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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경향(총 4 건 검색)

이번엔 태권도 뮤지컬이다!
이번엔 태권도 뮤지컬이다!
2022. 04. 29 13:57 문화/생활
K팝, K뷰티를 이을 다음 주자는 누구일까. K스포츠, 태권도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태권도의 저변 확대 및 세계화를 위한 문화 콘텐츠 육성사업 일환으로 기획된 뮤지컬 ‘태권, 날아올라’가 오는 6월 12일부터 7월 3일까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극장용에서 무대에 오른다. 한국체육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태권도 유망주들의 성장 스토리를 주제로 한 이 작품은 여러 대회에서 오랜 기간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한 태권도부 코치와 부원들이 성적이 좋은 다른 종목 팀에게 훈련장을 뺏길 위기에 처하며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웅장한 음악과 국가대표 시범단이 펼치는 화려하고 역동적인 태권도 퍼포먼스가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이번 무대에는 미국 서바이벌 쇼프로그램 ‘아메리카 갓 탤런트’에서 태권도 퍼포먼스로 화제를 이끈 배우 엄지민이 캐스팅돼 기대감을 더한다. 당시 그가 참여한 세계태권도연맹 태권도 시범단은 뛰어난 퍼포먼스를 선보인 이들에게 주어지는‘골든 버저’를 받고 결선에 진출한 바 있다. 그는 “작품을 위해 보컬 및 연기 트레이닝을 장기간 소화하며 연습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동료들과 함께 새로운 도전을 통해 관객들과 만날 날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티켓은 오는 5월 3일 낮 12시부터 인터파크 티켓사이트에서 예매 가능하다.
뮤지컬
7月 2012 런던올림픽 태권도 금메달 기대주 이대훈 선수
2012. 01. 18 17:45 화제
유럽 전지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이대훈(20·용인대학교) 선수를 태릉선수촌의 태권도장에서 만났다. 182cm의 키에 튼튼한 목선, 날렵한 몸매를 가진 그가 듬직해 보였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2011년 태권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거머쥔 그는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58kg급 금메달에 도전한다. 그가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때였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그는 대만 선수를 꺾고 당당히 금메달을 차지해 국민적 영웅이 됐다. 체급에 비해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서 상대 선수의 키를 훌쩍 넘기는 돌려차기가 가히 일품이었다. “처음으로 국가대표가 되면서 아시안게임이 얼마나 큰 대회인지, 금메달을 따면 군 면제의 특권이 주어지는지도 모르고 나갔어요. 그래서 긴장감이나 부담감이 전혀 없었죠. 오히려 올림픽을 앞두고는 대회 명성의 중압감에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지난해 6월, ‘2012 런던올림픽 세계 선발전’에 출전한 그는 어깨가 무거웠다. 대한민국 태권도의 런던올림픽 진출 여부가 그의 승패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끝까지 중심을 잃지 않았던 이대훈 선수는 준결승전에서 태국 선수를 이기고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다. “출전권을 따낸 국가에서 각 체급당 국가대표를 선발하게 돼 있는데, 그 선발전이 2월 즈음 있을 예정이에요. 그 선발전에서 이겨야만 런던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거죠.” 무난히 출전권을 따내지 않겠냐고 묻자 “모르겠다”라며 쑥스러운 웃음을 짓는 이대훈 선수.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다섯 살 때부터 태권도에 푹 빠져 살아왔다는 그에게는 젊음과 미래의 꿈이 태권도라는 이름 안에 모두 포함돼 있는 것 같았다.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정말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셨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됐죠. 주위에서 어린 나이에 많은 것을 이뤘다고 하시는데 사람들의 기억 속에 깊이 자리 잡기 위해서는 앞으로 해 나가야 할 것들이 더 많아요. 해외에 나가 우리나라의 이름을 알리고, 국민에게 뜨거운 감동을 전해줄 수 있는 그런 선수가 되고 싶어요.” 어깨를 짓눌렀던 올림픽에 대한 부담감을 떨쳐내고 오는 7월, 런던 하늘을 가를 그의 황금빛 돌려차기를 기대해본다. <■글 / 진혜린(객원기자) ■사진 / 이성원>
남성화장품 모델로 발탁된 태권도 금메달리스트 문대성
2005. 04. 01 연예
“‘예와 도’를 중시하는 태권도 정신이 제 매력의 비결 아닐까요” 아테네 올림픽의 열기가 전국을 뜨겁게 달군 지난 여름. 그 열기를 절정으로 이끈 주인공은 뭐니뭐니해도 태권도 금메달리스트 문대성이다. 올림픽 마지막 날 그가 우리에게 안겨준 통쾌한 금메달의 ‘맛’은 많은 이들에게 짜릿함으로 남아 있다. 군더더기 없는 일격으로 상대를 제압한 실력과 모델 못지잖은 외모로 명실상부한 ‘스타’가 된 그의 절도 있는 매력. 준수한 외모와 세련된 매너의 태권도 스타 작년 8월 아테네올림픽 마지막 날, 마치 한 편의 CF 장면처럼 그림 같은 일격으로 상대를 누르고 금메달의 주인공이 된 문대성 선수(30). 그의 승리는 태권도 종주국의 자존심을 드높였을 뿐 아니라 전 국민에게 잊지 못할 짜릿함을 안겨주었다. 주특기인 왼발 뒤후려차기 한 방으로 그리스의 태권도 영웅 알렉산드로스 니콜라이디스를 무릎 꿇게 한 그의 경기는 태권도의 진수를 한눈에 보여주는 명장면이었다. 우리나라가 메달 집계 종합 9위로 10위권 안에 재진입할 수 있던 것도 천금 같은 그의 마지막 승리 덕분이었다. 매트에 나가떨어진 상대 선수에게 따뜻한 포옹을 건네는 모습 또한 인상적이었다. 당시 그의 스포츠맨십을 높이 평가한 그리스기자협회는 그에게 아테네올림픽 페어플레이상을 시상하기도 했다. 180cm가 넘는 키에 운동으로 다져진 몸, 선한 미소가 매력적인 호남형 외모 역시 운동 실력 못지않게 수많은 여성 팬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실제로 지난 올림픽에서 탄생한 스포츠 스타들 가운데 각종 언론매체의 섭외 영순위는 단연 문대성 선수였다. 막대한 금액을 제시한 K-1, 이종격투기대회뿐 아니라 적잖은 연예 기획사에서 그에게 눈독을 들이며 달콤한 제안을 건네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돈보다 명예를 택했다. 갖가지 제안들을 뿌리치고 올해 초 자신의 모교인 동아대 태권도부 감독 직을 맡은 것. 지난 1999년 동아대 체육학과를 졸업한 문대성 선수는 용인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현재는 국민대에서 체육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지도자 생활과 학업을 병행하는 한편, 각종 행사의 홍보대사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무주태권도공원 홍보대사를 비롯해서 경기도 문화의전당이 태권도를 주제로 준비중인 태권도 퍼포먼스 ‘The Moon’의 자문위원, ‘나라사랑 무궁화사랑 2010’ 프로젝트의 ‘무궁화 홍보대사’, 부산병무청 병무홍보대사 등 ‘돈’과 상관없는 각종 봉사 활동에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화장품 모델로 발탁됐다. 엔프라니에서 처음 출시하는 남성 화장품 ‘페라루크’의 메인 모델로 선정된 것. 여배우 이은주와 함께 문대성 선수를 새 모델로 내세워 의욕적으로 마케팅을 벌일 예정이던 엔프라니는 이은주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본의 아니게 난처한 입장에 처하기도 했다. 엔프라니 관계자는 “직장 생활 2~3년 차 남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남자들이 닮고 싶어하는 ‘카리스마’의 소유자를 물색했다”며 강인하면서도 젠틀한 문대성 선수의 매력이 제품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진다고 설명했다. 꽃미남과 메트로 섹슈얼의 유행 속에서 오히려 강한 남성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겠다는 것. 광고의 첫 지면 촬영이 있던 날, 촬영장에서 만난 문대성 선수는 다부진 몸매와 깔끔한 매너로 모델 못지않은 카리스마를 발산하고 있었다. 요즘 젊은 남자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메트로 섹슈얼과는 거리가 있지만 강인하고 정직한 모습이야말로 오래 봐도 질리지 않는 남성미가 아닐까. 화장품 CF는 모든 여자 연예인의 ‘꿈’인데요 남자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운동선수로서 화장품 광고 모델이 되는 것은 꽤 이례적인 일인데, 제안받았을 당시 기분이 어떠셨는지요. 솔직히 처음엔 좀 어리둥절했습니다. 하지만 기분 좋았던 것도 사실이죠.(웃음) 엔프라니 측의 설명을 들어보니 저의 시원스러운 외모와 강한 카리스마가 남성 화장품 페라루크의 컨셉트와 잘 맞아떨어지는 이미지라고 하더군요. 안정환 선수도 화장품 모델을 했잖아요. 제 생각에 안정환 선수는 요즘 유행하는‘메트로 섹슈얼’적인 이미지로 화장품 모델에 발탁된 것 같아요. 반면 저는 좀더 남성다운 이미지의 모델로 선택된 것 아닐까요? 제가 태권도를 하다 보니 아무래도 그런 부분을 더 부각시키려 하는 것도 같구요. 하지만 솔직히 저보다 안정환 선수가 더 멋있죠. 요즘 젊은 남자들 사이에서 ‘메트로 섹슈얼’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한데… 문 감독의 경우 피부 관리나 외모 관리에 신경을 쓰시는 편인지, 어떤 스타일의 패션을 즐기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정말 따로 피부 관리하는 것도 없고 그다지 외모에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운동을 하다 보니 땀을 많이 흘려서 자주 씻는 정도가 전부라고 할까요. 그리고 패션의 경우는 글쎄요. 제가 딱히 의상 고르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화려한 옷차림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해서 캐주얼 차림을 즐깁니다. 최근 감독 발령 이후 공식적인 자리가 많아져서 정장을 자주 입지만, 평소에는 면 바지에 셔츠 차림이 가장 편하고 좋습니다. 다방면에서 홍보대사로 활동하신다는 보도를 자주 접합니다. 관련 행사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일정이 만만찮을 것 같은데, 그런 활동에 열심이신 것도 태권도의 대중화를 위한 건가요? 또, 홍보대사로 나선 분야 가운데 특별히 더 애착이 가는 분야가 있는지요. 태권도 대중화를 위해 활동하는 측면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 활동 부분에 있어서는 어느 단체든 저를 홍보대사를 임명해주시는 뜻에 우선 감사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더불어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이 더 크구요. 어떤 활동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중에서 굳이 애착 가는 부분을 꼽아보자면, 아무래도 어려운 이웃들을 도울 수 있는 활동들에 마음이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어렵게 자라서 그런지 진심으로 그런 분들을 돕고 싶습니다. 준수한 외모와 호감주는 인상으로 연예계의 러브콜도 상당했을 거라 짐작됩니다. 연예인으로 성공한 스포츠 스타들도 종종 있는데, 실제로 그런 러브콜을 받아보셨는지, 그런 제안들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지 궁급합니다. 사실 적지 않게 제의를 받았습니다. 할리우드에 보내주겠다는 제의까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스타의 기질이 있다고 생각진 않습니다. 또 돈보다는 ‘예와 도’를 중요시하는 게 태권도 정신이고, 저 역시 그러한 정신을 이어 태권도 발전에만 온 힘을 쏟고 싶습니다. CF 촬영의 경우도 태권도 기금 마련을 위해 제의를 받아들인 경우구요. 동아대 태권도부 감독으로 계신데, 후배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지도자로서는 어떤 스타일이신지요. 운영하시던 도장에 여성 팬들이 운집했다고 들었는데 현재도 계속하시나요? 모교인 동아대 태권도부는 제가 이 만큼 성장할 수 있게 해준 발판이기에 처음 감독 제의를 받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감회 또한 남다르지요. 저는 후배들을 엄하게 가르치기보다는 편한 형이나 오빠처럼 대화도 많이 나누면서 이끌어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태권스쿨도 계속 운영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여성분들이 몰려들어 좀 당황스러운 적도 있었지만…(웃음) 저를 보러 오신 분들이고 태권도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이기 때문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잘생기고 인간성 좋은 문대성 선수의 여성 취향은 어떠신지 궁금하군요. 보통 운동선수들은 조신하게 안에서 내조하는 여성을 선호하는 것 같은데, 문대성 선수의 경우는 어떠십니까. 글쎄요. 예쁜 여자면 좋죠.(웃음) 사실 따로 정해놓은 스타일은 없습니다. 느낌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만나서 느낌이 좋은 사람한테 끌립니다. 성격은 밝고 낙천적인 사람이 좋습니다. 결혼하고 싶고 해야 하는데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지금 할 일들에 정신을 쏟는 데도 시간이 모자랄 정도라 연애할 시간도 없습니다. 올림픽 이후 본인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외부적으로는 많은 분들이 저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거죠. 그 변화가 가장 큰 것 같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앞으로의 마음가짐과 책임 의식 등이 한결 다부져졌습니다. 생활 면에서 보면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께서 사랑해주시고 관심 가져주시는 덕분에 이런 저런 행사에 참석하고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빠졌죠. 태권도 이외에 취미로 즐기는 운동 종목이 있으신가요? 운동은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시간상으로나 여건상으로나 태권도 외에 따로 즐기지는 못하고 있어요. 문대성 선수의 매력은 한마디로 ‘건전한 카리스마’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본인이 생각하는 자신의 매력은 무엇인지 솔직하게 답변해주신다면? 건전한 카리스마라… 쑥스럽군요.(웃음) 글쎄요. 아무래도 남성적인 캐릭터가 제 매력으로 비쳐지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 종목이 태권도이다 보니 그런 면이 더욱 부각되는 것 같구요. 무엇보다 솔직한 성격이 저의 매력이 아닐까요? 학구열이 남다르시다고 들었습니다. 운동만으로도 힘들 텐데 공부까지 열심히 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공부가 체질에 맞으신가요? 박사 과정을 밟고 계신데, 궁극적으로 대학 강단에 서는 것이 목표인지, 지도자로서 후진 양성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것은 아닌지… 일과 관련해서 세워두신 진로나 목표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상대적으로 운동보다 공부가 쉽게 느껴지다 보니 병행해도 그리 어려운 부분은 없었습니다. 어렸을 적에 워낙 공부와 담쌓고 지내다가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공부에 재미를 들이다 보니 공부할 수 있을 때 열심히 해보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아직 대학 강단이니 뭐니 하는 구체적인 생각은 안 해봤습니다. 현재로선 그저 공부하는 것이 재밌고, 또 제가 하는 공부가 조금이라도 한국 태권도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에요.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 진로를 정해놓은 것은 아니구요. 한 가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한국 태권도 발전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 대학 강단이 됐든 지도자로서 후진을 양성하는 길이 됐든 무엇이든 하겠다는 것입니다. 글 / 박연정 기자 사진 / 지호영
인생역전 돌려차기 태권도선수 출신 문승실 사장
2004. 09. 01 화제
“사업 성공의 노하우가 별게 있나요! 스포츠맨십으로 물고 늘어지는 거죠” 운동밖에 몰랐다. 도복을 입고 살아온 20년 정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재기는 커녕 하루하루 살아갈 걱정이 앞선 시간. 하늘이 무너져도 쏟아날 구멍은 있다는 말처럼 이제 막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성공에 이르는 출발선상에 선 느낌이다. 운동이나 가구나 과학적으로 고민을 했더니 길이 열렸다는 MB콜렉션 문승실 사장의 성공 노하우. 포기하지 않았더니 길이 보였다 축제다. 2004년 지구촌은 스포츠맨십으로 들썩인다. 열광에 도취해 환호하고 기쁨에 겨워 눈물을 쏟는다. 스포츠는 멜로가 되고 다큐멘터리가 되며 역사가 된다. 도전에 대한 경외이며 숭모다. 정말 스포츠의 힘은 세다. 그러나 그 환호를 뒤로하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그만의 도전에 기치를 든 사람이 있다. 그는 4년이 아닌 매일, 전쟁과도 같은 도전에 직면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도전 끝으로 난공의 벽을 뛰어넘는다. 태권도 선수 출신으로 국가대표 상비군에까지 오른 MB콜렉션의 문승실 사장(40)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여섯 살 때부터 입고 매었던 도복과 검은 띠가 오히려 낯설어진 요즘. 변하지 않은 불굴의 스포츠맨십으로 전무한 경험과 불모의 가구 시장을 개척한 자긍으로 또다른 도전을 준비한다. 이제 스포츠맨에서 유망한 사업가로 새로운 삶을 개척한다. 태권도와 유도, 검도까지 도합 8단인 무도인의 길은 정확한 궤도를 따르게 마련이다. 대학 시절에는 태권도 이외에도 킥복싱 페더급 타이틀전에도 출전했으며, 군 복무중에는 육군 참모 총장기 태권도대회 페더급에서 우승할 정도로 실전 무술을 겸비하고 있는 종합 무술인. 사회생활 역시 잘나가는 태권도장을 운영하며 언제나처럼 그 길을 가는 것에 자랑스러웠던 청춘. 그러나 행, 불행의 조화는 인간의 능력 밖에 있는 듯했다. “건강이 안 좋아져서 선수 생활을 계속할 수 없었죠. 누구나처럼 도장을 냈어요. 물론 배우려는 사람이 인산인해였고요. 도장 하나만으로도 꽤나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으니 운동한 보람도 있었죠. 한데, 사고가 생긴 거예요. 학원과 집을 오가며 학원생을 태우던 셔틀버스의 인사 사고는 감당하기 힘든 상황으로 치닫더군요. 피해자에게 가진 모든 것을 정리해 위로금으로 주고 나니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됐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연탄 배달도 했고 막노동도 했다. 운동으로 단련된 몸이라지만 일과 운동은 천양지차. 생활은 나락으로 빠져들었고 헤어날 힘마저 서서히 고갈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냥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의 성실성을 지켜보던 학원생의 부모가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것이 그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첫발이었던 셈이다. “그때가 96년이었을 겁니다. 가구 대리점을 하던 분인데, 제 처지를 딱하게 여겨 배달부터 배워보라고 하더군요. 나중에 관심 있으면 가구점을 내라는 제안도 했고요. 들어보니까 구미도 당기더라구요. 하지만 그 일을 시작한 진짜 이유는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거였죠. 그래서 제안을 덥썩 받아들였습니다.” 잘나가던 스포츠맨은 이제 장롱을 지고 나르는 가구 배달원이 되었다. 누가 보기에도 잘 된 터닝 포인트는 아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그 자신을 더 비참하게 만들 뿐. 그러나 일에 재미가 붙으면서 디자인 학원을 다니는 등, 가구에 대한 혜안을 조금씩 넓혀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지금 상황이 너무 처참하는 생각에서 헤어날 수 없었기에. 그렇다고 주위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예상치 못한 순간에 돌려차기의 일격을 당한 것처럼 곤혹스런 상황이 벌어졌다. 배달을 요청하는 전화 목소리를 흘려들은 것이 실수였다. 그렇게 찾은 집의 문을 열고 낑낑거리며 무거운 가구를 지고 들어선 순간, 아뿔사! “하늘이 노랗더라고요. 친한 친구였는데, 한동안 서로 연락이 없었거든요. 내 앞에 떡 하니 서 있는 게 바로 그 친구인 거예요. ‘죄송합니다’란 말만 남기고 돈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어요.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리던지, 그 충격 탓에 한 사나흘은 가구점에 나가지 않았던 것 같아요. 물론 마음을 추스르기는 했지만 그후로도 1년간은 그 상황이 머리를 떠나지 않더군요.” 앞만 보고 달리면 사양 산업은 없다 부끄러운 순간은 자극제가 됐다. 극약도 잘만 쓰면 명약이란 말이 헛말은 아닌 모양이다. 평생 배달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간 취미 삼아 하던 가구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변한 그의 모습에 호형호제하던 사장도 기회를 제공했다. 매장 근무를 해보라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매출이 급성장했다. 탁월한 영업력을 인정받은 그는 근무 6개월 만에 본사로 스카우트되었고, 가구 시장의 가능성을 엿보고 입사 3년 만에 독립 사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먼저 그는 한국 가구 시장의 가능성을 고급 앤티크가구에서 찾았다. 부가가치 높은 가구만이 가구 산업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누구나 마찬가지죠. 사람 일이란 것이 좋다가도 나빠지고 나쁘다가도 좋아지는 것이니까요. 처음 일한 곳에서는 사장과 사업을 의논할 정도로 신뢰도 커졌죠. 하지만 사업을 키우는 방식에 갈등이 생겼어요. 안방 문화에서 거실 문화도 바뀌는 것을 전제로 한 고가 상품 전략에 대한 견해차죠. 결국 떠날 수밖에 없었고, 다른 쪽에서 내 꿈을 펼칠 수 있었어요. 잘 되더라고요. 제 생각이 맞았던 거죠. 그때 고객 중에 다른 가구회사 사장님도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 열성 덕에 또다른 기회가 왔다. 앞서 얘기한 고객이면서 다른 가구점의 사장이 좀더 큰 세상 보기를 제안해 처음 미국 비즈니스 여행을 하게 된 것. 지난 95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하이포인트 가구 시장을 방문한 문 사장은 미국 내 톱클래스에 해당하는 MB콜렉션의 위용에 놀랐다. 고층 빌딩에 빼곡히 들어 있는 세계 제일의 제품에 정신이 확 나가버렸다. 주문처럼 “내가 저 제품을 만들어야지” 앞뒤 안 가리고 그 회사의 사장 면담을 요청했더니 돌아오는 반응은 ‘황당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도전 정신만은 잊지 않은 스포츠맨이었기에 2주간 요청과 거절을 반복했다. 그리고 라이선스를 따냈다. MB콜렉션의 한국 독점권을 확보해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 스포츠맨 정신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고, 올림픽 무대의 금메달을 거머쥐는 순간이었다. ‘맞춤가구 컨설팅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현재 직영점 4개 등 36개의 대리점과 취급점을 운영하고 있는 문 사장은 불황 여파로 모든 중저가 가구회사가 어려운 상황에서 수제품만을 고집하며 고급 앤티크 가구를 생산, 미국 등으로 수출하고 있다. 높은 제품 원가와 디자인 경쟁력 미비, 수입상품 선호 경향 등의 열악한 시장 환경에서도 MB콜렉션(www.mbcollection.co.kr)이 높은 경쟁력을 유지할수 있었던 것은 과학적 생산 설비와 합리적 유통, 전 공정이 수공으로 처리되는 고부가가치 제품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라고. 특히 100% 국내 생산 공정을 고집하고, 총 5천여 평의 제1공장과 제2공장에서 진행되는 철저한 감수와 완벽한 제품생산 공정이 제품의 품질을 높인 바탕이라고. 문 사장은 한 우물만 판다. 운동도 그랬고 가구점도 그렇다. 그의 꿈은 여전히 가구에 닿아 있다. 외국의 최고급 가구와 견주어도 전혀 손색없는 최고급 가구회사를 만들어 직원 천명에 매출 1천억원의 건실한 회사를 만드는 게 목표라고. 가구로 더욱 농익을 그의 꿈은 얼마만할까! 글 / 강석봉 기자  사진 / 백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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