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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총 10 건 검색)

[정태겸의 풍경](75) 전북 익산 교도소 세트장-그대를 향한 내 마음, 철컹철컹(2024. 11. 13 06:00)
2024. 11. 13 06:00 문화/과학
예전에는 전북 익산을 여행지로 생각할 만했다. 충청도와 전라도로 뻗어 나가는 기찻길이 익산으로 모여들어 인구도 많았고, 여행하기 좋은 여건이었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아쉽게도 지금은 ‘여행지 익산’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이런 흐름을 바꿔놓은 게 있으니 익산 교도소 세트장이다. 폐교를 고쳐 교도소처럼 꾸민 곳인데, 온갖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하면서 이제는 여기를 찾는 사람이 꽤 많아졌다. 여기에 하나의 장치를 더 했다. 수갑이다. 언젠가부터 연인들은 온갖 여행지에 자물쇠를 걸어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부질없는(?) 짓을 하기 시작했다. 연장선으로 떠올린 게 수갑이었다. 모든 건 관광두레 기획자의 아이디어. 교도소와 수갑의 원래 의미를 뒤집어 버린 생각의 전환이 전국의 가족과 연인과 친구들의 발길을 불러 모았다. 세트장만 덩그러니 있었다면 지금 같은 호응은 없었을 거다. 익산의 별칭도 만들었다. ‘고백의 도시’. 여러 의미를 담았다. 그만큼 갈 곳, 볼 곳, 먹을 게 많다는 의도이기도 하고, 고백하기 좋은 도시라는 뜻이기도 하다.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철조망에 수도 없이 많은 수갑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자진해서 철창 안으로 들어가 익살맞은 사진을 남기기도 한다. 저 삭막한 철창과 철조망에, 로맨스라니. 나도 하나 걸어볼까 고민하다 그만두기로 했다. 기왕 할 거면 아내가 보는 앞에서 하는 게 맞다. 혼자서는 궁상맞기 그지없는 짓일 뿐이다.
정태겸의 풍경
[8인8색 여행특집]힐링하시개! 반려견과 김제·익산·전주 여행(2022. 06. 17 11:21)
2022. 06. 17 11:21 문화/과학
ㆍ김제 벽골제·전주 한옥마을, 보고 즐기는 코스로 안성맞춤 ㆍ음식·숙박은 기대치 낮추고 사전 확인 필수 “방 하나 예약하려고 하는데요. 침대방이나 온돌방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크지 않아도 되고요. 혹시 반려견도 동반 입실 가능할까요. 조그만 소형견이고 짖지도 않습니다만….” 김제 만경낙조전망대 전경 / 안광호 기자 숙소 예약부터 쉽지 않다. 홈페이지에는 ‘반려견 동반 가능’으로 돼 있고, 객실 현황에서도 빈방이 있다고 나오지만 숙소 주인이 “안 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다. 또다시 다른 곳에 전화를 돌려야 한다. 수화기 너머 “가능한데 ‘세탁비’가 추가됩니다”라고 한다. 동반 입실만으로도 감지덕지다. 반려견과 함께 여행해본 반려인이라면 한 번쯤 해봤을 경험이다. 귀찮다 싶으면 비용이 더 들더라도 반려견 동반 호텔(펫캉스) 또는 전용 펜션을 예약하거나 애견호텔에 반려동물을 맡겨야 한다. 그마저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여의치 않긴 하지만…. 어렵사리 숙소를 해결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목적지의 관광지를 검색하고 시설 이용료, 주변 맛집, 카페 등을 검색해본다. 가능한 몇 곳을 골랐으나 안심은 되지 않는다. 막상 가보면 또 다를 수 있어서다. 반려견 동반 입실이나 시설 이용을 제한하거나 추가요금을 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성수기에는 이런 사례가 더 많다. 국내에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는 전체(2092만7000가구)의 약 15%인 312만9000가구(통계청·2021년 조사)다. 반려동물 시장 규모는 2020년 3조4000억원 수준에서 2027년 약 6조원으로 급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관련 시장이 커지면서 반려인과 반려동물을 바라보는 사회의 인식도 과거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 그럼에도 반려동물과의 동반여행은 곳곳에 높은 문턱이 여전함을 실감하게 한다. 업주만 탓할 수도 없다. 반려인 스스로 ‘펫티켓(펫+에티켓)’을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반려견과 함께 가볼 만한 곳 이번 여행 콘셉트는 ‘전북+반려견 동반+알뜰’로 잡았다. 3요소의 조합이니 꽤 까다로운 조건을 설정한 셈이다. 전북지역은 제주나 강원, 수도권 등에 비해 반려견과 함께할 만한 먹거리, 볼거리, 즐길거리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은 편이다.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전북도와 관광공사 홈페이지, 관계자 추천 등을 참고해 김제→익산→전주 코스로 일정을 짰다. ‘반려견과 2박3일 동반여행’의 첫 여행지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인 김제 벽골제(사적 제111호)였다. 벽골제는 백제 11대 비류왕 27년(330)에 제방 길이만 1800보 규모로 처음 축조했다. 제방 축조 등에 연인원 32만명을 동원할 정도로 규모가 큰 국가사업이었다. 1420년(세종 2) 큰비로 유실된 후 지금은 약 3㎞ 길이의 둑만 남아 있다. 김제 벽골제 쌍룡조형물 / 안광호 기자 벽골제는 반려견 동반여행 콘셉트에 가장 잘 어울리는 명소다. 벽골제 관광안내소를 지나 단지 정문에 들어서니 왼쪽으로 메인 건물인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이 나온다. 우리 농경문화의 전통과 역사를 전시하고 연구하는 곳이다. 2층 카페에서 음료를 사들고 3층 전망대로 향했다. 강아지를 안고 전망대에 오르면 탁 트인 호남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김제를 ‘지평선의 고장’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게 된다. 단지 안은 산책로를 잘 갖춰 놓았다. 소나무동산과 생태연못 사이로 산책하기 좋게 데크가 깔려 있다. 곳곳에 버드나무와 푸른 잔디 사이로 앉아 쉴 수 있는 벤치가 제법 많다. 벽골제의 상징이자 최고 인기 포토존은 잔디광장에 높게 세운 쌍룡조형물(높이 15m·폭 54m·몸통 직경 2m)이다. 이 지역의 전설에 착안해 2007년 대나무로 만든 쌍룡은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형태로 마주 보고 있다. 바로 옆 그네타기와 디딜방앗간에선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도 전통놀이를 체험할 수 있다. 쌍룡조형물을 지나 단여광장과 중앙광장까지 걸어도 1시간 정도면 여유롭게 단지를 돌아볼 수 있다. 휴일이지만 비교적 한적했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단지 맞은편과 옆에 조성해놓은 주차장의 공간도 널찍하다. 주말에는 한복과 도자기 체험, 매듭 공예 등 가족단위의 다양한 체험도 할 수 있다. 오는 9월에는 이곳에서 지평선 축제(9월 29일~10월 3일)를 연다. 글로벌, 전통, 문화, 야간, 부대 체험 등 5개 분야 59개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이다. 김제 벽골제 단지는 입장료가 성인 기준 1인당 3000원이다. 김제시민과 6세 이하 영유아, 65세 이상 고령자는 입장료가 무료다. 매주 월요일 휴관한다. 700여개의 한옥이 군집한 전주한옥마을도 반려견과 함께 가볼 만한 장소다. 매년 10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곳으로, 강아지와 마을 골목길을 산책하기 좋다. 다만 주말이나 휴일, 휴가철 등 관광객이 몰릴 때는 반려동물을 이동가방에 넣고 다니는 게 서로 편할 듯싶다. 산책코스도 사람들이 붐비는 마을 주도로가 아닌 샛길을 권한다. 마을 내에서 강아지 동반 입장이 가능한 문화재는 전주향교(입장료 무료)가 유일하다. 전주향교는 공자와 그 제자들을 제사 지내는 곳으로, 조선시대 국가 교육기관의 역할을 했다. 대성전과 명륜당 앞뜰에는 400년 된 은행나무가 각각 2그루 있다. 가을에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영화 <YMCA 야구단>이나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등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한옥마을에서 큰길을 건너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자만벽화마을과 옥류벽화마을도 강아지와 함께 가볼 만한 코스 중 하나다. 한옥마을이 유명해지면서 이 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늘었다. 언덕에 자리한 자만벽화마을에서 한옥마을을 내려다보면 발아래 전주향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골목마다 영화와 애니메이션 주인공들이 등장하고 곳곳에 카페와 쉼터가 있다. 강아지들이 짖거나 배설물을 치우지 않는다는 민원도 있어 이곳을 찾는 반려인들의 주의와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익산 성동포구마을에서는 반려견을 동반한 가족단위 체험이 가능하다. 자연 생태습지와 5㎞ 구간의 바람개비길을 걷거나 자전거 투어를 할 수 있다. 금강과 아름다운 생태공원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추억을 쌓을 수도 있다. 익산 용안생태습지공원 전경 / 한국관광공사 제공 편하게 먹고 마실 만한 곳 반려견과의 동반여행 일정을 짤 때 빼놓을 수 없는 코스 중 하나가 애견카페다. 김제 벽골제에서 차로 10분가량 거리에 있는 한 애견카페를 들렀다. 잔디가 깔린 마당 주변으로 4명이 넉넉하게 앉을 수 있는 파라솔을 갖춘 탁자와 의자들이 10개가량 놓여 있다. 마당 크기는 아이들과 대형견을 포함한 반려견들이 뛰놀기에 충분한 공간이다. 대형견 2마리를 포함해 15마리 정도의 강아지가 마당을 휘젓고 다닌다. 평소 휴일에 비해 많은 편은 아니라고 했다. 마당 주변에서는 견주들이 마당을 뛰노는 강아지들을 보며 여유롭게 커피와 간식을 즐긴다. 실내에서도 간단한 음식과 커피를 마실 수 있게 좌석을 마련해 놓았다. 가격대는 아이스아메리카노 6000원, 자동조리기에서 끓인 라면 3000원 정도다. 돈가스와 김치볶음밥 등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메뉴들도 있다. 한끼 식사하기에는 양이 조금 부족한 편이다. 야외 마당 옆으로는 수영장이 있다. 이용하려면 추가 비용을 내야 한다. 소형견은 1만원, 대형견은 3만원이다. 시설 운영이나 가격은 휴가철에도 동일하다. 카페 맞은편에는 차량 7~8대 정도를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애견카페 이용에 제한은 없다. 기본적인 펫티켓만 알고 가면 된다. 목줄과 배설봉투, 입마개(대형견) 등이 필수다. 수컷의 경우 실내에서는 ‘매너 벨트’로 불리는 기저귀를 착용해야 한다. 본능적으로 영역을 표시하는 마킹 행위를 하기 때문이다. 간혹 배변을 수거하지 않는 견주들도 있지만 과거에 비해 많이 줄었다고 한다. 업주가 가장 걱정하는 상황은 공격성이 있는 강아지들이 일반 강아지들과 섞이는 경우다. 사회성이 떨어지는 강아지들은 처음엔 다른 강아지들을 피해다니거나 견주 주변에서만 맴돌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다른 강아지들과 곧잘 어울린다. 하지만 공격성이 강한 강아지는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는다. 카페 업주는 “자신들이 키우는 강아지가 공격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별생각 없이 다른 강아지와 섞이게 하는 견주들이 간혹 있다. 방문하기 전 전화로 카페 동반 입장이 가능한지 물어보거나 아니면 방문을 자제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통상 반려견과 여행할 때는 먹거리 기대치를 낮출 필요가 있다. 우선 실내에서 반려견과 함께 식사할 수 있는 식당이나 카페가 많지 않다. 선택지가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려견 놀이와 서비스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음식 맛과 가격대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전주한옥마을에서는 비교적 이런 걱정을 덜 수 있다. 한옥마을의 많은 식당과 카페가 야외석을 따로 두고 있어서다. 반려견 동반 가능 식당으로도 잘 알려진 B식당은 별관에 따로 켄넬(반려동물 이동가방)을 갖추고 있다. 중형견까지 충분히 들어갈 만한 크기다. 한옥마을을 찾는 반려인들에게 인기가 많아 주말이나 휴일엔 항상 긴 대기 줄이 만들어진다. 이날은 평일 오후 1시를 넘긴 터라 예약을 따로 하지 않고도 여유롭게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면 종류(2인 1만7000원)만 팔기 때문에 회전율이 빠르다. 전주 자만벽화마을 전경 / 안광호 기자 한정식집인 T식당도 반려인들이 한 번은 가볼 만하다. 오전에는 한정식(2인 기준 3만원) 단일 메뉴만 주문할 수 있다. 이곳도 반려견 동반 손님들은 별채로 안내한다. 사람에 따라 양념이 자극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겠으나 나오는 반찬들이 깔끔하고 맛도 나쁘지 않았다. 한옥마을에 있는 카페들도 야외석을 마련한 곳이 많다. 반려견 동반 입장은 가능하지만 실내 출입은 불가하다. 카페 주인이 직접 야외석으로 나와 주문을 받고 카드로 계산한 후 주문한 음료와 영수증을 가져다주는 방식이다. 김제에서는 반려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M카페를 찾았다. 만경읍 골목에 있다. 200년 된 느티나무에 버려진 나무와 자재들로 식당 입구를 멋스럽게 꾸몄다. 전체적으로 한옥과 나무 자재를 엮은 구조다. 사다리를 타고 3층 다락방 형태의 트리하우스에 오르면 고즈넉한 시골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애견 전문 카페는 아니지만 야외석에서 반려견과 동반 식사할 수 있다. 대형견은 들어갈 수 없다. 식사 메뉴는 새우볶음밥 등 모두 3가지다. 영업시간은 오후 6시까지며, 식당 맞은편에 5~6대 주차가 가능한 공간이 있다. 걷기 좋은 곳과 쉴 만한 곳 전북에는 반려인과 반려동물이 맘 편하게 산책할 수 있도록 한 ‘눈치보지마시개 길’ 10곳이 있다. 기존 둘레길과 공원, 호수길 중에서 주차 공간이나 주변 관광지와의 연계성, 탐방객 수 등을 따져 전북도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하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는 김제와 익산, 전주 등 3곳을 둘러봤다. 김제 만경읍 화포리 새만금광역탐방로는 토정마을에서 진봉면사무소까지 이어진 편도 6.5㎞ 구간이다. 만경강 제방길을 따라 간척지와 들판, 바람, 갈대가 있는 생태환경을 반려견과 함께 체험하며 걸을 수 있다. 시작점인 만경낙조전망대에서 만경 8경 중 1경으로 꼽는 만경낙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전망대 주차장에 야외 공용화장실이 있긴 하나 코스 중간에는 화장실과 쉼터가 없다. 익산 성당포구 바람개비길은 성당포구 금강체험관 뒤에 있다. 성당포구 마을에서 출발해 바람개비길과 용안생태습지공원을 거쳐 다시 성당포구 마을로 돌아오는 4.8㎞ 구간이다. 형형색색의 바람개비들이 춤을 추며 방문객을 반긴다. 쭉 뻗은 길을 반려견과 함께 걸으며 사계절 내내 그림 같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낭만여행지다. 바람개비길 주위엔 약 67만㎡ 규모의 용안생태습지공원이 있다. 이곳에선 나비광장, 풍뎅이광장, 조류전망대 등 다양한 습지 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다. 또 느릿하게 흐르는 금강을 바라보며 반려견과 쉬어갈 수 있는 조망 쉼터도 잘 갖춰져 있다. 반려동물 동반 식사가 가능한 전주한옥마을 식당의 한정식 상차림 / 안광호 기자 전주 바람쐬는길은 전주자연생태박물관에서 출발해 슬로길 쉼터(반환점)를 거쳐 다시 전주자연생태박물관으로 돌아오는 약 4㎞ 구간이다. 전주한옥마을에서 걸어서 5분이면 시작점에 도착할 수 있다. 길 오른편으로 맑은 전주천이 흐른다. 왼편으로 승암사, 치명자산 성지, 세계평화의전당 등을 지난다. 코스 내내 나무 그늘이 있어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반려견과 함께 느릿느릿 산책하기 좋다. 바람쐬는길을 포함해 지난 5월 눈치보지마시개 길로 추가 선정한 4곳(전주·군산·익산·고창)은 길을 알리는 이정표나 상징물이 아직 설치돼 있지 않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처음 이 길을 찾는 방문객들이라면 길의 시작점과 코스, 종착점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전북도와 관광공사는 오는 7월 중순까지 코스 주요 지점에 안내판을 설치 완료할 계획이다. 반려견 동반이 가능하면서 비용까지 저렴한 숙소를 고르는 일도 만만치 않은 과제다. 여행 콘셉트에 따라 반려견 전용 펜션은 애초부터 고려 대상에서 제외했다. 반려견 동반 숙소들은 통상 ‘세탁비’ 명목으로 최소 1만~2만원의 추가 비용을 요구한다. 결국 김제와 익산에서 숙소를 구하지 못하고 전주에서 2박을 했다. 두 군데 모두 가격은 7만원으로 동일했다. 비성수기이면서 조식 없이 일요일과 월요일에 숙박했기에 이 가격대가 가능했다. 전주한옥마을 내 B한옥체험 숙소에서 첫 1박을 했다. 한옥마을의 감성을 느끼면서 시간에 구애없이 반려견과 산책이 가능하다. 도보로 한옥마을 내 식당이나 카페, 관광지 방문도 할 수 있다. 한옥마을 변두리에 있다. 상가와 주택이 빼곡히 들어선 중심지에 비해 여유롭고 조용한 편이다. 주차장도 무료공영주차장을 이용할 수 있다. 가격대에서 알 수 있듯 시설 수준이 아주 만족스러운 편은 아니다. 방과 화장실이 좁고 냉장고 등 숙소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가전설비가 없다. 전주 구도심에 있는 D숙소의 경우 시설 수준에선 조금 나은 편이나 근처에 편의시설이 없고 한옥마을에서 2㎞ 정도 떨어져 있다는 게 단점이다. 두 군데 모두 원룸 형태인데다 조리시설이 없어 가족단위의 반려여행객들에게 그다지 추천할 만한 장소는 아니다. 숙소를 예약할 때 보통 홈페이지나 블로그 후기를 참고한다. 전적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 당일이라도 사전에 방 상태와 추가 요금 등을 유선으로 확인하는 게 좋다.
특집
[로컬즈-익산편]전북의 허브 익산이 살아나고 있다(2008. 02. 05)
2008. 02. 05 사회
전북 익산의 잠재력을 말할 때 빽빽하게 적힌 ‘열차운행 시간표’가 자주 등장한다. 익산이 철도교통의 요충지라는 얘기다. 익산은 호남의 ‘철도 관문’이다. 대한민국의 동맥인 호남하행선의 첫 기착지다. 또 전북의 유일한 KTX 정착역이다. 충남과 전북을 가로지르는 철도인 장항선과 전라도의 젖줄인 전라선(익산~순천), 그리고 서해안 시대의 첨병인 군산선(군산~익산)의 시발역이다. 전라선 복선화 작업도 추진할 예정(2010년 완공)이다. 이들 철도사업은 호남광역권 개발의 핵심이다. 철도는 미래지향적 도시 성장의 최고 인프라다. 물자와 자원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여기에 KTX의 속도가 더해진다. 사통팔달의 교통 요충지는 예나 지금이나 발전의 보증수표로 인식되고 있다.교통여건의 개선과 함께 대규모 산업단지 개발을 조성하고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1970년대 수출자유지역으로 보석·석재·섬유산업의 전성기를 누렸던 익산이 어떻게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지 알아봤다.
[익산 이야기]소설가 홍석영이 말하는 내 고장 익산(2008. 02. 05)
2008. 02. 05 사회
호남의 관문 益山익산 1933년 익산시 전경 홍석영 | 원광대 국문과 교수. 문리대. 인문대 학장 역임. 현재 원광대 명예교수. 1960년 '자유문학'지에 소설가로 등단. 이후 창작집 '이적의 밤' '피서지' '우리들의 대부님' '바람과 사슬' 장편소설에 '불꽃 제단' '숲에서 나무되어' '천년의한' '양고 소세양의 빛과 사랑' 등이 있음. 현재 한국문인협회와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고문을 맡고 있다. 나는 익산군 왕궁면에서 태어나 1957년부터 이리시에서 줄곧 생활해왔다. 그러다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되어 익산시가 되었으니, 나는 공부와 취직 때문에 몇 년 타향살이 한 것을 빼고는 평생을 익산 땅에서 살아온 셈이다. 고향을 멀리 두고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이 일쑤 느끼는 그리움과 나의 고향 정취는 애당초 다를 수밖에 없다. 어쩜 그리도 오랫동안 한 고장에 붙박아 지겹게 살아왔는지 때때로 나 자신도 이상하게 여겨진다. 직장에 매이다 보니 고장을 떠날 수 없었던 게 이유여서, 정년 퇴직을 앞두고 노후에 새로운 인정과 환경을 경험하고 싶어서라도 모처럼 훨훨 날아가는 기분으로 딴 고장으로 이사나 갈까 하고 꿈을 키워보기도 했지만, 막상 그때가 되고 보니 지엄한 현실이 옴짝달싹 못하게 나를 도로 이 고장에 주저앉혔다. 그러나마 익산은 매우 유구한 역사를 지닌 전통 있는 고을이다. 저 멀리 삼한시대에는 54개 부족국가 가운데 가장 강성했던 마한 목지국(木只國)의 중심지였으며, 백제시대 무왕 때는 한때 천도하려고 시공했다는 그 궁터 유구가 남아 있어 내 고향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근처에서 지금 한창 발굴 중이다. 그뿐 아니라 ‘서동과 선화공주’의 연기설화로 알려져 있는 미륵사지(彌勒寺址)의 서탑이 지금 해체복원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익산은 찬란한 백제문화의 창고 위_1940년 신용마을 전경아래_1950년대 익산의 음식점 풍경 이렇듯 내 고향이 마한과 백제의 역사적 유적지라는 데서 나는 어릴 적부터 은근히 큰 자긍심을 느껴왔거니와 최근 이와 연관하여 뜻밖에 황당하고 서글픈 생각을 경험했다. 우리 고향 마을은 백제 때 거찰인 제석사(帝釋寺) 유적지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동산에는 국보로 지정된 금강바라밀경과 사리병이 일시 보관되었던 걸로 알려진 탑의 심초석이 아직도 남아 있고, 마을 곳곳에 문화재 유물을 증명하는 석재와 와당 등을 더러 발견하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문화재 당국이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함으로써 주변사람들이 보상금을 받고 마을을 떠나게 된 것이다. 짐작컨대 우리 가계가 그곳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지가 가히 300여 년은 넘은직한데 결국 문화재 탐사란 명목으로 뜻밖에 쫓겨난 것이다. 내가 태어나 놀던 동산이며 정겨운 골목들, 그리고 애환이 이끼처럼 끼어 있는 사촌의 집들은 어찌 되었는가? 나는 궁금증을 가지고 지난 추석 귀성길에 문화개발지를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추억 어린 정겨운 동산과 집 그리고 골목들이 가뭇없이 사라진 것이다. 마을의 반쪽이 곳곳에 노란 깃대가 꽂혀 있는 삭막한 들판으로 변해 있었다. 세상에 수몰민이란 말은 들어보았어도 문화재로 실향민이 된 현실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과거가 어쨌든 현실의 익산시는 도무지 매력 없는 도시 환경이다. 흔히 말하는 산수경개의 기본인 빼어난 산이나 강, 하다 못해 냇물조차 흐르지 않는 삭막한 도시다. 그런 대로 도심에 가까운 배산(盃山)이 있어 시민들의 휴식터로 사랑받고 있지만, 정작 산행다운 즐거움은 도심에서 7, 8㎞나 떨어진 미륵산(彌勒山)에나 가야 한다. 또 시가지에 개울물조차 흐르지 않는다. 시의 최남단에 대아댐에서 흘러내리는 물길로 만경강 둑이 있지만, 시가에는 아무런 보탬이 안 되어 이른바 열섬 현상이 가중된다. 그러니 서울시의 청계천처럼 메마른 도심을 적셔주는 인공 수로라도 파서 가까운 금강 물이라도 끌어들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터무니없는 환상조차 갖는다. 사통팔달의 익산, 인재와 물류의 중심지 1995년 익산 기차가 폭발했을 당시 처참한 모습 본시 옛 이리시의 이름은 ‘솝리·솜리’였는데 ‘속마을’이란 뜻으로 그것의 한자 표현인 ‘이리(裡里)’ 역시 뜻이 같다. 이는 긴 능선 아래 약간의 분지로 널따랗게 퍼져 있는 시가지가 지닌 지형적 특성을 드러낸 것이다. 당초 이곳을 도시로 형성한 것은 무엇보다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즉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고 호남평야의 곡창에서 곡식을 수탈하여 일본으로 빼돌리기 위해 1907년에 전군도로를 개설했고, 이어 호남선 철도 부설이 본격화했다. 그러다가 본시 호남선 철도가 전주를 통과하도록 계획되었다가 유지들의 반대로 1914년에 이리를 연결지점으로 마침내 개통했다. 이로써 만경강 유역의 갈대숲 너머 이름 없는 한촌이 일약 도시로 발전한 것이다. 철도가 나면 ‘각 고을에서 뜨내기 모산지배(謀算之輩)가 몰려오는 틈에 불한당(不汗黨)이 들끓어 인심이 흉흉해진다’는 전주 유지들의 고루한 편견 때문에 익산이 되레 개방과 번영의 이득을 톡톡히 본 셈이다. 어찌 됐든 익산은 사통팔달의 교통 중심으로 호남선과 더불어 전라선과 군산선이 갈라지는 환승역으로, 또한 고속철도(KTX)가 머무는 자리로 잡혔으니, 북으론 서울, 남으론 목포, 동으론 여수, 서로는 군산으로 이어지는 익산역은 중요 물류의 핵심이 되었다. 더구나 최근에는 군산 하구둑에 철로가 부설되면서 장항선이 익산역까지 연결되었다. 이러한 교통의 발달은 급격한 인구 유입을 통해 근대적인 도시화를 꾀했으니, 해방 후 인구 3만 명의 작은 도시에서 산업화로 도약한 1970년대에 7~8만 명 그러다 10여 년 전 익산군과 통폐합하여 인구 30만 명이 넘는 중도시가 되었다. 이러한 교통의 편이는 필연적으로 인구 유통을 가속화함으로써 교육 진흥에 이바지했다. 일제강점기에 이 고장에 중등교육을 위한 시설이라고는 농림과 공업의 두 남자 실업교에 여고 하나뿐이었다. 그중 ‘이리농림고’는 호남평야의 관문이란 데에 세워진바 당시에는 농업계 고교로는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명문이었다. 광복 후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난 국민의 교육 열망에 힘입어 이 고장에는 남성중·고교란 사립학교가 설립되어 어두운 밤에 혜성처럼 명성을 떨치고, 더불어 남성여중·고가 들어서면서 짝을 이루었다. 이어 원불교 재단에서 일찍이 유일학림을 기초로 하여 원광대학을 설립해 오늘날의 유수한 명문 종합대학으로 키웠으며, 잇달아 원광 남녀 중·고교를 설립함으로써 육영재단으로 큰 공적을 세웠다. 또한 사립인 이리중·상고가 설립되었으나 오늘날 인문고로 전환되었고, 이일여중·고가 생겨 여성 교육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 무렵 고장에는 해방 후 도립인 ‘이리농대’와 ‘이리공대’가 있었으나 전북대학이 국립으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농대와 공대가 전주 캠퍼스로 흡수 통합되고 말았다. 그 후 농대 자리가 ‘익산대’란 국립 전문대 체제로 운영되다가 최근 통합조치에 따라 우여곡절 끝에 전북대와 합쳐 식품과 환경 쪽 단과대로 남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익산 시민은 일찍이 이 고장에서 싹터 키워왔던 두 단과대학을 대학본부의 일방적인 편이 때문에 전주로 빼앗겼다는 데 크게 배신감과 상실감을 느꼈다. 그뿐 아니라 일제 때부터 이 고장에는 오늘날의 전주 KBS가 ‘이리방송국’이란 이름으로 있었는데 이 역시 1960년대 후반쯤 전주로 옮겨졌다. 지역을 사랑하는 시민들은 이럴 때마다 궐기하여 항의하고 진정하면서 계속 존치시키려고 애썼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도청소재지인 전주시라는 우월권 앞에 맞서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이 무렵 ‘이리기독교방송국’이 교계의 후원을 받으며 어렵사리 터를 잡아 성장을 꾀하더니 이마저 전주로 옮겨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지금은 원불교에서 운영하는 라디오의 ‘원음방송’과 ‘금강 케이블 TV 방송국’이 있고, 지역신문으로 ‘익산신문’이 있어 빈약하나마 이 고장 언론의 맥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1970년대 자유수출지역 지정으로 번영기 누려 익산의 KTX 정차역 모습 대개 어느 지역이나 그러하듯 지역 발전에는 산업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다. 익산 역시 1970년대 ‘자유수출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지역 번영에 크게 발돋움하게 되었다. 공단을 조성하고 산업도로를 내고 인구 유입에 따라 아파트를 짓는 등 활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익산 공단에서 대표적으로 알려진 산업은 귀금속 공예품이었다. 전국에서 단일 품목으로 이곳처럼 큰 규모의 공장이 집단화한 곳은 없다. 이로 인해 익산시는 ‘보석 도시’를 자칭하며 홍보하고 있다. 지금은 옛 수출지역을 벗어나 제2, 제3 공장지대로 넓혀 기계·화학·전자 등 각종 공장이 빽빽이 들어서 비약적인 발전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익산시는 당초 철도 시설이란 교통의 이점으로 발돋움하여 교육도시로 발전했다가 결국 산업도시로 부흥하는 단계를 밟은 셈이다. 그런데 사람에게도 때로 길흉이 엇갈리듯 익산시에도 과거 31년 전 뼈아픈 시련이 닥친 일이 있었다. 1977년 11월 11일 밤 일어난 익산역 구내에서 발생한 이른바 ‘이리역 폭발사고’다. 그것은 ‘한국화약’이 대량의 다이너마이트를 기차로 운송하던 중 호송원 신무일이란 사람이 정차 중에 술에 취한 채 촛불을 켜놓고 자다가 불이 붙어 폭발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익산 시민 13만 명이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연상케 하는 끔찍한 재난에 휩쓸렸다. 순식간에 귀중한 생명 68명이 사라졌고, 1500여 명이 피를 흘렸으며, 가옥 670여 채가 폭삭 무너졌고, 1200여 채가 파손되었다. 그런데 피해가 가장 컸던 곳은 사고지점인 익산역 부군인 철인동이란 속칭 ‘윤락촌’이었다. 그런 까닭에 평소 도시 미관상 골칫거리였던 그 우범 마을이 우연찮게 말끔히 사라지는 계기가 됨으로써 혹여 당국이 은밀히 사고를 공작한 거 아니냐는 엉뚱한 유언비어가 나돌기도 했다. 이제 그 참극이 있은 지 30년이 지났다. 도도한 강물이 혼탁한 세월의 굽이를 안고 유유히 흘러가듯 아직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을 터인 데도 역사는 너무 쉽사리 과거와 등을 돌린다. 그때 이름 없이 죽어간 불쌍한 창녀들의 아련한 기억 대신, 그때 이재민 보상용으로 세운 아파트가 어느덧 세월이 흘러 재건축의 논의 속에 다시금 옛 추억의 흔적조차 지우려 하고 있다. 그처럼 익산시는 지금 미래를 향한 힘찬 동력으로 50만 명 인구를 목표로 삼아 살기 좋은 고장으로 거듭나려고 하고 있다.
[익산시의 비전]익산시가 변화하고 있다(2008. 02. 05)
2008. 02. 05 사회
도농의 조화, 익산의 제2 도약 기반 KTX익산역사 조감도 2007년 8월 중국 청도 상공회의소. 이한수 익산시장은 청도에 진출한 6개 보석 가공업체 대표를 만나고 있었다. 한·중 보석 브랜드 교류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뒤의 일이다. 한미래, 청도 국제 공예풍성 등 익산 기업 대표들이 가까운 시일에 익산 보석 클러스터 조성지역으로 이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시장도 이전에 필요한 지원을 약속했다. 이 약속은 이미 실행단계에 들어섰다. 익산시 입장에서는 이날 만남이 단지 기업유치 성공이라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익산시 관계자들은 변화하고 있는 익산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대 ‘사건’으로 해석한다. 익산은 보석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 익산역 앞 광장에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보석을 쌓아올린 형상을 한 탑과 분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익산이 ‘보석가공의 도시’라는 것을 부각시키는 조형물이다. 물론 미래 보석가공산업의 메카는 익산이라는 희망도 들어 있다. 하지만 가공수출이 산업의 기초를 이루던 1970년대 보석도시, 익산의 명성은 지금 찾기 어렵다. 고작해야 익산보석축제, 익산보석박물관 등이 그 명맥을 유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기업은 모두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중국으로 공장을 옮겨갔다. 보석산업이 퇴조한 직접적 원인이었다. 250만 명이 상존하는 대구 같은 대도시도 한 대기업이 역외로 빠져 나가면 그 타격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물며 인구 30만 명 남짓한 익산처럼 기업기반이 취약한 중소도시에서 기업이 연쇄 탈출하면 그 타격은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것도 중추기반 산업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만큼 익산시의 경제 활력은 떨어져갔다. 이산재 익산시 공보팀장은 “현재 산업구조 면에서 보석가공 산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다”라며 구체적 수치를 밝히지 않았다. 그는 이어 “이유가 어찌됐든 한국의 보석가공 기업들이 익산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사실은 환영할 일”이라면서 “외국에 나간 기업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익산이 기업하기 좋은 도시로 변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익산시 특화산업인 귀금속·보석 산업의 활성화와 보석도시의 이미지를 높일 수 있는 전기가 다시 마련되고 있다는 뜻이다. 기업의 탈출은 결코 홀로 오지 않는다는 게 경험칙이다. 보석가공 산업과 함께 익산의 전통 산업의 탈출도 이어졌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익산(1995년 이리시와 익산군 통합)의 전신인 이리시는 전북 제1의 도시였다. 교통 요지와 수출자유지역이라는 이점은 전주·목포·순천·여수 등 이름 높던 호남의 도시들을 압도했다. 특히 보석가공과 석재 그리고 섬유산업이 중심지 역할을 했다. 한때 메리아스 산업의 양대 산맥인 백양과 쌍방울이 익산에 본사를 둘 정도였다. 당시 내의 시장은 1조2000억 원 정도로 추정됐다. 당시로선 결코 작은 시장이 아니었다. 그중 백양과 쌍방울이 50%의 시장 점유율을 보였다. 그만큼 익산은 풍족했던 것이다. 백양, 쌍방울도 본사를 서울로 옮겼다. 해외 진출 기업들의 회귀, 익산 변화 실감 중앙매일시장 익산시 역시 옛 영화를 되찾기 위해 ‘기업하기 좋은 도시’를 내세우고 있다. 이한수 시장은 더 나아가 ‘투자매력도시’를 선언했다. 서울투자 유치사무소를 설치해서 100개 기업 유치를 목표로 뛰고 있다. 물론 성과도 있다. 지난해 9월 말 현재 81개 기업을 유치해서 약 827억 원의 투자 유치와 1000여 명의 고용창출 실적을 달성했다. 투자를 예약한 MOU 체결 성과도 적지 않다. 미림화학공업, 아이세로미림화학, 이지오스, 오성엘에스티, 참다래 등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튼실한 기업들이 1100억 원의 투자와 1100명 정도의 고용을 약속한 상태다. 이산재 공보팀장은 이런 실적에 대해 “전북에선 군산 다음으로 높은 성과를 낸 것”이라면서 “군산은 지방산업단지보다 유리한 조건을 갖춘 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된 점을 고려한다면 익사시가 사실상 최고”라고 말했다. 이한수 시장도 “익산이 산업기반이 튼튼하고 생산적인 기업도시가 되어야 희망이 있다”면서 산업 유치기반 구축을 역설했다. 보석가공 기업의 익산 회귀가 익산 경제를 회생시키는 상징적 사건이라면 1월 18일 김완주 전북지사의 도정 설명회는 사실상 익산이 ‘제2의 도약’을 위한 팡파르를 울리는 행사였다. 1월 18일 전북 익산 효성동 백제웨딩문화원. 시민 600여 명이 빽빽이 운집해 있었다. 국가 성장동력 산업으로 선정된 국가식품클러스터 연구·개발단지 조성에 관한 전북도의 보고대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익산시를 찾은 김완주 전북지사는 “식품산업은 21세기형 산업”이라고 규정하고 “익산시는 다른 곳보다 빠르게 준비해서 식품에 관한 모든 것, 즉 연구·개발·생산·유통부분을 총괄하는 식품의 메카가 될 것”이라며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했다. 전종수 익산부시장은 “익산은 최적의 국가식품 클러스터 지역일 뿐 아니라 준비된 도시”라고 강조했다. 전북은 국가식품 클러스터에 당장 도비 10억 원을 지원한다. 익산시도 43억 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국가식품 클러스터 조성사업은 앞으로 7년 동안 계속된다. 민간 주도의 인력양성 사업 중 식품산업 분야의 연구와 기술개발 그리고 생산과 유통 생산성 제고 등을 위해 2014년까지 무려 8910억 원을 투자할 예정이다. 음식산업을 익산의 새로운 지역특화 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전략인 셈이다. 찬란한 부활 준비는 시작됐다 음식 산업의 발전성은 무궁무진하다. 아시아 지역의 1년 식품산업의 유통량은 무려 2조 달러에 이른다. 식품산업은 로봇산업, 우주산업, 유전자산업, IT산업 등과 함께 ‘21세기형 녹색산업’으로 불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식품산업은 소비자 구매와 직접적 관계가 있는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농수산물도 이미 브랜드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익산’이라는 이름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인 것이다. 지역특화의 본거지는 왕궁농공단지가 있다. 이 단지는 87%의 분양률을 보이는 등 기업 투자가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익산이 국내 최대의 육가공업체인 하림, 국내 굴지의 농기계 업체인 동양물산기업의 익산공장 설립, 넥솔론, 참다래유통산업단 투자 등 농축산 및 농기계 관련 기업이 투자를 서두르고 있다. 이한수 익산시장은 “농공단지 조성으로 새만금 방조제 배후지역에 내륙형 첨단산업 기반을 구축해 지역산업발전과 신규고용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익산은 중소도시로선 꽤 대규모의 산업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왕궁농공단지 외에도 삼기·낭산지구산업단지(330만㎡, 약 100만 평)와 종합의료과학산업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삼기·낭산지구산업단지 조성은 사업비만 2363억 원이 드는 대규모 사업이다. 오늘 2011년까지 조성을 완료하고 전자부품, 영상·음향, 통신장비 등 첨단산업을 유치할 계획이다. 또 오는 2009년까지 함열읍 일원에 45만㎡(약15만 평) 규모인 종합의료과학산업단지는 양방과 한방의 협치를 기반으로 하는 국제적인 뇌질환 전문 치료 도시를 만들어 갈 예정이다. 사실상 ‘찬란한 부활’을 위한 준비작업를 시작한 셈이다.
[인터뷰]익산시장 이한수 “여성이 선택하는 익산을 만들겠습니다”(2008. 02. 05)
2008. 02. 05 사회
이한수 익산시장은 결코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그런 그가 ‘여성 중심의 시정론’을 펴고 나왔다. 그는 도시개 발도, 교육지원도 심지어 산업단지 조성과 관광단지 개발마저도 ‘여성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여성론’ 안에는 그의 시정철학과 시정목표가 담겨 있다. 2월 24일 익산 시청 시장 집무실에서 익산시정의 방향과 목표를 들어봤다. ● 지난해 성과와 아쉬움은. “지난해에는 안팎으로 많은 일을 겪었다. KTX 익산 정차역을 확정하고 지역 발전의 청사진인 중장기 발전 구상 및 역세권 개발 계획을 세운 게 큰 보람이다. 450만㎡ 규모의 산업단지를 조성하고 (주)넥솔론, 참다래유통사업단 등 굵직한 기업체를 유치하여 도시의 생산성을 높이고 있다. 특히 조류 인플루엔자(AI) 위기 극복, 전북대와 익산대 통합, 이리역 폭발사고 30주년 추모행사, 익산역사유적지구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등을 시민들과 함께하면서 자신감과 더불어 새로운 화합과 상생의 길을 열게 되었다. 서해안 시대를 맞아 중부 내륙의 교통 요지이며 자연재해가 없는 천혜의 조건을 가진 익산으로 많은 기업이 이전 의사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산업용지가 부족한 것이 아쉽다.” ● 올해 역점적으로 추진할 사업은. “올해 시정목표를 ‘행복이 한걸음 더 다가오는 해’로 정했다. 이를 위해 4대 핵심 시책으로 여성이 행복한 도시, 깨끗한 도시, 자녀가 안전한 도시, 숲이 어우러지는 도시를 만들 것이다. 지난해 익산은 많은 기업을 유치했으나 실질적으로 인구 유입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는 가정 살림의 주도권을 쥔 여성이 익산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해 특히 여성이 선택하는 도시 익산이 될 수 있도록 여성 친화적인 도시환경을 구축할 생각이다. 산업단지 조성, KTX 역세권 및 원도심 개발, 미륵사지지구관광지 조성, 웅포관광지 조성, 함라한옥체험단지 조성, 교육발전 1차 5개년 계획 추진, 익산사랑장학재단 기금 조성, 고구마 종순 기지화사업, 친환경농업활성화, 농산물 유통센터 건립 등이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데 크게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 여수 세계박람회 개최와 새만금 개발 등은 익산이 서해안 시대에 교통 요지로 부상할 기회가 될 텐테. “호남내륙의 철도교통 심장부에 KTX 익산 정차역이 생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지난해 KTX 익산 정차역 확정, 역세권 개발 구상은 익산의 부가가치와 직결된다. 올해는 좀 더 구체적인 역세권을 개발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할 것이다. KTX 익산역 역세권 개발 방향은 지금 당장의 수요보다 앞으로 지역 발전을 수용할 수 있는 상업·업무·문화 공간 등 복합기능을 조성하여 익산과 전북지역 발전의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려고 한다. 이 역세권 개발사업을 특화거리 조성, 창인시장 아케이드 설치 등 원도심 활성화 사업과 연계하여 지역경제의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갈 계획이다. 이러한 교통 물류 인프라와 생명도시라는 지역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국가식품 클러스터를 유치할 것이다.” ● 전북도가 주도하는 국가식품 클러스터 사업의 전망은. “식품 클러스터는 식품 수출 중심의 허브를 만들어 전북의 100년 먹거리를 해결하는 중요한 사업이다. 전북도청과 함께해온 익산은 오래전부터 열정을 가지고 지역 특성을 살려 생명·식품 산업의 중심도시가 되는 꿈을 키우며 준비해왔다. 익산은 지난해 7월 호남고속도로에 인접한 왕궁·흥암지구의 도시기본 계획을 완료하여 330만㎡ 규모로 식품산업전문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다른 지역보다 1년 6개월이나 빠르게 식품산업단지 등 주요 시설 공사를 바로 시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330만㎡ 규모의 산업 용지를 추가로 확보할 수 있는 준비된 식품 클러스터 도시라 할 수 있다. 또한 익산은 교통의 요충지로 식품 관련 기업, 학교, 연구소 등 인프라를 갖추었고, 쾌적한 주거, 우수한 교육, 문화, 레저 여건을 갖춘 식품 클러스터의 최적지라고 자부한다. 참고로 익산은 전주, 완주~익산~군산~새만금~김제, 정읍 델타벨트의 중심지이며 호남고속도로, 익산~장수 고속도로의 교차점으로 새만금, 세종시까지 20분, 수도권까지 90분 만에 닿을 수 있는 교통 요지다. 특히 2011년 완공할 예정인 KTX 고속철도로 익산과 서울이 60분대로 연결된다. 국내 최대 육가공업체인 하림, 오리온, 삼양식품, 참다래 유통사업단 등이 있으며 원광대학교 한의대, 전북대 생명과학대학, 호남농업연구소, 농업기술원, 축산연구소 등이 있다.” ● 풍부한 문화자원에 비해 관광인프라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다. “관광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올해는 백제 왕궁터와 제석사지를 발굴 조사하여 백제 무왕대에 익산을 경영한 사실을 좀 더 확실하게 밝혀내고 발굴 유적을 정비하여 역사문화 체험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또 총 231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미륵사지지구 관광지를 조성하고, 185억 원을 들여 함라한옥체험단지를 조성하며 왕궁리 유적지, 쌍릉테마공원, 보석박물관, 웅포관광권을 연계한 관광지를 개발할 것이다.” ● 침체된 익산의 전통산업인 보석·석재·섬유산업의 활성화 전략은. “섬유·보석 산업은 값싼 원자재 가격과 인건비로 중국, 동남아 등 많은 기업체가 이주했지만 최근 중국시장의 장점이 줄어들어 점차 국내로 이전하려고 준비하는 기업체가 늘고 있어 익산을 대표하는 산업으로 키우기 위해 관심을 쏟고 있다. 보석산업은 인적·기술적 잠재력과 인프라가 풍부하고 세계 시장 규모가 1000억 달러를 상회하고 있어 전망이 있다고 본다. 150억 원을 투자하여 전시판매장과 보석가공단지를 조성하고 관련 기업체를 유치하여 보석산업 클러스터를 구축해 전국의 뷰티산업을 주도해나갈 계획이다. 올해 5256㎡ 규모의 보석전시판매센터를 건립하고 8만6000㎡ 규모의 보석가공단지를 조성할 예정이다. 섬유산업은 2012년까지 247억 원을 투자하여 닥섬유 제품개발, 신소재개발 상품화, 제품 브랜드화 및 마케팅 등으로 닥섬유니트패션 클러스터 구축을 추진하고 있으며, 전라북도와 적극적인 공조체제를 유지하여 환경과 몸에 좋은 생활을 돕는 ‘섬유산업 로하스(LOHAS) 프로젝트’ 사업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생산에서 판매까지 산·학·연·관 협력체계를 구축하여 일류 니트패션 도시로 발전해나갈 계획이다. 지난해 우리 시 업체에서 신석기시대 빗살무늬 문양을 황등석에 되살린 물다듬 무늬석이 국내외에서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석재산업도 특구지정을 통해 환경친화적 산업으로 육성하고 2010년까지 67억 원을 투자하여 석제품 전시판매센터를 건립할 계획이다.”
[익산의 문화유적]서동요 얼 깃든 백제문화 고도(古都)익산(2008. 02. 05)
2008. 02. 05 사회
공주·부여에 못지않은 볼거리들, 관광 잠재력 뛰어나 왕궁5층석탑 지난 1월 17일 사학계는 전북 익산에서 날아온 낭보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는 “전북 익산 왕궁리 유적에 대한 2007년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 궁성 정원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는 조경시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익산 왕궁리 유적은 백제 무왕(600~641년)대에 조성됐다. 1989년부터 지금까지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2006년 왕궁 정원의 중심시설이 확인됐다. 특히 왕궁리 정원의 특징은 ‘자연친화적 구성’으로 꼽힌다. 왕궁성이 구릉지대에 있어 자연스러운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물을 흐르게 한 점이 가장 눈에 띄기 때문이다. 사학자 정무연씨는 “궁성 정원은 당시 궁궐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왕궁 정원의 발굴로 익산이 다시 세인의 관심이 되고 있다. 익산은 한때 ‘뜬’ 일이 있다. 2005년 한 TV방송에서 ‘서동요’라는 드라마를 촬영하고 반영한 게 계기가 됐다. 이 드라마를 통해 세인들이 익산이 서동요의 본고장이고 백제문화의 본고장임을 알게 된 것이다. 서동요의 주인공인 서동이 바로 왕궁 정원의 주인이다. 서동요는 백제 무왕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를 사모한 나머지 신라 서울에 와서 노래를 지어 성 안의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는 고대 설화다. 내용은 선화공주가 밤마다 몰래, 훗날 백제 무왕이 된 서동의 방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이 노래가 대권 안에까지 퍼지자 진평왕은 마침내 공주를 귀양 보낸다. 백제 무왕은 이를 기다렸다가 선화공주와 함께 백제로 돌아가 임금과 왕비로 잘 살았다는 이야기다. 1000년의 뛰어나고 독특한 문화유산 지녀 제적사지 유적 익산은 인구가 33만 명 남짓한 중소도시다. 지금까지 한 번도 자연재해가 발생했다는 기록이 없는 축복의 땅이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문화유적이 풍부하고 잘 보존되어 있다는 얘기다. 독립운동기념사업회 황성근 대표는 한 언론에 기고한 글에서 “익산은 구석기 문화부터 신석기 그리고 중세사와 근·현대사까지 한강 이남에 있는 다른 지역에 비해 독특하고 뛰어난 문화유산이 많다”고 설명했다. 사실 뿌리 깊은 마한·백제 문화 유적과 마를 캐며 익산 금마에서 성장한 서동이 백제 30대 무왕으로 등극하면서 미륵사를 창건하고 왕궁을 건설한 익산에는 숨은 볼거리가 많다. 백제 말기 무왕이 익산 천도 과정에서 건립한,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왕궁터인 왕궁리 유적지, 찬란한 백제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미륵사지, 현존하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미륵사지석탑(국보 11호), 왕궁리 5층 석탑(국보 제289호), 당간(幢竿·절에서 기도나 법회 등이 있을 때 당(幢)을 달아두는 기둥) 지주, 금강경판과 사라장엄(국보 제123호), 무왕릉과 무왕비릉, 완전한 입체불상인 연동리 석불좌상, 백제사를 알 수 있는 고분군이 분포된 입점리 고분 등이 대표적 백제유적이다. 이런 문화유산은 ‘천년고도(古都) 익산’이라는 칭송에 걸맞다. ‘고도’라는 칭호는 단지 오래된 도시라는 뜻이 아니다. 정부로부터 고도라는 칭호를 받으려면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왕이 태어난 곳이어야 하고 궁궐의 흔적이 있어야 한다. 또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산성 같은 방어시설이 있어야 한다. 사찰도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경주, 부여, 공주 그리고 익산이 ‘고도’로 불린다. 국제 관광도시로 도약 위한 기지개 위_제적사지 출토 막새가운데_제적사지 출토 악귀상아래_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 익산의 역사성과 문화적 우수성이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유수한 문화자원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익산이 관광명소로 부상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익산에는 나름대로 이름 있는 축제가 여러 개 있다. 익산보석축제, 익산국화축제, 익산돌축제, 서동축제 등이 그것이다. 이런 행사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관광객은 184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도 2006년에 비해 관광객이 45% 증가한 것이다. 이 수치는 1000만 명을 훌쩍 넘는 경주와 비교도 할 수 없다. 2006년 아시아 태평양 도시관광진흥기구인 TPO에 가입하고 익산 역사문화 지구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사실이 알려지면서 관광객이 현저히 늘어난 것이다. 이한수 익산시장도 “문화유적과 연계한 관광인프라가 부족할 뿐 아니라 역사·문화적 자긍심과 자부심도 이끌어내지 못했다”면서 “이는 역사문화 유적에 대한 실체화 작업이 미진했고 문화유적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게 그 원인”이라고 말했다. 문화유적과 연계한 관광인프라가 부족했다는 지적인 셈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익산은 문화관광자원을 단장하는 등 본격적인 상품화 작업에 나선다. 미륵사지, 미륵산성, 왕궁리 유적, 제석사지 등 백제문화 유적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있다. 총 231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미륵사지지구 관광지를 조성하고, 185억 원을 들여 함라한옥체험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또 왕궁리 유적지, 쌍릉테마공원, 보석박물관, 옹포관광권을 연계한 관광지도 개발하고 있다. 특히 웅포곰개나루, 최북단 자생차밭, 베어리버 골프장 등 레저와 휴양관관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익산 브랜드’ 작업도 본격화할 예정이다.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천년지애를 재현하는 서동축제를 중심으로 국화축제를 통합하고 보석축제와 돌문화축제를 연계 개최하여 수려한 볼거리와 체험거리를 제공할 예정이다.
[익산의 명장 명인]아사달의 후예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 김옥수(2008. 02. 05)
2008. 02. 05 정치
석공예 명장을 넘어 인간문화재로 일가 이뤄 투박하고 거친 돌이 그의 손을 거치면 예술작품이 되고 종교적 상징물이 된다. 40여 년을 석공예 외길을 걸어온 김옥수 일심석재 대표(54). 그는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으로 독보적 경지에 오른 인물이다. 2001년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노동부)으로 선정되고, 2006년 11월 석공예 분야 인간문화재(36호)로 지정된 우리 시대 최고의 장인이다. 전국적으로 석공예 명장은 14명에 불과하다. 그중에서 인간문화재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김 명장을 포함해 3명뿐이다. 김 명장은 1954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14세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가난과 배고픔 때문이었다. 석재공장이 몰려 있던 서울 망우리에 자리 잡은 김 명장은 그곳에서 석재기술을 배웠다. 자신과 같은 또래가 입은 교복차림이 너무 부러워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던 김 명장은 망치로 돌을 깨면서 ‘이것도 공부다’라는 말을 수없이 되뇌였다. 수년간 돌을 깨니 석공예의 오묘함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석공예가 인생을 걸 만한 일이란 확신이 들었다. 김 명장은 “고달픈 세월을 보내면서 기술을 배우고 내가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석공예라는 것을 깨달았다. 좋은 작품이 타인에 인정받을 때 고단함도 사라졌다”라고 술회했다. 한 우물을 꾸준히 파니 역시 기회가 왔다. 1975년 국제기능경기대회에 출전해 은메달을 획득한 것. “열심히 노력하면 돈도 벌고, 작품도 남기는 참 좋은 직업이다 싶더군요. 그래서 황등석으로 유명한 돌의 고장이라는 익산에서 능력을 더 연마하자는 마음으로 1984년 이사 와 정착한 거죠.” 김 명장은 이후 익산시 석재인과 기술교류, 석재연구 등 많은 활동을 하면서 일심석재를 설립했고 지금의 터전에서 석공예 명장과 인간문화재라는 일가를 이루어냈다. 석재박물관 건립과 돌문화 보존도 주도 김 명장은 자신을 석공예의 선조이며 익산미륵사지 석탑을 만든 백제 아사달의 후예라고 말한다. 백제 석공예의 후손으로 자부심이 대단한 김 명장은 익산의 대표 축제인 ‘돌문화축제’를 주도하고 있다. 익산은 뛰어난 화강암과 백제의 석재유물, 세계적인 미륵사지석탑을 비롯해 왕궁리5층석탑, 동고도리석상 등 자랑스러운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김 명장은 “위대한 백제 석공예인의 후손으로 익산이 아름다운 ‘돌의 고장’임을 널리 알리고 싶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는 1991년에 ‘돌문화 보존회’를 만든 이유기도 하다. 김 명장의 또 다른 요즘 관심사는 ‘익산 돌다루기 놀이’의 활성화다. 이를 민속놀이로 승화해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음으로써 석재 관련 업체들의 자긍심과 사기를 드높이고 건축·공예·조각 등 석재산업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석재박물관도 설립해야 한다. 마한과 백제문화가 살아 숨쉬는 익산에 국내 석재유물을 전시하는 ‘석재박물관’을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작은 소망이다. 김 명장은 “석재박물관과 전수관을 짓는 것은 우리의 찬란한 석재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출발점”이라며 “정부에서도 이런 박물관이나 전수관 하나 정도는 세워줄 만한 제도적인 장치와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익산의 전통산업]새롭게 변신하는 익산의 3대 전통산업(2008. 02. 05)
2008. 02. 05 사회
보석·석재·섬유산업 꽃보석 조형물 "KTX, 보석, 황등돌, 날씬이고구마, 순수미…” 익산의 상징이면서 익산을 지키고 살리는 힘이다. 1970년대 익산은 교통 요지이며 수출자유지역으로, 보석·석재·섬유산업과 농업도시로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1995년 도(이리)·농(익산) 통합도시로 새롭게 출발하면서 도시의 정체성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 1970, 80년대 산업구조(석재, 섬유, 보석, 수출자유지역 공단)를 그대로 지탱하며, 교통과 소비도시로서 명맥도 유지하지 못한 채 인구유출과 경제, 심리적 공황에 빠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 보석산업의 메카, 옛 명성 되찾는다 보석박물관 주력산업인 보석산업은 3D 업종으로 몰려 중국의 값싼 노동력에 밀려 많은 보석세공 업체가 익산을 떠나 중국과 태국, 일본으로 공장을 옮겼다. 섬유산업 역시 값싼 중국산에 밀려 존폐의 기로에 몰렸던 게 사실이다. 전국 생산량의 70% 이상을 공급하는 석재산업 역시 영세하기는 마찬가지다. 익산의 위기는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게 만들었다. 최근 익산이 제2의 도약을 통해 도·농이 조화롭고 살맛나는 지역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다시 한 번 용트림하고 있다. 우선 귀금속 보석산업을 활성화해 과거의 명성을 되찾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다. 익산시는 국내 최대의 보석가공단지를 조성하고 이를 수출특화산업으로 육성해왔다. 익산의 자랑거리인 보석박물관과 왕궁보석테마관광지, 보석문화축제 등은 익산이 한국의 보석 메카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인프라다. 또한 익산은 지역대학에 귀금속공예과, 귀금속디자인학과, 귀금속공예과 등 인적·기술적 잠재력을 갖고 있다. 익산은 1976년 이후 30년간 세계적인 가공기술을 축적하고 외화를 획득한 지역으로 현재 국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고급 기술인력(금은세공, 보석가공, 다이아몬드 가공)의 대부분이 익산공단 출신이다. 보석산업은 세계 시장 규모가 1000억 달러를 상회하고 있고 부가가치가 높은 대표적인 산업분야다. 태국과 중국 등 값싼 노동력에 밀려 현지공장을 이전한 업체가 최근 속속 돌아올 채비를 하고 있다. 익산시는 중국과 일본으로 진출한 기업을 대상으로 투자의향 조사를 실시하고 중국으로 진출한 19개 업체 대표 및 중역 관계자와 만나 상호 협력 방안을 논의했으며 익산 회귀 또는 제2공장 설립 등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한 지원정책을 모색하고 있다. 또한 전국의 뷰티산업을 주도하기 위한 보석산업 클러스터 구축사업도 전시 판매장을 설치하는 2008년 국가예산을 확보함에 따라 힘을 얻게 되었다. 익산 황등석 연간 57억 일본으로 수출 위_보석 상징 조형물아래_보석축제에 모여든 관광객 익산의 석재산업은 전국 석재산업의 70%를 차지한다. 황등 농공석재단지는 국내 유일의 석재가공단지이며 낭산, 황등 채석장이 분포되어 있다. 석재산업과 관련한 귀금속, 보석, 석재 가공 자동화 및 디자인 연구개발기술 혁신센터와, 국내에서 유일하게 매년 60~70명의 석공예 기술자와 건축석재 기술자를 배출하고 있는 대한광업진흥공사 익산사업소가 있다. 신석기시대 빗살무늬 문양을 황등석으로 되살린 물다듬 무늬석은 전국은 물론 일본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익산시는 황등농공단지 내에 있는 (주)초석석재산업과 일본 쓰게석재(주)가 양해각서를 체결해 연간 500만 달러(한화 47억 원)의 황등석(빗살무늬석)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길을 열었다. 석재 산업은 오는 2009년까지 109억 원의 사업비를 투자하여 석재산업특구지정, 석재전시판매센터 건립 등을 추진하고 있으며 폐석산을 활용해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미(美)와 건강을 입는다! 익산시는 오는 2011년까지 214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닥섬유 니트패션 클러스트를 구축하여 닥나무 제품과 디자인 개발, 신소재 개발 상품화, 제품 브랜드화와 마케팅 등으로 니트, 패션의 일류 도시로 성장시켜나가는 한편 LOHAS(Lifestyle Of Health And Sustainability) 패션의류사업을 적극 추진해나갈 계획이다. 현재 산업자원부는 충남 자카드직물, 전북 니트류, 대구·경북 화섬직물, 부산 모직물, 진주 견직물 등으로 특화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전라북도는 LOHAS 섬유분야를 특화시켜나갈 계획이다. 익산시에는 내의류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BYC, 태창, 쌍방울, 좋은 사람들 등이 있으며 염색가공에 적합한 수질의 공업용수가 풍부하고 한국니트산업연구원이 있다. 앞으로 패션·디자인의 개발, 고유상표 개발, 고기능성 소재의 개발 등으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익산시는 전국 최고의 한의학 도시, 한방산업 도시라는 이미지를 최대한 활용하여 함열읍 다송리 일원의 한·양방의료와 연구단지특구를 49만5000㎡ 규모로 확대해 종합의료과학산업단지를 조성하여 한방 중풍 치료 병원, 한약제제 신약 연구개발센터, 한약재 품질시험 및 보증기관, 한방 치료 휴양 복합단지 등을 조성할 예정이다. 익산시에는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및 한의학전문대학원, 한방과학연구센터, 약품연구소, 의과학연구소, 생명공학연구소, 한국전통의학연구소, 원광생체재료매식연구소, 한방과학연구소센터 등 대학과 10개 연구소가 있으며 약품 관련 산업체인 원광제약, (주)엘지화학, (주)두산 등 12개 기업체와 의료기기 관련업소 4개 기업체가 활동하고 있어 지역특화 전망이 밝다. 식품산업 클러스터를 조성하기 위해 삼양식품, 하림 등 신규 확장을 지원하며 산업단지를 조성하여 식품 대기업 유치, 전북의 전략산업인 식품산업 관련 중소업체 유치 및 창업 등을 지원한다. 전통축제도 리모델링, 익산의 4대 축제를 하나로 통합 익산을 대표하는 4대 축제가 올해부터는 하나로 통합하여 열린다. 10월에 치르는 통합축제는 기존의 익산서동축제, 천만송이 국화축제, 돌문화 축제, 보석문화축제를 하나로 합친 것이다. “선화 공주님은 남모르게 사랑을 나누고 맛둥방(서동)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익산은 국경과 신분을 초월한 사랑 이야기 즉 ‘서동설화’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고장으로 유명하다. 2006년 왕궁리 유적에서 궁궐 성터가 확인되고 드라마 ‘서동요’의 촬영지로 유명세를 타 해마다 많은 사람이 찾았고, 익산시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를 서동축제로 재현하고 있다. ‘익산천만송이 국화축제’는 도·농이 조화를 이룬 행복한 도시 익산과의 만남, 찬란한 오색빛과 감미로운 향의 천만송이 국화와의 만남, 친환경자연농법으로 생산한 웰빙 농·특산품과 특별한 만남을 마련했다. 또 50m 국화인절미 만들기, 시민국화작품 콘테스트, 민속놀이, 국화품종 전시, 국화 관련 체험 행사 등이 볼거리다. ‘익산보석축제’는 보석의 도시라는 명칭답게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조성된 귀금속 공단에 100여 업체가 입주하고 있다. 익산보석축제에서는 우수한 세공기술을 자랑하는 숙련공이 가공 생산한 보석의 아름다움을 체험할 수 있다. 관광객이 참여할 수 있는 보석가공 체험 코너, 보석 무료 감정, 보석 무료 세척, 익산 가족한마당 등 다양한 이벤트도 볼거리다. ‘돌문화축제’는 익산이 마한, 백제 거석문화의 숨결을 잇고 있는 지역으로 미륵사지석탑, 왕궁리 5층 석탑, 연동리 석불입상 등 과거 찬란했던 석조예술 문화재가 산재되어 있는 고장임을 상징하는 행사다. 관내 270여 업체가 함열, 황등, 여산 등 집단적으로 분포하고 있어 전통적으로 석재산업이 발달해왔고 백제 아사달의 전통을 이어받아 우수한 석공인의 긍지와 자부심을 일깨워주고 석재문화의 발상지로서 익산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리기 위해 매년 토속적이고 고유한 민속놀이 축제행사로 승화시켜오고 있다.
[익산의 명장 명인]국내 유일 보석 가공 장인 김찬(2008. 02. 05)
2008. 02. 05 사회
우리나라 신 보석가공기술 도입의 산증인 국내에 유일한 보석가공 명장이 있다. 45년째 천연 보석을 가공해온 김찬씨(58). 전북 익산시 영등동에 있는 66㎡(20여 평)의 조그마한 작업장에서는 지금도 원석과 씨름하는 김 명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김 명장은 생활고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순전히 먹고살기 위해 14세인 1963년에 시내 보석가공 공장에 취직했다. 당시 한국의 보석가공 기술은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1960년대 무렵부터 본격적인 보석가공 기술이 대중화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보석가공 방식은 비취와 호박 등으로 왕관과 비녀 등을 만들던 전통기법이었다. 서양기술을 전수받은 뒤부터 자수정과 황옥(토파즈), 석류석(가넷) 등 천연 보석으로 반지와 팔찌 등을 만들었다. 김 명장은 우리나라에 새로운 보석가공 기술을 도입하고 활성화한 산증인이다. 김 명장은 “1960년대 국내에는 연마(커팅) 도안조차 없어 미군 부대에서 서양 잡지를 빼내 기술자들끼리 공장에 모여 독학해야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거의 독학하다시피 보석가공 기술을 습득한 김 명장은 기술력을 인정받아 서울에서 꽤 큰돈도 벌었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몇 번의 위기도 왔다. 국교 단절 위기까지 유발했던 문세광의 육영수 여사 암살사건이 결정타였다. 당시 가공보석은 국내용보다 주로 일본 손님의 주문을 많이 받아온 터였다. 거래선 없는 사업은 모래성 쌓기와 같다. 사업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실의에 빠진 김 명장을 일으켜세운 건 그의 아내였다. 아내에게 틈틈이 선물했던 원석이 재활의 밑천이 된 것이다. 한국 보석연마 기술 역사를 보여줄 공간 마련할 터 김 명장의 기술력은 한국 보석가공 기술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원형 거북 커팅 기술’ 개발 등 45여 년에 걸쳐 200여 개의 가공연마 기술을 내놓았다. 기술력과 예술성을 겸비한 김 명장의 상품은 국내 소매상과 면세점 등에 납품 계약이 줄을 이으면서 한때 20억 원에 달하는 연매출을 올렸다. 1990년대부터 중국산 합성석이 대량으로 유입되고 경제 불황이 겹치면서 차츰 사업 규모를 줄여야 했다. 김 명장은 “젊은이들의 보석 가공일을 3D 업종으로 인식해서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라며 “중국산에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배우려는 사람도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기술을 남겨주기 위해 문하생도 10여 명 들였지만 “벌이가 되지 않는다”며 대부분 떠나갔다. 10여 년 전에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참고 견디던 가장 아끼던 문하생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곁을 떠났다. 현재는 슬하에 둔 1남 1녀 중 막내딸인 승희씨(32)가 대학원에서 보석디자인을 전공하며 틈틈이 김씨의 작업장을 찾아 ‘가업’을 잇고 있다. 회색빛을 띠는 울퉁불퉁한 돌멩이 상태인 원석(原石)으로 보석을 깎아내려면 10가지가 넘는 과정에 수십 번의 손품을 팔아야 한다. 필요한 크기대로 재단한 원석을 흐르는 물에 대강의 모양을 잡으면서 깎아낸 뒤 연마, 다듬기, 광택내기 등을 거친다. 이처럼 보석가공은 인내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기술이다. 쉽고 편한 일을 찾는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배우기가 꺼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김 명장은 걱정하지 않는다. 어디선가 보석가공의 오묘함을 느끼고 도전하는 젊은이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김 명장은 “50년 역사를 가진 국내 보석 연마 기술을 한자리에 모은 전시 공간을 작게나마 마련하는 것이 작은 소망”이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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