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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렌즈로 본 세상]전태일 열사 옆에 잠든 ‘시대의 어른’(2021. 02. 26 14:20)
- 2021. 02. 26 14:20 사회
- 우리 사회의 가장 아프고 서러운 이들의 벗이자,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백기완 선생이 지난 2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5일 동안 치러졌다. 2월 19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발인식을 시작으로 ‘시대의 어른’을 떠나보내는 의식이 진행됐다. 발인에 이은 노제는 고인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와 생전에 자주 찾았던 학림다방 등에서 열렸다. 대학로를 출발한 긴 운구행렬은 종로를 지나 영결식장인 서울광장에 닿았다. 선생의 시 ‘묏비나리’가 원작인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퍼지고, 고인의 오랜 동지였던 문정현 신부와 송경동 시인,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 등이 고인을 기리는 글을 읽었다. ‘거리 두기’를 한 1000여명의 시민이 고인의 마지막 길을 지켰다. 이날 오후 경기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에서는 하관식이 엄수됐다. 백기완 선생은 전태일 열사의 옆자리에서 영면에 들었다.
- 렌즈로 본 세상
- [취재 후]50년 후, 2020년에 되돌아보는 전태일(2020. 11. 13 15:10)
- 2020. 11. 13 15:10 사회
- 그렇게 길어질지는 몰랐습니다. 한두 시간 정도 이야기를 듣겠거니, 했는데 어머니의 말씀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결국 막차 시간 직전에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습니다. 예상 못 했던 저녁식사 대접도 받았습니다. 전기밥솥에서 밥을 뜨고 콩자반, 마른 오징어채볶음, 깍두기 같은 반찬을 곁들인 소박한 집밥이었습니다. 이소선 어머니와 전태일 열사의 동생 태삼씨 그리고 저까지 셋이서 밥을 먹었습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그때까지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대학 1학년 시절, 신입생 예비학회에서 가장 먼저 읽은 책이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평전>이었습니다. 지금은 모 보수 매체에서 데스크를 맡고 있는 동기가 “전태일은 자신을 희생한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대부분의 다른 사람은 게으름을 피우다가 노동자가 된 것이 아닌가”라는 주장을 용감히(!) 꺼내놓았다가 같이 세미나에 참석한 다른 동기들의 지탄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 학벌은 자신의 힘으로 달성했다는 일종의 능력주의적 환상이 깃든 순진한 발언이겠지요. 제가 대학 신입생일 때가 1989년이니 벌써 30년도 넘은 이야기입니다만, ‘노동’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은 그 뒤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분명 많이 달라지긴 했습니다. 군대를 다녀와서 대학원에 들어갈 즈음인 1995~1996년 무렵에 민주노총이 결성됐고, 2010년대에도 최규석 작가의 <송곳>과 같은 작품이 비정규직이나 노동조합에 대한 인식을 환기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부족합니다. 지난해 경향신문 1면 기획이 생각납니다. 노동자 산재문제를 다루는 기획이었습니다.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는 표제로 배경에 깔았던 산재사망 노동자의 이름들, 그들은 여전히 그냥 잊힌 사람들입니다. 여·야 모두 동의한다고 하니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위시한 전태일 3법이 연내 국회에서 통과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옵니다만, 그 이후에도 ‘잊힌 산재사고 사망자’는 있을 겁니다. 50년이 흐른 지금 다시 전태일을 생각합니다. 전태일의 삶을 미화하거나 영웅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다”라고 외쳤던 그의 말이 남긴 울림을 곱씹어 봅니다. 참, 인터뷰 후 이소선 어머니를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입니다만 1년에 두어 차례 마석 모란공원 묘지를 갑니다. 다음번 방문 때는 한번 찾아뵈려 합니다.
- 취재 후
- [표지 이야기]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기억법(2020. 11. 06 15:24)
- 2020. 11. 06 15:24 사회
- ㆍ전태일기념관 지난해 개관… 50주기 개정판 나와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 앞 버들다리 위에는 전태일 동상이 있다. 그래서 버들다리는 ‘전태일 다리’라는 이름도 얻었다. 동상 주변 보도에는 열사의 뜻을 기리는 시민들이 새겨넣은 동판이 빼곡하다. 2005년 35주기에 동상과 동판이 설치된 뒤 수많은 전태일이 이곳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오토바이와 사람 소리로 분주한 평화시장 초입. 둥그런 동판이 전태일이 분신한 장소임을 알린다. “1970. 11. 13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 여기서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다” 전태일의 삶을 기억하는 방법은 멀리 있지 않다.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 3층 상설전시장 모습 / 권도현 기자 전태일 다리에서 1.5㎞ 떨어진 청계천 수표교 인근에는 6층짜리 전태일기념관이 있다. 노동절을 하루 앞둔 지난해 4월 30일 문을 열었다. 입구 외벽에 새겨진 글은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오늘날 여러분께서 안정된 기반 위에서 경제 번영을 이룬 것은 과연 어떤 층의 공로가 가장 컸다고 생각하십니까?” 1969년 12월 전태일이 근로감독관에게 보낸 진정서다. 그의 삶을 담아놓은 전시장, 노동권익센터, 노동단체 네트워크 공간인 노동허브 등이 기념관을 이룬다. 상설전시장은 전태일의 생애와 허리조차 펴기 힘든, 좁고 어두운 다락 작업장을 재현했다. 1960~1970년대 평화시장의 어린 여공들은 하루 15시간 넘게 쭈그리고 앉아 ‘미싱’을 돌렸다. 전태일은 버스비를 털어 배곯는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주고, 2시간 넘게 쌍문동의 집으로 걸어가곤 했다. 그 시절 노동문제에 눈을 뜨고 행동하며 남긴 글과 유품, 전태일 사후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동료들의 투쟁 기록들이 전시장을 채우고 있다. 내년 상반기 개봉 예정인 애니메이션 영화 포스터(왼쪽)와 50주기 개정판 표지/ 명필름, 전태일재단 내년에 애니메이션 <태일이> 개봉 기획전시장에서는 내년 8월 15일까지 <청계, 내 청춘, 나의 봄> 전시가 열린다. 전태일의 분신 이후 이소선 여사, 친구들, 여성노동자들이 그의 뜻을 이어 결성한 청계피복노동조합의 활동을 엿볼 수 있다. 기념관은 매주 월요일 휴관이다. 현재 코로나19로 홈페이지에서 예약해야 관람할 수 있다. 전태일은 공책 7권 분량의 일기를 남겼다. 일기는 고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평전>의 밑바탕이 됐다. 최근 <전태일평전> 50주기 개정판이 나왔다. 본문은 2009년의 세 번째 개정판을 따랐다. 전태일의 일기와 수기를 인용한 부분에는 색을 입혔고, 요즘에는 잘 쓰지 않는 말이나 젊은 세대에게 생소한 사건에는 주를 달았다. 보릿고개를 넘긴 지가 언제인데 전태일의 시대를 떠올리냐고? 개정판을 펴낸 전태일재단은 ‘책소개’에서 그 의문에 답한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속 분신 장면. “인간은 밥 없이는 살 수 없지만, 그 만고의 진리가 인간더러 밥의 노예가 되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만 스물두 살 젊은 육신에 불을 댕기며, 전태일이 이루려 했던 것. 그것은 바로 인간의 나라였다. 전태일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이다.” 전태일은 25주기였던 1995년 11월 영화가 되었다.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 또는 자료원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한국고전영화’에서 무료로 만나볼 수 있다. 내년 상반기에는 애니메이션 영화 <태일이>가 개봉한다. 장동윤, 염혜란, 진선규, 박철민, 권해효 등 쟁쟁한 배우들이 목소리 연기를 맡았다. 50주기에 개봉하려 했으나 제작일정이 길어지면서 2021년 개봉으로 가닥을 잡았다
- 표지 이야기
- 전태일 50주기 맞아 ‘전태일 3법’ 운동(2020. 09. 04 16:28)
- 2020. 09. 04 16:28 사회
- ㆍ‘근로기준법 11조’와 ‘노조법 2조’ 개정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추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 스물두 살의 노동자 전태일이 자신의 몸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였다. 반세기가 지났다. 여전히 그의 말은 유효하다. 어떤 노동자는 근로기준법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고, 어떤 노동자는 노조를 만들어도 인정받지 못한다. 또 어떤 노동자는 기계처럼 다뤄지다 죽어간다. 지난 5월 7일 서울 종로구 전태일다리에서 열린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50주기 범국민행사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에서 전태일 열사의 동료 임현재씨가 발언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코로나19의 등장은 사각지대에 내몰린 노동자들이 맨 먼저 가장 심하게 고통받는다는 것을 드러냈다.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아 ‘전태일 3법’ 법안 발의 운동이 시작됐다. 전태일 3법의 알맹이는 새롭지 않다. 노동계와 시민사회가 지속적으로 요구해왔지만 오랫동안 제자리걸음이었다. 전태일 3법은 ‘근로기준법 제11조’와 ‘노조법 제2조’ 등 두 개의 법을 개정하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 적용, 모든 노동자의 노조할 권리, 모든 노동자의 죽지 않고 일할 권리로 압축된다. 민주노총은 지난 총선 당시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 적용과 노조할 권리 보장을 골자로 하는 ‘전태일 2법’을 제안했고, 정의당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까지 전태일 3법을 공약했다. 이후 민주노총과 정의당은 21대 국회에서 ‘전태일 3법’ 등을 위해 공동대응하기로 했다. 여기에 진보정당, 시민사회, 종교계 등 각계에서 힘을 보태고 있다. 국회는 올해 1월부터 온라인 청원사이트인 ‘국민동의청원’에 올라온 청원 중 30일간 10만명의 동의를 얻은 청원은 소관 상임위에 넘겨 심사토록 하고 있다. 예전처럼 법안을 만들어 해당 상임위 의원에게 입법 발의를 요청하는 소극적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기존 법이 존재하는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 개정은 환경노동위원회 소관이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은 법제사법위원회로 상정된다. 이에 따라 청원은 두 개가 올라와 있다. 오는 9월 25일까지 진행된다. 한상진 민주노총 대변인은 “10만명 동의 조기달성을 자신하고 내부적으로는 20만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올해 기필코 전태일 3법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두 개의 청원 근로기준법은 헌법에 따라 노동조건의 기준을 정함으로써 노동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향상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제11조(적용범위)에서 5인 미만의 노동자가 일하는 사업장은 적용을 배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전체 사업장 중 60%가 5인 미만 사업장이다. 법 적용에서 배제된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는 35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1일 8시간, 주 40시간 노동이 적용되지 않아 무제한 연장근로가 가능하다. 사업주가 연차휴가부터 연장·야간·휴일수당을 줘야 할 의무도 없다. 이유 없이 해고를 당해도 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할 수 없다. 법적 최저선을 보장해야 하는 의무를 회피하기 위해 회사를 5인 미만 사업장으로 쪼개는 사용자도 비일비재하다. 초단시간 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 파견 노동자들 역시 해고·휴일·노동시간 등을 다룬 핵심 조항에서 제외돼 있다. 개정안은 “상시 5명 이상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모든 사업 또는 사업장에 적용한다”는 조항을 “모든 사업 또는 사업장에 적용”하는 것으로 바꾸도록 했다. 노조법 제2조 개정의 핵심은 두 가지다. 특수고용노동자에게 노동조합을 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과 간접고용노동자가 ‘진짜 사장’과 교섭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근로기준법에서 제외되거나 일부만 적용받는 노동자,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노동조건을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현행 노조법은 특수고용노동자와 간접고용노동자(파견·용역) 등 근로기준법에서 배제된 노동자들을 노조법에서도 밀어내고 있다. 서울 정동 민주노총에서 8월 26일 전태일 3법 입법 발의 대표자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 강윤중 기자 특수고용노동자는 사용자로부터 지시·감독을 받지만, 근로계약이 특수 형태여서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이다. 택배기사, 대리운전 기사, 학습지 교사 등이 해당하며 221만명에 달한다. 설립신고증을 받은 노동조합조차 사측의 교섭거부에 가로막혀 있다. 노조법이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노조법 핑계를 대는 것이다. 기업이 제3자에게 고용된 노동자를 이용하는 형태인 간접고용노동자는 346만명 규모다. 현행 노조법은 원청을 간접고용 노동자의 사용자가 아니라고 본다.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원청을 대상으로 교섭할 수 없다. 이들이 단체행동에 나서면 원청은 원청 노동자들을 대체 투입하거나 하청업체와의 계약 해지로 맞선다. 하지만 노조법상 사용자가 아니라 부당노동행위의 책임이 없다. 노조법 개정이 필요한 이유다. 일하다 죽지 않게 2016년 5월 28일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열아홉의 비정규직 노동자 김군이 열차에 치여 세상을 떠났다. 2018년 12월 11일 태안화력 하청업체의 스물넷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가 석탄 이송용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숨졌다. 일하다 죽지 않는 사회를 만들자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올해도 죽음은 계속됐다. 지난 4월 이천 물류센터 화재는 38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5월에는 광주의 한 폐자재처리공장에서 스물다섯 노동자 김재순씨가 파쇄기에 끼어 숨졌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중대재해가 일어나면 노동자 안전을 책임질 능력과 최종 권한을 가진 기업을 엄격히 처벌하자는 취지다. 그래야 기업들이 안전한 일터를 위한 시스템을 갖추고 산재를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해 평균 2400명, 하루 평균 7명의 노동자가 산재 사고로 죽는다. 추락이나 끼임 같은 재래형 사고 비중이 높고 대부분이 하청노동자에게 일어난다. 2018년 노동부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사건 판결 분석연구’를 보면 산안법 위반의 재범률은 약 97%로, 일반 범죄 재범률 43%의 2배를 웃돈다. 김용균재단에 따르면 중대재해사업장에 대한 처벌 중 금고 이상의 형은 0.4%에 그친다. 산재 사망 노동자 1명당 기업이 내야 하는 벌금은 평균 450만원에 불과하다. 올해부터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원청 책임이 강화됐다. 하지만 처벌 대상이 하급관리자에 그치고 양형이 낮아 예방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왔다. 전태일 3법은 사업주 및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보건조치 의무를 위반해 산재 사망사고가 일어나면 3년 이상 유기징역 또는 5억원 이하 벌금형에 처하도록 했다. 다단계 하청 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의 중대재해도 실질적인 책임이 있는 원청을 처벌하도록 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한 청원에는 ‘용균 엄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이 대표 청원인으로 나섰다. 그는 9월 1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10만 국민동의청원 선포 기자회견’에서 아들에게 쓴 편지를 읽었다. “엉망이 된 사회를 단죄할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발의 청원을 엄마 이름으로 넣었단다. 이것은 그동안 너처럼 수없이 억울하게 죽어간 영령들을 위로하고 살아 있는 노동자들이 더 이상 허망하게 죽는 것을 막는 강력한 법이 되어야 해.”
- [렌즈로 본 세상]내 마음속의 전태일 그리기(2020. 07. 10 15:01)
- 2020. 07. 10 15:01 사회
- 지난 7월 8일 서울 종로구 전태일다리에서 ‘9차 전태일 50주기 캠페인’이 열렸다. 이날 캠페인에서 시사만화가 이동수 화백은 전태일 50주기를 주제로 밑그림을 그렸고, 행사에 참가한 시사만화가들과 시민들은 그림에 색을 채워 넣었다. 이 화백은 “전태일 50주기를 맞아 전태일이 노동자와 함께 항상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밝게 드러내고 싶다”고 밝혔다. 따가운 햇볕 아래에서 진행된 캠페인 중에도 인근 평화시장 등에 물류를 배달하는 짐꾼들은 끈적한 땀을 흘리며 발길을 옮겼고, 퀵서비스 오토바이들 역시 분주하게 움직였다. 노동자들이 지나가는 다리 위에는 전태일 동상이 우직하게 서 있다. 전태일 동상은 다리 위를 지나가는 노동자들을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듯했다.
- 렌즈로 본 세상
- [원희복의 인물탐구]전태일50주기행사위 실행위원장 한석호 “전태일 정신은 풀빵(나눔)이다”(2020. 05. 08 15:34)
- 2020. 05. 08 15:34 사회
- 올해는 서울 평화시장 열악한 환경에서 재단사로 일하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분신한 전태일의 50주기다. 100년에 가까운 우리 노동조합 역사에서 전태일 분신은 전환기적 사건이다. 지난 5월 7일 ‘아름다운청년전태일50주기범국민행사위원회(전태일50주기행사위)’가 출범했다. 근 8개월간 많은 행사를 기획·집행할 사령탑이다. 이 실행위 한석호 위원장(56)은 스스로 ‘왼쪽 심장에는 전태일, 오른쪽에는 5·18을 품고 산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전태일 추종자다. 전태일재단 기획실장·세월호 4·16연대 상임이사이기도 하다. 지난 5월 4일 서울 종로구 창신동 전태일재단에서 그를 만났다. ‘왼쪽 심장에는 전태일, 오른쪽에는 5·18’ -5월 7일 출범한 위원회에는 160여 개 노동·시민·사회단체가 참여했다. 어떤 인물과 단체가 같이하는가. “그동안 연대사업을 하던 노동·시민사회가 거의 모두 참여하고 있다. 민주·한국노총 양대 노총을 비롯한 노동단체, 한국진보연대·전농 등 사회단체, 참여연대·경실련·환경운동연합·YMCA 등 시민단체가 대부분 참여한다. 지금도 지방 시민·사회단체가 속속 참여를 알려오고 있다. 단체뿐 아니라 개인의 참여도 환영한다.” -전태일 50주기에 어떤 행사가 이뤄지나. “캐치프레이즈는 ‘(2020)연대의 50년 평등의 100년’이다. 다양한 학술·시민참여·문화사업이 열린다. 이미 10개 출판사가 각각 한 권의 책을 기획하는 행사를 시작했다. 5월 14일부터 7월까지 청년·노동·문학·여성 등 각 분야에서 전태일의 현재적 의미를 놓고 토론이 열린다. 전태일다리에서 <전태일 평전> 한 구절을 읽고 ‘코로나19 사회연대기금’을 내는 퍼포먼스와 동판 설치 사업도 진행한다. 이미 애니메이션 영화 <태일이>는 내년 초 극장 상영을 목표로 제작 중이다. 개인이 참여하는 시민참여위원회를 통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전태일 정신을 확산하는 작업도 이어진다. 10월 17일부터 11월 13일 두 노총의 노동자대회, 11월 9일 ‘노동의 미래’라는 주제로 국제학술포럼도 계획하고 있다.” -한 위원장은 스스로 ‘전태일은 내 왼쪽 심장’이라고 했다. ‘전태일 정신’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뭔가. “전태일 하면 분신만 생각하는데, 1980년대는 그런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번 50주기를 맞아 말하려는 시대정신은 세 가지다. 첫 번째가 실천과 조직 정신이다. 전태일은 바보회·삼동회를 만들어 대자보를 만들고 청원도 하다 언론에 보도하게 하고, 집회하다 자신의 몸을 던진 것이다. 두 번째가 전태일이 아름답다고 하는 이유로 바로 ‘풀빵 정신’이다. 점심을 못 먹는 어린 ‘시다’에게 풀빵을 사주고 자신은 12㎞를 걸어서 퇴근했다. 이는 코로나19 사태와 극심한 불평등 사회에서 사회연대의 필요성을 일깨울 것이다. 세 번째는 모범 기업 정신이다. 전태일은 마지막으로 ‘태일피복’이라는 직원이 인간답게 일하며 수익을 내는 이상적 기업을 만들려 했다. 바로 이것이 전태일의 3대 정신이고, 이번 행사는 모두 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영화 제작이나 전태일거리 조성, 문화·학술·출판 사업 등 너무 축제성 행사 위주다. 전태일 시대에는 노동자들이 밀폐된 봉제공장에서 저임금에 시달리다 폐병으로 죽었지만 지금은 화력발전소 컨베이어벨트,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끼어 죽는다. 최근 이천 물류창고 공사 중 죽은 38명도 대부분 하청 노동자다. “그렇다. 우리는 단순히 전태일 50주기에 전태일을 불러내 우상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모든 행사에 ‘코로나19 위기극복 사회연대운동’을 녹이고 있다. 노동·시민단체는 물론 국민 각자가 코로나19 사회연대기금을 모아 지금 구조조정 위기에 몰린 ‘밑으로’ 향하자는 것이 캠페인의 핵심이다. 연중 ‘5·5·5운동’, 즉 전태일 50주기, 5인 미만 사업장 500만 노동자, 5대 권리운동도 추진한다. 우리 실행위는 노조의 투쟁과 실천을 추동하는 역할을 한다.” 한 위원장은 “전태일은 자신의 노동조건을 올려 달라며 싸우다 죽은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인 미싱사와 시다 임금을 올려 달라고 싸우다 죽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이 행사를 통해 현재 노동운동이 실천하지 못하는 점을 강조하려 한다고 말했다. 사실 그는 민주노총 내에서 좀 ‘이단아적’ 기질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민주노총 조합원 절반 정도는 연 소득 7000만원 이상으로 노동자 상위 10% 안에 든다”면서 “외환위기 이전에는 현대자동차가 임금을 인상하면 다른 부분도 임금이 따라 올랐지만 지금은 비정규직 임금이 정체되거나 오히려 줄어든다”고 지적했다. 한국노동운동연구소 2017년 분석에 따르면 국민총소득(GNI)을 기업 이윤 없이 모든 노동자에게 배분했을 때 1인당 소득은 5200만원이다. 그는 “1억 이상 받는 노동자들이 그대로 있는 한 절대 5200만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상위 1억원 이상 노동자는 더 이상 임금을 올려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대학 때 <전태일 평전> 읽고 운동권으로 물론 이는 외환위기를 겪은 기업이 평생직장 개념을 없애고 비정규직을 양산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조조직률이 10%밖에 안 되는 우리 현실에서 이런 주장은 ‘귀족노조’라는 일반의 비난에 빌미를 준 것도 사실이다. 노조조직률 60~70%인 북유럽에 비하면 여전히 우리 양대노총은 빈약하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임금인상이 지상과제인 현 노동조합에는 일종의 ‘이단’이었고, 결국 그는 민노총 중앙집행위에서 사과했다. 한 위원장은 1964년 경북 예천 출신이다. 부친은 자식 공부를 위해 서울로 올라왔고, 그는 용산 해방촌 달동네에서 성장했다. 그는 농대를 나와 고향에서 농사를 짓겠다고 생각했지만 부친은 아들이 고위공무원이 되기를 원했다. 부친의 완곡한 요구에 그는 1983년 등록금이 싼 서울시립대 도시행정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는 대학 1학년 때 <전태일 평전>을 읽고 운동권이 됐다. 이후 그는 ‘왼쪽 심장에 전태일, 오른쪽에 5·18’이라는 신념으로 살았다고 했다. 1987년 6월항쟁에서 명동성당을 지키다 구속돼 4개월여 동안 복역하고 나오자마자 인천 노동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는 노조에서도 줄곧 사수대·선봉대로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투쟁의 최일선에 있었다. 군대도 가지 않았지만 전국 노조를 돌며 노조원에게 각목 전투 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 단순하고 무식하고 과격한 ‘단무지과’라 불렀다”고 말했다. 그 과정에서 1999년 금속연맹 주 5일 투쟁, 2001년 대우자동차 시위로 또 구속됐다. 숱한 구사대와 전투경찰과 싸움, 세 번의 투옥을 겪으면서 35년을 이어온 그는 요즘 스스로 ‘실패한 노동운동가’라고 자탄한다. 그것은 더욱 심각해지는 노동자의 양극화 때문이다. 5월 7일 서울 청계천 전태일다리에서 전태일 50주기 실행위가 출범하고 있다. -그렇다고 실패한 노동운동가로 자책할 것까지 있나. “아니다. 나는 실패했다. 노동운동의 본령은 더 평등한 사회를 위해 연대하고 투쟁하는 것인데 노동자 불평등이 더 심화됐다. 정부 잘못도 있고 지식인·언론 잘못도 있지만 노동운동도 잘못이 있다. 말로만 ‘연대와 투쟁’을 외치던 사람들이 실제로는 자기 것을 챙기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더라.” -노동·진보는 만날 동태찌개만 먹어야 하나, 가끔 등심도 먹어야 하지 않나. 욕망이 있는 인간에게 정당하게 벌어서 쓰는 것을 비난할 수 없다. 누구를 일제 렉서스 승용차 탄다고 비난하는데 러시아혁명을 끝낸 레닌도 영국에서 최고급 승용차 롤스로이스를 수입해 탔다. “열심히 일해서 난 소득 격차라면 뭐라 하겠나. 그러나 편법이나 부동산 투기로 재산을 늘린 사람에 대한 좌절과 분노가 크다. 특히 같은 방송프로그램을 만들면서, 같은 배를 만들면서, 같은 학교에서 일하면서 노동자의 양극화가 이렇게 커선 안 된다.” -조국 사태에 대단히 비판적이다. 조국 사태가 그런 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하나. “맞다. 조국 사태가 상징적이다. 조국을 보면서 ‘자녀 학력을 연줄과 돈으로 사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국만 욕할 수 없다. 조국만큼은 아니지만 우리 노조·시민사회에도 부지기수다. 더 화가 난 것은 진보라는 이름의 지식인·학자·정치인·언론인, 심지어 노동·시민·사회에서도 ‘그게 무슨 잘못인가’라는 반응을 보인 것이다. 거기서 더 절망했다.” 이번 조국 사태를 통해 심각한 진보의 분열이 노정됐다. 이른바 ‘박근혜 타도’를 외친 광화문 촛불과 ‘조국 수호’를 외친 서초동 촛불의 차이다. 한 위원장은 2017년 <누리야 아빠랑 산에 가자>(레디앙)라는 책을 펴냈다. 노모를 모신 가난한 노동운동가가 고교생 딸과 대학 ‘입시산’에 오른 이야기다. 책에는 ‘목숨보다 소중한 딸’ 학원비 23만원이 없어 주변에 ‘동냥과외’시키며 유명 여대에 합격시킨 과정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기자가 ‘조국의 딸과 자신의 딸이 너무 대비돼 분노하는 것인가’라고 ‘아픈 질문’을 했다. 이 질문에 그는 망설임 없이 “그런 거다”라고 인정했다. 사실 입과 글로 개혁·진보를 외친다고 실생활에서 가난하게, 혹 노동자 평균 임금으로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알면 행해야 한다는 지행합일이라는 동양문화에 너무 매여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정당하게 부를 축적해 쓴다면 뭐라 할 것인가. 최근 여당 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 양정숙 당선자의 석연치 않은 재산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결국 ‘꼬리 자르기식’으로 제명·고발했지만 비단 이 사람뿐일까. 경실련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 청와대 참모 37%가 다주택자였다. 특히 경제정책을 책임진 김수현 전 정책실장 소유 부동산은 최근 1~2년 사이 12억원, 장하성 전 실장도 10억원, 현 김상조 정책실장도 5억원 이상 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빈부 양극화의 가장 핵심인 부동산 투기를 잡을 수 있느냐는 경실련의 비판은 공감이 간다. ‘달의 뒤편에서 열심히 일하는 활동가’ 한 위원장은 민주노동당에서 떨어져 나온 진보신당 사무총장 경험이 있다. 그의 정치활동도 노동운동의 연장선이었다. 그가 천착했던 진보 정치세력 정의당·민중당·노동당은 패배했고, 심지어 민주당과 위성정당 연합에도 외면당했다. 이런 결과에 대해 그는 “민주당 2중대 소리를 들은 정의당의 ‘시각점’은 여의도에 갇혀 있었고, 민중당과 노동당은 여전히 운동에만 갇혀 있었다”며 “대중의 바다, 밑바닥으로 가지 않은 오류를 범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진보정치 재편에 대해 “여의도 권력을 위한 통합, 정치공학적으로 접근하면 통합진보당처럼 또 깨진다”고 말했다. 기자가 ‘통합진보당 분당은 진실의 문제 아닌가’라는 질문에 “두 노선을 경험한 바 권력과 욕망이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밑바닥’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인권운동가 박래군은 그를 “군더더기 없는 진정성으로 살아가는 노동운동가”라고, 이광호 출판사 레디앙 대표는 “달의 뒤편에서 열심히 일하는 활동가”라 평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낮은 곳’으로 ‘풀빵정신’을 강조했던 스타일 때문일 것이다. 이번 총선에서 신생 기본소득당이 원내에 진출했다. 물론 여당 민주당과 비례연정을 통해 이뤄진 정치지형이다. 기본소득당은 노동이 필요 없는 사회를 상정한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실행된 재난지원금은 사실상 기본소득으로, 이제 기본소득은 낯선 정책도 아니다. 특히 4차 산업혁명 시대는 대부분 노동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이는 250년 전 마르크스 이래 노동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기존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운동도 새로운 차원의 고민을 해야 할 시기라는 것이다. 이런 기자의 문제 제기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미래학자는 다양하게 노동의 미래를 예측한다. 나는 미래에 플랫폼 노동자가 한 축이라면 로봇이 노동자를 대체하면서 노동의 특권화가 가속될 것이라 생각한다. 더 많은 소득을 올리는 상층 노동자와 최저임금이나 기본소득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하층 노동자의 ‘양극화’가 더욱 심화될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사회연대 전략으로 가야 한다. 그것이 전태일 정신이다.”
- 원희복의 인물탐구
- [내 인생의 노래]전태일 추모가(2018. 11. 26 15:44)
- 2018. 11. 26 15:44 문화/과학
- ㆍ대학 학보사 문턱을 넘게 해주다 지금도 가슴속에 파고드는 소리 전태일 동지의 외치던 소리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헛되이 말라 외치던 그 자리에 젊은 피가 흐른다 내 곁에 있어야 할 그 사람 어디에 다시는 없어야 할 쓰라린 비극 고등학교 때와 달리 강의 사이에 한두 시간의 공강이 생기는 것도, 건물을 옮겨가면서 수업을 듣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 대학 1학년 때 봄이었다. 학내에 ‘짱 박힐’ 자리 하나쯤 있는 게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낯가림을 무릅쓰고 학보사 시험을 봤다. 1차 필기시험에서 두어 명 떨궈내고 2차 시험을 보는 게 마치 진짜 신문사 입사 같아서 긴장감이 있었다. 그런데 필기시험 날 문제지를 받아보고는 그동안 잔뜩 긴장했던 맥이 탁 풀려버렸다. 보통 사람들은 제목 정도만 겨우 들어봤을 법한 신문기사 쪼가리들을 모은 아주 난해한 시사문제였다. 열 문제 중에 단 몇 글자라도 끄적거릴 만한 게 없었다.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을 상대로 이런 비상식적인 상식 문제를 내다니…. 약간 짜증도 났지만 그 와중에 머리를 처박고 뭔가를 열심히 쓰는 아이들도 몇몇 있어서 그 틈에 앉아 아무ㅈ것도 하지 않고 있자니 좀 그랬다. 나도 뭔가 쓰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부담을 느끼기 시작할 때 눈에 들어온 게 10번 문제, ‘전태일에 관해서 쓰시오’였다. 물론 전태일에 관해서 설명할 수도, 두 줄 이상 쓸 것도 없었지만 그의 이름이 들어간 노래가 생각났다. 답안지에 노래 가사를 적고 나니까 흐뭇해졌고, 비상식적인 상식 문제를 낸 자들에게는 “옜다, 답안지!” 하고 던져주고 나왔다. 1980년에 강제징집됐다가 군대를 마치고 복학한 친형은 가끔 자기들이 직접 부르고 녹음한 공테이프를 집에 들고 왔다. ‘전태일 추모가’는 김지하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에 곡을 붙인 노래, 양성우의 시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에 곡을 붙인 노래들과 같은 테이프에 녹음됐다. 어떤 것은 독창으로, 어떤 것은 합창으로 불려졌는데 그 중에서 ‘전태일 추모가’는 북을 치면서 남학생 여럿이 불렀던 것 같다. 노래 좀 한다는 사람들을 모아서 부른 티는 났지만 녹음상태는 엉망이었다. 탁하고 아련한 노랫소리들이 중학생인 내가 듣기에는 좋았다. 공기 중에 흩어진 소리들을 끌어모으느라 청각을 곤두세웠고, 그래도 뭔 소린지 가사 연결이 안될 때는 리버스(되감기) 버튼을 여러 차례 눌러가며 다시 들었다. 카세트 플레이어가 테이프를 씹어먹을 때는 가까스로 끄집어내서 구겨진 면을 다리미로 다리듯이 펴서 들었다. 그렇게 조기 학습된 ‘전태일 추모가’였으니까 기억이 선명했다. 면접관 선배들은 자기들이 낸 나머지 9개의 시사문제는 애초에 페이크였다는 듯이 1차 시험을 통과시켰다. 더군다나 2차 면접에서는 직접 불러보라고까지 해서 가사 하나 틀리지 않고 불러줬더니만 면접장 분위기가 훈훈해졌고 나는 그렇게 수습기자가 됐다. 아버지는 내 인생이 학보사 입사 때문에 꼬이기 시작했다는 말씀을 지금까지 백 번 정도 하셨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전태일 때문이고, 그 노래를 집안에 들인 형 때문인데 아버지는 그 내막을 모른다.
- 내 인생의 노래
- [문화캘린더]태일-희망과 용기 잃지 않는 ‘청년 전태일’(2018. 05. 28 14:01)
- 2018. 05. 28 14:01 문화/과학
- 뮤지컬 태일 일시 6월 6일~18일 장소 프로젝트박스 시야 관람료 3만원 1964년, 열여섯 살 태일은 학업을 마치지 못한 채 평화시장 시다로 취직한다. 불우했던 과거에 얽매이지도 않고 또 외면하지도 않으며 내일이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간다. 재봉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일하지만 태일에게 평화시장의 일상은 노동지옥과 다를 바 없다. 불합리와 불공정이 판치는 현장에서 태일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를 위해 싸우기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모습보다는 인간애가 가득한 따뜻한 심성을 바탕으로 희망을 잃지 않고 묵묵히 용기 있는 삶의 행보를 보여준 ‘청년 태일’의 모습을 보여주는 음악극이다. 장우성 작가와 이선영 작곡가, 박소영 연출가가 의기투합한 ‘목소리 프로젝트’는 과거 실존 인물들과 관련된 어문자료들을 발굴하고 연구해 그들의 삶과 사상을 복원한다는 취지로 모인 창작집단이다. 목소리 프로젝트가 무대 위에 복원한 전태일의 목소리는 2017년 서울문화재단 최초 예술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열린 첫 트라이아웃 공연 기간 내내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반향을 얻었다. 이번 공연에서는 대본과 음악이 보다 완성도 있고 안정적인 작품으로 구현될 수 있도록 스토리도 보강했다. 음악과 안무, 시대를 재현한 무대미술 같은 요소를 더해 관객의 집중도를 높일 수 있게 한 점도 눈에 띈다. 또한 가변형 블랙박스 시어터인 공연장의 특성을 살려 공연 중 배우와 관객이 끊임없이 소통하는 작품의 특성을 극대화하고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었다. 070-7606-5577 ▲클래식 비보컬 콘서트 | 일시 6월 9일 장소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관람료 R석 11만원 / S석 8만8000원 / A석 6만6000원 스페인 출신의 세계적인 5인조 아카펠라 그룹 비보컬(b vocal)의 내한공연이다. 오직 목소리로만 드럼, 기타, 브라스, 리듬, 비트박스 등의 소리를 재현해 다양한 장르의 곡들을 흥겹게 연주한다. 02-597-9870 ▲전시 일부러 불편하게 | 일시 6월 8일~8월 19일 장소 소마미술관 관람료 성인 3000원 / 청소년 2000원 / 어린이 1000원 ‘몸’을 매개로 예술과 삶의 관계를 조망하는 전시로, ‘의도된 불편함’이라는 주제로 현대미술에서 낯설고 어려운 몸의 표현에 대해 살펴보면서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기획했다. 02-425-1077 ▲연극 후산부, 동구씨 | 일시 6월 8일~22일 장소 마포아트센터 플레이맥 관람료 3만원 무너진 탄광 안에 고립된 광부 4인과 그들을 구조하기 위해 모인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허술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대조시켜 희극과 비극을 오가는 드라마를 그려낸다. 02-3274-8600
- 문화 캘린더
- [칼럼]우분투와 전태일(2018. 04. 09 16:49)
- 2018. 04. 09 16:49 오피니언
- ‘우분투’라는 말이 있습니다. JTBC 손석희가 앵커 브리핑에서 소개하기도 했지만, 아프리카 어느 작은 부족의 말이랍니다.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 김현정 위원장이 ‘불평등 양극화 해소를 위한 대안모색 토론회’ 인사말을 하면서 소개한 우분투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인류학자가 아프리카 한 부족의 아이들을 모아놓고 게임을 제안합니다. 달콤한 과일바구니를 놓고 가장 먼저 바구니까지 뛰어간 아이 한 명에게 과일을 모두 다 주겠노라 약속합니다. 게임이 시작되면 저마다 1등을 하려고 달려갈 것이라 예상했으나 아이들은 손을 잡고 함께 달렸습니다. 인류학자가 물었습니다. 1등에게 모두 주겠다고 했는데 왜 손을 잡고 같이 달렸지? 오히려 아이들이 묻습니다. 다른 사람이 슬픈데 어떻게 혼자 기쁠 수가 있죠? 그리고 아이들은 이구동성 우분투를 외칩니다. 우분투, 나는 곧 우리, 네가 있어 내가 있다.” 우리나라 민주노조운동에서 사무금융 노동자들의 자부심은 대단합니다. 금속 등 제조업 노동자들이 주류를 이루는 상황에서, 1987년 6월대항쟁 때 넥타이를 맨 채 대거 참가해서 사회를 바꾸는 큰 흐름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뒤 7·8·9월의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지며 제조업을 비롯한 여러 업종과 대부분의 큰 기업에 민주노조가 건설되면서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운동은 획기적으로 변화, 발전하게 되었지요. 우리 사회도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어 민주주의와 인권의 확대 등 질적인 변화를 이루어 87년 체제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촛불혁명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아직 진행 중에 있습니다만, 사회 곳곳에 쌓여 있는 적폐의 청산이나 한반도의 평화체제 구축 등에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고 있는 것 같아 국민들은 기대에 차 있습니다. 이런 때에 노동계가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 불평등 양극화 사회 구조를 해소하기 위해 나서는 것은 촛불혁명의 연장선상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원초적 선한 의지의 발로인 ‘우분투’를 불러오는 것은 건강한 철학적 기반 위에서만 이러한 사업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이러한 우분투 정신의 발로는 우리 주변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전태일의 ‘풀빵 나눔 정신’입니다. 당시 정규직 재단사 전태일은 비정규직 어린 ‘시다’들을 외면할 수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재단사가 그랬고, 그 차별은 개인의 의지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임을 알고 있었지만, 전태일은 달랐습니다. 그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근로기준법도 공부하고, 어린 여공들의 건강상태 등 작업실태를 파악하고, 그 근거로 노동청을 방문하거나 심지어 대통령에게 간곡한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점심을 굶는 시다들에게는 자기의 버스비까지 털어 풀빵을 사 주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전태일의 ‘풀빵 사랑’이라 부르는데 바로 우분투였습니다. 노와 사가 함께 참여하여 기금을 조성하고, 비정규직이나 최저임금 문제 등 불평등 양극화 해소를 위해 전태일의 마음으로 우분투를 외치는 사무금융노동자들에게 뜨거운 연대의 박수를 보냅니다.
- 칼럼
- [원희복의 인물탐구]‘청년 전태일’ 대표 김종민 “결국 노동조합 결성이 답이다”(2017. 12. 04 18:25)
- 2017. 12. 04 18:25 사회
- 열일곱 살 이민호군이 죽었다. 공장의 큼지막한 적재기가 머리 위로 내려오는데 이군은 미처 피하지 못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이 담긴 동영상은 마치 세월호 침몰 상황을 떠올리게 했다. 세월호 참사의 고2나 이민호의 고3이나 비슷한 또래다. 기자는 수학여행 가던 단원고 학생보다 현장실습 도중 숨진 산업과학고 이군의 죽음이 더 가슴 아프다. 이군의 산업재해에 대한 정확한 조사가 나오겠지만, 필시 세월호 참사처럼 어른들의 탐욕이 주된 원인이었을 것이다. 지난 1월에는 통신사 콜센터에서 실습 중이던 고3 여학생이 ‘아빠, 나 오늘도 콜 수 못 채웠어, 늦게 퇴근할 것 같아’라는 문자를 남기고 자살했다. 언제까지 어른들의 탐욕에 이렇게 어린 노동자들이 희생돼야 하는가. 청년 노동운동 단체인 ‘청년 전태일’ 김종민 대표(32)는 사고 직후부터 제주도 현장에서 머물고 있다. 청년 전태일은 전태일이 그랬듯이 청년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노동문제를 바라보고, 스스로 개선책을 논의하는 단체다. “민호가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회사는 민호가 정지 스위치를 누르지 않고 적재기를 고치러 갔다는 등 사고의 책임이 민호 과실이라는 내용으로 된 산재신청서에 부모의 사인을 받았다. 민호 아버지가 나중에 그 서명이 잘못됐으니 바꾸겠다고 하는데도 회사는 ‘바꾸지 못하겠다’고 버티고 있다. 사장은 처음에 조문조차 않다가 이 사건이 언론에 크게 문제가 되니까 그때서야 와서 사과했다. 회사 차원의 재발방지 대책도 아직 마련하지 않고 있다.” 촛불 든 특성화고 권리연합회 으레 그렇듯 회사는 이번 사고에서 책임회피에 급급했다. 게다가 회사는 이군의 사고가 난 다음에도 다른 실습생들에게 야근을 시킨 것으로 드러나 공분을 사고 있다. 현재 이군의 장례절차는 중단돼 있다. 민주노총과 전교조, 참교육학부모회 등 20여개 단체가 합쳐 제주지역 대책위를 만들어 유가족을 지원하고 있다. 김 대표는 ‘특성화고 권리연합회’ 멘토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번 사고가 났다는 얘기를 듣고 청년 전태일 회원들과 특성화고 권리연합회는 20일부터 광화문에서 “왜 현장실습을 하다 죽어야 합니까?”라며 촛불을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21일 그는 제주로 달려갔다. -이번 사고의 원인은 뭐라 보나. “우선 회사가 문제다. 회사가 실습생을 학생으로 대하지 않고 안전이 담보되지 않은 기계를 혼자 맡겼다.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해 특성화고 실습생을 사용한 것이다. 또 해당 학교와 교육청 등이 학생이 실습 나간 업체에 대한 관리·감독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졸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실제적 차별 등 이 세 가지가 빚어낸 참극이다.” -이군과 회사는 현장실습 표준협약서까지 작성했다. 어떤 부분이 법을 위반한 것인가. “이군은 하루 평균 14시간을 근무했다. 실습생은 7시간 근무에 본인 동의하에 1시간 연장해 하루 8시간을 넘지 않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표준협약서는 아무리 본인이 동의하고 서명했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취업을 하려는 당사자들은 그것을 거부하기 어렵다.” -산업재해에 대한 회사의 안전불감도 주요 원인 아닐까. 회사 정규 책임자가 퇴사한 상태에서 실습생이 5일 만에 사실상 책임자가 됐더라. 안전확보 인력이 없으면 가동을 중단하는 것이 정상인데, ‘설마 사고가 나겠나’라는 ‘설마’가 또 사람을 잡은 것 아닐까. “그렇다. 실습생을 혼자 작업하게 둔 회사의 안전불감증이 문제다.” 세월호 참사도 그렇지만 ‘설마’ 하는 안전불감증의 배경은 돈을 더 벌기 위한 어른들의 탐욕이다. 낡은 배의 구조를 변경하고 과적하고, 값싼 인력을 쓴 것이나, 정규사원 없이 안전장치가 고장난 기계를 계속 돌린 것이나 똑같다. 특히 2008년부터 특성화고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취업률과 연계시키면서 학교는 무분별하게 학생을 취업전선으로 내몰고 있다. 이번 사고에 대해 특성화고 권리연합회는 현장실습 5대 문제와 대안을 제시했다. 그것은 ▲의무와 강요인 산업체 파견형 현장실습을 학생 선택형으로 전환할 것 ▲비정상적인 특성화고 3학년 2학기 수업을 ‘사회진출학기제’로 개선할 것 ▲현장실습 전담기구를 설립할 것 ▲청소년 노동보호법을 제정할 것 ▲즉시 현장실습 전수조사를 실시할 것이다. 고졸 청년들의 요구와 목소리 대변 김 대표는 지난해 5월 발생한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진상조사단에도 참여했다. 그때도 안전과 청년 비정규직 문제가 한참 거론됐다. 사실 구의역 사고 이후 정부와 정치권은 직업교육훈련 촉진법 개정안과 근로기준법 개정안 등을 발의했으나 상임위 논의도 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 게다가 현장 실습생에게 ‘업체의 요구를 준수하고, 아니면 어떤 처벌도 감수한다’는 서약서까지 쓰게 만든다. 이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라고 폐지를 권고했지만 17개 교육청 중 14곳은 아직 폐지하지 않고 있다. 사고가 났을 때만 반짝 호들갑을 떨지 계속 ‘기다리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정부는 12월 1일 대대적인 개선책을 발표했지만 실효성은 미지수다) ‘청년 전태일’은 2016년 2월 김 대표를 비롯한 청년노동자들이 만든 단체로 현재 130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나눈다는 명분으로 저성과자 해고와 함께 노동자에게 불리한 근로조건을 도입할 수 있는 2대 노동개악을 추진했다. 김 대표는 “박근혜 정부가 청년 일자리를 하도 강조해 당사자인 우리 청년들의 요구와 목소리를 내자는 취지로 이 단체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미 ‘청년유니온’이나 ‘장그래살리기운동본부’ ‘청년하다’ 등의 청년 노동운동 단체가 있지만, 이들은 대체로 대학 졸업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에 비해 청년 전태일은 고졸자가 저지 않다. 그동안 청년 전태일은 지하철 안전업무직 청년들의 정규직 전환 운동과 청년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을 돕는 연대활동을 해 왔다. 올 들어 최저임금 1만원 실현운동을 추진, 회원들이 1만원짜리 탈을 쓰고 문재인·안철수 대통령 후보를 찾아 최저임금 1만원을 공약에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5월에는 최저임금 1만원을 요구하는 ‘장미파업’ 행사를 가졌고, 최근에는 강사들을 모시고 사회심리학과 노동문제 등을 공부하는 ‘퇴근후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김종민 대표를 비롯한 ‘청년 전태일’ 회원들이 최저임금 1만원 인상 요구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청년전태일 제공 -청년노동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1998년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 사회가 됐다. 일부 공무원이나 공사 등과 중견기업 정규직 입사자를 제외한 나머지 80% 이상이 다 비정규직·저임금이다. 이 불안정하고 열악한 구조적 조건에서 청년들은 극심한 심리적 좌절과 갈등을 겪고 있다.” -서울대 병원 실습 간호사도 수십만 원밖에 임금을 주지 않고, 유명 패션회사도 100만원도 안되는 임금으로 열정페이를 강요하고 있다. 그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가는 이유가 뭔가. “스펙이 된다고 하니까 간다. 일자리가 없는 상태에서는 청년들끼리 경쟁을 해야 한다. 그렇게라도 인턴 경험을 쌓아야 나중에 취업이 용이하다. 그것을 악용하는 회사들이 많다. 젊은 사람들의 열정을 값싼 노동력으로 대체하려는 것, 우리는 그것을 ‘꿈을 빨아 먹는다’고 한다.” -대기업 노조가 귀족 노조라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아버지 세대가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 자식 세대를 비정규직으로 내몰고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나. “우리 회원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사회의 질 좋은 일자리가 부족하다. 가장 큰 이유는 기업이 둘이 해야 할 일을 한 사람에게 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일해야 한다. 추가고용을 않는 회사에 대해 규제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과거 이명박 대통령이 늘상 하던 얘기가 ‘요즘 젊은이들은 힘들거나 지방에서의 일을 안 하려 한다’는 것이다. “동의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부모님 세대들은 그런 인식을 가질 수 있지만, 만약 자기 자식을 일이 험하고, 근무지도 시골에 보낸다면 동의할까. 게다가 그런 일자리는 대부분 저임금에 미래조차 보장되지 않는다. 생활 자체가 어렵다.” 효선·미선 촛불 들면서 사회활동에 관심 김 대표는 1986년생으로 중앙고·서울시립대 국사학과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총학생회장 시절인 2003년 효선·미선 촛불 청소년 대책위원회 일을 하면서 사회활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004~2005년 ‘18세 선거권 낮추기 공동연대’ 대표로 선거권을 19세로 인하하는 데 기여했다. 2011년 대학 총학생회장으로 반값 등록금 운동을 벌여 박원순 서울시장과 합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는 “2011년 서울시립대 황승원 학우가 아르바이트를 하다 이마트 냉동창고에서 질식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면서 “그는 등록금 대출금 빚 1000만원을 갚기 위해 그 멀리까지 알바를 갔던 것”이라고 당시 반값 등록금 운동 배경을 설명했다. 2012년 8월 대학을 졸업하고 2014년 군대에 다녀온 그는 방과후 강사 자격증을 따 초등학교 역사논술 강의를 했다. 그는 “13만명이나 되는 방과후 강사 역시 비정규직(특수고용직)에 보수도 굉장히 열악하다”면서 “2개 학교 방과후 강사를 했지만 월 90~100만원 정도 수입밖에 안됐다”고 말했다. 청년 전태일이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며 요구한 것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였다. 최소한 법대로, 법을 지켜달라는 요구였다. 이를 위해 특성화고 3학년 학생들에게 노동법이나 최소한 근로기준법 교육을 시키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야 자신의 노동권리를 알고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최근 몇 시간씩 하고 있는데 강당에 몇백 명 모아놓고 형식적으로 강의하는 데 그치고 있다”고 말했다. 전태일 죽음 이후 결국 청계피복노조를 만들어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고, 이나마 노동조건 개선이 이뤄졌다. 김 대표도 “결국 노조가 답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노조 가입률이 10% 남짓밖에 안되는 상황에서 노조를 쉽게 만들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조를 불온시하는 사회 분위기는 여전하다. 바로 1년 전 박근혜 정부는 쉬운 해고와 노조 무력화를 시도하는 이른바 2대 지침을 만들고, 심지어 전교조를 법외노조화하고, 조합원 80만명의 합법적 노조위원장까지 구속했다. 새로 등장한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려는 소득주도 성장에서 중요한 것은 노조의 역할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역시 국제노동기구(ILO)의 권고조차 속시원히 이행할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 원희복의 인물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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