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옵션
닫기
범위
전체
제목
본문
기자명
연재명
이슈명
태그
기간
전체
최근 1일
최근 1주
최근 1개월
최근 1년
직접입력
~
정렬
정확도순
최신순
오래된순

주간경향(총 8 건 검색)

[박성진의 국방 B컷](12) 6·25 정전일은 ‘북 승전일’일까···전쟁 영웅도 세월따라 들쭉날쭉
[박성진의 국방 B컷](12) 6·25 정전일은 ‘북 승전일’일까···전쟁 영웅도 세월따라 들쭉날쭉(2024. 08. 02 16:00)
2024. 08. 02 16:00 정치
조현동 주미한국대사가 지난 7월 27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에서 열린 한국전쟁 정전협정 71주년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7월 27일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71주년 체결일이다.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만 했을 뿐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한국이 한류를 세계에 전파하면서 이만큼의 번영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데는 북한의 침략을 저지하고 정전협정을 맺은 게 큰 역할을 했다. 주무 부처인 국방부는 정전협정의 가치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북한 도발에 의연하게 대처해 정전협정을 지키려는 노력보다는 강력한 응징 의지가 더 강하다. 정부가 주관하는 129개 법정기념일에도 이날은 없다. 정부의 공식 기념식이 열리지 않는다는 의미다. 정보보호의 날(7월 둘째 수요일), 북한이탈주민의 날(7월 14일), 푸른하늘의 날(9월 7일), 원자력의 날(12월 27일)만도 못한 대우를 받는 셈이다. 반면 북한은 이날을 한국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하며 ‘전승절’로 기념하고 있다. 정전의 의미를 담은 기념일이 없는 것은 한국 정부가 북한의 주장을 간접적으로나 인정하는 것으로 오도될 수 있는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한국 정부에 이날은 오히려 ‘감사의 날’ 성격이 짙다. 정부는 유엔군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겠다며 2013년부터 이날을 ‘유엔군 참전의 날’로 지정했다. 하지만 유엔군 참전과 정전협정은 엄연히 다르다. 유엔의 파병 결의는 개전 이틀 뒤인 6월 27일 이뤄졌고, 정전협정은 그 3년여 뒤인 1953년 7월 27일 체결됐기 때문이다. 날짜상 관련이 없는데도 정전협정일에 유엔군 참전의 날을 덮어씌우면서 둘 다 의미가 반감됐다. 정부는 올해 열린 정전협정 71주년에서도 미국에 감사를 전했다. 조현동 주미 한국대사는 한국전참전기념비재단(KWVMF) 주관으로 미국에서 열린 기념행사 기념사에서 “한·미동맹이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날 같은 평화와 번영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10대 영웅’과 ‘4대 영웅’ 작년으로 돌아가 보자.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7월 20일 정전협정 및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한미연합군사령부와 공동으로 대한민국의 자유 수호에 크게 기여한 한·미 참전용사 10대 영웅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10대 영웅에는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 밴 플리트 부자(父子), 윌리엄 쇼 부자(父子), 딘 헤스 공군 대령, 랄프 퍼켓 주니어 육군 대령, 김영옥 미국 육군 대령, 백선엽 육군 대장, 김두만 공군 대장, 김동석 육군 대령, 박정모 해병대 대령이 이름을 올렸다. 미국 시민권자인 김영옥 대령을 포함해 미국인이 8명이고, 한국인이 백선엽 장군 등 4명이다. 백 장군은 한·미동맹의 상징처럼 보수세력으로부터 대우받는 인물이다. 가수 진미령씨의 부친으로도 잘 알려진 김동석 대령은 미 8군 정보 연락장교였다. 김두만 장군은 6·25전쟁 중 대한민국 공군 최초로 100회 출격했고, 승호리 철교 폭파 작전에도 참여했다. 박정모 대령은 서울탈환작전 당시 시가전을 전개하고 중앙청(당시 정부청사)에 인공기를 걷어내고 태극기를 게양했다. 이처럼 10대 영웅 가운데 2명을 제외하고는 미군이거나 미군과 밀접한 협조 관계에 있던 한국군이다. ‘10대 영웅’의 구체적 선발 과정은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7월 27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에서 한국전쟁 정전협정 71주년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눈길을 끄는 대목은 ‘10대 영웅’ 명단에서 미국 정부가 앞서 선정한 ‘한국전쟁 4대 영웅’ 중 한 명인 리지웨이 장군이 빠졌다는 점이다. 미국 정부가 이전에 선정했다는 한국전쟁 4대 영웅은 맥아더, 리지웨이 유엔군 총사령관과 백선엽 육군 대장, 김동석 육군 대령 등 4인이다. 사실 미국 정부가 선정했다는 한국전쟁 4대 영웅은 2005년 10월 이선호 예비역 해병대 대령과 주정연 창원대 교수가 공저한 <전쟁영웅 김동석, 이 사람(This man)>의 출판기념회에서 갑자기 등장했다. 저자는 6·25전쟁 때부터 북파공작 임무를 수행했던 김 대령의 평전을 소개하면서 “미국 정부가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맥아더와 리지웨이 그리고 백선엽과 김동석 네 분을 선정한 것은 1998년부터 휴전 50주년이 되는 2003년까지 한·미 양국이 5개년 계획으로 한국전쟁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던 과정에서 이루어졌다”고 소개했다. 그러자 국내 언론은 앞다퉈 4대 영웅을 보도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지금도 6·25전쟁 4대 영웅으로 회자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한국전쟁 4대 영웅’을 공식 선정했다거나, 이를 한국 정부에 전달했다는 공식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전쟁 중 해임된 전쟁 영웅 6·25전쟁 4대 영웅의 원조는 전두환 정부 때인 1983년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휴전 30주년을 맞아 발표한 김홍일 중장, 김종오 대장, 맥아더 원수, 워커 대장이다. 당시 선정 작업을 주도했던 박경석 예비역 준장은 “재향군인회를 통한 여론조사에서도 당시 생존했던 예비역 장군 등 한국전 참전 당사자들이 4대 영웅 선정에 동의했다”며 “백선엽 장군과 김동석 대령은 10인의 후보 명단에도 없었다”고 전했다. 김홍일 장군은 개전 초기 국군 패잔병을 모아 한강방어선을 구축해 북한군 공세를 저지했다. 또 중동부 전선에서 지연작전을 끈질기게 전개해 유엔군의 낙동강 반격 교두보 구축을 가능케 했다. 미군은 미 고문단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았던 김 장군의 해임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요구해 그는 전장에서 사라지게 된다. 대한민국 1호 장군이자 태극무공훈장과 건국공로훈장 수훈자인 그는 1951년 전역한 후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자유중국 대사로 떠났다. 육군 수도방위사령부에는 그를 기념하는 ‘김홍일 홀’(대강당)이 있다. 세계적으로 전쟁 영웅은 전쟁이 끝나면 나라를 이끄는 국가급 지도자로 등장하게 된다는 점에서 미군은 일찌감치 그 후보를 제거한 셈이다. 대신 미군은 자신들의 말을 잘 따르는 젊은 만주군 지휘관을 선호하고 지원했다. 일본군 출신인 김종오 장군(당시 대령)은 춘천, 홍천 전투에서 6사단장으로서 북한군 선봉 부대를 사흘간 저지했다. 1952년 한국전 사상 최고의 전투로 불리는 백마고지 전투에서는 9사단을 이끌고 중공군을 격파, 승리를 이끌었다. 두 장군이 지킨 사흘 덕분에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한국전 개입 선언과 유엔군 참전도 가능했다. 정부는 두 사람의 일대기를 펴냈고, 맥아더와 워커 장군의 다큐멘터리도 방송됐다. 김홍일 장군은 광복군 참모장뿐만 아니라 중국 국부군 중장(별 2개)을 역임했고, 한국군 전역 당시 계급이 중장(별 3개)이어서 ‘5성 장군’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KBS는 1985년 건군 37주년 특집으로 <오성 장군 김홍일>이라는 3부작 드라마까지 제작했다. 맥아더 원수는 인천상륙작전의 주역이고, 워커 대장은 절체절명의 낙동강 방어선(워커 라인)을 사수했다. 정부는 이미 1963년 서울 광장동에 조성한 유엔군 휴양시설의 이름을 ‘워커힐’로 명명해 그를 기렸다. 전두환 정부가 1983년 선정한 전쟁 영웅들은 30년 후 정전협정 체결일에 국가보훈처와 한미연합사에 의해 지워졌다.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도 ‘의문의 1패’를 당했다.
박성진의 국방 B컷
[이기환의 Hi-story](94)정전협정 지도에 담긴 휴전선의 비밀(2023. 07. 28 11:06)
2023. 07. 28 11:06 문화/과학
3년 1개월 2일간의 혈전을 끝내고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에 따라 교환된 정전협정문에 첨부된 ‘지도 1’(오른쪽). 군사분계선이 임진강변인 파주 장단 정동리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군사분계선(휴전선) 1호 말뚝이 세워진 파주 장단 정동리의 임진강변 남단은 파주 탄현면 만우리 부근이다. /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원문·박종우 사진작가 제공 시원하게 뚫린 자유로를 달리다 보면 임진강과 한강의 합수부에 경기도 파주 통일전망대가 서 있죠. 그쯤에서 한 5㎞ 정도 더 달리면 임진강변을 따라 설치돼 있던 철책이 갑자기 강 건너 북쪽으로 올라갑니다. 누가 “저 철책이 뭐냐”고 물으면 전 “아마 군사분계선(휴전선)의 남방한계선(휴전선에서 2㎞ 남쪽선)을 표시한 철책일걸?” 하고 대답합니다. 100% 이런 질문이 돌아옵니다. “그럼 통일전망대에서 여기까지 오는 자유로의 맞은편 지역은 뭐냐. 북한땅이냐”고요. 묻는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포털사이트의 지식백과를 검색해보세요. ‘군사분계선(휴전선)은 서해안 강화 북방(예성강 및 교동도)~동해안 간성 사이 155마일(250㎞)’로 설명돼 있습니다. 그런데 군사분계선이 임진강 하구에서 제법 떨어진 내륙에서부터 설치됐다니…. 상식을 거스르냐고 따질 만하죠. 휴전선을 둘러싼 심각한 오해 거두절미하고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문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우선 정전협정 제1조 제1항은 “군사분계선을 확정하고 쌍방이 각기 2㎞ 후퇴함으로써… 비무장지대를 설정한다”라고 했죠. 여기서 협정문에 첨부된 ‘지도 1’을 볼까요. 과연 파주 통일전망대에서 임진강변을 따라 제법 내륙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군사분계선과 남북방한계선이 표시돼 있죠. 군사분계선이 표시된 곳은 임진강 이북의 장단 정동리고요. 그곳에서 동해안의 강원 고성까지 1292개의 말뚝을 세워놓은 것이 바로 군사분계선(휴전선)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한 질문이 나오겠죠. 군사분계선 표시가 끝난 부분(임진강 하구)에서 서해5도 해역까지는 뭐냐, 그 구간에는 군사분계선이 없다는 거냐, 뭐 이런 궁금증이 생기겠네요. 그렇습니다.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문에 따르면 ‘임진강 하구~한강 하구~서해5도’ 사이에는 군사분계선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군사분계선(휴전선)은 육상에만 존재하지, 해상에서는 실체가 없다”는 점을 못 박은 겁니다. 정전협정에 따르면 군사분계선은 제법 내륙인 임진강변 경기 장단 정동리에서 시작된다. 그곳에서 동해안 강원 고성 강정리까지 세워놓은 1292개의 말뚝을 이은 것을 군사분계선이라 한다. /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원문·박종우 사진작가 제공 해상에서는 휴전선이 없다 조목조목 따져볼까요. 우선 임진강 하구부터 서해5도에 이르기까지의 해상 군사분계선은 없다고 했죠. 그럼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해 넓은 강이 되고, 그것이 강화도의 북변을 흘러 황해도 예성강과 만나 서해로 빠져나가는 수역은 어떻게 규정돼 있을까요. 정전협정에서는 이 수역을 ‘한강(하)구’라 칭하고 ‘첨부지도 2’에서 수역의 구획과 성격을 분명히 밝힙니다. ‘첨부지도 2’를 보면서 정전협정(제1조 제5항)을 읽어봅시다. “한강 하구의 수역으로서 그 한쪽 강안(강기슭)이 다른 일방의 통제하에 있는 곳은 쌍방의 민간선박 항해에 이를 개방한다. 한강 하구의 항행수칙은 군사정전위가 규정한다. 쌍방 민간선박이 항해함에 있어 자기 측의 군사통제하에 있는 육지에 배를 대는 것은 제한받지 아니한다.”(정전협정 제1조 제5항) 좀 복잡하죠. 간단히 말한다면 정전협정은 “임진강·한강 합수부에서 서해로 빠져나가는 한강수역에는 분계선도 없을 뿐 아니라 민간선박의 자유항행을 허용한다”고 규정했습니다. 게다가 자기 측 육지라면 배의 정박까지 가능하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까지 군사분계선(휴전선)을 설명해놓은 ‘지식백과’가 오류라는 이야기입니까. 그렇습니다. 정전협정문에 따르면 오류가 분명합니다. 한강 하구는 국제수로 흥미로운 착안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간과하는 동안 이런 정전협정 조항이 빛을 발한 때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1990년 11월 한강 하구 수역에 남측의 준설선이 통과했는데요. 그 해 엄청난 수해로 한강 하류와 임진강변의 제방이 유실됨에 따라 복구가 절실했죠. 육로로 복구 자재와 장비를 운반할 수도 있었으나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거든요. 이때 당시 유엔사 정전위 수석대표의 특별고문인 이문항씨가 나섰습니다. 이씨는 북한 측 군정위 고위간부들과 비공식모임을 통해 준설선 및 예인선이 인천~교동도~한강 하구를 거슬러 올라가는 계획을 설명했습니다. 물론 정전협정(제1조 제5항)에 따르면 한강 하구 수역은 민간선박에 개방된 수역입니다. 따라서 북한 측과 접촉할 필요도 없었죠. 하지만 불필요한 갈등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연락을 취했는데요. 북한 측도 이문항씨의 제의를 수락했답니다. 이로써 정전협정문에 따라 한강 하구에서 민간선박이 통행한 첫 번째 사례로 남게 됐습니다. 또 있습니다. 1996년 집중호우 속에 유도에 표류한 두 살배기 송아지를 구한 적도 있었습니다. 1999년 납섬에 표류한 염소 10마리를 회수한 적도 있었고요. 누누이 강조하지만, 정전협정에 따르면 유도와 납섬 등 한강 하구 섬들은 ‘중립섬’입니다. 이와 관련해 언론인이자 사회운동가인 리영희 교수(1929~2010)는 “한강 하구는 일종의 국제수로(International water passage)이며 남북한의 민간선박이 자유로이 드나드는 ‘자유통행권’을 갖는 수역”이라 해석했습니다. 이는 ‘정전위의 특정한 허가 없이 어떠한 군인이나 민간인의 출입을 불허한다’고 규정한 육상 비무장지대와 관련된 ‘정전협정 조항(제1조 제8항)’과는 사뭇 다릅니다. 경기 파주 만우리에서 바라본 임진강 건너편 북한지역. 콘크리트 다리에 침부방지용 철망이 설치돼 있다. 여기부터가 한강 하류 중립수역이 시작된다. / 박종우 사진작가 제공 함박도가 북한 땅인 이유 지금 이 순간에도 갈등의 화약고가 되고 있는 ‘서해5도’는 어떨까요. ‘분쟁의 원죄’가 바로 이 정전협정문에 있습니다. 즉 정전협정 제2조 제13항ㄴ조를 볼까요. “황해도(가)와 경기도(나)의 경계선을 기준으로 서쪽과 북쪽의 모든 섬은 공산 측의 통제에 두지만, 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우도 등 5개 섬은 유엔군의 관할 하에 둔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황해도(가)와 경기도(나)의 도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북쪽과 서쪽의 섬들은 북한의 통제에 두되, 백령도 등 5개 섬은 유엔군의 통제 아래 둔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도에는 이런 내용을 적시한 뒤 굉장히 엄격한 각주(1·2)를 달아놓았습니다. 먼저 ‘각주 1’은 “가(황해도)~나(경기도)는 그저 서해 섬들의 통제를 표시한 것일 뿐 아무런 의의가 없으며, 다른 의의를 첨부하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지도에 표시한 ‘가~나’선은 그냥 황해도와 경기도를 가르는 도경계선이라는 겁니다. 즉 서해 연안의 많은 섬의 통제권(유엔 측이냐 공산 측이냐)을 명시하는 선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 선을 연장하거나 접속시켜서 다른 ‘선’이나 ‘구역’의 일부로 이용할 수 없다는 점을 못 박은 겁니다. 한마디로 이 ‘가~나’선은 군사분계선(휴전선)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4년 전(2019)인가요. 때아닌 영토 관할권 논쟁에 휘말렸던 섬이 있었죠. 함박도인데요. 한국 정부가 이 섬을 ‘인천 강화군 서도면 말도리 산 97’이라는 주소를 부여해 행정적으로 관리해온 것이 알려지면서 정치 쟁점이 됐던 곳인데요. 그러나 정전협정의 지도에 따르면 함박도는 도경계선(가~나) 위, 즉 북한의 통제 아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전협정문 첨부 ‘지도 3’. 서해 해상에는 섬들의 관할권을 구분하는 도경계선(가~나) 외에는 어떤 경계선도 없다. 다만 ‘가~나’ 선 이북의 섬 가운데 백령도와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 등 5개 섬은 유엔군 통제 하에 두고 나머지 섬들은 모두 북쪽의 관할이라고 명시했다. 또한 지도 상에 5개 섬에 그려진 사각형의 점선은 아무런 의의를 두지 않는다고 엄격하게 명시했다. 정전협정 지도 3에 그려진 ‘가~나’ 점선 역시 군사분계선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 /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원문·박종우 사진작가 제공 ‘점’만 찍어둔 서해5도 나아가 ‘각주 2’를 볼까요. 더욱 엄격합니다. 정전협정 ‘첨부지도 3’을 보십시오. 유엔군 통제하에 둔 백령도 등 서해5도 둘레에 사각형 형태의 점선을 그렸습니다. ‘각주 2’는 이 점선의 의미를 엄격하게 규정해놓았습니다. “이 장방형의 구획(점선)은 유엔군 통제하에 두는 각 도서군(섬)을 의미하며, 아무런 다른 의의가 없다…”고 못 박아둔 겁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요. 장방형의 구획은 섬의 위치를 표시하는 점선일 뿐, 그 사각형 안의 공간은 어떤 수역이나 구역, 구획과 같은 공간의 면적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더구나 그 점선 사각형을 서로 연결해 어떤 목적의 선을 긋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기막힌 조항이죠. 백령도 등 5개 섬은 유엔군 통제 아래 두었지만 ‘면’(수역 혹은 구획)이 아니라 ‘점’(섬)에 둔 형국이 된 겁니다. 리영희 교수는 이에 기하학의 초보적 공리를 인용했는데요. “기하학의 초보적인 공리의 하나인 점(點)은 ‘위치는 있으니 크기는 없다’는 것이다. 이 공리가 서해5도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어떨까요. ‘정전협정’에 따르면 한강 하구~서해5도를 잇는 어떤 선도 불법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자연히 한국 측이 설정한 북방한계선(NLL)과 북한이 선포한 50마일 군사경계수역 등은 일방적인 선언 및 주장일 뿐이라는 겁니다. 해상봉쇄는 할 수 없었기에… 선뜻 이해할 수 없는 협정문입니다. 그런데 왜 백령도 등 서해5도를 제외한 나머지 섬에서 철수해야 했을까요. 이 또한 정전협정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정전협정 제2조 제15항을 볼까요. “정전협정은… 한국(북한)에 대해서는 어떤 종류의 해상봉쇄(naval blockade)도 하지 못한다.” 쉽게 풀이하면 북한을 해상봉쇄할 수 없다는 겁니다. 만약 해상에 군사분계선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결국 북한의 황해도 연안을 모두 해상봉쇄하는 셈이 되니까요. 사실 유엔군은 압도적인 제공·제해권을 토대로 서해안의 섬들을 장악하고 있었죠. 유엔군은 교착상태에 빠진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황해도 연안을 봉쇄하게 됩니다. 이것이 1952년 9월 27에서 1953년 8월 27일까지 설치된 ‘클라크 라인’입니다. 정전협정에 사인한 당사자는 마크 클라크 유엔군총사령관과 김일성 조선인민군총사령관, 펑어화이(팽덕회·彭德懷)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이다. 참석자는 정전회담을 이끌었던 유엔군 측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 중장과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 대장이었다. 한국인은 협상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 국사편찬위·박종우 사진작가 제공 미국은 이 ‘클라크 라인’ 등을 골자로 한 중국 및 북한해상 봉쇄안을 유엔총회에 올렸습니다. 끝내 채택되진 않았습니다. 결국 유엔군은 서해5도를 제외한 나머지 도경계선의 서북쪽 연해 섬지역을 공산 측에 ‘양보’했고요. 정전협정에 해상봉쇄 불가조항을 삽입하는 것에도 동의했습니다. 정전협정 제2조 제15항에 따라 유엔군 측이 설정한 해상봉쇄선인 ‘클라크 라인’도 철폐되고 맙니다. 그때가 정전협정 발효 한 달 후인 1953년 8월 27일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와 협상? “하지 마세요!” 올해로 정전협정을 체결한 지 꼭 7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럼에도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동안 잘 알지 못했거나 혹은 간과하고 넘어간 조항이 많네요. 정전협정이 시작된 것은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진 1951년 7월 8일부터였는데요. 이후 2년 19일간의 회담은 그야말로 악전고투였죠. 오죽하면 후반기 휴전회담을 이끈 윌리엄 해리슨 유엔군 수석대표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죠. “(공산주의자와의 협상은) 하지 마세요(Don’t).” 지루한 장광설에 휘말려 고전했고, 언젠가는 2시간 11분간이나 유치한 눈싸움까지 벌이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들으면서까지 악전고투했답니다. 물론 유엔군 측도 비슷한(유치한) 방법으로 맞대응했습니다. 기약 없이 결렬된 정치회담 불완전한 정전협정이었지만 그래도 전쟁 후 유종의 미를 거둘 기회는 있었습니다. 정전협정 제4조 제60항은 “협정 조인 후 3개월 이내에 관계국 간 정치회담에서 외국 군대 철수 및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의 문제를 협의한다”라고 했거든요. 이에 따라 1954년 4월 26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남북한과 유엔참전국 15개국(남아공 제외), 중국과 소련 등 19개국이 참석한 정치회담이 열렸는데요. 그러나 정치회담은 쌍방의 의제와 주장이 평행선을 달린 채 극심한 비방전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6월 15일 다시 만난다는 기약도 없이 결렬되고 말았죠. 이로써 한국통일을 위한 평화적인 노력은 물거품이 됐습니다. 지금까지 남북 간 반목과 갈등의 평행선을 달리는 신세가 됐죠. 저는 정전협정문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해결의 실마리’를 이 대목에서 찾습니다. 그것이 정전협정 제1조 제5항입니다. 즉 “쌍방 민간선박의 항행과 정박을 허한다”는 조항입니다. 그렇다면 어떨까요. 남북한 민간선박이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는 곳, 정전협정 체결 꼭 70년이 흘렀는데, 남북한이 바로 이곳, 한강 하구에서 화해의 이벤트를 벌여봄이…. 지금의 남북관계라면 몽상가의 실현 불가능한 꿈이라고 손가락질하겠죠. 언젠가는 현실로 다가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정전협정 71주년, 72주년… 계속 기다려봅니다.
이기환의 Hi-story
텍사스 정전사태, 에너지 독립의 고립(2021. 02. 26 14:19)
2021. 02. 26 14:19 국제
영하 20도를 밑도는 역대 최고의 한파가 닥치면서 텍사스 주민 약 3000만명 중 500만명 이상이 정전사태를 경험했다. 주민 대부분은 식수와 음식 부족으로 한동안 큰 고통을 겪었다. 아무리 예상 밖의 강추위가 닥쳐 왔다고 하지만 미국에서 개발도상국에서도 흔치 않은 정전사태가 일어나고, 눈을 녹여 물로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미국 텍사스주 애빌린의 한 가구점 주차장에서 노동자들이 판매할 땔감용 장작을 옮기고 있다. / AP연합뉴스 이번 사태는 미국의 연방제와 분권정치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문제의 핵심을 적확하게 꿰뚫어 볼 수 없다. 결론적으로 이번 정전사태를 통해 미국의 분권정치의 폐해, 작은 정부를 추구하는 보수 정부의 허점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텍사스주는 인구와 면적에서 미국 50개주 중 두 번째로 큰 주이다. 원래 멕시코 땅이었다가 1836년 텍사스 공화국으로 독립했고, 1845년 미국의 28번째 주로 편입됐다. ‘Lone Star State(외로운 별 주)’라는 별명을 가진 텍사스주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서부 개척 프런티어 정신 및 문화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최근까지도 정서상으로는 연방정부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연방정부로부터 독립 추구 텍사스주의 연방정부로부터의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움직임은 법, 제도, 세금 등 다양한 부분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왔다. 그런데 이번 정전사태를 통해 이러한 텍사스주의 연방정부로부터의 독립, 자치가 얼마나 큰 경제적·물질적 피해와 정부에 대한 불신을 가져오게 됐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미국의 50개주의 전력망은 텍사스주를 제외하고 기본적으로 동부 전력망과 서부 전력망으로 나뉘어 있다. 한여름이나 한겨울에 특정 주나 지역에서 전력 공급에 차질이 있어도 전력이 풍부하고 남는 주에서 연결해올 수 있기 때문에 정전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다. 즉 이번에 텍사스에 닥쳐온 한파는 이웃 주인 오클라호마, 아칸소주에도 동일하게 닥쳤지만, 이들 주에서는 정전사태가 나타나지 않았다. 같은 주에서도 다른 전력 공급망을 사용하고 있는 엘파소에서도 정전사태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텍사스주는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Federal Energy Regulatory Commission)의 구속을 받지 않으려고, 자체적으로 1970년대부터 ERCOT(Electric Reliability Council of Texas)라고 불리는 텍사스 전기신뢰성위원회라는 공기업을 통해 전력 공급망을 책임지고 있다. 문제는 이 공급망이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의 규제를 피하려다 보니, 다른 동부지역이나 서부지역 전력망과의 연결을 시스템적으로 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전기 부족 사태가 와도 다른 지역에서 전력 공급을 받을 수 없었고, 이번 정전사태를 맞게 된 것이다.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담요를 뒤집어쓴 시민들이 프로판가스를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 AP연합뉴스 7000달러짜리 전기 고지서 받은 주민도 2011년에도 비슷한 한파가 있어 기후변화에 따른 이상 한파에 대비한 월동 대비 시설을 구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이를 묵살하고, 현상유지를 했다. 그 바람에 이번 한파 때 많은 시설이 동파되거나 작동되지 않았다.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자체적인 대비도 소홀했다. 더군다나 전력 공급은 ERCOT가 책임지지만 판매는 일반 전기회사가 자유롭게 가격을 정할 수 있도록 1999년 허용된 뒤 전기료가 그 전에 비해 64% 이상 상승했다. 이번 사태 직후 어느 텍사스 주민은 이번 달 전기료로 무려 7000달러(770만원)나 되는 고지서를 받고 아연실색하게 됐다. 규제 철폐를 통한 이익이 소비자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라 결국 기업에만 막대한 이익이 돌아간 것이다. 텍사스주는 미국의 어느 주보다 석유와 천연가스 등이 풍부해 에너지 최강주로 손꼽혔다. 텍사스주는 이를 기반으로 에너지 독립이라는 자신감이 있었고, 큰 정부로 대표되는 연방정부에 대한 반감으로 규제를 피해 그들만의 에너지 독립 정책을 추진하려던 것이 스스로를 고립시킨 꼴이 됐다. 그 결과 텍사스 주민은 막대한 정신적·물질적 피해와 손실을 겪게 됐다. 지난 대선을 통해 공화당과 민주당의 지지가 근소한 차이로 좁혀지면서 텍사스주는 앞으로 ‘스윙 주(특정 정당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는 주)’가 될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전망이 나왔다. 이번 정전사태를 통해 그러한 전망이 더 빨리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기후변화가 미국 정치 지형에도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 틀림없다. 누구에게는 한파로 닥쳐올 것이고, 누구에게는 따뜻한 봄날로 돌아올 것이다.
[포커스]검·경 수사권 조정안은 ‘정전협정’?(2018. 07. 02 15:06)
2018. 07. 02 15:06 사회
ㆍ해묵은 갈등 “끝내라”는 정부 합의문… 검찰·경찰 모두 웃지도 울지도 못해 “정전협정이다.”   정부가 지난 6월 21일 발표한 검·경 수사권 조정안 합의문을 두고 한 정부 관계자는 이런 평을 했다. 이번 합의문은 ‘그만 싸우라’는 정부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검찰과 경찰은 60년 넘게 수사권 조정을 놓고 싸워 왔다. 한두 해 묵은 갈등도 아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에서는 해결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문제가 됐다. 이유는 검찰개혁이다. 촛불민심을 등에 업고 세워진 문재인 정부에서 검찰개혁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찰이 매번 검찰과 싸우는 모습만 보인다면 검찰개혁 역시 요원하다는 정권의 판단이 있었다는 것이다. “검찰개혁이라는 것이 결국은 수사권 조정을 통한 막강한 권력분산인데 그 수사권을 준다고 하면 누굴 주겠나. 경찰한테 줘야 하는데 경찰은 매번 검찰과 영장갈등, 수사 지휘권 갈등이나 보이는 상황에서 정부가 경찰을 믿고 수사권을 넘기도록 할 수 있겠느냐는 거다. (결국 검·경 수사권 조정 합의문은) 일단 싸움을 멈춰놓아야 그 다음을 계획할 수 있다는 판단이 들어간 작업이다.” 이 때문일까. 불과 일주일 정도 지난 6월 28일 현재 일선 경찰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서울지역 경찰서의 한 수사팀장은 “처음에는 경찰들이 ‘무슨 이런 합의가 다 있냐’면서 분노하다가, 경찰 내 일부 인사들이 ‘그래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하니 조금 수긍하는 분위기였다가 지금은 까맣게 잊고 지낸다”면서 “(수사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그런 합의사항을 신경 쓸 겨를도 없다는 게 우리들의 솔직한 반응”이라고 말했다. 이어 “사실 이번 합의문을 우리들(경찰)이 예뻐서 줬다기보다는 검찰개혁의 요체가 수사권 분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넘겨 받은 것 아니냐”고 했다. 지휘관계가 아닌 대등한 협력관계로 물론 검·경 수사권 조정 합의문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일선에도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 비록 헌법개정 사안인 영장청구권 문제는 제외됐지만 경찰과 검찰의 관계를 상명하복 지휘관계가 아닌, 대등한 협력관계로 규정한 것은 진일보한 것이라는 평가다. 조정안에 따르면 경찰은 앞으로 사건 송치 전까지 검찰의 수사 지휘를 받지 않는다. 검·경의 수직적 지휘관계가 수평적 관계로 전환되는 핵심 조항인 셈이다. 물론 조정안에는 검찰이 경찰 수사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상당 부분 남겨놨다. 검찰이 영장청구 시 필요한 경우 경찰에 보완수사를 요구할 수 있고, 경찰이 보완수사 요구에 따르지 않을 경우 검찰총장 또는 각급 검찰청 검사장은 경찰청장을 비롯한 징계권자에게 해당 직원의 직무 배제 또는 징계를 요구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또 경찰의 수사권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경찰 수사과정에서 법령위반, 인권침해, 현저한 수사권 남용이 의심되는 사실의 신고가 있거나 인지하게 된 경우 경찰에 사건기록 등본 송부 및 시정 요구를 할 수 있도록 한 일종의 ‘감시권’을 검찰에 부여했다. 수사 지휘권을 ‘빼앗긴’ 검찰을 달래는 일종의 당근인 셈이다. 합의문에 따르면 경찰은 수사권과 함께 수사종결권까지 갖게 됐다. 그러나 완전한 수사종결권이 아닌 ‘1차’라는 수식이 붙어 있다. 경찰이 불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송치하지 않더라도 불송치결정문, 사건기록 등본을 검찰에 통지함으로써 검찰의 사후 판단을 받도록 한 것이다. 검찰은 이를 토대로 이의제기를 하거나 재수사를 요구할 수 있다. 일선 경찰은 1차 수사권·종결권을 받은 것에 일단 환호하는 분위기지만 자성론도 있다. 경찰 내에 일부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고 검찰에 ‘퉁치는’ 관행이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머슴(경찰)이 주인집(검찰) 농사(수사)를 지으면서 내 논같이 농사 짓겠냐’는 식의 그릇된 인식을 고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ㄱ경감은 “이제는 경찰이 검찰과 동등한 하나의 수사기관이라는 무게를 잘 인식하고 좀 더 책임감 있게 수사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앞줄 왼쪽)과 김부겸 행안부 장관(앞줄 오른쪽)이 6월 21일 정부서울청사 국제회의실에서 검·경 수사권 조정 합의문에 서명하는 동안 이낙연 국무총리·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강윤중 기자 다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것은 검찰개혁의 핵심과제 중 하나이기도 한 영장청구권이다. 영장청구권은 이번 합의에서 빠졌다. 헌법을 개정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검찰이 영장을 기각했을 때 경찰이 관할 고등검찰청에 설치된 영장심의위원회(가칭)를 통해 이의제기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경찰이 그동안 줄곧 주장해 온 ‘검찰의 자의적 영장청구권 행사’를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 간부급 경찰은 “검찰이 영장청구권을 틀어쥐고 경찰의 수사를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하게 하다가 막상 그 사안이 언론 보도 등 외부로 공개되면 그제야 청구해주는 경우도 있어 왔다”면서 “때문에 비록 경찰이 검찰과 동일한 영장청구권을 갖지는 못하더라도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창구가 생겼다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영장청구권은 빠져 여전히 아쉬움 물론 검찰 입장에서는 한없이 실망스러운 결과다. 공식대응은 자제하고 있지만 경찰의 부실·강압수사를 염두에 둔 비판은 검찰이 내놓은 의견서에도 적나라하게 나온다. 검찰 측 의견서를 살펴보면 “경찰의 수사과정에서의 불법수사로 국민의 자유와 인권이 침해되는 경우 검사의 역할이 경찰의 수사에 ‘협력’하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검사의 역할은 구속력 있는 지휘·지시로 불법·부당한 수사를 중지시키거나 수사가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시정하는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또 국민의 입장에서도 경찰 수사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인권침해, 불법·부당수사를 통제할 장치가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경찰이 ‘법률전문가’가 아닌 점도 우려의 근거로 들고 있다. 이미 과거부터 경찰의 부실·불법수사가 존재해 왔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경찰에 큰 권한을 주고, 실효성 없는 보완수사 등 2차 수사·감시권을 준 것은 검찰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검찰의 수사영역을 부패범죄, 경제범죄, 금융·증권범죄, 선거범죄 등으로 제한한 것 역시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이다. 테러나 연쇄살인사건 등 검·경 수사 협력이 필요한 사건이 터졌을 때 검찰이 즉각적인 수사권을 갖지 못한다면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게다가 검찰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설치될 경우 현직 및 퇴직 2년 이내 정무직 공무원, 청와대·국정원 3급 이상, 법관·검사, 장성급 장교(전직에 한정), 경무관 이상 경찰공무원과 그 배우자 및 직계존비속, 대통령의 경우 4촌 이내 친족에 대한 수사는 모두 공수처로 넘겨야 한다(법무부 안). 검찰이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꼽혀 온 고위공직자 수사권을 내려놓아야 하는 셈이다. 경찰 역시 비록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지만 수사기능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국가수사본부 신설이나 자치경찰제 확대 등 경찰 조직을 사실상 여러 갈래로 분산하는 개혁안에 불만을 내비치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검찰과 경찰은 합의안이 발표된 이후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질의응답을 통해 한 발언을 새겨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검·경 양측 모두 불만이 있는 것으로 안다. 합의가 이뤄진다는 것은 양쪽의 입장을 100%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합의는 어느 한쪽 손을 들어주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에 견제를 해야 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것이다.”
[렌즈로 본 세상]정전 61주년…먹구름 낀 판문점(2014. 07. 29 11:34)
2014. 07. 29 11:34 정치
한국전쟁이 멈춘 뒤 어느덧 61년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 한반도에는 불안하지만 평화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정전협정기념일을 앞두고 찾아본 판문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남과 북의 경계병들이 콘크리트로 된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응시하며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판문점 하늘에는 이날 따라 검은 먹구름이 짙게 끼어 있습니다. 저 먹구름도 곧 걷히고, 맑은 하늘이 대지를 비추겠지요. 남북관계에서도 저 먹구름이 걷히면 얼마나 좋을까요.
렌즈로 본 세상
[김호기의 예술과 사회]정전 60년, ‘지루한 장마’가 어서 끝나기를(2013. 07. 23 15:56)
2013. 07. 23 15:56 문화/과학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맞이해 경향신문에서 이화여대 박인휘 교수와 ‘김호기·박인휘의 DMZ 평화 기행’을 시작했다. 첫 번째로 찾은 곳은 인천 강화도 양사면에 있는 강화제적봉평화전망대였다. 취재를 맡은 홍진수 기자, 사진을 맡은 김기남 기자와 동행했는데, 출발하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김포를 거쳐 강화를 오갔던 그날은 하루 종일 장대비가 쏟아지다 그치기를 반복했다. 지루한 장마의 시간이었다. “밭에서 완두를 거두어들이고 난 바로 그 이튿날부터 시작된 비가 며칠이고 계속해서 내렸다. 비는 (…) 두려움의 결정체들이 되어 수시로 변덕을 부리면서 칠흑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고 있었다.” 윤흥길 소설 의 첫 부분이다. 강화도로 가는 도중 쏟아붓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떠올린 구절이다. 여름이 되면 겪게 되는 장마는 동아시아 몬순(계절풍) 기후가 갖는 특징의 하나다. 매년 6월부터 7월까지 겪게 되는 장마가 외국에 살았을 때는 더러 그립기도 했지만 더 없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시간의 연속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잊을 수 없는 여름의 하나는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이어진 한국전쟁일 것이다. 강화도 제적봉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몇십년 전만 하더라도 배를 통해 오갈 수 있는 이곳과 저곳은 아주 가까운 생활권이었다. | 김기남 기자 는 바로 이 한국전쟁을 다룬 작품이다. 10살 난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한국전쟁에서 나타난 대립과 갈등을 그린 중편소설이다. 소설의 기본 구조는 빨치산이 돼 산속에 숨어 지내는 아들을 둔 친할머니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국군이 됐지만 안타깝게 전사한 외할머니 사이의 갈등이다. 두 할머니의 관계는 남과 북의 대립을 상징하는데, 윤흥길은 이 대립 속에 나타난 전쟁이라는 비극은 물론 인간적인 미움까지도 섬세하게 그려낸다. 비가 그치지 않고 줄기차게 내리는 장마는 다름 아닌 한국전쟁의 은유다. 돌아보면 한국전쟁은 해방, 산업화, 민주화와 함께 우리 현대사의 큰 전환을 이뤘던 일대 사건이다. 북한의 남한 침략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폐허로 만들고 막대한 인명피해를 가져 왔다.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한국전쟁에서 발생한 인명피해는 유엔군과 중국군을 포함한 군인 322만명, 민간인 249만명에 달했다.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했을 비극이었다. 전쟁의 포성이 그친 것은 1953년 7월 27일이었다. 전쟁이 발발한 지 1년이 지난 1951년 7월 17일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체결하면서 끝났다. 협정의 주요 내용은 ‘적대행위와 일체의 무장행동 중지,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DMZ) 설정, 군사정전위 및 중립국 감독위 설치, 전쟁포로 인도 및 인수,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의 소집’ 등이었다. 정전협정에 따라 1954년 제네바에서 정치회의가 87일 동안 열렸지만 성과 없이 종결됐다. 이런 불안정한 협정 때문에 지난 60여년간 남과 북 사이에는 여러 사건들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중요한 것은 1953년 체결된 게 전쟁을 종결하는 평화협정이 아니라 전쟁을 일시적으로 멈추는 정전협정이었다는 사실이다. 정전 60년은 냉전 40년과 탈냉전 20년으로 이어져 왔는데, 탈냉전 20년은 다시 2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첫 번째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주고받은 후 1993년 북핵 위기가 있었지만 세계사적 탈냉전의 흐름에 병행해 남북한 군사적 긴장이 완화된 시기다. 이어 두 번째는 2006년 북한이 제1차 핵실험을 감행한 후 천안함 침몰, 연평도 포격을 거치면서 군사적 긴장이 다시 고조되고, 전면전에 대한 우려가 커지기도 했던 시기다. 세계사적인 탈이념의 흐름 속에 남과 북의 군사적 긴장이 강화되는 ‘탈냉전 속의 냉전’이라는 현실이 현재 한반도가 놓여 있는 자리다. 윤흥길 소설 , 민음사 | 민음사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꿔야 한다. 문제는 이런 평화로 가는 길이 매우 험난하다는 점이다. 당장 눈앞에 놓인 과제는 북핵문제의 해결이다. 우리 정부와 미국은 ‘선 핵문제 해결, 후 평화체제 구축’을 강조하는 반면, 북한은 ‘선 평화체제 구축, 후 핵문제 해결’을 고수하고 있다. 당연히 핵문제를 해결하고 난 다음 평화체제 구축을 모색해야 하지만, 북한이 핵을 자위의 수단으로 삼고 있으니 답답한 국면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탈냉전 20년이 주는 교훈은 정전상태라는 절반의 평화를 넘어서 완전한 평화로 가기 위한 지름길은 없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남과 북이 다각적인 대화를 통한 협력을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북아의 핵심 이해당사자들인 미국·중국과 함께 다자간 평화협력 관계를 꾸준히 모색하는 것만이 현재로서는 최선의 길이다. 이 평화로 가는 도정에서 정전 60주년을 맞이한 올해가 새로운 전환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당혀야 할 일을 사분이 대신 맡었구랴. 그 험한 일을 다 치르노라고 얼매나 수고시렀으꼬.” “인자는 다 지나간 일이닝게 그런 말씀 고만두시고 어서어서 묌이나 잘 추시리기라우.” 의 마지막에 나오는 친할머니와 외할머니의 대화다. 현실의 갈등이 너무 치열했던 탓인지 윤흥길은 이렇게 구렁이를 등장시켜 화해를 모색한다. 산으로 들어간 아들을 대신해 나타난 구렁이를 보고 친할머니가 기절을 하자, 외할머니가 정성을 다해 구렁이를 달래 사라지게 한다. 어떤 이들은 작가가 샤머니즘을 끌어와 비현실적 화해를 제시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현실의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으며, 바로 그 비현실적인 화해의 방식이 전후 세대가 바라보는 전쟁의 비합리성과 비극성을 생생히 전달한다.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불안정한 평화의 현실을 돌아볼 때 소설 가 주는 울림은 지금도 작지 않다. 제적봉평화전망대에 서서 좁은 바다 건너 북녘 땅을 바라보니 마음이 더 없이 착잡했다. 몇십년 전만 하더라도 배를 통해 오갈 수 있는 이곳과 저곳은 아주 가까운 생활권이었으리라. 사람들이 오갈 수 없는, 시간이 정지된 바다를 바라보며 박 교수와 나는 말을 잇기 어려웠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장대비가 다시 쏟아졌다. 이 답답하고 지루한 장마가 어서 끝나기를 소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호기
김호기의 예술과 사회
[특집 l 시민정치의 꿈]‘안철수 쇼크’ 여의도를 정전시키다(2011. 09. 27 17:19)
2011. 09. 27 17:19 정치
ㆍ기존 정치권 우왕좌왕에 정당정치 허약함 여실히 확인 일주일간 ‘여의도 전구’에 불이 나갔다. 시끄러운 여의도가 일순간 화석화되었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서울시장직 관심 발언 한 마디에 대한민국 정치는 정지했다. 정치권은 마치 정권말 공직사회의 복지부동을 연상시키듯 바짝 엎드려 숨을 죽였다. 언제나 기세등등하던 정치권의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대중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9월 2일 ‘청춘콘서트’에서 강연하기 위해 서울대 문화관으로 들어가고 있다. /김영민 기자 기성 정치에 강력한 어퍼컷을 날리고 잠복한 안철수 원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주로 누구인가. 기본적으로는 20~30대의 젊은층, 고학력층, 화이트칼라 및 학생층 등에서 특히 지지경향이 강하다. 눈에 띄는 것은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는 이른바 무당파층의 상당 부분이 안철수 원장에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권주자들 전부를 불러주고 묻는 지지도 조사에서 안 원장은 17.4%의 지지를 얻었는데, 무당파층에서만 보면 20.6%로 전체 결과보다 더 높다. 무당파층에서 안원장 지지 높아 무당파층에서 강세라는 점은 박근혜 전 대표와의 일대 일 가상대결 조사 결과에서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나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경우, 전체 결과도 그렇지만 무당파층에서도 박 전 대표와 거의 30%포인트의 격차가 난다. 그런데 안 원장의 경우, 박 전 대표와 일대 일 가상대결시 전체 결과는 ‘박근혜’ 50.8%, ‘안철수’ 42.1%로 나타나 격차는 한자릿수에 불과한 것으로 나오고, 지지정당이 없는 무당파층만을 놓고 보면 ‘박근혜’ 44.7%, ‘안철수’ 46.6%로 미세하지만 안 원장이 더 높은 비율을 보여주고 있다. 무당파층에서 안 원장 지지 비율이 높다는 것은 안 원장이 이들에게 정치적 희망을 실현시켜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주고 있음을 의미한다. 정당지지 유권자 인식에도 변화 지난 8월 조사에서는 안 원장이 포함되지 않았다. 당시 지지하는 정당이 없는 무당파층만 놓고 보면, 지지하는 차기 대권주자를 정하지 못한 비율이 무려 38.6%였다. 안 원장이 포함된 9월 조사에서는 21.2%였다. 안 원장의 출현으로 무당파층 중 지지하는 대선후보를 정하지 않은 사람들의 비율이 대폭 줄어든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이러한 ‘안철수 열기’가 지속될까. 여론조사상 안 원장의 지지층으로 표현되는 사람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지지층’이라고 부르기는 적확하지 않다. 지지층이 되기 위한 충분한 숙성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선호층 또는 관심층 정도로 부르는 게 맞을 것이다. 박근혜 전 대표는 오랜 시간 지지층이 다져져왔다고 할 수 있는 데 비해 안 원장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견고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현 수준의 지지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는 시기가 지나가고 있는 것도 지지도 조정을 불가피하게 할 것이다. 다만 대중에게 강하게 인식효과를 주었고, 그간 철옹성으로 불려온 박근혜 전 대표에게 경쟁력이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본인의 의지나 의사와 무관하게 계속해서 일정 정도의 영향력을 보유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야권에서 마땅한 후보가 부각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차기 대권 경쟁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정치적 메시지를 내놓는다면 현 수준의 지지도를 금세 회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대통령은 단지 한 개인을 뽑는 문제가 아니라 정치집단의 선택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정치세력의 지원 없는 독자적인 행보로는 절대적 한계가 있겠지만 말이다. ‘안철수 쇼크’는 우리나라 정당정치의 허약함을 여실히 확인시켜주었다. 함부로 범접할 수 없을 것 같던 여의도가 여리고성처럼 무너져내리는 상황이 목도되었다. 기존 정당을 지지한다고 하는 유권자들의 인식에도 변화를 주었다. 안 원장 출현 이후에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는 무당파층의 비율 자체가 높아졌다. 지난 8월 조사에서는 26.3%만이 무당파였는데, 이번 9월 조사에서는 35.2%로 약 9%포인트가 많아졌다. 정당들은 내년 총선과 대선의 대회전을 앞두고 발생한 안철수 쇼크로 인해 대중들의 외면을 받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정당들은 대중들의 관심이 장외로 향하지 않도록 혁신경쟁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양당의 혁신경쟁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서로 다른 결과가 예상된다. 한나라당은 내년 총선 과정에서 고강도의 개혁조치를 단행하지 않을까 한다. 한나라당의 실질적 주인이 된 박근혜 전 대표는 차기 대권 프로그램의 한 과정으로서 과감한 공천개혁을 시도할 것이다. 자신 주변에 있던 일부 친박 의원들의 공천 탈락도 용인할 것이다. 그래야 대중들의 관심이 외부 인물로 번지는 것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당은 혁신경쟁에서 한나라당에 뒤처질 공산이 크다. 혁신조치를 단행할 주도세력이 민주당엔 없다. 몇 개 세력이 권력을 균분하고 있는 상황에, 유력 대권주자가 부재한 상황에서 과감한 당개혁과 공천개혁을 추진하는 것 자체가 버거워 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야권연대·통합 논의에서 민주당의 기득권을 최대한 방어하려는 데 더 신경을 쓸 것 같다. 안 원장은 TV에서 사라졌지만 기성 정치권의 부실함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고, 이에 도전하려는 인물들의 자신감을 충만케 하는 유산을 남겼다. 당장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의 무소속 박원순 변호사의 강세와 보수진영의 무소속 이석연 변호사의 등장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만약 서울시장 선거에서 특정 정당 소속이 아닌 인물이 당선되고 시장직에 연착륙한다면 ‘안철수 대체재들’의 출현이 추후 더 용이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계절은 바뀌고 여의도 정치권도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슬슬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지만 전원이 완전히 복구되지는 못했다. 여전히 깜빡거리는 형광등이다. 깜빡거리는 여의도 전구에 정당은 불이 들어오게 할 수 있을까. 윤희웅
특집
[사회]정전사태 근본 해결책을 찾아라!
[사회]정전사태 근본 해결책을 찾아라!(2011. 09. 27 16:35)
2011. 09. 27 16:35 사회
ㆍ피크타임대의 수요 관리, 한전·전력거래소 통합구조가 대안 9월 15일 정전에 따른 피해는 접수 3일 만에 2166건, 피해금액은 148억3000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전사태의 명확한 원인과 책임소재가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전력구조의 근본적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환경운동 측에서는 공급 중심의 정책에서 수요관리 정책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9월 16일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거래소 중앙급전실에서 직원들이 상황판을 보며 전력 수급을 점검하고 있다. /김세구 기자 차등요금, 스마트계량기로 절약 유인해야 전력거래소 염명천 이사장은 정전사태의 원인으로 “예측하지 못한 이상고온”을 꼽았다. 그러나 해마다 예측할 수 없는 무더위와 한파가 이어지고 있는 만큼 기후변화 현상은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다. 환경운동연합의 일본원전사고대비위 김혜정 위원장은 “기후변화가 일상화되어 있으므로 이변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며 “기상이변에 적응할 수 있는 형태로 수요관리를 강화하면서 공급관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제기한 수요관리의 핵심은 피크타임(peak time) 관리다. 발전소를 짓고 전력공급 확대에 치중하기보다 전력수요가 늘어나는 피크타임대의 수요를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이에 대한 방안으로 “수요자가 스스로 전기를 절약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인체계가 제도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전력요금 현실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예를 들어 전력소비량이 가장 많은 시간대에 전력요금을 더 높게 책정하고, 스마트 계량기처럼 자신이 현재 쓰고 있는 전기량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을 보편화해서 수요자 스스로 소비를 줄일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피크타임 관리가 성공적으로 정착한 예다.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전력 예비율이 낮아지면 정규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전력 소비를 줄이도록 홍보하고 전력을 많이 쓰는 공공기관이나 학교 및 대형건물과 연계하는 피크타임 관리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그 결과 캘리포니아주는 에너지 효율을 높여 미국 평균의 40% 정도의 전력만을 사용한다”며 “우리나라에도 일부 정책이 있긴 하지만 사실상 제대로 작동이 안 되고 있으며, 정부가 그런 것을 할 의지도 없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늘어나는 전력소비량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원자력 발전 증설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전력 수급계획에 따라 안정적인 전력을 확보하는 것이 근본적인 처방이기 때문에 원전 증설 말고 현실적인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혜정 위원장은 원전은 수요관리의 핵심인 피크 타임을 조정하는 데 효율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태양광이나 풍력 발전, 가스 발전의 경우에는 전력 피크타임 때에 바로 껐다 켰다 할 수 있을 정도로 공급 탄력성이 높다”며 “그러나 원자력 발전은 한 번 불을 붙이면 끄기도 힘들지만 갑자기 출력을 높일 경우 사고를 일으킬 위험이 높은 발전원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9월 22일 에너지시민연대가 개최한 긴급 토론회에 참석한 후지무라 야스유키 니혼대 공대 교수도 “정전사태로 원전 추가 건설 문제가 부각돼서는 안 된다”며 “전력 부족이 아니라 지나치게 전력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후쿠시마 사태 이후 일본의 전체 원전 54기 중 11기만 가동되고 있다는 것을 예로 들었다. 후지무라 교수는 “내년 4월이면 11기도 모두 점검에 들어가 원전 가동이 멈추지만 에너지 절약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어 전력 부족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3년 캘리포니아 대정전은 민영화 때문 한편 산업계에서는 전력산업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지적한다. 전력수급과 송전·배전을 각각 전력거래소와 한국전력으로 이원화한 것이 의사소통과 책임소재를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전국전력노조의 최용혁 대외협력실장은 9월 15일 정전이 발생한 것을 언론을 통해서 알았다. 최 실장은 “그날 3시에 전력수급에 문제가 있다는 사내방송이 나왔고, 4시가 넘어서 정전이 됐다고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다”며 “우리도 어이가 없는 게 한전이라는 회사가 모든 사람이 생각하듯 전기를 책임지는 기업인데, 그 기업의 핵심부서들이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9월 16일 발전노조 조합원들이 서울 삼성동 한전 본사 앞에서 대규모 정전사태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세구 기자지금의 전력산업 구조는 김대중 정부 때 IMF 극복 과정으로 공기업 민영화를 추진하면서 만들어졌다. 전력은 크게 발전, 송전, 배전 세 부분으로 나뉜다. 이전에는 이 세 가지를 모두 한국전력공사에서 담당했지만 2001년 4월 발전부분이 6개 발전사와 전력거래소로 나누어졌다. 당시 계획은 나누어진 발전소를 민영화하고 배전부분도 6개로 나눠 민영화할 예정이었다. 민영화에 제동을 건 것은 200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전력사태였다. 전력 구조개편에서 모범으로 삼았던 캘리포니아주에서 대정전사태가 발생하면서 시스템의 폐해가 드러난 것이다. 결국 2003년 노무현 정부 들어서 기대편익이 불확실하고 한 번 시행할 경우 되돌리기 어렵다는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민영화 중단을 결정했다. 최용혁 실장은 “당초 의도한 자유시장경쟁체제가 무너지고 민영화가 중단된 어중간한 상태로 나눠져 있다보니 협조와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겼다”며 “한 회사가 하던 것을 나누어 하다보니까 일을 계획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손발이 맞지 않는 비효율적인 상황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사회공공연구소의 오건호 연구실장은 “민영화를 목표로 했던 현재의 분할구조는 전력산업을 관리하는 데 적합하지 않은 구조”라며 “이번 사태의 가장 큰 문제는 전력 발전을 공급하는 일관적인 통합관리시스템이 망가졌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 실장은 “전력은 일관적인 네트워크 사업이기 때문에 송전과 발전, 배전을 쪼개면 그 내부에서 유기적인 통합관리체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정부에서는 이를 전력거래소가 충분히 총괄, 관리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이번 사태에서 그것이 아니라는 게 증명됐다”고 말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