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총 116 건 검색)
- [신간] 기술은 자본주의를 어떻게 바꿨나(2024. 09. 11 06:00)
- 2024. 09. 11 06:00 문화/과학
- 테크노퓨달리즘 야니스 바루파키스 지음·노정태 옮김·21세기북스·2만4000원 빅테크 기업의 기술은 편의를 제공하는 혁신, 인공지능(AI)은 충직한 비서라고 광고한다. 하지만 빅테크와 그들이 만든 디지털 혁명이 정말 편의만 제공할까? 저자인 전 그리스 재무장관 야니스 바루파키스는 “빅테크는 플랫폼으로 봉건제의 영지를 꾸리고 알고리즘으로 우리를 자발적 데이터 농노로 만들어 새로운 봉건주의 시대의 영주가 되었다”고 말한다. 책 제목 <테크노퓨달리즘>(Technofeudalism)은 기술을 뜻하는 테크(Tech)와 봉건제도(feudalism)를 합친 말이다. 페이스북 등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사람들이 생각 없이 쓴 온갖 의견을 모두 알고 있다. 애플과 구글 등은 우리가 무엇을 보고 누구를 어디서 만나는지 등 개인정보를 우리보다 더 자세히 기억한다. 클라우드 기반의 기업들이 시민의 정보를 모아 우리가 모르는 사이 정체성의 일면을 훔치고 있다. 저자는 “우리는 놀이처럼 정보를 제공하며 클라우드 기업의 자본을 대신 생산해주고 있다”며 “무급 생산 노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빅테크 기업의 배를 불리는 클라우드 농노로 전락하고 있다”고 말한다. 책은 클라우드 자본과 알고리즘 등의 디지털 혁명이 자본주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탐구하고, 국가 시스템과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본다. 또 그리스신화를 바탕으로 기술의 변화가 우리 정신을 어떻게 황폐화하는지와 세계 권력의 규칙을 다시 쓰는지 보여준다. 궁극적으로 이를 전복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선택을 조정하는 AI와 클라우드 영주에 맞서 자유를 되찾는 방법을 강구한다. 너는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 김희선 지음·민음사·1만7000원 혼령이 출몰하는 소설 세계와 살인마가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현실 세계 중 더 불가사의한 곳은 어디일까. 거대한 미지의 세계를 탐험할 준비가 된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스릴러와 환상, 추리물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소설가 김희선이 꼽은 미스터리 서평집이다. 미스터리로부터 배운 현실 감각은 소설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삶의 지혜를 제공한다. 헬렌 켈러 맥스 월리스 지음·장상미 옮김·아르테·4만4000원 헬렌 켈러의 여정을 다시 추적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평전이다. 책은 성별과 계급, 인종 등 차별에 맞서 싸워 온 정치적 활동에 초점을 맞춰 조명한다. FBI 비밀 문건과 개인 일기, 서신 등 방대한 증거를 쫓으며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 복잡한 20세기 정치사 속 신념을 지닌 인물로 그려냈다. 사카나와 일본 서영찬 지음·동아시아·2만9800원 에도시대부터 21세기 도쿄까지 갯내음 가득한 밥상을 통해 일본 사회를 들여다본다. 30여 가지 수산물로 요리한 이야기에는 우리와 닮은 듯 다른 일본 어식 문화가 담겨 있다. 일본에서 수산물이 어떻게 소비되고 지역에 따라 다르게 인식됐는지, 왜 같은 재료를 다른 조리법으로 요리했는지 등을 통찰하며 사회를 읽어낸다.
- 신간
- 1000만, 영화의 힘인가 자본의 힘인가(2024. 05. 20 06:00)
- 2024. 05. 20 06:00 문화/과학
- 영화 <범죄도시 4>가 촉발한 ‘스크린 독점’ 논란 배우 마동석 주연의 영화 <범죄도시 4>가 개봉 22일째인 지난 5월 15일 누적 관객 수 1000만명을 돌파했다. 사진은 지난 5월 15일 서울의 한 영화관의 <범죄도시 4> 홍보물 /문재원 기자 1000만. 한국 영화계에서 흥행 대박을 상징하는 ‘고유명사’ 같은 수치다. 2024년 기준, 한국 인구수가 약 5175만명인 만큼 전체 인구의 약 5분의 1에 해당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개봉하는 상업영화는 대부분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는다. 한국의 15세 이상 인구수는 약 4627만명이다. 이에 따라 특정 영화의 관객이 1000만명이라는 것은 ‘한국 15세 이상 인구 4~5명 중 1명이 같은 영화를 본 것’일 수 있다는 의미다. 해당 수치를 유사한 오락거리와 비교해볼 수도 있다. 1982년 시작한 프로야구의 역대 최고 관객동원 수치는 2017년 달성한 840만688명이다. 지난해는 810만326명을 동원했다. 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총 144경기 중 41경기쯤 치른 5월 14일 기준, 296만1205명을 동원했다. 전국 5개 야구장에서 동시에 치러지는 야구경기의 하루평균 관객은 약 7만2000명이다. 수치대로라면 올해 약 741만6000명을 더 모을 수 있다. 이로 인해 프로야구는 사상 첫 1000만 관객을 달성할 수 있을지 주목받는다. 즉 관객 1000만이라는 수치는 프로야구가 한 시즌 내내 흥행을 이어가야 달성할 수 있는 꿈의 숫자라는 의미다.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인 프로야구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입장권을 사서 관람’하는 오락거리 중 영화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영화는 한국인이 가장 즐기는 여가임을 수치가 증명한다. 실제로 상반기도 채 끝나지 않은 올해 1000만 영화가 이미 두 편이나 탄생했다. 지난 3월 24일 영화 <파묘>는 개봉 32일 만에 관객 1000만명을 돌파했다. 역대 32번째, 한국 영화로는 23번째 1000만 영화다. 곧바로 33번째 1000만 영화도 탄생했다. 지난 5월 15일,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범죄도시 4>다. <파묘>보다 10일이나 빠른 개봉 22일 만에 세운 기록이다. 연이은 1000만 영화의 탄생에 업계는 반색 중이다. 그런데 <파묘>의 1000만 달성 때와 달리 <범죄도시 4>를 두고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영화계에서 터져 나온 <범죄도시 4>의 ‘스크린 독점’ 문제다. 지난 3월 24일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파묘>. 사진은 지난 2월 28일 서울 한 영화관에 <파묘> 홍보물이 걸려 있다. /연합뉴스 상반된 기록이 보여주는 현실 <범죄도시 4>의 1000만 관객 동원은 한국 영화사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진기록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시리즈물이다. 주연배우와 이야기의 큰 틀이 변하지 않는다. 형사 마석도 역할의 배우 마동석이 범죄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결말을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야기의 빈틈은 주·조연 배우들의 연기력, 이들이 상호작용하며 만드는 웃음이 메운다. 예를 들어, 배우 마동석이 가진 힘 센 이미지가 과장되고 폭력적인 상황에 개연성을 부과하고, 장이수 역의 박지환이 이에 상응하며 재미를 만드는 식이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마동석이 나쁜 놈들을 혼내준다는 단순·명확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이 오히려 관객들이 이 영화를 선택하는 이유라고 볼 수도 있다”며 “코로나19 유행 이후 관객들은 검증된 영화를 선택한다는 것을 잘 파고든 것”이라고 말했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 역시 “주인공이나 서사구조가 반복되니까 관객들은 영화가 개봉했을 때 ‘돈을 주고 가서 볼 만한 것’인지 탐색하고,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일을 생략할 수 있다”며 “범죄도시 시리즈에는 일종의 브랜드 효과가 발생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범죄도시 4>뿐만 아니라 그 전작인 1~3편도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이중 2편과 3편은 각각 1269만3415명, 1068만2813명을 동원하며 나란히 ‘1000만 영화’에 이름을 올렸다. 688만546명을 동원한 <범죄도시 1>과 합치면 세 작품 관객 동원 숫자만 3025만6774명이다. <범죄도시 4>가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해당 시리즈는 이제 40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됐다. ‘한국의 15세 이상 인구수’와 맞먹는다. <범죄도시 4>의 1000만 관객 동원은 또 다른 의미에서도 진기록이다. 영화진흥위원회(KOFIC)에 따르면 <범죄도시 4>가 개봉한 지난 4월 24일부터 1000만 관객을 돌파한 5월 15일까지 총 27편의 영화가 개봉했다. 이중 한국 영화는 딱 7편이다. 4월 24일 <드라이브>, <모르는 이야기>, <여행자의 필요>, 5월 8일 <미지수>, 5월 15일 <그녀가 죽었다>, <내 손끝에 너의 온도가 닿을 때>다. 이중 독립영화가 5편이다. 대중에게 익숙한 유명 배우가 나오는 영화는 1000만 돌파가 확정된 5월 15일 개봉한 <그녀가 죽었다>가 유일하다. 쉽게 말해 <범죄도시 4>가 993만6307명의 관객을 모을 때까지 한국 상업영화는 단 한 편도 개봉하지 않았다. 외국 영화로까지 범위를 넓혀도 상황은 비슷하다. 5월 8일 개봉한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정도가 알려진 상업영화였다. 적어도 한국 상업영화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22일 동안 <범죄도시 4>를 보거나 영화를 보지 않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는 의미다. 보고 싶은 것인가, 볼 수밖에 없는 것인가 배우 마동석 주연의 영화 ‘범죄도시4’가 개봉 22일째인 지난 5월 15일 누적 관객 수 1000만 명을 돌파했다. 사진은 지난 5월 15일 서울의 한 영화관의 범죄도시4 홍보물./문재원 기자 “시간대가 맞는 영화는 <범죄도시 4>밖에 없던데요.” 지난 5월 15일 삼성동 코엑스 메가박스 앞에서 만난 A씨의 말이다. A씨는 “비도 오고, 생각보다 춥기도 해서 밖에 돌아다니기보다 그냥 여자친구와 영화를 보기로 했다”며 “지난주부터 영화를 볼까, 말까 고민했는데 2주째 아는 영화가 <범죄도시 4>밖에 없는 걸 보고 그냥 이거 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날 코엑스 메가박스는 <범죄도시 4>외에 <그녀가 죽었다>,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극장판 하이큐! 쓰레기장의 발견> 등을 상영했다. 이중 <범죄도시 4>가 제일 먼저 개봉한 영화임에도 가장 많은 상영관에서 짧게는 20분, 길게는 최대 1시간 간격으로 촘촘하게 상영했다. 이날 개봉한 한국영화 <그녀가 죽었다>는 예정된 무대인사를 제외하면 두 개 상영관에서 최대 2시간 50분 간격으로 상영했다. 강남역 CGV, 잠실역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점도 상황은 비슷했다. 이중 영화관 규모가 큰 코엑스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점은 각각 17편, 13편의 각기 다른 영화를 상영하며 다양성을 확보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범죄도시 4>, <그녀가 죽었다>,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극장판 하이큐! 쓰레기장의 발견>, <가필드>를 제외하면 대부분 심야 시간대에 한 번 상영하는 수준이었다. 이날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점에서 <범죄도시 4>를 본 B씨는 “꼭 보고 싶어서 봤다기보다는 쉬는 날 영화를 보려고 했는데 마침 그 시간에 <범죄도시 4>가 상영하고 있었던 것”이라며 “궁금해서 본 <파묘>와는 분명히 선택 기준이 다르다”고 말했다. 실제로 개봉한 지 20여 일이 훌쩍 지나고도 <범죄도시 4>는 압도적인 상영점유율을 자랑했다. 상영점유율은 전체 영화 상영횟수에서 특정 영화가 차지하는 비율이다. 5월 14일 기준, <범죄도시 4>의 상영점유율은 56.1%다. 즉 이날 스크린에 걸린 영화 중 56.1%가 <범죄도시 4>였다. 이마저도 <혹성탈출 : 새로운 시대>가 개봉한 5월 8일을 기점으로 꺾인 것이다. 5월 7일에는 75.6%였다. 지난 4월에는 줄곧 80% 이상을 유지했다. <범죄도시 4>와 <파묘>의 개봉일부터 1000만 관객 돌파시까지 일자별 상영점유율과 상영횟수/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총 좌석 수 중 특정 영화에 배정된 좌석 수를 의미하는 ‘좌석점유율’은 상영점유율과 동기화된다. 그럼에도 좌석점유율이 중요한 것은 이를 토대로 배정된 좌석 중 실제 관객이 입장한 수(판매량)를 의미하는 ‘좌석판매율’을 계산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5월 14일 기준, 57.2%의 좌석점유율을 자랑한 <범죄도시 4>의 좌석판매율은 8.2%였다. 총 136만2048석이 <범죄도시 4>에 배정됐는데 11만1652개 좌석만 판매됐다. 이는 곧 이날 영화를 본 관객 수다. “<범죄도시 4>를 보러 갔는데 그 큰 영화관에서 2~3명이 같이 봤다”는 증언이 허언이 아닌 셈이다. ‘평일에 누가 영화를 보냐’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주말 사정은 좀 낫다. 토요일인 5월 11일 좌석판매율은 20.9%, 일요일인 5월 12일은 19%였다. <범죄도시 4> 좌석판매율이 가장 높았던 시점은 개봉 첫 주 주말인 4월 27일 토요일로 47.5%였다. 이날 상영점유율은 81.8%였다. 즉 <범죄도시 4>는 단 한 번도 좌석판매율이 50%를 넘어본 적이 없다. 반면 영화 <파묘>의 개봉 첫 주 주말 좌석판매율은 2월 24일(토요일) 53.6%, 2월 25일(일요일) 58.6%였다. 같은 날 <파묘>의 상영점유율은 각각 51.8%, 52.2%였다. <파묘>는 시간이 갈수록 주말 좌석판매율을 높여갔다. 그 결과, 3월 1일 62%로 정점을 찍었다. 지난 5월 15일 서울 강남역 CGV 영화관의 티켓 발매처 앞 모습. <범죄도시 4> 상영 시간표가 나오고 있다./김찬호 기자 <범죄도시 4>가 누린 높은 상영점유율은 효과가 있었다. <범죄도시 4>가 개봉한 후 전국 영화관에서 하루 동안 약 2만1000회 각기 다른 영화들을 상영한 날이 있었다. 이중 약 1만7000회가 <범죄도시 4>였다. 상영점유율은 <범죄도시 4>가 개봉한 후 최고인 82%를 기록했다. 이날 이용 가능했던 약 290만개 좌석 중 256만8000개가 <범죄도시 4>에 배정됐다. 이날이 바로 <범죄도시 4>가 자체 하루 최고 관객 동원 기록(121만9038명)을 쓴 4월 27일이다. 초반 압도적인 물량 공세를 하면 그만큼 관객 수는 늘어날 수 있다는 점이 수치로 확인됐다. ‘영화의 힘’이 1000만명을 영화관으로 불러모으는지, ‘물량 공세’가 1000만까지 가기 어려운 영화도 기록을 세우게 해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파묘>는 1000만 영화에 등극할 때까지 누릴 수 없었던 혜택을 <범죄도시 4>는 받았다. ‘스크린 독점’ 문제인가, 현실인가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내버려 둬도 될 사안인가”. 지난 5월 2일 ‘한국 영화 생태계 복원을 위한 토론회’에서 영화제작사 하하필름스 이하영 대표가 <범죄도시 4>의 스크린 독점 문제를 지적하며 한 말이다. 이 대표는 “코로나19 유행 전에 비해 관객은 줄었는데 오히려 극장 수는 늘어나며 극장 간 경쟁이 과열 체제로 넘어갔다”며 “이런 상황에서 <범죄도시 4>라는 흥행 가능한 영화가 나오니 극장들이 앞다투어 관객 확보를 위해 스크린을 <범죄도시 4>에 배정해 독과점 현상이 났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독과점이라고 할 수 있는 50%선에서 하나의 영화가 스크린을 점유할 수 없게 제한하는 ‘스크린 상한제’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고 덧붙였다. 사실 <범죄도시 4> 흥행이 소환한 ‘스크린 독점’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다수 스크린을 보유한 ‘멀티플렉스’가 처음 문을 열었을 때는 관객의 영화 선택 폭을 넓힐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운영 방식은 그렇지 않다. 멀티플렉스는 <범죄도시 4>처럼 대박을 낼 것으로 보이는 영화가 개봉하면 갖고 있는 모든 스크린을 내어준다. 관객이 멀티플렉스를 찾아도 영화를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현행 멀티플렉스는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닌, 극장이 보라고 하는 영화를 보는 체제”란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관련법은 있지만 이를 제한할 방법은 없다.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19조는 ‘한국영화의 상영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법에 따라 영화상영관 경영자는 매해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연간 상영일 수의 5분의 1 이상 한국영화를 상영하여야 한다. 이른바 ‘스크린 쿼터제’다. 스크린 쿼터제는 외국영화의 공세에 맞서 한국영화를 보호하는 장치일 뿐, 한국영화계 내부에서 벌어지는 독점 문제는 막지 못한다. 그 결과 이른바 ‘빅5’라고 불리는 CJ엔터테인먼트, 쇼박스, 롯데엔터테인먼트, NEW,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등의 배급사와 손잡는 것이 이들 산하에 있는 CGV, 롯데시네마, CINE Q, 메가박스 등의 영화관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길이 됐다. <범죄도시 4>의 배급사는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고, <파묘>의 배급사는 쇼박스다. 영화 산업의 수직계열화는 이미 완성 단계다. 수직계열화를 인정하면 일부 의문은 해소된다. <범죄도시 4>가 개봉한 4월 24일부터 1000만 관객을 달성한 5월 15일 사이에는 근로자의 날, 어린이날, 부처님오신날 등의 휴일이 있었다. 상업영화 개봉 시점으로 고려해볼 만함에도 나서는 영화가 없었다. 이를 두고 한 영화산업관계자는 “왜 굳이 <범죄도시 4>와 나눠먹기를 하느냐”며 “조금만 기다리면 1000만 관객 달성하고 알아서 비켜줄 텐데 그때 스크린 싹쓸이를 노리는 것이 훨씬 더 낫다.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했다. 배우 마동석 주연의 영화 ‘범죄도시4’가 개봉 22일째인 지난 5월 15일 누적 관객 수 1000만 명을 돌파했다. 사진은 ‘범죄도시4’의 한 장면/‘범죄도시4’ 측 제공 전문가들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김 평론가는 “이제 와서 멀티플렉스 스크린 독점 문제를 지적해봐야 개선될 것은 없다. 법도 없지 않느냐”며 “결국 이들이 수익을 포기하고 다양한 영화를 상영하는 방식으로 변하라는 것인데 불가능한 말”이라고 말했다. 정덕현 평론가 역시 “이제 꼭 영화관에서 영화를 개봉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인식에서 탈피해 독립영화나 예술영화 같은 경우 OTT 등에서 개봉하는 쪽으로 변화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며 “영화 한 번 보는데 1만~2만원을 훌쩍 넘는 시대에 관객들에게 다양성을 담보하는 영화라고 봐달라고 하기도 어렵다. 이미 관객들은 극장에서 볼 때 효능감을 줄 수 있는 영화들을 선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극장을 찾지 않는 관객들은 ‘볼 만한 영화’가 없어서가 아닌, ‘극장에서 볼 만한 영화’가 없어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범죄도시 4>는 1000만 관객을 돌파한 5월 15일 상영점유율을 28.6%까지 한 번에 낮췄다. 목표를 달성하고 퇴장을 준비하는 모양새다. 남은 것은 <범죄도시 4>가 22일간 보여준 행보를 문제라고 제재할 것이냐, 현실이라고 인정할 것이냐다. <범죄도시 4>가 한국 영화계에 고민거리를 던졌다.
- 특집
- [신간]가난을 자본으로 자란다는 건(2023. 11. 15 07:00)
- 2023. 11. 15 07:00 문화/과학
-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강지나 지음·돌베개·1만7500원 ‘흙수저’를 상속받은 아이들은 어떤 꿈을 꿀까. 가난은 그저 재화 부족이 아니다. 내면의 힘을 키울 환경이 없고, 사회적 자본도 부족하다. 성실을 보상받는 것조차 스스로 “야망이 크다” 여길 만큼, 노력해도 원하는 것을 이루기 어렵다. 가난 때문에 엇나가기도 하지만, 일찍 철이 들기도 한다. 가족에 대해 애틋하며, 사회가 강요하는 ‘정상 가족’의 틀을 따라 “평범한 가정”을 꿈꾸나 순탄치는 않다. 교사인 저자는 초임 시절 청소년 현실에 무력감을 느껴 사회복지학을 공부했다. 빈곤 대물림에 대한 박사 논문을 준비할 때 알게 된 청소년들과 10년간 꾸준히 만나 가난이 성년 이후까지 미치는 영향을 추적했다. 3대를 이은 가난·우울증·알코올중독으로 고통받는 소희, 성실하지만 그 결과가 두려운 영성, 전과자라는 편견과 싸우는 현석 등 8명의 이야기는 교육·노동·복지정책의 현실을 절감하게 한다. ▲걸프의 순간 압둘칼리끄 압둘라 지음·김강석, 안소연 옮김·쑬딴스북·2만1000원 언제부턴가 ‘중동’ 하면 두바이의 고층빌딩들이 떠오른다. 20세기까지 아랍의 중심은 이집트·시리아·이라크였지만, 21세기 들어 걸프국(사우디·UAE·쿠웨이트·바레인·오만·카타르)들이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시작은 전 세계 매장량의 60%를 차지하는 아라비아만의 막대한 원유였지만, 이들은 교육·보건·복지 등 인프라에 투자하며 탈석유 시대를 준비했다. 아랍 정치 석학인 저자는 걸프국들이 아랍권 경제·외교·언론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른 변화를 ‘걸프의 순간’이라 정의하고, 그 현주소를 점검한다. ▲세계사를 바꾼 50가지 거짓말 나타샤 티드 지음·박선령 옮김·타인의사유·1만9800원 대제국 아스텍이 아무 저항 없이 나라를 넘겨주었다고? 그들은 맹렬히 저항했고, 스페인은 압도적 승리를 거둔 적이 없다. 역사는 승자 혹은 ‘승자처럼 보이고 싶은’ 자들의 기록이다. 왜곡되고 위조된 역사의 속살을 파헤쳤다.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들 테레사 뷔커 지음·김현정 옮김·원더박스·2만원 하루는 누구에게나 24시간이지만, 현대인의 시간은 공평하지 않다. 부유한 사람은 돌봄을 남에게 떠넘기며 여유를 얻고, 가난한 사람은 시간 빈곤에 빠진다. 노동·돌봄·자유·미래·정치의 영역에서 시간 불평등의 문제를 분석했다. ▲여성들의 자궁 이야기: 임신 출산은 빼고 권순택, 김세옥 지음·탐탐·1만6000원 특정 연령대 여성이면 누구나 하는 월경을 실존하지도 않는 ‘마법’이란 말로 대체해 쓰는 세상. 자궁의 문제는 더더욱 꺼내기 어렵다. 여성 대부분이 겪는 자궁 안팎 질환을 임신·출산이 아닌 건강과 삶의 질 측면에서 바라본다.
- 신간
- [김규항의 교육·시장·인간](1)부모 자본가의 출현(2023. 08. 18 10:47)
- 2023. 08. 18 10:47 사회
- 지난달 7월 21일 서울 서초구의 서이초에서 한 시민이 숨진 교사를 향한 추모 메시지를 읽어보고 있다. / 권도현 기자 초등학교 교사의 연이은 죽음이 사회에 큰 충격과 파문을 일으켰다. 학생 권리의 지나친 확대에 따른 교사 권리의 축소가 원인이라고도 한다. 오래전 학교에선 교사 권리가 지나쳐 학생 권리를 억눌렀다는 이야기와 대구를 이룬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라면 교사 권리와 학생 권리는 각각 고유하다. 만일 대립관계에 있다면, 권리를 가장한 폭력 상황을 의미한다. 교사 권리를 가장한 교사의 폭력은 국가 파시즘의 한 얼굴이었다. 젊은 교사를 죽음으로 몰아간, 학생 권리를 가장한 부모의 폭력은 시장 파시즘의 한 얼굴일 것이다. 국가 파시즘과 시장 파시즘이 역할을 교대한 건 1997년 즈음이었다. IMF 구제 금융의 대가로 한국은 대대적인 신자유주의 구조 조정에 들어간다. 경제 부문을 시작으로 한국 사회 모든 부문이, 사회 성원의 생활과 문화 전반이 근본적으로 바뀐다. 몇 해 후 노무현 대통령은 이 변화를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표현한 바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이 양육과 교육은 인격적 성장에만 전념하기 어렵다. 아이가 시장에서 살아가려면 상품적 성장도 중요하다. ‘교육 수준이 사회적 지위를 결정한다’고 말할 때, 교육 수준은 바로 상품적 성장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은 인격적 성장과 상품적 성장이라는 두 가치의 긴장 상태에 있는 셈이다. 1997년 이후 한국 교육은 긴장을 벗어나 상품적 성장 쪽으로 내달리게 된다. 사회 진보와 진보 교육을 말하는 사람들 역시 제 아이 교육에선 예외가 아니었으며, (이후 조국 사태를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듯) 오히려 더 적극적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이 변화가 어떤 정도였는지 알려준다. 2001년 1월 김대중 정부는 교육부를 ‘교육인적자원부’로 바꿈으로써 이 변화를 공식화한다. 아이의 상품적 성장을 판정하는 가장 주요한 절차는 대학입시다. 이때부터 한국인에게 ‘교육 문제’란 순수하게 ‘대학입시’를 의미하는 말이 된다. 그리고 새로운 부모들이 출현한다. 아이의 상품적 성장이 곧 인격적-인간적 성장이라는 전제하에, 교육 과정을 상품 생산과 이윤 축적 과정처럼 파악하며, 기획, 조율, 관리, 감독 등 경영 활동을 해나가는 부모다. 이때 다른 부모와 아이들은 경쟁자(업체)와 경쟁 상품이 된다. 한 인격체이자 아이 성장의 동료이던 교사는 생산 수단, 혹은 협력 업체가 된다. 생산성이나 이윤율 문제에서 교사는 대화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대상이다. 우리는 이 부모들에게, 가장 합당한 의미에서 ‘부모 자본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내 새끼 지상주의자’는 비록 소수더라도 어느 시대나 존재했다. 부모 자본가의 특별함은 그들의 이악스러움이 교육 부문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사적 일상에서 인간적이고 상식적인 모습을 보이는 자본가가, 자본가로서의 활동에선 온전히 ‘인격화한 자본’으로 변신하는 것처럼 말이다. 교사들의 죽음에 직접적 관련이 있는 부모들은 부모 자본가 중에서도 포악한 부류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특수한 건 언제나 일반적인 것 속에 존재한다. 포악한 부모 자본가의 출몰은 부모 자본가가 일반적인 사회임을 알려준다. 또한 기억할 것은 가장 본격적이며 가장 독점적인 자본가는 대부분은 포악함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경영활동을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공교육은 죽었다.” 서이초 교사의 사망 이후 거리로 나온 교사들의 외침입니다. 한국사회의 교육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매주 김규항 작가와 함께 지금 우리 교육에 필요한 성찰을 해봅니다.
- 김규항의 교육·시장·인간
- [신간]착한 자본의 탄생 外(2023. 05. 12 14:29)
- 2023. 05. 12 14:29 문화/과학
- ㆍ‘한국형 ESG’를 말한다 <착한 자본의 탄생> 김경식 지음·어바웃어북·1만8000원 글로벌 기업들의 경영모델로 자리 잡은 ‘ESG(환경·사회적 책임·지배구조)’에 대한 본질적인 탐구와 국내 ESG 현황과 관련 이슈에 대한 맞춤형 해법을 제시한 해설서다. 저자는 250여년 전 산업혁명을 계기로 나타난 자본주의의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 ESG의 본질을 밝힌다. 저자에 따르면 ESG는 산업혁명과 대량생산체제, 독점 및 금융자본화 등이 불러온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됐다. 이를 바탕으로 ESG가 현재 자본시장과 산업현장에서 어떻게 운용되고 있는지 진단하고, 우리 현실에 맞는 ‘실현가능한’ 해법을 제시한다. 저자는 한국에서 ESG가 유독 환경(E)이 강조되고 사회적 책임(S)이나 지배구조(G)는 상대적으로 주목 덜 받는 현실을 진단한다. 재벌기업들은 특히 지배구조 문제에 대해선 언급조차 하길 꺼린다. 저자는 이를 “ESG 워싱”이라고 꼬집는다. 이산화탄소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기업이 우수한 ESG 평가를 받는 기이한 구조, 사회가 직면한 노동문제를 외면해온 국내 ESG 경영의 민낯을 지적한다. 저자는 진정한 ESG에 대해 “자본주의가 스스로 올바른 방향으로 진화하는 가운데 기업이 사회적 가치를 지키며 지속가능한 경영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ESG는 곧 ‘기업지속가능경영지침(Enterprise Sustainability Guide)’으로 달리 해석할 수 있다. 기업은 ESG 경영을 통해 가치사슬을 재설계해 이해관계자들을 존중하고, 합당한 보상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저자는 권고한다. 이는 곧 ‘주주 자본주의’에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특히 기업과 시민단체, 언론 사이에 견제와 균형이 건강하고 조화롭게 유지돼야 한다는 분석이다. 국공내전 이철의 지음·앨피·2만8000원 중국의 대만침공 가능성, 미국의 대만수호 전략에 따른 미·중 충돌 우려 등 양안문제는 이제 중화민족 당사자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화두가 됐다. 중국과 대만의 탄생을 낳은 국공내전의 시작과 과정, 결말 등을 조명해 ‘일국양제’의 기원을 탐구한다. 카뮈의 말 알베르 카뮈 지음·이재룡, 조경민 옮김·마음산책·2만3000원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인 카뮈는 작가로 널리 알려졌지만, 강연자로서도 많은 어록을 남겼다. 1937년부터 1958년까지 이뤄진 34편의 강연 및 연설을 엮은 카뮈 강연록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공포 속에서 ‘인간의 위기’가 무엇인지 진단한다. 뜻밖의 미술관 김선지 지음·다산북스·1만9500원 저자는 오랫동안 명화와 거장으로 불린 작품과 화가들을 소개하며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중세 화가들은 왜 기괴하고 못생긴 사람들 그림을 그렸는지’, ‘원시적 아름다움을 그린 고갱의 작품이 지금도 위대한지’ 등이다. 뜻밖의 관점은 새로운 발견이다.
- 신간
- [엄길청의 이코노베이션](20)도시 안전과 사회직접자본(2022. 11. 04 11:16)
- 2022. 11. 04 11:16 경제
-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회간접자본(SOC)은 여러 정의가 있지만, 독일 출신의 경제학자 앨버트 허시먼에 의하면 ‘다른 다양한 경제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공공기관에 의해 통제되는 서비스’를 말한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에는 기초 기반환경인 에너지, 물 등을 확보하기 위해 댐이나 발전소 등을 주로 건설했다. 1970년대에는 수송시설을 확충하며 공단을 건설하는 일에 치중했고, 1980년대에는 국민생활의 편익을 증진하는 투자를 많이 했다. 1990년대에는 세계화·지방화의 방향성을 가지고 투자가 이뤄졌으며, 2000년대 이후는 사회복지투자와 균형발전투자에 비중을 키우는 편이었다. 경기 일산 경의선누리길에서 시민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사회간접자본의 투자 비중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투자 비중이 1980년대에 2%에서 1990년대에는 6%로 올랐다가 2000년대 이후는 4%대 정도로 내려왔다. 경제구조의 선진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나타난 일이다. 사람과 도시·마을의 사회직접자본화 직접자본이란 것은 말 그대로 경제에 투자되고 사용되는 직접자원을 말한다. 인력이나 금융, 기술, 토지, 생산자원 등을 포함한다. 그런데 갈수록 노동력은 기업경영이나 기술혁신에서 요소 단위로서의 직접자본으로 보지 않고 배제하는 흐름이 있다. 결국 시민이 산업의 노동력에서 국가의 활동력으로 자신을 구성원 자본(member capital)화하는 것을 사회직접자본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요즘 시민의 길거리 정치참여도가 높아지는 것도 그런 배경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지금 선진국들은 도시나 마을 전체를 교육, 문화, 과학, 주거, 자연환경 등을 잘 갖추고, 시민이 정주하는 사회적 직접자본으로 문명자원화하려고 노력 중이다. 행복하고 안전한 시민의 삶 자체를 문화적 자원으로 가치화하려는 정책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국가의 미래세대 자본인 청년들의 도시 진입과 지역 활동을 지원하려는 다양한 정책 목표를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덴마크 코펜하겐은 도심부의 일정 지역을 국제적인 건강한 배회문화 지역으로 설정하고, 골목이나 거리의 환경개선을 통해 도보로 안전하고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관리한다. 청년들을 포함한 국제적인 방문객을 환대 속에 받아들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스웨덴 스톡홀름도 그런 방향의 도시환경 개선책을 도입했다. 걸어서 이동해도 다양한 도시문화의 향유와 도시생활 경제가 가능한 거리로 도심부를 재구성하며 재정비하고 있다. 마드리드나 파리, 맨해튼, 런던, 토론토 등에서도 이런 일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런 도시의 변화를 일러 ‘뉴어버니즘(New Urbanism)의 구현’이라고도 부른다. 일부 도시에서는 ‘우븐 시티(Woven City·그물망 도시)로의 전략화’라고도 한다. 이 같은 일련의 도시혁신은 점점 인공지능화되며 과학기술로 치닫는 산업생산과 기술혁명의 현실에서, 청년이나 시민에게 직접생산 활동의 소외를 이겨내고, 고유한 자기 창의력의 외연을 키우게 해준다. 또한 이렇게 하여 청년들이 다양한 도시콘텐츠의 구성에 자발적으로 기여하며 스스로 행복하게 더불어 살아가는 이른바 사회직접자본으로서의 질적이고 양적인 발전을 지향하게 한다. 서울 신문로 흥국생명빌딩 앞에 설치된 조형물 ‘해머링 맨(Hammering Man)? / 경향신문 자료사진 인본가치를 직접자본으로 자산화해야 누구나 가슴이 한번쯤은 설레게 되는 10월 하순의 한국의 만추는 가히 절경이고 계절의 백미다. 다만 이 시대의 팽팽한 청년문화 자산을 담아내고 건강히 발산하게 하는 우리 도시의 공간문화 현실은 아직도 여건이 태부족이며 그 수준이 낙후된 편이다. 특히 요즘 도시의 골목길 문화생태계를 국제적인 배회자산으로 승화하고, 안전하며 편리하게 상품화하려는 여타 선진국 도시들의 도시혁신 트렌드에 비춰보면 우리 도시들의 준비는 많이 미흡하다. 이런 시기에 너무 처참하고 비극적인 도시 참사를 만났다. 서울의 대표적인 국제문화 배회거리인 이태원에서 빚어진 어처구니없고 기가 막히고 너무도 안타까운 참극을 보았다. 삽시간에 생때 같은 청춘들을 너무 허무하게 잃었다. 정녕 저 귀한 생명의 꽃들이 저렇게 연기처럼 스러지면 목전의 사지를 보면서도 아무 도움도 못 준 우리는 어쩌란 말인가. 이 비보를 접하면서, 우리는 청년들이 마음껏 미래의 꿈을 펼쳐보는 국가적 보금자리가 되도록 도시공간의 문을 활짝 열어줘야 한다. 어른들이 살자고 매일 도시를 욕심으로 채우는 현실에서 벗어나 젊은 야망과 희망의 공간으로 마을과 도시를 가꿔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절박하게 느껴야 한다. 이번 일만 보더라도 기성세대는 미래세대의 지원과 육성 및 보호를 너무 오랜 시간 등한히 했다. 비명에 하늘나라로 간 고귀한 청춘들의 희생이 미래를 위한 사회직접자본 강화의 씨앗으로 다시 거듭나게 해야 한다. 이런 현실은 비단 우리 청년에게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코로나19와 산업혁명으로 갑자기 잘 걸어가던 인생길을 잃어버린 4050대 신중년들이나 6070대 신장년들, 더 고령의 어르신들에게도 이제 도시는 착한 배회경제와 배회문화의 생태계로 거듭나며 안전하고 쾌적하게 작동해야 한다. 사실 오래전부터 서울 종로 탑골공원 등에서 하릴없이 하루를 보내고 있던 고령의 시민 운집에서 우리는 이런 미래를 예견했어야 했다. 농업국가에서 경공업국가로 전환하는 시점에서 도시로 온 당시의 젊은 시민은 나이가 들면서 중화학공업의 기술사회로 잘 넘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정보통신 사회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기술사회 출신들은 생업코드 전환을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도시는 점점 초(超)지능 혁명의 수레바퀴로 돌아가지만, 그 안의 정신과 손길은 휴머노이드에 기초한 인간 중심의 공간자본으로 그 내부를 채워야 한다. 시민은 그런 도시 안에서 각기 자신의 인본가치를 직접자본으로 사회자산화할 수 있어야 한다. 장차 도시의 공간정책이 여전히 이제까지처럼 주로 주택과 도로를 마련하는 데 치중한다면, 청년들의 미래문화 생태계는 물론이고, 중장년들의 생업생태계는 국가의 도움 없이 안전과 위생과 환경의 사각지대에서 저급하게 조성될 수밖에 없다. 지금은 문제의 좁디좁은 그 골목만을 탓할 게 아니라 젊은이들의 용솟음치는 뜨거운 가슴을 들여다보지 못한 어른들의 좁디좁은 시야를 반성해야 하는 시간이다. 도시가 이제 사회직접자본으로 시민을 품에 안아야 한다면, 도시의 시민은 그가 누구든 어디서도 언제나 정부의 보호 속에 있어야 마땅하다. 이번 참사도 그런 점에서 너무너무 젊은 영혼에 미안하고, 그래서 더 끊어질 듯 애가 탄다.
- 엄길청의 이코노베이션
- [안치용의 까칠한 ESG 이야기](2)인류세·닭세·자본세…그들과 헤어질 결심(2022. 08. 19 11:58)
- 2022. 08. 19 11:58 경제
- ‘치킨’은 한국인의 소울푸드 중 하나로 꼽힌다. 언젠가 비건이 되겠다는, 사실상 공염불에 가까운 꿈이 있는 나 또한 사람들과 어울려 어쩌다 치맥을 하는 편이다. 이론과 현실의 이러한 괴리에서 분열한 나는 “밀집감금으로 미친 닭을 살해해 털을 뽑고, 사체를 냉동고에 은닉했다가 그것을 펄펄 끓는 기름에 넣어 사후에 한 번 더 욕보인 다음 추가로 사체에 고춧가루 고문 같은 걸 한 다음에 먹는다”고 입맛 떨어지는 자학 반성문을 읊으며 치킨을 먹는다. pixabay 기술화석 그린피스가 하는 ‘건강한 먹거리 캠페인’에서 제시하는 몇가지 숫자가 있는데, 그중 ‘26%’는 지구 전체 면적에서 현재 가축 방목을 위해 사용되는 땅의 비중이다. 80%에는 “2020년 브라질 아마존에서 일어난 삼림 벌채 중 80%가 소 목축을 위해 발생한 벌목으로 추정됩니다”는 설명이 따라붙는다. ‘3.2kg=1kg’. 닭고기 1kg을 생산하는 데 드는 사료의 무게다. 14.5%는, 축산업이 배출하는 온실가스 비중. 연구에 따라 축산업의 온실가스 비중은 50%를 넘기도 한다. 터무니없는 가정이지만 세계인이 비건이 되면 온실가스 문제를 해결할 획기적 돌파구가 열린다. 현재의 지구온난화와 기후위기는 46억년 지구 역사에서 처음으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는 특정 생명종에 의해 초래됐기에 우리 시대를 설명하기 위해 ‘인류세’라는 말을 쓴다. 인류세(人類世·Anthropocene)는 인류를 뜻하는 ‘anthropos’와 시대를 뜻하는 ‘cene’의 합성어다. 위기, 혹은 재앙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는 현시기를 정의하는 용어로 인기가 있다. 1995년 오존층 연구로 노벨화학상을 받은 네덜란드 대기화학자 폴 크뤼천이 2000년에 처음 인류세란 용어를 제안했다. ‘신생대 제4기 충적세(沖積世)’라는 지질시대 최후의 시기이자 현재의 시기에 더해 크뤼천은 인류세라는 지질시대를 새롭게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4년 8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유로사이언스 포럼에서 각 분야 과학자들이 인류세란 용어 도입을 지지하면서도 이것이 지질학 이론이냐를 두고는 반론이 거셀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2016년 케이프타운 세계지질학대회는 “인류세를 지질학 시대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단 ‘인류세 워킹그룹’의 검토를 받아들인 이 결론은 권고사항이다. 과학계의 움직임과 별개로 이제 인류세는 우리 시대를 설명하는 용어로 자리 잡은 듯하다. 정색할 필요가 없는 게 인류세는 과학보다는 정치에 기댄 용어다. 과학자 사이먼 루이스가 2009년 가디언 기고문에서 “인류가 지구라는 통합 체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과학자는 거의 없다”고 말했듯, 인류세는 정치적 주장이다. 지구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이라는 종의 자기반성과 나아가 규탄을 담은. 만일 인류세를 지질시대로 살짝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수백만년, 수천만년 세월이 흐른 뒤에 인류세의 표지가 무엇이 될까. 닭뼈다. 인류는 1인당 연간 평균 10마리에 가까운 닭을 소비한다. 한국인의 연간 닭 소비량은 그 2배다. 현재의 식생활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수백년에 걸쳐 인간이 먹고 버린 켄터키 프라이드치킨 등의 뼈가 어마어마할 것이다. 긴 시간이 지나 인류의 역사가 잊히고 화석만으로 우리 시대를 추정한다면 이 시대의 지배종은 인간이 아니라 닭으로 추정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웃자고 한 이야기지만 하고 나니 꼭 웃기는 얘기인 것 같지 않다. 닭뼈 말고 출토될 특이한 화석으론 플라스틱, 알루미늄, 콘크리트 등이 예상되며 2016년 케이프타운 세계지질학대회에서 ‘인류세 워킹그룹’ 의장을 맡은 얀 잘라시에비치 영국 레스터대학 교수는 인류에 의해 창조된 이런 물질의 화석을 ‘기술화석(technofossil)’이라고 정의했다. 먼 미래에 플라스틱 화석은 닭뼈 화석과 함께 우리 시대를 지질학적으로 정의할 대표적 ‘기술화석’이다. 인류가 자조적으로 또 자학적으로 부여한 인류세란 용어가 전해지려면 인류가 ‘기술화석’이 발굴될 때까지 생존해야 하는데, 기후위기를 고려하지 않아도 그렇게 긴 시간을 살아남을 것 같지 않기에 우리는 인류라는 정체성 정의보다는 인류의 부산물로 정의되지 않을까. 좋은 인류세? 이 정도로 많은 닭을 인간이 먹기 위해선 공장식 양계가 전제된다. 공장식 양계를 통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는 자본주의 시스템, 그것도 글로벌하게 작동하는 자본주의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할 때 인류세에는 자본주의 생산과 소비, 문화와 이념 등 현 인류의 총괄적 삶과 생존의 체계가 확고하게 반영됐다. 세계생태학연구네트워크(WERN) 조정관이자 미국 빙엄턴대학 사회학과 교수인 제이슨 W. 무어는 “인류세라는 개념이 자본주의로 인한 문제의 책임을 인류 전체로 돌린 부르주아적인 구습을 강화하는 것은 아닐지 우려가 크다”라는 시각에서 인류세 대신 ‘자본세’라는 명명법을 제안한다. 인류세에 자학적인 뉘앙스가 담긴 것이 사실이기에 ‘자본세’는 분명 많은 이의 죄책감을 덜어준다는 장점이 있다. 우리 시대 기후위기의 본질을 정확히 포착한 용어이기도 하다. 한데 ‘자본세’는 전면적인 정치적 명명법이라 그런지 호응을 얻지 못했다. 에든버러대학에서 2013년 열린 기포드 강연에서 과학기술학자 브루노 라투르는 “인류세가 근대와 근대성의 관념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가장 적절한 철학적·종교적 그리고 인류학적 개념이 될 것이며,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혀 인류세의 범위를 확장했다. 자학이 포함된 반성의 용어인 인류세가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지구적 합의가 되고, 나아가 활용 범위가 넓어지는 건 양날의 칼이다. 자기반성을 도외시하고 자기파괴의 부정적인 면만을 지적하며 ‘좋은 인류세’라는 전래의 근대성 해법을 들고나오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음모론을 믿는 극단적인 세력을 빼고도, 과학기술 발전과 인류의 진보로 현재 인류가 처한 위기를 간단히 혹은 어렵지만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에코모더니스트 진영이 대표적이다. ‘좋은 인류세’란 모순어법을 굳이 감수하며 기후위기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하지 않지만, 근대 이래 인류가 그랬듯 인간은 이 위기 또한 극복하여 운명과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고 장담한다. 비록 형용모순이라 할지라도 ‘좋은 인류세’라는 게 있으면 좋긴 하겠다. 어쩌면 해답을 찾기에 너무 늦었는지 모르지만, 답을 찾으려면 일단 문제를 똑바로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에코모더니스트 같은 이들은 문제는 잘 들여다보지 않고 답을 먼저 얘기하곤 한다. <헤어질 결심>에 기대면 인류는 충분히 나빴고, 문제는 절대 만만하지 않다.
- 안치용의 까칠한 ESG 이야기
- [IT칼럼]언어모델, AI 자본주의 시대의 권력(2022. 06. 03 11:24)
- 2022. 06. 03 11:24 경제
- 구글은 람다2(LaMDA2)를 내놓았고, 메타는 OPT-175B를 출시했다. 오픈AI의 DALL-E2는 이미 한차례 바람을 몰고 갔다. 네이버는 하이퍼클로바의 고도화를 진행 중이다. 카카오도 KoGPT를 다듬어가고 있다. 빅테크 기업치고 대규모 언어모델을 개발하지 않는 곳은 거의 없을 정도다. 인공지능 시스템 ‘DALL-E2’에 우주인, 말을 타는, 포토리얼리스틱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어서 만든 이미지 / openai.com 언어모델의 규모를 상징하는 파라미터수는 매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GPT-3와 OPT-175B가 1750억개였고, 하이퍼클로바는 2040억개였다. 딥마인드의 고퍼는 2800억개 수준이다. MS와 엔비디아는 5000억개 파라미터를 지닌 초대형 언어모델을 곧 발표할 계획이다. 조 단위 파라미터 수를 넘어서는 건 이제 시간문제다. ‘새 무어의 법칙’(huggingface.co/blog/large-language-models)이라는 얘기가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이제 언어모델은 규모 과시의 영역을 넘어 서비스화되는 단계에 들어섰다. 구글 닥스에 곧 적용할 문서요약문 자동생성 기능은 구글 내 언어모델의 도움이 컸다. 하이퍼클로바는 네이버앱 음성 검색의 정확도를 높이는 데 한몫 톡톡히 하고 있다. 텍스트만 입력하면 그림을 그려주는 DALL-E2는 용도가 넓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을 정도다. ‘생산수단’으로 변모해가는 언어모델의 위력은 더 이상 상상이 아닌 현실로 입증되고 있다. 언어모델의 진화는 필연적으로 기술 산업을 ‘컴퓨팅 부자’와 ‘컴퓨팅 빈자’로 계층화한다. 조 단위로 뻗어가고 있는 파라미터수의 증가가 이를 유도하고 강화한다. 확보 가능한 데이터의 양만큼이나 컴퓨팅 파워, 즉 하드웨어의 연산 역량이 중요해지면서 기업 간 양극화의 정도는 더욱 극단화한다. 반대 방향으론 대규모 언어모델이 오픈소스와 결별하고 클라우드 시스템과 결합하며 상품화하는 과정이 진행 중이다. 오픈소스를 표방하던 GPT-3가 폐쇄형으로 전환되면서 더 이상 소스코드에 대한 보편적인 접근이 불가능해졌다. 클라우드와 결합한 대규모 언어모델에 가격표가 붙기 시작하면서 컴퓨팅 빈자들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언어모델 연구자들도 컴퓨팅 부자 기업에 취업하거나 시혜를 받지 않는 이상, 새롭고 혁신적인 연구성과를 낼 수조차 없는 상황이 오고 있다. 오픈소스 데이터로 학습한 언어모델이 다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면서 가진 자와 빈자의 격차를 급격히 키우는 형국이다. 조만간 콘텐츠 창작자를 위한 플랫폼에 언어모델이 필수 기술로 자리 잡을 전망이다. 창작 시간을 효율화하고 핵심 콘텐츠의 생산을 보조해주는 기술이기에 그 유혹을 물리치기란 쉽지 않다. 그날이 오면 컴퓨팅 빈자는 어쩔 수 없이 컴퓨팅 부자의 클라우드 플랫폼에 높은 비용을 지불하고 언어모델을 사용해야만 한다. 독과점 가격도 피하기 어려워진다. 소수 기술 기업에 의한 생산수단 독과점, 다시 말해 ‘AI 자본주의’ 시대가 이렇게 스멀스멀 우리 안으로 침투하고 있다.
- IT칼럼
- [엄길청의 이코노베이션](8)국가자본을 국민과 공유한다면(2022. 01. 14 15:04)
- 2022. 01. 14 15:04 경제
- 필자가 언급하는 ‘청자백자, 국민자본론’은 청년들에게 일정한 규모의 국가자본을 나눠주고, 100세를 준비하는 중장년 국민에게는 여러 혜택과 환경을 조성해 스스로 노후자산을 모으게 하는 정책을 말한다. ‘청년자본, 백세자산’을 요즘 유행어로 함축한 말이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이른바 MZ세대라는 2030세대의 인생설계가 정말 막막하다. 이 세대의 부모들은 아직 자식 뒷바라지에 한창이다. 게다가 자신의 ‘100세 인생’도 준비해야 한다. 두 세대의 고민은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어느 지점에서 이들이 모두 난관을 만났는지는 아주 복합적이다. 이미 이 현상은 시작됐으며, 곳곳에서 피해자가 등장하고 있다. 그에 따른 사회적 혼란을 우리는 또렷이 목격하고 있다. 이런 정황은 2016년 다보스포럼이 4차 산업혁명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관련 학자들의 통찰로 서서히 감지됐다. 2020년에 예기치 않은 코로나19 공습으로 삽시간에 등장한 새로운 뉴노멀 바람으로 지구촌 전체가 빠른 속도로 공포에 빠져들고 있다. 지금이 논의할 적절한 타이밍 ‘청자백자, 국민자본론’은 이보다 먼저 등장한 기본소득론의 당위론도 더불어 포함하고 있다. 사안의 시급성으로 보면, 국가가 재원을 만들고 나서 논의하자는 것이 아니라 ‘선(先)제도, 후(後)재원’이 불가피한 수순이자 우리 사회에 떨어진 ‘발등의 불’이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도 프랑스 청년들에게 만 25세가 지나면 프랑스 성인 평균자산의 60%인 12만유로(1억6000만원 정도)를 기본자산으로 주자는 제안을 코로나19 와중에 한 바 있다. 프랑스에 비해 한국은 경제발전이 빨라 머지않아 우리 경제가 소득수준 측면에서 볼 때 프랑스와 거의 비슷한 경제규모에 도달할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기본자산)를 논의할 타이밍이 됐다는 얘기다. 한국에선 ‘수익자 부담원칙’이 대전제였고, 개인의 경쟁과 효율을 시장경제의 핵심으로 이해하고 있는 국민에게 이런 주장은 급격하다는 인상을 줄 뿐만 아니라 분명 낯선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정치제도나 국가운영은 국민이 처한 생존의 상황이 달라지면 그에 맞는 시대담론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마침 202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이런 논의를 시작할 최적의 시간이다. 농경사회는 자연환경이 경작자본으로 지역 환경에 따라 공평하게 나뉜다. 토지를 제외한 빛이나 공기나 물이나 바람이 장소에 따라 다르긴 해도 일정한 권역에서는 공정하게 나눠 사용한다. 산업사회에서도 인간의 지혜와 근면·성실과 노동력이 교육이나 장소나 가정에 따라 일정한 차이를 보이지만 대체로 접근성과 도전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상당히 공평하게 열려 있다. 다가오는 자율 데이터 운영과 지능생산 로봇사회는 그렇지 못하다. 비대면 기술, 플랫폼기업, 원격연결 등의 시스템이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자율과 지속의 데이터 인식과 인공지능과 로봇의 작동기술로 무장한 채 더 빠르게 우리를 찾아오고 있다. 책을 한자 한자 읽는 세대와 한단어 한단어 읽는 세대와 한페이지씩 한 번에 읽는 세대가 동시에 이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번 대선을 보라, 이미 세대갈등과 세대 규합이 종래의 진영논리나 이념 다툼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뚜렷하지 않은가. 무슨 돈으로 청년에게 자본을 주고, 중장년에게 노후자산 형성지원금을 줄 것인가. 당장 몇가지가 생각난다. 청년·중장년에게 다양한 혜택을 우선 청년자본금의 재원으로는 기업의 배당소득세 전환을 검토해 이를 국민배당금으로 활용할 수 있다. 우리는 배당을 법인세와 이중으로 과세를 하고 있어 전통적으로 기업들이 배당을 억제하고 사내에 이익을 유보하는 경향이 많다. 오히려 사내 유보가 많아지면 성장의 욕구가 낮아져 고용의 탄력성이 줄어들 수도 있다. 유보된 자기자본으로 미래기술 개발에 나서면 인간고용 배제의 미래생산 기술을 더 앞당기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최근 기업들이 첨단기술과 지능화 시설 분야에 많은 투자를 하는 현실을 감안해 인적 투입 감소가 불가피하지만, 생산성 개선이 기대되는 산업 부문이라면 기업투자의 비용상각 기간을 고속으로 단축하는 대통령령 등을 시행해 기업투자를 지원하는 동시에 고속상각세도 부과해 재원 마련에 나설 수 있겠다. 또 일정한 감세를 통해 가족기업의 조기 상속과 증여를 유도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해서 늘어난 증여와 상속세 일부를 재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 군 인력도 모병제를 검토하는 지금, 국방비 일부를 군복무 중인 청년들이 전역 후 국내 안보기술이나 국방서비스 관련 업종을 창업할 때 지원하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인원이 줄어드는 데 따라 발생하는 국립대학교나 사립대학교의 학생장학금 지원 재원 여분을 재학생이나 졸업생의 창업지원 자본금 재원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가능하다. 중장년의 노후자산 확보 재원으로는 토지초과이득세나 새로 도입하는 주식의 양도소득세, 종합부동산세 등에서 조성한 재원을 노후재산형성 정부지원금으로 활용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중장년의 자산 격차를 키우는 주된 요인인 부동산 투자부문에서 재건축이나 리모델링의 인허가 정책을 현실적으로 완화해 그 혜택 증가에 따른 정부 개발이익 환수 증가분을 중장년의 노후자산 형성 재원으로 활용하면 좋겠다. 40세를 기준으로 여유가족은 그 전에 미리 증여나 상속을 가능하게 하고, 이를 계기로 증가한 재원으로 지원이 필요한 서민층이나 중장년 저소득층 가족을 도우면 어떨까. 과거 근로자의 자산증식을 도왔던 재형저축과 같은 제도를 마련해 이들의 재산형성과 자산축적을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해볼 수 있다. 마중물을 부어 국민연금의 자발적 가입을 유도하거나 정부 보유 우량주식이나 유휴 국유지의 공개매각 시 혜택을 주는 방안 등도 강구해볼 수도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진입으로 ‘국가 재창업’이라는 대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전의 개념과 가치관으로는 더 이상 모든 국민에게 공정한 기회와 미래사회의 희망을 안겨줄 수 없다. 노동과 기술과 지식의 개인 연마가 어려워지는 대다수 국민과 시대적 국민재산과 국가의 부를 슬기롭게 공유할 시기가 됐다는데, 모든 국민이 인식을 같이할 필요가 있다. 시장경제를 통한 혁신과 성장과 촉진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가운데 국가 공동의 부를 신성하게 공유하려는 국가 시스템이 작동해야 한다. 한국은 가장 민주적이며 산업기술이 우수한 나라다. 어느 선진국보다 먼저 혁신적인 국가자본의 공유시대를 열어나갈 잠재력이 있다. 이 정치의 계절에 지금 어느 진영의 정치가이든, 이 화급한 시대적 화두에 응답해 부디 그 실천에 앞장서주길 당부한다.
- 엄길청의 이코노베이션
- [박이대승의 소수관점](5)한국판 지옥도, 세계 자본주의를 들추다(2021. 10. 22 14:41)
- 2021. 10. 22 14:41 문화/과학
- 이제 <오징어게임>은 좀 지겨운 주제가 됐지만,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꽤 남아 있다. 일단 언론 반응에 시선을 돌려보자. 한국언론 다수는 작품 자체보다 ‘한국 문화산업의 대성공’에 주목한다. 어쩌면 한국 관객에게 드라마 속 지옥은 그리 새롭거나 충격적인 광경이 아닐지 모르겠다. 반면 해외 언론에 그 작품은 공포다. 세상 어딘가에 그런 지옥이 존재하고, 그것이 세계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는 보편적 두려움이 <오징어게임>이라는 전 지구적 문화현상의 한 배경이다. 뉴욕타임스, 가디언, 르몽드, 슈피겔 등 영향력 있는 서구언론 대부분이 한국사회의 불평등과 폭력을 조명하는 심층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한국 관객의 입장은 좀 난처하다. 한국사회의 지옥도를 재현한 작품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걸 기뻐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넥플릭스 제공 드라마, 한국, 자본주의 <오징어게임>의 성공 원인 중 하나는 드라마와 현실이 맺고 있는 독특한 관계다. 이 작품은 생각 이상으로 독창적이다. 미지의 권력자가 평범한 이들을 고립된 장소에 가두어 죽음의 게임을 시작한다는 발상은 익숙하지만, 기존 작품 대부분은 판타지 형식을 택한다. 반면 <오징어게임>의 폭력은 극단적이지만 충분히 현실적이고, 호러 판타지보다 범죄물에 가깝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는 게임 진행자들이 가면을 벗는 순간이다. 그들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게임 참가자와 똑같은 인간이다. 피가 튀고 내장이 잘려나가는 폭력은 초월적 존재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얼굴을 가진 현실의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반(反)판타지는 한국 대중문화를 특징짓는 경향 중 하나다. 할리우드와 일본의 창작자들은 사회적 폭력을 단순하고 노골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다른 우주나 먼 미래로 간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폭력의 진짜 모습은 은폐되게 마련이며, 디스토피아 혹은 아포칼립스적 픽션만이 보여줄 수 있는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창작자는 오히려 역사적 현실에 집중할 때 가장 뛰어난 작품을 창조한다. 멸망한 지구를 달리는 기차의 꼬리칸(<설국열차>)보다 서울의 반지하 주택(<기생충>)이 불평등의 실재를 더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한국의 역사와 현재가 폭력의 작동방식을 있는 그대로 증언하기 때문에 굳이 판타지라는 형식을 빌려올 필요가 없는 것 아닐까. <오징어게임>이 한국에서만 태어날 수 있는 작품이라면, 그 이유도 같은 맥락에 있을 것이다. 한국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자본주의를 발전시켜왔다. 이 말은 한국 자본주의가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특수성을 가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한국사회만이 투명하게 재현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보편적 메커니즘이 있다. 자본주의가 사회적 폭력을 재생산하는 논리를 이토록 분명하게 드러내는 사회는 찾기 힘들다. 아주 먼 훗날의 인간이 21세기 자본주의를 알고 싶다면, 특히 어떻게 인간이 하나의 물건으로 취급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면, 한국 역사를 읽으면 될 것이다. 한마디로 <오징어게임>은 한국사회의 알레고리이고, 한국사회는 그 자체가 세계 자본주의의 알레고리(혹은 환유)다. 이런 식으로 ‘헬조선’은 자본주의의 현실을 직시하는 세계인의 언어가 돼간다. 자본주의와 폭력을 잇는 고리 ‘빚’ 해외 언론이 <오징어게임>을 다루며 특히 주목하는 부채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기훈과 상우는 단지 가난해서 게임에 참여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동기는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빚더미에서 해방돼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바람이다. 게임의 설계자가 승리자에게 약속한 것은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윤리적 가치이고, 참가자들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 타인을 죽여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한다. ‘빚을 갚아야 한다’는 윤리적 명령이 인간을 극단적인 폭력으로 몰아넣고, 평범한 사람을 살인자로 만든다. ‘가난’과 ‘빚진 상태’는 연속적이지만 거기서 발생하는 불평등과 폭력의 양상은 전혀 다르다. 빈곤 국가에서 벌어진 비극의 상당수는 가난이 아니라 서구 국가·자본과 부채 관계로 얽혀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됐다. 당장 한국만 봐도 IMF 사태 이후의 사회적 폭력은 국가의 빈곤이 아니라 부채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현대 자본주의는 전 지구적인 부채시스템이고 금융 자본은 돈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지배력을 행사한다. 부채의 유무와 빈부격차는 다르다. 부자도 빚을 질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빚을 져야만 부자가 될 수 있다. ‘부자’는 단지 돈 많은 사람이 아니라 더 큰 규모의 부채를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빈부격차가 아니라 빚으로 더 큰 돈을 버는 사람과 빚더미에 깔린 사람의 불평등 아닌가? 가장 극단적인 폭력이 시작되는 순간은 자본가가 무산자를 착취할 때가 아니라 금융 자본이 무산자에게 돈을 빌려줄 때인지도 모른다. ‘착취’와 ‘이자’의 차이는 노동자와 노예의 차이만큼 크다. 이 모든 것을 투명하게 볼 수 있는 곳이 한국사회다. 양극화된 노동시장, 높은 자영업자 비율, 급등하는 부동산 가격, ‘선진국’ 수준의 국내총생산(GDP), 금융 소득에 대한 열광 등은 대출과 투자를 평범한 일상으로 만들었다. 어딜 가나 대출 광고가 넘치고, 인터넷에는 빚에 관한 경험담이 가득하다. 대중의 분노와 관심은 부자와 빈자의 불평등보다 부동산, 주식, 코인으로 ‘대박 난 사람’과 ‘빚더미에 앉은 사람’의 격차에 집중된다. 여기서 망하면 0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이너스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오징어게임>의 기훈처럼 망하는 과정마다 부채가 개입한다. 구조조정 당한 후 대출받아 자영업을 시작하고, 자영업 실패 후에는 빚으로 빚을 돌려막는 삶이 시작된다. 자본은 실패자를 무기력하게 놔두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여력이 남았다면 기꺼이 돈을 빌려줘 경제시스템 안으로 데려온다. 대출은 자본주의가 인간을 포획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다. 금융 자본주의는 보통 사람의 이해 범위를 벗어난 난해한 체계로 묘사되곤 한다. 그것은 마치 월스트리트의 수학자가 만들어낸 통계 함수의 비밀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의 본성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냥 드라마에 묘사된 한국 자영업자의 처지를 보면 된다. 빚더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인간, 이것이 자본주의가 부채를 통해 재생산하는 사회적 존재의 모습이다.
- 박이대승의 소수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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