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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 기회만 주는 윤석열 정부(2024. 12. 09 06:00)
- 2024. 12. 09 06:00 정치
- ‘물컵론’부터 ‘비상계엄’까지···한·일 정상회담도 불투명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2월 3일 밤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긴급 대국민 특별 담화를 하고 있다./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이 초래한 ‘12·3 비상계엄 사태’ 여파로 정부 대외정책 변화도 불가피해졌다.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책임과 기여를 다한다는 대외정책 기조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다”는 윤 대통령 말과 달리 국무위원들이 사의를 표명하며 사실상 정부 기능이 멈췄다. 범정부 차원의 대응이 필요한 ‘미국 트럼프 행정부 출범’에 대한 준비뿐만 아니라 예정돼 있던 국가 간 교류가 속속 취소됐다. 특히 현안인 ‘한·일관계 불협화음’ 대응도 미궁에 빠졌다. 사도광산 추도식 파행으로 불거진 일본의 약속 불이행 문제는 또다시 흐지부지 넘어갈 가능성이 커졌다. 이미 일본 정부는 한·일 간 현안을 사도광산에서 계엄 이후 상황으로 빠르게 옮겼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지난 12월 4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기자들과 만나 “(한국 상황을) 특단의 중대한 관심을 갖고 주시하고 있다”며 “재한 일본인의 안전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대응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아 추진 중이던 내년 1월 방한 일정과 관련해서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진 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양국 간 현안이 된 사도광산 추도식 문제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윤석열 정부를 상대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 ‘일제강점기 때 산업유산의 유네스코 등재 문제’ 등을 차례차례 해결한 일본은 한국과의 ‘약속 불이행’ 문제에서도 벗어나고 있다. 해제만 하면 끝? 비상계엄의 여파 ‘12·3 비상계엄 사태’가 만든 행정 공백은 외교 현안에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 11월 24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섬 아이카와 개발종합센터에서 열린 ‘사도광산 추도식’ 파행과 관련한 정부의 실효적 대책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비상계엄 사태가 터졌다. 주간경향은 비상계엄이 선포되기 전인 지난 12월 3일 오후, 외교부에 ‘일본의 약속 불이행에 대한 실질적 대응책은 무엇인가’, ‘사도광산 추도식 참여 인사나 추도사 내용 등에 관한 세부적 합의가 없었나’ 등을 질의했지만 답변을 받지 못했다. 외교부도 ‘긴급상황’이란 이유다. 지난 7월 27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사도광산’에는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가 엮여 있다. 분쟁 유산인 사도광산은 윤석열 정부의 동의를 받고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일본은 ‘사도광산 전체 역사를 반영한 전시 및 매해 추도식 개최’를 약속했다. 전시 관련 약속은 시작부터 깨졌다. 전시물에 ‘강제동원’ 문구가 빠졌다. 추도식 관련 약속도 깨졌다. 한국 정부는 추도식이 열리기 하루 전인 지난 11월 23일 불참을 결정했다. “일본 측 추도사 내용 등 추도식 관련 사항이 애초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시 합의한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라는 이유다. 실제로 이쿠이나 아키코 외무성 정무관(차관급)이 읽은 추도사에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사회적 상황 아래,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생각하며 광산 내의 위험하고 가혹한 환경 속에서 어려운 노동에 종사했다”는 내용만 담겼다. 조선인 강제동원 언급과 반성은 없었다. 합의와 이행이 다른 일본의 행태는 2015년 군함도(하시마)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때와 닮았다. 당시에도 일본은 “의사에 반해 끌려와 엄혹한 환경에서 일을 하게 된 조선인 노동자를 알리겠다”고 약속했다. 정작 등재 이후엔 군함도가 있는 규슈 나가사키현이 아닌 도쿄 신주쿠구 산업유산정보센터에서 해당 내용을 짤막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일본이 2015년과 같은 방식으로 2024년에도 한국을 속이는 데 성공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를 두고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합의 불이행에 대해 일본이 국제사회의 평판 부담을 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문화유산 전문가들은 일본의 태도 변화는 사실상 예견됐는데 한국 정부의 주의가 부족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준은 총 10가지로 구성된다. 이중 1번부터 6번까지가 문화적 기준이다. 일본은 군함도, 사도광산 모두 4번 ‘특정 시대의 중요한 건축물, 기술적 성취, 또는 도시 계획의 대표 사례’로 등재신청을 했다. 그런데 군함도나 사도광산처럼 역사 문제 등으로 합의가 필요한 문화유산은 ‘갈등 기억유산’으로 신청할 수 있게 별도의 기준이 있다. 6번 ‘인류에 미친 중요한 영향이나 과거의 갈등이나 재난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경우’다. 실제로 일본이 전쟁 피해사례로 강조하는 ‘히로시마 원폭돔’이 6번 기준으로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정부가 믿은 약속처럼 일본이 애초에 조선인 강제동원을 대대적으로 홍보할 것이었다면 쉬운 길인 6번 기준을 두고 굳이 4번 기준으로 갈 이유가 없었다. 일본은 해당 시도의 의미를 이미 군함도 때 보여줬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군함도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땐 차관, 똑같은 방식으로 사도광산이 등재될 땐 장관이 조태열 현 외교부 장관”이라며 “이게 우연인지, 실력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지난 11월 28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사도광산 문제와 관련한 김준형 조국혁신당 의원의 질의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똑같은 방식으로 두 번 속은 정부는 이번에도 ‘유감 표명’ 외엔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산업유산 전문가인 강동진 경성대 교수는 “이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만큼 개발 등으로 유적 가치가 훼손되지 않는 한 이제 특별한 대응 방법은 없다”며 “일본은 등재 당시 약속한 것들의 시행 여부를 이행보고서 형태로 유네스코에 제출하게 돼 있는데 그때 우리가 이의제기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12·3 비상계엄 사태’로 녹록지 않게 됐다. 정상 외교가 가능할까? 이른바 ‘물컵론’이라고 불리는 윤석열 정부 대일외교 기조는 ‘한국이 먼저 양보하고, 일본의 호응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문제는 호응은커녕 오히려 일본에 비판까지 받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추도식 하루 뒤인 지난 11월 25일 일본 정부 대변인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한국 측이 추도식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입장은 아니지만 유감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는 “대체 정부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정부가 추도식 하루 전날까지도 문제를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불참한다고 하니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협조를 얻어야 할 현안을 해결한 일본은 이제 관계가 악화하면 악화했지 한국에 무엇인가를 양보할 상황이 아니다”고 말했다. 외교의 불문율인 ‘하나 주고, 하나 받는’ 상호주의가 무너진 상황에서 한국 외교는 비상계엄 여파까지 맞았다. 윤석열 정부 표현대로면 일본에 받을 것이 남은 상황에서 내년 1월 한·일 정상회담 개최는 불투명해졌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현안에 대한 한·일 간 공동대응 역시 어렵게 됐다. 한·일관계 전문가인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사도광산을 포함한 한·일 문제는 양국 정상이 만나고, 대화를 통해 풀어나가야 하는데 계엄 여파로 이를 위한 여건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미·일 삼각협력 역시 삼국 정상 중 교체되지 않고 유일하게 남은 윤 대통령이 협력의 중심이 돼야 할 상황에서 스스로 대외 신뢰도를 낮출 수 있는 결정을 한 것”이라며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입장에선 한·일 정상 모두 국내 지지 기반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기존 삼각협력을 지속해야 할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12·3 비상계엄 사태’의 여파는 사회불안, 경제뿐만 아니라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외교에서도 크게 굴러가고 있다. *외교부는 지난 12월 6일 입장을 알려왔습니다. ‘사도광산 추도식 참여 인사나 추도사 내용 등에 관한 세부적 합의가 없었나’ 등의 질문에 “협상의 상세 내용에 대해서는 밝힐 수 없다”면서도 “우리 정부는 세계유산위원국으로서 한일 양자 차원의 협의와 함께 유네스코 틀 내에서 일본의 세계유산위원회 결정 이행을 지속 점검하고 문제제기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 방위비·관세 ‘돈맹’ 우려…인상 찡그리는 일본(2024. 11. 18 06:00)
- 2024. 11. 18 06:00 국제
- 일본서 본 미 대선 이후…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연합뉴스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이 확정된 후, 일본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것은 이시바 시게루 총리와의 ‘5분 전화 회담’이다. 통역을 제외하면 인사만 하고 끝난 것이다. 여기서 고인이 된 아베 신조가 다시 소환되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2016년 11월, 당시 아베 신조 총리가 골프채를 들고 취임 전 트럼프의 집을 방문해 친목을 다진 사례가 전설처럼 회자한다. 이시바도 당면한 G20 회의를 즈음해 트럼프와의 회담을 모색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시인처럼 말하는 정치인’으로 정평이 난 이시바를 트럼프의 거친 리더십이 상대해 줄까? 일본 여론과 오피니언 리더들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북·미 정상회담의 부활과 미·중 무역전쟁 재연이 키워드로 부상한 한국과 중국의 분위기와는 온도 차가 있다. 일본의 반응은 트럼프가 부과할 것이 확실한 ‘협상 과제’에 대한 우려다. 먼저 방위비 증액과 관련해 기시다 내각에서 이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기준인 국내총생산(GDP)의 2% 수준으로 끌어올렸지만 이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이시바 내각을 압박하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는 그 이상을 요구할 것이고, 고액의 방위 장비 구매 청구서도 내밀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더해 주일미군기지 유지경비 관련 협상 또한 예정돼 있다. 방위비용과 관련해 일본은 그동안 지속적인 엔저 현상의 영향으로 막대한 추가 재정손실을 본 것으로 추산된다. 미국의 안전보장 관련 비용 요구는 일본의 재정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고, 이것이 다시 엔화에 대한 신뢰도를 낮추는 악순환을 만들 수 있다. 이시바 총리가 이를 끊어 낼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시선은 거의 없다. 트럼프의 관세정책을 둘러싼 협상 또한 일본에 난제다. 일본의 자동차 등 제조업계는 이미 손실을 각오하고 있다. 나아가 일본 경제 전체에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관세장벽으로 인한 미국 국내 인플레이션의 지속 또는 상승이 달러의 강세와 엔화의 약세를 지속시킬 것이고, 이는 곧 일본 국내의 물가 상승을 가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민당이 지난 총선에서 참패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임금상승률이 물가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한 것이었다. 현재 소비세를 비롯한 감세를 주장한 정당들이 의석수를 확대한 상황이다. 이시바 내각은 트럼프의 귀환으로 이중의 재정압박을 받게 됐다. 경제안보와 관련해 가장 우려되는 것은 트럼프의 대중전략 향방이다. 일본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공급망 구축에 미국과 보조를 함께해왔지만, 대중 경제관계 회복을 위한 움직임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트럼프가 중국과 무역전쟁을 선포하고, 첨단 분야를 넘어 전 업종에서 디커플링을 추진할 경우, 일본 경제는 최악의 상황이 될 수 있다. 또 유사시 대만에 대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입장과 향후 대응도 주목받는다. 중국의 대만 침공에도 무력 불개입을 시사해왔던 트럼프의 발언이 진정성을 보인다면, 미·일동맹은 물론 일본의 외교안보 정책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 대만해협의 전쟁은 곧 센카쿠열도를 둘러싼 일본 해협의 전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시바 내각은 과반수에 미치지 못하는 소수여당을 이끌고 대응해야 할 처지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아베 외교의 레거시(유산)가 칭송되고 있지만 정치자금 스캔들, 아베노믹스 등의 영향으로 총선에서 패배한 이시바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다. 이시바의 지론인 ‘미·일지위협정 수정’ 가능성은 없어졌고, ‘아시아판 NATO’ 등 다자간 안전보장 협력의 새판짜기도 입 밖에 내기 어려운 정세다. 트럼프가 미·일동맹을 기축으로 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을 애써 수정하지는 않겠지만, 미·일동맹의 존재감은 상대적으로 약해질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의 외교는 가치보다 실리를 목표로 양자관계를 중시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박정진 일본 쓰다주쿠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특히 “취임 전 전쟁을 끝낸다”는 트럼프의 예고가 현실화할 것인지 관건이다. 트럼프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종전을 끌어낼 경우, 이는 곧 북·미관계와 미·중관계로 연동된다. 러시아와 북한의 밀월관계는 약화하는 반면 중국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은 부활하기 때문이다. 북한 김정은 위원장으로서는 트럼프와의 정상회담을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다. 여기서 이시바의 외교 구상은 또다시 좌절할 수 있다. 이시바는 총리 선거에서 북·일 정상회담은 물론 연락사무소 설치 등 독자적인 대북정책을 공약했지만, 이러한 국면에서는 실현되기 어렵다. 국제무대에서 트럼프식 외교가 실천력을 보일수록 한·미·일 협력과 한·일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2021년 4월에 발표된 바이든-스가 공동성명에서 일본은 인도·태평양전략의 최전방 국가로서 대만 유사 사태를 일본의 유사 사태로 간주한 바 있다. 같은 해 5월, 문재인-바이든 공동성명에서는 비확산 체제 유지를 위한 한·미·일 협력을 ‘한·일동맹의 핵심 징표’로 정의했다. 그러나 대만 유사 사태 시 미국이 무력 개입을 거부하고 북·미 정상회담 부활이 북한 핵 폐기가 아니라 핵 동결로 귀결될 조짐이 보인다면 한·미·일관계는 당분간 유동적인 상태가 될 수 있다. 현재 일본에서는 미·일동맹이 ‘악화’되지는 않겠지만 ‘약화’될 수 있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더불어 한·일 안보협력의 필요성이 다시 강조되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이시바 내각이 내년 여름 참의원 선거까지 유지될 것인지 아닌지다.
- 표지 이야기
- “조선인은 일본인? 시대적 맥락 도외시한 주장은 맞지 않다”(2024. 09. 02 06:00)
- 2024. 09. 02 06:00 정치
- 일제강점기 연구한 김강산·김태현 박사 인터뷰 지난 8월 27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김강산(왼쪽), 김태현 박사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김창길 기자 “일제강점기 우리 선조들의 국적은 어디인가.” 누군가에게는 복잡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질문이다. 이 문제를 복잡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은 역사 및 국제법 등의 학계다. 일본제국주의의 국권 찬탈이 왜 불법이고, 이것이 무효일 때 그 시대를 살아간 선조들의 귀속적 지위는 어떻게 되는지 등을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해야 한다. 이는 향후 국제분쟁이 발생하면 유용한 무기가 될 수 있다. 반면 이 문제가 반드시 단순해야만 하는 집단도 있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음을 헌법 전문에 밝혀 둔 대한민국 정부다. 대통령 이하 공무원 모두가 해당한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에는 본인의 지위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선조들의 국적을 대답하지 못하거나 일본이라고 답변하는 이들이다. 일본 국적설의 근거는 국권 피탈이다. 반례는 차고 넘친다. 1945년 해방 직후, 일본에 있던 조선인은 무국적자로 분류됐다. 일본인이라고 보지 않은 것이다. 국민의 기본권리도 완전히 주어지지 않았다. 대신 민족적 구별은 분명했다. 이는 차별로 나타났다. 주간경향은 지난 8월 27일 일제강점기를 연구한 두 명의 젊은 역사학자를 서울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김강산 박사는 1923년 발생한 간토대학살을 연구했다. 김태현 박사는 조선총독부의 임업 정책을 연구했다. 두 사람의 연구는 제국과 식민지,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을 잘 보여준다. ‘조선인=일본인’이라는 인식의 반례가 될 수 있다. 이제 막 전문 연구자의 길에 들어선 두 사람 앞에 던져진 ‘뉴라이트’라는 변수에 관해서도 들어봤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일본인’이라는 주장은 어떻게 봐야 하나. 김강산(이하 산) : “먼저, 일제강점기 선조들이 조선인이었냐, 일본인이었냐를 이분법적으로 묻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질문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국적 적용에 관해서는 일제의 의도된 모호함이 있었다. 식민지 조선인이 해외로 나갈 땐 일본 여권 등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조선인=일본인’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일제가 일본인에게 적용한 국적법이 조선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게다가 같은 국민이라면 차별 없이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하는데 참정권이나 의회 구성 등에서 조선인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차별적 요소가 다수 발견된다. 일제는 필요에 따라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보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시대적·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조선인=일본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맞지 않다.” 지난 8월 27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김태현 박사가 인터뷰하고 있다./김창길 기자 당시 ‘국적이 일본이다’까지만 말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국적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으로서 권리, 의무가 발생했느냐다. 당시에는 호적부터 일본적·조선적을 구분해 차별했다. 이에 따라 국민이라면 누려야 할 권리를 얻지 못했다.- -김태현 김태현(이하 현) : “당시 ‘국적이 일본이다’까지만 말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국적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으로서 권리, 의무가 발생했느냐다. 당시에는 호적부터 일본적·조선적을 구분해 차별했다. 이에 따라 국민이라면 누려야 할 권리를 얻지 못했다. 일본 국적이니 창씨개명도 한 것 아니냐고 하는데 창씨개명을 두고도 일본 내에서 ‘앞으로 조선인·일본인을 구별하지 못하면 어떡하냐’는 우려가 나올 정도였다. 그만큼 구분돼 있었다는 의미다. 당시 국적이 어디냐만 따지는 것은 ‘식민지 강제동원 등도 합법이다’라는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조선인=일본인’이라는 주장의 반례가 많지 않나. 산 : “1923년 9월 1일 발생한 일본 간토대학살 관련 연구를 했다. 당시 조선인은 ‘조선인이라서 죽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지진이 일어나고 하루 뒤 내무성이 계엄령을 선포하는데 이때 공식적으로 불령선인 침입을 경계하라고 경고한다. 조선인 폭도들이 찾아갈 테니 방비하라는 유언비어를 유포한 것이다. 이로 인해 계엄군이나 자경단이 조선인을 학살할 명분을 가지게 됐다. 과연 조선인과 일본인이 같은 국적이고 동등한 입장에 있었다면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겠나.” -차별이 존재했다면 ‘일제가 조선을 선의로 근대화했다’고도 볼 수 없는 것 아닌가. 현 : “뉴라이트와 반(反)뉴라이트 세력 간에는 공통점이 있다. 근대화를 반드시 달성해야 할 ‘가치’로 본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한쪽은 ‘근대화를 시켜준 만큼 일제도 좋다’는 결론을 내고, 또 다른 한쪽은 ‘그 좋은 근대화를 일제가 해줬을 리가 없다’로 결론을 낸다. 따지고 보면, 일제가 조선을 근대화했다는 것도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일제는 1926년 목재 대외무역수지 적자가 1억엔을 돌파하면서 각 식민지에서 목재 자원 조달계획을 세웠다. 당시 조선은 산림 자원이 매우 부족했다. 일제는 조선의 목재 부족이 심각해지면 일본으로부터의 목재 이입이 증가할 것을 걱정했다. 이에 따라 자급자족을 기본으로 한 조선 산림 개발을 한다. 이 과정에서 벌채 및 조림 비용은 국유림 벌채 수익으로 충당하기로 했는데 일제가 조선의 사방사업(수력 및 풍력에 의해 토사·자갈이 이동해 발생하는 각종 재해를 예방하고 복구하는 공사) 공채비를 감액하거나 사실상 주지 않아서, 국유림 벌채 수익으로 충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조림 정책에 투입할 비용은 부족해졌다. 즉 일제는 조선에 근대적 임업 정책을 도입했지만 이를 실시한 이유는 일본의 목재 무역수지 적자 때문이었다. 사업이 부실화된 원인은 일본이 사업 공채 등의 재정적 투자를 사방사업 등에 하지 않고, 철도 등의 군사 관련 시설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중요한 것은 단순히 근대화됐느냐가 아니라 근대화의 성격임을 알 수 있다. 개발이냐, 수탈이냐 식의 이분법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뉴라이트는 수치나 통계를 내세워 정당화 한다. 현 : “쌀 생산량이 늘어나고, 철도가 깔리는 것 등을 수치나 통계로 보여주는 것인데 문제의식이 거기에만 머문다는 것이 한계다. 이들은 식민지에서도 자본주의가 싹틀 수 있고, 자본주의야말로 달성해야 할 최고의 선으로 본다. 이에 따라 당연히 자본주의 성장을 증명할 수 있는 통계에 매몰된다. 성과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해당 연구를 통해 식민지 운영이 ‘원시적 수탈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방식이 논박되자 이를 개선하기보다 ‘민족주의가 문제다’란 방향으로 전환했다. 이 시점에서 학문적 논의는 더 이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이들이 맹신하는 경제성장 수치 등을 정립한 미국 경제학자 사이먼 쿠즈네츠 역시 ‘통계가 그 사회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통계는 역사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참고자료이지, 통계 자체가 역사는 아니다.” 지난 8월 27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김강산 박사가 인터뷰하고 있다./김창길 기자 뉴라이트가 수치나 통계를 내세우는데, 역사 연구하는 데 있어 수치나 통계는 중요한 자료다. 다만 정보에도 맥락이 있다. 그런데 이들은 모든 문제를 경제성장 여부에 집중하고, 이 과정서 발생한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김강산 산 :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수치나 통계는 중요한 자료다. 다만 이러한 정보에도 맥락이 있다. 예를 들어, 간토대학살의 경우 여러 주체로 작성된 학살자 수 통계가 발견되는데 이를 연구할 땐 ‘자료 작성 주체가 누구냐’, ‘과대 혹은 축소했을 가능성이 있나’ 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단순히 자료를 발굴했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이를 어떤 방식으로 해석할 것이냐까지가 역사학자 몫이란 의미다. 그런데 뉴라이트는 자료 이후 단계를 말하지 않는다. 단순히 ‘이러이러한 수치를 보니 일제강점기 한반도 경제가 성장한 것을 증명했다’로 끝난다. 결국 모든 문제를 경제성장 여부에 집중하고, 이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누리는 번영, 자유 등의 토대가 일제강점기에 마련됐다는 결론을 상정하고 연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른바 ‘뉴라이트’로 분류되는 인물들을 정부 산하 역사 관련 기관 요직에 임명하고 있다. 산 : “꼭 다수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만 기관장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역사 관련 정부기관은 국민의 역사의식을 정립해 가는 곳이다. 이런 자리에 사회가 공유하는 인식과 동떨어진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임명되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 분이 국민 통합에 앞장서겠다고 말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연구자 처지에서 볼 땐 이는 연구환경 변화와 직결된다. 지난해가 간토대학살 100주년이었다. 그런데 독립기념관에서 개최 예정이었던 ‘일본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기 전시회’가 돌연 취소됐다. 최근 언론 보도 등에 따르면 국가보훈부의 압박이 있었다고 한다. 간토대학살은 좌·우의 문제가 아닌 무고한 조선인이 일본에서 살해당한 사건이다. 이러한 사건 관련 전시까지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할 수 없다’는 분위기라면 어디까지 자유롭게 연구가 가능하고, 어디까지가 불가능한지 알 수 없게 된다. 그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진 느낌이다.” 현 : “정부의 뉴라이트 인사 임명에 대해서는 학계 성명서에도 서명했고, 언론 비판에도 동의한다. 이렇게까지 문제가 된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다만 한 가지 생각해봤으면 하는 지점이 있다.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에는 집중 비판이 나왔지만 동북아역사재단, 한국학중앙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에 유사한 성향 인사가 임명될 때는 이 정도 비판은 없었다. 김 관장은 학계에서 활동한 사람도 아니고, 독립운동 관련 단체에서 활동한 사람도 아니다. 반면 다른 기관에 임명된 인사들은 뉴라이트 성향으로 분류됐지만 서양사, 경제사 등에서 나름의 성과를 낸 인물들이었다. 즉 엘리트 의식이 반영된 학맥과 학력에 따라 선택적 비판을 하는 것은 아닌가 우려스럽다. 독립기념관뿐만 아니라 역사 관련 기관장을 임명할 때는 명확한 평가 기준과 해당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인사가 임명될 경우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학계의 의견이 정립될 필요가 있다.” -뉴라이트의 주장은 계속 존속될 수 있다고 보나. 산 :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 월례발표회 등을 하는 것을 보면, 연구는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새로운 학자가 등장하기보다는 여전히 안병직, 이영훈 등의 익숙한 이름만 나오는 것 같다. 뉴라이트는 <반일 종족주의> 출간과 함께 스스로 학문적 논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해당 책에서 주장한 내용 역시 이미 학계에서 논박됐던 것들이다. 즉 뉴라이트는 1970~1980년대 학계가 주장했던 내용과 여전히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역사 연구자들이 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면 해소될 문제라고 생각한다.” 현 : “정치적 선동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학문적 재생산 역시 되지 않고 있다. 이들 연구가 학계나 사회에 기여하는 것도 아니고, 친일 논란만 만들지 않나. 뉴라이트는 본인들을 ‘순교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한국이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일본과의 협력이 필수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에 방해되는 반일감정을 뿌리 뽑겠다는 인식 구조다. 그래서 이들이 학자적 양심을 가졌다기보다는 정치적 신념을 가졌다고 평가한다. 더 이상 이러한 뉴라이트를 상대로 우리 사회가 ‘근대화냐, 수탈이냐’라는 이분법적 논의에 매몰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 표지 이야기
- ‘지역수당’이 뭐길래…국가 상대로 소송 나선 일본 재판관(2024. 08. 05 06:00)
- 2024. 08. 05 06:00 국제
- 일본 공무원에게 지급되는 지역수당 때문에 적잖은 급여 차이 “동일노동 동일임금 위배”…제도 재검토 상황에서 귀추 주목 일본 도쿄 시나가와역 인근 도로를 시민들이 걷고 있다. /AP연합뉴스 장면 하나. 지난 7월 22일 아사히신문은 일본 국가공무원 일부가 민간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국의 광역자치단체에 해당하는 도부현(都府県) 47곳 중 8곳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기관으로 치면 207곳이었다. 고졸 일반직 초임 급여를 시급으로 환산한 결과였다. 장면 둘. 같은 달 2일 현직 판사가 나고야 지방재판소에 국가를 제소했다. 똑같은 재판관인데, 임지가 어디냐에 따라 월급이 달라진다는 이유였다. 주인공은 미에현 쓰(津)시 지방재판소 소속 다케우치 히로시 민사부 판사. 1987년 변호사 등록 후 2003년부터 판사로 재직한 베테랑 법조인이다. 마이니치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다케우치 판사의 급여는 쓰 지역으로 이동 후 크게 줄었다고 한다. 현직 재판관의 국가 상대 소 제기는 이례적이다. 고졸 초임 공무원과 22년차 판사. 좀처럼 같은 점을 찾기 힘든 두 사례 사이엔 한 가지 공통분모가 자리해 있다. 일본 공무원에게 지급되는 ‘지역수당’이 그것이다. 같은 일 해도 20%까지 급여 차이 공무원 지역수당은 2006년 도입됐다. 민간기업의 임금 수준이 높은 지역에서는 공무원에게 수당을 추가 지급해 생활 수준을 맞춰준다는 취지다. 반면 민간 임금 수준이 낮은 지역은 수당이 적다. 대기업 본사가 위치한 도심지, 산업단지가 자리한 지방 대도시, 농어촌 지역 등의 평균 벌이 차이와 겹친다. 현재 기준으로 지역수당은 시정촌(市町村)에 따라 기본급 기준 0%부터 20%까지 다르게 지급된다. 시정촌은 한국 기초지방자치단체에 해당하는 지역 단위다. 취지상 공무원에게 유리한 제도 같지만, 도입 배경은 의외다. 이 제도를 도입한 2006년에는 공무원 봉급이 민간보다 많다는 비판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자 정부는 공무원 전체 봉급 수준을 낮추는 대신, 지역에 따른 물가 차이를 보전하기 위해 수당을 지급하는 방식을 택했다. 마이니치신문, 요미우리신문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지역수당 규모는 10년 주기로 재검토된다. 현재 지역수당 지급률은 2014년 정해졌다. 전국을 7개 급지로 나눠 지급률을 달리하는 방식이다. 옛 도쿄시에 해당하는 도쿄 23구가 기본급의 20%로 가장 높고, 오사카시 등 21개 지방자치단체가 16%로 2순위다. 나고야시 등은 15%이며, 다케우치 판사가 현재 일하는 쓰시는 6%로 뒤에서 두 번째다. 7급지는 3% 지급률을 적용받는다. 이에 따른 급여 차이는 ‘월급쟁이’ 직장인 처지에서 결코 작지 않다. 월급이 30만엔이라고 가정해 보자. 도쿄 23구에 근무 중이라면 실질 월급이 36만엔으로 오른다. 지역수당이 지급되지 않는 일부 시정촌 근무자는 30만엔으로 매달 6만엔(약 54만원) 차가 난다. 연봉으로는 72만엔(약 648만원) 차다. 급여가 높은 고연차 공무원일수록 이 차는 더 커진다. 격차 완화책이 있기는 하다. 지역수당 지급률이 기존보다 낮거나 없는 지역으로 이동한 경우, 이동 1년차에는 전임지 비율을 적용하는 식이다. 하지만 2년차엔 전임지 최저수당의 80%로 이 비율이 줄고, 3년차부터는 이동한 곳의 지역수당 지급률을 적용받게 돼 한계가 있다. 다케우치 판사는 제소 당일 오사카 지방재판소에 근무할 때와 비교해 최근 3년간 봉급이 약 240만엔(약 2163만원) 줄었다고 밝혔다. 그는 “올해는 (지역수당) 재검토의 해이기도 하다. 이대로 피해를 받는 불합리를 침묵할 순 없다”고 말했다. 지역수당 탓 전근···공립병원도 인력 유출 지역수당은 공무원 인원 구성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연봉 차이가 꽤 나는 만큼 수당을 더 많이 지급하는 지역으로 근무지를 옮기려는 공무원이 생겨서다. 특히 생활권이 같은 인접 지역과 수당 격차가 큰 경우, 근무지 이동에 따른 환경 변화 등 부담이 적어 옮길 유인이 더 크다. 신입 직원의 경우 지역수당이 낮은 지역 입사를 고민한다. 아사히는 4년 전 고향 동사무소에 취직했다가 올 4월 근무 지역을 옮긴 남성의 사례를 전했다. 기존 근무지는 7급지로 지역수당이 3%, 새로 일하기 시작한 시청은 4급지로 12%다. 동기 중 다른 지자체에서 온 전직자가 3명 더 있다. 남성은 “좋아하는 마을이지만, 근무지에 따라 평생 연수입에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1년차부터 전직을 생각했다”고 말했다. 사이타마현 중부 모로야마초는 3% 지급률을 적용받는 곳이다. 동쪽 옆 사카도시(10%), 북쪽 하토야마초(6%)보다 지역수당이 적다. 이 지역 수장인 이노우에 켄지는 아사히와의 인터뷰에서 “취업 3~4년 만에 (인접한) 다른 지자체로 전직하는 직원이 있다. 물가도, 공무원 업무에도 그다지 차이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면서 지급률이 다른 데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히가시쿠루메시, 니시도쿄시, 기요세시 사례를 들었다. 이들 지역은 똑같이 도쿄도에 속해 있는데도 각각 6%, 15%, 16%로 지역수당 지급률이 다르다. 닛케이는 “지급률이 낮으면 직원 채용에 불리하다. 개호(돌봄노동), 보육 등 공공서비스 분야에서 인재 획득이 어려워진다”고 했다. 도쿄신문은 “공립병원의 의료 종사자도 지역수당 지급률이 높은 지역으로 옮겨가서, (지급률이) 낮은 곳에서는 인력 부족이 일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다케우치 판사가 현행 지역수당 제도에 맞서 소송에 나선 근거는 두 가지다. 하나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에 반하는 불합리한 차별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재판관 보수는 재임 중 감액되지 않는다는 일본 헌법 제80조 제2항 규정에 반해 위헌이라는 것이다. 후자는 판사에게만 해당하는 논리지만, 전자는 공무원 사회 전체에 적용된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지역수당이 도시와 지방 간 격차를 넓히고 있다”고도 비판한 것으로 전해졌다. 법원과 여론 판단에 따라 제도 변화의 폭이 커질 수 있는 주장이다. 지지통신 등 보도에 따르면 한국 인사혁신처에 해당하는 인사원은 최근 시정촌 단위로 지급률을 정하는 현 제도 설계를 재검토해 도부현 단위로 광역화하는 방향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급률도 4~20% 5단계로 바꾸고, 지역수당이 기존보다 낮은 지역으로 이동한 경우 3년째에도 기존의 60%를 지급하는 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작은 변화는 아니나, 다케우치 판사가 소송에 내포한 변화 폭은 더 크다. 일본 언론이 그의 소송을 주목하는 이유다.
- ‘발톱’ 드러낸 일본…라인은 어떻게 넘어갔나(2024. 05. 13 06:00)
- 2024. 05. 13 06:00 경제
- 일본의 자국 데이터 보호주의로 한국 미래 산업 놓쳐, 안 좋은 선례 남겨 한일 외교와 투트랙으로 플랫폼 등 미래 산업 육성 위한 정부 대응 필요 지난 5월 9일 오후 라인야후가 입주해 있는 일본 도쿄 지요다구의 도쿄가든테라스기오이타워에 사람들이 들어가고 있다. 걸어가는 사람 앞으로 ‘라인야후’라고 적혀 있다. 연합뉴스 네이버 자회사인 라인야후의 경영권이 일본으로 넘어갈 전망이다. 라인야후는 네이버가 개발한 일본 ‘국민 메신저’ 라인과 소프트뱅크의 포털 사이트 야후를 운영하는 회사로, 양사가 절반씩 지분을 갖고 있다. 소프트뱅크는 지난 5월 9일 열린 결산설명회에서 네이버가 보유한 A홀딩스 지분 일부를 오는 7월 초까지 사들이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A홀딩스는 네이버와 소프트뱅크가 50%씩 출자해 설립한 라인야후의 최대 주주다. 네이버가 소프트뱅크에 주식 1주만 넘겨도 라인야후 경영의 주도권을 잃게 된다. 일본 정부가 요구한 라인야후의 경영 체제 재검토가 현실화하는 것으로 일본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라인야후를 완전한 일본 기업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네이버는 일정 지분을 내주되 최대한의 실익을 거두는 방향 등 모든 것을 열어놓고 검토하고 있다. 미야카와 준이치 소프트뱅크 최고경영자(CEO)는 이날 결산설명회에서 “라인야후 자본 변경안을 두고 네이버와 논의하고 있다. 7월 초까지 협상을 타결하는 게 목표”라며 매각 의지를 분명히 했다. 미야카와 CEO는 “라인야후 측 요청에 따라 보안 거버넌스와 사업 전략 관점에서 자본 재검토를 협의 중”이라며 “아직 합의에 이른 단계는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 ‘소프트뱅크가 라인야후 지분을 추가 매입하는 것에 네이버가 소극적이거나 저항하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네이버도 소극적이지 않다”고 답했다. 라인야후도 지난 5월 8일 열린 결산설명회에서 ‘라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신중호 이사를 사실상 경질해 이사회를 모두 일본인으로 구성했다. 또 네이버와의 위탁관계를 차례대로 종료해 기술적인 협력관계에서도 독립을 추진하겠다고 밝혀 결별을 공식화했다. 다만 거래 금액 등에서 양측 견해차가 큰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내부에서도 지분 재조정이 쉽지 않고 기술적인 면에서는 네이버에 의존하는 구도가 상당 기간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니혼게이자이신문 등은 “소프트뱅크가 네이버로부터 일정한 수의 A홀딩스 주식을 추가 취득하는 등의 안이 나오고 있지만, 향방은 불투명하다”고 보도했다. 일본의 디지털 정책 전문가인 사토 이치로 국립정보학연구소 교수는 아사히신문과 인터뷰에서 “라인야후가 기술 혁신을 추진하고 있지만, 네이버와의 기술력 격차가 커 1~2년 안에 (격차를) 메울 수 없다”고 말했다. ■ 개인정보 유출이 경영권 박탈로 비화 이번 사건은 지난해 11월 라인야후에서 개인정보 약 52만 건이 유출되면서 시작됐다. 개인정보를 관리하는 네이버 클라우드와 업무를 위탁하고 있는 회사 직원이 모두 사이버 공격을 받아 생긴 일이다. 통상 이런 경우 재발 방지 조치를 요구하고,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과태료 등의 조치를 내린다. 실제로 페이스북 등 다른 외국 기업들이 개인정보를 유출했을 때도 일본은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책 마련을 요구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하지만 일본 총무성은 행정지도를 통해 ‘자본 관계 재검토’를 요구해 논란이 커졌다. 데이터 유출 사고 원인과 기업의 지분구조가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고, 라인야휴가 재발방지대책을 제시했음에도 올해 3월과 4월 두 번이나 행정지도를 내리자 일본 언론이 “이례적”이라며 먼저 보도해 논란이 됐다. 라인야후 지분구조 라인야후가 시스템 업무를 위탁한 네이버에 의존해 해킹에 대한 대처가 미흡했다는 것이 행정지도를 요청한 이유였다. 행정지도는 일본 총무성이 개인과 기업에 협력을 요구하는 지도 행위로 법적 구속력은 없다. 하지만 관료제가 강한 일본에서는 행정지도를 따르지 않고는 사업을 하는 게 불가능하다. 일본 총무성은 한국의 기획재정부와 행정안전부를 합친 기관이다. 정보기술(IT) 업계에서는 일본 정부가 자국의 대표 플랫폼을 한국 기업이 공동 소유하고 있는 것에 불편함을 공식적으로 드러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번엔 갈등이 봉합된다고 해도 향후 다른 행정지도로 규제를 이어가면 일본에서의 플랫폼 사업은 힘들어진다. 이에 네이버도 소프트뱅크와의 협상에서 해외사업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면서 지분에 대한 대가를 가장 잘 받을 수 있는 최선의 안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수연 네이버 대표도 지난 5월 3일 콘퍼런스콜(투자자 설명회)에서 “(일본의 행정지도는) 따를지 말지를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중장기적인 사업 전략에 기반해 결정할 문제로 내부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밝혀, 매각 가능성을 시사했다. 네이버가 실제 라인 지분을 매각하면 인수·합병 등을 위한 실탄을 확보할 수 있다. 네이버는 라인야후 지분 64.5%를 보유한 A홀딩스 지분을 절반가량 소유하고 있다. 라인야후 시가총액 약 25조원 중 32.3%에 달하는 8조1000억원가량이 네이버 몫이다. 경영권 프리미엄을 보태 지분을 매각하면 10조원가량을 챙길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네이버가 수십 년간 공들여 추진한 해외 사업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라인은 한국 기업이 세계 무대에 진출해 글로벌 플랫폼으로 성장한 유일한 사례다. 당장 라인야후와 관계가 단절되면 디지털라이제이션(Digitalization·디지털 기술을 이용해서 비즈니스 운영방식을 바꾸는 것)이 본격화되고 있는 일본 IT 시장에서 네이버가 성장할 기회를 놓칠 수 있다. 최악의 경우 동남아 시장 확장 기회마저 소프트뱅크에 넘기게 될 수 있다. IT 공정과 정의를 위한 시민연대 등은 “미국 등 타국 IT 기업의 데이터 보관에 대해선 관대하면서 유독 한국 기업에만 엄격하다면 우방인 한국에 대한 중대한 차별행위”라며 “이번 사태를 묵과하면 향후 한국 기업이 서비스하는 다른 국가에서 동일한 요구에 직면할 수 있어 정부는 위기의식을 갖고 대응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라인야후를 공동 설립한 네이버 이해진 창업주(왼쪽)와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 연합뉴스 네이버는 2011년 6월 일본에서 라인 서비스를 출시한 뒤 월간 활성 이용자(MAU)가 9600만 명에 달하는 ‘국민 메신저’로 성장시켰다. 일본을 발판삼아 태국(5500만명), 대만(2200만명), 인도네시아(600만명)를 포함해 아시아 시장에서 2억명의 라인 이용자를 확보했다. 라인야후 자회사인 ‘Z중간글로벌(Z Intermediate Global)’은 일본 이외 글로벌 사업 개발과 확장을 맡은 한국법인 라인플러스 등을 보유하고 있다. 라인야후 지분 매각으로 아시아 시장에서 메신저, 인터넷은행, 캐릭터 사업 등을 키울 기반을 잃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네이버 측은 “중장기적 관점에서 자본 변경을 검토한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라인 야후 사태 관련해 네이버의 입장을 존중하며 차질 없이 대응하겠다는 원론적 입장만을 밝혔다.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지난 5월 8일 “네이버가 중요하고 민감한 경영적 판단을 해야 하는 일들이 있는데 이런 부분에 (정부가) 끼어들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며 “한국 기업이 해외 사업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하는 데 최우선 가치를 두겠다”고 밝혔다. 기업 경영에 개입하지 않는 선에서 네이버 요청에 도움을 주겠다는 입장이다. ■ 라인 데이터 유출·한국 국적 논란 시달려 데이터 유출 이슈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1년 아사히신문은 심층보도를 통해 라인 이용자 간에 주고받는 대화 서비스의 모든 사진과 동영상이 한국에 있는 서버에 보관되고 있는데, 이용자들이 볼 수 있는 라인의 개인정보 관련 지침에는 그런 상황이 충분히 기술돼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또 라인이 서비스에 사용하는 인공지능(AI) 등의 개발을 중국 상하이에 있는 업체에 위탁, 이 업체 직원이 접근 권한을 갖고 있어 자칫 개인정보가 중국으로 유출될 우려가 있다고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또다시 데이터 사고가 발생했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라인야후는 지난 3월 첫 행정지도 조치를 받은 뒤 총무성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네이버와 네트워크 완전 분리에 2년 이상 걸린다는 전망과 구체적이지 않은 안전 관리 대책을 제시했다. 해당 보고서는 총무성 관계자들의 화를 돋웠고, 한 간부는 “사태를 너무 안이하게 보는 것 아닌가”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아사히신문은 전했다. 기저에는 국적 논란도 깔려 있다. 라인은 출범 당시 네이버의 자회사이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력이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자국중심주의가 강한 일본에서 한국 기업이 사업을 확장하는 건 쉽지 않았다. 네이버는 고도의 현지화 전략을 택해 현지 경영진 중심으로 사업부를 꾸리고 국적 논란이 일 때는 “도쿄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이사회의 과반수가 일본인으로 구성돼 있다”라는 등의 입장을 내며 논란을 피해 갔다. 하지만 반한 감정은 끊이지 않았고 한국 국가정보원이 네이버 라인을 통해 일본인을 감청하고 있다는 소문이 일본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네이버가 고심 끝에 소프트뱅크와 손을 잡은 이유다. 국적 논란이 일만큼 라인은 일본의 공공 인프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일본 인구가 대략 1억2300만명 정도 되는데 그중 80%에 달하는 9600만명이 쓰고 있다. 라인은 IT 산업이 뒤처진 일본 정부와 지자체의 디지털화를 일부 수행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기능도 갈수록 다양해져 행정 업무와 결제 등 사회 인프라로 거듭나며 생활 곳곳을 파고들었다. 2016년 구마모토 지진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라인으로 구조를 요청하고 생존을 확인하는 ‘핫라인’으로 활용했다. 지자체는 코로나19 알림 응용 프로그램으로 라인을 쓰기도 했다. 배달과 전자상거래, 간편결제 앱과 연동되는 슈퍼앱으로 일본에선 라인 없이 생활할 수 없다. 문제는 일본에 라인을 대체할 만한 토종 플랫폼이 없는데, 라인의 영향력과 의존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 사회에서는 공적 인프라를 언제까지 한국 기업에 의존할 것이냐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집권당에서는 라인이 공공재라며 “라인과 네이버 간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노골적인 목소리도 나온다. ■ 데이터 보호주의에 한국 미래 산업 휘청 일본 정부가 네이버에 지분 관계 정리를 요구하는 배경에는 ‘데이터 주권’에 대한 우려가 있다. 미래 산업인 플랫폼과 인공지능(AI)을 키우려면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해야 한다. 데이터 주권은 플랫폼과 AI에 대한 통제권을 자국 정부와 기업이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외국 기업이 소유하면 자국민의 데이터가 유출돼 경제와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플랫폼 업체 간 국경을 높이고 있는 건 일본만의 일이 아니다. 미국 등 세계 곳곳에서 이른바 자국 데이터 보호주의가 확산하고 있다. 지난 4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중국 동영상 플랫폼 틱톡 강제 매각법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틱톡은 1년 내 미국 기업에 운영권을 매각해야만 미국에서 서비스할 수 있다. 미국 정부가 내세운 이유도 국가 안보였다. 중국도 국가 안보를 내세우며, 미국 기업 애플에 미국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앱을 중국 앱스토어에서 삭제하라고 요구했다. 국산 플랫폼이 없는 유럽연합은 디지털시장법 등으로 자국 데이터를 보호하기 위해 구글 등 해외 빅테크에 대해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주요 국가들이 이른바 디지털 빗장을 내걸고 있는 것은 인공지능 시대가 본격화하면서, 데이터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데이터 통제권을 외국 기업에 뺏기면 경제 주도권을 잃는 것은 물론 자국민 정보의 해외 유출 위험도 있어서다. 해외에서는 데이터 주권이 국익 차원의 문제로 다뤄지고 있는 만큼 한국 정부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광석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한국경제산업연구원 경제연구실장)는 “결과적으로 일본의 자국 데이터 보호주의로 한국의 미래 산업을 놓쳤다”며 “내부적으로 공론화하고 여론전을 벌인 일본과 달리 한국 정부는 눈에 보이는 충분한 대응이 없었다. 외교와 투트랙으로 플랫폼·AI 등의 미래 산업 육성을 위한 정부 차원의 전략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가 한·일 관계 등의 외교 문제는 별도로 풀어가 돼 산업적으로 부당하고 불리한 차별 대우에는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데이터 주권에 대해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주문도 나왔다. 최경진 가천대 법학과 교수(개인정보전문가협회장)는 “한국의 개인정보나 데이터가 알리·테무 등의 외국 기업으로 얼마나 흘러가는지, 어떻게 관리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며 “데이터가 AI 등 미래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에 국민의 정보 주권을 지키는 방향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 특집
- “일본에 사과하라 반복하지 말고 번복하지 말라고 요구해야”(2024. 03. 04 06:00)
- 2024. 03. 04 06:00 정치
- 신각수 전 주일대사 인터뷰 신각수 전 주일본대사가 지난 2월 26일 서울 종로구 ‘법무법인 세종’ 회의실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서성일 선임기자 앞으로 나아가기도, 관계를 끊고 뒤로 물러서기도 어렵다.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한·일관계가 그렇다.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오는 일본발 ‘망언’은 전 국민을 분노케 하는 단골 소재다. 올 7월이면 결정될 사도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시도도 마찬가지다. 멀어졌나 싶지만 현실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지난해 기준, 일본인 232만명이 한국을 찾았고, 한국인 696만명이 일본을 찾았다.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 수 1위가 일본인이고,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 수 1위가 한국인이다. 일반적으로 활발한 교류는 친밀도를 상징한다.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 지속하는 것은 정치의 책임이 크다. 한·일관계는 외교 문제라기보다 양국의 국내 정치 문제다. 보수라고 친일, 진보라고 반일도 아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오부치 당시 총리와 한·일 파트너십을 선언하며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자’고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12년 독도를 방문하며 반일에 불을 지폈다. 대통령이 임기 내에 일본과 관계개선을 시도했다가 반일로 돌아선 사례도 빈번하다. 대일 전략이 장기적 관점과 계획으로 추진되지 못하고 그때그때 흔들렸다는 의미다. 2012년 8월10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독도를 방문해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관계의 부침은 피로감을 만든다. ‘한국으로부터 늘 사과를 요구받는다’고 볼멘소리를 하는 일본뿐만이 아니다. 이제 한국에서도 ‘굳이 한·일관계를 개선해야 하느냐’는 목소리가 나온다. 엔저효과를 이용해 값싸게 여행은 가되, 서로 이해는 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는 여전히 일본과 풀어야 할 쟁점이 많다. 상호 이해를 못 하는데 문제를 풀 수 있을 리가 없다. 감정의 골만 깊어질 뿐이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를 지난 2월 26일 만났다. 신 전 대사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일본 전문가’다. 보수·진보 전문가 모두가 인터뷰를 추천한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에게 한·일 갈등의 시발점부터 해법까지를 물었다. 2010년 간 나오토 일본 총리의 담화에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했다는 것과 식민지배가 잘못됐다는 내용, 반성·사죄가 담겨 있다. 그런데 정작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피로증만 일으켜 사과를 번복하는 빌미를 줘선 안 된다. -한·일 갈등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과거사 문제가 지속해서 한·일관계의 진전을 가로막아 왔다. 지난 ‘잃어버린 10년’도 결국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강제동원 문제 때문에 발생했다. 일본과의 과거사는 정체성 문제이기 때문에 어렵다. 우리 근세사를 논할 때 일본의 한반도 진출과 식민통치 부분을 빼면 많은 부분이 공백으로 남는다. 문제는 일본과의 역사 인식 차이가 너무나 크다는 점이다. 우리는 일본의 식민통치가 불법·부당하다고 보는 반면 일본은 이를 합법·정당하다고 본다. 14년 교섭 끝에 1965년 한·일기본조약 및 4개의 부속 협정을 맺었지만 이때도 인식 차이는 좁혀지지 않고 외교적 타협을 통해 해결했다. 기본조약 제2조를 보면,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임을 확인한다’고 나온다. 이처럼 상호 충돌하는 표현이 들어간 것은 일본은 ‘이미’라는 말을 원했고, 우리는 ‘무효’라는 말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일본은 대한제국과 맺은 조약 및 협정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조약 또는 1965년 기본조약 이후 효력을 상실했다고 주장한다. 즉 그 이전 식민지배는 합법이란 것이다. 반면 우리는 처음부터 무효라는 입장이다. 이 문제는 국교 수립 당시 일본으로부터 받은 자금 8억달러(무상 3억달러·유상 2억달러·은행차관 3억달러)의 성격과도 연결된다. 불법 행위에 대한 배상이냐, 청구권 청산자금이냐의 문제다. 또 청구권 협정 제2조에 나오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문항 역시 개인청구권 소멸에 관한 인식을 두고 갈등을 만들고 있다.” -역대 정부의 인식은 어떤가. “적어도 2018년 강제동원 문제에 관한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에는 피해 보상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 정부의 입장이 같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청구권 협정으로 소멸됐다는 것이다. 1970년대와 2007년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신청을 받아 예산으로 보상했다. 2005년 민관합동위원회에서 검토하고 발표한 보고에서도 1965년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되지 않은 것은 일본군위안부, 원폭피해자, 재사할린 한인 문제로 특정했다. 하지만 국내 사정으로 정부부터 일관된 입장을 보이지 못했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초기 일본에 더 이상 과거사를 묻지 않겠다고 했다가 나중에 번복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국민과 피해자들부터 납득을 하지 못했다. 결국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됐다.” -국민들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것 아닌가. “일본에 관해서는 반일감정 때문인지, 객관적·균형적 교육이 잘 안 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한·일수교 이후 일본은 한국 경제에 자본과 기술 측면에서 많은 기여를 했다. 현대와 미쓰비시의 관계나 포스코와 신일본제철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지금 한국 내 대표 산업들은 과거 일본과의 협력에서 시작한 것이 많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분은 일정한 기여를 했다고 인정해야 하는데 이런 부분에서 인색했던 것 같다. 유사한 사례는 또 있다. 1986년에 주일대사관 경제과장을 했다. 전두환 정부 초기 경제가 어려워지자 안보경협이란 논리로 일본에 협력을 요청했다. 우리가 북한 위협을 막아주니 일본이 경제협력을 해달라는 것이다. 그때 일본에 100억달러를 요구해 40억달러를 받았다. 이중 ODA(공적개발원조) 사업으로 서울시 하수종말 처리장 건설이 있었다. 당시 일본 외무성 담당과장이 일본에도 없는데 한국에 하수종말 처리장을 짓는다고 했다. 이런 사실을 우리 국민 중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간 나오토 전 일본 총리가 2010년 8월 10일 도쿄의 총리 관저에서 한·일병합 100년을 맞아 담화를 발표한 후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일본의 과거사 사과 문제는 어떻게 보나. “과거사에 대한 사과와 반성은 1983년 전두환 전 대통령 방일 때부터 30여 년에 걸쳐 천황 발언이나 총리 담화 형태로 나왔다.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2010년에는 간 나오토 일본 총리의 담화 형식으로 나왔다. 당시 정부가 많은 노력을 기울여 간 총리 담화를 끌어냈다. 정작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한 번 읽어보라. 구체적인 내용까지 들어가 잘 만들어졌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했다는 것과 식민지배가 잘못됐다는 내용이 그대로 나온다. 반성과 사죄가 담겨 있다. 과거사 문제에 접근하는 한국의 전략은 이제 변화가 필요하다. 더 이상 일본에 사과를 반복적으로 요구할 것은 아니다. 그보다 이미 여러 번의 사과를 통해 집적된 것을 잊지 말고, 번복하지 말라고 해야 한다. 감정적으로 ‘사과가 왜 이 수준밖에 안 돼’ 하는 것은 더 이상 일본과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는 것밖에 안 된다. 이러한 요구만 반복한 결과 일본에서 과거사 피로증이 생기고, 오히려 사과 수준도 후퇴하는 빌미를 줬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인가. “우리가 과거를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이는 꼭 필요하다. 우리가 ‘왜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고’, ‘어떻게 해서 독립했는지’ 등을 스스로 성찰할 기회는 피해자 의식을 탈피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어 현재를 발전시켜야만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 일본이 과거에 어떤 나쁜 짓을 했는지 기억하되, 우리는 무엇 때문에 국권을 빼앗겼는지 객관적이고 균형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일본은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죄의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역사적 사실을 부정·왜곡하는 행위를 멈춰야 한다.” -일본이 문제를 만드는 측면도 있지 않나. 올 7월 일본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 문제가 걸려 있다. “사도광산 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취약해진 일본을 ‘강한 일본’으로 바꾸려는 일본 정치권의 역사수정주의 기조와도 연결된다. 일본 우파들은 메이지유신과 그 이후 근대화 과정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생각한다. 이를 일본 국민에게도 주입해 침체한 국내 분위기를 고조시키겠다는 의도가 있다. 경제산업성이 주도하는 근대산업문화유산의 유네스코 등재는 이러한 계획의 일환이다. 또한 침체한 지역을 강화하려는 자치단체들의 욕구도 작용한다. 다만 이런 기조에 일본 각 지방이 모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같은 구역 내에 A지역이 세계유산이 될 경우 소외될 것을 염려하는 B지역이 있다. 이 문제는 일본 내에서도 그리 단순한 사안이 아니다.” -정부 대응이 필요하지 않나. “우리는 사실에 기반해서 다퉈야 한다. 사도광산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한 것은 아니라고 하거나 일본이 추진하고 있는 1910년 이전 역사만 잘라서 등재할 수는 없다고 다퉈볼 수 있다. 궁극적으로 군함도처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더라도 강제동원 역사를 넣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군함도 관련해서는 일본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는데 우리가 일본을 국제 사회에서 약속 위반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유리한 측면이 있다. 통상적으로 유네스코는 분쟁이 있는 후보지는 당사국 간 합의를 우선하라고 한다. 유네스코 논의 과정에서 일본의 군함도 관련 합의 위반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특히 식민지 문제에 관심이 많은 글로벌 사우스(제3세계 혹은 개발도상국)의 협력을 얻는 방안을 추진해볼 수도 있다. 국제사회 분위기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협상의 유불리가 결정되므로 외교적 노력이 필요하다.” 신각수 전 주일본대사가 지난 2월 26일 서울 종로구 ‘법무법인 세종’ 회의실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서성일 선임기자 -이를 위해선 사실관계에 대한 자료나 연구가 필요한 것 아닌가. “안타깝지만 부실하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증언도 얼마나 확보했는지 모르겠다. 일본의 사과를 외치기만 했지 먼지 쌓인 문서고로 달려가 그 당시 자료를 찾고 역사적 사실을 연구했는지 돌아봐야 한다. 없는 것도 만들어서 대비해야 하는데 그나마 있던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도 없애지 않았나. 역사를 놓고 다투려면 기본적으로 사료를 찾아 사실을 규명하고, 그것에 따른 역사서술을 해야 비로소 설득력을 갖게 된다. 동북아역사재단 외에 한·일과거사 관련 연구와 희생자 추모 기능을 겸한 기관을 만들어 연구·교육·추모 작업을 중장기적으로 실행해 나갔으면 좋겠다. 이스라엘은 600만 유대인 학살 조사 기관이자 자료 박물관으로 야드바셈을 운영하고 있다. 이런 기관이 증거자료를 확보하고 있으니 유대인 학살에 대한 반론이 나오기 어렵다. 이런 작업은 보수 정부에서 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이렇게까지 해서 굳이 한·일관계를 개선해야 하느냐’는 목소리도 있다. “지난 30여 년간 북핵 문제에 초점을 맞춘 외교를 하다 보니, 세계가 얼마나 빠르게 변하고 있는지 잊은 것 같다. 우리가 놓인 외부 환경이 어려워졌다. 미국이 만들고 지탱해온 자유주의 국제질서하에서 우리는 산업화·민주화·국제화·정보화까지 달성했다. 그런데 그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중국은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수정주의 세력으로 변하고 있다. 중국 주도의 수직적 국제 질서를 원한다. 중국의 동아시아 내 위상은 곧 나머지 아시아 전체를 능가할 전망이다. 미국 역시 트럼프와 같은 지도자가 나타나며 신고립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다. 북한은 핵무장을 하고 선제공격을 위협하고 있다. 결국 평화와 번영을 지속하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유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끼리 협력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한·일이 협력한다면 중국의 일탈을 견제하고 미국의 관여를 확보해 북한을 억지할 수 있다. 이는 우리의 생존 문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7월 리투아니아 빌뉴스의 한 시내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한일 정상회담을 하기 전 악수하고 있다./대통령실사진기자단 -바람직한 한·일관계는 어떤 것인가. “세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는 덧셈 외교를 해야 한다. 한·일은 얼마든지 윈윈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지 않나. 공동의 이익 역시 자유주의 질서 유지에 있다. 협력의 잠재력을 현실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는 축적의 외교를 해야 한다. 과거사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그동안 쌓은 것들을 부수고 또다시 쌓고 하는 것은 서로 끝없는 손해를 자초하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앞으로 나아가는 외교를 해야 한다. 시대가 바뀌었다. 초불확실성·초불안정성·초변동성이 지배하는 포스트 탈냉전 시대에 접어들었다. 여기에 다중위기까지 빈발하고 있다. 각자도생하며 혼자서 살 수 없는 시대다. 한·일은 앞으로 나아가는 외교에서 중요한 전략적 파트너가 될 수 있다. 내년은 한·일수교 60주년이다. 이순(耳順)을 맞는 한·일이 역지사지하면서 윈윈의 협력을 쌓아가는 새로운 60년을 열어가야 할 때다.”
- 표지 이야기
- [우정이야기]미국·일본 재외동포에 국산 김치 보내세요(2023. 11. 22 07:00)
- 2023. 11. 22 07:00 경제
- 김치 포장을 위한 캔 용기 /우정사업본부 제공 외국에 장기체류 중이거나 영주권을 취득한 대한민국 국민(재외국민) 또는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했던 사람 및 그의 직계비속(외국국적동포), 즉 재외동포는 지난해 말 기준 181개국 708만1510명이었다. 재외동포청은 매 홀수 연도마다 재외공관을 통해 재외동포현황을 파악하고 있다. 2년 전과 비교하면 재외동포 수는 3.3%(24만3633명) 줄었다. 재외국민은 2021년 말보다 1.73%(4만3552명) 감소한 246만7969명, 외국국적동포는 4.15%(20만81명) 줄어든 461만3541명이었다. 재외동포가 가장 많이 거주하는 상위 10개국은 미국(261만5419명), 중국(210만9727명), 일본(80만2118명), 캐나다(24만7362명), 베트남(17만8122명), 우즈베키스탄(17만4490명), 호주(15만9771명), 러시아(12만4811명), 카자흐스탄(12만1130명), 독일(4만9683명)이다. 베트남이 2년 전보다 2만1792명 늘면서 순위가 8위에서 5위로 높아졌다. 러시아는 4만3715명 줄어 6위에서 8위로 낮아졌다. 미국과 일본에 사는 재외동포에게 최근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우정사업본부는 지난 11월 13일부터 우체국에서 국제우편(EMS)으로 미국 전 지역에 김치를 발송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김치 해외 배송은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항공 운송 지연 사태로 2020년 11월에 중단됐다. 이후 우정사업본부는 항공사와 협의해 지난 11월 6일부터 일본 전 지역으로 김치 배송을 확대한 데 이어 미국 전 지역으로 배송 가능 지역을 넓혔다. 단 일본 오키나와, 미국 알래스카와 하와이 지역은 제외된다. 두 국가 모두 대한항공 항공기를 이용해 김치를 배송한다. 발송인은 운송 과정에서 김치가 터지지 않도록 내용물을 비닐로 포장한 후 전용 캔에 70% 정도만 채우고 덮개를 완전히 밀봉해 접수해야 한다. 스티로폼과 플라스틱 용기는 접수하지 않는다. 미국과 일본 현지에서도 과거와 달리 김치를 구할 수 있는 경로가 많아졌지만, 한국에서 만든 김치가 생각나는 재외국민이나 외국국적동포라면 이용해볼 만하다. 다른 국가들은 어떨까. 재외동포가 두 번째로 많은 중국은 2020년 11월부터 포장상태와 무관하게 김치 접수를 전면 중단했다. 성수기 항공 운송편 부족 등을 이유로 댔다. 캐나다, 베트남 등 다른 국가도 김치를 접수하지 않고 있다. 우정사업본부는 2016년 2월에 ‘베트남 등 동남아 국가 김치 발송 시 유의사항’을 안내했다. “더운 기후 때문에 배송 중 발효돼 용기가 파손되고 내용물이 흘러나와 다른 우편물까지 훼손되는 사고가 빈번하다”면서 “30~40%의 여유 공간을 두고 이중비닐 포장 후 플라스틱 또는 캔 용기에 포장해 달라”고 당부했다. 김치 접수 자체를 하지 않는 국가가 있는 만큼 국가별 발송조건을 확인해 달라는 공지도 했다.
- 우정이야기
- “반대해도 방류” 체념…일본 민주주의의 위기(2023. 09. 15 10:58)
- 2023. 09. 15 10:58 국제
- 일본 도쿄전력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 AP연합뉴스 일본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오염수 방류를 하루 앞둔 지난 8월 23일 현지 시민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후쿠시마를 찾았다. 일본 정부가 전날 오염수 방류 일정을 기습 발표한 뒤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에서는 반대 여론이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후쿠시마의 분위기는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후쿠시마 도심에는 오염수 방류와 관련된 플래카드 하나 보이지 않았고, 시민들 또한 오염수 방류 자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시민들의 침묵이 ‘찬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방법을 써도 정부의 결정을 바꿀 수 없다는 체념에 가까운 침묵이었다. 방류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의 의견을 묻는 절차는 생략됐다. 어민들의 동의도 끝까지 얻지 못했다. 그러나 정부의 결정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자민당의 독주를 막을 야당의 힘은 지리멸렬했고, 여당은 각종 프로파간다를 동원해 여론을 바꿔나갔다. 일각에서는 오염수 방류 결정 방식이 일본 민주주의 위기를 드러냈다고 우려했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책을 결정하면 미디어가 홍보하고 결국 여론이 움직이는 방식이 일본에선 마치 하나의 공식처럼 굳어져 가고 있었다. 반응 없는 정부…반대를 포기한 시민들 후쿠시마 도심에서 만난 시민들은 정부에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특히 후쿠시마의 젊은이들은 자포자기의 심정을 표현했다. 후쿠시마에서 나고 자란 사토 도오루(35)는 “어차피 반대하더라도 정부는 방류를 강행했을 것”이라며 “우리가 뭐를 해도 정부는 반응도 없고 변화도 보이지 않아왔다”고 체념 섞인 반응을 보였다. 오염수 방류로 생계에 직접적인 위협을 받는 어민과 상인들은 그러나 정부의 기습 방류 결정에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후쿠시마에서 식재료 도매업을 하고 있는 콘노 도시유키는 “정부가 방류하겠다고 예고를 해왔지만, 갑작스럽게 이틀 전에 일정을 발표한 것에 사실 쇼크를 받았다”면서 “하지만 후쿠시마 사람들은 원전 문제에 대해 입 밖에 잘 꺼내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을 ‘비(非)국민’으로 몰아가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정치와 관련된 이야기는 쉽게 나누지 않는다는 하소연이었다. 후쿠시마대 전·현직 교수들이 지역민들의 의견을 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결성한 ‘후쿠시마 원탁회의’ 사무국장인 하야시 군페이 후쿠시마대 교수는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내지 않는 이유에 대해 “원전 사고 이후 10년 넘게 고통을 받은 주민들은 정부·도쿄전력과 싸우기엔 너무 지쳐버린 상태”라고 전했다. 또 “‘오염수 방류가 위험하다’는 말을 꺼내면 불안해지는 심리가 더 커진다고 생각해 반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며 “일부 주민들은 정부 없이 복구는 꿈도 꿀 수 없기 때문에 포기하는 심정”이라고 덧붙였다. “정부 프로파간다가 여론을 바꿨다” 일본 정부는 대대적인 캠페인으로 여론을 움직였다. 2021년 4월 해양 방류 방침을 결정한 이후 일본 정부는 ‘오염수 안전 홍보’에 주력했다. 정부의 오염수 안심 캠페인은 신문, 방송 등 미디어는 물론 전국 학교에서도 이뤄졌다. TV·신문 광고는 끊임없이 “알프스(ALPS·다핵종제거설비)를 거친 오염수는 안전하다”는 내용을 되풀이했고, ‘오염수’ 대신 ‘처리수’를 공식용어로 사용했다. 정부의 프로파간다는 여론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아사히신문이 2020년 11~12월 전국 유권자 2126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 방류 방안에 대해 55%의 응답자가 ‘반대’한다고 답했다. ‘찬성’한다는 응답률은 32%에 그쳤다. 그러나 정부가 오염수 안심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하자 찬반이 비등해졌다. 현재는 아예 찬성이 압도적이다. 현지 공영방송 NHK가 지난 9월 8~10일 전국 18세 이상 시민 1236명을 대상으로 전화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오염수 해양 방류 대응에 대해 ‘타당하다’가 66%, ‘타당하지 않다’가 17%로 집계됐다. 후쿠시마에서 만난 지역 저널리스트 마키우치 쇼헤이는 주요 매체들이 오염수의 영향과 앞으로 생길 문제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대신, 오염수가 안전하다는 내용만 전해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시다 후미오 정권이 오염수 안심 캠페인에 쏟아부은 돈과 항목을 일일이 조사한 결과 유력매체인 요미우리신문도 지난해 2억5000만엔(22억7000만원)을 받고 오염수 안심 관련 사업을 전개한 사실을 찾아냈다며 “오염수 안심 캠페인 사업을 벌이고 있는 신문사가 오염수의 위험성을 파헤칠 가능성이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전쟁 가능 국가 만들기 나설 것” 우려도 일본 민주주의가 흔들리고 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후쿠시마 주민 3824명과 함께 원전 피해 소송을 이끌었던 나카지마 다카시 소송 단장은 “기시다 총리가 지난 8월 21일 일본 전체 어민을 대표하는 전국어업협동조합연합회(전어련)의 사카모토 마사노부 회장 등을 만났을 때 ‘몇십 년이 걸려도 책임지겠다’는 말만 되풀이했을 뿐 ‘방류하겠다’는 말은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면서 “전어련이 끝까지 반대 입장을 전달했는데, 바로 다음날 방류를 발표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민주주의적 단계를 모두 무시한 기시다 정부는 ‘소프트’한 독재 형태를 보이고 있다”며 “이를 방관하면 ‘하드’한 독재로 나아갈 것”이라고 우려했다. 마키우치는 프로파간다를 통해 오염수 방류 강행에 성공한 자민당이 같은 방식으로 ‘전쟁 가능 국가 만들기’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지난 6월 의회에서 통과된 ‘방위장비품 생산 기반법’의 계획서에는 ‘방위산업의 매력화’ 항목이 포함돼 있다. 마키우치는 “말 그대로 전쟁산업이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현재 대다수의 일본 국민은 전쟁을 반대하지만, 정부가 ‘후쿠시마를 부흥시켜야 한다’고 했던 논리를 그대로 적용해 ‘전쟁은 국가를 위해 좋은 것’이라는 프로파간다를 내건다면 오염수 방류 사태와 마찬가지 결론으로 귀결될 것”이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일본 정부의 오염수 방류 후폭풍 대응 방식에 전체주의 악몽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다. 앞서 오염수 방류 이후 중국이 일본산 수산물 수입 규제를 강화하자, 우파는 ‘일본 생선을 먹고 중국을 이기자’라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논픽션 작가 하야카와 타다노리는 “중국의 이해를 얻지 못한 외교적 실책을 ‘피해를 본 불쌍한 일본’으로 바꿔치기하고, 중국을 이기겠다는 말로 배외주의와 국가주의를 부추기고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 [주간 舌전]광복절 축사에 “일본은 이제 파트너다”(2023. 08. 18 10:47)
- 2023. 08. 18 10:47 정치
- 윤석열 대통령 /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일본은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파트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리는 한·미·일 정상회의를 두고는 “한반도와 인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할 3국 공조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날 윤 대통령은 “독립운동은 자유와 인권, 법치가 존중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드는 건국 운동이었다”며 “공산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다”고도 말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광복절 행사장에 앉아 있었는데 제가 지금까지 참석했던 어떤 광복절 행사보다 길고 힘들었다”며 “자유와 인권을 공유하는 일본과 군사협력 강화를 선언하는 경축사가 낭독됐다. 이때 일본 정치권은 대거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참으로 참담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민주당의 경축사 비판을 두고 “잘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아니다”며 “대한민국 주권 회복을 위해 목숨과 가족까지 다 희생하셨던 선열들의 뜻을 받들어 자유와 인권이 보장된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대통령의 경축사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 주간 舌전
- [이기환의 Hi-story](96)일본인의 석탑 반출, 총독부가 막은 까닭(2023. 08. 11 15:03)
- 2023. 08. 11 15:03 문화/과학
- 1911년 9월 강원 원주 법천사터에서 반출돼 서울 명동 무라카미 병원으로 옮겨진 지광국사탑. 이 탑은 일본인 사업가(와다 쓰네이치·和田常市)를 거쳐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는 남작 후지타 헤이타로(藤田平太郞)에게 3만1500원이라는 거액에 팔린 뒤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돌아왔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원주-서울(명동)-서울(남창동)-일본 오사카-서울(경복궁)-대전(국립문화재연구원)-원주. 무려 1975㎞를 떠돌다가 ‘112년 만의 귀향’을 이룬 문화유산이 있습니다. 강원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입니다. 예전엔 ‘미인박명’ 소리를 들었던 문화유산입니다. 탑이 지극히 아름다워 ‘미인’이라 했습니다.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시대에 활약한 왕사인 지광(해린·984~1070)의 사리와 유골을 봉안한 승탑인데요. 독특한 구조와 화려한 조각, 뛰어난 장엄 장식 등이 돋보인다는 평을 받고 있죠. 이 탑은 그러나 ‘박명’ 소리도 들었습니다. 일본인에 의해 오사카로 밀반출된 이후 이리저리 떠도는 신세가 된 것은 물론이고요. 한국전쟁 때는 미군의 폭격으로 무려 1만2000조각으로 박살 나는 비운을 맞거든요. 그래서 ‘미인박명’이라 했던 겁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등이 10여 차례에 걸친 보존처리 및 복원작업을 마무리 짓고 이번에 원래 자리인 강원 원주 부론면 법천사터로 옮겼습니다. 미인박명의 지광국사탑 이런 파란만장한 역정을 겪은 국보 석탑이 지광국사탑 1기만이 아닙니다. 생각할수록 속 터지는 경천사 10층 석탑은 물론이고요. 기막힌 산청 범학리 3층 석탑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먼저 지광국사탑 이야기를 잠깐 해보죠. 때는 바야흐로 1911년 9월이었습니다. 강원 원주 부론면 법천사터에 한 일본인(모리무라 타로·森村太郞)이 찾아옵니다. 모리무라는 땅주인(정주섭)과 흥정을 벌여 이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지광국사탑을 사들이는데요. 이 탑은 곧 해체돼 서울의 일본인 사업가(와다 쓰네이치·和田常市)에게 팔리고요. 와다는 이 탑을 명동 무라카미(村上) 병원을 거쳐 자신의 집(남창동) 정원으로 옮겨두었는데요. 다시 이 탑은 일본 오사카(大阪)에 거주하는 남작 후지타 헤이타로(藤田平太郞)에게 3만1500원이라는 거액에 팔립니다. 결국 1912년 5월 31일 오사카로 반출되는데요. 그런데 그해 10월쯤이었습니다. 탑의 일본 본토 반출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재임 1910~1916)가 앙앙불락합니다. 데라우치는 “폐사지는 원래 국유지로 봐야 하고 그 폐사지에 있는 탑 역시 국유물”이라면서 모리무라와 와다 등을 구류에 처하고 소환하는 등 수사에 나섰습니다. 모리무라에게 탑을 사 일본의 후지타에게 되판 와다는 데라우치 총독의 서슬에 전전긍긍하죠. 결국 와다는 일본의 후지타에게 팔았던 탑을 다시 사서 총독부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사건을 일단락시키는데요. 이때가 1912년 12월 6일쯤입니다. 이 탑은 1915년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조선물산공진회의 전시장(경복궁)을 꾸미는 장식물로 활용됐는데요. 공진회가 끝난 뒤에도 지광국사탑 등은 그대로 경복궁 안에 놓여 있었고요. 그러다가 한국전쟁의 와중(1950)에 폭격(유탄)을 맞아 1만2000개로 산산조각이 난 겁니다. 이후 10여 차례 정밀복원 끝에 원모습을 찾게 된 것이고요. 일제강점기 파란만장한 역정을 겪은 국보 석탑 3기. 경천사 10층 석탑과 법천사 지광국사탑은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귀환하는 우여곡절을 겪었고, 범학리 3층 석탑은 단돈 100엔에 팔린 뒤 일본으로 반출되기 전에 압수됐다./국립중앙박물관·국립문화재연구소·국립진주박물관 제공 가토 기요마사가 군침 흘린 걸작 탑 지광국사탑 스토리는 1907년 일어난 경천사지 10층 석탑 강탈사건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입니다. 그 강탈의 역사 또한 엄청 뿌리가 깊습니다. 경천사탑 사건이 국내외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던 1907년 4월 23일 대한매일신문은 일본의 오사카 아사히신문(大阪 朝日新聞)의 보도를 인용했는데요. 이런 내용입니다. “예부터 조선에 유명한 탑이 둘 있었다. 하나는 서울 종로의 원각사터에, 나머지 하나는 개성 풍덕군의 경천사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그 탑들을 일본에 가져오고 싶었다’는 설이 다나카 궁내대신에게 들어가…. 그중 하나를 일본으로 옮겨오면 비할 데 없는 진귀품이 될 것으로 여겨….”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임진왜란과 가토 기요마사까지 소환되고, 궁내부대신(장관) 다나카가 등장하네요. 이게 무슨 사건인지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예부터 개성에서 서남쪽으로 50리쯤 떨어진 부소산 기슭의 옛 절터(경천사터)에는 특이한 탑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대리석으로 조성된 경천사 10층 석탑입니다. 1층 옥개석 밑에 새긴 발원문에는 “(원나라 간섭기인) 1348년 원나라 황실을 위해 조성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때문에 ‘원나라풍’이 경천사탑에 반영돼 있습니다. 탑의 기단부에는 사자 같은 동물과 꽃, 현장법사와 손오공이 등장하는 서유기의 내용, 나한상을 조각했고요. 탑신부 1~4층엔 각종 불회도와 여래상, 호법신을 가득 채웠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인물이 살아 있는 듯하고 정교하게 만든 것이 천하에 둘도 없다”고 기록했어요. 1902년 일본 도쿄대(東京大) 교수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1867~1935)가 조선 전역을 답사하며 문화유산 전반을 조사했습니다. 세키노는 그 결과물을 토대로 1904년 <조선건축조사보고서>(동경제대 공대 학술보고 6호)로 펴냈는데요. 이 보고서는 당시 한국문화재에 눈독을 들이는 자들에게 아주 유용한 정보제공서가 됐습니다. 지광국사탑 부재가 전시될 강원 원주 법천사지 유적전시관. 복원 위치가 확정될 때까지 상설 전시할 계획이다./국립문화재연구원 제공 궁내부대신의 경천사탑 강탈사건 세키노의 보고서를 보고 “이거다!” 하며 군침을 흘린 자가 있었는데요. 그자가 바로 일본의 궁내대신인 다나카 미쓰야키(田中光顯·1843~1939)였습니다. 다나카는 300년 전 가토 기요마사가 눈독을 들였다는 ‘전설적인 탑’ 두 기(경천사탑과 원각사탑)를 보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마침 다나카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907년 1월 순종 황제의 결혼 가례에 일본 정부의 특사 자격으로 조선을 방문할 기회를 얻은 겁니다. 다나카가 지목한 약탈대상은 경천사탑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서울 시내 한복판에 서 있는 원각사탑보다는 지방의 폐사지에 덩그러니 놓인 경천사탑이 ‘쉬운 목표’였겠죠. 서울을 방문한 다나카는 골동품상을 운영하던 곤도 사고로(近藤佐五郞)에게 경천사탑의 무단반출을 지시했습니다. 그때가 1907년 2월 4일이었습니다. 곤도가 고용한 일본인들과 인부들은 다짜고짜로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면서 탑을 140조각으로 해체했습니다. 그런 뒤 10여 대의 달구지로 실어갔습니다. 그 커다란 탑을 해치우는 데 하루 밤낮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코 베어 가는 식으로 엄청난 경천사탑을 약탈당한 겁니다. 이 경천사탑 약탈은 바람 앞 등불 같은 대한제국의 운명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죠. 눈앞에서 멀쩡히 서 있는 나라의 보물(탑)을 빼앗기고도 속수무책 바라만 봐야 했으니까요. 강탈사건을 고발한 두 외국인 그런 꼴을 도저히 볼 수 없다는 듯 분연히 일어난 두 분이 있었습니다. 두 분 다 외국인인데요.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한국명 배설·1872~1909)과 미국인 호머 헐버트(1863~1949)였습니다. 헐버트는 1886년 왕립영어학교(육영공원) 교사로 초빙된 이후 한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인물입니다. 천인공노할 경천사탑 강탈 소식을 전해 들은 헐버트는 현장으로 달려가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진까지 찍었습니다. 헐버트는 자신의 취재내용을 대한매일신보에 제보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영국 언론인인 베델이 창간한 신문이죠. 대한매일신보는 3월 7일 이 충격적인 뉴스를 특종 보도합니다. “일본의 특사 다나카 자작(궁내대신)의 흉계로 무기를 가진 일본인들이 경천사탑을 급습해 탑을 해체한 뒤 실어갔다.” 대한매일신보는 정말 집요했습니다. 6월까지 3개월 동안 경천사탑 약탈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했습니다. “고종 황제의 허락을 얻었다는 것은 거짓”(4월 13일) “석탑을 빨리 되돌려보내 잘못을 사죄하라…. 일본으로선 역사의 무한한 수치가 될 것…”(6월 5일)이라는 등 끈질기게 파고들었습니다. 헐버트 또한 적극 나섰습니다. 자신이 발행하는 코리아 리뷰는 물론이고, 일본 고베(神戶)의 저팬 크로니클 1907년 4월 4일자에 경천사탑 탈취 사실을 기고했습니다. 뉴욕포스트 등에 이 천인공노할 사건의 전말을 기고해 미국 내 여론을 환기시켰고요. 이 문제를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까지 끌고 갔습니다. 고종의 밀사로 파견된 헐버트는 1907년 7월 헤이그 평화클럽 연설에서 일본의 야만성을 폭로하면서 경천사탑 약탈사건을 거론했습니다. 데라우치가 조선문화재를 사랑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일본 내 여론도 다나카에게 등을 돌렸고요. 마지막 통감 및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2대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916~1919)도 다나카를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경천사탑은 급기야 1918년 11월 15일 무자비하게 해체돼 포장된 바로 그 상태 그대로 반환됩니다. 11년 9개월 만에 서울에 도착한 탑재의 포장을 뜯어본 이들은 참담한 몰골에 고개를 돌려야 했습니다. 해체된 탑부재는 당대의 기술로는 복원조립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가 심했습니다. 결국 경천사탑의 부재는 경복궁 회랑에서 40여 년간 방치될 수밖에 없었고요. 급기야 1960년 이후 2차례 수리 및 재수리를 거쳐 복원돼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홀에 전시 중입니다. 경천사탑과 지광국사탑의 일본 반출 및 귀환 스토리를 할 때마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우선 한가지 궁금증이 들죠. 일본인들은 왜 그토록 부피가 크고 무겁고, 옮기기에도 번거로운 조선의 탑을 뜯어갔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정원 꾸미기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은 조선의 폐사지에 서 있는 탑과 불상에 군침을 흘렸습니다. 국립진주박물관에 있는 경남 산청 범학리 3층 석탑. 1941년 제자리를 떠나 대구로 반출된 지 77년 만인 2018년 제 모습으로 복원돼 국립진주박물관으로 돌아왔다./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그러자 보다 못한 조선총독부가 나섰습니다. 총독부는 ‘경천사탑’(1907년 2월) 및 ‘지광국사탑’(1911년 9월)의 일본 반출 사건이 잇달아 터지자 각 지방에 다음과 같은 ‘관통첩’(행정지침서)을 내립니다(1911년 11월 29일). ‘폐사지 및 빈터에 놓여 있는 석탑과 불상, 비석 등은 국유물이므로 매매 및 반출 등을 금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한가지 고개를 갸웃거릴 이야기가 있죠. 아시다시피 1·2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와 하세가와는 1910년대 무단통치의 원흉으로 꼽히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왜 경천사탑과 지광국사탑의 귀환에 적극 나섰을까요. 뭐 그자들의 행태를 그렇게 가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 데라우치나 하세가와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영영 남을 것으로 철석같이 믿었겠죠. 그러니 굳이 ‘식민지 조선’의 문화유산이 일본 본토에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한국의 문화유산은 본인이 총독으로 다스리는 ‘식민지 조선’에 있어야 했던 겁니다. 그래야 식민지 통치의 정당성도 확보하고, 한국인들의 불만도 무마할 수 있었으니까요. 100엔에 바꾼 국보탑 지금 국립진주박물관 경내에 서 있는 경남 산청 범학리 3층 석탑은 어떨까요. 통일 신라 양식을 계승한 범학리 석탑은 정교한 부조상이 새겨져 국보로 지정(1962)된 걸작입니다. 섬장암(閃長岩·반짝이는 장석으로 된 암석)을 다듬어 만든 유일한 석탑이기도 하죠. 이렇게 희귀암석으로 만든 범학리 3층 석탑의 역정 또한 파란만장했습니다. 1940년 11월 무렵이었는데요. 경남 진주에 살던 정정도라는 인물이 범학리를 찾아 땅주인과 마을 주민들을 꼬드겼습니다. 무너져 방치된 석탑 1기를 지목하며 “석탑을 팔라”고 요구한 겁니다. 그러나 아까 언급했듯이 폐사지나 공터의 탑비 및 불상을 매매하는 것은 불법에 속했습니다. 주민들이 주저하자 정정도는 마을회관 건립비로 100원(엔)을 제시했습니다. “매각에 동의하지 않아도 좋다. 석탑의 반출을 묵인해주기만 하면 된다”고 꾀었습니다. 주민들은 솔깃했습니다. ‘정식매매는 꺼림칙하지만, 회관 건립비라면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었겠죠. 결국 범학리탑은 마을주민의 방조 묵인 아래 이듬해인 1941년 1월 진주를 거쳐 대구로 반출됩니다. 석탑은 대구의 골동품상인 오쿠 지스케(奧治助)에게 매각됐는데요. 경북지사가 조선총독부에 보낸 보고서는 ‘석탑의 평가액=1만원’이라 했습니다. 오쿠-정정도 같은 거간꾼이 평가액의 100분의 1 가격으로 ‘후려쳐’ 국보급 석탑을 수중에 넣은 셈입니다. 이렇게 오쿠의 수중에 들어간 범학리 3층 석탑은 대구 동운정(동인동) 이소가이(磯貝) 제면공장 구내 공터에 해체된 채 놓여 있었습니다. 4개월 뒤(1941년 5월) 석탑의 불법 반출 사실이 적발됐고요. 석탑 부재들도 회수됐습니다. 일본 반출 미수사건 연구자들은 정정도-오쿠 같은 거간꾼 위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다고 입을 모으는데요. 오쿠를 사주한 자로 지목된 인물은 바로 그 악명높은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70~1964)입니다. 오구라는 대구에서 부동산 투기로 떼돈을 번 뒤 전기사업에 뛰어든 재력가인데요. 가격 불문, 장르 불문으로 닥치는 대로 한국문화재를 사들인 큰손으로도 악명이 높았죠. 그가 수집한 유물 중 금동관모와 새날개모양관식, 금동신발 등 8건은 일본 중요문화재로, 견갑형 동기와 고운무늬거울(정문경) 등 31건은 일본 중요미술품으로 각각 지정됐답니다. 국립도쿄(東京)박물관은 오구라가 기증한 한국문화재 1030점 등을 이른바 ‘오구라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런 인물이니만큼 범학리 석탑의 반출을 사주한 유력한 용의자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렇든 저렇든 만약 범학리 석탑의 반출이 조기에 적발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 오구라든 누구든 그 탑을 일본으로 가져가 제집 정원을 꾸미는 데 장식용으로 사용했을 겁니다. 어쨌든 대구 제면공장 공터에서 극적으로 회수된 석탑은 서울 경복궁(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겨졌고요. 해방 후인 1946년 재건해 국보로 지정됐다가(1962), 1994년 경복궁 복원정비 때 다시 17개 부재(조각)로 해체돼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는 신세가 됐죠. 그러다 2018년 국립진주박물관 경내에 옮겨 지금 이 순간 전시되고 있습니다. 물론 원위치(산청 범학리) 이전이 이상적이었겠죠. 범학리 현장은 밭농사를 짓는 개인소유의 땅이고, 물이 차는 지형이랍니다. 때문에 박물관 야외전시장이 차선책이었답니다. 어떻습니까. 국보 석탑 3기가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문자 그대로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었습니다. 그 3기 중 2기(경천사탑·범학리탑)는 이런저런 이유로 박물관 홀 안(경천사탑)과 야외(범학리 석탑)에 복원·전시 중인데요. 완전한 귀향은 아니었죠. 이번에 보존처리 및 복원작업이 끝난 지광국사탑은 원위치(원주)로 옮겨갔네요. 명실상부한 112년 만의 귀향입니다. 아직 어떻게, 어느 위치에 전시할지는 결정하지 않았다는데요. 마무리까지 모두에게 축복받는 이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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