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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환의 Hi-story](53)금제 띠고리의 ‘낙랑인’, 중국인일까 한국인일까(2022. 10. 07 14:00)
- 2022. 10. 07 14:00 문화/과학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자료(41만3000여점) 가운데 유독 낙랑 관련 유물과 사진이 눈에 밟힙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사하고 촬영한 1만7000여점의 유물과 4053점에 이르는 유리건판 사진이 그것입니다.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이 관련 자료를 재검토한 뒤 특별전(‘낙랑’·2001)도 열고, 발굴보고서(<평양 정백리 8·13호분>·2002), <평양 석암리 9호분>·2018)도 펴냈는데요. 그 과정에서 흥미로운 명문 자료 하나를 읽어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알코올로 닦자 2000년 전 글씨가 그것이 평양 석암리 9호분 출토 노기(弩機·원거리용 화살 발사 장치)에 적힌 묵서명(‘조자릉 용·趙子陵 用’)이었습니다. 명문 발견은 극적이었습니다. 박물관 보존과학부가 2018년 <평양 석암리 9호분> 보고서를 펴낸 뒤 유물을 정리할 때인데요. 문제의 쇠뇌(쇠로 된 발사 장치가 달린 활)를 알코올로 닦는 과정에서 희미한 글씨를 본 겁니다. 예서(중국 한나라 시대의 서체)로 쓰인 ‘조자릉 용’이었습니다. 손환일 한국서화연구소장은 “‘조자릉 용’ 명문은 한나라 시대 생활 서체로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박물관 측은 “<후한서> 등 중국 사서에 ‘자릉’이라는 자를 쓰는 인물들이 여럿 보인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조자릉’은 한반도로 넘어온 중국 망명자이거나, 한나라가 낙랑군에 파견한 관리로 파악했습니다. 자연히 명문 노기의 소유자(혹은 사용자)는 ‘조자릉’일 가능성이 크겠네요. 박물관 측은 ‘석암리 9호분의 주인공=조자릉’이라는 결론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조자릉’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걸립니다. 기원후 1~2세기에 ‘조(趙)’와 같은 성을 썼다면 아무래도 중국인일 가능성이 크다는 선입관 때문입니다. 그럼 ‘조자릉 용’ 명문은 평양이 중국(한나라)이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낙랑군의 치소’임을 입증하는 예일까요. ‘왕(王)x’는 중국 ‘왕서방’ 이름? 시계를 1909년 9월로 돌려봅니다. 당시 통감부 고건축 담당 촉탁이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1868~1935)가 대동강 변의 고분을 발굴합니다. 발굴결과 고분의 무덤방에서 2점의 청동거울과 오수전 등이 쏟아져 나왔습니다(석암리 벽돌분). 두 달 뒤(11월) 이마니시 류(今西龍·1875~1932) 등이 이끄는 발굴단도 똑같은 형식의 무덤을 조사했습니다(석암리 을분). 이곳에서는 ‘왕(王)x’명 칠기 부품과 청동거울 등이 확인됐습니다. 두 발굴단은 고분 2곳 모두를 ‘고구려 고분’으로 판단했습니다. 2년 뒤(1911) 이마니시 류가 입장을 바꿉니다. 석암리 을분에서 나온 칠기 부품의 ‘왕(王)x’ 명문을 중국인인 ‘낙랑 왕씨’와 관련시킨 겁니다. ‘낙랑 왕씨’는 <후한서> ‘왕경’전에 등장하는 ‘왕경’ 가문을 가리키는데요. <후한서>는 “왕경의 8대 조상인 왕중이 재북왕 흥거의 반란(기원전 177년)을 피해 동쪽 바다를 건너 낙랑 산중으로 피했다”고 했습니다. 이마니시는 <후한서>의 낙랑인 왕경이 바로 석암리 을분에 등장하는 ‘왕(王)x’라고 본 겁니다. 1916년 평양 석암리 9호분에서 출토된 순금제 띠고리. 보고서에는 7마리 용을 표현했다고 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큰 용 2마리, 작은 용 6마리 등 총 8마리로 보인다. 오른쪽 부분에서 얼굴을 밑으로 굽힌 듯한 큰 용 한마리가 표현돼 있음을 알 수 있다. / 이한상 대전대 교수 설명 1년 뒤인 1913년 낙랑토성에서는 ‘낙랑예관(樂浪禮官)’과 ‘낙랑태수장(樂浪太守長)’을 새긴 명문 기와와 봉니(문서류를 밀봉할 때 쓴 점토)가 잇따라 발견됩니다. 이어 평남 용강군 어을동에서 토성과 함께 ‘점제현 신사비’가 발견됩니다. 명문 내용 중 ‘점제’가 낙랑군에 속한 25개 현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 부각됐습니다. 눈·코·입에 항문까지 막았던 장례용품 일본학계는 ‘낙랑’이라는 단어에 ‘혹’했습니다. 낙랑이라면 한나라가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하고 세운 한사군 중 하나가 아닌가. 313년(미천왕 14)까지 무려 421년이나 한반도 서북쪽을 지배해왔던…. 뭐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런 탓이겠죠. 조선총독부는 1916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벌인 고적조사 사업에 ‘평양 일대의 낙랑고분 조사’를 0순위로 꼽았습니다. “…단군의 건국설화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후세에 견강부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반도 역사상 비교적 연대가 명백한 것은 한치군의 시기가 처음이다…. 그래서 한치군 유적부터….”(‘고적조사 개요’) 이중 석암리 9호분은 1916년 1차로 조사한 10기 중 1기였답니다. 이 조사가 시쳇말로 ‘대박발굴’이었습니다. 무덤 주인공이 묻힌 나무관 안에서 각종 장신구가 실제 착용한 그 모습, 그 위치대로 노출됐습니다. 칼 손잡이와 칼집 일부를 옥으로 장식한 ‘철제장검(일명 옥구검)’과 금장식철제모자환두소도(금장식 고리 자루가 달린 작은 어미칼 및 자식칼 세트)가 확인됐고요. 주인공의 가슴과 눈, 코, 입, 귀, 항문, 손 등에 삽입했거나 놓았던 장례용 옥(玉) 세트가 나왔습니다. 무엇보다 화려한 순금제 띠고리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덧널(나무곽)의 안쪽에서도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향을 피우는 박산로, 음식 조리용 취사기와 식기, 술을 담은 그릇 등 각종 청동 및 금속 용기가 8점 나왔고요. 옻칠한 소반(작은 밥상) 등 다양한 칠기 29점이 출토됐습니다. 출토유물은 총 100건 365점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군계일학은 순금제 띠고리였다 그중 군계일학은 ‘순금제 띠고리’(국보)였습니다. 얇은 금판을 두드려 표면에 용 문양을 표현한 후, 푸른색의 터키석과 붉은색의 안료로 장식해 만든 허리띠 장신구였습니다. 금의 순도는 순금(24K)에 가까운 22.8~23.8K였는데요. 조선총독부가 1916년 5개년 계획으로 시작한 조선고적사업의 1차 대상은 평양 일대의 낙랑고분 발굴이었다. 조선총독부는 “단군 건국설화는 믿을 수 없어서 대상에서 빼고 한반도 사상 연대가 확실한 역사는 한치군(한사군) 시대가 처음”이라면서 “따라서 이 시기를 1차연도 조사에 넣는다”고 못 박았다. / 국립중앙박물관 (2018) 보고서 금판 한장을 말발굽 형태로 제작했습니다. 테두리 부분을 높이 5㎜ 정도로 접어 입체감 있게 만들었죠. 바탕 금판의 두께는 0.3~0.7㎜, 표면을 장식한 금선의 두께는 0.2~1.1㎜입니다. 각각의 용은 금선과 금알갱이로 눈, 코, 뿔 그리고 발가락 등을 표현했습니다. 중심 뼈대 부분은 금선과 굵은 금알갱이를 띠처럼 이어붙여 표현했습니다. 금알갱이의 지름은 0.3~1.6㎜에 불과합니다. 띠고리에 표현된 용은 몇마리일까요. <평양 석암리 9호분> 보고서는 “얇은 금판을 작은 정으로 두들겨 7마리의 용을 표현했다”고 설명했는데요. 금공예 연구자인 이한상 대전대 교수가 이의를 제기하네요. “밑으로 급격하게 튼 얼굴이 보이지 않아 그렇지 오른쪽 부분에서 큰 용 한마리가 표현돼 있다”는 겁니다. 아닌 게 아니라 띠고리의 오른쪽 부분에 금알갱이로 뼈대를 표현한 큰 용의 몸통과 발톱이 보입니다. 숨어 있던 한마리가 나타났으니 모두 8마리가 되는 거네요. 또한 띠고리 표면에는 터키석을 끼운 물방울 모양의 알집 40개가 남아 있습니다. 현재 7개만 남아 있습니다. 또 하나의 핵심 유물은 ‘거섭(居攝) 3년명’ 옻칠 쟁반입니다. ‘거섭’은 전한의 마지막 군주인 유영(5~25·재위 6~8)의 연호(6~8년 사용)입니다. 석암리 9호분의 연대가 기원후 8년 무렵이라는 사실을 웅변해줍니다. 평양 석암리 9호분은 1916년 조선총독부가 1차로 조사한 고분 10기 중 하나였다. 석암리 9호분에서는 모두 100건 365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으로 파악됐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부금까지 받아 낙랑고분에 집착 석암리 9호분의 발굴 성과가 전해지자 어떻게 됐을까요. 일제는 석암리 9호분 발굴과 1913년 조사된 낙랑토성까지의 발굴결과를 포함해 ‘평양 대동강 남안=낙랑군의 치소’로 비정했습니다. 그러자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한 일대에 ‘낙랑 광풍(狂風)’이 불어닥쳤습니다. 가뜩이나 한국 역사의 타율성과 정체성을 강조하려 했던 일제는 ‘옳다구나’ 싶었겠죠. 그때부터 ‘중국(한나라)의 지배를 받은 낙랑의 옛땅’을 파헤치는 데 혈안이 됩니다. 일제가 패망 직전인 1944년까지 ‘발굴조사’의 명목으로 파헤친 낙랑고분은 무려 93기에 이릅니다. 고비도 있었습니다.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의 여파에 따른 예산 절감 차원에서 조선총독부의 조직이 줄어들게 된 겁니다. 총독부를 대신한 건 바로 ‘조선고적연구회’라는 외곽 단체입니다. 연구회는 1931년 일본의 미쓰비시(三菱) 합자회사 사장인 이와사키 고야타(岩崎小彌太·1879~1945)의 찬조금(6000원)으로 시작했는데요. 해마다 민간기업과 도쿄(東京)제실박물관 등의 거액 자금 지원을 받아가면서까지 낙랑고분 등의 조사에 집착하게 됩니다. 한번 따져봐야겠죠. 낙랑 발굴을 주도한 세키노 다다시는 “조선은 예부터 중국 문화의 은혜를 입었고 그 침략을 받아 항상 복속해왔다”면서 “자연히 사대주의와 퇴영 고식주의(낡은 형식에 집착하는 낡아빠진 습성 등)에 빠져 국민의 원기도 없어졌다”(<조선의 건축과 예술>·1941)고 했습니다. 정체성과 타율성을 강조한 겁니다. ‘너희는 영원히 남의 나라 속국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과연 낙랑고분은 100% 중국 한나라의 문화를 대변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석암리 9호분의 덧널(나무곽)에서 출토된 철제장검(긴 칼) / 국립중앙박물관 (2018) 보고서 낙랑의 치소가 존재했다는 평양 대동강 남안의 고분들을 살펴볼까요. 한사군 설치 직후(기원전 1세기 무렵) 평양 일대의 무덤형식은 단순한 덧널(나무곽)무덤이었는데요. 기원전후에서 1세기 무렵부터 새로운 무덤이 등장합니다. 하나의 무덤 구덩이 속에 사각형 형태의 덧널(나무곽)을 만든 뒤 그 안에 다시 2개 이상의 나무관을 두는 다소 복잡한 무덤이었죠. 그래서 ‘귀틀묘’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가운데서도 ‘순금제 허리띠 장식’ 같은 국보급 유물이 쏟아진 ‘석암리 9호분’은 특히 심상치 않습니다. 기원후 8년 무렵에 조성한 이 고분 역시 귀틀묘인데요. 다른 귀틀묘와 견줘도 구조가 특이합니다. 무덤 구덩이 바닥에 돌을 깐 것은 물론이고요. 무덤 구덩이와 덧널 사이에도 냇돌을 채워넣었습니다. 고인돌, 즉 적석총이 전통적인 무덤형식인 고조선의 향기를 짙게 풍기고 있습니다. 또 보통 귀틀묘는 하나의 덧널 안에 나무관을 2개 이상 넣는 합장묘의 형태를 취하는데요. 석암리 9호분의 주인공은 한명뿐입니다. 물씬 풍기는 고조선의 향기 무덤 주인공의 신분이 지극히 높은 분이라는 얘기죠. 일본학자 이마니시 류는 석암리 을분에서 출토된 ‘왕(王)x’ 명문을 두고 뭐라 했습니까. <후한서> ‘왕경’전의 기록대로 ‘낙랑 왕씨’, 즉 한나라에서 망명한 인물(왕중)의 8대손(왕경)으로 보았죠. 그 말대로 설령 ‘왕x’이 ‘중국인=왕경’이라 칩시다. 그래도 8대, 즉 200년 이상 한반도에서 대를 이으며 살아온 인물(귀화인)을 중국인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또 같은 <후한서>는 “토인(土人)인 왕조가 낙랑태수를 죽이고 6년간(기원후 25~30) 낙랑군을 장악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토인(土人)’은 고조선계 재지(在地)세력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주인공의 가슴, 눈, 코, 입, 귀, 항문, 손에 삽입했거나 놓았던 장례용 옥(玉) 세트가 나왔다. / 국립중앙박물관 (2018) 보고서 그렇다면 한때 낙랑태수를 자처한 ‘왕조’는 토착세력을 대표하는 고조선계 인물일 수 있습니다. 물론 ‘왕경’처럼 먼 옛날 한반도로 넘어와 완전히 고조선화한 인물일 수도 있겠죠. 어떤 경우든 ‘중국인’으로 단정해버리고 넘길 일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최근 석암리 9호분 유물(화살 발사 장치 부품)의 보존처리 과정에서 확인한 ‘조자릉’ 명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조(趙)씨=중국인’으로 해석하면 고조선의 체취가 나는 고분의 특성과 왕경 및 왕조 관련 역사 기록을 무시 혹은 오독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낙랑인이 중국인일까 국보인 ‘순금제 허리띠고리’는 어떨까요. 중국제를 굳이 대한민국 국보로 대접하는 것이 옳으냐는 의문이 생길 법하죠. 이 국보 허리띠와 비슷한 출토품이 평양의 낙랑고분 7기에서 나왔습니다. 2000년 전 이 땅에 터전을 잡고 살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받고 유행한 명품 허리띠였다는 겁니다. 그것이 중국제품이든, 고조선제품이든 국보의 대접을 받을 만합니다. 어떻습니까. 앞서 지적했듯이 덧널무덤에서 기원전후 귀틀무덤으로 바뀌는 와중에도 보이는 세형동검과 돌무덤의 전통, 정교하고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띠고리 문화는 무엇을 말해줄까요. ‘낙랑인=중국인’으로 도식화할 수 없는 증거가 됩니다. 그럼 낙랑과 낙랑문화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낙랑연구자인 오영찬 이화여대 교수는 “낙랑문화는 중국과 고조선 세력의 영향력이 교차하고 융합해 이룬 독특한 문화”라고 해석합니다. 이른바 ‘낙랑인’이라는 새로운 ‘종족집단(ethnic group)’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이제 ‘낙랑인’은 한국사의 당당한 주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겠네요.
- 이기환의 Hi-story
- [언더그라운드 넷]K똥, 중국인 학자를 기절시키다?(2021. 12. 17 13:22)
- 2021. 12. 17 13:22 사회
- “이젠 똥으로도 전 세계가 뒤집어짐.” 12월 12일 인터넷커뮤니티에 올라온 ‘갈 데까지 가버린 국뽕튜브 근황…jpg’라는 사진에 달린 코멘트다. 사진은 한 유튜브채널 영상 섬네일 이미지다. 흰 가운을 입은 학자가 뭔가를 들고 살펴보고 있는 사진엔 이런 캡션이 달려 있다. “50년 동안 중국인 똥만 연구하던 중국 과학자가 태어나 처음으로 한국인 똥을 분석해보더니…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기절한 이유/ ‘왜 한국인 똥에는 oo가 없지?’”(실제 발언) 유튜브 궁금하긴 하다. 저 oo에 들어갈 말은 무엇일까. 회충, 요충 같은 것이 답이라면 ‘가’라는 주격조사가 붙을 수 없다. 기생충이라면 세글자이고. 실제 영상을 찾아봤다. 48만여 구독자를 보유한 퍼플튜브라는 유튜브 채널이 12월 5일 게시한 영상이다. 영상을 재생하면 “우리나라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제국주의 일본에 짓밟혀 이 땅의 모든 자원을 빼앗겼고, 1950년부터 약 3년간 북한 김일성의 불법남침으로…”와 같은 근현대사에 대한 장광설로 시작한다. 반면 중국은 경제적으로 잘살게 됐지만 전 세계적으로 중국을 존경하고 닮고 싶다는 나라는 없는데, 그건 국민성 때문이라는 것이 영상의 주장이다. 영상은 그 근거로 아직도 아이들이 거리나 지하철에서 똥을 누며, 중국인 관광객을 받는 나라에서도 거리에서 용변 금지 등을 내거는 등 중국사람들의 불결한 위생 상태와 관념을 들고 있다. 물론 화장실문화가 정착된 것은 서구에서도 근대에 이르러서이며…. 잠깐, 애초 스크린숏에서 언급한 ‘50년 동안 중국인 똥만 연구하다 한국인 똥을 보고 기절한 중국학자’ 이야기가 나와야 할 타이밍인데? 총 12분 46초 분량의 영상이다. 후반부는 그에 비해 한국의 위생 상황은 기생충박멸협회의 활약으로 1970년대 80%에 달하던 기생충 감염률이 1997년에 이르면 2%에 불과할 정도로 줄어들었고, 또 한국의 공중보건은 세계 최고수준이며 이를 전수하기 위해 세계화장실협회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한국에 입국한 외국인은 인천공항 화장실에서부터 ‘이곳이 한국이구나’라고 느끼게 될 것이며,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나라를 넘어 그것을 관광적 요소로 특화한 것이 대한민국이라는 주장으로 영상은 마무리된다. 결국 ‘왜 한국인 똥에는 oo가 없지?’라며 기절한 중국인 학자는 온데간데없다. 실제 저런 학자가 있기는 할까. 영상에서 언급한 세계화장실협회 등의 단서로 검색해봐도 중국 참가자를 포함한 국제콘퍼런스를 열었다는 소식 이외에 딱히 잡히는 결과가 없다. 영상 제작자가 섬네일 사진에서 ‘실제로 한 말’이라고 한 걸 보면 뭔가 있을 수도 있는데. 볼일을 보고 뒤를 덜 닦은 것처럼 찝찝한 마음만 남는다(채널에 공개된 e메일로 문의해도 12월 16일 현재 답이 돌아오진 않고 있다. 생각해보면 애초 영상의 더빙도 실제 목소리가 아닌 TTS 합성 음성이다). 비판을 의식한 듯 이 채널 운영자는 “국뽕을 싫어하는 분들의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이 영상이 그저 ‘똥까지 빠는 영상’이라고 단순하게 해석하는 분들도 있어 안타깝다”라며 “똥은 내용전개를 위한 매개체에 불과하다. 결국엔 한국이 국민건강을 증진하기 위해 어떻게 기생충을 박멸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고정 댓글로 주장했다. 댓글 중에도 “그런데 그 한국인 똥을 보고 기절한 중국인 학자는 어디로 갔나”라는 질문이 나오지만 이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물론 과거보다 높아진 국격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는 있다. 하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과 문화를 깎아내린다고 국격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인정해야 비로소 국격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결국 누군가에게는 잘 팔리니 만든 영상이겠지만.
- 언더그라운드 넷
- [골목 내시경]대림동 골목-조선족·중국인은 왜 대림동에 몰려들까(2020. 05. 22 14:40)
- 2020. 05. 22 14:40 사회
- 서울 지하철 2호선과 7호선이 만나는 대림역, 12번 출구를 나서면 보고 들리는 것이 달라진다. 휴대폰으로 목청 높여 통화하는 젊은이는 중국말을 쓴다. 간판엔 중국식 간자체가 보이고, 용어도 중국식이다. 좌판에서 파는 간식은 해바라기씨와 호박씨이고, 빵집에선 중국식 호떡과 꽃빵, 튀긴 꽈배기를 판다.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일대는 어느새 작은 중국이 됐고, 우리 이웃이 된 중국인들이 골목골목 살고 있다. 대림동 일대는 작은 중국이 됐다. 대림동에 조선족 동포와 중국인들이 몰려든 것은 대략 20여 년 전부터다. 가리봉동 일대 쪽방촌에 살던 이들이 그 동네가 개발되면서 시나브로 대림동으로 이동했다. 처음 800명 정도이던 중국 출신 거주자들은 이제 대림동에만 2만여 명이 산다고 한다. 이 지역을 선호하는 이유는 첫째가 일자리고, 둘째는 주거비, 셋째로 편리한 교통을 꼽는다. 대림동은 아직도 2~3층의 오래된 주택이 많고 대부분은 집 전체의 방을 나누어 세를 놓고 있다. 처음에는 반지하방과 옥탑으로 이사했다가 점점 조선족과 중국인이 집과 동네 전체에 스며들었다. 그들을 위해 가게가 열리고, 이제는 모두 중국식 업종이 점령하게 됐다. 덕분에 이 동네 부동산 시장은 호황이란다. 월세도 점점 올라 싼 방값은 옛말이 됐다. 그럼에도 좋은 조건의 빈방이나 가게 자리는 나오는 즉시 나간단다. 초등학교는 교실마다 학생들로 가득 찬다. 골목길엔 갓난아이를 안은 부부의 모습도 흔히 볼 수 있고, 손잡고 걷는 신혼부부도 자주 보인다. 이 일대의 골목은 살아 있다. 대림동 골목 환전소는 다양한 민원사무도 함께 처리하고 있다. 대림역을 나와 골목에 접어들기 전 우선 보게 되는 것은 벽을 가득 메운 구인 광고판이다. 공장부터 농장, 주유소와 도축공장. 20대부터 60대 이후의 일자리까지 일손이 필요한 모든 직종의 직업들이 벽보로 붙어 있다.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의 대자보처럼 ‘인민이여, 와서 일하라’는 외침이 벽마다 빼곡하다. 게시물을 살피던 사람에게 물어보니 코로나19 사태 이후 해외에서 오는 인력이 줄면서 일손은 더 부족해졌단다. 서울보다는 지방에서 사람 구하는 내용이 많았고, 임금과 근로조건 숙식 제공 여부 등이 상세히 적혀 있다. 비계·철근·거푸집·미장·도배 등 전문직 만남의 광장이라는 대림역 12번 출구에서 대림시장으로 향하는 골목길 어귀에는 환전소들이 여러 곳 있다. 단순히 환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으로 돈을 보내거나 비자서류를 대행해주고 각종 민원사항도 처리하는 고충 처리 상담소 역할을 하는 곳도 있다. 행정사 사무소와 여행사도 눈에 띄는데 적어놓은 업무 내용에 영주권과 비자갱신은 물론이고 친자확인 광고도 붙어 있다. 나이든 직원은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 어디나 속고 속이고 얽힌 애정사가 골칫거리 아니냐”며 웃었다. 중국식 간자체 간판이 대부분이다. 직업교육소도 눈에 띄는데 요새 인기 있는 직종은 여자는 간병인, 남자는 건설현장 전문 기능인이라고 했다. 건설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자격증이 있으면 취업비자나 영주권을 얻는 데도 유리하단다. 이제는 단순 노동직보다 비계(飛階)·철근·거푸집·미장·온수·보일러·도배 등 전문직이 몸값도 비싸고 서로 모셔가려는 추세라고 한다. 서비스 업종은 중국에서 온 인력이 대세가 된 지 오래다. 대림시장 주변 골목에도 건설현장에서 일하기 위해 안전화며 작업복을 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발에 딱 맞는 안전화를 고르려고 하자 동료 세 명이 나서서 그를 말렸다. 노련해 보이는 50대 노동자는 “신발은 한 치수 큰 걸 신어야 한다. 현장에서 조금 지나면 발이 부어서 일 못 한다”며 신발을 골라주고 있었다. 그에게 분위기를 묻자 “요즘 남자들은 건설현장 일이 많다. 기술 있으면 돈도 더 벌어 좋고, 아는 사람들끼리 팀을 만들어 현장에 같이 들어가면 의지도 되고 작업도 수월하다”고 설명했다. 연고가 없으면 인근 남구로역 5번 출구 새벽 인력시장으로 가서 일당 일을 구할 수도 있고, 자신처럼 10여 년 이상 현장을 떠돌면 함께 일하자는 연락이 여러 군데서 온다고 했다. 건설현장에 “요즘 조선족하고 중국 사람 없이는 일 못 한다”고 장담했다. 대림시장은 전통시장임에도 보기 드물게 붐비고 번창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시장골목을 가득 메우고, 물건을 사고파는 소리가 활기찼다. 시장 초입에 채소를 파는 오래된 좌판과 드문드문 퍼진 마른버짐처럼 내국인 가게가 있을 뿐, 상점 대부분은 한족과 조선족이 지배한 지 오래다. 대림동은 서울에서 가장 붐비는 골목 중 하나이다. 파는 물건들도 국내시장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것이다. 돼지 꼬리부터 삶은 돼지코, 오리 튀김과 개고기 수육. 옌볜식 순대와 쓰촨식 채소절임. 어느 것 하나 흔한 물건들이 아니다. 주인과 손님은 태연히 중국말로 대화하고 있다. 채소가게에서 파는 오이는 짧고 뚱뚱한 모양이다. 값은 하나에 1500원을 달라고 한다. 국산 오이의 두 배 이상이나 비싼 값이다. 주인은 “이게 중국 오이인데 껍질이 얇고 맛있다. 그냥 먹어도 좋고, 채로 무쳐먹어도 맛있다”고 강조한다. 한 입 베어 먹어보니 우리 입맛엔 우리 오이가 맛있다. 그 옆에는 색깔도 옅고 모양도 제멋대로인 중국 참외를 함께 팔고 있다. 돈벌이 좋고 살기도 좋은 ‘작은 중국’ 가게 주인에게 언제 왔느냐고 묻자 그는 “나는 국적자다. 온 지 20년 됐고, 일가친척이 다 와서 이제는 여기가 고향이다”라고 했다. 국적자란 귀화해서 대한민국 국적을 얻은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란다. 대림동 주민 중 대한민국 국적자의 절반 정도가 그처럼 귀화한 사람이라고 한다. 가게 주인은 자신이 떠나온 중국 지린성 시골마을보다 여기가 돈 벌기도 좋고, 살기도 불편이 없으니 아예 옮겨왔다고 했다. 그는 아파트도 한 채 마련했고, 장사는 나날이 잘돼서 옮겨오길 잘했다고 이야기한다. 식품점에서 파는 식자재 대부분은 중국식이다. 시장 한편 길 위에 크게 사람 얼굴을 그려놓은 간판에 눈길이 갔다. 좌판 의자에 앉은 노인에게 묻자 “얼굴에 난 점과 주근깨 사마귀를 감쪽같이 빼준다”고 설명한다. 지금 뺄 수 있느냐고 하니 노인도 좌판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실력이 좋다는 부추김에 간판을 한 번 더 들여다보았다. 얼굴 곳곳의 혈자리와 그곳의 점이 어쩌면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단다. 시장골목에서 벌어지는 모습과 오가는 이들의 정경은 이곳이 지린성이나 헤이룽장성 혹은 옌볜의 장터거리라 해도 믿을 만했다. 시장통으로 이어진 샛골목엔 다세대 주택들이 어깨를 이어 빽빽이 들어서 있다. 골목에서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다가 소리를 지르며 시장통으로 뛰어간다. 아이들의 엄마는 살살 뛰라고 고함치다가 옆 가게 주인과 극성스러운 아이들 흉을 보며 웃는다. 흔히 1970년대 서울의 골목에서 볼 수 있는 모습들이 대림동에는 아직도 살아 있다. 갓난아이를 안고 3대가 함께 시장을 걷던 가족 중 할아버지가 저녁엔 냉면을 먹자고 했다. 국수가게 앞에서 그들이 고른 것은 옥수숫가루로 만든 노란 냉면국수. 옌볜에서 왔다는 국수공장 사장은 서너 명의 직원들과 함께 부지런히 면을 뽑아내고 있다. 면 다발을 담던 주인이 “면은 옥수수 냉면이 진짜 시원하고 맛있다. 한국 냉면은 별맛이 없다”고 설명한다. 만두와 칼국수 가락을 파는 식당은 주방장부터 종업원 모두가 일가족이라고 했다. 식당 테이블에서 만두피와 속을 열심히 빚는데 한눈에도 그 양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많아 보여도 다 팔린다. 일일이 손으로 빚어서 맛있다”며 권해준 음식은 수제 물만두였다. 대부분의 가게는 만둣가게처럼 가족 단위로 일하고 있었다. 우리 주변에서 보기 힘들어진 가업으로 장사하는 형태가 대림동에선 흔한 모습이다. 시장사람 대부분은 10년 이상 이곳에 뿌리를 내려 활착에 성공한 사람들이다. 다른 이들보다 수완도 좋고 적응도 빨랐던 영민한 사람들이다. 시장골목을 벗어나면 대림역 12번 출구에서 곧장 난 골목길과 만나게 되는데, 이 거리가 대림동의 중심인 셈이다. 곳곳에 중국식 카페인 커피호프집이 눈에 띄고 유난히 많은 노래방을 볼 수 있다. 마작을 치는 마작방도 대림동이나 구로구 일대에서나 볼 수 있는 오락실이다. 거리의 과일상도 용과와 망고, 더불어 두리안을 쌓아두고 팔고 있다. 서울의 골목길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과일들이다. 젊은이들은 무엇인가에 화가 나 있고, 신혼부부는 깨가 쏟아지며 아이를 앞세운 부인은 흐뭇한 표정이다. 한낮 이렇게 골목길을 꽉 메운 인파를 보기는 근래 들어 대림동이 처음이다. 만둣가게·커피호프집·마작방 즐비 골목에 사람이 많다 보니 어딘가 수심 깊은 모습도 보인다. 한가한 빵집 주인은 북적거리는 옆 가게를 부럽게 바라본다. 그 앞쪽 좌판에 담뱃잎 가루를 놓고 가치담배를 말아서 파는 중년의 상인이나 그에게 담배 한 개비를 받아 든 초로의 사내도 대림동의 활기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마트 안에선 소주 한 병을 들었다 놓았다 반복하며 아쉽고 서러운 표정을 짓는 깡마른 남자도 볼 수 있었다. 어떤 사연인지 그는 불편한 한쪽 다리를 끌고 주류 판매대 근처를 유령처럼 맴돌았다. 빠르게 중국말로 응답하는 계산원은 피곤하고 지친 표정이다. 골목에서 파는 튀긴 메뚜기처럼 꼼짝달싹 못 하고 자본 앞에서 무력한 운명을 경험하는 이들도 대림동 골목길을 걷는다. 구로동 일대와 대림동 지역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영화 <아저씨>의 통나무 장수와 마약공장이며 개미굴이 있는 곳으로, <범죄도시>에서 장첸이 범죄조직으로 공포를 휘두르는 동네로 대중들을 만났다. 대낮에도 칼부림이 나고 해가 지면 으레 패싸움이 흔한 지역으로 깊은 오해를 샀다. 하지만 대림동 골목은 평화롭다. 활기차고 어린아이들이 예쁘게 자라며 사람들은 바쁘게 살아간다. 말투와 국적을 제거하면 모두 우리의 모습이다. 바람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발이 있으니 인간의 발걸음은 어디든 가서 닿을 수 있다. 시류를 타고 사람도 뿌리를 옮겨 정들면 고향이고, 마음 주면 사랑인 것이다. 20년 전 침체된 주택가로 기울어가는 달의 운명을 따르던 대림동은 작은 중국으로 다시 활기를 얻었다. 우리 옆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며, 희로애락을 나누는 이웃 마을이다. 얄궂은 바이러스 하나에 세상의 국경이 거의 닫혀버린 오늘 대림동에서 중국 본토 맛의 훠궈 한 그릇을 해치우고, 돌아오는 길에 동북식 순대 한 줄을 사 오는 것도 즐거운 행보이다. 대림동에 가면 살아 있는 골목길을 만날 수 있다.
- 골목 내시경
- 중국인들, 축구 이어 영화서도 공한증(2020. 02. 21 16:00)
- 2020. 02. 21 16:00 국제
- ‘공한증(恐韓症).’ 중국인이 한국 축구에 대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단어다. 1978년 12월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중국 축구대표팀이 한국에 0대1로 패한 후 32년간 중국은 A매치에서 한국을 이기지 못했다. 치우미(球迷·축구팬)인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공개적으로 “중국의 월드컵 진출, 월드컵 개최, 월드컵 우승이 축구에 대한 세 가지 소망”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공한증이라는 단어에는 14억 인구를 가진 세계 2위 경제대국 중국이 못한 월드컵 4강 진출을 해낸 한국에 질투와 경외감, 좌절감이 묻어 있다. 은 중국 본토에서는 원제목인 으로 부르지만, 대만에서는 로, 홍콩에서는 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홍콩의 개봉 포스터. / AM 한국 영화 <기생충>이 비영어권 영화로는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최고 영예인 작품상을 받는 등 4관왕을 달성하자 공한증은 영화계로 번질 분위기다. 중국은 10조원에 달하는 거대 박스오피스 시장을 가지고 있고, 할리우드 영화산업을 좌지우지하는 ‘큰 손’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인정받는 자국 영화를 만들 수 있느냐의 문제에서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그렇다보니 5000만 인구의 작은 이웃나라 한국이 세계 영화계를 뒤흔들고 있는 데 대해 부러움과 좌절감이 뒤섞여 표출되고 있다. <기생충> 성과에 놀란 ‘영화 큰 손’ 중국 중국 온라인 매체 <펑파이>는 “<기생충>의 수상 소식은 갑작스러웠지만 이상하고 놀랄 일도 아니다. 한국 영화의 굴기(우뚝 서는 것)는 2∼3일 사이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라면서 “중국은 초기에만 해도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삼보(三寶·자동차 사고, 불치병, 기억상실)를 비웃었지만 최근 한국 영화의 강세는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한국 영화가 현실 문제를 파고들면서 관객들의 보편적 공감을 끌어내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예로 든 영화는 <소원>·<도가니>·<82년생 김지영>·<감기> 등의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실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사회 문제를 다룬다. <소원>은 잔혹한 아동 성폭력 조두순 사건을 소재로, <도가니>는 장애인 성폭력 사건인 광주인화학교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82년생 김지영>은 사회에 만연한 여성 차별에 대해, <감기>는 바이러스 유행에 대해 다루고 있다. 한국에서 일어난 일을 다루지만, 중국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 큰 공감을 얻은 작품들이다. <펑파이>는 “중국 누리꾼들은 사회적 이슈를 논하면서 한국 영화를 논거로 삼고 있다”면서 “한국 영화 시장의 규모와 인재는 제한적이지만 한국 영화인들은 극도로 민감한 예술적 후각, 현실 생활과 사회 문제의 높은 관심으로 이를 극복한다”고 했다. 1980년대 한국과 중국 영화가 동시에 중흥기를 맞았지만, 한국과 달리 중국은 검열과 스크린 쿼터 등을 유지하면서 두 나라 영화산업에 큰 격차가 벌어졌다는 것이 내부 목소리다. 중국 영화 블로거 위니는 “중국인들은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뿐 아니라 한국의 자유로운 정치적·사회적 분위기를 부러워하고 있다”며 “영화산업의 번영을 이끌 수 있는 것은 바로 건강한 사회 분위기”라고 지적했다. 중국의 한 영화관 매표소의 모습(사진 위) / 금세계영화관, 중국 베이징 차오양구의 한 영화관. 코로나19 영향으로 중국의 대부분 영화관이 영업을 중단했다. 대만 <연합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양극화와 빈부격차를 다룬 <기생충>은 한국 배경이지만 능숙한 위트와 유머로 전 세계에 통했다”면서 “이 작품은 지난 수십 년간 한국 영화산업이 어떻게 국제무대로 도약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됐는지 전 세계에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했다. <기생충>의 중국 본토 판권은 판매된 상태지만 개봉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생충>이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후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베이징청년보> 등 주요 관영 매체가 관련 논평을 쓰기도 했다. 2017년 중국 정부가 한국의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에 대한 반발로 한한령(限韓領·한류 콘텐츠 금지령)을 내렸지만 여전히 여러 경로로 한국 콘텐츠가 소비되고 있다. 코로나19로 올해 농사 망친 중국 영화계 중국 영화산업은 양적으로는 세계 최대 수준까지 팽창했다. 국가영화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 영화 박스오피스는 총 642억660만 위안(약 10조9542억원)으로 전년 대비 5.4% 증가했다. 이중 중국산 영화 박스오피스가 시장 점유율 64.07%를 차지한다. 지난해 영화 관람객 수는 총 17억 명을 넘었다. 중국산 애니메이션 영화 <너자(Ne Zha)>가 중국에서 <어벤져스: 엔드게임>(어벤져스 4)의 기록을 깨고 흥행했다. 중국은 자국에서는 메가 히트작을 쏟아내고 있지만, 검열에 따른 소재적 한계, 애국심을 고취하는 내용 때문에 내수용에 그치고 있다. 갈 길은 먼데 코로나19까지 닥치면서 ‘영화계의 시계’는 두 달째 멈췄다. <남방주말>은 “코로나19는 대형 영화사와 배급사, 톱스타뿐 아니라 중소형 제작사와 마케팅 회사, 단역 배우들에 이르는 영화산업의 말초신경까지 강타했다”고 했다. 중국 저장(浙江)성의 헝뎬(橫店)촬영소는 규모가 3000만㎡에 달하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영화 세트장이다. 베이징 자금성을 80% 크기로 재현한 건축물을 비롯해 진시황궁 등 5000년 역사를 아우르는 10여 개의 세트장을 갖췄다. 낮에는 스타를 보고, 밤에는 쇼를 본다는 헝뎬에는 호텔도 50개가 넘는다. 지난해 12월만 해도 200개 스튜디오를 동시에 운영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지만 코로나19로 지난 1월 25일부터 폐쇄됐다. 영화 제작자 허빈(賀斌)은 <남방주말>에 “사전 작업을 거쳐 2월 3일 일본으로 출국해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었지만 1월 30일부로 모든 것이 멈췄다”면서 “위약금도 문제지만 앞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배우들의 스케줄 등 통제 불능 요소가 많아지면서 영화 제작이 아예 취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소형 영화 마케팅 회사 대표는 “임금·월세를 고려할 때 6개월간 버틸 수 있는데 이미 두 달이 지났다”고 한숨을 쉬었다. 현재 대부분의 영화관도 폐점이거나 개점 휴점 상태다. 춘제(중국 설) 대목에 개봉될 예정이던 대작 영화도 개봉이 취소됐다. 올해 영화 농사는 망쳤다는 말까지 나온다.
- [법률 프리즘]신종 코로나, 중국인 입국 금지 가능한가(2020. 02. 07 15:22)
- 2020. 02. 07 15:22 사회
-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자와 사망자가 세계적으로 연일 늘어나고 있다. 중국에서 처음 발병했고, 대부분 감염자가 중국인이다 보니 미국 등의 국가들이 중국을 방문한 외국인의 입국을 포괄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인 입국을 금지하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67만 명(2월 5일 현재) 넘게 참여하는 등 입국 금지 의견이 높다. 법적으로 중국인의 입국을 막을 수 있는 것일까. 서울 중구 명동 거리를 이동하는 외국인 관광객. 정부는 2월 4일부터 중국 후베이성을 14일 이내 방문하거나 체류한 적이 있는 모든 외국인의 한국 입국을 전면 금지했다. /연합뉴스 필자가 지난 칼럼(<주간경향> 1352호)에서 밝힌 바와 같이 국가는 외국인을 입국시킬지 선택할 자유가 있다. 이는 주권국가의 기본적이고 배타적인 권리이다. 그러므로 설령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자라고 확인되지 않았다 해도 잠재적 위험을 막기 위해 중국에 체류한 적이 있는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하는 것은 가능하다. 법률이 아닌 대통령령으로 신속하게 입국을 금지할 수도 있다. 법원 판례 또한 전염병 환자에 대한 입국 제한과 출국 조치를 원칙적으로 인정한다. 반면 대한민국 국민이 대한민국에서 거주·이전할 자유는 헌법 제14조에 명시된 기본권이다. 국가는 헌법 제37조 2항에 따라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만 법률로 입국을 제한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 체류 국민의 입국을 막는 법률이 없고, 입국 금지 대신 격리 등으로도 충분히 관리 가능해 국가가 중국 체류 자국민의 입국을 막기는 힘들다. 한편 270만 명에 달하는 중국 재외교포들 역시 외국인이므로 국가는 원칙적으로 입국을 제한할 수 있으나, 이미 재외동포체류자격(F-4 비자)을 부여받은 사람이라면 법무부 장관이 재외동포체류자격을 박탈하는 절차가 선행되기 전에는 입국 거부가 힘들 것으로 생각한다. 외국인에 대한 입국 거부가 가능하더라도 실제 중국인에 대한 입국 거부는 쉽지 않다. 우선 바이러스 감염 가능성은 체류 지역에 따라 달라질 뿐 국적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니므로, ‘중국 체류자’가 아닌 ‘중국 국적자’에 대한 입국 금지는 합리적이라 보기 힘들다. 그리고 헌법 제6조에 따라 조약과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갖는데, 대한민국이 가입한 국제보건규칙(IHR2005)에 따라 국가는 필요한 범위 이상의 국경 폐쇄나 입국 제한을 둘 수 없다. 무엇보다 양국은 지리적으로 매우 가깝고, 매일 중국에서 한국으로 3만 명 이상이 입국할 정도로 교류가 잦다. 이러한 상황에서 섣불리 입국 금지를 했다가는, 대한민국의 검역체계 안에서 관리되지 않는 밀입국자가 생겨날 여지가 매우 크다. 그 경우 최소한 입국자에 대한 기본적인 관리가 가능한 현재보다 더 위험할 소지도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중국인의 입국 자체를 두려워하는 상황을 무시할 순 없다. 국민은 메르스 유행, 세월호 사건 등 수많은 경험을 통해 국가가 개인의 안전과 행복을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각자도생, 적자생존의 사회에서 국가가 잃어버린 신뢰를 찾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에 대한 검역과 관리가 성공해 그 신뢰를 찾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 법률 프리즘
- [장르물 전성시대]종이동물원-혼혈아 중국인 엄마가 남긴 상자 속 편지(2019. 06. 21 15:16)
- 2019. 06. 21 15:16 문화/과학
- 아들은 청소년기에 혼혈 용모와 문화적 차이로 따돌림을 당하자 그 화살을 엄마에게로 돌린다. 영어로 더듬대는 중국인 엄마는 1950~60년대 미국 중서부에서 희귀동물 내지 열등종족으로 비쳤으니까. 켄 리우의 단편집 한국어판 표지 / 황금가지 중국 외딴 시골 농가의 열 살짜리 여자아이가 문화혁명의 광풍에 휩쓸려 고아로 홍콩에 팔려온다. 여자아이는 홍콩의 부잣집에서 남자아이 둘을 돌보며 억척스레 온갖 잡일을 해낸다. 매일 새벽 4시 아침식사를 준비하며 장보기와 청소는 기본이다. 굼뜨거나 일을 잘못하면 매 맞기 일쑤다. 여자아이는 주인댁 애들이 말썽을 부려도 매 맞고, 영어를 어깨너머 배우려다 들켜도 매 맞는다. 주인아줌마는 영어 배워 경찰에 신고할 속셈이냐며 그랬다간 밀입국한 대륙 사람이라고 일러바치겠노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런 학대는 홍콩에서 지금도 동남아 출신 가정부들을 대상으로 자행된다.) 이렇게 6년이 흐른 어느 날 새벽시장 생선가게 할머니가 귀띔해준다. “몇 살, 한 열여섯? 언젠가 너희 바깥주인이 술에 취해 널 덮칠 걸, 넌 꼼짝 못할 테고. 안주인이 알면 네 인생은 진짜 지옥이야. 그리 살 수는 없잖아.” 할머니는 아시아인 아내를 맞으려는 미국 남자를 소개해줄 브로커와 연결해준다. 밥 짓고 집안일만 하면 미국인 남편이 행복한 삶을 선물한단다. 성년을 앞둔 여자아이에게 이것은 절대 놓칠 수 없는 구명줄만 같다. 사진과 온갖 거짓말로 도배한 신상정보에 혹한 미국 남자가 태평양을 건너온다. 그는 홍콩의 커피숍에서 만난 여인이 영어와는 담쌓은 일자무식이라는 사실에 분노해 브로커에게 환불을 요구하는 대신 웨이트리스를 불러 통역을 부탁한다. “낭만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그게 내 이야기야. 코네티켓주에서 난 외로웠단다. 네 아빠는 친절하고 상냥했어. 고마웠지. 하지만 날 이해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어. 나 역시 아무것도 이해 못했고. 그런데 네가 태어났어! 네 얼굴을 볼 때면 정말 행복했단다. 네 얼굴에 어머니가, 아버지가, 내가 보였거든. 난 가족도, 고향도 내가 알던 모든 것을 잃어버렸어. 그때 네가 생긴 거야. 네 얼굴은 그 모든 게 진짜였다는 증거란다. 내가 꾸며낸 기억이 아니란 증거.” 안타깝게도 해피엔딩이 아니다. 아들은 청소년기에 혼혈 용모와 문화적 차이로 따돌림을 당하자 그 화살을 엄마에게로 돌린다. 영어로 더듬대는 중국인 엄마는 1950~60년대 미국 중서부에서 희귀동물 내지 열등종족으로 비쳤으니까. 아들은 엄마와의 대화를 끊고 남편은 사태를 방관한다. 그래서일까? 사십을 갓 넘긴 여자는 암으로 죽기 전 아들에게 꼭 상자 하나를 챙기라고 유언한다. 그 안에는 아들이 어린 시절 엄마가 접어준 종이인형들이 들어 있다. 엄마의 숨을 불어넣은 종이 동물들은 마치 산 동물마냥 아들과 놀곤 했다. 그로부터 2년 후 아들은 우연히 종이인형 안쪽에 쓰인 엄마의 편지를 발견한다. 그리고 어른의 마음으로 처음 엄마를 이해할 기회를 갖는다. 켄 리우는 SF로 휴고상을 받은 중국계 미국 작가다. 이 단편은 SF가 아니고 살짝 환상이 가미되었을 뿐이지만, 대신 SF작가라 해서 인생의 쓴맛 단맛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리라 속단하는 이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기우인지 잘 보여준다. 작가의 말마따나 장르 구분은 무의미하며 어차피 소설은 현실의 은유일 따름이니까. 어떤 형식의 소설이든 현실의 은유임을 공감하는 독자라면 일독을 권한다.
- 장르물 전성시대
- [언더그라운드 넷]“미세먼지 한국 탓” 그린피스 대표가 중국인이라서?(2019. 03. 11 14:48)
- 2019. 03. 11 14:48 사회
- 미세먼지로 홍역을 치른 한 주였다. 문제는 앞으로다. 3월이 지나고 4월이 된다고 해서 나아진다는 보장은 없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역시 홍역을 치른 곳이 있다. 환경단체 그린피스다. 2011년 한국에 진출한 국제단체다. 2016년쯤부터 도는 이미지가 있다. 초미세먼지의 약 50~70%는 국내에서 발생한다는 주장이다. 2011년 서울시 자료를 인용한 그린피스의 주장이다. 3월 초 리바이벌된 이 이미지의 제목은 이렇다. ‘그린피스가 미세먼지 발생을 한국으로 돌리는 이유.jpg.’ 왜 그렇다는 걸까. 게시물은 별다른 설명 없이 그린피스 대표자 이름에 빨간 동그라미를 쳐놓았다. 쯔이팽청이라는 중국인이 대표를 맡고 있기 때문에 미세먼지 책임을 부인하는 중국 정부처럼 한국 탓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일까. 서울역에서 미세먼지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그린피스. / 그린피스 서울사무소 페이스북 그린피스가 글로벌 조직이다 보니 서울사무소는 홍콩, 중국, 대만을 아우르는 동아시아지부로 묶여 있다. 다른 대륙도 마찬가지다. 쯔이팽청은 1997년 처음 개설된 홍콩지부에서 2008년부터 활동했다. 그가 동아시아지부 사무총장이 된 것은 2016년. 올해로 4년차다. 확인해보니 “그린피스 운영에서 한국 사람이 배제되고 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동아시아 캠페인을 총괄하는 프로그램국장은 한국인 최희정씨다. 서울사무소 프로그램국장도 이현숙씨이고, 후원사업국장 역시 한국인 채정아씨가 맡고 있다. 그린피스 서울사무소 관계자는 “그린피스가 중국발 (초)미세먼지 문제에 대해 침묵한다, 혹은 국내 요인만을 부각한다는 의혹은 그린피스의 중국 내 활동이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아 발생한 오해”라며 중국 대기오염과 관련한 그린피스 활동자료를 보내왔다. 그는 “특정국가나 기업의 이익에 따라 활동방향이 정해지는 것은 구조적으로 있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특정국가에서 활동하는 환경단체는 그 국가의 책임을 강조할 수 있다. 환경단체들이 미세먼지와 관련해 한국 정부에 특단의 절감조치를 요구하는 까닭이다. 중요한 것은 기후변화와도 관련 있는 미세먼지 문제가 한 나라의 노력만으로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라는 점이다. 시민사회 차원의 국제적 연대 내지는 글로벌 단체가 문제제기의 적합한 주체일 수 있다. 그린피스 같은 단체들의 활동이 중요한 이유다.
- 언더그라운드 넷
- [정윤수의 ‘서문이라도 읽자’]김명호의 천하제일 이야기꾼의 장강대하 이야기(2018. 04. 23 14:40)
- 2018. 04. 23 14:40 문화/과학
-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는 일단 재미있다. 며칠 둘러보고 여행기까지 써내는 요즘 시대에 40년 공부와 교류와 추억을 종횡으로 비벼내는 문장은 얼핏 보기에 슬렁슬렁 쓴 듯 보이지만, 그 속은 꽉 차 있다. 우리는 중국과 중국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삼국지>나 <수호지>는 ‘이야기’의 어떤 원형이었다. 신영복은 <강의>에서 중학교 시절의 추억을 들려준다. <삼국지>의 결정적인 장면을 친구들과 읽고 있었는데 마침 어머님 심부름이 있었다. 까까머리 신영복은 뛰고 또 뛰었다. 그런데 심부름을 마치고 와보니 친구들이 책을 읽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관운장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인용컨대 “관운장이 죽자 더 이상 읽지 못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세상에 관운장이 죽다니! 어린 우리는 참으로 슬펐습니다.” 나도 엇비슷한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방학 때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강원도 함백의 고모네 집에 놀러갈 때, 우리 형제는 <삼국지>를 들고 갔는데, 아주 어렸을 때이므로 이문열이나 황석영·장정일의 번역본은 아니었다. 그렇기는 해도 누구의 번역본인지는 알 길이 없다. 박태원·정비석·김구용·박종화 같은 기라성 중의 하나인지, 아니면 육교 밑 카바이드 불빛 아래서 팔던 해적본인지 알 길 없으나, 그 당시 조판대로 세로 배열에 한 쪽을 두 칸씩 나눠서 촘촘하게 편집한 <삼국지>였다. 형이 더 빨리 읽었다. 그래서 책장을 넘기려 하면 나는 “잠깐, 잠깐만, 아직, 아직” 했다. 중앙선 기차는 덜컹거렸다. 그렇게들 중국 이야기를 다들 읽었을 테고, 고교시절의 한문시간에 더러 이름이나 익은 이백이나 두보를 거쳐서 일종의 혁명 시뮬레이션 시기에 저 레닌이나 루카치 대신 천두슈나 마오쩌둥 같은 사람에게 더 호감을 가진 세대들에게 중국과 중국인 이야기는 늘 넘쳐나는 이야기의 폭포수들이다. 일본 이야기에 매료된 사람들도 꽤 있겠지만 <대망>의 피비린내나 <료마가 간다>의 풍운이 <삼국지>를 시작으로 하여 수·당·명·청과 옌안 대장정, 문혁을 거쳐 형성되는 장강만리의 중국 이야기에 비할 바는 못될 듯싶다. 어느 일간지에 연재된 ‘사진으로 보는 중국 근현대’를 보았다. 그 신문을 구독하지는 않았기에 매주 읽지는 못하였어도, 틈틈이 검색을 통하여 읽었다. 나중에 <중국인 이야기> 시리즈로 출간되어, 에라 모르겠다 한 번에 몰아서 읽어야겠다, 해서 흔한 말로 ‘도장깨기’ 식으로 지금 한 권씩 독파 중이다. 베이징 골목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듯 이제는 일반 독자들에게 익숙한 이름이지만, 오래전에 그는 책 읽는 사람들 말고 책 쓰는 사람들, 책 만드는 사람들에게 장안의 최고수로 저명했다. 1970년대부터 홍콩과 타이베이를 거점으로 하여 ‘중공’을 들여다보았고 양국 수교 이후인 1991년 3월부터는 중국의 싼롄(三聯)서점 서울점 대표를 맡으면서, 멀리는 대륙 전체를 조망하고 가까이는 베이징이나 상하이의 골목 구석구석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는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는 일단 재미있다. 며칠 둘러보고 여행기까지 써내는 요즘 시대에 40년 공부와 교류와 추억을 종횡으로 비벼내는 문장은 얼핏 보기에 슬렁슬렁 쓴 듯 보이지만 그 속은 꽉 차 있다. 역사와 사건과 인물에 관한 저자의 대가다운 촌평과 일갈 또한 흥미롭다. 무엇보다 독자들을 바로 그 현장 가까이로 데리고 간다. 술냄새, 땀냄새, 화약냄새, 그리고 더러는 피냄새가 배어 있다. 가공과 상상의 묘사가 아니라 40년 이상의 문헌자료에 더하여 저자가 직접 만나서 듣고 기록한 구술이 곳곳에서 각 장면의 사실성을 보증한다. 책의 곳곳에 ‘구술하였다’ ‘말을 남겼다’ ‘엿들었다’ ‘이야기를 나눴다’ 등이 나오는데 그 겸손한 청자는 바로 김명호다. 이를테면 중국 현대사의 결정적인 장면 중 하나인 1958년의 루산 회의. 김명호는 적는다. “마오가 펑더화이의 한쪽 팔을 잡고 말을 걸었다. ‘우리 얘기 좀 하자.’ 시뻘게진 얼굴에 눈까지 부릅뜬 펑더화이는 ‘말하고 싶지 않다’며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마오쩌둥이 몸을 돌려 펑더화이를 다시 잡았다. ‘우선 앉기라도 하자. 좋은 말이건 나쁜 말이건 얘기 좀 하자.’ 펑더화이는 막무가내였다. 할 말이 없다며 마오의 팔을 뿌리치고 갈 길을 갔다. 수행원들 앞에서 마오의 권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봐서는 안될 정경을 목격한 수행원들의 반응도 제각각이었다. 뤄루이칭은 숲을 향해 바지춤을 내리고, 커칭스는 고개를 숙인 채 연신 콜록콜록 기침만 해댔다. 저우언라이는 어디로 없어졌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김명호 그 후 펑더화이는 실각했다. 세상이 완전히 그를 내치기 전에 그가 먼저 베이징을 표표히 떠나갔다. 김명호는 이렇게 덧붙인다. “펑더화이는 중난하이를 떠났다. 배웅객이 한 사람도 없었다. 마오쩌둥은 ‘스산한 가을바람이 대장군을 배웅했다’며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정도는 이 장강대하의 극히 일부다. 대륙을 제각각의 다리미로 누볐던 위안스카이, 천두슈, 루신, 후스, 장쭤린, 장제스, 마오쩌둥, 류사오치, 등샤오핑 등은 어떤 지점에서는 이 책들의 조연급으로 물러서기도 한다. 직접 이야기 들으면 훨씬 흥미진진 장강만리의 이야기 책에 비하여 서문은 짧다. 김명호답다. 평소 허례와 절차를 번거로이 여기고 위아래 서열 나누기를 질색하는 김명호의 단면이 엿보인다. 몇 자 써놓았으니 궁금하면 읽어보라는 풍모다. “40년 가까이, 중국은 나의 연구 대상이 아니었다. 그냥 놀이터였다. 책, 잡지, 영화, 노래, 경극, 새벽시장, 크고 작은 음식점 돌아다니며 즐기기만 했지 뭘 쓰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말장난 못지않게 글장난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일기건 편지건, 남들이 쓴 걸 보기만 했지 직접 써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일단 써놓고, 맘에 들 때까지 고치면 된다’는 마오쩌둥의 문장론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말이 쉽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하면서 깨달았다. 늦게 깨닫길 천만다행이다. 20여년간, 내게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준 중국의 ‘문화노인’들이 연재 도중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이제는 베이징이나 홍콩, 타이베이를 가도 만날 사람이 거의 없다. 어떻게 해야 그들의 영혼을 달랠 수 있을지, 몰라서 답답하다.” 실은, 김명호의 글을 읽는 것보다 직접 이야기를 듣는 게 훨씬 흥미진진하다. 마주 앉은 곳이 금세 베이징이 되고 상하이가 된다. 연재작의 그 첫째 권 표지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동네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농민화가 주융칭의 그림 ‘설서납량’이 제1권의 표지화가 된 연유가 그럴 것이다. 김명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분단으로 인하여 기껏해야 전철을 타도 문산 정도밖에 가는 신세가 되어 올망졸망 살아가는 이 남한의 지리적 한계, 상상력의 결핍, 넓이와 깊이의 부재를 금세 실감하게 된다. 여름이 오기 전에 평소 즐기던 냉면이라도 앞에 두고 중국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을 따름이다.
- 정윤수의 ‘서문이라도 읽자’
- 중국인 입맛, 소고기·커피·와인으로 변하다(2017. 09. 12 10:38)
- 2017. 09. 12 10:38 국제
- 소고기, 커피뿐만 아니라 주류시장도 재편되고 있다. 중국 하면 떠오르는 바이주 대신 와인 소비가 늘어나 중국은 최대 와인시장으로 부상하고 있다. 지난 1일 상하이의 와이가오차오(外高橋) 항구에 미국산 냉동 소고기를 실은 선박이 입항했다. 이번에 들어온 소고기는 15.1t, 30만 달러(약 3억3800만원) 상당이다. 전산화 시스템으로 검역신고서 작성이 생략된 미국산 소고기는 빠르게 수입식품 검사를 마친 후 곧장 중국인들의 식탁으로 향했다. 지난 6월 미국산 소고기가 다시 대륙으로 왔다. 광우병 파동으로 수입이 중단된 지 14년 만이다. 6월 첫 수입물량은 10t에 불과했지만 7월에는 16.8t으로 한 달 새 63.3%나 늘어났다. 상하이 항구로 들어온 소고기는 수입 재개 이후 배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온 첫 미국산 냉동 소고기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규모가 급격히 늘어날 것임을 예고한다. 최근 10년간 중국 커피 소비량은 연평균 12.8% 고속성장하고 있다. 미국의 커피 체인인 스타벅스는 중국에서 2800여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중국 스타벅스 지난해 소고기 수입 80만t으로 세계 2위 중국인들의 입맛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돼지고기 대신 소고기, 차 대신 커피, 바이주(白酒) 대신 와인 소비가 늘고 있다. 대신 인스턴트 라면이나 패스트푸드 소비는 주는 등 고급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스테이크, 갈비 등을 즐기는 중국인들이 급격히 늘면서 중국의 소고기와 송아지 고기 소비량은 지난 5년간 10% 이상 증가했다. 대신 과거 중국요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닭고기와 돼지고기 소비는 계속 줄고 있다. 중국의 농촌에서 빠르게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축산농가는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소고기 소비가 늘면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자 자연스런 결과로 수입이 늘었다. 최근 5년 새 쇠고기 수입량은 10배로 뛴 것으로 집계된다. 홍콩 영자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중국 당국이 급격히 늘어나는 소고기 수요를 맞추기 위해 수입 제한조치를 하나씩 풀고 있다”며 “올해 초에는 남아프리카와 아일랜드 소고기 수입을 허가했고, 6월에는 미국산, 최근에는 아프리카 남부의 나미비아산 소고기 수입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국에 가장 많은 소고기를 수출하는 나라는 브라질로 전체의 29%를 차지한다. 우루과이(27%), 호주(19%), 뉴질랜드(12%)가 뒤를 잇고 있다. 미국, 남미, 오세아니아에 이어 아프리카 소고기까지 중국인들의 식탁으로 옮겨오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중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소고기 수입국으로 떠올랐다. 2006년 6000t에 불과했던 수입규모는 지난해 80만t으로 급증했다. 전문가들은 중국의 소고기 소비는 더 늘어나 현재보다 10% 이상 많아질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베이징, 상하이, 선전 등 중국의 대도시는 ‘한 집 건너 한 집이 커피숍’일 정도로 커피 문화가 보편화됐다. 최근 10년간 중국 커피 소비량은 연평균 12.8% 고속성장해 왔다. 이 같은 추세로 미뤄볼 때 2020년에는 중국 커피 소비량이 3조 위안(약 523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중산층이 늘어나고 해외여행, 유학 등으로 입맛의 서구화가 일어나면서 차에서 커피로 갈아타고 있는 것이다. 차관(茶館)은 찾기 힘들어도 커피숍은 도처에 있다. 백화점, 쇼핑몰, 주요 오피스빌딩 1층에는 어김없이 커피체인점이 차지하고 있다. 최근 10년간 중국 커피 소비량은 연평균 12.8% 고속성장하고 있다. 미국의 커피 체인인 스타벅스는 중국에서 2800여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중국 스타벅스 스타벅스 매장 미국 다음으로 많아 미국의 유명 커피 체인인 스타벅스는 중국에 2800여개의 매장을 보유하고 있다. 스타벅스의 ‘고향’인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매장이 많은 곳이 중국이다. 지난해에만 500개 넘는 매장이 새로 오픈하는 등 성장잠재력이 높아 미국을 제치고 1위 국가로 올라서는 것은 시간문제다. 중국 당국의 규제로 미국을 대표하는 정보기술 기업인 구글, 페이스북 등은 대륙에서 힘을 못쓰고 있다. 그러나 빠르게 바뀌고 있는 중국인들의 입맛까지는 당국도 규제할 수 없고, 미국계 커피 체인점이 중국 안방을 차지한 것이다. 소고기, 커피뿐만 아니라 주류시장도 재편되고 있다. 중국 하면 떠오르는 바이주 대신 와인 소비가 늘어나 중국은 최대 와인시장으로 부상하고 있다. 중국 와인시장은 매년 7%씩 성장하며 영국을 제치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와인시장으로 떠오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지난해 성장률이 눈부시다. 작년 와인 소비량은 17.2억ℓ로 전년 대비 6.9% 성장하며 증가폭으로는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와인 업계는 2020년에는 중국 내 와인 매출이 210억 달러(약 23조원)까지 늘어나 61억ℓ의 와인을 소비할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인들의 소비수준이 올라가면서 인스턴트 라면 소비량은 급격히 줄고 있다. 세계인스턴트라면협회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의 인스턴트 라면 소비량은 385억개로 2013년(462억개) 이후 17%나 감소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중국 소비자들의 개인가처분소득(개인소득 가운데 자유롭게 소비·저축할 수 있는 돈)이 지난 10년새 2배로 늘어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추구하면서 인스턴트 라면 소비는 크게 줄어들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 내 소비 수준이 늘어나면서 스테이크를 즐기는 중국인들도 늘어나고 있다. 지난 5년간 중국의 소고기 수입량은 10배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경향신문 자료사진 인스턴트 라면 소비는 급격히 줄어 개혁개방 이후 태어나 물질적인 풍요를 맘껏 누리며 성장한 중국의 신세대 소비자들은 건강과 품질을 중시하고 가공식품을 멀리한다. 당이나 지방이 들어간 제품도 이들에게는 피해야 할 식품이다. 라면이나 튀김 대신 생수, 유제품, 유기농 식품을 선호하고 있다. 소득이 올라갈수록 건강식품을 선호하는 것은 전 세계에서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다. 미국에서도 중산층 사이의 건강 다이어트 붐으로 탄산음료 소비가 31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중국인들의 입맛이 변하면서 기존 승승장구하던 라면 기업들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중국 내 라면 소비가 줄면서 중국의 유명 라면 생산업체인 퉁이(統一)기업의 올해 1분기 순이익이 27%나 하락했다. 퉁이는 중국 인스턴트 라면 및 음료시장에서 2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는데, 이 회사의 수익률은 2013년 이후 계속 내리막이다. 퉁이와 함께 유명 라면 생산업체인 캉스푸(康師父)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중국 인스턴트 라면과 아이스티 시장의 50%를 점유하고 있는 이 기업은 2015년과 2016년에 수익이 30%나 감소했다.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4년간 1만5400명의 인원을 줄였다.
- [클릭TV]‘별그대’를 대하는 중국인의 자세(2014. 03. 18 10:00)
- 2014. 03. 18 10:00 문화/과학
- 김수현·전지현 주연의 드라마 의 중국 열풍은 언론 보도를 뛰어넘는다. 극중 전지현의 “첫눈 오는 날엔 치맥(치킨과 맥주)”이라는 말 한마디가 치킨 유행으로 이어졌다. 김수현과 전지현이 캠핑을 떠나 라면을 먹는 장면 덕분에 중국 신라면 매출도 덩달아 뛰었다. 전지현이 김수현을 도민준씨라고 부르는 점에 착안,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이름 뒤에 ‘xi’(씨)를 붙이는 게 유행이다. 씨라는 의존명사가 없는 중국에서 신조어가 생긴 셈이다. 이쯤 되면, 정치 행사인 양회에서 “우리는 왜 이런 드라마를 못 만드냐”는 정치인들의 한탄이 나온 게 무리는 아니다. 흥미로운 점은 를 향한 중국인들의 ‘숟가락 얹기’ 전략이다. 드라마 인기에 기대려는 마케팅뿐 아니라, 이 작품을 현지화하려는 움직임까지 눈에 띈다. SBS | SBS 제공 중국신문망 보도에 따르면 중국 공영방송인 CCTV는 당초 제목이 이었던 다큐를 로 바꿔 방송하기로 했다. 가 널리 알려지자 그 이름을 따 친숙함을 주려는 시도다. 3월 13일 포털사이트 야후의 증권뉴스는 “수정방은 의 홍 사장도 좋아하는 중국의 술”이라고 보도했다. 홍진경이 MBC 예능프로그램 에 출연해 수정방을 마셨다고 말한 부분에서 착안한 기사다. 그는 에서 전지현의 절친한 친구이자 만화가게 주인으로 나왔다. 에서 시작된 기사는 수정방이 600여년의 역사가 있고, 한국의 30여개 5성급 호텔과 50여개 고급 식당에서 판매되고 있다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에 슬쩍 수정방 홍보를 얹은 것이다. 중국에서 도민준(김수현 역)의 흔적을 찾으려는 움직임도 재미있다. 13일 인민일보가 운영하는 온라인 사이트 인민망은 저장사범대에 근무 중인 ‘현실판’ 도 교수가 화제가 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저장사범대에서 생물화학을 가르치는 조모 교수의 학사, 석사, 박사, 그리고 현재 사진이 온라인에 올라와 있는데, 안경을 쓴 것만 빼면 짧은 머리에 둥근 이마 등 도민준과 거의 똑같은 모습이다. 외계인으로 설정된 드라마 속 도민준 교수가 늙지 않는 것처럼, 이 교수 역시 14년간 늙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SBS | SBS 제공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에는 “조 교수님 정말 외계에서 온 것 아닌가요?” “실험할 때 치맥 먹어도 되나요?” “도 교수의 환생 아닌가요?”라는 누리꾼들의 질문이 올라왔다. ‘백미’는 도민준의 조상에 관한 중국 기사들이다. 광명일보 인터넷판은 도민준의 뿌리를 중국에서 찾고 있다. 도민준(都敏俊)의 본관이 성주라고 가정하고, 한국 도씨의 선조는 중국 한나라 인물 도계라는 설명이다. 이 신문은 “도씨 시조인 도계의 후손인 도조가 고구려로 건너오면서 한국의 도씨가 번성하게 됐다”고 밝힌다. 전지현의 극중 이름은 천송이다. 중국 언론은 천송이의 뿌리도 중국에서 찾아냈다. 영양 천씨의 시조는 명나라 관리 천암이다. 이 후손이 한국으로 건너가 한국에 천씨가 생겼다며 천송이의 조상도 중국인이라고 주장한다. 드라마 제작사에서는 주인공의 한자 이름을 따로 만들지 않는다. 없는 중국 이름을 있다고 가정하고 만들어내는 중국인들의 뿌리 찾기 노력이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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