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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 여행자] 전북 전주 - 따끈한 구들 위로 단잠이 눈처럼 쏟아졌다
- 2015. 12. 02 17:18 레저/여행
- 잘생긴 기와지붕을 얹은 전주 톨게이트를 지나 위풍당당한 ‘호남제일문’을 통과하는 짧은 찰나, 전주 사람도 아니거늘 고개가 빳빳해졌다. 한옥마을의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오목대에 올라 검푸른 기와의 도도한 물결을 마주한 순간에도 그러했다. 전주 땅을 밟는 순간, 「혼불」의 작가 최명희가 이야기한 ‘꽃심’이라도 지핀 것일까. 이 고장의 근거 있는 자부심에 동화된 채 종내 식지 않는 흥으로 걷고, 마시고, 기웃거렸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과 한옥마을이 어우러진 풍경은 고색창연한 조화를 이룬다. 고속도로를 통한 여행길이라면 톨게이트는 해당 여행지의 첫인상이 된다. 사실, 그 첫인상이 강렬한 도시는 많지 않다. 운전자가 아닌 이상 졸다 지나치기 십상이며, 모든 톨게이트가 해당 도시의 상징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전주는 다르다. 한옥 기와지붕을 맵시 있게 올린 톨게이트가 보일 때쯤 여행객은 비로소 전주에 왔음을 실감한다. 현판의 힘찬 서체도 근사하다. 한글이 반포된 이후 서민들이 쓰던 글씨체라 하여 ‘민체’라 이르는 서예가 여태명씨의 글씨다. ‘전주’ 현판은 입구와 출구의 글씨가 미묘하게 다르다고 알려져 있다. 입구 현판은 ‘전주’의 자음을 작게, 모음을 크게 쓰고, 출구 현판은 자음을 크게, 모음을 작게 썼다는 것. ‘자음은 아들을, 모음은 어머니를 뜻하는데, 고향으로 들어올 때는 어머니의 큰 사랑과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고 나갈 때는 자식들이 크게 돼라’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전주 톨게이트를 지나면 전주시의 관문인 ‘湖南第一門(호남제일문)’이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일주문으로 유명하며, 현판의 한자는 강암 송성용 선생의 글씨다. 호남제일문이란 이름은 전주가 전라감영의 문, 호남평야의 첫 관문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조선 초기 전주에 설치된 전라감영은 1896년까지 전라남북도를 포함해 제주도까지 통할하는 관청이었다. 전주는 후백제의 왕도이자 조선왕조의 시조인 전주 이(李)씨의 고장으로, 조선왕조의 발상지라는 자부심이 옹골찬 도시다. 왕복 5차선 대로를 가로지른 위풍당당 호남제일문은 그 유서 깊은 자부심의 첫인상이기도 하다. 육교의 기능도 겸하니 한번 올라가볼 만하다. 느릿느릿 걸으며 산책하기에 좋은 운치 있는 전주 한옥마을 풍경. 한옥마을의 전경을 한눈에 담고자 오목대로 향했다. 황산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성계가 귀경길에 들러 잔치를 벌였다는 이 언덕은, 그가 개국의 꿈을 내비침으로써 정몽주와 갈라서게 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700여 채의 한옥이 빽빽하게 군락을 이룬 풍경 앞에 감탄을 삼킨다. 때론 침묵으로 감탄사를 대신해야 할 때가 있다. 깊고 푸른 바다를 만났을 때가 그렇고, 도도한 검은 기와의 물결을 마주할 때도 그러하다. 전주 한옥마을의 유래는 1990년 초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인들의 세력 확장에 반발했던 전주 사람들이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을 짓고 모여 살면서 지금의 한옥마을을 이루게 됐다고 한다. 1 호남 지역의 서양식 근대 건축물로는 가장 오래된 전동성당.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로 손꼽힌다. 2 전동성당이 세워진 자리는 원래 전라감영이 있던 자리로, 우리나라 천주교 첫 순교자가 나온 곳이기도 하다. 3 대하소설 「혼불」을 남긴 전주 출신 최명희 작가의 삶과 문학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최명희문학관. 4 기록문화의 땅으로 전주를 재조명하고자 설립한 완판본문화관. 꽃담 너머 이야기를 기웃거리며 「삼국사기」 중 백제 위례성의 새 궁실을 묘사한 문구인 ‘儉而不陋 華而不侈(검이불루 화이불치: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전주의 문화와 전통, 의식주를 아우르는 미학이다. 톨게이트부터 시작된 ‘전주다움’은 발길 닿고 눈길 닿는 족족 온전히 그러했다. 국내 현존하는 향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제대로 보존된 전주향교는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학생들을 가르치던 명륜당 등의 건물로 구성돼 있다. 마당에 400년 수령의 은행나무도 만날 수 있는데, 벌레가 타지 않는 은행나무처럼 유생들이 반듯하게 자라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향교엔 꼭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전주향교 앞의 완판본문화관은 기록문화의 땅으로 전주를 재조명하고자 설립한 곳이다. 전주에서 발간한 옛 책과 판본을 이르는 ‘완판본’은 서울의 ‘경판’과 함께 조선시대 목판인쇄의 양대 산맥으로 통했다. 목판인쇄 및 제본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당시의 기법으로 책을 만들어볼 수도 있다. 이야기를 품은 작은 골목길로 이어진 전주 한옥마을은 자신의 보폭으로 완성하는 여행지다. 담장 너머를 기웃거리며 발길 닿는 대로 이어지는 길 위에 마음을 얹으면 족하다. 야트막한 담장 너머 여염집을, 아기자기한 공방과 카페를 기웃거리며 걷다 보니 최명희문학관 앞이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그의 고향이기도 한 전주를 ‘꽃심을 지닌 땅’이라 했다. ‘꽃심’은 사전에 없는 말이지만 ‘꽃의 마음’, 혹은 ‘꽃의 힘’으로 풀어도 충분하리라. 아름다운 우리말로 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생생하게 그려낸 「혼불」은 그가 17년에 걸쳐 200자 원고지 1만2,000장 분량으로 완성한 대하소설이다. 작가는 말한다.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라고. ‘생애를 기울여 한마디 한마디 파나간’ 소설을 단숨에 읽어내릴 수는 없는 일. 적어도 한 시절을 기울여 읽어야 할 소설이다. 최명희문학관까지 왔다면 바로 이웃해 있는 부채문화관과 교동아트센터를 함께 둘러볼 만하다. 경기전과 전동성당도 가깝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창건된 경기전은 경사스러운 터에 지어진 궁궐이란 뜻을 담고 있다. 경기전에서 궁궐 담장 너머로 바라보는 전동성당은 매우 인상적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과 한옥마을이 어우러진 풍경은 이물감보다는 고색창연한 조화를 이룬다. 세월을 입은 건축물들은 동서양의 차이를 넘어 아름답게 낡아가는 속성을 공유하는 까닭이다. 내친김에 보폭에 탄력을 실어 남부시장까지 걸었다. 조선 3대 시장으로 통했을 만큼 역사와 규모를 자랑하는 전통 재래시장에 색다른 재미가 깃들었다는 소문을 들어온 터였다. 시장 2층에 형성된 ‘레알뉴타운’ 청년몰이 그것. 재기 발랄한 청년들이 운영하는 20여 곳의 이색 점포들은 전통의 도시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1·3 남부시장 2층에 조성된 청년몰. 재기 발랄한 청년들이 운영하는 이색 점포가 전통시장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2 유수한 명창들의 판소리 공연이 열렸던 학인당 본채 거실. 일제강점기 국악인과 예술인들의 교류 장소로 기능했다. 4 한옥마을의 정신적 중심지인 전주향교의 대성전. 샘이 깊은 집에서의 하룻밤 여행객에게 해가 짧은 겨울은 언제나 아쉽다. 더욱이 전주처럼 볼 곳 많은 도시라면 뉘엿거리는 해가 입 속에서 닳아 없어지는 알사탕처럼 아깝기만 하다. 하지만 또한 다행인 것이, 전주에서의 한옥 숙박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여정이 된다. 한옥마을엔 숙박이 가능한 한옥 체험관과 한옥 게스트하우스, 한옥 민박 시설이 100여 곳에 이른다. 그중에서도 학인당에 방을 잡은 것은 행운이었다. 고택 문화재이기도 한 학인당은 1905년부터 약 3년에 걸쳐 연인원 4,280명이 참여해 지은 집으로, 한강 이남 민가 중 가장 화려한 고택으로 손꼽힌다. 궁중 건축양식을 민간 주택에 도입한 예로 본채 건물의 내부 구조는 창덕궁 희정당과 비슷하다. 건물 구조는 전통 한옥 양식을 취했지만 유리 여닫이문을 두르고 내부 생활공간을 서재, 세면장, 목욕탕, 화장실 등 양옥 형태로 구성해 생활의 편리를 추구했다. 개량형 한옥의 모습을 지닌 학인당은 근대 한옥 구조 변천사를 이해할 수 있는 건축사 학술 자료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학인당은 국내 최초의 한옥 국악 공연장으로도 유명하다. 학인당의 건립자 인재 백낙중은 국악과 소리를 아꼈던 인물. 전주감영과 전주부에서 내려오던 대사습 경연이 조선 말 중단된 것을 안타까이 여긴 그는 본채의 넓은 대청을 판소리 연희장으로 제공, 국악인들을 초청해 꾸준히 공연을 열며 판소리의 명맥을 유지하도록 후원했다. 그의 아들 백남혁 역시 선대의 유지를 받들어 일제강점기 때 국악인과 예술인들의 교류 장소로 학인당을 제공했다. 임방울, 박녹주, 김연수, 박초월, 김소희 등 유수한 소리꾼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소리로 민족의 정신을 지켜낸 학인당은 광복 후, 김구 선생 등 정부 요인의 전주 방문시 영빈관의 역할을 맡기도 했다. 본채 큰방의 명칭이 ‘백범지실’인 이유도 그 때문. 김구 선생이 머물렀던 본채 큰방도 숙박 체험공간으로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학인당에서 또 하나 주목할 곳은 정원이다. 소나무와 돌과 연못을 배치한 정원은 여느 전통 한국식 정원과 다를 바 없지만 그 이면엔 비밀스러운 샘을 간직하고 있다. 연못 한쪽에 조성된 이끼 낀 돌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 만나게 되는 아담한 박우물이 그것. 땅 밑에 있다 하여 땅샘이라 부른다. 학인당 본채를 지을 당시 발견한 우물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그와 같이 독특한 구조를 고안해냈다고. 기실, 대부분의 우리나라 전통 정원이 본채 뒤에 조성되는 데 반해 학인당은 본채 앞에 정원을 조성한 것이 특징인데, 이 오래된 우물을 지키기 위한 의도임을 짐작할 수 있다. 강물은 흐르고 샘은 솟아야 조화로운 법. 먼저 자리 튼 물길을 위해 사람이 비켜 선 사려 깊은 조경 원칙과 마주하니, 정원이 꼭 인위의 산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땅샘은 여름에도 서늘한 온도를 유지해 예부터 자연 냉장고로 쓰였다고 한다. 지금도 여름이면 수박 같은 과일을 띄워놓는 운치를 누린다 하니, 샘을 지킨 복록이 대대손손 이어지는 듯싶다. 학인당의 종손은 초겨울이라 정원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며 아쉬워했지만 샘솟는 이야기가 야윈 풍경을 충분히 갈음했다. 100년 전에 지어진 잘생긴 한옥에서 머무는 하룻밤은 가만가만, 선비 걸음으로 깊어갔다. 잠들기 아쉬운 밤, 시간이 사위어드는 풍경을 지켜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따끈한 방바닥에 몸을 뉘고 바스락거리는 홑청에 싸인 솜이불을 코까지 끌어다 덮으니 단잠이 눈처럼 쏟아졌다. 모처럼 꿈 없는 잠을 잤다. <■글 / 고우정(여행작가) ■사진 / 현일수(리빙룸스튜디오)>
- 정원 여행자
- [정원 여행자]전북 고창, 서럽도록 붉고 시리도록 푸른 봄날에
- 2015. 04. 02 11:15 레저/여행
- 보리밭 사잇길을 지나, 철쭉을 휘감은 조선시대의 읍성을 한 바퀴 돌고, 천년고찰을 병풍처럼 에워싼 동백 숲에 이르렀다. 청춘의 보리는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고창 군민의 정원이라 할 모양성과 후드득 눈물처럼 꽃이 지는 선운사는 서럽도록 붉었다. 봄의 절정, 봄이 봄을 밀어내는 풍경 앞에 마냥 헤실거릴 수도 없지 않나. 어쨌거나 이별인데. 초록 물결이 끝도 없이 펼쳐진 학원농장은 봄날, 고창에 가야 하는 강력한 이유다. 초록 물결 일렁이는 보리밭 사잇길로 보릿고개를 알 턱도 없고, 보리피리를 불어본 경험도 없다. 보리에 대한 기억이라면 그저 어린 시절에 즐겨 하던 ‘쌀, 보리’ 놀이와 가곡 ‘보리밭’을 배우던 음악 시간 정도다. 한데 몇 해 전 4월, 고창 청보리밭 축제를 다녀오고부터 보리에 대한 애착이 생겼다. 바람이 불고 멈춤에 따라 물결치는 바다가 됐다가 침묵하는 호수가 되기도 하는 보리밭 사잇길을 걸어본 연후, 멥쌀에 구수한 찰보리를 섞어 밥을 짓고 보리차를 끓여 마셨다. 가루녹차 같은 보리순 분말을 찬물에 녹여 녹즙처럼 마시기도 했다. 입 안 가득 짙은 풀내를 머금고 있노라면 청보리밭에 이는 청신한 바람이 몸속으로 스미는 것 같았다. 고창의 옛 지명인 ‘모양현(牟陽縣)’의 ‘모’ 자는 보리를, ‘양’ 자는 태양을 뜻한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보리가 잘 자라는 고장’인 셈이다. 보리는 10월 말, 11월 초에 파종해 11월 말경 잔디 모양으로 자라며, 이후에는 성장을 멈추고 눈 속에서 봄을 기다린다. 겨울 추위를 이겨낸 보리는 이듬해 3월 초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해 이삭이 패기 시작하는 4월 중순부터 누렇게 익기 전인 5월 중순 사이가 가장 예쁜 ‘청춘’이다. 이 시기의 보리를 ‘청보리’라 부르는 이유도 그 때문. 고창 학원농장에서 열리는 청보리밭 축제는 오는 4월 18일부터 5월 10일까지 진행되는데, 광활한 보리밭을 배경으로 보리밭 사잇길 걷기, 보리 음식 먹기를 비롯한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다. 초록 물결이 끝도 없이 펼쳐진 학원농장은 봄날, 고창을 찾는 강력한 이유가 된다. 보리밭 사잇길을 걷노라면 유명한 노랫말처럼 ‘뉘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게 될지도 모른다. ‘옛 생각’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대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때문이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곡 중 단연 상위권을 차지할 ‘보리밭’은 박화목의 시에 작곡가 윤용하가 곡을 붙였다. 한국전쟁 당시 종군기자였던 박화목은 부산 피난 시절 해군음악대 소속의 윤용하를 만났다. 고향이 같고 연배가 비슷해 쉽게 친해진 이들은 대폿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다가 “이 참담하고 어지러운, 실망과 좌절의 시기에 국민들에게 따뜻함을 줄 수 있는 노래를 만들자”라며 의기투합했다고 한다. 박화목이 회고한 가곡 ‘보리밭’의 탄생 비화다. 1 고창읍성 내 대숲도 압권이다. 영화 ‘관상’의 촬영지이기도 한 맹종죽림 안에는 서늘한 바람이 고여 있다. 2 벚꽃이 지고 나면 철쭉으로 갈아입는 고창읍성. 이처럼 화려한 꽃단장은 봄의 마지막 인사다. 3 시문학관 인근에 위치한 안현돋음볕마을은 미당의 시를 모티브로 한 벽화로 꾸며져 있다. 4 서정주 시인의 고향인 부안면 선운리에 세워진 미당시문학관. 5 청보리밭 축제 기간에 만날 수 있는 유채밭은 언제나 좋은 사진 촬영 포인트다.윤용하는 음악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음악적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20세에 이미 오페라를 작곡했으며, 동요 ‘나뭇잎배’와 ‘노래는 즐겁다’ 등을 지었다. 하지만 배곯던 시절, 음악가로 산다는 건 쉽지 않은 길이었다. 가난과 고독을 술로 달래던 그는 자신의 노래가 그처럼 널리 사랑받는 것을 보지 못한 채 홀로 단칸방에서 세상을 떠났다. 꽃 피던 날은 짧았지만 꽃 진 뒤의 날들은 오래도록 푸르고 깊다 (도종환, ‘초록 꽃나무’ 중에서) 올해는 43세에 절명한 작곡가 윤용하의 50주기가 되는 해다. 순정한 예술가의 삶은 짧고 외로웠지만 그가 남긴 노래는 맥랑이 일렁이는 계절 내내 불리고 또 불려진다. 고창에 시심(詩心)을 지핀 건 8할이 미당이다 ‘모양성’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고창읍성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조선 단종 원년(1453년)에 축조된 자연석 성곽으로 성벽의 높이는 4~6m, 길이는 1,700m에 이른다. 고창읍성에는 성 밟기와 관련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머리에 돌을 이고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에 간다’라는 이야기다. 읍내 한가운데에 위치한 고창읍성은 고창 군민들에게 오래도록 사랑받아온 공원이다. 이곳 토박이들은 성곽길을 밟으며 자라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마 등에 업혀 오르던 길이자 소꿉동무와 달렸던 길이며, 첫사랑의 손을 잡고 걸었던 길이다. 그렇게 몇 바퀴를 돌고 나면 엄마가 그랬듯 내 아이를 업고 걷기도 할 것이다. 주택가 인근에 이와 같은 숲길, 꽃길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각자의 대문을 열고 나와 아름다운 정원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 성곽길을 걸었다. 붉은 꽃길도 좋지만 성 안의 소나무 숲과 대숲도 장관이다. 영화 ‘관상’의 촬영지이기도 한 맹종죽림은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리꽂은 죽비인 것처럼 맑고 서늘한 기운이 짱짱하다. 선운사에 가기 전 미당시문학관을 찾았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고향인 부안면 선운리에 세워진 문학관은 미당의 유품 5,000여 점과 함께 시인으로서 빛나는 삶은 물론 친일 행적까지 담아냈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천생 시인을, 또 누군가는 오욕의 사내를 읽고 갈 터. ‘미당의 시로 그의 처신을 덮어버릴 수는 없다. 미당의 처신으로 그의 시를 폄하할 수도 없다’라는 김춘수 시인의 딜레마가 문학관 한쪽 벽면에서 시선을 잡아맨다. 미당의 ‘자화상’이라든가 ‘동천’ 같은 시를 처음 만났을 때의 두근거림을 잊지 못한다. 내 마음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서정주, ‘동천(冬天)’) 6 만세루에서 바라본 선운사 대웅보전. 차를 즐길 수 있는 휴식공간이다. 7 꽃과 잎이 함께 돋은 꽃나무와 함께 봄날도 저물어간다. 8 낱낱의 꽃잎을 흩뿌리지 않고 꽃송이째 툭- 떨어지는 동백은 낙화의 비장미로 주목받는 꽃이다. 9 주변 풍광을 거울처럼 담아내는 도솔천 덕분에 물 밖 세상과 물 속 세상이 데칼코마니처럼 펼쳐진다. 차가운 겨울밤 눈썹 같은 초승달을 볼 때면 설화 같은 저 시가 먼저 생각났고,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 같은 시구엔 ‘바람’ 대신 ‘술’, ‘안개’, ‘잠’ 무엇을 넣어도 적절해 기분 따라 돌려쓰곤 했으니. 미당의 처신을 싫어하긴 쉽지만, 그의 시를 좋아하지 않기란 힘들다. 미당은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무려 1,625개에 달하는 세계의 고봉 이름과 그 높이를 외웠다고 한다. 왜 매일같이 산 이름을 외우는가 물으면 “세계의 모든 산신령과 친구 되는 기분이 든다”라고 답했다는데. 노 시인이 택한 그 독특한 두뇌 운동은 세속적 욕망이건 시적 성취건 늘 높은 곳을 지향했던 미당의 삶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일화가 아닐까 싶다. 문학관 인근에 위치한 안현돋음볕마을은 미당의 ‘국화 옆에서’를 모티브로 한 벽화로 꾸며져 있다.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 같은 마을 아주머니들의 푸근한 얼굴을 수놓은 담벼락이 정겹다. 꽃이 져도 같이 울지 못했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 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드득 지는 꽃 말이에요 특유의 너울거리는 창법으로 송창식이 부르는 ‘선운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낱낱의 꽃잎을 흩뿌리지 않고 꽃송이째 툭- 떨어지는 동백은 ‘나무에서 한 번, 땅 위에서 다시 한 번’ 피어난다는 헌사와 함께 낙화의 비장미로 주목받는 꽃이다. 이를 두고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라는 김훈의 문장도 탁월하지만, 그럼에도 동백이 지는 모습을 묘사한 글귀 중 가슴에 맺히는 것은 ‘눈물처럼 후드득 지는 꽃’이다. 하여 송창식의 ‘선운사’를 들을 때면 행간의 여백마다 맞장구로 일관한 추임새를 넣곤 한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있지요. 바람 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 그럼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봤지요. 눈물처럼 후드득 지는 꽃 말이에요- 그러게요…. 선운사에 갔던 날들을 돌아보니 스물일곱에서 서른둘, 서른아홉, 마흔으로 내 나이만 달라질 뿐 때마다 봄이었다. 조금 이르거나 늦은 4월 언저리, 매번 동백을 보러 갔건만 첫 번째 선운사행에선 동백을 보지 못했다. 일러도 너무 일러, 선운사 입구 사하촌에서 동백처럼 붉은 복분자주만 들입다 마셨다. 술잔에 핀 꽃으로도 충분하다고 취해 떠들었지만 술 깨고 돌아오는 길엔 영 시무룩했던 기억이다. 선운사는 동백을 보러 가는 절이다.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라는 사연(김용택 시인의 ‘선운사 동백꽃’)도, 아직 일러 피지 않은 동백꽃 대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만 듣다 간 사연(서정주 시인의 ‘선운사 동구’)도 이곳에는 차고 넘치리라. 일주문을 지나 선운사까지의 진입로는 도솔천을 따라 이어진다. 동백으로 이름난 선운사가 가을에도 사랑받는 이유는 이 천변에 도열한 단풍나무들 때문인데, 신록이 물오른 도솔천도 선경이긴 매한가지다. 주변 풍광을 거울처럼 담아내는 도솔천은 반영 사진을 찍는 포인트로도 유명하다. 물 밖 세상과 물 속 세상이 데칼코마니처럼 펼쳐진다. 경내로 들어서면 대웅전을 병풍처럼 감싼 동백나무 숲의 위용을 우러르게 된다. 평균 높이 6m에 달하는 500년 수령의 동백나무 군락 앞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른다. 기막힌 아름다움과 슬픔을 경험하는 순간의 공통점은 탄성과 탄식조차 삼키게 된다는 것. 동백나무 그늘 밑에 낭자한 젊고 붉은 주검 앞에 끽소리도 내지 못했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어야 하거늘. 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 없어야 하거늘. 오래도록 같이 울지 못한, 너무 빨리 잊어버린 4월의 죄의식이, 눈물처럼 후드득 꽃이 지는 동백 숲에서 송연히 되살아났다 Tip 고창의 추천 명소 매산리 고인돌 유적 고창은 전남 화순, 경기도 강화와 더불어 국내 3대 고인돌 분포 지역으로 손꼽힌다. 특히 500여 기에 달하는 고창 매산리 산기슭의 고인돌 유적은 산 전체가 고인돌 군락지라 할 만큼 밀집도가 높고 탁자 모양, 바둑판 모양 등 다양한 형태를 선보여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유적 탐방에 앞서 고인돌박물관부터 둘러보면 고인돌과 선사문화에 대한 이해를 도모할 수 있다. 전시 및 체험 공간과 아울러 입체영상관, 뮤지엄 숍 등을 운영하는 박물관은 고인돌 유적까지 탐방 열차인 ‘모로모로 열차’를 운행한다. <■글 / 고우정(여행작가) ■사진 / 현일수(리빙룸 스튜디오)>
- 정원 여행자
- 김보금 전북여성일자리센터장의 경력 단절 여성을 위한 조언
- 2014. 12. 29 14:26 화제
- 20대에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40대 중반이 되면 커리어 면에서 정점을 찍는다. 이론상으로는 분명 그렇다. 하지만 결혼 뒤 임신, 출산, 육아, 자녀 교육, 가족 돌봄으로 직장을 그만두는 우리나라 상당수의 3040 여성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얘기다. 그리고 그들은 ‘경력 단절 여성’이라는 사회적 이름을 얻는다. 천신만고 끝에 재취업 지난해 11월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15~54세 기혼 여성 중 직장을 그만둔 여성이 213만9천 명으로 전체 기혼 여성의 22.4%를 차지했다. 직장을 그만두는 사유는 결혼(82만2천 명), 육아(62만7천 명), 임신·출산(43만6천 명), 가족 돌봄(16만2천 명) 순으로 나타났다. 중학교 교사, 소비자 운동가로 활동하다가 2011년 전북여성일자리센터장으로 부임한 김보금씨(55)는 경력 단절 여성들의 재취업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우리 사회의 경제적 여건이 ‘맞일’을 하지 않으면 자녀들 교육비와 생활비 감당이 어려운 환경으로 경력 단절 여성들의 취업 요구가 높아진 데 따른 것이다. 김 센터장은 전북은 대기업보다는 중소형 업체가 많은 지역으로 청년층보다는 ‘1인 다기능’이 가능한 주부들이 취업하기 유리한 틈새가 있다는 점을 간파했다. 덕분에 지난 2013년 한 해 동안 전북여성일자리센터를 통해 4천433명의 여성이 취업에 성공했다. “아이도 잘 키우고 싶고 일도 하고 싶고 돈도 벌고 싶다는 주부들이 많지만, 일과 가정의 양립이 어렵다 보니 갈등도 있어요. 또 취업은 하고 싶은데 자격증 등 스펙에서 밀리거나 자신감이 없다는 분들도 많고요.” 김 센터장에게 취업 연계를 의뢰하는 여성들의 연령대는 40대가 가장 많다. 30대에 육아에 매진했던 그녀들은 이제 빠듯한 생활비와 아이들의 교육비로 인해 다시 바깥일이 필요해진 것이다. ‘잘할 수 있을까’, ‘그냥 남편 월급으로 어떻게든 살아볼까’ 하는 갈등을 딛고 취업에 성공해도 직원 간의 소통, 가사 부담 등의 일명 ‘경(력)단(절) 사춘기’를 겪는 탓에 취업 1년 뒤 남는 인원이 100명 중 31명밖에 안 되는 것이 현실. 그만큼 어려운 것이 ‘경력 재생’이다. 그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김 센터장은 최근 경력 단절 여성 13인의 재취업 성공 스토리를 담은 「엄마, 어디 가?」를 펴냈다. 그녀는 이 책에 소개된 이들은 ‘천신만고 끝에 취업에 성공한 사례’라고 일컬었다. 나이, 경력, 신체적·정서적 장벽에 부딪혀 주저앉은 여성들이 다시 일어서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만들었다는 이 책이 주는 공감의 힘이 크다. “13명 모두 대단한 여성들이에요. 그중 권효정씨는 27세에 육종암 판정을 받고 치료했는데 다시 재발하는 아픔을 겪었어요. 그 과정에서도 3명의 자녀를 낳은 그녀는 ‘딸아이에게 당당한 엄마가 되고 싶다’라며 저희 센터의 2개월 무료 맞춤형 교육을 받았고 연구소 사무직 면접을 봤어요. 면접 현장에서도 당당히 환자였음을 알리고 일자리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어필해 여러 명의 후보를 제치고 합격했죠. 연구소 대표는 권효정씨의 당찬 일 처리에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죠.” 김 센터장은 “재취업에 도전한 그녀들이 흘린 눈물의 질량을 어떻게 책에 다 담아내겠는가 싶기도 했다”라는 고백에 이어 건설 현장에서 남편을 잃고 4남매를 키우기 위해 재취업 전선에 뛰어든 유승화씨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다고 했다. 13명의 주인공들이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을 수도 있는 이야기를 선뜻 이 책을 통해 공개하기로 마음먹은 데에는 취업을 고민하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깊은 마음 씀씀이가 큰 몫을 했다. 자신의 상태 점검이 우선 “아줌마라고, 40세가 넘었다고, 제조업 일자리도 구하기 어려운데 무슨 사무직이냐고 고개를 내젓는 기업체 대표는 물론, ‘몇 푼이나 번다고 이 고생이냐’라고 볼멘소리를 하는 남편들의 항의도 재취업을 준비하는 여성들을 힘들게 합니다. 경력 단절 여성들의 재취업을 위한 기업의 배려는 물론 일과 가정이 양립될 수 있도록 가족 구성원의 적극적인 지원이 절실합니다. 가사 노동에 대한 부담도 함께 나누고 무엇보다 엄마의 노동의 가치를 인정해야겠죠. 아울러 어린이집 확충, 초등학교 돌봄 교실 확대 등 사회적인 관심과 지원도 늘어야 하고요.” 취업을 마음먹었지만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는 여성들을 위해 김 센터장은 가까운 지역의 여성새로일하기센터를 방문하길 권했다. 그럼 취업의 반절은 성공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경력 단절 여성 중 처음 취업에 나서는 여성들의 경우 두려움이 앞서 행동에 옮기지 않고 갈등만 하는 경우가 많다. “재취업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보는 거예요. 오랫동안 직장을 떠나 있었던 점을 감안해 자신의 성격과 직업의 공통점을 찾아봐야 합니다. 이를 위해 구직 상담 후 5일간의 집단 상담 프로그램 참여를 적극 추천해요. 취업을 희망하는 여성이면 누구나 무료로 받을 수 있고 자신의 성격과 직업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거든요. 특히 집단 상담 프로그램을 통해 경력 단절 여성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만나 교류함으로써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어요.” 「엄마, 어디 가?」에 소개된 정연경씨의 경우 잘 운영하던 의류 대리점이 실패한 이후 재취업에 나섰으나 40대 후반이라는 나이에 발목이 잡혔던 케이스. 늦었다고 포기할 법한 나이에 그녀는 당장의 수입보다 투자를 택했다. 고객상담사 교육을 받은 전략은 성공했다. 고용노동부의 내일배움카드를 활용해 교육비의 80%를 지원받은 그녀는 고객만족(CS) 강사, CS 리더스 강사, 병원 코디네이터, 성폭력 예방 강사, 정리수납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현재 기업체와 청소년대학직업 캠프 등의 강사로 부지런히 활동하고 있다. 김 센터장 역시 재취업을 위한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활용할 것을 적극 권한다. 요즘 인기 드라마 ‘전설의 마녀’에는 제과제빵 교육을 받은 주인공이 그 능력을 살려 사회인으로서 기틀을 다지는 이야기가 나온다. 제과제빵이나 바리스타와 같은 요리 분야는 나이나 경력, 학력의 구애를 덜 받고 직업훈련을 통해 재진입이 가능해 눈여겨볼 만하다. 이 밖에 고용노동부와 한국고용정보원이 경력 단절 여성의 재취업이 용이한 직업으로 선정한 직종으로는 교육 관련 분야의 학습지도사(방과 후 교사, 직업진로체험지도사, 독서지도사 등), 사무직종 분야의 경리회계사무원(세무사회에서 추진하는 전산회계 2급 자격증 취득이 필수), 보건복지 분야의 요양보호사(요양보호사 1급), 병원 코디네이터(민간자격증), 상담 분야의 직업상담사(국가자격증), 상담심리사(민간자격증), 다문화방문교육지도사(민간자격증) 등을 꼽을 수 있다. 그 외에 미용, 고객 상담, 제조·가공·유통까지 품질관리를 책임지는 품질관리원 분야가 있다. 김보금 센터장이 꼽은 재취업을 계획하는 경력 단절 여성 십계명 1 자신이 희망하는 직업이 요구하는 능력을 얼마나 갖췄는지 객관적 진단 도구를 통해 확인할 것. 2 직업의식 및 자신감 회복을 위해 관내 취업 알선 기관에서 운영하는 집단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해볼 것. 3 경력 단절 여성 중 기초부터 직업 역량을 키워야 하는 경우 직업훈련비를 지원하는 내일배움카드제 등을 이용해 훈련을 받거나, 살고 있는 지역의 관련 기관을 이용할 것. 4 정확한 직업 정보 제공을 받기 위해 워크넷, e-새일시스템에 들어가 구직 신청을 할 것. 5 급변하는 직업 동향을 따라잡기 위해 온·오프라인 강의를 통해 현재의 직업 흐름을 알아볼 것. 6 일과 가정 양립을 위해 현재 자신이 가진 강점과 약점, 기회와 위협적인 요소를 파악할 것. 7 국가자격증이나 민간자격증 취득을 계획할 때는 자격증 취득이 주는 장점과 단점을 구체적으로 파악한 뒤 도전할 것. 8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방향이 불분명한 경우에는 자원봉사센터의 프로그램이나 직업 체험을 통해 자신에게 무엇이 맞는지를 파악한 뒤 교육을 받을 것인지, 취업을 할 것인지를 결정할 것. 9 학력, 나이, 자격증, 경력 등에 비춰 자신이 현재 어떤 직종에 취업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아볼 것. 10 입사할 회사를 선택할 때는 업체의 정확한 정보를 파악한 뒤 지원할 것. <■글 / 장회정 기자 ■사진 제공 / 김보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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