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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운동가에서 교수로 변신한 故전태일 열사 매제 임삼진
- 2004. 02. 01 화제
- “제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전태일 열사보다 유명해지기는 어렵죠” 20여 년간 시민운동을 했던 임삼진씨가 연구교수로 발령받았다. ‘고 전태일 열사의 매제’라는 꼬리표 때문에 그의 행보는 종종 관심의 대상이 됐다. 총선을 앞두고 한양대 교정에서 그를 만났다. 미완의 도전으로 끝난 녹색 정치의 실험이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했다. 광화문 사거리에 횡단보도 만든 시민운동가 바야흐로 총선의 시기다. 총선이 다가오면서 정치판이 요동을 친다. 각 당에서는 능력 있고 이름 있는 사람을 영입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20여 년간 시민·사회 활동을 해온 고 전태일 열사의 매제 임삼진씨(44)의 행보가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서울대 철학과 졸업 후 1980년대 운수노보 편집장, 박종만추모사업회 사무국장, 서울노동운동단체협의회 공동대표, 녹색교통운동 사무총장, 녹색연합 사무처장 등 시민운동계에서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DJ 정부에서는 대통령 민정비서실 국장(98~99)까지 했으니 그가 이번 총선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정치판이 아닌 대학 캠퍼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민운동가에서 교수라는 직함을 얻은 것. 얼마 전 한양대학교 교통공학과 첨단도료연구센터의 연구교수 발령을 받았다. 석사 학위로 연구교수 발령을 받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동안 시민운동을 하면서 경험한 교통 관련 행정 경험을 인정받아서 가능한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축하 전화를 해줬어요. 청와대에서 나온 이후에 힘든 점이 많았거든요. 제 어려움을 아는 사람들은 ‘차라리 정치를 하지 왜 힘들게 사회운동을 하느냐’는 이야기도 많이 했어요. 그러다 안정적인 직장을 잡으니까 아는 분들이 많이 좋아하셨죠. 특히 장모님(이소선 여사)이 정말 좋아하시던데요.(웃음)” 임삼진 교수는 대학에서 석사 과정에 있는 학생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맡아서 운영할 예정이다. 그리고 서울대에서 교통기술정책에 관한 박사 과정을 밟을 예정. 임 교수는 함께 있는 학생이나 교수들도 시민운동을 하면서 알던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고 말한다. 그는 시민단체에서 일할 때부터 교통에 관한 세미나와 포럼에 단골로 초대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학교에 가니까 젊어져서 좋아요. 제가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말을 잘 놓지 않는데, 학생들이 말 놓으라고 성화네요. 시간이 가면 스스럼없이 이야기할 수 있겠죠.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는 게 너무나 좋고, 생활이 안정되니까 행복이 두 배예요.(웃음)” 그는 전부터 교통에 관한 한 전문가 소리를 들었고, 그동안 이룬 성과도 상당하다. 1999년에 광화문 사거리에 드디어 횡단보도 2개가 만들어졌다. 당시는 광화문에 횡단보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고발 프로그램이 방송된다 해도 꿈쩍도 하지 않던 때다. 임 교수는 1998년 서명운동을 벌여 1만 명의 참여를 얻었다. 그리고 노약자나 장애인이 거리를 걸어다니는 권리인 ‘보행권’의 개념을 알린 주인공이다. “서명운동 이후 광화문에 횡단보도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제가 직접 그리려고 했어요.(웃음) 벌써 만들어졌어야 하는데, 복지부동하는 공무원들의 특징 때문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거죠. 그리고 보행권이라는 개념을 알리기 위해서 ‘보행권 회복을 위한 도심지 걷기 운동’도 했어요. 시민운동을 할 때는 정신없이 뛰어다닌 기억밖에 없네요.(웃음)” 그는 ‘스쿨 존(School Zone)’을 만들기도 했다. 95~96년에 거의 모든 학교 부근에 설치됐는데, 이것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학교 담을 빙 둘러싸고 주차해놓은 풍경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스쿨 존이 만들어진 이후에는 주차가 불가능해졌다. 아이들이 등·하교할 때 위험한 장면들이 없어진 것. 과속 차량의 범칙금을 파출소에서 받던 것을 벌금 통지서로 만들어 징수하게 한 것도 임 교수다. 그는 시민운동을 할 때부터 사회 전반의 제도 개혁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시민운동 경력과 경험을 인정받아 DJ 정부 시절에는 민정비서실 국장으로 청와대에 합류했다. 이번 총선에는 출마하지 않을 것 임 교수는 청와대에서도 능력을 발휘했다. 제주 4·3 특별법을 제정하는 데 산파 역을 맡았고, 신용카드 영수증 복권 제도를 제안한 당사자다. 또 여러 시민·사회 운동 단체와 대통령의 면담을 주선하고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시민운동을 하던 사람이 정치 한복판에 들어가는 데 많은 의심의 눈초리도 받았다. “당시 우리나라는 IMF 시국이었어요. 만일 IMF가 없었다면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았을 겁니다. 지식인으로서 뭔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국난 극복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거든요.” 청와대에서 한 일 중 가장 보람을 느끼는 것은 ‘제주 4·3특별법 제정’이다. 그는 ‘강성구 선배의 눈물’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당시 4·3 사건은 보수와 진보 세력간에 다양한 의견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희생자 사이에서도 보상 문제로 특별법 제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어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하지만 제주도에서 비행기를 타고 밤에 그를 찾아온 제주평화목장 대표 강성구씨의 눈물은 그를 움직였다. “4·3 사건 희생자들이 얼마나 어렵게 지내고 있는지 아느냐”며 눈물 흘리는 강성구씨를 보고 특별법 제정에 열을 올리게 됐다. 당시 임 교수의 성화 때문에 밤잠 못 잔 정부 관료들도 많다고. “절박한 마음으로 가지고 하는 일은 사람을 감동시킨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제가 너무나 열성적으로 여기저기 쫓아다니고 전화해서 약 한 달 만에 국회에서 특별법을 통과시켰으니까요.(웃음) 당시에 관련 단체들이 보상이 아닌 명예회복을 원해서 특별법이 제정될 수 있었죠.” 총선이 있던 지난 2000년, 그는 청와대를 나왔다. 공천만 받으면 당선이 확실시되는 후보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임 교수는 장모와 함께 권력 실세를 만났다. 공천에 관한 이야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많은 고민을 하게 됐다. 시민운동가의 양심으로 실세의 낙점에 의해 정치인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것. 집에 와서 아내(전순덕씨)와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와 아내가 내린 결론은 정치를 포기하는 것. 그리고 ‘경선을 통한 상향식 공천’과 ‘정당 민주화’를 주장해 화제의 인물이 됐다. 임 교수는 정치권 대신 시민운동가로 돌아간다. 2000년 4월부터 녹색연합 사무처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건 또 다른 시련이었다. 녹색연합에 들어간 지 2개월 만에 녹색연합의 간판스타(?)인 장원씨의 성추행 사건이 터진 것. 실망한 녹색연합 회원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재정 상태는 최악이었고, 간사들의 월급은 3개월씩 체불되기 시작했다. “그때 무척 힘들었죠. 하지만 신앙의 힘으로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일했어요. 녹색연합의 명성이 부활한 계기가 7월에 있었던 주한미군 독극물 방류 사건이죠. 저희가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미군의 공식 사과를 받아냈어요. 그때부터 녹색연합이 다시 살아났죠. 그 후 백두대간에 대인지뢰가 묻혀있다는 것, 캠프 이글에서 폐유를 방류한 사건 등을 계속 폭로했어요.” 임 교수가 ‘녹색’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난 것은 1990년 유럽에 갔을 때다. 당시 유럽에서는 녹색운동이 하나의 운동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사회 현상 전반을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존 버튼의 「녹색사전」을 읽고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뀐 것. 그는 녹색연합의 경험을 살려 2002년 ‘녹색평화당’을 만들었다. 환경·생명 존중과 함께 정치권의 부패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한 정치사의 새로운 실험이었다. 하지만 미완의 도전으로 남은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임 교수는 지금도 녹색평화당 이야기가 나오면 가슴이 아려온다. 자신의 주도로 만들었지만, 주변 상황과 정치적인 어려움 때문에 성공시키지 못한 책임을 느끼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녹색당은 한 지역에서 10년 이상을 뿌리내리면서 전국적인 정당이 됐어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지역당을 만들기 너무 어려워요. 당시 녹색당 참여를 약속했던 사람들도 마지막에 취소하는 경우가 많았고. 녹색당을 포기하고 제가 책임졌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 사람들에게 약속했던 것도 있어서 그러질 못했어요.” 그리고 서울시장 선거에 나가서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고 낙선했다. 지난해 6월 선거 이후 가장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임 교수. 이번에 한양대 연구교수로 발령받아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받을 수 있었다. 아직 그는 정치에 대한 꿈을 버리지는 않고 있다. 다만, 이번 총선에는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에게 약속한다. 시민운동가와 정치인. 별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그는 정치인으로서 자신이 할 일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 전태일 열사의 매제라는 꼬리표 때문에 항상 자신이 손해 보는 쪽으로 활동해온 임 교수. 그에게 전태일이라는 꼬리표는 어떤 의미일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고 전태일 열사 공무원의 아들로 부족한 것 없이 지내던 임 교수의 어린 시절. 5·16 쿠데타로 인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후 빈농의 자식으로 자라면서 사회를 보는 눈이 남달랐다. 시대가 요구하는 대로 대학을 나와 시민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운수노보 편집장으로 일할 때 전순덕씨를 소개받았다. 당시 아내는 외환은행 노조 활동을 하고 있었다. 만난 지 1년 만에 둘은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을 결정하기까지는 큰 부담감이 있었다. 바로 ‘전태일’이라는 이름 때문이다. “집사람과 저의 성향은 물론 비슷했죠.(웃음) 하지만 전태일 가족이라는 부분이 상당한 부담이었어요. 물론 우리 집안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때는 장모님도 수배중이셨거든요. 장모님도 마치 접선하듯이 한 번씩 만나뵙고, 여러 가지로 어려운 결혼이었죠.” 그를 가장 아껴주는 사람은 바로 장모인 이소선 여사. 지금도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일을 하는 장모는 시간이 날 때마다 사위에게 전화를 걸어서 안부를 묻는다. 처형인 전순옥 박사는 성공회대 교수를 그만두고 동대문 여성노동자들의 단체인 ‘참여성노동복지회’ 일을 하고 있다. 전순옥 박사가 일하는 모습은 임 교수를 감동시킬 정도로 열정적이라고 자랑한다. “사람들이 웃으면서 그래요. 제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전태일 열사만큼 유명해지기는 어렵다고요.(웃음) 저에게 항상 따라다니는 꼬리표겠죠. 저는 항상 자신의 이익을 버려야 큰 사람이 된다고 생각해요. 나중에 어느 누구에게나 떳떳하게 제 활동을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중학교 2학년과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을 둔 임 교수. 공부 압박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지만, 결과보다는 과정에 충실하도록 가르친다. 그는 당분간 캠퍼스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할 계획이다. 하지만 시민운동과 정치를 하면서 얻은 소신이나 녹색의 이념을 버린 것은 아니다. 그의 녹색 실험은 캠퍼스에서도 계속될 것이다.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정준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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