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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세 이상 취업자 23.4%···전체 연령대 중 1위
60세 이상 취업자 23.4%···전체 연령대 중 1위(2024. 10. 22 14:03)
2024. 10. 22 14:03 경제
지난달 60세 이상 고령층 취업자가 전체 연령대에서 1위를 차지했다. 60세 이상 취업자 비중도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10월 22일 중소벤처기업부와 통계청 자료를 보면 지난 9월 60세 이상 취업자는 지난해 동기보다 27만2000명 증가한 674만9000명으로 집계됐다. 역대 최대이며 1982년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50대 취업자(672만명)를 넘어섰다. 60세 이상이 674만9000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 50대(672만명), 40대(619만1000명), 30대(547만3000명), 20대(356만9000명), 15∼19세(14만2000명) 순이었다. 전체 취업자 중 60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율도 23.4%로 역대 최고다. 50대 취업자(23.3%)를 처음 넘어서며 전체 연령대에서 1위를 기록했다. 이어 40대(21.5%), 30대(19.0%), 20대(12.4%), 15∼19세(0.5%) 순이다. 관련 통계가 처음 작성된 1982년 7월 60세 이상 취업자 비중은 6.0%로 20대(26.8%)의 4분의 1 수준이었다. 고령층 취업뿐 아니라 창업도 증가하는 추세다. 올해 7월 창업기업은 9만5000개(부동산업 제외)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1.5% 증가했다. 이 중 창업주가 60세 이상인 창업기업은 1만3000개로 14.6% 증가했다. 창업기업 중 60세 이상 창업 비중도 14.0%로 같은 달 기준으로 역대 최고다. 월간으로도 지난 3월(14.1%)에 이어 역대 2위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인구 고령화에 따른 노동시장 고령화는 갈수록 심화할 수밖에 없어 이들의 노하우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청년 취업 문제 등과도 얽혀 있는 만큼 정년 연장보다 고용 연장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계에 선 청춘의 험난한 취업 여정(2022. 07. 22 11:16)
2022. 07. 22 11:16 사회
한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차별과 배제를 일상적으로 겪는 이주민 2세대가 있다. 본인 또는 부모가 외국으로부터 이주한 경험이 있는 ‘이주배경 청년’이다. 여기서 ‘이주’란 중국, 베트남, 몽골, 러시아 등 외국뿐 아니라 북한으로부터 이주한 사례도 포함된다. ‘이주배경 청년’ 고미르씨(26)가 지난 7월 20일 경기 파주시 월롱면에 있는 회사로 출근하면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박민규 선임기자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다문화정책’은 주로 결혼이민자와 아동·청소년에 초점을 맞춰왔다. 이 접근법은 빠르게 바뀌는 현실을 따라잡지 못한다. 우선 한국에서 태어난 국제결혼가정 자녀뿐 아니라 외국에서 태어나 성장하다 중도에 한국으로 오는 이들의 규모가 커지고 있다. 인구절벽이 본격화할수록 다양한 유형의 이주배경 청년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1990년대 급증한 국제결혼가정의 자녀들이 본격적으로 청년기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 때문에 한국사회가 다양한 이주배경을 가진 청년의 삶에 주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국사회는 이주배경 청년이 언젠가는 사회갈등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전에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겨왔다. 이젠 이주배경 청년의 ‘건강함’에 주목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공존하는 법을 모색할 때가 됐다. 주간경향은 지난 7월 초부터 최근까지 다양한 이주배경을 가진 청년 6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이들을 만나 일자리를 구할 때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경계인’으로서의 고민은 무엇인지 등을 집중적으로 들었다. 첫 진입장벽은 ‘한국어’ 이주배경 청년들이 한국에서 마주하는 첫 번째 관문은 한국어다. 한국에서 태어난 국제결혼가정 자녀에겐 한국어는 ‘모국어’다. 외국에서 태어난 뒤 한국에 중도입국한 이들은 다르다. 이주를 체계적으로 준비하는 과정 없이 부모 제안으로 갑작스럽게 들어오는 사례가 많다 보니 한국어가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 언어를 빨리 배우는 초등학생 연령 때 중도입국해 학교에 다니거나 중국동포(조선족)여서 상대적으로 한국어에 익숙한 경우는 그나마 사정이 낫지만 여전히 한계는 있다. 외국인 가정의 자녀인 김모씨(21)는 중국에서 중학교까지 마치고 2017년 한국에 들어왔다. 당시 중국동포인 부모는 모두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김씨의 방학 기간에 잠시 중국을 찾은 어머니는 딸에게 같이 한국에 갈지, 계속 중국에서 학교에 다닐지 물었다. 김씨는 부모가 있는 한국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김씨에게 한국어는 아주 낯선 언어는 아니었다. “중국에 있을 때 ‘조선족 학교’에 다니면서 한국어도 같이 배웠다. 일상생활에서 한국어로 간단한 소통은 가능한 정도였다. 다만 한국 사람들이 들었을 때 외국인이 한국말을 하는 느낌이었을 거다.” 김씨는 중국에서 중학교를 졸업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학적 서류 준비가 부족했던데다 행정처리에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아 한국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공교육 진입 실패는 중도입국 청소년의 한국어 능력 향상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 김씨는 고등학교 진학 대신 이주배경 청소년 전문 종합사회복지시설인 수원시글로벌청소년드림센터의 도움을 받아 고졸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국무조정실이 2020년 6월 연 제18차 다문화가족정책위원회 회의 자료를 보면, 중도입국 청소년이 학교에 진학하지 않는 비율은 약 30%다. 입학까지 걸리는 기간도 6개월 이상이 약 43%에 이르는 등 공교육 진입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서류 준비에 문제가 없다 해도 개별 학교장이 이주배경 아동·청소년 입학신청을 거부하는 사례도 잦았다. 이에 정부는 당시 회의에서 입학신청 방식을 ‘교육장(시군 단위 교육청장) 배정’으로 바꿔 중도입국 청소년 입학을 학교장이 거부할 수 없도록 했다. 한국어 능력은 이주배경 청년 취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김씨의 말이다. “가장 중요한 게 한국어다. 이주배경 친구 중 한국어를 잘 못하는 친구들은 건설현장 등 의사소통이 많이 필요 없는 쪽에서 일한다. 한국어를 잘하는 중국동포 친구는 대학에 안 다녔지만 보험회사 사무직으로 취업을 했다.” 이주배경 청년들은 자격증을 준비하거나 직장에서 일하는 중에도 한국어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베트남에서 태어난 고미르씨(26)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2014년 말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고씨의 부모는 고씨가 초등학생일 때 이혼했다. 고씨 어머니는 이혼 뒤 한국으로 떠났고, 한국인 남성을 만나 재혼했다. 고씨는 고등학교 졸업 뒤 한국에 오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어머니로부터 받았다. 가족·친구들과 헤어져 낯선 곳에 온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여동생과 함께 경기 파주로 왔다. 새아버지에게 입양된 고씨는 입국 뒤 6개월 만에 귀화시험에 통과했다. 새아버지는 용(龍)을 뜻하는 순우리말인 ‘미르’를 고씨의 한국 이름으로 지어줬다. 고씨는 2016년 한식 조리사 자격증을 준비할 때 장국죽, 비빔밥, 너비아니구이 등 한식 요리 명칭을 익히는 게 쉽지 않았다고 했다. “한국에 오기 전 ‘가나다라마바사’ 정도만 접했다. 한국어가 어려워 자격증 필기시험을 3번이나 봤다.” 2020년 6월 단체급식회사인 아워홈에 계약직으로 입사한 뒤 정규직 전환 시험을 준비하는 것도 또 하나의 도전이었다. “처음 입사 때 계약직과 정규직 차이도 몰랐다. 같이 일하는 여사님들이 (고용형태를) 물어보셔서 내가 ‘정직원이 뭐예요’ 하고 되물어봤다. 나중에 알아보니 정규직 전환 시험이 있었다. 이력서 제출, 인·적성 검사, 1차 면접, 실기시험, 임원 면접 등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베트남어로 하면 바로 이해가 됐을 텐데 한국어로 인·적성 검사를 보려 하니 아주 어려웠다. 집에 책을 사두고 따로 공부도 했다. 인·적성 검사에서 2번 떨어지고 3번 도전 끝에 정규직 전환이 됐다.” 체류자격·국적 취득이 취업의 관건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고 중도입국한 이주배경 청년들이 마주하는 두 번째 관문은 안정적 체류자격 확보 혹은 국적 취득 문제다. 이주배경 청년들은 중도입국 시 대부분 부모의 미성년 자녀 신분으로 한국에 체류한다. 대표적인 비자 유형이 F-1(방문동거), F-2(거주), F-3(동반) 등이다. 문제는 성년(만 19세)이 되면 독자적으로 체류자격을 취득해야 한다는 점이다. 입국 초기나 학교 재학 중 비자 또는 국적 취득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졸업 뒤 취업할 때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기업은 외국 국적자 고용에 따른 복잡한 절차를 피하기 위해 안정된 체류자격이나 한국 국적을 취업 조건으로 요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주배경 청년의 제대로 된 진로·취업에 대한 고민은 안정적 체류자격을 확보하거나 국적을 취득한 후에나 가능하다. 이주배경 청년들이 청소년기에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선택하는 경로는 크게 네가지다.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 대학에 진학해 유학생 자격(D-2 비자)을 얻는 것, 동포 자녀의 경우 자격증을 따서 F-4(재외동포) 등 안정된 체류자격을 미리 확보하는 것, 귀화하는 것 등이다. 이주배경 청년들은 고교 졸업 전 안정적 체류자격 확보를 위해 자신의 진로와 무관한 국가공인자격증 취득에 에너지를 낭비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중국동포 자녀의 경우 자격증 시험에 통과하면 F-4 비자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F-1 비자로 입국한, 중국동포 가정 자녀 김씨의 말이다. “2017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F-1 비자였는데 일정 기간이 되면 중국에 다시 가서 연장하고 와야 해서 복잡했다. 그래서 자격증을 따서 상대적으로 안정된 F-4 비자를 받았다. 2019년 당시 급해서 가장 간단한 걸 선택했는데 세탁기능사 자격증이었다.” 법무부는 올해 1월 3일부터 초·중·고교에 재학 중인 중국 및 고려인 동포 미성년 자녀에게 F-4 체류자격을 부여하기로 했다. 그간 중국 및 고려인 동포 미성년 자녀는 국내에서 고교를 졸업해야 F-4 자격을 받을 수 있었다. 제도 변화에도 불구하고 김씨처럼 ‘학교 밖 청소년’들은 여전히 적용 대상이 아니다. 국적 취득 심사에 적어도 1년 6개월가량의 시간이 걸리는 점도 이주배경 청년이 겪는 난관 중 하나로 꼽힌다. 한창 일할 나이에 손발이 묶여버리기 때문이다. 국민권익위원회가 2018년 8월 실태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이주배경 청소년을 위한 기술전문학교인 제천 한국폴리텍 다솜고 재학생들은 3년간 기술을 익히고 국가공인자격증을 딴 뒤 졸업한다. 귀화 면접시험에 합격한 후에도 법무부 국적허가까지 1년 6개월 이상 걸리기 때문에 졸업과 동시에 취업할 수가 없다. 취업할 수 있는 비자나 한국 국적이 없어 집에서 허송세월하거나 D-2(유학생) 비자를 받기 위해 불가피하게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 이에 권익위는 중도입국 청소년 중 국가공인자격증을 취득하고 귀화시험에 합격한 고등학교 졸업 예정자가 국적 취득 전이라도 취업을 할 수 있도록 제도개선을 하라고 법무부에 권고했다. 법무부는 2019년 3월 ‘예외적 취업’을 허용하기로 했다. 법무부는 지난 7월 18일 주간경향에 보낸 서면 답변에서 “중도입국자녀에 대한 취업은 자격증 해당 분야에만 허용하며, 취업을 위한 ‘체류자격 외 활동허가’는 1회 1년 범위 내에서 부여하고 연장 횟수에는 제한이 없다”고 밝혔다. 법무부 조치가 현장에서 큰 실효성은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변경환 폴리텍 다솜고 교사는 “기업들은 이주배경 청소년들이 국적 취득 전 임시로 받는 비자가 안정적이라고 여기지 않는 면이 있다”고 말했다. 예외적 취업 허용의 대상 역시 제한적이다. 국가공인자격증을 취득하고 귀화시험에 합격한 고등학교 졸업 예정자가 아닌 경우엔 여전히 긴 인생의 휴지기를 견뎌내야 한다. 몽골 출신인 노모씨(29)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12년 초 한국에 있는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대학에 다니려고 한국에 입국했다. 노씨의 어머니는 몽골에서 이혼하고 한국으로 온 뒤 한국인 남성과 재혼했다. F-1 비자로 한국에 온 노씨는 입국 뒤 1년간 대학교 어학당에 다니면서 한국어를 공부했고, 2013년 서울 소재 대학 정치외교학과에 외국인 전형으로 입학했다. 입국하자마자 새아버지에게 입양됐던 노씨는 2018년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해 6월 특별귀화 신청을 했다. 이후 체류자격은 D-2에서 F-1으로 다시 바뀌었다. 당시 노씨는 미성년은 아니었지만, 국적 심사 결과를 기다리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법무부가 F-1 비자를 발급한 것으로 보인다. F-1 비자는 취업이 불가능한 비자 유형이다. 국적 심사가 마무리된 게 지난해 초였으니 거의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노씨의 말이다. “1년 6개월 정도면 된다던데 코로나19 때문인지 3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기다리는 동안 스트레스도 받고 많이 힘들었다. 가끔 자다가 일어날 정도였다. 대학 졸업 뒤 경력이 많이 단절됐다. F-1 비자여서 아르바이트조차 할 수 없었다.” 이주배경 청소년 교육지원사업인 ‘레인보우스쿨’에 참여 중인 이주배경 청소년들이 지난 5월 서울 문래동에 있는 이주배경청소년문화교류센터 ‘투소프카’에서 진로탐색 교육을 받고 있다. / 투소프카 제공 바늘구멍인 ‘전문직 취업’ D-2 비자 소지자가 대학·대학원을 졸업한 뒤 취업할 수 있는 분야는 E-7(특정활동) 비자를 받을 수 있는 전문 분야로 한정된다. 고용허가제 E-9(비전문취업) 비자로 입국한 이들과 다른 트랙이기 때문이다. 이주민센터 ‘친구’의 이진혜 변호사는 “E-7은 요건이 너무 까다로워 받기가 힘들다. 무역 등 꼭 필요한 분야가 아닌 이상 한국 회사들이 굳이 외국인 채용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몽골에서 온 A씨(27)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하던 부모의 권유로 한국에 왔다. 한국어를 전혀 몰라 학교 입학 뒤 수업 내용을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어린 나이에 온 만큼 빨리 한국어를 익히게 됐다. A씨는 한국 생활에 익숙해진 중학교 2학년 때 부모, 자매와 함께 다시 몽골로 돌아갔다. 한국에 함께 왔던 언니가 대학에 입학할 시기가 된데다 동생이 모국어인 몽골어를 잘 모르는 게 걱정됐던 부모가 몽골로 돌아가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A씨는 몽골에서 대학까지 졸업한 뒤 2017년 한국에 다시 돌아와 대학원(한국어교육학)에 입학했다. 좋은 기억이 있던 한국에서 정착하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2020년 대학원을 졸업하고 체류자격을 D-2에서 D-10(구직)으로 바꾼 뒤 본격적으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D-10 비자는 인턴으로만 일할 수 있는 비자 유형이다. D-10 비자 소지자는 E-7에 해당하는 직종에 취업이 확정되면 비자 변경 절차를 밟을 수 있다. A씨는 몇군데 인턴을 거치긴 했지만 E-7으로 비자를 바꿀 수 있는 직장을 찾지 못했다. D-10 비자의 만료 기한이 어느새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최근 면접을 본 곳에선 일주일이 넘도록 연락이 없는 상태다. “외국인이고 경력도 없다 보니 한국에서 일자리 찾는 게 어렵다. 취업할 수 있는 곳도 외국인 의료 코디네이터 등 제한적이다. 한국이 좋아서 대학 졸업 뒤 석사 과정으로 오게 됐다. 출입국관리소가 지나치게 까다롭게 구는데다 취업도 쉽지 않으니 한국이 점점 싫어진다. ‘타지에서 사는 게 역시 힘들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주배경 아동·청소년이 아닌 청년에 대한 지원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강은이 시흥시 가족센터장은 “이주배경 청년들은 특출난 재능이 있거나 죽어라 열심히 살지 않는 한 한국사회에서 기회를 잡기가 정말 어렵다”며 “생존(체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선 ‘꿈이 뭐고, 어떤 일을 하고 싶고, 무슨 직장에서 일하고 싶은지’를 묻는다는 게 뜬구름 잡는 일 아닌가라는 고민을 현장에서 많이 한다”고 말했다. 국적을 취득해도 이주배경 청년이 안정적이고 전망이 보장된 일자리를 찾기는 쉽지 않다. 몽골 출신인 노씨는 국적을 취득하고 지난해 7월부터 인터넷 쇼핑몰 MD(상품기획책임자)로 일을 시작했다. 오랫동안 일할 수 있는 곳도 아니고 정체된다는 느낌이 들어 8개월 만에 사직했다. 올해 4월부터는 다른 인터넷 쇼핑몰에서 물류 담당 업무를 맡고 있다. 그는 “이주배경 청년을 받아주는 곳들이 있는데 노동환경이 좋지 않고 오래 일하기 어려운 곳들이다. 지금 일도 장기적 전망이 있는 일자리는 아니다”며 “무역 분야 일을 해보고 싶다. 스펙을 보강한 뒤 중견기업에 지원해보려 한다”고 말했다. 이주배경 청년의 강점은 두가지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노씨는 몽골어 구사 능력을 활용하는 일자리를 찾는 게 쉽진 않았다고 했다. “처음엔 이것저것 알아봤는데 몽골 출신이 할 수 있는 일이 한정적이었다. 한국과 몽골 간 교류가 활발한 편은 아니기 때문이다. 몽골에서 온 환자 통역을 하는 의료 코디네이터 정도를 빼곤 딱히 찾기가 어렵더라.” 노씨는 취업에 유리한 이공계 전공을 선택하지 않은 게 가장 후회된다고 말했다. “내 전공인 정치외교학과는 문과이지 않나. 이과 쪽으로 갔으면 이주배경 청년이라 해도 수요가 있었을 텐데….” 제천 한국폴리텍 다솜고 학생(파키스탄 출신)이 컴퓨터설계(CAD) 실습을 하는 모습 / 폴리텍 다솜고 제공 정보 부재로 인한 시행착오 이주배경 청년들은 자신의 진로, 취업 등의 정보를 구체적으로 얻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다 보니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겪지 않아도 될 시행착오를 거치는 사례가 많다. 중국동포 자녀인 김씨는 검정고시로 고교 졸업자격을 얻은 뒤 안산에 있는 전문대학 호텔경영학과에 2020년 입학했다. 졸업을 앞둔 지난해 말 김씨는 수원에 있는 한 호텔에서 채용면접을 봤다.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고 출근한 첫날 김씨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단순노무직 취업이 불가능한 F-4 비자로는 호텔 식음료 서비스 파트에서 일할 수 없다는 통보였다. “출근 첫날 체류자격 등과 관련된 서류를 제출했다. 호텔 직원이 ‘F-4 비자네요? 우리는 한국 국적을 딴 것으로 알았어요. 죄송해요’라고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라 충격을 받았다. 호텔 관련 학과를 나왔는데 호텔에서 일할 수 없다고 하니 막막할 뿐이었다. 일자리를 소개해준 교수님도 처음 아셨다고 하더라.” 김씨는 호텔 채용이 취소된 뒤 수원 집 근처에 있는 한 휴대전화 매장에서 일하면서 취업 분야 제한이 없는 F-5(영주권) 비자 취득을 준비 중이다. 그는 “비자 문제가 해결되면 이중언어 구사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호텔의 문을 다시 두드려보고 싶다”고 말했다. 베트남 출신 고씨 역시 아워홈에 입사하기 전까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는 2016년 말 한식 조리사 자격증을 따자마자 파주 롯데아울렛에 있는 한식집, 김포에 있는 고깃집 등에서 3년간 일했다. 주 6일, 하루 12시간씩 장시간 노동을 했지만 매달 210만~240만원의 임금만 손에 쥐었다. 고씨는 2년간의 장거리 연애 끝에 고교 친구였던 베트남 여성과 결혼을 했다. “결혼 뒤 가족과 지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하루 8시간 일하는 곳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식당에서 일하던 3년간 배운 메뉴도 많이 없고 시간을 낭비했다. 처음 일자리 구할 때 여러 정보도 찾아보고 고민을 하지 않으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다.” 외국인(중국동포) 가정 자녀 정모씨(23)는 대학 전공과 졸업 뒤 일자리 간 연계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례다. 정씨는 2016년 6월 중국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한국으로 이주했다. 12년 만에 온 가족이 한국에서 함께 살게 됐다. 정씨는 입국 뒤 이주배경 청소년 교육지원사업인 ‘레인보우스쿨’에서 한국어·한국문화를 익히고 이듬해 서울다솜관광고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이주배경 청소년을 대상으로 3년간의 직업교육을 하는 공립 대안학교다. 정씨는 2020년 선생님이 되겠다는 마음을 먹고 한국외대 사범대학 한국어교육과에 입학했다. 이 학과에선 국어교육,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어교육 두 분야를 수강하면 교사자격증 2개를 받을 수 있다. 정씨의 말이다. “막상 저의 국어 지식으로는 국어교육 교원자격 취득이 어렵다는 걸 알게 됐다. 국어교육 수업은 2학년 때부터 듣지 않았다. 지금도 진로 때문에 고민이다. 중국동포라 한국어 발음이 불완전해 한국에서 한국어교사로 일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이주배경 청년으로선 진학, 취업에 대한 체계적 정보를 얻기가 어렵다.” 국내 출생 국제결혼가정 자녀 이주배경 청년 중 한국에서 태어난 국제결혼가정 자녀의 경우 중도입국한 청년과 달리 한국어, 국적 취득 문제 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는다. 이들은 자신이 아닌 부모에게 이주의 경험이 있을 뿐이다. 이들 역시 한국사회에서 차별에 노출되거나 진학, 취업 등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례는 있다. 울산에서 태어난 안혜진씨(26)는 어머니가 결혼이민자(베트남 출신)다. 학교 다닐 때 간혹 친구들이 “베트콩”이라며 놀리기도 했지만, 노골적인 차별을 겪진 않았다. 안씨는 어머니 배려로 학창 시절 방학 때 베트남 외갓집에서 지내면서 베트남어를 익힐 수 있었다. ‘이중언어 구사’라는 강점을 살려 부산외대 베트남어과에 입학한 안씨는 2018년 졸업 뒤 일주일 만에 한국 섬유회사의 베트남 현지 사업장에서 일하게 됐다. “영업 파트로 들어갔는데 통·번역 등 갖가지 일까지 저에게 몰리다 보니 힘들어서 6개월 만에 그만뒀다. 이후 베트남에서 식당 매니저 등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한국에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019년 초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안씨는 방송국 통·번역 업무, 섬유회사 영업파트 등에서 일했다. 현재 지인의 회사에서 수입차 부품 견적을 주문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안씨는 국내 출생 국제결혼가정 자녀가 모두 이중언어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나는 이주배경이 강점으로 작용한, 운이 좋은 경우다. 사실 대부분은 그냥 한국인으로 살기 때문에 두가지 언어를 하지 못한다.” 변경환 교사는 한국에서 태어난 국제결혼가정 자녀들은 가정환경 때문에 방치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폴리텍 다솜고 입학생을 보면 중도입국 자녀가 60%, 한국에서 태어난 국제결혼가정 자녀가 40%다. 후자의 경우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자녀들이 적지 않다. 어머니가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를 낳고 한국어가 조금 익숙해질 때쯤이면 일하러 나가기 때문이다. 부모가 학업에 신경을 써주지 못하다 보니 고등학교 시기가 되면 비(非)이주배경 청소년과의 격차가 커진다. 이게 진로에까지 연결이 된다.”
표지 이야기
[우정 이야기]빚을 진 청년들에 빛이 될 ‘취업이룸통장’(2021. 11. 26 20:57)
2021. 11. 26 20:57 경제
우체국 취업이룸통장 출시 홍보 포스터 / 우정사업본부 제공 우정사업본부는 구직 중인 청년이 정부로부터 받는 수당을 압류당하는 일이 없도록 압류 방지 전용 ‘우체국 취업이룸통장’을 11월 22일 출시했다고 밝혔다. 고용노동부로부터 구직촉진수당, 취업활동비용, 취업성공수당 등을 받는 청년이라면 우체국에서 1개 계좌를 개설할 수 있다. 신분증과 함께 고용노동부에서 발행한 ‘수급자격 인정 통지서’를 지참하고 가까운 우체국을 방문하면 된다. 이 통장엔 고용노동부에서 받는 수당만 입금할 수 있다. 취업이룸통장은 구직자취업촉진법에 따라 우체국을 비롯한 11개 은행이 동시에 출시했다. 신용불량 등 사유로 통장이 압류된 청년은 안 그래도 형편이 어려운데 정부가 주는 수당까지 받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마련된 제도다. 시민단체 건강세상네트워크는 월 건보료 5만원 미만의 ‘생계형 체납자’가 216만 세대, 최소 405만명에 달한다고 본다. 장기 체납자 중에는 20대 청년도 많다. 우체국 취업이룸통장이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청년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 보다 근본적으로 사회 초년생이 이런 빚을 져야 하는 상황에 대한 해결책이 더 많이 논의되면 좋겠다.
우정이야기
해외취업선원 산재, 도움 구할 곳 없었다(2021. 05. 17 15:07)
2021. 05. 17 15:07 사회
ㆍ호주에서 사고 당한 이상국씨, 2년 넘게 혼자 싸워 검찰 기소 이끌어내 2019년 3월 12일, 8만t 규모의 대형선박에서 일하던 이상국씨(31)는 사고로 발가락 10개를 모두 잃었다. 당시 호주 멜버른 부두에 정박한 선박에서는 체인블록(거중기)을 이용한 엔진 부품 정비 작업이 한창이었다. 거중기 아래에는 기관장과 이씨를 비롯한 선원들이 있었다. 이씨는 취업한 지 한달도 되지 않은 3기관사였다. 경기 평택항에 정박해 있는 한 대형 선박이 매연을 내뿜고 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 없음) / 연합뉴스 거중기가 6t 무게의 엔진 부품을 끌어올릴 때였다. 거중기에 달린 체인이 끊어지면서 부품이 이씨의 발 위로 떨어졌다. 너무 순식간이라 피할 새도 없었다. 발가락 10개가 잘렸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필리핀 국적의 선원 두명이 들 것을 가져왔다. 이씨는 호주의 한 병원으로 후송됐다. 배가 정박한 상태에서 일어난 사고라 빠른 후송이 가능했다. 하지만 부품에 깔린 발가락들은 챙기지 못한 상태였다. 기관장은 이씨에게 “걱정하지 마라. 발가락을 붙일 수 있게 빨리 가져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발가락이 도착한 건 10시간 가까이 지나서였다. 그마저도 이씨가 호주에 있는 한국영사관에 도움을 요청한 후였다. 의사는 안전화에 들어 있는 발가락 상태를 보더니 “너무 늦었다”고 말했다. 잘 알려지지 않는 해외취업선원 사고 작업을 서두르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던 사고였다. 이씨는 “그날 전문 엔지니어가 오기로 돼 있었는데, 엔지니어가 오기 전에 무리한 사전작업을 하다가 사고가 났다”고 말했다. 게다가 승선경험이 부족한 이씨는 보조업무를 하던 중 갑자기 해당 작업에 투입됐다. 별다른 안전 지시는 없었다. 이씨와 같은 해외취업선원의 산업재해는 잘 알려지지 않는다. 일단 종사자 수 자체가 적다. 맹성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해양수산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해외취업선원은 2018년 2956명, 2019년 2909명, 2020년 2530명이다. 전체 취업자의 0.01% 수준이다. 수가 적다 보니 문제 제기를 해도 해결을 위한 동력을 얻기 힘들다. 배라는 공간의 특수성도 산재가 잘 알려지지 않는 요인 중 하나다. 사고가 나도 곧장 뭍으로 돌아갈 수 없고, 통신의 어려움으로 당사자가 어디에 알리기 어렵다. 선원 근로감독관이 있지만 배가 한국에 정박해 있지 않는 한 사고 직후의 현장조사는 불가능하다. 사고 신고의 주체도 당사자가 아닌 회사다. 선원법 제82조는 “선박 소유자는 선원의 직무상 사고 등이 발생했을 때는 해양항만청에 보고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배에서 17년을 근무한 A선장(51)은 “선장이 사고경위서를 쓴다. 하지만 선장의 관리감독 책임이 있기 때문에 사실대로 쓰지 않고 합의를 종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사고 이후 발가락이 잘린 이씨의 발 엑스레이 사진 / 이상국씨 제공 사고도 억울한데 직장까지 잃어 법률사무소 보다의 정소연 변호사는 “지켜보는 눈이 적지 않은 건설현장이나 지역 공장에서도 산재가 은폐되는 경우가 많다. 지역마다 법률구조공단이 있고 지정된 근로감독관이 있어도 포착하기가 어려운데 배 위는 오죽하겠나”라며 “외부에 알릴 시기를 놓치거나 그 시기를 기다리다가 회사와 합의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렇다 보니 사고를 당한 선원은 어디에도 도움을 청하기 어려운 처지가 된다. 첫 수술이 끝나고 깨어났을 때, 이씨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했던 배는 이미 호주를 떠난 상태였다. 이씨가 한국의 선박관리회사에 전화해 따지자 ‘선주와 이야기해 잘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씨가 탄 배의 선주·선사는 일본, 선박은 라이베리아 국적이다. 그러나 며칠 뒤 이씨가 받은 것은 고용보험 상실 통지서였다. 통지서에서는 ‘근로자의 귀책사유에 의한 징계해고, 권고사직’이라고 쓰여 있었다. 또 회사는 하지도 않은 ‘안전교육’을 했다는 서류를 뒤늦게 작성했다. 안전교육 서류에는 이씨의 서명이 조작돼 있었다. 원칙대로라면 기관장과 1기관사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 작업에 관한 위험성 평가를 실시하고 이를 선장에게 보고해 최종 승인을 얻어야 한다. 실습항해사 과정을 마친 B씨(34)는 “배에서는 엄청 신경을 써도 자칫하면 사고가 발생하기 때문에 작업 전에 위험 요인 목록을 만들어 공유한다”고 말했다. 이씨가 사고를 당한 작업에서는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이씨는 “사고를 당한 것도 억울한데 순식간에 직장까지 잃고, 또 모든 게 제 탓으로 돼 있었다”고 말했다. 호주에 홀로 남은 이씨는 고용노동부, 해양수산부, 국민권익위원회 국민신문고 등에 자신의 상황을 알렸다. 돌아온 답은 한결같았다. 노사합의에 따른 치료비와 보상금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선원은 근로기준법이 아닌 선원법 적용을 받고 해외취업선원은 선원법에 준하는 노사합의 적용을 받는다. 이씨가 궁금했던 건 치료비나 보상이 아니었다. 왜 이 과정에서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지, 다친 사람만 다른 나라에 내버려두면 사건은 끝나는 건지 등이다. 이씨는 배를 소유한 일본 회사, 자신을 고용한 한국 선박관리회사, 지시를 내린 선장과 기관사 등 누구에게서도 사과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선박관리회사는 이씨에게 “항만청과 해경에 무슨 서류를 줬는지 모르겠지만 (중략) 민원을 취하해달라”며 수차례 요구했다. 결국 그는 혼자 사고의 책임을 묻는 싸움에 나섰다. 호주에서 치료를 받는 상황이라 도움을 청할 노무사나 변호사는 없었다. 형법, 선원법을 공부하며 증거를 모았다. 지난 4월 16일 검찰은 선장, 기관장, 1기관사 등을 업무상과실치사, 사서명위조, 위조사서명행사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사고가 난 지 2년 만이다. 검찰조사 과정에서 이씨가 처음 문제를 제기한 것 외에 ▲선장이 위험성 평가 업무를 기관장에게 전적으로 맡겨두고 전혀 확인하지 않았으며 ▲문제의 거중기가 품질·안전인증서조차 없이 선주사로부터 공급받은 중국산 저가라는 사실 등이 드러났다. 또 선박관리회사는 안전교육 서명 조작과 관련해 이씨에게 “선주에게 보고하는 것인데 당사자(이씨)가 없어서 임의로 서명을 했다. 이건 내부 보고용이지 외부용이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공소장에 따르면 기관장과 1기관사는 조작된 서명을 호주 해양안전청 조사관에게 제출했다. 만약 사실대로 사고경위서를 조사관에게 제출했다면, 이들은 호주에 남아 조사를 받아야 한다. 선주나 선사 외국이어서 포기하기도 이씨는 자신의 사건을 두고 ‘나쁜 사례’라고 말했다. 선장 등이 기소됐지만 몇년 동안 혼자서 싸우는 게 아니라 그러지 않을 수 있도록 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간 이씨는 절단과 피부이식 등 6차례의 대수술을 받았다. 사고와 그 이후의 스트레스로 수면제를 복용하지 않고는 잠을 자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런 사고가 땅에서 일어났다면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하고 근로감독관이 사업장을 확인할 수 있다. 회사를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노동청에 고발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해외취업선원은 선원법에 준하는 보상과 개인 소송 외에는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사실상 없다. 그마저도 소송도 선주나 선사가 외국 회사거나 선장이 외국인인 경우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이씨도 부당해고와 관련해 선박관리회사를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했으나, 선박관리회사는 선주의 대리인일 뿐 직접 계약을 체결한 당사자는 선주이기 때문에 일본 선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라는 답을 받았다. 이렇게 되면 당사자가 느끼는 어려움은 확 커진다. A선장은 “사고를 당해도 대부분의 선원이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정소연 변호사는 “선주나 선사가 외국 회사거나 선장이 외국인이어도 한국에서 소송을 진행할 수 있다. 섣불리 포기하지 말고 법적 대응을 고려해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국해상선원노동조합연맹 관계자는 “정부에서 해외취업선원들이 겪는 고충을 파악해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한국 선박관리회사가 4대 보험을 납부하고 한국인 선장, 기관장에게 업무 지시를 받았는데 우리를 보호해주는 법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씨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선장, 기관장, 1기관사와 관련된 재판 결과가 나오면 이를 공증번역해 호주 해양안전청 자료를 바로잡을 계획이다. 호주 해양안전청에는 여전히 이씨의 잘못으로 사고가 난 것으로 돼 있다. 또 일본 선주와 선사에도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예정이다. 이번 사건 첫 공판은 오는 5월 2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열린다.
표지 이야기
[표지 이야기]질본 무기계약직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2020. 06. 19 15:24)
2020. 06. 19 15:24 사회
ㆍ새 보수체계 적용으로 임금 줄어… 노조 임금체불 소송 검토 정부가 채용한 무기계약직 직원 처우를 둘러싼 잡음은 보건복지상담센터만의 일이 아니다. 복지부 산하 질병관리본부(이하 질본)에서도 논란이 일었다. 질본에는 2017년 5월 이전에 채용된 무기계약직 직원 11명이 있었다. 이들의 보수체계는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공무직이 된 무기계약직 직원들과 달랐다. 질본은 2019년 6월 기존 무기계약직 직원들에게 2017년 5월 이후 적용된 공무직 보수체계로 통합·변경하는 안을 제안했다. 이는 기존 무기계약직 직원들의 처우를 낮추는 안이어서 문제가 됐다. 충북 오송 질병관리본부 청사 전경 / 연합뉴스 무기계약직 직원 일부가 속한 전국보건의료산업노조에서는 질본의 보수체계 변경 시도를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이라고 봤다. 노조에 따르면 기존 무기계약직 직원마다 편차는 있지만, 보수체계 변경 시 향후 10년치 급여 총합이 1000만원가량 줄어들 가능성이 컸다. 당장 올해 임금이 줄어든 기존 무기계약직 직원만 3명이다. 노조 측은 2019년 11월 고용노동부에 질본의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동의 방식에 하자가 있다며 진정을 냈다. 노조 측 대리를 맡은 임청아 노무사(노무법인 승)는 “향후 지급받는 총급여가 줄어드는 등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에 대해서는 사측과 노측 모두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동의 방식을 두고 다퉜다”고 했다. 노동부 “위법 소지가 없다” 기존 무기계약직 직원들은 질본이 세 차례나 개별적으로 직원들과 접촉해 보수체계 변경 동의를 받으려 한 점을 문제 삼았다. 질본 측은 2019년 6월 21일과 24일 문자메시지, 사내 메신저로 기존 무기계약직 직원들과 개별 접촉해 보수체계 변경을 시도했다. 같은 해 9월 24일에는 질본 측이 일부 직원을 개별적으로 찾아가 ‘보수체계 변경 동의서’에 서명을 받았다. 당시 질본이 만든 동의서를 보면 계약 변경에 대한 개별 동의인지,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에 동의하는 것인지를 묻는 구체적인 질문은 빠져 있다. 근로기준법 제94조1항은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시 노동자 과반수의 동의를 받도록 규정한다. 대법원 판례를 보면 노동자 과반수 동의는 사용자 측 개입이 배제된 노동자들의 회의로 결정돼야 한다. 노동부는 지난 3월 “위법 소지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노동부 판단이 3개월 가까이 지체된 사이 질본이 기존 무기계약직 직원들의 과반수 동의를 받아낸 점이 인정됐다. 기존 무기계약직 직원 11명 중 9명이 동의서에 사인했다. 노조 측은 “사측의 지속적인 회유와 압박으로 다수 직원이 찬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주장했다. 질본 측은 “비슷한 업무를 하는 직원들 사이 형평성 문제를 해소하는 차원의 조정이었고, 근로감독관의 감독 아래 정상적으로 과반수 동의를 얻었다”고 밝혔다. 노조는 무기계약직 직원들의 임금체불 소송 진행도 검토하고 있다. 새 보수체계 적용으로 줄어든 임금을 체불로 보고 소송을 제기하는 방식이다. 임청아 노무사는 “새로운 제도 적용 이후 3~4년 이후 불이익이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으로 본다. 불이익이 드러난 시점에 임금체불로 문제 제기하는 방법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표지 이야기
[골목 내시경]강남역 골목-취업·스펙·허영·향락 뒤섞인 ‘욕망의 거리’(2020. 02. 14 15:49)
2020. 02. 14 15:49 사회
서울 강남역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역동적인 곳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지하철 2호선과 분당선 강남역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테헤란로로 이어지는 상업지구와 서쪽 서초동 법조타운으로 연결되는 관문이다. 아침이면 출근하는 직장인과 수도권 남부지역 대학 등교버스에 오르는 학생들과 인근 학원으로 등교하는 재수생들, 낮이면 어학원과 유학원에서 내일을 위해 공부하는 청년들, 저녁이면 각종 자격증학원에서 배우는 젊은이들로 붐빈다. 밤이 되면 클럽과 유흥가가 흥청망청이고, 심야까지 차를 잡기 위해 거리는 전쟁터가 된다. 강남역엔 우리 시대 번영과 고민이 몰려 있고, 골목길엔 그 그림자가 짙게 도사리고 있다. 강남 일대가 허허벌판이던 1970년대 말까지 이 지역은 뉴욕제과와 제일생명 건물만이 좌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골목이랄 것도 없었고 멀찍이 들어선 아파트 몇 채와 한참 건설 중인 상가건물만 보일 뿐이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강남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잡고 서초동에 법조타운이 들어서면서 강남역 일대는 불타올랐다. 골목엔 주점과 유흥가가 빈자리가 없이 번창했다. 지금도 강남역 골목길에는 당시 지어진 건물 몇 채가 남아 있어 주변에 새롭게 지은 빌딩들과 명백한 대비를 이룬다. 서초동 법조타운 들어서며 번창 강남역 일대의 골목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것은 젊은층이다. 골목길마다 어학원·유학원·취업학원이 번창하고 있다. 길가에 어학원 안내판을 든 사람들이 드물지 않게 있고, 어떤 건물엔 10개가 넘는 유학원 간판이 붙어 있다.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좋은 대학을 나오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외국어 몇 개쯤은 술술 할 수 있어야 하며 해외연수도 빠뜨리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그 밖의 자격증도 따두어야 하는 것일까. 그런 무거운 갑옷을 갖춰 입고 취업의 전쟁터에 나가서 살아남기 위해 청춘은 강남역 골목길을 바삐 오가고 있다. 젊은 취향과 유행의 중심지가 강남역 일대이다. 과거 랜드마크였던 뉴욕제과와 제일생명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지금은 대형 어학원 건물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영어만으로 부족해 중국어를 배우고 프랑스어나 스페인어를 배우는 젊은이들도 많다고 한다. 골목 안 유학원 옆에는 워킹홀리데이로 일하면서 외국어도 배우라고 권하는 소개소도 보인다. 그 한편으로 낮시간 굳게 문을 닫은 클럽은 무료입장 이벤트 광고판을 요란하게 붙여놓고 있다.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상표가 골목길을 온통 덮고 있다. 지금 청년들의 부모들도 아련하게 기억할 만한 오래전의 추억들을 파는 목로주점도 눈에 띈다. 최근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일식 주점들도 골목 안에 가득 차 있다. 강남역 뒷골목 전당포는 명품만을 취급한다고 했다. 예전처럼 카메라 따위는 잡지 않고 고급 차나 명품 아니면 귀금속만을 다룬다. 면접용 정장을 빌려주거나 팔고 있는 전문점도 있다. 반드시 합격한다는 보장이 없으니 옷을 빌려 입고 면접장을 들어서야 하는 사정을 안쓰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젊은이들에겐 빌리는 것이 오히려 편하단다. 종업원 이야기로는 직업과 사업장별로 면접관들이 좋아할 만한 분위기를 골고루 갖추고 있어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각종 어학원과 취미학원이 강남역 골목에 몰려 있다. 파고다어학원 뒷골목부터 교보타워에 이르는 길은 골목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화려한 건물이 올라가 있다. 간간이 남아 있는 강남 개발 초창기의 상가건물 대부분은 재건축을 앞두고 있단다. 부동산 중개업자는 “연건평을 두세 배로 늘려 높이 지을 수 있다. 건물주들이 대부분 큰손이라서 돈에 구애받지 않고 건물을 짓는다”고 설명했다. 오피스텔이건 사무실이건 수익률이 높고 공실률도 낮아 물건을 잡기가 바쁘다고 한다. 부동산 업소마다 24시간 상담, 심야 출장상담이라고 붙어 있는 것도 이 동네 부동산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강남역 11번 출구 뒤편 골목의 이름은 여명길이다. 골목은 상대적으로 오밀조밀한 건물들이 줄지어 있고, 어학원과 가게들도 건너편과는 규모의 차이가 있었다. 골목 어귀에는 멀티방 홍보를 위해 광고판을 메고 전단을 나눠주는 아주머니들의 모습도 흔하다. 오가는 젊은이들을 이끄는 호객도 자연스럽다. 멀티방이 뭐냐고 묻자 “영화도 보고 게임도 하고, 쉬었다 갈 수도 있고, 여러 가지가 가능한 곳”이라며 웃는다. 방에서 무엇을 하건 이용하는 사람 마음이라고 한다. 노래방도 코인노래방이 대부분이고, 한참 유행하던 ‘방 탈출 게임방’도 곳곳에 있다. 요즘 젊은이들이 뭘 먹고 무엇을 입으며 어떤 것을 즐기는지 알고 싶으면 단연 이 골목을 한 바퀴 둘러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대형 스파 매장과 운동화 가게들이 줄지어 있고 카페들은 ‘양궁카페’니 ‘타로사주카페’ 등 특색 있는 업소들이 많았다. 간간이 ‘고양이카페’도 여럿 박혀 있다. 역시 지금은 고양이의 시대임이 분명하다. 점심시간 간단히 요기를 때울 푸드트럭이 골목의 명물이다. 유학원에서 내건 간판들도 예전과는 분명 달라졌다. 과거 미국 유학이 주류였다면 요즘엔 덧붙여 중국 대학을 내건 곳도 많았다. 중국 대학의 출장 입시시험장 간판을 내건 곳도 여럿 있었다. 국내 대학엔 중국인 유학생들이 몰려오고 있고, 중국 대학엔 한국인 유학생들이 몰려가고 있는 셈이다. 토플과 토익 등이 익숙한 세대에 중국어 능력평가시험 안내는 낯설어 보인다. 한동안 유행하던 일본 유학원 자리를 중국 유학원들이 대체하고 일본어 능력평가시험과 더불어 중국어도 국내에서 시험을 치는 시대가 됐다. 곳곳에 훠궈집과 마라탕을 파는 식당이 번창하는 것은 덤이다. 양궁카페·타로사주카페·고양이카페 강남역에서 국기원으로 올라가는 골목길은 고급주택가가 밀집한 곳이다. 상업지대가 점점 주택가까지 밀고 들어가 개성 있는 카페들이 하나씩 자리 잡고 있다. 젊은이의 눈길을 끌 수 있는 디자인 카페나 즐기고 쉴 수 있는 웹툰 카페도 보이고, 이국풍의 가게들도 자리 잡고 있다. 강남역 일대 골목은 현재 청년문화의 나침반이다. 방송·연예 학원과 댄스학원, 음악원이 많은 것도 강남역 골목길의 특색이다. 이 길목에서 오가는 선남선녀들에게 명함을 건네며 길거리 캐스팅을 빌미로 호객하는 일도 잦다고 한다. 설레는 마음에 무대의 주인공이 될 기대로 상담을 받다보면 성형에 얼마가 필요하고, 곡을 받는데 또 얼마가 있어야 하며 연기와 노래지도를 받는 데 드는 비용, 더불어 안무비용 등의 청구서가 줄줄이 뒤따른다. 그러나 정작 주인공이 될 만한 사람에겐 그런 청구서가 필요치 않을 것이다. 젊은이들의 등을 밟는 먹이사슬의 덫도 강남역 골목길 일대에 널려 있다. 점심시간 즈음 여객기 객실승무원 복장의 젊은이들 여럿이 눈에 띈다. 그들이 나온 건물엔 승무원 학원 간판이 붙어 있다. 수업과정 중에 유니폼을 입는 것도 들어 있단다. 건너 건너서 물어보니 학원 비용도 만만치 않다. 강남역 골목마다 붙어 있는 취업을 위한 직업학원·자격증·외국어·유학원·멘토링 상담소 등을 보니 요즘 청년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사는지 실감이 난다. 현실은 지옥이고 취업은 건너야만 할 극락의 강인가 보다. 취업을 위해 필요한 것은 기술과 스펙만이 아니다. 이 시대는 용모 또한 재능으로 강조한다. 강남역 일대의 성형외과들은 주로 취업을 위해 용모를 바꾸는 데 특화되어 있다고 광고한다. 얼굴을 바꿔야 팔자가 바뀌는 것일까. 그 많은 학원과 성형외과와 미용실과 옷가게 사이로 정신건강 클리닉이 오아시스처럼 아픈 마음을 기다리고 있다. 밤이 되면 강남역 일대는 현실을 잊는다. 닫혔던 클럽문이 열리고 주점마다 떼 지어 몰리는 손님을 맞는다. 단체석을 강조하는 간판들이 술집 문 앞을 장식하고 있다. 이 동네 분위기는 주로 떼를 지어 퍼마시는 것인가 보다. 테헤란로 쪽에서 몰려오는 직장인 무리와 학원을 마친 젊은이들, 하교버스를 타고 돌아온 대학생들, 간간이 재수생들 무리, 그리고 강남역에서 약속을 잡은 청년들이 술집에 합류한다. 좁은 골목이 미어터지고 요란히 꾸민 외제차를 몰고 골목골목을 누비는 젊은이는 엔진 소리를 높인다. 삐끼들은 젊은 회사원 무리를 따라붙어 열심히 흥정에 바쁘다. 어디서 왔는지 꽃과 같은 젊은이들이 도도하게 고개를 세우고 술집 사이를 활보한다. 강남역의 밤은 언제나 불타고 있다. 어학원·연예학원·댄스학원·음악학원 자정 무렵 강남역을 지나쳐본 사람이라면 질서가 사라진 종말의 세상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골목마다 자신이 먹은 안줏거리를 다시 확인하느라 고개 숙인 사람들과 분노에 찬 악다구니. 비틀거리며 모텔로 사라지는 남녀의 급한 걸음이 눈에 띈다. 좁은 골목은 이미 꼬여버린 차와 차로 가득 찼고 노여운 경적이 허공을 메운다. 길가엔 경계석에 주저앉아 넥타이를 풀고 있는 직장인도 보이고, 이리저리 차를 잡겠다고 비틀비틀 뛰어다니는 걸음도 있다. 분당이며 용인으로 가는 광역버스들은 중앙차로를 메우고 거기에 택시와 차량이 온통 뒤섞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너무나 멀어 기약이 없다. 강남역 일대는 늘 분주하다. 골목길에서 큰길까지 대부분은 젊은이들의 바쁜 걸음으로 가득 찼다. 그래서 활기찬 곳이다. 살아남기 위해 배우고 노력하고 길을 찾는 이들이 강남역 부근을 오간다. 무심히 강남역 사거리 앞에 서면 어디선가 강한 노랫소리가 들린다. 1980년대부터 줄곧 거리와 현장에서 들리던 민중가요와 노동가요. 사거리 교통감시 카메라 철탑에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삼성해고자 복직을 위한 고공시위가 해를 넘긴 채 이어지고 있다. 한쪽에서는 스펙을 쌓고 취업을 위해 애쓰는 노력의 지옥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생계를 위해 일해야 하는 노동의 지옥이 있다. 그 건너편엔 내몰리고 빼앗긴 이들의 시련의 지옥이 있다. 이 즐겁고 풍요로운 세상의 발밑에 층층의 고해가 있는 셈이다. 강남역 골목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지금 젊은이들의 욕망과 노력과 좌절이다. 청년들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것이 온통 취업과 스펙일 수밖에 없고, 또 다른 한쪽에선 허영과 향락이 있다. 그 혼란한 세상을 견디고 나도 성공을 보장받을 수 없을 것이다. 애써 공부하지 않아도 상가건물 하나만 있으면 수십 년 동안 쌓이는 현금다발을 얻고 다시 황금탑을 쌓아 올리는 역설의 현장이 강남역 골목이기 때문이다. 부당 해고를 항의하는 노동자의 저항과 주류사회의 말석에라도 앉아보겠다는 백일몽과 그를 내려다보는 부의 탑이 강남역 골목에 혼재하고 있다.
골목 내시경
[취재 후]취업의 ‘주기화’
[취재 후]취업의 ‘주기화’(2018. 12. 10 15:39)
2018. 12. 10 15:39 사회
스포츠 과학에서 쓰는 ‘주기화’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이 수행하는 훈련에는 각 종목에 필요한 기술을 연마하는 것 외에 이를 뒷받침하는 기본적인 체력훈련도 비중 있게 들어갑니다. 그런데 근력과 순발력, 지구력 등으로 나눠지는 체력의 여러 요소들을 한꺼번에 모두 늘리기란 어렵습니다. 그래서 각각의 요소에 보다 집중하는 쪽으로 일정 기간의 ‘주기’를 번갈아 두는 방식을 주기화라고 합니다. 한동안은 근력 자체의 향상에, 다음 시기에는 보다 빠른 속도, 그 뒤에는 더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 지구력에 초점을 맞추는 식으로 훈련의 방향을 바꿔가는 것입니다. 기사와 무관해 보이는 주기화라는 용어를 꺼낸 것이 의아해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본격적인 생계활동에 나서는 청년기에 양질의 일자리를 잡지 못하면 이후에도 계속 같은 문제를 경험하게 되는 현실을 취재하면서 이들 청년의 삶이 노동계약 기간을 주기로 하는 주기화를 반복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에서 ‘평생직장’이라는 신화가 사라지면서 길어야 2년, 짧게는 수개월 단위의 계약을 반복하며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는 모습은 이미 흔히 찾아볼 수 있게 됐습니다. 주유소에서 일하다 공장 생산직으로 옮기고 또 그 다음에는 영업이나 외판에 나서는 등 전혀 다른 업종을 오가는 것입니다. 이전 직장에서의 경험은 전혀 다른 업종에 가면 아무 쓸모가 없어지고, 경력이 쌓일 새도 없이 새로운 일터에서 맡은 일은 적응하기가 무섭게 계약만료 시점이 다가옵니다. 같은 맥락에서 “모두 다 경력직을 원하는데 그럼 우리 같은 신입은 어디서 경력을 쌓느냐”고 항변하는 구직자들의 목소리도 높습니다. 그런데 체력훈련에서의 주기화는 키우려고 하는 한 특정 요소에 집중해도 부수적으로 다른 요소들도 어느 정도는 함께 향상되는 시너지 효과가 납니다. 전 직장에서의 경험이 전혀 새로운 일자리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 노동현실과는 상반됩니다. 기사가 정부의 노동정책 방향을 전환하면 이러한 문제들을 개선할 여지가 크다는 데 초점을 맞추느라 다소 짧게 짚고 넘어간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기업의 책임입니다. ‘노동 유연화’라는 명목으로 언제든 싼 임금으로 부린 뒤 영업환경이 바뀌면 쉽게 내쫓는 기업의 고용문화가 자리잡은 사회에서는 인적자본에 전문성과 경험을 축적시킬 기회도 그만큼 사라집니다. 그 결과 정규직 일자리를 잡지 못한 노동자들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생계를 위해 각자도생하며 비자발적인 주기화를 반복합니다. 어느 일자리에서든 쌓은 나름의 경험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보다 개선된 고용문화를 기업에 요구하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일까요.
취재 후
[표지 이야기]IMF 이후 달라진 취업 풍속도(2018. 12. 03 14:15)
2018. 12. 03 14:15 사회
IMF 구제금융이 대한민국 사회에 남기고 간 상흔은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남아있다. 비정규직이라는 새로운 직군이 생겨났고, 해고대란으로 한순간에 일자리를 잃은 가정은 무너졌다. 암울한 IMF 개입의 신호탄은 1997년 1월 한보그룹의 부도사태가 터지면서부터였다. 동남아 국가들의 화폐가치가 폭락하며 국내 외화가 급속도로 유출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경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1997년 11월 21일 임창렬 부총리는 IMF에 공식 금융구제를 신청했다는 발표를 한다. 국민들은 임 부총리가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하는 장면을 시청해야만 했다. IMF는 580억 달러의 구조자금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기업 구조조정과 공기업 민영화 등을 내걸었다. 국민들은 금모으기 운동, 국산품 애용하기 운동 등을 벌이며 2001년 8월 23일 IMF를 조기졸업했다. 그러나 후유증은 깊고 컸다. IMF가 낳은 ‘비정규직’이라는 직군은 여전히 한국 사회의 아픈 손가락이 되고 있다.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면서 ‘오륙도’, ‘사오정’ 등 신조어들이 등장했다. 양극화는 더욱 심각해졌다. 세계 경제 역시 악화됐다. 2007년과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리먼브라더스 사태가 미국 사회에 연이어 터지면서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다. 2008년 처음 등장한 ‘88만원 세대’는 10년이 지난 2018년까지도 여전히 88만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는 ‘삼포세대’에 이어 ‘N포세대’까지 등장했다. 정부는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이지만 지금의 청년들은 미래를 포기하고 있다. 2018년 출생률은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표지 이야기
[탈북 교수 주승현의 ‘우리는 모두 조난자다’](4) 대학진학 그리고 취업-벅찬 등록금 때문에 혹독했던 대학생활(2017. 01. 24 16:16)
2017. 01. 24 16:16 사회
호프집, 치킨 배달, 건설장 노가다, 촬영 엑스트라, 일식당, 전단 알바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지금도 마음에 응어리로 남아있는 것은 수업이 끝난 후 도서관으로 가는 친구들을 보며 홀로 일터로 가야 했던 내 모습이다. 공부만이 살 길임을 깨달은 후 일하는 곳에서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한 대입학원에서 공부하기로 했다. 대학 준비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일터 동료들이 탈북자가 무슨 대학이냐며 빈정과 면박을 주기도 했는데, 그러한 그들의 태도를 사갈시한 나머지 오기를 부려 월급의 절반을 떼어내 학원에 등록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후회가 밀려왔다. 영어와 수학은 물론이고 대학입학을 위한 논술의 기본조차 갖추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남북한의 이질적인 커리큘럼을 탓하기 전에 북한에서도 열심히 공부를 해본 적이 없었던 자신을 먼저 탓할 수밖에 없었다. 월급의 절반을 떼어내 과감히 학원 등록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학창시절 일찌감치 직업군인으로 살려는 꿈을 가지고 체육소조(동아리)에 가입하여 수영, 마라톤, 총검술과 같은 국방체육에 몰두했고, 학교와 집을 떠나 경기와 대회에 전전하기를 좋아했다. 학교를 졸업하던 만 16살에 곧바로 군에 입대하여 DMZ 안에서 근무하다가 왔으니 학업의 공백은 클 수밖에 없었다. 학교시절에 담임은 아니었지만 각별하게 나를 챙겨주시던 선생님이 계셨다. 공부는 뒷전인 천방지축의 일상을 걱정하며 훗날 공부하지 않았던 시간을 뼈아프게 후회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 얘기하신 적이 있었다. 그분 앞에서는 꽤나 경청하는 표정이었지만 평생을 직업군인으로 살아갈 나에게 그런 날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은 속 아래로부터 꽉 차 올랐다. 그때 그분의 생생한 표정과 말씀이 서울의 대입학원에서 뼈아픈 후회로 고여 올라올 줄은 몰랐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대학에서 직업군인으로 진출하려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강의시간에 그날 선생님이 내게 하셨던 말씀을 비슷이 전하다보면 감정이 절로 묘해지는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학원을 다닐수록 후회가 밀려왔지만 손쉽게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하루 네댓 시간 자고 일터와 학원을 오갔고, 쉬는 날이면 학교들을 찾아다니며 입학에 관련한 자료를 모았다. 누구도 알려주는 이가 없었던 시절이기에 홀로 불비한 조건들을 극복해야 했다. 여러 대학을 찾아다니며 학교 입학을 문의했고, 각박한 담당자를 만난 경우는 낭패 보기가 일쑤지만, 친절하게 정보를 얻는 날이면 손으로 자기소개서를 써서 독수리타법으로 컴퓨터로 옮겨 지원서류를 준비해 갔다. 마침내 그해 가을에 대학 입학원서를 냈고, 필기와 면접 등의 단계를 거쳐 서울에 있는 여러 대학에 합격했다. 입학할 때 나보다 공부를 잘해 보이던 다른 탈북민이 고배를 마신 것을 보면 필기전형 외에도 자기소개서나 면접 등도 중요한 부분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은 대학 진학을 선택하는 탈북민이 많아지고 오래된 고충도 알려지면서 입시를 위한 상담과 정보를 제공해주는 기관·단체도 여럿이다. 뿐만 아니라 입학예정자를 위한 예비대학 운영과 멘토링 사업, 기초학력과 학업보충을 위한 글쓰기를 비롯한 외국어 습득 프로그램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입국 전부터 한국에서의 학업을 계획하거나 입국 후 바로 대학 입학을 목표하는 탈북민이 증가하면서 자료 공유와 정보 습득은 과거에 비해 원활하다고 할 수 있다. 함경북도 무산군 출신의 청년 탈북자의 삶을 다룬 영화 (박정범 감독. 2011년 개봉)의 한 장면. / 세컨드윈드필름 제공 탈북민은 대체로 정원 외 특별전형으로 학교를 지원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오해도 적지 않다. 우선 탈북민의 입학으로 다른 한국 출신들이 피해가 있다는 오해인데, 정원 외로 선발하는 까닭에 실력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말 그대로 ‘정원 외’이므로 일반 지원자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는다. 등록금 문제도 지원이 절실한 저소득층에 대한 등록금 지원이 적용되고 있는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저소득층에 해당할 수밖에 없는 탈북민 지원도 이에 준하여 생각해보면 오해를 풀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일정한 점수를 받지 못하면 등록금 지원은 중단된다. 좋은 대학으로의 진입도 과거처럼 수월하지 않다. 그동안 대학 안에서의 적응과 졸업이 쉽지 않았던 까닭에 탈북민의 입학을 제한하는 대학이 많아졌고, 때문에 탈북민 서로 간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최근 들어 북한에서부터 엘리트교육과 좋은 대학에 다녔던 경험자의 상당수가 대학공부를 원하고, 특히 한국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닌 탈북민도 적지 않기에, 소수의 인원만을 선발하려는 풍토에서 점점 어려운 일이 됐다. 오죽하면 원하는 대학으로 가기 위해 재수·삼수의 특별전형을 준비하는 탈북민도 있고, 특별전형이 더 어렵다며 수능을 치르고 원하는 학교로 간 탈북민도 생겼을까. 작년에는 서너 명밖에 뽑지 않는 어느 대학에 가려고 100명 가까운 탈북민이 경쟁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특별전형이라는 제도가 있어 대학입학에서 탈북민이 좀 더 기회를 갖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회적 배려이다. 결국은 대학을 제대로 졸업하느냐와 졸업 후 취업의 문제이다. 탈북민의 경우 대학 입학은 가능하나 졸업은 쉽지 않다는 말이 나돈다는 사실을 입학 후에야 알게 됐다. 내 경우에도 전국적으로 수십 명의 탈북민이 입학했지만 졸업한 이는 몇 안 됐다. 지금은 전체 입학자 중 상당수가 졸업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때 여러 대학에 모두 합격한 것은 어쩌면 운이 좋았다고도 할 수 있다. 경영학과, 정치외교학과, 신문방송학과 등 대학마다 서로 다른 과를 지원했는데, 그때까지도 전공뿐만 아니라 진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선택해야만 했다. 경영학과가 있는 대학이 집에서 가까웠지만 집에서 가장 먼 거리에 위치한 학교의 정치외교학과를 최종 선택했다. 얼마 안 되는 한국에서의 생활이 고달프기도 하고 자신이 처한 형편이 고약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낯선 곳에서의 어려움이 아닌, 조난자의 그물이 나를 옥죄고 있음을 1년도 안 되는 정착과정에서 체감했다. 경영학을 공부하여 좋은 기업에서 돈 많이 벌려는 목표도 가질 수 있었지만 정치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끊임없이 속박하고 있는 분단환경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정원 외 선발’로 일반 지원자 피해 안 가 입학 전 들떴던 마음과 달리 대학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서로 다른 남북한의 교육과정뿐만 아니라 그 시절 나에게는 공부에 대한 취미는 고사하고 요령조차 없었다. 경제적 어려움도 컸다. 생계지원금으로 집세며 온갖 종류의 공과금을 내고 나면 교통비나 식비도 남지 않았다. 의지할 가족도, 도움 받을 이웃도 남쪽 하늘 아래에는 없었다. 입학과 동시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야 했는데, 첫 학기 성적이 최악이었다. 탈북민의 경우 사립대학 등록금은 국가와 학교에서 반반씩 지원하는데, 성적이 나쁘면 수업료를 지원받을 수가 없다. 등록금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나는 한 가지 아르바이트로는 쌔빠지게 고생해도 도저히 등록금을 마련할 수가 없어 여러 일을 해야 했다. 호프집, 치킨 배달, 가이드, 건설장 노가다, 촬영 엑스트라, 일식당, 전단 알바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에 응어리로 남아 있는 것은 수업이 끝난 후 도서관으로 가는 친구들을 보며 쓸쓸히 일터로 가야 했던 내 모습이다. 도서관에 앉아 공부하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현재 전국에 있는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2000명이 넘는 탈북민이 신경 쓰이는 이유도 그 시절 기억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학업은 포기할 수 없었다. 교재 살 돈이 없어서 다른 학교 도서관들을 전전하며 책을 빌려 공부를 했고, 대형서점에 가서는 하루 종일 선 채로 눈치를 보며 책을 읽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기초학문이나 전공과목의 어려움이 컸지만 인내와 끈기로 버텼다. 시험기간에는 아예 학교 도서관 의자에서 자면서 일주일이나 열흘씩을 공부했는데, 군 시절에 얻은 체력과 정신력이 여러모로 도움이 됐다. 어느 탈북민 친구는 영어로 진행하는 강의실을 박차고 나온 것이 자퇴의 원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사실은 나도 여러 번 뛰쳐나왔다. 그럼에도 자퇴를 하지 않았던 결정적 부분은 자신을 추스른 후 다시 강의실에 들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온갖 일을 해 두 학기 등록금을 직접 냈고, 성적도 조금씩 올랐다. 더 이상 등록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서야 캠퍼스의 낭만도 눈에 들어왔다. 산악동아리, 기타동아리에 가입하여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즐겼고, 3학년 때부터는 아예 친구들과 민속문화반이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친구들도 두루 생겼고, 날밤을 까면서 신촌에서의 온갖 추억도 쌓아갔다. 내게 관심을 주시던 교수님의 배려로 학부생 신분으로 연구실에 소속돼 한국 정치를 전공으로 공부했는데, 분단문제에 접근하게 된 토대가 됐다. 생활은 어려웠지만 휴학 한 번 없이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요즘은 휴학 없이 졸업하는 탈북민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지만 그때는 내가 첫 사례라고 했다. 대학에 입학하였지만 실제로 졸업하는 사람은 그만큼 찾아보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힘들 때마다 휴학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었다. 그때마다 휴학만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되뇌곤 했다. 주변에서는 어학연수나 인턴 등 스펙 관리나 취업준비를 위해 휴학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내 경우에는 오로지 두려움 때문에 휴학할 수 없었다. 휴학을 한다면 어쩌면 학교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졸업 후 어학연수를 마치고 직장생활을 시작한 나는 언필칭 학문에 욕심을 내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학부과정이 공부에 대한 재미뿐만 아니라 미련도 남겼기 때문이다. 대학원에서도 한 번의 휴학 없이 석사와 박사과정을 마쳤는데, 오로지 학부시절의 경험에서 도움을 받았다. 귀순하여 대학생활을 시작한 후 10년 만에 학부와 대학원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지만 그 과정은 혹독할 만큼 시리고 궁핍했다. 장학재단 많지만 탈북대학원생 서류는 외면 학부시절 내가 제일 당황한 것은 혼자서 감당하기 벅찬 등록금이었다. 북한에 있을 때 당국의 선전에서 ‘남조선’의 대학생들이 등록금을 낼 돈이 없어서 자신의 피를 뽑아 학비를 마련한다는 교육을 밥 먹듯이 받아왔다. 그런데 실제로 내가 한국에서 등록금을 마련할 수만 있다면 내 몸 안의 피를 다 뽑아 마련하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절박한 순간을 여러 차례 겪은 것이다. 정작 문제는 내 몸 안의 피를 다 뽑아도 등록금을 마련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대학원도 마찬가지였다. 수백 개도 넘는 장학재단이 존재하지만 공부하고 싶어하는 탈북대학원생의 서류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대학에 진학하였다가 학업을 포기하는 탈북민 중에는 등록금의 문제로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렇게 어려운 학업과 사회적응과정을 마친 이들이 졸업 후 마주한 상황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취직은 이곳 출신의 취업준비생들과 매한가지로 탈북민에게도 돌파하기 어려운 ‘전선’이다. 같은 시기 같은 대학에 다녔던 2명의 고향사람이 있었다. 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어 국제영화제를 휩쓴 영화 속 주인공이기도 한 함경북도 무산군 출신의 형과 북한에서 엘리트 대학으로 꼽히는 ‘김책공업종합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와서 경영학과를 선택한 고향선배다. 무산군 출신의 형은 나와 같은 시기에 하나원에 있었고 함께 대학에 온 입학동기이기도 하다. 입학 후 각자의 삶 때문에 여유가 없었지만 우리는 틈틈이 서로의 안부를 챙겼다. 그러나 의 주인공인 그는 위암 투병 끝에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나중에 그의 학과 친구가 영화감독이 되어 형의 삶을 픽션으로 그려 내놓은 영화가 바로 이다. 영화를 보면서 암울하고도 잔인했던 서울 적응기를 보낸 그의 생애에 비통함이 더해졌다. 눈을 감는 날까지 창백한 미소로 그간의 사연을 덮고 있었기에 더 슬펐는지도 모른다. 또 다른 고향선배는 북한에서 명문대학을 나왔지만 한국에서는 그쪽 졸업장이 무용지물이다. 그는 나와 같은 대학에서 취업에 유리할 것 같은 경영학에 다시 도전했고, 어렵게 졸업했지만 이후 번번이 취업에 실패했다. 어느 날 고향출신의 배우자마저도 그를 떠났고, 선배는 작은 임대아파트 화장실에서 스스로 목을 맸다. 학부를 졸업한 내가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는 사이에 생긴 일이었다.
탈북 교수 주승현의 ‘우리는 모두 조난자다’
[렌즈로 본 세상]우수인재 취업 ‘거대기업 편향 박람회’(2015. 09. 15 18:16)
2015. 09. 15 18:16 사회
서울대 교내 대학본부 앞 잔디광장에서 ‘우수인재 채용박람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우수인재 채용박람회라는 이름에 걸맞게 국내 최고 기업의 인사·채용 담당자들이 총출동해 학생들과 상담을 벌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들의 관심은 극명하게 갈리고 있습니다. 국내 굴지의 거대기업 부스는 학생들이 줄을 설 정도로 붐비지만(사진 위), 기업규모가 그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규모가 큰 한 기업의 부스(사진 아래)는 학생들이 찾지 않아 한산합니다. 기업의 외형만 보고 내 인생을 걸려고 하는 것보다는 이런 기회에 정말로 내 꿈을 펼칠 수 있는 직장이 어디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채용 담당자들과 진지한 상담을 하는 것이 젊은 인재들이 취해야 할 자세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렌즈로 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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