게 풀어내는 극 중 화자, 노인 최척(이호재 분)의 추임새가 한국적 풍취를 더한다. 한·중·일 언어에 능통한 이주 난민들 디아스포라에서 생존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외국어 실력이다. 최척과 옥영은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타국 문화에 대한 해박함으로 전쟁통에서도 자신을 지키고 가족을 찾아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도 마찬가지다. 연극 <최후의 분대장: 제1부 조선의용군>(김재엽 작·연출, 장호 무대, 한재권 음악)은 평생 경계인으로 살아온 독립운동가이자 소설가 김학철(1916~2001)의 삶을 통해 독립운동사에서 강제로 삭제됐던 ‘조선의용군’의 미시사를 생생하게 재현한다. 1940년 전후부터 해방기까지 중국 화북지역에서 활약한 조선의용군은 한·중·일 3개 국어에 능통한 청년 엘리트들이다. 중·일 전쟁기 자주독립을 목표로 일본군을 섬멸하기 위한 소수 정예부대로서 외국어에 능통해야 했다. 덕분에 위기를 기회로 삼아 승승장구하던 조선의용군은 마지막 전투인 중국 태항산 호가장 전선에서 대부분 전사한다. 다리 하나를 잃고 끝까지 생존한 김학철은 그가 보고 들은 모든 것, 밀정의 관여까지 그대로 문학작품에 남긴다. 대표적인 기록문학이다. <최후의 분대장>은 10대의 김학철(김시유 분)과 20대 이후의 김학철(김세환 분), 노년의 김학철(남명렬 분) 등 나이대별 3명의 김학철이 무대 위를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며 경계인으로서의 삶과 잊힌 역사를 증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시공간을 넘나들며 11명의 출연진이 한 번의 암전도 없이 180여 분간 일사불란하게 뛰어다닌다. 독립군가를 합창하는 최후의 결전 장면에서는 천장에서 내려온 여러 개의 작은 스크린에 기록영상과 가사가 영사돼 관객들도 손뼉을 치며 제창하게 된다. 잊힌 그들을 기억하고 전쟁의 냉혹함을 되새기게 하는 체험 장치들이다. 연극 <퉁소소리> 연습실 모습. 서울시극단 제공 위정자 각성에 좌우되는 민초의 삶 디아스포라의 초국적 연대는 문학을 바탕으로 한 작품에서도 다양하게 다뤄진다. 연극 <햄릿>(신유청 연출·강태경 번역·황정은 각색·이태섭 무대)은 노르웨이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권력의 정점에서 동생에게 독살당한 선황의 사연을 알게 된 덴마크 왕자 햄릿의 각성을 다루었다. 셰익스피어 원작에서는 아버지를 독살한 숙부와 결혼한 친어머니에 대한 원망으로 광기와 우유부단함이 교차하는 햄릿이다. 신유청이 연출하고 조승우가 연기하는 햄릿은 국제정세 속에서 부도덕한 위정자 클로디어스(박성근 분)가 자멸한 후 벌어질 연쇄 비극에 대해 냉철히 대비하는 모습을 다룬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춘 ‘이성적인 광기’의 <햄릿>이라고 할 수 있다. 2막 마지막, 모두의 죽음을 맞이한 후 자신도 죽어가는 순간 후회하는 햄릿(조승우 분)에게 친우 호레이쇼(김영민 분)는 “어긋난 시간을 바로잡고 계십니다”라고 응원한다. 햄릿의 죽음과 함께 위태롭게 기울어져 있는 무대 위 기둥 중 하나는 완전히 스러지고, 연이어 햄릿의 유언에 따라 노르웨이의 왕자 포틴브라스(송서유 분)가 등장해 수습에 나선다. 전쟁 없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생을 추스를 것으로 상상되는 정황이다. 뮤지컬 <조로: 액터뮤지션>(이사벨 아옌데 원작·크리스티안 더램 연출·홍승희 공동연출)은 19세기 초 스페인 식민지인 캘리포니아를 폭정으로 난도질한 친형 라몬(김승대·최세용 분)에 대항하는 동생 디에고(최민우·MJ·민규 분)의 이야기다. 권력욕이 없어 집시들과 어울리며 유유자적하던 디에고는 마스크를 쓰고 조로로 분해 폭군을 물리치고 민생을 되살린다. 전쟁과 폭력을 막으려면 강력하고 선한 위정자가 필요충분조건이라는 동화다. 액션과 플라멩코 군무가 인상적인 이 작품은 출연진이 모두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군무·액션을 소화한다. 폭정에 시달리는 민초의 억울한 삶은 디에고의 친우들인 집시 무리가 이주해 오면서 흥과 저항으로 대체된다. 악기를 들고 군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은 그간 상연된, 배우들이 연주자를 겸하는 액터뮤지션 작품들과도 차별화되는 본격 기예의 현장이다. 공연이 임박해 객석에 들어서면 출연진들이 관객과 소통하며 객석 앞에서 연주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다. 위정자들의 희생양인 민초가 풀뿌리 운동으로 살아남는 비법은 초국적 연대 속에서 목소리 내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라는 상징 같기도 하다. <햄릿>의 극중극 장면에서 햄릿은 “배우란 각 시대를 보여주는 연대기와 같다”고 강조한다.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은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고 유언했다. <퉁소소리>에서 옥영은 “하늘은 언제나 무심했지만 살아날 바늘구멍도 만들어 주었단다”라며 분연히 일어나 항해 준비를 하고 흩어진 가족들을 찾아 나섰다. 고선웅 연출은 라이브 국악 연주와 동아시아 각국의 민초가 국가를 초월해 서로 돕고 응원하는 초국가적 연대의 군무를 장면화한 것이다. 서로에 대한 연민과 사랑,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지만 않으면 언젠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가족애와 인류애에 대한 작품들이다. <최후의 분대장>은 상연이 끝났다. <햄릿>과 <조로: 액터뮤지션>은 11월 17일까지, <퉁소소리>는 11월 27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의 연뮤 덕질기
[이주영의 연뮤덕질기](34) 미래는 디스토피아? 유토피아?
[이주영의 연뮤덕질기](34) 미래는 디스토피아? 유토피아?(2024. 10. 25 15:30)
2024. 10. 25 15:30 문화/과학
연극 <모든>·<간과 강>, 뮤지컬 <애니>·<부치하난> 등 뮤지컬 <부치하난>에서 객석을 유영하는 고래 장면/ 라이브러리컴퍼니 ‘기승전 인공지능(AI)’ 세상이 도래했다. 2020년 이후 문화예술계 지원금이 AI와 논휴먼(non-human·비인간) 분야에 몰려서인지 관련 공연들이 다채롭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그려낸 세상이 대부분 디스토피아(dystopia·부정적인 측면을 극대화한 암울한 세계)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과학기술을 다룬 SF 장르와 디스토피아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생산성 향상과 삶의 편의를 도모하는 기술 지향적 현대인에게 자칫 균형을 잃으면 암울한 미래뿐이라는 경고와 자각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 챗GPT나 소형 AI 로봇이 일상에 스며드는 요즘 상연되는 관련 작품은 더이상 SF가 아니다. 너무 현실적이어서 가끔은 머리끝이 쭈뼛 서기도 한다. 인간다움 말소하는 AI 통제 사회 올해 상연된 관련 작품들의 면면을 돌아보니 이런 세계관을 다루는 작품은 대략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AI 지배 세상을 풍자하고 직시하는 작품들이다. 연극 <거의 인간>, <전기 없는 마을>, <아이들>, <모든> 등은 피폐한 미래를 돌본다. <거의 인간>은 한때 대세였던 작가가 딥러닝(인간의 두뇌활동을 흉내 낸 기계학습 방법)을 시킨 AI 작가가 인간을 대체하고, 인공 자궁이 보편화한 사회를 ‘막장 드라마’처럼 담았다. 폐허가 된 마을의 전기를 끊으러 다니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AI 로봇의 종말을 그린 <전기 없는 마을>, 원전 파괴 후 피폭된 청년 과학자들을 구하려는 원로 과학자들의 성찰을 담은 <아이들>, 소수의 인류만 거주하는 돔에서 초인공지능에 통제된 인간의 탈출을 그린 <모든> 등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사라지고 단절이 지속하면 더 이상 인간일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모든>은 초인공지능 라이카에 통제돼 통증마저 느끼지 못하는 미래인의 삶을 얇은 상자로 된 단칸방으로 대변한다. 인간들은 바로 옆에 모여 있지만 아무도 없는 것과 같다. 초인공지능이 인간들끼리의 연대와 대화는 분절화하고 시스템이 판단한 합리적 기계와의 결합만 채택하기 때문이다. 이를 자각한 인간이 시스템과 접속 해제를 시도하지만, 그것은 곧 죽음이다. 직접적인 대면, 즉 아날로그적인 만남보다 매체를 매개로 한 디지털 연결에 더 치중된 현대인의 삶(온갖 SNS와 미디어 연결은 기본인)도 이 가상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이미 디지털에 의존하기 시작한 삶은 초인공지능 등장과 동시에 더 강력히 구속될 수 있다는 경고다. 이 작품의 미장센(무대구성)은 특별하다. 큰 도구 없이 양 측면과 천장에 조밀하게 설치된 조명디자인으로 모든 세트를 대체했다. 공연이 끝난 후 폐기해야 하는 큰 도구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친환경적인 작품이다. 두 번째는 시스템이나 미디어에 의존한 인류의 공허함과 무기력을 담은 초현실주의 미장센을 내세운 작품들이다. 종말을 맞는 무기력과 분절적인 인간들의 심리를 감각에 의존해 다룬 연극 <간과 강>, 가부장에 대항해 젠더 평등과 다양성에 대한 인식 확장을 낙서로 표현한 <지상의 여자들>,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고전을 표현주의 미학으로 재해석해 19세기 말 종교와 억압에 대한 일탈을 그린 오페라 <탄호이저> 등이다. 연극 <모든>에서 AI가 통제하는 분절된 인간사회의 한 장면 / 국립극단 연극 <간과 강>은 한강이 보이는 낡은 아파트에서 외도하는 남편과 사는 무기력한 중년 여성의 일상을 컬트영화처럼 담아낸다. 집안에 생긴 싱크홀과 첫사랑이 인어가 돼 나타나는 설정은 기괴하고 분절적이다. 거대한 한강대교가 무대의 반 이상을 차지하며 전체를 가로지른다. 기울어진 무대 바닥 위에 설치된 침대와 테이블은 맥주를 들이켜는 과정에서 하나씩 사라진다. 그 와중에 주인공은 낚시도구를 쌓아놓고 누군가는 한강대교에 걸터앉아 낚시한다. 주인공 L의 첫사랑이 인어가 되어 등장하며 춤을 추는 마무리는 서사적 도약이 급박함에도 어쩐지 후련하다. 시스템 바깥의 삶에 대한 자각과 공포는 자조와 무기력에서 맥락을 끊어낸 용기와 대범함으로 마무리된다. 디스토피아에 찌들어 사는 주인공 L이 어느 순간 해탈하듯, 자기만의 유토피아를 찾아낸 것이다. 유토피아 꿈꾸는 객석 카메라와 고래 세 번째 경향은 시스템 종속사회를 딛고 희망을 노래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판타지 작품이다. 고아 소녀 애니와 친구들이 재벌 워벅스와 만나 연대와 부녀의 정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은 뮤지컬 <애니>, 전설 속 물 부족 세상을 살아가는 부족들 간의 전쟁과 현재 생존하려는 청춘의 애환을 교차하며 고래 모형으로 희망을 전하는 <부치하난>, 가족을 잃고 남극으로 향한 연구원들이 로봇의 보조를 받으며 고통을 잊게 하는 운석을 통해 삶을 돌아본 뮤지컬 <리히터>, 호수의 심연과 수면을 오가는 백조들의 생존 경쟁과 자연 친화적인 삶을 통해 자유를 자유롭게 담아낸 무용극 <백조의 잠수> 등이 그러하다. <애니>의 경우 극 중 객석을 향하는 라이브 ENG 카메라(손이나 어깨로 들고 다니는 카메라)를 통해 자신을 버린 부모 찾기 광고를 녹음하는 고아 소녀 애니와 이를 응원하는 관객의 이미지를 하나의 시공간에 담는다. 무대 위에 영사된 애니 또래 어린이 관객들이 손을 흔들고 뛰는 모습은 관객과 출연진들 모두를 희망에 들뜨게 한다. <부치하난>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객석을 유영하는 고래가 등장한다. 현대의 주인공 누리와 태경이 전설 속 부치하난과 올라처럼 비극적인 죽음을 맞지 않고 생존해 사랑을 확인하는 마지막 장면에 객석으로 헤엄쳐 나오는 고래는 디스토피아를 극복한 그들만의 유토피아다. 실제 객석 위를 날아다니는 초대형 고래는 로봇공학의 애니매트로닉스 기술이 적용돼 지느러미 움직임까지 섬세하다. 강력한 소형 드론을 엔진으로 서서히 2층 객석까지 날아오르니 순식간에 공연장 전체가 바닷속이 돼버린다. 관객들의 복잡한 고민이 일거에 사라지게 만든다. 물리적인 만남을 통해 온기와 정서를 공유하는 것은 인간다움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향인 유토피아의 실현 가능한 대안으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를 말했다. 쉽게 표현하면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같은, 개인화된 숨 쉬는 공간이다. 모든 것이 AI로 대체된다 해도 인간에게는 온기와 정서를 나눌 공간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위에 언급한 대부분 작품은 상연이 끝났다. <부치하난>은 오는 11월 17일까지 상연된다.
이주영의 연뮤 덕질기
[이주영의 연뮤덕질기](33) 혼돈 치유하는 경청의 힘
[이주영의 연뮤덕질기](33) 혼돈 치유하는 경청의 힘(2024. 10. 04 16:00)
2024. 10. 04 16:00 문화/과학
뮤지컬 <홍련>·<베르사유의 장미>, 연극 <사운드 인사이드>·<트랩> 연극 <사운드 인사이드> 공연 장면 / 쇼노트 보고 싶은 공연과 봐야 할 공연을 수없이 접하다 보면 가끔 폐부 깊이 박히는 작품을 만나 잠 못 이룰 때가 있다. 작품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겹쳐 심중을 살피는 순간이다. 뮤지컬 <홍련>과 <베르사유의 장미>, 연극 <사운드 인사이드>와 <트랩>의 주인공은 관객을 향해 치부까지 다 드러내며 캐릭터를 깊게 들여다보게 이끈다. 상대가 전하는 말과 행동에 집중해 저변에 있는 감정과 고통에 동기화되는 순간 개인의 문제는 사회의 문제로, 캐릭터의 고충은 나의 고충으로 화장된다. ‘경청(傾聽)’이 선사하는 치유의 과정이다. 경청을 통한 집단 치유 창작 초연 뮤지컬 <홍련>(배시현 작·작사, 이준우 연출, 박신애 작곡, 남경식 무대, 김진 안무)은 망자를 심판하는 바리(이아름솔·김경민·이지연 분)와 원귀로 떠돌기 직전, 소멸과 환생의 기로에 선 홍련(한재아·김이후·홍나현 분)에 대한 이야기다. 한국 전통 신화와 전래동화 주인공인 ‘바리공주’의 바리데기(버려진 아이라는 의미)와 ‘장화홍련전’의 홍련은 ‘천도정’이라는 신화적 공간을 매개로 속내를 털어놓는다. 증오와 공포에 찌들어 스스로 존속 살해범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던 홍련은 바리와 저승 차사들, 관객의 경청과 공감으로 천도되기에 이른다. 원한을 승화해 새로운 영혼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다. 일련의 과정은 록밴드와 거문고 등이 섞인 탈경계 밴드의 연주로 표현된다. 홍련과 바리의 극고음 이중창은 심혈에 찌든 원망과 분노를 토해내게 한다. 속이 후련해지는 집단 치유의 장이다. 반면 한국 초연 라이선스 연극 <사운드 인사이드>(아담 랩 극작, 박천휴 번역·윤색·연출, 박상봉 무대)는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고요하다. 넓고 쾌적한 거실이자 서재로 디자인된 무대는 극 내향 등장인물들이 서로의 심연을 깊이감 있는 문학적 토론을 통해 드러내게 만든다. 미국 예일대 영문과 교수 벨라(문소리·서재희 분)와 영문과 학생 크리스토퍼(이현우·강승호·이석준 분)가 보여주는 결은 같지만 세대는 다른 예술적 고민과 예민함이 2시간 가까이 무대를 채운다. 단순한 티키타카(주고받기)가 아닌, 심연을 토해내는 그들만의 이야기는 오가는 대화의 반 이상 차지하는 문학작품에 관해 거의 모르는 관객들마저 빨려들게 한다. 벨라와 크리스토퍼만의 세상에 관객들이 기꺼이 주파수를 맞춰 동참하는 이유는 방백과는 다른 결의 ‘관객을 향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극 중 인물이 깊은 속살을 담담하게 드러내는 순간 관객들의 속내도 교집합이 된다. 크리스토퍼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인 소설 첫 장에 쓰인 도스토옙스키의 말 “우리는 완벽하게 낯선 이들 사이에서 한눈에 말 한마디 나누기도 전 마음이 가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와 같은 기적 같은 순간이다. 창작 초연 뮤지컬 <베르사유의 장미>(이케다 리요코 원작, 왕용범 극작·작사·연출, 이성준 작곡, 서숙진 무대)는 ‘마음이 가는 사람’인 앙드레의 희생을 통해 ‘내면의 소리’를 행동으로 옮긴 오스칼 이야기다. 가상인물 오스칼(옥주현·김지우·정유지 분)과 앙드레(이해준·김성식·고은성 분)를 중심으로 역사적 인물이 뒤섞여 나오며 프랑스 대혁명 당시 왕당파와 혁명파의 부조리가 전시된다. 1972년 발표된 일본의 유명한 만화가 원작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임에도 지금까지는 일본 내수 중심인 다카라즈카 극단(여성 국극단) 공연이 유일했는데 한국 창작 뮤지컬로 번안되면서 보편적인 청년 세대의 고민과 문제의식을 전면화한 작품이 됐다. 방대한 원작을 잘 벼려내 오스칼과 앙드레 중심으로 혼돈의 사회상에 대한 계급 불문, 모든 청년의 공감과 연대를 다루었다. 인형 같은 황실 근위대장으로, 권력의 중심에서 남장 여성으로 살아가는 귀족의 딸 오스칼은 평생 자신에 맞춰 큰 사랑을 실천한 앙드레를 잃는 순간 “마음을 억누르지 말고 살고 싶은 세상을 위해 함께 나아가자”는 내면의 소리를 인정하고 시민혁명의 선두에 선다. 내면의 소리 나누는 기적 이는 국내 초연 연극 <트랩>(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원작, 변우정 각색, 하수민 재각색·연출, 남경식 무대)이 넌지시 찌르는 의표이기도 하다. 현대인들이 살고 싶은 세상은 ‘자기 욕망에 충실한 개인화된 세상인가?’ 아니면 ‘보편적인 윤리와 도덕을 끊임없이 인식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세상인가?’ 질문한다. 고급 스포츠카를 몰고 가다 사고를 당해 숙박할 곳을 찾은 트랩스(김명기 분)는 얼결에 노년 법조인들이 놀이로 하는 모의재판에 피고로 참여한다. 아름다운 만찬과 음악, 미슐랭 별 3개 식당도 울고 갈 고급스러운 음식과 와인의 향연 속에서 트랩스는 자신도 모르게 유도 신문에 빠져든다. 연극 <트랩> 공연 장면 /세종문화회관 서울시극단 트랩스의 입에서 상사 부인과의 불륜, 상사의 죽음을 기대했던 속내가 흘러나오고 판사 역 집주인(남명렬 분)과 검사 역 초른(강신구 분), 변호사 역 쿰머(김신기 분), 사형집행인 역 필렛(손성호 분) 등을 통해 논거와 판결문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트랩스는 내면 깊은 곳 양심과 윤리의 자기 정화에 매몰된다. 가정부이자 집사로 모든 파티의 수발을 들고 라이브 연주를 통해 극적 전개를 이끄는 시모네(이승우 분)의 보이지 않는 승부수 덕일지도 모른다. 전혀 다른 소재, 다른 미장센의 작품이지만 네 작품은 내면의 소리를 경청하는 과정과 결과를 담아냈다는 점에서 하나의 방향을 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들의 결말은 모두 죽음을 매개로 한 성찰이기도 하다. <홍련>은 긴 무명천을 횡단하며 이승의 원한과 분노를 승화한 망자를 인도하는 씻김굿을 소극장 무대에서 처음으로 깊이감 있게 재현한다. <사운드 인사이드>는 무대 깊은 곳에 숨어 있던 미국 도시 뉴헤이븐의 눈이 내리는 넓은 공원을 무대예술로 재현하면서 자신만의 예술성에 매몰된 주인공의 현재와 미래를 애도하게 만든다. <베르사유의 장미>는 국내 처음 시도되는 레이저 다중 고정장치를 활용해 오스칼과 근위대가 수천만 민중의 선봉에 선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트랩>은 내면의 소리에 답한 트랩스의 충격적인 결론을 통해 다른 극 중 인물과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경청하는 자세는 타인을 감각하고 나를 존중하겠다는 선언이다. <홍련>은 마지막 넘버 ‘사랑하라’에서 “부디 너를 사랑하여 부디 너를 용서하라”고 외친다. <베르사유의 장미> 역시 마지막 넘버 ‘나를 감싼 바람은 내게만 불었나’에서 “마음을 억누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다시 태어날 기회 살고 싶은 세상을 위해 다 함께 가자”고 말한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다. 인간의 삶 역시 죽음을 향해 가는 미래의 기억이다. 이는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과정이며 스스로 ‘힐러’(healer·게임용어로 팀원을 치유하는 역할)가 되고 싶은 욕망의 발현이다. <베르사유의 장미>는 10월 13일, <홍련>과 <트랩>은 10월 20일, <사운드 인사이드>는 10월 27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의 연뮤 덕질기
[이주영의 연뮤덕질기](32) 사랑에 대한 실재와 허상
[이주영의 연뮤덕질기](32) 사랑에 대한 실재와 허상(2024. 09. 13 16:00)
2024. 09. 13 16:00 문화/과학
연극 <시뮬라시옹>·<랑데부>, 뮤지컬 <사의 찬미>·<박열> 연극 <시물라시옹> 공연 장면 / 예술창작공장 콤마앤드 및 파란오이 명절 연휴는 축복이자 재앙이다. 친지들과 모임 속 뼈있는 대화와 명절 음식 장만 여파는 회포를 푸는 것과 동시에 탈출을 꿈꾸게 한다. 명절 노동으로 불거지는 고부갈등과 부부갈등은 사랑하는 이들을 폭력의 주체로 만든다. 오죽하면 ‘명절 이혼’이라는 신조어가 생겼을까. 본질을 허상으로 대체하며 참고 참다 극단으로 치닫는 것보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선언하고 실재를 직시한다면 연휴의 축복을 만끽할 수 있을지 모른다. 가상 부부와 현실 연인의 동상이몽 연극 <시뮬라시옹>(최양현 작·이태린 연출)은 인공지능(AI)이 일상이 된 가까운 미래, 확장된 허상이 본질을 대체하면서 생기는 혼돈을 다룬다. 선욱(송철호 분)은 갑작스러운 비행기 사고로 아내 상아(신사랑 분)를 잃고 슬픔에 잠식되던 중 동료가 죽은 반려견을 AI로 복원해 상실의 아픔을 치료하는 것을 보게 된다. 아내를 복원하기로 결심한 선욱은 아내에 대한 데이터를 스캔해 AI 시스템에 연결한다. 이제 특수 안경만 착용하면 일상 어디에서든 AI로 복원된 아내와 함께할 수 있다. 복원된 아내와 처음 만난 날, 그리움에 사무친 선욱은 아내가 눈앞에 있는 현실이 믿기지 않아 오열하며 웃는다. 멜로드라마적 절정이다. 그림을 전공하고 피아노와 베이킹을 배우느라 바쁜, 쾌활한 아내와의 일상은 행복하면서 밋밋하다. 반복되는 나날이 답답해진 선욱은 ‘진짜 아내’를 재현하기 위해 일기장과 메모장, 휴대전화, 노트북 데이터 등 더 많은 데이터를 입력한다. 더 풍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AI가 재현한 아내는 진짜일까? 선욱은 아내의 심연을 접하고 충격에 빠진다. 행복의 절정이라고 생각해온 모든 관계와 기억이 상아 입장에서는 소외와 폭력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선욱은 AI로 복원된 아내와 언쟁을 벌이고 생전에도 해본 적이 없는 막장 부부싸움에 이른다. 서로의 바닥을 본 선욱은 그런데도 아내가 그립다. 그는 AI가 복원한 ‘진짜 아내’와 대면할 수 있을까. 시스템을 초기화해 아내의 허상을 다시 소환할까. 아니면 ‘진짜’가 존재하긴 한 걸까. <시뮬라시옹>이 부부의 ‘동상이몽’을 두 세계의 공존을 의미하는 거꾸로 매달린 가구들과 기술융합 등의 서사를 기반으로 다루었다면 연극 <랑데부>(문정희 원안, 김정한 작·연출, 최천중 작곡, 정소연 안무)는 정반대다. 무대 중앙에 놓인 가로로 긴 런웨이 중심으로 사방에 객석이 자리 잡고 있다. 일부 객석은 무대 위 두 남녀의 호흡과 땀방울을 공유할 정도로 가깝다. 검은색의 긴 런웨이 무대 위를 검은 정장의 남녀가 질주하면서 춤을 추고 과격한 행동을 하며 뛰어다닌다. 처음부터 실재와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겠다고 선언하는 무대예술이다. 다른 세상의 남녀가 우연히 만나 상처를 인식하고 이해하며 각자의 실재에 접근하는 과정을 다룬다. 로켓 공학자 태섭(박성웅·최원영 분)이 배달 짜장면의 맛이 잘못됐다고 항의하자 짜장면집 사장 지희(문정희·박효주 분)가 달려와 따지는 게 첫 만남이다. 자로 잰 듯 반듯해야 하고 신체접촉에 경기를 일으키는 강박증 환자 태섭은 자유로운 영혼의 무용수였던 지희와 맹렬히 싸우고 사과하면서 서로의 과거가 연결됐음을 깨닫는다. 지희의 상처가 태섭에게 축복이었던 상황을 확인한 순간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이야기와 춤으로 위무하지만,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질 수 없다. 실체를 공유할수록 닿고 싶으나 닿지 못하는 지점만 부상하기 때문이다. 중년에 이른 늦깎이 연인들의 소통은 로켓 발사 카운트다운과 남녀 2인무인 파드되(pas de deux)로 형상화된다. 서로를 놓아주기로 한 이들의 파드되는 그 어떤 러브신보다 애절하다. 이들은 현실적인 거리 두기에 성공할까. 아니면 불행을 감내하며 각자의 상처를 더 깊이 들여다볼까. 뮤지컬 <박열> 공연 장면 / 더블케이엔터테인먼트 근대 연인들의 목숨 건 연대 동시대 현대인들의 복잡한 심리를 다룬 작품들에 비하면 근대 암울한 시대에 대항한 연인들의 삶은 명확하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 실존 인물들을 다룬 창작 뮤지컬 <사의 찬미>와 <박열>은 어떤 측면에서는 <시뮬라시옹>과 <랑데부>보다 직설적이고 진보적이다. 짧고 소중한 생존의 시간 속 자아를 잃지 않으며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목숨보다 중요했다. 뮤지컬 <사의 찬미>(성종완 작·작사·연출, 김은영 작곡, 이헌재 드라마터그)는 1926년 8월 4일 현해탄을 건너던 부산행 관부연락선 안에서 실종된 극작가 김우진과 소프라노 윤심덕의 비극적 결말이 사실은 해피엔딩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에서 시작됐다. 전라도 거부의 아들로 와세다대학에 유학 중이던 김우진은 아이가 있는 유부남이었다. 도쿄음대생 윤심덕은 당대 유학생 사회에서는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주목받던 소프라노였다. 속절없이 사랑에 빠진 이들의 삶은 여러 드라마와 영화로 재현됐으나 뮤지컬 <사의 찬미>는 기존 서사를 거부한다. 1926년 8월 4일 현해탄을 건너는 관부연락선 위가 현재, 그들이 처음 만난 1921년을 과거로 놓고 시대의 아픔과 가족들에 얽힌 삶을 저울질하며 둘만의 삶을 도모하는 과정을 스릴러물에 담았다. 2013년 초연 후 올해가 일곱 번째 시즌인 대학로의 대표 흥행작품이다. 극 중 윤심덕이 부르는 ‘난 그런 사랑을 원해’는 현대인들의 심연을 드러낸 넘버로 알려져 있다. 독립운동가이며 아나키스트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부부의 삶을 다룬 뮤지컬 <박열>(이선화 작·작사, 성종완 연출, 이유정 작곡) 역시 마찬가지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6000여명의 조선인이 학살된 상황을 세상에 알리고 저항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권력에 맞서며 자유를 수호하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같은 세계관과 정체성을 가진, 연인에서 부부로 마지막까지 같은 방향을 향해 달린 동지로서의 삶은 동시대 현대인들이 흠모하는 이상향이다. 영화로 잘 알려진 박열 일대기와 달리 올해 두 번째 시즌인 뮤지컬 <박열>은 두 연인이자 부부의 확고한 연대와 확장된 사랑을 현대적인 록 발라드로 시원하게 표현했다. 연극 <시뮬라시옹>과 <랑데부>는 사상누각 같은 동시대 남녀관계의 실재와 허상을 들여다보며 솔직해지자고 말한다. 뮤지컬 <사의 찬미>와 <박열>은 근대 실존 인물들이 시대적인 암울함 속에서도 허상을 깨고 실재를 획득하는 용기를 다루고 있다. 모방이라는 의미의 ‘시뮬라시옹(simulation)’은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에 의해 원본을 대체한 허상으로 재해석됐다. ‘랑데부(rendez-vous)’는 서로 다른 세계의 만남과 조화를 상징한다. 친인척들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송편을 먹는 풍경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허상이다. 가부장 제도와 유교적 가치관에서 비롯된 허상에 매몰되기 전 각자의 실재를 인정하고 랑데부할 용기가 필요한 시기다. <시뮬라시옹>은 9월 15일, <랑데부>는 9월 21일, <박열>은 9월 29일, <사의 찬미>는 10월 27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의 연뮤 덕질기
[이주영의 연뮤덕질기](31) 내 안의 ‘헤르메스’ 다스리기
[이주영의 연뮤덕질기](31) 내 안의 ‘헤르메스’ 다스리기(2024. 08. 23 16:00)
2024. 08. 23 16:00 문화/과학
뮤지컬 <하데스타운>, 연극 <일리아드>, 오페라 <오텔로> 뮤지컬 <하데스타운> 공연 장면 / 에스앤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헤르메스는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전령의 신이다. 해석과 의미 전달, 교역과 교환, 발명 등 상업과 과학, 체육을 관장하는 중요한 신이지만 장난꾸러기 신으로도 불린다. 그가 관장하는 영역을 쥐락펴락하는 양면성이 있기 때문이다. 거짓말쟁이와 도둑, 교활함까지 내포하는 헤르메스는 불신과 분노를 양산하기도 한다. 뮤지컬 <하데스타운>(아나이스 미첼 극작·작사·작곡, 레이첼 차브킨 연출, 박소영 협력 연출)의 헤르메스(최정원·최재림·강홍석 분)도 주인공들을 돕는 것 같지만, 결국 파국에 이르게 하는 단초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양가적이다. 오르페우스 신화를 모티브로 한 송스루(song-through·대사 없이 노래로만 이어지는) 재즈 뮤지컬 <하데스타운>의 안내자이며 진행자인 헤르메스는 첫눈에 반한 연인 오르페우스(조형균·박강현·김민석 분)와 에우리디케(김환희·김수하 분)가 평탄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음악밖에 모르는 무능한 남편이라 배가 고프긴 하지만, 잘살겠다고 자아를 상실할 정도는 아니었던 에우리디케는 얼결에 하데스(지현준·양준모·김우형 분)와 만나 타운행 기차표를 받는다. 헤르메스의 부추김으로 기차를 타고 죽음과 광물, 재물을 관장하는 하데스에게 종속돼버린 것이다. “폭력의 역사·일상 체험하는 작품들” 오르페우스는 뒤늦게 아내를 찾아 헤매고 헤르메스는 친절하게도 하데스타운으로 가는 험난한 길을 안내한다. 중앙에 회전판을 돌며 지하세계로 내려가는 이 장면은 작품의 백미다. 오르페우스의 동선이 반복되면서 좁은 무대가 지하세계의 광활한 무대로 확장되는 마법 같은 순간이다. 다행히 아내를 찾아 집으로 가려는데 하데스가 그냥 보내줄 리 만무하다. 자신이 감동할 곡을 연주하지 않으면 죽음뿐이라니 오르페우스는 기후변화로 겨울이 길어진 지구를 되살리기 위해 안 먹고 안 자고 작곡한, 세상을 구원할 곡을 연주한다. 하데스와 그의 아내 식물의 여신 페르세포네(김선영·린아 분)는 오래전 서로 사랑했던 초심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기에 이른다. 내기에 졌음에도 하데스는 타운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에우리디케의 손도 잡지 말고 뒤돌아보지도 않아야 한다며 조건을 건다. ‘함정이 아닌 시험’이라고 헤르메스가 설명하지만, 하데스의 권력과 자신의 나약함을 돌아보는 오르페우스는 지상으로 가는 내내 의심의 고통에 시달리다 결국 탈출 직전 돌아본다. 1인 연극 <일리아드>(데니스 오헤어·리사 피터슨 공동집필, 함유선 번역, 김달중 연출)를 이끌어가는 음유시인이자 주인공 ‘내레이터’도 신화 속 헤르메스와 기 싸움을 벌인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드’를 동시대 시선으로 각색한 연극 <일리아드>의 객석은 공연 시작 20분 전부터 빠르게 채워진다. 프리쇼(공연 시작 전 배우들이 무대 위에 나와 작품 속 세계관을 공유하는 퍼포먼스)처럼 극을 이끌어가는 배우와 관객의 소통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객석 분위기와 내레이터의 콘셉트에 따라 근황 토크(군인 콘셉트의 김종구와 아코디언 연주자)부터 세상사 토론(홈리스 콘셉트의 최재웅과 드럼 연주자), 타로점을 통한 인생상담(집시 콘셉트의 황석정과 클래식 기타 연주자)이 벌어진다. 객석과 무대는 어느새 기원전 12세기부터 2024년을 아우르는 시공간으로 확장된다. 내레이터는 연주자와 함께 신들에 의해 조작된 그리스와 트로이 전쟁 한복판, 트로이 장군 헥토르와 그리스 장군 아킬레스의 대결을 생중계하기 시작한다. 내레이터가 언급하는 헤르메스의 교활함은 정의롭고 가정적인 헥토르가 아킬레스의 친우인 파트로클로스를 어떻게 처참하게 죽이는지를 묘사하며 존재를 드러낸다. 인간 안에 숨어 있는 신들(헤르메스 포함)의 광기는 복수의 화신이 된 아킬레스가 헥토르를 어떻게 잔혹하게 처단하고 시신을 훼손하는지 묘사한다.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왕이 아킬레스에 사정해 아들의 시신을 받아오는 장면과 헥토르의 갓난쟁이 아들이 그리스 병사의 손에 내던져져 골이 깨진 장면을 내레이터는 광기의 연기와 음악으로 전한다. 지구 각지의 전쟁사를 기원전 사르곤(인류 최초의 국가)의 정복부터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까지 숨도 쉬지 않고 낭독하는 10분 가까운 이 장면은 <일리아드>의 하이라이트이자 고통의 극대화이다. 불신과 분노가 씨앗이 되어 벌어진 폭력의 역사들을 극단적으로 체험하는 장면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분노를 놓는 것” 일상에서도 양분된 불신의 비극은 허다하다. 베르디 오페라 <오텔로>(셰익스피어 원작·키스 워너 연출·카타리나 카스트닝 리바이벌 연출·카를로 리치 지휘)는 100여명의 풀 오케스트라 연주와 100여명의 합창으로 시작된다. 웅장한 서막으로 폭풍우를 뚫고 전쟁에서 승리해 귀환하는 오텔로(테너 이용훈·마르코 베르티 분) 장군의 위대함을 표현한다. 오텔로는 그를 질투하는 측근 이아고(바리톤 프랑코 바살로·니콜로즈 라그빌리바 분)에 의해 아내 데스데모나(소프라노 흐라추히 바센츠·홍주영 분)를 의심하기 시작해 광인이 돼 결백한 아내를 교살한다. 베르디 오페라 <오텔로>는 의심과 불신, 불안의 전령인 이아고를 악의 화신이자 신을 대변하는 자로 묘사한다. <하데스타운>의 헤르메스나 <일리아드>의 내레이터처럼 방백(무대 위 다른 인물에게는 들리지 않고 관객만 들을 수 있는 대사)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아내는 결백하다. 모든 것이 이아고의 모략이었음을 깨달은 오텔로는 칼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고는 죽은 아내에게 기어가 마지막 키스를 한 뒤 불신과 분노로 상실한 자아를 되찾으며 숨을 거둔다. 마치 오르페우스가 세상을 구원할 곡을 연주해 아내 에우리디케와 하데스를 벗어날 수 있게 됐을 때의 ‘자아 복원’ 혹은 ‘기후 정상화’ 과정을 연상하게 만든다. <하데스타운>에서 헤르메스가 노래하듯 “세상에서 가장 사나운 개는 거리에서 만나는 사냥개가 아니다. 정말 두려운 개는 머릿속에서 울부짖는 개”다. 그 울부짖음이 “사람을 미치게 하고 머릿속을 뒤엉키게 함”을 이 세 작품은 여실히 보여준다. 결국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는 헥토르와 그의 아내 안드로마케, 오텔로와 그의 아내 데스데모나처럼 영원히 헤어진다. 이것으로 모두 끝나는 것일까? 중요한 건 분노를 놓아버리는 것이다. <하데스타운>은 유일하게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며 막을 내린다. 커튼콜에서 마이크를 끄고 전 출연진이 합창하는 넘버 ‘잔을 높이 들어’는 분노를 다스리며 지금에 이른 인류의 희망을 노래한다. <오텔로>는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 프로덕션으로 8월 25일까지, <일리아드>는 오프 브로드웨이 작품으로 라이선스 재연으로 9월 8일까지, <하데스타운>은 토니상 수상작인 브로드웨이 작품 라이선스 재연으로 10월 6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의 연뮤 덕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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