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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총 56 건 검색)

[정태겸의 풍경](68) 인천 주문도-강화에서 15㎞, 그 섬에 남기고 온 추억
[정태겸의 풍경](68) 인천 주문도-강화에서 15㎞, 그 섬에 남기고 온 추억(2024. 06. 19 06:00)
2024. 06. 19 06:00 문화/과학
우연히 몇 년 전의 사진을 마주했다. 한창 캠핑하러 다니던 시절, 강화도에서 배 타고 들어간 섬에서 며칠 캠핑을 즐기던 순간의 기록이다. 그때만 해도 강화도에 딸린 섬을 잘 몰랐다. 주문도라는 이름은 더욱더 낯설었다. 한강이 임진강을 만나고 북에서 흘러나온 예성강과 합쳐져 흘러 들어가는 강화만은 북녘을 지척에 두고 있다. 강화만 가장 북쪽을 큼지막한 교동도가 막아섰고, 그 뒤 몇 개의 섬 중 하나가 주문도다. 강화도에서 서쪽으로 직선거리 15㎞.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그런 곳. 주문도는 내세울 유적이나 명승지가 별반 없다. 서해에 별처럼 뜬 섬이 대체로 그렇다. 더구나 걸어서 반나절이면 충분히 한 바퀴를 돌 법한 이 작은 섬에서야 대단한 게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그 섬에서의 기억이 무척 좋았다. 대빈창이라 부르는 해변 곁 솔숲에 텐트를 치고 끼니마다 밥을 지어 먹으며 틈나는 대로 해변을 거닐던 시간은 평화로웠다. 문득 열어젖힌 사진첩에 남은 몇 장의 사진은 그 평화로움을 떠올리게 했다. 잔잔한 바다와 푸르러서 고마웠던 해송 숲과 모래사장에 반쯤 파묻힌 성경이 의아했던 순간과 순간이 사진 속에서 되살아났다. 시간의 강을 따라 몇 년을 흘러오는 동안 잊고 지냈던 추억이 그 섬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주섬주섬 다시 배낭을 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자는 때때로 이렇게 오랜 보물처럼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추억을 찾으러 길을 나선다.
정태겸의 풍경
인천애뜰’ 시위 가능한데 ‘허가’받아야(2023. 10. 13 11:06)
2023. 10. 13 11:06 사회
ㆍ헌재, 인천시 시위 금지 조례 위헌 결정 ‘허가’ 조항은 판단 안 해 아쉬움 남아 인천시청사 바로 앞에 조성된 인천애뜰 잔디마당 / 인천시청 제공 시민에 개방된 광장에서 집회·시위를 원천 금지한 조례는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왔다. 헌재는 해당 조례가 집회·시위의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다만 헌재는 광장에서 집회·시위를 개최하기 전에 지방자치단체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을 두고는 위헌 여부를 판단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다소 아쉬운 결정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그간 이런 내용의 조례가 집회의 허가제를 금지한 헌법과 배치돼 위헌성이 짙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된 터다. “집회 장소로 상징성 큰 곳” 헌법재판소는 지난 9월 27일 인천시의 ‘인천애(愛)뜰의 사용 및 관리에 관한 조례’ 가운데 제7조 제1항 제5호 가목은 위헌이라고 밝혔다. 재판관 9명 전원 일치 의견으로 이같이 결정했다. 해당 조항은 인천애뜰 내 잔디마당에서 집회·시위를 아예 금지하는 내용이다. 인천시는 2019년 11월 청사 담장을 허물고 그 앞에 인천애뜰을 조성해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인천애뜰은 잔디마당, 바닥분수광장, 음악분수광장 등 3곳으로 나뉜다. 인천시는 해당 조례도 함께 제정했다. 조례는 기본적으로 인천애뜰을 사용하려면 시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또 시청사 바로 앞에 조성된 잔디마당에서는 집회·시위를 무조건 금지토록 했다. 잔디마당은 시의 청사부지(행정재산)라는 점 등이 근거였다. 청사에서 조금 떨어진 바닥분수광장과 음악분수광장에서는 허가를 받으면 집회를 할 수 있다. 인천차별금지법제정연대 준비위원회 등 시민사회단체가 그해 12월 잔디마당에서 집회를 열겠다고 신청서를 제출했으나 인천시는 조례를 근거로 불허했다. 그러자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인천지부 등은 해당 조례가 위헌이라며 헌재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헌재는 집회 금지 조항이 ‘침해의 최소성’과 ‘법익의 균형성’을 갖추지 못했다며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헌재는 우선 “집회 장소는 집회의 목적·효과와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집회 장소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집회의 자유가 비로소 효과적으로 보장된다”고 전제했다. 이는 그간 헌재가 일관되게 견지해온 견해다. 헌재는 잔디마당 또한 주변에 인천시, 시의회, 시교육청 등이 들어서 있는 점을 거론하며 “상징성이 큰 곳”이라고 했다. 이어 “이런 장소적 특성을 고려하면 집회의 장소로 잔디마당을 선택할 자유는 원칙적으로 보장돼야 한다”고 밝혔다. 인천시는 잔디마당이 시청사 부지에 속한다는 점을 집회 금지 이유로 들었다. 또 바닥분수광장 등 다른 공간에서는 집회를 개최할 수 있기 때문에 집회의 자유를 위축시키지 않는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헌재는 그러나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헌재는 “바닥분수광장은 시청사에서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집회·시위의 효율적인 목적 달성이 어려울 수 있다”라며 “바닥분수광장에서 집회를 개최할 수 있다는 점이 잔디마당에서 집회를 금지하는 것에 대한 대안이 될 수는 없다”고 일축했다. 헌재는 인천시가 집회를 전면 제한하지 않더라도 방호인력 확충 등을 통해 시청사의 안전과 기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봤다. 또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이 적용되기 때문에 폭행 등 직접적인 위협이 발생할 수 있는 집회는 경찰의 금지·제한 통고 등을 통해 대응하는 방법도 존재한다고 했다. 헌재의 위헌 결정으로 해당 조항은 즉시 효력을 상실했다. 잔디마당에서도 집회 개최가 가능하게 됐다는 뜻이다. 인천시는 헌재 결정의 내용과 취지를 반영해 조례를 개정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인천시 관계자는 “잔디마당에서 집회를 개최하겠다는 신청이 들어오면 시가 허가하는 내용으로 조례가 개정될 것 같다”라며 “다만 현재까지 바닥분수광장 등에서의 집회 개최 신청이 들어오면 반려한 적이 없어 사실상 신고제로 운영해왔기 때문에 잔디마당도 같은 방식으로 운영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지자체의 ‘집회 허가 권한’ 논란 지속 애초 헌법소원 청구인 측은 집회를 개최하기 위해서는 인천시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내용의 조항을 두고도 위헌 여부를 판단해 달라고 했다. 헌법은 집회의 허가제를 금지한다. 이 때문에 광장에서 집회를 개최할 때 인천시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건 헌법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다른 여러 지자체에서도 집회 개최 전에 허가를 받도록 하는 내용이 담긴 조례를 운영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울시의 ‘광화문광장 사용 및 관리에 관한 조례’다. 광화문광장을 사용하려면 기본적으로 허가를 받아야 하고, 더불어 ‘건전한 여가선용과 문화활동’이라는 사용 목적에 부합하지 않으면 사용을 제한할 수 있도록 한다. 서울시는 지난해 10월 시민사회단체가 집회를 열겠다며 제출한 사용신청을 반려한 바 있다. 인천, 부산, 대전 등의 도시공원 관련 조례에도 집회를 위해 공원을 사용하려면 허가를 받도록 한다. 지자체 측은 공유재산법에 따라 행정재산의 사용허가 권한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집회 또한 허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처럼 지자체의 집회 허용 권한을 두고 ‘헌법 위배’와 ‘정당한 권한’이라는 견해가 대립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헌재가 이번 헌법소원심판에서 이 부분을 명확하게 판가름하면 논란이 정리되리란 기대가 있었다. 헌재가 위헌 결정을 내린다면 다른 지자체의 조례에도 영향을 끼치는 등 파급력이 상당히 클 것으로 전망됐다. 그러나 헌재는 이 조항들을 이번 심판 대상에 넣지 않았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집회·시위를 금지한 조항을) 제외한 나머지 조항들에 대해서는 해당 조항 고유의 위헌성에 대한 구체적인 주장을 하고 있지 않으므로 심판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한다”고 밝혔다. 청구인 측을 대리한 박한희 변호사(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는 “헌법소원을 낼 때 집회 허가제를 금지한 헌법을 위반했다는 점을 충분히 주장했는데 아쉬움이 있다”라며 “이런 조례들에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지 논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집회·시위를 ‘공공질서 문란행위’라고 표현하고 제한 사유로 규정하거나 종교·노동·정치집회 등 특정 종류의 집회만 금지 대상으로 둔 조례들도 위헌 소지가 크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인천차별금지법제정연대와 민변 등은 헌재 결정 직후 성명을 내고 “인천시를 비롯해 전국 지자체는 공공청사 부지와 광장 등 시민들에게 열려 있어야 할 공간에서의 집회·시위를 통제하는 조례들은 폐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28)인천 기행(2023. 08. 04 11:21)
2023. 08. 04 11:21 사회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다음 버스까지는 18분이 남았다. 버스 배차간격을 확인하는 일은 서울에 살게 된 이후로 없어진 습관이다. 나는 다른 버스를 고른다. 일단 타고, 도착하면 방법은 얼마든 있을 거였다. 그 동네라면 훤했으니까. 인천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일은 10년 만이다. 그곳으로 향하는 버스는 모두 빨간색이다. 빨간색 버스가 수시로 정류장을 드나들며 인천의 곳곳으로 사람들을 실어나르지만, 사실상 같은 버스는 30분의 한 대꼴로 온다. 서울을 나오는 날이면 버스 배차 시간부터 확인하곤 했다. 무턱대고 나왔다가는 한참을 기다리게 됐으니까. 내가 기억하는 인천의 절반은 빨간 버스다. 평생 많은 버스를 타봤지만 잠을 자기에는 빨간 버스만 한 것이 없다. 관광버스처럼 등받이 각도를 조절할 수 있는 좌석이 있고, 한 번 고속도로에 들어가면 정차하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앞을 향해 매끈하게 내달렸다. 덕분에 잠에 빠지면 깰 일이 거의 없었다. 버스를 탔지만 목적지에 도착하는 데는 실패하는 날이 많았다. 내가 줄기차게 빨간 버스를 타던 시절은 중·고등학생 때였으니, 생각해보면 한창 잠이 많던 시기였다. 한창 클 때의 아이와 빨간 버스가 만나면 무한 루프의 슬리핑 버스가 된다. 나는 서울과 인천을 가로지르며 깊은 잠에 빠졌다. 인천 끄트머리에 있던 우리 동네에서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면 신촌이었다. 서울역의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내려야지 하고 눈을 뜨면 거짓말처럼 다시 인천에 도착해 있었다. 분명 여러 번을 내렸고, 내려서 학교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여전히 빨간 버스 안에 있었다. 버스에서 내릴 즈음에는 키가 조금 더 자라 있었다. 학교에는 점심때가 다 돼야 도착했다. 혼비백산으로 뛰어오느라 진이 다 빠진 얼굴로 어버버하며 어떻게 늦었는지도 설명하지 못했다. 친구들과 선생님은 외계인을 보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알 수 없는 억울함에 부아가 치밀고 토가 나올 것 같았다. 빨간 버스와 함께 와서 해명을 하고 싶었다. 헐레벌떡 내리느라 버스에 두고 내린 물건들이 종일 눈에 아른거렸다. 그런 날이 줄줄이 이어지고, 학교에 가는 건지 버스에 타는 건지 알 수 없는 날들이 이어져도 인천에서 서울로 학교에 다니는 것을 문제 삼은 적은 없었다. 서울이 좋았던 건지, 버스가 좋았던 건지 알 수 없다. 나는 그저 매일 아침 빨간 버스에 올랐다. 간혹 드물게 잠들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때는 울었다. 잠 다음으로 많은 것이 생각이었으니까. 빨간 버스에서 가장 울기 좋은 자리는 맨 뒷줄 가운데 자리다. 자칫했다가는 언제든 앞으로 데굴데굴 구르기 딱 좋은 텅 빈 복도가 쭉 뻗어 있다. 버스에 타는 모든 승객이 가장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버스에서 가장 위험한 좌석. 그곳에 앉으면 천장에 난 작고 네모난 창문을 볼 수 있다. 그곳이 열려 있으면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향해 불어왔다. 그것은 그 시절 나에게 울 장소로는 요동 벌판 다음으로 적절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장소에 걸맞은 의식처럼 보였다. 무릇 산 정상에 오르면 “야호!” 하고 외치듯이. 모두가 앞을 보고 있고, 모두가 앞으로 향하고 있으며, 짝수로 앉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한 나머지수가 되어 앉아 있었으니까. 구슬 똥 같은 눈물방울을 쉬지 않고 뚝뚝 흘렸다. 그때 운 것을 모아 말렸으면 소금 한 통은 거뜬할 거다. 울었던 기억은 선명한데, 이유는 모두 녹아버렸다. 삶은 그때도 마음처럼 되질 않았던 모양이다. 아무렴 버스에 타고 내리는 것도 되지 않았던 것을. 어떤 이유에선가 이곳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이곳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고 믿고 싶었다. 마치 종료된 게임 서비스처럼, 도메인을 잃은 홈페이지처럼. 그런데 그곳에 가는 일은 우스울 정도로 금방이었다. 창문 밖으로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 시작됐고, 한산한 오후의 경인고속도로를 시원하게 질주하던 버스는 순식간에 나를 그곳에 데려다 놓았다. 나는 앞쪽 창가 자리에 앉아 눈을 크게 뜨고 밖을 바라보았다. 나는 더 이상 내릴 곳을 지나칠 정도로 잠이 많지 않았고, 눈물을 뚝뚝 흘릴 만큼 촉촉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인천은 그대로였다. 마치 10년 전에 내 방 책상에 두고 간 지우개와 연필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처럼. 풍경들은 즉각적으로 기억들을 불러냈다. 매일 같이 드나들던 지하철역 입구, 자전거를 세워두던 골목, 저기 저 하천에서는 놀다가 너구리를 마주친 적이 있었고, 그 옆에는 언젠가 일했던 편의점이 있었다. 그 동네에서 우리 가족도 잠깐 집이란 걸 가졌다. 단 한 동짜리 작고 낡은 아파트의 10평짜리 집이었다. 엄마는 지금까지도 종종 그때의 이야기를 한다. 우리도 집이 있었다고. 꿈이라도 꾼 듯이 말하곤 한다. 그때 그걸 안 팔았으면 지금쯤 얼마일까? 이따금 나한테 물었다. 궁금하지만, 팔을 걷어붙이고 알아볼 만큼 궁금하지는 않은, 딴소리 같고 혼잣말 같은 말이었다. 아빠는 경제위기가 닥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덜컥 집을 팔았다. 우리는 다시 월세를 살았고, 예고했던 경제위기는 오지 않았다. 그 일을 두고 아빠는 갖는 것도 뭐든지 가져본 애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 이후로 우리 가족이 뭔가를 가져본 일은 없다. 그 시절 나는 내 집이고 아니고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몰랐다. 나에게 집은 엄마·아빠, 그리고 지붕이었을 따름이다. 다만 한껏 들뜬 엄마·아빠와 방마다 어떤 벽지로 도배를 할지 고르러 다니고, 화려하고 밝은 와인색 싱크대로 부엌을 단장하는 과정이 신났을 뿐이다. 우리는 딱 한 개만 고르지 못해 결국 방마다 다른 벽지를 발랐다. 내 방은 갖가지 꽃장식이 그려진 싱그러운 연두색이었다. 엄마가 그 집을 나오면서 그 벽지들을 하나하나 오래도록 바라보았던 것을 기억한다. 아파트는 기억 속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외벽의 흰색 페인트가 세월에 비해 바래지 않은 걸 보니 근 몇 년 사이에 페인트칠을 한 모양이다. 나는 아파트 입구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부동산 앞을 기웃거렸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영진아파트 왔어. 옆에서 듣고 있던 이모가 묻는다. 어디래? 엄마가 말한다. 아, 영진아파트. 이모가 되묻는다. 그 영진아파트? 영진아파트라는 단어는 우리 가족에게 대명사다. 우리 집이라는 대명사. 나는 영진아파트 앞에 있는 영진부동산에 나붙은 영진아파트의 매매가를 그들에게 불러준다. 10년 전에 산 가격에서 딱 두 배 올랐다. 그것은 내가 자취하는 집의 전세보증금에도 못 미친다. 나는 말한다. 자, 봐봐. 이 집 갖고 있었어도 횡재수는 못 됐겠지? 엄마는 힘없이 웃는다. 어쩌다 거길 갔어? 나는 말한다. 그냥.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
[정태겸의 풍경](26)인천 무의도-봄기운 만끽하는 바닷길(2022. 04. 18 13:32)
2022. 04. 18 13:32 문화/과학
인천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 옆에 무의도가 있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배를 타야만 갈 수 있는 섬이었지만, 이제는 잠진도와 무의도를 잇는 다리가 놓여 얼마든지 차로 다녀올 수 있는 여행지가 됐다. 무의도의 여행지 중에서도 제일 시선을 끄는 곳은 실미도다. 실미도는 무의도의 서북쪽에 인접한 작은 섬. 예전 김일성 암살을 위해 조직한 684부대의 훈련지로 잘 알려진 바로 그 섬이다. 무의도 실미해수욕장을 가면 맞은편 몇백m 앞으로 실미도가 보인다. 두 섬 사이에는 썰물 때 바닷물이 빠지면서 바닷길이 열린다. 이런 길은 보통 질퍽한 갯벌인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모래로 덮여 있다. 잠시 실미도까지 다녀오기에 더없이 좋다. 봄날은 이 바닷길을 걷기에 가장 적당한 시기다. 실미도의 야트막한 언덕 위로 울긋불긋 봄꽃이 만발해 있고 따스한 바람이 불 때마다 아지랑이처럼 꽃가루가 하늘 위로 아스라이 흩날린다. 바다를 건너던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봄을 만끽하는 그 순간을 사진으로 남긴다. 더 바랄 게 없는 여유로운 시간. 봄은 그렇게 사람들의 입꼬리마다 미소를 걸어놓았다.
정태겸의 풍경
[골목 내시경]인천 부평종합시장(2022. 02. 18 13:57)
2022. 02. 18 13:57 사회
ㆍ먹거리부터 입을거리까지… 없는 게 없어요 시장은 번영의 중심이다. 전통시장이 줄어들고 위축돼가고 있지만, 인천 부평종합시장은 아직도 활기가 넘치는 몇 안 되는 시장 중의 한곳이다. 채소와 수산물, 먹을거리부터 생필품과 옷까지 없는 게 없다. 가게에 따라 새벽부터 문을 열고 자정까지 장사하며 하루를 바쁘게 살고 있다. 통칭으로 부평종합시장이라 하지만, 시장 안을 살펴보면 깡시장과 진흥종합시장 그리고 부평종합시장이 있다. 한편에 있던 부평자유시장은 철거로 사라졌다. 깡시장은 농수산물 경매를 하던 곳이나 이제는 경매기능을 잃어버렸다. 진흥종합시장은 상가건물로 출발해 이제는 부평종합시장의 일부가 됐다. 시장은 모두 5곳의 구역으로 나눈다. 장터 곳곳이 골목으로 연결돼 있어 처음 오는 이들은 미로 속에서 헤매기 십상이다. 다른 전통시장에 비해 공용주차장이 잘 돼 있고, 안내판과 시장 골목도 잘 정비된 편이라 지금도 시장을 찾는 이들이 많다. 부평종합시장은 늘 활기가 넘치는 곳이다. 한국전쟁 직전에 시장이 처음 열렸다. 당시 공설시장으로 출발해 좌판이 대부분이었고, 부평 일대 미군부대의 물건을 주로 다뤘다고 한다. 암시장의 커피와 양담배를 팔았는데 이제는 그런 것들을 찾아볼 수 없다. 몇차례 자리를 옮긴 끝에 지금의 장소에 닻을 내렸다. 부평수출산업공단이 들어선 후 1970년대부터 부평 인구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시장의 팽창과 번영도 필연적이었다. 부평종합시장에서 살림살이를 구하고 하루를 살 양식을 장만했다. 부평의 젖줄이 된 것이다. 1970년대 경제 번영기 신화의 산물이 부평종합시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산물은 어디보다 싱싱하죠” 시장 안 상품은 시대를 반영해 변해왔다. 지금의 가게는 워낙 다양하다. 아마도 시장 개장 이후 가장 많은 품목이 팔리고 있지 않나 싶다. 순대부터 해산물과 건강식품, 옷과 이불과 반찬거리까지 어느 전통시장도 이처럼 다양한 물품으로 가득 찬 골목을 갖추지는 못했을 것이다. 수많은 물건 중 해산물과 생선 등이 눈에 띈다. 인천이 지척이라 싱싱한 해물들이 어물전을 가득 채우고 있다. 바둥거리는 꽃게를 고르는 손님에게 상인은 친절하게 상태 좋은 녀석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고 있었다. 상인은 “꽃게잡이 철이 지났는데도 인천과 강화도 연평도 서산 등지에서 물 좋은 물건이 많이 들어온다. 서울과 부천, 수원 등지에서도 찾아오는 손님이 많다”고 이야기한다. “이곳의 생선과 해산물은 어디보다 싱싱하고 값이 좋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시장 골목 곳곳에 콜라텍이 숨어 있다. 맛있는 군것질거리가 많은 것도 시장을 찾는 기쁨 중 하나다. 유치원생인 듯한 아이 하나가 수족관에 매달려 방어며 광어 등이 헤엄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다. 그 옆의 아버지는 장바구니를 들고 아이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통통한 물고기들이 예쁘게 헤엄친다”는 아이한테 차마 곧 회를 뜨고 매운탕거리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할 수 없었으리라. 누군가에겐 신기한 생명체가 다른 이에겐 싱싱한 횟감으로 보인다. 모두가 자기 처지에서 사물을 살피는 모습이 세상의 진실을 말하는 것 같다. 요즘 맛이 들었다는 물미역과 파래를 고르는 이들도 있다. 배를 갈라 굵은 소금을 골고루 뿌린 간고등어도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반쯤 말린 생선은 이곳 시장의 인기 품목이란다. 김을 자동으로 굽는 가게에는 주부들이 김 한조각씩을 먹어가며 품평 중이다. 맛을 모를 때는 무조건 비싼 걸 사면 된다는 게 그들이 들려준 물건 고르는 요령이다. 시장 안 골목은 모두 시장로터리 사거리를 향한다. 대정로와 시장로 사이 거대한 삼각형 지역 안의 골목들 사이로 점포들이 있다. 깡시장과 진흥시장 그리고 부평종합시장이 연결된 형태다. 자연 발생형 시장 골목이 아니라 계획에 맞춰 가로가 형성돼 있어 골목은 모두 직선으로 잘 뻗어 있다. 점포 사이 골목길 중간엔 노점 좌판들이 줄지어 있다. 좌판들은 대개 젓갈이나 반찬이며 주전부리를 팔고 있다. 좌판과 상점들이 평화롭게 공존한다. 시장 건너편에는 젊은이들 북적거려 분주한 시장통 골목 안에 동동주를 파는 집과 순댓국밥집, 포장마차도 숨어 있다. 국밥집 골목은 다른 곳에 비해 한가한 편이다. 좌판이 없어 고작해야 시장을 질러가는 행인 몇만이 지날 뿐이다. 국밥집 앞에서 사내 몇은 대낮인데도 불콰해진 얼굴로 담배를 피우며 건설판 막노동판 반장의 뒷얘기를 하고 있다. 분노는 입으로 풀어야 제맛이고 험담만 한 안줏거리가 없는 법이다. 술국과 탁주 한사발에 위로받고 힘을 낸다. 때때로 탁주 사발을 나눌 수 있는 동료가 가족보다 가까울 수 있다. 그들이 건네는 눈빛이 그런 정황을 잘 보여준다. 옆 건물엔 중국인을 위한 마작원도 눈에 띈다. 부평에도 꽤 많은 중국인이 거주하고 있다는 얘기다. 언제나 질 좋은 제철 상품을 구할 수 있다. 식자재와 용품 도매시장도 부평종합시장의 일부다. 채소가게 주인이 오랜 단골인 듯한 손님에게 말을 건넨다. “왜 요즘 안 나와. 얼굴 보기 어렵네”, “코로나19가 무서워 바깥나들이를 아예 안 해”, “백신 안 맞았어?”, “맞았는데도 겁나서 못 다니겠다.” 요즘 시기에 대중이 느끼는 불안감을 역력히 확인할 수 있었다. 전염률이 점점 높아지고 감염자가 폭증하는 현실에서 그들의 심정에 충분히 이해가 간다. 공포 앞에서 위축되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팬데믹 사태로 힘들지 않냐고 묻자 한 상인은 “예전보다는 못해도 여긴 좀 손님이 다니는 편이다. 아예 문을 닫을 정도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한사람이라도 찾아오는 손님이 귀한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고 한다. 시장 골목을 한발짝 나서면 온통 오피스텔과 원룸텔이다. 한동안 유행하던 다세대·다가구 공동주택을 헐고 대형 건물을 세웠다. 지금도 한편에서는 헐고 짓는 모습을 반복하고 있다. 아래층에 주차장을 갖추고 위로 높게 주거공간을 만들었다. 예전과 달리 젊은이의 비중이 높아졌다. 이들은 아무래도 시장보다는 대형마트를 선호하는 편이라 시장 주변에서 마트와 아웃렛을 종종 볼 수 있다. 부평의 특성상 서울과 인천에 빨리 접근할 수 있고, 고속도로와 간선도로를 타면 일산과 분당까지 생활권이 이어진다. 사회 초년생과 신혼부부가 집을 구하기에 용이한 편인 것도 이 지역에 젊은이들의 비중이 커지는 이유다. 부평종합시장 건너편에는 부평문화거리 골목이 있다. 젊은이들이 자주 모인다. 골목 안에는 옷가게와 식당, 카페가 주류다. 간혹 타로 점집도 눈에 띈다. 야간에는 포장마차들도 문을 연다는데 낮에는 보이지 않았다. 샛골목은 옷을 파는 노점과 의류 가게로 연결돼 있다. 모자와 귀마개를 파는 손수레 상점도 있고, 방한복부터 내의며 양말을 파는 점포도 있다. 한 상인은 “여기가 동대문보다 싸다. 구색도 다 갖추고 있어서 단골도 많다”고 한다. 젊은 멋쟁이들은 유명상표의 가게를 찾고, 눈썰미 좋은 멋쟁이들은 뒷골목 옷가게를 살핀다고 그는 말한다. 듣고 보니 어디 내놔도 돋보일 옷들이다. 시장 입구의 콜라텍은 정오의 시간에도 번창이다. 바람머리를 하고 털코트를 빼입은 중년의 여인부터 철에 안 맞게 백바지로 멋을 낸 장년까지 쿵작거리는 음악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골목 안으로 스며든다. 골목 입구까지 느긋한 걸음으로 걷다가 콜라텍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는 유독 다들 발걸음이 빨라진다. 봄이 오지 않아도 춘심은 마음을 흔들고 춘풍은 겨울에도 분다. 외로움이 인생의 본질이다. 삶의 사막, 고해의 피난처로 오라는 풍악에 넋이 팔리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른다. 이 시국에도 지르박과 블루스는 참을 수 없나 보다. 부평 문화의 거리는 의류와 카페 등이 주류를 이룬다. 젊은 인구가 늘었다지만 아직 시장 손님의 대부분은 중장년층이다. 손이 많이 가지만 반찬거리와 생선 등을 사다가 공을 들여 손질하고 가족을 위해 반찬을 만든다. 정성은 필수적인 조미료라 그 찬과 밥이 왕의 것과 다를 바 없다. 젊은이들은 시장 골목에서 주로 만들어진 반찬을 사간다. 밥상을 앞에 두고서도 서로의 가치관이 다르니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따질 수는 없지만, 정성껏 차린 식탁과 따듯한 밥 한공기가 주는 감동을 돈만으로 구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시장이 곧 문화다 시장 골목의 상인들은 대부분 20~30년을 훌쩍 넘긴 붙박이들이다. 자신이 다루는 물건뿐 아니라 손님의 안색만 스쳐도 그가 물건을 살 것인지 타박만 할 것인지 알아본다고 한다. 건강식품을 파는 가게 주인은 “장사하려면 숙이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손님한테 ‘예’란 소리부터 한다”고. 시장에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까다롭고 마음의 수행이 돼야 하는 일인지 그로부터 배울 수 있다. “그래도 여기에 좌판이라도 하나 깔고 사는 이들은 먹고살 걱정은 지난 셈이다. 모두가 못 살겠다지만 시장 바닥에서는 그래도 뭐라도 해먹고 살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있다”는 게 젓갈집 사장의 이야기다. 부평종합시장 골목과 부평 문화의 거리를 굳이 나눠 놓았지만, 실상은 시장이 곧 문화다. 문화는 시간에 따라 쌓아 올린 삶의 양식이며, 시장만큼 그 본질을 명백하게 살펴볼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보고 듣고 먹고 입는 모든 것이 유통되는 곳이라 가난한 이도 형편대로 만족의 기쁨을 누릴 수 있고, 넉넉한 이는 가진 것을 향유할 수 있는 곳이 시장이다. 경제가 어렵다 해도 순대 한줄은 팔리는 법이고, 망한 세상에서도 시장은 문을 닫지 않는다. 어려워도 견뎌내는 모습을 시장에서 발견한다. 사람들의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부평종합시장 골목만을 본다면 부평사람들은 말 그대로 넉넉하고 평화롭다. 시장은 매일같이 축제가 벌어지는 장소로 남아 있다. 이 위기의 시대에도 잠시 시름을 벗고 위안을 얻는다. 부평의 바닥 경제가 시작되고 부평사람들의 동질성과 정체성이 존재하는 곳이 부평종합시장이다. 부평시장 골목에서 고른 반찬거리 하나에서 오늘의 만족을 얻는다. 삶의 번뇌에서 벗어나 행복해지고 싶다면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으로 나서야 한다.
골목 내시경
인천상륙작전 영웅’의 X파일(2021. 06. 25 16:21)
2021. 06. 25 16:21 정치
ㆍ신화냐 사기냐… ‘팔미도 점령 작전’ 최규봉 켈로부대 대장 싸고 진실게임 ‘역사’와 ‘기억’은 구별돼야 한다. 역사가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면 기억은 역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다. 기억은 역사를 배합해 원하는 것만 남길 수 있다. ‘참혹한 패배’가 ‘빛나는 승리’가 되고, ‘평범한 군인’이 ‘전쟁 영웅’으로 둔갑하는 식이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기억으로 역사를 대체하는 일은 신중해야만 한다. 한국전쟁(6·25전쟁)은 지난 70여년 동안 역사와 기억이 혼재된 상황에 있었다.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가 생존해 있고, 이들이 떠올린 기억으로 일부 역사가 뒤집어졌다. 이중 한국군이 주도한 승리의 기억은 곧바로 역사가 됐다. 전쟁 영웅이 되는 것도 본인의 기억만으로 가능했다. 6·25전쟁이 ‘역사’인지, 누군가의 ‘기억’인지 그 경계가 모호한 경우가 발생했다. 후세대는 일부 검증되지 않은 기억도 역사로 학습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지난 한달, 주간경향은 6·25전쟁 중 있었던 한 첩보작전을 추적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시작점으로 유명한 이 작전은 ‘극적인 성공’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팔미도 점령 작전’과 최규봉 켈로(KLO)부대 대장의 이야기다. 최씨의 무용담은 국가기관에서 홍보하는 역사가 됐다. 하지만 추적 끝에 마주한 실체는 ‘기억이 역사로 둔갑하는 광경’이었다. ‘팔미도 점령 작전’은 한명의 전쟁 영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실체가 불분명한 영웅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수많은 무명용사의 희생 위에 서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로 알려진 팔미도등대. 앞쪽 작은 등대가 ‘구 등대’ / 김찬호 기자 팔미도 인천 연안부두에서 8.5해리(15.7㎞), 편도 약 1시간 거리에 작은 섬 하나가 홀로 떠 있다. 모양이 마치 여덟 팔(八)자와 닮았다 하여 ‘팔미도’라 불린다. 서해에서 인천으로 들어가는 물길 ‘비어수로’ 한가운데에 있어 섬에서 보이는 것은 수평선과 간간이 지나는 대형 선박이 전부다. 그럼에도 섬은 빼어난 경관으로 유명하다. 특히 ‘해지는 풍경’은 인천 팔경의 하나로도 꼽힌다. 이 섬에서 인간의 손길이 닿은 유일한 볼거리는 ‘등대’다. 섬의 가장 높은 곳에 2개가 서 있다. 이중 높이 7.9m의 구 등대는 100년 동안 인천으로 들어가는 배들의 길잡이 역할을 했다. 지난 2003년 신 등대에 역할을 내줬지만, 인천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며 영구 보존이 결정됐다. 일반적으로 팔미도등대는 이 ‘구 등대’를 의미한다. 섬을 방문한 관광객 중에는 구 등대를 보기 위해 방문한 사람도 있다. 구 등대는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사연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유진 클라크의 책 에 소개된 인천 항구 지도 / The Secrets of Inchon 기록에 따르면 팔미도등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3년 6월 1일 첫 불을 밝혔다. 이 등대는 일본인 이시바시 아야히코가 세웠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앞두고 군사적 필요와 통상의 편리함을 위해 대한제국 주요 섬에 등대를 설치했다. 그 시작이 팔미도등대였다. ‘침략의 불빛’으로 시작된 팔미도등대가 극적인 반전을 맞은 것은 6·25전쟁 때다. 1950년 6월 29일 한국전선을 방문한 맥아더 장군은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대규모 상륙작전을 결심했다. 작전참모인 라이트 준장이 이끄는 합동 전략기획단이 구체적 계획을 만들었다. 상륙작전은 100-B, 100-C, 100-D 3가지 계획이 동시에 검토됐다. 각각 인천, 군산, 주문진으로의 상륙이었다. 맥아더는 이중 인천을 선택했다. 그는 정치적·군사적·심리적 이유에서 반드시 서울을 수복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 가능성을 가장 높일 수 있는 것이 인천상륙이었다. 1950년 8월 12일 작전 계획 100-B가 하달됐고, 작전 개시일은 9월 15일로 정해졌다. 이 계획에는 ‘크로마이트 작전’이라는 암호명이 붙었다. 켈로(KLO)8240부대가 주관해 세운 최규봉 전 켈로 부대장 공적 기림비 / 김찬호 기자 하지만 인천은 지리적 문제가 있었다. 조수간만의 차로 상륙에 적합한 날이 한정됐고, 외항의 규모 역시 대규모 함대가 정박하기 어려웠다. 특히 상륙함이 인천해안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작은 섬과 암초로 휩싸인 비어수로를 지나가야 했다. 항로의 위험한 곳을 표시해줄 장치가 필요했다. 등대가 있는 팔미도가 전략적 요충지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미 극동사령부는 인천상륙작전의 예비 작전으로 팔미도 점령 작전을 준비했다. 이른바 ‘트루디 잭슨’ 작전의 시작이었다. 정부 기록을 종합하면 팔미도 점령 작전의 책임자로 임명된 것은 당시 미국 해군 대위 유진 클라크(Eugene F. Clark)였다. 클라크는 한국인 동료 연정, 계인주 및 한국인 지원자 10명과 함께 팔미도 인근 영흥도에 머물며 등대 점령을 준비했다. 9월 10일 팔미도에 상륙한 클라크 첩보대는 등대 사용에 이상이 없다는 점을 확인하고, 이를 도쿄에 알렸다. 맥아더사령부는 9월 15일 0시, 팔미도등대를 점등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9월 14일 클라크 첩보대는 팔미도에 상륙해 등대를 점등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의혹 이날 작전을 두고 팔미도등대 앞에는 3개의 설명판이 세워져 있다. 하나는 인천시 유형문화재임을 알리는 설명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인천지방해양항만청에서 세운 설명판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클라크 미군 대위가 한국군 유격부대(KLO)의 지원을 받아 점령한 등대’라는 내용이다. 팔미도 점령 작전에 참가한 연정씨가 공개한 작전 참가자들 사진 / 6·25전쟁 비화 문제는 세 번째 설명판이다. 켈로8240 부대 전우회가 주관하고, 해군 제2함대 사령부가 협찬해 만들었다. 설명문 바로 옆에는 맥아더의 얼굴까지 조각돼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문장은 국방부 기관지 승리일보 주간을 지낸 구상씨가 작성했다. ‘등대에 불을 밝혀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설명문에는 기존 문헌에서 확인할 수 없었던 새로운 내용이 다수 포함됐다. 이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등대 탈환에 직접 참여한 것이 클라크, 계인주, 연정 외에 한국인이 한명 더 있다는 것이다. 그 한국인은 최규봉 켈로부대 대장이다. 두 번째는 작전이 있었던 9월 14일, 나사못이 빠져 등대가 점등불능 상태였다는 것이다. 기진맥진해 누워 있던 중 최씨 손에 나사못이 잡혔고, 극적인 순간 점등에 성공했다는 내용이다. 마지막은 점등에 성공한 뒤 성조기를 등대에 걸었고,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맥아더가 이 성조기와 친필 서명이 들어간 사진을 최씨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해당 내용은 지난 2003년 최씨가 ‘월간조선’과 인터뷰하며 주장한 것과 같다. 2016년 개봉한 한 영화에도 팔미도 점령 작전 내용이 일부 담기며 이 사건은 더욱 유명해졌다. 특히 서울 전쟁기념관은 해당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며 최씨가 맥아더로부터 받았다는 감사서신도 전시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팔미도 탈환 작전에 참여한 최규봉 전 켈로부대 유격대장으로부터 당시 게양했던 미국 국기를 기증받은 맥아더 장군이 1957년 11월 8일 감사의 표시로 보낸 편지’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팔미도 점령 작전에서 최씨의 활약을 사실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전시 중인 최씨가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받았다는 감사서신 / 김찬호 기자 추적 최씨는 이미 사망했다. 최씨의 무용담을 소개하고 있는 기관들은 “더 이상 진위를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6·25전쟁 관련 기록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전쟁사연구자 A씨는 “6·25전쟁 시기 확인되지 않는 무용담으로 공로를 인정받은 분들이 상상 이상으로 많다”며 “특히 특수작전의 경우 작전 기록을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거짓말이 횡행한다”고 말했다. 최씨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어렵다. 최씨와 함께 전우회 활동을 한 김상기 켈로8240 전우회 회장은 “최씨는 전우회 사람들에게도 자기 가족들을 소개하지 않았다”며 “전우회도 최씨 가족들 연락처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주간경향은 최씨 가족들을 수소문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 장군 동상 / 김찬호 기자 하지만 최씨 주장이 검증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당시 작전 관련자들이 남긴 기록을 비교해보면 진위를 확인해 볼 수 있다. 팔미도 점령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기록은 클라크 대위의 수기다. 그가 사망한 이후인 2002년 <The Secrets of Inchon(인천의 비밀)>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됐다. 클라크는 소속 부대 및 작전 참여 과정이 명확하고, 전쟁 이후 한국과 이해관계도 없다. 클라크 수기에는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인물로 계인주, 연정만 언급됐다. 최씨에 대한 기록은 없다. 계인주는 회고록에 최씨를 ‘자신을 도왔던 사람’ 정도로 간단히 언급했다. 연정은 자서전에 팔미도 작전과 당시 촬영한 사진을 소개했지만 최씨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연정의 동생 연상씨는 기자와 만나 “형으로부터 당시 작전에 관한 이야기는 들었지만 최씨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클라크 수기를 국내에 소개한 재미 작가 조화유씨는 기자에게 “최씨의 언론 인터뷰를 제외하면 그의 활약상이 적힌 문서는 확인된 바가 없다”며 “최씨는 팔미도 점령 과정에서 적과 교전이 있었다고 했지만, 클라크 수기에는 교전도 없었던 것으로 나온다”고 말했다.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소개된 팔미도 점령 작전 / 김찬호 기자 또 다른 의혹은 나사못 부분이다. 전쟁 당시 등대는 석유 백열등을 사용해 불빛을 만들었다. 1954년 8월에야 발전기를 이용한 전기등으로 교체됐다. 그렇다면, 어떤 나사못이 빠졌길래 점등이 불가능했느냐가 확인돼야 한다. 하지만 최씨는 이에 대한 설명을 상세히 밝힌 적이 없다. 다만, 언론 인터뷰에서 “반사경의 전선이 끊어졌다”는 이해하기 힘든 말만 했다. 최씨 주장을 담은 설명판을 세우는 데 협찬한 해군, 유물 전시를 담당한 전쟁기념관도 사실관계는 알지 못한다. 누구도 확인해보지 않은 것이다. 이에 관해 김상기 켈로8240 전우회 회장은 한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김 회장은 “팔미도에 설명판을 세울 당시 인천수산청 항로표지과 과장이 ‘기술적으로 팔미도등대 점등과 나사못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 저 이야기가 왜 들어갔느냐’고 항의했다”며 “이미 만들어놓은 설명판을 폐기할 수도 없어 그냥 세우기로 했다”고 말했다. 마지막 의혹은 성조기 부분이다. 최씨 주장에 따르면 그는 1955년 맥아더에게 팔미도 점령 당시 등대에 걸었다는 성조기를 선물했다. 그러자 미 대사관 측이 성조기의 진위를 알 수 없다며 당시 서울 중구에 있는 반도호텔에 최씨를 감금하고 조사했다. 최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새벽 무렵 대사관 직원이 본부의 연락을 받고는 ‘미안하다’고 정중히 사과했다. 알고 보니 내가 소장하고 있는 성조기 밑에 당시 팔미도등대 탈환 작전의 작전명령 번호가 있었다”고 말했다. 인천 팔미도섬 전경 / 김찬호 기자 최씨 주장의 진위는 성조기에 ‘작전명령 번호’가 진짜 있는지만 확인하면 된다. 미국 맥아더 박물관에 이 부분에 관해 문의했다. 박물관 큐레이터 서튼 코레이씨는 기자에게 “최씨가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성조기를 보관하고 있는 것은 맞다”면서도 “해당 성조기에는 작전명령 번호가 없으며, 현재는 박물관 여건상 전시도 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맥아더가 최씨에게 보낸 감사서신 역시 성조기 선물에 대한 답례 이상의 의미로 보기 어렵다. 영웅 최씨의 무용담을 검증할 증거는 접근 불가능한 것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국가기관은 최씨 주장을 있는 그대로 홍보하고 있다. 이는 왜일까. 그 이유를 추측해볼 수 있는 곳은 전쟁기념관이다. 최씨가 받았다는 맥아더 서신을 전시하고, 한쪽 벽면에는 나사못 이야기까지 크게 홍보하고 있다. 전쟁기념관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최씨가 맥아더 장군 서신을 기증하며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소개한 것”이라며 “추가적인 사실 검증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씨가 실제 참전자이기도 하니 그분 의사를 그대로 반영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전쟁사연구자 B씨는 “매번 그런 식이다”며 “관련 논문 한두편만 읽어도 진실을 알 수 있는데 이마저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결국 참전용사의 증언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검증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지난 6월 19일 기자와 팔미도에 동행했던 문화관광해설사 조한기씨의 말 속에서 엿볼 수 있다. 조씨는 “원래 팔미도는 관광객 입도가 불가능했는데 2009년 ‘인천 방문의 해’를 맞아 일반에 공개됐다”며 “2016년 6·25전쟁을 다룬 영화가 개봉한 이후 관광객이 대폭 늘었다”고 말했다. 영화 같은 극적인 이야기는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최씨의 무용담이 좋은 홍보 수단이 됐던 것이다. 그럼에도 조씨는 “나사못으로 뭘 어떻게 했다는 것인지는 당최 모르겠다”며 “이 부분을 설명할 때면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최씨 스스로 누가 검증할 수 있겠느냐는 자신감도 있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최씨가 무용담을 본격적으로 언급할 당시 작전에 참가했던 클라크, 계인주, 연정은 국내에 없거나 사망한 상태였다. 김 회장은 “당시에는 최씨가 그렇다고 하니 다들 그런 줄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며 “나사못 사건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따지면 피곤하니까 다들 좋게 넘어가자는 식이었다”고 말했다. 이상의 이유로 최씨는 팔미도 점령 작전의 영웅이 됐다. 해군은 2012년 최씨에게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주역이라며 ‘충무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앞선 작전들에서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했다는 이유다. 이에 대해 해군 관계자는 “6·25전쟁과 한국해군작전이라는 책에 수록된 내용을 토대로 국방부에 훈장을 건의했다”고 말했다. 또 팔미도에 세워진 설명판과 관련해서는 “당시 상황을 기록한 문서들을 찾을 수 없어 경위를 확인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진실 한명의 전쟁 영웅이 부각되면 그를 도운 수많은 무명용사는 사라진다. 이는 팔미도 점령 작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클라크 첩보대를 도와 정보원으로 활동했던 한국 해군 소속 첩보부대와 이름 모를 청년들이 있었다. 특히 청년들은 팔미도 인근 영흥도에 거주하며 농사짓던 주민이거나 황해도 등지에서 고향을 잃고 내려온 실향민들이었다. 이들은 인천지역의 북한군 배치, 보급선 현황, 상륙지점 지형, 인천항의 안벽 높이 등의 정보를 수집했다. 이러한 이들의 활약은 놀라운 결과를 만들었다. 인천상륙작전은 태평양전쟁 시기에 있었던 상륙작전들에 비해 사상자 수가 눈에 띄게 적다. 1945년 2월 벌어진 이오섬(이오지마) 상륙작전에는 8만7000여명이 상륙해 2만6000명이 죽거나 다쳤다. 비율로는 30%에 달한다. 반면 인천상륙작전은 5만3900명이 상륙해 사상자는 2400명이었다. 비율로는 4% 정도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이상호 박사는 “이러한 결과는 상륙지점 정보를 모았던 이름 모를 한국인 청년단의 활약으로 가능했다”며 “이들이야말로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기여한 진짜 영웅들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영흥도에서 클라크 첩보대를 도왔던 청년들은 정확한 수도, 이름도 확인되지 않는다. 이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조명하는 작업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기념관 내 인천상륙작전 전시관은 이들의 활약상을 소개하지 않는다. 무명용사들의 활약으로 채워야 할 자리는 확인되지도 않은 무용담으로만 가득하다. 이 박사는 “전쟁 이후 7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며 한 세대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며 “그동안은 살아계신 참전 용사들을 예우하기 위해 잘못 알려진 사실도 그대로 뒀다면 이제는 역사를 바로잡을 때가 됐다”고 말했다. 최씨가 켈로부대 대장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팔미도 점령 작전에 최씨가 정말 참전했는지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다. 그럼에도 최씨는 팔미도 점령의 영웅으로 인식되고 있다. 비단 최씨뿐만 아니라 6·25전쟁사에는 여러 사람의 공로가 한사람 공적으로 잘못 기록되는 경우가 많다. 지나친 전쟁 영웅 만들기가 불러온 결과인 것이다. 6·25전쟁으로 희생당한 사람은 400만~450만명으로 추산된다. 영웅 한사람을 위해 지나치게 많은 이들의 희생이 역사에서 지워지고 있다.
특집
[표지 이야기]인천, ‘제2 도시’ 될 날 멀지 않았다(2020. 09. 24 16:42)
2020. 09. 24 16:42 경제
ㆍ부산과 경제 지표 엎치락뒤치락… 인구도 20년 안에 인천이 앞설 듯 100여년 만에 ‘제2의 도시’ 자리가 바뀌게 될까. 수도권 집중화는 도시의 위상도 바꾸고 있다. 부산광역시의 성장은 부진한 반면 인천광역시는 가팔라 보인다. 인천은 이미 ‘서인부대(서울-인천-부산-대구)’론을 공공연히 내세우고 있다. ‘제2의 도시’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부산과 인천의 대표적인 신시가지인 부산 해운대./ / 경향신문 자료사진 현시점에서 제2 도시의 위상은 아직 부산이 가지고 있다. 인구가 더 많은데다 지역내총생산(GRDP)도 근소하게나마 인천을 앞서고 있다. 올해 8월 주민등록 인구 기준으로 부산(340만명)이 인천(294만명)보다 46만명이 더 많다. 2018년 확정자료 기준 부산의 지역내총생산은 89조9800억원으로 88조7350억원을 기록한 인천을 앞섰다. 전통적인 도시 서열이 반영된 행정기관코드도 직할시(현 광역시) 승격 시점에 따라 서울 다음 부산·대구·인천 순이다. 하지만 인천이 부산을 따라잡았다고 볼 수 있는 지표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1인당 GRDP는 인천이 더 높고, 두 도시 사이의 총생산 격차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2017년에는 한 차례 인천이 역전하기도 했다. 미래산업의 주축이 될 신성장산업 수출실적을 보면 지난해 인천은 112억달러를 기록, 부산(25억달러)보다 4배이상 많았다. 부산은 오랜 기간 수도권 다음가는 경제권인 동남권(부산·울산·경남)을 주도한 역할도 잃고 있다. 동남권 전체의 신성장산업 수출실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부산은 19%에 불과해 울산과 경남에 크게 못 미쳤다. 신성장산업 수출, 인천이 부산의 4배 향후 20년 안에 인구도 인천이 부산을 추월할 가능성이 크다. 1995년 인구가 388만3880명으로 정점을 찍은 이래 줄곧 줄어들기만 하고 있는 부산은 2030년대 중반이 되면 300만명 선이 무너진다. 반면 인천은 300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된다. 조선왕조 500년 이래 줄곧 수도이자 한반도의 중심도시 역할은 서울이 도맡아왔다. 반면 제2의 도시는 여러 도시가 자리바꿈해온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자생적인 상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하며 도시화가 진행된 조선 후기에는 인구 기준으로 개성과 평양이 제2의 도시 자리를 두고 경쟁했다. 1789년(정조 13년)의 호구수를 종합해 규장각에서 편찬한 <호구총수(戶口總數)> 자료를 보면 당시 한성 인구가 18만9153명으로 가장 많았고, 개성(2만7769명), 평양(2만1869명), 상주(1만8296명), 전주(1만6694명), 대구(1만3734명), 충주(1만1905명), 의주(1만838명) 순으로 인구 1만명 이상의 도시가 형성돼 있었다.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부산과 인천은 모두 제2의 도시 후보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19세기 말 외세의 개항 요구가 밀어닥치며 상황은 반전되기 시작했다. 부산이 1876년, 인천이 1883년 개항하면서 두 도시의 성장은 눈에 띌 정도로 빨라졌다. 인천에는 1899년 최초의 철도 노선인 경인선이 깔렸고, 부산 역시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부설돼 서울과 연결됐다. 개항 이후 외국세력 중 특히 일본에 의해 부산과 인천은 원산·목포·군산 등과 함께 도시화가 활발하게 진행된 것이다. 인천 송도 일대의 대형 건물들이 밤을 밝히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 무렵부터 부산은 한반도 제2의 도시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1907년 대한제국 경무고문본부의 <한국호구표> 자료에 따르면 부산은 인구 3만9743명으로 한성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그 뒤를 평양(3만1576명)과 인천(2만7896명)이 이었다. 부산이 제2의 도시가 된 역사도, 인천과의 라이벌 구도가 형성된 것도 100년을 넘긴 셈이다. 당시만 해도 서울 다음가는 도시는 평양이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해당 조사에서 부산과는 별도로 인구가 집계된 동래·구포·사상의 인구가 2만명에 육박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부산이 실질적인 제2 도시였다고 볼 여지는 충분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과 분단의 과정을 거치면서 부산의 입지는 더욱 강화됐다. 한국전쟁의 포화를 고스란히 받은 서울과 인천에 비해 부산은 임시수도 역할을 하며 물밀 듯이 밀려오는 피란민들을 수용하며 성장했다. 1963년 경상남도에서 분리돼 직할시가 된 부산은 1980년대까지 경공업과 무역의 중추 역할을 하며 더욱 팽창해 1990년대에는 인구 400만을 바라보는 도시가 됐다. 그러나 이후 사정은 역전되기 시작했다. 수도권으로의 집중이 가속화되면서 인천은 대구를 제치고 실질적인 제3의 도시가 됐고, 이제 부산의 위상마저 넘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도쿄 인근의 요코하마와 비슷한 인천 이러한 자신감으로 인천시는 2018년부터 1인당 지역내총생산, 경제성장률, 지방세 규모, 일자리 지표 등의 수치를 근거로 ‘서인부대’론을 공공연히 내세우고 있다. 인천시 관계자는 “인천이 서울·경기와 함께 수도권으로 묶여 실질적인 위상에 비해 명목적으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으나 이미 명실상부한 제2의 도시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수도권에 자리 잡은 요코하마가 인천과 비슷한 점이 많다. 요코하마시가 있는 가나가와현의 인구는 2010년대 들어 오사카시가 속한 오사카부를 제쳤다. 그래도 여전히 전반적으로는 오사카가 일본 제2의 도시라는 인식이 강하다. 오사카를 중심으로 교토·고베 등과 이어진 ‘케이한신 경제권’이 도쿄·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의 경제력을 능가하지는 못해도 제2 경제권으로서의 위상을 굳게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오사카는 에도막부 이전 1000년 역사의 수도였던 교토를 지척에 두고 상업을 바탕으로 경제력을 갖춘 제2 도시로서 자리 잡은 역사가 길다. 부산은 도시가 축소된다는 위기감을 바탕으로 지역 여론을 결집하고 있다. 다만 경쟁에서 앞서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기보다는 수도권 집중화로 인해 발생한 시민의 불편과 경제적 역량이 줄어드는 현상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지역주민들의 실생활을 고루 발전시키는 대안적 패러다임을 마련하는 쪽으로 부산발전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김형균 부산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국내 도시들 간 인구경쟁은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한 소모적 도시경쟁에 불과하다”며 “인천이 나름대로의 발전전략으로 성장을 해나가는 것은 당연하고, 마찬가지로 부산은 부산만의 발전전략으로 세계도시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표지 이야기
[포커스]인천공항 정규직 연봉 9130만원이 되기까지(2020. 07. 17 15:54)
2020. 07. 17 15:54 경제
ㆍ신입사원 평균 연봉도 4589만원으로 공기업 중 가장 높아 2019년 기준 공기업 정규직 직원들의 평균 연봉은 7941만7000원이다. 주요 대기업 평균 연봉과 유사하다. 기업평가사이트 CEO스코어의 지난 3월 조사결과를 보면, 국내 500대 기업 중 사업보고서를 제출한 318개사의 2019년 직원 연봉 평균 7920만원이었다.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3층 출발층 / 김창길 기자 공기업마다 연봉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의 평균 연봉은 9159만원인데 한국공항공사는 7113만원이다. 가장 많은 평균 연봉을 받는 한국중부발전(9285만원)과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5937만원)의 차이는 3348만원이다. 왜 공기업 간 평균 연봉 차이가 크게 나는 것일까. 정흥준 한국노동연구원 노사관계연구본부 부연구위원은 “임금체계는 기준이 필요한데 현재 공기업 임금체계는 이렇다 할 합리적 기준이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정 위원은 “대체로 수익이 많이 나는 공기업의 임금이 높은 편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적자가 많은 공기업이라도 이미 공고화된 호봉체계가 작동해 높은 임금 수준을 유지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인천국제공항공사(이하 인천공항공사)의 2019년 정규직 직원의 평균 연봉은 9130만원이다. 신입사원 평균 연봉은 4589만원으로 공기업 중 가장 초임이 높았다. 인천공항공사는 최근 문재인 정부가 추진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 과정에서 갈등을 겪었다. 높은 초봉이 고임금 구조로 안착 인천공항공사 정규직의 고임금 구조를 단순히 ‘공사에서 수익이 많이 나기 때문에 임금도 높다’고 설명하긴 어렵다. 인천공항공사 임금구조를 들여다보면 공사 설립 과정, 정부의 정책 기조, 연공서열이 반영된 호봉제 등이 고임금 구조에 모두 녹아 있다. 인천공항공사의 모태는 신공항건설기획단(1990년·교통부 산하)이다. 이후 수도권신공항건설본부(1992년·한국공항공단 산하)→수도권신공항건설공단(1994년)으로 이어진다. 한국공항공단(현 한국공항공사) 산하에 있다 분리된 수도권신공항건설공단은 1999년 인천공항공사가 됐다. 인천공항공사 정규직 직원들이 받는 고임금의 토대는 ‘공단’ 시절 만들어졌다. 인천공항이 있는 인천 영종도는 1990년대만 해도 오지였다. 1994년 이후 인천공항공사 입사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인천공항공사 직원들은 매일 오전 8시 인천 서구 율도에서 화물선을 타고 출근했다. 근무는 컨테이너에서 했다. 1996년 대기업의 평균 대졸 초임은 1860만원이었다. 1996년 공기업 정규직 연봉은 1400만~1600만원에서 형성됐다. 고임금은 일종의 유인책이었다. 당시 신공항건설공단은 평균 연봉이 1900만원을 넘었다. 인천공항공사에 따르면 교통비 명목으로 매달 40만~45만원이 수당으로 붙었다. 과거 정부기관 보고서에도 초창기 인천공항공사 임금 수준이 높았던 사실이 드러난다. 한국행정연구원이 2002년 12월 발간한 <우수 정책사례집>을 보면 “타 조직에 비해 높은 임금 수준을 책정하는 등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유인체계도 마련해 우수한 인재를 유치했다”고 나와 있다. 인천공항공사 임금체계는 고임금이 초기 인재 유인책으로 작용하고, 연차가 쌓일수록 임금이 높아지는 호봉제까지 더해지는 구조다. 박용석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장은 “초기 급여 인센티브에 신생 공기업이라 인사 적체가 없어 승진도 빠른 구조였다. 승진과 더불어 호봉제가 적용되니 임금 인상 속도도 상대적으로 빨랐다”고 말했다. 인천공항공사 정규직이 입사 초기 받는 고임금이 ‘정률제 임금 가이드라인’을 따라가다 보면 다른 공기업과의 평균 임금 격차도 벌어진다. 현재 공기업 임금은 기획재정부가 제시한 정률제 임금 가이드라인 틀에서 움직인다. 공무원 보수인상률에 준해 임금이 오르는 구조다. 물가상승률·경제상승률이 반영된다. 2015~2017년 공무원 보수인상률(3.8%→3%→3.5%)과 공기업 총인건비 인상률은 동일했다.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항공일자리 취업지원센터 근처에서 보안검색 직원이 업무를 보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정규직 고임금에 보탬이 된 아웃소싱 신입사원 초임이 2000만원인 공기업 ㄱ사와 1500만원인 공기업 ㄴ사가 동일하게 10%씩 5년간 임금이 올랐다고 가정해보자. ㄱ사는 5년 뒤 기본급은 3221만원이고, ㄴ사 기본급은 2416만원이다. 인상률은 같지만 총액 격차는 더 벌어진다. 인천공항을 둘러싼 정부의 정책 목표도 정규직 고임금과 무관하지 않다. 인천공항공사는 애초에 민영화를 전제로 출범한 조직이었다. 인천공항공사는 1999년 1월 공기업 경영구조개선 및 민영화에 관한 법률에 따라 민영화 대상에 포함됐다. 민간자본을 유치해 민영화를 한 뒤 경쟁력 있는 공항운영체제를 구축하겠다는 취지였다. 당초 목표는 2002년 민영화 완료였다. 정부는 민영화 추진을 위해 인천공항공사를 ‘가벼운 조직’으로 만들었다. 정부는 가벼운 조직이어야 민영화 추진에 직원들의 반발이 상대적으로 적고, 기업 입장에서 비용인 인건비를 최소화해 기업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봤다. 2000년 당시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는 비핵심업무를 아웃소싱하겠다고 국회에서 밝혔다. 규모는 필요인력의 85%인 3044명이었다. 인천공항공사의 정규직 직원은 2001년 675명, 2002년 714명, 2003년 735명이었다. 관리직군을 제외하곤 대부분 아웃소싱한 결과였다. 인천공항공사는 출범 이후 2007년까지 기재부의 경영평가를 받지 않았다. 대신 경영평가 결과에 따른 성과급 대신 자체적으로 실적수당과 성과급을 지급했다. 이때 평균 연봉은 2004년 5386만원에서 2007년 6549만1000원으로 올랐다. 2008년부터 경영평가를 받으면서 경영평가에 따른 성과급이 임금에 반영됐다.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전까지 기재부 경영평가 지침은 인건비를 줄이면 점수를 높게 줬다. 공공기관 경영평가는 노동생산성이나 계량인건비 등 적은 임금으로 노동자를 얼마나 고용했는지 평가해 아웃소싱을 유도했다. 이때 아웃소싱을 확대하면 성과급 확보에 유리한 구조가 만들어졌다. 사람을 줄일수록 노동생산성은 올라가고, 정규직 1명에게 돌아가는 성과급은 늘어나게 된다. 아웃소싱의 대가로 성과급을 한 푼이라도 더 받는 정규직과 그렇지 못한 비정규직 임금 격차는 자연스레 늘어났다. 인천공항공사의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상대 임금은 2004년 65%에서 2016년 53.5%로 임금 차이가 벌어졌다. 인천공항공사가 추진한 아웃소싱 흔적도 곳곳에 나타난다. 기재부가 작성한 <2008년도 공기업·준정부기관 경영실적 평가보고서>를 보면 “인천공항공사는 2008년도에 2단계 사업의 오픈으로 인한 증원 소요 인력을 아웃소싱함으로써 인건비를 절감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대목이 있다. 인천국제공항공사 노조원들은 지난 7월 9일 정규직 전환 추진에 대한 공익감사를 감사원에 청구했다. / 김영민 기자 과실은 주로 정규직에게 인천공항공사는 2008년 작성한 <경영효율화 추진계획에 의한 아웃소싱용역비 절감계획(안)>에서 2009년부터 4년간 1675억원에 달하는 아웃소싱비를 절감하겠다고 밝힌다. 세부 방안으로는 용역업체에게 ‘연장 및 휴일근로수당을 적용하지 않는 방안’, ‘교육훈련비 등 경비 최소화’, ‘소규모 공사의 수선유지 자체 시행’ 등을 제시했다. 정규직으로 고용했다면 투입해야 할 간접비를 최대한 줄이려는 의도가 드러난다. 황선웅 부경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이익을 공유하는 방식이 다소 불평등했다. 황 교수는 “아웃소싱 비용을 낮추는 것은 곧 비정규직의 임금을 낮추는 과정이었다. 아웃소싱 비용을 낮추면 경영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며 “인천공항이 각종 공항평가에서 1등을 한 것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다같이 모여 이룬 성과였다. 현재는 과실이 상당수 정규직에게 집중됐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인천공항이 우수한 평가를 받는 데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몫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12년 연속 1위를 차지한 세계공항서비스평가(ASQ)에는 평가항목이 34개가 있다. 주요 평가요소 중 하나인 친절과 청결 항목은 대부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담당한다. 빠른 출입국 시간도 평가요소인데, 공항 설계 당시 갖춰진 정교한 시스템에 더해 보안검색 비정규직 직원들의 역할도 크게 작용한다. 공기업 임금체계는 어디로? 인천공항공사 정규직이 안정적인 고임금을 유지하는 또 다른 이유는 ‘독점’ 덕분이다. 인천공항공사는 국내 공항 인프라를 독점한 공기업이다. 독점적 지위에서 나오는 안정적 수입은 성과급을 포함한 고임금으로 이어진다. 인천공항공사의 독점적 지위에서 나온 수익의 대표 사례는 비항공수익이다. 비항공수익에는 상업시설 임대수익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지난해 상반기 인천공항공사 수익 1조3674억원 중 비항공수익은 9056억원(66.2%)이었다. 비항공수익에서 면세점 등 상업시설 임대수익은 8309억원이었다. 반면 착륙료·공항이용료 등 항공수익은 4618억원(33.8%)이었다. 인천공항이 문을 연 2001년에는 항공수익과 비항공수익이 각각 1867억원(49.6%), 1900억원(50.4%)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인천공항공사 측은 비항공수익이 높은 구조도 경영 방식의 일환이라고 했다. 인천공항공사 측은 비항공수익 비중을 높이는 대신 항공이용료 등을 낮춰 여객과 화물을 끌어모으는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인천공항공사 측의 설명을 감안하더라도 전체 수익의 3분의 2가량이 임대료에서 나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은 “독점을 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임대수익 등 일종의 ‘지대(Rent)’를 소수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맞는지 이제는 고민해봐야 할 때”라고 말했다. 공기업 임금체계를 둘러싼 고민은 인천공항공사만의 문제는 아니다. 2018년 기준으로 36개 공기업의 평균 임금은 5년 전에 비해 624만원 오른 7800만원이었다. 같은 기간 32개 공기업의 당기순이익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공기업은 이익을 내지 못하고 있는데, 고임금이 고착화된 연차 높은 정규직 직원들의 임금 상승까지 맞물려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올초 쓴 논문 <기업 내 베이비부머·386 세대의 높은 점유율은 비정규직 확대, 청년고용 축소를 초래하는가?>에서 이 같은 통계를 근거로 “연공제로 인한 기업의 비용위기와 비용위기로 인한 비정규직의 증대 및 청년고용 감소”를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대대적인 공기업 임금체계 개혁은 저항에 부딪힐 가능성이 높고, 단계적으로 임금체계를 개선해나가야 한다고 했다. 황선웅 교수는 “불평등을 줄여나가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다만 기존 정규직의 임금을 깎는 방식으로는 어렵다”며 “오래 걸리더라도 같은 기업 내에서도 정규직-비정규직의 연대, 공항노동자들이나 운수교통노동자들처럼 산업별 연대의 움직임으로 해결해나가는 게 맞는 방향”이라고 말했다. 노광표 한국노동사회연구소장은 공기업 임금체계의 투명화를 진행해야 공기업 임금체계 개선도 이뤄진다고 봤다. 노 소장은 “지금은 공공부문 전체의 임금체계를 조금 더 객관화해서 임금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를 받고, 어떤 시스템에서 임금이 지급되고 있는지 지금까지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고 말했다. 정흥준 부연구위원은 “공공부문 임금체계 개편은 불가피하지만, 개편하면서 기존에 받고 있는 정규직의 임금은 수정하기 쉽지 않다”며 “결국 기존 임금은 보장하면서 새로운 임금체계를 도입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초봉은 다소 올리고 호봉 상승에 따른 기울기를 조금 낮추는 방식을 1차적으로 선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특집
[표지 이야기]서울·경기·인천 판세(2020. 04. 06 15:15)
2020. 04. 06 15:15 정치
ㆍ20대 이어 민주당 우세 ‘착시’일까 21대 총선에서 서울은 49명, 경기는 59명, 인천은 13명의 의원을 배출한다. 합치면 121석이다. 전체 253개 지역구의 절반에 육박한다. 갑을병정무의 다섯 개 지역구가 있는 경기 수원시에 인근 지역구 한 둘을 더하면 한 개 도(道)와 맞먹는 크기다. 선거구 획정이 지역비례가 아니라 인구비례를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서울·수도권의 승자가 사실상 이번 선거의 승자다. 승패는 어디로 기울까. 선거운동이 시작된 4월 2일, 서울 종로에 출마한 이낙연 민주당 후보(왼쪽)와 황교안 미래통합당 후보가 유세를 하고 있다. / 김영민 기자 ◆서울 - 이낙연·황교안 결과가 전체 좌우 현재 여론조사 결과만 보면 섣불리 예측하기 힘들다. 수많은 언론사 주관 여론조사가 실시됐지만 대부분 관심이 집중된 특정 격전지에만 국한되어 있다. 서울의 경우, 49개 지역구 중 4월 2일 현재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된 지역구는 9개에 불과하다. 나머지 40곳의 판세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판단할 수 있는 자료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중앙여론조사심의위원회에 결과가 등록되는 여론조사는 공표용 여론조사다. 정당이 자체적으로 실시하는 판세조사, 비공표용 여론조사 결과는 실시 여부에 대해 신고만 하게 되어 있을 뿐 발표할 수 없다. 각 당이 발표하는 우세·경합·열세 등을 표시하는 판세자료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나온 것이다. 각 당이 내부적으로 판세 예측에만 사용되는 자료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수치를 공개할 수 없다. 각 당이 주장하는 판세자료에는 정무적 판단이 들어간다. 웬만큼 밀리지 않는 한 ‘열세’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차범위 내에 있는 경합지역이라도 단 1%포인트만 앞서면 ‘정무적으로’ 절대 우세를 주장하기 십상이다. 그래도 비교는 가능하다. 서로 우세를 주장하는 지역은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지만 ㄱ당이 ‘절대 우세’, ㄴ당이 ‘경합’을 주장하면 그 지역판세는 ㄴ당이 밀리고 있다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서울은 일단 4월 2일 기준으로 발표된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9개 중 7개가 민주당 후보가 앞서고 있다. 미래통합당이 앞서고 있는 것으로 발표된 조사는 강남갑의 탈북자 출신인 태구민 미래통합당 후보와 송파을의 배현진 전 MBC 앵커밖에 없다. 태 후보(42.6%)는 김성곤 전 국회 사무총장에게 3월 30일 현재 약 9%포인트, 배 후보(40.3%)는 현역 최재성 의원에게 지난 3월 16일 발표된 여론조사에서 약 2.5%포인트 앞섰다. 강남갑 여론조사의 오차범위가 ±4.4%이므로 최대 8.8%포인트는 차이가 날 수 있다. 오차범위 밖이라는 뜻이 된다. 반면 배 후보는 오차범위(역시±4.4%) 내인데다 공식 선거전에 돌입되기 한참 전에 치러진 여론조사다. 송파을 판세는 ‘경합’으로 보는 것이 맞다.(이하 언급된 구체적인 수치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www.nesdc.go.kr) 참조) 서울 전체 선거를 견인하는 것은 역대 총리가 맞붙은 종로선거다. 직전 총리였던 이낙연 후보가 민주당으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 후 ‘권한대행’ 경험을 가진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가 후보로 맞붙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 총 스무 차례가 넘는 대부분의 여론조사를 ‘독식’하고 있는 종로선거에서 이낙연 후보의 절대강세 경향은 뚜렷하다. 3월 30일 발표된 중앙일보·입소스 여론조사 결과 이 후보는 55.1%, 황 후보는 34.5%를 기록했다. 여론조사가 치러지지 않은 나머지 지역은 강북 지역구를 중심으로 민주당 강세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2016년 총선에서는 민주당이 35석, 새누리당이 12석, 국민의당이 2석이었다. 한강 이북에서 현 미래통합당이 계승하고 있는 새누리당 후보가 당선된 곳은 중·성동을 지역구에서 당선된 지상욱 의원이 유일했다. 이번 선거에서는 박성준 전 JTBC 아나운서가 지 의원과 대결을 펼친다. ◆경기 - 엎치락뒤치락 혼전 속 여권 강세 경기도에서 4월 2일 현재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된 곳은 전체 49개 지역구 중 28곳이다. 이중 오차범위 내 우세까지 포함해 민주당 후보가 앞서는 곳으로 나온 지역구는 19개다. 미래통합당 후보가 앞서고 있는 지역구는 7곳이다. 역시 민주당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 20대 총선에서는 민주당이 40석, 새누리당이 18석, 정의당이 1석을 얻었다. 관심이 집중되는 경합지는 이재정 민주당 의원과 심재철 미래통합당 원내대표가 격전을 벌이고 있는 안양 동안을이다. 이곳에는 정의당 추혜선 의원까지 3명의 20대 국회 금배지가 격돌하고 있다. 3월 25일 알앤서치 조사에서는 민주당 이 후보가 44.3%, 통합당 심 후보가 40.0%로 오차범위 내 초박빙으로 발표되었지만, 그 뒤 발표된 조사에서는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3월 31일 입소스 조사에서는 이 후보가 48.3%로 심 후보(35.0%)를 오차범위 밖에서 앞서고 있는 것으로 나왔다. 정의당 추혜선 후보는 6~7% 내외를 기록하고 있다. 심 의원 측은 여론조사가 불공정하다고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심 후보 측은 3월 27일 보도자료를 내고 “엇비슷한 시기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업체에 따라 결과가 너무 차이가 난다”며 “발표된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 불공정 여론조사로 여론조사심의위원회에 문제를 제기했다”고 밝혔다. ◆인천 - 서구을·남동갑이 판세 결정 13석이 걸린 인천 지역에서 초미의 관심사는 ‘서구을에서만 내리 3선을 한 현역 이학재 의원을 국회 사무총장을 지낸 김교흥 전 의원이 꺾을 수 있을 것인가’다. 이 의견이 절대 강세를 보일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김 후보가 앞서고 있는 것이다. 3월 30일 OBS·리서치DNA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민주당 김교흥 후보는 49.2%로 35.3%를 얻은 이학재 후보를 13.9%포인트 차로 앞섰다. 오차범위 밖으로 지지율 격차가 벌어진 것이다. 지역 정치권 관계자는 “인천의 경우 쓰레기매립·소각장 등 10년 넘은 지역 현안이 현재까지 현안으로 남아 있다”며 “국회의원 12년, 구청장을 8년을 한 이 후보가 그동안 지역 현안들을 제대로 해결한 것이 뭐가 있느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이번 선거 때 서구갑과 선거구 조정과정에서 이 의원의 텃밭이었던 청라동 지역구가 서구갑으로 넘어간 것도 달라진 조건이라고 지역에서는 회자되고 있다. 서구을의 경우 여·야 모두 자체 판세조사에서는 경합지역으로 평가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지역구는 남동갑이다. 현역 맹성규 의원에 인천시장·행정안전부 장관을 역임한 유정복 미래통합당 의원이 도전하고 있다. 여론조사는 30~40%대에서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두 당은 모두 경합우세를 주장하고 있다. 여론조사 결과만 놓고 보면 서울·수도권의 전체 판세를 지난 20대 총선에 이어 민주당이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실제 경기도에서 각 당이 내놓은 판세자료를 놓고 비교해보면 미래통합당이 절대 우세를 주장하는 지역구는 두 군데에 불과한 데 비해 민주당 측이 ‘절대 우세’로 분류한 지역구는 23군데에 이른다. 김장수 제3정치연구소 소장은 민주당이 초강세를 보이는 여론조사 결과를 두고 “지난 총선 때 새누리당이 180석을 가져간다는 오판이 어떻게 가능했겠느냐”며 “근본적으로 과대표집 문제를 여론조사기관들이 방치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말한다. 안심번호 샘플링 자체가 문재인 정부 지지자들이 많이 반영된 ‘편향’이 존재하는데 보정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주장이다. 지난 총선 당시 여권이었던 새누리당에서 ‘진박감별’, ‘옥새 들고 나르샤’ 소동을 벌어진 것도 180석 달성이 가능하다는 ‘착시’를 일으킨 여론데이터 편향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비록 코로나 국면이라는 예외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정권 4년차에 치러지는 선거는 정권심판 선거”라며 “이번 선거는 130석을 기준으로 누가 1당이 되는가의 싸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론조사 상으로는 민주당 압승으로 나오지만, 실제 선거결과는 미래통합당이 1당을 하는 ‘의외의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박신용철 정책컨설팅 그룹 더체인지플랜 선임연구원은 ‘브래들리 효과(Bradley effect)’를 거론했다. 브래들리 효과란 미국선거에서 여론조사에서는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 유색인종 후보가 실제 결과에서는 낮은 득표율을 받는 현상을 말한다. 그는 “특히 코로나 국면 후 예상되는 경제위기를 누구나 직감하는 상황에서 정부 대처에 우선적 신뢰를 보이는 것이 옳다는 ‘도덕적 판단’이 여론조사 답변에 개입해 실제 지지율과 유리된 편향을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높다”며 “여기에 역시 코로나 때문에 낮을 것으로 예상되는 투표율이 어느 당에 유리할지도 빼놓지 않고 고려해야 할 변수”라고 덧붙였다.
표지 이야기
[렌즈로 본 세상]검역 1차 관문, 인천공항의 긴장감(2020. 02. 03 16:34)
2020. 02. 03 16:34 사회
입자 모양이 왕관을 닮았다고 해서 라틴어로 왕관을 뜻하는 ‘코로나(corona)바이러스’가 지난해 12월 중국 우한에서 발생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종전에 보고된 코로나바이러스와 달라 ‘신종’이라는 단어가 붙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2019-nCov)’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우한 폐렴·사스·메르스보다는 어감이 좋지만 그렇다고 왕관 모양의 바이러스를 반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지난 1월 28일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에 도착한 여행객들이 왕관 대신 마스크를 쓰고 검역소로 향하고 있다. 질병관리본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과 관련해 중국 전역을 검역대상 오염지역으로 지정하고 전체 입국자를 대상으로 검역과 건강상태질문서 제출을 의무화했다.
렌즈로 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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