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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본 세상]애니메이션 와 그래픽노블 (2018. 06. 19 15:38)
2018. 06. 19 15:38 문화/과학
ㆍ사랑은 거리와 시간 속에서 바뀌어 간다 <초속 5센티미터>가 그 거리와 시간의 중력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떨어지고자 버티는 마음을 그렸다면, <초속 5000킬로미터>는 거리와 시간의 작동을 못내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사랑이 어떤 모양으로 존재하는지를 묻는다. 매력적인 제목 뽑기 경연대회를 연다면 후보로 들이밀고 싶은 제목들이 있다. 호기심을 자아내어 눈길을 멈추게 하고 결국에는 속까지 들여다보게 만들고 마는 그런 제목들이다. 특히 우열을 다투기 어려운 두 작품은 공교롭게도 ‘속도’를 제목에 담았다. 애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신카이 마코토 감독)와 그래픽노블 <초속 5000킬로미터>(마누엘레 피오르 지음, 김희진 옮김, 미메시스)가 그 작품이다. 마누엘레 피오르 작가의 만화 의 한 장면 / 미메시스 전자와 후자에 공히 사용된 ‘초속’이라는 단위는 신선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전자는 5㎝, 후자는 5000㎞로 단위도 다를뿐더러 후자가 1억 배는 더 빠르다. 그런데 크게 다른 속도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은 공히 ‘사랑’을 이야기한다. 속도와 사랑은 어떤 관계일까? 속도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따로 놓고 보면 조금 파악하기가 쉬울지도 모른다. 상승기류 속 벚꽃이 떨어지는 스피드 우선 거리. 2007년작 <초속 5센티미터>의 두 주인공 타카키와 아카리는 도쿄의 한 초등학교에서 만났다. 같은 공간, 짧은 거리는 그들을 이어주었다. 가까워진 둘 사이로 무수한 대화가 오간다. 대화의 단편 중 아카리가 한 말, “있잖아, 초속 5센티래. 벚꽃이 떨어지는 스피드. 초속 5센티미터”가 작품의 제목이 되었다. 실제로는 초속 1.75m의 상승기류가 낙하를 방해한다는 조건 하에서만 가능한 낙하 속도라지만, 그보다 이 말이 환기하는 바는 사랑과 관련한 어떤 ‘느림’이다. 벚꽃이 사랑이라면 아마 마음에서 서서히 떠나보냄을 의미할 ‘벚꽃의 낙하’는 둘의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면서부터 예고된 일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아카리의 부모님이 도쿄 북쪽의 도치기로 전근 가게 되면서 둘 사이의 거리는 약 150㎞로 벌어진다. 둘은 편지 왕래로 그리움을 쌓아가며 중학생이 되었지만, 1학년을 마칠 때쯤 이번엔 타카키의 집이 일본열도 서남쪽 끝 가고시마로 이사하게 된다. 이사 후 둘의 거리는 약 1500㎞. 타카키는 이사 전에 아카리를 만나러 가기로 결심한다. 이렇게 떨어질 벚꽃이 만개하려 한다. 이탈리아 만화가 마누엘레 피오르의 2011 앙굴렘 최고 작품상 수상작 <초속 5000킬로미터>도 비슷하다.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공동주택에 열여섯 살 루치아네 가족이 이사 온다. 맞은편 집에서 창문을 통해 그녀를 지켜보던 피에로는 어느새 그녀를 마음에 품은 모양새다. 진지하고 명민한 피에로와 달리 활달하고 이성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서곤 하는 친구 니콜라도 그를 부추긴다. 망설이던 끝에 피에로는 우연을 가장해 루치아를 스쳐지나가다 첫 인사를 건네는 데 성공한다. 이후 고교 졸업 다음의 삶을 우스개 삼아 논하는 자리에서 피에로는 니콜라에게 말한다. 만약 그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단한 사람이 된다면, 루치아와 사는 집에 니콜라를 집사로 써주겠다고. 바로 다음 페이지, 이번에는 벚꽃이 아니라 빗줄기가 하나 똑 하고 떨어진다. <초속 5000킬로미터>의 장절을 구분하는 빗줄기다. 장면이 바뀌어 노르웨이 오슬로의 어느 주택에 도착한 택시에서 누군가 내린다. 집 앞에 나와 있던 중년여성이 반가이 외치며 그녀를 맞이한다. “루치아!” 루치아는 입센에 대한 논문을 쓰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자신을 힐데라 소개한 하숙집 주인 여성과 그 아들 스벤과의 첫 저녁식사가 끝날 무렵 전화벨이 울린다. 피에로다. 루치아는 그와 통화를 하다 울어버린다. 중년여성은 말한다. “몸이 멀어지면 더 어려운 법이지. 안 그러니, 스벤?” “그래요, 엄마.” 그 견해가 반갑다는 듯 스벤이 답한다. 그 말뜻보다 더 빠르게, 루치아는 그날 밤 곧바로 이별 편지를 쓴다. “이젠 널 사랑하지 않아.” “멀리 있으니까 말을 꺼내기가 더 쉽다는 걸 알았어.” “너로부터, 이탈리아로부터, 그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기분이었어.” “다시금 숨쉬기 시작한 기분이었지.” 이런 말들이 촘촘히 담긴 편지가 다음날 아침 우체통에 담긴다. 루치아를 우체국까지 차로 태워 온 스벤이 웃으며 그녀를 바라본다. 우체통을 뒤로 하고 돌아선 루치아도 웃음 짓는다. 그리고 똑, 똑. 다음 페이지에선 빗줄기가 둘 떨어진다. 어쩌면 이별을 위해 멀리 떠나왔을 루치아의 이야기 이후로는 남겨져 떠나온 피에로의 삶이 다시금 펼쳐진다. 니콜라의 농담대로 대단한 사람이 된 피에로가 도착한 곳은 이집트다. 그는 오래된 공간을 파헤치는 고고학자가 되어 있다. 신카이 마코토 작가의 애니메이션 의 한 장면 / 에이원 엔터테인먼트 <초속 5센티미터>의 다음 장면에서 타카키는 전차를 타고 도치기로 향하지만 눈으로 연착된 전차는 약속시간을 몇 시간이나 넘겨 밤 늦게서야 아카리가 기다리기로 한 역에 도착한다. 시간에 지면서도 끝까지 온 타카키는 시간을 버티고 추운 역사 안에서 기다렸던 아카리를 마침내 만난다. 하지만 앞으로 둘이 버텨야 할 시간은 몇 시간이 아니다. 이때의 재회와 키스와 이야기꽃을 그려낸 후 1부가 막을 내린다. 2부는 고3 타카키의 이야기가, 3부는 다른 누군가와의 결혼을 준비하는 아카리와 공허한 직장생활을 하던 타카키가 철도 건널목에서 어긋나는 이야기가 담긴다. 시간, 세월의 흐름을 버티지 못한 마음은 머나먼 데서 초속 5㎝로 떨어져 결국 땅에 떨어진다는 걸까. 시공을 가르는 빗줄기가 하나, 둘… 다섯. 그 앞뒤로 배치된 여섯 개의 이야기에서 <초속 5000킬로미터>의 두 주인공은 나이를 먹어간다. 10대, 20대, 30대, 그리고 40대의 그들이 만나고 편지하고 통화하고 재회하기까지, 그들의 마음은 계속해서 시간에 풍화된다. 아마도 초속 5000㎞로 풍화된 마음은 그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것으로 변한다. 이탈리아에 두고 온 애인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 밤 피에로는 곧 아이를 낳을 예정인 루치아가 몇 년 만에 걸어온 전화를 받는다. 발신인은 노르웨이, 수신인은 이집트. 5000㎞에 이르는 거리에 휴대전화 통화에는 1초의 딜레이가 발생한다. <초속 5000킬로미터>로 번역된 제목은 여기서 왔다. “5000킬로미터랑 1초라.” 피에로의 혼잣말처럼 1초를 통해 인식되는 5000㎞의 거리다. 물리적 거리만 아니라 마음의 거리도 시간과 함께 누적되는 것이리라. 발신인은 노르웨이, 수신인은 이집트 두 작품은 거리와 시간이 함께 작용하며 사람들의 사랑이 변화하는 양상을 슬프고 아름답게 담아낸다. <초속 5센티미터>가 그 거리와 시간의 중력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떨어지고자 버티는 마음을 그렸다면, <초속 5000킬로미터>는 거리와 시간의 작동을 못내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사랑이 어떤 모양으로 존재하는지를 묻는다. 물론 이것은 사랑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모든 부분이 거리와 시간 속에서 바뀐다. 거창하게는 최근 남북정상회담이나 북·미 정상회담도 그 틀로 관찰 가능하다. 평범하게는 기러기 가족이나 유학생, 국제결혼한 사람들, 이민자들의 삶도 그렇다. 작은 이야기들을 경유했을 때 비로소 보이는 ‘나’ 역시 마찬가지다. 시간과 공간은 ‘나’와 ‘우리’에게 무엇을 했고, 우리는 그것에 어떻게 대응해 왔을까. 이 시대의 속도를 객관화된 대상으로 두고 그 상대편에 또 객관화된 대상으로 ‘나’와 ‘우리’를 놓을 기회가, 제목에 혹해 두 작품을 펼친 이의 앞에 열린다. 때로 이야기는 이런 일까지 한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을, 그 속도를, 조금은 바꾼다.
만화로 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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