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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혜림과 함께 떠나는 독일 문화 기행]정치인의 스캔들에 대응하는 독일의 자세
- 2012. 11. 20 17:24 육아/교육
- 우리는 정치인들의 스캔들을 자주 접하는 까닭에 관련 뉴스를 들어도 그리 충격적이지도 않다. 게다가 시간이 흐른 뒤 그들이 국민 앞에 고개를 숙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쉽게 용서를 해주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독일은 정치인의 스캔들에 어떻게 대응할까? 1 논문 표절 논란에 휩싸였던 올림픽 태권도 금메달리스트 문대성. 2 독일 집권 여당의 정치인 구텐베르크. 3 독일 제1야당 자유민주당의 유럽 대표의원 코흐메린. 4 논문 표절 의혹을 받는 아네테 샤반. 5 교육부장관 차치마르카키스. 6 구텐베르크의 복귀를 원하는 사람들의 페이스북.1 매번 교수님께 리포트를 내거나 석사 논문을 제출하고 난 뒤 간담이 서늘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혹시 어디서 문장을 그대로 도용하진 않았을까’, ‘주석을 제대로 밝혔는가’라며 스스로 생각해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난겨울이었습니다. 총선이 열리기 전, 정치인들의 비리가 여러 건 터졌습니다. 뇌물, 성 상납, 성추행과 같은 스캔들이었죠. 사실 우리에게는 엄청나게 큰 사건들이지만, 정치인들에게는 항상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습니다. 2 그런데 단 하나,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표절된 논문을 다시 표절한 올림픽 태권도 금메달리스트 문대성 후보가 교수직을 사퇴했지만 국회의원에 당선됐다는 점입니다. 개인적으로 현재 논문을 쓰는 것이 제 일이기 때문에 민감한 부분도 있습니다. 또 제 어머니 세대의 경우 대학을 졸업하신 분들이 많지 않고, 논문에 대한 지식이 적거나 관심이 전혀 없는 분들이 많을 것이라 조금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를 관대하게 바라보는 친구들의 반응이었습니다. 3 독일 집권 여당의 정치인 칼 테오도르 주 구텐베르크(Karl-Theodor zu Guttenberg) 박사의 논문 표절은 독일 내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2009년 경제기술부 장관을 지냈으며 2011년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40대의 법학자 출신의 전도 유명한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2011년 2월 중순 논문 표절 의혹이 제기됐고, 4월에는 논문 표절이 확정되면서 바이로이스 대학의 박사 학위가 취소된 것과 동시에 “큰 실수였다”라는 짧은 말을 남기고 정치 관련 모든 임무를 사퇴했습니다. 4 독일 정치인들의 논문 표절 의혹은 현 교육부 장관 차치마르카키스(Chatzimarkakis)의 박사 논문까지 이어졌습니다. 2011년 5월, 독일 제1야당 자유민주당의 유럽 대표의원 질바나 코흐메린(Silvana Koch-Mehrin) 역시 논문 표절 의혹에 휩싸여 유럽의회 의장직과 국회 부의장직을 사퇴했습니다. 한 달 이후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그녀의 박사 학위를 취소했고, 그해 12월 대학의 결정을 받아들였습니다. 구텐베르크와 코흐메린의 경우 모두 인터넷상에서 표절 논란에 휩싸였고, 약 한 달 반 안에 표절 심사와 정치 사퇴로 사건이 마무리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유민주당 차치마르카키스의 경우 특이한 것은 자신의 박사 학위를 폐지한 본 대학교에 법적 소송을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2011년 7월 13일 표절 판정된 결과를 뒤집을 수는 없었지만요. 5 로버트 슈미트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익명의 누군가가 지난 5월, 인터넷에 공개적으로 기독교민주동맹 아네테 샤반(Annette Schavan)의 논문 표절 의혹을 제시했는데요. 구텐베르크와 코흐메린의 논문이 복사와 붙여넣기의 확실한 논문 표절이었다면, 이것은 내용을 교묘하게 짜깁기하면서 주석을 정확히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32년 된 이 오래된 논문을 대학에서 여전히 심사하고 있답니다. 이 건이 표절 시비로 결론 난다면 더욱 충격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녀의 직책이 현 교육학과 대학교수이자 독일 교육부 장관이기 때문입니다. 6 정치인들이 스캔들 이후 종적을 감춘 뒤 시간이 지나 다시 나타나는 것은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작년 이맘때, 한 젊은 강사가 “왜 독일 사람들이 구텐베르크의 복귀를 그렇게 원하는지 모르겠다”라고 푸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훔치고 자신의 공으로 돌리며 그 타이틀을 도용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 이에게 우리의 권리를 위임하는 것이 과연 그들의 실제 정치와 무관할지 반드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그 문제는 우리들의 인식에서 출발해 사회적으로 다뤄지고 판단되는 문제이니까요. 독일 통신원 오혜림(28) www.twitter.com/LeipzigBegabung 600년의 역사를 지닌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영재교육 석사 과정 졸업 후 현재 에어랑엔 뉘른베르크 대학에서 교육심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독일의 교육과 심리학 저변뿐만 아니라 문화·정치·역사에 관한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지금 바로 그녀와 트위터 친구가 되어보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그녀가 경험한 생생한 독일의 삶과 풍경을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다. <■기획&정리 / 김민주 기자(www.twitter.com/min7765) ■글&사진 / 오혜림>
- 오혜림과 함께 떠나는 독일 문화 기행
- 대한민국 대표 여성 정치인 패션 따라잡기
- 2012. 10. 11 17:12 패션
- 연예인 공항 패션, 연예인 행사 패션만큼 관심을 끄는 것이 바로 여성 정치인들의 패션 스타일이다. 단정하고 깔끔한 혹은 활동적이고 경쾌한 스타일링으로 자신만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는 여성 정치인들의 패션 세계를 공개한다. 박근혜 / 새누리당 대선 후보 Fashion Keyword Formal&Elegance 사람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이 믿음과 신뢰라고 말하는 그는 옷차림 또한 보수적이면서 포멀한 느낌의 정장과 원피스를 착용한다. 하지만 대선 유세 등 대외활동을 할 때는 스포티한 느낌을 주는 점퍼 등의 아이템도 즐겨 입는다. 최근 대선을 앞두고 자신의 정체성을 부각시키는 밝고 화려한 색상의 의상을 입은 모습이 자주 포착되며, 여기에 고급스러우면서도 여성미가 드러나는 브로치나 목걸이, 시계 등을 함께 매치하는 추세. Styling Hint 1 활동이 편안한 점퍼에 셔츠를 매치해 스포티한 느낌과 동시에 단정한 느낌을 준다. 플랫칼라 화이트 셔츠 11만9천원, 올리비아로렌. 스트링 장식의 라이트 그레이 점퍼 가격미정, 이새. 활동성을 배려한 블랙 크롭트팬츠 5만9천9백원, 유니클로. 시크한 느낌의 그레이 플랫 슈즈 17만9천원, 나무하나. 2 강렬한 느낌의 레드 재킷에 블랙 팬츠를 매치해 카리스마 있으면서도 포멀한 느낌을 연출한다. 심플한 디자인의 블루 셔츠 17만8천원, 제시뉴욕. 단정한 느낌의 레드 재킷 22만9천원, 이사베이. 베이식 실루엣의 네이비 팬츠 가격미정, 제라르다렐. 크로커다일 패턴의 레더 백 1백5만원, 마리아꾸르끼. 고급스러운 디테일의 펌프스 17만9천원, 나무하나. 진주로 포인트를 준 골드 브로치 가격미정, 제이미앤벨. 클래식한 연출을 위한 진주 목걸이 가격미정, 제이미앤벨. 외국 여성 정치인 스타일 No. 1 마거릿 대처 / 전 영국 총리 클래식하고 우아한 룩을 즐겼던 마거릿 대처. 동시에 파워풀한 면모를 부각시켜주는 의상으로 푸른색 스커트 투피스를 자주 입었다. 여기에 그는 고급스러운 하이 주얼리 브랜드의 액세서리로 의상에 포인트를 주며 자신의 시그니처 룩을 완성했다. 메릴 스트립이 주연한 영화 ‘철의 여인’에서 그의 엘리건트한 스타일을 감상할 수 있다. Styling Hint 1 아이보리 컬러 시폰 블라우스 8만9천6백원, 샤트렌. 산뜻한 느낌이 돋보이는 블루 스커트 정장 가격미정, 칼리아. 2 하프 현이 떠오르는 리르링과 볼륨감있는 디자인의 아르슈링. 모두 가격미정, 루시에 . 나경원 / 2013 평창 스페셜올림픽 조직위원장 Fashion Keyword Feminine&Sensible 평소엔 무채색 계열의 고급스러우면서도 단정한 정장에 스카프나 코르사주, 브로치 등의 액세서리를 매치한다. 블랙 재킷을 착용할 때는 컬러감이 돋보이는 이너웨어나 스카프를 매치해 재킷이 주는 매니시한 느낌을 완화시킨다. 셔츠나 점퍼를 입을 때도 프릴 장식이 있는 디자인으로 늘 여성스러움을 강조하는 그는 ‘원조 얼짱 여성 정치인’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세련된 룩을 선보인다. Styling Hint 1 페미닌하면서도 포멀함을 연출하는 컬러와 디자인의 슈트 스타일링. 액세서리의 컬러 또한 상의와 맞춰 더욱 깔끔한 느낌이다. 아이보리 컬러 실크 블라우스 15만7천원, 샤트렌. 레드 커프스 장식 네이비 컬러 재킷 23만9천원, 나이스크랍. 비대칭적인 프릴 장식 스커트 7만8천원, LIST. 실버톤 브로치 가격미정, 제이미앤벨. 체인 스트랩 블랙 레더 백 50만5천원, 더블엠. 블랙 페이턴트 펌프스 10만원대, 엘리자벳. 2 전체적으로 톤 다운된 컬러와 부드러운 곡선의 디자인을 선택해 딱딱할 것이라는 정치인의 고정관념을 탈피하는 것이 스타일링 포인트. 라운드 네크라인의 화이트 시폰 블라우스 13만9천원, 이사베이. 턱시도 칼라 그레이 재킷 20만2천3백원, 칼리아. 다크 베이지 컬러가 여성스러운 스커트 23만8천원, 아니베f. 리본 장식 브라운 펌프스 31만8천원, 키사. 사각 펜던트 귀고리 3만원대, 케이트앤켈리. 경쾌한 패턴의 시폰 스카프 10만원대, 마리아꾸르끼. 외국 여성 정치인 스타일 No. 2 미셸 오바마 / 미국 대통령 영부인 하이패션 브랜드부터 중저가 패션 브랜드를 넘나들며 다양함을 추구하는 미셸 오바마. 패션을 전략적으로 이용한다는 호사가들의 평도 있지만, 글래머러스한 자신의 몸매를 돋보이게 하는 스타일로 패셔너블한 영부인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한다. Styling Hint 1 실루엣이 드러나는 패턴 원피스 21만8천원, 제시뉴욕. 2 앞코에 스틸 장식으로 포인트를 준 펌프스 42만8천원, 쉐에보카. 3 볼드한 골드 스톤 브레이슬릿 가격미정, 에이치스턴. 박영선 / 민주통합당 의원 Fashion Keyword Mannish&Minimal 방송인 경력이 있는 만큼 전문적이고도 깨끗한 이미지 연출을 즐긴다. 페미닌한 느낌의 의상보다 디테일이 많지 않은 블랙 정장을 자주 착용하며 때에 따라 컬러감 있는 이너웨어로 변화를 준다. 여성 의원들이 자주 하는 브로치조차 잘 하지 않을 정도로 매니시하고 절제된 패션 스타일을 선보인다. 액세서리를 하더라도 눈에 띄지 않는 작고 심플한 아이템을 선택해 여성스러운 면모를 강조하기보다 비교적 보수적인 스타일을 연출한다. Styling Hint 1 스커트 차림에서도 미니멀한 디자인을 선택해 여성성보다 프로페셔널한 면모를 강조한다. 스탠더드 칼라의 스카이 블루 셔츠 4만9천9백원, 유니클로. 군더더기 없는 다크 그레이 재킷 9만8천원·스커트 5만8천원, LIST. 견고한 디자인의 캐멀 컬러 토트백 68만원, 마리아꾸르끼. 클래식한 느낌의 태슬 장식 펌프스 27만8천원, 키사. 2 올 블랙 슈트에는 컬러 이너웨어로 포인트를 주는 것이 그의 스타일링 노하우. 생동감이 느껴지는 그린 블라우스 9만원, 샤트렌. 테일러드 칼라의 심플한 블랙 재킷 15만8천원, LIST. H라인 블랙 팬츠 10만원대, 조이너스. 블랙 스틸레토 힐 10만원대, 엘리자벳. 단정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진주 귀고리 가격미정, 제이미앤벨. 클래식한 느낌의 시계 10만원대, 크리스찬모드. 외국 여성 정치인 스타일 No. 3 힐러리 클린턴 / 미국 국무부 장관 정치관뿐 아니라 패션 스타일 또한 단호하며 계획적인 이미지를 고수하는 힐러리 클린턴은 미국 내에서도 진주를 사랑하는 명사로 잘 알려졌다. 권위 있는 직책인 만큼 재킷을 즐겨 착용하며 스카프를 함께 매치하기도 한다. Styling Hint 1 칼라 디자인이 독특한 베이지 재킷 10만원대, 쉬즈미스. 2 블루와 골드 컬러 프린트가 화사한 스카프 12만9천원, 데코. 3 멀티 컬러 진주 목걸이 가격미정, 제이미앤벨. 김재연 / 통합진보당 의원 Fashion Keyword Young&Casual 19대 국회 개원 첫날, 퍼플 미니스커트를 착용해 주목받았던 김재연 의원. 3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인 만큼 보수적인 패션보다 젊은 감각의 룩을 즐긴다. 모노톤 일색인 국회에서 다채로운 컬러의 상의와 버튼 장식으로 경쾌한 느낌을 주는 재킷 등을 스타일링해 시선을 끌고 있으며, 옆으로 긴 사각 뿔테 안경을 쓴 모습이 자주 포착되기도 한다. 대외활동에서는 트렌치 재킷이나 셔츠 등을 착용해 젊고 활동적인 정치가의 이미지를 연출한다. Styling Hint 1 톤앤톤 컬러 매치로 더 늘씬하게 보이도록 연출한다. 심플한 화이트 셔츠 8만원대, 쉬즈미스. 롱 베스트 가격미정, 아돌포 도밍게즈. 톤 다운된 오렌지 컬러 팬츠 11만4천원, 아날도바시니. 벨트 6만9천원, 올리비아로렌. 엔벨로프 디자인의 클러치백 가격미정, 블랙마틴싯봉. 리본 장식 플랫 슈즈 29만8천원, 네오리즘. 2 비교적 짧은 기장의 스커트로 젊은 여성의 도전적인 이미지 메이킹을 시도한다. 와인 컬러 실크 셔츠 4만1천3백원, 무자크. 블랙 재킷 22만8천원, 아날도바시니. 머스터드 컬러 미니스커트 13만8천원, 온앤온. 브라운 레더 스틸레토 힐 19만9천원, 나무하나. 밋밋한 룩에 포인트를 주는 코스튬 목걸이. 10만원대, 세렌. 견고한 디자인의 빅 토트백. 가격미정, 쉐에보카. 외국 여성 정치인 스타일 No. 4 카를라 브루니 / 전 프랑스 대통령 영부인 영부인 당시에도 모델, 가수, 배우 등으로 활동하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카를라 브루니는 패션 감각 또한 남달랐다. 늘씬한 몸매를 뽐내며 프랑스의 고급 패션 브랜드 의상을 선호했으며, 남편과의 키 차이를 줄이기 위해 늘 플랫 슈즈를 비롯한 낮은 굽의 신발을 신었다. Styling Hint 1 고급스러운 소재감이 느껴지는 트위드 재킷 34만9천3백원, 칼리아. 2 상큼한 옐로 컬러가 돋보이는 플랫 슈즈 25만9천원, 나무하나. 3 포멀한 느낌의 베이지 토트백 60만원대, 코치넬리. <■진행 / 김성실(객원기자) ■사진 / 이주석 ■사진 제공 / 경향신문 포토뱅크, 「비판에 담담하게 시선에서 자유롭게」(미셸 오바마, 중앙북스), 「힐러리 클린턴 살아 있는 영어」(힐러리 클린턴, 리베르), 「완벽한 퍼스트레이디 카를라 브루니」(키아라 제미올리 저, 강현주 옮김, 디자인이음) 제품 협찬 나무하나·쉐에보카(02-512-4395), 네오리즘·쉬즈미스·코치넬리(546-7764), 나이스크랍·데코·무자크·올리비아로렌(02-548-3956), 더블엠·이새·조이너스(02-542-0385), 루시에(02-512-6732), 세렌·LIST·칼리아(02-545-5134), 샤트렌·이사베이·키사(02-3446-9949), 마리아꾸르끼·아돌포 도밍게즈·제라드다렐(02-540-4725), 블랙마틴싯봉·유니클로(02-3442-3012), 아날도바시니·엘리자벳·제시뉴욕(02-3442-0220), 아니베f·온앤온(02-514-9006), 에이치스턴(02-3443-5940), 제이미앤벨(070-8247-7834), 케이트앤켈리(02-508-6033), 크리스찬모드(02-508-6033) ■스타일리스트 / 김유미>
- 연하의 정치인과 결혼한 방송인 박정숙
- 2012. 06. 07 17:23 연예
- 박정숙은 본업인 방송은 물론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돕는 국제기구인 ‘호프키즈’ 대표로 활약해왔다. 경희대학교 국제교육원에서 강의하는 그녀와 인터뷰한 지 벌써 5년이 됐다. 해를 넘기지 않고 결혼하겠다던 말은 옛말이 됐지만 늦은 결혼 발표에 많은 관심이 쏠린 것은 예비신랑이 연하의 정치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조용하게 결혼하고 싶다”라는 그녀의 바람대로 지난 5월 19일 모 교회에서 비공개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연하의 정치인과 6개월 만에 결혼 지난 4월 각종 매체를 장식한 결혼 기사의 주인공은 박정숙(42), 그리고 새누리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 이재영(37) 당선인이었다. 반가운 소식에 박정숙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연결되지 않고 ‘해외 로밍 중’이라는 안내 멘트만 흘러나왔다. 며칠 후에야 통화가 이뤄졌는데 국제기구 일로 출장을 다녀온 길이라 했다. 지난 4월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정치인이 된 신랑을 의식해서인지 박정숙은 말을 아꼈다. “늦은 결혼인데 과분한 관심이 쏟아져서 민망하네요(웃음). 둘 다 워낙 바쁘고 정신이 없어서 5월의 신부인데도 날짜도 못 잡고 별다른 준비를 못 하고 있어요. 남편이 공무원 신분이어서 결혼은 최대한 간소하게, 비공개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박정숙은 5월 19일에 결혼한다는 보도가 나오자 즉각 부인했으나 당일 식 올리기 한 시간 전에 인정했다. 이들은 이날 오후 2시 작은 교회에서 양가 가족과 친지만을 모시고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린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의 결혼식은 최대한 간소하고 소박하게 진행했다. 청첩장도 따로 돌리지 않고 모바일 청첩장으로 대신했다. 예물예단은 물론 화환이나 축의금도 생략하고 단출한 반지만 마련했다. 신랑 이재영 당선인은 평소에도 입을 수 있는 예복 정장에 보타이를 맸고, 박정숙은 드레스 협찬 제의를 거절하고 모 디자이너의 드레스를 빌렸다고 한다. 결혼식에 든 비용은 1천만원 정도로 알려졌다. 애초 두 사람은 결혼을 6월 이후로 계획했으나 이 당선인이 5월 말 국회 등원을 앞두고 있어 5월에 서둘러 치른 것으로 보인다. 국회의원 출신 시어머니의 적극 지원 이 커플은 지난해 11월 부산세계개발원조총회에서 선배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고 한다. 만난 지 6개월여 만에 결혼에 골인한 셈이다. 예비신랑의 신분만큼이나 화제를 모았던 것은 박정숙보다 다섯 살 연하라는 점이다. 1975년생인 이재영 당선인은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한때 건설회사에 근무했으며, 스위스 다보스포럼을 개최하는 민간 기구인 세계경제포럼의 아시아팀 부국장으로 다년간 국제무대에서 활동해왔다. 이번 19대 총선에서는 그 경력을 인정받아 비례대표 24번으로 당선됐다. 이 당선인의 어머니는 제13대 국회의원을 지낸 도영심(65) 유엔세계관광기구(UNWTO) 스텝(STEP) 재단 이사장이다. 도 이사장은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두 배로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적극 지원했다고 한다. 1993년 서울여대 재학 시절 대전엑스포 홍보대사로 선발되어 외교사절로 세계 각국을 누볐던 박정숙은 이후 전문 방송인으로 데뷔해 ‘출발 모닝와이드’, ‘아주 특별한 아침’ 등의 MC로 활약해왔다. 2003년에는 ‘대장금’에서 문정왕후 역할을 맡아 연기자로 활동 영역을 넓히기도 했다. 일정을 쪼개 연세대 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하고 일본 게이오 대학원에서 국제문화과정 연구원 활동을 했던 박정숙은 이후 국내 활동을 중단하고 유학길에 올라 미국 콜롬비아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부터는 강단에 서기도 했던 박정숙이 결혼만큼은 적기를 놓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결혼이 늦어지면서 ‘골드미스’의 전형처럼 되어버린 박정숙이 결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역시 시대를 잘 타고난 거 같아요(웃음). 제 목소리를 내야죠. 예쁜 여자로만 남거나 착한 척하고 싶지 않아요. 아나운서 출신도 아닌데 전문 진행자로서 입지를 굳힌 것과 배우로 변신한 ‘대장금’의 성공은 제게 감당하기 힘든 행운이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큰 인기를 얻는 것보다는 천천히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나가고 싶어요.” 박정숙이 말한 ‘새로운 영역’은 다문화 가정 살피기로 이어졌다. 대표로 있는 호프키즈는 다문화 가정을 위한 문화예술 복지 프로그램을 꾸준히 진행하는 등 여러 성과를 이뤄냈다. 또한 그녀는 ‘대장금’에 출연한 한류 스타이자 한국국제협력단 명예대사로 미국 PBS에서 방영된 김치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한국 문화와 타 문화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데도 누구보다 열심이던 그녀가 과연 정치인의 아내로서 어떤 행보를 보여줄지 기대가 되는 대목이다. 신혼여행은 6월께 여수로 다녀올 계획이다. 박정숙이 여수세계박람회 국제홍보위원으로 활동 중이라 겸사겸사 여수를 둘러보는 것으로 허니문을 대신할 예정이다. 신접살림은 박정숙의 일과 남편의 공무를 위해 서울 모처에 차린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글 / 위성은(객원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 [理想한 사람들_일본 편]일본 최초 트랜스젠더 정치인 가미카와 아야
- 2012. 05. 04 18:29 화제
- ㆍ상식이란 알을 깨고, 세상을 바꾸다 일본에서 최초로 트랜스젠더라는사실을 공표한 후 세타가야 구 의원에 당선된 가미카와 아야. 연예계와 달리 정치계의 문은 성동일성장애인에게 굳게 닫혀져 있었다. 그 문을 당당히 열어젖힌 그녀. 그녀가 꿈꾸는 이상을 좇아가본다. ‘나는 여자다’ 스물일곱에 깨달은 성 정체성 일본 TV에서 방송되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패널로 활동하는 사람 중 한두 명은 성동일성장애(생물학적으로는 정상이지만 인격적으로는 반대의 성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증상)를 갖고 있다. 한류를 폄하해 논란이 된 거구의 탤런트 마츠코 디럭스,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학 출신의 미츠 맨그로브, 한국 명예 관광대사로 임명되기도 했던 미용 전문가 겸 방송인 이코는 대표적인 여장 남자 캐릭터로 활동하고 있으며 태국에서 열린 트랜스젠더 세계미인대회에서 1위를 차지한 하루나 아이도 빼놓을 수 없는 여장 남자다. 이들은 방송에서 내뿜는 따끔한 독설과 호방한 기질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시청자들은 처음에는 이들을 보고 깜짝 놀라지만 몇 날 며칠을 보고 있으면 금세 익숙해지고 친근감까지 느끼게 된다. 이들은 자신들이 겪은 차별과 아픔을 웃음으로 승화시키곤 하는데, 그런 면에서 시청자들과 큰 공감대가 형성되기 때문인 듯하다. 이달의 주인공 가미카와 아야(上川あや, 44)는 1968년 도쿄 아사쿠사에서 삼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렇지만 형과도 남동생과도 자신이 좀 다르다고 느꼈다. 형과 남동생이 좋아했던 ‘울트라맨’, ‘스타워즈’ 그리고 야구에는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캔디캔디’에 열광했고 그 인형을 갖고 싶어 했다. 고등학교 시절엔 주변 남학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인근에는 가미카와 아야를 두고 진짜 예쁜 학생이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동창생들로부터 사귀자는 제안을 받았고 실제로 교제도 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니 당시 남자였던 그는 자신이 성동일성장애인이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대학에 들어갔고, 남자로 취직을 했고, 그렇게 살다보니 20대 후반이 되었다. 레이디경향(이하 LADY) 자신이 성동일성장애인이란 사실을 언제 알았나요? 가미카와 아야(이하 가미카와) 스물일곱 살 때요. LADY 그럼 그전까진 몰랐던 거예요? 가미카와 어릴 땐 그냥 좀 다른 줄만 알았어요. 제 안에 여성성이 있단 사실은 잘 몰랐죠. 근데 저뿐만 아니라 성동일성장애를 가진 사람 중엔 서른이 넘어서 아는 사람도 있어요.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살다가 자신의 또 다른 성에 눈뜨는 경우죠. LADY 어떤 계기로 자신의 성동일성장애를 알게 된 건가요? 가미카와 여자를 좋아해본 적이 없어요. 고교 시절에도,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말이에요. 제가 좋아했던 남자들이 다른 여자랑 결혼하는 걸 보면서 ‘도대체 나는 왜 그를 좋아하지도 못하고, 아이를 낳지도 못하는 걸까’라는 생각에 참 허탈한 기분이었어요. 사회생활을 5년 이상 했는데, 일도 잘했고 평가도 좋았어요. 그런데 못 견디겠더라고요.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제 모습에 위화감을 느꼈고, 무엇보다 남자를 좋아하면서 남자인 척 살아가는 것도 힘들었어요. LADY 꼭 그렇게 그래도 여자가 되고 싶었나요? 가미카와 글쎄요. 결과적으로 여자가 되어버렸네요(웃음). 치마를 입고 싶고 화장을 하고 싶은 욕심은 없었어요. 징그럽던 넥타이와 양복을 벗어던지고 여자 옷을 입어보니 마음이 참 편해지더라고요. 제 자신의 본모습을 찾은 기분이 들었죠. 그렇게 어둡고 힘겨웠던 부분을 벗어던지고 마음 편한 것들로 하나 둘 채워가다 보니 어느새 여자가 되어 있었어요. 아주 자연스럽게. LADY 여자가 된 후 가족의 반응은? 가미카와 처음엔 좀 당황해하셨는데 요즘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저희 부모님에겐 성별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자기 자식이 아들이건 딸이건 자신의 길을 열심히 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세요. 열심히 살아간다면 전적으로 응원해주시죠. 사회가 말하는 남녀, 학력 그런 것들이 아니라 제 자신을 믿고 따라주셨어요. LADY 반대하는 가족도 많다고 들었는데요. 가미카와 저희 가족도 처음엔 깜짝 놀랐죠. 그런데 사람이란 게, 몇 개월이나서도 놀란 상태로 지낼 수는 없거든요. 처음엔 놀랐다가도 몇 주 지나니까 익숙해지고 이젠 이런 제 모습을 받아들인 거죠. 2003년, 트랜스젠더 구의원의 탄생 가미카와는 성 정체성을 찾은 후 5년간 다녔던 회사를 그만두고 치마를 입고 화장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신분증을 요구하거나 각종 보험에 가입하기 위해 호적 관련 서류가 필요한 정규 사원 자리는 엄두도 못 냈다. 마음은 여자이지만 사회에서는 가짜 여자였고, 가짜 인간이었다. 호적상 성별이 바뀌지 않는 한 평생 자신이 남자란 사실을 숨겨야 했고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할 처지였다. 성동일성장애를 가진 이들은 자신이 남자 혹은 여자란 사실이 발각될까봐 병원에도 못 가는 처지다. 결국 그녀는 2003년 세타가야 구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다. 세타가야 구는 84만 명이 사는 도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이다. “저는 한때 남자였습니다”라며 전철역 앞에서 호소하는 그녀의 모습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일본 정치 역사상 최초로 성동일성장애를 공표한 후보자였기 때문이다. 처음엔 놀란 반응을 보이던 구민들이 점차 그녀를 위로하고, 그녀 편에 서준 결과 가미카와 아야는 일본 최초의 트랜스젠더 의원이 되었고 어느새 3선에 성공해 9년째 구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LADY 구의원에 출마하게 된 계기는 뭔가요? 가미카와 처음엔 정치에 관심이 없었어요. 제가 성동일성장애인이란 사실을 알게 되면서 호적상 성별을 바꾸지 않으면 생활이 매우 불편하다는 것을 깨달았죠. 많은 사람들이 병원조차 가지 못해요. 남자였거나 여자였던 사실이 발각될까봐서요. 그런 불편함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고 싶었어요. LADY 성동일성장애인이란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일이 두렵지 않았나요? 가미카와 물론 두려웠어요. 저 말고 다른 누군가가 선구자가 되길 기다렸어요. 구세주를 말이죠. 그런데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나서게 되었어요. 선구자는 사실은 리스크를 짊어져야 하잖아요. 수많은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과 비난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텨야 하니까요. 그런 아픔을 다른 사람에게 넘길게 아니라 제가 감수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LADY 성전환수술도 하셨죠? 성형수술도 하셨나요? 가미카와 2003년에 성전환수술을 했고 성형수술은 하지 않았어요. 2004년 4월 20일에 성별이 여성으로 바뀌었어요. LADY 그날이 본인에게는 특별한 날이겠네요. 새로 태어난 생일 같은? 가미카와 아니요.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저는 제 마음이 여자임에도 호적상 성별을 여자로 바꾸기 위해 성전환수술도 해야 했고 성별 변경 제도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했어요. 2003년 세타가야 구의원이 된 직후 가미카와 아야의 첫 과제는 성동일성장애인의 성별 변경 제도를 만드는 일이었다. 마침 일본 국회에선 성동일성장애 성별 변경에 관한 특별법 초안이 작성될 무렵이었고, 가미카와는 각 당의 당수와 주요 인사를 설득하는 등 만나 법안 통과에 큰 힘을 보탰다. 그 결과 2003년 7월 10일 ‘성동일성장애자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의사로부터 성동일성장애 판정을 받은 사람, 20세 이상인 사람, 현재 미혼인 사람, 아이가 없는 사람 등 수많은 조건이 붙었지만 이로써 일본에서도 성동일성장애를 가진 사람이 성별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것이다. LADY 여자로 살면서 불편한 점은 없었나요? 가미카와 여자로 사는 것도 참 어렵더라고요.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것과 남성에게 요구하는 것이 매우 달랐어요. 제가 남자로 회사에 다녔을 때는 중요한 일을 맡는 게 당연했는데, 여자로 회사에 다니면서 보니까 중책을 맡는 여성은 매우 드물었고, 중요한 사내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도 여자가 아닌 남자였죠. 여자는 비정규직이어도 괜찮은데, 남자가 비정규직이면 아쉽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이런 남녀의 차이를 보면서 남자로 살기도 힘들고, 여자로 살기도 힘들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죠. LADY 남자로도, 여자로도 살기 힘든 사회….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가미카와 법적으로는 모든 회사에서 남녀 차별을 철폐하라고 되어 있지만 남녀 간에 차이가 발생하는 게 현실이에요. 제도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의 문제죠. 마인드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상식을 깨는 자가 사회를 바꾼다 “사회 통념과 편견으로 가득 찬 마인드가 차별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살기 힘든 사회를 만든다”라고 가미카와 아야는 말한다. 구의원이 된 후 그녀는 사람들의 편견을 바꾸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수많은 안건을 제시해 살기 좋은 구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그녀가 바꾼 지난 9년을 돌아보기로 했다. LADY 의원이 된 지 벌써 9년째인데 어떤 정책을 펼쳐왔는지 소개해주세요. 가미카와 청각장애인 중에 수화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혹시 알아요? LADY 대부분 하는 거 아닌가요? 가미카와 땡! 잘못된 상식입니다. 도쿄의 경우 청각장애인협회에 따르면 17.7%에 불과해요. 구청에선 수화 통역사를 붙여주는 일이 많은데, 수화보다는 이야기 내용을 글로 요약해달라는 청각장애인이 더 많아요. 그런 분들을 위해서 글 요약 서비스를 시작했지요. 상식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정말 필요한 부분에서 필요한 역할을 하는 게 중요해요. 혹시 도쿄에 살아요? 그렇다면 도쿄에 지진이 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요? LADY 글쎄요. 그냥 무섭기만 해요.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가미카와 물 부족 문제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대규모 지진이 일어나면 저수 탱크의 물을 관리하는 도쿄가 물을 나눠주지요. 그럼 각 구는 급수차로 물을 나눠줘야 해요. 여기 두 가지 문제점이 있어요. 하나는 세타가야 구의 급수차가 열 대밖에 없다는 거죠. 세타가야 구 인구의 22.5%, 무려 20만여 명이 물 부족을 겪게 되는데, 급수차 열 대가 모두 해결할 수 있을까요? LADY 열 대뿐이라고요? 가미카와 더 많을 줄 알았죠? 그게 바로 잘못된 상식이에요. 전 그런 상황이 됐을 때 과연 급수차가 올지, 안 올지도 조사했어요. LADY 두 번째 문제점은요? 가미카와 둘째는 저수 탱크의 내진 설계 문제예요. 구청에서 가장 가까운 저수 탱크는 80년 전에 만든 것으로 토목학회에서 중요 문화재로 지정하자는 움직임이 있는 건물이에요. 이 건물이 대규모 지진에 견딜 수 있을까요? 그럼 못 견딜 경우엔 물은 어디서 구해야 할까요? LADY 가미카와 의원의 해결 방법은요? 가미카와 세타가야 구청 지하에서 물을 끌어올리도록 했어요. 현재 공사 중이고, 오는 9월부터 7만 명분의 물을 공급할 수 있게 됩니다. 물이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어떤 공사를 해야 하는지도 제가 혼자 조사해서 보고서를 올렸어요. 그 안건이 구의회를 통과했지요. LADY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지진에 대한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죠. 사실 지진을 막을 순 없잖아요. 가미카와 제가 문제 하나 낼게요. 도쿄에 산사태가 날까요, 안 날까요? LADY 그렇게 물어보니 산사태가 난다는 게 정답이겠지만, 이 평지대에서 산사태가 나나요? 가미카와 세타가야 구는 위험지 지도를 새로 만들었어요. 이것도 제가 제안했지요. 도쿄는 산을 깎고 강을 메워서 만든 땅이라서 지진에 매우 취약해요. 고베 대지진 때도 산사태 때문에 수많은 집이 휩쓸렸는데 도쿄의 경우 지진이 일어나면 산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요. 평평해 보이는 도쿄지만, 강을 메운 곳은 밑에 구멍이 나 있게 마련이거든요. 이런 곳에는 내진 설계가 완벽한 집을 지어도 지진이 나면 땅 자체가 떠내려가니까 아무 의미가 없는 거죠. 그래서 세타가야 구는 아주 오래전 도쿄에 산과 강이 있던 시절의 지도와 비교해가면서 산사태 예상 지역 지도를 만들었어요. 이런 기본 지식을 구민들에게 전해주는 게 의원의 역할이죠. LADY 가정폭력에 처한 모자를 위한 지원 제도도 제안하셨죠? 가미카와 그건 저 혼자만이 아니라 여성 의원들과 같이했어요. 가정폭력을 피해 도망 온 여성들의 경우, 남편이 알고 찾아올까봐 주소지 등록을 못해서 아무런 제도적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여성들을 위해 주소지가 없어도 일부 지원을 해주자는 의도에서 제안했어요. 지난 9년간 그녀는 그 어느 의원보다 바쁘게 움직였다. 그녀의 말을 옮기자면 ‘제일 공부 열심히 하는 의원’이다. 정부, 도쿄의회, 구의회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하나하나 검토하고 조사한 후,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꼼꼼히 지적하고 시정해왔다. 그녀가 해온 일들을 열거하자면 한 둘이 아닐 지경이다. 구청 홈페이지에 한국어를 싣자고 제안한 것도 그녀였다. 인공 항문 사용자를 위한 화장실 설치 확대를 제안해 실현시켰다. 앞서 말한 청각장애인을 위한 글 요약 서비스 제공,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블록 통일화도 해냈다. “아인슈타인이 ‘상식이란 18세까지 습득한 편견의 집합’이라고 말했어요. 자신이 가진 상식을 깨부술 때 자기 자신도 편해지고 타인을 받아들이게 되죠. 전 선구자가 되기 위해 사회를 바꾸고 싶은 게 아니라 상식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하나하나 조사하다 보니 문제와 맞닥뜨리게 되고 그 문제를 해결해나가고 있는 거예요. 달걀로 바위 치기도 실은 어떤 방향에서 어떻게 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를 수도 있거든요. 자세히 조사하고 개선점을 제안하면 실현된다는 걸 체험하며 살고 있어요.” 트랜스젠더 구의원이 꿈꾸는 이상 LADY 여자로 사는 게 즐거우세요? 가미카와 이젠 익숙해져서…. 즐겁다기보다 마음이 편해요. LADY 여자로 생활하면서 즐거울 때는? 가미카와 옷 구경하러 다닐 때(웃음). 화장하면서 혼자 보내는 시간도 좋아요. LADY 의원으로서 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꿈꾸는 이상적인 세상은? 가미카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사회요. 도쿄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아요. 모르는 척 사는 게 도쿄에선 밸런스를 유지하는 방법이죠. 근데 이런 곳이야말로 재해가 일어났을 때 금세 무너지는 사회예요. 좀 번거롭고 불편하더라도 이웃에 누가 사는지 정도는 알고 조금은 간섭도 하면서 밸런스를 유지하는 관계를 만들어야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대화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LADY 당당하고 강인하게 사회와 어울리며 사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가미카와 자아 긍정감이요. 내 자신을 긍정하는 것. 어떤 사람들이 보기엔 제가 아주 이상한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전 그냥 저답게 살고 싶을 뿐이에요. 나답게 사는 게 잘못된 일은 아니잖아요. 날씬한 체형, 살짝 꼰 다리와 손동작, 가느다란 목소리, 환하게 짓는 웃음 등 그녀를 남자로 보게 하는 요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연약한 어깨로 세상 모든 상식을 깨부수겠다는 여전사 가미카와 아야 의원은 오늘도 세타가야 구를 산책하며 구민들의 고충을 듣고, 바꿀 것들을 메모하며, 머리를 싸매고 공부한다. 아이슬란드의 요한나 시귀르다르도티르는 동성 결혼을 한 세계 최초의 총리가 되었고 베를린 시장, 파리 시장도 커밍아웃한 게이다. “단지 성동일성장애인이란 이유로 시장이나 총리가 될 권리를 빼앗을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라고 그녀는 묻는다. 조금 다르면 어떤가. 세상을 바꾸는 힘은 늘 조금 다른 이들로부터 시작되어온 것이 아닌가 싶다. <■글 / 김민정(「레이디경향」 일본 통신원) ■사진 / 최이삭(프리랜서)>
- 理想한 사람들_일본 편
- 정치인의 아내 된 황혜영의 달콤한 러브 스토리
- 2011. 12. 30 16:21 연예
- 1990년대 큰 인기를 끌었던 그룹 ‘투투’ 출신의 황혜영이 민주당 부대변인 김경록씨와 부부의 연을 맺고 한창 신혼의 단꿈에 빠져 지내는 중이다. 그래서일까,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결혼 후 한층 더 물오른 미모를 과시했다. 정치인 남편과 새로운 둥지를 틀고 알콩달콩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황혜영의 사랑 그리고 또 다른 꿈. 자상하고 유머러스한 남편과의 좌충우돌 연애 찬바람이 쌩쌩 불던 추운 겨울날, 강남의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황혜영(39)은 예나 지금이나 세월이 무색할 만큼 동안 외모를 자랑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쁜 일정에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며 탈의실 한쪽에서 빵으로 식사를 대신하던 그녀는 소탈하면서도 조용했지만, 그래도 얼굴에는 밝은 기운이 넘쳤다. “주위 사람들 말로는 결혼하고 나서 제가 굉장히 안정되고 좋아 보인대요. 간혹 친한 친구들은 ‘네 눈에서 독기가 빠졌어’라고도 해요. 아니, 무슨~ 내가 뭐 항상 독기 품고 다녔나?(웃음) 농담으로 그렇게 말을 해도 저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어요. 아무래도 결혼 전에는 혼자 사업한다고 아등바등대느라 힘들었는데 지금은 제가 느끼기에도 마음의 여유가 좀 생긴 것 같거든요.” 그녀의 남편 김경록(39)씨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동 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엘리트다. 키 180cm의 서글서글한 외모에 안정된 화술까지 두루 갖춘 그는 이후 정계에 입문해 실력을 높이 평가받으며 유인태 의원의 보좌관과 원혜영 원내대표 비서실 부국장을 지냈으며, 현재 민주당 부대변인을 맡아 당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지인들과 함께한 모임 자리에서 우연히 처음 만났어요. 정치하는 분이라고 하기에 그냥 그런 줄 알고 별 신경 안 썼죠. 제가 개인적으로 정치하는 사람에 대한 편견이 좀 있었거든요. 정치인들은 왠지 모르게 딱딱하고, 지루하고, 무겁고, 어려울 것만 같았어요.” 그런데 그는 조금 달랐다. 만나면 만날수록 유쾌했다. 정치인이 이렇게 자상하고 유머러스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때로는 그녀와 성별이 바뀐 게 아닐까 착각될 정도로 여자보다 더 살가웠다고. 그렇게 조금씩 황혜영은 김경록 부대변인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결혼까지 생각했던 건 절대 아니었다. 대중이 황혜영·김경록 부부를 보며 정치인과 가수라는 다소 어색한 조합에 의아해하듯,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가 정치인의 아내가 될 거라는 상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남편 역시 자신이 연예인을 아내로 맞게 될 줄은 예측 못했겠죠. 그만큼 저희는 서로가 배우자에 대해 품어왔던 환상과는 전혀 그림이 달랐어요. 그래서 ‘너랑 나랑 결혼은 절대 아니다’라는 생각을 먼저 해뒀던 것 같아요.” 사랑은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다 “결혼할래요…?” 대화가 잘 통하고, 코드가 잘 맞는다는 건 연인에게 굉장히 축복받은 일이었지만, 현실을 생각하면 이게 과연 맞는 일인지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불혹의 나이를 코앞에 두고 만났기에 결혼을 뒷전으로 미루고 당장 연애에만 집중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우리는 도저히 결혼 상대자는 아닌 것 같다”라며 잠시 이별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은 이미 각자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끊어내는 건 정말 쉽지 않더라고요. 그러던 차에 남편이 먼저 다시 제게 다가왔고요. 그래도 저는 거절했어요. 정치인의 아내는 남편을 위해 희생해야 하고, 내조도 잘해야 하고, 집안일도 거뜬히 해야 하는데 저는 그동안 연예인으로 살아온 저만의 라이프스타일이 너무 강해서 그걸 죽이지는 못하겠다고, 그래서 나는 당신의 신붓감이 아니라고 말이죠.” 그럼에도 김경록 부대변인은 자신의 아내이기 이전에 연예인 황혜영으로 살아온 오랜 시간을 존중한다면서 그녀를 끊임없이 설득했다. “남보다 트렌드를 앞서나가야 하는 사람이 정치인의 아내가 된다고 해서 갑자기 하던 일을 그만두고 내조만 하면서 살아야 하는 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여자가 결혼한다고 해서 꼭 집에 들어앉아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 자신을 믿고 결혼해달라고 했고요. 그래서 그렇게 결혼까지 결심하게 된 거예요. 그러고 보니 프러포즈도 제대로 못 받았어요(웃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두 사람의 만남은 보통 인연이 아니었다. 부모님들 사이에 먼저 인연이 있었던 것. 직접 얼굴을 보며 만났던 건 아니었지만, 아주 오래전 같은 종교 덕분에 강원도와 전라도라는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서로 맛있는 꿀을 나눠 먹었던 과거를 알게 됐다. “제 고향은 평창, 남편 고향은 장성인데 둘 다 불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상견례 자리에서 우연히 들었는데, 제 아버지가 평소 잘 다니시던 유명 사찰의 한 스님께 귀한 꿀 한 병을 선물해드렸다고 해요. 그런데 제 시아버님이 그 사찰에 들러 스님에게 건강이 안 좋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다가 스님으로부터 꿀 한 병을 선물받으셨던 거예요. 그 꿀은 바로 제 아버지가 스님께 드렸던 것이고요. 워낙 구하기 어려운 귀한 꿀이었던지라 두 분이 꿀병의 모양과 당시 상황을 추론해서 결국 같은 물건이었다는 걸 알게 되셨죠. 그러시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양가 부모님 모두 ‘이건 정말 인연이다. 당장 올해 안에 날 잡자’라고 해서 결혼을 일사천리로 진행하게 됐어요.” 정치인의 아내가 된다는 것 ‘내 모습 그대로 살기’ 1년간의 비밀 연애를 한 두 사람은 지난 10월 23일 수많은 하객들의 축복 속에서 행복한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의 어디가 가장 마음에 들었냐는 질문에 황혜영은 “긍정적인 마인드”를 꼽았다. 어떠한 문제가 닥쳐도 좋게 생각하고 차근차근 해결하려는 모습에 믿음을 갖게 됐다고. “사람이 늘 밝아요. 옆에 있으면 저까지 기분 좋아지거든요. 연예인이라는 조금 특별한 직업을 가진 저를 존중해주고, 배려해주는 마음이 참 고맙고 예뻤어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까요?” 토속적인 전라도 음식을 좋아하는 식성도 통했다. “처음에 남편이 ‘뭐 먹으러 갈까’ 하고 물었을 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왠지 저는 이미지상 스테이크 썰고, 스파게티 먹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대뜸 갈낙찜 먹으러 가자고 했죠. 저 묵은지, 갓김치, 젓갈 같은 시골 음식 무척 좋아하거든요. 연애하면서 단둘이 피자, 파스타 이런 거 먹으러 간 적 한 번도 없어요(웃음).” 황혜영은 최근 SBS-TV 예능 프로그램 ‘스타부부쇼 자기야’에 출연해 “남편이 너무 똑똑하니까 내게 지적 콤플렉스가 생겼다”라고 말해 화제를 끌기도 했다. “에이, 방송 컨셉트 때문에 그렇게 비쳐지긴 했지만 콤플렉스라고까지는 느껴본 적 없어요. 다만 남편은 굉장히 똑똑한 반면 저는 많이 덜렁대고 어리바리한 스타일이죠. 말할 때도 저는 성격이 엄청 급하고요. 그래서 가끔은 이야기할 때 단어가 잘 생각나지 않고 그런 건 있어요. 그리고 제 남편은 한문을 정말 잘 알아요. 가끔 제가 사업적으로 만나는 사람으로부터 온통 한자로 도배된 명함을 받아오고는 하는데 사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면 남편이 대신 해석을 해주죠. TV나 신문 보면서 모르는 단어나 한자가 나오면 남편이 친절하게 잘 설명해주니까 좋아요.” 언젠가 남편이 선거에 출마해 함께 유세 활동을 해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남편의 조언대로 미리 신경 쓰고, 스트레스 받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원래 사람들이 알고 있는 황혜영의 모습이 있는데, 남편이 정치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한다고 해서 돌연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건 오히려 가식적인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제가 평소 불의를 보면 잘 못 참는 성격이에요. 힘없는 노인이나 아이, 버려진 동물 보면 정말 가슴 아파요. 그래서 예전부터 개인적으로 저소득층 아이들과 병원비가 부족한 아이들을 돕기 위해 모금하는 재단에 꾸준히 소득의 일부를 기부하고 있어요. 유기동물을 위한 봉사단체에서 활동도 하고 있고요. 남편은 그런 제가 이미 훌륭한 정치를 하고 있는 거래요. 제가 자신보다 더 낫다고 하면서요. 간혹 ‘황혜영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울 것 같다’라는 편견을 갖고 있는 분들이 있는데 남편은 결코 그게 제 진짜 모습이 아니라고 늘 곁에서 말해줘요. 만약 정말 그런 사람이었으면 결혼도 안 했을 거라고 하던걸요?(웃음)” 깜찍했던 가수, 쇼핑몰 CEO로 성공하기까지 서울예술대학 방송연예과를 졸업하고 1994년 ‘투투’ 1집 앨범 「일과 이분의 일」로 데뷔한 황혜영은 깜찍하고 귀여운 이미지로 일찍이 팬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 가수활동을 중단하고 2007년부터 쇼핑몰 사업에 뛰어들어 현재 연매출 100억원대의 수익을 올리고 있는 어엿한 CEO가 됐다. 패션 전공자도 아니었던 그녀가 새롭게 도전한 쇼핑몰 사업은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밟은 것은 아니다. 처음이기에 서툴렀고, 그래서 가끔은 더 막막했고, 그럴 때마다 더 잘하고 싶은 마음과 잘 되지 않았을 때의 좌절감이 수차례 그녀를 괴롭혔다. 일이 많아 육체적으로 고될 때는 그만두고 싶은 적도 있었다. “처음에 친동생과 직원 한 명을 뽑아서 세 명이서 시작했어요. 일이 너무 많아 벅차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죠. 쇼핑몰을 처음 시작할 때 6개월간 하루 24시간 중 18~19시간을 일만 했어요. 새벽 세 시 전에는 퇴근을 못했고요. 제 개인 시간은 물론 친구조차 만나기 힘들었어요. 건강도 많이 나빠져 일주일에 두세 번 응급실을 찾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오기가 생겼고 뒷걸음질 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쇼핑몰을 시작한 지 어느덧 5년째에 접어들며 이제는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오늘은 어제보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차근차근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보며 뿌듯해진다고 한다. “한꺼번에 팡 터지는 것보다 조금씩 탄탄하게 커가는 게 좋아요. 해마다 제가 그걸 확인하고 있고요. 지금은 처음보다 직원 수가 열 배 정도 늘어서 약 서른 명의 직원과 함께 일하고 있어요. 물론 더 이상 힘든 게 없다면 거짓말이죠. 직원들과 틈틈이 회의를 하면서 하나하나 확인해야 하고, 지금도 가끔 새벽 도매시장에 나가서 좋은 옷들을 직접 선별해요.” 자체 제작으로 판매하는 상품도 있다. 샘플 하나를 만드는 데만 무려 예닐곱 번의 수정작업을 거치느라 손이 많이 가지만 상품의 반응이 좋아서 매출이 오르면 그만큼 더 큰 보람을 느낀다고. “저는 해가 바뀔 때마다 새해의 운영 목표를 세워요. 그 목표를 향해 1년 동안 노력하면서 전력 질주하고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계속 한 계단씩 올라가면서 제 쇼핑몰을 탄탄한 회사로 키우고 싶어요. 좋은 기회와 대박운도 준비된 사람만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거, 그 믿음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마흔의 나이에도 마음은 이팔청춘 “이제부터 시작이죠” 사업에 매진하느라 한동안 방송에서 모습을 볼 수 없었던 황혜영은 요즘 다수의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서서히 활동을 재개하고 있다. 과거 1990년대에 그녀를 보고 자라왔던 세대들에게는 내심 반갑고 기쁜 일이다. “쇼핑몰에만 올인하다 보니 방송일에는 자연스레 소원해졌어요.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고요. 그래서 못했던 거지 일부러 안 한 건 아니에요. 이제 기회가 된다면 다시 방송활동을 해보려고요. 어느 한 분야를 딱 정해놓은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가수로 다시 활동하는 건 좀 어렵지 않을까요?(웃음)” 그래도 예전에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과는 연락을 꾸준히 이어나가고 있다. “그 시절에 저랑 같이 무대에 올랐던 친구들이 방송에 나오는 모습을 보면 반갑죠. 꼭 저와 친했던 사람이 아니더라도 동시대에 활동했던 분이 TV에 나오는 걸 보면 더 유심히 보게 돼요. 성대현씨와도 친하고요. 룰라 멤버들과도 가끔 만나요.” 2012년, 그녀의 나이도 벌써 마흔이다. 여자에게 마흔의 나이란 숫자 그 이상의 여러 의미를 갖는다고 했는데, 그녀 역시 요즘 나이를 실감한다고 한다. 하지만 체력적으로 조금 버거울 뿐, 마음은 여전히 이팔청춘 그대로라고. “체력이 잘 안 따라줘요. 옛날에는 며칠 밤새며 일해도 끄떡없었는데 지금은 새벽 한 시 전에는 무조건 자야 해요. 잠을 안 자고는 아무것도 못하겠어요. 끼니때마다 밥 챙겨 먹어야 하고, 슬슬 건강보조식품도 챙기게 되고요(웃음). 하지만 제가 마흔이 된다고 해서 심리적으로 크게 동요되거나 그런 건 없어요. 뭔가 좀 더 경험했으니까 성숙해진 면은 있지만, 저는 20대 때보다 지금이 더 이팔청춘 같아요. 비결이요? 글쎄요. 아무래도 같이 일하는 직원들이 어리다 보니 늘 대화하면서 트렌드를 읽게 되는 것 같아요.” 더 늦기 전에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은 목표가 무엇인지 물었더니 그녀는 “엄마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처럼 열심히 회사를 꾸려나가고, 한 남자의 아내로서 살림에도 신경 쓰면서 이제는 아이를 낳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힘들거나 쓰러지고 싶을 때마다 늘 ‘그래도 계속 가라’라는 말을 떠올리며 힘을 냈어요. 인생은 한 계단 없이 열 계단으로 올라설 수는 없는 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앞으로 지금처럼 한 계단, 한 계단 차근차근 올라가고 싶어요. 물론 늘 승승장구할 수만은 없겠죠. 하지만 비록 시련이 들이닥쳐도 반드시 그 끝은 있어요. 터널 안이 깜깜하다고 해서 멈추는 게 아니라 어두워도 계속 가다 보면 끝이 분명히 있다는 것. 전 그렇게 열심히 나아갈래요(웃음).” <■글 / 윤현진 기자 ■사진 / 이성원 ■의상 협찬 / 아마이(www.amai.co.kr) ■장소 협찬 / 스튜디오 밥(02-545-1452)>
- 40년 연기 인생 접고, 정치인의 길로 들어선 최종원
- 2010. 09. 06 10:50 연예
- ㆍ“폐광촌 살리고 문화·예술을 발전시키는 게 내가 할 일” 중견 배우 최종원이 지난 7월 28일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과거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을 도와 활동한 경험이 있긴 하지만, 본인이 직접 정치에 나서게 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연극배우였던 그는 왜 갑자기 정치인의 길을 택했을까. ‘의원님’ 호칭과 양복… 어색해 죽을 맛 파란만장했던 40년 연기 인생을 일단락 짓고, 새로운 꿈을 가슴에 품은 최종원(60) 민주당 의원. 그는 7·28 재보궐 선거를 통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 강원 태백·영월·평창·정선 선거구에서 가슴에 금배지를 달았다. 연극계 원로 배우인 그가 한평생 천직으로 생각해오던 연기자의 길을 뒤로하고, 국회에 입성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8월 초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만난 최종원 의원. ‘의원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한 지 일주일 정도가 지났지만, 여전히 그 호칭이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다. 평상시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여겨졌던 모자와 생활한복, 안경줄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도 이렇게 양복을 입었지만, 영 불편해요. 지금은 참고 있는데 조금만 지나면 원래대로 생활한복을 입고 다닐 생각입니다. 딱딱하고 어려운 정치인 최종원보다 사람들의 아픔을 알고 보듬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바뀐건 의상뿐만이 아니다. 유세 활동부터 시작된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생활은 하루아침에 180° 바뀌어버렸다. 원래 아침을 먹지 않던 그는 아침 7시부터 잡혀 있는 조찬 모임에 참석해야 했고, 저녁 11시까지 하루 종일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해내야 했다. 지금까지 아날로그 템포로 살아왔다면 갑자기 디지털 시대를 살게 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가끔은 보좌진들에게 “너무 빠르게 가지 말고, 조금만 쉬면서 사람들에게 인간적으로 대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하곤 한단다. “아무리 유세도 좋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에 ‘진정성’이 없으면 안 되잖아요. 1, 2분 동안 악수 한 번 하고 돌아서는 건 인간적으로 못할 일이죠. 적어도 서로 얼굴 보고 이야기를 하면서 유대감을 형성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보좌진들은 시간이 촉박하니까 빨리 끝내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를 원하지만 전 성격상 그게 안 되더라고요.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 순간만큼은 제 앞에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야죠.” 직접 정치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람들에게는 그의 정치 입문이 갑작스러워 보일 수 있지만 그는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활동을 도와왔다.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 후보 시절 단독으로 찬조연설을 하기도 했다.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이사 등을 역임했던 최 의원은 2002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을 돕고, 2004년 열린우리당 문화예술특위 위원장으로 영입된 뒤,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에 공천되기도 했다. 최 의원은 “예술인 그리고 자연인으로서 살아온 자신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많이 했다”고 한다. 하지만 “국민으로서 권리를 행사하자”며 마음 깊이 응원하는 정치인을 돕기로 결심했다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역대 그 어느 대통령보다 문화예술에 조예가 깊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스스로 권위의식을 벗고 낮은 자세로 임하는 소탈한 삶의 자세 때문에 옆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정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예술인으로 살아온 저의 인생 노하우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 경험을 바탕으로 문화예술의 발전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옆에서 도울 뿐이지, 내가 직접 정치를 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정치를 할 생각이었다면 오래전부터 기반을 닦고 준비를 했을 터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공천을 받은 그는 40년 동안 예술인으로 살았던 삶을 정리하지 못하고, 정치에 발을 들인 게 가장 아쉬운 점이란다. “아직 실감은 안 나지만 당분간 마음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한 것 같다”고 말하는 그는 국회의원에 당선된 지금도 과거를 정리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준비를 동시에 하고 있다. “유인촌 전 장관, 좌파 우파 나누는 모습 이해 안 돼” 최종원 의원이 갑작스럽게 공천을 받아들이게 된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그의 고향 강원도 때문이고, 두 번째는 문화예술의 발전 때문이었다. 강원도 태백 탄광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폐광이 되고 난 후, 지역 주민들의 아픔을 절감하는 사람 중에 한 명이다. 폐광이 된 후, 먹고살 기반이 없어진 지역 주민들 상당수는 고향을 떠났고 남은 자들은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저는 폐광촌에 대한 상처와 아픔은 우리 세대에서 끝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2세들에게는 먹고살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줘야죠.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산수가 뛰어난 강원도에 문화예술을 접목시키는 것이었죠. 이를 통해 관광을 산업화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고향 폐광촌의 아픔을 보듬고, 지역 주민들이 새로운 희망을 품고 살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 그게 바로 최종원 의원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또 그는 40년 동안 자신이 쌓아왔던 예술인으로서의 경험과 노하우가 지역의 관광산업 발전에 분명히 도움이 될 거라고 자신했다. “폐광이 되면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지역 주민들 그리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삶의 의욕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요. 우선 교육환경이 좋아야 아이들이 우리 세대보다 훨씬 양질의 삶을 살 수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아이들의 교육환경 개선에도 많은 도움이 되고 싶어요.” 강원도는 유인촌 문광부 장관 시절, 전국 예술인의 창작 공간을 넓히고 공연예술을 산업화시킬 수 있는 고한 예술촌 사업의 지원금으로 국고 111억원을 따냈다. 하지만 유 전 장관은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광산테마파크로 바꾸라고 지시, 결국 고한 예술촌은 무산됐다. 이에 대해 최종원 의원은 “유인촌 전 장관은 왜 지역의 본질을 꿰뚫어보지 않는지 안타깝다”고 전했다. “유인촌 전 장관이 재임기간 동안 한 게 뭐가 있습니까. 장관이라는 사람이 좌파와 우파로 나누어 척결하는 모습이 전혀 이해가 안 가요. 게다가 연기자 시절에는 진보와 보수 등의 이념 논리를 따지지 않는 사람이었거든요. 제가 유인촌 전 장관에게 ‘한 대 맞자’고 말하는 의미는 만나서 속 시원히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거죠. 제가 알고 있는 부분을 충고해줄 테니 일단 잘 되도록 만들자는 의미죠.” 최종원 의원이 그토록 바라던 유인촌 전 장관과의 만남은 성사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바로 지난 8월 8일 정부의 개각으로 인해 장관직에서 물러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최 의원은 “9월 중순 국정감사 기간에 증인으로 유 장관을 부를 수도 있다”고 밝혔다. 당리당락에 개의치 않는 정치 할 터 최종원 의원은 “당리당락과 당파 싸움에 끼어드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환갑이 지나 국회에 들어가서 명예와 부를 누릴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연예인이 국회의원이 됐다고, 주위에서는 갑자기 신분상승을 한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최 의원에게는 단순히 고향의 발전과 문화예술을 발전시키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는 바탕이 생긴 것뿐이다. “저는 제대로 지킬 수 없는 공약을 늘어놓는 그런 행동은 하기 싫었어요. 그냥 내 능력 되는 대로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살고 싶어요. 정치인 최종원을 기억하는 것보다 인간 최종원을 기억하기를 원하거든요.” 과거에 그를 잘 몰랐던 사람들은 그의 이 같은 소신 발언과 유인촌 전 장관에 대한 거침없는 발언을 보고 ‘최종원의 새로운 면을 봤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 의원은 원래부터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온 자유인이었다. 돈도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특별히 돈에 연연해하며 살지도 않았다. 또 나이를 불문하고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바로 인정한다. 사죄하는 대상이 제자가 됐든, 후배가 됐든 잘못을 했으면 고개를 숙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는 선배가 잘못했어도 후배만 질타하잖아요. 저는 그런 게 싫어요. 서로 인간적인 예우를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선배가 잘하면 후배는 알아서 따라옵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면 되는 거예요.” 아내의 조용한 내조… 그저 고마울 뿐 자유인으로 살아왔기에 스스로에게는 후회나 미련이 없지만, 가족에게는 미안함이 남아 있다. “사실 연극배우는 거의 백수나 마찬가지거든요. 결혼 후 신혼일때는 일이 없어서 더했죠. 아내가 10년 동안 외판원 등을 하면서 생계를 책임졌거든요. 그 일이 지금까지도 미안하고 항상 고맙죠.” 결혼 34년 차인 그는 결혼 직후부터 10년 동안 고생한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아내의 묵묵하고 조용한 내조가 있었기에 지금의 최종원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최종원 의원의 대쪽 같은 성격을 잘 아는 가족은 그가 처음 국회의원에 나가겠다고 했을 때 극구 반대했다. 정치권이 그의 성격에 맞지 않을 거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결심이 확고해지자, 가족은 모두 강원도로 내려와서 선거 유세 활동에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임해 최 의원의 든든한 지원군이 돼주었다. 최 의원은 지금까지 특별히 죄 짓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인생에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무대 위에서는 세상 그 누구보다 특별한 주인공이었고, 연기자를 천직으로 충실하게 살아왔다. “저는 나름 인생을 보람 있게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죽은 다음에도 최종원은 꽤 괜찮은 사람, 그리고 배우였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김준수(프리랜서) ■장소 협찬 / 어반가든(02-777-2254)>
- [서울시장 후보에게 바란다]③ 진부한 정치인의 이미지를 벗겠다는 지상욱 자유선진당 후보
- 2010. 05. 31 15:26 화제
- ㆍ“4년 후가 아니라 100년 후 서울을 내다보고 달리겠습니다”서울시장 후보에게 바란다 지상욱 후보는 대중에게 정치인보다는 연기자 심은하의 남편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만큼 그의 정치 경력은 매우 짧다. 그는 2008년 자유선진당 대변인을 역임하고, 이회창 총재 공보특보를 지냈다. 그런 그가 갑작스레 서울시장 선거에 야심찬 출사표를 던졌다. 과연 서울시장 출마를 결심한 이유는 무엇이고, 그가 꿈꾸는 서울은 어떤 모습일까.지상욱 후보는 일본 도쿄대학 대학원에서 건축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토목과 도시공학을 전공한 공학도다. 그는 서울의 비전은 4년 후가 아니라 앞으로 10년, 100년 후를 내다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4년이라는 단기간의 개발에서 벗어나 먼 미래를 내다봐야만 세계의 중심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 그는 정치적인 경험이 부족하다는 지적에 대해 오히려 더 장점일 수 있다고 반박했다. 그는 “다른 후보들처럼 중앙정치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패거리 정치도 할 일이 없다”면서 “덕분에 4년 후만 생각하는 다른 정치인들과 달리, 100년 후를 생각하는 긴 안목을 가질 수 있다”고 밝혔다.지상욱 후보는 지난 4년 동안 오세훈 후보의 시정 운영에 대해 “서민을 위해 소중한 예산을 썼던 시장은 아니었다”고 분석했다.“디자인이 경쟁력이라고 하지만, 디자인 서울이 시민들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었습니까? 진짜 경쟁력은 경쟁력 있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일 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또 그는 서울시장이 가져야 할 덕목은 ‘정직’과 ‘깨끗함’이라며, 성공한 지도자들은 국민과 소통을 많이 했다고 밝혔다. 소통하는 정치인으로서 서울 시민들의 건강한 가정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마지막으로 그에게 정치인의 아내로서 심은하씨의 내조를 평가해달라고 했더니 “아내는 최고의 참모”라며 “가장 편안하게 조언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밝게 응수했다. 지상욱 후보가 이번 서울시장 선거를 통해 심은하의 남편이 아닌, 정치인 지상욱으로 홀로서기에 성공할 수 있을지 그의 행보가 주목된다.1세금 예산 집행의 투명성 확보를 위한 대책은 없나요?(박혜숙 주부(30), 서울 강남구)우선, 일상 감사 시스템을 도입해서 예산을 포함한 행정 전반에 대한 감사를 할 것입니다. 시민과 외부 전문가를 참여시켜서 서울시의 회계 처리 내용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도록 해 시민들이 낸 세금이 낭비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2영유아 무상교육과 공공 보육시설 확대 계획이 있는지요?(김유경 주부(37), 서울 서대문구)현재 부족한 국공립 유치원을 초등학교 숫자만큼 늘리고 국공립 보육시설도 확충해 민간에서 운영하는 보육시설에 대한 지원을 늘려 보육교사의 질을 높일 것입니다. 그리고 기존의 동사무소 등을 리모델링해 ‘우리아이교육문화센터’를 각 동마다 세워서 보육, 교육, 방과 후 교육을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또한 저는 전철역 남는 공간에 보육시설을 만드는 것도 생각중입니다. 전철역내에 공간이 없다면 지하철 역과 연계된 개인 빌딩에 보육 시설을 둘 수 있습니다. 그 경우 용적율 인센티브를 주어서 부모들이 출퇴근시에 마음놓고 아이를 맡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3학교 무상급식에 관한 후보님의 생각과 정책이 궁금합니다.(허미행 주부(40), 서울 노원구)사실, 무상급식은 서울시장의 권한이 아니고 교육감의 권한입니다. 그런데도 서울시장 후보들이 무상급식을 공약으로 내놓는 것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표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무상급식도 좋지만 급식의 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예산을 사용할 때도 저소득층 아이들이 학교뿐 아니라, 방과 후에도 교육 차별을 받지 않도록 끼니를 제공하고 방과 후 학습에 문제가 없도록 지원할 것입니다.4서민을 위한 후보님만의 서울 집값 안정 대책을 듣고 싶어요.(이선영 주부(45), 서울 관악구)서민들이 가장 부담 없이 주거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임대주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임대주택 보급률은 고작 3% 정도입니다. 저는 임기 내에 임대주택 보급률을 7%인 10만 호로 늘릴 것입니다. 기존의 임대주택처럼 있는 주택을 밀어서 아파트를 세우지 않고, 다가구나 노후 불량 주택을 시가에 매입해서 저층으로 재건축해 임대주택으로 활용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주택을 공급하여 대학생, 장애인, 신혼부부, 어르신들이 편안하게 집 걱정 없이 살도록 만들겠습니다.5다양한 주택 형태를 갖춘 새로운 뉴타운 정책이 있나요?(정진 주부(54), 서울 서대문구)저는 뉴타운처럼 원주민을 쫓아내는 주거정책을 하지 않겠습니다. 원주민이 쫓겨나지 않는 임대주택으로 주거 문제를 해결할 것입니다. 저는 20대 및 대학생을 위한 기숙사나 원룸형, 장애인 주택, 신혼부부를 위한 원룸이나 오피스텔, 노인들을 위한 실버형, 그리고 3대가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중대형 주택을 보급할 것입니다. 유럽(바로셀로나, 런던)이나 일본(미무하라 신도시)처럼 건폐율을 높이고 층수를 낮추면 할 수 있습니다.6그린벨트가 해제된 후 녹지 보완 환경정책이 궁금합니다.(이인숙 주부(50), 서울 강북구)저는 기본적으로 그린벨트 해제에 반대합니다. 그리고 도시를 뒤덮고 있는 시멘트를 걷어낼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서울역과 용산역 사이의 철로를 지하화해서 그 위에 뉴욕의 센트럴파크와 같은 공원을 조성하겠습니다. 그리고 임기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1억 그루 나무 심기 운동을 펼쳐 숲으로 둘러싸인 서울을 만들겠습니다.7시청 앞 광장을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 생각은 없나요? (김경하 주부(32), 서울 도봉구)모든 광장은 소통과 문화의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광장은 관공서의 것이 아니라 시민의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 서울광장은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서울광장은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서울 시민들이 가장 편히 쉴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 것입니다.8저출산 문제가 심각한데 후보님의 출산장려정책이 궁금합니다.(송현주 주부(35), 서울 강남구)출산율이 떨어지는 원인은 낳는 것보다 기르는 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보육시설’을 지역, 직장, 사는 곳 등 다양하게 늘리겠습니다.9고령화 사회에서 노인들의 일자리 확대를 위한 계획은 있나요?(김채영 주부(44), 서울 동대문구)저는 사회적 기업을 1만개 발굴·육성한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아름다운 가게’와 같은 사회적 기업은 단순히 돈을 버는 목적도 있지만, 일을 통해 남을 돕는다는 차원에서 보람도 큽니다. 저는 1만개의 사회적 기업 중에서 3,000개를 어르신들을 위해 사용할 것입니다.10서울에서 재해·재난 발생시 극복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고 있나요? (서상희 주부(43), 서울 광진구)서울은 안전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다리나 대형 빌딩들은 안전점검을 받고 있지만, 정작 우리들이 주로 생활하는 학교나 저층 상가 혹은 주택들과 같은 기타 건축구조물은 안전진단을 받지 않습니다. 그런 건물들이 붕괴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저는 일반주택도 안전진단을 받게 해 시민들이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나아가 주택을 사고팔 때 안전진단증명서를 발급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집앞 눈치우기를 강제하는 것은 행정편의주의입니다. 시민의 불편을 해소하는 것이 서울시가 할 일입니다. 시민의 입장에서 정책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 [서울시장 후보에게 바란다]④소통의 중요성을 아는 정치인-노회찬 진보신당 후보
- 2010. 05. 31 15:11 화제
- ㆍ“시민과 대화가 통하는 시장이 되어 시민 우선 정책을 실시하겠습니다” 노회찬은 국민과 가까운 정치인이다. 그는 권위적이고 무거운 정치인의 이미지를 타파해 젊은 층의 지지가 높다. 정치인은 가장 먼저 국민과 가깝고 그들의 의견을 대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서울시장 후보 노회찬을 만났다. 진보신당 노회찬 후보는 트위터, 미니홈피 등을 통해 대중과 가장 가깝게 소통하고 있는 정치인이다. 그는 “요즘 트위터 활동이 선거법 위반으로 규제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트위터 활동이 선거법 위반이라는 건 어불성설이죠. 그곳은 정치를 광고하는 공간이 아니라 시민들과 대화하는 기능이 큽니다. 저는 종종 ‘노회찬의 점심 번개’라는 이벤트를 하죠. 대중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보다 더 좋은 정치 공부가 어디 있을까요? 트위터 등 새로운 문화의 발전 상황을 충분히 지켜보며 순기능을 살리는 방향으로 논의해야죠.” 그는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비판하기에 앞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역설했다. 대학입시 교육과 왜곡된 스펙 쌓기 등으로 그들이 사회에 대한 사고와 고민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고민해야 나라에 발전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젊은이들은 당장 앞일을 걱정해야 하는 팍팍한 환경이라 잠재돼 있지만 언젠가 큰 폭발력을 가질 거라 믿습니다. 저는 대학생과 청년층의 주거 문제 해결 등에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 세계에서 두 번째로 비싼 등록금을 내고 있는 우리 대학생들 차상위 계층 3만 명에게 장학금을 무이자로 주고 취업 후 원금만 반환케 해서 그 이자는 서울시가 떠안는 것을 제안합니다. 이 비용은 1년에 45억원밖에 들지 않아요.” 일부 사람들은 진보신당의 진보적 가치가 너무 이상적이라는 이야기도 한다. 무상급식 정책을 내세우고 있는데 재원 마련으로 인해 다른 복지 예산이 부족해지지 않을지 걱정의 소리도 들린다. “현재 서울시는 예산의 30%를 토목건설비로 쓰고 있어요. 이 비용만 줄이면 언제라도 복지정책의 실행은 가능하죠. 또 최근 3년간 연평균 1조원이 넘는 잉여금이 있어요. 서울지역 초등학생 60만 명, 중학생 35만 명 전원에게 무상급식을 하는 데 드는 비용은 연 1,900억원입니다. 그런데 왜 무상급식 할 돈이 없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는 그간 정치인, 학자, 기업인, 법조인 출신 등 다양한 서울시장이 있었지만 서민들의 생활은 더 팍팍해졌다고 주장한다. 서울에 필요한 것은 화려한 분수가 아니라 공공주택, 보육시설 그리고 따뜻한 노후다. “서울과 서울 시민이 앞으로 나아가야 해요. 서울이 바뀌어야 대한민국이 바뀝니다. 서울이 선택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여권에서 야권으로의 권력 이동이 아닌 서울 시민들의 삶을 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진보적 정권 교체입니다.” 1세금 예산 집행의 투명성 확보를 위한 대책은 없나요?(박혜숙 주부(30), 서울 강남구) 예산의 투명성 확보를 위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서울형 참여예산제도와 유리알 재정 공시제도 실시를 통해 예산 집행 계획을 투명하게 공개하겠습니다. 현재 형식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사업 실명제를 제대로 운영하고 개별 사업별로 예산 지출 내역을 그때그때 공개할 것입니다. 현재 서울시가 독단적으로 예산을 짜고 있는 것을 방지하고 시민의 입장에서 정말 필요한 예산이 반영될 수 있도록 보장하겠습니다. 2영유아 무상교육과 공공 보육시설 확대 계획이 있는지요?(김유경 주부(37), 서울 서대문구) 4세까지 어린이의 의(醫), 식(食), 주(住)를 서울시가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4세까지 어린이의 건강보험 본인부담금을 전액 지원해 의료비에 대한 걱정을 없애고, 월 10만원씩 ‘맘마수당(아동수당)’을 지급하고, 국공립 어린이집을 동마다 3개씩 만들겠습니다. 저는 국공립 어린이집을 1,500개까지 확충해 국공립 어린이집에 대한 수요를 충족하는 것을 넘어, 아이들의 의료 문제와 먹을거리·보육 문제까지 폭넓은 복지를 실시하겠습니다. 3학교 무상급식에 관한 후보님의 생각과 정책이 궁금합니다.(허미행 주부(40), 서울 노원구) 무상급식이 선거를 앞두고 이슈가 되긴 했지만, 진보신당은 아주 오래전부터 ‘무상교육’을 주장했습니다. 헌법에도 ‘의무교육은 무상으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아이들이나 부자 아이들이나 중학교까지 학비는 모두 면제인데, 급식도 교육의 한 과정인 만큼 무상으로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선진국에서는 학비, 급식비뿐만 아니라 책값, 학용품값도 모두 무상입니다. 아직 완벽한 무상교육은 한계가 있는 만큼 일단 가장 중요한 급식부터 무상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4서민을 위한 후보님만의 서울 집값 안정 대책을 듣고 싶어요.(이선영 주부(45), 서울 관악구) 서울의 수많은 재건축과 뉴타운에도 정작 서민들이 살 곳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사람 잡는 뉴타운 개발은 전면 재검토되어야 합니다. 현재 서울시 뉴타운 사업지구는 무려 184개 구역입니다. 이들의 면적을 합치면 2,686만km²로 여의도의 3배, 2003년 이전 30년 동안 진행된 재개발 사업 지역의 2.5배에 달합니다. 이러한 무분별한 뉴타운 개발은 집값을 올리고 살 곳은 줄이고 있습니다. 반값 전세 아파트, 공공임대주택 10만 공급으로 서민 주거 안정을 도모하겠습니다. 임대주택 건설 비율을 상향조정하고 기존 주택매입사업 등을 통해 10만 호의 공급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또 SH공사의 사회주택 관리기능을 강화해서 현행 시프트의 문제점을 개선하겠습니다. 5다양한 주택 형태를 갖춘 새로운 뉴타운 정책이 있나요?(정진 주부(54), 서울 서대문구) 문화가 있는 동네, 복지가 있는 주택, 저층 중심의 대안적인 ‘마을 가꾸기’ 프로젝트가 서울에는 절실합니다. 주민과 전문가가 참여해 거주지의 특성을 반영한 마스터플랜을 제출하면 서울시가 공적자금을 투자해 ‘우리 마을 가꾸기’ 프로젝트를 실시하는 것입니다. 아파트 중심의 재개발 방식에서 벗어난 친환경적이고 쾌적한 도시 환경을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6그린벨트가 해제된 후 녹지 보완 환경정책이 궁금합니다.(이인숙 주부(50), 서울 강북구) 서울에는 녹지가 부족합니다. 아이들과 산책할 작은 공원도 마땅치 않습니다. 가장 우선적으로는 마구잡이식 개발로 그린벨트가 훼손되거나 해제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도시의 녹지를 확충하기 위해서는 자투리땅을 이용한 손바닥 공원을 비롯해 도시 농업을 장려할 것입니다. 도시의 녹지는 여름철 도시 열섬 현상을 완화시켜주는 것은 물론 도시 농업을 통한 아이들의 환경생태 교육 효과까지 거둘 수 있습니다. 7시청 앞 광장을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 생각은 없나요? (김경하 주부(32), 서울 도봉구) 세계 어디를 가도 서울과 같은 불통의 광장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모두가 자유롭게 즐겁게 어울리는 곳, 그것이 광장의 본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광장은 늘었지만 시민들이 마음 편히 갈 곳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습니다. 광장 근처에 언제나 위치하는 전경 차량들, 때로는 광장을 둘러싸는 차량들이 시민들을 광장에서 몰아내고 두려움에 떨게 만듭니다. 서울광장조례 개정을 통해 보여주기 위한 녹지공간이 아닌 진정한 시민의 광장으로 모든 광장을 시민 여러분께 돌려드리겠습니다. 8저출산 문제가 심각한데 후보님의 출산장려정책이 궁금합니다.(송현주 주부(35), 서울 강남구) 아이를 낳고 싶은 서울을 만들겠습니다. 무조건 낳으라고 강요하는 목소리는 반성해야 합니다. 저출산은 ‘낳지 않는 여성’들의 문제로 한정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키우기가 어려운데 무조건 낳으라고만 하는 것은 진정한 출산장려정책이 아닙니다. 거시적 관점으로 대학에 졸업하고 나서는 비정규직, 저임금에 허덕이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좋은 직장에서 보람을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다. 이를 통해 자식들에게 힘든 삶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출산을 기피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출산장려정책은 하나의 단일한 정책이 아닙니다. 모든 정책이 조화를 이루어 나간다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9고령화 사회에서 노인들의 일자리 확대를 위한 계획은 있나요?(김채영 주부(44), 서울 동대문구) 기본적으로 노인들을 위한 일자리를 무조건적으로 확충하는 것보다는 노인 복지를 제대로 갖추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인들의 복지를 위해서는 지역별로 노인 주치의 제도를 확립하고 기초노령연금을 현실화 해야 합니다. 서울에 거주하는 60세 이상 노인의 39.1%가 100만원 미만의 가구 소득을 보이고 있으며 이를 개인 소득으로 살펴보면 20만원 미만 소득비율이 35.5%에 달합니다. 현재 기초노령연금을 받는 노인들에게 기초노령연금의 상한액에 해당되는 금액(2010년 4월 현재 8만8,000)을 연 4회 직접 지급해드리겠습니다. 이를 지금의 세대가 앞선 세대에게 드리는 ‘효도수당’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10서울에서 재해·재난 발생시 극복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고 있나요? (서상희 주부(43), 서울 광진구) 재난·재해에 대한 예방과 대책은 서울시가 세우고 실행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인력과 예산이 부족하다면 시민들께 양해를 구하고 도움을 얻어야 할 일이지 강제로 규제할 일은 아닙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시민들에게 전가시키는 것이 옳은지, 게다가 벌금까지 만들어 강제하는 것이 맞는지 의문입니다. 폭설이 내린 경우 소규모 지역 단위로 자체적으로 제설 작업을 하고, 참석 인원을 공무원들이 파악해 세제 혜택을 주거나 공공근로사업에 준하는 임금을 지급하는 것과 같은 방안을 검토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제공 / 노회찬 선거대책본부>
- 정치인으로 첫발 내딛는「7막 7장」홍정욱의 이유 있는 도전
- 2008. 03. 17 화제
- 베스트셀러 「7막 7장」의 저자이자 헤럴드미디어 대표였던 홍정욱이 정치인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오는 4월에 있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의 한나라당 동작 갑 예비 후보로 등록한 것이다. 끊임없이 도전하는 홍정욱의 삶 그리고 그가 전하는 헌신적인 부모님, 고마운 아내와 사랑하는 세 자녀 이야기.케네디 전기를 읽은 15세 소년의 꿈 홍정욱(38)은 이제 헤럴드미디어의 대표가 아니다. 그가 건넨 명함에는 ‘한나라당 동작 갑 예비 후보’라고 적혀 있었다. 그동안 ‘정치 입문 가능성에 대해서 항상 열어놓고 싶다’고 말해왔던 그다.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려 한다는 소식이 놀랍지 않은 이유다. 단지, 그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뭔가 특별한 게 있을 것 같았다. “아주 어릴 적부터 정치에 관심이 있었어요. 그때는 누구나 대통령, 국무총리가 되고 싶어 하잖아요. 열다섯 살 때 읽은 케네디 전기의 영향이 컸어요. 케네디 책을 읽어보면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 궁극적으로 택하는 가장 영예로운 직이 공직이었는데, 그들의 삶이 참으로 멋져 보였어요. 그때 우리나라가 언젠가 선진국이 되면 공직 참여가 가장 영예로운 직이 될 것이란 생각을 했어요.” 우리 사회는 지난 5년간 굉장한 성장을 거두었다. 홍정욱은 이를 두고 세계사적인 흐름으로 볼 때 대한민국이 진보와 보수의 틀을 넘어 실용이라는 길을 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지금 진행되는 이 실용주의 노선이 완전하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이것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이 우리 세대 즉, 포스트 386세대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공직에 들어가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 거죠. 공직 참여라는 것은 자신이 바꾸고 싶은 게 있어야 하고, 그것을 바꿀 수 있는 때가 되어야 하고, 자신이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해요. 착각일지 몰라도 그런 확신이 들었습니다.” 진지하게 말을 잇던 그는 “지루한 얘기죠?”라며 웃었다. 많은 사람들이 홍정욱을 두고 ‘정계에 진출할 만한 인물’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그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38세의 젊은 나이에 보수 정당인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한 것과 관련해 부정적인 의견도 많다. 그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대한민국에서 과연 진정한 진보란 무엇일까요? 지난 5년 동안 대한민국 사람들이 겪어온 사회를 진보적인 사회라고 말할 수 있는지 큰 의문이 있습니다. 진보가 됐든 보수가 됐든 리더는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과 사회를 함께 격상시켜야 해요. 서민을 부르짖던 참여정부가 서민의 삶을 완전히 망가뜨렸습니다. 그건 진보도 보수도 아니고, 무능함일 뿐이에요. 저는 제가 속한 조직 혹은 회사를 항상 업그레이드 시켜왔다는 자부심이 있고, 한나라당에서도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진보와 보수를 떠나서 실용주의 노선을 가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이기도 하죠.”헤럴드미디어에 미련은 남지만 복귀는 없다! 홍정욱의 과거는 화려하다. 그는 미국 하버드대학교 동북아지역학과를 졸업했고, 중국 북경대학원에서 동북아 정세를 공부한 뒤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법과대학원에서 법무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의 다국적 투자 금융 기업 리만브러더스에서 인수 합병 전문가로 활동했고, 벤처 회사인 스트럭시콘을 창업한 뒤 CFO로 지냈다. 그리고 2002년 헤럴드미디어를 인수했다. 그가 인수할 당시 헤럴드미디어는 50년 동안 적자를 반복하며 아주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홍정욱은 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헤럴드미디어를 흑자 기업으로 전환시켰다. 사람들은 그의 경영 수완과 추진력에 놀랐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쳐 보였다. 지난 2월 초, 헤럴드미디어의 모든 직책에서 사임한 홍정욱은 이제 대주주 자격만 유지하고 있다. 언론인과 경영자로서의 삶에 미련이 남지 않을까 궁금했다. “50년간 적자였던 기업을 월급 잘 나오고, 미래에 대한 투자도 할 수 있고, 다들 돈 걱정 안 하는 회사로 만들었습니다. 경영자로서 어떤 수치, 실적이라는 면에서 성공을 거뒀음은 분명해요. 하지만 헤럴드미디어의 모든 식구들을 예전보다 더 행복하게 만들었느냐, 예전보다 더 따스한 회사로 만들었느냐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어요. 너무 실적 위주로 회사를 운영하다 보니 그동안 떠난 분도 많고, 내부에 있는 사람들 중에도 힘들어 하는 사람이 많아요. 수치와 실적은 절반이고 나머지는 정서와 감성인데, 정서와 감성을 너무 소홀히 한 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들어요. 그 부분에서 미련이 남죠.” 홍정욱은 다시 헤럴드미디어의 경영자로 복귀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언론사주와 최고경영자라는 화려한 옷을 벗고, 낮은 곳에서 섬기며 살아갈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정치는 험난한 길이고, 모든 선거는 이길 확률과 질 확률이 절반이에요. 만약에 실패를 해서 다시 회사로 돌아가 CEO로 복귀한다면 그건 회사 직원들뿐 아니라 대한민국 언론계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헤럴드미디어는 패자부활전을 치르는 곳이 아니거든요.” 비빌 언덕도 사라졌고, 이제 ‘정치판’에 뛰어들었으니 홍정욱의 인생이 좀 더 치열해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잠시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이내 말을 잇는다. “왜 그러나 싶죠. 정말 왜 그러나 싶다니까요(웃음). 회사 인수한 지 5년, 이제 겨우 먹고살 만해졌는데…. 저와 같이 회사를 나온 사람들도 ‘이제 먹고살 만하고, 내년과 3~5년 계획을 세울 수 있을 만한 기업이 됐는데 왜 나가느냐, 왜 우리까지 나가야 하느냐``’고 불평을 했을 정도예요.” 홍정욱이 회사를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한 건 지난해 가을이다. 회사가 2년 반 정도 흑자를 내면서 편안함에 익숙해진 뒤였다. 그 나름의 고민도 있었을 것이다. “갑자기 ‘지금 안 던지면 못 던지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안 던지면 내가 무엇이 될 것인가를 생각했더니 답이 확실해지더라고요. 올 1월에 들어서니 ‘지금이 던질 때’라는 생각이 간절해졌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정치를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간의 언론사주와 최고경영자로서의 삶이 초엘리트의 삶이었기 때문에 바닥에 내려가서 다시 싸우는 삶을 살아야 되겠다고만 맘먹었어요. 사회봉사 활동이든 다른 것이든, 무엇이 됐든 대중과 호흡하고 배우는 일을 하고 싶었던 거예요.”헌신적인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것은 축복 아직도 ‘홍정욱’ 하면 「7막 7장」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책은 1993년 출간 당시 1백만 부가 팔렸다. 그 뒤 홍정욱이 수많은 청소년과 젊은이들의 롤모델이 됐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홍정욱은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는 의외의 고백을 들려주었다. “「7막 7장」이라는 책이 주는 이미지가 무척 부담스러웠어요.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저를 ‘초엘리트’ ‘대중과 호흡할 줄 모르는 귀족’으로 바라봤어요. 저는 집에 돈이 차고 넘쳐서 미국 유학을 간 게 아니에요. 온 가족이 이를 악물고 저를 지원해줬고, 저도 이를 악물고 공부했어요.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미화돼서 마치 한 편의 동화처럼 그려졌다는 게 지금까지도 큰 부담이에요.” 홍정욱은 헌신적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신성일과 함께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영화배우 남궁원이다. ‘무조건 케네디가 나온 고등학교를 가겠다’고 했던 홍정욱은 학비가 천만원대인 것을 알고 잠시 머뭇거렸다. 아버지는 ‘배추 장사를 해서라도 학비를 댈 테니 걱정 말라’며 화를 내셨다. 아들은 예정대로 유학을 떠났다. “재벌도 아닌 집에서 자식을 외국에 유학 보내 지원해줄 정도의 재정적인 능력이 어디 있었겠어요. 그 당시 영화배우로 돈을 벌 수 있는 길은 밤무대 출연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텔레비전에도 출연하지 않을 정도로 영화에 대한 자긍심이 강한 분이셨는데, 아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밤무대에서 노래를 부르셨어요. 서울에서 하면 아들의 장래에 누가 될까 봐 그것도 지방으로만 다니면서 말이에요.” 그의 말을 통해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홍정욱은 지금도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고생을 많이 하신다고 말했다. 대개는 후보자와 후보자의 배우자가 가족 대표로 선거 운동을 하는데 그는 배우자가 아닌 아버지와 함께하는 것. 아들이 공직에 참여하는 것을 평생의 사명으로 생각하신 아버지 덕분이다. 남궁원은 그동안 다른 사람의 선거 운동을 도우면서 아들의 선거 운동에 뛰어들 날만 고대했다고 한다. 홍정욱은 아버지의 존재만으로도 힘이 된다고 했다. “저도 제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아버지의 그런 헌신은 기대하기 힘든 것 같아요. 나와 내 아내가 있은 다음에 자녀들이 있는 것이지, 자녀들을 위해서 내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거든요.” 아들을 위해 헌신하기는 홍정욱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제가 미국에 처음 갔을 때 어머니는 뉴욕에 조그만 방을 얻어 지내시면서 제 뒷바라지를 해주셨어요. 주말에 오면 밥 한번 먹여주고, 공부하는 데 어려운 것은 없는지 물어 번역을 해주시곤 했죠. 무려 1년 동안이나 말이에요. 그렇게 서울로 돌아가시라고 해도 안 가시더니 결국 유방암에 걸리셨어요. 어머니는 유방암 절제 수술을 받은 뒤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지만 결국 암을 이겨내셨어요. 대단하신 분이에요.”좋은 아빠지만 좋은 남편은 글쎄… 홍정욱은 어떤 아빠, 어떤 남편일까. 그는 자신은 아주 좋은 아빠라고 확신에 차 말했다. “아주 좋은 아빠입니다.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고, 같이 있는 시간에는 아이들에게 최대한의 관심과 애정을 주기 위해 노력하죠. 또 아이들에게 잘해줘야 할 때와 무섭게 해야 할 때를 잘 조화시켜요. 지금처럼만 유지한다면 아이들에게 존경받는 아빠로 남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는 좋은 남편인지는 잘 모르겠다며 말끝을 흐렸다. 인터뷰 도중 그가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인 건 그때가 유일했다. 언제 어디서나 당당한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평소 잘해주고 못해주고, 속 썩이고 안 썩이고를 떠나 아내가 지향하는 삶과 제가 지향하는 삶이 처음부터 많이 달랐어요. 아내는 자유로운 예술인으로 살기를 원했거든요. 미국에서 예술 활동을 하며 평온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을 한국으로 데려왔고, 제가 언론사라는 시끌시끌한 조직을 인수하면서 아내도 맘고생을 했어요. 그것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니까 이제는 정치에 뛰어들잖아요. 아내가 지향하는 삶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만들어버렸으니까 많이 미안하죠.” 미안하기 때문에 홍정욱은 아내에게 최선을 다한다. 그는 아내의 사생활을 지켜주고, 아내의 선택을 전적으로 존중하는 배려 깊은 남편이다. “미국에 머물 때 아내가 미국인으로 남겠다고 해서 그녀의 의견을 존중했어요. 귀화 신청도 ‘당신이 하기 싫다면 하지 말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아내가 한국에서 살아야 하니까 귀화 신청을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굉장히 고마워요. 앞으로도 아내의 사생활은 최대한 지켜줄 예정이에요. 정치 인생에 많은 마이너스가 된다고 해도 말이에요.”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 성공한 삶을 사는 사람은 많다. 우리는 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 부와 명예를 이룬 사람을 두고 ‘성공했다’고 말한다.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는 것이 위대한 삶이다. 위대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야 한다. 남들과 똑같은 길을 가서는 위대한 삶을 살 수 없다. “위대한 삶을 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전 정신이에요. 세상에서 남다른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뭔가 남다른 도전을 했기 때문이에요. 젊은이들에게도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서 자신의 발자취를 남기겠다는 모험 정신을 가지라고 말하곤 하죠.” 홍정욱은 후세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을까. 그의 끊임없는 도전의 종착지가 궁금했다. “저는 역사의 한 귀퉁이에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한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다. 잘사는 나라를 만들었다기보다는 대한민국을 존경받는 나라로 만들었다는 부분에 대해서 말이에요. 또 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희망’이라면 완벽할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저를 바라보면서 희망을 느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어요.” 홍정욱의 도전은 끝이 없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향해 한 발 한 발, 걸어나가고 있다. 그에게 일시정지나 후퇴는 없다. 홍정욱의 도전은 그가 사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글 / 김민정 기자 ■사진 / 이주석
- 정치인의 아내 된 심은하 국회의원 선거운동까지 직접 나설까?
- 2008. 02. 15 연예
- 심은하가 드디어 정치인의 아내가 됐다. 남편 지상욱씨가 자유신당의 공동 대변인을 맡게 된 것이다. 이는 이미 지상욱씨가 지난해 이회창 전 총재의 대선 출마를 측근에서 보좌할 때부터 예상 가능했던 일이다. 이로 인해 지상욱씨의 4월 총선에 점점 무게가 실리면서 심은하가 선거운동에 직접 나설지에 대해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지상욱씨, 자유신당의 새로운 ‘입’으로 활동 은퇴를 선언한 지 7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심은하. 그간 결혼, 임신과 출산을 겪으면서 간간히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긴 했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심은하의 모습을 좀 더 자주 보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심은하의 남편인 지상욱씨가 정계에 입문하면서 심은하가 공식적으로 정치인의 아내가 됐기 때문이다. 지상욱씨는 이미 심은하와 결혼할 당시부터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의 최측근으로 통했으며, 지난 대선을 통해 그 사실이 입증됐다. 지상욱씨는 대선 1년 전부터 이회창 전 총재의 사무실에서 비상근으로 근무하면서 인터넷을 통해서 ‘창사랑’을 관리하고, UCC 관련 업무를 책임지는 사이버 총괄 팀장을 맡아왔다. 또 이회창 전 총재가 선거운동을 할 때도 항상 최측근에서 그의 곁을 보좌하는 등 이 전 총재와의 남다른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지상욱씨와 이 전 총재의 인연은 2002년 대선이 끝난 뒤부터 시작됐다. 이 전 총재는 대선 참패 후, 미국 스탠퍼드대 연수 길에 올랐는데, 이때 지상욱씨가 함께 미국에 건너가 1년간 이 전 총재 옆에서 정성을 다해 모셨다는 것. 또 지상욱씨는 이 전 총재의 아들 이정연씨,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씨와도 절친한 친구 사이로 알려졌다. 그가 정치와 인연을 맺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대선 당시 지상욱씨는 “이회창 전 총재가 아버님 같은 분이기 때문에 도와드리는 것뿐”이라는 말로 정치적 행보에 대한 언급을 피해왔다. 하지만 지난 1월 13일, 지상욱씨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주도하고 있는 자유신당(가칭) 창단준비위원회 신임 공동 대변인에 임명되면서 본격적인 정치인으로서 첫발을 내딛었다. 심은하와 지상욱, 4월 총선 출마설은 ‘노코멘트’ 지상욱씨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어깨가 무겁습니다. 잘해야겠습니다”라는 말로 대변인이 된 소감을 밝혔다. 하지만 여전히 4월 총선 출마설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는 상태다. 지난해 11월 말, 둘째 아이를 출산한 심은하는 현재 육아에만 전념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외부 외출이 잦아지고, 몸매 관리를 위해 다이어트를 한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대중에 얼굴을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돌고 있다. 김한길 국회의원의 부인인 최명길씨가 그랬던 것처럼 지상욱씨의 부인인 심은하가 유세 현장을 돌면서 사람들과 직접 대면한다면 이 모든 것이 ‘표’로 연결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고 있는 상태. 주변 소문은 무성하지만, 정작 지상욱씨와 심은하 본인은 주변의 추측에 지극히 말을 아끼고 있다. 하지만 오는 4월 총선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기 때문에 지상욱씨의 총선 출마 여부는 머지않아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심은하가 조만간, 스타가 아니라 정치인의 아내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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