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옵션
닫기
범위
전체
제목
본문
기자명
연재명
이슈명
태그
기간
전체
최근 1일
최근 1주
최근 1개월
최근 1년
직접입력
~
정렬
정확도순
최신순
오래된순

주간경향(총 22 건 검색)

[IT칼럼]초인종 카메라의 ‘상사형 행동’(2022. 10. 21 11:08)
2022. 10. 21 11:08 경제
‘자동화된 사회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미디어의 구조, 물질적 기질에 특정 방향으로 사회성을 형성한다”는 뜻이다. 새로운 자동화 기술이 등장하면 그에 따라 인간의 문화적 특성이 변화하는데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기술과 인간이 상호작용하며 공진화하고 있다는 단서이기도 하다. 구글 네스트가 출시한 초인종 카메라 ‘헬로’ / 네스트 비단 자동화 기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 초인종 카메라가 널리 확산되고, 이에 따라 인간의 문화적 행동이 바뀌는 경향도 이 개념으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초인종 카메라는 초인종처럼 보이는 보안 카메라로, 벨을 누르면 일반 초인종처럼 작동하지만 동시에 안에 있는 카메라로 영상을 찍어 바깥 상황을 모니터링할 수 있다. 초인종 카메라, 그중에서도 무선 인터넷 기능을 담은 스마트 초인종 카메라는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기술이다. 팬데믹으로 온라인 주문이 급증하면서 초인종 카메라의 수요가 크게 증가했다. 주문한 제품이 문 앞에 잘 도착했는지 혹시 누군가 가져가지는 않았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해야 할 일이 많아져서다. 배송 기사와 대면을 피할 수밖에 없는 문화적 조건도 영향을 미쳤다. 이 스마트 초인종 카메라는 이전 기술과 달리 카메라를 타고 들어온 모든 영상 콘텐츠를 외부로 공유할 수 있게 도와준다. 필요에 따라 카메라를 활성화해 주변 움직임을 감지할 수도 있다. 기기 제조사의 서버와 연결돼 있기에 촬영된 영상물의 아카이빙도 가능하다. 모든 제품 조작은 스마트폰으로 제어된다. 언제 어디에서든 확인할 수 있고 공유할 수 있다는 게 특징이다. 구글 네스트, 샤오미, 링 등 굵직한 테크 기업들이 이 시장에 일찌감치 뛰어들어 경쟁 구도를 형성 중이다. 스마트 초인종 카메라 사용이 늘어나면서 사용자들의 행동양식에 독특한 변화가 관찰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상사형 행동(Boss Behavior)’이다. 비영리 연구기관인 ‘데이터&소사이어티’가 명명한 이 행위 양식은 크게 모니터링, 훈계, 징계 등 3가지로 나뉜다. 예를 들어 택배기사가 유니폼을 입지 않고, 주문 상품을 집 앞에 두고 가면, 촬영된 영상을 주문업체에 직접 전송하는 행태가 자주 나타난다. 이는 모니터링과 징계에 해당한다. 특정 시간대엔 벨을 누르지 말라거나 택배를 놔두는 위치를 지정하면서 배송기사의 행동 변화를 제언하는 건 훈계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스마트 초인종 카메라 기술은 사용자가 택배기사의 상사처럼 행동하도록 하는 문화를 만들었다. 어떤 고용관계도 없는 택배기사를 향해 직장 상사나 관리자처럼 행동하려는 태도, 말하자면 ‘기술화된 사회성’을 형성했다. 이런 유형의 사회성은 노동자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침으로써 다시 사회화된다. 초인종 카메라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인사를 올리고 정중하게 경의를 표해야만 하는 특별한 풍경이 현실화되고 있다. CCTV에 이어 스마트 초인종 카메라까지 일상 감시체계의 네트워크로 들어오면, 노동자들의 작업장은 무한대로 넓어질 수밖에 없다. 전통적인 작업장뿐 아니라 그곳을 벗어난 공간까지 감시의 눈이 확대된다. 기존 초인종 카메라에 연결한 네트워크만으로도 인간의 태도와 노동 조건은 큰 변화를 겪는다. 기술 초감시 사회 앞에서 사회제도의 대응 속도는 늘 더디다.
IT칼럼
전후 10년, 이들의 붓과 카메라는 같은 곳을 보았다(2022. 01. 14 15:05)
2022. 01. 14 15:05 문화/과학
1945년 일본의 항복과 함께 찾아온 광복의 기쁨도 잠시, 정치적 혼란과 분단에 이어 발발한 한국전쟁은 참혹한 고통을 우리 민족에게 안겨줬다. 폐허가 된 서울은 광복 후 165만명으로 급증한 서울의 인구를 감당하느라 판자촌이 여기저기 생겼다. 도심도 예외가 아니었다. 2층, 3층으로 구성된 판잣집들이 청계천 2가와 3가의 천변부지에 즐비했다.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에는 현금이나 필요한 물품을 교환하려는 사람들이 난장을 펼쳤다. 음습한 전쟁의 폐허 위에서도 사람들은 일상을 영위했다. 희로애락이 있었다. 한영수, 서울 금호동 1956-1963(사진 왼쪽) / 한영수문화재단 제공, 박수근, 길가에서(아기 업은 소녀) 1954, 캔버스에 유채, 107.5×53㎝, 개인소장 이들의 작품은 닮았다 서울 덕수궁미술관에서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 전시회(2021.11.11~ 2022.3.1)가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주중 800~1000명, 주말 1400~1800명이 관람해 1월 13일 현재까지 약 6만명이 다녀갔다. 전시회는 박수근(1914~1965)이 19세에 그린 수채화부터 51세로 타계하기 직전에 제작한 유화까지 그의 전 생애의 작품 163점과 자료를 소개하고 있다. 역대 최다 작품이 나온 것도 놀랍지만, 박수근이 화폭에 붓으로 담아낸 전쟁 직후 서울의 모습을 라이카 카메라로 촬영한 한영수(1933~1999) 작품들이 컬래버를 이루고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김예진 학예사는 “기획 단계부터 사진을 컬래버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한영수의 작품들이 박수근의 작품들과 공통점이 많음을 알게 돼 전시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김 학예사가 꼽는 공통점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월남했다는 것, 전쟁 직후 서울의 평범한 서민들을 작품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 그리고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몹시 따뜻하다는 것 등이다. 이 같은 시선은 전쟁 직후 서울의 풍경을 비참하고 남루하며 거칠게 표현한 당시 대다수 리얼리즘 사진작가들과 크게 차별화되는 점이다. 서울의 일상을 그린 박수근 박수근은 한국전쟁 때 남한으로 내려왔다. 1952년부터 1954년까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있던 미8군 PX에서 초상화가로 일했다. 용산 미군부대에서 전시를 열고 그림을 팔았다. 열심히 저축해 1953년 창신동에 가족의 둥지가 될 집 한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창신동은 동대문시장과 가까워 피란민을 포함한 서민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1953년은 박수근이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특선을 차지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미술대학을 나오지 않았고 당시 유행하는 그림을 그리지도 않았지만 진솔한 소재를 개성 있는 화법으로 구현해 인정을 받았다. 이후 10년간 박수근은 재건되지 못한 서울의 판잣집, 짐을 달구지에 실어나르거나 장사하는 사람들, 골목길에서 노는 아이들, 아기 업은 소녀,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행상을 하거나 노점에서 장사하는 여인들, 개천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을 주로 그렸다. 창신동에서의 10년은 박수근의 전성기였다. 박수근과 한영수는 살아생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박수근이 살았던 창신동과 일했던 명동(미군 PX), 그리고 작품을 팔았던 을지로1가 반도호텔을 오가며 그가 보았던 풍경들은 한영수의 사진에 고스란히 등장한다. 한영수는 개성 만석꾼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학교 미술 선생님이 집으로 직접 찾아와 전문적인 회화 수업을 권유할 정도로 그림, 특히 드로잉에 재능이 있었다. 집안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가업을 물려받은 그는 취미로 사진을 시작했다. 한국전쟁 때 서울로 피란을 내려온 후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헝가리에서 디자인을 공부한 후 20여년째 아버지의 사진 작품을 관리 중인 한선정 한영수문화재단 대표(52)는 “아버지는 새로운 기계 만지는 것을 좋아한 얼리어답터였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전쟁 후 서울을 사진으로 기록해둬야겠다고 마음먹은 아버지는 라이카 카메라를 사서 독학을 하며 사진에 심취했다”고 말했다. 1978년 ‘디자인’지에 실린 한영수 인터뷰에는 좀더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1955년 군에서 제대할 무렵 카메라를 하나 마련했습니다. (중략) 특히 ‘아루스’ 같은 잡지에서 연재된 필름의 현상 및 인화 방법과 사진을 찍는 데 필요한 장비의 소개는 큰 도움이 됐습니다. (중략) 전쟁 후 나의 관심은 어떤 사람을 그의 주어진 환경에서 포착해보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남루한 옷차림의 어린 소녀가 아름다울 수 없지요. 그러나 앵글의 각도에 따라 그 소녀가 품고 있는 아름다움이 남루함 속에서 풍겨나온다면 그것은 성공한 사진입니다.” 박수근, 판잣집 1960년대 후반, 종이에 유채, 20.4×26.6㎝, 성신여자대학교박물관 힘겨움 속 희망 찍던 한영수 1956년부터 1963년까지 한영수는 본격적으로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 나섰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각종 일상용품을 거래하던 시장을 비롯해 을지로, 명동과 충무로, 퇴계로, 남대문, 종로, 서울역, 한강의 광나루, 뚝섬, 한강 인도교 주변, 마포, 세검정, 청계천 등 서울의 여러곳에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1958년부터 한국 최초의 리얼리즘 사진연구 단체 ‘신선회’에서 활동했다. 박수근, 세 여인 1960년대 전반, 나무판에 유채, 21×46.4㎝,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한영수, 서울 1956-1963 / 한영수문화재단 제공 최종현 통의도시연구소장은 2017년 열린 <한영수 기증유물특별전> 전시도록 논고에 “그가 작업한 사진에는 도시를 보는 독특한 시각이 드러나 있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장소가 배경으로 처리되면서 사람과 장소의 관계가 유연하고도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 (중략) 주제가 무엇이든, 장소가 어느 곳이든, 항상 사람이 중심에 있다. (중략) 사진 속에 나타난 인물은 거의 예외 없이 의지가 있어 보이며 어떤 희망이나 미래에 대한 전망을 담지하고 있는 표정을 보여준다. 낙담하지 않는 긍정을 지닌 표정, 노여움이나 서글픔보다는 건강하고 변함없는 생의 의지를 드러내는 표정이 있다.” 한영수를 제외한 동시대 리얼리즘 사진가들은 고통스러운 시절을 고통스럽게 표현했다. 당시 사진 사조가 그랬다. 김예진 학예사는 “반면 한영수의 사진은 전쟁 후 헐벗고 못먹던 힘겨운 환경 속에서도 사람들이 계속 힘차게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영수 프로필 1958 / 한영수문화재단 제공 1952년경 서울 명동 미군 PX 초상화부에서 작업 중인 박수근(오른쪽에서 두 번째 앉은 남자) / 양구군 군립박수근 미술관 소장 한영수는 1960년대 중반, 백화점 카탈로그를 찍은 것을 시작으로 광고·패션 1세대 사진가로 큰 성공을 거둔다. 삼성전자, 쥬단학화장품 등 1990년대 중반까지 그의 손을 거친 광고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제약회사 종근당의 상징인 커다란 ‘구릿빛 종’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진도 한영수의 작품이다. 당시 광고시장을 한영수와 김한용(1924~2016)이 양분해 싹쓸이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한선정 대표는 “정부와 결탁한 재벌 위주의 대기업이 급성장하고 백화점들이 생기면서 홍보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그 결과 광고시장이 크게 열렸다”며 “아버지는 1966년에 건물 전체가 유리로 된 스튜디오를 열고 본격적으로 광고사진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당시 우리 가족이 살던 동숭동 집은 100평 규모의 통창으로 된 빨간 벽돌 3층집이었는데 이곳에도 모델들이 드나들며 패션 화보 촬영을 했다”고 회상했다. 한영수, 서울 1956-1963 / 한영수문화재단 제공 한영수, 서울 명동 중앙극장 1957 하늘에 내걸린 한영수의 사진 1987년에는 한국전쟁 이후 서울과 역사적 발자취를 담은 사진을 모은 사진집 <삶>을 출간했다. 작고 후에는 딸 한선정씨가 한영수문화재단을 설립, 필름을 관리하고 있다. 2014년 프랑스 아를 포토 페스티벌에 참가한 것을 비롯해 뉴욕·LA 등지에서 활발하게 개인전을 열었다. 한선정 대표는 “해외 전시회 때마다 교포들로부터 고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교포들은 전후 한국에서 보낸 어린시절을 슬프고 힘들었던 시기로만 기억하고 있는데, 한영수의 사진을 보는 순간 그 시절 자신에게도 즐거웠던 일, 웃었던 추억이 있었음을 떠올리게 됐다는 설명이다. 현재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서울스카이에서도 한영수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시간, 하늘에 그리다> 전시회(2월 6일까지)로, 한영수가 촬영한 1950년대 서울 풍경을 지하 2층 전시장과 118층 세계 최고층에 펼쳐놓았다. 백미는 118층이다. 유리바닥 전망대(스카이덱) 벽면 하나가 거대한 흑백사진 한장으로 덮여 있다. 한영수가 1958년 한강변에서 물놀이하는 사람들을 담은 작품 ‘서울 뚝섬’이다. 주요 출판물로는 <Seoul, Modern Times>(2014), <한영수: 꿈결 같은 시절>(2015), <시간 속의 강>(2017),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2020)가 있다. 한선정 대표는 “올가을 서울에서 개인전을 예정하고 있고, 9월부터 내년 2월까지 미국 LA카운티뮤지엄(LACMA)에서 열리는 <사이의 공간: 한국근대미술>에도 아버지의 작품 6점이 전시된다”고 말했다.
[문화프리뷰]카메라 렌즈 너머의 코로나19(2021. 09. 24 14:58)
2021. 09. 24 14:58 문화/과학
비엔날레는 2년에 한 번 열리는 정기 이벤트다. 올해에는 경기세계도자비엔날레, 광주디자인비엔날레, 대구사진비엔날레 등이 전국에서 지역대표 문화행사로 자리 잡아 개최됐거나 준비 중이다. 비엔날레는 문화자본을 앞세운 ‘미술올림픽’으로 불린다. 국제적 규모로 도시를 대표하는 문화예술축제라 인식된 만큼 주관·주최 측의 역량을 과시하는 행사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프로젝트 규모나 내용에 대한 기대가 클수록 비용 대비 파급효과에 대한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다. 제8회 대구사진비엔날레 전시 / 김옥렬 제공 무엇보다 막대한 자금지원에 힘입어 문화 선진국에서 활동하는 전시감독이나 큐레이터, 작가들의 유명세에만 의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비엔날레 행사에서 흥행한 감독은 유명세를 타고 다시 세계의 크고 작은 비엔날레 감독으로 선임되기도 한다. 이렇게 국제적 행사가 많아질수록 미술문화의 획일화 역시 피할 수 없다. 이러한 비엔날레의 딜레마는 시대를 앞서가는 문화적 흐름과 대중적 시선에 맞는 취향 추구라는 양면성 속에 글로벌리즘이 자리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 역설적이게도 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 문화의 확산과 집중, 중앙과 변방 사이에서 포스트코로나를 위한 포스트비엔날레의 특성화가 필요해 보인다. 사진이라는 장르로 특성화를 추구하는 대구사진비엔날레가 9월 10일 시작해 11월 2일까지 열린다. 코로나19로 한해 연기된 탓에 지난해 전시를 준비하던 독일의 브리타 슈미트 예술감독 대신 올해는 심상용 예술감독(서울대 교수) 체제로 전시가 이루어진다. ‘누락된 의제-37.5 아래’라는 주제로 32개국 351명의 작가가 참여한 이번 비엔날레에선 주제전시, 특별전시, 포토 월 프로젝트, 연계전시 및 부대행사 등이 진행된다. 전시 주제에 나오는 숫자 ‘37.5’는 코로나19 감염 여부를 진단하는 발열 기준이다. 전시 소개 자료에 나온 대로 “바이러스는 인간과 적대적 공생관계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37.5 아래, 곧 의학적으로는 표준이지만, 우리가 삶의 방식, 문명의 노선을 위탁해온 ‘논란의 여지가 많은 표준’에 대해 전향적인 사유의 단초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담긴 시의적절한 주제다. 주제전시에서는 프랑스의 사진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앙투안 다카타가 카메라 너머로 바라본 시선이 주목을 끈다. 그의 사진은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프랑스의 봉쇄된 거리와 여러 도시에서 이루어지는 황량한 풍경들, 거리를 배회하거나 잠이 든 모습,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와 치료사의 모습을 카메라 렌즈 너머로 응시한다. 그의 시선은 과학의 발전을 환호하며 맞이한 21세기 인류에게 코로나19가 뒤흔든 위기의 현실 속 깊이를 열화상 카메라의 눈을 통해 포착한다. ‘신념’을 주제로 한 특별전시에선 이기명 사진 전문 큐레이터와 미국의 엘리슨 몰리 큐레이터가 세계 11개국을 대표하는 사진가 18명의 동시대 현실인식을 담았다. 정치와 사회, 경제와 노동, 인간과 종교, 기후위기와 환경오염 그리고 난민에 대한 시선이 펼쳐진다. 역동적인 영상시대에 ‘순간포착’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 눈에 담긴 ‘사진의 본성’을 새롭게 만나는 시간이다.
문화프리뷰
[달라진 탈레반](2)이제 탈레반은 카메라를 피하지 않는다(2021. 09. 03 15:40)
2021. 09. 03 15:40 국제
ㆍ탈레반의 미디어전, 향후 국제사회와 직접 외교관계 맺기 위한 포석 해석 탈레반, 그들이 돌아왔다. 지난 8월 31일, 2461명의 미 장병이 희생된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이 완전철수하면서 20년 만에 공식적으로 전쟁이 종료됐다. 미국이 떠난 자리를 탈레반이 다시 차지했다. 탈레반은 미군 철수 후 아프간의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면서 정부 구성에 한창이다. 외신을 통해 보도되는 탈레반의 악행은 우려를 가중시키고 있다. 과연 지금 탈레반은 20년 전 탈레반과 얼마나 다를까.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지난 8월 31일(현지시간) 이슬람 무장세력 탈레반이 무기를 들고 활주로를 순찰하고 있다. / 카불 로이터=연합뉴스 촬영 죄악시하던 탈레반의 변화 2001년 기자가 처음 아프가니스탄을 취재할 때 탈레반 정부는 미국의 막강한 화력에 맥없이 밀려 퇴각한 직후였다. 탈레반 정부 인사로 누가 있었는지 취재하려 해도 사진이 없었다. 현지인들에게 물어보니 탈레반은 그들이 믿는 극단주의 이슬람 규율에 따라 사진과 영상에 자신의 얼굴이 촬영되는 것을 죄악시해 사진이 없다고 했다. 실제도 취재하면서 탈레반과 인터뷰하려면 카메라 없이 오라는 황당한 주문을 많이 받았다. 이 때문에 인터뷰할 때마다 촬영에 애를 먹었다. 그런 탈레반이 카타르 도하에서 미국과 평화협상을 할 때 한껏 차려입은 모습으로 기자들과 포토타임을 가졌다. 기자는 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탈레반을 아무렇지도 않게 촬영할 수 있는 게 신기했다. 지난 8월 15일,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 무혈입성하며 대통령궁에 들어가 대통령 집무실 책상 위에 앉아 기념 촬영을 한 사진이 전 세계에 배포됐다. 이 사진을 가만히 보면 탈레반들이 아직 카메라 렌즈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 그들은 아직 이슬람 규율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탈레반이 과거와 달리 사진 촬영을 한 이유는 미디어전에 민감해졌기 때문이다. 돌아온 탈레반을 전 세계에 홍보하기 위해 그들이 죄악시하던 사진 촬영을 더는 마다할 수 없었다. 탈레반은 각종 SNS와 인터넷 네트워크를 활용해 적극적으로 자신들을 홍보한다. 탈레반이 2001년 퇴각 이후 처음엔 아랍계 방송을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표명했다. 알자지라 방송이나 알아라비아 등과 산에서 총을 들고 인터뷰하거나 자신들이 미군을 공격하는 영상 등을 배포하며 탈레반의 건재를 알렸다. 그러나 2010년 이후에 소셜 네트워크가 성장하며 탈레반은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기반으로 성명을 발표하거나 자신들의 홍보 영상을 올렸다. 그러면서 이들은 홍보와 미디어전의 중요성을 서서히 터득한 듯하다.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에서 지난 9월 1일(현지시간) 탈레반 지지자들이 미군 철수 축하행사를 열었다. 탈레반 깃발을 단 헬기가 상공을 날고 있다. / 칸다하르 AFP=연합뉴스 탈레반은 이번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취재하는 언론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상황을 홍보하면서 상당히 정치적인 태도로 미디어전을 전개했다. 카불이 함락된 후 화제가 된 것은 지난 8월 17일 탈레반의 자비훌라 무자히드 대변인 기자회견이다. 15일 카불이 함락되고 우왕좌왕하는 외신에 트위터를 통해 탈레반의 첫 기자회견이 있다는 안내 문자가 등장했다. 처음엔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진짜 탈레반이 보낸 건지 아닌지 외신 사이에 말이 많았다. 그러나 탈레반이 페이스북 생중계와 유튜브까지 연결한 기자회견장은 서방의 다른 기자회견장과 방식이 다르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자비훌라 대변인은 여성을 존중한다는 내용과 외국 군대와 일한 사람들에 대해 복수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이어 기자들의 질문에도 답했다. 기자가 본 그 어느 외신 기자회견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광경이었다. 특히 생중계를 통해 기자처럼 현장에 가지 못하는 취재진을 위한 준비를 했다는 점에서 탈레반은 서구사회의 기자회견을 그대로 따라 했다, BBC 생방송 도중 전화 연결까지 탈레반은 카불 현지에 있는 외신들의 취재에 나름 협조하며 전 세계에 나가는 자신들의 뉴스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 카불이 함락된 당일인 지난 8월 15일 BBC의 세계뉴스 전문 채널 BBC월드의 앵커는 생방송 도중 갑자기 돌발 상황을 맞이했다.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보도하는 도중 앵커는 “죄송하지만 여기까지 해야겠다. 탈레반 대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고 밝혔다. 그후 연결된 전화 인터뷰에서 자신을 탈레반 대변인이라고 밝힌 사람은 “탈레반이 수도 카불을 장악하더라도 평화가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카불에 사는 아프가니스탄 국민 모두의 재산과 삶, 안전을 보장한다”고 주장하며 “누구에게도 복수는 없다. 우리는 이 나라 국민의 종복일 뿐이다”라고 강조했다. 이 인터뷰는 급하게 연결된 바람에 휴대전화 스피커폰 기능으로 방송이 이뤄졌다. 이 방송 책임자는 트위터에서 “이런 상황은 방송 인생 중 처음 겪는 일”이라고 밝혔다. 생방송 도중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은 탈레반이 파격적인 언론 플레이를 한다는 반증이다. 아프간의 한 현지 기자는 “탈레반은 미디어룸을 운영하며 많은 인원이 이를 위해 일한다. 내가 본 한곳은 여러개의 TV 모니터를 켜놓고 서방의 방송은 물론 대륙별 주요 방송사의 위성 방송을 시청하며 그날의 탈레반 뉴스를 실시간 체크한다. 탈레반은 더 이상 산에서 투쟁하는 게릴라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지난 8월 31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남동부 호스트시 거리에 모인 군중이 미국, 영국, 프랑스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등의 깃발로 덮인 관을 든 채 장례식 퍼포먼스를 벌이며 아프간전 승전을 자축하고 있다. / 호스트 로이터=연합뉴스 합법 정부로 인정받으려는 이유 탈레반이 미디어에 민감한 이유는 앞으로 탈레반이 세우는 아프가니스탄 정부 때문이다. 탈레반은 자신들의 정부가 국제사회에서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카불이 함락되며 각국 대사관들이 탈출한 상황에서 탈레반이 직접 외교관계를 맺기 위해 여론전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있다. 자신들이 극악무도한 이슬람 무자헤딘으로만 세계가 인식한다면 앞으로 탈레반에게 다가오는 난관이 많다. 우선 경제적인 문제가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탈레반이 카불 함락 후 기존 아프간 정부가 남겨둔 국고는 전무했다. 즉 예산이 0인 상황에서 정부를 물려받은 셈이다. 더군다나 미국이 아프간 중앙은행 국외자금 95억달러(약 11조원)를 동결했다. 벌써 아프간 내 생필품과 식료품 등 물가도 무섭게 치솟고 있다. 아프간 주민 하뮨씨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카불 전체가 암흑이다. 생필품값이 두 배 이상 뛰었고 은행에서 현찰을 인출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 아프간 사람들은 모두 패닉에 빠져 있다. 아프간은 이전에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화폐가 바뀐 적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화폐가 돈인지 뭔지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러니 탈레반은 정부를 구성해 내각이 결성되면 빨리 경제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 그러려면 국제사회의 탈레반 정부에 대한 신뢰가 중요하다. 현 탈레반 정부를 두고 세계 각국은 고심하고 있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테러조직인 탈레반인데 합법 정부가 된들 수교 관계나 경제적 협력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 자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 정부조차 아직 탈레반에 대한 관계 설정에 정확한 답을 못하고 있다. 이는 한국 정부도 마찬가지다. 탈레반 정부가 합법 정부로 인정받아야 악화된 경제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이 탈레반의 계산이다. 그래서 아프간에 남아 있는 외국인에 대한 폭력적 행동은 전혀 할 수 없고, 자국의 외국 협력자들에 대한 강력한 보복을 아직은 하지 못할 수 있다. 자칫 탈레반은 역시 테러조직이라는 인식이 더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8월 31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아프가니스탄전쟁에 대해 대국민 연설을 하고 있다. / 워싱턴 AP=연합뉴스 탈레반에게만 ‘파격’? 이제는 한 국가의 당당한 정권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탈레반은 이전과 비교했을 때 대폭적인 변화를 할 것으로 전망된다. 카불 점령 이후 탈레반은 개방적이고 여성과 소수민족에 포용적인 정부 구성을 약속했다. 하지만 이는 서구사회 기준과는 많이 다를 것으로 생각된다. 서로 눈높이가 다르다는 말이다. 탈레반으로서는 파격적인 정부 구성이 서구사회가 봤을 때는 그렇지 못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탈레반이 세우는 정부는 신정정치 정부이다. 신정정치란 성직자가 정치를 한다는 말이다. 서구사회의 민주주의 정치와 전혀 다른 형태이다. 또 탈레반은 샤리아(이슬람 원리주의)에 기반을 둔 법정과 정부를 세울 것이 당연하다. 모든 것은 샤리아에 기반을 두고 거기에서 조금 변화한 정도를 탈레반 나름의 파격이라고 발표할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이 직장에 다니는 것을 허용한다는 말만 하더라도 그렇다. 서구사회는 이를 두고 평소 직장 다니는 서구사회의 여성을 떠올리겠지만 탈레반 입장에서는 여성이 보호자 없이 직장을 나오게 하는 것 자체가 파격이다. 그래서 직장은 허용하더라도 여성의 직장 내 행동반경을 제약할 것이고, 고위직에 오르지는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서로의 눈높이 차이가 있다. 현 아프가니스탄 사태에서 미국과 서구사회는 예상치 못할 정도의 급변하는 상황을 맞아 당황하고 있다. 이는 20년간 탈레반에 대한 서구사회의 정보와 분석이 많이 빗나갔음을 알 수 있다. 기자가 본 아프가니스탄은 늘 중세시대였다. 중세 사람들과 현재 사람들의 충돌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일의 근본 문제이다. 그래서 서구사회가 아프가니스탄을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20년간 치른 아프간전쟁의 결론은 탈레반의 승리다. 우리 모두 이 혼란의 현대사의 목격자들이다.
특집
[방구석 극장전]버마 VJ 카메라로 본 민주화 투쟁기(2021. 04. 23 11:28)
2021. 04. 23 11:28 문화/과학
미얀마 민주화운동이 3개월째를 넘어가면서 시민의 희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중국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한 국제사회는 시위대를 지지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도움을 전하기엔 부족한 상태다. 그동안 타국의 민주화운동에 상대적으로 입장표명이나 개입이 턱없이 미흡했던 한국 정부와 시민사회는 활발히 의견을 개진하는 중이다. 버마VJ / 다음영화 미얀마 민주화운동은 올해 초 갑자기 발생한 게 아니다. 1962년부터 기나긴 군부독재에 맞선 1988년 8·8항쟁, 2007년 샤프란 항쟁 등이 끈질기게 일어났다. 한계에 부딪힌 군부는 수십년간 가택 연금했던 민주화의 상징, 국부 아웅산의 딸인 수치와 그의 정당 NLD에 약간의 권력을 나눠주며 형식적 민주화를 진행한다. 사람들은 낙관했다. 하지만 군부독재는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자국민을 대상으로 내전을 벌이는 중이다.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보여주듯, 3세계 독재정권에 맞선 민주주의 투쟁을 국내외에 알리는 데 서구 언론과 영화계 역할은 결코 작지 않았다. 자국민에게는 폭압적 독재자라도 강대국 시민권자에겐 주춤한다. 그 이점을 활용해 미얀마 민주화운동 영상물은 거의 전적으로 서구의 시선과 자금에 의해 만들어져 왔다. 8·8항쟁 직후 군부 탄압을 피하려는 민주화 인사들과 함께 목숨 건 탈출을 감행하는 미국인 의사 이야기를 다룬 <비욘드 랭군>(1995)과 아웅산 수치의 전기영화 <더 레이디>(2011)를 통해 그가 2010년 가택연금에서 석방되기까지 과정과 민주화운동의 개략적 흐름을 엿볼 수 있다. EBS의 다큐멘터리 전문 OTT 플랫폼 D-box에는 <버마 VJ>라는 작품이 등록돼 있다. 감독은 덴마크인이지만 작품 속 영상은 거의 전부가 ‘버마 민주의 소리(Democratic Voice of Burma·DVB)’ 지하방송 활동가들이 생명의 위협 속에서 촬영해 해외로 반출한 것들이다. 대부분 현장에서 휴대폰이나 핸디캠으로 촬영됐다. 감독은 이를 편집하고 정리했을 뿐이다. 비록 지난 10년의 민주화일망정, 이를 쟁취해낸 2007년 투쟁의 시작부터 종막까지가 생생히 담겨 있다. 물론 그 대가는 가볍지 않다. 작품 속 화자의 지인 몇은 끝내 소식이 끊어졌고, 비밀리에 운영되던 방송본부는 끝내 경찰에 ‘함락’되고 만다. 하지만 수많은 시민의 희생과 불굴의 의지를 목격한 화자는 ‘해야 하기 때문에’ 다시 생명을 걸고 미얀마로 잠입한다. 그 장엄한 결의 앞에서 (이제 군부독재의 총칼 걱정은 않는) 한국 시민은 답해야 한다. 우리가 힘들 때 누군가 자기 안위를 희생하며 소득 없는 일에 나섰다. 이제 우리도 찬란한 민주화 투쟁 역사를 자랑만 할 게 아니라 그에 희망을 품고 거리에 나선 이들을 도울 궁리에 나서야 할 때다.
방구석 극장전
[주간 舌전]“광학카메라만 작동되었을 뿐 전자파의 방사는 일절 없었다.”(2018. 12. 31 11:58)
2018. 12. 31 11:58 정치
한·일 양국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가 해군 함정의 레이더 전파 발신 논란으로 수면 위에 올랐다. 한국 해군 함정이 표류 어선 구조과정에서 주위를 비행하던 일본 측 초계기를 조준해 사격통제 레이더인 추적레이더 전파를 쐈다는 주장이 일본 방위성에서 나온 것이다. 2018년 12월 20일 해군 구축함인 광개토대왕함은 북한 어선이 동해상에서 표류 중이라는 구조신호를 보내자 현장에 급파돼 구조작업을 벌인 바 있다. 일본 측은 이 과정에서 광개토대왕함의 추적레이더(STIR)가 일본 초계기를 의도적으로 겨냥했다며 증거도 확보했다고 여러 차례에 걸쳐 주장했다. 레이더 조준이 무기 사용에 준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일본 방위성은 유감이라는 뜻을 표명했다. 기동훈련 중인 광개토대왕함 / 해군 제공 그러나 국방부와 해군은 광개토대왕함이 구조 탐색을 위해 가용한 모든 방법을 쓰면서 3차원 레이더(MW08)로 광범위한 구역을 탐색했지만 추적레이더를 작동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안상민 합동참모본부 작전2처장(해군 준장)은 12월 24일 국방부 정례브리핑에서 “일본 측이 위협을 느낄 만한 어떠한 조치도 없었다”며 일본의 주장을 반박하는 한편 “한 나라의 군함 상공으로 초계기가 통과하는 것은 이례적인 비행”이라고 일본 초계기의 인근 공역 비행 자체가 문제라고 비판했다. 국방부 전비태세검열단도 26일 레이더 운용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추적레이더는 가동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양국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증거를 확보했다고 주장하는 일본 측도 수신한 레이더 전파 주파수는 공개하지 않고 있어 공방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
주간 舌전
[인생도처유상수]카메라 수리 이기훈 씨-경험 과신 않고 신상 나올 때마다 새로 배워(2017. 05. 29 19:03)
2017. 05. 29 19:03 사회
“기술이 너무 아까워서 은퇴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는 훗날 막내딸을 시집보내고 나면 전원에 집을 짓고 택배로 카메라를 받아 고치겠다는 꿈을 가졌다. 아주 오래된 물건, 만든 지 100년도 더 된 물건까지 일부러 찾아 쓰는 사람들이 있다. 고장 나면 다시 고치고 구할 수 없으면 세상 끝까지 뒤져 손에 넣는 이들을 골동벽과 수집벽이 있다고 치부한다. 카메라 애호가들 중에 골동벽을 가진 이들이 유난히 많다. 굳이 오래되고 불편한 아날로그 카메라에 환호하고 도취한다. 그들이 애정과 관심을 가진 물건이 아플 때 찾아가는 곳이 있다. 웬만한 카메라들은 공식대리점이 있어 쉽게 고치지만 아주 오래된 카메라들은 수리하기가 쉽지 않다. 옛날 카메라를 쓰는 이들에겐 몇 군데의 수리점이 족보로 전해진다. 어떤 카메라는 어디가 잘 보고, 렌즈 곰팡이는 누가 수리를 잘한다는 식이다. 그 중 한 곳인 충무로 삼성사 이기훈 대표는 카메라 수리를 배운 지 40년이 넘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다. 특히 아사히펜탁스 중형카메라는 미국에서도 수리하러 찾아온다. 중대형 카메라를 고칠 수 있는 곳은 한정됐다.” 일반 카메라보다 큰 판형으로 스튜디오나 전문작가들이 애용하는 중형카메라는 그 크기부터 육중하고 기계의 신뢰성과 정확성을 생명으로 삼는다. 이기훈씨는 “이 카메라에 관한 한 세계적”이라고 자신했다. 그는 아직도 한 달에 150대가량의 카메라를 고친다. 그가 얻은 명성의 시발엔 고통스럽고 슬픈 일이 숨어 있었다. 우리나라 기술자들의 손재주와 수준은 세계적이라는 것이 이기훈씨의 지론이다. 소문 듣고 미국에서도 찾아와 젊은 시절 카메라 서비스센터 수리기사로 근무하던 때 펜탁스제 중형카메라 한 대가 찾아왔다. 지도 제작업체에서 항공촬영용으로 사용하던 장비였다. 수리를 마치고 돌려준 카메라는 항공촬영 중 필름이 하나도 감기지 않았다. 대형사고가 터진 것이다. 카메라는 고사하고 촬영을 위해 띄운 막대한 비행경비까지 물어야 할 판이었다. “어떻게 처리해줄까?”라는 그의 떨리는 물음에 같은 기종으로 새 카메라 하나를 사주는 것으로 마무리 짓자는 답이 돌아왔다. 월급 13만원을 받던 시절 카메라는 100만원이 넘었다. 급전을 빌려 카메라를 사주고 대신 고장 난 카메라를 받았다. 밤을 새워서 뜯어보고 나사 하나까지 살펴보자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았다. 작은 스프링 하나. 필름을 넘기는 톱니를 움직이는 스프링이 제 몫을 하지 못했다. 아주 작은 일이 큰일을 망치는 법이다. 그 카메라는 그의 보물 1호가 됐다. “앞으로도 아마 어떤 일이 있어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수 아주머니에게 꼬박 6개월 동안 월급을 고스란히 바쳐야 했지만 그 일을 계기로 중형카메라의 속살을 알았다. “자존심 때문이었다. 남에게 피해주기 싫었고 그 일로 여러 가지 질책을 받는 일도 싫었다. 그 카메라를 속속들이 알고 싶었다.” 훗날 그는 결국 그 자존심 때문에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게 된다. 오늘의 번영 뒤에는 그의 세대가 겪었던 가난과 절망이 숨어 있다. 경기도 파주의 고단한 집안 출신인 그는 중학교를 마치고 공장에 취직했다. 월급이라 할 수 없을 몇 푼을 벌던 그에게 집안을 드나들던 지인이 “차라리 기술을 배우라”고 했다. 인천에 가면 먹여주고 재워주는 곳이 있다는 소개에 하나라도 입을 덜기 위해 집을 떠났다. 미군부대에서 나오던 카메라를 고치는 곳에서 그야말로 밥만 먹으면서 일을 배웠다. 잘못하지 않아도 가혹한 말은 비수가 돼서 날아다니고, 배우지 않은 것도 모른다고 타박 받아야 했다. 6개월이 지나자 첫 월급 5000원을 받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첫 월급으로 어머니께 브라우스 한 벌을 사다 드렸다.” 당시 카메라 수리는 5년은 배워야 첫걸음을 뗀다던 시절이었다. 카메라를 배워 가자 필름에 대해 알고 싶었다. 필름과 현상·인화를 배우기 위해 현상소에 취직한 것이 그의 운명을 가르는 선택이 됐다. 고통의 기억이 됐던 중형카메라는 그의 보물 1호가 됐다. 실수로 여섯 달 월급 바친 카메라가 보물 1호 기계 구조에 대한 이해가 빨라 현상소 영선실 일을 곁가지로 거들었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깨치던 시절이었다. 그는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배우고 싶었다. 학력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배우고 깨우치고 숙달하는 방법밖엔 없었다. 운명은 우연의 모습으로 닥쳐왔다. 그가 일하던 현상소에서 일본 카메라회사와 합작으로 서비스센터 사업을 시작했다. 일제 카메라가 시장을 지배하자 수리의 수요가 높았기 때문이다. 카메라 수리기사를 모집해서 교육해야 했는데 그럴 만한 인력이 귀했다. 자연히 기회는 그의 차지가 됐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기술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측정장비로 카메라의 이상을 읽는 법부터 카메라 구조에 관한 매뉴얼까지 일본 카메라 제조사 인력으로부터 모든 과정과 단계를 정식으로 이수했다. “일본 펜탁스 카메라 공장에 파견가서 교육받을 때 정신적인 충격이 있었다. 그들은 일과시간에는 모두 집중해서 일만 했다. 잡담도 흡연도 없었다. 열심히 일하고 끝나는 시간에 정확히 마치는 모습이 우리 현장 분위기와 너무나 달랐다.” 그는 기술뿐 아니라 일하는 자세를 배울 수 있었다. 당시엔 기술자의 감과 경험으로 수리를 진단하고 고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기계에 물려 수치를 보고 정밀하게 조절하며 정확성을 따지는 시기가 열렸다. 형광등과 브라운관 텔레비전의 주사선에 맞춰 카메라 셔터 속도를 가늠하던 대충의 시간은 끝나고 있었다. 그는 측정장비를 통해 수치를 읽고 카메라회사에서 설계한 대로 조정하고 고치는 기술을 배웠다. 이미 카메라 수리를 배웠던 전력이 있던 터라 수리기사로 안착하는 것은 쉬웠다. 제대로 된 월급을 받던 평범한 직장생활을 그만둔 사건은 예의 중형카메라 대형사고 때문이 아니었다. “500원 때문에 회사를 그만뒀다. 내가 기술을 가르치는 이들이 나보다 월급 500원이 더 많았다.” 실력은 장벽이 될 수 없었지만 학력은 불공정과 자존심의 상처를 강요했다. 서비스센터에서 일하는 기사들은 대부분 그의 지도를 받았다. 대졸 학력으로 채용된 직원들은 처음에는 그보다 월급이 적었지만 한두 해가 지나면 그보다 더 많은 급여를 받아갔다. 기술은 그가 뛰어났지만 사회적 관습은 그에게 굴복을 강요했다. “받아들일 수 없어서 시정을 요구했다. 말로만 알았다고 하고 넘기는 일이 몇 차례 있자 사표를 냈다.” 결혼 직후여서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실력 때문에 고개를 숙일 수는 있어도 부당함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찾아온 곳이 충무로였다. “이제는 다 떠났지만 1987년도에는 광고회사들과 스튜디오들이 많았다. 카메라 가게는 거의 없었다. 내가 중형카메라를 잘 고쳤는데 그것을 쓰는 곳 대부분이 충무로에 몰려 있었다.” 임대료가 제일 싼 장소를 찾다보니 다락방 수준의 작업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만 20년 가까운 시간을 지냈다. 이제는 세상을 떠난 광고사진계의 대가 김한영 선생의 카메라나 백두산 사진으로 유명한 안승일 작가의 카메라도 그의 손으로 고쳤다. 그는 “직장 그만두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호황의 시대와 성공의 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카메라의 유행도 돌고 돌아 과거 외면받던 자동카메라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인터넷에 호평 돌면 중고값도 크게 올라 이기훈씨는 정확히 오전 9시30분에 수리센터 문을 연다. 문 닫는 시간은 저녁 7시, 토요일에는 4시까지 일하고 일요일과 공휴일엔 쉰다. 거의 카메라 셔터처럼 정확히 시간을 지키는 이유는 그를 찾는 사람들 때문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다급한 손님이 찾아온다. 급히 문을 연 작업복 차림의 손님 손에는 페인트 얼룩이 묻어 있다. 인테리어 공사현장에서 사진을 찍다가 찾아온 것이다. “렌즈가 말을 안 듣는다”는 설명에 이기훈씨는 카메라를 받아들었다. 렌즈를 들여다보고 소리를 듣고는 “줌이 안될 것이다. 입원시켜야 한다”고 진단을 내렸다. 별다른 질문도 대화도 없었다. 삼성사를 찾는 사람들은 현장에서 급하게 찾아오는 이들이 많았다. 어떤 카메라는 살펴보고는 그대로 돌려보냈다. 필름덮개가 뻑뻑하다는 소리에 찬찬한 설명을 했다. “이 기종은 생활방수 때문에 고무패킹이 들어 있어 그렇다. 수리할 필요 없다.” 그가 돌려보낸 것은 전자동, 일명 똑딱이 필름카메라였다. “카메라도 유행이 심하다. 특히 요즘엔 인터넷 때문에 어느 것이 좋다는 평이 돌면 싹쓸이 현상이 있다. 우수한 렌즈코팅 때문에 소문이 난 소형 자동카메라 하나는 중고가격이 4배가 뛰었고, 요즘 수리센터로 몰려오는 애물단지다.” 80년대 생산된 그 카메라는 독특한 색감과 선명한 해상도로 입소문을 탔다. 한때 일본인들이 한국 시장을 뒤져서 가져가더니, 이어서 중국인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제는 한국 사람들이 다시 일본을 샅샅이 뒤져서 가져오고 있단다. 덕분에 가격도 올라서 몇 배가 뛰고 말았다.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때 국내 카메라 시장이 커졌다. 내겐 IMF 구제금융 시절이 가장 호황이었다.” 다소 의아했지만 억대의 위로금을 받고 직장을 그만둔 한량들이 비싼 카메라를 사들고 무료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충무로 골목 곳곳에서 고급 카메라가방을 멘 동호인들을 볼 수 있었다. 충무로에 카메라 가게들이 몰리고 식당에서도 사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났다”고 한다. 취미와 예술이 누군가에게는 고통을 잊는 아편이 됐다. 그는 그 언저리에서 호황을 누렸다. 수리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직원을 늘리고 수리센터도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흥청망청의 세월은 급작스럽게 찾아온 디지털 앞에서 끝나고 말았다. “필름과 아날로그의 시대가 끝나면서 다시 고독한 시절로 돌아갔다. 그러나 언젠가 아날로그를 그리워하고 돌아오는 시절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에게 욕심이 없는 것이 복이라고 말한다. 돈을 욕심내면서 망가지는 모습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했다. 힘겨우면 즐겁게 술 한 잔으로 잊어버리고 다시 일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기술이 있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도 줄 수 있다. 가끔은 카메라 수리 때문에라도 건강하게 오래 살라는 축원의 인사도 듣는다. 인두를 달궈 보일 듯 말 듯한 카메라 제어 칩을 떼어내면서 “이걸 납땜해서 수리하는 곳은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는 그에게는 기술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심이 담겼다. “기술이 너무 아까워서 은퇴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는 훗날 막내딸을 시집보내고 나면 전원에 집을 짓고 택배로 카메라를 받아 고치겠다는 꿈을 가졌다. 그래도 카메라 수리밖에는 해보지 못한 삶이 아쉽긴 하다고 했다. 이기훈씨는 지금도 수리에 막히면 같은 기종을 구해 똑같이 뜯어 부품을 옮겨보며 고친다. 그리고 배운다. “배우지 않고 알 수 있는 일은 없고, 원리를 깨치지 않고 고수가 되는 길은 결코 없다”고 말한다. “경험을 과신하지 말아야 한다. 새로운 카메라가 나오면 새로 배운다. 카메라회사와 수리센터는 함께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이 그의 확신이다. 경험의 교만을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딛고 섰다. 그 덕에 오늘도 사람들은 망가진 카메라를 들고 그를 찾아온다.
인생도처유상수
[사진공모전]카메라와 마주친 순간(2013. 10. 08 16:16)
2013. 10. 08 16:16 사회
일요일 오후 아파트 놀이터에서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이 아빠와 함께 숨바꼭질을 하다가 아빠의 카메라와 딱 마주친 순간을 담았습니다.  - 정한교 이달의 최우수작 선정평 사진공모전 이달의 최우수작에는 1044호에 게재된 최진수님의 작품이 선정되었습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위해 우산을 씌워주시는 모습을 찍은 사진으로, 노부부의 다정한 모습을 적절하게 잘 표현한 작품입니다. 최진수님에게는 니콘이미징코리아에서 제공하는 디지털카메라를 상품으로 전달해 드립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응모 요령 소재나 주제 제한이 없습니다. 다만 과도한 보정은 사양합니다. 합성한 사진도 곤란합니다. 촬영 장소와 시간을 밝혀 주시고, 짧은 글도 덧붙여 주십시오. 사진사이즈를 2mb 이상으로 올려주세요. 응모 방법 wkhphoto@kyunghyang.com으로 사진과 글, 연락 가능한 전화번호를 보내 주세요. 상품 매월 ‘이달의 최우수작’ 수상자에게 니콘 쿨픽스 S3100 1대 수여.(기종은 추후 사정에 따라 바뀔 수 있습니다) 제세공과금은 당첨자 부담입니다. 발표 및 게재 매주 지면. 월별 최우수작은 다음달 첫째주. 후원 : 니콘이미징코리아
사진공모전
[언더그라운드, 넷]‘카메라 의식녀’, 영구미제로 남을까(2013. 04. 29 14:51)
2013. 04. 29 14:51 사회
인터넷 게시판에 돌아다니는 자료들을 보다보면 영구미제로 남은 것들이 꽤 있다. 더 이상 추적이 불가능한 경우다. 이를테면 ‘개똥녀’가 이에 해당한다. “지하철 2호선 아현역에서 황급히 짐을 챙겨 내렸다”는 전언을 끝으로 그 뒤의 행적이라든지, 붙여진 닉네임에 대한 생각 등은 확인할 길이 없다. “(남성 군복무 기간이) 2년이면 너무 짧고 3년이면 적당할 것 같다”는 언론 인터뷰 때문에 ‘군삼녀’라는 닉네임이 붙은 여학생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부정적인 딱지가 붙은 경우에 해당한다. “이름을 바꾸고 이민 갔다”(개똥녀), “비키니를 입고 인터뷰한 다른 화면이 있다”(군삼녀) 등의 추가적인 소문이 있지만, 역시 확인이 불가능한 뜬 이야기다. 1~2년 전부터 ‘카메라 의식녀’, ‘낙서녀’라는 이름으로 돌아다니는 사진. | 인벤 1~2년 전부터 인터넷 게시판에서 볼 수 있는 ‘카메라 의식녀’ 또는 ‘낙서녀’ 사진 역시 비슷한 전철을 밟는 중이었다. KBS 과 시사토론, EBS 프로그램 등을 넘나들며 방청객으로 참여한 한 여성을 두고 붙여진 이름이다. 어떤 방송프로그램이든 여러 대의 카메라가 다각도로 관중석을 비추기 마련인데, 그때마다 카메라를 향해 ‘살포시 미소짓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는 데서 붙은 이름이다. 낙서녀는 또다른 캡처에서 그녀가 열심히 뭔가 끄적이고 있는데, 적은 걸 확대해보니 ‘강연자의 말을 필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없는 낙서를 하고 있더라’는 데서 나온 별명이다. 4월 23일, 한 유명 커뮤니티 게시판에 ‘카메라 의식녀’의 사진이 다시 올라왔다. 대부분 ‘보고 또 보고’ 식의 식상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런데 한 사용자의 댓글이 눈길을 끌었다. “외대 학보사 김○○씨로 판명났는데?” 오오. 이건 무슨 말? 바로 확인에 들어갔다. 외대학보사 기자 김씨(22·여)는 지난해 대선 때 누리꾼의 관심을 모았다. 당시 김씨는 박근혜 후보 초청 대학생 토론회에서 투표시간 연장 문제에 대해 어물쩍 넘어가려는 후보의 말을 제지하며 확실한 입장을 밝힐 것을 요구해 화제를 모았다. 당시 언론 보도에 나온 사진을 보면 확실히 김씨는 ‘카메라 의식녀’를 닮은 것도 같았다. 찾아보니 보도 직후에 “‘카메라 의식녀’와 동일인 아니냐”는 설왕설래도 있었다(기자보다 눈썰미가 좋은 백모 기자도 “동일인물 맞네”라고 확인(?)해줬다). 연락해보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시 ‘카메라 의식녀’ 맞나. “아, EBS에 방청객으로 나온 그분요? 저도 그 사진 본 적 있어요. 저 아닌데요.” 김씨는 “그분은 저보다 더 예쁘던데”라고 덧붙였다. 누리꾼 추측이 틀렸다. 덧붙여 근황을 물었다. 박근혜 후보 질문 사건 때 용자(勇者)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뒤탈은 없었을까. “왜 없었겠어요. 그 사건(?) 이후 압력이 들어오고 기사도 못쓰게 되었고… 결국 학보사를 나왔어요.” 그 뒤 김씨는 학교 밖에서 국민사랑의회라는 대안언론 일도 하고 있다. 나중에 졸업하면 진보언론에 들어가는 것이 꿈이라고도 덧붙였다. 그 꿈, 꼭 이루시길 바란다.
언더그라운드. 넷
[길에서 만난 사람]설악산 봉정암의 ‘찰나’를 카메라에 담다(2013. 01. 22 13:59)
2013. 01. 22 13:59 문화/과학
설악산 산등성이에 올라앉은 구름이 걷히니 지극한 마음으로 대중을 끌어안았던 관음의 미소처럼 따사로운 햇살이 비로소 석탑을 감싸안는 찰나이다. 관조(觀照). 한자를 그대로 풀면, ‘그대로 비추어 바라보다’로 해석될 수 있다. 서양철학의 미학적 관점에서 관조(contemplation)는 자연이나 미술품을 보고 감동하는 계기나 태도를 의미한다. 이는 아름다운 자연이나 작품을 감상하는 미적 인식의 태도이자 관점이다.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상태에서 세상을 관조하는 어느 사진가의 걸음을 따라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봉정암(鳳頂庵)을 찾아 오른다. 봉정암은 설악산 소청봉에 있는 백담사 부속 암자이다. 대표적 불교 성지인 5대 적멸보궁 중의 하나로 하늘과 맞닿아 있는 거대한 암석 위에 자리한 석가사리탑을 찾아 수많은 불자들이 찾는 순례지다. 봉정암 석가사리탑. | 장명확 하지만 봉정암에 오르는 길은 만만치 않다.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여정을 확인한 후 산에 오를 채비를 단단히 한다. 사실 당일로 봉정암을 다녀오는 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아침 햇귀가 떠오르기 전에 백담사에 도착할 셈으로 길을 달린다. 백담사에서 봉정암으로 오르는 길은 두 가지다. 백담사에서 영시암 쪽에서 수렴동 대피소로 가는 코스와 오세암을 거쳐서 올라가는 코스다. 수렴동 코스로 길을 잡아 걸으니 이번 여정의 동행인 사진작가 장명확씨가 길잡이가 되어준다. “수렴동 대피소를 지나 쌍폭까지는 대체로 오를 만합니다. 완만한 경사도를 이루며 편한 길입니다. 봉정암 못미쳐 깔딱고개만 넘어서면 되니, 아무래도 이쪽이 오르기에 수월합니다.” 20년 넘게 전국의 사찰을 찾아다닌다는 그는 올해 첫 발걸음으로 봉정암을 찾았다고 전한다. 백담사에서 계곡을 따라 오르니 잔설이 남은 겨울 산풍경에 가슴이 탁 트인다. 수렴동 계곡을 따라 올라 와룡폭포, 쌍폭(雙瀑) 등을 지나 깔딱고개를 넘어서자 숨이 턱에 차오른다. 더 높은 하늘 아래, 설악의 겨울 산자락 깊은 곳에 봉정암이 들어앉아 순례자를 맞이한다. 자연과 어우러진 합일의 경지 10여년 넘게 우리나라의 전통사찰과 이름 없는 암자를 찾아 영상을 담아내고 있는 사진가 장명확씨.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건너가 도선율사로부터 수계한 후 가사와 발우 및 석가세존의 진신사리를 나누어 받아가지고 돌아와 동왕 12년(643) 이 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하였다고 전해진다. 암자 이름을 봉정이라고 한 것은 신라 애장왕 때 조사 봉정(鳳頂)이 이곳에서 수도하였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짐작한다. 봉정암은 현재는 법당과 요사채만 갖추고 있어 그 규모가 큰 편은 아니다. 다만 법당 옆 바위 위에 세워진 봉정암 석가사리탑이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불러 모으고 있다. 이 탑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석탑으로 자장이 사리를 봉안하였던 때보다 훨씬 후대의 양식을 띠고 있어,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자연석 그대로에 탑신을 세워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석탑입니다. 자연과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탑 모양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고 정교한 균형비가 돋보이며, 자연을 배경으로 한 어울림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석탑은 봉정암 오른쪽 암벽 뒤에 세워져 있는 품이다. 거대한 암벽을 지대 겸 기단으로 삼아 세워진 5층 석탑은 옥개석과 탑신석을 각각 하나씩 쌓아올려 세워졌다. 설악산의 능선 위에 서 있는 석탑의 모습은 완전한 형태로 주변의 웅장한 산세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석탑에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는 불자들의 모습이 또한 한데 어우러지는 품이다. 석탑을 마주한 그의 눈빛이 밝아진다. 불교 및 우리 전통문화를 찾아 사진에 담아내는 전통문화 사진작가 장명확씨. 그는 10여년 넘게 우리나라의 전통사찰과 이름 없는 암자를 찾아 영상을 담아내고 있는 사진가다. “대략 400개 정도의 사찰을 다닌 듯합니다. 처음에는 다큐멘터리 작업으로 자연을 찾았는데, 자연 속에 들어앉은 절집을 마주하며 그만 빠져버렸습니다. 이후 사찰 사진을 전문으로 촬영하게 된 셈입니다. 자연에 대한 관조를 그 출발로 볼 수 있습니다. 자연과 어우러진 사찰 풍경,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온전히 어우러짐에 매력을 느낀 것입니다.” 봉정암에 들어서서 석탑을 마주하고도 그는 한동안 카메라를 꺼내지 않는다. 그리 서두를 것 없이 먼저 자연을 바라보고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 그가 피사체를 바라보는 자세다.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상태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는 고교시절 카메라를 접하고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면서 사진에 입문하여 30여년 동안 사진을 업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는 대학시절 스승이 문득 던진 ‘수미산(須彌山)을 찾아보거라’는 주문이 평생 화두가 되었다고 말한다. 수미산은 불교의 세계관에 나오는 상상의 산으로 세상은 아홉 산과 여덟 바다가 겹쳐져 있는데, 가장 높은 산이 바로 수미산이다. 설악산 대청봉 아래 자리한 봉정암. | 장명확 그래서 그는 아직도 대상을 마주하기 전에 화두 굴림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마음으로 깨달아야 비로소 보고 느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 사찰은 자연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이 점이 바로 사찰 풍경, 불교사진이 지닌 매력입니다. 지금까지 다녀본 사찰 중 설악산 봉정암, 전남 해남의 미황사, 전남 순천의 송광사와 선암사 등이 온전히 마음에 자리한 사찰로 손꼽을 수 있습니다.” 고요한 가운데 마음이 흐르는 찰나 그는 지난 10여년 동안 전통사찰과 우리 전통문화 사진을 주제로 현재까지 다양한 사진작업을 해왔다. “우리 풍경, 우리 문화의 색은 고요하면서도 강렬합니다. 또 사찰은 가장 여실히 우리의 역사와 억겁의 시간이 존재하는 공간이도 합니다. 고요한 가운데 마음이 흐르는 그 찰나를 담아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흰 눈 덮인 설악의 설경을 배경으로 들어앉은 봉정암에 시간이 흐른다. 설악산 대청봉 아래 솟아오른 석탑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마치 순례자의 모습처럼 결연하기까지 하다. 그는 이 시간이 비록 찰나이기는 하여도 분명 시공의 경계를 넘어서는 소중한 시간이라고 믿는 듯하다. 성스럽고도 신비한 그 자리에서 그는 지극한 마음으로 오래도록 온전한 빛이 깃들기를 기다린다. 순간 탑신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에 세상을 마주했다는 안도감이 배어난다. 고요한 가운데 마음이 흐르는 순간 그가 카메라의 셔텨를 누른다. 사진가 장명확은 서정 풍경이 좋아 자연과 어우러진 우리 전통사찰을 주작업으로 하는 사진가다. 그는 그간 전통사찰은 물론 불교계 큰 스님들의 모습을 담아왔으며, 앞으로도 지금의 작업을 이어갈 것이다. 글·사진|이강 leeghang@tistory.com
길에서 만난 사람
이전1 2 3 다음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