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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경향(총 1 건 검색)

남편 잃고 사기 피해 딛고 꿈 이룬 중국동포 이진숙
2008. 10. 13 화제
“낮에는 남편을 간호하고 밤에는 사우나에 출근했죠. 강남은 부자동네라고 해서 손님도 많을 것이고, 내가 열심히만 하면 돈을 잘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걸요. 이상하게도 밤 11시면 모든 전등을 꺼버리는 거예요. 탈의실에 앉아 벌벌 떨면서 손님을 기다렸지만 손님이 올 리가 없죠. 사기였어요” 청천벽력 같은 남편의 위암 선고, 날아간 희망 이진숙씨(59)는 이번 여름 일본으로 휴가를 다녀왔다. 일본에서 결혼해 그곳에서 살고 있는 딸, 유학 중인 아들과 함께 여름을 보내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놀러가본 건 거의 처음이니까요. 무척 즐거웠어요. 아이들이랑 맛있는 것도 먹고 온천도 다녔어요. 손녀 재롱도 실컷 보고요.” 몇 년 만에 자녀들을 만나는 터라 기대가 컸던 여행이었다. 설레는 마음에 출발 전날에는 잠 한숨 이루지 못했고, 새벽부터 일찌감치 공항에 도착해 몇 시간을 기다렸다. 공항 대합실 의자에 앉아 비행기 이륙 시간을 기다리며 오고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그 순간을 이진숙씨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지나온 시간이 머릿속에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지면서 정말로 하늘 위에 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7년 전 매서웠던 그 겨울에도 이진숙씨는 공항 의자 한쪽에 앉아 있었다. 다만, 옆자리에 든든한 남편이 있었다는 것이 지금과 달랐다. “아이들이 공부를 잘했어요. 우리는 못 배웠지만 똑똑한 애들 뒷바라지는 끝까지 해주겠다고 마음먹었죠. 중국에서 대학을 보내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들 것 같아 한국행을 결심 했어요. 아이들만큼은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거든요. 돈 많이 벌어서 아이들 공부도 시키고, 집도 사고, 잘 살아보자고 남편과 다짐하고 한국에 들어왔던 건데….” 이야기를 막 시작했지만 벌써부터 말끝이 흐려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남편은 이미 곁에 없다. 한국에 들어온 지 1년도 채 안 돼 위암 판정을 받은 남편은 5년 가까이 투병 생활을 하다 재작년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암 선고를 받았을 때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더군요. 많이 벌지는 못했지만 한푼 두푼 통장에 돈이 늘어나는 재미로 힘든 줄도 모르고 살았어요. 남편은 건설 현장에서 일을 했는데 언제부턴가 72kg 정도 나가던 몸무게가 59kg까지 빠지는 거예요. 힘들어서 그런가보다 했죠. 돈도 없고, 바쁘기도 하고 해서 몸이 아파도 그냥 약 사 먹으면서 버텼어요.” 아이들, 아내 생각은 많이 해도 정작 자기 몸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던 남편이었다. 수중에는 50만원 정도밖에 없었지만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당장 남편을 동대문의 한 종합병원에 입원시키고 수술 날짜를 잡았다. 가깝게 지내던 친구, 친척들이 돈을 보태줘 어렵게 수술비를 마련했지만, 장기간 받아야 하는 항암 치료가 더 문제였다. “그전까지는 식당에서 일을 했는데 그 돈으로는 몇 십만원씩 하는 항암 치료비를 감당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한 게 ‘때밀이’라고 불리는 목욕관리사 일이었어요. 처음에는 많이 망설였지만 ‘이 시련을 꼭 이겨내야 한다. 망설이면 안 된다’라고 마음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면서 용기를 냈죠.” 평소 남들 앞에 나서서 말하는 것도 겁내는 이씨였다. 그런데 목욕탕에서 발가벗고 남의 몸을 밀어야 한다니 두렵기도 하고,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이 일을 안 하면 누가 남편 수술비를 대고, 유학 중인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겠나, 하는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어요. 다른 일보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하니까 꼭 열심히 배워서 일을 해야겠다 싶었죠.” 목욕관리사가 되기 위해서는 학원에서 한 달 가까이 실습을 해야 했다. 처음 학원을 찾았던 날, 쑥스러움과 긴장을 떨쳐내고 다른 사람들을 따라 열심히 때 미는 연습을 하고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끙끙 앓아눕고야 말았다. 쉰이 넘은 나이에 40대 건강한 이들과 똑같이 일하려고 하니 가뜩이나 체구도 작고 몸도 약한 그녀가 두 배로 힘을 써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원장님께서 세심하게 신경 써준 덕분에 금방 배울 수 있었어요. 제가 처음에 워낙 못해서 원장님 등을 시뻘겋게 벗겨놓았는데도 괜찮다고 하시며 체격에 따라, 피부에 따라 서비스를 다르게 해야 한다고 자세히 가르쳐줬어요. 힘들 때여서인지 따뜻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큰 돈보다 더 고맙게 느껴지더라고요.” 따뜻하게 그녀를 감싸주던 원장님은 이씨의 집안 사정을 어떻게 알았는지 학원을 수료하던 날 ‘치료비에 보태라’며 학원비를 되돌려주었다고 한다. ‘힘내라’는 말과 함께. 남편의 암 선고 이후 어쩔 수 없이 맘에도 없는 목욕관리사 일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한 달여를 쫓기듯 살아온 그녀였다. 갑작스럽게 닥친 불행에 펑펑 울어보지도 못한 채 사는 데만 급급했다. 원장님의 속 깊은 배려를 받던 날, 이진숙씨는 한국에 온 뒤 처음으로 마음 놓고 눈물을 쏟았다. 서럽고 절망스러워서가 아니라 고맙고 감격스러워서였다. 연이은 사기, 고된 목욕관리사 일로 손님들 등에 눈물 쏟아 병원에 누워 있는 남편을 생각하면 하루빨리 한 푼이라도 더 벌고 싶었지만 막상 목욕관리사 일을 배웠어도 목욕탕에 ‘취직’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국 사정도 잘 모를뿐더러, 초보인지라 우선 소개소를 통하기로 했다. 소개소에서 연결해준 서울 역삼동에 있는 24시 사우나는 시설도 깔끔하고 주인도 선량해 보여 마음에 들었다. 아는 언니로부터 1천만원을 빌려 주인에게 넘겨주고 야간조로 계약을 했다. “낮에는 남편을 간호하고 밤에는 사우나에 출근했죠. 강남은 부자동네라고 해서 손님도 많을 것이고, 내가 열심히만 하면 돈을 잘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걸요. 이상하게도 밤 11시면 모든 전등을 꺼버리는 거예요. 탈의실에 앉아 벌벌 떨면서 손님을 기다렸지만 손님이 올 리가 없죠. 사기였어요.” ‘아차’ 싶었다. 몸을 맡기는 손님이 있어야 돈을 버니 얼른 다른 목욕탕을 찾아가야했다. 다른 데로 가겠다고 1천만원을 돌려달라며 주인을 찾아갔더니 상냥했던 주인은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냉정한 얼굴의 주인이 내놓은 계약서에는 24개월이라는 기한이 적혀 있었다. 계약을 하던 당시 그저 초보인 자신을 고용해준다는 사실이 고마워 허겁지겁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게 화근이었다. 소개소에서도 대신 들어갈 사람이 생기면 바꿔주겠다는 말뿐 ‘나 몰라라’ 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1천만 원이라는 큰 돈이 물거품이 되어버렸으니 내 자신이 싫고 세상이 원망스러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항암 치료 중인 남편의 창백한 얼굴을 보는데 정말 아찔하더군요.” 뿐만이 아니었다. 넋 놓고 앉아 있을 수 없어 곧 가게를 연다는 말만 믿고 겨우 5백만원을 만들어 찾아간 곳에서도 또 사기를 당했다. 빚은 산더미처럼 불어만 가고, 어떻게 사람들이 이럴 수가 있나 싶어 기가 막혔다. “하루하루가 악몽 같았어요. 그러던 중 누군가 ‘중국 동포 외국인 노동센터’를 찾아가보라고 하더라고요. 가서 자초지종을 얘기하니까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시더군요. 관계자 분들의 도움으로 5백만원은 되찾을 수 있었죠.” 연이은 사람들의 배신은 그녀를 좌절에 빠뜨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녀를 다시 일으킨 것 역시 사람들이었다. 딱히 더 나을 것도 없는 상황의 친구들도 이씨를 돕기 위해 팔 걷고 나섰다. 덕분에 마송과 목감동에서 좋은 곳을 찾아 자리를 잡고 본격적인 목욕관리사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이를 악물고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제 키가 작아서 굽이 높은 슬리퍼를 신고 일을 하다 보니 저녁이 되면 발도 퉁퉁 부어요. 게다가 하루 종일 김이 꽉 찬 목욕탕에서 땀 흘리며 힘을 쓰고 나면 탈수증에 걸려서 쓰러질 뻔한 적도 여러 번이에요.” 목욕탕에서 남편이 다니는 병원까지는 두 시간도 더 걸리는 거리였다. 버스로 40분을 가고도 또 지하철을 갈아타야 했다. 남편의 항암 치료가 있어 병원에 다녀온 날은 목욕탕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힘이 쫙 빠졌다. 하지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손님들 등에 눈물도 많이 흘렸어요. 게다가 전 몸무게가 50kg도 안 나갈 정도로 자그마한데, 덩치 큰 손님들은 어찌나 많은지(웃음). 그래도 저처럼 늙고 약한 사람한테 관리를 받으면서도 제 사정이 딱하다고 5천원씩, 1만원씩 더 얹어주는 분들이 많았어요. 위로의 말도 많이 해주고요. 그런 분들 덕분에 살 수 있었죠.” 그렇게 번 돈은 고스란히 남편의 항암과 방사선 치료비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런 정성에도 불구하고 암은 자꾸만 재발했다. 피눈물 나는 투병 생활을 이어가던 남편은 결국 세상을 등졌다. “좋은 날 한번 못 누려보고 간 남편이 안타깝고 보고 싶지만, 그래도 정말 다행인 건 남편 치료에 최선을 다했다는 거예요. 내 힘으로 열심히 벌어서 받아야 할 치료는 전부 받게 해줬어요. 우리 형편에는 정말 큰 돈을 썼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조금이라도 소홀했다면 지금 얼마나 후회가 되겠어요. 남편도 마지막에 그러더라고요.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게 해줘서 고맙다고.”든든하게 자라준 아이들이 곁에 있어 행복해 지금 이진숙씨는 개포동의 한 목욕탕에서 매점을 운영하고 있다. 친구 소개로 시작한 지 1년 정도 됐는데 목욕탕 주인도 편안하게 대해주고 손님들과도 제법 친해져서 매일이 즐겁다. 돈을 많이 벌고, 일이 쉬워서라기보다 마음이 편해서다. 비록 사랑하는 남편은 잃었지만 훌륭하게 자란 두 아이들을 생각하면 항상 가슴이 벅차오른다. 남편에게 신경 쓰느라 혹은 돈 번다는 핑계로 아이들에게 다소 소홀했었다. 하지만 대견한 아이들은 어느 집 아이들보다 잘 자라 이제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특히 철이 일찍 든 딸은 크면서 장녀 노릇을 톡톡히 했다. 자기 공부도 힘들 텐데 시간을 쪼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를 벌고 동생까지 일본으로 데려다 공부를 시켰다. 부지런하고 똑똑한 딸 덕분에 이진숙씨가 큰 부담을 던 것도 사실이다. 한번은 이진숙씨의 딸이 어렸을 때 목욕탕에 찾아왔다가 엄마가 손님 등을 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울면서 돌아간 일이 있었다. “그때 딸이 자기는 이제 공부 그만둘 테니 엄마도 일 그만하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죽어도 너희는 공부해야 한다고. 너희마저 공부를 그만두면 우리 식구 전부 한강에 뛰어들어야 한다고요.” 딸 입장에서는 자기 학비 때문에 그렇게 고생하는 엄마를 보는 것이 괴로웠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진숙씨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사는 이유는 오직 딸과 아들 때문이었다. 두 아이가 열심히 공부해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제 능력을 발휘하며 사는 것, 그 모습을 보고자 한국행을 택하지 않았던가. 고맙게도 아이들은 그녀의 마음을 헤아렸는지 능력 있는 회사원으로, 대학원 장학생으로 자랐다. 그리고 이렇게 가족이 함께 모여 행복한 여름 휴가를 보내게 됐다. 앞으로 이진숙씨는 더 바빠질지도 모른다. 매점에서 버는 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남편과 약속했던 내 집 마련의 꿈을 꼭 이루려고 하기 때문이다. 곡절 많았던 그녀의 ‘인간극장’ 드라마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드라마에는 이제 눈물보다는 행복과 웃음이 가득할 것이다. ■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인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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